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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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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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0.08.17
    춤추고 노래한 외로운 고승, 장태남 명인 (4)
  2. 2010.06.29
    신화와 예술과 영감의 젖줄, 인도 여행기 (18)
  3. 2009.12.22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사랑이야기 (34)
  4. 2009.12.02
    심각한 '외모 비하', 범죄일까 아닐까? (56)
  5. 2009.06.24
    느리게 산다는 것의 어려움 (41)

「삼국유사」에 <도솔가>가 만들어진 내력을 이야기하는 내용 중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신라 경덕왕 19년인 서기 760년, 하루는 해가 둘이 떠서 서로 교대하여 지지 않는 괴변이 생겼다.
그러자 일관이 말하기를 '범패승'을 데려다가 <산화공덕>이라는 노래를 부르면 괜찮을 것이라고 하여 왕은 단을 쌓고 범패승을 기다렸다.
그때 월명이라는 중이 지나가므로 왕이 불러 '범패'를 부르라 하니, 그 중은 오직 향가만을 알 뿐 '범패'를 모른다고 했다.

향가를 잘불렀던 월명스님도 부를 줄 몰랐던 인도음악인 '범패'는 아마 그 무렵에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절에서 재를 지내거나 예불을 올릴 때 쓰이게 된 듯합니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지내는 제사인 <상주권공재>, 저승의 십대왕에게 행운을 비는 의식인 <십왕각배재>, 물속의 외로운 혼을 위로하는 제사인 <수륙재>, 국가의 안녕이나 죽은 자를 위해서 지내는 제사인 <영산재>와 같은 의식을 거행할 때 부르는 노래인 범패는 가곡, 판소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성악곡 중의 하나로 꼽힙니다.

범패를 부르는 범패승.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00138648

서양의 그레고리 찬가처럼 장단도 없고, 가락도 없고, 감정도 없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한없이 느리게 부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요즘의 음악 정서와는 너무도 다른 먼 옛날의 이국적이고도 원시적인 음악 세계를 느끼게 됩니다.

깊은 산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범종 소리같이 그윽하고 고요하고 심오한 범패 소리는 경건한 종교 음악인 탓에 부르는 태도도 세속의 노래와 사뭇 다릅니다.

“고개를 흔들고 눈을 두리번거리면 안돼. 몸도 흔들지 말고, 뜻을 생각하면서 정성스럽게 잡념을 몰아내고 무아의 경지에서 소리를 해야지.”

범패승('어산' 또는 '인도승'이라고도 합니다)인 벽응 장태남 명인은 경기도 김포군 월곳면에 있는 ‘문수사’라는 작은 절의 주지였습니다.

겨울날씨답지 않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80년대의 어느 날, 문수산 자락에 자리잡은 문수사 안방에서 만난 귀가 크고 길며 미간이 넓고 흰 눈썹이 길게 돋은 스님에게서는 맘씨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와 같은 인자한 분위기가 풍겨왔습니다.

1909년 경기도 파주군 장마루촌에서 농사짓는 장용식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을 때만 해도 그의 집은 근방에서 알아주는 부잣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삼 년을 내리 흉년을 당하고 나니 싸그리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첫해는 홍수가 져서 남의 논은 다 놔두고 우리 논만 물에 실려가 농사를 망치더니, 둘째 해는 이상한 돌림병이 들어서 벼이삭이 픽픽 쓰러지는 통에 농사를 망치고, 셋째 해는 한참 잘 자라던 벼가 된서리를 맞아서 다 죽어 버렸어. 그렇게 삼 년을 연속 망하다 보니 완전히 폐농이 되어 버렸어.
아버님은 성미가 장대같이 곧아서 빚지고는 못 사는 분이라 땅 팔아서 빚갚아 버리고, 아들들은 남의 집에 머슴으로 나눠주고, 여기서 강만 건너면 갈 수 있는 장단이라는 이북땅에 ‘화장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에 나무도 때주고 잡일도 하는 부목으로 들어갔어. 그때 내가 여덟 살 때라.”

길게 머리를 땋고,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짚신을 신고 절에 간 소년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게만 여겨졌습니다. 여스님들만 모여 사는 미타암 곁에 있는 집에 이사한 뒤 부목으로 들어간 아버지는 가자마자 절에서 나무를 패고 불을 땠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이 왔다갔다 하는데 난 처음에 남잔 줄 았았지 . 그런데 목소리를 들어보니 여자야. 여자가 머리 빡빡 깍은 모습을 생전 처음 보니 참 이상해. 제사를 지낸다고 인절미를 하고, 가래떡을 하고, 과일을 깎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한 비구니 스님이 오더니 ‘부처님 종 땡땡 울리고 나서 이 인절미 먹어라.’ 하더란 말이야. 나를 거지로 알고 그러시나 싶어 창피하여 그 길로 집에 도망가서 한 사나흘을 절에 안 갔지.”

