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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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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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10.07.22
    핏줄을 타고났나, 신이 내렸나, 김석출 명인 (11)
  2. 2010.05.08
    북에 미쳐 집안 망친 불효 인생, 김명환 명인 (10)
  3. 2009.11.29
    전주세계소리축제 '광대의 노래' 이벤트 (39)
  4. 2009.10.15
    '우리 소리 우리 음악' 선물 이벤트합니다. (43)
  5. 2009.09.25
    내가 생각하는 판소리 이야기 (34)
  6. 2009.08.30
    지리산의 겨울, 판소리와의 기이한 인연. (23)
  7. 2009.08.22
    맹렬 기생과 가왕 송흥록의 사랑이야기 (26)
  8. 2009.08.10
    배화여고 '철부지'들과 연극하며 지낸 사연 (42)
  9. 2009.07.21
    나를 매혹시킨 여류 명창의 욕설과 판소리 (34)
  10. 2009.06.13
    맹수처럼 아름다운 예술가가 되고 싶다. (18)
  11. 2009.05.19
    <판소리 말아톤> 소년의 아름다운 도전 (20)
  12. 2009.05.13
    스타킹, 폴포츠와 수잔보일의 감동 배워라 (43)
  13. 2009.05.11
    명창들은 정말 목에서 피를 토했을까? (20)
  14. 2009.05.05
    장관 껍데기 훌훌 벗고 광대로 돌아와보니 (24)
아무개가 '굿하는 사람이다', 곧 '무당이다'라고 하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점쟁이나 푸닥거리나 미신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어서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미친 여자나 엑소시스트에 나오는 신들린 소녀를 머리 속에 떠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도대체 무당이 명인 명창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기분 나빠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무당과 무속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깊이 연구한 사람들은 무당이 목사나 신부나 스님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종교의 사제이며,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찬송가나 염불과 다름없는 엄숙하고 경건한 종교 음악이며, 그들이 읊어대는 사설은 성경이나 불경의 여러 말씀과 다를 바 없는 귀한 말씀이라는 걸 압니다.

그러나 외국에서 들어온 수많은 신들의 위세에 짓눌려서 우리 조상들이 수천년 동안 모셔 오던 민족의 신들은 우리 문화 속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고, 그 신을 모시는 성직자인 무당들도 오랫동안 사회의 밑바닥 천민으로 혹세무민하는 무리라는 편견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무당들은 자신들이 지녀온 기예를 예술로 내세우기 시작했고, 또 예술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들의 기예는 인정을 받기도 했습니다.

동해안 무속의 뛰어난 무당인 김석출 명인도 사람들이 자신을 무당으로보다는 예술가로서 알아 주기를 바랬습니다.

경상남북도와 강원도를 잇는 동해안 마을에서는 해마다, 또는 3년, 4년, 5년, 7년, 10년 마다 한 번씩 '별신굿'이 벌어졌습니다.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빌고 바다에서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벌이는 그 굿은 그 뛰어난 예술성과 오락성 덕분에 구경꾼들이 많이 몰려들어 언제나 푸짐한 굿판이 되곤 했습니다.

출처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01_02_01

그 굿판을 이끌어가는 노래 잘 하고, 춤 잘 추고, 재담 잘 하고, 악기 잘 치는 여러 뛰어난 무당 중에서도 김석출 명인은 그 솜씨나 경험이나 연륜으로 보아서 첫손에 꼽을 수 있는 명인이었습니다. 경상도에서는 남자 무당을 '박수', ‘화랭이’ 또는 ‘양중’이란 말로 부릅니다.

그는 '부정굿'이나 '일월맞이굿'이나 '골매기청좌굿'이나 '당맞이굿'이나 '성조굿'이나 '마당밟이굿'이나 '화해굿'이나 '세존굿'이나 '조상굿'이나 '천왕굿'이나 '심청굿'이나 '군웅굿'이나 '손님굿'이나 '계면굿'이나 '용왕굿'이나 '탈놀음굿'이나 '거리굿'과 같은 갖가지 굿의 사설을 재미있고 구성지게 읊어 댈 뿐만 아니라, 탈놀음굿이나 거리굿과 같이 연극성이 강한 굿을 할 때에는 일류 배우 못지않게 뛰어난 연기를 보여 주고, 잽이를 할 때에는 징이나 장고나 꽹과리니 북이나 제금 어느 것을 손에 잡아도 절묘한 장단을 마음대로 구사하고, 날라리 부는 솜씨는 나라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만하고, '덤불국화'라든가 '출화작약'이라든가 '사계화'와 같은 종이꽃 만드는 솜씨라든가, 대금을 만드는 솜씨 또한 전문가 대접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출처 : http://www.artpusan.or.kr/board/moim00....a%3Ddesc

이렇듯 그가 갖가지 기예를 두루 갖춘 데에는 그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집안 내력과 신이 내린 재능이 고루 작용하고 있습니다.

1922년 2월 29일에 경상북도 포항시 환호동에서 김성수의 둘째아들로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 이선옥 명인과 함께 할아버지 김천득 명인과 할머니 이옥분 명인의 뒤를 이어 무업을 하고 있었고, 큰아버지 김범수 명인와 큰어머니 김운화 명인, 작은아버지 김영수 명인과 작은어머니 이영파 명인도 무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부근에서 ‘날리던’ 무당인 어머니 이선옥 명인은 맏아들 호출과 큰딸 외동과 둘째아들 석출과 셋째아들 재출까지 낳고 병이 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살림을 떠맡아 오던 아내가 죽게 되자 살 길이 없어진 그의 아버지는 어린 아이들을 돛단배에 태우고, 동생과 어머니가 무업을 하고 있는 강원도 삼척군 건덕면 교가리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무업을 하고 있던 할머니 이옥분 명인은 불쌍한 어린 손자들을 자그마한 움막에서 재우며 걷어먹였습니다. 그때 다섯 살밖에 안된 어린 석출은 할머니가 고사나 굿을 하러 다닐 때 누이와 동생과 함께 졸래졸래 따라다니며, 밥도 얻어 먹고 떡이며 과일이며 나물을 얻어먹었습니다.

그동안 함경도 원산이나 구룡이나 청진 너머 소련 땅에까지 무업을 하러 다니던 그의 아버지는 고생스런 방랑 생활을 일 년만에 끝내고 경주로 내려와서 설달이라는 여자를 얻어 살림을 차렸습니다. 그래서 '애비 없는 무당 아들'이라고 동네 아이들에게 발길질 당하고, 돌팔매질 당하며 불쌍하게 자라던 어린 아이들은 아버지를 따라 경주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달이 엄마가 데리고 온 이복형제들과 매일같이 싸우고 울고 매맞고 쫓겨 났다 쫓겨 오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글 배울 시간도 없고 학교 갈 시간도 없이 여덟 살이 되고 다른 할 일은 없고 해서 굿판을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징이나 꽹과리나 제금을 조금씩 두드려 보고, 어른들이 부르는 노래도 흉내내어 흥얼거리는데 개구쟁이에다 버르장머리는 없어도 기억력이 좋고 재주가 좋아서 어른들이 가끔씩 “니 내중에 큰 화랭이 된데이” 하고 칭찬하곤 했습니다.

그가 배운 경상도 무속은 전라도 무속이나 제주도 무속과 마찬가지로 “세습무속”입니다.

즉 경기도나 평안도나 황해도와 같은 경기 이북 지방의 무속이 주로 신내린 무당이 이끌어가는 “강신 무속”이기 때문에 무당의 예술성보다는 신령함에 더 의존하는 데에 견주어서, 세습무들은 집안의 무업을 이어받아 춤이나 노래나 사설이나 악기를 다루는 예술적 능력을 닦아 온 사람들입니다.

굿을 보는 관객들도 경기 이북 지방에서는 무당이 신통한지 못한지에 관심이 많지만, 경상도나 전라도에서는 무당이 굿을 잘하는지 못하는지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전라도나 경상도의 굿판을 보면 거의 공연 예술과 같은 형태를 가지게 되고, 실제로 굿에 쓰인 춤이나 음악은 전라도나 경상도 민속 예술의 뿌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는 굿판에서 살다시피하며 굿에 필요한 갖가지 기예를 어른들에게 전수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열일곱 살 때부터 첫째 무당 노릇을 하기 시작했는데 “꽃 잘 만들지, 징 장구 잘 치지, 소리 잘 하지. 머, 무당 딸 있는 사람은 다 사위 삼을라꼬.” 하던 판에 작은어머니의 이웃 마을에서 무업을 하던 변재춘의 딸 변난호와 열아홉 살에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주 시내에 첫 살림을 차리고 굿을 하러 다니다가 스물한 살이 됐을 때 비로소 ‘온 섬’ 출연료를 받는 어른 무당이 되었습니다. 어린 무당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출연료를 못 받거나, 어른들이 주는 대로 푼돈을 받거나, 조금 대우를 받는 경우는 ‘반 섬’이라 하여 어른의 반절을 받는 것이 관례인데 장가도 가고 첫딸도 나은 덕에 어른 대접을 받아 '온 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때는 일제 말이라 “콩 배급받고, 풀 베고, 놋쇠 걷어가고, 굿 하는 기 발각되몬 순사들이 당 뿌수고 칼 빼서 휘두르몬 우리는 징 장구 들고 달려가 숨고, 유치장에 가서 죽을 매 맞고 시말서 쓰던” 시절이라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니 새 세상이 왔다고 포항 시내에서 지신밟기를 할 때 형이 설장구 메고, 동생이 꽹과리 치고, 김석출은 날라리 불고, 보름 동안 마음껏 신명을 플어냈습니다.

그 전부터 날라리 부는 법을 배우기는 했어도 워낙 시끄러운 악기라서 남이 들을까 두려워 산골이나 언덕 밑이나 집없는 바닷가에서 남몰래 불었는데, 해방이 되고서는 입이 얼얼하도록 불어 댄 것입니다.

'호적' 또는 '태평소'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날라리'는 중국의 서북방에 사는 유목 민족이 쓰던 악기로 중국을 거쳐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찍부터 궁중 음악의 대취타나 군대의 취악에 쓰이다가 점차 민간에 널리 전해지면서, 풍물을 치거나 굿을 할 때 중요한 악기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놀기 좋아하고 행동이 헤픈 사람을 '날라리'라고 하는데, 그 악기가 워낙 아무데나 잘끼어서 시끄럽게 연주되다보니 그런 말이 생겨난 게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대추나무나 중국 버드나무인 화류목을 깎아 가운데를 비게 하여 관대를 만들고, 위에 일곱 구멍을 뚫고 아래에는 한 구멍을 뚫은 다음, 놋쇠나 구리로 만든 나발을 답니다. 나발 반대편 관대의 끝에 끼우는 빨대는 갈대를 깎아서 쓰거나 기러기 깃털 뿌리를 밥솥에 쪄서 숫돌에 갈아 구멍을 뚫어 만든 것을 썼는데, 요즈음은 플라스틱 빨대를 많이 씁니다.
그 무렵에 날라리 잘 불기로 이름난 사람으로는 호적 시나위로 천하제일이라는 평을 듣던 김봉기 명인과, 쌍호적을 잘 불던 신참문 명인과, 상주에서 무업을 하던 염상태 명인과, 봉사 악사 김재수 명인과, 시나위를 불면 “결딴나는 가락”이라고 칭찬을 듣던 방태준 명인 등이 있었는데, 이들이 모두 해방 뒤에 생긴 국악 단체의 악사가 되어 전국을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한창 날라리에 맛을 들인 김석출은 어디에 단체가 왔다는 말만 들으면 날라리를 들고 가서 사흘씩 나흘씩 그 단체에서 먹고 자며 날라리의 대가들과 합주를 하기도 하고, 부족한 점을 그들에게 배우기도 하며 솜씨를 늘여 나갔습니다.

“단체가 왔다 하면 죽어라꼬 쫓아가는 기라. 바지 가랑이에다 돈 만 원쯤 숨겨 놓고 가서 내 돈 내고 단체를 따라다니는 기라. 단체가 돈을 못 벌 때는 밥 한 그릇 가지고 아버지 아들들이 나눠 먹고 점심도 없이 하루 두 끼 먹는 기 다반사니, 내 돈 내서 밥 사주고 호적 배왔는 기라. 내는 그때 굿해서 돈 잘벌었으니, 뭐 내가 가모 다들 환영을 했제.”

그렇게 배운 솜씨로 단체의 악사들이 풍물을 치면서 시내에 광고를 도는 ‘마찌마리’를 할 때 날라리를 불어 주기도 하고, 판소리도 몇 대목 배우고, 대금 만드는 법도 배워 웬만한 전문가가 만든 대금보다도 음질이 더 좋은 대금을 만들어 악사들에게 선물도 수없이 했습니다.

특히 임방울이나 김연수나 박동진과 같은 판소리 명창들과 사귀는 동안에 그는 판소리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 어른들이 부르는 판소리를 귀동냥해서 토막으로 배운 데다가, 국악에 귀가 열려 있던 터라 부끄럽지 않을 만큼 소리 실력을 얻게 되어 굿을 할 때 가끔씩 판소리 한 대목씩 부르기도 하고 적당한 사설을 지어 창작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굿할 때 “학자님들이 그런 대목만 나오면 녹음기를 찰칵 꺼 버리는” 것을 보고 점점 삼가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판소리나 국악에 대한 관심을 날라리에 쏟아넣었는데, 그 결과로 나온 것이 그가 자랑해 마지 않는 <호적 산조>입니다.

“옛날 선생님들이 호적을 잘 불기는 했어도 십 분을 넘게 불 가락이 없었는 기라. 한 가락 불고, 또 되풀이해서 불고, 그라이 단조롭고 맛도 없어. 천하제일 명선생의 가락도 십 분 넘으면 그기 그 가락인 기라. 그래 김석출이가 호적 산조를 생각해 낸 기라. 내는 한 시간이면 한 시간, 두 시간이면 두 시간, 사흘이면 사흘, 얼마든지 다른 가락으로 불 수 있으니 호적 산조는 김석출이가 전무후무한 기라.”

그가 이렇게 호언장담을 한 만하기도 한 것이 날라리 가락이란 고작해야 궁중음악의 대취타 가락이나 경기 시나위, 전라도 시나위, 동해안 무속 시나위에서 쓰이는 몇 개의 가락이 전해 올 뿐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에는 다양한 가락이 전해오는 모양이라. 육이오 때 중공군들이 꽹과리 치고 날라리 불면서 쳐들어올 때 무슨 가락 불면 전진하고, 무슨 가락 불면 후퇴하는 걸 다 날라리가 했는기라. 또 내가 우연히 중국 우동집에서 주인 내실에 들어가 중국 호적 레코드를 들은 적이 있는데, 사람 죽어서 치르는 장례식을 할 때 호적 가락이 바뀌는데 따라서 곡하고 절하고 상여 나가고 하는기라. 그란데 그 사람들이 잘 불어. 호적 일고여덟 개를 같이 부는데 기가 막히게 잘 불어!"

중국 날라리에 비해 너무도 단조로운 날라리 가락을 다양하게 만들 길은 산조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끊임없이 산조 가락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산조(散調)'는 시나위 가락을 일정한 장단에 맞춰 연주하는 기악 독주곡을 말합니다. '흐튼 가락'이란 이름 그대로 즉흥성이 강조된 음악 형식으로, 19세기 말엽에 김창조 명인이 가야금 산조를 만든 것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그 뒤 백낙준 명인이 거문고 산조를 만들고, 대금이나 아쟁 그리고 단소도 대가들에 의해서 산조 가락이 만들어져서 지금가지 전해 옵니다. 그 뒤 산조는 그 즉흥적이면서도 풍부한 표현력 때문에 많은 음악가들이 자신의 새로운 창작을 곁들여 변화되고 발전되어 왔습니다. 

