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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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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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0.08.12
    얇은 사 하얀 고깔 춤추는 나비, 이매방 명인 (6)
  2. 2010.07.09
    말뚝이, 문둥이의 절절한 한, 이윤순 명인 (13)
  3. 2010.06.24
    담백하고 깊은 경기민요의 멋, 묵계월 명창 (6)
  4. 2010.06.03
    '진주 검무'에 서린 논개의 혼, 성계옥 명무 (11)
  5. 2009.12.06
    신명나고 웅장한 "광대의 노래" 공연했어요. (34)

조지훈 시인의 <승무>는 전 국민이 애송하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훠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이 시에서 표현한 대로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을 나비처럼 곱게 차려 입고 그 위에 장삼을 입고 가사를 걸치고 길다란 소매를 허공에 뿌리며 추는 승무는 환상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종교적인 경건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출처 : http://juruby86.egloos.com/

우리나라 명무 중 승무와 살풀이춤의 대가로 꼽히는 이매방 명인은 자신의 승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을 하다가 그 사랑이 깨져서 중이 되었는디, 수도를 하다가 문득 옛날 생각이 나고 속세가 그리워 가슴 속에 왼갖 번뇌가 떠오른단 말이지요. 그래서 그걸 참다 못해 그 울분, 한 이런 것을 춤이나 북을 두드리는 것으로 해소할라고 추는 춤이 바로 승무라.”

불교적인 용어로 멋있게 설명하자면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기원하는 수도승의 내면 세계를 묘사한 춤이라는 말이 되겠지만, 그런 어려운 말보다 그의 말이 훨씬 현실감이 있어 보입니다.

이것은 그가 1927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뒤, 팔순이 넘은 지금까지 승무를 비롯한 전통 무용에 젖어 살아왔고, 특히 승무에서의 북춤은 제일인자라고 누구나 인정할 만큼 그 춤에 뼛속 깊이 통달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출처 : http://www.ibulgyo.com/news/read.asp%3F...%3D88236

“소리나 춤이나 타고 나야지 억지로 하면 안돼요. 관중이 천 명이고 만 명이고 간에 그 사람들을 잡았다 놨다 험서 관중들 오장을 속속들이 후벼 놓고 울려 놔야 명창이니 명무니 하는 이름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아무나 명창이 되고 명무가 될 수 있나요?”

스스로 자신의 춤이 명무라고 자부하는 것은 어려서부터 '춤추는 머시마'로 놀림을 당하면서도 한눈 팔지 않고 춤 속에서만 살아 온 자기 인생에 대한 자신감에서 우러나온 말이기 때문에 설득력을 지닙니다.

“세 살 때부터 누님들처럼 머리 땋고, 쪽 찌고, 머리 틀고, 치마 저고리 입고, 거울 앞에서 춤을 췄다니까 말해서 뭘 해요. 자라면서 남자애들하고는 안 놀고 맨 여자애들하고 소꿉장난하고 놀았어요. 주위에서는 이씨 가문에 만고에 없는 굿쟁이가 나올랑갑다 하면서 걱정들을 했지요.”

과연 주위에서 걱정한 대로 그는 일곱 살에 아버지 몰래 전라남도 목포 권번에서 이대조 명인에게 춤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대조 선생이 사실은 우리 할아버지예요. 우리 집안이 할아버지대까지 무업을 해 오다가 아버지께서 무업을 끊고 일체 자식들에게 그 일을 못 하게 했는데, 내가 다시 그 업을 이어받은 거지요. 그러니 피는 못 속이나 봐요.”

할아버지에게서 춤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허튼춤’을 배운 뒤에 광주에 와서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는 광주 권번에서 박영구 명인에게 승무와 북을 배우고 이창조 명인에게 검무를 배웠습니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ser...%3Dat007

“요새 와서 알게 된 건데 승무로 치면 내가 5대째라는 거예요. 맨 처음 승무를 창시한 분이 신방초 선생이고, 그 다음 이정선 선생, 그 다음이 김금옥 선생이고, 김금옥 선생의 제자로 한성준 선생과 박영구 선생이 있는데 한성준 선생 밑에서 한영숙 씨가 나오고, 박영구 선생 밑에서 내가 나왔다는 거지요."

승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뒤인 신라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고, 그밖에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주장이 있어 확실하게 단정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신방초 명인이 승무의 창시자라는 설은 문헌의 고증이 없으니 다만 원로 무용인들 사이에 전해 오는 계보를 추정해 올라갈 때 제일 ‘웃어른’으로 꼽히는 명인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는 게 무난할 듯합니다.

어쨌든 그러한 계보를 거쳐 전해진 승무를 그는 박영구 명인에게 회초리를 맞아가며 배웠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기가 막히게 춤을 추시고 소리북도 잘 치시는 멋쟁이였어요. 그런데 발을 약간 절어요. 그래도 춤추면 발을 저는지 몰라...
우리 선생님이 북을 치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물레를 타다가도 어깨춤을 절로 추곤 했으니께. 그 북가락을 내가 배우는디 참 배우는 방법이 옛날 식이라. 선생님이 북도 내주지를 않아서 함부로 칠 수도 없고, 감나무 가지 꺾어서 만든 북채를 가지고 입으로 몇 가락 배운 것을 돌담에서 혼자 돌을 두드림서 연습을 혀.
그러자니 손등이 벗겨지고 굳은 살이 박혀요. 다른 기생들은 힘들다고 다 집어치웠는데 나는 끝까지 버텼어. 선생님 눈치 봐서 기분 좋을 때 한 가락씩 사흘에 한 번 열흘에 한 번 그렇게 동냥하다시피 가락을 배웠어요. 요새 사람들이 들으면 야만적이고 원시적이라고 허지만 그렇게 배운 거라서 쉽게 잊혀지지 않아요.”

그렇게 '야만적이고 원시적으로' 배운 그의 북은 그 가락의 다양함이나 기교의 뛰어남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승무를 출 때는 누구나 ‘천수북’이라고 불리는 북을 앞에 놓고 북채 두 개로 ‘구래’라고 불리는 가죽 부분과 ‘변죽’이라 불리는 북 가장자리를 두드리며 북춤을 춥니다. 그런데 그 단순한 북춤 속에 엄청난 가락의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박영구 명인과 함께 서울에서 활동했던 명무 한성준은 승무나 학춤뿐만 아니라 소리북 잘 치기로도 당내에 따를 자가 없었지만 그의 북춤가락도 박영구 명인에 견주면 '재산이 많지 않다.'고 평가됩니다.

북춤의 ‘구정놀이’ 라고 부르는 여러 가락과, ‘세산조시’라고 부르는 휘모리의 여러 가락들은 농악 장단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풍물의 꽹과리 가락이나 장구 가락 그리고 북가락 등을 북채 두 개로 두드릴 수 있게 변화시킨 가락들이 대부분입니다. 거기에다 이매방 명인은 ‘엇머리’ 장단을 새로 창작하여 '재산'을 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북춤을 한번 보고 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북 가락은 싱거워서 들을 맛이 안 난다고 할 만큼 사람의 속을 울리는 묘한 힘이 있습니다.

“북춤 추는 시간이 삼 분에서 오 분 사이인데 남이 볼 때는 시원하고 쉬운 것 같아도 거기에다 엇붙임, 잉엇거리 같은 어려운 기교를 마스터 하려면 십 년 공부는 해야 돼요.”

그 역시 그 어려운 공부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공업학교 건축과에 다닐 때까지 계속했습니다. 열네 살에 명창 임방울이 주최한 명인 명창 대회에서 승무를 춘 뒤로 학교에서나 주위에서 ‘춤추는 머시마’라고 놀려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춤만 추었습니다.

그런 일과 함께 그의 성격은 더욱 더 여성화되어 갔고, 그 기질은 평생 동안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는 “한국 춤은 여자가 추어야 제 맛이 나고, 남자가 추더라도 여성적인 태도가 우러나야 그 맛이 제대로 난다.” 고 하며 여성화된 춤의 미학에 대해서 확고한 지론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탈춤이나 농악을 출 때의 춤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니 그것들과 비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승무나 살풀이를 추는 남자 춤꾼들의 거의 모두가 여성화되어 있고 여성화되지 않은 춤꾼이라도 씩씩하고 활발한 남성적 정서보다 부드럽고 연약한 여성적 정서를 위주로 춤을 추는 것에 대해서는 앞으로 우리 무용계가 풀어야 할 숙제로 꼽히기도 합니다.

“한국 춤은 덜렁이 왈가닥은 못 춰요. 성격이 차분하고, 얌전하고. 어딘가 애원이 깃들어 있고, 눈에 색이 흐르고, 그 눈에 변덕이 죽이 끓듯 하면서 온갖 감정을 나타내고, 슬프고, 아름답고, 어여쁘고, 수심이 가득 차고, 곱게 빗은 머리에서 머리카락 한 오라기가 살짜기 흘러 내려오듯이 교태가 있어야 그 춤이 제 맛이 나는 디 덜렁이 왈가닥이 어떻게 그 춤을 추어요?
장삼을 날리면서 그늘을 저어서 한을 만들어내고 고깔을 좌우로 놀려서 온갖 하소연을 해야 하는디, 요새 춤추는 사람들 보면 구르고 넘어지고 몸부림치고 가랑이 쩍쩍 벌리고 궁둥이 흔들어대니 그게 춤이에요? 지랄 염병하는 것이제.”

