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관 하면 배뱅이굿, 배뱅이굿 하면 이은관'이라고 할만큼 이은관 명창은 나라 안에서 <배뱅이굿>을 가장 뛰어나게 불러 젖힐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웬만한 여자의 목소리보다도 더 높이 올라가는 그 고운 목소리로 한없이 높게 뻗어냈다가 때로는 간드러지게 때로는 구슬프게 엮어나가는 그의 노랫가락을 듣고 있노라면, 막혔던 속이 확 뚫리듯 시원하고 개운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또 사이사이 끼워 넣는 재담은 구수하고 멋스러워 때로는 폭소를 터뜨리게 하고, 때로는 실눈을 뜨고 조용히 웃게 하니,「배뱅이굿」을 연기하는 그의 솜씨는 가히 일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처 : http://child.junggu.seoul.kr/h/h03/h030...EC%3DAAC
그는 1917년 11월 27일에 강원도 이천면 회산리에서 평범한 농부인 이윤하의 8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산에 나무하러 가면서도 "나무하러 가세 나무하러 가세, 상상마루에 올라가세" 하는 산타령을 지게 작대기로 장단을 맞추면서 곧잘 불러 젖히던 아버님의 핏줄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소리에 귀가 밝은 소년으로 동네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자라났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배우는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하는 창가라든가,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하는 동요를 곧잘 불러 학예회 때는 반드시 뽑혀 나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또 친구들과 개울에 나가 미역감고 놀 때는 <신고산타령>이나 <닐니리야> 같은 민요를 불러서 동무들한테 부러움과 찬사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철원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는 공부보다는 노래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3학년때 그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는 일대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때가 열아홉 살 땐데 철원극장에서 콩쿠르 대회가 열렸거든. 근데 내가 거기서 <창부타령>하고 <사설 난봉가>를 불러서 일등상을 탔어요. 그 길로 학교를 때려치우고 서울로 올라갔지요. 그때는 서울만 가면 금세 출세하는 줄 알았지. 어찌어찌해서 경성방송국에서 <초한가>를 불렀는데, 그것이 고향에 알려져 가지고 나중에 집에 내려가니 환영이 대단해요. 요릿집에 불려가서 소리도 하고, 여자들의 프로포즈도 받아보고, 아무튼 촌놈이 노래 하나로 출세한 거지요."
방송국의 위력은 대단해서 학교를 그만두고 집을 나간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부친이나, 신혼의 재미도 누려보지 못하고 소박맞은 듯이 서러워하던 젊은 아내도 라디오에 나온 그의 출세를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남들은 명창이나 된 듯이 추켜세우고 좋아했지만, 소리를 하면 할수록 그의 마음 속에는 불만이 커져가기만 했습니다.
천성적으로 재주를 타고났다고는 하지만 유성기 판이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배운 솜씨로는 결코 일류가 될 수 없다는 자각이 싹튼 것입니다. 그는 남몰래 고민하다가 다시 집을 뛰쳐나가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을 찾아 공부를 하려고 서울로 올라 온 그는 적당한 선생님을 찾지 못해 얼마간 방황하다가 황해도 황주 권번의 소리선생인 이인수 명창을 알게 되어 황주로 갔습니다.
"황주하고 서울을 왔다갔다 하면서 한 삼 년 간 공부했지. 황주에서는 이 선생님 댁에서 먹고 자면서 공부했는데, 선생님 성품이 너그롭고 인자하셔서 아주 잘 가르쳐 주셨어. 그 선생님에게 <배뱅이굿>하고 서도민요를 배웠지."
이 아이들이 자라서 세월네와 네월네는 시집을 가서 잘 사는데 배뱅이는 어느 날 시주를 받으러 왔던 상좌중과 사랑에 빠진다.