김석출 명인이 만들어낸 호적 산조도 가락의 흐름이나 장단의 구성에서 가야금 산조나 대금 산조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가 호적 산조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나자 그와 친했던 국악인들은 대단한 관심을 보여주었지만, 대부분의 국악인들은 "굿쟁이가 굿이나 하지 산조는 또 뭐냐?"고 하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서울의 소극장인 공간 사랑에서 사물놀이패의 합주와 어울려 호적산조를 발표하자,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김석출의 산조가 호적을 살렸다"고 감탄했습니다. 

"옛날 양반들 부는대로 날라리를 불면 산조 가락이 안 나와. 내는 빨대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가지고 이빨로 살살 물었다 놨다 하면서 재주를 부리지. 그래야 산조 가락의 맛을 낼 수 있는기라. 갈대나 기러기 깃털뿌리로 만든 옛날 빨대로는 이로 물어서 내는 음색을 못내. 이로 물면 빨대가 붙어버리는 기라. 그러니 앞니로 재주 부리는 성음은 내가 처음 발견한 기라"

그는 이렇듯 어렵게 만들어 낸 산조 가락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녹음도 해놓고, 틈만 나면 콧소리로 흥얼거리면서 연습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은 방음장치가 되어 있지 않아서 마음대로 날라리를 불 수가 없고, 산이나 공원에 가서 불면 산책 나온 사람들이 불평을 해대는 통에 마음대로 연습할 수가 업었습니다. 그래서 굿판이 벌어지면 연습도 할 겸 발표도 할 겸 해서 산조 가락을 마음것 뽐내어 불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형제들과, 그의 두 아내에게서 난 자식들과, 조카들이 모두 직접으로나 간접으로 무업과 관련되는 일을 하고 있어 거대한 무당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일이 창피하다고 집을 뛰쳐나간 사람도 있었지만, 인간문화재로서 대접을 받고 보니 이제는 오히려 무당 집안 출신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손들까지 생겨나게 되어 집안 어른으로서의 권위도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호적 산조에는 시나위나 대취타 가락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은 한과 서러움이 배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지지리도 가난하고 불쌍하게" 자라 온 그의 어린 시절과 천대 받고 멸시 받으며 살아 온 그의 삶의 역정에서 마음 깊은 곳에 깊숙이 자리 잡은 응어리들이 다 쏟아져 나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그 모든 응어리들이 다 쏟아져 나올 때까지 산조 가락을 갈고 닦아 마지막 남은 삶을 날라리 산조로 마무리하고 2005년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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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미래의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스피어에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이니만치 부자 양반 출신으로 북에 미쳐서 집안을 망치고 '불효' 인생을 살면서도 고집스럽게 예술의 외길을 걷다 돌아가신 김명환 명인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고수 김명환 명인은 광대 집안 출신이 아닌 양반 집안 출신의 광대입니다.

그는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무창리에서 만석꾼 부자인 김용현의 막내 아들로 1913년에 태어났습니다. 옥과보통학교를 나오고 동경에 있는 고세이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는 부잣집 막내도련님으로 호사를 하며 살았을 뿐, 국악과는 전혀 인연을 맺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7살이 되었을 때 능주에 사는 조금안이란 색시와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처갓집에 놀러 갔다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일이 북을 배우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놀이판이 벌어졌는데 저마다 소리도 허고 북도 침서 노는디 나보고 북을 쳐보라고 헌단 말이여. 못 친다고 혔더니 바보 같은 사람이 북도 못치냐고 놀려먹드란 말여. 그리서 두고보자 내가 너희들보다 북을 잘 치고 말 것이다. 허고 선생을 찾아서 북을 배운 게 평생 이 길로 들어서게 되었어. 내 신세를 그르칠라고 그런 것이제. 공부나 착실히 했더라면 지금쯤 박사나 교수나 그런 것이 됐을틴디 그놈의 북에 미쳐 갖고 불효막심하게 이 모양 이 신세가 되고 말았어.”

불효막심한 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그는 그 길로 옥과에 살고 있던 장판개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장판개 선생은 얼굴이 살짝 얽었었는디 북으로나 소리로나 당대 명인이었어. 그때 마흔도 넘은 양반이 내가 가면 서방님 왔다고 존대를 깎듯이 하면서 북을 가르쳐 줬지. 나는 양반의 자식이고 자기는 광대니, 그때는 그 차이가 옛날 미국에서 백인하고 흑인 차이 나듯이 차이가 났응게. 그런디 치면 칠수록 북이 재미가 나. 그리서 어디에 유명한 선생이 있다 하면 몇 백리라도 찾아 가. 돈을 얼마든지 써서라도 배워와야 직성이 풀리지 안 그러면 몸이 근질거려서 못 견뎌.”

부잣집 서방님이었기에 가능했던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해서 그는 고흥의 오성삼, 곡성의 신찬문, 능주의 주봉현과 같은 이름 높은 고수들을 만나 북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소리는 혼자서 연습을 할 수 있지만 북은 소리 없이 혼자서 연습이 안 됩니다. 

소리꾼들을 따라다니면서 연습을 해야 하는데 이름난 소리꾼들은 초보 고수한테 여간해서 소리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음식 대접하고 돈을 주어 가면서 소리를 청하고 그 대가로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

20살이 되었을 때는 서울에 올라가 '조선 성악 연구소'에서 명창들의 소리판에 끼어 북가락을 익혔습니다.

“그것도 쉬운 일이 아녀. 아직 미숙한 솜씬디 누가 소리를 해줄라고 허간디? 그 덕에 돈이 많이 깨졌지. 어찌됐든 송만갑, 이동백 같은 대명창들의 북을 쳐 본 사람으로 지금껏 살아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이렇듯 저돌적으로 북에 매달린 탓에 서울 온 지 얼마 뒤에 북 잘 치는 부자 한량이 나타났다는 평판을 들었습니다.

“난 바둑도 못 두고 장기도 못 두고 화투도 못 허고 마작도 못혀. 돈 있는 집 자식들이 대개 술과 노름과 계집질에 가산을 탕진허는디 나는 오로지 북 때문에 탕진헌 사람이여. 내 평생에 죄라면 북 친다고 자식 노릇 못 허고 부모 노릇 못 허고 재산 다 날린 죄밖에 없네. 내가 죄인은 큰 죄인이지.”

북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그의 눈빛은 열정으로 빛났습니다. 그러나 고생담을 이야기할 때는 금새 슬픔에 가득찬 충혈된 눈빛으로 변하곤 했습니다.

“내가 스스로 북에 미쳐서 그 고생을 했으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지. 그래서 뼈저린 지난 날을 생각하면 가슴속에서 불이 일어나. 해방되고 마누라가 병으로 죽으면서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지.”

그 전부터도 가세는 기울고 있었지만 만석꾼이라 불리던 부잣집이라서 남보기에는 번듯했는데 해방이 되자 형이 친일파로 몰려 가산을 몰수 당하고 사방에서 핍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 여순 반란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조카가 반란군에 잡혀갔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큰아들이 월북하는 통에 한동안 고통을 당했습니다.

“다른 놈들은 친일하고도 잘만 사는디 우리 집안은 쑥밭이 되도록 당했어. 그래도 나는 북치고 노래부르는 거 밖에는 모르는 놈이라고 봐줘서 변은 안 당했어. 마누라 죽고, 조카 잡혀가고, 큰아들 북으로 가서 소식을 모르고, 가산은 다 날려서 파산선고를 해버리고, 수중에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살아 갈 길은 막막허고 미치것대. 그때 누가 아편을 허면 고통이 잊어진다고 그려. 그리서 아편을 시작혔지. 내가 그 아편 때느라고 고생헌 생각을 허면 지금도 치가 떨려.”

딸 둘을 여동생 집에 맡기고 이집 저집 떠돌아 다니며 돈을 얻어서 아편 주사 맞고 구걸하다시피 하며 살아가는 그를 보고 모두들 폐인이 됐다고 하며 멀리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튼지 예술이 훌륭해. 내가 살아난 것이 예술 덕분이여. 아편을 하고 남들이 나를 페인 취급하니까 내 속에서 오기가 생기더란 말여. 내가 이대로 죽어서는 안되지. 내가 알고 있는 북가락이 내가 죽으면 끝나는 것 아니냐. 어찌됐든 살아야겠다. 이렇게 독허게 마음을 먹고 딱 끊었지.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 내가 오죽 허면 몸을 칼로 북북 그어버렸겄어. 아편 생각이 날 때마다 이런 놈은 죽어야 된다고 칼로 그었어. 그 흉터 자국이 지금도 있어. 내가 지금도 광주에 가면 대접을 받네. 북 잘 치는 고수로서가 아니라 아편쟁이가 아편 끊고 장수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그 일로 대접을 받아. 다른 아편쟁이는 다 병 나서 죽었어. 그러니 내가 무서운 놈은 무서운 놈이여.”

무서운 오기로 아편을 끊은 뒤 그는 보성에 살던 정응민 명창 집에 몇 년 간 기거하면서 북을 치다가 쉰이 가까워 오는 나이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지방에서 떠돌아다니기만 하다가는 영영 잊혀버린 사람이 될 것 같아 어찌됐든 서울의 국악계에서 인정을 받을 결심이었습니다.

이집 저집 떠돌아다니며 어렵게 지내 던 중, 판소리와 가야금산조의 명인인 함동정월을 만나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썩은 나무토막도 불붙일 만큼’ 예술적 열정이 넘치는 성격이었던 그는 그녀의 음악성에 탄복하여 하루종일 북을 치며 가야금 산조를 연습시켰습니다. 예술을 통해 두 사람은 하나가 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곤궁한 현실 때문에 결국 두 사람의 만남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새까만 후배들이 ‘철조망’을 쳐 놓고 그를 받아들여 주지 않아 한동안은 국악계 주변을 서성거리며 지내야 했습니다.

“같은 광대 출신이 아니라 ‘한량북’이라며 무시를 했어. 참 설움 많이 받았고만. 그런디 돌아가신 박녹주 명창허고 김여란 명창이 내 북을 지지혔지. 내 북 아니면 소리헐 맛이 안 난다고 말여. 그때부터 뚫고 들어갔지.”

그처럼 남다른 고통과 남모르는 설움을 겪으면서 ‘뚫고 들어 간’ 북이기에 그의 북에는 다른 고수들의 북과 달리 매서운 기운이 서려 있습니다.

“국민학생 소리를 허면 북도 국민학생 북이 나오고 대학원생 소리를 허면 북도 대학원생 북이 나오는 법이여. 나는 대학원 북을 쳐야 것는디 국민학생 소리를 허면 북칠 기분이 나것능가? 나는 소리가 귀에 들어와야 추임새도 나와. 그래서 추임새를 여간해서 안했더니 소리꾼들이 싫어해. 그리서 안 좋아도 ‘좋다!’ 허고 추임새를 해 주지. 돈을 받아야 헝게. 그래도 속으로는 즐겁지가 않지. 어쨌든 북 치는 사람은 언제 적군이 쳐들어올지 모른다 허고 정신무장을 단단히 허고 적을 봐야 혀.”

소리꾼을 적으로 딱 정해놓고 북을 치는 그의 모습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몸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고, 소리꾼을 쏘아보는 그의 눈초리는 독수리 눈처럼 매서웁습니다.

마치 소리꾼하고 자기하고 둘만 있다는 듯이, 둘이서 생사를 건 한 판 싸움을 벌여 보자는 듯이 맹렬한 기세로 북을 칩니다. 그처럼 서슬이 시퍼런 북 앞에서는 아무나 소리를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와 죽이 맞는 소리꾼은 한정되어 있고, 그 역시 자기가 좋아하는 소리꾼의 북만 치려고 했습니다.

‘강한 자 한티는 적이 많은 법잉게 그런 것을 두려워허지는 않어. 다만 욕을 허는 만큼 실력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자가 나왔으면 좋겠어. 누가 나를 이겨 주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내가 무릎을 꿇고 배우지. 정말 좋은 소리 좀 들어 봤으면 좋겠어. 그런디 인제는 그런 소리 듣기는 틀렸어. 인제 판소리는 죽었어.“

그렇듯 딱 잘라 말하는 성격 때문에 인심 잃고 따돌림 받으며 사방팔방에서 비난의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내가 한동안 소리 평론가 노릇을 하는 통에 미움을 많이 받았지. 그래도 헐 말은 해야 되는 성질인디 어쩔 것인가? 예전 선생님들의 소리에 비하면 요새 소리는 소리라고 할 수도 없어. 내가 이런 말 허면 소리꾼들이 전부 나를 죽일라고 헐 것이지만 사실인디 어쩔 것이여. 북도 마찬가지여. 요즘 북치네 허는 사람치고 '음양(陰陽)' 알고 북치는 사람 하나도 없어. 북이란 것이 자세, 수법, 음양, 강약에 모두 법도와 이치가 있는 법인디 예전 선생님들은 그걸 맞게 쳤는디 지금은 그저 아무렇게나 치고는 다 명고수래. 이런 말을 자꾸 하고 사교술이 없어서 인심을 못 얻지만 그런 나를 왜 문화재시켜주나. 다 실력 때문이지.”

1978년에 판소리 고법문화재가 된 것이 오로지 실력 때문이었음을 주장하던 그의 실력 제일주의에는 실력 있는 사람의 자부심이 가득 배어 있었습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놈이지만 아직도 북만 잡으면 나도 모를 힘이 난단 말이여. 그래도 한 가지 걱정은 있어. 내가 이러다 죽어버리면 내 뱃속에 있는 가락도 함께 사라져버리는 것 아니냐? 장지 종이에 들기름 쩔 듯이 꽉 쩔어 있는 이 북가락을 어느 놈한티 전해주고 죽느냐? 요새는 이것이 한 가지 근심이여.”

그는 오로지 북가락을 이어 줄 제자 근심을 하다가 결국 그 근심을 풀지 못한 채 1989년에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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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조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는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올해 행사는 신종플루 때문에 취소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정성을 기울였던 개막공연을 잘 다듬어서 송년소리나눔  <광대의 노래> 란 제목으로 공연합니다.

12월 4일(금) 7시에 전주에 있는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모악당'에서 막을 올리는데, 10명을 초청할까 합니다.

송년 이벤트가 되는 셈이네요. 

모시기 어려운 최고의 명인명창들이 대거 출연하는 무대라 다시 만나기 어려운 기회입니다. 제가 작시로 참여도 했고, 잠깐 무대에서 축문을 읽기도 한답니다. 

11월 30일(월) 밤 10시까지 신청된 분 중 선착순으로 10명을 선정해서 초대장을 메일로 발송해 드리겠습니다. 한 분이 동반자 포함해서 2장을 신청해도 좋습니다. 그날 오시는 분들께는 블로그 기자단 이름으로 6시 30분에 무대에서 진행되는 명인명창 사진 촬영에도 참석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꼭 '메일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서 비밀댓글이나 방명록으로 신청해 주세요. 




송년소리나눔 <광대의 노래>

한국 최고의 명인명창과 함께하는 따뜻한 국악무대

전주세계소리축제(조직위원장 김명곤)가 2009년 한 해를 보내며 송년소리나눔 <광대의 노래>를 무대에 올립니다.