출처 : http://kr.blog.yahoo.com/siesindnochjung/2095

‘욕 대장’, ‘직사포’, ‘깡패’, '따발총‘이라는 많은 별명에 어울리게 그는 눈에 거슬리는 춤에 대해 매섭고 혹독한 비평을 큰 소리로 얘기했습니다.

문제야 어떻든지간에 그는 더욱 더 여성화되어 갔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을 따라 북경에 잠시 머물러 있을 때, 최근에 첸 카이거 감독이 만든 <매란방>이란 영화로 한국에도 소개된 적이 있는 중국의 전설적인 무용수 '매란방'에게 무용을 잠깐 배웠습니다. 그 뒤로 그는 매란방처럼 되는 것을 평생의 소망으로 삼을 만큼 깊이 빠졌습니다.

“매란방하면 우는 아기도 그친다던 유명한 무용가인데 남자에요. 기가 막힌 미남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여자 역할만 맡아서 여자 춤을 추면 여자고 남자고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어버린다니까요. 오죽하면 일본 천황이 반해서 자기 앞에서 춤을 추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했으니까요. 중국 평민들은 얼굴도 볼 수 없고, 그 사람이 공연하면 황제 귀족들만 와요.”

해방이 된 뒤에 목포 권번의 무용선생으로 있던 시절, 나이도 어리고 키도 작아 기생들한데 “뚜드려 맞기도” 많이 하다가 악극단이 유행하던 시절에는 ‘창공’이라는 단체를 따라다니며 밴드반주에 맞춰서 승무를 추기도 했습니다.

그뒤 광주 국악원으로 자리를 옮기고서는 전라남도 경찰국 선무 공작반의 무용단 단장이 되어 전남 일주 순회공연을 하기도 하고, 임방울이 만든 단체를 따라다니며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6.25 직후에는 육군 군예대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부산 유지들의 권유를 받아 부산 국악원의 무용강사 노릇을 하는 따위로 쉴 새 없이 떠돌아 다니며 춤을 췄습니다.

그러면서 북을 하나 놓고 치는 전통적인 '외고' 형식을 나름대로 바꾸어 보기도 했습니다.

1948년에 임방울이 목포역전 가설극장에서 명인 명창 대회를 열었을 때는 북을 셋 놓고 치는 '3고'를 선보였고, 1953년에 전라북도 군산에서 국악원 주최로 명인 명창 대회가 열렸을 때에는 '9고'를 선보였습니다. 1954년에는 서울 계림극장에서 ‘삼성 여성 국극단’의 창극에 특별 출연하여 '7고'를 선보였으며, 1955년에는 광주극장에서 ‘이매방 무용 발표회’를 열어 '5고'를 선보였습니다.

국립무용단의 북춤.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00354725

“요새 사방에서 북춤들을 많이 추는데 그게 어디서 나왔는지 아는 사람이 드물어요. 그런데 내가 만들어 놨으니까 하는 얘긴데, 외고나 삼고는 예술적인 가치가 충분히 있어요. 하지만 오고나 칠고, 구고, 십일고로 넘어가면 예술적인 면보다는 쇼적인 면이 강해요.”

젊어서 쇼무대에 나섰더라면 떼돈을 벌었을 터이지만 그런 유혹을 뿌리치고 본격 무대에서만 춤을 춰 왔다고 자부하는 그는 그뒤로도 서울과 부산을 왔다갔다 하면서 무용 발표회를 열고, 외국을 수없이 들락거리며 해외 공연을 하고, 국내의 중요한 무용 공연에는 어김없이 출연하면서 그 명성을 높여 이제는 웬만한 춤의 문외한도 승무와 이매방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최고의 지위를 굳혔습니다.

그러나 재운은 신통치 않아서 궁색한 살림살이밖에 남은 게 없다는 그이지만 돈과 처세에 무능한 자신의 성격을 별로 탓하는 기색도 없습니다.

“어느 기자가 어떤 무용과 교수 집에 한번 갔다가 뒤로 넘어지게 놀랐대요. 그 집이 대통령 집보다도 더 으리으리하고 궁궐 같았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집에 와서 보고는 또 한번 놀랐대요. 그 집에 비해서 너무 초라하고 가난해서 그랬대요. 그래도 나는 웃어요. 어수룩한 예능계에서 남 등쳐먹고 돈 벌어서 살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무용심사다 대학 입학이다 할 때 엄청난 돈이 왔다갔다 하고 나도 그럴려면 그럴 수 있어요. 허지만 난 못 해요. 그게 어디 예술가입니까. 사기꾼 날강도지.”

울분만 끓어오르면 술을 마시고 직사포처럼 거침없이 바른 말을 해대는 성격 때문에 손해도 많이 보고 몸도 많이 상한 그는 그 좋아하던 술을 딱 끊어버렸습니다. 술을 끊으니 성격도 변해서 남의 욕도 덜하게 되고, 제자들 가르칠 때에도 예전처럼 무섭고 사납게 굴지 않고 많이 부드러워졌습니다.

타고난 성격 탓으로 신식 문물보다는 옛 것을 더 좋아하는 그는 노래도 판소리나 육자배기를 좋아합니다. 신식 노래라고 해야 겨우 고복수, 황금심, 이미자의 노래를 들을 정도이고, 요새 노래에는 아예 귀도 열지 않습니다.

“춤도 그래요. 원형과 기본을 버려서는 안돼요. 아무리 창작도 좋지만 어떻게 한국 춤의 기본이 곡선에서 직선으로 바뀌고, 자연스러운 동작이 태권도 같은 현대 무용으로 변합니까? 창작을 하더래도 원형을 지켜 가면서 조금씩 해야지... 요새 젊은 무용가들의 춤을 보면 이게 춤인지 지랄발광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에요.”

이렇듯 고직식하다 싶을 정도로 옛것을 고수하는 그의 고집도 요새 와서는 조금씩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이 너무 바뀌어서 도무지 그의 고집이 먹혀 들어가지 않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새 대학생들은 승무 추면 다 졸아요. 승무에서 염불 장단이 제일 멋있고 춤도 맛이 진진한 법인데, 염불 장단만 나오면 다 꾸벅꾸벅 졸다가 갑자기 북을 치면 그때야 박수가 나와요. 요새는 뭐든지 빠르고 미친 놈처럼 흔들어대야 좋아하니 원춤대로 추다가 손님 다 가 버리고 나 혼자 추면 뭐 해요?”

그렇게 걱정을 하면서도 춤 추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는 그는 그런 걱정과 한을 오로지 춤을 추며 풀어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쓸쓸해 합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가 '얇은 사 하이얀 고깔'로 춤을 출 때 왜 그토록 격렬하고 격정적이며 때로는 가슴이 저리도록 애닯고 슬픈 울림을 주는지 조금은 알 듯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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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이백 년 전, 낙동강에 큰 홍수가 났을 때,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초계 땅 밤마리 앞 언덕에 큰 궤짝이 하나 흘러 와 닿았다.
그 궤짝을 열어보니 탈과 탈놀이에 쓸 도구와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모두 손 대기를 싫어했으나, 인연이 있어서 닿은 것이니 탈놀이를 해야 한다고 하여 탈을 쓰고 그 책에 적힌 대로 말을 하니 참 재미있는 놀이가 되었다. 

이것은 밤마리 마을에 전해오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로 밤마리가 <오광대 탈놀음>의 시발지라는 학설의 자료로 종종 거론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 말고도 오광대의 발생지가 밤마리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서울에서 흘러온 장정 한 명이 밤마리 양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답니다. 그런데 주인의 구박이 말할 수 없이 심하여 참다못한 머슴이 탈을 몰래 만들어 두었다가 어느날 밤에 술을 잔뜩 마시고 탈을 쓰고 주인집 마당에 나가 춤을 추며 양반 욕을 퍼부었는데, 그게 오광대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몇 가지 전승 자료만으로 '오광대 탈놀음'의 시발지를 초계 밤마리로 못박기에는 여러 가지 무리가 있지만, 그곳이 근세에 와서 오광대 놀이를 많이 놀던 곳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낙동강은 1930년대까지만 해도 수심이 깊어 뱃길로 쓰였고, 안동까지도 소금배가 오르내렸다고 합니다. 따라서 밤마리는 강의 포구로 의령, 합천, 고령, 초계와 같은 지방의 물산이 모이는 집산지였고, 수시로 난장이 벌어져서 상인들이 광대패에게 돈을 주어 며칠씩 탈놀음을 했다고 합니다.

거기서부터 의령, 산청, 진주, 사천, 고성 등으로 탈놀이가 퍼져서 수영이나 동래나 부산진과 같은 낙동강의 왼쪽 지방에서는 ‘들놀음’을 뜻하는 ‘야류(野遊)’라 불리게 되고, 낙동강의 오른쪽 지방에서는 '오광대'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오광대 놀음이 남아 있는 곳은 통영과 가산과 진주와 마산과 고성이 있는데,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고성 오광대>가 가장 원형에 가깝게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이 다가오면 고성 몰디 뒷산의 도독골 산기슭 잔디밭에 놀이꾼들이 모여서 며칠씩 연습을 한 뒤에 풍물을 치면서 탈놀음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인근에서 수많은 구경꾼이 모여들어 흥청거리는 한판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이 놀이의 기능보유자 중에서 80년대에 제가 만났던 이윤순 명인이 어렸을 때만 해도 해마다 마을에 그런 놀이가 벌어져 소년의 마음을 들뜨게 했습니다.

