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블로그 이미지
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 2,563,767Total hit
  • 28Today hit
  • 184Yesterday hit

'4대강'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08.27
    4대강을 위한 '시애틀의 잠못 이루는 연설' (14)
  2. 2010.06.12
    배를 띄운 민심은 배를 엎어버리기도 한다 (15)
  3. 2010.06.06
    우리 가슴에 불 지른 위대한 스님, 문수여! (15)
  4. 2010.03.19
    법정 스님의 사자후 "한반도 대운하 안 된다" (35)

미국의 인디언 지도자로 세알트(Sealth 1786년~ 1866년), 일명 '시애틀'이란 이름의 추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젊어서 용감한 전사로 이름을 날렸으며, 두와미시 족과 스콰미쉬 족의 연합 대추장으로서 크게 존경을 받는 지도자였다고 합니다.

세알트 추장의 이미지. 출처 : http://blog.daum.net/_blog/rss/rssList....Page%3D4

1854년, 미국대통령 피어스에 의해 파견된 백인 대표자들이 그에게 15만 불에 6천만 평에 달하는 땅의 권리를 넘기는 조약서에 서명을 하라고 강요하였습니다. 물론 서명을 안 하면 당장이라도 전쟁을 벌일 태세였습니다. 전쟁을 하게 되면 수많은 동족이 희생될 것을 염려한 그는 몇날 밤을 고민한 끝에 조약서에 서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서명하기 전에 그는 백인들 앞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그 연설을 두와미시 족의 언어를 배운 헨리 A. 스미스라는 백인의사가 기록했습니다. 그 연설문은 오랫동안 원문이 공개되지 않은 채 부분 부분 공개되다가, 1976년의 미국독립 200주년을 기념한 '고문서 비밀해제'로 120년 만에 햇볕을 보게 됩니다.

여기 소개하는 그의 연설문은 그동안 녹색평론, 법정 스님, 류시화 시인 등에 의해 소개되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명문입니다. 하지만 제게는 마치 요즘의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천둥과 같은 외침으로 들려옵니다.

출처 : http://kr.blog.yahoo.com/zephyrakim/22

나와 함께 온, 지금 당신들 앞에 서 있는 한 무리의 이 사람들은 나의 부족이며 나는 그들의 추장이다.

우리는 왜 이곳에 왔는가? 연어떼를 구경하기 위해서다. 올해의 첫 연어떼가 강물로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연어는 우리의 주된 식량이기 때문에 연어떼가 일찌감치 큰 무리를 지어 강의 위쪽으로 거슬러오는 걸 보는 일만큼 우리에게 즐거운 건 없다.

그 숫자를 보고서 우리는 다가오는 겨울에 식량이 풍부할 것인가를 미리 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더없이 기쁜 까닭은 그 때문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연어떼가 햇살에 반짝이며 춤추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 또 한 번의 행복한 겨울이 우리를 찾아올 것을 짐작한다.

우리가 무리를 이루어 몰려왔다고 해서 전투를 벌이려고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 달라. 나는 당신들이 우리의 땅에 온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다. 당신들과 우리는 모두가 이 대지의 아들들이며, 어느 한 사람 뜻 없이 만들어진 사람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들은 이 땅에 와서, 이 대지 위에 무엇을 세우고자 하는가?

어떤 꿈을 당신들의 아이들에게 들려주는가?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그저 땅을 파헤치고 건물을 세우고 나무들을 쓰러뜨릴 뿐이다. 그래서 행복한가? 연어 떼를 바라보며 다가올 겨울의 행복을 짐작하는 우리만큼 행복한 것인가?

'워싱턴의 대추장(미국대통령 피어스를 말함)'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대추장은 우정과 선의의 말도 함께 보냈다. 그가 답례로 우리의 우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그로서는 친절한 일이다. 그의 부족은 숫자가 많다. 그들은 초원을 뒤덮은 풀과 같다. 하지만 나의 부족은 적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다음에 드문드문 서 있는 들판의 나무들과 같다.

