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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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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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만갑'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0.06.14
    나를 '광대'라 부르지 마라, 정광수 명창 (2)
  2. 2010.06.08
    오기로 버틴 판소리 외길, 한승호 명창 (7)
  3. 2010.05.31
    고집스럽고 튼튼한 땅의 소리, 강도근 명창 (6)
  4. 2010.05.23
    목은 꺾였어도 최고의 공력, 박봉술 명창 (6)
  5. 2010.05.08
    북에 미쳐 집안 망친 불효 인생, 김명환 명인 (10)
  6. 2009.08.26
    '쑥대머리' 임방울, 노전대통령 노제의 '추억' (28)
  7. 2009.05.11
    명창들은 정말 목에서 피를 토했을까? (20)

정광수 명창은 자신이 소리 광대로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안 친척들이나 친구들 앞에서도 여간해서는 판소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국악인의 최고 명예인 인간문화재가 되고, 광대가 전통예능인으로 우대 받는 세상에 살면서도 예전의 천대와 편견을 잊지 못했던 탓입니다.
 

출처 : http://www.ncktpa.go.kr/html/jsp/ncktpa...5A6%25AC

그러나 그가 1909년 7월 28일에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났을 때만 해도 판소리 광대가 되는 것은 천민의 신분을 벗어나 출세와 돈과 명예가 보장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잘만하면 임금 앞에서 소리도 하고 벼슬도 받을 수 있는 '화려한 직업'이었습니다.

그 역시도 그의 스승인 김창환 명창을 통해서 출세의 꿈을 키웠습니다.

“우리집이 나주군 봉산면 복룡리에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정창업 명창이시고, 아버님도 소리를 좋아하셔서 어려서부터 판소리를 즐겨 듣곤 했지. 17살 됐을 때에 아버님이 김창환 선생님 댁에 보내 거기서 먹고 자면서 배우게 됐지."
 
정광수 명창은 자신이 다산 정약용의 방계 7대손이고, 철종과 고종 연간에 어전광대로 활동한 서편소리의 대가 정창업 명창의 손자라는 것을 자랑으로 꼽습니다. 어려서 ‘천자문’과 ‘사략(史略)’을 뗀 뒤, 김창환 명창의 제자로 판소리의 길에 들어선 것도 그가 평생 자랑하는 일입니다.

김창환 명창은 고종 황제 앞에서 판소리를 하여 정3품의 명예벼슬인 당상관직을 받고 돈도 많이 번 뒤, 전남 나주군 삼도면 양화리의 절골이라는 곳에 넓은 터를 잡아 풍족한 말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풍신이 잘 생기시고, 행실이 분명하고, 효자시고, 인격이 갖추어진 분이셨어. 소리로 말하자면 송만갑 명창은 강한 상청으로 음이 높아 귀에 쟁쟁 울리고 정확하여 축음기에도 잘 받는 소리였는디, 우리 선생님은 음의 폭이 넓고 굵고 후령음이 무서웠지.
특히 우리 선생님은 늘상 인격을 강조하셔서 성악은 인간이 되어야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 그리고 고종 황제를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지 동네 뒷산에 사당을 지어서 그분 영정을 모셔놓고 날마다 올라갔다 내려 오셨어. 그 분 밑에서 5년쯤 배웠지.”

그러다가 어느덧 스물두세 살이 되어 ‘꽃기운’이 펄펄 살아나는 청춘이 되었습니다.

“내 자랑은 아니지만 그 무렵에는 풍신이 좋았어. 몸집이 두텁고 점잖고 또 예쁜 구석도 있어서 어른들이 귀여워했지. 그러니 나도 자연히 벌렁거리는 마음이 생겨. 남들이 하도 잘 생기고 소리 잘한다고 추어대니까 정말 그런 줄 알고 으스댔지. 그러다가 목포에 있는 권번에 성악 강사로 가게 됐지. 말하자면 첫 취직인 셈이여.”

목포 권번의 강사를 하며 지내는 동안, 재기발랄한 젊은 기생들 틈에서 잘 생기고 소리 잘하는 젊은 총각이 선생님 노릇을 하려니 그 속이 온전할 리가 없었습니다.

“안되겠어. 여자들 속에서 연애나 하고 공부는 못 허고 가르치기만 하니 실력이 줄어. 그리고 여자들이 어찌 극성스럽게 구는지 내 개인 시간을 온통 빼앗아 가고, 이 여자 저 여자가 나를 사이에 두고 싸움을 벌이는 통에 골치가 아파서 못 있겄어. 그래서 그만 두고 나와 삼성암이란 암자에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지.”

수많은 여성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암자에서 먹고 자면서 2년 동안 스승도 없이 그야말로 죽자사자 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무리한 연습으로 몸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암자 뒤에 있는 절벽에서 하루종일 소리를 지르면 목이 잠겨. 어찌나 목이 잠기는지 스님한테 밥 달라는 소리도 못혔어. 그래도 구슬땀을 흘리면서 소리를 지르면 소리가 살살 터져나와. 그 소리를 '지름상성'이라고 혀. 한없이 높은 소리가, 자기도 생전에 들어보지 못한 소리가 어디에선가 튀어나와. 그 소리에 미쳐. 제 소리에 제가 반해 가지고 아침부터 절벽 끝에 있는 석대에 올라가서 소리허고 점심 먹고 또 허고......
그러기를 일년쯤 하니까 소리는 좋아졌는디 몸에 이상이 왔어. 힘만 조금 쓰면 창자가 나올라고 혀. 탈장기가 생긴 거지. 겁 없이 무식하게 힘을 썼으니 뱃속이 온전할 리가 있을 거여. 그 후유증 때문에 많이 고생을 혔어.”

방법이야 어떻든 지독한 공부 덕분에 그의 소리 기량은 한껏 늘었고, 탈장도 치료가 되었습니다. 그는 순천 권번에서 성악 강사를 하다가 유성준 명창에게 더 공부를 하려고 진주로 갔습니다.

유성준 명창은 순천에 살던 장자백 명창의 제자로 소리제가 좋고 공력이 있어서 독특한 실력을 인정 받던 명창이었습니다. 특히 「수궁가」를 잘해서 많은 제자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전세방 하나 얻어 놓고 봄, 여름 동안 공부를 하는디 기초가 있어 놓으니까 번쩍번쩍 공부가 잘 돼. 그래서 <수궁가>, <적벽가>를 다 떼고 집에 돌아오는데 선생님이 정이 들어서 우시는 거여. 선생님뿐만 아니라 그 진주 권번의 수많은 기생 중에서도 우는 사람 많었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울린 그는 29살이 되었을 때, 드디어 서울로 올라와 ‘조선 성악 연구회’를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소리 실력을 인정 받아 바로 경성 방송국에 가서 녹음을 하고, 공부하면서 공연다니는 생활을 3,4년 하던 끝에 신의주에서 해방을 맞게 된 그는 본가가 있는 장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스무살 때에 장흥 사는 안삼차라는 장흥 사는 처녀에게 장가든 뒤로 소리 공부한다 소리 선생한다 하며 잠시도 집에 붙어 있질 않았지만, 아내는 군소리 한 마디 없이 살림을 꾸려 나갔습니다. 그 뒤 광주 권번에 일자리가 생기자, 아예 광주로 살림을 옮겨 그곳에서 3년쯤 지내다가 6.25전쟁을 맞았습니다.