처음에는 수줍어서 며칠 안 갔지만 그뒤로는 낯이 익어 매일 절에서 살다시피했습니다. 제사할 때 봉지에다 사과, 밤, 대추를 싸서 나눠주고 떡도 먹고 과자도 먹으며 밤새워 노는 모습도 재미있었고, 머리 깎은 여스님들이 종치고 예불 올리는 염불 소리도 듣기 좋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같은 또래의 사미스님들과 절 뒷산에서 토끼를 쫓고 밤도 따고 칡도 캐며 노는 재미가 으뜸이었습니다. 그런데 짓궂은 빡빡머리 사미스님들은 어린 신도의 긴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놀려대곤 했습니다. 긴 머리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되기 싫었던 소년은 어머니에게 머리를 깎아달라고 졸랐습니다.

처음에 반대하던 어머니는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해 드디어 열세  살이 되던 해의 삼월 삼짓날에 머리를 깎고 계를 받은 뒤 사미승이 되었습니다.

화장사에는 극락암, 죽두암, 미타암 같은 암자가 아홉 개 있었는데 한꺼번에 제사를 지낼 정도로 신도 수가 많았습니다. 그런 만큼 재를 올릴 때의 노래인 범패나, 나비춤, 바라춤을 잘 하는 스님이 많이 있었습니다.

큰 재를 올릴 때는 밖에서 유명한 범패승을 청해 들였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귀동냥, 눈동냥으로 모든 의식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수계스님인 황청하 스님에게 벙패를 배울 때에는 함께 배우는 동료 중에서 제일 잘 한다고 칭찬을 듣곤 했습니다.

“황청하 스님은 서울에 있는 화계사에서 오셨는데, 화계사는 어찌나 재가 많았는지 화계사 부목이 공양재를 할 줄 안다고 할 만큼 큰 절이여. 그분에게서 기초를 배우고 우리 절의 사형인 김보성 스님에게 훗소리를 배웠지. 그뒤 그분의 스승인 이범호 큰 인도스님에게 짓소리를 마저 배웠어.”

절에서 쓰이는 노래는 음악적인 형태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나뉩니다.

재를 올리는 의식을 담당한 '안채비'들이 부르는 <안채비소리>, 다른 곳에서 초청해온 범패 전문 스님들이 부르는 <겉채비소리>, 그밖에 민속 음악의 가락에 가사를 얹어서 부르는 <화청>이나 <회심곡>이 있습니다.

안채비소리는 흔히 <염불>이라고 알려져 있는 노래로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을 민요의 엮음 가락처럼 촘촘하게 엮어 나갑니다.

겉채비소리는 '훗소리'와 '짓소리'로 나누어지는데 좁은 의미의 범패는 이 겉채비소리만을 가리킵니다.

훗소리는 대개 한문으로 된 찬양시를 혼자서 길게 부르는 형식이고, 짓소리는 훗소리를 모두 배운 범패승들이 한문으로 된 산문이나 산스크리트어로 된 경전을 반드시 합창으로 부릅니다.

예전에는 일흔두 가지가 있었다고 하나 오늘날에는 거의 사라졌고, 몇몇 범패 스님이 '인성', '거영산', '관욕게', '식영산', '거불'과 같은 열세 곡만을 부를 수 있을 뿐입니다.

고고형이 1929년에 지은 <이조불교>라는 책에 보면 “근년까지 경성 교외 백련사에 만월이라는 노승이 있어 범패로 유명하였다. 원래 경성의 동서산에 각각 만월이 있어 실력이 서로 백중하였다. 이 만월은 서만월이라고 한다.” 고 씌여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서만월의 여러 제자 중에 이범호 스님이 있고, 그 스님의 제자로 김보성 스님이 있으니, 장태남 스님은 서만월의 손자 제자뻘이 된다 하겠습니다.

“이 범패가 하도 어렵고 재미가 없어서 모두들 조금씩 배우다가 다 나가 떨어지고 제대로 못 배웠어. 그런데 나는 재미를 느껴서 혼자 산에서도 익히고 길 가면서도 익혀. 그러니 선생님들이 재주가 있다고 귀여워 하셔.
내가 음악에 재주가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라. 우리 절이 박연폭포 가는 길에 있어서 폭포에 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우리 절에 들렀다 원통사에서 자고 가는데, 이 사람들이 장구 치고 호적 불고 떠들썩하게 놀아. 그 호적소리가 어찌나 듣기가 좋은지 혼자서 호적 들고 산골짜기에 들어 가서 흉내내어 불어. 그래서 들려주면 모두 잘한다고 해.
그 후 호적 불고 박연폭포까지 길 안내하기도 했지. 한번은 서울에 갔는데 동양극장 단원들이 손님을 청하느라 풍물을 치고 대취타를 불면서 거리를 누비는데 산에서 못 들어본 정통 소리라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들어서 귀에 익혔어. 그래도 귀동냥으로 배운 소리라 처음과 끝을 몰라. 그래서 동대문 밖 숭인동에 있는 방생원에 있으면서 윤만순 씨라는 분에게 제대로 길을 닦았지.”

