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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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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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0.01.06
    왜 기업의 CEO들이 노래를 부를까? (22)
  2. 2009.11.12
    온 세상은 무대, 모든 여자와 남자는 배우? (29)
  3. 2009.10.26
    결혼기념일, 아내에게 시 한 편 바치며... (32)
  4. 2009.10.13
    '격정만리' 사건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28)
  5. 2009.06.09
    자장면과 화교의 슬픈 눈망울 (25)
  6. 2009.05.15
    나의 스승 박초월 명창 생각하니 눈물난다 (16)

요즘 기업이나 공공기관의 CEO들이 음악회에서 노래를 하거나, 사진이나 그림 전시회를 하거나, 독서 모임에서 시낭송을 하거나, 연극에 단역으로 출연했다는 기사가 종종 눈에 띕니다. 

그리고 기업 직원이나 공무원들의 교육이나 연수 프로그램에도 영화보기나 뮤지컬 감상하기나 연극 만들기나 여러가지 예술활동이 포함되는 추세라고 합니다.

출처 : http://anews.kb.icross.co.kr/anews/read.php?idx=279537

창조력과 표현력과 자기 개발 능력을 키우는데 예술활동이 효과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증거일 것입니다. 

예전에는 예술활동이란 특수한 재능을 부여받은 특수한 사람들의 일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예술가들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구름 속의 신선이나 선녀 같은 존재-성공한 예술가인 경우- 이거나, 떠돌이 보헤미안이나 백수건달 같은 존재-실패한 예술가인 경우-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서 예술활동은 더이상 예술가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키워 나가고, 그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가꾸고 있습니다. 

전 세계 블로그스피어에서 활동하는 수천만 명의 블로거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작가가 아니지만 엄청난 양의 글을 쓰고, 미술가가 아니지만 사진이나 그림이나 에니메이션을 만들고, 영화감독이 아니지만 동영상을 제작하고, 평론가가 아니지만 책이나 공연이나 영화나 TV의 리뷰를 올립니다.

블로그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활동들은 예술활동과 참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술의 대중화', '예술의 민주화' 광법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공간인 블로그스피어는 그래서 저에게 많은 자극과 도전과 흥미를 일깨워줍니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예술활동에 목말라할까요?

저는 그 현상을 한마디로 '현실 끌어올리기'라고 이름 짓고 싶습니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꿈과 이상을 지향합니다. 꿈과 이상을 통해 자신의 현실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욕구...이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탈출해서 예술에 몸을 담그는 이유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너무나 커서 두 세계의 조화를 이루기란 너무도 어렵습니다.

엄청난 혼돈 속에서 창작의 실마리를 찾아내어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작품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도 없고, 창작 작업에 관여하는 사람은 그 작품에 깊이 빠져 객관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워지고, 오로지 믿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확신과 열정뿐입니다.

이러한 창작의 꿈꾸기 과정에 현실적인 뒷받침을 하는 것이 경영인데
예술이 경영의 논리에 압도되어 상업적으로 변질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돈이 벌리든 말든 가족이 굶든 말든 오로지 예술에만 빠져 산다는 것도 현대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일입니다.

많은 분들이 예술은 '감성과 직관에 의한 창작의 산물'이며, 경영은 '이론과 논리에 의한 비즈니스의 산물'이라고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말은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며 한편으로는 틀린 말입니다. 창작의 꿈꾸기 속에도 혼돈의 늪을 빠져 나오려는 논리적인 투쟁이 있으며, 경영의 비즈니스 속에도 논리가 따르지 못하는 감성과 직관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술적 감성과 직관이란 창작과 관련된 복잡하고 섬세하고 까다로운 제작 과정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컨트롤 해낼 수 있는 그러한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비즈니스 마인드와 결합이 될 때 커다란 힘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술적 감성과 경영적 논리의 적절한 배합과 조절'......

이것이 수많은 CEO들이 노래를 부르고, 수많은 비즈니스맨들이 뮤지컬을 보고, 수많은 블로거들이 블로깅을 하는 이유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뮤지컬 「캐츠」와 「미스 사이공」을 세계적으로 성공시켜 젊은 나이에 명성을 떨친 트레버 넌이란 연출가가 있습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_blog/hdn/ArticleContentsView.d...

그가 영국 국립극장장으로 선임되어 혁신의 돌풍을 일으키며 성공적인 임기를 마친 뒤, 예술가가 극장장으로서 경영을 해보니 어떻더냐고 물어보는 기자에게 이런 재미있는 대답을 했습니다.

극장을 경영하는 것은
높은 절벽의 양쪽 끝에 놓여진 '외줄'
'외발 자전거'로 타고 가면서
한 손으로는 '접시 세 개' 돌리며 가는 것과 같더군요.

국립극장장이나 장관을 하던 시절, 저 역시 예술가의 입장에서 경영자의 입장으로 바뀌다보니 이 말이 너무도 가슴에 와닿아서 종종 인용하곤 했습니다. 

