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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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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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01.06
    왜 기업의 CEO들이 노래를 부를까? (22)
  2. 2009.09.15
    이장호감독과의 영화, 그리고「바보선언」 (41)
  3. 2009.06.17
    내 소년 시절을 지배한 만화 <라이파이> (16)
  4. 2009.05.05
    장관 껍데기 훌훌 벗고 광대로 돌아와보니 (24)

요즘 기업이나 공공기관의 CEO들이 음악회에서 노래를 하거나, 사진이나 그림 전시회를 하거나, 독서 모임에서 시낭송을 하거나, 연극에 단역으로 출연했다는 기사가 종종 눈에 띕니다. 

그리고 기업 직원이나 공무원들의 교육이나 연수 프로그램에도 영화보기나 뮤지컬 감상하기나 연극 만들기나 여러가지 예술활동이 포함되는 추세라고 합니다.

출처 : http://anews.kb.icross.co.kr/anews/read.php?idx=279537

창조력과 표현력과 자기 개발 능력을 키우는데 예술활동이 효과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증거일 것입니다. 

예전에는 예술활동이란 특수한 재능을 부여받은 특수한 사람들의 일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예술가들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구름 속의 신선이나 선녀 같은 존재-성공한 예술가인 경우- 이거나, 떠돌이 보헤미안이나 백수건달 같은 존재-실패한 예술가인 경우-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서 예술활동은 더이상 예술가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키워 나가고, 그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가꾸고 있습니다. 

전 세계 블로그스피어에서 활동하는 수천만 명의 블로거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작가가 아니지만 엄청난 양의 글을 쓰고, 미술가가 아니지만 사진이나 그림이나 에니메이션을 만들고, 영화감독이 아니지만 동영상을 제작하고, 평론가가 아니지만 책이나 공연이나 영화나 TV의 리뷰를 올립니다.

블로그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활동들은 예술활동과 참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술의 대중화', '예술의 민주화' 광법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공간인 블로그스피어는 그래서 저에게 많은 자극과 도전과 흥미를 일깨워줍니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예술활동에 목말라할까요?

저는 그 현상을 한마디로 '현실 끌어올리기'라고 이름 짓고 싶습니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꿈과 이상을 지향합니다. 꿈과 이상을 통해 자신의 현실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욕구...이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탈출해서 예술에 몸을 담그는 이유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너무나 커서 두 세계의 조화를 이루기란 너무도 어렵습니다.

엄청난 혼돈 속에서 창작의 실마리를 찾아내어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작품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도 없고, 창작 작업에 관여하는 사람은 그 작품에 깊이 빠져 객관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워지고, 오로지 믿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확신과 열정뿐입니다.

이러한 창작의 꿈꾸기 과정에 현실적인 뒷받침을 하는 것이 경영인데
예술이 경영의 논리에 압도되어 상업적으로 변질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돈이 벌리든 말든 가족이 굶든 말든 오로지 예술에만 빠져 산다는 것도 현대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일입니다.

많은 분들이 예술은 '감성과 직관에 의한 창작의 산물'이며, 경영은 '이론과 논리에 의한 비즈니스의 산물'이라고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말은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며 한편으로는 틀린 말입니다. 창작의 꿈꾸기 속에도 혼돈의 늪을 빠져 나오려는 논리적인 투쟁이 있으며, 경영의 비즈니스 속에도 논리가 따르지 못하는 감성과 직관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술적 감성과 직관이란 창작과 관련된 복잡하고 섬세하고 까다로운 제작 과정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컨트롤 해낼 수 있는 그러한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비즈니스 마인드와 결합이 될 때 커다란 힘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술적 감성과 경영적 논리의 적절한 배합과 조절'......

이것이 수많은 CEO들이 노래를 부르고, 수많은 비즈니스맨들이 뮤지컬을 보고, 수많은 블로거들이 블로깅을 하는 이유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뮤지컬 「캐츠」와 「미스 사이공」을 세계적으로 성공시켜 젊은 나이에 명성을 떨친 트레버 넌이란 연출가가 있습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_blog/hdn/ArticleContentsView.d...

그가 영국 국립극장장으로 선임되어 혁신의 돌풍을 일으키며 성공적인 임기를 마친 뒤, 예술가가 극장장으로서 경영을 해보니 어떻더냐고 물어보는 기자에게 이런 재미있는 대답을 했습니다.