화장사를 근거로 삼고, 서울 홍은동의 백련사나 숭인동의 방생원을 연락처로 삼아 여기 저기 다니면서 젊은 범패 스님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스물한 살 때에 어떤 스님의 손녀딸로 어머니가 데려다 길러 온 처녀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때는 대처승과 독신승이 서로 다투지 않던 시절이라, 결혼한 뒤에도 계속해서 전국을 떠돌며 이 절에서 저 절로 재를 지내러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서른한 살이 되던 해에 몸담고 있던 화장사를 떠나 서울 청담동에 있는 삼각사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설흔 살 무렵인가 백련사에서 범패 인간문화재로 함께 지정을 받으신 박송암 스님을 처음 만나 같이 범패를 부르고 재미있게 놀았지. 그러다가 헤어졌는데 황해도 성불사에서 만나 한 번 같이 불렀어. 그후 봉원사에서 본격적으로 같이 범패를 불렀는데, 그 친교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어.”

박송암 스님과 그는 마치 서만월과 동만월이 쌍벽을 이루었던 것처럼 우리나라 범패의 우뚝 선 두 봉우리였습니다.

송암 스님의 목소리가 맑고 청아하고 고음이 잘 나오는데 견주어서, 벽응 스님의 목소리는 무게 있고 깊이 있고 포근하고 구수하고 담담하고 저음이 잘 나옵니다.

서로의 특색 있는 목소리로 화음을 이루어가며 그들은 젊은 범패스님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의 어수선한 시국에 그들 역시 범패만 부르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젊은 스님들은 징용으로 끌려가고 서른이 넘은 스님들은 보국대란 명목으로 부역을 나가야했던 시절에, 그는 김포공항 길 닦는 보국대에서 한동안 일을 하다가 강화 황산도에서 길 닦는 중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일을 하던 중 비행기가 날아와서 폭격을 하는데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그 며칠 뒤에 집에 가서 들으니 사람들이 천황폐하가 항복했다고 수군수군해. ‘목 달아날 소리 하지도 마라.’고 하고서 길로 나오니까 양철통이나 세숫대야를 두들기면서 만세를 부르고 난리가 났어.”

절에서도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던 그들인지라 해방은 무척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사찰령'은 그 감격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습니다.

대처승은 왜색이라고 하여 독신승과 구별하여 태고종과 조계종을 갈라놓은 게 탈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전까지는 한 승적에 같이 올라 사이좋게 지내던 대처승과 독신승이 수십 년간 피투성이 싸움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조계종과 태고종이 옛날부터 갈라져 싸워온 것과 같은 인식을 사람들에게 주었고, 범패를 위주로 하는 태고종의 의식은 멸시받고 소외당했습니다.

절에서 재를 올리기 위해 할 수 없이 청하기는 하지만, 옛날처럼 다정하고 우호 있는 분위기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편견이 점점 굳어져 가고 있는 것을 벽응 스님은 못내 안타까워했습니다.

“범패 뿐만 아니라 불교 의식을 거행할 때 바라춤, 나비춤을 추는 것을 '작법'이라고 하는데, 범패스님들은 모두 그것을 할 줄 알지. 그런데 어떤 스님들은 중이 무슨 춤을 추느냐며 못마땅하게 여긴단 말이야. 이것이 모두 해방 뒤에 생긴 편견들이지.
그리고 가사짓는 법, 가사 입는 법에서부터 가사 색깔까지 지금은 마구잽이야. 제대로 아는 이가 없어. 그래서 내가 중곡동에 있는 원릉원이란 곳에서 불교의 의법을 가르치는데 모두 어렵고 까다롭다고 나가 떨어져. 그러니 옛법은 이제 모두 망가졌어.”

바라춤을 추는 범패승. 출처 : http://www.mediabuddha.net/print_paper....r%3D2503

자기가 입는 가사를 손수 바느질해 가며 옛법대로 지어서 입을 만큼 고지식하고 경건한 그는 지나치게 옛법을 무시하고 참선과 경전에만 치중하는 요즘의 풍토를 못내 안타까워 했습니다.

6.25때 피난 와서 잠깐 묵은 뒤, 주지가 열반하자 여러 사람의 권고로 눌러 앉게 된 문수사 주지 노릇을 하면서 몇 번이나 구석지고 가난한 절을 떠나 서울로 올라갈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동네 주민들이 말리는 통에 그곳에서 평생을 지내다 열반하셨습니다.

“절동네 쳐놓고 부처님 신심 있는 동네가 없는데 여기는 신도가 많아. 이곳이 가난한 동네라 어떤 신도는 ‘뭐가 있어야 부처님께 바치지.’ 하고 걱정을 해.
그럼 내가 ‘부처님이 당신더러 뭐 가지고 오라고 했소? 당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논에 가서 보리 이삭 떨어진 거 주워. 그걸 절구에다 찧어서 보리공양 올리고 부처님한테 기도 드려.’ 하면 그들은 ‘그래도 돼요?’ 하고 되물어. 되고 말고가 어디있나 정성이 문제지.
절이란 데가 쌀이 흔한 곳이야. 여름이면 바구미가 나고 쌀이 썩다시피 해. 보리 고개 때 가난한 사람들이 쌀 얻으러 와. 열 말을 얻어가면 가을에 열닷말을 가져와. 이게 뭐냐고 물으면 장리래. 이자라 이거지. ‘나는 고리대금업자 아냐!’ 하고 호통을 치고 도로 주어 보내. 그 덕에 인심을 잃지 않고 지낸 모양이야. 내 소원이 고아원이나 양로원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그 꿈을 영영 이루지 못하고 한세상 가는가봐.”