이 말을 제나름대로 해석해 본다면
양 절벽은 ‘예술’과 ‘경영’, 또는 ‘이상’과 ‘현실’’ 절벽입니다.
외발자전거를 타기 위해서는 엄청난 '훈련' '시련''역경' 극복해야 합니다. 
줄을 타고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균형감각’ 필요합니다.
그리고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접시 세 개를 한 손으로 돌릴 만큼 뛰어난 '엔터테이너의 기량'을 발휘해야 합니다.

예술과 경영, 이상과 현실의 외줄타기.....

출처 : http://: www.swingwalking.com/technote/board.php?board...

오늘날의 수많은 블로거들과 직장인들과 비즈니스맨들과 경영자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숙제 중의 하나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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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그의 작품에서 인생을 연극에다 자주 비유했습니다. 


「뜻대로 하세요」라는 희극의 2막 7장에 나오는 대사 중 일부입니다.


제이퀴스 :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여자와 남자는 배우라네.
그들은 등장했다가 퇴장하지요.
어떤 사람은 일생 동안 7막에 걸쳐
여러 역을 연기한답니다.


'모든 여자와 남자는 배우'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따져 볼까요?

배우들은 자기가 맡은 역할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훈련을 합니다. 그 훈련의 기초는 내 감정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감정이입’입니다.

그런데 배우처럼 모든 남자와 여자도 살아가면서 감정이입을 필요로 합니다. 예를 들어 친한 친구가 여자 친구와 헤어졌을 때 상대방이 느끼는 고통을 함께 느끼면서 아파해 주면 그 고마움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면접을 볼 때, 교수님을 만날 때, 선보러 갈 때, 또는 친구들하고 놀러 갈 때 등의 다양한 경우에서 그 상황에 맞는 감정과 태도를 잘 발휘할 때 많은 사람들이 호감을 느끼게 되고, 또 상대방을 내가 원하는 감정에 동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이입이나 감정동화는 아무때나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나 이것을 능숙하게 잘 할 수도 없습니다. 배우가 아무리 소리를 치고, 눈물을 흘리며 연기를 해도 객석에 앉은 관객들을 지루하게 하고 짜증나게 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에는 '감정이입'과 ‘감정동화’를 위한 수많은 갈등이 상존합니다. 

언젠가 보험계에서 성공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다른 데서 강연할 때와 굉장히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강연에서는 저를 바라보는 눈초리에서 ‘너 어디 잘하나 한 번 보자!’ 하는 느낌을 받는데, 그들에게서는 ‘나를 한번 좀 봐 주세요!’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모두들 옷차림이라든가 머리 매무새나 눈빛을 통해 강사가 자기를 바라보도록 신호를 보내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들은 상대에게 호감을 보이고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감정이입이나 감정동화에 대해 고도의 훈련을 받았고, 그 태도가 몸에 배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마 그런 방법에 대해 훈련을 받지 않거나 성격이 비사교적이거나 내성적인 사람들은 대인관계의 감정이입이나 감정동화 단계에서 상처 받고 어려움에 빠지는 경우가 너무도 많을 겁니다.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덕목은 '진실'입니다. 

연기의 최고 경지는 바로 인물의 진실을 몸과 마음으로 표현할 때 발휘되는 것입니다. 흔히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태도를 보일 때 '연기하지 마라'라는 말을 하는데, 그건 연기가 무엇인지 모르고 쓰는 말입니다.

연기의 핵심은 진실입니다. 배우가 배역의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 혼신의 연기를 펼치듯,  진심을 담아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전하는 능력이야말로 사회생활이나 대인관계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배우는 ‘제1의 자아’와 ‘제2의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존재입니다.

'나'라는 제1의 자아가 있고, 내가 홍길동이라는 역할을 맡고 있다면 홍길동이 제2의 자아입니다. 내가 홍길동으로 어떻게 진실하게 변신해야 하는가? 이것이 배우의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숙제입니다.

마찬가지로 본질적 '나'인 제1의 자아와 아들, 딸, 언니, 동생, 연인, 아내, 남편, 선배, 후배, 며느리, 사위, 엄마, 아빠, 직장의 후배, 상사 등 제2의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은 모든 여자와 남자에게 주어진 어렵고도 중요한 숙제일 것입니다.

또한 배우는 무대 위에 있는 동안에만 조명을 받으며 환상적인 시간을 보내는 존재입니다. 

무대 위의 불이 꺼지면 차가운 현실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현실은
고통의 시간, 어둠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멕베드」란 비극의 5막 5장에 나오는 대사를 들어보세요. 

맥베스 : 인생이란 한낱 걸어다니는 그림자,
가련한 배우,

무대 위에 서 있을 때는 활개치고 떠들어대지만
얼마 안 가서 영영 잊혀버리지 않는가.
바보들의 이야기.
광포와 소란으로 가득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중 한 장면.
출처 :http://www.madmad.co.kr/community/content.html?recom...

