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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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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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9.09.25
    내가 생각하는 판소리 이야기 (34)
  2. 2009.07.23
    타락한 동양의 아름다운 전통, 접대문화. (32)
  3. 2009.07.02
    [편견타파 릴레이] 우리가 기생이냐? (24)
  4. 2009.05.15
    나의 스승 박초월 명창 생각하니 눈물난다 (16)
  5. 2009.05.05
    장관 껍데기 훌훌 벗고 광대로 돌아와보니 (24)
며칠 전, 몬스터님으로부터 릴레이 바통을 받았습니다. 릴레이의 주제는 '내가 생각하는 @@이야기'이고, 몬스터님은 저에게 <판소리>라는 주제로 바통을 넘기셨습니다. 몬스터님의 릴레이 글은http://culturemon.tistory.com/187 에 실려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판소리 이야기

저는 6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때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책 아래 온 국민이 <새마을 노래>를 합창하던 시절입니다. 새마을 노래의 2절을 아시나요?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초가집을 시멘트집으로, 기와 지붕은 스레트 지붕으로, 황토길은 아스팔트길로 바꾸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옛날 것, 초가집, 풍물, 굿....이런 것들은 비생산적이고 비능률적이고, 비효율적인 유산으로 치부되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근대화의 열풍 속에서 전통은 무너뜨리고 부셔버려야 하는 대상이었던 겁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저는 70년대에 대학교를 다녔습니다. 당시 저는 “사운드 오브 뮤직” 같은 뮤지컬 영화나 오페라 아리아나 이태리 민요에 열광하고, 서양의 고전 음악을 좋아했고, 독일에 유학 가길 희망했던 독문학도였습니다.

그러다가 1973년 대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판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느 시골 국악원에서 여자 명창이 아이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어느 곳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음악이었기 때문입니다.

제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은 베토벤의 열광적인 숭배자였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오페라 팬이었고, 누이들도 교회의 성가대나 학교의 합창반이었습니다. 그런 집안의 분위기 때문에 저도 이탈리아 민요나 오페라 아리아나 가곡을 즐겨 불렀습니다.

이런 제게 판소리는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판소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혼자 국악 음반을 듣고 책을 보며 공부했습니다. 

대학교 4학년 말, 서울 종로의 단성사를 지나가다 ‘박초월 국악학원’을 발견하고 무작정 쳐들어갔습니다. 처음 배웠던 노래가 <진도 아리랑>이었는데, 제가 노래만 부르면 학생들이 깔깔거리고 웃었습니다.

선생님이 나중에 이유를 말씀하셨는데, 제가 판소리를 소프라노로 노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벨칸토 창법'으로 판소리를 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서구예술을 동경했고, 서구예술을 공부했고, 서구예술에 심취했던 제가 판소리를 배우면서부터 인생관도 바뀌고 삶의 태도도 바뀌었습니다. 

저는 제 고향을 싫어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가난의 흔적이 너무나 많은 그 곳을 떠나 서울로 가겠다는 일념으로 진학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도 누추한 한국을 빨리 떠나 독일에 갈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다 판소리에 빠지면서부터 거꾸로 전라도 말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전라도 말이 얼마나 다양한 표현과 영롱한 문학적 향기가 있는지 다시 배우게 되었습니다. 고향의 땅에 대해서도 다시 알게 되고, 고향에 대한 애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핏줄에 대한 애정 곧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사랑도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
통이란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았던 삶의 자취이고 향기인 것입니다. 

또 저는 한 동안 판소리를 배우면서도 판소리가 과연 음악적으로 얼마나 가치가 있는 지 오랫동안 의문을 품었습니다. 저는 마리오 란자나 프렝코 코렐리나 스테파뇨 같은 오페라 가수들이 세계에서 최고로 노래 잘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태리에서 오페라단이 왔는데, TV에서 그 사람들의 리허설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주고받는 게 노래가 아니라 말이더군요. 

그때까지 저는 오페라는 목에 힘주고 벨칸토 창법으로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태리 사람들은 자기 나라 말 가지고 자연스럽게 주고받다가 오페라를 부르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오페라가 그랬듯이 판소리는 우리말을 자연스럽게 주고받다가 노래가 되었다는 것. 판소리는 우리말을 그 중에서도 전라도 말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성악이고, 오페라는 이태리의 말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성악이니 무엇이 더 아름다운지 가릴 수가 없다는 걸 그 순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걸 깨달으면서 눈이 뜨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술에 대한 눈, 우리 전통을 보는 눈, 모든 것들이 새롭게 뜨인 겁니다.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자기 세계를 찾고 싶어 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찾으려고 하는 젊은이에게 전통은 억압적이고, 벗어나고 싶고, 파괴하고 싶은 대상으로 다가 옵니다.

그 테마가 「서편제」에 들어있습니다. 먹고 살기 힘든 판소리에 환멸을 느낀 젊은 아들이 소리꾼 유봉에게 대들다가 두들겨 맞고 가출을 합니다. 유봉은 하나 남은 의붓 딸의 눈을 멀게 만들지요.

겉으로는 소리의 명창 만들려고, 한을 심어주려고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도망 못가게 하려고, 전통에다가 묶어 두려고 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송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전통의 희생자입니다. 판소리에 집착하는 아버지 때문에 눈까지 멀고 모든 인생이 망가진 비극적 여인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중요한 대사가 나옵니다. 

유봉 : 송화야, 내가 네 눈을 멀게 했다. 알고 있었냐?
송화 : 알고 있었어요.
유봉 : 나를 용서해 줄 것이냐?