장태남 스님. 출처 : http://www.lba.or.kr/gnu/inmul/list.php...ge%3D107

탄식 끝에 회색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범종을 두드리며 저녁 예불을 올리는 그의 모습에서 비로소 경건한 고승의 모습이 내비치고 있었으니, 이는 오로지 오동나무 떡갈나무 사이에서 산새를 벗삼아 아침 저녁으로 '음성공양'을 올린 그의 오랜 공덕 탓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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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대만의 고산족 마을과 인도 뉴델리를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초청 공연을 위한 사전 답사 여행이었습니다. '대만편'에 이어 '인도편'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인도!
나의 성씨인 김해김씨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후가 태어난 곳!
신라승 혜초가 1300년 전 4년 동안 외로운 구도의 여행을 한 뒤 <왕 오천축국전(往 五天竺國傳)>이란 불후의 여행기를 남긴 곳! 
성경의 15배나 되는 인류 최고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가 이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해 내려 오는 곳!
젊은 시절부터 너무도 가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뒤늦게 인연이 닿아 중년의 황혼기에 찾게 된 곳!
수많은 시인들과 철학자들과 예술가들과 명상가들에게 영감의 젖줄을 제공해 주는 곳!
 
오래 전부터 인도의 신화와 음악과 예술에 심취되어 있던 저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타이페이 공항에서 델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타이페이에서 홍콩을 경유, 델리 공항까지 거의 10시간 넘게 비행기 안에 갇혀 있다가 공항밖으로 나오니 무더운 열대의 공기가 확 밀려 들더군요. 하지만 건기라서 그런지 후덥지근하지 않아 오히려 따끈하고 포근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밤중에 도착했기 때문에 호텔에 짐을 풀고 바로 잠을 잤습니다.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호텔 방 밖으로 뉴델리의 나즈막한 시내 풍경이 이국적으로 펼쳐지더군요.
 


둘째날은 하루 종일 뉴델리 시내의 여기저기를 다니며 문화탐방을 했습니다. 먼저 뉴델리를 방문한 사람들은 반드시 둘러보고 간다는 '인디아 게이트'로 향했습니다. 2차 대전 때의 전몰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 놓았다는 인디아 게이트는 한창 보수 공사 중이더군요.


주변에 널찍한 공원이 펼쳐져 있는 인디아 게이트에서 직선으로 연결된 도로 끝에 대통령 관저와 국회의사당과 정부 청사등 여러 관공서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저는 권위적인 그 건물들보다도 공원 여기저기에서 물건도 팔고 구경도 하는 남루한 서민들의 모습에 눈길이 가더군요.



현대와 전통, 가난과 부유함, 흙먼지와 최첨단 산업 등 극과 극이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는 오늘날의 인도는 거센 변화의 용트림을 틀고 있는 거대한 용광로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 장터에서도 볼 수 있었던 '신기료 장수'가 앉아 있는 골목 바로 뒤에 멋진 현대식 디자인으로 지어진 국립현대미술관이 서 있었습니다. 마침 수백 년 전의 전통 민화에서 근현대 작가의 작품들까지 한 눈에 펼쳐 놓은 '인도 회화의 흐름전'이 전시되고 있더군요. 한 작품 한 작품이 매우 독특하고 처음 보는 작품들이어서 오랫만에 눈이 호강을 했습니다.   



점심으로 아담한 인도식 식당에서 북인도식 전통 음식을 먹었습니다. 의외로 음식이 맛깔스럽고 소스도 우리 입맛에 잘 맞더군요. 식당 안의 손님들이 모두 음식을 손으로 먹길래 우리도 문화 체험을 위해 손가락으로 먹어 보았는데 의외로 맛있었습니다. 옛날 우리 엄마들이 김치 가닥을 손으로 쭉쭉 찢어 밥에 얹어 먹던 맛이 바로 이런 맛 아닐까요?



혼잡한 시간에 자동차로 시내를 오고가다보니 인도의 차도는 차선이 거의 지켜지지 않더군요. 사람과 자전거와 모바일차와 자동차가 서로 엉켜서 다니는 통에 끼어들기는 보통이고, 차선 외의 길로도 사정없이 비켜 가고, 심지어 어떤 차는 반대 차선을 넘어 역주행도 서슴치 않더군요. 처음에는 가슴이 덜컹거리며 겁이 났지만, 그게 인도의 자동차 문화라니 빨리 적응하는 길밖에는 방법이 없을 듯해서 될 수 있으면 창밖을 보지 않고 얘기를 나누며 <국립 연극원>에 당도했습니다.