1918년 5월 23일에 고성군 하일면 오방리에서 농사를 짓던 이원제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단소도 곧잘 불고 국악을 좋아하던 아버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려서부터 동네에 굿이 벌어지거나, 풍물을 치거나, 오광대 놀음을 할 때에는 신이 잔뜩 나서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가난한 살림 탓에 초등학교 1학년을 겨우 다니다 그만 두고 집에서 농삿일을 돌보고 있을 때 부친이 덜컥 중풍에 걸렸습니다. 한약을 달여 먹고 침쟁이가 말을 타고 들락거리는 법석을 떠는 동안에 얼마남지 않은 살림마저 약값으로 다 날아가버리자, 그의 형은 외갓집으로 떠나고 그 역시 집을 뛰쳐 나왔습니다.

주로 전라도 지방을 떠돌아다니면서 포목장사도 하고, 어물장사도 하고, 광산에도 다니던 열여덟 살 소년은 전라도의 멋과 흥에 한껏 빠져버려 장삿일이 신나기만 했습니다.

“전라도 53주를 빠진 데 없이 돌아다니는데, 그기는 막걸리 묵으로 가자꼬 안 하고 북치러 가자꼬 하는 기라. 북 못 치고 소리 한마디 못 하모 막걸리 집에서도 무시받고 한량 축에도 못 드는디가 전라돈 기라. 내 취미에는 딱 맞는 기지. 그래 판소리도 조끔 배우고 북도 조끔 배우고 술도 묵고 하면서 지냈는데, 우째 정이 들었는지 내중에는 마, 떠나기가 싫을 정도인 기라.”

그 떠나기 싫은 전라도를 오 년쯤 떠돌아다니면서 돈도 벌고 한량 놀음도 하면서 지내다가 스물셋이 됐을 때, 고향에 돌아와 하일면 수양리에 사는 김필선 색시에게 장가를 갔습니다.

그 사이에 아버님 병은 차도가 있어서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기에는 아직 힘이 부치는지라, 그는 신혼의 재미를 보기도 전에 다시 돈을 벌러 객지로 나가야했습니다. 삼사 년 동안 장사를 하면서 지내다가 8.15 해방이 되자 그는 고성으로 돌아와서 객지에서 배운 장사 솜씨를 발휘하여 집에다 물건을 들여 놓고 상인들을 데리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해방이 되이까네 일본놈들이 못 하게 해서 못 놀았던 오광대 놀음을 하는데, 우째 좋은지 미치겠능기라. 그래 탈놀음하는 노인들이 있던 고성 경로당에 찾아디니믄서 술도 사고 담배도 사고 물주 노릇을 하믄서 춤도 배우고 장고도 배왔제.”

그를 그토록 '미치게 했던' 오광대 놀음을 놀 때에는 먼저 풍물을 치고 길놀음을 하며 놀이가 벌어지는 마당에 도착합니다. 그 다음 첫째마당인 승무를 추는데 고깔을 쓰고 장삼을 입은 중이 각시를 유인하는 교태스러운 춤을 추면 각시도 요염한 춤으로 맞춤을 춥니다.

출처 : http://www.seelotus.com/gojeon/gojeon/m...-dae.htm

그 다음에 문둥이 광대가 문둥탈과 벙거지를 쓰고 굿거리 장단에 소고춤을 춥니다. 이윤순 명인의 말에 따르면 “부잣집 자식이 모진 병에 걸려서 손이 오그라지고 가슴에 한이 맺혀서 추는 춤인데, 제대로 추면 뼈가 아픈 춤”인 문둥북춤이 끝나면, 상놈 하인인 말뚝이가 양반들에게 모욕을 주며 희롱하다가 같이 어울려 춤을 추는 오광대 마당이 벌어집니다.

출처 : http://ask.nate.com/qna/view.html%3Fn%3D6109594

“집안이 쫄딱 망해 객지로 나와 양반 하는 짓을 보니 속이 끓고, 저도 알고 보면 근본있는 집안 자식이라, 양반 앞에서는 욕을 못 하고 서민들을 모아 놓고 탈을 쓰고 돌려 대면서 양반 욕을 하는” 이 마당은 평소에 서민들의 응어리진 한과 분노를 익살과 해학으로 돌려 치며 뼈있는 웃음과, 푸짐한 욕설과, 재치있는 풍자로 곳곳에 날카로움이 번뜩입니다.

말뚝이에게 놀림을 당한 양반들이 춤을 추고 있을 때에, ‘영노’라고도 하고 ‘비비’라고도 하는 양반 잡아먹는 괴물이 나와 양반을 붙잡고 마음대로 놀려대며 혼을 냅니다.

그 다음에 가정 비극을 탈놀음화한 ‘제밀지 마당’이 벌어집니다. 제밀지라는 젊은 각시와 살림을 차린 영감에게 본각시인 할미가 나타나 질투한 끝에 제밀지가 난 아이를 두고 첩하고 큰마누라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집니다. 할미가 아이를 죽이면, 제밀지도 달려들어 할미를 죽이고, 상도꾼이 할미의 상여를 메고 나갑니다.

출처 : http://www.ogwangdae.or.kr/

이 다섯마당의 놀이를 설흔 명쯤 되는 놀음꾼들이 춤을 추고 풍악을 울리면서 밤새도록 놀 때면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모닥불은 너울거리고, 모두들 신이 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온 몸이 욱신거릴 만큼 흥청댔습니다.

이윤순은 그 흥에 반해서 밥만 먹고 나면 경로당에 가서 장구치고 춤추고, 어떤 때는 기생도 데리고 와서 놀면서 그 속에 푹 파져서 지냈습니다.

“그란데, 다른 거는 다 좋은데 양반들을 놀리니께 양반들이 싫어 하고 광대 놀음 한다꼬 집안 어른들이나 친구들도 무시를 하는 기라. 이 고성이 양반 터가 세서 유림이나 향교 다니는 사람들은 우리를 기생이나 남사당 같은 천민 취급하는 기라. 전라도에서는 광대놀음한다꼬 무시를 안 하는데, 경상도는 마 그기 아닌 기라. 그 애로가 제일로 컷제.”

그래도 천성은 어쩔 수가 없어 그는 장구 잘 치는 정상수 명인에게 장구를 정식으로 배우고, 문둥북춤 잘 추던 홍승낙 명인이나, 승무를 잘 추던 천세봉 명인이나, 장구를 잘 치던 남상국 명인이나, 양반춤을 잘 추던 배갑문 명인이나 말뚝이 춤을 잘 추던 최응두 명인들과 어울려 춤도 배우고 <양산도>나 <육자배기>같은 노래도 배우면서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그러는 한편으로 시조에도 취미를 붙여서 시조회 회원이 되어 전라도 사람 양해식 명인이나, 삼천포 사는 김병용 명인이나, 하동 사는 장남기 명인이나, 함양 사는 김영식 명인과 같은 시조 사범들에게 틈틈이 시조를 배웠습니다.

“시조도 그렇고, 탈놀음도 그렇고, 옛날 어른들 모습을 그려보마 참 옛날 어른들 진멋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구마. 우째 그렇게 잘 만들고 잘 추고 잘 노는지, 누워서 가만히 생각해보마 참 기가 막힌 기라. 그라고 탈도 정신이 맺혀 있어서 슬픈 연기를 하모 꼭 탈이 우는 것 같은 기라. 장구도 그렇제. 그 작은 통 안에 무신 가락이 그리 많이 들었는지 평생을 치도 만족이 없으니...”

그는 노래도 배우고, 춤도 배우고, 악기도 배웠지만 춤은 뼈가 굳어서 그저 흉내내는 데서 그치고 노래는 늦게 배운 시조를 취미정도로 부르는 데서 그쳤습니다. 그러나 장구는 유달리 애착이 가고 솜씨도 뛰어나서 아무도 그를 따를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탈놀음 할 때는 '덧뵈기 가락'과 '굿거리 가락' 두 가지만 쓰이는 단순한 장구 가락이지만 그 간단한 4박 가운데에 무슨 가락이 들어가도 써먹을 수 있는 만큼 칠수록 어렵다고 합니다.

또 춤이나 노래하고 맞아 떨어져야 반주로써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춤과 노래의 속을 샅샅이 알아야 하고, 춤을 빠르게 추면 잔가락을 넣어 주고, 춤이 느리면 잔가락도 줄이고, 춤을 으쓱거리면 장구도 으쓱거리며 궁짝이 맞아야 하니 장구가 없으면 흥이 안나오고 춤을 살리고 죽이는 것이 오로지 장구잽이의 솜씨에 달려있다는 그의 말이 틀림없는 말이겠습니다.

물론 <오광대 탈놈음>의 반주 악기로 장구 말고도 꽹과리나 북이나 징과 같은 타악기 외에 단소와 호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단소와 호적은 불 줄 아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서 빠져버리고 지금은 사물만으로 반주를 합니다.

그 중에 가락을 이끌어가는 것은 꽹과리와 장구인데, 꽹과리는 꽹과리대로, 장구는 장구대로 가락을 엮어 가면서 치고, 춤의 맛을 살리는 데에는 장구 가락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장구만으로 탈놈음이 진행될 수도 있을 만큼 중요한 몫을 차지합니다.