백인 대추장은 우리의 땅을 사고 싶다는 제의를 하며 우리에게는 아무런 불편 없이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그대들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볼 것이다. 우리가 땅을 팔지 않으면 백인이 총을 들고 와서 우리 땅을 빼앗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따사로움을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 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인디언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인디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

워싱턴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온 것은 곧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달라는 것과 같다. 대추장은 우리만 따로 편히 살 수 있도록 한 장소를 마련해 주겠다고 한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안을 잘 고려해보겠지만, 우리에게 있어 이 땅은 거룩한 것이기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울과 강을 흐르는 이 반짝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피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을 팔 경우에는 이 땅이 거룩한 것이라는 걸 기억해 달라. 거룩할 뿐만 아니라, 호수의 맑은 물속에 비추인 신령스러운 모습들 하나하나가 우리네 삶의 일들과 기억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음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준다. 카누를 날라주고, 자식들을 길러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에게 하듯 강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아침 햇살 앞에서 산안개가 달아나듯이 인디언은 백인 앞에서 언제나 뒤로 물러났지만, 우리 조상들의 유골은 신성한 것이고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다. 그러니 이 언덕, 이 나무, 이 땅덩어리는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다.

백인은 우리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인에게는 땅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똑같다. 그들은 한밤중에 와서는 필요한 것을 빼앗아 가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땅은 백인들에게 형제가 아니라 적이며, 그것을 다 정복했을 때 그들은 또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백인은 거리낌 없이 아버지의 무덤을 내팽개치는가 하면, 아이들에게서 땅을 빼앗고도 개의치 않는다. 아버지의 무덤과 아이들의 타고난 권리는 잊혀지고 만다. 백인은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저 하늘을 마치 양이나 목걸이처럼 사고 약탈하고 팔 수 있는 것으로 대한다. 백인의 식욕은 땅을 삼켜 버리고, 오직 사막만을 남겨놓을 것이다.

모를 일이다. 우리의 방식은 그대들과는 다르다. 그대들의 도시의 모습은 인디언의 눈에 고통을 준다. 백인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봄 잎새 날리는 소리나 벌레들의 날개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다. 인디언은 미개하고 무지하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도시의 소음은 귀를 모욕하는 것만 같다. 쏙독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한밤중 연못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나는 인디언이라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내음을 사랑한다. 만물이 숨결을 나누고 있으므로 공기는 인디언에게 소중한 것이다. 짐승들, 나무들, 그리고 인간은 같은 숨결을 나누고 산다. 백인은 자기가 숨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여러 날 동안 죽어가고 있는 사람처럼, 그는 악취에 무감각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대들에게 땅을 팔게 되더라도 우리에게 공기가 소중하고, 또한 공기는 그것이 지탱해 주는 온갖 생명과 신령스러운 기운을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베풀어준 바람은 그의 마지막 한숨도 받아준다. 바람은 또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준다. 우리가 우리 땅을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잘 간수해서 백인들도 들꽃들로 향기로워진 바람을 맛볼 수 있는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그러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즉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개인이니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나는 초원에서 썩어가고 있는 수많은 들소를 본 일이 있는데, 모두 달리는 기차에서 백인들이 총으로 쏘고는 그대로 내버려둔 것들이었다. 연기를 뿜어대는 철마가 우리가 오직 생존을 위해서 죽이는 들소보다 어째서 더 중요한지를 모르는 것도 우리가 미개인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짐승들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이 사라져버린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맺어져 있다. 그대들이 온 이후로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제 삶은 끝났고, 살아남는 일 만이 시작되었다. 이 넓은 대지와 하늘은 삶을 살 때는 더없이 풍요로웠지만, 살아남는 일에 있어서는 더없이 막막한 곳일 따름이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딛고 선 땅이 우리 조상의 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이 땅을 존경할 수 있도록, 그 땅이 우리 종족의 삶들로 충만해 있다고 말해 주라.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을 그대들의 아이들에게도 가르치라. 땅은 우리 어머니라고, 땅 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들들에게도 닥칠 것이니, 그들이 땅에다 침을 뱉으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주는 피와도 같이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그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는 짓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종족을 위해 그대들이 마련해준 곳으로 가라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는 떨어져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우리가 여생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패배의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의 전사들은 수치심에 사로잡혔으며, 패배한 이후로 헛되이 나날을 보내면서 단 음식과 독한 술로 그들의 육신을 더럽히고 있다.

우리가 어디서 우리의 나머지 나날을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 많은 날이 남아있지도 않다. 몇 시간 혹은 몇 번의 겨울이 더 지나가면, 이 땅에 살았거나 숲 속에서 조그맣게 무리를 지어 지금도 살고 있는 위대한 부족의 자식들 중 살아남아서 한때 그대들만큼이나 힘세고 희망에 넘쳤던 사람들의 무덤을 슬퍼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우리 부족의 멸망을 슬퍼해야 하는가? 부족이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인간들은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 가는 존재이다. 자기네 하나님과 친구처럼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백인들조차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백인들 또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가지는 우리 모두의 하나님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땅을 소유하고 싶어하듯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하느님이며, 그의 자비로움은 인디언에게나 백인에게나 똑같은 것이다.

