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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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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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울'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0.08.18
    '깊은 사랑'이 그리운 비취새, 안비취 명창 (4)
  2. 2010.05.23
    목은 꺾였어도 최고의 공력, 박봉술 명창 (6)
  3. 2010.05.02
    가야금 12줄에 꽃핀 여성 파워, 박귀희 명창 (8)
  4. 2010.04.22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박동진 명창 (24)
  5. 2009.08.26
    '쑥대머리' 임방울, 노전대통령 노제의 '추억' (28)
  6. 2009.05.08
    미친듯이 노는 인재가 나라를 먹여 살린다 (12)

1926년에 종로구 효자동에서 태어난 안비취 명창은 어려서부터 춤과 노래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신동이었습니다. 

"어려서 할머니가 내 당사주를 보면 춤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대요.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할머니가 어쩌다 무당을 불러다 집안에서 굿을 벌이면 하루 종일 구경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는 걸 흉내내곤 했지요. 학교 다닐 때도 춤추고 노래 부르는 소질이 뛰어나서 선생님들께 칭찬을 듣곤 했어요."
 
그러나 그녀가 춤 추고 노래 부르는 것에 대해 집안에서는 절대 반대였습니다. 아버지는 펄펄 뛰고, 오빠는 집안 망신이라며 동생이 노래 부르면 자살까지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녀가 말을 안 들으니까 목을 쳐서 죽여 버리라고까지 난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 죽어도 춤과 노래를 배우고 싶었던 그녀는 당차게 집을 뛰쳐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청운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니까 열세 살 무렵의 일입니다. 요샛말로 하자면 무단가출을 한 셈인데, 그녀의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하숙비와 학비를 보내 주신 덕에 청진동에 하숙을 구한 뒤 조선권번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조선권번에서 그 당시 궁중 음악과 궁중 무용의 최고 권위자였던 하규일 명인에게 꿈에도 그리던 춤과 노래를 배웠습니다. 예전에 권번은 그 학습 내용이나 분위기가 요즈음의 예술 학교보다도 더 엄격하고 열심이었습니다. 

하규일 명인은 이왕직 아악부에 계시면서 조선 권번의 학감을 겸했는데, 체구가 자그마한 분이 어찌나 엄하고 무서웠던지 모두들 어려워 말도 제대로 못 붙였다고 합니다. 

하규일 선생의 동상. 출처 : http://cafe.daum.net/abchouse/Yda/882

그녀의 예명인 '비취'도 하규일 명인이 지어 주셨습니다. 본명은 안복식인데 얼마 동안은 왜 그런 이름을 지어 줬느냐고 물어 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조금 지나서 슬그머니 물었더니 비취는 빨갛고 파란털을 가진 조그맣고 맵시 있는 새의 이름인데, 그녀의 인상이 그 새처럼 귀엽고 예뻐서 그렇게 지어 주셨다는 거였습니다. 

이처럼 겉으로는 엄했지만 속으로는 정도 있고 멋도 있던 하규일 명인에게 가곡과 가사와 함께 <춘앵전>, <연화대무>, <사고무> 와 같은 궁중 무용을 2년 동안 배우고 졸업을 할 무렵에 그만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하 명인이 돌아가신 뒤에는 수제자인 이병성 명인에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분들은 모두 궁중 음악과 궁중 무용을 하신 분들이라 민속 음악이나 민속 무용은 절대 못하게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민속 음악과 무용 쪽에 점점 더 끌려들어 갔습니다.그래서 선생님들 몰래 그 당시 민속 무용의 최고 권위자인 한성준 명인에게 승무를 배우고, 경·서도 민요의 최정식 명창에게 12잡가를 배웠습니다.

경·서도 민요는 '긴잡가'와 '잡잡가'로 나뉘어집니다. 긴잡가는 <유산가>, <제비가>, <춘향가>, <십장가>, <적벽가>, <선유가>, <출인가>, <박물가>, <평양가>, <집장가>, <형장가>, <달거리>의 12잡가를 말하고 잡잡가는 흔히 경기 민요니 서도 민요니 하는 것들입니다. 잡가라고 하니까 잡스러운 노래 같은 인상을 주지만 그게 아닙니다. 판소리의 다섯 바탕, 다섯 마당과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잡가 열두 마당, 열두 바탕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맑고 튼튼한 목소리를 타고 났습니다. 

"판소리하는 분들은 피도 토하고 똥물도 먹는다는데, 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한 번은 백일 기도를 하면 산신이 도와서 명창이 된다고 하길래 지금의 청와대 뒷산 약수터에서 백일 공부를 했는데, 그때도 목이 쉬지 않았어요. 새벽에 산책나온 노인들이 너무 연습을 많이 하면 목이 상한다고 조심하라고 했지만, 조금 부었다가 다시 풀리고 해서 이날까지 목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어요. 그렇게 공부를 하다가 최정식 선생님을 따라서 ‘깊은 사랑’ 에 간 뒤 소리꾼으로 인정을 받았지요."

예전에 땅속에다 움을 파고 방을 꾸며 놓고서 사람들이 모여 놀도록 되어 있는 곳을 '깊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반지하 사랑방' 같은 곳인데, 이름도 근사한 이곳이 음악가들에게는 사설 공연장 역할을 했습니다.

"선생님을 따라서 선배 언니들 하고 그곳엘 갔더니, 보료 깔고 병풍 치고 노인네들이 빙 둘러앉아 있는 거예요. 그곳에서 밤을 새워 소리를 했지요. 그분들이 말하자면 서울에서 소리 속을 제일 깊이 아는 귀명창들이예요. 그분들 앞에서 심사를 받은 겁니다.
큰절을 한 다음 단정하게 앉아서 시조 여창, 남창에서부터 긴잡가, 잡잡가까지 내리부르는데 꼼짝않고 앉아서 듣고 계시다가 중간에 잠깐 쉬면서 담배를 피우시고 다락문을 열어 연기를 뺀 다음 다시 꼼짝 않고 앉아 계시는 거예요.
저희들도 귤, 소금, 날계란만 조금씩 먹어 가면서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눈 한 번 못 돌리고 소리를 했지요. 하고 났더니 그분들이 이런 저런 평을 하시면서 유망하다고 하시더군요. 그때는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천정이 낮으니까 소리가 퍼지지 않고 내리 누르는 통에 혼이 났는데, 그래도 잘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뛸 듯이 기쁘더군요. 그게 말하자면 소리꾼이 되는 신고식 같은 거라고 할까요?"

그렇게 어려운 신고식을 치른 뒤부터 그녀는 방송에도 나갈 수 있게 됐습니다.

열다섯 살 무렵, 첫 방송을 나가게 됐을 때입니다. 잔뜩 긴장한 채 옷을 입고 화장을 하며 부산을 떨고 있자니 경성 방송국에서 보낸 차가 왔습니다. 최정식 명인, 선배 언니 둘, 그리고 대금 잘 불기로 유명하던 김기선 명인, 그녀 이렇게 다섯 명이 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어찌나 사지가 떨리는지 두 손으로 무릎을 꽉 잡고 벌벌 떨고 있었더니 김기선 명인이 그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비취야!"
"네?"
"내가 호도를 가져올 걸 그랬다."

그녀는 무슨 말씀인가 하고 어리둥절해서 대답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김기선 명인이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릎을 그렇게 꽉 잡고 있으니 무릎 사이에다 호도를 넣으면 깨질 것이 아니냐?"

차 안이 웃음바다가 됐지만 어린 그녀는 어찌나 떨리는지 웃지도 못했습니다. 방송국에 들어갔더니 다다미 방에 마이크가 있고 그곳에서 노래를 하는데, 김 명인이 또 그녀에게 농담을 하는 거였습니다.

"비취야!"
"네?"
"네가 명창이 되고 싶지?"
".........?"
"네가 명창이 되려면 이 마이크에다 큰절을 해라."
"아이, 싫어요!"
"싫으면 관두려무나, 여기 처음 오는 사람은 다 큰절을 하는데, 안 하는 사람은 명창이 못 된다. 그러니 명창되기 싫거든 그만둬라."

안비취 소녀가 둘러보니 김 명인의 얼굴 표정이 아주 진지하고, 주위 분들도 그렇다는 표정들을 하고 계셨습니다. 소녀는 쑥스럽긴 했지만 큰절 한 번하고 명창 소리 듣는 게 낫겠다 싶어 마이크 앞에 엎드려 곱게 큰절을 했습니다. 그러자 또 한 번 웃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뒤 두고두고 그 일이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참 소박했던 시절의 일화입니다.