"가족들 데리고 피난 다니느라 죽을 고생했지. 수복되고 다시 광주에 가서 가르치고 있다가 이듬해에 광주 국악원을 창립했고, 2년 뒤에 불화가 생겨서 민속예술원을 따로 만들어 강사 노릇을 했지. 그 일에 발목이 잡혀서 20년을 광주에서 살다보니, 이럭저럭 광주가 제2의 고향이 되고 말았어"

정든 광주에서 20년쯤 지내던 그는 결국 동료들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서울로 올라왔고, 1964년에는 판소리 「수궁가」의 인간문화재가 되었습니다.

“소리라는 것, 즉 음악에는 예의 체통이 있어. 칠정과 희로애락을 살리고 인의예지를 살리는 것이 소리니 함부로 곡조를 내두르고 허망히 하면 안될 것이여. 목성음으로만 듣기 좋게 흥얼거리고 놀기 좋게 불러도 안 되며, 법통과 격식에 맞게 정중히 해야 될 것이여.”

이렇듯 고상한 음악관을 가지게 된 탓에 그는 아무데서나 소리를 하지 않았고, 소리꾼으로서의 활동도 그리 활발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소리 광대 된 것을 부끄러워 하는 것은 아니여. 다만 세상에서 처신하며 살아가려니 꺼리는 게 많아서 그러는 거여. 내가 아무리 내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겨도 사람들이 안 알어주는디 어쩔 것이여. 그리서 난 누가 날 광대라고 부르는 걸 싫어혀. 집안이나 종친회에도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몰라.”

이처럼 광대들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이 사회의 뿌리깊은 편견에 정중한 처신으로 항거하며 지내던 그는 2003년 11월 2일, 판소리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재' 지정받기 닷새 전에 삶을 마무리했습니다. 

지금은 광대를 천대하는 일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서양의 광대들에 비해 초라한 대접을 받는 전통 광대들의 현실을 볼 때, 그의 항거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나름대로의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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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한승호 명창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판소리의 내용이 복잡하고 다양한 것과 같이 소리꾼의 재주도 가지가지입니다.

목청이 좋은 소리꾼이 있는가 하면, 목청은 안좋아도 음악적인 표현력 곧 '목구성'이 뛰어난 소리꾼이 있고, 전체 판의 구성을 잘 짜는 곧 소리를 '가지고 노는' 솜씨가 뛰어난 소리꾼도 있습니다. 한승호 명창은 그 중에서도 ‘가지고 노는’ 소리를 가장 높이 치는 명창이었습니다.

“소리꾼은 목만 좋아 가지고는 안돼야. 전술이 있어야 돼. 소리를 가지고 놀면서 새 것이 자꾸 나와야지. 지루하게 한 것 또 하고 또 하면 누가 들을라고 헐 것이여.”

소리를 '가지고 노는' 일은 어려서부터 판소리를 듣고 자라나, 판소리에 속속들이 통달한 대명창들에게 공부를 한 이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함부로 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출처 http://newslink.media.daum.net/news/20060628194005932

그가 1923년에 전라남도 광주시 금남로에서 한성태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 그의 부친은 근방에서 소리꾼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일반적인 소리꾼하고 다른 비밀이 있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동학 의병에 참가하신 뒤로 아버지도 의병에 가담하셨어. 그런디 한일합방이 되고 친구들은 모두 의병에 나가셨는디 아버지는 안 나가셨지.
왜냐하면 우리 아버님이 점잖고 선비 같은 분이신지라, 친구들이 자네는 투쟁헐 사람이 아니니 소리나 허고 가만이 앉아 있으소. 우리가 대신 싸울테니 하셨더래.
그래서 의병 명부에는 들었어도 의병 활동은 안 하시고 소리를 허시면서 생명을 보전혔는디, 그렇게 소리히서 번 돈을 몰래 서울에 가서 의병 친구들한티 주고 오셨대야. 말허자면 군자금 조달을 허신 거지.
가족들이야 그때는 그런 사실을 일체 몰랐지. 그러다가 내가 여덟살 때 돌아가셨는디, 마흔 살밖에 안되신 분이 하도 일본놈한티 불려가서 혼도 나고 분함을 많이 당해 골병 들어 돌아가신 거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광주 권번의 소리 선생이던 장판개 명창을 큰아버지라 부르며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그때에 명창들이 우리집에 자주 드나들었고, 아버님이 그 분들더러 형님이라고 불렀지. 또 아버님 처세가 점잖고, 의병 활동을 하는 줄 모두 알고 계셔서 속으로 모두 좋아하셨어. 그래서 그 분들에게서 조금씩 소리를 배우다가 장판개 선생님에게 친아들처럼 사랑을 받음서 공부를 했지.”

장판개 명창은 본래 땅재주를 넘다가 판소리로 길을 바꿨는데 북에도 일가를 이룬 명창이었습니다. 나라를 뺏긴 한이 맺혀 고향인 순창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광주 권번에서 초빙하여 소리 선생으로 온 터였습니다. 나중에 명창이 된 그의 아들 장영찬과 형님 아우하면서 소리 공부를 하던 그는 일 년쯤 공부를 한 뒤에 서울로 올라가서 조선성악연구회의 연구생이 되었습니다.

“낙원동 친척집에서 먹고 자면서 송만갑 선생님한티 배웠지. 그런디 이 분이 아버님한테도 스승이라 내가 걸음마할 때 나를 보셨다고 하시며 할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셔서 할아버지라고 불렀지.
이 분이 어찌나 귀여워 하시는지 다른 사람한테는 학채를 받는디 나한티는 안 받어. 안 받는 것은 고사허고 가끔씩 돈을 주셔. 밥 사먹으라고.”

그렇듯 사랑과 귀염을 받으며 소년 명창으로 자라난 그는 대명창들에게서 인자하면서도 엄격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특히 송만갑 명창은 나라 잃은 가객이 술 담배 먹고 방탕하면 안된다고 하며 제자들에게도 술 담배를 못 하게 했습니다. 송 명창은 체구는 조그마했으나 몸이 강철같이 튼튼해서 일흔이 넘도록 일선에서 활동하며, 후배들에게 두려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에게서 3,4년 간 공부를 한 뒤에 고향인 광주로 내려오니 광주의 애호가들이 서울 가서 배운 소리 한 번 해보라고 하는 통에 여기 저기 불려 다니며 소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소리를 듣고 난 노인들이 “대선생한테 배워서 소리는 좋은디, 소리를 참으로 헐라먼 김채만제를 배워야 허겄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김채만(1865~1911)은 이미 고인이 된 명창이라 본 적도 없고 소리조차 들은 적이 없었지만, 그의 소리제를 이어 받은 제자들이 몇몇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들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 소리는 선생님하테 배울 때보다 혼자 연구하며 제 길을 찾아갈 때가 제일 어려운 법이여. 그때는 누구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저 혼자서 깜깜한 산길을 가는 심정이었지.
나는 김채만 선생 제를 찾을라고 그 고생을 혔어. 근디 한 대목 두 대목 찾아서 해보니 정말 좋아. 진짜 깊은 소리맛을 아는 사람은 그 선생 소리를 안 좋아 할 수가 없어.”

김채만은 전라남도 능주에서 태어나 고종 때에 활약하다가 쉰 살 무렵에 세상을 떠난 명창입니다. 목청이 곱고 멋이 있고 고아하기로 당대에서 으뜸이었고, 장단이 변화무쌍하고 기묘한 성음으로 듣는 사람의 등짝에서 땀이 났다 추운기가 돌았다 눈물이 돌았다가 웃게 하는 재주가 다른 소리꾼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뛰어났다고 합니다.

