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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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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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0.09.27
    전주세계소리축제 관계로 블로그 쉽니다. (37)
  2. 2010.07.02
    저 깊숙한 혼의 소리, 상여소리꾼 최 명인 (7)
  3. 2009.12.26
    청춘의 고독 가르쳐 준 아버지, 나의 아버지! (30)
  4. 2009.10.02
    서울살이 한가위, 고향 생각 절로 난다. (36)
  5. 2009.05.10
    천년 고도 간직한 전주 한옥마을에 가보니 (19)
  6. 2009.05.05
    장관 껍데기 훌훌 벗고 광대로 돌아와보니 (24)
  7. 2009.05.04
    부모님 무덤에서 보낸 어린이날 생각하니 (25)

명절 잘 쉬셨나요?

폭우로 범벅이 된 한가위였지만 오랫만에 가족들이 만나 차례도 지내고 정담도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셨겠지요. 

전 저희 집에서 차례를 지낸 추석 날 빼고는 <전주세계소리축제> 관계로 마음 부산한 연휴를 보냈습니다. 이제 10월 1일부터 시작되는 소리축제가 나흘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오늘 전주로 내려가 10월 5일까지 전주에 머무를 계획입니다. 

개막공연의 총감독으로서 연습과 리허설을 진행하고, 조직위원장으로서 리셉션과 공연과 행사 전반을 살펴보려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런 저런 걱정으로 잠을 설치곤 합니다. 소리축제의 김정수 예술감독님은 며칠 전 꿈속에서 축제가 열렸는데, 관객이 한 명도 오지 않아 울다가 깨어났다고 합니다.

이처럼 축제에 오신 관객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담당자들을 엄청난 엄무에 시달리고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 답니다. 무릇 모든 예술도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축제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관객들이 만족 속에 돌아가게 되면 그 모든 고통과 스트레스는 봄눈 녹 듯 사라지고 행복한 성취감을 느끼게 되지요. 바로 그 느낌을 위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위해 뛰고 있답니다.  

저와 함께 일하는 소리축제 직원들도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명절도 반납한 채 휴일도 없이 밤늦게까지 뛰어 다니고 있답니다. 열정과 패기로 똘똘 뭉쳐 너무도 성실히 축제 준비를 하고 있는 직원들에게 고마운 마음 뿐입니다.

올해는 전주세계소리축제 10년이 되는 해이고, 제가 위원장을 맡은지 2년차에 개최되는 축제이기 때문에 전북 도민들과 주변의 기대도 많고 그에 따른 부담도 많답니다. 최선을 다해서 행사 진행과 공연 하나하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와 응원보내주시면 저와 함께 소리축제 직원들에게 큰 힘이 될 듯 합니다.  

전주에 머무는 동안에는 차분히 글을 쓸 여유가 없을 듯 하여 당분간 블로그에 글을 못올릴 듯 싶습니다. 그대신 온라인의 이웃들에게 '트위터'와 '페이스 북'을 이용해서 짧은 소식을 전할까 합니다. 

전주세계소리축제 관련 정보는 아래 소개하는 홈페이지를 찾아 보시면 상세하게 나와 있구요, 제 페이스북과 트위터 계정도 링크 걸어 놓을께요.   

전주세계소리축제 홈페이지
 http://www.sorifestival.com
   
김명곤 트위터 
http://twtkr.com/myunggon



김명곤 페이스북(가입안하신 분은 이 기회에 가입해서 친구 맺어주세요)
http://www.facebook.com/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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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상여소리꾼 최 명인을 찾아 고향인 전주를 찾았던 80년대, 그가 일하는 <남밭 상여도가>는 풍남문 둑길 안쪽에 허름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호남제일문’ 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풍남문 바로 옆에는 남문 시장이 자리잡고 있고, 그 시장 한켠에 <남밭상여도가>라는 낡은 간판이 붙어 있는 허름한 집이 있었습니다. 
   

 출처 : http://blog.joins.com/media/index.asp%3...Type%3D1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드나들 여유 밖에 없는 작은 문을 지나 네댓개의 돌계단을 걸어 내려가니, 하루종일 햇볕이 들지 않을 것 같은 음침한 집의 복도가 나왔습니다. 눅눅한 습기와 어둑한 그늘이 만들어내는 적막한 분위기가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시장의 소란한 분위기와 너무도 대조적이어서 처음 찾아간 방문객을 무척 당황하게 만드는 그러한 집이었습니다.

최 노인은 평생 동안 그 집에서  죽은 사람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살아 온 할아버지입니다. 사람을 꺼리는 눈매나 표정이 없는 얼굴에 깊게 패어 있는 주름살들에서 예사롭지 않은 그의 삶을 읽을 수 있어서 살아 온 얘기부터 듣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첫마디부터 “이름도 밝힐 수 없고 사진도 찍을 수 없응게 그것부터 약속혀야 얘기를 허겄소”라고 야무지게 말하는 그를 보니 삶의 얘기가 쉽사리 나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선 상여도가에 관한 얘기부터 듣기로 마음먹고 '선바 상여도가'니 '남밭 상여도가'와 같은 이상한 간판 글씨가 무슨 말인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건 간판 쓰는 이가 잘못 써서 그런거요. ‘선바’는 ‘서문 밖’, ‘남밭’은 ‘남문 밖’, 이렇게 써야 맞는디 말 나오는 대로 쓰다 보닝게 그렇게 정해져 버렸지요. ‘서문 밖 상여도가’는 젊은 사람들이나, 병원에서 죽은 시체나, 사고로 죽은 시체들을 파묻어 주고 품삯을 받는 디고 본 상여 일은 여그서 맡고 있지요.”

자기의 신상과 관계없는 걸 물어 보아서 그런지 최 노인의 말투에서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졌습니다. 그는 ‘남밭 상여도가’의 내력을 이것저것 늘어놓았습니다.

“여그가 임경업 장군 자손이 대대로 주인 노릇을 혀 나온 디요. 임경업 장군의 셋째 손이 있었는디 임 장군이 역적으로 몰려서 돌아가시게 되닝가니 먹고 살 것이 없어서 여그로 내려오게 됐답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삼십대를 내려오다가 요 전대에 주인이 바뀌었지요. 그 전에는 터가 워낙 쎄서 임 씨 아니고서는 혀 먹들 못혔지요.”