그때가 1940년이 지났을 때이니 한창 태평양 전쟁중이었습니다. 

공출하고, 징용나가고, 아주 험악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녀는 선배나 선생님들을 따라 군부대에 위문 공연을 다니며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때 국악이 없어질 뻔했어요. 가사까지 일본말로 불러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실망도 되고 회의도 생겨서 열여덟 살에 강기준이라는 은행원의 재취로 들어갔지요."

해방 후에는 승무, 판소리, 민요, 민속, 만담을 한데 섞어 가설 무대를 꾸민 단체와 함께 다니기도 했습니다. 신불출이라는 불세출의 만담가가 꾸민 단체였습니다.

"신불출씨는 정말 대단한 분이셨어요. 안경 쓰고 인물은 못 생겼는데, 어찌나 재주꾼인지 말도 못 해요. 그 분이 만담을 하면 울다 웃다 사람들이 정신을 잃을 지경이예요. 연극에 연출에 만담에 모두 다 천재예요. 거기다가 왜정 때는 유치장을 자주 드나드셨지요. 만담 중에 애국적인 말을 꼭 집어넣었거든요. 겁 없이 막 해댔죠. 6.25때 북으로 올라가셨다는데 지금은 어찌 됐는지 몰라요." 

그러나 유랑극단의 고생은 말로 다 못 할 지경이었습니다. 출연료를 못 받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밥값 못 내서 여관에 잡혀 있기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래도 그때가 그립네요. 요새는 주로 현대식 극장에서 공연을 하지만, 분위기나 관중과의 일체감이 옛날의 가설 무대만 못한 것 같아요." 

1959년 해방 후 처음으로 <춘향전>을 가지고 일본에 교포 위문 공연 갔을 때의 일화도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연출은 최상덕과 이서구와 박진 씨가 공동으로 맡았고, 박귀희 명창과 임춘앵 명인이 번갈아서 이도령을 맡았고, 연극 배우 복혜숙 씨가 고창현감, 그 당시 최고의 판소리 명창이었던 임방울 씨가 운봉현감을 맡았고, 그녀는 행수 기생을 맡아서 변사또 잔치 때 '춘향무'를 잠깐 췄습니다. 

"하루는 임방울 씨한테 제가 불평을 털어 놨지요. 지루해서 못 살겠으니 얼른 고국에 갔으면 좋겠다구요. 그랬더니 ‘그거 큰일났군요.’ 하시대요. 
그날 저녁 고오베에서 공연을 하는데 이도령이 어사출도를 해서 난리가 난 판인데, 객석에서 ‘와’ 하며 웃음소리가 나는 거 아녜요? 그래서 보니 운봉현감 분장을 한 임방울씨가 빤스만 입고 아랫도리를 홀랑 벗은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더니 장치로 쓴 기둥에 올라갔다 미끌어지곤 하며 난리를 부리니 이도령이고 춘향이고 배를 잡고 난리가 났지요.
어찌어찌 그 장면을 간신히 끝내고 나오니까 임 선생님이 ‘이젠 지루한 게 좀 풀리셨습니까?’하시는 거예요. 어찌나 우스웠던지 지금도 기억이 새로와요."

출처 : http://www.gugakcd.pe.kr/music_detail.a...SSCD-011

1962년에 초대 회장 이소향 씨 뒤를 이어 2대 민요연구회 회장이 된 뒤 우리 음악의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다 1975년에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영달보다 우리 음악의 쇠락에 대해 더 마음 아파했습니다. 

“옛날에는 후진들이 좋은 선생님 모시려고 돈을 싸가지고 다녔지요. 요샛말로 레슨을 한 번 받으려면 학비 말고도 담배 사드리고 양칫물 떠다 드리고 갖은 정성을 다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가 되었어요. 선생님이 제자를 모셔야 돼요. 소리 공부 열심히 하라고 나무라면 오히려 제자들이 선생님같이 고생하고 사시려면 뭐하려고 배우느냐면서 나를 나무란답니다.
그러면 내가 한마디 하지요. 내가 처음 이걸 배울 때는 돈을 벌려는 것도 아니었고, 인간 문화재 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소리가 좋아 소리에 미쳐서 집까지 뛰쳐나와 노래부르고 살다 보니 예까지 왔다. 노래 못 부르면 죽는다 하고 스스로 미쳐서 해야지 돈 벌려고, 인기 얻으려고, 문화재 지정받으려고 하다 보면 좋고 바른 소리가 나오지 못하는 법이며 곧 실망할 것이라고 하지요. 헌데 그 말이 먹혀 들어가질 않아요.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죠.”

출처 : http://www.gayo114.com/musicColumn/musi...Fno%3D71

서른네 살 때 남편을 잃고 혼자서 자녀들을 훌륭하게 길러낸 그녀는 노래하다가 죽을 수만 있다면 행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소망대로 1997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곱고 화사한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다가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화려하고 밝은 모습 한켠에는 우리 음악의 미래에 대한 어둡고 쓸쓸함이 묻어 있어 저를 가슴 아프게 했습니다.

"말할 수 없이 외롭습니다. 소리를 들어 주는 사람도 갈수록 줄어들고, 제자들도 딴 생각만 하고, 방송에서까지 외면당하는 실정이니 더 외롭지요. 수백 년 수천 년을 내려온 우리 노래들이 수십 년 사이에 대중가요의 그늘에 묻혀 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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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스피어에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목은 껶였어도 소릿길을 빛낸 박봉술 명창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새벽 3,4시, 옆에서 쿨쿨 잠을 자고 있는 어린 아들의 입에 아버지가 앵두사탕을 슬며시 넣어 주며 흔들어 깨웁니다.

“봉술아, 봉술아!”
“.....예!”
“잠이 깨냐?”
“예!”
“그럼 아버지 따라 해봐라. 둥둥둥 내 사랑 어허 둥둥 내 사랑----”
"둥둥둥 내 사랑 어허 둥둥 내 사랑"
 
소년은 어렴풋한 잠결에 앵두사탕을 빨아 먹으면서 아버지를 따라 판소리를 부릅니다. 자신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차세대 명창으로 승승장구하던 아들 박봉래가  33세의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뜨자, 박만조씨는 이제 막 10살을 넘은 막내 아들 봉술에게 자신이 직접 판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21년에 전라남도 구례군 용방면 중방리에서 박만조씨의 5형제 중 막내로 태어 난 박봉술 소년은 이렇듯 아버지의 판소리에 대한 집념 때문에 소리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한약방을 운영하던 그의 부친은 오래 전부터 판소리에 심취해 있었는데, 특히 송만갑 명창과 교분이 두터워서 그에게 판소리를 직접 배우기도 하고, 큰아들인 박봉래를 그의 제자로 집어넣어 소리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 꿈이 꺾이자, 형에게 판소리를 배우던 막내아들에게 당신의 꿈을 걸어보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동네 친구들과 놀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던 봉술 소년은 차츰 판소리에 재미를 붙여 낮에도 열심히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그 뒤 ‘꽃기운이 올라’ 소리에 힘도 생기고 소릿길에 눈이 뜨이자, 명창이 되어 일세를 울리려는 욕망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리하여 16
살에 서울로 상경한 봉술 소년은 드디어 <조선성악연구회>에서 꿈에도 그리던 송만갑 명창을 만나 그에게 소리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송만갑 명창은 구한말과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이 나라 방방곡곡에 이름을 드날린 최고의 명창입니다. 박봉술 명창의 회고에 따르면 ‘송 명창 사진만 보아도 오갈이 들어서 소리 못하는 명창이 많을’ 정도로 뛰어난 명창이었습니다.

“우리 선생이 소리만 허시면 그 자그마한 몸 어디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쇳소리 같은 '철성'이 몸으로 파고든단 말이여. 그러면 등골이 오싹오싹혀지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 있들 못허게 헌단 말여.
그리고 이 대목이 좋으면 저 대목이 좋고, 저 대목이 좋으면 이 대목이 좋고 해서 마디마디 소리가 좋고, 또 어떻게나 '상청'이 잘 나는지 상청을 질러대면 앵벌 날아가는 소리가 에--엥 에--엥 허고 나와서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단 말여.
거그다 또 같은 노래를 헐 때마다 달리 혀. 말하자면 즉흥적으로 작곡도 허고 편곡도 허는 거지. 그런디 그것이 또 이렇게 불러도 좋고 저렇게 불러도 좋아. 수만 번을 불러서 소리를 뚜르르 꿰고 있으니 그런 재주가 나오는 거지. 우리 선생님이 그만큼 공력이 좋았어.”