배우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잠시 빛을 받으며 환상적인 행복을 맛보는 순간도 있지만, 차가운 현실의 벽에 부딪쳐 수없이 좌절하고 절망하고 고통에 빠집니다. 때로는 환멸을 느끼는 순간도 있을 겁니다.

정말 인생은 바보들의 이야기일까요?
광포와 소란으로 가득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일까요?

전 이 질문에 대해서는 맥베스의 말에 동의를 하지 않겠습니다.

제 인생도 다른 사람들처럼 바보스럽고 광포와 소란으로 가득하지만,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제게 인생은 '의미가 가득 찬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제게 인생은 '바보스러우면서도 신기한' 이야기입니다.

현실은 저를 좌절시키고 절망에 빠지게 하고 고통을 주고 환멸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저에게 인생은 신비한 이야기로 가득찬 마술상자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도 꿈을 꾸는 소년처럼 마술상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답니다.

하지만 저와 다른 이야기로 꾸며진 인생도 수없이 많을 겁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어떤 이야기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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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내와의 결혼 23주년 기념일입니다.

얼마 전, 어느 선배가 부부관계에 대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부부 사이는
20대는 열정으로 대하고,

30대는 애정으로 대하고,
40대는 믿음으로 대하고,
50대는 동반자로 대하고,
60대는 간호하는 마음으로 대하라.

이 단계를 다 거치며 살기까지 부부 사이는 왜 그리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는지요? 열정이 애정으로 자리잡기까지 겪는 수많은 갈등과 싸움에 얽힌 사연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또 애정이 믿음으로 이어지지 못하여 믿음의 관계, 동반자의 관계, 간호하는 관계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헤어지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도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습니다. 
 
저 역시 서로의 장점만을 사랑하던 열정의 시기에서, 단점까지도 껴안아야 되는 애정의 시기, 믿음과 동반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아내의 가슴을 수없이 아프게 했습니다. 

우리가 동반자의 관계에서 간호하는 단계에 가기까지 또 어떤 험난한 역정이 가로 놓여 있을까요? 
그러나 한 사람 곁에 또 한 사람이 오랜 인생의 길동무로서, 그리고 늙고 쇠약해졌을 때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사람으로서 오랫동안 있어 준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축복 아닐까요?  

칼릴 지브란의 시 한 편을 결혼기념 선물로 아내에게 바칩니다.



나 그대에게


나 그대에게
아름다운 이름이고 싶네

차가운 바람 속에 그대 서 있을 때라도
그대 마음 따뜻하게 채워드릴 수 있는
그대의 사람이 되고 싶네

우리 서로에게 어려운 사람이길
바라지 않는 까닭에

그대 말하지 않는 부분의 아픔까지도
따뜻이 안아 드릴 수 있으면 좋겠네.

그대 잠드는 마지막 순간이나
그대 눈을 뜨는 시간 맨 처음에
문득 그대가 부르는 이름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우리 서로의 가슴 안에
가장 편안하고 진실한 이름이 되어

변하지 않는 진실로
그대 곁에 머물고 싶네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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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에는 제 삶의 한 토막 이야기들이 실리게 됩니다. 시간의 순서를 충실히 따르지 않고 그때 그때 기억나는 이야기들을 쓰기 때문에, 혹 혼란이 오시는 분들은 앞의 글들을 읽어보시면 참고가 되겠습니다. 오늘은 저의 연극 활동 중 「격정만리」 공연과 관련됐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1991년 9월 무렵, 극단아리랑에서는 김명곤 작, 조항용 연출의 「격정만리(激情萬里)」를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격정만리」는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 때까지의 격동하는 시대 속에서 살다가 간 연극배우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1920년대의 '왜색 신파'로부터 '한국적 신파극'을 모색하는 시기의 이야기, 1930년대의 '신극' 운동과 '카프' 연극운동, 그들과 신파극과의 갈등, 1940년대 '친일연극'의 실상과 만주에서 활약하던 조선의용군의 '항일연극', 해방 이후 좌·우익 연극의 대립, 1950년의 전쟁과 극좌·극우 '선전극'의 대립 등 식민 지배와 분단으로 인한 역사의 비극이 주인공 연극배우의 삶을 중심으로 그려집니다.

또 한국연극사의 중요한 작품들이 극중극으로 보여져서 연극사의 흐름과 변천을 한눈에 살펴볼 수가 있게 짜여져 있습니다. 

일본 대중소설인 「곤지끼야사(金色夜叉)」를 번안한 신파극 「장한몽(長恨夢)」, 땅을 잃고 고국을 떠나는 농민들의 수난을 그린 박승희의 「아리랑 고개」, 송영의 카프 연극 「호신술」,「홍도야 우지마라」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도 되고 악극화도 된 임선규의「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북한의 혁명가극「피바다」의 원전으로 알려진 「혈해지창(血海之唱)」, 좌익 선동극인 신고송의 「서울 갔던 아버지」, 그 외에 고골리의 「검찰관」, 유치진의 친일연극「대추나무」 등이 주인공들의 연습 장면이나 공연 장면으로 잠깐씩 소개됩니다.  




