"왔구나~ 왔소이다~~배뱅이가 왔소이다~~~~"

'이은관 하면 배뱅이굿, 배뱅이굿 하면 이은관'이라고 할만큼 이은관 명창은 나라 안에서 <배뱅이굿>을 가장 뛰어나게 불러 젖힐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웬만한 여자의 목소리보다도 더 높이 올라가는 그 고운 목소리로 한없이 높게 뻗어냈다가 때로는 간드러지게 때로는 구슬프게 엮어나가는 그의 노랫가락을 듣고 있노라면, 막혔던 속이 확 뚫리듯 시원하고 개운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또 사이사이 끼워 넣는 재담은 구수하고 멋스러워 때로는 폭소를 터뜨리게 하고, 때로는 실눈을 뜨고 조용히 웃게 하니,「배뱅이굿」을 연기하는 그의 솜씨는 가히 일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처 : http://child.junggu.seoul.kr/h/h03/h030...EC%3DAAC


그는 1917년 11월 27일에 강원도 이천면 회산리에서 평범한 농부인 이윤하의 8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산에 나무하러 가면서도 "나무하러 가세 나무하러 가세, 상상마루에 올라가세" 하는 산타령을 지게 작대기로 장단을 맞추면서 곧잘 불러 젖히던 아버님의 핏줄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소리에 귀가 밝은 소년으로 동네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자라났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배우는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하는 창가라든가,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하는 동요를 곧잘 불러 학예회 때는 반드시 뽑혀 나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또 친구들과 개울에 나가 미역감고 놀 때는 <신고산타령>이나 <닐니리야> 같은 민요를 불러서 동무들한테 부러움과 찬사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철원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는 공부보다는 노래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3학년때 그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는 일대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때가 열아홉 살 땐데 철원극장에서 콩쿠르 대회가 열렸거든. 근데 내가 거기서 <창부타령>하고 <사설 난봉가>를 불러서 일등상을 탔어요. 그 길로 학교를 때려치우고 서울로 올라갔지요. 그때는 서울만 가면 금세 출세하는 줄 알았지. 어찌어찌해서 경성방송국에서 <초한가>를 불렀는데, 그것이 고향에 알려져 가지고 나중에 집에 내려가니 환영이 대단해요. 요릿집에 불려가서 소리도 하고, 여자들의 프로포즈도 받아보고, 아무튼 촌놈이 노래 하나로 출세한 거지요."

방송국의 위력은 대단해서 학교를 그만두고 집을 나간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부친이나, 신혼의 재미도 누려보지 못하고 소박맞은 듯이 서러워하던 젊은 아내도 라디오에 나온 그의 출세를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 http://www.gugakebook.com/master/list/c...tart%3D0


이렇게 남들은 명창이나 된 듯이 추켜세우고 좋아했지만, 소리를 하면 할수록 그의 마음 속에는 불만이 커져가기만 했습니다.

천성적으로 재주를 타고났다고는 하지만 유성기 판이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배운 솜씨로는 결코 일류가 될 수 없다는 자각이 싹튼 것입니다. 그는 남몰래 고민하다가 다시 집을 뛰쳐나가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을 찾아 공부를 하려고 서울로 올라 온 그는 적당한 선생님을 찾지 못해 얼마간 방황하다가 황해도 황주 권번의 소리선생인 이인수 명창을 알게 되어 황주로 갔습니다.

"황주하고 서울을 왔다갔다 하면서 한 삼 년 간 공부했지. 황주에서는 이 선생님 댁에서 먹고 자면서 공부했는데, 선생님 성품이 너그롭고 인자하셔서 아주 잘 가르쳐 주셨어. 그 선생님에게 <배뱅이굿>하고 서도민요를 배웠지."

서울에 김 정승, 이 정승, 최 정승, 세 사람이 있었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명산에 기도하여 딸 하나씩을 낳았는데 이 정승의 딸은 세월네, 김 정승의 딸은 네월네, 최 정승의 딸은 배뱅이였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세월네와 네월네는 시집을 가서 잘 사는데 배뱅이는 어느 날 시주를 받으러 왔던 상좌중과 사랑에 빠진다.
상좌중이 계교를 써서 배뱅이의 방에 숨어 들어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 절로 돌아간 뒤 소식이 없으니 배뱅이는 상사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그런데 평양의 어느 건달이 이 동네 막걸리집에서 배뱅이의 내력을 다 알아가지고 능청스런 울음과 넋두리로 배뱅이의 부모를 속여 많은 재물을 얻어 가지고 돌아간다.

이 배뱅이의 이야기를 민요가락에 얹어서 흥겹게 부르는 <배뱅이굿>은 이인수 명창의 스승인 김관준 명창이 창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황해도 지방에 전해오는 배뱅이의 이야기를 황해도소리를 중심으로 하여 경기도, 강원도, 함경도의 민요나 잡가들을 중간중간에 넣어가면서 소리꾼 한 사람이 엮어 나가는 이 소리는 전라도 지방의 판소리와 그 형태가 아주 비슷합니다.

한 시간쯤 걸리는 이 <배뱅이굿>에는 '긴 염불', '자진 염불', '황해도 뱃노래', '사설난봉가', '어랑타령', '강원도 아리랑', '창부타령', '장타령', '장님 송경'과 같은 노래들이 쉰 곡쯤 나오는데 김관준 명창은 이 노래들을 그의 아들인 김종조 명창과 제자인 최순경 명창, 이인수 명창에게 전해 주어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이라 합니다.

세 사람 중에 최순경 명창이 제일 먼저 유성기에 "소리를 박아서" 세상에는 최순경 명창이 <배뱅이굿>의 일인자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 뒤에 김종조 명창이 취입하여 그도 얼마간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이인수 명창은 레코드 취입을 못해서 세상에는 동료 두 사람 만큼 널리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은관 명창의 말에 따르면 이인수 명창이 다른 두 사람보다 "재담도 잘하고, 짓거리도 잘 하고, 소리도 성량이 크고, 고음이 잘 나고, 남성적이어서" 제일 실력이 좋았다고 합니다.

서울에 와서는 왕십리에 살던 이명길 명창에게 <노래가락>, <창부타령>, <청춘가>, <사발가>와 같은 경기민요를 배웠습니다.

또 마포에 사는 최경식 명창에게는 시조를 배워 소리의 기초를 모두 닦은 뒤 황해도 장연의 권번에서 소리선생을 잠깐 했습니다. 그뒤 서울에 와서 김봉업 명창이 주관이 되어 꾸민 가설극장을 따라 이천에서 일 주일쯤 공연도 했습니다.

"김봉업 씨는 줄타기의 명수로 유명했던 분이고, 해금도 잘 타시던 대단한 명인이셨어. 그분 단체에서 공연을 하고 서울역에 내렸는데 만담 잘 하시기로 유명했던 박춘복 씨가 나와 있어.
'아니 형님 어떻게 왔소?' 하니까 '아무 말 말고 나하고 어디 좀 가세.' 하더니 택시를 타고 종로 익선동의 골목에 가더니 어느 집에 들어가는 거야. 그 집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 박춘복 씨가 인사를 시키는데 알고보니 그 사람이 그 유명한 신불출 씨라. 내가 레코드판 껍데기에서 많이 봤던 바로 그 얼굴이야. 나는 그만 감격해 버렸지."

신불출 명인은 본래 연극배우로 무대 활동을 하다가 만담가로 변신해서 당대 최고의 만담가로 활약하던 사람으로 당시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고 합니다. 그의 만담들은 우습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민족 정신을 고취하고 일본에 대한 풍자나 독립을 고취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걸핏하면 공연이 끝나고 경찰서 신세를 지기도 하고, 공연중에 수갑을 차고 잡혀가기도 했지만 굽히지 않고 용감하게 버틴 신화적인 만담가로서 그 당시 대중들의 우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은관 명창 역시 고향에서 신불출의 <대머리 영감>이나 <엉터리>, <견우직녀>, <홍길동>과 같은 만담이 '박힌' 유성기를 들으면서 동네 사랑방에서 동치미 국물 마시면서 웃고 울던 기억이 생생했습니다. 그때 무한히 동경했던 별 같은 우상을 직접 만났으니 가슴이 떨리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그는 신불출 명인과 인사를 나눈 뒤 다음날 다시 만나 <배뱅이굿>을 들려 주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준비를 단단히 하고 다음날 그 집에 갔더니 신불출 선생하고 연극 연출가이신 박진 선생하고 신불출 씨 어머니하고 누이동생 둘, 이런 분들이 앉아있더란 말이야. 그 앞에서 소리를 하는데 아무튼 어떻게 열심히 불렀던지 박진 씨가 눈에 수건을 대고 울었어. 그 덕에 며칠 뒤에 청계천에 있는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할 때 뽑혀서 출연하게 됐지."

그때의 출연자로는 박춘복과 송흥란이 재담을 하고, 이은관과 김계출이 낮과 밤에 교대로 <배뱅이굿>을 하고 마지막에 신불출이 만담을 했습니다.

김계출 명창은 그보다 4년 선배되는 사람으로 그 전에도 놀이판에서 한번 같이 놀아봤던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배뱅이굿> 이라 해도 계보가 조금 달라서 김계출은 슬픈 내용이 많이 있었고, 이은관은 웃기는 내용이 많이 있는 편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김계출이 먼저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에 이은관은 그를 따라잡기 위해서 비상수단을 썼습니다.