박봉술은 “나는 평생에 우리 송선생님 한 분한테만 소리를 배웠다”고 말할 만큼 송만갑 명창의 소릿제를 많이 물려받은 명창입니다.

송만갑 명창(좌)과 박봉술 명창(우). 출처 : http://news.d.paran.com/snews/newsview2...r%3D2009

그렇듯 소년 명창으로서 귀여움을 받으며 공부를 하고, 밤에는 ‘놀음’ 다녔습니다. 놀음이란 요샛말로 밤무대를 뛴다는 말인데 그때의 이름난 요정인 명월관, 식도원, 국일관과 같은 곳에 불려가서 판소리를 하면 어른 명창의 절반 값인 5원이 출연료인 ‘소리채’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1년쯤 지났을 때 갑자기 목이 ‘괄리기’ 시작했습니다.

변성기가 되어 목이 잘 쉬고 고음이 나지 않고 소리가 탁해지는 것을 목이 괄린다고 합니다. 그럴 때는 소리를 잠시 쉬거나 성대를 보살펴가며 연습해야 하는데, 조급한 마음에 
고향으로 내려 와 지리산의 쌍계사에서 백일 공부를 혼자 시작한 것이 평생의 탈이 되고 말았습니다. 너무 무리한 나머지 안타깝게도 목이 ‘꺾이고’ 만 것입니다.

예전과 같은 맑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탁한 음색으로 변하고, 고음은 꽉 잠겨서 나오지 않으니 
그는 울적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왓습니다. 그 다음 해에 타고 난 목청과 애간장을 녹이는 목구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임방울 명창을 따라 일본 순회공연에 참가했지만, 목이 꺾인 그는 보잘 것 없는 단역을 맡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석 달쯤 순회공연을 한 뒤에 다시 고향에 돌아 오기도 하는 동안 해방이 되고 창극단들이 ‘비온 뒤 대나무 순 열리 듯’ 자꾸자꾸 생겨 이 단체 저 단체 따라 다니며 재미있는 일도 많이 겪었고 고생도 ‘직사하게’ 했습니다.

그럭저럭 결혼도 하고 전라남도 순천시로 이사해서 살게 되었는데,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여순반란사건’을 겪게 되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4·3사태가 확산되자, 이승만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국군 제14연대를 급파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지창수·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민간인을 학살할 수 없다고 반발하며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친일파 처단'과 '조국통일' 등의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켜 일대 혼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번은 길을 가다가 반란군의 검문에 걸렸는데, 손을 내밀어보라고 해서 내밀었습니다. 그랬더니 느닷없이 뺨을 때리면서 “이거 개놈의 새끼 아니냐?”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손이 하얗고 못이 안 박혀 있으니 일 안 하고 놀고먹는 반동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저, 저는 소리 허는 사람입니다“
“소리가 뭐냐?”
“창이요.”
“창? 창이 뭐냐?”
“노래요.”
“노래? 그럼 노래 한번 해봐라”
"(두 손을 하늘로 올린 채 벌벌 떨면서) 둥둥둥 내 사랑 어허 둥둥 내 사랑.....”
“오, 그게 소리구나. 너 그럼 이승만 찬양하고 김일성 나쁘다고 노래 안 했냐?”
“아뇨. 나는 춘향가, 흥보가 이런 노래만 부르요.”
“그럼 우리 김일성 수령 동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봐라.”
“나는 그런 거 부를 줄 모르요. 그저 옛날 선생님한테 배운 노래만 겨우 부를 줄 아요.”

그 말을 들은 반란군은 허허 웃더니 공중에다 대고 총을 한 발 쏜 다음 어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도 당원들이 수시로 찾아 와서 공산당에 가입해서 소리로 활약하라고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섭고 싫어서 못 마시는 막걸리를 잔뜩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게 취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날은 편하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도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취한 척 하며 드러누워 버리곤 했습니다. 그 '술' 덕분에 어지러운 시절을 죽지 않고 간신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 뒤 순천에 국악원이 생기자 소리선생으로 지내면서 점차 술이 늘어갔습니다. 남모를 괴로움이 그를 점점 술꾼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소리를 안 알어줘. 바디는 좋고 공력은 있다고들 하지만 목이 꺾였응께 알어주는 사람이 드물어. 기껏 힘들여서 소리허고 나면 오천 원, 만 원씩 던져주니 오장이 상허고 울화가 나서 에잇 잡것, 나도 먹을 것이나 실컷 먹고 시간이나 때우자 허고 같이 앉어서 술을 먹어 버려”

이런 저런 울화가 쌓여 나중에는 ‘술이 봉 걸리 박’이란 별명까지 얻을 만큼 '술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한때는 공부에 정진하려고 술을 끊어보기도 했습니다.

“한 삼 년 끊어 봤제. 그런디 술을 안 먹고 조심을 혀봐도 별것이 없어. 영양실조만 걸려”

그래서 차라리 ‘영양가 있는’ 안주를 먹으면서 술을 마시는 게 몸에도 좋고 정신에도 좋을 것 같아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틈틈이 소리꾼으로서 활동을 하였지만 쟁쟁한 명창들의 그늘에 가려 그의 소리는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러다가는 평생의 공부가 죽도 밥도 안되겠다 싶어 '이를 갈고' 성공해보자고 결심한 끝에 1970년에 혼자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열심히
제자를 가르치고 공연 활동도 활발하게 한 보람이 있어 드디어 52살 되던 해인 1973년에 판소리 「적벽가」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판소리에서 무엇보다 '공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명창이었습니다.


'공력'이란 소리를 짜나가는 솜씨를 일컫는 말입니다. 목청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소리의 흐름과 가사 내용이 조화를 이루고, 가지고 나가는 소릿길에 무궁무진한 변화가 있고, 장단의 이음새가 자유자재하여 천변만화, 조화무궁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공력이 높다고 합니다. 제아무리 목청이 좋고 고음과 저음을 마음대로 구사하여도, 변화가 없이 무미건조하게 소리를 하면 공력이 없다고하여 높이 쳐주질 않습니다.

“옛날 명창들 소리를 들으면 가지고 나가다가 느닷없이 신기허고 묘헌 소리가 나온단 말여. 헌디 요즘은 그런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

그것도 그럴 것이 요즘은 문화재 전수에 지나치게 많은 비중이 주어져서 스승에게 배운 그대로 하지 않고 가사 하나 장단 하나만 바꾸어도 큰일 나는 줄로 알고 있으니, 개개인의 개성과 특성이 살아나지 않고 비슷비슷한 ‘복사 소리’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요즘 학자나 이론가들이 동편제니 서편제니 나누는디 나는 그런 거 안 따지네. 동편제는 무겁고 맺음새가 분명허고 서편제는 애원성이 많고 끝을 길게 끌고 허는 특징들이 있다고들 허지만, 그런 것들이 서로 오고가며 배우고 가르치고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은 뚜렷하게 구별 지을 특성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어. 괜스리 파벌만 생기고.
옛날에는 누구한테 배웠든지 간에 그 사람이 소리 잘 허먼 알아줬고 선생님한티 배운 것도 자기가 자꾸 고쳐감서 자기에 맞는 소리로 짰던 것이지 요새처럼 그렇게 빡빡허게 허들 안했어”

그의 소리를 처음 들어 보는 사람들은 안으로 꽉 잠겨서 탁한 음색이 나오고, 고음으로 올라갈 때는 가늘게 뽑는 가성인 ‘암성’으로 들릴 듯 말듯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왜 그를 명창이라고 하는지 의심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자꾸 듣게 되면, 저음인 ‘하성’의 웅장함과 걸걸함, 그리고 소리를 질질 끌거나 잔 멋을 부리지 않고 곧 ‘소리에 꼬리를 달지 않고’ 씩씩하고 꿋꿋하고 거뜬거뜬하게 몰고 나가는 남성다운 소릿길, 그리고 아기자기하고 변화무쌍하게 구사하는 장단의 변화, 들으면 들을수록 감칠맛이 나고 깊이 있고 무게 있는 그의 소리에 점점 끌려 들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의 소리가 나라에서 제일 공력이 많은 소리라고 감탄을 하게 됩니다.