이 질문에 송화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용서를 한 거지요. 이게 「서편제」의 중요한 테마입니다.

젊은이는 전통을 파괴하고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전통과 화해하는 것, 전통을 용서하는 것, 또 전통을 그리워 하는 것입니다.

「서편제」이야기는 도망갔던 의붓아들이 그의 누이를 찾아서 헤매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자기가 버렸던 전통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여행을 떠나는 남자의 회상기입니다. 



전통은 바로 고향입니다.

우리의 영혼, 우리의 정서, 우리의 사고가 돌아가서 쉴 수 있는 곳. 쉬었다가 다시 또 새로운 힘을 찾아서 영감을 찾아 새로운 삶을 꾸려나갈 수 있게 해 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전통을 우리는 그동안 너무 무시했습니다. 그대신 남의 나라 전통은 너무도 열심히 배웠습니다. 
피아노, 바이올린, 클래식 음악, 발레.....서양의 전통예술들을 배우느라 엄청난 돈과 노력을 기울입니다. 

남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문화를 풍성하게 해주기 때문에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의 것을 열심히 배우면 배울수록, 자기 것을 비하하고 무시하는 부작용도 점점 커진다는 데 있습니다. 

판소리가 유럽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게 10여년 전입니다. '아비뇽 페스티발'이나 '파리 음악 축제'와 같은 유명 축제에 판소리가 소개된 뒤로, 유럽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판소리팬이 많이 생겼습니다. 

몇 년 전 프랑스에 갔을 때, 판소리를 좋아하는 프랑스 예술가들 몇몇에게 왜 판소리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전 세계에 이런 놀라운 예술이 없다는 겁니다. 한 인간이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동안 노래를 한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라는 겁니다. 

판소리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이 된 데에는 그런 유럽 판소리 팬들의 영향력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의 보물을 무시하는 동안 오히려 외국인들이 우리 전통의 가치를 더 깊이 알기 시작한 겁니다. 


칼 융이라는 심리학자는 “한 나라의 집단적 무의식은 유전이 된다.”고 말했다. 즉, 우리 핏속에 이어져 내려 온 무의식이 바로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저에게 전통이란, 또 판소리란 ‘나를 숨쉬게 하고, 나를 활기 있게 만들어 주고, 또 창조의 열정에 불타게 하는 소중한 원천이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TRACKBACK 5 AND COMMENT 34

 

손님을 극진하게 ‘대접’하는 것은 동양의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그런데 이 글자를 뒤집으면 ‘접대’라는 단어가 됩니다.

접대비는 영어로 ‘오락비(entertainment expenses)’로 번역된다고 하니, 술이든 골프든 오락을 통해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비난할 일이 아닌 듯 합니다.

다만 우리 기업들의 접대가 사회문제화 되는 이유는 엄청난 오락비용과 2차, 3차로 이어지는 '타락한 접대문화' 때문일 것입니다.



유럽의 기업가들은 동양을 가리켜 ‘부패가 문화인 나라들'이라며 비꼰다고 합니다. 대규모 접대비를 회사 예산으로 짜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라고 하니, 동양의 아름다운 '접대' 전통이 현대에 와서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다행히도 요즘 들어 기업의 ‘접대문화’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 두개의 단어를 바꾼 ‘문화접대’가 각광을 받는다니 반가운 일입니다.

기업들이 문화접대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공연 협찬이 세금 감면 대상이 되는 이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술이나 골프나 고급 음식을 대접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품격 있는 대접’을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 문화에 대한 일반 국민의 높아진 관심이나, 부부와 가족 중심 생활패턴의 확산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문화접대는 기업에는 문화적이고 품격 있는 이미지를 고객에게 심을 기회를 주고, 문화계에는 든든한 후원을 제공해주고 , 접대 받는 사람들에게는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일거삼득(一擧三得)’의 아주 바람직한 손님 대접입니다.

그런데 문화접대의 대상으로 선택되는 공연들은 주로 예술성과 흥행성을 두루 갖춘 서구의 대형 수입 뮤지컬이나 오페라나 발레 작품들입니다.



물론 우리의 기업인들과 문화접대를 받는 분들이 이런 작품들을 통해 문화적 품격을 향상시키고, 예술적 안목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제 가슴 한쪽이 이렇게 답답해 오는 걸까요?

마침 저의 마음을 대변해 줄 글이 연암 박지원의 글 가운데 있어 잠깐 소개합니다.

화담 서경덕 선생이 길을 가다가 길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너는 왜 우는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저는 다섯 살에 눈이 멀어 이제 스무 해나 되었습니다. 아침에 나와 길을 가는데 갑자기 천지만물이 맑고 밝게 보이는지라 기뻐 돌아가려 하니, 골목길은 갈림도 많고 대문은 서로 같아 제 집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웁니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네게 돌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그러면 바로 네 집을 찾을 수 있으리라.’

이에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려 도달할 수 있었다.

애국계몽기에 간행된 ‘담총’이란 글에서는 이 글을 인용한 후, 신세계에 눈을 떴으나 미처 적응하지 못한 우리 민중을 눈을 뜬 소경으로 보고, 도로 눈을 감으라는 것은 구시대에 안주하라는 뜻이라고 연암 선생을 비판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는 이 글을 달리 해석하고 싶습니다. 이 글의 요지는 ‘왜 눈을 뜬 소경이 집으로 가는 길을 잃었을까?’ 하는 의문에 있습니다. 자기 집 안에서 눈을 떴으면 괜찮았을 텐데 밖에 나와 눈을 뜬 것이 탈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잠깐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려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고 삶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집을 찾게 되면, 그 이후는 눈을 뜨고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겠지요.