상좌중이 계교를 써서 배뱅이의 방에 숨어 들어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 절로 돌아간 뒤 소식이 없으니 배뱅이는 상사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그런데 평양의 어느 건달이 이 동네 막걸리집에서 배뱅이의 내력을 다 알아가지고 능청스런 울음과 넋두리로 배뱅이의 부모를 속여 많은 재물을 얻어 가지고 돌아간다.
이 배뱅이의 이야기를 민요가락에 얹어서 흥겹게 부르는 <배뱅이굿>은 이인수 명창의 스승인 김관준 명창이 창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황해도 지방에 전해오는 배뱅이의 이야기를 황해도소리를 중심으로 하여 경기도, 강원도, 함경도의 민요나 잡가들을 중간중간에 넣어가면서 소리꾼 한 사람이 엮어 나가는 이 소리는 전라도 지방의 판소리와 그 형태가 아주 비슷합니다.
한 시간쯤 걸리는 이 <배뱅이굿>에는 '긴 염불', '자진 염불', '황해도 뱃노래', '사설난봉가', '어랑타령', '강원도 아리랑', '창부타령', '장타령', '장님 송경'과 같은 노래들이 쉰 곡쯤 나오는데 김관준 명창은 이 노래들을 그의 아들인 김종조 명창과 제자인 최순경 명창, 이인수 명창에게 전해 주어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이라 합니다.
세 사람 중에 최순경 명창이 제일 먼저 유성기에 "소리를 박아서" 세상에는 최순경 명창이 <배뱅이굿>의 일인자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 뒤에 김종조 명창이 취입하여 그도 얼마간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이인수 명창은 레코드 취입을 못해서 세상에는 동료 두 사람 만큼 널리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은관 명창의 말에 따르면 이인수 명창이 다른 두 사람보다 "재담도 잘하고, 짓거리도 잘 하고, 소리도 성량이 크고, 고음이 잘 나고, 남성적이어서" 제일 실력이 좋았다고 합니다.
서울에 와서는 왕십리에 살던 이명길 명창에게 <노래가락>, <창부타령>, <청춘가>, <사발가>와 같은 경기민요를 배웠습니다.
또 마포에 사는 최경식 명창에게는 시조를 배워 소리의 기초를 모두 닦은 뒤 황해도 장연의 권번에서 소리선생을 잠깐 했습니다. 그뒤 서울에 와서 김봉업 명창이 주관이 되어 꾸민 가설극장을 따라 이천에서 일 주일쯤 공연도 했습니다.
"김봉업 씨는 줄타기의 명수로 유명했던 분이고, 해금도 잘 타시던 대단한 명인이셨어. 그분 단체에서 공연을 하고 서울역에 내렸는데 만담 잘 하시기로 유명했던 박춘복 씨가 나와 있어.
'아니 형님 어떻게 왔소?' 하니까 '아무 말 말고 나하고 어디 좀 가세.' 하더니 택시를 타고 종로 익선동의 골목에 가더니 어느 집에 들어가는 거야. 그 집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 박춘복 씨가 인사를 시키는데 알고보니 그 사람이 그 유명한 신불출 씨라. 내가 레코드판 껍데기에서 많이 봤던 바로 그 얼굴이야. 나는 그만 감격해 버렸지."
신불출 명인은 본래 연극배우로 무대 활동을 하다가 만담가로 변신해서 당대 최고의 만담가로 활약하던 사람으로 당시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고 합니다. 그의 만담들은 우습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민족 정신을 고취하고 일본에 대한 풍자나 독립을 고취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걸핏하면 공연이 끝나고 경찰서 신세를 지기도 하고, 공연중에 수갑을 차고 잡혀가기도 했지만 굽히지 않고 용감하게 버틴 신화적인 만담가로서 그 당시 대중들의 우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은관 명창 역시 고향에서 신불출의 <대머리 영감>이나 <엉터리>, <견우직녀>, <홍길동>과 같은 만담이 '박힌' 유성기를 들으면서 동네 사랑방에서 동치미 국물 마시면서 웃고 울던 기억이 생생했습니다. 그때 무한히 동경했던 별 같은 우상을 직접 만났으니 가슴이 떨리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그는 신불출 명인과 인사를 나눈 뒤 다음날 다시 만나 <배뱅이굿>을 들려 주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준비를 단단히 하고 다음날 그 집에 갔더니 신불출 선생하고 연극 연출가이신 박진 선생하고 신불출 씨 어머니하고 누이동생 둘, 이런 분들이 앉아있더란 말이야. 그 앞에서 소리를 하는데 아무튼 어떻게 열심히 불렀던지 박진 씨가 눈에 수건을 대고 울었어. 그 덕에 며칠 뒤에 청계천에 있는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할 때 뽑혀서 출연하게 됐지."
