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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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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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15
    나의 스승 박초월 명창 생각하니 눈물난다 (16)

아직도 스승의 날만 되면 특별히 떠오르는 스승이 계십니다. 바로 저의 판소리 스승인 박초월 명창이십니다.                       .

박초월 스승과의 만남은 제가 대학교 3학년 학생이던 때였습니다.

눈이 펑펑 내리던 초겨울 어느 날, 군대 갔다가 휴가 나온 친구와 함께 비원 쪽으로 터덜터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다가 친구가 길가에 멈춰 서더니 간판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박초월 국악 전습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건물 4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친구는 김제에 있는 국악원에서 판소리를 조금 배웠고, 저는 그 친구 덕에 난생 처음 판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어 판소리에 심취해 있었기에 무조건 올라간 겁니다. 

북소리와 소녀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학원의 현관문을 기세 좋게 열고 들어간 친구가 
판소리를 몇 달 배웠다는 둥 너스레를 떨자 중년 남자 한 분이 북을 차고앉으면서 “소리를 배웠다니 한번 들어 보자”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당대 최고의 남자 명창이던 조상현씨였습니다.

친구는 김제에서 배웠던 '단가' 한 대목을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나니 소파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쉰 목소리로 하하거리고 웃었고, 소녀들도 킥킥거리고 웃었습니다. 친구는 본래 음치인데다가 박치까지 겸했으니 그럴 만도 했지요.

소파에 앉아서 웃던 할머니가 저를 가리키며 “저 사람도 소리 한번 들어 보자.”고 했습니다. 저는 얼굴을 붉히며 “저는 저 친구가 배우는 걸 구경만 해서 한 마디도 부를 줄 모릅니다.” 했습니다. 그러자 “소리를 배우러 왔다니 오늘부터 배워 보시게.”하면서 직접 북 앞에 앉으시는 거였습니다.

박초월 스승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박초월 명창(1917~1983). 호 미산. 본명 박삼순. <수궁가> 인간문화재.
김소희, 박녹주 명창과 함께 1930~1970년대 한국 여성 판소리계를 대표한 3대 여류명창 중 한 명이다. 
현재의 대표적인 남성 명창인 조통달은 박초월 명창의 조카이고, 가수 조관우는 조통달 명창의 아들이니 명창의 피가 손자인 조관우에게 이어졌다.

                   박초월 명창의 외손자인  가수 조관우.


저는 그날부터 열심히 학원에 다녔고, 친구는 저의 한 달분 수업료 6천원을 대신 내주고는 군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지 한 달 뒤에 수업료 낼 돈이 없어서 학원을 다니지 못하겠다고 하자, 선생님이 웃으며 그냥 다니라고 하셨습니다.

“자네는 서울대학교 학생이잖여...”

선생님이 말씀하신 학원비 면제 이유였습니다. 게다가 자취방도 없이 여기저기 기숙을 하며 보내던 제 딱한 사정을 아신 선생님은 크리스마스가 되자 목도리와 장갑을 선물로 주시며, 잠자리가 마땅찮으면 학원에서 자라고 하셨습니다. 오갈 데 없던 처지였던 저는 며칠 뒤부터 학원에서 잠을 잤습니다.

70년대의 대학가는 서구의 히피 문화가 휩쓸었던 때입니다. 장발에 청바지와 통기타와 미니스커트가 유행했습니다. 그런 문화적 분위기에서 살았던 제가 미쳐도 한참 미치고,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습니다.

대학교 졸업생이 학교는 안 가고 판소리 학원에서 먹고 자고, 선생님이 아침 일찍 싸들고 오시는 아침밥을 얻어 먹고, 하루 종일 전화 받고, 노래 가사도 써 주고, 학원생들 판소리 배울 때 같이 배우고, 학원생들 다 가고 나면 걸레질하고 소파에서 잠을 잤습니다. 참으로 괴상한, 그러나 너무도 행복한 나날들이었습니다.