상두도가라고 부르기도 하는 '상여도가'는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커다란 도회지에는 한 두 개 쯤은 있었던, 요샛말로 부르자면 ‘관인 장의사 조합’이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크고 작은 장례일을 돌봐 주느라고 분주했었을 상여도가는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 생겨난 '영구차'에 밀려서 그 일거리가 점점 줄어들었고, 새로 생겨난 '장의사'들이 상여도가의 역할을 하는 통에 쓸모가 없어져서 하나씩 둘씩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상여도가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들은 나이들어 죽거나, 천대받던 신분을 숨기고 다른 직업을 찾아 떠나 버렸습니다.

최 노인은 임경업 장군의 사당에 얽힌 전설, 임 씨 집안에서 묘를 훌륭하게 써서 그 아들들이 대학교 교수도 하고 고등학교 선생도 한다는 것과 같은 상여도가의 ‘역사’들을 점점 신이 나서 얘기했습니다.

저는 그의 얘기에 신이 오른 틈을 타서, “임 씨 집안 역사도 재미있는데 할아버지의 ‘역사’를 들으면 더 재미있겠다”고 운을 떼었습니다. 그랬더니 최 노인의 얼굴이 갑자기 침울하게 변하더니 목소리에서 힘이 싹 가셨습니다.

“내 살아 나온 역사? 그런 건 들어서 뭐 헐라고요? 모다 쓸데없는 짓이요.”

꼬박 꼬박 존대말을 쓰며 신상 얘기를 물어 볼 때마다 엉뚱한 얘기로 말꼬리를 돌리는 그에게서 툭 터 놓은 삶의 ‘역사’를 듣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고향이요? 여그 전주지요. 근디 내가 네 살 났을 적에 부모가 다 돌아가셔서 아무도 없으닝가니 붙는다는 것이 여그 와서 붙는디 남의 집이 아니라 그전 주인 임 씨네허고 나허고 이종간이라. 이종간이라도 남 한가지지, 자기네는 잘 살고 나는 못 사는디 헐 수가 있간디요.”

최 노인의 할아버지는 비단 장수였습니다.

요새로 말하자면 포목 도매상이었는데, 장사가 잘 되어 돈 궁한 줄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재산을 이어받은 아버지가 ‘삼십륙기’라는 중국 놀음에 빠져서 집안의 재산을 모두 거덜내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최 노인이 네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고, 곧 이어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최 노인은 아버지나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도 못한 채, 거렁뱅이 고아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상여도가에 들어가서 잔심부름을 해 주면서 자라났습니다. 그렇게 10년이 넘게 커 나오는 동안에 여러 가지 상여 일을 손에 익힌 그는 스무살쯤이 되자 한 사람 몫의 일을 맡아 돈을 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벌이는 천헌 벌이라도 돈은 귀엽게 잘 벌려서” 제법 돈푼깨나 손에 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물네살 때 “속 알고 마음 착한 전주 시악시”한테 장가를 갔습니다.

“그때에는 노동자가 장가가기 힘들었어요. 다들 천허게 알어서 딸을 주들 안혔거든요.”

그가 말한 ‘노동자’란 상여도가에서 일을 해 주고 품삯을 버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무당, 백정, 노비, 중, 고리장이, 광대, 기생 들과 함께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천대를 받으며 힘겹게 살아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일 중에서도 가장 궂은 일 곧 죽은 사람의 몸을 거두거나, 뼈를 골라 모으거나, 무덤을 파고 시체를 묻거나, 땅에 묻혀 있는 시체를 다시 파내어 다른 곳에 옮기거나, 상여가 나갈 때에 상여를 메는 일이었습니다. 

출처 : http://blog.jangheung.go.kr/main_board....page%3D6

하는 일이 그토록 궂은 일이었던 만큼 품삯은 다른 노동 보다 많았습니다. 그래서 농촌의 막벌이 일군이나 지게꾼이나 놀음하다가 거덜난 포목 장수들이 상여도가에 눌러앉아 ‘벌어 먹다가’ 돈이 모아지면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최 노인과 같이 오랜 수업 시대를 거친 ‘전문가’는 그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했는데 그런 대우를 받으려면 그만한 솜씨를 지녀야 했습니다. 장례에 관한 모든 범절과 일속을 샅샅이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묘 자리도 지관만큼이나 눈 밝게 보아야 하고, 애기를 밴 채 죽은 부인의 '하문'에 손을 넣어 애기를 꺼내는 일과 같은 특수한 기술도 알아야 합니다. 

“상여 나가는 법이 참 어려운 법이요. 우리 같은 전문가들이 허먼 문제가 없지만, 요새는 그골 풍습대로 계꾼들이 상여를 메기도 허고 친구들이 메기도 허닝게 그 사람들을 연습시켜야 허요. 왜냐? 내 소리를 받아서 ‘어행 어행’ 허던가 ‘어노 어노’ 혀야 되는디 처음 허는 사람들은 맞추기가 힘이 들거든요. 그렇게 출상 전날 밤에 연습을 허기도 허지요.”

출상 전날 밤에 상여를 꾸며 가지고 예행 연습을 하는 것을 ‘대뜨리’ 또는 ‘다드레기’ 또는 '다시래기'라고 합니다. 그것은 떠나려는 영혼을 위안하는 구실도 하고 출상 예행 연습의 구실도 하고 슬픔에 잠긴 상주를 위로하는 구실도 하도록 마련된 풍습인 듯합니다.

“그런디 상여 메는 것만 어려운 게 아니라 사람 죽고 나서 허는 일 모두가 어렵다닝게요. 요새는 모다 쉽게들 허는가 봅디다만 그것은 우리식허고 틀려요. 그런디 제 법대로 허자먼 한이 없으닝게 요새는 될 수 있으먼 돈 안 들이고 간단허게 허지요.”

그 한없이 어려운 ‘우리 식’의 장례법을 '간단하게' 알아 볼까요.

사람이 죽으면 가장 먼저 ‘수족을 거둬서’ 칠성판 위에 뉘어 놓습니다. 그 다음에 죽은 사람의 적삼을 쳐들고 “김해 김 씨(성에 따라서) 복 복 복”하고 소리치면서 지붕 위로 던집니다. 그것을 ‘초혼’이라고 합니다.