“높은 음으로 올라갈 때는 낙락장송 높은 가지 끝끝터리 매달린 가지처럼 한없이 높은 공중에서 가지고 놀다가 뱅뱅 돌려서 탁 떨어뜨리면 귀머거리도 무릎을 친다는 소리였어. 그리고 성음, 장단, 선율에 통달을 해서 박자는 박자대로 달아 놓고 소리는 소리대로 가고......
여기다 갖다 놓고 저기다 갖다 놓아 소리를 벌려 놓은 다음에 기묘한 방법으로 몰아서 맺는 솜씨가 사람의 오장을 긁는단 말이여. 그리고 소리를 '통성(通聲)'으로 질러대는 것이 아니고 '암성(暗聲)'으로 막아서 올리고 '세성(細聲)'으로 가늘게 양념을 치는 기술이 뛰어 난 분이셨지.
그래서 노인들 말씀이 상청으로 위에서 가지고 노는 기술은 송만갑이 으뜸이고, 목청 크고 호령 잘하기로는 이동백이 으뜸이고, 사람의 오장육부를 갉아대기로는 김채만이 으뜸이라고들 하셨어.”

그는 스승에게 배운 소리를 연습하고, 또 새로운 소리를 찾아다니느라 여러 절을 떠돌아다니고, 어떤 때는 시골의 골방을 얻어 소리공부에 골몰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당시 판소리계 최고의 인기 스타였던 임방울 명창이 창극단을 꾸며 놓고 같이 활동하자고 “꼬이는 통에” 한동안 그와 함께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연을 했습니다.

“내가 소리를 배워서 여기 저기 불려다님서 푼돈 얻어 쓰고 포장 쳐 놓고 돈벌이 허는 거 안 좋아 허는디, 그때는 그거라도 안 허먼 극빈자들이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던 세상이라 할 수 없이 따라다녔지.
그리고 그때 극단을 움직이려면 반드시 '신민의례(臣民儀禮)', 요새로 말하자면 국민의례를 해야했어. 모두들 기립해서 동쪽을 향해서 절을 한 다음에 ‘고꼬꾸 신민노 가까이’ 어저고 하는 '황국 신민 서사'를 외워야 했어.
'나는 황국의 신민으로서 천황폐하께 충성을 하고' 어쩌고 하는 말이었는데 의병 활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분의 자식으로서 참 부끄러웠지.”

그러한 가운데 만주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때 만주 개척단 동포들이 보여 준 환호를 그는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그때에 유명한 유행가 가수였던 백년설, 장세정 이런 사람들하고 우리 국악단하고 같이 갔는디 개척단 제1단에는 전라도 광산군에 살다가 떠나 온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어.
근디 이 사람들이 유행가 할 때는 심드렁하다가 우리가 나가서 소리를 하니까 '얼씨구 절씨구' 춤을 추고 울고 불고 난리가 나버렸어. 마치고 나면 '또 해라!' 하는 통에 날을 새고 소리를 할 지경이었어.
제2단에는 경상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디 그곳에서도 어찌나 사람들이 열광을 하는지 데모가 날 지경이었응게.
그러자 우리를 데리고 온 일본 놈 단장이 ‘참으로 무서운 민족이다. 우리가 총 갖고 한국 사람 중국 사람 다 죽일 수는 있어도 저 정신은 도저히 죽일 수가 없다. 참으로 당신들 소리가 좋소. 내가 들어도 들을수록 좋소’ 하고 탄식을 허고 말았어. 그때 나도 국악이 얼마나 무서운 민족 정신을 가지고 있는가 확연히 깨달아버렸지.”

소리 광대로서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에 차츰 눈을 뜨게 됐을 무렵, 그에게 소집영장이 날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본놈들이 시작해 놓은 전쟁에 나가서 개죽음 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그 길로 ‘튀었습니다’.

광주에서 무등산을 넘어 능주로 튀고, 거기서 담양으로, 담양에서 다시 능주로 첩첩산중으로만 다니며 남의 집 헛간이나 쓰러져 가는 절방에서 고픈 배를 틀어잡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징병기피자의 고생을 몸서리 나게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광주 집으로 돌아오니 모두들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야단들이 났으나 그에게는 기쁨을 느낄 기운마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한참동안 집에서 쉰 뒤에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웠던 박동실 명창을 찾아갔습니다.

“저는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소리를 해야지.”
“소리 집어 치우고 농사나 짓고 싶어요.”
“그런 말 마라. 잘 살든 못 살든 이걸 배웠으니 이걸 버리면 안된다.”
"기운이 없어서 악쓸 힘도 없어요. 그리고 일본놈들한티 빌붙어서 소리허던 놈들이 해방이 됐다고 설치는 꼴도 보기 싫어요.“
“그렇다고 소리를 놓으면 되나. 어떻게든 꼭 소리를 하도록 해라.”

선생님의 간곡한 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다시 소리를 하겠다고 다짐은 했으나 속속들이 골병이 든 쇠잔한 몸 때문에 용기가 안난 그는 집에 돌아와서 조용히 소리를 닦아 나갔습니다. 소리꾼의 길에 들어 선 사람이 흥행무대를 외면하고 정통 판소리의 길을 지켜가려니 그 고생이야 뻔한 노릇이었습니다.

“한 번은 서울에 장영찬이를 만나러 갔다가 소리 좋아하는 부자가 내 소리를 듣고 싶어한다고 히서 갔지. 소리를 하고 났더니 탄복을 하고 광주서 뭐하냐고 묻대.
'공부해요.' 그랬더니 '벌이가 없을텐데 어떻게 공부를 하지요?' 그래. '밀가루 한 푸대 사다 놓고 수제비 끓여 먹고 공부해요.' 그랬더니 옷 한 벌 맞추고 밀가루 몇 푸대 사라고 돈을 주대.
그래 내가 화를 벌컥 내면서 '그런 소리 마시오. 내가 소리 들려주고 남한티 돈 몇 푼 구걸하는 사람으로 보이오? 그런 소리 말고 인연이 닿아서 만났으니 즐겁게 놀고 헤어집시다.' 그러고 나서 그 사람 하고 며칠 동안을 밤낮없이 놀고 내려왔어.”

그토록 오기가 세고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인기 얻는 일에나 돈 버는 일에는 성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판소리의 공력은 누구보다 깊어져서 웬만큼 실력 있는 명창도 그 앞에서는 함부로 소리를 하지 못할 만큼 실력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의 소리는 소리의 맛이 깊고, 가운데에서 밀어 올리는 소리가 멋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늘게 뽑아 올리는 소리에는 미묘한 가락이 나오고, 특히 입 안에서 돌려내는 아구성이 변화무쌍하고 옛맛을 가장 많이 지닌 명창으로 인정받습니다.



그 뒤 서울로 올라 온 그는 1980년에 판소리 「적벽가」의 인간문화재로 지정 받게 되었습니다.