밤에 잠이 안 오면 학원 창문 밖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단성사> 영화관의 화려한 영화 간판과 네온사인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는데, 십오 년쯤 뒤에 제가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한 「서편제」의 간판이 그 곳에 걸릴 줄 어찌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러다가 선생님의 외아들이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지자, 아예 서대문구 불광동에 있는 선생님 댁에 가정교사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아들의 공부를 가르쳐 주고, 선생님은 제게 노래를 가르쳐 주는 교환(?)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북도 칠 줄 모르는 초보 제자에게 한복을 입히고 집 마당에 병풍 치고 찍은 기념 사진.


선생님은 새벽 다섯 시면 불광산으로 아침 등산을 가는 게 첫 일과였습니다. 그때 집에는 전남 순천에서 소리를 배우러 올라온 예쁜 꼬마 국민학교 소녀가 있어서 함께 가곤 했지요.

우리는 산에 올라가 선생님을 따라서 발성 연습을 하고, 시조로 목을 풀기도 하고, 낮에 배웠던 대목 중에서 잘 안 되는 부분을 반복해서 연습하고 교정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참 하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몸도 가벼워져서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정이 많은 성격이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무한정으로 정을 쏟는 성격이었지요. 그중에서도 제게 쏟는 정은 무척 각별했어요. 마치 아들에게 하듯이 먹는 것 입는 것 모두를 챙겨 주고, 제가 외출을 할 때면 용돈까지 주시곤 했습니다.

게다가 소리 공부도 어찌나 극성스럽게 시키는지 다른 제자들이 질투할 정도였습니다. 또 제자 중에 대학을 나온 ‘선비’가 있다는 게 그렇게도 자랑스러운지 공연을 하러 가시거나, 방송국에 가시거나, 국악인들의 모임이 있을 때면 꼭 저를 데리고 가서 인사를 시키곤 하셨습니다.

그러한 선생님의 사랑 덕분에 저는 평생을 판소리에 몸담아 온 예술가의 겉과 속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책이나 이론적인 가르침을 통해서는 깨달을 수 없는,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광대의 삶에 대해서도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같은 스승 박초월 명창


선생님은 제자들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 피우는 걸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물론 성대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오랜 무대 생활의 체험으로 광대에게는 무엇보다 절제가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때로 옛날에 함께 판소리를 했던 사람들 중에 술이나 아편으로 폐인이 된 사람이 많았다는 얘기를 하시면서 술·담배에 절어 있으면 절대 명창이 될 수 없다고하셨습니다.

또 남녀 간의 이성 관계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하신 편이었습니다.

“사내는 계집 조심하고, 계집은 사내 조심해야 돼.”

옛날 선생님들은 제자가 방탕한 행동을 하면 여지없이 파문해버렸다는 말씀도 종종 하시곤 했습니다.

또 평상시의 몸가짐에서도 오랫동안 혼자 사시느라 그랬는지 무척 까다롭고 가리시는 게 많아 사람을 가려서 사귀는 편이었고, 약속 시간은 철저하게 지키셨습니다.

또 소리꾼이 술 몇 잔 얻어먹거나, 돈 몇 푼에 팔려서 취객의 흥을 돋우는 것은 옛날 얘기지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술자리나 잔칫집에서 노래 부르는 걸 철저하게 금하셨습니다.

그런 성격이셨으니 공연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지병인 당뇨병으로 고생하신 지 십 년도 넘었던 터라 평상시에도 건강을 위해서 세심하게 신경을 쓰시는 편이었지만, 공연 날짜가 확정되면 그날부터 집안은 초긴장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보약을 지어서 달여 먹거나 끼니때마다 몸의 기운을 돋워 주는 음식들을 정성스럽게 드시고, 사람과의 만남도 줄이고, 등산길에 체조도 하고, 발성 연습도 더욱 공들여 하십니다.

또 될 수 있으면 집안일에 신경을 덜 쓰고, 공연에만 정신을 집중하려 하십니다. 자신의 허약한 건강 상태를 극복하고 무대에서 최상의 판소리를 부르려는 선생님의 눈물겨운 노력을 보면서 나는 종종 숙연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는 동안, 제게는 새로운 음악 세계를 탐험하는 행복과 함께 힘겨운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차라리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더욱 빨리 판소리의 창법을 익힐 수 있었으련만, 노래만 하려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벨칸토 식 발성기관 때문에 호되게 고생했습니다.