외국인들까지 포함해서 전국에서 모여 든 학생들이 거의 국비와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니고, 졸업생들이 대부분 유명한 배우나 연출가로 활동하기 때문에 학생들의 학교에 대한 긍지가 대단하다는군요. 방학 중인데도 학교 교정 한쪽에서 땀흘리며 연습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니, 문득 방학도 미팅도 데이트도 없이 연극에 미쳐 보낸 제 대학 시절이 그리워지더군요.  



국립 연극원과 바로 한 건물처럼 이어져 있는 <국립 까탁 무용원>을 둘러봤습니다.



마침 안내 겸 통역을 해주시는 김은정씨가 그 무용원에서 10여년 간 인도의 전통 춤을 공부하고 계시는 분이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또 우리가 초청하려는 예술가들이 바로 '까탁 춤'의 대가들이기 때문에 사전 조사 차원에서 대단히 유익했습니다.

‘까탁Kathak’은  ‘까타’라고도 하는데 ‘이야기꾼’이라는 뜻입니다. 수많은 인도의 전통 무용 중에서 독특하게도 이야기와 무용이 함께 어울어져서 즉흥적으로 연희되는 춤입니다.
먼 옛날 힌두사원에서 <마하바라타>나 <라마야나>와 같은 힌두신들의 서사시를 소리꾼이 옆에서 노래를 하며 이야기를 낭송하면 음악가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무용가는 그 내용에 맞는 몸짓으로 그 긴 이야기를 표현했는데, 수천 년 내려오는 동안 그 몸짓 하나하나가 매우 정교하고 상징적으로 다듬어져서 몸으로 이야기가 가능한 상태까지 된 것입니다.



고목이 늘어 서 있는 까탁 무용원의 교정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남녀 무용수들의 모습이 무척 정겹게 보였습니다. 



김은정씨의 안내로 저녁에는 <젊은 무용수의 밤(A Young Dancer's Festival)> 공연을 봤습니다.



몇몇 유파의 무용 명인에게 배운 제자 중 가장 뛰어 난 젊은 제자들에게 발표 기회를 주고, 앞으로의 대성을 위헤 마련한 공연인 듯 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인도의 모든 극장은 '무조건 무료'라는 겁니다. 티켓을 살 필요도 없고, 예매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극장에 가서 아무데나 앉아서 보고 오면 된다니 신기한 일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연이나 돈이 많이 드는 공연도 일종의 공연진흥센터 같은 데서 지원을 해서 무료로 공연한다니, 인도의 경제력을 볼 때 그 예산의 규모와 지원 시스템이 어떻게 되는지 매우 흥미롭더군요. 나중에 차분히 알아 볼 생각입니다.



게다가 공연 전에 관계자가 나와서 인사말을 한다든지, 공연 중에 사진을 맘대로 찍을 수 있다든지, 우리의 공연 질서와는 너무도 다른 극장 문화에 놀랐습니다. 마치 예전 우리 시골의 가설무대 분위기였습니다. 그동안 세계 여러나라의 극장을 다녀보고 공연도 봤지만 정식 극장에서 그토록 자유분방하게 관람하는 문화는 처음이었습니다. 실제로 공연 중에 사진을 찍는 건 물론이고, 도중에 일어나서 나가는 관객 때문에 공연  분위기가 산만해지더군요. 관객에게는 너무도 편안한 문화지만, 공연자들에게는 매우 힘든 관람 문화 아닐까 생각이 들더군요.


다음날, 드디어 올해 <전주 세계 소리축제> 인도 초청공연을 후원하는 <인도국제교류센터(ICCR)> 사무실에서 ‘까탁’ 춤의 대가인 판딧 비르주 마하라즈 명인을 만났습니다.



장난끼 많은 얼굴에 아담한 키의 마하라즈 명인은 대대로 내려오는 까탁 춤의 명인 집안에서 음악과 무용을 배웠고, 스스로 다양한 창작도 해 오신 대가입니다. 이미 칠순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현역으로 활동을 하시니 전통 예술가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계시다고 합니다.

제가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마하라즈 명인의 제자이며 안무가인 샤스와티 센 명인이 자신이 이끄는 20여명의 무용단이 펼칠 공연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아이디어를 내더군요. 두 분 다 한국 공연이 처음이라 잔뜩 흥분해 있고, 기대가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하라즈 명인은 대화에 깊이 끼어들지는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가끔 웃기나 하고 콧소리를 흥얼거리며 뭔가를 끄적거리기도 하더군요. 샤스와티와 우리가 아주 기분 좋게 이야기를 마치니 마하라즈 선생이 종이를 쓱 내미는데 저와 소리축제 기획자 한지영씨의 얼굴을 스케치한 그림이었습니다. 종이 뒤편에는 방금 적은 즉흥시를 썼다는데 내용이 뭔지 물어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이토록 그림과 시와 음악과 무용 모든 부분에 천재적이고 창의적인 감각을 아직도 잃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머와 위트가 번뜩여서 공연할 때 사람들을 즐겁게 웃기는 걸 좋아하는 매우 순수한 영혼을 가진 예술가였습니다. 두 분은 우리를 무척 좋아한다는 표현을 멋진 몸짓으로 표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아쉬움을 안고 10월 1일 전에 전주에서 만나 연습할 약속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한 번 가면 반드시 또 가게 된다는 인도. 하지만 언제 다시 밟게 될 줄 모르는 인도의 땅을 아쉽게 떠나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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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아버지는 어렸을 적에 우리 집안 족보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저는 '김해김씨 삼현파(金海金氏 三賢派)' 72대손이니 김수로왕(金首露王)으로부터 이어진 왕손이라는 겁니다. 어린 저는 '그럼 수백만 명의 김해김씨가 다 왕손이냐'고 철없이 아버지에게 따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우리 씨족의 시조인 김수로왕과, 삼현파의 시조이며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돌아가신 대학자 김일손 할아버지에 대해 대단한 존경과 자부심을 가지고 수시로 저에게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김수로왕의 이미지. 출처 : http://edumr.culturecontent.com/sub01/03.asp