한량 중에 친한 사람 하고 짜서 그가 소리할 때에 박수치고 발구르면서 잘한다고 소리지르도록 했더니 사람들이 멋 모르고 따라서 잘 한다고 소리치는 통에 김계출은 점점 소리에 기가 죽어 목이 쉬고 이은관은 점점 신이 나서 공연이 끝날 무렵에는 두 사람의 솜씨가 뚜렷이 차이가 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다음 공연인 대구 공연 때에는 그 혼자 뽑혀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국민복 입고 무대에서 삼십 분쯤 소리를 하는데 사람들이 좋아서 소리를 지르고 재청을 하라고 난리 법석이라. 그때 기분이 좋아서 신불출 선생한테 가니 수고했네 한마디 뿐이야. 뭐라고 칭찬이라도 해줄 줄 알았는데 너무 냉랭해서 실망했지. 그런데 또 사업부 일을 보던 김광산 씨가 ‘자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나면 안 되네.’ 하시는 말을 듣고 보니 이해가 가. 내가 어린 나이에 너무 인기가 좋으면 배짱을 부릴까 염려해서 그러신 거지.”

사실 염려한 대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자 그에게 곧바로 유혹의 손길이 들어왔습니다. 신불출 명인의 여자 제자였던 김윤심 씨가 독립해서 서과불, 곤일평과 같은 만담가들과  단체를 만들어 가지고 그에게 함께 하자고 제의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불출의 단체만 따라다녔습니다.

신불출 명인은 일본이 창씨를 하라고 하니까 “에하라 노아라”라고 풍자 섞인 개명을 할 만큼 반일정신이 투철했던 사람이지만, 일제 말기의 예술인 동원 정책에는 어쩔 수 없이 굴복하여 잠시 그들에게 이용되어 위문공연을 다녔습니다.

이은관 명창도 단체를 따라 전국 각지를 순회하고 함경도 산수갑산에서 만주까지 감자국수나 풀빵으로 허기를 때우며 배고픔과 피로에 시달리면서 고달픈 공연 여행을 다녀야 했습니다. 그때의 젊은이로서 징용을 면하려면 단체를 따라다니면서 일본에 협력하는 길밖에 없었고, 그게 싫으면 산속으로 숨어다니든지 징용을 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좌익 단체와 우익 단체가 대립하여 심각한 싸움이 벌어졌는데 신불출 명인은 좌익 계열의 연극 단체에서 공연을 하다가 끝내 북으로 올라가 소식을 알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은관 명창은 해방이 된 후 바로 신불출의 단체와 헤어져서 대한국악원 민요부의 일원이 되어 그쪽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민요부에는 박천복, 장소팔, 김옥심, 이은주, 고백화, 묵계월과 같은 경기민요와 서도민요의 명창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과 함께 여기저기 공연도 다니고 민요 보급활동도 활발히 했습니다.

그러다가 6.25 사변이 끝난 얼마 뒤에 고려 영화사에서 <배뱅이굿>을 영화로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와 난생 처음으로 영화도 찍게 되었습니다.

감독에 양주남, 조감독에 김수용, 건달박수에 이은관, 함경도 할머니에 복혜숙, 돌쇠에 박흥수 등이 모여 반 년이 넘게 고생하며 만든 이 영화는 그런 대로 흥행에 성공하여 그때 조감독이었던 김수용은 감독 첫작품으로 장소팔, 백금녀, 이은관, 박흥수를 등장시켜 <공처가>라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 뒤 <낙화유수>라는 영화에서는 뱃노래를 부르고 <두견새 우는 마을>에서는 상여소리를 불러 영화를 찍고, 레코드 녹음하고, 장소팔과 유랑극단을 만들어 3, 4년간 떠돌아 다니기도 하고, 일본이나 미국이나 월남에 공연 다니기도 하고, 민속 예술학원을 설립해서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대한국악협회 이사를 지내기도 하며 바쁜 세월을 보낸 결과 1984년에 서도소리의 인간 문화재로 지정받게 되었습니다.

“이 <배뱅이굿>이 어떤 이야기를 노래와 재담으로 엮어나가는 것은 남도 판소리하고 비슷해. 그렇지만 음악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나지. 판소리가 무게와 깊이가 있고 단조가 많다면 <배뱅이굿>은 경쾌하고 단순하고 장조가 많아.
또 서도민요 창법이 남도민요하고는 확실히 달라서 남도쪽에서는 뱃속에서 뽑아올리는 통성으로 거칠고 꿋꿋하게 소리를 내지만 우리는 맑고 고운 목소리를 주장하지. 또 경기민요하고는 비슷한 점도 많지만 다른 점도 많아. 경기민요가 부드럽고 간드러지게 넘어간다면 서도민요는 좀더 심하게 소리를 떨지. 그것을 조는 목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이 모두 그 지형 산세를 따라서 생겨난 특징일 거야. 어쨌든 나는 맑고 높은 소리가 자유자재로 난다고 사람들이 감탄을 하고 했지.”

그렇듯 고운 목청과 튼튼한 성대를 타고 났던 그도 한때 목이 쉬어 좌절한 적이 있었습니다. 6.25 뒤 전라도 순회공연을 갔는데 공연을 마치고 트럭타고 숙소까지 오는 길에 마침 비가 내리는데도 소리를 부르고 놀다가 다음날 목이 잔뜩 쉬어 버렸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목이 풀리지 않고 점점 쉬어가기만 하니까 그는 소리를 포기하려고 공연을 사양하고 집에서 쉬었습니다. 그런데 한 2년쯤 쉬고 나니까 소리가 제대로 돌아와 다시 공연을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인인 남상욱 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육 남매를 거의 다 출가시키고 조촐하게 지내는 그의 말년은 다복합니다.

출처 : http://blog.joins.com/media/index.asp%3...3D200801

아흔 살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아직 건강하고 목소리 또한 낭낭하여 간간이 공연도 다닐 수 있습니다. 작년 12월 제가 위원장을 맡은 전주세계소리축제 송년 기념 공연인 <광대의 노래>에 출연하신 그는 배뱅이굿과 함께 트럼펫 연주까지 멋들어지게 들려하셔서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습니다. 정말 기네스 북에라도 올리고 싶은 분입니다. 

아직도 그의 얼굴에 늘상 웃음이 떠나지 않고 몸에서는 훈훈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소리 하나로 한 세상을 웃고 울리며 살아온 그의 삶이 이루어 놓은 아름다운 공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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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명곤
지금으로부터 80년쯤 전에 거문고의 백낙준 명인이 거문고에 전라도의 무속 음악과 판소리의 가락을 얹어 '거문고 산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자 유식한 선비들과 선비들의 영향을 받은 음악인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비난을 해댔습니다. 그보다 20년쯤 전에 가야금의 김창조 명인이 '가야금 산조'를 만들었을 때 여기 저기서 감탄과 칭찬의 말이 오가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반응이었습니다. 이는 거문고와 가야금이 지니고 있는 음악의 특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겨난 일입니다.

가야금이 규중의 아낙이나 기생들의 사랑을 받는 악기였다면, 거문고는 '군자의 벗'이라하여 마음을 닦고 뜻을 기르는 데에 쓰였기 때문에 ‘모든 악기의 우두머리’ 로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 온 터였습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_blog/photoList.do...3D679834

이렇듯 고상하고 점잖은 악기를 가지고 천박한 세속의 가락을 타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이단이요, 불경하기 짝이 없는 짓으로 여겼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거문고 산조를 비판한 것입니다.

그러나 백낙준 명인은 주위의 눈총에도 굴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산조 가락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전해 오던 거문고의 곡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묘한 가락이 그의 거문고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의 거문고 속에서는 슬프게 흐느끼다가, 호탕하게 웃어대다가, 바람처럼 속삭이다가, 시냇물처럼 재잘거리다가, 무섭게 호령하다가, 애절하게 통곡하는 ‘세속’ 의 온갖 정서가 찬란하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러한 세속의 정서는 거문고에서 금기로 여겨오던 것이었지만, 그것이 워낙 진하고 간곡한 삶의 냄새를 전해 주는 탓에 그를 비판하던 사람들도 마침내 하나 둘씩 그의 가락을 좋아하게 되어 드디어 거문고 산조의 창시자로 백낙준 명인을 찬양하게까지 되었습니다.

백낙준 명인은 그렇듯 어렵게 만든 산조가락을 박석기, 신쾌동, 김종기에게 전해 줬고 박석기 명인은 한갑득 명인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한갑득 명인이 거문고 산조를 배울 때만 해도 나라 안에 산조를 켜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습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음악가 집안이여. 할아버님 성함이 한덕만인디 대금을 잘 부시고 가야금도 명인이셨고, 아버님 성함은 성태인디 할아버지한테 가야금을 배웠다가 나중에 명창 김채만씨한티 판소리를 배워서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어. 내 나이 열두 살 됐을 때 아버님이 세상을 뜨셨지.”

아버지가 세상을 뜰 무렵 어린 한갑득은 안기옥이라는 명인에게서 가야금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되지 않은 열세 살쯤 되었을 무렵, 백낙준 명인이 광주에 공연을 왔을 때 우연히 그의 거문고 산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거문고 산조를 들었는디 어린 마음에도 참 좋아. 가야금 산조를 몇 년 배웠고, 어려서부터 음악에 젖어 살아왔으니 어렸다고 해도 이에 귀는 뚫려 있었거든. 그런데 들어보니 참 좋아. 가야금 산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씩씩하고 남자답고 깊고 무거운 맛이 울려 나온단 말이여. 그래서 거문고를 배울라고 여기 저기 알아보니 창평에 사는 박석기라는 사람이 거문고를 잘한대. 그래서 자전거를 빌려타고 창평까지 오십 리 길을 달려갔지.”