그는 주로 장구를 치며 놀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탈놀음을 하는 것은 돈 버는 일이 아니라, 돈 쓰는 일이어서 장삿일이나 집안 살림이 조금씩 축나기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정상박의 <고성 오광대 대사> 후기에 보면 통영 오광대와 고성 오광대의 놀이판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연희자 자신도 흥이 나는 연기이기 때문에 연희자들이 주동이 되어,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일심계가 한가한 봄철에 모임을 가지게 되면, 밤에 자갈밭에서 오광대 연기를 하고 냇가의 고기를 잡아 국을 끓여 먹으며 하루를 즐긴다고 한다. 이때에는 구경꾼이 많이 모여드는 것은 물론이다. 8.15해방 후 고성 군민들이 오광대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고 흥미있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어 정월 보름과 추석을 기하여 읍내 가야극장과 시민극장에서 연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때엔 입장료를 받았으나 장터나 방내에서 연기할 때에는 비용을 주로 일심계원들이 부담하고 관객은 무료로 구경했다.”

계원들이 스스로 돈을 내고 춤추고 놀며 놀이판을 이어온 덕분에 오광대 놀음은 점점 윤기를 더해가서 1963년에는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게 되었고, 일 년에 한 번씩 서울로 올라가서 덕수궁이나 국립극장에서 공연발표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이윤순 명인도 1967년에 오광대 장구 예능 보유자로 인간 문화재 지정을 받게 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서 1973년에는 청주에서 열린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고, 1974년에는 부산에서 열린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까지 받게 되어 전국에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선배들의 뒤를 이어받아 문둥춤 잘 추는 조용배 명인이나, 승무 잘 추는 박갑준 명인이나, 양반 잘하는 허판세 명인이나, 제밀주를 잘 노는 허현도 명인이나, 말뚝이를 잘 노는 허중복 명인 같은 재주꾼들이 일심으로 모여서 흥겹게 놀아주고, 이윤순 명인과 같은 잽이들이 든든하게 받쳐준 탓에 고성 오광대는 갈수록 인기를 끌어서 전국 경연대회가 열릴 때마다 시범 공연을 다니고 봄이나 가을에 민속촌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읍이나 군의 행사가 있을 때는 반드시 등장하게 되었고, 여름방학 때나 겨울방학 때는 놀음을 배우러 오는 학생들이나 시민들 때문에 전수소 안이 터져나갈 지경이었습니다.

한 가지 흠이라면 공연 수익금이나 국가보조금이 보잘 것이 없어서, 경비 쓰고 나면 남는 게 없고, 생계에 전혀 도움이 안 되니 생업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매달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옛날에는 자기가 미쳐서 돈 쓰고 다니고 먹을 것이 없으면 고구마 먹으면서도 놀았으니, 그것에 비하면 많이 발전한 거라고 애써 좋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게다가 동외동 점촌부락에 번듯한 전수관 건물이 세워져서 체면도 서고 자랑스럽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정작 즐거워하고 좋아해야 할 고성 사람들의 흥미가 점점 시들어 가고 있는 점이라고 아쉬워했습니다.

하도 여러 번 봐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볼거리가 너무 많아서 그런지, 예전처럼 신명나게 구경을 하지 않고 멀거니 서 있다가 돌아가기가 일쑤고, 그나마도 오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대신 서울이나 다른 지방에서 오는 학생들은 점점 그 수나 열기가 더해가고 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고마워. 요새 학생들 장구도 잘 치고 꽹과리도 잘 치고 춤도 잘 추고 놀기도 잘 놀아. 요새는 디스코나 고고나 그런 양춤들을 다 춘다카는데, 탈춤 좋아하는 학생들이 이래 많으니까네 참 든든하제. 내는 회원들이 혹시 양춤을 추더라도 못 하게 말리는데, 그 춤이 풍기문란하고 미풍양속을 해치는 기라. 우리 선조들 노시는 게 얼마나 좋은데 서양놀음을 배우노. 농악이 나오면 산천초목도 춤을 추고, 판소리를 들으마 구절구절이 진 멋이 있고, 춤도 활개치고 추모 그 맵시가 기가 막히고, 옷도 우리 한복이 을매나 멋있는지, 학생들 의상을 입혀서 춤을 추게 하모 옛날 선인들 모습이 우러나오는 기라.”

출처 : http://www.emuseum.go.kr/relic.do%3Fact...3D130880

이렇듯 선인들의 멋에 잔뜩 취해 반평생을 살아온 그도 늙는 게 제일 섧고 한심하다는 생각에 잠겨 지낸다고 한탄했습니다. 좋아하는 술도 젊은 사람들하고는 어울릴 수가 없어 시조를 같이 부르는 늙은 벗들하고나 마시며, 가난하고 외롭게 지내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어느덧 그러한 삶의 서러움과 한이 절절이 배어있는 문둥탈이나 말뚝이탈의 그림자가 짙게 서려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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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우리에게 '민요'는 설날이나 추석 같은 특별한 날에나 들어볼 수 있는 특수한 노래입니다.

하지만 일본이 이 나라를 지배하기 전까지만 해도 민요는 수천 년 동안 이 땅의 백성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려 온 대표적인 '민중의 노래'였습니다.

한반도의 곳곳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 온 수천 편의 토속 민요들이 있었습니다. 그 노래들은 제쳐두고 <경기민요>, <서도민요>, <남도민요>로 크게 나뉘어지는 대표적인 애창 민요만을 보더라도, 그 생생한 표현력과 풍부한 음악성으로 듣는 사람에게 다양한 정서를 제공해 줍니다. 이 좁은 땅 안에 어찌 그리도 지역에 따라 창법이나 선율이 확연히 다른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전라도 지역에 전해 오는 남도민요는 뱃속에서 소리를 끌어내어 목에서 갖가지 조화를 부립니다. 어던 노래는 꿋꿋하면서도 박력이 있고, 어떤 노래는 비장하고 처절한가 하면, 어떤 노래는 흥겹고 신명이 절로 납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무게가 있고 뱃속에서 통성을 뽑아내는 발성을 합니다.

이북 지역에 전해 오는 서도민요는 콧소리가 많이 들어가면서 꺾어 넘겨서 끄는 목을 주로 사용하는데, 애절하고 슬픈 가락을 많이 사용합니다. 

경기 민요는 곱고 예쁘게 나가다가 섬세하게 떨고 끌어 잡아당기고 조이는 목을 주로 사용하며,
슬픈 노래보다 경쾌하고 흥겨운 노래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남도민요나 판소리를 하는 명창들에게는 판소리의 가락이 지니고 있는 비장함이나, 비극적인 어두움이나, 해학적인 분위기가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묘한 성품을 느낄 수 있는데 비해 경기민요를 부르는 명창들에게서는 그 가락처럼 밝고 경쾌하고 화려한 성품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저의 편견일까요?

그거야 어찌됐든 <경기 12잡가>로 인간문화재가 된 묵계월 명창은 경기민요의 곱고 화려한 분위기와 다르게 소박하면서도 꾸밈없는 창법으로 새로운 맛을 보여주는 명창입니다.

출처 : http://www.gayo114.com/musicColumn/musi...Fno%3D71

“내가 어려서부터 키도 작고 다른 재주도 없었는데, 유독 노래부르는 재주만은 유별났어요. 우리집이 서울 광희동 지금 을지로 계림극장 건너편에 있었는데,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나 어디서 주워들은 노래를 그렇게 흉내를 잘 내었어요.
또 우리집 부근에 민요 부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노래 연습하는 걸 오다가다 듣고는 그 흉내를 잘 냈어요.”

1921년 10월 21일에 이윤기씨의 다섯 딸 중 넷째딸로 태어난 그녀는 방산보통학교에 다닐 때까지만해도 노래 흉내 잘 내는 소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녀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인연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버님이 명주실 꼬아서 매듭 만드는 일을 하셨는데 집안 형편은 괜찮은 편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열한두 살쯤 되었을 때, 동네에서 노래부르고 활 쏘러 다니는 한량 노인이 내가 노래부르는 걸 듣더니 이 아이는 노래를 가르쳐야 하니 자기에게 맡기라고 아버지를 졸랐어요.
아버지가 그럴 수가 없다고 거절하니까, 이번에는 어머니를 구슬러서 아이의 장래를 위한 일이라고 끈덕지게 졸라대는 통에 종로 2가의 낙원동에서 혼자 살고 계시던 이씨라는 부인에게 수양딸로 들어갔지요. 그 양어머니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은인이랍니다."

광희동의 ‘문 밖’에서 종로 ‘문 안’으로 들어가게 된 소녀는 학교도 그만 두고 양어머니와 함께 살며 마음껏 노래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양어머니의 돌아가신 남편 성이 묵씨라서 이름도 이경옥에서 묵계월로 고치고, 그 동네에서 노래를 가르치던 이광식이라는 소리꾼에게 노래공부를 시작하게 된 그녀는 새로운 생활이 신기하고 재미있기만 했습니다.

“이광식 선생님에게서 시조로부터 시작해서 여창 지름, 남창 지름 그리고 12잡가를 배우는데, 제가 열심히 하고 또 목이 말을 잘 들어 빨리빨리 배우니까 선생님이 무척 좋아하셨어요.
거기서 일년 반쯤 배웠는데, 한량 노인이 더 좋은 선생님에게 맡기라고 어머니에게 권유하여 김태식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어요. 거기서 일 년쯤 배우고 있는데, 본격적으로 노래를 할려면 권번에서 배워야 한다고 해서 조선권번에 나가 주수봉 선생님에게 공부를 했지요.”