특히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후(許皇后) 얘기를 해주시면서 '너는 절대 허씨 성을 가진 여성과는 결혼할 수 없다'고 못을 박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수로왕과 허황후에 대해 마치 저의 할아버지나 할머니인 것처럼 친근한 느낌을 가지며 자랐습니다. 

김수로왕의 탄생과 결혼은 대부분 알고 계시는 너무도 유명한 설화입니다. 
 

아홉 명의 부족장이 백성을 다스리고 있던 시절, 경상남도 김해에 있는 '구지봉'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구지가(龜旨歌)>를 합창했습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을 테다


수백 명이 모여 노래를 하고 춤을 추자 하늘로부터 끈이 내려왔는데, 그 끈에는 붉은 천에 쌓인 황금의 상자가 달려 있었습니다. 상자를 열어 보니 황금알 6개가 담겨 있었습니다. 

구지봉 고인돌. 출처 : http:// korean.visitkorea.or.kr/kor/ti/everywhere_sig...

며칠 후에 그 알에서 귀여운 아기들이 나왔는데 제일 먼저 나온 아이가 수로왕이요, 나머지 다섯 명도 각각 왕이 되었으니 이 분들이 6가야의 시조입니다. 수로왕은 키가 9척이요, 8자 눈썹에, 얼굴은 용과 같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척의 배가 남해 바다에서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다가왔습니다.

수로왕은 신하들을 보내어 배에 탄 사람들을 모셔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배 안에 타고 있던 아름다운 공주는 “나는 너희들을 모르기 때문에 경솔히 따라 갈 수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수로왕은 대궐 아래에 장막을 치고 공주를 기다렸습니다. 공주도 별포 나룻터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산신에게 바친 후 수로왕이 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허황후가 가지고 왔다는 파사석탑. 출처 : http://kr.blog.yahoo.com/isis21kr/1168.html?p=1&t=2

공주가 여러 사람들과 보화를 가지고 다가오니 왕은 그녀를 맞이하여 장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공주가 자신이 가락국에 오게 된 사연을 수로왕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이라고 합니다.
본국에 있을 때 부모님들께서 꿈에서 상제님을 보았는데 상제께서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라’ 라고 하셔서 저를 가락국으로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따고 떠났는데, 수신(水神)이 노해 갈 수 없게 되어 다시 돌아가 석탑을 배에 싣고 무사히 여기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왕과 공주는 장막에서 두 밤 한나절을 지낸 후 대궐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허황후는 1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로왕과 다정한 사랑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허황후 영존 출처 : http:// kr.ks.yahoo.com/service/ques_reply/ques_view....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이 이야기는 저에게 너무도 많은 의문을 던져 주었습니다.

-<구지가>를 부른 때가 후한 건무 18년이고, 신라 유리왕 19년이라고 하는데 그때 과연 알에서 사람이 태어날 수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아유타국 왕의 꿈에 김수로왕이 나타날 수 있었을까?
-아유타국 왕은 어떻게 자신의 꿈만 믿고 가보지도 못한 가락국에 공주를 보낼 수 있었단 말인가? 
-뱃사공들은 과연 가락국을 어떻게 알고 항해를 했을까?
-아유타국 공주의 이름이 왜 허황옥일까? 
-공주와 처음 만난 수로왕은 가락국말로 대화를 했을까, 아니면 아유타국말로 했을까, 아니면 통역이 있었을까?
-공주가 살았다는 아유타국은 과연 어디였을까? 
 일본에 있던 가락국의 분국이라는 설도 있고, 기원전 1세기 무렵 인도에 있었던 '아요디아' 왕국이라는 설도 있고, 태국의 '아유티야' 또는 '아요디아'에서 중국 사천성 보주 지역으로 집단 이주해 살던 허씨족이 이주해 온 것이라는 설도 있고, 낙랑지역에서 내려 온 유이민 혹은 상인이었다는 설도 있는데 과연 어느 것이 사실일까?


이 많은 의문을 시원하게 풀어 줄 해답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만남과 사랑이야기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바다 건너 이민족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흔적을 알려주는 신화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시조할머니인 허황후는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눈이 흑진주처럼 빛나고 얼굴에 비단 너울을 쓴 태국의 공주일 거라고 상상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나도 태국에 가서 나의 할머니가 살았던 아유디아란 나라의 흔적을 찾아 보리라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그 꿈은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저는 우리나라에 시집와서 사는 수많은 필리핀 여성이나 태국 여성들의 모습 속에서 허황후 할머니의 그림자를 보곤 합니다. 그 그림자는 바로 이 마지막 의문에서 출발한 겁니다.