'나를 확고히 세우지 않으면 밖의 것이 나를 길 잃게 만든다.'는 연암 선생의 이 인상적인 가르침을 문화를 즐기는 모든 이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제 것을 모른다면 좋아만 보이는 서구의 화려한 예술들이 나를 길 잃게 하고, 눈 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낡고 어렵다며 멀리 하지만, 전통예술은 보물창고입니다. 지금 우리가 찾고자 하는 수많은 보물들은 오래 전에 옛사람들이 저장해 놓은 창고 속에도 잔뜩 들어 있습니다. 

저에게 전통은 '삶의 활기를 불어 넣어주고, 예술의 영감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는 제 영혼의 보물창고' 입니다.

우리 기업들의 문화접대 명단에 우리 소리도, 우리 몸짓도, 우리 연극도 포함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연암 선생의 글을 빌어 전해 봅니다.


트랙백 1 AND COMMENT 32
바람나그네님과 예스비™님으로부터 릴레이 바톤을 이어받았습니다. 추천 감사드립니다.

[편견타파 릴레이]
1. 자신의 직종이나 전공 때문에 주위에서 자주 듣게 되는 이야기를 써주세요.
2. 다음 주자 3분께 바톤을 넘겨주세요.
3. 마감기한은 7월 31일까지 입니다.




몇 년 전에 어느 도의 국악원 단원들이 고위관료들의 술자리나 잔치 자리에 수시로 불려 가 노래를 부른 사례를 폭로하며 “우리가 기생이냐?”고 공개적으로 항의한 일이 있었습니다.

때아닌 “기생 논쟁”에 많은 분들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관료들의 구시대적인 관행을 꾸짖었습니다. 그 일은 곧 마무리되어 잠잠해졌지만, 봉건사회의 천민 계급이었던 기생이나 광대들의 예술혼으로 이어져 온 전통 예술에 대한 편견은 아직도 이 사회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의 판소리 스승인 고 박초월 명창은 고향이 남원군 운봉면인데 전라도 쪽에서 공연 초청이 오면 다른 때보다 유난히 신경이 예민해지고 가기 싫어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서울에서는 인간문화재로 “선생님” 대접을 받고 있는데, 고향에만 가면 술자리에서 “초월이, 소리 한마디 해봐”하는 노인 팬들의 무례함에 속이 상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평소에도 술자리에서 함부로 소리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신신 당부하셨습니다. 그 가르침 때문에 저 역시 술자리에서 소리하는 일을 조심스럽게 여기게 되었지만, 지금껏 지내오는 동안 그 가르침을 제대로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서편제> 이후 여러 모임이나 술자리에서 소리 한 마디 청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아 곤혹스러운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노래를 청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분위기와 예의가 필요한 법인데, 너무도 쉽게 소리 한 마디를 요구할 때마다 상대방이 기분 상하지 않게 거절하느라 진땀을 빼곤 했습니다.  저같은 아마추어가 그럴진대 국악에 몸담고 정진하는 예술가들은 그런 경우를 얼마나 많이 겪겠어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성악가에게 오페라 아리아를 청하기보다 판소리 명창에게 소리 한마디 청하는 걸 더 쉽게 생각합니다. 한술 더 떠서 민요나 판소리나 한국춤은 술자리에서 해야 진짜 맛이 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때로는 기생 점고를 통해 국악인을 희롱하는 변학도의 풍류 취향이 남아 있는 사회 지도층 인사도 종종 눈에 띕니다. 이런 시대 착오적인 풍류객들이 종종 예술가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어느 국악 콩쿨에서 입상한 젊은 여자 명창은 입상 축하 회식 자리에서 또 다시 판소리를 부르게 하고, 술시중까지 요구하는 주최사 사장님의 추태에 수치심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국악하는 여성이나 여가수나 여탈렌트나 여배우들을 술자리의 여흥을 돋우는 도우미나 하룻밤 잠자리 시중을 드는 고급 화류계 여성처럼 함부로 대하는 남성들의 편견 섞인 말이나 행동을 보면 저는 분노가 밀려 오곤 합니다. 장자연님의 자살에 대해 너무 마음이 아픈 것도 그런 편견이 젊은 여성의 마음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줬는지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나 전통 예술은 현대 대중 예술의 위세에 눌려 맥을 못 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진국일수록 자기 나라의 전통 예술을 지켜 내기 위해서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일본의 가부키나 중국의 경극, 인도의 전통극들은 일찍이 정부와 기업의 지원 아래 유럽이나 미국의 예술계에서 동양의 우수한 예술로 인정받고, 지금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또 유럽 각국도 미국 대중 문화에 대항해서 자국의 전통 예술을 살려 내기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화려하고 부유한 애호가들에 둘러싸인 서양의 전통 예술가들에 비해 소박한 촌로와 서민들에게 둘러싸인 이 나라 전통 예술의 현실이 너무 마음 아픕니다.  

많은 분들이 전통을 사랑하고 키워내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생활에서 전통은 아직도 편견 속에서 소홀하게 취급당하고 있으며, 때로는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수많은 전통 예술인들은 슬픔을 느끼면서도 오로지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힘겨운 삶을 지탱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스타 가수들이나 스타 탤런트들이 받는 것과 같은 고액의 개런티도 아니고, 정부로부터 받는 지원금을 두배 세배 올려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편견없는 사랑과 관심입니다. 그들이 예술가로서 진정한 자부심을 느끼고, 예술가로서 성장할 희망을 갖도록 마음을 써 주는 주변의 깊은 배려인 것입니다.