비록 '목이 꺾여' 한세상을 울린 명창은 못 되고 말았지만 어느 명창보다 소리 연륜이 깊고 공력 높은 스승에게서 갈고 닦은 덕에 누구에게도 공력이 뒤떨어지지 않던 그는, 후학에 대한 안타까움을 남긴 채 1989년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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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생소한 분들이 많고, 내용도 그리 흥미롭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미래의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스피어에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판소리와 가야금병창으로 화려한 예술의 꽃을 피우다 돌아가신 박귀희 명창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본디 남자들만의 독무대이던 판소리계에 여성 명창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부터입니다.

신재효의 제자이고 대원군의 사랑을 받던 진채선이라는 명창이 나타난 이후로 이화중선 명창이 일제 시대에 대단한 인기를 끌자, 수많은 소녀들이 판소리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박녹주, 김소희, 박초월 명창과 더불어 판소리계에서 여성의 지위를 한껏 높인 박귀희 명창도 그런 소녀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1921년 2월 6일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서 태어난 오계화 소녀(훗날의 박귀희 명창)는 대구시 봉산동에 있던 외갓집에서 대구 공립보통학교에 다녔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길 건너 작은 집에서 날마다 노래소리가 들려왔는데, 자기도 모르게 그 소리에 끌려 어린 기생들이 배우는 단가와 판소리를 귀동냥으로 익혔습니다.

어떤 때는 학교를 빠져가며 몰래 따라 배웠고, 반 년쯤 지나면서부터는 가까이 가서 큰 소리로 따라 불렀습니다. 그러니 소리 선생인 손광제의 눈에 안 뜨일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선생이 불러서 이름을 묻고 소리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인지라 귀동냥으로 익힌 <만고강산>이라는 단가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선생은 당장 외갓집에 찾아가서 명창 될 소질이 있으니 국악을 가르치라고 권했습니다. 

선생은 그녀를 당대의 최고 여성 명창인 이화중선에게 소개시켰고, 그녀의 소리를 들어 본 이화중선 명창은 바로 입단을 허락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을 따라 순회 공연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조선팔도는 물론이고 만주, 훈춘, 봉천까지 다녔어요. 물론 고생을 무척했지만 그때는 오로지 명창 되려는 생각에 참을 수 있었지요. 자나 깨나 명창 될 생각뿐이고, 꿈을 꾸어도 명창 꿈을 꿨어요. 닭을 먹을 때도 목소리에 좋다는 울대만 먹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명창 꿈에 부푼 소녀에게 떠돌이 창극단 생활은 차분히 공부할 시간을 마련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음해 여름, 공연이 없어서 단체가 쉬고 있을 때 고향으로 내려 가 대구의 용인사에서 조학진 명창에게 100일 공부를 하며 <적벽가>와 <춘향가>를 배운 뒤, 19살 때에는 김소희 명창과 함께 광주 지실마을에 살고 있는 박동실 명창을 찾아 가 <흥보가>와 <심청가>를 배우고, 21살 때에는 하동 쌍계사에서 임방울 명창과 함께 유성준 명창에게 <수궁가>를 배웠습니다.

이렇듯 틈틈이 연마한 솜씨를 인정받아 임방울, 박초월과 함께 ‘동일 창극단’ 조직했을 때에는 주인공 역할을 도맡아 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그녀의 목소리가 굵고 낮은 탓에 흥보나 이도령과 같은 남자 역할을 가끔씩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뒷날 여성 국극단을 탄생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해방 전에 일본에 레코드 취입하러 갔을 때에 ‘송죽가극단’이라고 하는 여자들만으로 만들어진 단체 공연을 구경했는데 기가 막히게 잘해요. 연기며 의상이며 노래며 춤이며 나무랄 데가 없고, 관객들의 반응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나라도 저런 단체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남자들하고 단체 생활을 하다보면 연애를 하고 애기를 낳아서 애기까지 끌고 다니는데, 여관의 좁은 방에서 애기 기저귀 널어놓고 복작거리는 생활이 지겹다 못해 환멸감까지 느낄 지경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오랫동안 여자들만으로 만들어진 창극단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해방 뒤에 박녹주 선배하고 상의했더니 대뜸 좋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김소희, 임유앵, 임춘앵, 김경희씨와 함께 '여성 국악 동우회' 만들었는데 뜻밖에 관중들의 반응이 좋았어요.”

1949년 2월에 김아부가 쓴 <햇님 달님>을 서울의 시공관에서 공연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놀라운 인기를 끌었습니다. 햇님 왕자는 박귀희, 달님 공주는 김소희, 햇님 아버지를 박녹주가 맡아서 했는데 우리나라 처음으로 여성들만 출연하는 창극인데다 의상과 무대장치가 화려하다보니 특히 여성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공연장의 유리창이 수없이 부서졌습니다. 부산의 공회단에서 공연을 할 때는 임신 열 달째가 된 부인이 사람들 틈에 끼어 빠져 나가지 못해 그 자리에서 해산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 젊은 처녀들이 햇님 왕자를 만나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통에 변장을 하고 달아나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인기 덕에 “돈을 가마니에 쓸어 담을 만큼” 많이 벌자 수많은 여성 국극 단체들이 생겨나서 야담이나 전설들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6.25이후로 여성 국극은 점점 인기를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할 때는 궁녀 한 사람이라도 창을 잘 하고 잠깐 나오는 엿장수 한 사람이라도 소리 실력도 있고 연기도 좋아서 손님들이 좋아했는데, 단체가 많아지다 보니까 한 단체에 두세 사람만 소리를 잘하고 나머지는 소리 들을 맛도 없고 연기 볼 맛도 없고, 아마 그래서 손님이 떨어진 것 같아요.”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0449293

그녀는 판소리를 주로 닦아 온 명창이었지만 가야금 가락에 판소리 한 대목씩을 얹어서 부르는 ‘가야금 병창’에도 명인의 경지에 이른 솜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솜씨 때문에 1971년에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을 때는 곤혹스러운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지정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판소리로 해야 될지, 가야금 병창으로 해야 될지 한동안 말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가야금 병창을 하는 사람은 드물고 귀하니까 그 맥을 잇는 의미에서 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의 예능보유자가 됐지요.”

그녀가 가야금과 인연을 맺은 것은 15살 무렵이었습니다. 처음 만난 선생은 강태홍 명인이었는데 그녀는 이상하게도 가야금에 깊이 빠져 들었습니다. 그 뒤 창극단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가야금 병창의 일인자이며 창극계의 명배우로 알려진 오태석 명인에게 열심히 가야금을 익혔기 때문에 어느덧 그녀의 솜씨는 스승의 법통을 이어받은 유일한 후계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출처 : http://jigurecords.co.kr/bbs/board.php%...page%3D4

“내가 이 길로 가려고 태어났는지 어려서부터 뭐든지 배우면 남보다 빨리 익혔어요. 하나를 배우면 그 다음 것까지 알아낼 정도였으니 선생님들이 모두 놀라면서 귀여워해 주셨지요.”

그녀는 제자 복이 많아 재능이 뛰어난 제자들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현재 판소리계 최고의 프리마돈나인 안숙선 명창 그의 제자요, 연극과 마당놀이와 뮤지컬을 오가며 눈부신 재능을 발휘하는 배우 김성녀도 그의 제자요, 강정숙·오갑순 등은 그녀의 법통을 이어받은 가야금 병창의 명인이요, 박범훈·김덕수 등 국악계의 리더로 활약하고 있는 명인들도 그녀의 제자입니다.

게다가 재복도 많아서 대부분의 국악인들이 말년을 가난하고 불우하게 보내는 데 비해서 그녀의 말년은 윤택하고 풍요로웠습니다. 종로구 운니동에 있던 전통 한옥식 여관인 ‘운당여관’의 여주인으로서 그녀의 경제력은 국악계의 어느 누구보다도 탄탄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재산을 1960년대에 박헌봉, 박초월 명창 등과 함께 설립한 '국악예술학교'를 위해 쾌척한 일로 국악인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녀는 후진들을 가르치고 국악계의 어른으로서 바쁜 말년을 보내다가 1993년 7월 14일에 이 세상을 떴습니다.

박귀희 명창은 저의 스승인 박초월 명창 언니라고 부르며 각별하게 지낸 사이여서 저는 스승을 따라 그녀의 공연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가야금 병창을 할 때면 판소리로 익힌 목 성음과, 창극을 하면서 익힌 몸짓과, 가야금으로 익힌 우아함이 서로 어우러져서 잠시도 관객의 한 눈을 팔지 못하게 했습니다.