만약 허황후가 인도나 태국쪽의 여인이었다면, 우리 김해김씨는 바로 '다문화 씨족' 이며 나는 그 후손 아닌가?


국립무용단 춤극 <가야> 중 허황후 장면. 출처 : http://www.peridot.or.kr/bbs/zboard.php?id=photo7&no=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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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0일 저녁 9시 경, 술에 취한 박모(31세)씨는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옆에 서 있는 검은 얼굴의 외국인을 보자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그는 "아랍사람들은 더럽다", "냄새난다" 등의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외국인이 박씨를 고소했고, 이 사건을 심리한 인천지법 부천지원 형사 2부는 박씨에게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피고인이 특정 종교나 국적의 외국인을 혐오하는듯한 발언을 해 피해자에게 모욕감을 느끼게 한 점이 인정된다.

박씨가 '형법 상 모욕죄'를 범했다는 판결의 요지입니다. 국내 사법 사상 외국인이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고 기소를 한 것도 처음이고, 유죄판결을 내린 것도 처음있는 일입니다. 

보노짓 후세인씨. 출처 : http:// 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

소송을 한 보노짓 후세인(28세)씨는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을 왜 번거롭게 법원까지 가지고 갔을까요? 기사에 따르면 아랍이 아닌 인도에서 온 그는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그 비슷한 일을 수도 없이 겪었다고 합니다.

지하철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곁에 앉기 꺼려했고, 버스에서 깜빡 졸아 종점까지 갔을 때 버스기사가 발로 차서 그를 깨운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갈수록 심해지는 한국사회의 인종차별적 풍토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법의 문을 두드렸다고 합니다.

그는 성공회대학교의 연구교수입니다. 인도 뉴델리의 델리 대학에서 현대사를 전공한 그는 인도에서는 성공한 엘리트이며, 국내에서는 어엿한 교수입니다. 그런데도 외모만으로 편견을 가지고 대하는 우리 사회의 풍조에 억울한 일을 수도 없이 당한 겁니다. 

이 판결이 전례가 되어 앞으로는 외국인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면 유죄판결을 받게 될 공산이 큽니다. 이번은 벌금형이었지만, 사안에 따라서는 구속을 당할 수도 있는 범죄행위가 된 겁니다.

외국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중적 태도는 정말 눈 뜨고 못 볼 지경입니다. 유럽이나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온 백인들에게 그런 모욕적인 언행을 한 사례는 거의 없을 겁니다. 오히려 지나친 친절로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는 많이 봤습니다.

실제로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낸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친절도에 대해 서구인들은 70% 이상이 친절하다고 답한 반면, 아시아인들은 40% 대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올까요?

저는 외국인에 대한 '인종차별'보다도, 그보다 더한 '외모차별'에서 나온 현상이라고 봅니다. 

하얀 피부와 검은 피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너무도 극심한 편견과 차별에 가득 차 있습니다. 노르스름한 피부의 황인종인 우리는 피부가 새하얗고 늘씬하게 쭉쭉 뻗은 백인들의 외모를 선망하며 자랍니다. 

모든 남자와 여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은 서구식 미남미녀의 기준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는 말이 방송 츨연자 입에서 서슴없이 나올만큼 광법위하게 '외모지상주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키가 크고, 아름답고, 몸매가 쭉 빠진 사람을 선호하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 인간의 본성이니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타고 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외모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에게 모욕적인 언행을 하거나 부당한 차별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회 풍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 현상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게 개그프로그램들입니다. 

웃음을 위해 외모를 활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정도는 위험 수위까지 도달했다고 보여집니다. 뚱뚱한 여자, 마른 남자, 키 작은 남자, 여성스러운 남자들이 조롱과 비웃음의 소재로 너무도 흔하게 사용됩니다.

출처 : http://www.sportsseoul.com/news2/entertain/broad/200...

KBS 2TV <개그콘서트>'그냥 내비둬'에서는 뚱뚱한 여성과 근육질 남성이 데이트하는 장면을 보던 두 남자가 뚱뚱한 여자를 향해 "얼굴에 악성 코드가 걸렸어", "침 뱉고 싶겠지".... 와 같은 말을 합니다.

'달인'에서는 개그맨과 진행자 사이에 "네 다리는 족발", "네가 먹는 건 돼지 사료" 같은 식의 농담을 대수롭지 않게 주고 받습니다. '봉숭아학당'에선 유난히 마른 몸매를 지닌 개그맨을 자주 시체나 해골, 난민에 비유합니다.