이 작품은 한국연극협회가 주최하는 <서울연극제>의 자유참가작으로 선정되어 모든 홍보와 공연 계획도 거기에 맞춰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고동업, 권태원 등 극단아리랑의 배우들과 함께, 기성 연극배우들도 여럿 참여한 야심적인 기획이었습니다. 지금은 텔런트로 방송에서 맹활약하는 중견의 연극배우 최종원과, 지금은 여성 영화감독으로 활약하는 미모의 신인여배우 방은진 등이 흔쾌하게 작품에 참가하여 열심히 연습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내용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가진 <서울연극제> 집행위원들이 극단아리랑의 연습장에 와서 연습을 참관한 후, 우리하고는 상의 한마디 없이 전격적으로 '서울연극제 참가 취소' 결정을 내렸습니다.

극단아리랑 앞으로 보낸 취소 공문에 따르면 이 작품이 “우리 신극사의 원류를 신파극으로부터 시작하여 1930년대의 좌익 연극운동인 카프로 이어져서 북한 김일성 체제하의 사회주의 연극을 거쳐, 오늘날 남한의 민중극 또는 민족극으로 계승되는 것으로 해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연극사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신파극, 신극, 좌익연극 어느 쪽에 어느 만큼의 비중을 두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예술관과 연극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제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그 동안 남한의 연극계는 <토월회>를 기점으로 한 신극운동의 흐름에 정통성을 부여해 왔고, 북한의 연극계는 김일성이 주도한 <항일혁명연극>에 그 정통성을 부여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양쪽 모두 분단적 역사관의 틀 속에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연극 행위는 지나치게 확대하거나 미화하고, 상대의 연극 행위는 지나치게 축소하거나 매도하는 잘못을 저질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연극사의 여러 자료들을 섭렵해 보니 신파극이나 좌익연극이나 신극 모두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작품을 썼기 때문에, 제가 한국연극의 흐름을 신파극에서 카프로, 그리고 김일성의 사회주의 연극으로 파악했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극중 인물 중 몇 사람이 친일적이고 친미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는 데 대해, “한국연극협회에 소속된 연극인들을 친일·친미의 반동적 연극 세력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한 취소 공문의 글은 지나친 자격지심의 발로라고 반박했습니다.

저는 극 중에 등장한 여러 인물들을 통해 굴절과 타협, 그리고 오욕의 역사 속에서 예술가들이 어떻게 대처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려고 했을 뿐, 그들을 통해 오늘날의 남한 연극인들을 매도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저는 한국연극협회에 공개 토론회를 제안했습니다. 공연을 직접 본 뒤, 저와 연극제 관계자들과 평론가들이 관객들 앞에서 토론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와, 집행위원회의 권리 남용에 대한 우려를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제기했습니다. 

몇몇 집행위원과 심사위원, 그리고 연습에 참관했던 위원 몇몇 분은 솔직하고도 양심적인 발언으로 집행부의 처사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또한 주변의 예술가나 예술단체들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집행부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참가취소 요구 서명 운동에 3백 명에 가까운 연극계 선후배들이 서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1차 공연과 2차 공연 내내 극장 안을 뜨겁게 달구었던 관객들의 유례없는 성원 등으로 많은 격려와 성원이 있었습니다. 그 해의 연극계를 뒤흔들었던 '격정만리 사건'은 연말이 되면서 잠잠해졌습니다. 

"연극하는 사람이 연극배우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면 무척 재미있을 것이다."

처음 이 작품의 구상을 시작했을 때, 저는 그렇게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소재를 깊이 파들어 가면 갈수록 재미있을 수 만은 없는 여러 문제들이 저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의 분단 시대는 예술가들에게 괴로운 선택을 강요한 시기였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쓰면서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보다, 그러한 선택이 몰고 온 비극에 촛점을 맞췄습니다. 제가 연극을 하면서 괴로워했던 문제들의 근원이 거기에 있었고, 그 문제들을 붙들어 안고 고민했던 동료, 선배, 후배들의 비극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비극은 21세기를 훌쩍 넘기고 있는 지금까지 끝나지 않고 있군요.

김윤수(전 국립현대미술관장), 김정헌(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황지우(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진중권(문화비평가), 신해철(가수), 윤도현(가수), 정관용(시사평론가), 신경민(방송인), 김제동(방송인), 손석희(방송인).....

요즘의 문화예술계에 불어닥치고 있는 '진보적 문화예술인 축출'의 회오리바람을 보면, 해방 후의 좌·우익 예술가 사이에 벌어졌던 갈등과 별로 다르지 않음을 느낍니다. 비록 그 표현 방식은 합법성과 합리성을 표방하고 있지만, 내면의 대립과 증오심은 더욱 은밀해지고 깊어진 듯 합니다.   


격정만리사건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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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자장면을 무척 좋아합니다.
아마 저희 세대 사람들은 대부분 자장면을 좋아하고, 그에 얽힌 추억이 많을 겁니다.