“판소리 허는 것은 팔자속이여. 타고 나야 돼. 지가 지 소리에 반해가지고 죽자 사자 소리를 허면 득음이 되고, 꿈에도 바라던 소리가 목에서 튀어 나오면 부귀공명이 문제가 아니여.
그러게 옛날에 아편 하시던 어떤 분이 '나는 약으로 아편쟁이인데 너는 소리로 아편쟁이로구나' 하고 말하더군. 그만큼 미쳐야 돼. 그리고 소리꾼도 여러 가지여. 돈만 주면 아무디나 가서 소리허는 놈 있고, 배가 고파 굶어 죽어도 안 헐디서는 소리 안 허는 놈이 있어. 또 소리를 못 쓰게 허는 놈은 인간성도 안 좋고, 소리를 잘 허는 놈은 인간성부터가 돼먹었어.
제자들을 가르쳐봐도 이것으로 목매달고 배우는 놈이 없어. 전부 벼슬허고 돈 벌라고 허지. 인기가 없고 돈도 못 버는 판소리를 누가 헐라고 헐 것이여. 우리같이 미친 사람들이나 허지 다른 사람은 못 혀. 국악이 우리 대까지는 근근히 연명이 되었는디, 우리가 가고 나면 아마 끝나고 말 거여.”

이처럼 국악의 현실에 대해 매섭고 분노에 찬 말을 서슴없이 토해내던 그의 판소리에 대한 오기와 고집은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공감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올 1월에 돌아가신 그의 오기와 고집이 후학들의 가슴에 오래오래 살아 남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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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 땅이라고 하면 누구나 춘향이를 떠올리거나 판소리를 떠올릴 것입니다.

실제로 남원군은 국악의 본거지라 할 만큼 수많은 명인명창을 길러냈습니다.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에서 태어나 판소리의 중시조로 일컬어지며 ‘가왕’이란 칭호로써 판소리계 최고 명창으로 떠받들어지는 송흥록 명창,
그의 아들 송우룡 명창,
송우룡의 아들로써 일제시대 판소리계의 왕자로서 일세를 울리다 간 송만갑 명창,
남원군 수지면에서 태어나 송만갑과 함께 일제시대에 이름을 떨친 유성준 명창,
유성준과 송만갑의 제자인 김정문 명창,
남원시에서 1900년에 태어나 여자 명창으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 간 이화중선 명창과 그의 동생 이중선 명창,
운봉면 화수리에서 1915년에 태어나 최고의 여자 명창 중 한 명으로 활약했으며 저의 스승이기도 한 박초월 명창 등등.......


모두가 남원 땅에서 태어난 명창들입니다.

남원에 있는 광한루. 출처 : http://www.lsphoto.co.kr/%3Fdocument_srl%3D616

이밖에도 많은 명인명창들이 일제시대인 1921년에 광한루 안에 세워진 <남원권번>에서 판소리나 시조나 가야금이나 춤 등을 배우고 가르치며 활동했습니다.

남원권번은 그후 일본 경찰의 강압으로 광한루 밖으로 쫒겨 나 민가에서 국악교습소 노릇을 해오다가, 1977년 11월에 광한루 건너 요천 곁의 금암산 기슭에 아담한 한옥을 세워 <남원국악원>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새롭게 증축된 남원 <국립민속국악원> 출처 : http://korean.visitkorea.or.kr/kor/ti/e...6cat2%3D

강도근 명창은 1973년에 남원국악원 창악 강사로 자리를 잡은 뒤, 1996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오로지 이곳에서 제자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살아 온 남원 판소리계의 기둥입니다.

1918년에 남원시 향교동에서 강원종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농사일에 재미를 붙이며 열심히 땅을 가는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는 틈틈이 귀동냥으로 얻어 들은 농부가나 판소리 가락을 흥얼거리면 주위에서 ‘얼씨구 절씨구’ 하며 목이 좋고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그 재주를 썩히기 아까우니 정식으로 소리공부를 하라고 주위에서 자꾸 권하는 통에 17살이 되었을 무렵, 주천면에 살고 있던 김정문 명창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김정문 명창의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2년쯤 공부를 했습니다.

“한 2년 공부허다가 선생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어. 젊은 나이에 심장마빈가 뭔가로 돌아가셨어. 그래 집에 돌아와 있다가 20살쯤 되었을 때 서울에 올라가서 조선 성악 연구회에 갔지.
그곳에서 송만갑 선생님헌티 소리공부를 했지. 김정문 선생이 그 양반 제자였기 땜시로 나도 당연히 그 양반한티 배워야 헌다고 생각헌 거여. 그런디 그때 선생님이 일흔 일곱 살인가 되셨으니 몸이 불편하셔서 잘 안 나와. 그런디 공부헌지 얼마 안돼서 선생님이 또 돌아가셨어.
그래서 구레 사는 박만조씨가 수십 년 동안 송만갑 선생님허고 사귀면서 그 사설이나 가락을 알고 계시기 땜시 그분한티 찾아가서 조금 배우고, 전라도 광양 땅에 이진영씨가 송만갑 선생한티 공부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서 조금 배웠어. 아무튼지 죽어도 동편 소리가 좋다허고 동편만 찾었으니께.”

그가 그토록 애타게 찾은 동편 소리는 송흥록으로부터 시작해서 송우룡과 송만갑을 거쳐 내려오는 송씨 집안의 소리로 그들이 전라도의 동쪽 지방인 구례나 남원에서 살았기 때문에 ‘동편제’라고 불리는 소릿제입니다. ‘서편제’가 장단의 변화가 많고 섬세하고 기교가 풍부한데 견주어서, 동편제는 장단이 똑똑 떨어지고 웅장하고 단순 소박한 것을 특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열심으로 공부를 하는 판인디, 어느날 갑자기 목소리가 변했어. 장가 가기 전이라 전부터 나를 좋아하던 여자하고 딱 하룻밤 잤는디, 그 이튿날 소리를 해보닝께 뒤통수에 무거운 돌을 매단 것 같고 목이 갈려서 독아지 깨지는 소리가 나.”

여자하고 딱 하룻밤 잔 것 때문에 목이 상했다는 것은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남자 명창들이 젊었을 때 목이 상해서 고생한 경험을 얘기하는데, 그 원인이 거의 여자 아니면 술인 것으로 보아 젊은 시절에 정력을 함부로 낭비하는 것이 소리하는 데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남자는 사춘기를 벗어나면 어떻든 목이 갈려서 소리가 변하게 되어 있어. 그렇게 갈라져서 안 나오기가 십 년이 가. 그 재난을 이기고 뚫고 올라오지를 못해. 목이 안 나오니 생활은 안돼. 애는 터지고 부아가 나서 견딜 수가 없으니 술이나 퍼 먹고 좌절해 버려. 어렸을 때 명창 소리 들은 것 다 소용없고, 남들이 비웃기나 허고, 앞날은 암담허고.....나는 이십 년간 그 고생을 견뎠어. 없어진 소리를 되찾을라고 말도 못헐 고생을 혔지.”

그는 지리산 밑에 있는 쌍계사나 순천의 선암사나 남원산성 같은 곳에 가서 죽어라고 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전 같은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창극 단체에도 잠깐 몸을 담았는데 인기 있는 선배 명창들의 뒷바라지나 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울적한 세월을 2년쯤 보낸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버렸습니다. 그 뒤 해방이 되고서도 여기 저기 창극단에 끼어 공연을 하곤 했지만, 일만 끝나면 부지런히 공향에 내려오곤 했습니다.

“창극단을 따라 다니면서도 농사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어. 내가 본시 농사꾼이라 일허는 것이 좋아. 남들은 일허기 싫어서 소리헌답시고 건달처럼 지내는디 나는 밭에서 지게 지고 하루 종일 일허고 나면 몸이 개운허고 기분이 좋아. 그렁게 판소리허는 사람들도 모두 다 알아. 저 사람은 소리허는 것보다 농사를 더 좋아허는 사람이다 그렇게 알아 버려.”