노무현 전대통령 <노제> 때의 '초혼' 장면.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3D940100

초혼이 끝나면 대문 앞에 밥과 나물과 짚신과 동전을 내어 놓습니다. 죽은 사람을 데리러 온 저승 사자가 먹을 밥과 신을 신과 차비입니다. 그 다음에 시체의 몸을 씻습니다. 그것을 ‘염’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향나무 삶은 물로 시체를 씻었지만 지금은 향료를 탄 물이나 방부제를 탄 물을 수건이나 솜에 묻혀서 씻습니다. 그 다음에 수의를 입혀서 손을 싸매고, 솜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홑이불로 몸을 싸서 묶습니다. 이것이 ‘소렴’입니다.
 
소렴이 끝난 시체를 관에 옮기는데 먼저 관 밑 바닥에 ‘지금(地衾)’이라는 베를 깔고, 그 위에 베개를 놓고, 시체를 관에 넣습니다. 시체 위에 ‘천금(天衾)’을 덮고 솜이나 백지로 관을 채운 뒤에, 관 뚜껑을 덮고 나무못을 칩니다. 이로써 ‘대렴’이 끝납니다.

대렴이 끝나면 영혼이 의지할 곳이 없어졌으므로 죽은 사람의 사진이나 초상화 곧 ‘영좌’를 모셔 놓습니다. 그 영좌 앞에 제물을 차려 놓고 상복을 입고 제사를 지냅니다. 그것을 ‘성복제’라고 합니다. 성복제가 끝나면 비로소 조문객이 인사를 합니다.

성복한 지 사흘이나, 닷새나, 이레나, 아흐레 만에 상여를 내가는데 요즘은 보통 사흘 만에 내갑니다. 관을 묶는 ‘절관줄’을 일곱매 묶은 다음에 맏상주를 빼놓은 상주들인 ‘복인’들이 양쪽에서 관을 듭니다. 방 네 구석을 돌아나가서 마당에 내어 놓은 뒤에 마당에 내온 관을 상여 위에 올려 놓고 제상을 차립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이 집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받는 제사입니다. 그 제사를 ‘발인제’라고 합니다.

맏상주가 잔을 올리고 모두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면 ‘발인축’을 읽습니다. 동네의 글 잘 하는 사람이나 최 노인과 같은 앞소리꾼이 영혼이 저승질을 편안히 가도록 빌어 주는 ‘영인기가 왕즉유택 재진견례 영결종천’ 이라는 축문을 음률에 맞추어 읽고 나면, 곡이 슬프게 울려 퍼집니다.

그런 다음에 ‘관하아-음 보살’이나 ‘관세으-음 보살’ 이라는 앞소리꾼의 소리를 신호로 해서 상여꾼이 일제히 상여를 멥니다. 앞소리꾼의 지휘에 따라 집을 한 바퀴 돈 다음, 집 정면을 향하여 바로 서서 세 번 울렸다 내렸다 하며 하직 인사를 합니다.

그 다음 앞소리꾼이 상여 소리를 시작하면 상여꾼들이 소리를 받아 후렴을 부르며 집을 나섭니다. 요령을 손에 쥔 앞소리꾼이 요령을 흔들면서 선창을 하면 상여를 메고 가는 상여꾼들이 후렴을 합창하며 걸음을 떼어 놓습니다. 최 노인은 어려서부터 상여도가를 드나드는 유명한 앞소리꾼들과 함께 지내며 그 사람들에게서 대받음으로 소리를 물려받았습니다.

상여 소리는 그 가사나 곡조나 후렴이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고 같은 지방의 소리라고 해도 부르는 사람에 따라서 조금씩 다릅니다. 가사는 주로 인생의 허무함이나 이별의 슬픔이나 저승에서의 복된 삶에 대한 바람을 담고 있고, 때로는 죽은 사람의 이력이나 인품이나 살았을 적에 이룬 업적을 추모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출처 :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3D326756

불쌍하다 이내 일신 인간 하직 망극하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진다고 설워말아
명년 삼월 봄이 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우리 인생 한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북망 산천 돌아갈 제 어찌 할꼬 산심 험로
한정 없난 길이로다 언제 다시 돌아오리
이 세상을 하직하니 불쌍하고 가련하다
.......

상여 소리의 곡조는 대체로 비통하고 애절하기 때문에 소리를 높이 띄워 올려서 통곡하듯이 내지릅니다. 최 노인은 자기가 소리를 내지르면 십리 밖에서도 들린다고 했습니다. 전주를 다녀온 뒤에 한국 방송 공사에서 녹음해 놓은 최 노인의 상여 소리를 들어 보았는데, 그 소리에 어느 앞소리꾼이나 판소리 명창이 따르지 못한 한이 절절이 서려 있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거의 전부를 죽음이 얽혀 있는 곳에서 살아 온 그의 삶을 모르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한이었습니다. 오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그의 비통한 목소리에는 가는 넋을 달래 주고 넋을 떠나 보내는 사람들의 슬픔을 위로해 주는 힘도 깃들어 있었지만, 그보다는 슬픔이 없던 사람까지도 통곡하게 만드는 힘이 더 강하게 깃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죽어서 땅에 묻히는 일이 참 '한심헌' 노릇이거든요. 그렁게 소리도 한심허게 해 줘야지요. 그래야 상주들도 눈물을 빠치고요.”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마는 날 일러 주오
어너 어너 어너리 넘차 어하너
황천 길이 멀다더니
문턱 밑이 황천 길이로구나
어너 어너 어너리 넘차 어허너
먹던 밥그릇 덮어 놓고
먹던 수저 그대로 두고 북망 산천이 웬일인가
어너 어너 어너리 넘차 어하너

하늘로 멀리 퍼져 나가는 상여 소리에 맞춰서 상여가 나아가면 상주들이 통곡을 하며 그 뒤를 따릅니다. 상여 행렬의 맨 앞에는 죽은 사람의 관직이나 본관 성씨를 쓴 ‘명정대’가 서고, 그 뒤에 관을 닦는 데에 쓰는 삼베 헝겊을 매단 ‘공포대’가 따르고, 그 뒤에 무늬를 새긴 널조각을 긴 자루에 매단 ‘운삽’과 ‘불삽’이 따릅니다. 그 뒤에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글을 매단 ‘조기’가 섭니다.

옛날에는 북을 치고 칼춤을 추면서 잡귀를 몰아내는 사람이 그 뒤에 따랐다고 하나 지금은 그것이 없습니다. 상여가 나가다가 가기 어려운 험한 길이나 시냇물을 만나면 행상을 멈춥니다. 그러면 친척들이 앞으로 나와 상여 앞 새끼줄에 돈을 끼워 놓고 절을 하며 어서 가자고 타이릅니다. 돈이 모이는 것을 보고 상여는 다시 움직입니다.