쪽진 머리에 산호잠을 찌르고 화문석을 깐 무대에 앉아, 무릎에 가야금을 올려놓고 어깨춤을 추며 손으로 가야금 줄을 희롱하는 그 몸짓은 너무도 화사하고 흥겹고 교태가 흘러넘쳤습니다.

그녀가 가야금을 안고 노래를 부르는 순간, 사랑과 이별로 얼룩진 한 많은 세월이 어느 새 화사하고 밝고 아름다운 꿈의 세월로 변하고 마는 느낌을 받았던 나는 위대한 예술의 힘에 그저 놀라고 감탄하고 도취할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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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송흥록 명창, 박초월 명창, 임방울 명창, 박녹주 명창 등 명인명창에 대한 이야기를  띄엄띄엄 올렸는데 앞으로는 좀더 자주 전에 제가 발표했던 명인명창에 대한 글들을 손질해서 올려볼까 합니다. 그래서 '명인명창 이야기'라는 카테고리도 만들었습니다. 
아마 네티즌들에게는 생소한 분들이 많고, 내용도 그리 흥미롭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미래의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 끝에 시작합니다. 첫번째 타자는 대중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으로 박동진 명창을 선택했습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아마 판소리는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이 말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겁니다. 박동진이라는 노명창이 CF 광고에 나와서 한 대사지요. "또 제비 후리러 나간다~"하는 소리 대목도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겁니다. 모두가 박동진 명창의 광고 속의 멘트가 히트한 결과 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처음부터 판소리계의 스타로 활동한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50세가 넘어서야 명창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06/asp/ce...21203303

그 놀라운 집념과 열정의 이야기를 펼쳐 볼까 합니다. 
 
1968년에 국립국악원 강당에서 박동진이라는 소리꾼이 <흥보가>를 5시간 동안 쉬지 않고 완창한다고 하자 국악계에서는 ‘참 별일이 났다’고 수군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박동진이라는 소리꾼은 그때까지만 해도 김연수, 임방울, 김소희, 박초월과 같은 쟁쟁한 명창들의 그늘에 가려 별로 이름을 내밀지 못하던 소리꾼인데다가, 그런 소리꾼이 소리 한바탕을 완창으로 부른다는 것은 보통 무모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5시간을 쉬지 않고 불러 젖히는 데다가, 그 소리목이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힘이 있고, 고음과 저음을 마음대로 구사하였으며, 몸짓과 대사가 구성지고 익살맞고 재미있어서 5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가 버리자 그 소리판을 구경한 관객들과 소리꾼들과 기자들이 모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 이듬해에 <춘향가> 한바탕을 그 당시 명동에 있었던 국립극장에서 8시간 동안 쉬지 않고 부르자 소리 솜씨는 제쳐 두고라도 어떻게 한 인간이 8시간이나 계속해서 소리를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얘기로 온 장안이 시끌시끌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박동진이라는 소리꾼은 쟁쟁한 판소리 명창들의 대열에 끼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완창 소리꾼으로 이름이 높아졌습니다. 그 뒤 많은 소리꾼들이 그의 성공에 힘입어 완창 판소리 발표회를 가짐으로써 완창 발표가 마치 유행처럼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다른 소리꾼들은 일생에 한두 번 하기도 어려운 완창 소리판을 그 뒤로도 일 년에 한 번 또는 두 번씩 쉬지 않고 열었던 그의 정열과 집념은 무섭고 놀랍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어려운 일을 이를 악물고 해낸 데에는 그의 실패와 좌절이 큰 몫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1916년 7월 12일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무룡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 대에 몇 백 석을 거두며 부유하게 살던 그의 집안은 이미 아버지 대에 가세가 기울어 그는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 겪는 배고픔과 설움을 일찍부터 체험해야 했습니다.

여덟살이 될 때까지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익힌 그는 충남 대덕군 진잠면에 있는 진잠 보통학교를 4년 만에 어렵게 졸업한 뒤 대전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는 학비를 대기가 힘에 부쳤지만 아들이 중학교를 졸업한 뒤 면서기라도 해서 집안 살림을 도와줄 것을 기대한 그의 아버지는 꼬박꼬박 학비와 하숙비를 대주었습니다.

그렇게 학교를 다닌 지 4년이 되어 졸업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그의 앞날을 확 바꿔 놓고 집안에 평지풍파를 일으킬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지금 대전극장이 들어 선 자리에 <협률사>라는 단체가 들어와서 소리판을 연다기에 무심코 구경을 갔다가 그만 넋을 빼앗긴 것입니다.

조선 천지를 들썩이게 하던 이동백, 이화중선, 이중선, 장판개, 김창룡과 같은 최고의 명창들이 벌이는 소리판에서 넋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목석같은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소년 박동진은 온 몸이 달아오르고, 등에 소름이 끼치고, 귓전이 간질거리고, 오금이 저려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린 소년의 마음에 불을 지펴놓고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버렸습니다. 소년은 며칠 동안 학교 공부도 집어치우고 무대에 서서 소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다가 한숨을 쉬며 신세를 한탄한 끝에, 그예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소리를 배우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마침 이동백 명창의 고수로 따라다니던 지동백씨가 연기군에 산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지동근은 판소리로 이름을 날릴 만할 때에 목이 나빠져서 판소리를 그만 두고 땅재주를 하거나 북을 치면서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지동근은 자기는 판소리를 가르칠 수 없다며 “청양군 정산면 백공리에 가면 손병두라는 사람이 있는데 바탕소리는 못하지만 토막소리는 맛있게 잘 한다“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길로 집에 돌아 와 부모님께 자기의 결심을 여쭸습니다.

짐작한대로 아버지는 노발대발하고 매를 때리고 욕설을 퍼붓기까지 했습니다. “몇 달 있으면 졸업인데 무슨 미친 병이 들어서 광대짓을 하려느냐”고 펄펄 뛰며 야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집을 꺾지 않고 집을 나와 버렸습니다.

그때가 18살 되던 해 여름이었습니다. 물어물어 손병두씨 집을 찾아가서 나무도 하고 꼴도 베어 주며 머슴살이를 하다시피 일 년을 지내며 소리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사랑가'나 '옥중가' 같은 토막소리를 반 년쯤 배우고 나니 손병두씨도 가르칠 밑천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을 눈치 채고 선생 곁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손 선생의 부친인 손필모씨가 청양군 청장면에 있는 미륵당이라는 집에 그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 집은 행세깨나 하는 양반 집안이었는데 인사를 마치고 술상이 들어온 뒤, 주인 영감의 명령이 떨어지자 아들, 손주, 며느리들이 저마다 가야금, 거문고, 피리, 젓대, 양금, 해금 등을 끼고 앉아 '풍류'를 연주하는 것이었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풍류 가락에 넋을 잃고 연주가 끝났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앉아 있는데 손필모씨가 “이놈이 내 아들 제자인데 소질이 있는가 없는가 봐 주시요”하고 소개를 했습니다.

장구를 치던 주인 영감은 “어디 한 번 소리를 들어 보자”면서 북을 가지고 앉았습니다. 그래 겁을 바짝 내며 손병두에게 배운 소리를 하고나니 영감이 “네가 소질이 있기는 있는데 명창이 되려면 지금 선생으로는 안 된다. 이 집은 선배 대명창들이 한 번씩 다녀가셨던 집이다. 서울에 가면 정정렬 명창이 있는데 그 분이 <춘향가>는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러니 그 분한테 배우도록 해라”하며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길로 손병두 선생을 떠나 정정렬 명창을 찾아 서울로 올라가는데 일이 안 되려는지 도중에 서울 못 갈 일이 생겨버렸습니다.