이렇듯 생활에 튼튼한 뿌리를 내린 명창이기 때문에 그의 판소리는 건강한 생활에서 오는 소박함과 강인함이 특징입니다.

“나는 서울 사람들허고 판이 달러. 그 사람들은 창이면 창, 연극이면 연극으로 먹고 살아야것다 허고 나선 사람들이지만 나는 내 손으로 농사지어서 먹고 살어. 그것이 나는 좋아. 서울 사람들이 촌놈이라고 비웃어도 나는 오히려 그 사람들을 비웃네. 나는 돈을 싸줌서 서울서 살라고 혀도 못 살어. 그리고 서울 가면 사람이 버려. 옛날에도 멀쩡한 청년들이 소리헌다고 서울 가서는 게집질에 술에 아편에 몸버린 사람 많았어. 그러니 우리는 촌에서 농사 짓고 사는 게 마음 편하고 좋아.”

이렇듯 도도하게 땅을 지키며 소리를 다듬어 온 그는 차츰차츰 목소리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나이 마흔이 넘었을 때 비로소 고음과 저음을 마음대로 구사하고 몇 시간을 계속해서 소리해도 목소리가 변하지 않는 ‘득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약간 쉰 듯한 수리성인 그의 목소리는 가늘고 단단하며 고음이 강하고 튼튼합니다. 특히 그의 음질은 옛날 송만갑 명창의 음질을 많이 닮았고, 기교를 부리지 않고 통성으로 뽑아 냄으로써 동편제 소리의 특성을 가장 잘 전해 준다고 평가받습니다.

어쨌든 그는 서울 사는 소리꾼에게서는 보기 드문 고집과 힘을 지니고 있는 느낌을 주는데, 이는 오로지 돈과 출세와 인기와 명예를 멀리 떠난 그의 튼튼한 생활 덕분이라 하겠습니다.

“그 전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논에서 살았는디 나이가 등게 그것도 맘대로 안돼. 인제는 일허는 것이 힘이 들어. 거기다가 여기 국악원에 애들이 워낙 많어. 그애들 가르치다가 하루해가 다 가버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찾아 오는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그의 목은 하루도 쉴 날이 없었습니다.

국민학생에서부터 고등학생까지 하루에 쉰 명쯤 되는 제자들은 그의 덕으로 전국에서 벌어지는 학생 국악경연대회는 모조리 휩쓸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갖춘 ‘무서운 아이들’로 성장했습니다.

그동안 국악에 끼친 공로로 ‘한국국악협회 공로상’(1981), ‘남원시민의상 문화상’(1985), ‘KBS국악대상’(1986), ‘자랑스러운 전북인의 상 대상’(1988) 등을 수상하였으며 198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의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30여 년 동안에 수백 명의 문하생을 길러냈습니다. 안숙선, 오갑순, 성우향, 김정숙, 한농선, 홍성덕, 강정흥, 전인삼 등 명창과 많은 국악인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습니다. 고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꼬박 학생과 마주 앉아 직접 북장단을 치면서 목청을 돋구고, 소리 하나하나를 일일이 교정해주었습니다

“서울서는 소리 가르치는디 5만 원도 받고 10만 원도 받는다고 허는디 그것 몹쓸 일이여. 소리공부 허는 학생치고 부잣집 애들이 없는디 누가 그렇게 많은 돈을 내고 공부를 허것어. 여그서도 국악원을 운영허느라고 7,8천 원씩 받고 있지만 소리는 돈 안 받고 가르쳐야 돼. 선생 먹고 살 것은 정부에서 보조해 주고, 제자들은 무료로 정성껏 길러내야 앞으로 국악이 발전허게 돼.”

앞으로 남원에서 명창이 나오게 된다면 이는 오로지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소리는 돈 안 받고 가르쳐야 된다고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를 하다가 돌아가신 고집스럽고 꿋꿋한 스승의 덕일 것입니다.

강도근 명창의 후계자 전인삼 명창. 출처 : http://www.postech.ac.kr/k/student/cult...ex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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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스피어에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목은 껶였어도 소릿길을 빛낸 박봉술 명창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새벽 3,4시, 옆에서 쿨쿨 잠을 자고 있는 어린 아들의 입에 아버지가 앵두사탕을 슬며시 넣어 주며 흔들어 깨웁니다.

“봉술아, 봉술아!”
“.....예!”
“잠이 깨냐?”
“예!”
“그럼 아버지 따라 해봐라. 둥둥둥 내 사랑 어허 둥둥 내 사랑----”
"둥둥둥 내 사랑 어허 둥둥 내 사랑"
 
소년은 어렴풋한 잠결에 앵두사탕을 빨아 먹으면서 아버지를 따라 판소리를 부릅니다. 자신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차세대 명창으로 승승장구하던 아들 박봉래가  33세의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뜨자, 박만조씨는 이제 막 10살을 넘은 막내 아들 봉술에게 자신이 직접 판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21년에 전라남도 구례군 용방면 중방리에서 박만조씨의 5형제 중 막내로 태어 난 박봉술 소년은 이렇듯 아버지의 판소리에 대한 집념 때문에 소리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한약방을 운영하던 그의 부친은 오래 전부터 판소리에 심취해 있었는데, 특히 송만갑 명창과 교분이 두터워서 그에게 판소리를 직접 배우기도 하고, 큰아들인 박봉래를 그의 제자로 집어넣어 소리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 꿈이 꺾이자, 형에게 판소리를 배우던 막내아들에게 당신의 꿈을 걸어보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동네 친구들과 놀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던 봉술 소년은 차츰 판소리에 재미를 붙여 낮에도 열심히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그 뒤 ‘꽃기운이 올라’ 소리에 힘도 생기고 소릿길에 눈이 뜨이자, 명창이 되어 일세를 울리려는 욕망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리하여 16
살에 서울로 상경한 봉술 소년은 드디어 <조선성악연구회>에서 꿈에도 그리던 송만갑 명창을 만나 그에게 소리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송만갑 명창은 구한말과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이 나라 방방곡곡에 이름을 드날린 최고의 명창입니다. 박봉술 명창의 회고에 따르면 ‘송 명창 사진만 보아도 오갈이 들어서 소리 못하는 명창이 많을’ 정도로 뛰어난 명창이었습니다.

“우리 선생이 소리만 허시면 그 자그마한 몸 어디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쇳소리 같은 '철성'이 몸으로 파고든단 말이여. 그러면 등골이 오싹오싹혀지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 있들 못허게 헌단 말여.
그리고 이 대목이 좋으면 저 대목이 좋고, 저 대목이 좋으면 이 대목이 좋고 해서 마디마디 소리가 좋고, 또 어떻게나 '상청'이 잘 나는지 상청을 질러대면 앵벌 날아가는 소리가 에--엥 에--엥 허고 나와서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단 말여.
거그다 또 같은 노래를 헐 때마다 달리 혀. 말하자면 즉흥적으로 작곡도 허고 편곡도 허는 거지. 그런디 그것이 또 이렇게 불러도 좋고 저렇게 불러도 좋아. 수만 번을 불러서 소리를 뚜르르 꿰고 있으니 그런 재주가 나오는 거지. 우리 선생님이 그만큼 공력이 좋았어.”

박봉술은 “나는 평생에 우리 송선생님 한 분한테만 소리를 배웠다”고 말할 만큼 송만갑 명창의 소릿제를 많이 물려받은 명창입니다.