“그거야 다 벌어먹는 풍속으로 그러는 거지요. 호상인디 심심허게 그냥 갈 수가 없다고 버티먼 새끼줄에 돈을 꽂아 주지요. 그 돈을 모아서 술도 먹고 놀음도 허지요. 근디 그런 풍속도 요새는 많이 없어졌어요.” 

행상길의 반쯤을 가게 되면 ‘노제’를 행합니다. 상여를 내려 놓은 다음 그 앞에 돗자리를 깔고, 뒤에는 병풍을 치고, 그릇에 음식을 차려 놓고, 맏상주부터 차례로 잔을 올리고 두 번 절한 다음에 곡을 하며 물러섭니다. 친척이나 친구들도 모두 잔을 올리고 두 번 절하고 나서,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골고루 나눠 먹은 뒤에 다시 행상을 계속합니다.
 

노무현 전대통령 <노제> 장면. 출처 :
http://www.cbs.co.kr/nocut/show.asp%3Fi...D1162108

묘지에 가까운 산기슭에 이르면 앞소리꾼은 상여 소리를 조금 빠르게 하여 일심으로 매겨 줍니다. 상여꾼들도 빠른 박자로 ‘간살 보살, 간살 보살’하고 후렴을 합창합니다.

산에 올라가서 ‘산신제’를 지낸 뒤에는 ‘하관’을 합니다. 상여꾼이 관을 맨 새끼를 푼 다음,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발치를 남쪽으로 향하게 하여 관을 무덤 속에 내려 놓습니다. 관의 뚜껑만 보이도록 옆자리를 흙으로 메우고, 관뚜껑을 공포로 깨끗이 닦은 다음, 관 곁에 운삽과 불삽을 끼어 놓고 관 위에 명정을 덮습니다.

출처 : http://www.110ja.com/sub/plist3_1.htm%3...r_id%3D7

죽은 이의 가족들이옷자락에 흙을 담아 명정 위에 붓고 발치에 가서 곡을 합니다. 그 다음에 일꾼들이 흙을 퍼붓습니다. 흙이 관 자리를 메워 평지와 같게 되면 ‘평토제’를 지냅니다. 평토제가 끝나면 객토로 둥글게 봉분을 만든 뒤에 잔디를 입히고, 발로 밟아 다집니다. 그 다음에 산을 내려와 오던 길을 다시 걸어 상가에 돌아와서, 밥과 술을 먹으며 피로를 풉니다.

이 모든 과정은 지방에 따라서도 다르고, 상갓집 형편에 따라서 더해지기도 하고 덜해지기도 합니다. 더구나 요즘에는 현대적으로 생략되어 간편하게 진행됩니다.

최 노인은 상여소리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이와 같은 장례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골고루 돌봐 주는 일을 해왔습니다.

“요새는 상만 당해 놨지 돈이 많이 있어도 어찌 헐 줄을 몰라요. 이것저것을 다 가르쳐 줘야지요. 그러니 대우는 잘 받지요.”

그런데 대접은 잘 해 주면서도 말을 낮추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더라고 말하며 최 노인은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요새는 별로 그런 사람은 없는디 그래도 촌에 가먼 머리가 깜깜헌 양반들이  ‘허소’를 허지요. 어떤 때는 젊은 사람이 늙은 사람보고 말을 함부로 헌단 말여요. 그럼 그냥 받어 주지요. 왜냐? 돈, 돈 땜에 그 천대를 그냥 받는 거지요. 그런디 만약에 돈도 많이 안 줌서 반말을 허먼 한소리 허지요. ‘니가 뭔디 돈도 적게 줌서 허소를 팽팽허고 방거드러지게 노느냐?’ 허고 한마디 해 준단 말이요.”

천대를 받는 것을 그토록 마음 아파하면서도 그가 평생 동안 다른 직업에 눈을 돌리지 않고 그 일만 해 온 것은 그 일의 돈벌이가 좋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번돈으로 그는 널따란 집을 장만하고 아이들의 공부도 시켰습니다. 그 아들들이 장성해서 지금은 좋은 일자리에서 ‘대우받음서’ 살고 있습니다.

그토록 자랑스러운 자수성가를 하기까지 꾸준히 주검만을 돌보며 살아 온 그는 자기 죽음에 대한 준비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완주군 이서면 삼태동에 좋은 자리를 골라 충청도에서 하는 식으로 미리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고 햇습니다.

“외로와요. 내 앞에 있던 사람은 모다 죽고 나 혼자뿐이요. 내가 여그 앉어 있으먼 내 앞에서 담배 필 수도 없고 말벗도 안 되닝게 모다 나가 버려요. 일 나갈 때도 재미가 없고 놀 때도 재미가 없어요.
집에 가도 마찬가지요. 큰며느리는 학교 교사라고 나가서 없고, 나는 방에서 혼자 살어요. 마누라허고도 딴 방을 쓰지요. 늙은이들 끼리 등어리도 긁어 줌서 재미있게 지낼래도 자식들이 숭을 볼까 봐서 한 십년 넘게 딴방을 써요.
자식들은 일허지 말고 놀라고 허는디 말로만 그러지 용돈을 많이 주들 안 혀요. 그러고 내가 번 돈으로 반찬도 사 가고, 손자들 먹을 것도 사 가고, 그런 재미가 있응게 그냥 노느니 여그나와 있는 거지요. 그렇게 고생인지 설움인지 모르고 지내요.”

최 노인은 끝까지 이름 밝히기와 사진 찍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자식들이 모두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자기 아버지가 그런 ‘천한 벌이’를 했다고 세상에 알려지면 좋을 게 있겠느냐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저는 그 대신에 상여소리나 들려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자 그는 사람들이 “싫어허닝게” 큰 소리로 할 수 없다고 하며 소리를 죽여서 몇 마디의 상여소리를 들려 주었습니다.

“못 오시네 못 오시네
한번 가면 못 오시네
인생 아차 죽어지면
육진장포 일곱매를
상하로 질끈 동여매어
북망산천을 돌아들 적
송죽으로 울을 삼고
두견 접동 벗이 되어
산은 첩첩 밤은 깊은디
처량헌 게 인생 넋이로구나
세월아 세월아 오고 가지를 말어라
아까운 이내 운명 마지막 간다.”