이 땅은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이므로, 땅을 해치는 것은 그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다.

백인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갈 것이다. 어쩌면 다른 종족보다 더 빨리 사라질지 모른다. 계속해서 그대들의 잠자리를 더럽힌다면, 어느 날 밤 그대들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멸망할 때, 그대들을 이 땅에 보내주고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그대들에게 이 땅과 인디언을 지배할 권한을 허락해 준 하느님에 의해 그대들은 불태워질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불가사의한 신비이다. 언제 들소들이 모두 살육되고, 야생마가 길들여지고, 은밀한 숲 구석구석이 수많은 인간들의 냄새로 가득차고, 풀이 우거진 언덕이 '말하는 쇠줄'(전화선)로 더럽혀질 것인지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숲은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독수리는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날랜 조랑말과 사냥에 작별을 고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의 끝이자 죽음의 시작이다.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가 거기에 동의한다면 그대들이 약속한 보호구역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서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마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 인디언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가 다만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기억될 때라도, 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백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의 심장의 고동을 사랑하듯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우리가 돌본 것처럼 이 땅을 돌보아 달라. 당신들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이 땅의 기억을 지금처럼 마음속에 간직해 달라. 온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대들의 아이들을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이.

한 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하나님은 하나라는 것을. 이 땅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백인들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연어떼를 보았으니 이제 나와 나의 부족은 행복한 얼굴로 돌아간다. 어쩌면 또 한 번의 행복한 겨울은 짐작에 그칠 뿐, 나의 부족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꿈인지 모른다. 당신들 백인들에게 밀려, 살아남기 위해 고통 받아야 할 막막한 겨울 들판으로 뿔뿔이 떠나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본 연어떼의 반짝이는 춤을 나의 부족은 잊지 못할 것이다.

이것으로 내 말을 마친다.


출처 : http://seerdeborah.blogspot.com/2010/08..._17.html

당시 피어스 대통령은 인디언들의 마음을 달래는 제스츄어였는지 그 지역을 세알트 추장의 이름을 백인들이 발음하기 쉽게 고친 '시애틀Seattle'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영화 <시애틀의 잠못 이루는 밤>으로 우리에게도 친근한 시애틀은 이렇듯 신성한 땅과 부족의 몰락을 앞두고 '잠못 이뤘던' 세알트 추장과, 정든 고향을 떠나 보호지역으로 들어가게 된 인디언들의 슬픔이 담겨져 있는 도시입니다.

시애틀에 있는 세알트 추장의 동상. 출처 : http://www.necrosant.net/zbxe/25349

세알트의 연설문은 원본이 환경론자들에 의해 여러번 개작되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고, 그가 백인에게 이용당한 지도자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런 의혹이나 평가에도 불구하고, 연설문의 내용 자체는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세알트 추장이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 대지, 강, 연어, 새, 사슴들 모두 지금의 시애틀에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시애틀뿐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 곳곳에서 인디언들의 땅과 삶은 철저히 수탈되고 파괴되었습니다.

이렇듯 백인들에 의해 짓밟히고 무시 당했던 그의 연설문은 지금도 여전히 지구촌 곳곳의 수많은 개발론자과 건설론자들의 손에 의해 무참히 갈기갈기 찢기고 있습니다.

저는 특히 그가 강과 물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4대강 사업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개울과 강을 흐르는 이 반짝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피다.....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준다. 카누를 날라주고, 자식들을 길러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에게 하듯 강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자비하게 강바닥을 파헤치는 덤프트럭과 크레인의 굉음에 묻혀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한반도의 어머니 대지 위를 흐르는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형제들은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제들의 외침은 철저히 무시되고 짓밟히고 있습니다.


트랙백 0 AND COMMENT 14

6.2 지방선거로 인해 정치권의 지형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정치권의 갈등은 만만치 않게 증폭될 것입니다. 
그에 따라 그동안 정부가 핵심적으로 추진해 온 정책들의 앞날도 험난해 보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정책이 ‘세종시 수정안’과 ‘4대강 살리기 사업’입니다.