송만갑 명창(좌)과 박봉술 명창(우). 출처 : http://news.d.paran.com/snews/newsview2...r%3D2009

그렇듯 소년 명창으로서 귀여움을 받으며 공부를 하고, 밤에는 ‘놀음’ 다녔습니다. 놀음이란 요샛말로 밤무대를 뛴다는 말인데 그때의 이름난 요정인 명월관, 식도원, 국일관과 같은 곳에 불려가서 판소리를 하면 어른 명창의 절반 값인 5원이 출연료인 ‘소리채’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1년쯤 지났을 때 갑자기 목이 ‘괄리기’ 시작했습니다.

변성기가 되어 목이 잘 쉬고 고음이 나지 않고 소리가 탁해지는 것을 목이 괄린다고 합니다. 그럴 때는 소리를 잠시 쉬거나 성대를 보살펴가며 연습해야 하는데, 조급한 마음에 
고향으로 내려 와 지리산의 쌍계사에서 백일 공부를 혼자 시작한 것이 평생의 탈이 되고 말았습니다. 너무 무리한 나머지 안타깝게도 목이 ‘꺾이고’ 만 것입니다.

예전과 같은 맑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탁한 음색으로 변하고, 고음은 꽉 잠겨서 나오지 않으니 
그는 울적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왓습니다. 그 다음 해에 타고 난 목청과 애간장을 녹이는 목구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임방울 명창을 따라 일본 순회공연에 참가했지만, 목이 꺾인 그는 보잘 것 없는 단역을 맡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석 달쯤 순회공연을 한 뒤에 다시 고향에 돌아 오기도 하는 동안 해방이 되고 창극단들이 ‘비온 뒤 대나무 순 열리 듯’ 자꾸자꾸 생겨 이 단체 저 단체 따라 다니며 재미있는 일도 많이 겪었고 고생도 ‘직사하게’ 했습니다.

그럭저럭 결혼도 하고 전라남도 순천시로 이사해서 살게 되었는데,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여순반란사건’을 겪게 되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4·3사태가 확산되자, 이승만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국군 제14연대를 급파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지창수·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민간인을 학살할 수 없다고 반발하며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친일파 처단'과 '조국통일' 등의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켜 일대 혼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번은 길을 가다가 반란군의 검문에 걸렸는데, 손을 내밀어보라고 해서 내밀었습니다. 그랬더니 느닷없이 뺨을 때리면서 “이거 개놈의 새끼 아니냐?”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손이 하얗고 못이 안 박혀 있으니 일 안 하고 놀고먹는 반동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저, 저는 소리 허는 사람입니다“
“소리가 뭐냐?”
“창이요.”
“창? 창이 뭐냐?”
“노래요.”
“노래? 그럼 노래 한번 해봐라”
"(두 손을 하늘로 올린 채 벌벌 떨면서) 둥둥둥 내 사랑 어허 둥둥 내 사랑.....”
“오, 그게 소리구나. 너 그럼 이승만 찬양하고 김일성 나쁘다고 노래 안 했냐?”
“아뇨. 나는 춘향가, 흥보가 이런 노래만 부르요.”
“그럼 우리 김일성 수령 동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봐라.”
“나는 그런 거 부를 줄 모르요. 그저 옛날 선생님한테 배운 노래만 겨우 부를 줄 아요.”

그 말을 들은 반란군은 허허 웃더니 공중에다 대고 총을 한 발 쏜 다음 어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도 당원들이 수시로 찾아 와서 공산당에 가입해서 소리로 활약하라고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섭고 싫어서 못 마시는 막걸리를 잔뜩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게 취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날은 편하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도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취한 척 하며 드러누워 버리곤 했습니다. 그 '술' 덕분에 어지러운 시절을 죽지 않고 간신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 뒤 순천에 국악원이 생기자 소리선생으로 지내면서 점차 술이 늘어갔습니다. 남모를 괴로움이 그를 점점 술꾼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소리를 안 알어줘. 바디는 좋고 공력은 있다고들 하지만 목이 꺾였응께 알어주는 사람이 드물어. 기껏 힘들여서 소리허고 나면 오천 원, 만 원씩 던져주니 오장이 상허고 울화가 나서 에잇 잡것, 나도 먹을 것이나 실컷 먹고 시간이나 때우자 허고 같이 앉어서 술을 먹어 버려”

이런 저런 울화가 쌓여 나중에는 ‘술이 봉 걸리 박’이란 별명까지 얻을 만큼 '술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한때는 공부에 정진하려고 술을 끊어보기도 했습니다.

“한 삼 년 끊어 봤제. 그런디 술을 안 먹고 조심을 혀봐도 별것이 없어. 영양실조만 걸려”

그래서 차라리 ‘영양가 있는’ 안주를 먹으면서 술을 마시는 게 몸에도 좋고 정신에도 좋을 것 같아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틈틈이 소리꾼으로서 활동을 하였지만 쟁쟁한 명창들의 그늘에 가려 그의 소리는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러다가는 평생의 공부가 죽도 밥도 안되겠다 싶어 '이를 갈고' 성공해보자고 결심한 끝에 1970년에 혼자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열심히
제자를 가르치고 공연 활동도 활발하게 한 보람이 있어 드디어 52살 되던 해인 1973년에 판소리 「적벽가」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판소리에서 무엇보다 '공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명창이었습니다.


'공력'이란 소리를 짜나가는 솜씨를 일컫는 말입니다. 목청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소리의 흐름과 가사 내용이 조화를 이루고, 가지고 나가는 소릿길에 무궁무진한 변화가 있고, 장단의 이음새가 자유자재하여 천변만화, 조화무궁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공력이 높다고 합니다. 제아무리 목청이 좋고 고음과 저음을 마음대로 구사하여도, 변화가 없이 무미건조하게 소리를 하면 공력이 없다고하여 높이 쳐주질 않습니다.

“옛날 명창들 소리를 들으면 가지고 나가다가 느닷없이 신기허고 묘헌 소리가 나온단 말여. 헌디 요즘은 그런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

그것도 그럴 것이 요즘은 문화재 전수에 지나치게 많은 비중이 주어져서 스승에게 배운 그대로 하지 않고 가사 하나 장단 하나만 바꾸어도 큰일 나는 줄로 알고 있으니, 개개인의 개성과 특성이 살아나지 않고 비슷비슷한 ‘복사 소리’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요즘 학자나 이론가들이 동편제니 서편제니 나누는디 나는 그런 거 안 따지네. 동편제는 무겁고 맺음새가 분명허고 서편제는 애원성이 많고 끝을 길게 끌고 허는 특징들이 있다고들 허지만, 그런 것들이 서로 오고가며 배우고 가르치고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은 뚜렷하게 구별 지을 특성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어. 괜스리 파벌만 생기고.
옛날에는 누구한테 배웠든지 간에 그 사람이 소리 잘 허먼 알아줬고 선생님한티 배운 것도 자기가 자꾸 고쳐감서 자기에 맞는 소리로 짰던 것이지 요새처럼 그렇게 빡빡허게 허들 안했어”

그의 소리를 처음 들어 보는 사람들은 안으로 꽉 잠겨서 탁한 음색이 나오고, 고음으로 올라갈 때는 가늘게 뽑는 가성인 ‘암성’으로 들릴 듯 말듯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왜 그를 명창이라고 하는지 의심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자꾸 듣게 되면, 저음인 ‘하성’의 웅장함과 걸걸함, 그리고 소리를 질질 끌거나 잔 멋을 부리지 않고 곧 ‘소리에 꼬리를 달지 않고’ 씩씩하고 꿋꿋하고 거뜬거뜬하게 몰고 나가는 남성다운 소릿길, 그리고 아기자기하고 변화무쌍하게 구사하는 장단의 변화, 들으면 들을수록 감칠맛이 나고 깊이 있고 무게 있는 그의 소리에 점점 끌려 들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의 소리가 나라에서 제일 공력이 많은 소리라고 감탄을 하게 됩니다.