역사적 헌정의 무대

오늘 12월 4일 저녁 7시,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에서 열리는 이번 무대는 국내 최초이자 최후가 될지도 모르는 역사적인 헌정무대로 우리나라 최고의 명인명창이 한 무대에 오르는 공연입니다. ‘광대’라는 두 글자 안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이름처럼 ‘넓고도 큰마음으로 기쁨과 슬픔, 외로움 같은 우리네 삶의 이야기들을 때로는 소리로, 때로는 악기로, 때로는 춤으로 풀어내는 창조자’들이 바로 광대들이기 때문입니다. 송년소리나눔 <광대의 노래>는 이러한 ‘광대의 노래’를 주제로, 천하를 호령하는 광대들의 삶과 우리 전통예술의 숭고한 역사를 돌아보는 창작공연 무대입니다.

창과, 민요, 합창, 기악, 무용이 어우러지는 무대

송년소리나눔 <광대의 노래>는 국악의 전 장르가 어우러져 하나의 이야기를 엮어가는 새로운 형식의 국악공연 무대로, 대서사의 시작(詩作)에 웅장한 국악관현악과 서양합창, 판소리합창 그리고 판소리 천하명창과 젊은 명창이 한 무대에 오르는 초대형 작품입니다.

이번 무대에는 판소리 대서사합창 ‘광대의 노래’가 올려집니다. 오늘 우리에게 판소리란 무엇인가 라는 화두를 가지고, 동리 신재효의 <광대가>를 모티브로 하여 신광대의 의미를 새로 묻습니다. 김명곤 위원장과 김태균이 작시를, 김대성이 작곡을 맡았으며, 국내최고의 국악관현악 지휘자 김재영과 박병도 연출가가 만나 본격적인 국악관현악과 합창앙상블을 연출합니다. 여기에 국립창극단 단원인 남상일 명창이 아니리 광대로 나와 맛과 흥을 더합니다.

송년소리나눔 <광대의 노래>는 총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무용과 축문낭송으로 이어질 열림의식에 이어 서장 ‘오라, 새생명을 부활하는 신광대의 터로’는 이번 공연의 의미를 전하는 첫 합창곡으로 광대 즉 전통예술인들의 예술혼을 통해 온 세상에 빛과 생명이 깃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제1장 ‘광대가’는 동리 신재효 선생의 <광대가>의 광대내력을 합창과 함께 송순섭, 조상현, 김일구 명창의 소리로 표현합니다. 광대의 덕목인 너름새와 득음, 사설을 노래하며, 어렵고도 어려운 광대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제2장 ‘오늘 광대, 광대 놀음’은 오랜 세월 어려움을 이겨내고 전통예술의 맥을 이어온 전통예술인 별들의 무대로, 악기는 악기로 춤은 춤으로 소리는 소리로 풍성한 한판이 벌어집니다.

이생강(대금), 박대성(아쟁), 김무길(거문고), 김영재(해금), 이종대(피리), 임경주(가야금), 이호용(징), 허봉수(장고) 등 명인들의 시나위 연주와 명무 이매방의 승무, 김백봉의 부채춤이 이어집니다. 이어, 백성들의 삶을 노래하는 신명나는 삼도민요가 뒤를 잇습니다. 경기민요에는 명창 이춘희, 이호연, 이선영, 서도민요에는 배뱅이굿 명창 이은관, 남도민요에는 명창 박송희, 조순애, 성우향의 구성진 소리가 흥겨운 무대를 장식합니다. 또한, 백인영(가야금) 명인을 중심으로 한 수성반주단이 민요의 멋을 돋웁니다.

제3장 ‘신광대가’는 신광대의 정신을 이야기합니다. 풍류와 인간, 생명과 민족을 위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깨우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광대를 상징하는 4인의 소리꾼이 각각 ‘풍류’, ‘생명’, ‘인간’, ‘민족’을 주제로 노래하며, 웅장한 합창으로 새로운 생명과 세상을 동트게하는 신광대판을 외칩니다.

종장 ‘광대여 일어나 천하를 움직여라’는 대단원의 문을 닫는 막으로 ‘새로운 광대판을 열어 세상을 움직이는 역사의 숨결 몰아 거침없는 사자후로 민족의 혼을 깨워 세계를 호령하고 온누리 온세상 새소리로 누비어라’는 메시지를 통해, 광대의 소리가 온 세상에 퍼져 새 세상 열어가기를 기원하는 웅장한 무대로 꾸며집니다.

우리시대의 진정한 광대들이 한 자리에

이번 공연은 진정한 광대의 조건과 그들의 소리가 만들어 나갈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하는 무대인만큼,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인명창들이 한 무대에 오릅니다.

제1장 광대가의 독창부분에는 송순섭 명창, 조상현 명창, 김일구 명창이 차례로 무대에 오릅니다.

가왕 송흥록을 시조로 송광록, 송우룡, 송만갑, 박봉술로 이어지는 송판 적벽가의 계승자 송순섭 명창은 드물게 동편제 소리를 고수해온 명창으로 남성미 물씬 풍기는 장쾌하고 시원한 소리가 일품입니다.

조상현 명창은 보성제 소리를 가장 완벽하게 구사하는 명창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번 무대에서도 그의 완벽하게 조화된 연기와 타고난 성량으로,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 가운데 가장 우아하고 기품있는 소리로 평가받는 보성제 소리의 진수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김일구 명창은 남성 판소리 특유의 호방한 기개를 보여주면서도 미려한 성음으로 세세한 부분까지 섬세하게 표현하는 소리를 보여줍니다.

‘신광대가’에서는 염경애, 김경호, 이주은, 왕기철의 차세대 명창들이 차례로 무대에 오릅니다.

시나위합주에 출연하는 명인들의 면면도 만만치 않습니다. 대금에 이생강 명인, 아쟁에 박대성 명인, 거문고에 김무길 명인, 해금에 김영재 명인, 피리에 이종대 명인, 가야금에 임경주 명인, 징에 이호용 명인, 장고에 허봉수 명인 등 한분한분 모시기도 힘든 당대 최고의 기악명인들이 한 무대에 올라 시나위합주를 들려줍니다.

한국무용의 거장 이매방 명인은 힘 있고 선이 굵어 시원스런 느낌을 주는 승무를, 최승희 선생의 수제자로 잘 알려진 김백봉 명인은 그 자신이 창작해 이제는 한국의 대표춤이 된 부채춤을 보여줍니다.

흥겨운 경기민요와 서도민요, 남도민요도 무대에 오릅니다. 경기민요에는 이춘희, 이호연, 이선영 명창이, 서도민요에는 이은관 명창이, 남도민요에는 박송희, 조순애, 성우향 명창이 출연합니다. 백인영(가야금) 명인을 중심으로 한 수성반주단이 민요의 멋을 돋웁니다.

공연의 맥을 잡아줄 관현악과 합창에는 경기도립국악단과 전북도립창극단, 익산시립합창단, 대구그랜드에코오페라합창단, 전북도립무용단이 함께 웅장한 무대를 연출합니다.

김명곤 조직위원장은 “송년소리나눔 <광대의 노래>는 올해 전주세계소리축제에 관심을 갖고 응원해주신 여러분들과 우리국악을 사랑하시는 애호가 여러분들을 위해 마련한 무대로, 판소리와 민요, 합창, 기악, 무용 등 우리 국악의 여러 장르가 어우러져 천하를 호령하는 광대들의 삶과 우리전통예술의 숭고한 역사를 돌아보는 창작공연무대다”며, “오늘 무대로 우리 국악과 전주세계소리축제에 대한 아쉬움과 갈증을 달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송년소리나눔, 광대의 노래’는 무료공연으로, 전주세계소리축제조직위(063-232-8398)로 전화하셔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www.sorifestival.com)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공연은 7시부터입니다. 공연 시작 전 6시 30분에는 그날 공연하시는 명인명창 선생님들과 초청되시는 전국의 명인명창 선생님들 단체사진을 촬영할 예정입니다. 전국의 내로라는 명인명창 선생님들, 약 60여 분께서 함께 하시는 자리입니다. 단체사진 촬영은 기자님들께만 개방되는 행사로,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사진 촬영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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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제가 쓴 책 한 권이 나왔습니다.
상수리 출판사에서 출판한 「김명곤 아저씨가 들려주는 우리 소리 우리 음악」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어린이들을 위해 쓴 소중한 책이라서 블로그 이웃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벤트를 어떤 방식으로 해야할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여러 날 고민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책을 선물할까 고민고민하다가 할 수 없이 가장 평범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이 글이 발행된 2009년 10월 15일(목) 오후 5시까지 신청하신 분들 중 '선착순'으로 10명을 선정해서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책은 특별히 어린이들을 위한 우리 음악 책이니만큼 기왕이면 어린이를 자녀로 두신 분이나, 조카나 주변의 어린이에게 선물을 하실 분이 응모해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음악을 사랑하는 어린이라면 더욱 환영하구요. 

신청하실 분들은 자신의 연락처와 택배를 받을 주소, 
이 책을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은지 간단한 사연,
그리고 책을 받을 사람 이름
등을 적어서 제 메일로 보내주시면
메일이 도착한 순서대로 10명을 선정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사연이나 책 받을 사람 이름없이 주소만 보내주신 분들은 우선 순위에서 뒤로 밀리겠습니다. 좀 더 많은 분들에게 기회를 드리지 못하는 걸 용서해 주세요. 

제 메일 : arang0@empas.com

제 책에 대한 소개는 출판사에서 만든 보도자료로 대신하겠습니다.


신명 나고 흥겨운

우리 음악으로 배우는 역사와 문화

블로그 http://blog.naver.com/kyung_park

출간 의도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며 트로트를 부르는 쌍둥이 자매가 소개되어 화제가 되었어요. 지루하다고만 생각했던 우리 음악이 요즈음 새로운 옷을 입으며 사람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국악은 어렵고 다가가기 힘든 것으로 여기고 있어요. 영화 <서편제>에 남자주인공으로 출연하고 전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김명곤 아저씨가 들려주는 《우리 소리 우리 음악》 이야기는 우리 음악을 쉽고 재미있게 풀이해 어린이들이 우리 음악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어린이들이 우리 음악의 역사와 지식을 이해하고 흥겹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책이랍니다.


이 책의 특징

우리 음악은 선조들의 행복과 슬픔을 고스란히 담고 이어져 내려온 삶의 음악입니다. 《우리 소리 우리 음악》은 이러한 우리 음악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민족의 멋과 흥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고대시대부터 현대까지 대표적인 음악과 악기, 재미있는 음악 이야기 등을 시대별로 정리해서 초등학생이 알아야 할 우리 음악 지식을 모두 담았지요. 또한 어린이들이 우리 음악과 문화에 자부심을 가지고 시대에 발맞춰 창의적인 새로운 음악도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특별부록으로 우리 소리와 음악을 고대부터 삼국시대, 조선 시대별로 ‘음악으로 듣는 한국 음악사’ CD(국악방송, 국립국악원 선곡)에 모아 놓았어요. 거문고 독주인 <영산회상>, 조선시대의 궁중음악 <여민락>, 판소리 <사랑가> 등 대표적인 우리 소리와 우리 음악을 직접 CD로 들을 수 있습니다. 눈으로는 책을 읽고, 귀로는 음악을 들으며 우리 음악을 감각적으로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답니다.

 

 


저자의 말

우리 소리 여행을 떠나요!

많은 사람들이 ‘광대’라고 하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코에 빨간 공을 붙인 서양의 피에로나 어릿광대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광대는 익살스러운 표정과 몸짓을 하며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만을 뜻하지는 않아요. 한자로 ‘넓은 광(廣)’에 ‘큰 대(大)’로 쓰는 광대는 그 뜻대로 ‘크고 넓은 마음으로 기쁨과 슬픔, 외로움 같은 삶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창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큰 광대가 되어 어린이들이 우리 음악을 즐기고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답니다. 여러분은 서양 음악과 너무나 다른 음악 세계를 보여 주는 우리 음악을 딱딱하고 어려운 음악이라고 생각하나요? 우리 음악은 선조들의 행복과 슬픔을 고스란이 담고 이어져 내려온 삶의 노래예요. 우리 음악을 공부하면 우리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마음과 멋 그리고 흥도 느낄 수 있답니다.

자 그럼, 저와 함께 우리 음악 여행을 떠나 볼까요?


차례

1. 고대 우리 음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먼 옛날 고대의 우리 음악
노래와 춤이 있는 축제 같은 ‘굿’

2. 고유한 음악을 만든 삼국과 가야

거문고를 만든 고구려
일본에 음악을 전해 준 백제
노래의 나라, 신라
문화가 발달한 작은 나라, 가야

3. 불교 음악이 꽃피었던 통일신라시대

전통음악과 외래음악이 하나가 된 통일신라 음악

4. 고려시대에는 어떤 음악이 있었을까요?

궁중 음악의 발달
새로운 향악의 등장

5. 조선시대 음악

세종대왕의 음악 정책
민속악의 발달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 곁에 있던 민요
흥겨운 장단에 신명 나는 풍물놀이

6. 판소리와 일제강점기 음악

서민들을 위한 노래 판소리
노래하는 소리 광대
일본 침략으로 위기를 맞은 판소리

7. 새로운 우리 음악

해방 후 민족정신을 되살린 음악
친근한 음악으로 발전한 국악
퀴즈로 풀어 보는 로봇 이야기

특별부록 : 음악으로 듣는 한국 음악사 CD

김명곤 글|이인숙 그림

독자 대상 : 초등학생 3~6학년|출판사 : 상수리나무|발행일 : 2009년 10월 7일
ISBN 978-89-93397-10-9|값 11,000원|쪽수 104|판형 188×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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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몬스터님으로부터 릴레이 바통을 받았습니다. 릴레이의 주제는 '내가 생각하는 @@이야기'이고, 몬스터님은 저에게 <판소리>라는 주제로 바통을 넘기셨습니다. 몬스터님의 릴레이 글은http://culturemon.tistory.com/187 에 실려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판소리 이야기

저는 6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때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책 아래 온 국민이 <새마을 노래>를 합창하던 시절입니다. 새마을 노래의 2절을 아시나요?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초가집을 시멘트집으로, 기와 지붕은 스레트 지붕으로, 황토길은 아스팔트길로 바꾸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옛날 것, 초가집, 풍물, 굿....이런 것들은 비생산적이고 비능률적이고, 비효율적인 유산으로 치부되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근대화의 열풍 속에서 전통은 무너뜨리고 부셔버려야 하는 대상이었던 겁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저는 70년대에 대학교를 다녔습니다. 당시 저는 “사운드 오브 뮤직” 같은 뮤지컬 영화나 오페라 아리아나 이태리 민요에 열광하고, 서양의 고전 음악을 좋아했고, 독일에 유학 가길 희망했던 독문학도였습니다.

그러다가 1973년 대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판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느 시골 국악원에서 여자 명창이 아이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어느 곳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음악이었기 때문입니다.

제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은 베토벤의 열광적인 숭배자였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오페라 팬이었고, 누이들도 교회의 성가대나 학교의 합창반이었습니다. 그런 집안의 분위기 때문에 저도 이탈리아 민요나 오페라 아리아나 가곡을 즐겨 불렀습니다.

이런 제게 판소리는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판소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혼자 국악 음반을 듣고 책을 보며 공부했습니다. 

대학교 4학년 말, 서울 종로의 단성사를 지나가다 ‘박초월 국악학원’을 발견하고 무작정 쳐들어갔습니다. 처음 배웠던 노래가 <진도 아리랑>이었는데, 제가 노래만 부르면 학생들이 깔깔거리고 웃었습니다.

선생님이 나중에 이유를 말씀하셨는데, 제가 판소리를 소프라노로 노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벨칸토 창법'으로 판소리를 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서구예술을 동경했고, 서구예술을 공부했고, 서구예술에 심취했던 제가 판소리를 배우면서부터 인생관도 바뀌고 삶의 태도도 바뀌었습니다. 