지난 9월에 종영한 MBC TV의 <개그야> 역시 외모 비하로 끊임없이 억지웃음을 유발하다 외면당했습니다. SBS TV의 <웃찾사>에서는 지난 8월에 "못생긴 여자는 없애야 한다"는 대사를 방송해서 문제가 된 적도 있습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측은 "지난 3~4월 지상파 방송 3사 코미디 프로그램을 분석한 결과, 외모 비하가 지나쳐 '의견 제시' 형식으로 행정 지도를 했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며 "방송에서 성형수술을 해야만 여자가 예뻐질 수 있다는 식으로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는 건 큰 문제"라고 밝혔습니다.

방송에서는 비하 받는 당사자가 모욕감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그런 연기를 통해 돈을 벌고 인기를 얻으니 당사자끼리는 문제될 게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말이나 표현이 공중파를 타고 끊임없이 시청자의 안방에 파고 들기 때문에, 시청자들 또한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게 된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외모에 대해 번지는 우리 사회의 차별과 편견은 '큰 문제'가 아니라 '매우 심각한 문제' 수준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피해자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모욕과 차별에 대한 분노를 참아야만 합니다.

이걸 '그냥 내비둬'야 할까요?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외모에 대한 모욕적인 말을 듣고 상대방을 고소하면 어떤 판결이 나올까요?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피고인이 특정 신체나 외모의 소유자를 혐오하는듯한 발언을 해 피해자에게 모욕감을 느끼게 한 점이 인정된다.

이런 판결문으로 벌금형이나 구속형이 언도될 때가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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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예술인 모임에서 지각하는 사람 때문에 시작이 지체되자 여기저기서 불평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한 원로 예술인이 얼마 전에 인도를 갔다 왔다며 여행담을 시작했습니다.

인도에서는 버스가 삼십 분이나 한 시간쯤 연착하는 건 보통인데,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가 타더랍니다.

이상해서 한 노인에게 왜 불평 한 마디 없이 기다리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버스가 늦게 오는 건 오천 년 전부터 예정된 일인데 왜 불평하느냐고 반문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인도의 거리는 사람과 차와 소가 한데 뒤엉켜 말할 수 없이 혼잡스러운데도 교통사고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다는 등 인도인들의 재미있는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듣는 동안 참석자가 모두 모이게 되자, 이것도 오천 년 전에 예정된 늦은 시작이라고 농담을 하며 즐겁게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농담처럼 던져진 그 이야기에 내심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도 노인의 인생관과, 우리 인생관의 간극이 너무도 엄청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외국인들이 한국 사람을 기억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빨리 빨리’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우리는 숨차게 살고 있습니다. 노래도 빠른 노래, 춤도 빠른 춤, 컴퓨터도 빠른 신종, 자동차도 빠른 새차로 빨리 빨리 바꿔치기하며 살고 있습니다. 느긋하고 소박한 심성은 답답하고 무능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제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은 치열한 승부욕으로 무장한 채 미래를 향해 돌진하며 살아갑니다. 현재의 제 삶 역시 끊임없는 변화와 도전과 발전을 추구하며, 경쟁과 속도와 정보의 홍수와 교통지옥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이러한 제게 인도 노인의 한마디는 선승이 던져 준 화두처럼 제 머리를 오랫동안 맴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때때로 달리기를 멈추고 숨고르기를 해야 되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휴식 공간이 필요하듯 한 국가나 도시 안에도 숨 쉴 공간은 반드시 필요한 것 아닐까요?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수필집의 ‘뒤늦은 도시계획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이렇게 제안합니다.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오직 하나, 사람들이 마음대로 머물 수 있고, 때로는 시름에 잠겨서 발길 닿는 대로 산책도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공간을 보존하거나 혹은 회복시키자 것이다.”


이런 얘기는 현재 우리나라의 4대강 사업이나 대규모 국토 개발을 이끌어가고 있는 개발론자들에게는 시대에 뒤떨어진 한가한 소리라고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제가 가 봤던 파리나 베를린이나 베니스가 곳곳에 있는 오래된 유적과 성과 광장과 공원과 극장의 아름다움으로 엄청난 관광 수입을 올리는 것을 보면, 그런 나라들의 도시 개발 담당자들은 현명한 철학자의 말을 비웃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생존의 전쟁터가 아닌 영혼의 휴식이 가능한 곳, 돈과 권력이 판치는 곳이 아닌 예술과 삶의 지혜가 넘치는 곳, 욕망과 탐욕이 들끓는 곳이 아닌 인정과 소박함이 넘치는 곳이었으면 하는 꿈을 오랫동안 간절하게 품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꿈을 위해서 오늘도 숨가쁘게 뛰어다녀야 하니, 느리게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소망인가 봅니다.


여기 섬진강 시인 김용택님 멋진 육성이 있군요.

가끔은 멈추어야 한다고. 요즘 얼마나 빠른 세상이야. 정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달려가고 있지. 정신이 없어. 그럴 때 가끔 멈추어서 뒤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지. '성찰'하는 거 말이야. 그래서 뭔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치고, 새롭게 또 가는거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만 하는 삶은 재미없어. 삶의 재미는 그런 게 아니니까. 삶은 고속도로가 아니야. 저기 보이는 섬진강 물줄기처럼 휘어지기도 하고, 깊기도 하고, 얕기도 하고, 잠깐 멈추기도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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