그 시기의 저는 발성법뿐 아니라 그 동안 내가 쌓아왔던 음악에 대한 감각의 대수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탐험에 따른 고통치고는 정말 혹독한 시련의 세월이었습니다.

그 무렵의 저를 가장 괴롭힌 문제는 오페라와 판소리의 음악성에 대한 비교의 문제였습니다.

저는 판소리가 우리 것이기 때문에 좋아한 것이 아니고, 음악적으로 저를 끌어당겼기 때문에 좋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음악적 깊이와 표현력은 오페라와 견주어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판소리를 공부하면 할수록 타당한 생각으로 굳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판소리를 둘러 싼 외적 여건은 그런 생각을 증명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게 현실이었습니다.

판소리를 하는 성악가의 절대 부족,
그 성악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 공간의 열악함,
성악가를 좋아하는 팬들의 고령화와 절대적 감소추세,
새로운 판소리를 작곡할 수 있는 작가와 작곡자, 연출가의 빈곤함,
음반화에 필수적인 전문 기획자와 녹음 기사의 부족,
이 모든 조건에서 판소리는 오페라와 경쟁하기에는 너무도 척박한 환경에서 악전고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악전고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오페라나 서양 음악을 몰랐더라면 하지 않았을 고민으로 저는 오랫동안 끙끙대며 가슴앓이 했습니다.

저는 기초적인 민요나 단가를 배운 뒤,「흥보가」「수궁가」를 공부하고 있던 때라 공부에 대한 의욕은 대단했지만 연극일에 쫒겨서 가는 날보다 못 가는 날이 갈수록 많아졌습니다.

그 무렵 선생님은 무척 적적하고 쓸쓸해 하셨습니다. 당뇨병 증세가 심해지고 갈수록 건강이 나빠지자 아예 학원을 폐쇄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찾아오는 제자들만 가르치니, 제자 기다리고 가르치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었습니다.

또 공연 요청도 갈수록 줄어들어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잊혀져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싸여 무척 초조해 하셨습니다.

그 무렵 선생님은 남원군 운봉 땅에서 살 무렵, 아버지한테 지게작대기로 얻어 맞으면서도 판소리에 미쳤던 시절의 이야기를 종종 하시곤 하셨습니다.

집안에 기생이 나올까 걱정이 태산이셨던 아버님은 14살도 안 된 딸을 부잣집에 시집 보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첫날 밤도 치르지 않고 시집에서 도망 나와 남원 권번에 들어 가 판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에 서 있는 동편제의 시조인 송흥록 명창(1789년 경~1863년 경)의 동상.
그 뒤에 보이는 초가집이 박초월 명창이 자랐던 소녀 시절의 집.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재 소녀 명창이란 칭찬을 듣고, 열여섯 살 무렵에는 이미 명창 대회에서 일등을 한 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레코드 취입을 하고, 일본으로 서울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던 시절의 얘기는 화려하고 재미있었습니다.

1933년에 <조선 성악 연구회>에 들어가서 이화중선과 같은 여류 명창과 함께 대표적인 여류 명창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여성 창극단이 생겼을 때는 전국을 돌면서 뛰어난 노래와 연기로 수많은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던 그 시절의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있고 때로는 눈물겹기까지 했습니다.

  요즘의 <소녀시대>만큼이나 인기를 끌며 활약하던 시절에 찍은
  박초월 명창의 엣된 모습


사랑과 미움, 만남과 헤어짐, 화려함과 비참함, 방랑과 배고픔 같은 온갖 사연들이 소용돌이친 전성기의 영광은 늙으면 늙을수록, 또 주위가 적막해질수록 더욱더 빛을 발하며 선생님의 가슴속을 비춰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 무렵의 선생님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결사적으로 항거하고 있었습니다. 고적한 방안에서 가쁜 숨을 쉬고 손을 떨며 화장을 하시고는, 언제 올지 모를 제자를 하염없이 기다리시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가면 이를 악물고 북을 치며 소리를 가르쳐 주시곤 했습니다.

                       병든 몸으로 소리를 가르치던
                       스승님의 말년의 모습.