터벅터벅 걸어서 유성까지 나왔을 때 마침 공주의 부자인 김 갑순이 궁술대회를 열고 기생들을 데리고 노는데, 저녁에 천막을 쳐 놓고 사당패들이 소리판을 벌이는 걸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구경꾼들 틈에 끼어 소리를 듣는데 이미 소릿길을 조금 안 그의 귀에 사당패의 장바닥 소리가 가소롭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자청해서 무대로 올라가 소리를 한 마디 했더니 “야, 그거 투가리보다 장맛이다”하며 “재청이요, 산청이요” 한 것이 오청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리를 끝내고 잠을 자려는데 느닷없이 곱게 차려 입은 중년 여인이 찾아와서 “아까 소리한 학생이 누고? 니 우리 방에 온나”하지 않겠습니까? 그 여자를 따라 여관으로 가니 의젓한 중년 신사가 앉아 있다가 “내 김천 서 치과의사하는 사람인데 너 김천 가서 기생 선생할래?”하며 이 말 저 말 얘기를 했습니다. 들어보니 그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생겨 두말없이 그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올라가려다가 거꾸로 내려가게 된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그는 중년 여인이 경영하는 진양옥이란 선술집에서 손님 앞에서 소리하며 하룻밤에 50전도 벌고 1원도 벌면서 몇 달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명월관이라는 요릿집에서 기생들 소리를 가르쳐 달라고 하여 꽃같은 기생 스무 명쯤을 모아 놓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소리를 배우지도 못하고 토막 소리 몇 대목 가지고 밥벌이하면서 누구를 가르치는 일이 항시 마음에 걸리던 차에 공주 대제암에서 정정렬 명창이 소리를 가르친다는 얘기를 듣고 대번에 기차를 타고 절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스승 운이 없으려는지 조상선, 김여란, 김초앵과 같은 쟁쟁한 신인 명창 12명이 한 시간씩 꼬박 열두 시간 동안 선생님을 붙잡아 놓고 있는 통에 도저히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여름이면 절간 아무데서나 잠을 자며 귀동냥이라도 할 텐데 엄동설한에 그럴 수도 없고 해서 다시 대구 봉산동에 와서 술집 기생들의 소리선생을 하며 지냈습니다.

얼굴도 “빤질빤질하게” 잘 생긴데다가 소리 잘 하고 멋이 있는 젊은 총각이 젊은 여자들 틈에서 지내다보니 “만사가 맨숭맨숭하기만 할 수는 없어서” 가끔씩 연애 사건을 저지르곤 했습니다. 대두에서는 대구 경찰서 고등계 형사의 조카인 일본 여자 대학생과 연애를 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가서 모진 매를 맞고 갖은 협박을 당한 끝에 강제로 쫒겨나다시피 경주 권번으로 옮겼습니다. 또 경주에서는 얼굴 예쁘고 인기 있던 기생 김난윤의 짝사랑에 말려들어 호되게 곤경을 치루는 등, 여자들 등쌀에 시달렷습니다.

결국 그는 그 생활을 청산해야겠다는 결심 끝에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습니다.

“내가 여자들한테 인기는 있었구만. 그런디 그것이 좋은 것이 아녀. 젊은 놈 신세 망치기 딱 좋은 것이라. 더욱이 소리 공부하는 사람은 여색을 조심해야 돼. 지동근씨가 나헌티 헌 말이 있네. 젊어서 여자를 알면 소리를 망치게 되니 여자 보기를 원수 보듯이 해야 한다고 하셨어. 성공만 하면 여자는 줄줄이 따라오는 법이니 성공할 때까지 절대 여자를 가까이 말라고 말이여. 그런디 한창 기운이 좋을 적에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는가. 서울 와서도 맨 연애만 허고 다녔지”

22살에 서울에 와서 조선 성악 연구회에 다니며 꿈에 그리던 정정렬 명창에게 소리공부도 하고 명월관, 식도원 같은 요리집에서 소리를 하며 돈도 벌었습니다. 노명창들을 모시고 북만주, 신의주, 상해, 무창, 북경, 남경, 서주까지 공연을 다녔습니다. 또 김창진, 조학진 같은 명창에게 소리공부를 하며 몇 해를 보내는 동안 그의 앞에는 소리꾼으로서 밝은 미래와 성공이 열리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거침없이 돈도 쓰고 한껏 멋을 부리고 신식 여학생들과 뻔질나게 연애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25살이 되던 해에 무서운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목이 안 나와. 고음이 안 나오고, 숨이 짧아지고, 소리가 갈라지고, 허리도 아프고, 소리 기운이 싹 없어져 버렸어. 한약도 써 보고 목을 쑥으로 떠보기도 하며 별별 짓을 다 했지만 소용이 없어. 목이 그 지경이 되니 무대에 서면 집어치우라고 소리지르니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고, 무엇보다 내 인생이 이것으로 끝이구나 생각하니 죽고 싶은 생각밖에 안 나”

그러던 차에 고향 집에서 옥천에 사는 색시와 혼인을 하라는 전갈이 오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대뜸 혼인을 해버렸습니다. 실의에 잠긴 마음을 그렇게 해서라도 달래보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그에게 안정과 행복을 가져다 주기는 커녕 도리어 무거운 짐만 짊어지게 했습니다.

그는 그 짐에서 벗어나고 잃어버린 목도 찾을 겸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그러자니 자연 가정을 돌보지 않게 되어 아내는 집을 떠나게 되고, 그 아내에게서 낳은 자식마저 저 세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불러들인 불행이지만 자신으로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어 더욱 더 실의와 좌절 속에서 세월을 보내는 동안 해방이 되고 그의 나이 30살이 되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그는 해방 뒤에 생긴 여성창극 단체인 <햇님국극단>에 들어 갔습니다.

그 단체에는 박초월, 김소희, 박귀희, 조금앵, 김경애와 같이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던 여자 명창들이 있었는데 그는 그 단체에서 고수도 하고, 무대감독도 하고, 작곡도 하며 그들의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그 뒤 김연수 명창이 이끄는 <우리 국악단>에서도 무대 뒷일을 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때의 쓰라린 경험과 명창들의 그늘에 가려 그들의 뒤치닥거리를 하며 느꼈던 열등감, 무대감독을 하며 익힌 무대 경험들이 '재기'를 위한 밑거름이 될 줄이야 그 당시는 아무도,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기에는 숨은 공신이 있었습니다. 

함께 창극단의 스탭 일을 하던 중 사랑을 하게 되어 마지막까지 해로한 둘째부인 변기씨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없었던들 그의 재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1962년에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들어 간 그는 남들은 전성기를 지나서 활동을 마무리 짓는 나이에 골방에 틀어박혀 아침 여섯시부터 정오까지 꼼짝 않고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그 뒷바라지를 지성스럽게 했을뿐더러 돈 못 벌어 온다고 잔소리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또 소리공부하다가 절망에 빠진 그가 소리 집어치우고 다른 일을 하겠다고 하면 극구 말리며 다른 생각 말고 소리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러한 아내의 내조 덕분에 그는 10여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로지 소리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만 52살이 된 1968년에 <흥보가> 5시간 완창 발표회를 갖고, 1969년에 <춘향가> 8시간 완창발표회를 한 다음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를 차례차례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 뒤에 그는 계속해서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 <강를매화전>과 같이 가사와 곡을 잃어버린 것으로 알려진 노래들을 다시 가사를 찾고 곡을 붙여서 발표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된 그는 1970년에 주태익이라는 극작가가 판소리 사설체로 쓴 <예수전>에 곡을 붙여 5시간 동안 불렀고, 그 뒤 <팔려 간 요셉>이라는 노래도 창작해서 전국 교회를 돌며 신자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또 1973년에는 <이순신전>을 불러 창작 판소리에 대한 국악계와 일반인들 사이에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407031

“십 년 동안 목숨을 걸어 놓고 공부를 헌 결과여. 내가 젊어서 못된 짓을 많이 혀서 목을 버려 놓았응게 목만 다시 찾으면 죽어도 원이 없다 허고 일심으로 공부를 허니까 목이 다시 찾아 와. 그래도 고음이 예전처럼 안 나와서 나 혼자 연구를 혔지. 처음에 '암성'으로 가늘게 내다가 점점 기운을 넣어서 '통성'으로 내는 거여. 옛날 임방울 명창도 이런 말씀을 허셨지. 소리를 많이 허면 가느다란 '실목'이 나오느니라. 그것을 많이 허면 그 목이 차차 굵어져서 통성이 되는디 그 단계가 어려운 것이니라. 허셨는디 내가 혀 보닝게 정말 어려워요. 실목을 통성으로 변화시키기가 소리공부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여. 그 단계를 통과혀야만 득음을 혔다고 헐 수가 있는거지”

그 어려운 단계를 통과한 명창에 대한 예우로 나라에서는 1973년에 판소리 <적벽가>의 인간문화재로 그를 지정했습니다.