박석기 명인은 전남 담양군 창평 고을의 소문난 갑부였습니다. 일찍이 동경 대학을 나온 인텔리로 일본에서 야구를 배워와 우리나라에 보급시킨 체육인으로도 알려져 있는 터였고, 국악을 좋아해서 판소리와 거문고를 익힌 한량이었습니다. 그의 집에는 국악인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렸습니다. 그는 그 사람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며 후하게 대접하고 그들에게서 음악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는 거문고를 좋아해 백낙준 명인에게 십 년 동안 거문고를 배워 그의 수제자로 인정을 받을 만큼 실력을 쌓았습니다.

“그 양반은 생기기도 잘생기고, 마음도 넉넉한 사람이여. 찾아가서 ‘내가 한성태 씨 아들인디 거문고를 배우러 왔으니 가르쳐 주시오.’ 하니 두말없이 가르쳐 주겠다고 하더구만. 그날부터 그 집에서 먹고 자고 배우는디, 그때 박동실 명창한테서 김소희, 박초월, 한애순이 판소리를 배우고 있었고, 악기하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렸어.”

박석기 명인은 그에게 거문고 산조와 정악가락을 모두 전수해 주었습니다. 창평과 광주를 오락가락하며 거문고 공부를 끝낸 그는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그야말로 ‘푸른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광주 촌놈이 서울에 무작정 올라와서 대뜸 꿈을 이룰 수는 없었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어서 종로 낙원시장 근천에 하숙을 하며 무료하게 한두 달을 지냈습니다.

그런던 어느날, 마침내 그에게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하숙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는디 밖에 누가 와서 광주에서 온 한갑득 씨가 누굽니까 헌단 말이여. 그래 내가 한갑득이오. 허닝께 선생님을 뵙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나를 따라갑시다 헌단 말이여.
그래서 그 사람을 따라 가니 지금 단성사 옆 골목으로 돌아가더니 웬 커다란 한옥집으로 들어가더란 말이여. 따라가보니 대청마루에 수염 허연 노인네들이 탕건쓰고 갓쓰고 옥관자 달고 도포 입고 담뱃대 물고 떡 앉어 있더란 말이여. 그래 노인네들헌디 절을 했더니, ‘이놈아 니가 어린놈이 거문고 산조를 배웠다니 한번 타 봐라.’ 하더만. 그래서 덜덜 떨면서 배운 대로 탔지.”

그가 들어간 집은 식민지 시대 국악인들의 집합소였던 ‘조선성악연구회’였습니다. '수염 허연 노인네'들은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열 같은 원로 명창들이었고, 젊은 여자와 남자들은 정남희, 조상선, 오태석, 박녹주와 같은 신인 명창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거문고 산조의 ‘젊은 별’ 이었던 신쾌동도 앉아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는 스승 박석기에게서 배운 가락을 열심히 탔습니다. 그러자 노인네들이 얼굴에 웃음을 지으면서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신쾌동 씨가 나보다 세 살이 많은디 그 사람도 그때 놀랬다고 하드만, 어쟀든 그날 저녁부터 외출을 받게 되었어. ‘외출’이란 공연을 하는 건디 요새로 말하자면 밤무대를 뛰는 거여. 식도원에서 몇 시, 명월관에서 몇 시, 국일관에서 몇 시, 이렇게 예약을 받아놓고 외출을 나가는디, 한번 나가면 십 원이 보통이고 손님 인심이 좋으면 하룻밤에 오십 원을 벌 때도 있어. 그때부터 출세를 헌 거지.”

1919년 12월 12일, 광주시 수교동에서 태어나 스무 살이 되도록 광주와 창평 부근에서만 살아오던 촌놈이 느닷없이 출세를 하여 쌀 한 가마니에 일원오십 전하고 밥 한 그릇에 오 전씩 하던 시절에 하룻밤에 십 원도 벌고 오십 원도 벌었으니 그 씀씀이가 헤펐을 것은 물어보지 않아도 뻔한 일입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물어 보았더니 “그거야 친구들 만나 다 먹고 놀았지.” 하며 그런 당연한 말을 뭐 하러 물어 보느냐는 듯이 툭 내뱉는 그의 말에서 한량스러웠던 젊은 시절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술과 노름과 친구와 여자와 인기와 돈... 서울 생활이 가져다 준 이런 달콤한 유혹에 한껏 빠진 그는 그 시절 최고 멋쟁이로 옷차림에도 남달리 돈을 들였습니다. 당항라 바지에, 모시 께끼 저고리를 입고, 한산 모시 두루마기를 척 걸쳐 입고, 번쩍번쩍 윤이 나는 칠피 구두를 신고서 신나게 바람을 피우고 다녔습니다.

그런 바람둥이가 진도에서 명창으로 이름이 높던 박동준의 맏딸인 박보아를 만나고서는 그녀에게 홀딱 빠져 버렸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소리를 익히고 성악연구회에서 송만갑, 정정열 명창에게 소리를 익혀 신인 명창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한 박보아는 소리도 잘하고 얼굴도 예뻐서 여러 사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던 처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 역시 한갑득의 거문고 소리에 반해 열렬히 사랑을 하다가 부모의 반대도 무릅쓰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때가 스물세 살 되었을 땐데 결혼하고 삼 년쯤 지나서 해방이 되었지. 해방이 되니까 여기저기 국극 단체가 생기더란 말이여. 그래 우리도 ‘삼성국극단’을 만들었지. 마누라의 동생, 그러니까 내 처제가 박옥진이라고 소리 잘하고 연주도 잘했거든 그래서 박보아, 박옥진 그리고 한갑득 이렇게 세 별이 모였다고 해서 삼성국극단이라고 이름을 붙인 거여. 나는 반주도 해주고, 작곡도 해주고, 단체운영도 하면서 같이 다녔지.”

창극단체를 운영하며 팔도를 돌아다니는 동안에 그의 거문고 솜씨는 신쾌동 명인과 더불어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명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진전을 보였습니다. 특히 스승에게서 배운 가락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창작한 가락을 많이 섞어서 타기 때문에 그의 산조는 변화무쌍하고 자유자재함에서 아무도 따를 수 없는 독특한 맛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출처 : http://gugakcd.com/shop/%3Fdoc%3Dbbs/gn...%3D09...

“요새는 문화재 지정이니 뭐니 해서 선생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하라고 하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여. 선생한테는 기본 가락을 배우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지 재주껏 편곡도 허고 창작도 해서 타야 좋지. 밤낮 배운 대로만 허면 그건 밥만 먹고 똥만 싸는 꼴이지.
내가 내 가락을 타는디 ‘어떻게 가락을 잘 만들어서 듣는 사람의 심장을 건드려 주나.’ 허고 끊임없이 연구를 허니 가락이 한정이 없어. 수시로 변해. 공연 때마다 다르고 켤 때마다 달라.
그리고 즉흥적인 멋이 있어야 허니 한 음 켜 놓고 그 다음에 동으로 갈지 남으로 갈지 북으로 갈지 서로 갈지 몰라. 그래서 산조가 어려운 거고, 그래서 산조가 좋은 거여. 판소리도 마찬가지여. 내가 가락을 연구할 때 엤날 명창 선생님들의 소리가 많이 참조가 됐는디 그 양반들 소리가 그려. 자유자재허고, 신출귀몰허고, 구석구석 기묘허고, 마음대로 사람을 울리고 웃기고, 그래서 국악이 좋은 거여.”

 <삼국사기>에 기록된 거문고의 유래를 살펴보면 중국의 악기와 우리의 전통악기인 '고'를 섞어서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진나라 사람이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내왔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아나 그 성음과 타는 법을 알지 못하므로 나랏사람으로서 능히 그 소리를 낳고 이것을 탈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후하게 상을 주겠다 하였더니, 이때에 왕산악이 그 본 모양을 그대로 두고 많이 제도를 고치어서 아주 새로운 악기를 만들고 겸하여 곡조를 백여 곡을 지어 이를 아뢰매 검은 두루미가 내려와 춤을 추었으므로 드디어 '현악금'이라 이름하고 뒤에 줄여서 그저 '현금'이라 하였다.”

거문고는 그뒤 신라 사람 옥보고에게 전해졌고, 옥보고는 지리산에 들어가 새로 30곡을 지어 속명득에게 전하고 속명득은 이를 또 귀금 선생에게 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거문고는 중국과의 인연 때문인지 남쪽의 가야 지방에서 생긴 가야금이 서민적이고 통속적이고 익히기 수월한 것과 달리 귀족적이고 고답적이고 익히기 어려운 특성을 지녀왔습니다.

그런 특성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좋아하는 선비들의 기호에 딱 맞아 예로부터 '금'과 '서'는 선비 수업의 필수과목으로 꼽혀 왔습니다.

그리고 가락의 운용에 있어서도 감정을 절제하고 조화롭고 평정하게 이끌어 나가는 것을 으뜸으로 쳤으니 슬퍼하고, 분노하고, 웃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삶의 진한 정서는 천하고 격이 낮은 것으로 여겨져 산조가 생기기 전까지 거문고는 세속의 가락과 인연을 맺지 못한 채 수백 년을 지내왔던 것입니다.

거문고의 몸통은 앞면은 오동나무를 쓰는데 돌 위에서 자란 오동나무로 만든 것을 으뜸으로 치고 뒷면은 밤나무를 씁니다. 줄은 모두 여섯 줄인데 대현이 가장 굵고 문현, 무현, 괘상청, 괘하청, 유현의 순으로 가늘어집니다.