저는 제 고향을 싫어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가난의 흔적이 너무나 많은 그 곳을 떠나 서울로 가겠다는 일념으로 진학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도 누추한 한국을 빨리 떠나 독일에 갈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다 판소리에 빠지면서부터 거꾸로 전라도 말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전라도 말이 얼마나 다양한 표현과 영롱한 문학적 향기가 있는지 다시 배우게 되었습니다. 고향의 땅에 대해서도 다시 알게 되고, 고향에 대한 애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핏줄에 대한 애정 곧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사랑도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
통이란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았던 삶의 자취이고 향기인 것입니다. 

또 저는 한 동안 판소리를 배우면서도 판소리가 과연 음악적으로 얼마나 가치가 있는 지 오랫동안 의문을 품었습니다. 저는 마리오 란자나 프렝코 코렐리나 스테파뇨 같은 오페라 가수들이 세계에서 최고로 노래 잘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태리에서 오페라단이 왔는데, TV에서 그 사람들의 리허설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주고받는 게 노래가 아니라 말이더군요. 

그때까지 저는 오페라는 목에 힘주고 벨칸토 창법으로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태리 사람들은 자기 나라 말 가지고 자연스럽게 주고받다가 오페라를 부르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오페라가 그랬듯이 판소리는 우리말을 자연스럽게 주고받다가 노래가 되었다는 것. 판소리는 우리말을 그 중에서도 전라도 말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성악이고, 오페라는 이태리의 말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성악이니 무엇이 더 아름다운지 가릴 수가 없다는 걸 그 순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걸 깨달으면서 눈이 뜨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술에 대한 눈, 우리 전통을 보는 눈, 모든 것들이 새롭게 뜨인 겁니다.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자기 세계를 찾고 싶어 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찾으려고 하는 젊은이에게 전통은 억압적이고, 벗어나고 싶고, 파괴하고 싶은 대상으로 다가 옵니다.

그 테마가 「서편제」에 들어있습니다. 먹고 살기 힘든 판소리에 환멸을 느낀 젊은 아들이 소리꾼 유봉에게 대들다가 두들겨 맞고 가출을 합니다. 유봉은 하나 남은 의붓 딸의 눈을 멀게 만들지요.

겉으로는 소리의 명창 만들려고, 한을 심어주려고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도망 못가게 하려고, 전통에다가 묶어 두려고 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송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전통의 희생자입니다. 판소리에 집착하는 아버지 때문에 눈까지 멀고 모든 인생이 망가진 비극적 여인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중요한 대사가 나옵니다. 

유봉 : 송화야, 내가 네 눈을 멀게 했다. 알고 있었냐?
송화 : 알고 있었어요.
유봉 : 나를 용서해 줄 것이냐?

이 질문에 송화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용서를 한 거지요. 이게 「서편제」의 중요한 테마입니다.

젊은이는 전통을 파괴하고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전통과 화해하는 것, 전통을 용서하는 것, 또 전통을 그리워 하는 것입니다.

「서편제」이야기는 도망갔던 의붓아들이 그의 누이를 찾아서 헤매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자기가 버렸던 전통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여행을 떠나는 남자의 회상기입니다. 



전통은 바로 고향입니다.

우리의 영혼, 우리의 정서, 우리의 사고가 돌아가서 쉴 수 있는 곳. 쉬었다가 다시 또 새로운 힘을 찾아서 영감을 찾아 새로운 삶을 꾸려나갈 수 있게 해 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전통을 우리는 그동안 너무 무시했습니다. 그대신 남의 나라 전통은 너무도 열심히 배웠습니다. 
피아노, 바이올린, 클래식 음악, 발레.....서양의 전통예술들을 배우느라 엄청난 돈과 노력을 기울입니다. 

남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문화를 풍성하게 해주기 때문에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의 것을 열심히 배우면 배울수록, 자기 것을 비하하고 무시하는 부작용도 점점 커진다는 데 있습니다. 

판소리가 유럽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게 10여년 전입니다. '아비뇽 페스티발'이나 '파리 음악 축제'와 같은 유명 축제에 판소리가 소개된 뒤로, 유럽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판소리팬이 많이 생겼습니다. 

몇 년 전 프랑스에 갔을 때, 판소리를 좋아하는 프랑스 예술가들 몇몇에게 왜 판소리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전 세계에 이런 놀라운 예술이 없다는 겁니다. 한 인간이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동안 노래를 한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라는 겁니다. 

판소리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이 된 데에는 그런 유럽 판소리 팬들의 영향력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의 보물을 무시하는 동안 오히려 외국인들이 우리 전통의 가치를 더 깊이 알기 시작한 겁니다. 


칼 융이라는 심리학자는 “한 나라의 집단적 무의식은 유전이 된다.”고 말했다. 즉, 우리 핏속에 이어져 내려 온 무의식이 바로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저에게 전통이란, 또 판소리란 ‘나를 숨쉬게 하고, 나를 활기 있게 만들어 주고, 또 창조의 열정에 불타게 하는 소중한 원천이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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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쯤 당진의 가을바다를 서성이던 저는 겨울이 되자, L의 하숙집을 떠나 지리산으로 갔습니다.

 



그때의 심정은 죽을 때 죽더라도 지리산 <상선암(上禪庵)>에서 죽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상선암은 구례읍 부근에 있는 <천은사(泉隱寺)>의 부속 암자인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독서모임인 고전독서회의 여름 수련회를 갔던 곳입니다.

폐허가 된 절간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예쁜 여학생들과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고, 구들장이 여기저기 망가진 절의 방에 누워, 깨어진 기와지붕 위로 반짝반짝 빛나던 별을 바라보며 하룻밤을 지샜던 추억이 너무도 그리워 무작정 그곳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옷가지와 책 몇 권이 든 가방을 들고 구례에서 버스 타고 천은사에서 내린 다음, 눈 쌓인 지리산의 중턱에 자리 잡은 상선암까지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기어' 올라갔습니다.

말끔하게 새 단장이 된 암자까지 숨이 턱에 차서 간신히 다다른 저는, 툇마루에 앉는 순간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상선암>의 최근 모습. 정면의 툇마루가 기절했던 곳이고, 오른쪽 뒤꼍에 제가 묵었던 골방이 있습니다.

깨어나 보니 따뜻한 방안에 이불까지 덮고 누워 있더군요. 머리맡에 두 청년이 앉아 있다가 제가 눈을 뜨자 한 청년이 급히 물그릇을 주며 “이거 꿀물이니 드시쇼!” 하는 것이었습니다. 

꿀물을 먹고 나니 또 한 청년이 “몸을 바로 누워 보쇼!”하면서 온몸 여기저기 지압을 해 주었습니다.

꿀물 준 W는 벌을 치는 청년이었고, 지압을 해준 H는 중국무술인 십팔기의 고단자였습니다. W는 벌통을 상선암 근처에 풀어 놓고 있었고, H는 무술 수련한다고 암자에 묵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암자에는 스님은 안 계시고 중년의 '여보살'이 관리하고 있었고, 김씨라 불리는 늙은 ‘불목하니’ 영감님이 나무, 청소, 불때기와 같은 잔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사정을 들은 그들은 저를 따뜻하게 거두어주었습니다. 마침 보살님의 아들이 고등학교 시험을 볼 때라 저는 가끔씩 아들 공부를 가르치며, 공짜로 몇 달 동안 맛있는 절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저는 중국 무술의 소림권, 무당권, 태극권, 팔괘장, 내공, 외공, 단전호흡, 장풍, 팔단금법 등의 현란한 세계를 알려 주는 H의 말에 푹 빠졌습니다. 

저는 그 전부터 무협소설과 무협영화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특히 김용이나 와룡생 같은 작가들이 펼쳐 주는 무림의 세계는 제게 황홀하기 그지없는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여 주었습니다.

그 중 지금도 잊지 못하는 최고의 무협영화는 「유성호접검(流星胡蝶劍)」이었습니다. 김용과 더불어 무협소설의 대표 작가인 고룡의 원작 소설을 각색해 만든 그 영화는 음모와 배신, 그리고 남녀 간의 아름다운 사랑이 정교하게 얽혀 있는 무협영화의 고전입니다.

대학 1학년 방학인지 2학년 방학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친구와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다른 무협영화가 짜장면이라면 「유성호접검」은 탕수육이다!”고 감탄하며, 중국집에서 빼갈을 실컷 마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제가 좋아하는 고룡의 작품 중에 「초류향」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풍류와 여자와 도박을 즐기는 무림고수 초류향과, 냉정하고 현실적인 희빙안, 고독하고 말이 없는 살수 일점홍 등이 중원과 사막을 종횡하며 대마두(大魔頭)와 벌이는 서사적 이야기는 저를 사정없이 매혹시켰습니다.

이렇듯 무림과 무공에 대한 사전 준비가 되어 있던 터라, 저는 말솜씨 좋은 H가 들려주는 무술과 관련된 과장된 경험과 온갖 무술가, 도사들의 이야기에 도취하였습니다.

또 그가 스승의 비밀 금고에서 훔쳐내어 몰래 베꼈다며 비밀스럽게 보여주는 <내공비급(內功秘及)>을 베끼며, 언젠가 나도 ‘장풍’을 날리는 무림의 고수가 되겠다는 허황된 꿈을 키웠습니다.

암자의 골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호흡을 하고, 향을 피우고, 밤에는 암자 마당에서 H가 가르쳐주는 소림권의 기초 동작들을 익혔습니다.

십팔기를 가르쳐 준 H와 구례읍의 사진관에서 찍은 기념 사진.

그런데 거기서 판소리와의 기이한 인연이 또 이어졌습니다. 처자도 없이 상선암에서 산지 몇 년이 된 불목하니 김씨 할아버지가 북도 잘 치고 젊었을 때 판소리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해 여름, 김제국악원에서 처음으로 판소리를 들은 뒤 자나깨나 판소리에 심취해 있던 저에게, 그 소식은 귀에 번쩍 뜨이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할아버지께 판소리 좀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저녁 먹고 자기 방으로 오라고 해서 우리 셋은 할아버지 방에 모였습니다. 할아버지 방에는 이부자리 한 채와 옷 몇 가지, 그리고 낡은 북 하나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풍년초' 담배 잎을 종이에 말며 말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구식 노래는 배워서 뭐 할라고 그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할아버지는 중머리 북 장단도 가르쳐 주고, 심청가 한대목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맑은 공기에 따뜻한 절밥을 배부르게 먹고, 벌꿀과 로얄젤리도 가끔씩 얻어먹고, 친구들과 더덕을 캔다고 산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단전호흡과 기공으로 몸보신을 하니 몸이 점점 좋아졌습니다.
 
처음 올 때는 죽을 힘을 다해 기어 올라왔던 산길을, 나중에는 천은사에서 상선암까지 단숨에 오르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산길을 오르내리면서 우리는 고래고래 판소리를 불러댔습니다.

그러던 중 구례에 단소의 명인이 살고 계시다는 소문을 들은 우리는 지체 없이 그 분을 찾아나섰습니다. 구례읍내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산길을 물어물어 걸어 간 끝에, 절골 마을에 사는 김무규 명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대단한 고대광실이었을 퇴락한 기와집에 살고 계셨던 김무규 명인은 단소와 북과 거문고의 명인이셨습니다.

그러나 지주이며 양반댁 엘리트 출신이고, 그의 부인 역시 한말의 대학자이며 일본의 침략에 항거해 자결하신 매천 황현의 손녀이실 만큼 명문가의 자제라는 지위 때문인지 직업적인 연주 생활은 안 하신 분입니다.

백경 김무규 명인(1908~1994)의 연주 모습.

다만 그의 단소는 전설적인 단소의 명인인 전추산에게 배웠기 때문에 매우 귀한 가락으로 평가 받습니다.

호리호리하고 깐깐하게 생긴 명인은 가지고 간 꿀 한통을 드리며 단소를 배우러 왔다는 산 청년들에게 퉁명스럽게 첫마디를 꺼내셨습니다.

“이 어려운걸 뭐 하러 배우려 하는가?”

그러면서도 먼 길을 걸어 온 정성이 갸륵했던지, 다음에 한번 찾아오라고 허락을 하셨습니다.

며칠 뒤에 다시 찾아가니 집 뒤에 있는 대나무 숲에서 대를 잘라 단소 세 자루를 만들어 놓으셨다가 선물로 주며, 단소 부는 법의 기초부터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제가 판소리에 관심이 있는 걸 아시고 김소희 명창이 여름이면 제자들과 함께 자기 집에 연습을 하러 오기도 한다고 하시며, 명창들과 관련된 옛날 얘기를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아쉽게도 그 분에게 몇 번 밖에 단소를 배우지 못하고, 몇 달 뒤에 복학해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연은 끊어지지 않아 나중에 어느 잡지에 그 분의 이력을 소개하는 인터뷰 기사도 쓰고, 인간문화재가 되신 뒤 「서편제」 촬영할 때 그 분을 임권택 감독에게 소개해서 절골의 퇴락한 기와집과 대숲이 멋지게 등장하고, 새하얀 한복을 입고 거문고를 치는 그 분의 모습도 영상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영화가 개봉된 지 얼마 뒤에 돌아가셨으니, 아마 「서편제」가 그 분의 마지막 연주를 담은 필름이 되었을 겁니다.

판소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 김제국악원의 여자명창과 지리산 상선암의 불목하니와 구례의 김무규 명인이 차례로 제 인생에 등장하더니 마침내 다음해 겨울에 박초월 명창과의 만남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상상도 하지 않았던 판소리와의 인연이 마치 누군가의 연출로 한 장면 한 장면 이어지듯, 제 인생의 무대에 펼쳐진 것입니다. 전 지금도 그 기이한 인연에 신기해하며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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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는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서민들뿐만 아니라 양반들까지 포함해서 폭넓은 대중들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무렵의 판소리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려주는 시 한편을 소개해 볼까요? 18세기에 살았던 시인인 신위가 판소리 공연을 보고서 쓴 시입니다.

이따금 환호하는 외마디 소리
넓은 뜰엔 구경꾼이 구름같이 몰렸네
이 밤에 부질없이 횃불 걱정 마오
반달이 구름 끝에 걸려 있으니

요즘 인기가수의 야간공연 장면 같지 않아요? 그 무렵에 이름을 날리던 명창 중에 권삼득, 송흥록, 염계달, 모흥갑, 고수관, 신만엽, 김제철, 황해천 여덟 명을 뽑아서 ‘8명창’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난다긴다 하는 8명창보다 더 대단한 우춘대 명창을 찬양하여 쓴 시가 있는데 소개해 볼까요? 신위보다 약간 후배인 송만재라는 시인이 쓴 시입니다.

장안에 이름 높은 가객 우춘대
오늘에 누가 능히 그 소리를 잇나
술자리에서 한 곡 빼면 비단이 천 필
권삼득과 모흥갑은 아직 어린애

서민들은 비단 한 필 구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술자리에서 부른 노래 한곡에 비단 천 필이란 출연료를 받았다니 대단한 슈퍼스타였나 봅니다. 이처럼 판소리의 전성기였던 그 시절의 명창들은 그야말로 탄탄한 인기가도를 누리며 고액의 출연료를 받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평양감사 부임도> 중 명창 모흥갑의 판소리 공연 장면.

수많은 명창들 중에서도 명창 중의 명창으로 꼽히는 사람이 ‘가왕(歌王)' 송흥록입니다.

‘가왕’은 요즘의 ‘가수왕’과 같은 말입니다. '판소리의 중시조', '동편제의 비조' 등으로도 추앙 받는 송흥록 명창에게는 아주 재미있는 사랑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송흥록은 1780년쯤에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비전마을에서 태어나, 스무 살 무렵에 이미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그의 노래를 들으려고 아우성이었답니다.