 
 예스비™님을 통해 바톤이 넘어온 경로

 1. 라라윈님 : 독서릴레이 + 새 릴레이 시작, 편견타파 릴레이

 2. 해피아름드리님 : 편견을 버리세요~~편견타파 릴레이...

 3. 검도쉐프님 : [편견타파 릴레이] 편견을 버리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4. 용짱님 : [편견타파 릴레이] 용짱은 된장남?

 5. 생각하는 사람님 : [편견타파 릴레이]생각이 없는 생각하는사람?

 6. White Rain님 : [편견타파 릴레이]남자가 팩하면 별난 사람?

 7. 코로돼지님 : [편견타파 릴레이] 고양이 키우면 유산해?

 8. 영웅전쟁님 : [편견타파 릴레이] 왼손잡이의 편견에서 벗어나자

 9. 아이미슈님 : [편견타파 릴레이] 보이는게 다가 아니다. 여자라고 어리다고 냅다 반말부터?

 10. leebok님 :  [편견타파릴레이]수학을 잘해야 과학자가 될수 있나요?

 11. 미국얄개님 :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주인공은 바로 자기자신

 12. 예스비™님 : 편견타파 릴레이_ 나이는 숫자에 불과 하다면서?
 



 
 바람나그네님을 통해 바톤이 넘어온 경로

 1. 라라윈님 : 독서릴레이 + 새 릴레이 시작, 편견타파 릴레이

 2. 해피아름드리님 : 편견을 버리세요~~편견타파 릴레이...

 3. 검도쉐프님 : [편견타파 릴레이] 편견을 버리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4. 용짱님 : [편견타파 릴레이] 용짱은 된장남?

 5. 생각하는 사람님 : [편견타파 릴레이]생각이 없는 생각하는사람?

 6. 라이너스님 : 비싼 카메라 든 사람은 정말 사진을 잘 찍을까? [편견 타파 릴레이]

 7. 펨께님 : [편견타파 릴레이] 편견은 무지다.

 8. 바람나그네님 : [편견타파 릴레이] 편견은 배척을 낳는다.


 


제가 바톤을 넘기고 싶은 분을 3분씩 추천합니다.

바람나그네님 쪽
1. 쏭군님 : 저한테 독서릴레이 바톤을 주셨으니 빚을 갚아야죠?
2. 뷰라님 : 방송계의 편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황금촉.
3. 정운현님 : 역사와 우리 사회에 대한 편견을 께뜨려주시는 분. 

예스비™님쪽
1. 곤이엄마님 : 시골 생활에 대한 도시인들의 편견을 깨뜨려 주시는 분.
2. 붉은방패님 : 물구나무 서서 세상을 보는 분.
3. heraus님 : '생각은 자유'라는 소신으로 글을 쓰시는 분. 


 

TRACKBACK 8 AND COMMENT 24

아직도 스승의 날만 되면 특별히 떠오르는 스승이 계십니다. 바로 저의 판소리 스승인 박초월 명창이십니다.                       .

박초월 스승과의 만남은 제가 대학교 3학년 학생이던 때였습니다.

눈이 펑펑 내리던 초겨울 어느 날, 군대 갔다가 휴가 나온 친구와 함께 비원 쪽으로 터덜터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다가 친구가 길가에 멈춰 서더니 간판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박초월 국악 전습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건물 4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친구는 김제에 있는 국악원에서 판소리를 조금 배웠고, 저는 그 친구 덕에 난생 처음 판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어 판소리에 심취해 있었기에 무조건 올라간 겁니다. 

북소리와 소녀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학원의 현관문을 기세 좋게 열고 들어간 친구가 
판소리를 몇 달 배웠다는 둥 너스레를 떨자 중년 남자 한 분이 북을 차고앉으면서 “소리를 배웠다니 한번 들어 보자”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당대 최고의 남자 명창이던 조상현씨였습니다.

친구는 김제에서 배웠던 '단가' 한 대목을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나니 소파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쉰 목소리로 하하거리고 웃었고, 소녀들도 킥킥거리고 웃었습니다. 친구는 본래 음치인데다가 박치까지 겸했으니 그럴 만도 했지요.

소파에 앉아서 웃던 할머니가 저를 가리키며 “저 사람도 소리 한번 들어 보자.”고 했습니다. 저는 얼굴을 붉히며 “저는 저 친구가 배우는 걸 구경만 해서 한 마디도 부를 줄 모릅니다.” 했습니다. 그러자 “소리를 배우러 왔다니 오늘부터 배워 보시게.”하면서 직접 북 앞에 앉으시는 거였습니다.

박초월 스승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박초월 명창(1917~1983). 호 미산. 본명 박삼순. <수궁가> 인간문화재.
김소희, 박녹주 명창과 함께 1930~1970년대 한국 여성 판소리계를 대표한 3대 여류명창 중 한 명이다. 
현재의 대표적인 남성 명창인 조통달은 박초월 명창의 조카이고, 가수 조관우는 조통달 명창의 아들이니 명창의 피가 손자인 조관우에게 이어졌다.

                   박초월 명창의 외손자인  가수 조관우.


저는 그날부터 열심히 학원에 다녔고, 친구는 저의 한 달분 수업료 6천원을 대신 내주고는 군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지 한 달 뒤에 수업료 낼 돈이 없어서 학원을 다니지 못하겠다고 하자, 선생님이 웃으며 그냥 다니라고 하셨습니다.

“자네는 서울대학교 학생이잖여...”