70년대 초반의 대학 초년생 시절, 저는 자취방에「정협지」,「초류향」,「군협지」와 같은 무협소설을 쌓아 놓고 읽다가 돈이 좀 생기면 중국 무협 영화를 보러 다녔습니다. 지금도 멋있는 장면들이 눈에 삼삼 어리는「유성호접검」이란 영화를 친구와 함께 보고 나오면서 이렇게 소리쳤던 기억이 납니다.

“왕우가 나오는「돌아온 외팔이」가 자장면이라면, 이 영화는 탕수육이다!” 


하지만 탕수육 사먹을 돈이 없던 우리는 자장면 한그릇에 소주를 취하도록 마시며,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강호에서 한 자루 검에 의지해 살아가는 자객의 삶을 한없이 그리워했습니다.

저에게 자장면을 사 주던 그 친구는 고향으로 내려가고, 저는 우연히 그러나 운명처럼 연극반에 들어갔습니다.

연극 연습할 때의 주식은 라면이요, 부식은 구내식당의 김치와 단무지였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고학생인 저는 하루 한 끼를 걱정 없이 때울 수 있는 게 고마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습에 참가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따금씩 제공되는 자장면은 시골 촌놈에게는 황홀한 특식이었습니다.


한번은 학교 근처의 중국집에서 열 명쯤 되는 연극반 친구들이 자장면에 소주를 시켜 놓고 밤늦게까지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자장면은 진작 먹어 치운 뒤, 안주 하나 안 시키고 계속 단무지만 축내며 소주를 마셔대는 우리 일행을 보다 못한 주인이 영업이 끝났으니 그만 나가달라고 했습니다.

금방 가겠다고 해놓고는 또 자정이 가깝도록 열띤 토론을 하며 앉아 있으니 주인이 다시 올라와서 그릇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술에 취한 후배가 주인과 언성을 높이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서로 삿대질을 하며 멱살잡기 일보 직전까지 발전했습니다. 그러다가 후배가 이상한 말을 내뱉고 말았습니다.

“야, 이 지독한 노랭이 짱쾌 놈아, 니네 나라로 가!”

그 무렵의 젊은이들을 짓누르고 있던 민족주의가 배타적 국수주의로 변해 한국으로 이민 와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외로운 화교의 가슴에 화살처럼 날아드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우리 모두는 당황했고, 그 말을 내뱉은 친구도 잠시 주인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습니다. 주인 역시 그 말을 한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무어라 중국말로 중얼거리며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모두들 울적한 마음으로 중국집을 나왔지만, 주인의 슬프면서도 분노에 찬 눈은 오랫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제가 그 일을 겪었던 '70년대의 화교는 우리 사회에서 너무도 외로운 이방인이었지요.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우리의 주위에 살고 있습니다.

태국, 필리핀, 베트남, 중국, 방글라데시, 인도....수많은 나라에서 들어 온 남성들과 여성들이 우리 아이들의 아빠 엄마가 되어 가고 있고, 회사와 주거지에서 우리의 이웃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외국인들에게 슬픔과 분노보다 기쁨과 희망을 선사하며 함께 살아 갈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나라 서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결과 지금은 거의 한국 음식이 되어버린 자장면. 저는 자장면을 먹을 때마다 그 '슬픈 화교의 눈망울'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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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스승의 날만 되면 특별히 떠오르는 스승이 계십니다. 바로 저의 판소리 스승인 박초월 명창이십니다.                       .

박초월 스승과의 만남은 제가 대학교 3학년 학생이던 때였습니다.

눈이 펑펑 내리던 초겨울 어느 날, 군대 갔다가 휴가 나온 친구와 함께 비원 쪽으로 터덜터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다가 친구가 길가에 멈춰 서더니 간판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박초월 국악 전습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건물 4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친구는 김제에 있는 국악원에서 판소리를 조금 배웠고, 저는 그 친구 덕에 난생 처음 판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어 판소리에 심취해 있었기에 무조건 올라간 겁니다. 

북소리와 소녀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학원의 현관문을 기세 좋게 열고 들어간 친구가 
판소리를 몇 달 배웠다는 둥 너스레를 떨자 중년 남자 한 분이 북을 차고앉으면서 “소리를 배웠다니 한번 들어 보자”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당대 최고의 남자 명창이던 조상현씨였습니다.

친구는 김제에서 배웠던 '단가' 한 대목을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나니 소파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쉰 목소리로 하하거리고 웃었고, 소녀들도 킥킥거리고 웃었습니다. 친구는 본래 음치인데다가 박치까지 겸했으니 그럴 만도 했지요.

소파에 앉아서 웃던 할머니가 저를 가리키며 “저 사람도 소리 한번 들어 보자.”고 했습니다. 저는 얼굴을 붉히며 “저는 저 친구가 배우는 걸 구경만 해서 한 마디도 부를 줄 모릅니다.” 했습니다. 그러자 “소리를 배우러 왔다니 오늘부터 배워 보시게.”하면서 직접 북 앞에 앉으시는 거였습니다.