최 노인과 작별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거리에 진눈개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질척거리는 시장길을 빠져나와 한벽루 쪽으로 난 전주천 둑길을 걸었습니다.

어둠에 덮인 전주천 물을 바라보는 저의 귀에는 최 노인이 남의 귀를 꺼려 속삭이듯이 들려 준 상여 소리가 끈질기게 맴돌고 있었습니다. 어느 곳에도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지만 제게는 어느 명인명창보다도 소중한 또 한 사람의 명인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최 노인은 제게는 '최 명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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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돌아가신 아버님의 기일입니다.
매년 형제들과 함께 저희집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 준비를 하며 아버지의 사진과 편지들을 정리하다가 문득 몇 가지 아버지와의 추억이 떠올라 블로그에 올립니다. 


총각 시절의 아버지.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성악에 심취했다고 합니다.

특히 러시아의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이며 러시아 민요는 그보다 더 잘 부르는 사람이 없다는 평을 받는 성악가 표도르 샬리아핀의 팬이었습니다. 음악에 대한 식견과 지식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술이 거나해지면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저의 누이들과 남동생도 모두 피아노나 키타를 치거나, 합창반이나 성가대를 하며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서 어떤 날은 때 아닌 가족 노래자랑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잔잔한 바다 위로/ 저 배는 떠나가며/ 노래를 부르니/ 나폴리라네----”로 시작하는 이태리 가곡 <먼 산타루치아>나 우리 가곡 <나물 캐는 처녀>를 자주 부르셨습니다.

푸른 잔디 길 위에 봄바람은 불고
아지랑이 잔잔히 끼인 어떤 날
나물 캐는 처녀는 언덕으로 다니며
고운 나물 찾나니 어여쁘다 그 손목
소 먹이던 목동이 손목 잡았네
새빨개진 얼굴로 뿌리치고 가노니
그의 굳은 마음 변함없다네
어여쁘다 그 처녀

평상시의 퉁명스럽고 거친 목소리가 노래를 부를 때면 아버지답지 않게 가늘게 떨리고 부드러운 가성으로 흘러나오는 게 신기해서, 저는 아버지가 노래 부르는 걸 참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사에 나오는 '나물 캐는 처녀'가 아버지와 굉장히 친했던 어떤 여자인 것만 같은 상상에 빠지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알듯 말듯 미소를 짓고 눈을 가늘게 뜨고 ‘처녀’니 ‘어여쁘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은 오직 그 노래를 부를 때뿐이어서 특별하고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나면 아버지는 다시 무뚝뚝하고 침울한 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와 함께 저의 즐거움도, 상상 속의 여자도 사라져버리곤 했습니다.

아버지를 회상할 때마다 저는 이렇듯 두 가지의 상반되는 기억들, 부드러움과 거칠음, 밝은 미소와 침울한 표정, 상냥함과 무뚝뚝함, 따뜻함과 차가움, 침묵과 고함 속에서 혼란에 빠지곤 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아버지를 닮아가는 저의 기질이 튀어나올 때마다 그 혼란은 더욱 더 커지기만 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복잡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내면세계가 있는 법이겠지만, 아버지의 기질과 사고는 남다른 것이어서 어린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참 많았습니다. 출생과 어린 시절의 성장에 얽힌 불우한 환경이 큰 원인이 아닐까 짐작은 하지만 꼭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렸을 때의 아버지는 칭찬에 무척 인색한 분이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에 반장이었고, 공부도 잘해서 선생님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학생이었는데 유독 아버지한테는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반장으로서 통솔력이 부족한 점, 내성적이고 대범하지 못한 성격에 대해 비판하시고 그걸 고치도록 엄격하게 요구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어쩌다 칭찬을 하더라도 그 말씀이 매우 간단하고 무뚝뚝해서 칭찬인지 뭔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런 태도는 그 당시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가진 가부장적인 태도였지만 어린 저는 참으로 서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서운함을 모두 가시게 해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입니다. 밤늦게까지 다음날 아침 자습시간에 제출할 산수 숙제를 하다가 피곤에 지쳐 그대로 엎드려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담임선생님은 호랑이 같은 분으로 학생들이 거의 매일 매를 맞고 지낼 때인지라, 저는 매 맞는 꿈에 가위 눌리다가 벌떡 일어나 부랴부랴 학교에 갔습니다. 숙제 검사를 할 때 비참한 심정으로 공책을 펼치는데, 세상에......뜻밖에 산수 숙제가 고스란히 풀어져 있는 게 아닙니까?
 
독특한 필체 때문에 아버지께서 밤에 대신 풀어놓은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아버지가 저를 사랑하고, 저에게 깊은 관심을 쏟고 계시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대학 다니러 집을 떠나 있을 동안에는 아버지와 수시로 편지를 교환했습니다. 편지에는 아들에 대한 걱정과 자상한 관심, 그리고 인생의 선배로서 자신의 철학을 전수해 주고자 하는 아버지의 배려가 담뿍 실려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지금도 저는 잊지 못합니다.



(의타심 없이 자기 창의력에 충실할 것)

청년은 고독하다

고독이야말로 오늘날 청년에게 주어진
유일하고 가능한 상태인 것이다.(특권)
고독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투쟁인 것이다.
소신대로, 솔직하게, 생각한대로 해보는 것이다.
청년이란 것은 해보고 실패하면 다시 시작하고,
또다시 고쳐 시작하고, 무한히 투쟁할 수 있다.
다시 고쳐 또 해도 기성인과는 달라서 흉이 없고,
오히려 칭찬 받는 시기이다.
자기에게 성실하고 대담함이 있어라.
교활하고 비굴함은 삼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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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가 다가 오니 가을 하늘은 더욱 높고, 햇살은 더욱 따사로워 지는군요.
 
이천오백 만이 넘는 대인구가 새옷을 차려 입고, 선물보따리를 들고, 열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거나 자동차를 타고서 삼삼오오 찾아가는 곳은 어디인가요?

부모가 있고, 선산이 있고, 일가친척이 있고,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는 '고향'입니다.

고달프고 각박한 도시 생활에 지친 우리는 포근하고 아늑한 고향에서 휴식과 기쁨과 활력의 재충전을 하려고 귀향길을 재촉합니다.