한번은 대구감영에서「춘향가」를 불렀는데, 모두들 그의 노래에 감동해서 감격어린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예쁘고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기로 대구에서 가장 유명한 맹렬이란 기생만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송흥록은 그 기생을 눈 여겨 보았다가 이튿날 그녀의 집에 찾아 갔습니다. 술상을 앞에 놓고 방에 앉아 있으니, 한복을 예쁘게 차려 입은 맹렬이가 들어왔습니다.

맹렬 : 무슨 일로 오셨나요?
송흥록 : 왜 어젯밤에 내 노래를 듣고 한마디 말이 없었소?
맹렬 : 할 말이 없어서요.
송흥록 : 남의 노래를 듣고 할 말이 없다니 그런 말이 어디 있소?
맹령 : 꼭 말을 해야 하나요?
송흥록 : 꼭 듣고 싶소.

송흥록이 안달을 하며 보채니까 맹렬이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맹렬 : 송선생님이 명창은 명창이지만 아직도 부족한 대목이 있어요.
송흥록 : 그게 뭐요?
맹렬 : 귀곡성이 많이 부족해요.

‘귀곡성(鬼哭聲)’은 춘향이가 옥에 갇혀 있는 어느 날 밤에, 비가 내리고 바람이 으스스 부니 온갖 귀신들이 나와서 춘향이에게 달려드는 대목에 나오는 귀신소리입니다.

송흥록 : 귀곡성 어떤 점이 부족하오?
맹령 : 그걸 제가 어찌 알아요? 어쨌든 선생님 소리는 귀신소리는 아니예요.

맹렬이는 매몰차게 말을 하고 송흥록을 떠나 보냈습니다. 송흥록은 그 길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노래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는 귀곡성을 제대로 하려고 죽을 힘을 다해 연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웬 소년이 찾아왔습니다.

소년 : 송명창님!
송흥록 : 이 밤중에 누구냐?
소년 : 어떤 높은 어르신들이 송명창님을 모셔 오랍니다.
송흥록 : 왜 나를 찾느냐?
소년 : 송명창님의 판소리를 듣고 싶으시답니다.
송흥록 : 그 분들이 계시는 곳이 어디냐?
소년 : 저를 따라 오십시요.

송흥록은 소년을 따라서 대나무 숲이 우거진 어느 기와집에 갔습니다. 집안에는 수염이 하얀 노인 세 분이 갓을 쓰고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앉아 있었습니다.

노인 : 송명창 왔는가?
송흥록 : 예.
노인 : 우리들이 심심해서 자네 노래를 듣고자 불렀네.
송흥록 : 어느 대목을 원하십니까?
노인 :「춘향가」중 ‘옥중가’를 해보게.

송흥록은 높은 어르신들 앞이라 열심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나니까 노인들이 말했습니다.

노인 : 자네 노래가 다 좋은 데 귀곡성이 틀렸네.
송흥록 : 어떤 점이 틀렸습니까?
노인 : 가르쳐 줄 테니 따라 해보게.

송흥록은 노인들이 가르치는대로 따라 불렀습니다. 밤새도록 힘들게 노래 연습을 하고 났더니, 노인들이 그만하면 됐으니 술이나 한잔 하고 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송흥록은 술을 몇 잔 얻어 마시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밝아 깨어보니 어느 무덤가에 누워 있지 않겠어요? 무덤가에서 밤새 연습하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었던 겁니다. 그는 꿈속에서 노인들에게 배웠던 노래를 기억하여 그 유명한 ‘귀곡성’을 만들었습니다.

그 뒤에 다시 대구에 가서 판소리를 했습니다. 송흥록 명창은 노래를 하면서 맹렬이의 얼굴만 바라 봤습니다. 드디어 ‘귀곡성’을 하는 대목이 되었지요.

밤은 적적 깊었는데
사람 자취 고요하고
밤새 소리는 부웃 부웃
물소리는 주루루루루루루루루
도깨비는 휫휫
바람은 우루루루루루루루루루루루
번개 천둥이 치고
궂은 비는 퍼붓는데
귀신들은 둘씩 셋씩 짝을 지어
이히이히이히이히이히

송흥록 명창은 온 힘을 다바쳐 ‘귀곡성’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어디선가 으시시한 바람이 불어와서 촛불이 한꺼번에 꺼지고, 하늘 한쪽에서 귀신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신이 들린 소리라고 소리치며 열광적으로 박수를 쳐댔습니다. 맹렬이도 넋을 잃은 사람처럼 송흥록의 입만 쳐다보고 무어라 하여야 좋을지 모르는 모양이었습니다.
 

비전마을 송흥록 생가 앞에 서있는 송흥록의 동상.

그날 밤, 맹렬이가 송흥록의 방에 찾아와 문을 두드렸습니다.

맹렬 : 송명창님, 송명창님!
송흥록 : 누구요?

송흥록은 자다 말고 일어나 방문을 열었습니다. 맹렬이가 봇짐을 들고 방 밖에 서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송흥록 : 아니, 맹렬이 아니요?
맹렬 : 선생님, 이제 진짜 명창이 되셨어요.
송흥록 : 모두가 그대 덕분이요.
맹렬 : 그동안 저를 생각하셨나요?
송흥록 : 소리 공부하는 동안 그대 생각만 했소.
맹렬 : 저도 그 동안 선생님 생각 뿐이었어요.
송흥록 : 고맙소.
맹렬 : 우리 당장 떠나요.
송흥록 : 뭐요?
맹렬 : 시간이 없어요. 어서 짐을 싸세요.

사랑에 눈이 먼 두 사람은 그날 밤으로 대구를 떠나 송흥록의 고향인 운봉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예전에는 관청에 춤도 추고 악기도 연주하고 노래도 부르는 기생이 딸려 있었는데 그들을 ‘관기’라고 불렀습니다. 관기는 마음대로 결혼할 수도 없고 허락 없이 그 곳을 떠나서도 안되는데, 관기였던 맹렬이는 죽음을 무릅쓰고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도망 친 겁니다.

보기 드물게 정열이 넘치고 용기 있는 여성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맹렬이란 이름만큼이나 성격이 불 같아 화를 잘 내고 질투심도 많아서 남편이 공연을 갔다가 돌아오는 날짜가 하루만 지나도 난리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진주에서 송흥록을 초청해서 스므 날쯤 갔다 올 예정으로 떠났는데, 여러 사고가 생겨서 이삼 일 늦게 되었답니다. 송흥록은 그 사연을 자세히 적어 사람을 시켜 편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화가 난 맹렬이는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고 봇짐을 싸가지고 집을 나갔습니다.

심부름꾼 : 송명창님!

심부름꾼이 허겁지겁 돌아와서 송명창을 불렀습니다.

송흥록 : 그래, 편지는 전했느냐?
심부름꾼 : 아이구, 말도 마십쇼.
송흥록 : 무슨 소리냐?
심부름꾼 : 제가 가니까 마침 짐을 들고 어디 가시려다가 저와 만났어요.
송흥록 : 그래서?
심부름꾼 : 송명창님 심부름으로 왔다고 하면서 늦으시는 사연을 이 편지에 적어 보냈습니다. 하니까----
송흥록 : 하니까---
심부름꾼 : '그 놈의 거짓말 편지 읽으면 뭐해?’ 하면서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으시고---
송흥록 : 뜯어보지도 않았다구?
맹렬 : ‘다시는 나를 찾지 말라고 송명창에게 전하라’고 하시고는 휭 하니 집을 나가시더라고요.
송흥록 : 아이구, 이거 큰일 났구나!

송흥록은 깜짝 놀라 모든 일을 다 제치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가보니 정말 맹렬이는 간 곳이 없고 빈집뿐이었습니다. 송흥록은 몇날며칠 맹렬이를 찾아 헤맨 끝에 진주고을을 다스리는 병사인 이경하를 모시는 수청기생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진주로 갔습니다. 송흥록이 왔다는 말을 듣고 진주병사가 송흥록을 불러 들였습니다.

진주병사 : 네가 명창이라고?
송흥록 :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줍니다.
진주병사 : 그럼 나하고 내기를 해 보겠느냐?
송흥록 : 어떤 내기를---?
진주병사 : 내 앞에서 판소리를 하는데, 나를 한 번 웃게 하고 또 한 번 울게 하면 상을 줄 것이나, 만일 그렇지 못하면 너의 목숨을 바쳐라.

그제서야 송흥록은 맹렬이 병사에게 가르쳐 준 내기인 줄 알아챘습니다.

송흥록 : 그렇게 하겠습니다.
진주병사 : 그대신 소리는 수궁가를 하여라.
송흥록 : ‘수궁가를? 아이고, 큰일 났구나.’

「수궁가」는 판소리 중에서도 울리고 웃기는 대목이 별로 없는 빡빡한 소리이니 송흥록은 속으로 걱정이 태산같았습니다.

드디어 소리판이 열렸습니다. 송흥록이 아무리 웃기려고 온갖 어리광을 다하여도 병사의 얼굴은 화가 난 듯 점점 굳어져만 갔습니다. 송흥록은 느닷없이 병사 앞으로 달려들어 “아저씨, 왜 안 웃으시오? 나를 죽이고 싶어 그러시오?”했더니 병사가 '픽!' 하고 웃었습니다.

송흥록은 그것을 보고 “우리 아저씨가 웃기는 하였다마는 또 어떻게 우는 꼴을 보나”하더니 토끼가 용궁에서 죽게 된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통곡하는 대목을 불렀습니다. 어찌나 슬프게 부르던지 모든 사람들이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병사도 슬픔을 참지 못해 돌아앉아서 슬쩍 수건을 눈에 대었습니다.

소리판을 마친 뒤 병사가 물었습니다.

진주병사 : 그래, 무슨 상을 원하느냐?
송흥록 : 맹렬이를 원하옵니다.
진주병사 : 맹렬이를?

병사가 맹렬이를 바라보니까 맹렬이가 송흥록과의 관계를 숨김없이 말했습니다. 맘씨 좋은 병사는 껄껄 웃으면서 둘이서 다시 살게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기구한 사연으로 재결합을 하였건만, 또다시 사랑싸움이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인기스타인 송흥록이 여기저기 공연을 다니느라 수시로 집을 비우는 데다가 여성들의 인기도 한 몸에 받았을테니 맹렬이가 화낼만도 하지 않았나 추측해보지만,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사랑싸움의 진상(?)은 알 길이 없습니다.

맹렬이도 한 성질하는 여성이었지만, 송흥록도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었나봅니다. 그러다보니 싸우는 일이 잦아지고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큰 싸움을 한 끝에 맹렬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소리치며 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송흥록은 바로 쫒아가서 화해를 하고 싶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말은 못하고 속에서는 더욱 더 화가 나고 슬픔이 밀려들었습니다. 맹렬이와 영영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온갖 감정이 불길처럼 끓어올라 노래가 터져 나왔습니다.

맹렬아 맹렬아
맹렬아 맹렬아
네 이년 잘 가거라
날 버리고 네가 가면
내가 너를 잊을소냐

어쩌고 하면서 슬프고, 외롭고, 사랑스럽고 하는 온갖 감정을 노래로 불렀습니다. 맹렬이는 문밖에서 듣고 있다가, 그만 봇짐을 내던지고 다시 돌아와 부등켜안고 울면서 화해했답니다.

정말 멋진 사랑 이야기지요? 그 두 분이 백년해로 했는지, 언제 어떻게 이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일제시대에 정노식이 쓴 『조선 창극사』라는 책에는 판소리 명창들에 얽힌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많이 소개되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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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뿌리깊은 나무」라는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자, 온 가족과 일가친척들까지 너무너무 기뻐했습니다.

취직 초기에는 중앙대학교 근처 흑석동에 번듯한 자취방을 얻어 착한 여동생이 오빠의 밥을 해주며 둘이서 함께 지내다가, 얼마 뒤에 부모님들까지 전주의 집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아들 하나 달랑 믿고 답십리 근처의 용답동으로 이사를 온 부모님과 함께, 온 가족의 본격적인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연극병'이 깊어지는 통에 일 년 만에 첫직장을 그만 두게 되었으니, 주변의 실망이 어떠했겠습니까?

부모님께서 속으로 걱정하시는 것 같아 저는 걱정마시라고 안심시켜 드린 후, 두번째 직장을 급히 알아봤습니다. 다행히 그 무렵에는 서울 사대 졸업생은 1순위로 교사 채용이 될 때인지라, 금새 배화여고 독어교사로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훌륭한 교사가 되겠다고 간 것이 아니라, 수업이 일찍 끝나고 방학도 있어 그 시간을 이용해 연극을 하려는 속셈으로 간 것이었으니 배화여고로서는 불량교사(?)를 채용한 셈이었습니다.

 
대망의 배화여고 첫 수업날이 왔습니다.

유서 깊고 아름다운 교정을 지나 1학년 신입생들의 첫 독일어 수업에 들어가니, 교실 안을 가득 메운 예쁜 소녀들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덥수룩한 머리에 허름한 검은 폴라티에 회색 양복을 입은 저를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눈동자들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흥분하여 참으로 엉뚱한 수업을 하고 말았습니다.

나 : 여러분, 독일어를 왜 배우느냐? 
학생들 : (묵묵부답)
나 : 우리 말을 잘 하려고 배우는 것이다.
학생들 : (무슨 소리?)
나 : 우리 말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학생들 : (....국어선생인가?)
나 : 우리 음악을 잘 알아야 한다.
학생들 : (...이번엔 음악선생?)
나 : 우리 음악을 잘 알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학생들 : (묵묵부답)
나 : 판소리를 알아야 한다.
학생들 : (...뭔소리?)
나 : 여러분, 춘향가 아느냐?
학생들 : (...웬 고리타분?)
나 : 판소리 춘향가 중에 <사랑가>라고 있는데 아느냐?
학생들 : (...사랑...뭐?)
나 : 내가 그 한 대목을 불러 보겠다.
학생들 : 와....(박수! 어쨌든 공부 안하잖아...)
나 :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어허 둥둥 내사랑이지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사랑
학생들 : 와....(더 큰 함성! 괴짜 선생 왔다!)
나 : 자, 그러면 독일어를 해보겠다. 데어 데스 뎀 덴....
학생들 : 싫어욧! 판소리 더 들려 주세요!

그 이후로 판소리 부르는 독어 선생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저는 골치 아픈 독일어 문법은 뒤로 하고, 슈베르트의 <보리수>나, 하이네의 시에 곡을 붙인 <로렐라이>의 노래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황태자의 첫사랑>이야기나 노래를 들려주기도 하고, 불러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판소리도 간간이 들려줬지요. 

음악이나 문학이나 예술에 관한 이야기들은 저도 좋아하고 소녀들도 좋아하는 이야기라서 문법 공부하다가 조금만 지루하면 이야기해달라고 졸라대는 소녀들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여러 이야기들로 수업 시간을 채웠습니다. 

더구나 29세의 풋풋한(?) 총각선생이었으니, 독일어 시간은 소녀들의 들뜬 수근거림과, 묘한 눈짓과, 웃음소리와, 뭔가 모르는 긴장과 열기로 가득 찼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독어과 학생들이 하도 독일어 선생 얘길 하니까 불어과 학생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러나 싶어서 몰래 독일어 수업을 듣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는 사람 별로 없는 오래 전 일이라 지나치게 자화자찬한다고 비아냥거릴 분들도 계시겠지요? 하지만 누구나 지난 일은 조금씨 미화시키고 자화자찬도 섞이는 것 아니겠어요? 아무래도 소녀들과의 사연을 얘기하다보니 저도 약간 푼수(?)를 떨게 되네요.