박초월 스승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박초월 명창(1917~1983). 호 미산. 본명 박삼순. <수궁가> 인간문화재.
김소희, 박녹주 명창과 함께 1930~1970년대 한국 여성 판소리계를 대표한 3대 여류명창 중 한 명이다. 
현재의 대표적인 남성 명창인 조통달은 박초월 명창의 조카이고, 가수 조관우는 조통달 명창의 아들이니 명창의 피가 손자인 조관우에게 이어졌다.

                   박초월 명창의 외손자인  가수 조관우.


저는 그날부터 열심히 학원에 다녔고, 친구는 저의 한 달분 수업료 6천원을 대신 내주고는 군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지 한 달 뒤에 수업료 낼 돈이 없어서 학원을 다니지 못하겠다고 하자, 선생님이 웃으며 그냥 다니라고 하셨습니다.

“자네는 서울대학교 학생이잖여...”

선생님이 말씀하신 학원비 면제 이유였습니다. 게다가 자취방도 없이 여기저기 기숙을 하며 보내던 제 딱한 사정을 아신 선생님은 크리스마스가 되자 목도리와 장갑을 선물로 주시며, 잠자리가 마땅찮으면 학원에서 자라고 하셨습니다. 오갈 데 없던 처지였던 저는 며칠 뒤부터 학원에서 잠을 잤습니다.

70년대의 대학가는 서구의 히피 문화가 휩쓸었던 때입니다. 장발에 청바지와 통기타와 미니스커트가 유행했습니다. 그런 문화적 분위기에서 살았던 제가 미쳐도 한참 미치고,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습니다.

대학교 졸업생이 학교는 안 가고 판소리 학원에서 먹고 자고, 선생님이 아침 일찍 싸들고 오시는 아침밥을 얻어 먹고, 하루 종일 전화 받고, 노래 가사도 써 주고, 학원생들 판소리 배울 때 같이 배우고, 학원생들 다 가고 나면 걸레질하고 소파에서 잠을 잤습니다. 참으로 괴상한, 그러나 너무도 행복한 나날들이었습니다.

밤에 잠이 안 오면 학원 창문 밖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단성사> 영화관의 화려한 영화 간판과 네온사인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는데, 십오 년쯤 뒤에 제가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한 「서편제」의 간판이 그 곳에 걸릴 줄 어찌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러다가 선생님의 외아들이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지자, 아예 서대문구 불광동에 있는 선생님 댁에 가정교사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아들의 공부를 가르쳐 주고, 선생님은 제게 노래를 가르쳐 주는 교환(?)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북도 칠 줄 모르는 초보 제자에게 한복을 입히고 집 마당에 병풍 치고 찍은 기념 사진.


선생님은 새벽 다섯 시면 불광산으로 아침 등산을 가는 게 첫 일과였습니다. 그때 집에는 전남 순천에서 소리를 배우러 올라온 예쁜 꼬마 국민학교 소녀가 있어서 함께 가곤 했지요.

우리는 산에 올라가 선생님을 따라서 발성 연습을 하고, 시조로 목을 풀기도 하고, 낮에 배웠던 대목 중에서 잘 안 되는 부분을 반복해서 연습하고 교정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참 하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몸도 가벼워져서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정이 많은 성격이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무한정으로 정을 쏟는 성격이었지요. 그중에서도 제게 쏟는 정은 무척 각별했어요. 마치 아들에게 하듯이 먹는 것 입는 것 모두를 챙겨 주고, 제가 외출을 할 때면 용돈까지 주시곤 했습니다.

게다가 소리 공부도 어찌나 극성스럽게 시키는지 다른 제자들이 질투할 정도였습니다. 또 제자 중에 대학을 나온 ‘선비’가 있다는 게 그렇게도 자랑스러운지 공연을 하러 가시거나, 방송국에 가시거나, 국악인들의 모임이 있을 때면 꼭 저를 데리고 가서 인사를 시키곤 하셨습니다.

그러한 선생님의 사랑 덕분에 저는 평생을 판소리에 몸담아 온 예술가의 겉과 속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책이나 이론적인 가르침을 통해서는 깨달을 수 없는,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광대의 삶에 대해서도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같은 스승 박초월 명창


선생님은 제자들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 피우는 걸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물론 성대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오랜 무대 생활의 체험으로 광대에게는 무엇보다 절제가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때로 옛날에 함께 판소리를 했던 사람들 중에 술이나 아편으로 폐인이 된 사람이 많았다는 얘기를 하시면서 술·담배에 절어 있으면 절대 명창이 될 수 없다고하셨습니다.

또 남녀 간의 이성 관계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하신 편이었습니다.

“사내는 계집 조심하고, 계집은 사내 조심해야 돼.”

옛날 선생님들은 제자가 방탕한 행동을 하면 여지없이 파문해버렸다는 말씀도 종종 하시곤 했습니다.

또 평상시의 몸가짐에서도 오랫동안 혼자 사시느라 그랬는지 무척 까다롭고 가리시는 게 많아 사람을 가려서 사귀는 편이었고, 약속 시간은 철저하게 지키셨습니다.