선생님이 말씀하신 학원비 면제 이유였습니다. 게다가 자취방도 없이 여기저기 기숙을 하며 보내던 제 딱한 사정을 아신 선생님은 크리스마스가 되자 목도리와 장갑을 선물로 주시며, 잠자리가 마땅찮으면 학원에서 자라고 하셨습니다. 오갈 데 없던 처지였던 저는 며칠 뒤부터 학원에서 잠을 잤습니다.

70년대의 대학가는 서구의 히피 문화가 휩쓸었던 때입니다. 장발에 청바지와 통기타와 미니스커트가 유행했습니다. 그런 문화적 분위기에서 살았던 제가 미쳐도 한참 미치고,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습니다.

대학교 졸업생이 학교는 안 가고 판소리 학원에서 먹고 자고, 선생님이 아침 일찍 싸들고 오시는 아침밥을 얻어 먹고, 하루 종일 전화 받고, 노래 가사도 써 주고, 학원생들 판소리 배울 때 같이 배우고, 학원생들 다 가고 나면 걸레질하고 소파에서 잠을 잤습니다. 참으로 괴상한, 그러나 너무도 행복한 나날들이었습니다.

밤에 잠이 안 오면 학원 창문 밖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단성사> 영화관의 화려한 영화 간판과 네온사인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는데, 십오 년쯤 뒤에 제가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한 「서편제」의 간판이 그 곳에 걸릴 줄 어찌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러다가 선생님의 외아들이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지자, 아예 서대문구 불광동에 있는 선생님 댁에 가정교사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아들의 공부를 가르쳐 주고, 선생님은 제게 노래를 가르쳐 주는 교환(?)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북도 칠 줄 모르는 초보 제자에게 한복을 입히고 집 마당에 병풍 치고 찍은 기념 사진.


선생님은 새벽 다섯 시면 불광산으로 아침 등산을 가는 게 첫 일과였습니다. 그때 집에는 전남 순천에서 소리를 배우러 올라온 예쁜 꼬마 국민학교 소녀가 있어서 함께 가곤 했지요.

우리는 산에 올라가 선생님을 따라서 발성 연습을 하고, 시조로 목을 풀기도 하고, 낮에 배웠던 대목 중에서 잘 안 되는 부분을 반복해서 연습하고 교정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참 하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몸도 가벼워져서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정이 많은 성격이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무한정으로 정을 쏟는 성격이었지요. 그중에서도 제게 쏟는 정은 무척 각별했어요. 마치 아들에게 하듯이 먹는 것 입는 것 모두를 챙겨 주고, 제가 외출을 할 때면 용돈까지 주시곤 했습니다.

게다가 소리 공부도 어찌나 극성스럽게 시키는지 다른 제자들이 질투할 정도였습니다. 또 제자 중에 대학을 나온 ‘선비’가 있다는 게 그렇게도 자랑스러운지 공연을 하러 가시거나, 방송국에 가시거나, 국악인들의 모임이 있을 때면 꼭 저를 데리고 가서 인사를 시키곤 하셨습니다.

그러한 선생님의 사랑 덕분에 저는 평생을 판소리에 몸담아 온 예술가의 겉과 속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책이나 이론적인 가르침을 통해서는 깨달을 수 없는,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광대의 삶에 대해서도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같은 스승 박초월 명창


선생님은 제자들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 피우는 걸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물론 성대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오랜 무대 생활의 체험으로 광대에게는 무엇보다 절제가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때로 옛날에 함께 판소리를 했던 사람들 중에 술이나 아편으로 폐인이 된 사람이 많았다는 얘기를 하시면서 술·담배에 절어 있으면 절대 명창이 될 수 없다고하셨습니다.

또 남녀 간의 이성 관계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하신 편이었습니다.

“사내는 계집 조심하고, 계집은 사내 조심해야 돼.”

옛날 선생님들은 제자가 방탕한 행동을 하면 여지없이 파문해버렸다는 말씀도 종종 하시곤 했습니다.

또 평상시의 몸가짐에서도 오랫동안 혼자 사시느라 그랬는지 무척 까다롭고 가리시는 게 많아 사람을 가려서 사귀는 편이었고, 약속 시간은 철저하게 지키셨습니다.

또 소리꾼이 술 몇 잔 얻어먹거나, 돈 몇 푼에 팔려서 취객의 흥을 돋우는 것은 옛날 얘기지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술자리나 잔칫집에서 노래 부르는 걸 철저하게 금하셨습니다.

그런 성격이셨으니 공연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지병인 당뇨병으로 고생하신 지 십 년도 넘었던 터라 평상시에도 건강을 위해서 세심하게 신경을 쓰시는 편이었지만, 공연 날짜가 확정되면 그날부터 집안은 초긴장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보약을 지어서 달여 먹거나 끼니때마다 몸의 기운을 돋워 주는 음식들을 정성스럽게 드시고, 사람과의 만남도 줄이고, 등산길에 체조도 하고, 발성 연습도 더욱 공들여 하십니다.

또 될 수 있으면 집안일에 신경을 덜 쓰고, 공연에만 정신을 집중하려 하십니다. 자신의 허약한 건강 상태를 극복하고 무대에서 최상의 판소리를 부르려는 선생님의 눈물겨운 노력을 보면서 나는 종종 숙연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는 동안, 제게는 새로운 음악 세계를 탐험하는 행복과 함께 힘겨운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차라리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더욱 빨리 판소리의 창법을 익힐 수 있었으련만, 노래만 하려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벨칸토 식 발성기관 때문에 호되게 고생했습니다.