출처 : http://www.jinodyssey.co.kr/zeroboard/v...c05b737c

타는 법은 거문고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술대'를 잡고, 왼손으로는 줄을 희롱합니다. 나직하게 고르면 속삭임처럼 다정하고, 세게 치면 소낙비처럼 요란하며, 맑고 흐리고 그윽하고 기쁘고 노여웁고 거세고 부드러운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음색을 가진 거문고는 십 년쯤 공부해야 비로소 소리를 갖출 수 있을 만큼 배우기 어렵습니다.

이렇듯 어려운 거문고에 반해 한평생 거문고 하나만을 안고 살아온 그는 처세할 줄도 치부할 줄도 모르는 대쪽 같은 성격 때문에 삼양동의 셋집에서 부인과 처제를 거느리고 어렵게 살다가 1987년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떠나기 전, 그는 기회만 있으면 ‘쓸모없는 문화재’ 푸념을 늘어놓곤 했습니다.

“문화재라는 것이 빛좋은 개살구여. 쌀 한 가마니 사고 나면 싹 없어지는 돈 조끔 주면서 별별 귀찮은 일은 다 시켜. 말이 좋아 인간 문화재지 사는 꼬라지는 인간 쓰레기여. 내가 어떤 때는 챙피하고 서러워서 이 길로 들어선 게 원망스럽고 죽고만 싶어. 이젠 거문고 소리 알아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

이렇듯 비참한 노후를 보내다 가신 그에게서 설날에 떡방아 찧을 쌀이 없다고 바가지를 긁는 아내에게 거문고로 <방아타령>을 들려주었다는 '백결 선생'의 그림자를 본 것은 저의 지나친 상상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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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명곤
오늘은 명인명창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소를 팔고 사는 일의 '명인급 쇠거간' 한 분을 소개합니다. <뿌리깊은 나무> 기자 시절에 만난 그는 너무도 솔직하고 호탕한 모습으로 제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분입니다.   

 “소나 사람이나 매한가지여. 눈구녁 하나 보먼 그 놈이 잘 될 놈인지 못 될 놈인지 대번에 알아 버리는 벱이여.”

출처 : http://ask.nate.com/qna/view.html%3Fn%3D8456379

점잖게 서 있는 암소의 궁둥이를 “철썩”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으로 야무지게 때리며 이판동 노인이 고함치듯 말했습니다. 삼백 마리가 넘게 물려들어 비벼대는 소들의 울음 소리가 어찌나 시끄러운지 바로 옆에 붙어 서서 얘기를 나누는데도 마치 강을 사이에 두고 얘기를 나누듯이 소리를 질러대야 했습니다.

“눈구녁을 어떻게 보나요?”
“눈구녁이 우뭉허니 깊어 놓으먼 성질이 못된 놈이고, 툭 불거져서 순하게 생겨야 그게 좋은 소여. 사람도 마찬가지여. 사위를 삼더라도 그놈 눈구녁 하나 보고 말 한자리 시켜 보면 그놈이 마누라 굶길 놈인지 안 굶길 놈인지 대번에 알아 버리제.”

이 노인은 소의 아랫배를 손가락으로 꾹꾹 찔러대며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었는지 소고삐를 쥐고 있던 중개인이 험악한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이생원, 이놈 눈구녁 하나 보고 오십만원에 사쇼” 하고 되받았습니다. 이판동 노인은 그 중개인을 힐끗 보더니 “이놈아, 오십만원이면 너무 싸다, 육십만원 허면 내가 사마” 하며 손을 툭툭 털고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는 송아지들이 옹기종기 매어져 있는 곳으로 가서 송아지 한 마리의 고삐를 잡고서 “이 소 임자놈이 누구여?”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이렇게 해야 빨리 나온당게” 하고 눈을 찡긋해 보이며 개구쟁이처럼 장난스럽게 말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옆에서 다 듣고 있던 마흔 살쯤 된 중개인이 씁쓸한 얼굴로 “여기 있시오” 하고 나섰습니다. “얼매여?” 하고 이 노인이 묻자, 중개인은 귀찮다는 말투로 십오만팔천 원이라고 대꾸했습니다. 이 노인은 송아지를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놀리는 말투로 “쬐깐 놈이 통도 크네. 여보시오, 천 원만 깎어!” 하고 말했습니다.

이 노인의 말투에서 흥정을 하려는 낌새가 없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인지 중개인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먼 산만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 노인은 “이놈아, 거간놈이 흥정은 안허고 뭐혀?” 하면서 중개인의 어깨를 잡아 끌어 땅에다 메치려는 듯한 시늉을 해보였습니다. 중개인은 늘 그런 일을 당해 온 양 익숙하게 몸을 빼치며 “거간놈, 거간놈 허지 마쇼!” 하고 투덜거렸습니다.

이 노인은 도망가려는 그를 연신 따라붙으며 “나도 거간놈 허다가 나왔다. 이놈아 거간놈이란 말이 별난 말이간디? 중개인이란 말여, 중개인!” 하고 우스갯소리를 섞어가며 그를 놀려댔습니다. 옆에 서 있는 사람들도 그의 재담을 한 마디씩 거드는 통에 그가 가는 곳은 다른 곳보다 훨씬 시끌짝했습니다.

출처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34.HTML


쇠거간인 이판동씨를 제가 만난 때는 1970년대말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78세였는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허리가 꼿꼿하고, 걸음새가 가벼웁고, 말소리에 뱃심이 잔뜩 든 할아버지였습니다. 전라북도 정읍군 소성면에 자리 잡고 있는 정읍 쇠전에서 그 근방에 사는 쇠거간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재미난 할아버지를 소개해달라고 청했을 때, 선뜻 그를 소개해 줬을 만큼 쇠전과의 인연이 해묵은 할아버지입니다.

고삐줄을 매는 데 쓰려고 세워 놓은 말뚝을 사이에 두고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이판동 노인은 대뜸 “나는 한평생 쇠전을 따라댕긴 사람이여. 그런디 이 쇠전이란 디가 도적놈 소굴이여. 나는 도적놈 대장이고” 하고 주위를 휘둘러보며 기세 좋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조그마한 몸 위에 하얀 한복을 차려입고 노르스름한 중절모를 맵시있게 눌러 쓴 차림새와 함께 걸직하게 나오는 그의 첫마디에 휠씬 입맛이 당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다니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는 빽빽하게 서 있는 소의 사이사이를 잘도 빠져 다니면서 소의 값을 물어 보기도 하고, 능숙한 손길로 소 몸뚱이의 이곳저곳을 만져 보기도 하고, 낯익은 중개인과 장난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그의 몸가짐에서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도 기력은 젊은이 못지 않게 팔팔하다”고 은근히 뽐내 보려는 어린 아이 같은 순진함이 엿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도가 지나친 탓이지, 아니면 그날따라 그의 힘이 부쩍 솟은 탓인지는 몰라도 잠시도 한곳에 서 있지 않고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어느 새 소 열 마리를 사이에 둔 거리만큼 멀리 가 버리는 통에 그의 뒤를 쫓아다니느라고 애를 먹어야 했습니다.

더구나 고개를 잔뜩 빼어 들고 소 잔등 너머로 희끗희끗 보이는 하얀 한복과 중절모만 바라보며 뒤를 따라다니다 보니 쇠똥과 쇠오줌으로 범벅이 된 땅을 찬찬히 살피면서 걸을 겨를이 없어서 그가 중개인하고 장난을 칠 때마다 제 바지 가랑이에는 소가 내갈기는 똥이 땅에 떨어질 때 튀어나온 쇠똥이 한점씩 늘어가고, 그가 소의 값을 물어 볼 때마다 제 구두 윗창에는 노르끼리한 쇠똥이 자꾸 올라 앉았습니다.

하지만 이 노인은 쇠전 안의 소들을 모조리 한번씩 훑어볼 듯한 기세로 쉴 새 없이 입을 놀려 재담을 뿌리면서, 때로는 판소리 가락을 구성지게 흥얼거리면서, 이 소에서 저 소로 휘휘거리고 돌아다녔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축은 소입니다.

농사일을 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일꾼으로서, 물건을 나르는 짐꾼으로서, 또 죽은 뒤에 살과 내장은 맞좋은 음식으로서, 뿔과 가죽과 털은 갖가지 가공품의 재료로서 어느 것 한 가지 버릴 것 없이 두루 쓰이는 귀중한 가축입니다.

허허, 이름이 소로구나
의 있고 겸손하고
부지런도 할서이고
남을 위해 몸 바치고
사람에게 점잖으기
네 몸밖에 또 있을까
온갖 짐승 다 있어도
모도 모도 꾀만 피는데
이 천지 무궁토록
살고 살고 자꾸 살아
천하 백성 도와 주고
평야 평야 너른 들도
네 몸 아니면 뭐가 되나
허허, 이름이 소로구나

이렇듯 민요 가락에 실려서까지 사랑을 받던 소도 주인의 형편이 어렵게 되면 팔리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출처 : http://www.nemopan.com/photo_life/78769.../page/37

그래서 쇠전에 끌려 가서 새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말뚝에 매여 있어야 합니다. 쇠전은 “쇠장”, “소시장”, 또는 “우시장”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소뿐만이 아니라 양이나 돼지나 염소 같은 가축들의 거래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가축 시장”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중개인은 흔히 “쇠거간”이라고 부르고 때로는 “소중매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들의 등록된 이름은 “축우 중개인”입니다. 그들은 부탁 받은 소의 흥정을 붙여주고 흥정이 이루어졌을 때에는 그에 따른 수당을 자기의 수입으로 삼고 있습니다.