극장을 경영하는 것은
높은 절벽의 양쪽 끝에 놓여진 '외줄'
'외발 자전거'로 타고 가면서
한 손으로는 '접시 세 개' 돌리며 가는 것과 같더군요.

국립극장장이나 장관을 하던 시절, 저 역시 예술가의 입장에서 경영자의 입장으로 바뀌다보니 이 말이 너무도 가슴에 와닿아서 종종 인용하곤 했습니다. 

이 말을 제나름대로 해석해 본다면
양 절벽은 ‘예술’과 ‘경영’, 또는 ‘이상’과 ‘현실’’ 절벽입니다.
외발자전거를 타기 위해서는 엄청난 '훈련' '시련''역경' 극복해야 합니다. 
줄을 타고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균형감각’ 필요합니다.
그리고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접시 세 개를 한 손으로 돌릴 만큼 뛰어난 '엔터테이너의 기량'을 발휘해야 합니다.

예술과 경영, 이상과 현실의 외줄타기.....

출처 : http://: www.swingwalking.com/technote/board.php?board...

오늘날의 수많은 블로거들과 직장인들과 비즈니스맨들과 경영자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숙제 중의 하나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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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하는 동안, 영화를 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을 못했는데, 이장호 감독을 통해서 영화와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김민기 작 이상우, 김석만, 김민기 공동연출의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라는 동학혁명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전봉준 역할로 출연하고 있던 1982년 무렵입니다.


「일송정 푸른 솔」이란 독립군 영화를 준비하고 있던 이장호 감독이 그 당시 기획자로 일을 하던 장선우감독의 소개로 그 연극을 보러 왔다가, 저를 광대 출신 독립군으로 캐스팅했습니다.

이장호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무대에서 봤을 때는 키도 크고 당당해 보였는데, 영화사 사무실에서 처음 만나보니 조그맣고 비리비리해 보여 무척 놀랐다고 합니다.

어쨌든 「별들의 고향」으로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떠오른 뒤, 「바람 불어 좋은날」이나 「낮은데로 임하소서」 같은 작품으로 하길종, 김호선 감독 등과 함께 ‘영상시대’를 이끌고 있던 당대 최고의 감독이자, 늘 새로운 실험으로 영화계를 이끌어가고 있던 이장호 감독과 일을 한다는 것은 제게는 행운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함께 연극을 했던 동료들 사이에서 내가 영화를 한다니까 찬반 토론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영화를 하면 상업적으로 물들어서 예술을 망친다는 의견과, 생활 형편이 어려우니 영화라도 해야 연극을 계속할 수 있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선 끝에 보다 '인간적인' 후자의 의견이 이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생활비보다는 영화에 대해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선뜻 출연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그 무렵에는 연극배우들이 영화를 거의 하지 않았고, 하더라도 예술을 위한 아르바이트 정도로 취급하던 시절이었는데 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영화에 매료되어 있었고, 영화가 가진 예술성과 연극의 예술성이 얼마든지 교류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 연기자로서 각종 연기술을 파고들며 고민하고 있던 터라 마당극의 연기술, 판소리나 전통연희의 연기술, 리얼리즘 무대의 연기술에 이어 영화의 연기술을 체험하고 싶은 욕구가 강렬했습니다.

짐작했던 대로 저는 첫 촬영 때부터 영화 연기의 매운 맛을 호되게 맛 봐야했습니다. 카메라의 프레임에 대한 기초 상식도 없었으니, 얼굴을 찍는지 손을 찍는지 발을 찍는지 알지 못한 채, 오로지 연극적인 온몸 연기를 한 것입니다. 나중에 찍은 필름을 보니 얼굴이 화끈거려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일송정 푸른 솔> 중 한 컷.

지금은 연극배우들이 영화하는 게 일상화되어 있고 당연시되어 있지만, 그때만 해도 영화배우협회의 쟁쟁한 배우들 수십명이 총동원된 주요 배역 중에 연극배우는 저 혼자 뿐이었습니다.

자기들끼리는 형, 동생하며 재미있게 지내는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무명 연극배우인 저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어 독립군 의상 입고 촬영장에서 꾸벅꾸벅 조는 게 일과였습니다.