저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고, 산소는 경기도 고양의 용미리 공원묘지에 있기 때문에 서울의 저희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추석을 쇱니다. 

그래서 추석이나 설날의 귀향전쟁을 경험하지 못하고, 오히려 한산해진 서울의 도로를 오고가며 성묘를 하고 명절을 치릅니다.

그래도 이맘 때가 되면 제 고향 전주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 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군요.

출처 : 이주봉여사의 '천연덕 생활' 블로그 중 전주 시내 진입로에 서 있는 서예 편액.

저는 전라북도 전주의 중앙동에서 태어나 고사동, 태평동, 진북동, 남노송동 등을 전전하며 살았으니 오갈 데 없는 전주 토박이인 셈입니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저의 초등학교 시절은 행복했던 추억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출처 : 미리르님이 찍은 전주시 전경.
 
시멘트 푸대로 야구 클럽을 만들고 동네 공터에서 고무공과 나무 막대기로 놀던 야구놀이, 
동네 앞 기찻길에 대못을 올려 놓았다가 기차가 지나간 뒤 납작해진 대못으로 뽀족칼 만들기,
보리 이삭 불에 까슬어 먹기,
벼이삭 출렁이는 논에서 메뚜기 잡아 구워먹기, 
맑은 물이 흐르던 전주천에서 피리잡기와 미역감기,
각시바위 아래 빨래터에서 놀기,
겨울이면 나무판에 철사를 끼운 스케이트로 얼음지치기,
그리고 무엇보다 낚시광이신 아버지와의 낚시질 가기.....

이 모든 추억들은 다시는 찾지 못할 미로 속의 보석처럼 제 가슴 속에 소중하게 남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찾아 본 진북동 동네의 골목길. 너무 많이 변해서 추억의 장소를 찾기 어려  웠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친구들과 전주 근교를 무던히도 싸돌아 다녔습니다. 또 새벽이면 좋아하는 노래 연습을 하려고 다가공원까지 구보로 뛰어가서 혼자 목청껏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좋아하는 여학생이 생기면 그녀의 집 뒷산에 올라가 <불 꺼진 창>, <남 몰래 흐르는 눈물> 같은 노래를 열심히 불러대곤 했습니다. 

전주의 <한벽루>에서 바라 본 전주천 풍경.


그 뒤로 연극, 영화, 판소리의 세계에서 활동해 오면서 이 직업을 택하게 된 것은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고향의 예술적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비록 어렸을 때는 가난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마음 때문에 일부러 고향을 멀리 한 적도 있지만, 고향에는 멀리 할수록 더 그리워지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그 신비한 힘이야말로 제가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마무리 하는 데 큰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깊어가는 가을 밤, 서울살이의 한가위를 보내며 그리운 고향생각에 잠시 잠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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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20대 후반에 온 가족이 서울로 올라오게 된 뒤로 점점 고향과 멀어졌다. 

물론 공연이나 일 때문에 가끔 고향에 내려 가기는 했지만 오래 머물지 못하고 당일치기로 돌아오거나, 길어야 하룻 밤 정도 자고 올라오다보니 고향이 점점 낯설어졌다.

새로 뚫린 도로, 우뚝우뚝 들어 서는 아파트들, 점점 번화해가는 거리들 때문에 추억 속의 장소들은 희미한 흔적만을 남긴채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사실 고향이라고 내려가도 밥집이나 술집말고는 특별히 마음을 끌어당기는 장소가 없었다. 

그런데 요즘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장소가 나타났다. 바로 '전주 한옥마을'이다.

 
     전주 한옥마을 전경

향교가 있던 동네라서 교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마을은 전부터 6백여 채의 한옥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어서 지방문화재로 지정됐던 곳이다. 그런데 수리도 못하고 살기도 불편해서 전주 시내에서도 가장 낙후된 동네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러던 이곳에 십여 년 전부터 전주시의 한옥살리기 지원 정책이 적극적으로 펼쳐지고, 한옥마을 지킴이와 같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모임이 활성화되고, 여러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어 행사도 하고 모임도 하더니 점점 독특한 문화공간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주의 남쪽 출입문이었던 풍남문,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전이 있는 경기전, 1914년에 세워진 전동성당, 한옥마을을 조감할 수 있는 언덕 오목대, 전주천 변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정자인 한벽당 등은 본래 이마을을 대표하는 유적지인데 그곳들에 둘러 싸인 한옥마을 곳곳에 새로운 문화 공간들이 생겨났다.



유서 깊은 전동성당의 주변 거리

 <혼불>의 작가인 최명희 문학관, 전통문화체험관인 동락원, 강암 서예관, 향교, 전주전통문화센터, 전주 한지 체험관인 한지원, 조선의 마지막 황손인 이석 씨가 머무는 승광재, 다도를 체험할 수 있는 설예원, 한옥생활 체험관, 술박물관, 공예관, 학인당, 교동 아트센터 등등 흥미로운 문화공간들이 계속해서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실개천이 흐르는 한옥마을의 거리

게다가 유명한 전주 한정식이나 비빔밥이나 콩나물 국밥을 맛 볼 수 있는 밥집과, 막걸리 한주전자를 시키면 눈이 휘둥그레지게 안주가 나오는 막걸리집과, 한옥에서 와인을 즐길 수 있는 와인바와 같은 특색 있는 밥집이나 술집이나 찻집들이 속속 들어서서 전주만의 독특한 맛을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서예가 김두경님의 <밥>이란 간판.

한옥마을은 이제 전주를 대표하는 관광지로서도 인기를 끌고 있고, 놀랍도록 활기가 생기고, 아름답게 가꿔지고 있다. 

나는 한옥마을 근처인 중앙동에서 태어났지만 내가 태어난 동네보다 한옥마을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전통문화가 현대의 삶 속에 녹아 든 훌륭한 본보기로서 너무 자랑스럽다.  

전통은 과거 삶의 흔적이다. 대부분의 전통은 나날이 서구화되어 가는 현대의 삶속에서 버림 받고 박물관의 유물로 남아 있게 되는 슬픈 운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전통이 박물관을 박차고 나와 현대인의 삶속에 살아 숨 쉴 때, 참다운 가치를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전통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현재이며 미래'라고 생각한다.

전주 한옥마을은 과거의 마을이었지만, 과거를 박차고 변화함으로서 '현재의 마을'이 되었고, 점점 더 전주를 풍성하게 해주는 '미래의 마을' 될 것이다. 