경기민요의 노래 공부는 대개 시조를 배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잡가를 배우는 것으로 끝납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긴아리랑>, <이별가>, <도라지타령>, <구 아리랑>, <노랫가락>, <창부타령>, <방아타령>, <한강수타령>, <경복궁타령>, <양산도>, <천안삼거리>, <오봉산 타령>, <개성난봉가(박연 폭포)> 같은 민요들은 공부를 하는 동안에 저절로 익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경기민요의 독특한 개성을 보여 주는 잡가는 ‘긴 노래’라고도 불리는데 민요도 아니요, 가곡이나 가사나 시조와 같은 정악 계통의 노래도 아니면서  조선말기에 민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독특한 노래입니다. 

본래는 <유산가>, <제비가>, <적벽가>, <소춘향가>, <선유가>, <집장가>, <형장가>, <평양가>의 여덟 가지가 서울의 8잡가로 불렸는데 여기에 <달거리>, <십장가>, <출인가>, <방물가>가 합쳐져서 12잡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노래들이 언제부터 불리었지는 문헌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 없고, 작곡자나 작사자도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잡가 잘 부르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구한말에는 추교신, 조기준, 박춘경과 같은 명창들이 이름을 날렸고, 그밖에도 한다하는 소리꾼들이 이곳저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권번에서 가곡을 배우려고 했어요. 그때 가곡 선생님은 하규일씨라고 가곡으로는 나라 안에서 으뜸이시고 명성이 대단한 분이셨어요.
그런데 그 분이 내 목소리를 들어보시더니 내 목이 좋기는 한데 청이 낮고 굵어서 가곡에는 안 맞다고 하세요. 가곡은 목청이 높고 가늘고 섬세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잡가를 배우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주수봉 선생님한테 ‘긴 노래’를 배우고 있는데 하루는 어떤 노인이 찾아 오셔서 내 노래를 듣더니 ‘너 나한테 한 가락 배워봐라’하면서 뭘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삼설기>라는 노래인데 그 귀한 노래를 뭣인지도 모르고 흥이 나서 배웠지요. 열다섯 살 때의 일이예요.”

<삼설기(三說記)>는 노래가 아니고 '송시(誦詩)', 곧 글에 가락을 얹어 읽어 내려가는 것인데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어려운 가락입니다.

세 사람의 선비가 낮잠을 자다가 한꺼번에 죽게 되어 사자에게 이끌리어 저승으로 가서 재판을 받는다.
그런데 죽을 때가 안 된 사람을 잡아들였음이 밝혀져 도로 살려 보낼 적에 각기 자기 소원을 말하게 된다.
한 사람은 높은 벼슬을 달라 하고, 또 한 사람은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하여 그 사람들은 자기 소원대로 되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이 이런 소원을 이야기한다.
"‘명당에 터를 잡아 만 권의 책을 쌓아 두고 거문고 벗을 삼고 앞내에 고기 낚고 뒷뫼에 약을 심어 아들 형제 딸 하나에 내외손이 번성하여 병 없고 성한 몸이 수삼갑자를 누리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노발대발하여 자기도 못할 것을 해달랜다고 야단을 친다.

이것이 간단한 <삼설기>의 줄거리입니다. 원래 사설이 어렵고 길어서 외우기가 힘들고 가락도 까다로워 부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이문원이라는 사람이 묵계월 소녀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그 선생님은 ‘노래를 나만 알고 죽으면 어떡하니? 배우려는 놈도 없고 또 배우려는 놈이 있어도 목이 안되더라’고 하시면서 열심히 가르쳐 주셨어요. 한 일 년 배우고 나니까 어지간히 흉내낼 수 있데요. 그러자 그 어른이 신이 나서 자기가 다니는 사랑방에 데리고 다녔지요.”

그때는 방송이나 레코드판이나 무대공연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소리꾼들의 소리판은 주로 잔치집이나 사랑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살림이 조금 풍족한 사람들은 으레 집 안에 사랑채를 지어 놓고 한량들을 불러서 노는 풍류가 있었는데, 이문원은 이 사랑방 저 사랑방 떠돌아다니며 노래를 들려주면서 살아가던 노인이었습니다.

그를 따라다니면서 사랑방의 청중들에게 귀여움과 인기를 독차지한 어린 소녀는 그 뒤 최종식이라는 민요의 대가에게 민요를 배우러 찾아갔습니다.

“양어머니가 무조건하고 뒤를 대주시니까 좋은 선생님 찾아서 공부를 원없이 했지요. 최정식 선생님은 민요로 입신(立神)했다는 말을 들은 분인데, 노래도 잘하셨지만 작사나 작곡도 잘 하셔서 지금 많이들 부르고 있는 <풍등가>나 <금강산 타령>은 그 분이 만드신 노래로 크게 히트를 했어요.”

그렇게 꾸준히 공부하던 중에 드디어 방송 출현의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양어머니가 방송국에 청을 넣어서 출연하게 되었지요. 방송국 차가 집까지 와서 나를 데려가데요.
방송국에 들어 가 벌벌 떨면서 <유산가>와 <제비가>를 하는데 그저 또박또박 배운 대로 했지요. 그랬더니 방송국장 되시는 분이 기특하다고 하시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출연료로 3원인가 5원인가를 주셨어요.
방송국 차가 집에까지 바래다 줘서 어머니한테 달려갔더니, 어머니는 내가 과거 급제나 한 듯이 좋아하셨지요.”

그 뒤로 가끔씩 방송국에 출연할 기회가 생겨 본격적으로 방송 활동을 하고, 무대에도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회사원이던 김영배와 중매 결혼을 하고 아기를 갖게 되자 활동이 뜸해졌습니다.

또 그때는 일제 말기의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때라 세상이 뒤숭숭하고 노래할 곳도 없었습니다. 무대라야 기껏 전선 위문공연이나 탄광촌 공연이 대부분이라, 아예 집에 들어 앉아버렸습니다.

해방이 되자 그녀는 무대에 서는 것을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는 남편을 설득하여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무대에서 춤도 추고 연극도 하고 갖가지 재주를 부리는데 나는 통 그런 재주가 없어요. 그저 딱 서서 노래만 했지 손도 안올렸댔어요.
해방 전에 조선에서 제일 가는 명무라는 한성준 선생님에게 승무를 잠깐 배운 적이 있는데 저는 키도 작고 몸매도 잘 빠진 편이 아닌데다가 춤에 대해서는 워낙 둔재였나봐요. 하도 못배우니까 선생님도 재미없어 하시고 나도 별로 흥미가 없어서 포기해 버렸어요. 그때 이를 악물고 버텼더라면 조금은 나아졌을텐데 그냥 끊어버리니까 몸이 말을 안 들어요. 요새는 조금씩 손도 올리고 발림도 하지만, 예전에는 그저 나무토막이었다니깐요. 그래도 소리가 좋다고 청하는 곳이 많아서 쩔쩔 맸어요.”

그렇게 바쁘게 지내다가 6.25 동란을 맞아 간신히 살아남을 만큼 고생을 했습니다.

“피난을 못 가서 남아 있는데 동네에 좌익 사상을 가진 부인네가 찾아 오더니 여성 동맹회 예술단에 가입하라는 거예요. 남편이 지하운동했다는 여잔데 노래만 하면 먹고 사는 것 문제 없게 해줄 테니 나오라고 어찌나 성화를 대는지 그것 거절하느라 혼났어요.
겨우 거절해 놓으니까 이번에는 회의에라도 나오라고 하는 거예요. 안 나가면 주목 받으니 할 수 없이 아기를 업고 나갔는데 연설하고 박수 치고 하는데 골이 아파 죽겠대요.
그래서 꾀를 내어 아기 볼기를 꼬집었지요. 아기가 울자 시끄러우니까 나가라고 해요. 그래서 빠져나오곤 하다가 부산으로 피난을 갔지요.”

전쟁이 끝나고 피난에서 돌아오니 노래할 곳이 많이 생겨 바쁘게 다니는 틈틈이 레코드 판도 찍었습니다. 그때에 젊은 경기 명창으로 아름을 날리던 김옥심, 이은주와 함께 신세계 레코드에서 12잡가와 민요를 넣은 것을 시작으로 여러 장의 레코드에 소리를 ‘박았습니다.’



그녀의 노래를 들어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녀의 목소리가 평범한 듯 하면서도 구수하고 성량이 풍부하며 담백하고 깊은 맛이 있다고 평합니다.

이것은 그녀와 함께 12잡가의 보유자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은 이은주 명창의 곱고 맑은 목소리나 안비취 명창의 강하면서도 섬세한 목소리와 다른 맛을 풍기면서, 그녀의 독특한 개성으로 인정 받아오고 있습니다.

“나는 제자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밖에 안 해요. 우리 공부할 때는 책도 없이 선생님 입만 보고 배웠다가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복습하고 화장실에서도 연습하는 등 밤낮으로 열심히 했는데 요새는 그렇게 열심히들 안 해요.
그리고 몇 년 배워 가락을 어지간히 익힌 다음에도 계속 다듬고 연구해서 자기 것으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흉내 소리밖에 안돼요. 다이아몬드를 만들려면 돌을 깎고 다듬어서 기가 막힌 공을 들여야 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양어머니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명창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원없이 공부를 하고,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복된 가정을 꾸려 왔습니다. 말년에는 소박하고 덕스러움을 좋아하는 애호가들과 제자들 덕분에 90세가 된 지금까지 무대에 서며 행복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이대로 노래 부르다 죽으면 더 이상 원이 없겠다.”는 게 그녀의 남은 소망이니 그 소망은 충분히 이루어지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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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진주 검무>의 명인 성계옥 명무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동경잡기」에 전하는 '검무(劍舞)'의 유래는 매우 비장하고 전투적입니다.