저와 함께 「일송정 푸른 솔」로 영화에 데뷔한 이보희씨도 저와 비슷한 ‘왕따’ 신세였는데, 그 외로움을 달래줬던 게 이장호 감독의 특별한 ‘은총’이었습니다.

가끔씩 촬영 후의 술자리가 벌어질 때면 꼭 이보희씨와 저를 불러서 친밀함을 과시하니, ‘이장호 감독이 키우는 배우다’ 라는 소문이 나자 그 뒤로는 다른 배우나 스탭들하고도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 뒤 정이 많고 마당극과 판소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이장호 감독과는 형제처럼 친해져서, 다음 작품인 「바보선언」에서 이보희씨와 함께 주인공을 맡게 되었습니다.



「바보선언」은 본래 황석영씨의 「어둠의 자식들」이란 소설을 원작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검열당국에서 허가가 나오지 않아 제작이 중단될 상황이 되자, 대사가 거의 없는 블랙코미디로 방향 전환을 해서 제작이 가능하게 됐던 작품입니다.

「어둠의 자식들」의 원주인공인 이동철씨와 이장호감독과 저, 셋이서 각색을 했지만, 완성된 시나리오 없이 로드무비 형식으로 촬영현장에서 아이디어 회의도 해 가며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장면이 대부분인 작품입니다.



그 영화에서 제 역할은 동칠이라는 절름발이 거지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대학을 나온 멀쩡한 두 다리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대학 시절에 거지처럼 살며 빈민 생활을 지겹도록 체험하기는 했지만, 진짜 거지하고는 사귈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청계천부근이나 청량리나 창녀촌 같은 빈민가를 열심히 돌아다니며 노숙자나 부랑아나 거지들이 어떻게 살고, 말하고, 어떻게 밥 먹고 사는지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길만 가면 절름발이를 따라다녔습니다. 전철 타고 가다가도 절름발이가 있으면 따라다녔습니다. 그때 보니까 서울 거리에 절름발이가 얼마나 많은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더 놀란 것은 영화 촬영이 끝나고 나니, 그 많던 절름발이가 제 눈에 한명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에서 체험하는 많은 것들이 자기가 보려고 하는 것들만 선택되어 보여 진다는 깨달음을 얻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절름발이의 걸음걸이가 다 다르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많은 절름발이의 걸음걸이를 연습해서 그 중 캐릭터에 맞는 절름발이를 골라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이 영화는 이장호 감독이 암울한 시대에 절망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만든 작품으로 영화의 앞부분에 이장호 감독 본인이 연기하는 영화감독의 자살은 바로 감독의 당시 심경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무성영화적 양식, 특히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 같은 슬랩스틱 코미디의 스타일을 취한 이 영화의 양식적 실험은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라는 것을 망쳐놓고 싶었다.”는 감독의 위악적인 태도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섹스, 스포츠, 스크린의 3S라고 불렸던 5공화국 군사정부의 우민화정책을 비판하는 자의식적 스타일을 선보이고 창녀와 절름발이, 뚱보 등 사회 소외계층을 주인공으로 하여 당시 군사정부의 문화예술정책과 그에 편승하는 영화계 풍토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이 영화는 국내 평단의 호평은 물론 해외에서도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한국 영화의 문법에 맞지 않는 파격적 형식으로 일관한 그 영화를 본 제작사 사장은 “영화제작 평생에 이런 괴상한 영화는 처음 본다.”며 창고에 처박아 두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극장에 걸리지도 못하고 있다가 단성사에서 그 회사의 다른 영화가 너무 일찍 막을 내리는 통에 임시로 땜질하기 위해 간판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젊은이들이 열광하고 평론가들이 최고의 화제작이라고 추켜세우는 통에 롱런을 한 결과, 83년 그해 한국영화 흥행 2위를 했습니다. 1위는 「애마부인」이었습니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중

이어서 「과부춤」, 「어우동」,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명자 아끼꼬 쏘냐」, 「천재선언」에 이르기까지 저의 젊은 시절 영화인생은 이장호 감독과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명자, 아끼꼬, 쏘냐> 중에서.

이장호 감독은 지금도 술 한잔하게 되면 “자네가 나하고 처음 영화를 시작했고 나하고 영화를 제일 많이 찍었는데, 그 얘기들은 싹 사라져버리고 오로지 서편제만 사람들한테 알려졌다.”고 푸념을 하십니다.