그 시기의 저는 발성법뿐 아니라 그 동안 내가 쌓아왔던 음악에 대한 감각의 대수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탐험에 따른 고통치고는 정말 혹독한 시련의 세월이었습니다.

그 무렵의 저를 가장 괴롭힌 문제는 오페라와 판소리의 음악성에 대한 비교의 문제였습니다.

저는 판소리가 우리 것이기 때문에 좋아한 것이 아니고, 음악적으로 저를 끌어당겼기 때문에 좋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음악적 깊이와 표현력은 오페라와 견주어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판소리를 공부하면 할수록 타당한 생각으로 굳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판소리를 둘러 싼 외적 여건은 그런 생각을 증명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게 현실이었습니다.

판소리를 하는 성악가의 절대 부족,
그 성악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 공간의 열악함,
성악가를 좋아하는 팬들의 고령화와 절대적 감소추세,
새로운 판소리를 작곡할 수 있는 작가와 작곡자, 연출가의 빈곤함,
음반화에 필수적인 전문 기획자와 녹음 기사의 부족,
이 모든 조건에서 판소리는 오페라와 경쟁하기에는 너무도 척박한 환경에서 악전고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악전고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오페라나 서양 음악을 몰랐더라면 하지 않았을 고민으로 저는 오랫동안 끙끙대며 가슴앓이 했습니다.

저는 기초적인 민요나 단가를 배운 뒤,「흥보가」「수궁가」를 공부하고 있던 때라 공부에 대한 의욕은 대단했지만 연극일에 쫒겨서 가는 날보다 못 가는 날이 갈수록 많아졌습니다.

그 무렵 선생님은 무척 적적하고 쓸쓸해 하셨습니다. 당뇨병 증세가 심해지고 갈수록 건강이 나빠지자 아예 학원을 폐쇄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찾아오는 제자들만 가르치니, 제자 기다리고 가르치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었습니다.

또 공연 요청도 갈수록 줄어들어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잊혀져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싸여 무척 초조해 하셨습니다.

그 무렵 선생님은 남원군 운봉 땅에서 살 무렵, 아버지한테 지게작대기로 얻어 맞으면서도 판소리에 미쳤던 시절의 이야기를 종종 하시곤 하셨습니다.

집안에 기생이 나올까 걱정이 태산이셨던 아버님은 14살도 안 된 딸을 부잣집에 시집 보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첫날 밤도 치르지 않고 시집에서 도망 나와 남원 권번에 들어 가 판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에 서 있는 동편제의 시조인 송흥록 명창(1789년 경~1863년 경)의 동상.
그 뒤에 보이는 초가집이 박초월 명창이 자랐던 소녀 시절의 집.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재 소녀 명창이란 칭찬을 듣고, 열여섯 살 무렵에는 이미 명창 대회에서 일등을 한 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레코드 취입을 하고, 일본으로 서울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던 시절의 얘기는 화려하고 재미있었습니다.

1933년에 <조선 성악 연구회>에 들어가서 이화중선과 같은 여류 명창과 함께 대표적인 여류 명창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여성 창극단이 생겼을 때는 전국을 돌면서 뛰어난 노래와 연기로 수많은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던 그 시절의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있고 때로는 눈물겹기까지 했습니다.

  요즘의 <소녀시대>만큼이나 인기를 끌며 활약하던 시절에 찍은
  박초월 명창의 엣된 모습


사랑과 미움, 만남과 헤어짐, 화려함과 비참함, 방랑과 배고픔 같은 온갖 사연들이 소용돌이친 전성기의 영광은 늙으면 늙을수록, 또 주위가 적막해질수록 더욱더 빛을 발하며 선생님의 가슴속을 비춰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 무렵의 선생님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결사적으로 항거하고 있었습니다. 고적한 방안에서 가쁜 숨을 쉬고 손을 떨며 화장을 하시고는, 언제 올지 모를 제자를 하염없이 기다리시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가면 이를 악물고 북을 치며 소리를 가르쳐 주시곤 했습니다.

                       병든 몸으로 소리를 가르치던
                       스승님의 말년의 모습.


저는 선생님의 힘들어하시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공부하는 시간을 한 시간에서 삼십분으로 줄이고, 어떤 때는 혼자서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거나, 아니면 이야기만 나누다 오곤 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굳이 문밖까지 나와 제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쓸쓸하게 서 계시곤 했습니다. 그 모습이 등에 박혀 제 걸음은 무겁기만 했지만, 집에는 또 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로 중풍의 병환이 점점 깊어가는 아버님이 계시니 안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은 연극 공연이 끝나고 출연료를 받았는데, 그 돈으로는 도저히 쌀값과 아버지의 약값을 마련할 길이 없어 한숨을 쉬면서도 습관적으로 선생님 댁에 공부를 하러 갔습니다.

그날 마침 「흥보가」중에서 흥보 부인이 <가난타령>을 하면서 우는 대목을 배웠습니다.

가난이야 가난이야
원수 놈의 가난이야
잘 살고 못 살기는
삼신 제왕이 마련을 했나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불우 행사 한 일 없이
밤낮 주야로 벌었어도
삼순구식(三旬九食)을
면할 수가 없네

박초월 명창의 흥보가 중 '가난타령'

그런데 노래를 부르던 중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더니 그만 노래를 다 부르지 못하고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시더니 물으셨습니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어디 몸이 아픈가, 집안에 우환이 있는가?”

그래도 제가 대답 없이 울기만 하자 눈물을 글썽이며 곰곰 생각하시더니 틀림없이 그것 때문일 것이라는 듯이 조용히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사귀던 여자하고 헤어진 게지?^^”

저는 그런 쪽으로 결론을 내린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도 뜻밖이라 웃지도 울지도 못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눈물을 그치고 거짓말로 들러대기 시작했습니다.