4대강 사업에 대해 민주당은 6월 국회에서부터 철회나 수정을 요구할 계획이지만 청와대는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4대강 사업이 현 정부의 핵심정책인 만큼 이를 철회하거나 수정한다는 것은 정책의 기조가 붕괴된다는 위기의식이 깔려 있는 듯 합니다. 

한나라당도 4대강 사업을 전면 중단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반대 여론이 거세다는 것을 이번 선거에서 인식한 만큼 개선할 부분은 수정하거나 보완한다는 여지를 남겨 놓고 있습니다.

출처 :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3D60483

세종시 문제의 경우, 민주당 등 야권은 수정안을 폐기를 주장하고 있지만 청와대는 종전의 입장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청와대의 입장에 비해 한나라당에서는 수정안 추진 동력이 다소 떨어지는 분위기입니다. 새로운 전략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가 솔솔 흘러나옵니다.

출처 : http://www.asiae.co.kr/news/view.htm%3F...6sp%3DEC

이처럼 정치 지형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정치력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소통과 타협과 절충을 일상화해야 할 구조로 변한 것입니다. 이 구조에 적응하기 위한 최선의 비법은 오직 이번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민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에 따르는 길뿐입니다.

2010년 올해 초에 정치권에서 자주 오르내린 사자성어로 ‘여민동락(與民同樂)’, ‘상하동락(上下同樂)’, ‘수능재주 역능복주(水能載舟 亦能覆舟)’와 같은 말들이 있었습니다.

이번 선거는 정치인들의 입에 발린 그 말들이 현실 정치에서 얼마나 무서운 결과로 정치권을 휩쓸었는지 실감하게 해주었습니다. ‘민심과 함께 하지 않고(與民不同樂)’, ‘권력자가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지 않으면(上下不同樂)’ ‘배를 띄워준 민심이 언젠가는 배를 엎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 것입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 정치권은 민심의 흐름을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했을 것입니다. 말로는 언제나 민심을 들먹였지만, 그 민심이 얼마나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 잘못 파악된 흐름인지 알고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론조사도 믿을 수 없고, 시중에 떠도는 말들도 진의를 알기 어렵고 ,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민심의 흐름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제 정치권은 그 강물 속 보이지 않는 곳에 흐르고 있는 ‘바닥 민심’이 마치 '어뢰'처럼 다가 와서 자신들이 띄워 놓은 배를 엎어버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민심은 정치인들이 일신의 영달을 도모하거나, 권력욕과 출세를 달성하기 위해 일회용으로 쓰이는 도구가 아닙니다.

이번 선거는 그러한 정치권의 행태에 대한 민심의 매서운 경고이며 심판이었습니다. 정치권은 이 같은 민심을 제대로 파악하고 자기혁신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예전처럼 민심을 자신들 위주로 해석해서 불리한 민심에는 귀를 닫고, 유리한 민심만 귀에 담는 구태를 되풀이한다면 진정한 민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민심은 사심을 갖지 않고 진정으로 자신들을 위해 올바르게 일을 할 정치 일꾼을 원하고 있습니다. 강물의 깊은 바닥으로 내려가 바닥 민심을 찾아내어 그것을 채워주려고 노력하는 일꾼을 원하고 있습니다. 민심과 함께 웃고, 민심과 함께 울고, 민심과 함께 아파하는 일꾼을 목마르게 원하고 있습니다.

민심을 따르지 않는 정치 세력에 대해서는 언제든 그 배를 뒤집어엎을 무서운 흐름이 존재하고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트랙백 1 AND COMMENT 15

지난 5월 31일 낙동강 제방에서 자신의 몸을 불사른 문수스님은 어떤 분일까요?

스님은 1986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시현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文殊) 보살’ 이름을 법명으로 받았습니다. 중앙승가대학교 재학시절에는 의협심이 강하고 대중을 이끄는 힘이 있어 총학생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여러 선원을 떠돌며 용맹정진하는 수도승의 길을 걸었습니다. 2006년에는 청도 대산사의 주지를 잠시 맡기도 했으나, 수행에 걸림돌이 된다며 주지직을 버렸습니다.

그 뒤 경북 군위의 지보사에서 3년 가까이 수행에만 전념했습니다. 스님의 수행이 어찌나 엄격한지 신자들마저 문수스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5월 31일 오전 7시20분 경, 문수 스님은 절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어느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샀습니다.