“황창랑은 신라 소년으로 7세의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적국인 백제에 들어 가 칼춤으로 이름을 날렸다.
백제왕이 소문을 전해 듣고 그를 불러 검무를 보았는데, 황창랑이 기회가 왔다 하고 검무를 추다가 드디어 백제왕을 칼로 찔러 죽이고, 황창랑 또한 잡혀 죽었다.
신라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그의 용모와 닮은 가면을 만들어 쓰고 그의 춤을 모방하여 추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전하는 검무이다.”


이러한 사연을 담은 검무는 ‘전복(戰服)’을 입고, ‘전립(戰笠)’을 쓰고, 가면을 쓰고, 진짜 칼을 들고, 남성적인 활달한 춤을 추는 무사들에 의해 오랫동안 추어져 왔습니다.

장유경 무용단의 창작무용 <검무>. 출처 : http://snilbo.co.kr/search.html%3Fimage...o_search

그러다가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어느 틈엔지 기생들이 우아하고 아름답게 추는 춤으로 바뀌었는데, 어떤 사연으로 검무가 그렇게 변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궁중 검무 무희의 복장. 출처 : http://kr.blog.yahoo.com/joy7473/2

어쨌든 이러저러한 이유로 해서 검무는 민속무용의 형태로 남게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진주 검무>는 그 춤가락이나 칼 쓰는 법이 궁중에서 추어지던 검무의 원형을 가장 많이 닮고 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검무로 꼽히고 있습니다.

성계옥 명인은 이 <진주 검무>의 보유자이자 계승자였고, 후원자이고, 교사였습니다.
 
전통예술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가 만연한 땅에서 진주 검무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스승과 동료들과 제자들의 숨은 노력과, 그들을 한 끈으로 묶어 놓을 수 있었던 그녀의 희생과 열정과 통솔력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검무를 추는 성계옥 명인. 출처 : http://media.daum.net/cplist/view.html%...%3Dsegye

그러나 그녀가 진주 검무와 인연을 맺기까지에는 한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습니다. 1927년 4월 29일에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의 시골 마을에서 성갑주씨의 육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난 그녀는 영특하고 지혜로운 어린 소녀로 주위에서 귀여움과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대지주이자 유학자였던 그녀의 부친이 독립운동에 관련됐다는 혐의로 헌병대에 끌려 가 고문을 당한 뒤 신경쇠약증에 걸리자 온 집안이 수라장이 되고, 그 통에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그녀는 진학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춤추고 노래하는 개화학교에 딸을 보낸다고 반대했던 어머니도 그녀가 모든 면에서 우수한 학생임을 알고 자랑스러워 했고, “속이 맑고 영리한 아이라 남자로 태어났으면 큰일을 했을텐데”하고 대견스러워 하던 아버지도 학교에 진학 못시킨 것을 후회할 만큼 영특했던 그녀는 질질 짜고 우는 대신, 동경에서 보내오는 강의록을 스승 삼아 중등학교 과정을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19살에 동경 의전을 나온 김상식씨와 결혼한 뒤에도 공부를 계속해서 21살에 준교사 시험에 합격할 만큼 그녀의 향학열은 대단했습니다. 

이렇듯 엄격하고 학구적인 성품의 그녀는 어느 봄날, 엉뚱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결혼하고 일 년이 넘도록 신랑 얼굴도 마주 못 보고 밥 묵을 때도 신랑이 쳐다보마 부끄러버 밥이 안 넘어가는 새색씨였는데, 어느 봄날에 동네 여자들이 뒷산에 모여서 야유회를 하는데 내는 새댁이라 끼지도 몬했지.
여자들이 술 마시고 장구 치고 춤을 추면서 노는데, 내가 불을 때다가 부지깽이를 들고 뒷마당에서 그걸 잠깐 보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넋을 잃고 한창 바라보다가 그만 나도 모르게 춤을 따라 춘 기라.
내 평소 성격 상 도저히 허용이 안되는데 우째서 그랬는지 지금도 몰라. 그때 그걸 남편이 본 기라. 싱긋 웃더니 ‘그렇게 추고 싶으모 놀러가지’하는데 우째 부끄럽던지 얼굴이 화끈거리고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었제.”

선비의 딸이 체통머리없는 행동을 했다고 스스로 한동안 근신할 만큼 '단정한' 그녀였던지라, 그런 이성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본능적인 ‘끼’가 몸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그 ‘끼’를 용납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뒤로도 한참동안 단정한 가정 부인의 생활을 꾸려나갔습니다.

그러다가 26살이 되었을 때, 남편이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려다가 익사하는 슬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청천에 벽력이었제. 한동안 식음도 전폐하고 드러누워 있었는데, 그러다가는 시어머님과 애들이 굶게 안 생겼나. 마침 준교사 자격증이 있어서 초등학교 교편을 잡을 수 있었지.
교원 생활을 하던 중에 강기례씨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이는 진주 권번 출신으로 명무라. 자기집에 교습소를 차려놓고 춤을 가르쳤는데, 방학 때면 한달씩 가고 평소에는 시간나는 대로 가서 배우는데 춤만 추면 모든 고통이 싹 가셔지고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기라.
아마 내가 사주에 ‘천예(天藝)’가 들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우쨌든 그때부터 예술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제.”

강기례 명인에게 승무와 한량무를 배운 뒤 가야금 산조도 배우면서 차츰 예술의 맛을 알아갈 무렵, 또다시 그녀에게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지주의 집안이라 하여 재산을 몰수당하고 부친이 돌아가시는 통에 순식간에 몰락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친정 망하고 남편 잃고 전쟁의 고생살이가 겹쳐서 그녀는 폐결핵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삼 년 동안 주사를 맞고 약을 먹으며 약해진 몸을 악착같이 회복시킨 그녀는 자식들과 살아갈 길을 궁리한 끝에 시골에 남아 있던 논을 팔아서 진주 시내에 조그마한 밥집을 차렸습니다.

혼자서 백반도 만들고 비빔밥도 만들어 정갈하게 상을 차린 정성의 덕으로 차츰 손님이 많아져서 나중에는 “손님끼리 박치기를 해서 이마가 붓기도 할 만큼”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러자, 또다시 춤을 배우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장사를 하는 틈틈이 승무도 배우고, 살풀이춤도 배우고, 가야금 산조도 배우며 한을 풀어 나갔습니다.

그렇게 한 십 년쯤 지난 뒤에야 드디어 <진주 검무>와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마흔 살이 좀 넘었을 때인데, 하루는 진주 검무 보유자이던 김자진 선생이 찾아와서 검무가 문화재로 지정돼서 전수자를 기를라꼬 하는데 해보겠냐고 하는 기라.
두말없이 따라가서 남강 옆에 세워진 문화원에 다니면서 하루에 한 시간씩 배웠제.
검무 선생님으로 이윤례, 최예분, 이음전 이런 분들이 계셨는데, 그 분들이 추는 검무는 그 분들의 스승인 최순희 선생님에게서 배운 기라.“

최완자라고도 불리는 최순희 명인은 '진주 교방'의 동기였다가 13살 때 중앙의 '장악원'에 뽑혀 예술 교육을 받은 뒤, 궁중에 들어 가 고종 황제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25살 때 진주 교방으로 낙향하여 권번에서 진주 기생들의 필수 과목인 검무를 가르쳤습니다.

조선조 말의 유학자인 황현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진주 기생 산홍이가 검무를 잘 춘다는 소문을 듣고 내무대신 이시홍이 천금을 주고 산홍이를 사겠다고 하자, ‘비록 천한 기생의 몸이지만 오적의 두목에게 몸을 팔지 않겠다’고 말해 크게 노한 이시홍이 그녀를 때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걸로 보아 이미 진주에는 기생들에 의해 검무가 추어지고 있었는데, 그 유래를 논개의 죽음에서 찾는 이가 많습니다.

진주 기생 논개가 왜군 장수의 몸을 끌어 안고 의암이라는 바위에서 남강에 몸을 던져 빠져 죽자 그 순절을 기려 해마다 <의암별제>를 지냈는데, 그때 기생들이 검무를 춘 게 <진주 검무>의 효시라는 겁니다.

진주 검무의 공연 모습. 출처 : http://www.photowang.net/%3Fmid%3Dgalle...l%3D2310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따르면 “고려 신우왕 11년에 이담이 계림(경주)에서 검무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 세조와 성종 사이에 살았던 김종직의 시문집인 「점필재선생집(佔畢齋先生集)」에도 “경주에서 황창의 검무를 보았으며, 이것이 처용무와 함께 연희되었다.”는 글이 있고,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동학도들이 검가를 부르며 검무를 추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특히 경상도 지방에 오랫동안 검무가 전해져 온 것은 확실한 듯합니다.

“이 춤사위들을 배우는데, 처음에는 멋도 없고 힘들고 어렵기만 해. 그래도 참고 오래오래 배우다보니 점점 맛이 나는데, 오히려 빠르게 움직이는 때보다 느린 장단에 천천히 출 때 더 흥이 나. 속춤을 출 줄 모르면 손이 아파서 잠시도 손들고 못 서 있지. 정중동의 맛을 아는데 한 십 년이 걸렸어요.”