그때의 출연자로는 박춘복과 송흥란이 재담을 하고, 이은관과 김계출이 낮과 밤에 교대로 <배뱅이굿>을 하고 마지막에 신불출이 만담을 했습니다.
김계출 명창은 그보다 4년 선배되는 사람으로 그 전에도 놀이판에서 한번 같이 놀아봤던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배뱅이굿> 이라 해도 계보가 조금 달라서 김계출은 슬픈 내용이 많이 있었고, 이은관은 웃기는 내용이 많이 있는 편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김계출이 먼저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에 이은관은 그를 따라잡기 위해서 비상수단을 썼습니다.
한량 중에 친한 사람 하고 짜서 그가 소리할 때에 박수치고 발구르면서 잘한다고 소리지르도록 했더니 사람들이 멋 모르고 따라서 잘 한다고 소리치는 통에 김계출은 점점 소리에 기가 죽어 목이 쉬고 이은관은 점점 신이 나서 공연이 끝날 무렵에는 두 사람의 솜씨가 뚜렷이 차이가 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다음 공연인 대구 공연 때에는 그 혼자 뽑혀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국민복 입고 무대에서 삼십 분쯤 소리를 하는데 사람들이 좋아서 소리를 지르고 재청을 하라고 난리 법석이라. 그때 기분이 좋아서 신불출 선생한테 가니 수고했네 한마디 뿐이야. 뭐라고 칭찬이라도 해줄 줄 알았는데 너무 냉랭해서 실망했지. 그런데 또 사업부 일을 보던 김광산 씨가 ‘자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나면 안 되네.’ 하시는 말을 듣고 보니 이해가 가. 내가 어린 나이에 너무 인기가 좋으면 배짱을 부릴까 염려해서 그러신 거지.”
사실 염려한 대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자 그에게 곧바로 유혹의 손길이 들어왔습니다. 신불출 명인의 여자 제자였던 김윤심 씨가 독립해서 서과불, 곤일평과 같은 만담가들과 단체를 만들어 가지고 그에게 함께 하자고 제의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불출의 단체만 따라다녔습니다.
신불출 명인은 일본이 창씨를 하라고 하니까 “에하라 노아라”라고 풍자 섞인 개명을 할 만큼 반일정신이 투철했던 사람이지만, 일제 말기의 예술인 동원 정책에는 어쩔 수 없이 굴복하여 잠시 그들에게 이용되어 위문공연을 다녔습니다.
이은관 명창도 단체를 따라 전국 각지를 순회하고 함경도 산수갑산에서 만주까지 감자국수나 풀빵으로 허기를 때우며 배고픔과 피로에 시달리면서 고달픈 공연 여행을 다녀야 했습니다. 그때의 젊은이로서 징용을 면하려면 단체를 따라다니면서 일본에 협력하는 길밖에 없었고, 그게 싫으면 산속으로 숨어다니든지 징용을 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좌익 단체와 우익 단체가 대립하여 심각한 싸움이 벌어졌는데 신불출 명인은 좌익 계열의 연극 단체에서 공연을 하다가 끝내 북으로 올라가 소식을 알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은관 명창은 해방이 된 후 바로 신불출의 단체와 헤어져서 대한국악원 민요부의 일원이 되어 그쪽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민요부에는 박천복, 장소팔, 김옥심, 이은주, 고백화, 묵계월과 같은 경기민요와 서도민요의 명창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과 함께 여기저기 공연도 다니고 민요 보급활동도 활발히 했습니다.