그는 그 뒤 국립창극단의 단원이 되고, 1978년에는 단장이 되어 1981년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창극단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는 더 바빠져서 남들은 은퇴할 나이까지 각종 판소리 관련 교육이나 수없이 밀려오는 초청 공연, 방송 출연, 음반 취입, 게다가 광고 출연까지 젊은이 못지 않게 분주하게 보내다가 87세인 2003년에 세상을 떴습니다.

인생의 후반기인 50세에 재기해서 30년의 전성기를 보낸 그는 깊은 고난의 길을 걸어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무서운 집념과 미래에 대한 도전, 그리고 열정으로 충만한 노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뜬 '대기만성' 형의 명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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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판소리계 최고의 로맨티스트' 임방울 명창(1904년~1961년)을 소개하겠습니다.

임방울 명창은 을사보호 조약을 맺기 1년 전인 1904년에, 전남 광산군 수성마을에서 아버지 임경학씨와 어머니 김나주씨의 팔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세습 예술가 집안이었고, 본 이름은 승근인데 방울 같은 소리를 내며 크라고 방울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외삼촌이자 국창이라 불리던 서편제의 김창환 명창에게 기초를 닦았고, 자라면서 여러 명창들에게 배운 뒤, 15세 무렵에는 동편제의 유성준 명창에게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유성준 명창은 성질이 급하고 괴퍅해서 어린 임방울은 기다란 담뱃대로 머리통을 수도 없이 얻어 맞았다고 합니다. 같이 공부하던 여자애들을 맨발로 북 위에 한 시간씩 세워두기도 했다니, 제가 연기했던 「서편제」의 유봉보다 더 지독한 선생님이었나 봅니다.

임방울은 목소리가 맑고 청아하면서도 슬픈 느낌을 주고, 고음과 저음이 시원시원하게 터져나오고, 어떠한 경우에도 목이 쉬지 않을 정도로 좋은 성대를 타고 났습니다.

그런데 변성기를 맞아 소리가 마음대로 나오지 않자 골방에 틀어박혀 문을 걸어 잠그고 연습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이 무렵의 임방울 명창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그가 무덤가에서 하루종일 소리공부를 하는데 원하는 소리가 죽어도 안나오자 "마마(천연두)에 걸리면 목이 트인다는데 마마나 걸려라!"하고 소원을 빌었더니 과연 천연두에 걸려서 소리가 트이고, 그 대신 얼굴이 얽었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이처럼 소리 공부에 전력을 기울인 뒤, 그는 대명창이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스물을 갓 넘은 1925년 9월, '조선명창연주회'가 매일신보사 주최로 열렸습니다. 명창들의 노래를 듣기 위해 관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먼저 그의 외삼촌인 김창환 명창과 당대 최고의 명창인 송만갑 명창, 이동백 명창, 정정렬 명창들이 특별출연으로 무대에 올라 소리를 했습니다.

그뒤를 이어 무릎 위로 올라간 짧은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땅딸막한 키에, 약간 얽은 데다가 별로 잘생기지 않은 얼굴의 임방울이 무대에 나타났습니다. 초라한 행색의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판소리 「춘향가」 중 <옥중가(獄中歌)>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寂寞獄房) 찬 자리에
생각나는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이 노래는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힌 춘향이가 한양으로 떠나 간 이몽룡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목에 칼을 쓰고 산발한 머리가 마치 쑥대처럼 생겼고, 얼굴은 창백하게 귀신처럼 생겼다고  해서 '쑥대머리 귀신형용'이란 충격적인 가사로 노래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참혹한 지경에서도 일편단심 사랑하는 님을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이 너무도 절실하게 묘사된 명곡입니다. 오페라로 치면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이나 <공주는 잠 못 이루고>와 같은 대표적인 아리아인 것입니다.


뱃속에서 바로 소리를 뽑아서 내는 통성에 약간 쉰듯 칼칼하게 터져나오는 수리성을 섞어, 춘향이의 비통처절한 심정을 애절하게 토해내는 임방울의 판소리는 단박에 청중을 휘어잡았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춘향이의 심정이 절망적인 시대의 정서와 어울어지면서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습니다. 이 노래가 바로 불후의 명곡이 된 <쑥대머리>인 것입니다.


 
그 공연 이후 임방울은 하루 아침에 명창의 반열에 올랐고, 콜럼비아 레코드나 빅터 레코드나 OK 레코드와 같은 유명 음반사가 앞다투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의 출세작 <쑥대머리>가 실린 음반은 한반도와 만주와 일본까지 불티나게 팔려나가, 각 음반사마다 12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기록을 세웠습니다. 

그후 1930년 전국명창대회에서 장원의 영광을 차지한 임방울은 본격적인 소리꾼으로 나서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연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즈음, 광주의 기관장들이 환영파티를 열어 준 '송학원'이라는 요릿집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임방울이 소년시절에 광주의 부잣집에서 고용살이를 했는데, 그 집에 동갑내기의 아름다운 딸이 있었습니다. 소녀와 소년은 철부지의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소녀의 부모가 반대하는 통에 소년은 그 집을 떠나야 했고, 소녀는 어느 부잣집 아들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후 소녀의 결혼 생활은 실패로 끝났고, 광주에서 송학원이란 요릿집을 차리고 예명을 김산호주로 지은 소녀는 광주 유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여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날, 그 자리에서, 명창이 되어 돌아 온 임방울과 여주인 김산호주가 십여년도 훨씬 흐른 뒤에 해후를 한 겁니다. 그동안 서로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두 연인은 곧바로 불같은 사랑을 불태웠습니다.

임방울은 2년 간 송학원의 내실에 숨어 살며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습니다. 세상에서는 임방울이 잠적했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전속계약을 한 OK 레코드 회사에서는 그의 행방을 찾느라 혈안이 되었습니다. 

미색이 빼어났던 김산호주는 천하명창 임방울을 2년 동안 송학원의 내실에 숨겨 놓은 채, 사랑의 포로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임방울은 자신의 목소리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토록 기름졌던 목소리가 탁해지고, 고음이 마음대로 나오지 않고, 소리를 조금만 질러도 땀이 뻘뻘 나는 것이었습니다.

대경실색한 그는 어느 날, 산호주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지리산으로 떠나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그는 지리산 토굴에 숨어 살며 소리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임방울의 행방을 알지 못한 채, 미칠듯한 그리움과 슬픔에 빠진 산호주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천지사방을  수소문한 끝에 간신히 임방울의 행방을 알아 낸 산호주는 임방울이 소리공부를 하는 토굴 앞에서 만나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임방울은 끝내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깊은 절망에 빠져 집으로 돌아 온 산호주는 임방울을 애타게 그리다가 병이 깊어져, 마침내 30세도 안된 꽃 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산호주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임방울은 죽어가는 애인을 가슴에 껴안고 슬피 울며 즉석에서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습니다. 그것이 바로 <추억>이라는 노래입니다.


앞산도 첩첩허고
뒷산도 첩첩헌디

혼은 어디로 향하신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럇든가

그리쉽게 가럇거든

당초에 나오지를 말았거나
왔다가면 그저나 가지

노던 터에다 값진 이름을 두고가며
동무에게 정을 두고 가서

가시는 임을 하직코 가셨지만
세상에 있는 동무들은
백년을 통곡헌들

보러 올 줄을 어느 뉘가 알며
천하를 죄다 외고 다닌들

어느 곳에서 만나 보리오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전생에 무슨 함의로
이 세상에 알게 되어서

각도각골 방방곡곡 다니던 일을
곽 속에 들어서도 나는 못잊겄네

원명이 그뿐이었든가
이리 급작스리 황천객이 되얏는가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어데를 가고서 못오는가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을 보고지고



이 노래가 바로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울광장 '노제' 때 안숙선 명창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제가 판소리를 배우던 젊은 시절, 이 노래에 얽힌 비극적 사랑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여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오다가, 사랑하던 노전대통령을 떠나보내는 국민들의 마음을 이 노래에 실어 보내드렸던 것입니다.

이후 박초월 명창 등과 <동일 창극단>을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하며 최고의 명창으로 대중들을 울리고 웃기던 임방울 명창은 1961년 공연 도중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5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상 처음 국악예술인장으로 치러진 임방울 명창의 장례식에는 200여 명의 여류 명창들이 소복을 입고 길을 가며 상여소리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행렬 끝에 100여 명의 거지가 눈물을 흘리며 따라와 눈길을 끌었습니다. 공연 때마다 거지들은 무료로 관람시켰던 임방울 명창에 대한 추모의 표시였습니다.