또 쇠전에는 소를 팔고 사는 농민들 말고도 직업적으로 소를 팔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쇠장수”라고 하는데, 관공서의 문서에는 “우상인”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들은 정식으로 등록 된 직업인이 아니고 비공식 직업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소의 거래라는 것이 몇십만 원에서 몇백만 원이 오고가는 커다란 거래기 때문에 그 거래의 속판에 여간한 비밀이 깃들어 있는 게 아닙니다. 이판동 노인이 첫 마디에서부터 “쇠전이 도적놈 소굴”이라고 외친 것만 보아도, 소의 거래를 둘러싸고 온갖 시비가 분분하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습니다.

이판동 노인은 젊은 시절부터 쇠판에 뛰어들어 쇠장수 노릇을 해오다가 늘그막에는 등록된 축우중개인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순살에 “정년 퇴직”을 하여 그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아는 사람의 부탁을 받아 소를 팔아 주기도 하고 하면서 “담배값이나 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등록이 안 된 “무허가” 소중개인인 셈입니다. 그래서 그가 소 흥정을 붙이려 할 때에 관리 사무소에서 “이판동씨, 소 고삐 놓으시오” 하고 소리치는 때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등록된 중개인들이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면서 “그려도 내가 나타나면 모다 벌벌 떨제. 제놈들의 속판을 훤히 아니께 안 떨고 배길 재간이 있어?” 하고 호기롭게 말했습니다.

“거간놈 끄트머리가 좋은 놈이 없더라네. 이 놈의 디가 아는 놈이 아는 놈 죽이는 디여. 그러게 도적놈 소굴이랑게. 나는 도적놈 대장이고.”

그 말이 그렇게도 자랑스러운지 그는 자기가 “도적놈 대장” 이라고 두 번씩이나 말했습니다. 그래 좋은 기회 다 싶어 “도적놈 대장이시라니 도적 기술이 환하시겠네요? 한 두 가지만 가르쳐 주세요” 하고 졸랐습니다.

그러자 그는 여기저기 고함을 쳐 대며 소를 팔고 있는 스무명 남짓한 중개인들을 쓱 둘러 보더니 “아 저기 있는 사람들이 모다 내 동지고 내 부하인디, 그 사람들 밥줄을 끊어서야 쓰겄는가? 그냥 여기 있는 놈들이 다 도적놈인 줄만 알면 되어” 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무어라 대꾸도 하기 전에 그는 한쪽 담 곁의 구석진 말뚝에 매어져 있는 암소 곁으로 가더니 그 소의 고삐를 쥐고 있는 중개인에게 “얼매여?” 하고 물었습니다. 중개인은 소잔등이를 철썩 치면서 “사팔이요”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이 노인의 얼굴이 이제까지 실없던 표정에서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싹 변했습니다.

그는 고삐를 중개인에게서 넘겨 받아 소를 몰아 보기도 하고, 목덜미의 멍에 자욱을 훑어보기도 하고, 등의 털을 쓸어보기도 하고, 멀찍이 물러서서 뒷짐을 지고 한참 바라 보기도 하더니 중개인의 소매를 끌고 담 곁의 귀퉁이로 데리고 갔습니다.

“내 사돈이 살 것이여.”
“사돈도 시세대로만 주쇼.”
“아, 이 사람아. 싸게 살라니께 사돈 찾제.”

이런 말들을 주고 받으며 담 곁 모퉁이로 가더니 마주 보고 앉아서 한참을 쑥덕였습니다. 그때 그들이 귀엣말로 속살일 때 드러난 표정이 참으로 심각하고 은근해서 그제야 “도적놈의 소굴”이라는 이 노인의 말이 실감이 났습니다.

한참 동안 둘이서 쑥덕이더니 중개인은 다른 곳으로 가고, 이 노인은 서른쯤 되어 보이는 사내 곁으로 가서 “주민등록증 내 놔” 하고 말했습니다. 소 곁에 엉거주춤 서 있던 사내는 잠바 주머니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어 이 노인에게 주면서 “얼마에 판대요?” 하고 물었습니다.

이 노인은 주민등록증을 받아 쥐면서 “얼매든 내 맘에 들먼 사고, 내 맘에 안 들먼 안 산다” 하고 내뱉듯이 말하더니 그 중개인이 데리고 온, 역시 서른쯤 되어 보이는 사내에게 “당신이 소 임자여?” 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내는 땅에다 침을 탁 뱉으며 “병원 갈라고 파는 소요!” 하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노인은 “병원은 내가 갈란다” 하고 말하더니 중개인의 소매를 끌고, 소가 틈을 이루어 놓은 구석으로 가서 다시 한참 동안 둘이 쑥덕거렸습니다.

얘기를 마친 다음에 이 노인과 중개인은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을 데리고 관리 사무소에 가서 중개 수수료를 내고 등록을 했습니다. 등록을 마치고 나서는 다시 모두 소를 매어 놓았던 자리에 모여 앉아 돈을 교환했습니다.

소를 사 가는 사내가 배띠로 묶어서 배에 차고 온 돈뭉치를 끌러 땅에 내려 놓자, 소를 파는 사내가 한 뭉치씩 집어서 돈을 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돈을 내주는 사람이나 돈을 받는 사람이나 그 표정들이 하도 비장하고 엄숙해서 감히 그 자리에 끼어 들어 무어라 말을 걸어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이 노인은 돈을 세는 것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다시 조금 전의 활기를 되찾아서 제게 농을 걸었습니다.

“저 중개인 녀석이 댁보고 형사냐 뭐냐고 허길래 나허고 무관한 사람인디 한 대 치먼 가 버리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잡것이 아무말도 못허대.”

나는 이 노인의 우스개소리에 대꾸를 못할 만큼 긴장한 채 그들의 거래하는 모습을 열심히 지켜보았지만, 거래 방법이 하도 비밀스럽고 은근해서 그 내막을 확실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개인의 남을 꺼리는 눈빛이나 중개를 해 주어서 얼마나 벌었는지 대답을 안해 주는 이 노인의 태도로 보아 그 바닥의 속사정이 간단치는 않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소의 부정한 거래 방법 중에 “메기치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중개인이 소를 팔려는 사람에게 미리 천원에서 삼천원쯤의 선금을 주고 중개의 권리를 사는 방법입니다. 한번 그 중개인에게 소를 팔 권리를 맡긴 사람은 그 소가 하루 종일 안 팔리더라도 마음대로 다른 중개인에게 맡길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 중개인과 싸워서 소를 빼앗았다고 하더라도 그 소를 다른 중개인에게 맡길 도리가 없습니다. 동료 중개인에게 농간할 건덕지가 쥐어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중개인에게 넘어간 소는 자칫하면 “후려치기”라는 수법을 당합니다.

소를 맡은 중개인은 매매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아침에는 시세보다 비싸게 올려 부릅니다. 예를 들어 이십사만원쯤이 제 값인 소를 이십육만원이나 이십칠만원쯤으로 올려 부릅니다. 그러면 소 임자는 멋 모르고 좋아하지만 시세보다 비싼 소가 팔릴 리가 없으니 소 임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져서 점심 때가 지나 오후가 되어 장이 거의 파할 무렵에는 시세보다 싼 값으로라도 좋으니 팔아 달라고 조르게 됩니다.

그 때쯤 해서 중개인은 자기와 미리 약속이 되어 있는 사람과 흥정을 붙여 시세보다 훨씬 싼 값으로 소를 팔게 합니다. 소를 팔지 않고 도로 데려가는 소 임자도 있지만, 대개는 다시 한번 장에 나가게 되면 중개인의 차삯과 술값과 밥값으로 싸게 파는 돈보다 돈이 더 들게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개인의 말을 따르게 됩니다.

중개인은 자기의 부하뻘 되는 '하매인'을 살 사람으로 꾸며서 자기가 그 소를 사기도 하고, 자기가 직접 사지 않을 때에는 싸게 산 만큼의 돈에서 비공식 중개료를 받습니다. 이런 '후려치기' 수법은 타관에서 온 쇠장수나 친분이 두텁지 않은 소 임자에게 자주 쓰이고 아는 사람의 소를 중개할 때에는 조심을 합니다. 그러나 이 노인이 “아는 놈이 아는 놈을 죽인다”고 말한 것을 보면 아는 사이에도 얼마쯤의 술수를 부리는 것이 보통인 모양입니다.

“벌중개”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쇠전 밖에서 소의 매매를 중개해 주는 방법입니다. 중개 수수료를 내지 않고 매매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의 돈이 절약되고, 중개인은 수수료 한푼이라도 더 받아낼 수 있기 때문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매매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예부터 쇠전 밖에서의 매매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서 주막이나 길 한모퉁이에서 비밀스럽게 거래를 합니다. 보통은 쇠전 안에서 입으로 거래를 끝낸 뒤에 관리 사무소에는 소가 안 팔려서 끌고 나간다고 해 놓고, 쇠전 밖으로 나와 적당한 장소에서 돈을 교환합니다. 만약에 이런 불법 매매가 적발됐을 때에는 중개 수수료에다 벌금을 더해서 내야 되고, 심할 때에는 중개인 자격증을 내어 놓아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무 직원들의 관리가 철저해서 위에서 말한 부정한 거래가 적은 쇠전에서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고 소를 거래할 수 있지만, 직원들과 중개인들이 짜고서 그런 거래를 일삼아 하고 서로 돈을 나누어 먹는 쇠전에서는 농민들의 피해가 대단합니다. 그러므로 부정이 많은 쇠전은 사람들이 잘 찾아가지 않아서 점점 시들어 가고, 운영 관리가 철저한 곳은 사람들이 자꾸 몰려들어 점점 번창해 갑니다.