휘발유 통을 든 채 400m를 걸어서 4대강 사업 구간 중 가장 규모가 큰 낙동강의 제1지류인 위천이 보이는 강둑으로 올랐습니다.

오후 2시20분, 둑길 옆에서 큰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사람들이 가보니 불길 옆에 가지런히 접힌 승복과 흰 고무신이 놓여 있었고, 적삼과 그 옆에 놓인 종이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똑같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 폐기하라.
이명박 정권은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이명박 정권은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文殊

출처 :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3...%3D57040

고적한 선방에서 수행을 하는 동안 스님은 이명박 정권을 화두로 삼은 듯합니다. 자신의 몸을 불 태워 ‘소신공양(燒身供養)’이라는 충격요법을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현 정권의 오만과 독선에 대해 외롭게 명상을 하신 듯합니다.

1963년 6월 11일, 월남 고 딘 디엠 정권의 독재와 불교 탄압에 반대해 사이공 중심가에서 시민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몸울 불태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당시 73세의 꽝뚝 스님의 소신공양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3D960206

아침과 점심도 거른 채 오랜 시간 동안 강둑에 앉아서 스님은 생명이 꺼져가는 낙동강과 국토와 뭇생명들에 대해 홀로 고독하게, 무섭도록 뜨겁게 명상에 잠기신 듯합니다.

드디어 볼펜을 들어 승복에 이승의 간절한 마지막 ‘서원(誓願)’ 적고 고무신을 벗어 가지런히 놓은 다음, 휘발유를 자신의 몸에 끼얹고 불을 붙인 뒤 고요히 삼매에 빠지셨을 겁니다. 타오르는 그 육신의 고통을 극한의 수행력으로 참아내시며, 스스로 이 세상을 밝히는 한 줄기 불꽃이 되어 가셨을 겁니다.

문수스님의 산화에 대해 정부는 분신 자살로 몰아가는 분위기이고, 젊은 스님이 너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 아니냐고 못마땅해 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분의 평소 행적을 볼 때, 오랜 명상과 수행에서 나온 결단의 소신공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6월 4일 오전 10시, 스님의 영결식이 지보사 앞마당에서 거행됐습니다.

시종 장중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조계종 원로의원 월탄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 뜬 사람은 똑똑히 볼 것이며, 눈 어두운 사람은 차차 볼 것이다.
뭇 생명을 내 몸 같이 아끼고 아껴서 그 생명들을 살리기 위해 소신공양 올렸으니,
문수여 장하고 장하도다…”

스님의 시신은 다비장으로 향했고, “문수야, 불 들어간다”라는 외침과 함께 다시 한 번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그렇게 타들어간 불길은 못내 아쉬운 듯 다비장 주변을 휘휘 맴돌았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스님이 남기고 간 서원 때문일 것입니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3D960206

스님의 영혼은 지보사를 떠나 강둑을 지나 낙동강으로 달려가, 4대강과 한반도 주변을 빙빙 맴돌며 가난하고 소외되고 죽음을 눈앞에 둔 수많은 생명들을 위해 간절한 기원을 올리고 계실 것이 분명합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교육자인 앨프리드 화이트헤드는 이런 명언을 했습니다.

보통 교사는 지껄인다.
좋은 교사는 잘 가르친다.
훌륭한 교사는 스스로 해 보인다.
위대한 교사는 가슴에 불을 지른다.

이 말에 나온 교육자를 스님으로 바꿔 봤습니다.

보통 스님은 지껄인다.
좋은 스님은 잘 가르친다.
훌륭한 스님은 스스로 해 보인다.
위대한 스님은 가슴에 불을 지른다.

우리 ‘가슴에 불을 지른’ '위대한'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에 답하는 것은 이제 온전히 우리들의 몫으로 남았습니다.


TRACKBACK 2 AND COMMENT 15

단순하고 청빈한 삶의 실천가인 법정 스님이 우리 곁을 떠났군요. 

그 분의 다비식은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않았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않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에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유언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출처 : http://www.ijejutoday.com/news/p..._655.jpg

그런데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은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판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한 유언의 내용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군요.