10여세부터 여러 스승으로부터 '서편제'와 '동편제'를 모두 사사받아 자신의 고유한 가풍을 수립한 전설적 명창 임방울. 

민족사의 흐름에서 가장 불행했던 시기이자, 판소리 역사에서 가장 시련과 수난이 많았던 일제 침략기에 민초들의 한을 노래한 명창 임방울. 

김창환, 이동백, 송만갑 같은 선배 가객들처럼 조선시대의 벼슬 하나 지낸 바 없고, 후배 명창들처럼 인간문화재로 대접 한 번 받아보지 못한 불운한 시대의 진정한 광대 임방울. 

평생 양복 입기를 싫어하며 흰색 한복 두루마기를 즐겨 입고, 수많은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소외된 민초들의 아픔을 위로해주던 아름다운 가객 임방울.

공연 때 마이크 쓰기를 꺼려 했고, 입에 발린 공치사나 돈 받기를 외면했으며, 번돈은 불우한 이웃에게 아낌없이 써버려 유족에게 아무런 유산도 남기지 않은 풍류남아 임방울.

조선왕조가 저물어가는 때에 태어나 민족사의 혼란 속에서 유랑의 생애를 마친 임방울은 우리의 비극적 시대를 대표하는 명창이었습니다.


그의 출생지인 광주시 광산구 송정공원에 세워진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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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하기, 생수통 나르기 등 각 분야에서 최고의 솜씨를 발휘하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생활 속의 달인>이란 TV 프로그램이 있다. 나는 가끔 그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을 보며, 그들이 그 일에 쏟아 부었을 엄청난 노력을 떠올려 보곤 한다.

그러한 노력은 재능을 가진 한 사람을 경지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경지가 있다.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공자는『논어』<옹야(雍也)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알기만 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보다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보다 못하다.
(知之者 不如 好之者, 好之者 不如 樂之者)


자기 분야에서 일정 수준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들은 한 가지 점에서 일치한다. 그것은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긴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 분야에서 전인미답의 창조적인 업적을 이루는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노력하고(知), 좋아하고(好), 즐기는(樂) 단계에서 한 단계 더 올라서야 한다. 나는 공자의 말씀에 한 구절을 덧붙이고자 한다.

좋아하는 것은 미치는 것보다 못하다.
(樂之者 不如 狂之者).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不狂不及)'는 말처럼, 미친듯한 열정이 없으면 창조적 성취는 불가능하다.

세계적 문호 발자크는 “나는 굴이 무너져 갱 속에 갇혀 버린 광부가 목숨을 걸고 곡괭이를 휘두르듯 글을 썼다.”고 말했다.

<보봐르 부인>등의 소설로 프랑스 문학의 거장이 된 플로베르 또한 “몸이 아파서 하루에 몇 백 번이나 심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진짜 노동자처럼 이와 같이 괴로운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그렇다.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비 오는 날이나 바람 부는 날이나, 눈이 내리거나 번개가 치는 속에서도 망치를 내리치는 대장장이처럼 글을 썼다.”고 했다.

한 열성 팬이 바이올리니스트 프리츠 크라이슬러에게 다가와 “크라이슬러씨, 당신처럼 연주할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내놓겠어요.”라고 하자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부인, 전 이미 제 목숨을 내 놓았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과골삼천(踝骨三穿)'이란 말을 남겼다. 학문에 미친 다산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하루 종일 글을 쓰고 책을 읽으니 복사뼈가 세 번 망가졌다는 일화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세계적 발레리나인 강수진의 발가락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짓무르고 으깨져서 울퉁불퉁 옹이가 박힌 발. 춤에 미친 발레리나의 흉측한 발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어떤 사람은 이 발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가락이라 격찬했다.

판소리의 명창 임방울은 얼굴에 마마 자국이 있는데, 그 사연이 기막히다. 젊어서 무덤가에 움막을 지어 놓고 소리공부를 하는데 바라는 소리가 안 나오자 "마마(천연두)에 걸리면 목이 트인다는데 마마나 걸려라!"하고 소원을 빌었더니 과연 천연두에 걸려서 소리가 트이고, 그 대신 얼굴이 얽었다는 것이다.


김연아의 엉덩방아


피겨스케이팅에 미친 김연아는 수만 번의 엉덩방아 끝에 세계적 스타가 되었고, 골프에 미친 최경주는 완도 바닷가의 모래사장에서 수만 번의 벙커 샷을 연습했고, 백신에 미친 안철수 박사는 몇 년 동안 하루 서너 시간을 자며 V3 백신을 만들었다.

작곡가, 농구선수, 소설가, 스케이터, 피아니스트, 체스 선수, 범죄자 등에 대한 수많은 연구에서 1만 시간 연습의 중요성이 모두 발견되었다---진정한 대가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익히는 데는 뇌를 최소한 1만 시간 정도는 자극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경과학자 다니엘 레비틴의 말이다.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도 “자기 일에 미치지 않은 사람이 성공한 예를 나는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창의력을 발휘해서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는 첫 걸음은 자신의 일을 ‘미친듯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명예나 돈과 같은 세속적 욕망이 아니라 일에 대한 ‘열정'이며 그 열정을 통해 창의성이 발휘되는 것이다.

이 말을 “기는 놈 위에 뛰는 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는 우리 속담에 대입해 본다면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노는 놈 위에 미친 놈”이라 할 수 있겠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규격화된 교육 제도, 금전 만능주의의 사회 구조 속에서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가서, 돈 잘 벌고, 출세하는 사람 곧 ‘뛰는 놈’이나 ‘나는 놈’을 길러내고 그들이 이룬 경지를 성공으로 인정하는 사회였다. 세속적 부와 성공을 담보하지 못하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 곧 ‘노는 놈’이나 ‘미친 놈’은 괴짜 취급을 당했다.

<도시와 창조계급>의 저자인 리쳐드 플로리다 교수는 미국의 여러 도시와 창조적 인재와의 관계를 연구한 끝에 도시의 경제 성장과 창조적 인재의 수가 정비례한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는 이 이론을 바탕으로 "보헤미안 지수"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화가, 작가, 음악가, 연극인, 영화인, 디자이너와 같은 보헤미안들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도시가 발전한다는 그의 이론은 국가 경쟁력과 창조력과의 관계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제로 우리가 수출 강국, 건설 강국의 기치를 내걸고 전자, 건설, 조선, 자동차, 반도체 등 20세기형 산업을 육성해 오는 동안에 미국이나 유럽이나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창조력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 산업, 우주 산업, 바이오 산업, 나노 산업 등 미래 산업의 육성에 많은 공을 들여왔다.

그 중에서도 문화 산업은 미래 성장 산업으로 엄청난 부가가치가 발생될 것을 간파하고 국가 간에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미국은 헐리우드와 디즈니와 팝송 등의 대중문화로 지구촌의 문화산업을 지배하는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프랑스는 세계 2차대전 후부터 20년 간 문화부 장관을 한 세계적 작가 앙드레 말로가 다져 놓은 문화 정책으로 세계 문화정책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영국은 블레어 총리 시절에 주창된 “창조산업”이란 개념으로 미국에 맞서 문화산업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국의 병마용갱

중국은 ‘아시아 문명의 중심국가’로서의 국가 위상을 높이기 위해 중국 고대문명의 재조명과 현대화에 막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 또한 아시아 문화의 주도권 싸움에서 중국에 뒤질세라 문화적 역향력을 넓히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뒤늦게나마 문화산업을 육성하고 지원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일반적 인식은 ‘문화산업이 국가 경제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한류가 얼마나 돈을 벌었는가?’ 하는 세속적이고 경제적인 관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기초 원동력인 ‘창조력’의 개발에 대해서는 투자도 관심도 지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창조력이란 돈이나 시간이나 인력을 투자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상품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가 공통의 관심 속에서 정성을 다해 꾸준히 숙성시킬 때 제조되는 포도주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 예술이나, 스포츠나, IT나, 수학이나, 물리학이나, 천문학이나, 우주 공학이나, 생물학 등의 전문 분야에서 갑자기 창조적인 인재가 나타나 기적같이 위대한 성취를 보여주는 일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희망을 버리지는 말자. 아직 우리 사회에는 남의 도움을 바라지 않고 스스로 미쳐서 노는 수많은 ‘미친 괴짜’들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의 미래는 ‘미친 듯이 노는’ 인재들을 얼마나 많이 길러내는가에 달려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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