십년이 지나 이수자가 되니 문화원 살림살이를 맡아야할 책임과, 전수자를 교육해야 할 책임과, 일반인에게 보급해야 할 책임이 그녀에게 한꺼번에 지워졌습니다. 그녀는 곰곰 생각한 끝에 장사를 그만 두고 검무와 관련된 일에만 전력투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게다가 때마침 '진주민속예술보존회관 건립'이라는 어려운 숙제마저 떠안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무지막지한 싸움’ 끝에 '진주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이 세워져서 남의 무용학원을 전전하며 초라하게 지내던 신세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일을 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진주 검무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던 중, 옛날의 학구열이 되살아난 그녀는 쉰여섯 살의 만학도로 고려대학원 한문교육학과에 입학하여 2년 뒤에 기어코 졸업하고 말았습니다.

또 문헌을 조사하다가 <의암별제>를 지낼 때 제기처럼 술이 달린 공을 문에 던져 집어 넣는 놀이를 춤과 노래를 섞어서 하는 <포구락>이란 놀이가 연희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고, 이윤례 선생의 기억을 되살려서 포구락 춤을 발굴했습니다. 그 춤으로 1984년에 민속경연대회에서 장관상을 타낸 것은 그녀의 끈질긴 학구열과 집념의 결과입니다.

성계옥 명인의 학구적이고 단아한 모습. 출처 : http://otr.kr/play/view.htm%3Fsid%3D611...ide%3D03

그런 공로를 인정 받아 '진주민속예술보존회' 회장이 된 그녀는 매일같이 잡무에 시달리고 제자들 뒤치다꺼리하다가 문득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개인의 기능을 열심히 연마해서 명무가 되는 기 낫겠는가, 아니면 진주 검무를 위해 뒷일을 하는 기 낫겠는가 이리저리 따져 보았제.
그란데 이 작은 조직 안에서 시기, 질투, 싸움, 반목이 그칠 새가 없는데 이걸 뜯어고치는 기 내 사명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고마 회원들 '종년' 노릇 하자꼬 작정해 버렸제.”

그뒤로 더욱 자신을 돌보지 않고 회관과 회원들의 일에 매달리는 틈틈이 새벽 여섯시에 혼자 회관에 나가 춤을 연습했습니다.

“예능이 뛰어난 사람은 통솔력이 없고, 학벌있고 능력있는 사람은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서 화합이 잘 안돼요. 빨리 유능하고 통솔력있고 개인사보다 공적인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나와야 할텐데 걱정이라.”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 검무>의 예능보유자였던 운창 성계옥 명인은 이렇듯 사라져 가는 민족예술의 앞날을 걱정하시다가 2009년 1월에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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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세계소리측제 송년소리나눔 "광대의 노래" 공연을 지난 금요일(12월 4일) 밤에 마쳤습니다. 행사 준비와 마무리, 뒷풀이로 이어지는 강행군에 녹초가 되었다가 이제야 기운을 차리고 블로그 앞에 앉았습니다.
 
뜻밖에도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한국소리문화의전당' 2000석의 객석을 모두 채워주셨고, 공연 내내 뜨거운 박수와 추임새와 환성으로 출연진들과 하나가 되어 극장 안을 달구어 주셨습니다. 

공연이 끝나고도 많은 분들이 격려와 감사와 치하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시니 그동안의 노고와 피로가 싹가겨지는군요. 특히 근래에 이렇게 최고의 명인명창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연한 건 처음있는 일이라 눈과 귀가 호강했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특히 80세가 넘으신 이매방명인이나 김백봉 명인의 출연과, 93세의 이은관 명인의 공연에는 입을 쩍 벌리며 뜨거운 박수로 그 분들의 건재를 환영해 주었습니다.

공연을 위해 몸을 바쳐 열심히 뛰어준 소리축제 직원들과 무대의 스탭과 예술가들 모든 분들께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다른 공연 같으면 감상평을 써야 겠지만, 제가 공연 당사자인지라 저와 김태균씨가 공동으로 쓴 대본과 함께 공연 사진을 소개하는 것으로 공연 소개를 대신할까 합니다. 

이 대본에는 광대예술에 대한 저의 평소 생각이 녹아 들어 있답니다. 


 
2009 송년소리나눔 “광대의 노래”


열림의식


전북도립무용단의 열림무용.

축문

해동조선 대한민국 빛나는 땅 온고을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기축년 십이월 나흘 날, 천하광대 모두 모여 송년소리나눔 한판을 벌이는데, 바로 “광대의노래”라.

이 공연을 위해 전국 방방곡곡 명인명창 온고을로 모이고, 온고을 사람들 이 자리에 모여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이는 판이니 그 아니 장관이랴.

소리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광대의 혼 길이 기려 광대의 길 밝히려 함이니 동리 신재효 선생의 “광대가” 뜻을 이어 오늘 천하광대의 역사가 살아있으니 그 정성 그 뜻 어찌 아니 고마운가.

그 뜻을 이어 받아 소리로 풍류를 나누고 소리로 생명을 나누고 사람의 뜻을 밝혀 세계로 통하는 민족의 혼을 일으켜 세우는 신광대판을 열어 보자 함이라.

소리는 하늘에서 나는 것. 하늘의 뜻을 받아 땅에서 자라는 생명과 같으니 온 고을 온 세상 그런 소리를 나누면 평화가 넘치는 판이 절로 이루어지나니

온 고을의 생명 넘치는 판을 위해 여기 모인 지극정성 모두 모아 평화와 상생 위한 큰 판으로, 세계를 울리는 천하의 판으로 펼쳐지기를 소원하옵고,

여기 오신 모든 분들 가정에 사랑과 행복이 넘쳐나고, 새해에는 운수대통하고 만사형통하길 비옵고 또 비옵나이다.

무용단들과 함께 한 저의 축문 낭독 장면.

 

<서장> 부르자, 새생명 부활하는 광대의 노래를

<합창>

오 오라 천둥처럼
오 오라 벼락 치는 소리로
광대여 오라
광대여 오라
생명의 광대여 부활 광대여

앞산도 들썩 뒷산도 들썩인다
천하가 춤을 춘다.
천하강산 광대여 바람처럼 일어나
천둥소리로 오라.
벼락소리로 오라.

부르자, 새생명 부활하는 광대의 노래를
광대여 오라. 광대여 오라

여기는 소리가 생명으로 잉태하는 곳
여기는 소리가 세계를 살리는 판
산 광대 죽은 광대 모두 모여 살판을 만들어라

부르자, 광대의 노래를
온 고을에 퍼지는 온 세상의 소리
빛이 되어 퍼진다. 생명이 되어 퍼진다
대명천지 신명천지 광대판을 열어라

200여명이 넘는 경기도립국악단, 전북도립창극단, 익산 시립합창단, 대구그랜드에코오페라 합창단의 대합창 장면. 작곡 김대성님, 지휘 김재영님. 


<제1> 광대가

<사회>
우리 나라 광대 내력 풀어보면
단군 왕검 명을 받아 하늘의 뜻을 세상에 밝히고
국선 풍류 천하를 세우고 화랑정신 광대 정신으로 펼쳐지니
광대가를
들어보자
저 멀리 조선시대 전라북도 고창 사람 동리 신재효 선생
"광대가"
에서
말하기를

맛깔스러운 도창과 재담으로 공연을 재미있게 끌고 간 남상일 명창.

<합창>
인간의 부귀영화, 일장춘몽 가소롭다.
유유한 생사이별 뉘 아니 한탄하리.
거려천지(居廬天地) 우리 행락, 광대행세 좋을시고.
그러나 광대행세, 어렵고 또 어렵다.

광대라 하는 것이, 제일은 인물치레
둘째는 사설치레, 그 다음은 득음(得音)이요,
다음은 너름새라.

<사회>
렇지 광대라 하는 것 인물,사설,득음,너름새라 하였으니 그 내력을 곰곰이 따져 보는데, 이러한 내력을 천하명창 송순섭 명창, 김일구 명창, 조상현 명창...아구메 떨리는 거...떡 하니 등장하여 다음과 같이 논하더라 얼씨구 그 내력 한번 들어보자 얼씨구~

<송순섭 명창>
너름새라 하는 것은 구성지고 맵시있고, 경각에 천태만상,
위선위귀(爲仙爲鬼) 천변만화, 좌상의 풍류호걸
구경하는 남녀노소 울게 하고 웃게 하는,
이 구성 이 맵시가, 어찌 아니 어려우랴

                 송순섭 명창.

<김일구 명창>
이라 하는 것은, 오음(五音)을 분별하고,
육율(六律)을 변화하여, 오장에서 나는 소리,
농락하여 자아낼 제, 그도 또한 어렵구나.

김일구 명창.

<조상현 명창>
사설이라 하는 것은, 정금미옥(精金美玉) 좋은 말로
분명하고 완연하게, 색색이 금상첨화,
칠보단장 미부인이, 병풍 뒤에 나서는 듯,
삼오야 밝은 달이, 구름 밖에 나오는 듯,
눈 뜨고 웃게 하기, 대단히 어렵구나.

                 조상현 명창.