“출판사 하는 친구에게 꾸어 준 돈이 있는데 그 친구가 망해서 그 돈을 못 받게 되었어요.”

저는 그때까지 연극을 하면서 친구와 함께 출판사를 차려서 돈을 잘 번다고 선생님을 속여 왔기 때문에 솔직한 사정을 도저히 얘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 얘기를 들은 선생님은 금세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시더니 서랍에서 오만 원을 꺼내어 제 손에 꼬옥 쥐어 주셨습니다.

그 돈으로 아버님께 약을 사드릴 수 있게 되었지만 저는 그 일이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지금도 <가난타령> 대목만 하려면 그때의 일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이렇듯 정 많고 눈물 많은 분이었기에 말년의 쓸쓸함을 어느 누구보다도 견디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건강이 허락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일 년에 몇 차례 있는 공연 요청을 한 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당뇨병이 점점 악화되어 체중이 줄어들고 기억력이 감퇴되고 목소리가 잠기게 되었는데도, 다른 국악인들을 만나면 건강이 좋아졌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 웃음 뒤의 슬픔, 그 짙은 화장 뒤의 주름살과, 무대에서의 갈채 뒤에 오는 기력 쇠진과 허탈을 모두 알고 있는 저는 선생님의 웃음이 밝으면 밝을수록 더욱더 불안하였습니다.

그 불안은 점점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어떤 공연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번은 「수궁가」를 하시던 중에 느닷없이「흥보가」가사가 튀어 나오더니, 중간에 가사를 잊어버리고 한참을 헤매시다가, 제자들이 무대 뒤에서 가사를 소리쳐서 일러준 덕에 간신히 한 대목을 때우고 나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처참한 선생님의 표정은 내 가슴을 사정없이 후비며 파고들었습니다.

또 한 번은 공연을 끝내고 나오시더니 부리나케 집으로 가자고 하시는 거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배에 힘을 쓰다가 자신도 모르게 설사가 나와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당뇨병의 말기 증세인 만성 설사에 시달리고 계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그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을 했으며, 그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된 것을 느낀 선생님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지 생각하곤 혼자서 남몰래 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촬영을 마치고 새벽에 돌아왔을 때, 집으로 박초월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깜짝 놀라 허둥지둥 달려가 보니 선생님의 집안에 제자들과 국악인들의 통곡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며 그렇게도 이승의 삶에 애착을 가졌던 선생님!
예순여섯이란 '젊은' 나이에 죽음을 기다리게 된 자신을 몹시도 안타까워 했던 선생님!

지금쯤 이승의 허공을 떠돌며 자식들과 제자들과 자신이 사랑을 쏟았던 사람들의 주변을 맴돌고 계실까요? 

선생님! 어디에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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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부 장관 직을 그만 둔지도 어느 덧 2년이 되어 간다.
그동안 TV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연기자로, 연극 <밀키웨이>에서는 극작과 연출가로, 최근에는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위원장으로서 즐겁고 바쁘게 살고 있다.
 

내가「대왕 세종」에 출연하고 있을 때, 모 일간지에 동정 기사가 실렸는데 그 기사의 제목이 한동안 여기저기서 화제가 됐다.


김명곤 씨 “장관 껍데기 훌훌~ 다시 광대로”

“장관이라는 껍데기를 훌훌 벗어 버리고 이제 천직인 광대로 탈바꿈해야죠. 걱정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허허.”

김명곤(55·사진)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내년 1월 방송 예정인 KBS 1TV 사극 ‘대왕 세종’(극본 윤선주·연출 김성근)에서 배우로 복귀한다. 1999년 자신이 연출한 연극 ‘유랑의 노래’에 출연한 지 8년 만이다.

그는 그동안 국립극장장과 문화부 장관을 지내면서 연기와 멀어졌다.김 전 장관은 ‘대왕 세종’에서 고려 황실의 후예로 조선 왕조의 전복을 꿈꾸는 옥환 역을 맡았다. 옥환은 어린 세종을 긴장하게 만드는 인물로 초반 30회까지 비중이 큰 역할이다. 그가 대하 사극에 출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D일보 2007년 10월 6일자 기사 중 일부)

나는 대학교 다닐 때만해도 광대라고 하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코에 빨간 공을 붙인 서양의 삐에로를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줄타기하는 광대를 처음 보았는데 그 광대가 줄에 올라서서 “이 줄타기가 옛날에는 화랑의 기예였소!.” 하길래 깜짝 놀랐다. "화랑이라면 신라 시대의 무사 집단인데 줄타기를 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며 광대에 관한 기록을 찾아봤다.

우리나라에 그윽하고 오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며 유교, 불교, 도교의 3교를 포함한 것으로 민중을 교화하는 것이다.

신라 시대의 학자인 고운 최치원이 쓴 글이다. 이 글을 바탕으로 역사가인 단재 신채호는 이렇게 썼다.
 

선가(仙家)는 신라의 국선 곧 '화랑'으로 보며, 그 시원은 삼한의 소도(蘇塗)의 제관으로 고구려의 '조의선인(鳥衣仙人)'이다.