비록 '목이 꺾여' 한세상을 울린 명창은 못 되고 말았지만 어느 명창보다 소리 연륜이 깊고 공력 높은 스승에게서 갈고 닦은 덕에 누구에게도 공력이 뒤떨어지지 않던 그는, 후학에 대한 안타까움을 남긴 채 1989년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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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미래의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스피어에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이니만치 부자 양반 출신으로 북에 미쳐서 집안을 망치고 '불효' 인생을 살면서도 고집스럽게 예술의 외길을 걷다 돌아가신 김명환 명인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고수 김명환 명인은 광대 집안 출신이 아닌 양반 집안 출신의 광대입니다.

그는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무창리에서 만석꾼 부자인 김용현의 막내 아들로 1913년에 태어났습니다. 옥과보통학교를 나오고 동경에 있는 고세이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는 부잣집 막내도련님으로 호사를 하며 살았을 뿐, 국악과는 전혀 인연을 맺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7살이 되었을 때 능주에 사는 조금안이란 색시와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처갓집에 놀러 갔다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일이 북을 배우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놀이판이 벌어졌는데 저마다 소리도 허고 북도 침서 노는디 나보고 북을 쳐보라고 헌단 말이여. 못 친다고 혔더니 바보 같은 사람이 북도 못치냐고 놀려먹드란 말여. 그리서 두고보자 내가 너희들보다 북을 잘 치고 말 것이다. 허고 선생을 찾아서 북을 배운 게 평생 이 길로 들어서게 되었어. 내 신세를 그르칠라고 그런 것이제. 공부나 착실히 했더라면 지금쯤 박사나 교수나 그런 것이 됐을틴디 그놈의 북에 미쳐 갖고 불효막심하게 이 모양 이 신세가 되고 말았어.”

불효막심한 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그는 그 길로 옥과에 살고 있던 장판개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장판개 선생은 얼굴이 살짝 얽었었는디 북으로나 소리로나 당대 명인이었어. 그때 마흔도 넘은 양반이 내가 가면 서방님 왔다고 존대를 깎듯이 하면서 북을 가르쳐 줬지. 나는 양반의 자식이고 자기는 광대니, 그때는 그 차이가 옛날 미국에서 백인하고 흑인 차이 나듯이 차이가 났응게. 그런디 치면 칠수록 북이 재미가 나. 그리서 어디에 유명한 선생이 있다 하면 몇 백리라도 찾아 가. 돈을 얼마든지 써서라도 배워와야 직성이 풀리지 안 그러면 몸이 근질거려서 못 견뎌.”

부잣집 서방님이었기에 가능했던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해서 그는 고흥의 오성삼, 곡성의 신찬문, 능주의 주봉현과 같은 이름 높은 고수들을 만나 북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소리는 혼자서 연습을 할 수 있지만 북은 소리 없이 혼자서 연습이 안 됩니다. 

소리꾼들을 따라다니면서 연습을 해야 하는데 이름난 소리꾼들은 초보 고수한테 여간해서 소리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음식 대접하고 돈을 주어 가면서 소리를 청하고 그 대가로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

20살이 되었을 때는 서울에 올라가 '조선 성악 연구소'에서 명창들의 소리판에 끼어 북가락을 익혔습니다.

“그것도 쉬운 일이 아녀. 아직 미숙한 솜씬디 누가 소리를 해줄라고 허간디? 그 덕에 돈이 많이 깨졌지. 어찌됐든 송만갑, 이동백 같은 대명창들의 북을 쳐 본 사람으로 지금껏 살아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이렇듯 저돌적으로 북에 매달린 탓에 서울 온 지 얼마 뒤에 북 잘 치는 부자 한량이 나타났다는 평판을 들었습니다.

“난 바둑도 못 두고 장기도 못 두고 화투도 못 허고 마작도 못혀. 돈 있는 집 자식들이 대개 술과 노름과 계집질에 가산을 탕진허는디 나는 오로지 북 때문에 탕진헌 사람이여. 내 평생에 죄라면 북 친다고 자식 노릇 못 허고 부모 노릇 못 허고 재산 다 날린 죄밖에 없네. 내가 죄인은 큰 죄인이지.”

북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그의 눈빛은 열정으로 빛났습니다. 그러나 고생담을 이야기할 때는 금새 슬픔에 가득찬 충혈된 눈빛으로 변하곤 했습니다.

“내가 스스로 북에 미쳐서 그 고생을 했으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지. 그래서 뼈저린 지난 날을 생각하면 가슴속에서 불이 일어나. 해방되고 마누라가 병으로 죽으면서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지.”

그 전부터도 가세는 기울고 있었지만 만석꾼이라 불리던 부잣집이라서 남보기에는 번듯했는데 해방이 되자 형이 친일파로 몰려 가산을 몰수 당하고 사방에서 핍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 여순 반란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조카가 반란군에 잡혀갔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큰아들이 월북하는 통에 한동안 고통을 당했습니다.

“다른 놈들은 친일하고도 잘만 사는디 우리 집안은 쑥밭이 되도록 당했어. 그래도 나는 북치고 노래부르는 거 밖에는 모르는 놈이라고 봐줘서 변은 안 당했어. 마누라 죽고, 조카 잡혀가고, 큰아들 북으로 가서 소식을 모르고, 가산은 다 날려서 파산선고를 해버리고, 수중에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살아 갈 길은 막막허고 미치것대. 그때 누가 아편을 허면 고통이 잊어진다고 그려. 그리서 아편을 시작혔지. 내가 그 아편 때느라고 고생헌 생각을 허면 지금도 치가 떨려.”

딸 둘을 여동생 집에 맡기고 이집 저집 떠돌아 다니며 돈을 얻어서 아편 주사 맞고 구걸하다시피 하며 살아가는 그를 보고 모두들 폐인이 됐다고 하며 멀리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튼지 예술이 훌륭해. 내가 살아난 것이 예술 덕분이여. 아편을 하고 남들이 나를 페인 취급하니까 내 속에서 오기가 생기더란 말여. 내가 이대로 죽어서는 안되지. 내가 알고 있는 북가락이 내가 죽으면 끝나는 것 아니냐. 어찌됐든 살아야겠다. 이렇게 독허게 마음을 먹고 딱 끊었지.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 내가 오죽 허면 몸을 칼로 북북 그어버렸겄어. 아편 생각이 날 때마다 이런 놈은 죽어야 된다고 칼로 그었어. 그 흉터 자국이 지금도 있어. 내가 지금도 광주에 가면 대접을 받네. 북 잘 치는 고수로서가 아니라 아편쟁이가 아편 끊고 장수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그 일로 대접을 받아. 다른 아편쟁이는 다 병 나서 죽었어. 그러니 내가 무서운 놈은 무서운 놈이여.”