그런데 아뿔싸!
어느날 인자한 여성 교육자이신 안효식 교장 선생님깨서 저를 부르시더니, 결코 해서는 안될 말씀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교장선생님 : 김선생님, 대학 때 연극반 하셨다면서요?
나 : 아니,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교장 : 제가 알아 보니까 사대에서 유명하셨던데요?
나 : 아이구, 뭐..그저...
교장 : 저희 학교가 이번에 개교 80주년이 되었거든요.
나 : 저더러 출연을 하라는...
교장 : 그게 아니고 연극반을 만들어서 기념 공연을 올려볼까 하는데 지도를 맡아주시겠어요?
나 : 아, 예! 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다니....교장 선생님은 참으로 위험한(?) 선택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신이 나서 그 무렵에 화제가 됐던 톰 존스 원작의 뮤지컬 「철부지들」을 공연작으로 선정하고, 연극반 모집 공고를 냈습니다.

그런데 놀라워라!
200여명이 지망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선생님들과의 숙의 끝에 1학년과 3학년을 제외해보니 100명쯤이 남았습니다. 국어, 음악, 무용 선생님들을 심사위원으로 삼아 1차, 2차, 3차에 거친 오디션 끝에 드디어 30여명의 배우와 스탭을 선발했습니다.


 
「철부지들」은 이웃에 살며 서로 사랑하는 소년 소녀가 오해로 인해 사랑에 금이 가고, 소년은 세상을 방랑한 끝에 다시 사랑을 되찾는다는 내용입니다.

소극장용 뮤지컬로 대히트를 한 뒤 수십 년 간 브로드웨이의 인기 뮤지컬로 이름을 날렸고, 주제가인 "Try to Remember" 는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사랑 받던 노래입니다.



그 뒤로 저는 독일어 교사인지 연극 교사인지 모를 정도로 연극반 학생들과 함께 공연을 올리는데 전심전력을 기울였습니다. 방학 때도 학교에 나와 소녀들과 연극 연습을 하는 동안 여러 사건도 많았고, 우여곡절도 많았습니다.



가을이 되어 '전국고등학교 연극경연대회'에 나가 우수상을 받은 뒤, 드디어 80주년 기념일에 학교 강당에서 막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공연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 꽃다발, 친구들의 감격 어린 찬사, 교장 선생님의 눈물 어린 포옹과 여러 선생님들의 칭찬....등이 쏟아졌습니다. 연극반 소녀들은 팔짝팔짝 뛰고 눈물을 흘리며 좋아했습니다. 
 

추억의 연극반 소녀들과 함께 교정에서 찍은 유일한 사진.

그런데 저는 감격과 눈물과 꽃다발에 묻힌 무대를 바라보며, 교사를 그만 둘 결심을 굳혀가고 있었습니다. 교사로서가 아니라 배우로서 무대 위에 서고 싶은 욕망을 진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욕망은 교사극단「상황」과의 인연으로 이어지고, 두번 째 직장이었던 배화여고와의 인연도 2년 뒤에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리워라!
그때 추억의 소녀들은 어느덧 중년의 엄마들이 되어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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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3학년 여름, 저는 건강이 나빠져서 1년 간 학교를 휴학하고 집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고등학교 시절의 문학친구이고 전북대 영문과에 다니는 친구 P와 함께 그의 김제 집에 놀러갔습니다. 김제가 지금은 시로 승격되었지만, 그때는 전주에서 버스로 40분쯤 걸리는 자그마한 읍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김제국악원에서 판소리를 배우고 있으니 함께 가보자고 하는 게 아닙니까? 저는 그때까지 판소리를 말로만 들었을 뿐, 직접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 집은 아버님과 누이들 모두 서양 클래식과 피아노의 애호가여서 국악은 들어 볼 기회도 없었을 뿐더러, 중-고등학교 시절의 음악선생님들은 서양음악의 숭배자들이라 국악은 아예 음악으로 치지도 않았던 분들입니다. 저 또한 오페라 아리아나 이태리 민요나 독일 가곡의 열렬한 팬이었기 때문에 국악이나 판소리에 대해서는 전혀 사전 지식이 없었습니다.   

김제 국악원은 활 쏘는 ‘사정(射亭)’의 한쪽 구석에 있는 한옥 별관을 빌려 쓰고 있었습니다. 매미소리 요란한 활터에 들어서니, 어디선가 북 치는 소리와 어린 소녀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노랫소리를 따라가니 고목나무 옆에 아담하게 세워진 정자 안에 하얀 모시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중년 부인이 국민학교 학생인 듯한 어린 소녀 서너 명을 앞에 앉혀 놓고 판소리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소년의 판소리 배우는 풍경.

중년 부인은 갸름한 얼굴에, 오똑한 코와, 선이 분명한 입술이 젊은 시절에는 대단한 미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얼굴색이 거무스레하고 표정이 차갑고 침울한 것이, 병을 앓고 있거나 아니면 마음속에 고통을 느끼고 있는 사람처럼 여겨졌습니다. 소녀들은 「심청가」 중에서 심봉사가 부인을 잃고 슬피 우는 대목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여보 마누라

날 버리고 어디 가오
마누라는 나를 잊고
북망산천 들어 가
송죽으로 울을 삼고
두견이 벗이 되어
나를 잊고 누웠으니
내 신세를 어이 하리


친구와 나는 정자 한구석에 걸터앉아 열심히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중년 부인이 북채로 북머리를 딱딱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소녀들의 노랫소리가 뚝 그치고 중년 부인의 입에서 느닷없이 욕설이 튀어나왔습니다.

“야, 이년들아, 그것도 소리라고 부르고 자빠졌냐? 니 년들 소리 듣고 우는 놈이 있으면 개아들 놈이다. 가서 더 연습하고 와!”

저는 깜짝 놀라 그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설마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부인의 입에서 그런 상스런 욕이 튀어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터라 나는 어리벙벙하고 당황해 있었습니다.

소녀들이 정자 아래로 내려가자 친구가 정자 안으로 올라가더니 북 앞에 앉았습니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 짜증스러운 표정이 스치고, 소녀들은 정자 아래에서 재미난 표정으로 정자 안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소녀들 역시 혀를 낼름 내밀고나서 금세 히히덕거리는 걸로 보아 부인의 욕설에 놀란 사람은 저 혼자뿐인 듯싶었습니다. 친구는 「춘향가」 중에서 월매와 이몽룡이 상봉하는 대목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거 뉘가 날 찾나
거 뉘가 날 찾아
날 찾을 이가 없건마는
거 뉘가 날 찾아
남원 사십팔 면 중에
나의 소문을 못 들었나
내 딸 어린 춘향이를
옥중에다가 넣어 두고
명재경각(命在頃刻)이 되었는데
늙은 나를 누가 찾어


친구는 문외한인 제가 듣기에도 엉망진창으로 불러 댔습니다. 정자 아래에 있던 소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깔깔거리고 웃고, 부인은 얼굴을 더 찡그리며 북채로 북머리를 딱딱 쳤습니다.

저는 또 욕설이 튀어나오나 하고 기다렸지만 욕은 나오지 않고, 부인은 옆에 놓인 <명랑>이라고 쓰인 약상자에서 약봉지를 꺼내더니 가루를 입에 탈탈 털어 넣고 물을 마셨습니다. 그때는 아스피린 대신 명랑이나 뇌신 같은 약이 두통약으로 널리 쓰이고 있던 때라, 저는 소리 가르치느라 스트레스가 쌓여 두통에 시달리는 것으로 짐작했습니다.

친구는 부인이 가르쳐 준 대목을 자꾸 틀려서 “남원 사십팔 면 중에”라는 대목을 사십팔 번쯤 반복했습니다. 부인의 표정은 더욱 찡그려지고, 친구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한 삼십 분쯤 친구와 씨름하던 부인은 참다못해 “오늘 수업은 이것으로 마칩시다!” 선언하고는, 다시 명랑 한 봉지를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습니다.

저는 그녀가 두통약으로 뇌신이 아니라 명랑을 선택한 것이 참으로 현명하게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음치인 친구의 노래를 듣는 동안, 저도 가슴이 답답해지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와서 '명랑하게' 기분을 전환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늙은 할아버지 한 분이 주전자에 물을 가지고 오다가 친구의 모습을 보고는 허허거리고 웃었습니다. 친구는 부인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정자를 내려왔습니다. 헤어질 때 부인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스치는 듯 했으나 이내 사라지고, 검은 얼굴에 차가운 표정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친구와 술집에 앉아서 그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짐작했던 대로 젊었을 때 창극계에서 미모와 소리로 한몫을 했던 명창인데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아편 중독에 걸려 활동을 중단하고, 시골의 소리 선생님으로 눌러 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무렵 많은 국악인들이 아편 중독으로 병을 앓거나 패가망신한 경우가 많은데, 그녀는 다행히 중단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편 중독의 후유증이 남아 있어서 카페인 성분이 있는 명랑이나 뇌신을 아편 대신에 먹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다음 날에도 친구를 따라 국악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국악원의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소녀들은 고목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고, 부인은 한옥의 방에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친구가 할아버지에게 사연을 물어 보았습니다.

“오늘 아침 저 꼬마애들 소리를 가르치는디, 활 쏘던 활량이 와서 아침부터 재수없게 아이고 아이고 우는소리를 헌다고 지랄을 허고 갔어. 저 사람 성질에 당장 대들고 싸웠겄지만 우리가 이 활터한티 신세를 지는 형편이라, 말 한 마디 못 허고 속병이 나서 드러누워 있다네.”

할아버지는 한숨을 쉬어 가며 설명했습니다. 친구와 저는 국악원을 나와 막걸리집 탁자에 앉았습니다. 그날 우리는 정신을 잃도록 술을 마시고, 김제읍의 밤거리를 비틀거리며 “남원 사십팔 면 중에”를 사백팔십 번쯤 불렀습니다.

다음날 오후 늦게 국악원을 찾아가니, 부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얀 한복을 깨끗하게 차려 입고 소녀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를 쓴 중년의 사내가 정자에 오더니, 이웃 읍인 정읍 국악원에 새로 부임한 국악 강사라고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부인은 그를 올라오게 한 뒤, 참으로 우아하게 절을 했습니다.

약간 얼굴을 붉히며 수줍고 교태스러운 몸짓에 살짝 미소를 짓는 부인의 모습에서, 저는 애들에게 상욕을 하던 흔적을 도저히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중년의 사내 : 부인의 명성을 듣고 오래 전부터 꼭 한 번 소리를 한 수 배우고 싶었습니다.
부인 :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보잘것없는 실력이에요. 오히려 선생님께 한 수 배우고 싶습니다.
중년의  사내 : 겸손의 말씀을 다하십니다. 저는 소리라고 어디 내놓을 수도 없는 실력인데, 국악원에서 잘 봐줘서 오게 된 겁니다. 제 귀를 좀 틔어 주십시오.
부인 : 오히려 귀를 어지럽힐까 걱정됩니다. 그럼 서로 한 수씩 주고받기로 하지요. 손님으로 오셨으니 제가 먼저 대접을 하지요.

이렇듯 정중하고 은근한 말들이 오고 가더니 중년의 사내가 장구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곧게 앉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맑고 고우면서도 어딘가 슬픈 가락이 부인의 입에서 흘러 나왔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노래는 시조와 같은 짧은 노랫말을 길고 우아한 가락에 얹어서 부르는 ‘가곡(歌曲)’이었는데, 실력 있는 소리꾼이 아니면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어렵고 격조 높은 노래였습니다.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정자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는 부인의 표정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그녀의 차가우면서도 매혹적인 얼굴과, 그 얼굴에 서린 삶의 그늘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습니다. 저와 함께 친구도, 소녀들도, 할아버지도 모두들 숨을 죽이고 듣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노래를 끝내자 중년의 사내는 격찬을 한 다음, 가부좌를 틀고 곧게 앉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부인이 장구를 잡았습니다. 저는 또다시 장구를 치는 부인의 모습을 취한 듯이 바라보았습니다. 중년의 사내는 노래를 끝낸 뒤에 부인과 정중한 인사를 나누고서 돌아갔습니다. 저는 사내를 배웅하는 부인의 눈이 아쉬움으로 흐려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했지만, 그 여성 명창의 모습은 제 뇌리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다음날, 저는 전주시내의 레코드 가게를 돌아다니며 판소리가 실린 레코드를 여러 장 샀습니다. 그리고 몇 달 동안 방에 틀어박혀 판소리를 수백 번 수천 번 들었습니다.

그 뒤 이듬해 여름 방학 때, 저는 벼르고 별러서 김제 친구 집에 다시 갔습니다. 국악원에 가자는 저의 말에 친구는 가봐야 부인은 없다고 했습니다. 간암으로 사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허탈한 기분으로 친구와 함께 국악원에 가보았습니다.

정자에서는 여전히 북소리와 소녀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낯선 남자 선생님이 북 앞에 앉아서 소녀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또다시 친구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거리를 비틀거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판소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그 시절, 그 여류 명창의 차갑고 그늘진 검은 얼굴과, 맑고 고우면서도 구슬픈 목소리,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듯한 눈, 그리고 상스러운 욕설, 쓸쓸하고 적막한 정자의 분위기, 노을, 고목나무, 소녀들의 웃음소리, 이 모든 추억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제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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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텔레비젼 프로그램 중에서 다큐멘터리를 가장 좋아합니다.

남극-북극의 오지 탐험이나, 정글 원주민들의 생활이나, 역사 유적지 탐방이나, 수중 탐사 같은 프로그램들은 아무리 자주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내용 자체의 재미도 재미지만 프로그램을 만들기까지 제작진이 겪었을 엄청난 땀과 열정이 저를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야생 동물 특히 맹수를 다룬 프로그램을 가장 좋아하는데 맹수들의 움직임이 언제나 저를 감탄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군더더기 없는 유연한 몸놀림, 먹이를 노리는 강렬한 눈빛, 고도의 집중력을 무기로 삼아 종족 보존과 생존을 위해 처절한 투쟁을 하는 맹수의 삶은
저를 숨막히게 합니다.



저는 또 중국 무협 영화나 서부극이나 특수부대원의 활약을 그린 소설이나 영화도 좋아하는데 그 작품의 주인공들은 어딘지 맹수를 닮아 있습니다.

고독, 집중력, 치열한 자기 수련, 적과의 목숨을 건 싸움, 난관을 헤쳐 나가는 강인한 의지, 이런 개성을 가진 인물은 우리를 일상으로부터 끌어올리는 매력이
있습니다.


제가 판소리에 매혹 당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무살 무렵 어느 판소리 명창의 <춘향가>를 세 시간 듣는 동안 저는 인간의 성악적 한계에 도전하는 듯한 명창의 피끓는 소리에 압도당했습니다.



그 뒤 오랫동안의 무대 생활을 통해 저는 관객들은 무대 위의 예술가에게 뭔가 특별한 에너지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을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어 주는 무엇, 초인적인 에너지를 발휘하는 사람에 대한 경외심이 관객을 집으로부터 극장으로 또는 영화관으로 끌어들이는 힘입니다.

그 힘에 대한 갈증이 수많은 예술지망생을 만들어 내고 예술가들을 괴롭힙니다. 누구나 이 계통에 처음 뛰어 들었을 때는 자신의 온 몸을 던져서 훈련을 하고 목숨을 건 자세로 준비를 합니다.

그러는 동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육체와 정신의 에너지가 축적되고, 그 에너지가 눈빛이나 몸짓에 배어 나게 됩니다. 비록 서툴지라도 온 몸을 다 바쳐서 자신의 역할을 하는 예술가에게서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기(氣)가 방출됩니다.



그 기를 갈고 다듬는 데는 오랜 인고의 세월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가 어느정도 성숙한 뒤에 예술가에게 찾아오는 것은 기의 소진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고, 잡다한 일상이 기의 집중을 방해합니다.