전라도 근방에서는 가장 큰 쇠전으로 꼽히는 남원장에 갔을 때, 관리 사무소에서 마이크로 “고삐를 풀어 놓고 자꾸 걷게 하는 소는 물 먹인 소입니다. 소가 물을 먹은 것을 감추려고 자꾸 걷게 하는 것이니 그런 소는 사지 마십시오” 하고 안내 방송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관리 사무소에서 그렇게 성의를 보이기 때문에 그 장이 번창하는 게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중개인들이 소의 흥정에서 부리는 농간은 여러 가지가 있어서 쇠전 운영의 큰 문제점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소의 매매를 경매로 하자는 의견이 검토된 일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횡성, 춘천, 강릉 같은 강원도 몇곳과 청주, 조치원, 담양 같은 충청도의 몇곳에는 소 경매 시장이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매 방법은 도살용 소에나 가능한 방법이지 일소에는 적당치 않은 방법입니다. 도살용 소는 몸무게에 따라서 값을 매기면 되지만, 일소는 몸무게만으로는 값을 매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살이 쪘어도 좋지 않은 소가 있고, 버쩍 여위었어도 훌륭한 소가 있습니다.

이 노인의 말에 따르면 남이 비싸게 사는 소를 자기는 싸게 사기도 하고, 남이 싸게 사는 소를 비싸게 사기도 한다고 합니다.

소를 살펴보고서 그것이 좋은 소인지 아닌지를 가려 내어 그것에 맞는 값을 매기는 솜씨는 오랜 경험이 없이는 지니기 힘든 솜씨입니다.

소를 보는 기초적인 상식으로는 입이 짧고 넓어야 좋고, 배가 넓고 크고 처지지 않아야 좋고, 뿔과 뿔 사이와 뿔의 크기가 알맞아야 좋고, 뿔이 뒤로 재껴 있거나 앞으로 굽지 않아야 좋고, 눈꼬리가 째지지 않아야 좋고, 앞가슴이 환하게 열려야 좋고, 털이 짧고 윤기가 있고 부드러워야 좋고, 궁둥이가 처지지 않아야 좋고, 얼굴이나 배나 궁둥이에 흰 점이 없어야 좋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이 툭 불거져서 선명해야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기초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소의 모든 장단점을 가려내려면 오랜 경험이 없이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농민들은 곧잘 속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팔려고 내어 놓은 소의 결점을 숨기고 싶어할 것이며, 중개인도 자기의 잇속에 따라서 소의 결점을 감추고 값을 엉뚱하게 매겨 팔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는 사람 쪽에서도 자기가 믿을 만한 사람 중에 소를 잘 보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데리고 가게 됩니다. 이판동 노인의 경우가 아마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는 소를 살 사람이 자기 사돈인데 그 사람의 부탁으로 자기가 소를 골라 주었다고 말하며 “소를 잘못 사면 돌아오는 장에 또 팔아야 된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을 만한 사이라는 “사돈 사이”에도 어떠한 알지 못할 속판이 끼어 있는지는 그들 자신과 하늘만이 알 일입니다.

이판동 노인은 소를 산 사내가 홍시 두 개와 종이돈 몇장을 주머니에 넣어 줄 때까지 쇠전 안을 싸다니다가 “이제 차삯을 벌었으닝게 그만 나가제” 하면서 쇠전을 나섰습니다.

우리는 쇠전 곁에 늘어서 있는 밥집 가운데 한 집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봉놋방의 한 구석에 앉아서 비빔밥을 청해 놓고 사방을 둘러 보니 쇠전에서 나온 사람들이 밥을 먹거나 막걸리를 마시면서 커다란 소리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봉놋방이 밥상만 다 치워 놓으면 영락없이 놀음방으로 변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요새도 쇠전 부근에서 놀음판이 자주 벌어지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쇠전에서 돈이 왔다 갔다 허닝게 도박 상습단에 걸려서 앞발 들어 버린 사람 많었제. 옛날처럼 성허지는 않어도 요새도 술잔 먹은 김에 몸뚱이에 돈은 지녔겄다 푸덕푸덕 허다가 애꿎은 돈 날리는 놈 많어.”
“그럼 할아버지도 놀음 많이 하셨겠네요.”
“놀음이고 뭣이고 우리는 그저 각시에만 정신이 빠져서 각시헌티 돈을 다 써 버렸으니께.”

이 노인이 헛기침을 해 가며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헛기침 속에 은근히 각시 자랑을 해 보고 싶어하는 기미가 엿보여서 어떤 각시한테 그렇게 돈을 다 써 버렸느냐고 바싹 다가서며 물었습니다. 이판동 노인은 멋지게 자란 허연 수염을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더니 한마디 한마디에 맛을 들여가며 말했습니다.

“어떤 각시가 아니라 각시가 사방 팔방에 여러 명 있었고만. 지금은 다 죽고 두 명만 남었네만.... 젊었을 적에는 이놈 가서 돈 주고 저놈 가서 돈 주고 허느라고 쇠장사 해서 번 돈이 손에 남아 날 틈이 없었제. 그놈의 얘기를 다 허자면 심청전 엮제.”

사람들이 자꾸 밀려 들어 느긋하게 앉아 얘기를 나누기가 어렵겠기에 부지런히 밥을 먹고 밥집을 나왔습니다.

“옛날에는 이 장에서 묵고 저 장에서 묵을라니께 부안에도 작은 마누라가 하나 있었고, 줄포에도 하나 있었고, 신태인에도 있었고.... 아무튼지 장마다 하나씩은 있었제. 그런디 이젠 다 죽고 줄포에 있는 마누라허고 신태인에 있는 마누라허고만 남았어.”

바깥으로 나오니까 더 힘이 솟는지 이 노인은 기차 정거장으로 향하는 포장된 국도를 활개치고 걸어가며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내가 이 담에 죽어도 거꾸로 죽을 것이네. 이 근방에 홀애미치고 안찌른 놈이 없고, 남의 유부녀 속도 어지간히 긁어 놓았제. 그저 그 구녁만 합천 해인사 뽄나게 좋다 허고, 내일 모가지가 떨어져도 그것이 제일이다- 하고 미쳐서 지랄을 떨었으닝게.”
“그것이 그렇게 좋던가요?”
“말이라고 허는가? 그 속에 한번 넣어 놓는다 치먼 만사가 해결이고, 그 속에서 살림을 헌다 치먼 몇해고 살림 걱정은 안해도 될 것이여. 그게 다 쇠전 따라댕김서 생긴 정력이라. 그런디 이보게, 지나고 보니께 모두 후회가 나. 빡빡 얽고 째보라도 큰마누라가 좋데. 다른 것들은 그때만 조께 좋고 그만이라.”

그러면서도 이 노인은 신태인에 가면 큰마누라가 있는 본집보다 작은마누라가 있는 작은 집에 더 자주 가게 되더라며 껄껄 거리고 웃었습니다.

밥집에서 밥을 먹을 때에 아들이 일곱이고 딸이 다섯이라고 했던 그의 말이 생각나서 자식들이 아버지 바람 때문에 속 많이 썩혔겠다고 하니까,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 신명나게 침방울을 튀겼습니다.

“말헐 것이 있겄능가? 기생한티서 난 자식이 있는디 그놈이 가슴 찧고 학교도 마다 허도 돌아다니지 않는가? 시방 스물둘인디 어디 가서 돈 쪼끔 벌어야 각시집에다 다 내던지고 다니는 판이여. 근묵자흑이라, 애비 놈이 그러먼 자식도 따라서 그러는 벱이여. 자식들만 그러겄능가? 큰마누라 고생도 어지간했지. 그런디 이보게, 마누라 데리고 사는 게 전쟁하는 거 한가지여. 수가 있었야 데리고 살제, 안그러먼 허구헌 날 시끄럽기만 허네.”

길가 양쪽에는 사람 손에 고삐를 쥐인 소들이 줄을 지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소들 가운데에는 흥정이 이루어져서 낯선 주인 손에 끌려가는 소들도 있었을테고, 흥정이 이뤄지지 않아서 옛 주인 손에 끌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소도 있었을 것입니다. 모두들 저마다 길고 긴 사연을 품고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판동 노인과 저는 정거장에 이를 때까지 쉴 새 없이 얘기를 나누며 걸었습니다. 그는  “와가리 영감”이란 자기의 별명에 부끄럽지 않게 잠시도 입을 멈추지 않고, 평생 동안 담아 놓았던 사연들을 거침 없이 쏟아 놓았습니다.

그는 기차를 타면서 내일은 신태인 장에 갈 것이고, 모레는 부안장에 갈 거라고 했습니다. 기차가 출발하자, 그는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드는 저를 보고 껄껄거리며 호탕하게 웃더니 주머니 속에 남겨 두었던 홍시를 꺼내어 입에 덥석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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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명곤
지난 4월 초, 서울 서초동 가정법원청사 소년법정에서 있었던 어느 판결의 이야기입니다.

지인을 통해서 뒤늦게 알게 되었는데, 너무도 감동적인 판결이라 저 혼자 알고 있기 아까워 전합니다.

피고인 A양(16)은 서울 도심에서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 등을 훔쳐 달아난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A양은 작년 가을부터 14건의 절도·폭행을 저질러 이미 한 차례 소년 법정에 섰던 전력이 있었습니다. 법대로 한다면 '소년보호시설 감호위탁' 같은 무거운 보호 처분을 받을 수 있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김귀옥 부장판사는 이날 A양에게 아무 처분도 내리지 않는 '불처분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가 내린 처분은 '법정에서 일어나 외치기'뿐이었습니다. 김 판사가 다정한 목소리로 '피고는 일어나 봐' 하고 말하자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던 A양이 쭈뼛쭈뼛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김 판사가 말했습니다.