저도 그게 참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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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초등학교 시절에 만화 보는 것을 ‘무지무지’ 좋아했습니다.

집 근처에 골방 만화방이 있었는데, 그 주인이 창백한 얼굴을 가진 17, 8세쯤 된 소아마비 청년이었습니다. 5원에 13권이나 10원에 25권을 빌려서 옆에 쌓아 놓고,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고 쥐오줌 자국이 누렇게 낀 골방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만화를 보는 순간은 너무도 황홀했습니다.

그때 많은 만화를 봤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열광했던 김산호 작가의 「라이파이」는 어린 시절 저의 우상이었습니다.



검은 테가 있는 안경을 쓰고 머리에 'ㄹ'자가 새겨진 반달 모양의 두건을 쓰고 날씬한 몸에 멋진 의상을 입은 라이파이.


태백산맥의 깊은 산속 동굴에 비밀기지를 두고 윤박사가 설계한 멋진 비행선인 제비기를 타고 다니는 라이파이.



제비기를 운전하는 아름다운 제비양과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악당들과 싸우고, 광선총과  긴 밧줄로 황홀한 모험을 벌이는 라이파이의 이야기는 어린 저를 흠뻑 도취시켰습니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4부작 총 42권으로 발간되었는데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 <피너 3세와 라이파이>, <십자성의 신비와 라이파이> 등 여러 시리즈가 있었지만 저는 그 중에서도 <녹의여왕과 라이파이>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인카의 후예로 지구를 멸망시키려 하는 악녀로서 라이파이와 숙명의 대결을 벌이는 왕녀지만 예쁜 얼굴의 그녀를 도저히 미워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녀에게 사정없이 매혹당한 저는 한 편 한 편을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읽었습니다.



저는 라이파이의 모습을 흉내 내서 머리에 두건을 쓰고, 마분지로 검은 테 안경을 만들어 쓰고, 보자기로 망토를 만들어 쓰고, 아버지가 벽장에 감추어 넣은 일본도를 몰래 꺼내어 들고 외치곤 했습니다.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가 왔다. 칼을 받아라!”

제가 서투른 칼질로 달려들면 누나들은 기겁하며 도망가곤 했습니다. 그래도 착한 저의 누나들은 보자기로 제 머리를 정성스럽게 씌워 주기도 하고, 망토의 매듭을 예쁘게 묶어주곤 했습니다.

저는 또 라이파이처럼 하늘을 날고 싶어서 동네 앞 개울에 있는 다리에서 뛰어 내리기 훈련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날은 오지 않고, 괜한 발목만 삐어 절뚝거리고 다니곤 했습니다.

또 스케치 북에다 온통 라이파이의 모습과, ‘제비기’와, 그의 파트너이자 애인인 ‘제비양’의 모습을 그려서 부모님께 보여드리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신기하게 보시면서 “잘 그린다! 멋있다!”하며 아낌없이 칭찬을 해주시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 라이파이는 저에게 단순한 만화가 아니었습니다. 저의 친구이고, 사랑이고, 희망이고, 미래였습니다. 또한 저 뿐만이 아니라 그 시절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그 이름만으로도 하나의 세대를 아우를 수 있을만큼 끝없는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만화입니다.

 「황금박쥐」나 「배트맨」이나「스파이더 맨」과 같은 만화들은 영화나 에니메이션이나 게임으로 만들어져 전세계 관객들을 도취시키고 있습니다. 



전「라이파이」도 언젠가는 전 세계 어린이와 성인들을 도취시키는 캐릭터로 화려하게 부활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부활의 몸짓에 저도 한몫할 수 있기 위해 열심히 꿈을 꾸는 중입니다.  