그 한옥마을에서 내가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새로운 마당이 펼쳐칠 예정이다. 


                2004년 전주 세계소리축제의 멋스런 포스터


한국소리문화의 전당이라는 극장에서 주로 공연되던 소리축제가 극장과 한옥마을 두 곳에서 동시에 펼쳐지게 되면 9월 22일 전야제와 함께 9월 27일까지 진행되는 축제 기간 동안 한옥마을의 야외에서, 마당에서, 곳곳의 사랑방에서 신명 나는 소리와 풍류의 향연이 벌어질 것이다. 

올해의 축제가 성공해서 해마다 그 무렵이면 한옥마을 전체가 예술과 문화의 축제로 들썩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주의 맛과 멋과 향기에 취해 행복해할 미래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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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부 장관 직을 그만 둔지도 어느 덧 2년이 되어 간다.
그동안 TV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연기자로, 연극 <밀키웨이>에서는 극작과 연출가로, 최근에는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위원장으로서 즐겁고 바쁘게 살고 있다.
 

내가「대왕 세종」에 출연하고 있을 때, 모 일간지에 동정 기사가 실렸는데 그 기사의 제목이 한동안 여기저기서 화제가 됐다.


김명곤 씨 “장관 껍데기 훌훌~ 다시 광대로”

“장관이라는 껍데기를 훌훌 벗어 버리고 이제 천직인 광대로 탈바꿈해야죠. 걱정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허허.”

김명곤(55·사진)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내년 1월 방송 예정인 KBS 1TV 사극 ‘대왕 세종’(극본 윤선주·연출 김성근)에서 배우로 복귀한다. 1999년 자신이 연출한 연극 ‘유랑의 노래’에 출연한 지 8년 만이다.

그는 그동안 국립극장장과 문화부 장관을 지내면서 연기와 멀어졌다.김 전 장관은 ‘대왕 세종’에서 고려 황실의 후예로 조선 왕조의 전복을 꿈꾸는 옥환 역을 맡았다. 옥환은 어린 세종을 긴장하게 만드는 인물로 초반 30회까지 비중이 큰 역할이다. 그가 대하 사극에 출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D일보 2007년 10월 6일자 기사 중 일부)

나는 대학교 다닐 때만해도 광대라고 하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코에 빨간 공을 붙인 서양의 삐에로를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줄타기하는 광대를 처음 보았는데 그 광대가 줄에 올라서서 “이 줄타기가 옛날에는 화랑의 기예였소!.” 하길래 깜짝 놀랐다. "화랑이라면 신라 시대의 무사 집단인데 줄타기를 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며 광대에 관한 기록을 찾아봤다.

우리나라에 그윽하고 오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며 유교, 불교, 도교의 3교를 포함한 것으로 민중을 교화하는 것이다.

신라 시대의 학자인 고운 최치원이 쓴 글이다. 이 글을 바탕으로 역사가인 단재 신채호는 이렇게 썼다.
 

선가(仙家)는 신라의 국선 곧 '화랑'으로 보며, 그 시원은 삼한의 소도(蘇塗)의 제관으로 고구려의 '조의선인(鳥衣仙人)'이다.

이런 글들을 보니 고대사회에서 예술가들은 하늘에 국가적 제사를 지낼 때는 제관으로서 활동했고, 그들의 신분은 왕족이나 귀족에 속하는 상류계급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통일신라가 무너지고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화랑들과 함께 예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천민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광대”라는 말은 고려시대에 서역에서 들어 와 우리말로 정착된 외래어인데, 예술가를 지칭하는 단어인 광대가 화랭이, 재인 등의 용어와 뒤섞이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광대들은 기생, 무당, 중, 백정 등과 함께 천민계급으로 살아야 했다. 이들은 사대부나 평민들과 한 동네에서 살지도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하고,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자기들끼리 기예를 전수하면서,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고, 그들만의 독특한 사회를 꾸려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광대들에 대해 다산 정약용은 이런 상소문을 썼다.

광대가 봄·여름이면 고기잡이를 좇아 어촌으로 모여들고 가을과 겨울이면 추수를 바라고 농촌으로 쏠리는데, 특히 창촌에서는 사당, 창기, 주파, 화랑, 악공들의 잡류들을 엄금해야 합니다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본 <왕의 남자>는 이 무렵의 떠돌이 남사당 광대패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실학사상이 일어나고 평민 가사, 탈춤, 판소리 등의 가치를 양반들 중의 몇몇이 언급하게 되면서 광대들의 가치가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고종과 대원군이 권력을 쥐었던 무렵에는 광대들이 왕족이나 고위 관리들의 잔치에 초대받고, 심지어 명인, 명창, 국창 등의 이름으로 궁궐에 들어가 임금 앞에서 기예를 선보이며 많은 돈을 벌고 신분의 상승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조선이 망한 후 광대들은 또 다시 천대받게 된다. 그 상황은 일제시대의 학자인 육당 최남선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조의 재인, 광대들은 적극적으로 특별한 권장을 입지 못하고, '무식무기력한 예인'들이 사회 최하층적 지위에서 구차히 존재하다 보니까 거기 쇠잔이 있을 뿐이지 발달이 없으며 저락이 거듭될 뿐이지 향상을 볼 수 없음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조건 하에 있다 보니까 '수 천 년을 하루같이' '몸을 놀리는 기술'과 '우스개 놀이'쯤에 그치고 드디어 다른 데 만한 순희곡적 생장을 이루지 못하고 만 것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명 풍화에는 조금도 유익한 바가 없으니 이는 연희를 실시하는 자가 학문이 없어 '동양의 부패한 풍습'만 알 뿐이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했던 <서편제>는 이 무렵의 떠돌이 판소리 광대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나는 대학시절에 오페라나 이태리 민요나 가곡이나 뮤지컬이나 비틀즈 등의 서구음악의 열광적 팬이었고, 괴테나 세익스피어나 입센이나 도스토에프스키 등의 서구문학(독문학)에 심취했던 사람이다. 그러다 우연히 판소리를 알게 된 후로 내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고향인 전주를 무지 싫어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의 흔적이 너무나 짙은 그 곳을 어서 떠나 서울로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진학공부를 했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도 한국을 빨리 떠나 독일로 유학 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인간문화재인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면서 전라도 말이 그렇게 다양한 표현과 영롱한 문학적 향기가 있는가를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핏줄에 대한 애정 곧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나의 조상과 조국에 대한 사랑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전통은 박물관에 진열된 골동품이 아니다. 전통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았던 삶의 내용과 형식 곧 그 분들의 삶의 자취이고 향기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세월이 지나면 전통의 계승자가 될 것이며, 언젠가는 전통 그 자체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나에게 전통은 ‘나를 숨쉬게 하고, 나를 활기 있게 만들어 주고, 또 창조의 열정에 불타게 하는 소중한 원천이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무식무기력’한 광대들에게서 내 예술의 많은 부분을 배웠다. 나는 ‘수천 년을 하루같이’ ‘동양의 부패한 풍습'을 몸으로 전해 온 그들의 예술에 매혹 당하고 심취하고 깊이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들의 ‘몸을 놀리는 기술’ 속에서 삶의 깊은 애환과 감동을 보았고, 그들의 ‘우스개 놀이’ 속에서 예술적 창조의 편린을 보았다. 그들은 나의 스승이었고, 나의 애인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 종족의 일원이 되고자 ‘광대’라는 말을 쓴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연기, 연출, 극작, 경영, 행정에다가 연극, 영화, 국악, 방송 등 여러 분야에 간여하는 것을 보고 혼란스럽다고 한다. 