또 소리꾼이 술 몇 잔 얻어먹거나, 돈 몇 푼에 팔려서 취객의 흥을 돋우는 것은 옛날 얘기지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술자리나 잔칫집에서 노래 부르는 걸 철저하게 금하셨습니다.

그런 성격이셨으니 공연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지병인 당뇨병으로 고생하신 지 십 년도 넘었던 터라 평상시에도 건강을 위해서 세심하게 신경을 쓰시는 편이었지만, 공연 날짜가 확정되면 그날부터 집안은 초긴장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보약을 지어서 달여 먹거나 끼니때마다 몸의 기운을 돋워 주는 음식들을 정성스럽게 드시고, 사람과의 만남도 줄이고, 등산길에 체조도 하고, 발성 연습도 더욱 공들여 하십니다.

또 될 수 있으면 집안일에 신경을 덜 쓰고, 공연에만 정신을 집중하려 하십니다. 자신의 허약한 건강 상태를 극복하고 무대에서 최상의 판소리를 부르려는 선생님의 눈물겨운 노력을 보면서 나는 종종 숙연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는 동안, 제게는 새로운 음악 세계를 탐험하는 행복과 함께 힘겨운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차라리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더욱 빨리 판소리의 창법을 익힐 수 있었으련만, 노래만 하려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벨칸토 식 발성기관 때문에 호되게 고생했습니다.

그 시기의 저는 발성법뿐 아니라 그 동안 내가 쌓아왔던 음악에 대한 감각의 대수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탐험에 따른 고통치고는 정말 혹독한 시련의 세월이었습니다.

그 무렵의 저를 가장 괴롭힌 문제는 오페라와 판소리의 음악성에 대한 비교의 문제였습니다.

저는 판소리가 우리 것이기 때문에 좋아한 것이 아니고, 음악적으로 저를 끌어당겼기 때문에 좋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음악적 깊이와 표현력은 오페라와 견주어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판소리를 공부하면 할수록 타당한 생각으로 굳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판소리를 둘러 싼 외적 여건은 그런 생각을 증명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게 현실이었습니다.

판소리를 하는 성악가의 절대 부족,
그 성악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 공간의 열악함,
성악가를 좋아하는 팬들의 고령화와 절대적 감소추세,
새로운 판소리를 작곡할 수 있는 작가와 작곡자, 연출가의 빈곤함,
음반화에 필수적인 전문 기획자와 녹음 기사의 부족,
이 모든 조건에서 판소리는 오페라와 경쟁하기에는 너무도 척박한 환경에서 악전고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악전고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오페라나 서양 음악을 몰랐더라면 하지 않았을 고민으로 저는 오랫동안 끙끙대며 가슴앓이 했습니다.

저는 기초적인 민요나 단가를 배운 뒤,「흥보가」「수궁가」를 공부하고 있던 때라 공부에 대한 의욕은 대단했지만 연극일에 쫒겨서 가는 날보다 못 가는 날이 갈수록 많아졌습니다.

그 무렵 선생님은 무척 적적하고 쓸쓸해 하셨습니다. 당뇨병 증세가 심해지고 갈수록 건강이 나빠지자 아예 학원을 폐쇄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찾아오는 제자들만 가르치니, 제자 기다리고 가르치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었습니다.

또 공연 요청도 갈수록 줄어들어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잊혀져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싸여 무척 초조해 하셨습니다.

그 무렵 선생님은 남원군 운봉 땅에서 살 무렵, 아버지한테 지게작대기로 얻어 맞으면서도 판소리에 미쳤던 시절의 이야기를 종종 하시곤 하셨습니다.

집안에 기생이 나올까 걱정이 태산이셨던 아버님은 14살도 안 된 딸을 부잣집에 시집 보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첫날 밤도 치르지 않고 시집에서 도망 나와 남원 권번에 들어 가 판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에 서 있는 동편제의 시조인 송흥록 명창(1789년 경~1863년 경)의 동상.
그 뒤에 보이는 초가집이 박초월 명창이 자랐던 소녀 시절의 집.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재 소녀 명창이란 칭찬을 듣고, 열여섯 살 무렵에는 이미 명창 대회에서 일등을 한 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레코드 취입을 하고, 일본으로 서울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던 시절의 얘기는 화려하고 재미있었습니다.

1933년에 <조선 성악 연구회>에 들어가서 이화중선과 같은 여류 명창과 함께 대표적인 여류 명창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여성 창극단이 생겼을 때는 전국을 돌면서 뛰어난 노래와 연기로 수많은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던 그 시절의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있고 때로는 눈물겹기까지 했습니다.