 

김산호 선생

본명: 김철수, 호 : 만몽(卍夢)


1939년 만주 출생. 부산과 서울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중학생 시절부터 극장 간판을 그리며 학비를 벌었다. 1957년 서라벌 예대 입학, 같은 해 잡지 만화세계에 독립 투사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황혼에 빛난 별>로 데뷔. 
1959년 본격적으로 김산호라는 필명으로 라이파이 시리즈를 발표하게 된다. 이 만화의 폭팔적인 인기로 산호는 당시 최고의 인기만화작가 중 한사람이 된다.
 20대 초반 정상의 자리에 올라선 그는  성공된 미래와 부를 버리고 미국으로 새로운 도전을 떠나게 된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한국의 전설을 소개한 동양적인 만화로 한국적 독창성과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현재 한국에 돌아온 그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한 연구, 후진양성,작품활동 등으로 열정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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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부 장관 직을 그만 둔지도 어느 덧 2년이 되어 간다.
그동안 TV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연기자로, 연극 <밀키웨이>에서는 극작과 연출가로, 최근에는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위원장으로서 즐겁고 바쁘게 살고 있다.
 

내가「대왕 세종」에 출연하고 있을 때, 모 일간지에 동정 기사가 실렸는데 그 기사의 제목이 한동안 여기저기서 화제가 됐다.


김명곤 씨 “장관 껍데기 훌훌~ 다시 광대로”

“장관이라는 껍데기를 훌훌 벗어 버리고 이제 천직인 광대로 탈바꿈해야죠. 걱정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허허.”

김명곤(55·사진)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내년 1월 방송 예정인 KBS 1TV 사극 ‘대왕 세종’(극본 윤선주·연출 김성근)에서 배우로 복귀한다. 1999년 자신이 연출한 연극 ‘유랑의 노래’에 출연한 지 8년 만이다.

그는 그동안 국립극장장과 문화부 장관을 지내면서 연기와 멀어졌다.김 전 장관은 ‘대왕 세종’에서 고려 황실의 후예로 조선 왕조의 전복을 꿈꾸는 옥환 역을 맡았다. 옥환은 어린 세종을 긴장하게 만드는 인물로 초반 30회까지 비중이 큰 역할이다. 그가 대하 사극에 출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D일보 2007년 10월 6일자 기사 중 일부)

나는 대학교 다닐 때만해도 광대라고 하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코에 빨간 공을 붙인 서양의 삐에로를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줄타기하는 광대를 처음 보았는데 그 광대가 줄에 올라서서 “이 줄타기가 옛날에는 화랑의 기예였소!.” 하길래 깜짝 놀랐다. "화랑이라면 신라 시대의 무사 집단인데 줄타기를 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며 광대에 관한 기록을 찾아봤다.

우리나라에 그윽하고 오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며 유교, 불교, 도교의 3교를 포함한 것으로 민중을 교화하는 것이다.

신라 시대의 학자인 고운 최치원이 쓴 글이다. 이 글을 바탕으로 역사가인 단재 신채호는 이렇게 썼다.
 

선가(仙家)는 신라의 국선 곧 '화랑'으로 보며, 그 시원은 삼한의 소도(蘇塗)의 제관으로 고구려의 '조의선인(鳥衣仙人)'이다.

이런 글들을 보니 고대사회에서 예술가들은 하늘에 국가적 제사를 지낼 때는 제관으로서 활동했고, 그들의 신분은 왕족이나 귀족에 속하는 상류계급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통일신라가 무너지고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화랑들과 함께 예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천민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광대”라는 말은 고려시대에 서역에서 들어 와 우리말로 정착된 외래어인데, 예술가를 지칭하는 단어인 광대가 화랭이, 재인 등의 용어와 뒤섞이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광대들은 기생, 무당, 중, 백정 등과 함께 천민계급으로 살아야 했다. 이들은 사대부나 평민들과 한 동네에서 살지도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하고,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자기들끼리 기예를 전수하면서,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고, 그들만의 독특한 사회를 꾸려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광대들에 대해 다산 정약용은 이런 상소문을 썼다.