출가 이후 생의 대부분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오두막에서 홀로 수행하며 중생들을 위해 써내신 『산에는 꽃이 피네』,『오두막 편지』,『물소리 바람소리』, 『맑고 향기롭게』,『인도기행』,『무소유』,『영혼의 모음(母音)』,『홀로 사는 즐거움』,『말과 침묵』,『법정 스님이 들려주는 참 좋은 이야기』,『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버리고 떠나기』등 주옥같은 글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시간이 흘러도 항상 새로운 울림과 깨달음을 주는 글들, 방향을 잃고 흔들리는 현대인의 영혼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힘을 지닌 글들, 한 그루 나무와도 같은 간소한 삶과 명상에서 우러나온 깊은 통찰이 배어 있는 그의 글들을 다시는 읽을 수 없는 걸까요?

저 역시 스님의 글을 못읽는 사태가 생길까 두려워 몇 권의 저서를 구입했습니다. 그 중『아름다운 마무리』는 가장 마지막에 출간된 책입니다. 마치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하듯  더욱 깊어진 사유와 맑아진 영혼의 소리를 담은 글들은 마치 그 분의 속삭임처럼 제게 다가왔습니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얼음을 깨어 차를 달이고, 채소 모종을 심고 가꾸는 스님의 단순소박한 일상으로부터 책과 독서에 대한 이야기, 월든 호숫가로 자연주의 사상가인 소로우의 삶을 찾아간 이야기, 내려놓음, 비움, 살아온 날들에 대한 찬사, 용서, 이해, 자비, 깨어 있음 등 삶의 본질을 발견하는 스님의 지혜가 문장마다 진주처럼 빛납니다.

그런데 마치 산사의 은은한 풍경소리처럼 청정하고 은은한 울림을 주는 56편의 글들 중 유독 한편의 글이 세상을 향해 무서운 호통을 치고 있더군요. 스님이 이토록 직설적이며 분노의 외침이 묻어 있는 글을 쓴 것은 참으로 희귀한 일입니다.   
 

"한반도 대운하 안 된다"

2008년 4월 무렵, 길상사 법회에서 대운하 사업의 부당함에 대해 법문을 통해 사자후를 토하셨다는데, 그 호통을 글로 정리하신 듯 합니다. 대운하를 반대하는 어느 분의 글보다 단순명료하며 날카롭고 격정적입니다. 조금 길더라도 그 분의 '마지막 사자후' 듣는 셈치고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출처 : 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22/2008042200911.html

......(전략)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람들만 사는 곳이 아니다. 그 겉모습은 다를지라도 수많은 생명체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어울려 산다. 균형과 조화로써 생명의 연결고리인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사업으로 은밀히 추진되고 있는 한반도 대운하 계획은 이 땅의 무수한 생명체로 이루어진 생태계를 크게 위협하고 파괴하려는 끔직한 재앙이다.

우리 국토는 오랜 역사 속에서 조상 대대로 이어 내려온 우리의 몸이고 살이고 뼈이다. 이 땅에 대운하를 만들겠다는 생각 자체가 우리 국토에 대한 무례이고 모독임을 알아야 한다. 물류와 관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몇 푼어치 경제 논리에 의해 이 신성한 땅을 유린하려는 것은 대단히 무모하고 망령된 생각이다...... 

운하를 환영하는 사람들은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발 사업으로 치솟는 땅값에 관심이 있는 땅 투기꾼들이다. 그리고 건설공사에 관심이 있는 일부 건설업자들뿐이다.
 
강은, 살아있는 강은 굽이굽이마다 자연스럽게 흘러야 한다. 이런 강을 직선으로 만들고 깊은 웅덩이를 파서 물이 흐르지 못하도록 채워놓고 강변에 콘크리트 제방을 쌓아 놓으면 그것은 살아 있는 강이 아니다.....
 
대통령 공약사업 홍보물의 그럴듯한 그림들로 지역 주민들을 속여 엉뚱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개발욕구에 불을 붙여 국론을 분열시키면서 이 사업을 추진하려는 것은 지극히 부도덕한 처사이다.

일찍이 없었던 이런 무모한 국책 사업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면 커다란 재앙이 될 것이다. 이런 일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다면 우리는 이 정권과 함께 우리 국토에 대해서 씻을 수 없는 범죄자가 될 것이다. 

이런 무모한 구상과 계획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가 사전에 나서서 막아야 한다. 이는 신성한 우리의 의무이다. 이 문제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중대한 사안임을 깊이깊이 명심하기 바란다.

 

TRACKBACK 2 AND COMMENT 35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306)
예술이야기 (55)
세상이야기 (52)
나의 이야기 (57)
책이야기 (50)
신화이야기 (6)
문화이야기 (46)
명인명창이야기 (40)

CALENDAR

«   2018/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