이런 글들을 보니 고대사회에서 예술가들은 하늘에 국가적 제사를 지낼 때는 제관으로서 활동했고, 그들의 신분은 왕족이나 귀족에 속하는 상류계급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통일신라가 무너지고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화랑들과 함께 예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천민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광대”라는 말은 고려시대에 서역에서 들어 와 우리말로 정착된 외래어인데, 예술가를 지칭하는 단어인 광대가 화랭이, 재인 등의 용어와 뒤섞이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광대들은 기생, 무당, 중, 백정 등과 함께 천민계급으로 살아야 했다. 이들은 사대부나 평민들과 한 동네에서 살지도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하고,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자기들끼리 기예를 전수하면서,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고, 그들만의 독특한 사회를 꾸려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광대들에 대해 다산 정약용은 이런 상소문을 썼다.

광대가 봄·여름이면 고기잡이를 좇아 어촌으로 모여들고 가을과 겨울이면 추수를 바라고 농촌으로 쏠리는데, 특히 창촌에서는 사당, 창기, 주파, 화랑, 악공들의 잡류들을 엄금해야 합니다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본 <왕의 남자>는 이 무렵의 떠돌이 남사당 광대패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실학사상이 일어나고 평민 가사, 탈춤, 판소리 등의 가치를 양반들 중의 몇몇이 언급하게 되면서 광대들의 가치가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고종과 대원군이 권력을 쥐었던 무렵에는 광대들이 왕족이나 고위 관리들의 잔치에 초대받고, 심지어 명인, 명창, 국창 등의 이름으로 궁궐에 들어가 임금 앞에서 기예를 선보이며 많은 돈을 벌고 신분의 상승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조선이 망한 후 광대들은 또 다시 천대받게 된다. 그 상황은 일제시대의 학자인 육당 최남선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조의 재인, 광대들은 적극적으로 특별한 권장을 입지 못하고, '무식무기력한 예인'들이 사회 최하층적 지위에서 구차히 존재하다 보니까 거기 쇠잔이 있을 뿐이지 발달이 없으며 저락이 거듭될 뿐이지 향상을 볼 수 없음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조건 하에 있다 보니까 '수 천 년을 하루같이' '몸을 놀리는 기술'과 '우스개 놀이'쯤에 그치고 드디어 다른 데 만한 순희곡적 생장을 이루지 못하고 만 것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명 풍화에는 조금도 유익한 바가 없으니 이는 연희를 실시하는 자가 학문이 없어 '동양의 부패한 풍습'만 알 뿐이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했던 <서편제>는 이 무렵의 떠돌이 판소리 광대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나는 대학시절에 오페라나 이태리 민요나 가곡이나 뮤지컬이나 비틀즈 등의 서구음악의 열광적 팬이었고, 괴테나 세익스피어나 입센이나 도스토에프스키 등의 서구문학(독문학)에 심취했던 사람이다. 그러다 우연히 판소리를 알게 된 후로 내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고향인 전주를 무지 싫어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의 흔적이 너무나 짙은 그 곳을 어서 떠나 서울로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진학공부를 했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도 한국을 빨리 떠나 독일로 유학 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인간문화재인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면서 전라도 말이 그렇게 다양한 표현과 영롱한 문학적 향기가 있는가를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핏줄에 대한 애정 곧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나의 조상과 조국에 대한 사랑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전통은 박물관에 진열된 골동품이 아니다. 전통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았던 삶의 내용과 형식 곧 그 분들의 삶의 자취이고 향기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세월이 지나면 전통의 계승자가 될 것이며, 언젠가는 전통 그 자체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나에게 전통은 ‘나를 숨쉬게 하고, 나를 활기 있게 만들어 주고, 또 창조의 열정에 불타게 하는 소중한 원천이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무식무기력’한 광대들에게서 내 예술의 많은 부분을 배웠다. 나는 ‘수천 년을 하루같이’ ‘동양의 부패한 풍습'을 몸으로 전해 온 그들의 예술에 매혹 당하고 심취하고 깊이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들의 ‘몸을 놀리는 기술’ 속에서 삶의 깊은 애환과 감동을 보았고, 그들의 ‘우스개 놀이’ 속에서 예술적 창조의 편린을 보았다. 그들은 나의 스승이었고, 나의 애인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 종족의 일원이 되고자 ‘광대’라는 말을 쓴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연기, 연출, 극작, 경영, 행정에다가 연극, 영화, 국악, 방송 등 여러 분야에 간여하는 것을 보고 혼란스럽다고 한다. 

당신의 정체는 뭔가? 아마도 이게 그들의 질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나는 그 모든 것을 추구하는 광대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럼 당신은 어떤 광대가 되고 싶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
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라는 책에 나오는 발렌친 카그다예프라는 브리야트 족의 샤먼과 저자와의 대화로 대신하고자 한다.

질문 : 당신 삶의 목표는 무엇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

답변 : 훌륭한, 혹은 좋은 샤먼이란 자신이 함께 살아가는 민족을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는 좋은 샤먼이 되고 싶고, 따라서 우리 민족이 서로 도와가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본다.-----사랑을 나누고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모든 샤먼이 지녀야 할 미덕이다.

반면 모든 악과 문제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과 자연과 사물을 착취하는 데서 발생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인내하고 이해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남을, 상대방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상대가 원하기 전에 그가 원하는 것을 먼저 베풀어 주는 것이 사랑의 첩경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현자와 성자들이 설파했던 조화와 사랑, 이것의 실천자로서의 샤먼 곧 ‘무당’의 역할에 대한 바이칼 샤먼의 지혜로운 말이 ‘광대정신’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광대란 '넓은 광(廣), 큰 대(大)'라는 말 뜻 그대로 ‘넓고 큰’ 영혼으로 세계의 불화와 고통에 정면으로 마주 서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온 몸으로 감싸 안고 표현하는 예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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