저는 선생님의 힘들어하시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공부하는 시간을 한 시간에서 삼십분으로 줄이고, 어떤 때는 혼자서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거나, 아니면 이야기만 나누다 오곤 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굳이 문밖까지 나와 제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쓸쓸하게 서 계시곤 했습니다. 그 모습이 등에 박혀 제 걸음은 무겁기만 했지만, 집에는 또 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로 중풍의 병환이 점점 깊어가는 아버님이 계시니 안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은 연극 공연이 끝나고 출연료를 받았는데, 그 돈으로는 도저히 쌀값과 아버지의 약값을 마련할 길이 없어 한숨을 쉬면서도 습관적으로 선생님 댁에 공부를 하러 갔습니다.

그날 마침 「흥보가」중에서 흥보 부인이 <가난타령>을 하면서 우는 대목을 배웠습니다.

가난이야 가난이야
원수 놈의 가난이야
잘 살고 못 살기는
삼신 제왕이 마련을 했나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불우 행사 한 일 없이
밤낮 주야로 벌었어도
삼순구식(三旬九食)을
면할 수가 없네

박초월 명창의 흥보가 중 '가난타령'

그런데 노래를 부르던 중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더니 그만 노래를 다 부르지 못하고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시더니 물으셨습니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어디 몸이 아픈가, 집안에 우환이 있는가?”

그래도 제가 대답 없이 울기만 하자 눈물을 글썽이며 곰곰 생각하시더니 틀림없이 그것 때문일 것이라는 듯이 조용히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사귀던 여자하고 헤어진 게지?^^”

저는 그런 쪽으로 결론을 내린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도 뜻밖이라 웃지도 울지도 못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눈물을 그치고 거짓말로 들러대기 시작했습니다.

“출판사 하는 친구에게 꾸어 준 돈이 있는데 그 친구가 망해서 그 돈을 못 받게 되었어요.”

저는 그때까지 연극을 하면서 친구와 함께 출판사를 차려서 돈을 잘 번다고 선생님을 속여 왔기 때문에 솔직한 사정을 도저히 얘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 얘기를 들은 선생님은 금세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시더니 서랍에서 오만 원을 꺼내어 제 손에 꼬옥 쥐어 주셨습니다.

그 돈으로 아버님께 약을 사드릴 수 있게 되었지만 저는 그 일이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지금도 <가난타령> 대목만 하려면 그때의 일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이렇듯 정 많고 눈물 많은 분이었기에 말년의 쓸쓸함을 어느 누구보다도 견디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건강이 허락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일 년에 몇 차례 있는 공연 요청을 한 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당뇨병이 점점 악화되어 체중이 줄어들고 기억력이 감퇴되고 목소리가 잠기게 되었는데도, 다른 국악인들을 만나면 건강이 좋아졌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 웃음 뒤의 슬픔, 그 짙은 화장 뒤의 주름살과, 무대에서의 갈채 뒤에 오는 기력 쇠진과 허탈을 모두 알고 있는 저는 선생님의 웃음이 밝으면 밝을수록 더욱더 불안하였습니다.

그 불안은 점점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어떤 공연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번은 「수궁가」를 하시던 중에 느닷없이「흥보가」가사가 튀어 나오더니, 중간에 가사를 잊어버리고 한참을 헤매시다가, 제자들이 무대 뒤에서 가사를 소리쳐서 일러준 덕에 간신히 한 대목을 때우고 나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처참한 선생님의 표정은 내 가슴을 사정없이 후비며 파고들었습니다.

또 한 번은 공연을 끝내고 나오시더니 부리나케 집으로 가자고 하시는 거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배에 힘을 쓰다가 자신도 모르게 설사가 나와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당뇨병의 말기 증세인 만성 설사에 시달리고 계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그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을 했으며, 그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된 것을 느낀 선생님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지 생각하곤 혼자서 남몰래 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촬영을 마치고 새벽에 돌아왔을 때, 집으로 박초월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깜짝 놀라 허둥지둥 달려가 보니 선생님의 집안에 제자들과 국악인들의 통곡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며 그렇게도 이승의 삶에 애착을 가졌던 선생님!
예순여섯이란 '젊은' 나이에 죽음을 기다리게 된 자신을 몹시도 안타까워 했던 선생님!

지금쯤 이승의 허공을 떠돌며 자식들과 제자들과 자신이 사랑을 쏟았던 사람들의 주변을 맴돌고 계실까요? 

선생님! 어디에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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