이때 그의 예술은 더 이상 빛을 발하고 못하고 관객에게 외면당하는 위기가 찾아옵니다. 많은 무대 예술가들이 경륜이 쌓일수록 무대에 서는 일이 무서워진다는 말을 하는데 바로 잃어 가는 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맹수들에게도 기의 쇠퇴는 찾아오게 마련이지만 그들은 최후까지 치열하게 싸우다가 고독한 최후를 맞습니다. 그 모습은 감동적이고 아름답습니다.



저도 마지막까지 기의 상실과 싸우면서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하고 영혼을 도취시켜 주는 “맹수처럼 아름다운 예술가”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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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저에게 두툼한 서류 봉투와 함께 어떤 엄마의 편지가 배달되어 왔습니다.

"저는 자폐증(발달장애) 장애를 안고 있는 고등학교 3학년 최준의 엄마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엄마의 사연과 최준의 활동을 담은 스크랩 북을 보고 저는 놀라움과 감동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조승우군이 주연을 한 영화  <말아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자폐
증을 가진 청년이 마라톤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자신감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그 영화는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적시고 감동을 선사했지요.


최준군은 바로 '판소리의 말아톤'이란 별명을 가진 소년입니다. 


최준(18세).
 대화능력은 대여섯 살 수준. 자폐성 장애 2급, 중증. 낯선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고, 대화하는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못함. 초등학교 4학년까지 기저귀를 차고 지냈슴.



그러한 준이를 변화시킨 것은 엄마의 피나는 노력입니다. 3살 무렵, 아들이 자폐아라는 판정을 받은 이후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거의 24시간 붙어서 산 엄마는 뼈를 깎는 고통과 노력 끝에 지금의 준이를 있게 했습니다.

이런 준이가 엄마와 아빠만큼 좋아하고, 웬만한 또래 아이들보다 확실히 잘하는 게 있습니다. 음악. 특히 '피아노'와 '판소리'입니다.
 
어렸을 때 준이는  소리에 민감해서 그릇이나 물건 두드리는 소리를 유심히 듣곤 했답니다. 상점에 가면 상품이나 진열대를 일일이 두드려 소리의 높낮이를 확인해보곤 했답니다. 기계소리나 변기의 물 내리는 소리를 싫어 해 지금도 변기 물을 내리고는 바로 도망친다고 합니다. 장난감 태엽 돌아가는 소리는 귀를 막고 몸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싫어했답니다. 그대신 프로펠러 소리나 음악소리는 너무너무 좋아했답니다.

준이의 부모님은 이런 준이를 보고 초등학교 1학년 때 피아노를 배우게 했답니다. 하지만 피아노 학원에서는 한 음만 계속쳐대서 건반을 망가뜨리기도 하는 준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1년도 안돼 포기했답니다.

그러나 음악적 재능은 쑥쑥 자라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우연히 들은 <캐논변주곡>의 멜로디를 그대로 피아노에 옮길 만큼 절대음감을 보여 엄마를 놀라게 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사물놀이를 가르치려고 국악학원을 찾았는데, 마침 지도하던 대학생 교사의 전공이 판소리여서 자연스럽게 판소리를 배우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준이는 아이들의 음정과 박자가 맞지 않을 때마다 "틀렸어, 아니지!"라고 웅얼거리며 판소리의 세계에 빠져 들었답니다.

5분도 제대로 앉아 있지 못하고 불안하게 돌아다니던 아이가 1시간이 넘게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 연습을 하는 것을 본 준이 엄마는 "이거다!" 싶었답니다.
 


그 뒤로 준이의 음악적 재능은 무럭무럭 자라 중학교 때는 <전국 청소년 국악 경연대회>에서 비장애 학생들과 겨뤄 판소리 부문에서 우수상을 탔고,

2002년 4월에는
<흥보가>를 완창 하고,

2006년 4월에는
<춘향가>를 완창하고,

2007년에는
<동랑청소년 예술제>의 판소리 고등부 부문에서 비장애 학생들과 겨뤄 2등상을 탔고,

2008년 3월에는
<음, 소리에 빠지다>라는 공연에서 판소리와 함께 피아노 실력을 선 보였고, 

2009년 2월에는
<흥보가>를 완창했습니다.




준이에게는 판소리가 즐거운 놀이이고, 자신을 치유하는 치료법이고,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 대상입니다. 

공연 전에 격려하러 찾아 온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 배형진 군. 왼쪽부터 배군 어머니 박미경씨, 최준군, 배형진군, 최군 어머니 모현선씨.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이란 자폐나 정신지체 같은 뇌기능 손상 장애를 갖고 있으면서, 수학이나 암기나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특정 영역에서 천재성을 보이는 경우를 말합니다.

영화 <레인맨>의 실제 모델이었던 미국인 킴픽 등이 그런 사람입니다. 

제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최준군을 서번트라고 할 수 있는 지 어떤 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재능을 잘 살려주면 전혀 새로운 인생이 전개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음악을 듣거나 소리 연습을 할 때면 "너무 아름다워요!"하고 소리친다는 준이.

삼겹살과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고, 헬리콥터와 비행기의 날개와 지하철을 좋아해 컴퓨터에 날개 있는 모든 것들과 전 세계 지하철을 다운 받아 놓았다는 준이.

기쁘거나 슬플 땐 아무 음악에나 맞춰 춤 추는 걸 좋아하고, 예쁜 스포츠댄스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사춘기 소년 준이.

밤늦도록 피아노와 판소리 연습을 하느라 힘들어도 요령 피우는 방법조차 모르는 연습 벌레 준이. 

말 대신 소리로 세상과 소통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준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은 기적을 선보이는 아름다운 청년 준이. 


지금 준이는 대학입시라는 또다른 도전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두 손 활짝 펴고 소리로 세상을 여는 준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때까지 준이의 '아름다운 도전'이 계속되길 바랍니다.

"판소리의 말아톤 최준! 잘한다! 얼씨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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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브리튼스 갓 탤런트(Britain's got Talent)>란 영국의 방송프로그램을 알게 된 것은 폴 포츠 때문이었다. 

당시 어느 일간지에서 그에 관한 기사를 보자마자 구글로 검색해 들어 가 폴 포츠에 관한 동영상을 거의 섭렵하다시피 했다.

나는 판소리를 알기 전엔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나 "별은 빛나건만"이나 "축배의 노래" 같은 오페라 아리아에 심취했고, 스테파뇨나 베냐미노 질리나 호세 카레라스나 마리오 란자 같은 테너들의 열광적 팬이기도 했다. 

판소리를 배우는 동안에는 우리 명창들의 노래에 열광했지만, 사춘기 때 좋아했던 음악에 대한 향수 때문에 지금도 오페라 아리아를 들으면 예사롭지 않은 감정의 파도에 휩싸인다. 

그런 내게 핸드폰 판매원이고 지지리도 못 생기고 초라해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투란도트>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라는 노래 한 곡으로 세계적 스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눈에 번쩍 띄였고, 그의 청아한 목소리와 진실한 감정을 담은 노래는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슬프도록 긴장한 폴 포츠의 모습


그 뒤로 나는 틈 나는 대로 구글에 들어 가 그 프로그램과 관련된 동영상들을 보곤 했다. 과연 그 안에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흥미진진한 삶의 이야기가 있었다. 

최근에는 제2의 폴 포츠라고 불리는 수잔 보일 나타나 화제를 끌었다. 47세가 되도록 키스 한 번 못해 본 노처녀, 덥수룩한 볶은머리에 뚱뚱하고 못 생겼지만 유머스럽고 당당하기도 한 그녀가 뮤지컬 <레 미제라블> 중에서 "난 꿈을 꾸었네(I dreamed a Dream)"를 불러 준결승에 진출한 후 세계적 스타가 되었다.    

UNEMPLOYED (실업자, 실제로는 독신녀), 47. 소개 자막에서 영국인의 유머가 돋보인다. 


그녀의 뒤를 이어 마이클 잭슨의 "널 사랑하는 사람(Who's loving you)"을 부른 12세 소년 샤힌 자파골리, 낮에는 트럭운전사를 하고 밤에는 피자 배달을 한다며 뮤지컬 <레 미제라블> 중 장발잔의 아리아 "그를 집으로 돌아오게 해주세요(Bring him Home)" 를 부른 중년의 사내 제이미 퓨, 발레리나를 꿈꾸며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 중 "난 밤새 춤 출 수 있었어(I could have danced hole Night)"을 부른 10세의 소녀 홀리 스틸 등이 매주 심사를 통과할 때마다 세계적 화제를 터뜨리며 결승을 향한 불꽃 튀는 경쟁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길드홀 뮤직 앤 드라마 스쿨의 졸업생인 한국인 전자 바이올리니스트 손수경(Sue Son)양이 피아노를 치는 친구와 함께 출전했다가 예선에서 탈락한 뒤 혼자서 출전해보라는 심사위원의 제안에 <사계> 중 "폭풍(Storm)"으로 준결승에 진출해 예비스타로 주목을 받고 있다.

게다가 손수경은 가장 절친했던 친구가 자기를 버리고 혼자 출전한 데 마음이 상해 절교를 선언한 일로 '우정이냐? 스타의 길이냐?'라는 논란에 휩싸여 있어 한국 언론에 흥미로운 기사를 제공하고 있다.

친구와의 연주 후 혼자 출전할 수 있느냐는 심사위원의 질문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손수경 양.


그 프로그램의 목적은 영국의 방방곡곡에 숨어 있는 재능 있는 인재들을 발굴해서 세계적 스타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최종 결승에서 우승한 사람은 영국 여왕 앞에서 노래할 수 있는 기회와, 우리 돈 약 2억원 정도인 10만 파운드의 상금이 주어지고, 음반도 즉시 만들어진다.
 
그야말로 프로가 되기를 꿈꾸는 아마추어들에게는 황홀한 꿈의 무대다. 초라하고 못생긴 오리가 한순간에 아름다운 백조로 변신하는 신화의 무대다. 

그 무대를 위한 프로그램 기획자와 연출가의 전략은 대단히 치밀하다. 수천 명의 지원자 중에서 재능이 돋보이는 사람들을 선별해서 그들의 오디션 장면과, 출연자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진행자들과의 인터뷰 장면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그들이 오리새끼일 적의 모습을 화면에 미리 담아 놓는다. 

그 뒤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 무대와 같은 분위기가 나는 극장의 무대에 나온 참가자는-혹은 참가자들은- 객석의 관객들과 맨 앞 줄의 심사위원들을 바라보며 스스로 3분 정도의 무대를 끌어가야 한다. 

재능이 보이지 않거나 곡목 선정이 잘 못 됐거나 긴장해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탈락이 되고, 3명의 심사위원 전원 일치 "YES"를 받은 사람만이 준결승에 진출하고, 거기서 살아 남은 사람들이 연말의 최종 결승에서 승부를 가린다. 

그야말로 '재능의 진검 승부'가 펼쳐지는 현장이다. 게다가 객석을 꽉 채운 관객들은 출연자의 재능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낸다.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는 야유와 비웃음을 사정없이 보내고, 재능을 보이는 사람에게는 노래 한 소절 한 소절에 대해 아낌없는 박수갈채와 눈물로 성원을 보낸다.

예전 우리 소리판에서는 명창들의 노래에 대해 관객들이 '추임새'로 성원했다. "잘한다!", "좋다!", "얼씨구!"하고 소리치면 명창들은 더 신을 내서 소리를 하고, 소리가 맘에 안들면 "집어쳐라!" "그것도 소리냐?"하고 인정사정없이 소리쳤다. 

그런 사람들을 '귀명창'이라고 불렀는데 요즘 한국에서는 찾아 보기 힘들어진 귀명창들이 대거 영국으로 이주한 모양이다. 그 프로그램의 관객들은 폴 포츠나 수잔 보일이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환호와 갈채와 기립박수로 그들을 스타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폴 포츠의 노래에 열광하는 영국의 귀명창들.


게다가 스타를 키워내는 뛰어난 감각으로 세계적 음반기획자로 이름을 날리는 사이먼 코웰과 함께 심사를 보는 피어스 모건과 아만다, 이들의 심사방식도 매우 독특하다.

'다른 일을 찾아 봐라', '그런 실력으로 어떻게 나왔나?'와 같은 가차없는 독설로 출연자의 기를 팍팍 죽이기도 하고 눈물을 쑥 빠뜨리게 하기도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당신은 스타가 될 것이다', '재능이 놀랍다', '소름끼친다'는 등 최고의 찬사도 아끼지 않는다.   

   출연자들에게 저승사자가 되기도 하고 수호 천사가 되기도 하는
   심사위원들.


그들의 심사태도나 심사평은 조금 감상적이고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시청자들의 흥미를 끄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그들의 심사결과에 대해서도 특별한 잡음이 없는 걸 보면 나름대로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심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이 든다.
 
심사만 끝나면 욕설과 비방과 돈봉투에 대한 투서가 끊이지 않는 우리나라 여러 예술 경연대회와 비교되는 부러운 면이다. 게다가 준결승부터는 프로들의 무대 뺨치는 멋 있는 무대 연출로 시선을 끌고, 전국민 참여형 심사로 바뀌니 누군들 그 대회를 주목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때로 그 프로그램의 어두운 면이 논란이 되기도 한다. 제이미 퓨는 무대공포증 때문에 한번도 무대에 서 본 적이 없었다는 거짓말이 들통 나 비난을 받고 있고, 폴 포츠는 노래 실력에 비해 과대 포장된 것 아니냐는 클래식계의 비판도 있다. 또한 그 프로그램에서 발굴된 스타들이 반짝 스타로서 방송 산업과 음반 산업의 노리개 역할을 하다가 슬그머니 사라져버리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도 있다.

그러나 그런 어둠을 넘어서서 그 프로그램은 계속 세계의 주목을 받는 빛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거기에는 단순한 재능의 발굴만이 아닌 감동적인 삶의 이야기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어렵고 소외감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한 평범한 인간이 꿈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아 인생역전을 이루는 스토리는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인 것이다. 그 드라마는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다. 

우리에게도 그런 포맷의 프로그램으로 <스타킹(STARKING)>이 있다. 나도 스타킹을 즐겨보는 팬이다. 거기에도 눈물이 있고 삶의 애환이 있고 꿈이 있고 고난을 넘어 선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은 하나의 방송 프로그램으로서의 기능만을 한다. 거기서 배출된 스타들을 그야말로 '킹'으로 만들어 낼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 

참가자들은 예비 스타로서가 아니라 시청자들을 즐겁게 하는 출연진으로서의 역할에 더 방점이 찍혀 있다. 그들의 재능을 최대한 돋보이게 할 무대도 배경도 진행도 매우 허술하다. 그야말로 코미디 쇼의 어릿광대를 만들어내는 기능에 충실한 프로그램이다.

단적인 예로 폴 포츠와 최종 결승에서 2위로 아쉽게 졌지만 여러 개의 음반을 만들고 세계 무대를 돌아다니며 스타가 된 소녀 가수 코니 탤벗이 <스타킹>에 출연하여 맹인 소녀 피아니스트 강예은 양과 협연을 하며 "무지개 넘어(Over the Rainbow)"를 부르던 장면은 너무도 아쉬웠다.

그 소녀가 영국이나 홍콩이나 일본에 출연했을 때는 그 소녀의 음악성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연출이 되었는데 비해 <스타킹>에서는 마치 진기명기 쇼를 보는듯한 연출과 진행자들의 반응으로 인해 그 음악의 감동이 반감되어 버렸다.
 


어린 소녀들의 재능이 어른들을 위한 진기명기 쇼가 된 느낌의 아쉬운 무대.