"자, 날 따라서 힘차게 외쳐 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예상치 못한 재판장의 요구에 잠시 머뭇 거리던 A양이 나직하게 "나는 세상에서…"라며 입을 뗐습니다.

"자, 내 말을 크게 따라 해 봐.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큰 소리로 따라 하던 A양은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라고 외칠 때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김 판사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A양이 범행에 빠져든 가슴 아픈 사정을 감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A양은 본래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간호사를 꿈꾸던 발랄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작년 초, 남학생 여러명에게 끌려가 집단폭행을 당하면서 그녀의 삶은 급속하게 바뀌었습니다.

A양은 그 사건의 후유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고,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신체 일부가 마비되기까지 했습니다. 심리적 고통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A양은 그 뒤 학교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했고, 비행 청소년과 어울리면서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김 판사는 울고 있는 A양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가해자로 재판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가해자라고 쉽사리 말하겠어요? 아이의 잘못이 있다면 자존감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존감을 찾게 하는 처분을 내려야지요."

그 말을 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진 김 판사는 눈물범벅이 된 A양을 법대(法臺) 앞으로 불러세웠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중요할까. 그건 바로 너야. 그 사실만 잊지 않으면 돼. 그러면 지금처럼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러고는 두 손을 쭉 뻗어 A양의 손을 꽉 잡았습니다.

"마음 같아선 꼭 안아주고 싶은데, 우리 사이를 법대가 가로막고 있어 이 정도밖에 못 해주겠구나."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ol...l_no%3D2

이 재판은 비공개로 열렸지만 서울가정법원 내에서 화제가 되면서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법정에 있던 A양의 어머니도 펑펑 울었고, 재판 진행을 돕던 법정 관계자들의 눈시울도 빨개졌습니다. 저도 이 이야기를 읽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흘렀습니다

법정에서 울음을 터뜨린 소녀의 미래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녀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건 보호 감호라는 법적인 처분보다 자존감을 살리는 자신을 향한 외침이었을 거라는 겁니다.

"일어나서 힘차게 외쳐라!"

정말 아름다운 명판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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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명곤
아무개가 '굿하는 사람이다', 곧 '무당이다'라고 하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점쟁이나 푸닥거리나 미신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어서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미친 여자나 엑소시스트에 나오는 신들린 소녀를 머리 속에 떠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도대체 무당이 명인 명창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기분 나빠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무당과 무속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깊이 연구한 사람들은 무당이 목사나 신부나 스님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종교의 사제이며,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찬송가나 염불과 다름없는 엄숙하고 경건한 종교 음악이며, 그들이 읊어대는 사설은 성경이나 불경의 여러 말씀과 다를 바 없는 귀한 말씀이라는 걸 압니다.

그러나 외국에서 들어온 수많은 신들의 위세에 짓눌려서 우리 조상들이 수천년 동안 모셔 오던 민족의 신들은 우리 문화 속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고, 그 신을 모시는 성직자인 무당들도 오랫동안 사회의 밑바닥 천민으로 혹세무민하는 무리라는 편견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무당들은 자신들이 지녀온 기예를 예술로 내세우기 시작했고, 또 예술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들의 기예는 인정을 받기도 했습니다.

동해안 무속의 뛰어난 무당인 김석출 명인도 사람들이 자신을 무당으로보다는 예술가로서 알아 주기를 바랬습니다.

경상남북도와 강원도를 잇는 동해안 마을에서는 해마다, 또는 3년, 4년, 5년, 7년, 10년 마다 한 번씩 '별신굿'이 벌어졌습니다.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빌고 바다에서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벌이는 그 굿은 그 뛰어난 예술성과 오락성 덕분에 구경꾼들이 많이 몰려들어 언제나 푸짐한 굿판이 되곤 했습니다.

출처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01_02_01

그 굿판을 이끌어가는 노래 잘 하고, 춤 잘 추고, 재담 잘 하고, 악기 잘 치는 여러 뛰어난 무당 중에서도 김석출 명인은 그 솜씨나 경험이나 연륜으로 보아서 첫손에 꼽을 수 있는 명인이었습니다. 경상도에서는 남자 무당을 '박수', ‘화랭이’ 또는 ‘양중’이란 말로 부릅니다.

그는 '부정굿'이나 '일월맞이굿'이나 '골매기청좌굿'이나 '당맞이굿'이나 '성조굿'이나 '마당밟이굿'이나 '화해굿'이나 '세존굿'이나 '조상굿'이나 '천왕굿'이나 '심청굿'이나 '군웅굿'이나 '손님굿'이나 '계면굿'이나 '용왕굿'이나 '탈놀음굿'이나 '거리굿'과 같은 갖가지 굿의 사설을 재미있고 구성지게 읊어 댈 뿐만 아니라, 탈놀음굿이나 거리굿과 같이 연극성이 강한 굿을 할 때에는 일류 배우 못지않게 뛰어난 연기를 보여 주고, 잽이를 할 때에는 징이나 장고나 꽹과리니 북이나 제금 어느 것을 손에 잡아도 절묘한 장단을 마음대로 구사하고, 날라리 부는 솜씨는 나라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만하고, '덤불국화'라든가 '출화작약'이라든가 '사계화'와 같은 종이꽃 만드는 솜씨라든가, 대금을 만드는 솜씨 또한 전문가 대접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출처 : http://www.artpusan.or.kr/board/moim00....a%3Ddesc

이렇듯 그가 갖가지 기예를 두루 갖춘 데에는 그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집안 내력과 신이 내린 재능이 고루 작용하고 있습니다.

1922년 2월 29일에 경상북도 포항시 환호동에서 김성수의 둘째아들로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 이선옥 명인과 함께 할아버지 김천득 명인과 할머니 이옥분 명인의 뒤를 이어 무업을 하고 있었고, 큰아버지 김범수 명인와 큰어머니 김운화 명인, 작은아버지 김영수 명인과 작은어머니 이영파 명인도 무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부근에서 ‘날리던’ 무당인 어머니 이선옥 명인은 맏아들 호출과 큰딸 외동과 둘째아들 석출과 셋째아들 재출까지 낳고 병이 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살림을 떠맡아 오던 아내가 죽게 되자 살 길이 없어진 그의 아버지는 어린 아이들을 돛단배에 태우고, 동생과 어머니가 무업을 하고 있는 강원도 삼척군 건덕면 교가리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무업을 하고 있던 할머니 이옥분 명인은 불쌍한 어린 손자들을 자그마한 움막에서 재우며 걷어먹였습니다. 그때 다섯 살밖에 안된 어린 석출은 할머니가 고사나 굿을 하러 다닐 때 누이와 동생과 함께 졸래졸래 따라다니며, 밥도 얻어 먹고 떡이며 과일이며 나물을 얻어먹었습니다.

그동안 함경도 원산이나 구룡이나 청진 너머 소련 땅에까지 무업을 하러 다니던 그의 아버지는 고생스런 방랑 생활을 일 년만에 끝내고 경주로 내려와서 설달이라는 여자를 얻어 살림을 차렸습니다. 그래서 '애비 없는 무당 아들'이라고 동네 아이들에게 발길질 당하고, 돌팔매질 당하며 불쌍하게 자라던 어린 아이들은 아버지를 따라 경주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달이 엄마가 데리고 온 이복형제들과 매일같이 싸우고 울고 매맞고 쫓겨 났다 쫓겨 오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글 배울 시간도 없고 학교 갈 시간도 없이 여덟 살이 되고 다른 할 일은 없고 해서 굿판을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징이나 꽹과리나 제금을 조금씩 두드려 보고, 어른들이 부르는 노래도 흉내내어 흥얼거리는데 개구쟁이에다 버르장머리는 없어도 기억력이 좋고 재주가 좋아서 어른들이 가끔씩 “니 내중에 큰 화랭이 된데이” 하고 칭찬하곤 했습니다.

그가 배운 경상도 무속은 전라도 무속이나 제주도 무속과 마찬가지로 “세습무속”입니다.

즉 경기도나 평안도나 황해도와 같은 경기 이북 지방의 무속이 주로 신내린 무당이 이끌어가는 “강신 무속”이기 때문에 무당의 예술성보다는 신령함에 더 의존하는 데에 견주어서, 세습무들은 집안의 무업을 이어받아 춤이나 노래나 사설이나 악기를 다루는 예술적 능력을 닦아 온 사람들입니다.

굿을 보는 관객들도 경기 이북 지방에서는 무당이 신통한지 못한지에 관심이 많지만, 경상도나 전라도에서는 무당이 굿을 잘하는지 못하는지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전라도나 경상도의 굿판을 보면 거의 공연 예술과 같은 형태를 가지게 되고, 실제로 굿에 쓰인 춤이나 음악은 전라도나 경상도 민속 예술의 뿌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는 굿판에서 살다시피하며 굿에 필요한 갖가지 기예를 어른들에게 전수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열일곱 살 때부터 첫째 무당 노릇을 하기 시작했는데 “꽃 잘 만들지, 징 장구 잘 치지, 소리 잘 하지. 머, 무당 딸 있는 사람은 다 사위 삼을라꼬.” 하던 판에 작은어머니의 이웃 마을에서 무업을 하던 변재춘의 딸 변난호와 열아홉 살에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주 시내에 첫 살림을 차리고 굿을 하러 다니다가 스물한 살이 됐을 때 비로소 ‘온 섬’ 출연료를 받는 어른 무당이 되었습니다. 어린 무당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출연료를 못 받거나, 어른들이 주는 대로 푼돈을 받거나, 조금 대우를 받는 경우는 ‘반 섬’이라 하여 어른의 반절을 받는 것이 관례인데 장가도 가고 첫딸도 나은 덕에 어른 대접을 받아 '온 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때는 일제 말이라 “콩 배급받고, 풀 베고, 놋쇠 걷어가고, 굿 하는 기 발각되몬 순사들이 당 뿌수고 칼 빼서 휘두르몬 우리는 징 장구 들고 달려가 숨고, 유치장에 가서 죽을 매 맞고 시말서 쓰던” 시절이라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니 새 세상이 왔다고 포항 시내에서 지신밟기를 할 때 형이 설장구 메고, 동생이 꽹과리 치고, 김석출은 날라리 불고, 보름 동안 마음껏 신명을 플어냈습니다.