당신의 정체는 뭔가? 아마도 이게 그들의 질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나는 그 모든 것을 추구하는 광대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럼 당신은 어떤 광대가 되고 싶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
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라는 책에 나오는 발렌친 카그다예프라는 브리야트 족의 샤먼과 저자와의 대화로 대신하고자 한다.

질문 : 당신 삶의 목표는 무엇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

답변 : 훌륭한, 혹은 좋은 샤먼이란 자신이 함께 살아가는 민족을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는 좋은 샤먼이 되고 싶고, 따라서 우리 민족이 서로 도와가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본다.-----사랑을 나누고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모든 샤먼이 지녀야 할 미덕이다.

반면 모든 악과 문제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과 자연과 사물을 착취하는 데서 발생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인내하고 이해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남을, 상대방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상대가 원하기 전에 그가 원하는 것을 먼저 베풀어 주는 것이 사랑의 첩경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현자와 성자들이 설파했던 조화와 사랑, 이것의 실천자로서의 샤먼 곧 ‘무당’의 역할에 대한 바이칼 샤먼의 지혜로운 말이 ‘광대정신’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광대란 '넓은 광(廣), 큰 대(大)'라는 말 뜻 그대로 ‘넓고 큰’ 영혼으로 세계의 불화와 고통에 정면으로 마주 서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온 몸으로 감싸 안고 표현하는 예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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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거실에는 사진이 4개 놓여 있다. 
부모님 사진 2개, 가족 사진 1개, 나의 어릴 적 사진 1개다. 그 중 내가 3살 무렵에 어머님의 품에 안겨 찍은 이 사진은 대학 다닐 무렵부터 언제나 머리맡에 놓고 다니던, 나의 분신과도 같은 사진이다.
 

*세 살 무렵, 우리집 정원에서 엄마와 함께.

이 사진을 바라 보면 너무도 행복했던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어렸을 적, 우리집은 전라북도 전주 시내에서도 가장 번화가인 중앙동에 있었다. 어머니는 <백합미용실>을 운영하며 백합처럼 우아하고 청초하게 사셨고, 아버님은 외갓집에서 운영하던 <풍성여관>의 지배인으로서 우리집과 처가의 살림까지 관리하던 믿음직한 가장이었다. 

그런데 내가 다섯 살 무렵부터 양쪽 집의 가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뒤로는 고사동, 태평동, 진북동, 중노송동 등 점점 시내에서 벗어난 외곽으로 이사를 다녔다. 집의 크기도 점점 줄어 들더니 나중에는 단칸 셋방에서 부모님과 6남매가 힘겨운 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철이 든 이후 나의 고향에 대한 기억은 가난과 우울로 채색되어 있다. 그 회색빛 추억을 뚫고 유일하게 어린 시절을 빛나게 해주는 사진이 바로 위의 사진이다.

그런데 내 아이들의 어린 시절은 어떤 추억들로 채워져 있을까? 한국예술종합학교 3학년으로 예술 경영을 전공하는 딸과 대학 입시생인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둘다 이구동성으로 "할머니, 할아버지 무덤!"이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과연 가족 사진첩을 찾아보니 아이들 어린 시절의 사진 중 많은 양이 부모님 산소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가난한 연극 배우로 살아가던 신혼 초, 집사람과 나는 명절이나 제사 때는 물론이고 아이들과 외출이라도 할려면 경기도 고양시의 시립공원묘지에 있는 부모님 산소에 가곤 했다.

* 세 살배기 딸과 부모님 산소 앞에서. 엄마가 찍은 사진. 

노원구 상계동에서 버스를 타고 불광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광탄 가는 버스로 갈아 탄 뒤, 산소 앞 동네에서 내려, 아이들을 안고 업고 터덜터덜 산소까지 걸어서 도시락 까먹고 놀다 돌아오곤 했다. 아이들이 조금 자라서는 함께 손을 잡고 걸어서 갔다. 어떤 때는 어린이날에도 놀이 공원에 데려갈 형편이 못 되어 부모님 산소에서 놀았다(?).

* 여덟 살 딸과 다섯 살 아들의 나들이. 오른쪽이 할머니 무덤, 왼쪽이 할아버지 무덤.

가난한 연극배우 가장을 따라 어린이날에 산소에서 먹을 도시락을 싸 준 아내, 불평도 없이 아빠를 따라 공동묘지의 잔디에서 놀아 준 아이들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은 무덤가 잔디 색깔인 초록색이나 황토색으로 채색되어 있지 않을까?  

놀이공원과 에버랜드와 선물과 외식과 여행으로 화려한 어린이날을 추억하는 아이들도 많을 것이고, 어린이날에는 그러한 추억의 하루를 보내는 어린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이 사회에는 어둡고 우울한 어린이날을 보내는 아이들과 부모들도 수없이 많다. 비록 허름한 도시락에 동네 근처 야산에서 보내는 하루일지라도 어린이날 하루만은 그 모든 아이와 가족들에게 사랑과 축복이 함께 하길 빈다.  


내 생각에 부모의 임무란,
아이들이 일생 동안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그 꿈을 열정적으로 좆을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것이다.

<랜디 포시의  '마지막 강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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