<스타킹>이 진정한 스타의 산실이 되기 위해서는 참가자들의 재능을 최대한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세심하고 치밀한 연출이 있어야 한다.

MC나 보조 출연 연예인들이 주인공이 아닌, 진정으로 순수한 재능을 지닌 못난 오리들을 아름답고 화려한 백조로 탈바꿈 시켜주는 정성 어린 준비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과 재능에 대한 깊은 전문성과 애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단순히 시청율을 올리기 위한 과장과 웃음이 아니라 진정으로 진흙속의 진주를 발견해서 보석으로 만들려는 비전이 있어야 한다.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서의 품격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나라에도 전국 방방곡곡에 '숨은 인재(Talent)'들이 수없이 많다. 예로부터 '가무악' 곧 노래하고 춤 추고 악기 연주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인 우리 민족이다. 얼마든지 세계적 스타가 될 수 있는 풍부한 인적 자원을 지닌 나라다. 다만 스타를 만들어내는 '기획력'과 '전략'이 부족할 뿐이다.

미국의 ABC 방송이 그 프로그램의 성공을 보고서 "영국인들은 왜 이렇게 재능이 많은 거야?"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한다. 미국인만이 아니라 영국인이 아닌 대부분의 지구촌 사람들은 찬탄과 부러움과 시샘이 섞인 눈으로 <영국인은 재능이 있다(Britain's got Talent)>를 볼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어 "왜 한국인들은 그렇게 재능이 많은 거야?"라는 찬탄과 부러움과 시샘 좀 받아 봤으면 여한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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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명창들에게는 '득음'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 전설 같은 일화들이 많이 전해 온다.  득음이란 '소리를 얻는 것' 곧 판소리가 필요로 하는 최고의 성악적 경지에 다다른다는 말이다. 

테너나 바리톤이나 베이스와 같이 음역에 맞추어 역할이 정해지는 오페라와 달리 판소리는 소리꾼 혼자서 최고의 고음에서부터 최저의 저음까지를 소화해야 한다.

또 <춘향가>나 <심청가> 같은 판소리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완창하기 위해서는 서너 시간에서 길게는 아홉 시간까지의 긴 시간 동안 성대를 쓰기 때문에 상상할 수 없을만큼 고된 수련을 필요로 한다. 

안숙선 명창의 열창하는 모습


예전에 판소리 공부를 하던 소리꾼들은 기생들에게 무용과 음악을 가르치던 사설 교육 기관인 권번이나, 명창 선생님이 사는 집을 오가며 기초 공부를 했다.

그 다음에 '독공'이라는 개인 훈련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주로 마을에서 떨어진 산속의 움막이나 절 같은 곳에서 소리 공부를 했다.

그러다보니 어떤 명창은 폭포수 아래에서 폭포소리를 이겨가며 수련을 했다든지, 어떤 명창은 토굴에서 북채 수백 개를 부러뜨려가며 수련을 했다는 등의 수많은 일화가 전해 온다.

일제시대에 판소리에 미친 정노식이란 학자가 입으로만 전해 오던 명창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음악 세계를 집대성해서 펴낸 <조선창극사>에는 그런 일화들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판소리사라 할 이 책은, 관극시(觀劇詩)를 비롯한 판소리와 연관된 한시(漢詩)들도 모아 놓았고, 판소리의 음악적 특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광대의 약전 및 그 예술>이라는 항목에서는 89명의 남녀 소릿광대와  고수 1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중에 일반인들이 궁금해하는 '전설(?)' 두 가지가 있다.  소리 공부를 할 때 '똥물을 먹는다'는 전설과, '목에서 피를 토한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나 역시 그 전설이 궁금해서 한창 소리 공부를 할 때 나의 스승이신 박초월 명창에게 여쭤봤다.

 나의 스승 박초월 명창의 소녀 시절 사진


그랬더니 첫 번 째 질문인 똥물에 대해서는 자신도 마셔본 적이 있다고 대답하셨다. 

난 얼굴을 찡그리며 "그 냄새 나는 것을 어떻게 마셔요?"하고 물었다. 박초월 명창은 웃으면서 "그걸 어떤 미친 놈이 그냥 마셔?" 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똥물 제조법'을 가르쳐 주셨다. 

똥물 제조법

1. 굵은 대나무 통 뚜꼉을 무명천으로 꼭꼭 감싼 다음,  변소간에 넣어 둔다.
2. 몇 개월 뒤  대나무 통을 꺼내면 천 사이로 스며 든 '맑은' 똥물이 가득 차 있게 된다.
3. 그 물을  뚝배기에 담아 펄펄 끓인다.(기생충 박멸 작전)
4. 물이 식으면 코를 한손으로 막은 다음 단숨에 마신다. 


왜 구린 냄새가 나는 똥물을 마셨을까? 

하루에 몇 시간 씩 매일같이 소리 연습을 하다 보면 누구나 성대가 붓고 열이 생겨서 목이 잠기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때 성대의 열을 내리고 잠긴 목을 틔워주는데 똥물이 효과가 있다는 민간의 속설이 전해져서 그 물을 마시는 것이다.

실제로 곤장을 맞아서 온 몸이 부은 사람이 똥물을 먹고 나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는 걸 보면, 몸의 독기를 빼고 부기를 내리고 열을 내리는데 똥물이 효과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박초월 명창은 자신도 어릴 때 몇 번 마셨고, 제자 중에도 마신 사람이 있지만 "그건 모두 약이 귀했던 옛날 얘기지 지금은 좋은 약이 많아져서 똥물 마시는 사람은 없다." 하셨다.


명창들은 정말 목에서 피를 토했나?

두 번 째 질문에 대해서는 '하하' 웃으시며 그건 좀 과장된 얘기라고 하셨다.

소리 공부를 하다보면 성대가 붓고, 염증이 생겨 목이 쉬는데 그걸 이기고 계속 소리를 지르다 보면 염증이 터져서 가래에 조금씩 피가 섞여 나오는 경우는 있어도 "피를 토한다는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고 있을 수도 없다"는 대답이었다.

마침 그 무렵에 모 방송국에서 송흥록이란 전설적인 명창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어 내보내고 있었는데, 절에서 혼자 노래 연습을 하다가 시뻘건 피를 입에서 울컥울컥 쏟아내는 장면이 있었다.

선생님과 함께 그 장면을 보던 중 "저 사람이 폐병에 걸렸나? 저게 무슨 일이냐?"하며 화를 내신 적이 있다. 작가나 연출이 피를 토한다는 전설에 대해 연구도 하지 않고 만든 엉터리 장면을 본 시청자들은 명창들이 모두 저렇게 한사발씩 피를 토하는 줄 알 거 아니냐는 걱정과 함께 말이다.

나 역시 소리 공부에 빠졌을 적에는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을 하기도 했고 목이 쉬어 고생도 많이 했지만, 똥물을 먹거나 피를 토한 적은 없었다.

또 내가 아는 주변의 명창들도 성대가 붓거나 염증이 생기고 조금씩 피가 섞여 나온 일로 고생을 하고 그걸 치료하기 위해 무던히 고생을 했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도, 울컥울컥 피를 토한 경험을 한 사람은 없었으니 전설은 전설로 남겨 놓을 일이다.  

그만큼 판소리 수련의 길은 멀고도 고통스러운 길이다. 그런 길을 걸어 명창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인간승리의 표본이다.


     전설적인 명창 송만갑(1865~1939).
     그는 74세의 생애 동안 오로지 판소리의 길에만 매진했던
     대명창이며, 판소리계의 가왕이라고 불리는 송흥록 명창의
     손자이기도 했다.


나는 그 멀고도 고통스러운 길을 가다가 중도 포기한 사람이기 때문에 꿋꿋이 그 길을 걸어 가는 명창들에게는 지금도 한없는 존경과 사랑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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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부 장관 직을 그만 둔지도 어느 덧 2년이 되어 간다.
그동안 TV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연기자로, 연극 <밀키웨이>에서는 극작과 연출가로, 최근에는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위원장으로서 즐겁고 바쁘게 살고 있다.
 

내가「대왕 세종」에 출연하고 있을 때, 모 일간지에 동정 기사가 실렸는데 그 기사의 제목이 한동안 여기저기서 화제가 됐다.


김명곤 씨 “장관 껍데기 훌훌~ 다시 광대로”

“장관이라는 껍데기를 훌훌 벗어 버리고 이제 천직인 광대로 탈바꿈해야죠. 걱정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허허.”

김명곤(55·사진)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내년 1월 방송 예정인 KBS 1TV 사극 ‘대왕 세종’(극본 윤선주·연출 김성근)에서 배우로 복귀한다. 1999년 자신이 연출한 연극 ‘유랑의 노래’에 출연한 지 8년 만이다.

그는 그동안 국립극장장과 문화부 장관을 지내면서 연기와 멀어졌다.김 전 장관은 ‘대왕 세종’에서 고려 황실의 후예로 조선 왕조의 전복을 꿈꾸는 옥환 역을 맡았다. 옥환은 어린 세종을 긴장하게 만드는 인물로 초반 30회까지 비중이 큰 역할이다. 그가 대하 사극에 출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D일보 2007년 10월 6일자 기사 중 일부)

나는 대학교 다닐 때만해도 광대라고 하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코에 빨간 공을 붙인 서양의 삐에로를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줄타기하는 광대를 처음 보았는데 그 광대가 줄에 올라서서 “이 줄타기가 옛날에는 화랑의 기예였소!.” 하길래 깜짝 놀랐다. "화랑이라면 신라 시대의 무사 집단인데 줄타기를 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며 광대에 관한 기록을 찾아봤다.

우리나라에 그윽하고 오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며 유교, 불교, 도교의 3교를 포함한 것으로 민중을 교화하는 것이다.

신라 시대의 학자인 고운 최치원이 쓴 글이다. 이 글을 바탕으로 역사가인 단재 신채호는 이렇게 썼다.
 

선가(仙家)는 신라의 국선 곧 '화랑'으로 보며, 그 시원은 삼한의 소도(蘇塗)의 제관으로 고구려의 '조의선인(鳥衣仙人)'이다.

이런 글들을 보니 고대사회에서 예술가들은 하늘에 국가적 제사를 지낼 때는 제관으로서 활동했고, 그들의 신분은 왕족이나 귀족에 속하는 상류계급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통일신라가 무너지고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화랑들과 함께 예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천민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광대”라는 말은 고려시대에 서역에서 들어 와 우리말로 정착된 외래어인데, 예술가를 지칭하는 단어인 광대가 화랭이, 재인 등의 용어와 뒤섞이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광대들은 기생, 무당, 중, 백정 등과 함께 천민계급으로 살아야 했다. 이들은 사대부나 평민들과 한 동네에서 살지도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하고,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자기들끼리 기예를 전수하면서,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고, 그들만의 독특한 사회를 꾸려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광대들에 대해 다산 정약용은 이런 상소문을 썼다.

광대가 봄·여름이면 고기잡이를 좇아 어촌으로 모여들고 가을과 겨울이면 추수를 바라고 농촌으로 쏠리는데, 특히 창촌에서는 사당, 창기, 주파, 화랑, 악공들의 잡류들을 엄금해야 합니다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본 <왕의 남자>는 이 무렵의 떠돌이 남사당 광대패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실학사상이 일어나고 평민 가사, 탈춤, 판소리 등의 가치를 양반들 중의 몇몇이 언급하게 되면서 광대들의 가치가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고종과 대원군이 권력을 쥐었던 무렵에는 광대들이 왕족이나 고위 관리들의 잔치에 초대받고, 심지어 명인, 명창, 국창 등의 이름으로 궁궐에 들어가 임금 앞에서 기예를 선보이며 많은 돈을 벌고 신분의 상승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조선이 망한 후 광대들은 또 다시 천대받게 된다. 그 상황은 일제시대의 학자인 육당 최남선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조의 재인, 광대들은 적극적으로 특별한 권장을 입지 못하고, '무식무기력한 예인'들이 사회 최하층적 지위에서 구차히 존재하다 보니까 거기 쇠잔이 있을 뿐이지 발달이 없으며 저락이 거듭될 뿐이지 향상을 볼 수 없음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조건 하에 있다 보니까 '수 천 년을 하루같이' '몸을 놀리는 기술'과 '우스개 놀이'쯤에 그치고 드디어 다른 데 만한 순희곡적 생장을 이루지 못하고 만 것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명 풍화에는 조금도 유익한 바가 없으니 이는 연희를 실시하는 자가 학문이 없어 '동양의 부패한 풍습'만 알 뿐이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했던 <서편제>는 이 무렵의 떠돌이 판소리 광대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나는 대학시절에 오페라나 이태리 민요나 가곡이나 뮤지컬이나 비틀즈 등의 서구음악의 열광적 팬이었고, 괴테나 세익스피어나 입센이나 도스토에프스키 등의 서구문학(독문학)에 심취했던 사람이다. 그러다 우연히 판소리를 알게 된 후로 내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고향인 전주를 무지 싫어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의 흔적이 너무나 짙은 그 곳을 어서 떠나 서울로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진학공부를 했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도 한국을 빨리 떠나 독일로 유학 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인간문화재인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면서 전라도 말이 그렇게 다양한 표현과 영롱한 문학적 향기가 있는가를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핏줄에 대한 애정 곧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나의 조상과 조국에 대한 사랑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전통은 박물관에 진열된 골동품이 아니다. 전통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았던 삶의 내용과 형식 곧 그 분들의 삶의 자취이고 향기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세월이 지나면 전통의 계승자가 될 것이며, 언젠가는 전통 그 자체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나에게 전통은 ‘나를 숨쉬게 하고, 나를 활기 있게 만들어 주고, 또 창조의 열정에 불타게 하는 소중한 원천이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무식무기력’한 광대들에게서 내 예술의 많은 부분을 배웠다. 나는 ‘수천 년을 하루같이’ ‘동양의 부패한 풍습'을 몸으로 전해 온 그들의 예술에 매혹 당하고 심취하고 깊이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들의 ‘몸을 놀리는 기술’ 속에서 삶의 깊은 애환과 감동을 보았고, 그들의 ‘우스개 놀이’ 속에서 예술적 창조의 편린을 보았다. 그들은 나의 스승이었고, 나의 애인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 종족의 일원이 되고자 ‘광대’라는 말을 쓴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연기, 연출, 극작, 경영, 행정에다가 연극, 영화, 국악, 방송 등 여러 분야에 간여하는 것을 보고 혼란스럽다고 한다. 

당신의 정체는 뭔가? 아마도 이게 그들의 질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나는 그 모든 것을 추구하는 광대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럼 당신은 어떤 광대가 되고 싶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
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라는 책에 나오는 발렌친 카그다예프라는 브리야트 족의 샤먼과 저자와의 대화로 대신하고자 한다.

질문 : 당신 삶의 목표는 무엇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

답변 : 훌륭한, 혹은 좋은 샤먼이란 자신이 함께 살아가는 민족을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는 좋은 샤먼이 되고 싶고, 따라서 우리 민족이 서로 도와가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본다.-----사랑을 나누고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모든 샤먼이 지녀야 할 미덕이다.

반면 모든 악과 문제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과 자연과 사물을 착취하는 데서 발생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인내하고 이해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남을, 상대방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상대가 원하기 전에 그가 원하는 것을 먼저 베풀어 주는 것이 사랑의 첩경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현자와 성자들이 설파했던 조화와 사랑, 이것의 실천자로서의 샤먼 곧 ‘무당’의 역할에 대한 바이칼 샤먼의 지혜로운 말이 ‘광대정신’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광대란 '넓은 광(廣), 큰 대(大)'라는 말 뜻 그대로 ‘넓고 큰’ 영혼으로 세계의 불화와 고통에 정면으로 마주 서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온 몸으로 감싸 안고 표현하는 예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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