그 전부터 날라리 부는 법을 배우기는 했어도 워낙 시끄러운 악기라서 남이 들을까 두려워 산골이나 언덕 밑이나 집없는 바닷가에서 남몰래 불었는데, 해방이 되고서는 입이 얼얼하도록 불어 댄 것입니다.

'호적' 또는 '태평소'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날라리'는 중국의 서북방에 사는 유목 민족이 쓰던 악기로 중국을 거쳐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찍부터 궁중 음악의 대취타나 군대의 취악에 쓰이다가 점차 민간에 널리 전해지면서, 풍물을 치거나 굿을 할 때 중요한 악기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놀기 좋아하고 행동이 헤픈 사람을 '날라리'라고 하는데, 그 악기가 워낙 아무데나 잘끼어서 시끄럽게 연주되다보니 그런 말이 생겨난 게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대추나무나 중국 버드나무인 화류목을 깎아 가운데를 비게 하여 관대를 만들고, 위에 일곱 구멍을 뚫고 아래에는 한 구멍을 뚫은 다음, 놋쇠나 구리로 만든 나발을 답니다. 나발 반대편 관대의 끝에 끼우는 빨대는 갈대를 깎아서 쓰거나 기러기 깃털 뿌리를 밥솥에 쪄서 숫돌에 갈아 구멍을 뚫어 만든 것을 썼는데, 요즈음은 플라스틱 빨대를 많이 씁니다.
그 무렵에 날라리 잘 불기로 이름난 사람으로는 호적 시나위로 천하제일이라는 평을 듣던 김봉기 명인과, 쌍호적을 잘 불던 신참문 명인과, 상주에서 무업을 하던 염상태 명인과, 봉사 악사 김재수 명인과, 시나위를 불면 “결딴나는 가락”이라고 칭찬을 듣던 방태준 명인 등이 있었는데, 이들이 모두 해방 뒤에 생긴 국악 단체의 악사가 되어 전국을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한창 날라리에 맛을 들인 김석출은 어디에 단체가 왔다는 말만 들으면 날라리를 들고 가서 사흘씩 나흘씩 그 단체에서 먹고 자며 날라리의 대가들과 합주를 하기도 하고, 부족한 점을 그들에게 배우기도 하며 솜씨를 늘여 나갔습니다.

“단체가 왔다 하면 죽어라꼬 쫓아가는 기라. 바지 가랑이에다 돈 만 원쯤 숨겨 놓고 가서 내 돈 내고 단체를 따라다니는 기라. 단체가 돈을 못 벌 때는 밥 한 그릇 가지고 아버지 아들들이 나눠 먹고 점심도 없이 하루 두 끼 먹는 기 다반사니, 내 돈 내서 밥 사주고 호적 배왔는 기라. 내는 그때 굿해서 돈 잘벌었으니, 뭐 내가 가모 다들 환영을 했제.”

그렇게 배운 솜씨로 단체의 악사들이 풍물을 치면서 시내에 광고를 도는 ‘마찌마리’를 할 때 날라리를 불어 주기도 하고, 판소리도 몇 대목 배우고, 대금 만드는 법도 배워 웬만한 전문가가 만든 대금보다도 음질이 더 좋은 대금을 만들어 악사들에게 선물도 수없이 했습니다.

특히 임방울이나 김연수나 박동진과 같은 판소리 명창들과 사귀는 동안에 그는 판소리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 어른들이 부르는 판소리를 귀동냥해서 토막으로 배운 데다가, 국악에 귀가 열려 있던 터라 부끄럽지 않을 만큼 소리 실력을 얻게 되어 굿을 할 때 가끔씩 판소리 한 대목씩 부르기도 하고 적당한 사설을 지어 창작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굿할 때 “학자님들이 그런 대목만 나오면 녹음기를 찰칵 꺼 버리는” 것을 보고 점점 삼가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판소리나 국악에 대한 관심을 날라리에 쏟아넣었는데, 그 결과로 나온 것이 그가 자랑해 마지 않는 <호적 산조>입니다.

“옛날 선생님들이 호적을 잘 불기는 했어도 십 분을 넘게 불 가락이 없었는 기라. 한 가락 불고, 또 되풀이해서 불고, 그라이 단조롭고 맛도 없어. 천하제일 명선생의 가락도 십 분 넘으면 그기 그 가락인 기라. 그래 김석출이가 호적 산조를 생각해 낸 기라. 내는 한 시간이면 한 시간, 두 시간이면 두 시간, 사흘이면 사흘, 얼마든지 다른 가락으로 불 수 있으니 호적 산조는 김석출이가 전무후무한 기라.”

그가 이렇게 호언장담을 한 만하기도 한 것이 날라리 가락이란 고작해야 궁중음악의 대취타 가락이나 경기 시나위, 전라도 시나위, 동해안 무속 시나위에서 쓰이는 몇 개의 가락이 전해 올 뿐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에는 다양한 가락이 전해오는 모양이라. 육이오 때 중공군들이 꽹과리 치고 날라리 불면서 쳐들어올 때 무슨 가락 불면 전진하고, 무슨 가락 불면 후퇴하는 걸 다 날라리가 했는기라. 또 내가 우연히 중국 우동집에서 주인 내실에 들어가 중국 호적 레코드를 들은 적이 있는데, 사람 죽어서 치르는 장례식을 할 때 호적 가락이 바뀌는데 따라서 곡하고 절하고 상여 나가고 하는기라. 그란데 그 사람들이 잘 불어. 호적 일고여덟 개를 같이 부는데 기가 막히게 잘 불어!"

중국 날라리에 비해 너무도 단조로운 날라리 가락을 다양하게 만들 길은 산조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끊임없이 산조 가락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산조(散調)'는 시나위 가락을 일정한 장단에 맞춰 연주하는 기악 독주곡을 말합니다. '흐튼 가락'이란 이름 그대로 즉흥성이 강조된 음악 형식으로, 19세기 말엽에 김창조 명인이 가야금 산조를 만든 것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그 뒤 백낙준 명인이 거문고 산조를 만들고, 대금이나 아쟁 그리고 단소도 대가들에 의해서 산조 가락이 만들어져서 지금가지 전해 옵니다. 그 뒤 산조는 그 즉흥적이면서도 풍부한 표현력 때문에 많은 음악가들이 자신의 새로운 창작을 곁들여 변화되고 발전되어 왔습니다. 

김석출 명인이 만들어낸 호적 산조도 가락의 흐름이나 장단의 구성에서 가야금 산조나 대금 산조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가 호적 산조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나자 그와 친했던 국악인들은 대단한 관심을 보여주었지만, 대부분의 국악인들은 "굿쟁이가 굿이나 하지 산조는 또 뭐냐?"고 하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서울의 소극장인 공간 사랑에서 사물놀이패의 합주와 어울려 호적산조를 발표하자,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김석출의 산조가 호적을 살렸다"고 감탄했습니다. 

"옛날 양반들 부는대로 날라리를 불면 산조 가락이 안 나와. 내는 빨대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가지고 이빨로 살살 물었다 놨다 하면서 재주를 부리지. 그래야 산조 가락의 맛을 낼 수 있는기라. 갈대나 기러기 깃털뿌리로 만든 옛날 빨대로는 이로 물어서 내는 음색을 못내. 이로 물면 빨대가 붙어버리는 기라. 그러니 앞니로 재주 부리는 성음은 내가 처음 발견한 기라"

그는 이렇듯 어렵게 만들어 낸 산조 가락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녹음도 해놓고, 틈만 나면 콧소리로 흥얼거리면서 연습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은 방음장치가 되어 있지 않아서 마음대로 날라리를 불 수가 없고, 산이나 공원에 가서 불면 산책 나온 사람들이 불평을 해대는 통에 마음대로 연습할 수가 업었습니다. 그래서 굿판이 벌어지면 연습도 할 겸 발표도 할 겸 해서 산조 가락을 마음것 뽐내어 불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형제들과, 그의 두 아내에게서 난 자식들과, 조카들이 모두 직접으로나 간접으로 무업과 관련되는 일을 하고 있어 거대한 무당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일이 창피하다고 집을 뛰쳐나간 사람도 있었지만, 인간문화재로서 대접을 받고 보니 이제는 오히려 무당 집안 출신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손들까지 생겨나게 되어 집안 어른으로서의 권위도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호적 산조에는 시나위나 대취타 가락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은 한과 서러움이 배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지지리도 가난하고 불쌍하게" 자라 온 그의 어린 시절과 천대 받고 멸시 받으며 살아 온 그의 삶의 역정에서 마음 깊은 곳에 깊숙이 자리 잡은 응어리들이 다 쏟아져 나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그 모든 응어리들이 다 쏟아져 나올 때까지 산조 가락을 갈고 닦아 마지막 남은 삶을 날라리 산조로 마무리하고 2005년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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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명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