광대가 봄·여름이면 고기잡이를 좇아 어촌으로 모여들고 가을과 겨울이면 추수를 바라고 농촌으로 쏠리는데, 특히 창촌에서는 사당, 창기, 주파, 화랑, 악공들의 잡류들을 엄금해야 합니다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본 <왕의 남자>는 이 무렵의 떠돌이 남사당 광대패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실학사상이 일어나고 평민 가사, 탈춤, 판소리 등의 가치를 양반들 중의 몇몇이 언급하게 되면서 광대들의 가치가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고종과 대원군이 권력을 쥐었던 무렵에는 광대들이 왕족이나 고위 관리들의 잔치에 초대받고, 심지어 명인, 명창, 국창 등의 이름으로 궁궐에 들어가 임금 앞에서 기예를 선보이며 많은 돈을 벌고 신분의 상승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조선이 망한 후 광대들은 또 다시 천대받게 된다. 그 상황은 일제시대의 학자인 육당 최남선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조의 재인, 광대들은 적극적으로 특별한 권장을 입지 못하고, '무식무기력한 예인'들이 사회 최하층적 지위에서 구차히 존재하다 보니까 거기 쇠잔이 있을 뿐이지 발달이 없으며 저락이 거듭될 뿐이지 향상을 볼 수 없음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조건 하에 있다 보니까 '수 천 년을 하루같이' '몸을 놀리는 기술'과 '우스개 놀이'쯤에 그치고 드디어 다른 데 만한 순희곡적 생장을 이루지 못하고 만 것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명 풍화에는 조금도 유익한 바가 없으니 이는 연희를 실시하는 자가 학문이 없어 '동양의 부패한 풍습'만 알 뿐이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했던 <서편제>는 이 무렵의 떠돌이 판소리 광대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나는 대학시절에 오페라나 이태리 민요나 가곡이나 뮤지컬이나 비틀즈 등의 서구음악의 열광적 팬이었고, 괴테나 세익스피어나 입센이나 도스토에프스키 등의 서구문학(독문학)에 심취했던 사람이다. 그러다 우연히 판소리를 알게 된 후로 내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고향인 전주를 무지 싫어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의 흔적이 너무나 짙은 그 곳을 어서 떠나 서울로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진학공부를 했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도 한국을 빨리 떠나 독일로 유학 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인간문화재인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면서 전라도 말이 그렇게 다양한 표현과 영롱한 문학적 향기가 있는가를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핏줄에 대한 애정 곧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나의 조상과 조국에 대한 사랑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전통은 박물관에 진열된 골동품이 아니다. 전통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았던 삶의 내용과 형식 곧 그 분들의 삶의 자취이고 향기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세월이 지나면 전통의 계승자가 될 것이며, 언젠가는 전통 그 자체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나에게 전통은 ‘나를 숨쉬게 하고, 나를 활기 있게 만들어 주고, 또 창조의 열정에 불타게 하는 소중한 원천이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무식무기력’한 광대들에게서 내 예술의 많은 부분을 배웠다. 나는 ‘수천 년을 하루같이’ ‘동양의 부패한 풍습'을 몸으로 전해 온 그들의 예술에 매혹 당하고 심취하고 깊이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들의 ‘몸을 놀리는 기술’ 속에서 삶의 깊은 애환과 감동을 보았고, 그들의 ‘우스개 놀이’ 속에서 예술적 창조의 편린을 보았다. 그들은 나의 스승이었고, 나의 애인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 종족의 일원이 되고자 ‘광대’라는 말을 쓴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연기, 연출, 극작, 경영, 행정에다가 연극, 영화, 국악, 방송 등 여러 분야에 간여하는 것을 보고 혼란스럽다고 한다. 

당신의 정체는 뭔가? 아마도 이게 그들의 질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나는 그 모든 것을 추구하는 광대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럼 당신은 어떤 광대가 되고 싶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
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라는 책에 나오는 발렌친 카그다예프라는 브리야트 족의 샤먼과 저자와의 대화로 대신하고자 한다.

질문 : 당신 삶의 목표는 무엇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

답변 : 훌륭한, 혹은 좋은 샤먼이란 자신이 함께 살아가는 민족을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는 좋은 샤먼이 되고 싶고, 따라서 우리 민족이 서로 도와가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본다.-----사랑을 나누고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모든 샤먼이 지녀야 할 미덕이다.

반면 모든 악과 문제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과 자연과 사물을 착취하는 데서 발생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인내하고 이해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남을, 상대방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상대가 원하기 전에 그가 원하는 것을 먼저 베풀어 주는 것이 사랑의 첩경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현자와 성자들이 설파했던 조화와 사랑, 이것의 실천자로서의 샤먼 곧 ‘무당’의 역할에 대한 바이칼 샤먼의 지혜로운 말이 ‘광대정신’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광대란 '넓은 광(廣), 큰 대(大)'라는 말 뜻 그대로 ‘넓고 큰’ 영혼으로 세계의 불화와 고통에 정면으로 마주 서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온 몸으로 감싸 안고 표현하는 예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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