  요즘의 <소녀시대>만큼이나 인기를 끌며 활약하던 시절에 찍은
  박초월 명창의 엣된 모습


사랑과 미움, 만남과 헤어짐, 화려함과 비참함, 방랑과 배고픔 같은 온갖 사연들이 소용돌이친 전성기의 영광은 늙으면 늙을수록, 또 주위가 적막해질수록 더욱더 빛을 발하며 선생님의 가슴속을 비춰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 무렵의 선생님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결사적으로 항거하고 있었습니다. 고적한 방안에서 가쁜 숨을 쉬고 손을 떨며 화장을 하시고는, 언제 올지 모를 제자를 하염없이 기다리시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가면 이를 악물고 북을 치며 소리를 가르쳐 주시곤 했습니다.

                       병든 몸으로 소리를 가르치던
                       스승님의 말년의 모습.


저는 선생님의 힘들어하시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공부하는 시간을 한 시간에서 삼십분으로 줄이고, 어떤 때는 혼자서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거나, 아니면 이야기만 나누다 오곤 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굳이 문밖까지 나와 제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쓸쓸하게 서 계시곤 했습니다. 그 모습이 등에 박혀 제 걸음은 무겁기만 했지만, 집에는 또 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로 중풍의 병환이 점점 깊어가는 아버님이 계시니 안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은 연극 공연이 끝나고 출연료를 받았는데, 그 돈으로는 도저히 쌀값과 아버지의 약값을 마련할 길이 없어 한숨을 쉬면서도 습관적으로 선생님 댁에 공부를 하러 갔습니다.

그날 마침 「흥보가」중에서 흥보 부인이 <가난타령>을 하면서 우는 대목을 배웠습니다.

가난이야 가난이야
원수 놈의 가난이야
잘 살고 못 살기는
삼신 제왕이 마련을 했나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불우 행사 한 일 없이
밤낮 주야로 벌었어도
삼순구식(三旬九食)을
면할 수가 없네

박초월 명창의 흥보가 중 '가난타령'

그런데 노래를 부르던 중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더니 그만 노래를 다 부르지 못하고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시더니 물으셨습니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어디 몸이 아픈가, 집안에 우환이 있는가?”

그래도 제가 대답 없이 울기만 하자 눈물을 글썽이며 곰곰 생각하시더니 틀림없이 그것 때문일 것이라는 듯이 조용히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사귀던 여자하고 헤어진 게지?^^”

저는 그런 쪽으로 결론을 내린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도 뜻밖이라 웃지도 울지도 못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눈물을 그치고 거짓말로 들러대기 시작했습니다.

“출판사 하는 친구에게 꾸어 준 돈이 있는데 그 친구가 망해서 그 돈을 못 받게 되었어요.”

저는 그때까지 연극을 하면서 친구와 함께 출판사를 차려서 돈을 잘 번다고 선생님을 속여 왔기 때문에 솔직한 사정을 도저히 얘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 얘기를 들은 선생님은 금세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시더니 서랍에서 오만 원을 꺼내어 제 손에 꼬옥 쥐어 주셨습니다.

그 돈으로 아버님께 약을 사드릴 수 있게 되었지만 저는 그 일이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지금도 <가난타령> 대목만 하려면 그때의 일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이렇듯 정 많고 눈물 많은 분이었기에 말년의 쓸쓸함을 어느 누구보다도 견디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건강이 허락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일 년에 몇 차례 있는 공연 요청을 한 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당뇨병이 점점 악화되어 체중이 줄어들고 기억력이 감퇴되고 목소리가 잠기게 되었는데도, 다른 국악인들을 만나면 건강이 좋아졌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 웃음 뒤의 슬픔, 그 짙은 화장 뒤의 주름살과, 무대에서의 갈채 뒤에 오는 기력 쇠진과 허탈을 모두 알고 있는 저는 선생님의 웃음이 밝으면 밝을수록 더욱더 불안하였습니다.

그 불안은 점점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어떤 공연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번은 「수궁가」를 하시던 중에 느닷없이「흥보가」가사가 튀어 나오더니, 중간에 가사를 잊어버리고 한참을 헤매시다가, 제자들이 무대 뒤에서 가사를 소리쳐서 일러준 덕에 간신히 한 대목을 때우고 나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처참한 선생님의 표정은 내 가슴을 사정없이 후비며 파고들었습니다.

또 한 번은 공연을 끝내고 나오시더니 부리나케 집으로 가자고 하시는 거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배에 힘을 쓰다가 자신도 모르게 설사가 나와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당뇨병의 말기 증세인 만성 설사에 시달리고 계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그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을 했으며, 그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된 것을 느낀 선생님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지 생각하곤 혼자서 남몰래 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촬영을 마치고 새벽에 돌아왔을 때, 집으로 박초월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깜짝 놀라 허둥지둥 달려가 보니 선생님의 집안에 제자들과 국악인들의 통곡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며 그렇게도 이승의 삶에 애착을 가졌던 선생님!
예순여섯이란 '젊은' 나이에 죽음을 기다리게 된 자신을 몹시도 안타까워 했던 선생님!

지금쯤 이승의 허공을 떠돌며 자식들과 제자들과 자신이 사랑을 쏟았던 사람들의 주변을 맴돌고 계실까요? 

선생님! 어디에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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