<합창>
인물은 천생이라 변통할 수 없거니와,
원원한 이 속판이, 소리 하는 법례로다

<판소리 합창>
영산초장(靈山初章) 다스름
은은한 청계수가
얼음
밑에 흐르
구슬러
내는 목이, 순풍에 배 노니는 듯,
차차로 돌리는 목, 봉회노전(峰回路轉) 기이하다.
도도와 올리는 목, 만장봉이 솟구듯,
툭툭 굴러 내리는 목, 폭포수가 솟치는듯,
장단고저 변화무궁, 이리 농락 저리 농락,
아니리 짜는 말이, 아리따운 제비말과 공교한 앵무소리,
중머리 중허리며, 허성(虛聲)이며 진양조를,
달아 두고 놓아두고, 거니다가 들치다가,
청청하게 도는 목이, 단산(丹山)에 봉의 울음
청원하게 뜨는 목이, 청천에 학의 울음
원성 흐르는 목, 황영(皇英)의 비파소리.
무수 농락변화(弄樂變化), 불시에 튀는 목이, 벽력이 부딪는 듯,
음아질타(音啞叱咤) 호령소리, 태산이 흔들흔들
어느덧 변화하여, 낙목한천 찬 바람이, 슬하게 부는 소리.
왕소군(王昭君)의 출새곡(出塞曲)과 척부인(戚夫人)의 황곡가(黃鵠歌)라.
좌상이 실색하고, 구경군이 낙루하니,
이러한 광대노릇, 그 아니 어려우랴.


<제2장> 오늘 광대, 광대 놀음

<사회>
이러한 광대노릇 그 아니 어려우랴 하였거늘, 세월을 탓하랴 세상을 탓하랴, 무심한 시절 탓에, 그 광대들 바람처럼 가버렸. 늙어늙어 가는 인생 어이타 부질없다 누구를 탓할소냐. 가고 오면 온다 기약 없이 무심한 세월 절로 가는구나 ~바람 바람 바람아 불어와라 신광대바람 들어와라 오늘 광대 여기 살아 새로운 길을 여니 어절씨구. 오늘광대 나가신다~ 광대 놀음 벌여보자~ 천하의 명인명창 다 모였으니 그 아니 별의 무대랴. 악기는 악기로 춤은 춤으로 소리는 소리로 놀아보니 산해진미 따로 없다. 장단 잡아 펼쳐 놓고 악기소리 졸졸졸 물처럼 흘러가고 즉흥 춤에 모아진 흥 바람타고 절로 난다. 좋~다.

즉흥에 즉흥이라 우리나라 최고의 명인모여 시나위 한자락 펼쳐보니 대금에 이생강 명인, 피리에 이종대 명인, 해금에 김영재 명인, 가야금에 임경주 명인, 거문고에 김무길 명인, 아쟁에 백대성 명인, 아이구 힘들어라 아이구 대단한 거...장고 허봉수 명인.징에 이호용 명인 대령이요.

시나위 명인들의 연주 장면.

아니 이번엔 무엇이뇨. 부채꽃이 피니 부채춤이로다. 한국 춤의 대모 김백봉 명무와 제자 안병현 명무의 부채춤이 펼쳐지는구나~
 
                 김백봉 명인의 부채춤.

다음은 승무인데 “얇은 사 하얀 고깔~ 고이 접어 나빌래라‘ 펼쳐지니 그 아니 아름다운 춤이라 하지 않으랴. 묵직한 대풍류에 얹어 승무 펼쳐지니 승무의 지존 이매방 명무와 최창덕 명무의 무대구나~

이매방 명인의 승무. 리허설 장면.


<합창>
소리로다 소리로다. 경기민요소리로다
소리로다 소리로다. 서도민요소리로다
민요란 무엇이냐
삶과 죽음이 함께 하는 한과 신명의 소리
민요란 무엇이냐
픙자와 해학이 있는 일과 놀이의 소리
어절시구 흥이 난다.

<사회>
슬퍼도 좋고 기뻐도 좋은 소리 민요로 나가보니. 경서도 명창들의 소리 판이로다. 경기는 얼씨구, 서도는 절씨구하니 경기민요는 이춘희명창, 이호연 명창, 이선영 명창이고 서도민요는 이은관 명창에 박성현, 김영빈, 전옥희 명창이로구나. 자 왔구나 왔나 아니 무엇이 왔나 경서도 소리가 왔구나 왔소이다.

왼쪽부터 이선영, 이춘희, 이호연 명창의 경기민요 공연.  노래가락, 청춘가, 창부타령.


93세의 이은관 명창과 제자들의 서도민요 공연 장면. 배뱅이굿, 신방아타령,농사타령--

<합창>
경기 서도 지나 남도로다. 호남가 한자락에 절로 멋이 드니.
부채를 높이 들어 소리 한 자락 메겨보니 두둥실 소리세상 펼쳐진다.
남도라 풍류고장, 판소리 광대 모두 모여 남도민요로 흥을 낸다.
흥흥흥 남도 신명타령이요.

<사회>
남도민요에는 판소리 명창 박송희 명창 조순애 명창, 성우향명창, 김영자 명창, 정순임 명창 대령이요.얼씨구 절씨구! 

왼쪽부터 김영자, 성우향, 박송희, 조순애, 정순임 명창의 남도민요. 육자배기, 잦은 육자배기, 삼산은 반락. 

<제3장> 신광대가 

<사회>
아따 뻑적지근 하구만 잉, 경기에 서도, 남도창에 춤까지 말여, 으메 그야말로 별일세 별이여, 별이 뜨니 세상도 밝아지고 우리 소리판도 밝아 지네요, 안 그럽니까? 자 그럼 옛 광대, 오늘 광대 보았으니 이제 신광대판 한판 벌여보니 바로 이렇더라

<합창>
옛 선생 이르기를
광대라 하는 것 그 아니 어려우랴하시거늘

광대란 하늘에서 나는 것
원원한 그 속판 타고 난대로
광대라 하는 것은 천지의 입이요
광대라 하는 것은 인간의 손발이라
광대소리는 사람으로 통하는 천지의 소리

찌그러지고 갈라진 세상
막히고 토라진 것들
갈아 업고 휘둘러치며
세상을 깨우친다.
그 광대 누구인가.

<사회>
자고로 광대는 소리로 사람을 살리고 소리로 세상을 개벽하는데, 세상을 살리는 소리. 그것이 광대의 소리인데. 풍류있고 사람과 생명을 위하고 민족을 일으켜 세우니 그것이 바로 바로 신광대. 신광대가 일어나 소리판을 펼쳐내면 세상이 뜰썩 들썩 얼씨구 신광대 내력 어디 한번 들어보자

<합창>
광대의 제일치레는 풍류. 천하를 조화하고 생동하게 하는 소리
그런 소리 어이 하리 광대 노릇 어찌 아니 새로우랴

<독창>
풍류라 하는 것은
하늘의 명을 받아 소리로 천하의 뜻 받드는 것
소리로 풍류에 들면 천지가 요동치니
하늘처럼 풍요롭고 바람처럼 변화롭고
햇살처럼 따스하고 물처럼 여울진다
소리로 푸는 풍류,아니 새로우랴

<합창>
광대의 다음치레는 생명, 세상 살리고 보듬어 주는 자연의 소리
그런 소리 어이 하리 광대 노릇 그 아니 새로우랴

<독창>
생명이라 하는 것은 자연의 뜻.
피고 지는 조화 속에 생명은 절로 피니
노래하라 생명을, 찬미하라 자연을
생명을 위하면 광대정신 절로 사니
소리로 푸는 생명, 그도 또한 어렵구나

<합창>
광대의 다음치레는 인간
생노병사 고달픈 인간의 삶을 풀어주는 소리
그런 소리 어이 하리 광대 노릇 그 아니 새로우랴

<독창>
인간이라 하는 것은 천하의 중심이
사람을 위하고 사람을 풀어주는 소리
삶과 죽음, 병들고 지친 사람들의 고된 삶을 소리로 풀어주니
광대는 그런 것, 그도 또한 어렵구나

<합창>
광대의 다음치레는 소리, 민족의 혼을 일깨운다.
쇠망치소리로 일깨운다 그런 소리 어이 하리 광대 노릇 그 아니 새로우랴

<독창>
소리라 하는 것 광대의 기상이니 천생의 그 소리로 득음을 이루나니
소리가 제일이면 천하강산 휘잡는다. 호랑이 기상으로 민족혼을 소리하니
광대소리 절로 민족의 혼 일깨운다.
신광대가 일어난다. 세상이 절로 살고 이 민족 절로 산다

<사회>
그렇지 신광대란 
그런 것이여. 신광대 일어나면 천하가 움직이니 신광대여 놀아라 저 세상 끝자락까지 쩌렁쩌렁 울려 퍼져라. 놀아라 광대여 얼씨구 새로운 생명 새로운 소리로 신광대판을 열어라


<종장> 광대여 일어나 천하를 움직여라

<합창>
놀아라 놀아 신광대여 헌 소리 주고 새소리 받아라
놀아라 놀아 신명나게 강강술래 강강술래
역사가 돌고 세계가 돈다 돌아라 돌아
우리 속에 세계가 있네. 우리 소리 민족의 소리 민족의 소리는 세계소리
열린다 열려 어서가자
광대여 일어나 천하를 움직여라
새로운 생명, 새로운 세상 동트게 하라
새로운 소리로 신광대판을 열어라
부르자, 새생명 부활하는 광대의 노래를
온세상을 소리로 연다
온 고을 빛나는 신광대판이로다
광대여 새날을 열어라 새소리를 열어라
역사의 숨결 몰아 거침없는 사자후로
민족의 혼을 깨워 세계를 호령하고
온누리 온세상 새소리로 누비어라


뒷풀이

모든 출연진과 관객이 함께 어울어져서 "진도 아리랑"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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