그러다가 6.25 사변이 끝난 얼마 뒤에 고려 영화사에서 <배뱅이굿>을 영화로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와 난생 처음으로 영화도 찍게 되었습니다.
감독에 양주남, 조감독에 김수용, 건달박수에 이은관, 함경도 할머니에 복혜숙, 돌쇠에 박흥수 등이 모여 반 년이 넘게 고생하며 만든 이 영화는 그런 대로 흥행에 성공하여 그때 조감독이었던 김수용은 감독 첫작품으로 장소팔, 백금녀, 이은관, 박흥수를 등장시켜 <공처가>라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 뒤 <낙화유수>라는 영화에서는 뱃노래를 부르고 <두견새 우는 마을>에서는 상여소리를 불러 영화를 찍고, 레코드 녹음하고, 장소팔과 유랑극단을 만들어 3, 4년간 떠돌아 다니기도 하고, 일본이나 미국이나 월남에 공연 다니기도 하고, 민속 예술학원을 설립해서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대한국악협회 이사를 지내기도 하며 바쁜 세월을 보낸 결과 1984년에 서도소리의 인간 문화재로 지정받게 되었습니다.
“이 <배뱅이굿>이 어떤 이야기를 노래와 재담으로 엮어나가는 것은 남도 판소리하고 비슷해. 그렇지만 음악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나지. 판소리가 무게와 깊이가 있고 단조가 많다면 <배뱅이굿>은 경쾌하고 단순하고 장조가 많아.
또 서도민요 창법이 남도민요하고는 확실히 달라서 남도쪽에서는 뱃속에서 뽑아올리는 통성으로 거칠고 꿋꿋하게 소리를 내지만 우리는 맑고 고운 목소리를 주장하지. 또 경기민요하고는 비슷한 점도 많지만 다른 점도 많아. 경기민요가 부드럽고 간드러지게 넘어간다면 서도민요는 좀더 심하게 소리를 떨지. 그것을 조는 목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이 모두 그 지형 산세를 따라서 생겨난 특징일 거야. 어쨌든 나는 맑고 높은 소리가 자유자재로 난다고 사람들이 감탄을 하고 했지.”
그렇듯 고운 목청과 튼튼한 성대를 타고 났던 그도 한때 목이 쉬어 좌절한 적이 있었습니다. 6.25 뒤 전라도 순회공연을 갔는데 공연을 마치고 트럭타고 숙소까지 오는 길에 마침 비가 내리는데도 소리를 부르고 놀다가 다음날 목이 잔뜩 쉬어 버렸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목이 풀리지 않고 점점 쉬어가기만 하니까 그는 소리를 포기하려고 공연을 사양하고 집에서 쉬었습니다. 그런데 한 2년쯤 쉬고 나니까 소리가 제대로 돌아와 다시 공연을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인인 남상욱 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육 남매를 거의 다 출가시키고 조촐하게 지내는 그의 말년은 다복합니다.
출처 : http://blog.joins.com/media/index.asp%3...3D200801
아흔 살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아직 건강하고 목소리 또한 낭낭하여 간간이 공연도 다닐 수 있습니다. 작년 12월 제가 위원장을 맡은 전주세계소리축제 송년 기념 공연인 <광대의 노래>에 출연하신 그는 배뱅이굿과 함께 트럼펫 연주까지 멋들어지게 들려하셔서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습니다. 정말 기네스 북에라도 올리고 싶은 분입니다.
아직도 그의 얼굴에 늘상 웃음이 떠나지 않고 몸에서는 훈훈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소리 하나로 한 세상을 웃고 울리며 살아온 그의 삶이 이루어 놓은 아름다운 공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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