무서운 오기로 아편을 끊은 뒤 그는 보성에 살던 정응민 명창 집에 몇 년 간 기거하면서 북을 치다가 쉰이 가까워 오는 나이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지방에서 떠돌아다니기만 하다가는 영영 잊혀버린 사람이 될 것 같아 어찌됐든 서울의 국악계에서 인정을 받을 결심이었습니다.

이집 저집 떠돌아다니며 어렵게 지내 던 중, 판소리와 가야금산조의 명인인 함동정월을 만나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썩은 나무토막도 불붙일 만큼’ 예술적 열정이 넘치는 성격이었던 그는 그녀의 음악성에 탄복하여 하루종일 북을 치며 가야금 산조를 연습시켰습니다. 예술을 통해 두 사람은 하나가 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곤궁한 현실 때문에 결국 두 사람의 만남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새까만 후배들이 ‘철조망’을 쳐 놓고 그를 받아들여 주지 않아 한동안은 국악계 주변을 서성거리며 지내야 했습니다.

“같은 광대 출신이 아니라 ‘한량북’이라며 무시를 했어. 참 설움 많이 받았고만. 그런디 돌아가신 박녹주 명창허고 김여란 명창이 내 북을 지지혔지. 내 북 아니면 소리헐 맛이 안 난다고 말여. 그때부터 뚫고 들어갔지.”

그처럼 남다른 고통과 남모르는 설움을 겪으면서 ‘뚫고 들어 간’ 북이기에 그의 북에는 다른 고수들의 북과 달리 매서운 기운이 서려 있습니다.

“국민학생 소리를 허면 북도 국민학생 북이 나오고 대학원생 소리를 허면 북도 대학원생 북이 나오는 법이여. 나는 대학원 북을 쳐야 것는디 국민학생 소리를 허면 북칠 기분이 나것능가? 나는 소리가 귀에 들어와야 추임새도 나와. 그래서 추임새를 여간해서 안했더니 소리꾼들이 싫어해. 그리서 안 좋아도 ‘좋다!’ 허고 추임새를 해 주지. 돈을 받아야 헝게. 그래도 속으로는 즐겁지가 않지. 어쨌든 북 치는 사람은 언제 적군이 쳐들어올지 모른다 허고 정신무장을 단단히 허고 적을 봐야 혀.”

소리꾼을 적으로 딱 정해놓고 북을 치는 그의 모습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몸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고, 소리꾼을 쏘아보는 그의 눈초리는 독수리 눈처럼 매서웁습니다.

마치 소리꾼하고 자기하고 둘만 있다는 듯이, 둘이서 생사를 건 한 판 싸움을 벌여 보자는 듯이 맹렬한 기세로 북을 칩니다. 그처럼 서슬이 시퍼런 북 앞에서는 아무나 소리를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와 죽이 맞는 소리꾼은 한정되어 있고, 그 역시 자기가 좋아하는 소리꾼의 북만 치려고 했습니다.

‘강한 자 한티는 적이 많은 법잉게 그런 것을 두려워허지는 않어. 다만 욕을 허는 만큼 실력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자가 나왔으면 좋겠어. 누가 나를 이겨 주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내가 무릎을 꿇고 배우지. 정말 좋은 소리 좀 들어 봤으면 좋겠어. 그런디 인제는 그런 소리 듣기는 틀렸어. 인제 판소리는 죽었어.“

그렇듯 딱 잘라 말하는 성격 때문에 인심 잃고 따돌림 받으며 사방팔방에서 비난의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내가 한동안 소리 평론가 노릇을 하는 통에 미움을 많이 받았지. 그래도 헐 말은 해야 되는 성질인디 어쩔 것인가? 예전 선생님들의 소리에 비하면 요새 소리는 소리라고 할 수도 없어. 내가 이런 말 허면 소리꾼들이 전부 나를 죽일라고 헐 것이지만 사실인디 어쩔 것이여. 북도 마찬가지여. 요즘 북치네 허는 사람치고 '음양(陰陽)' 알고 북치는 사람 하나도 없어. 북이란 것이 자세, 수법, 음양, 강약에 모두 법도와 이치가 있는 법인디 예전 선생님들은 그걸 맞게 쳤는디 지금은 그저 아무렇게나 치고는 다 명고수래. 이런 말을 자꾸 하고 사교술이 없어서 인심을 못 얻지만 그런 나를 왜 문화재시켜주나. 다 실력 때문이지.”

1978년에 판소리 고법문화재가 된 것이 오로지 실력 때문이었음을 주장하던 그의 실력 제일주의에는 실력 있는 사람의 자부심이 가득 배어 있었습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놈이지만 아직도 북만 잡으면 나도 모를 힘이 난단 말이여. 그래도 한 가지 걱정은 있어. 내가 이러다 죽어버리면 내 뱃속에 있는 가락도 함께 사라져버리는 것 아니냐? 장지 종이에 들기름 쩔 듯이 꽉 쩔어 있는 이 북가락을 어느 놈한티 전해주고 죽느냐? 요새는 이것이 한 가지 근심이여.”

그는 오로지 북가락을 이어 줄 제자 근심을 하다가 결국 그 근심을 풀지 못한 채 1989년에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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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판소리계 최고의 로맨티스트' 임방울 명창(1904년~1961년)을 소개하겠습니다.

임방울 명창은 을사보호 조약을 맺기 1년 전인 1904년에, 전남 광산군 수성마을에서 아버지 임경학씨와 어머니 김나주씨의 팔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세습 예술가 집안이었고, 본 이름은 승근인데 방울 같은 소리를 내며 크라고 방울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외삼촌이자 국창이라 불리던 서편제의 김창환 명창에게 기초를 닦았고, 자라면서 여러 명창들에게 배운 뒤, 15세 무렵에는 동편제의 유성준 명창에게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유성준 명창은 성질이 급하고 괴퍅해서 어린 임방울은 기다란 담뱃대로 머리통을 수도 없이 얻어 맞았다고 합니다. 같이 공부하던 여자애들을 맨발로 북 위에 한 시간씩 세워두기도 했다니, 제가 연기했던 「서편제」의 유봉보다 더 지독한 선생님이었나 봅니다.

임방울은 목소리가 맑고 청아하면서도 슬픈 느낌을 주고, 고음과 저음이 시원시원하게 터져나오고, 어떠한 경우에도 목이 쉬지 않을 정도로 좋은 성대를 타고 났습니다.

그런데 변성기를 맞아 소리가 마음대로 나오지 않자 골방에 틀어박혀 문을 걸어 잠그고 연습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이 무렵의 임방울 명창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그가 무덤가에서 하루종일 소리공부를 하는데 원하는 소리가 죽어도 안나오자 "마마(천연두)에 걸리면 목이 트인다는데 마마나 걸려라!"하고 소원을 빌었더니 과연 천연두에 걸려서 소리가 트이고, 그 대신 얼굴이 얽었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이처럼 소리 공부에 전력을 기울인 뒤, 그는 대명창이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스물을 갓 넘은 1925년 9월, '조선명창연주회'가 매일신보사 주최로 열렸습니다. 명창들의 노래를 듣기 위해 관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먼저 그의 외삼촌인 김창환 명창과 당대 최고의 명창인 송만갑 명창, 이동백 명창, 정정렬 명창들이 특별출연으로 무대에 올라 소리를 했습니다.

그뒤를 이어 무릎 위로 올라간 짧은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땅딸막한 키에, 약간 얽은 데다가 별로 잘생기지 않은 얼굴의 임방울이 무대에 나타났습니다. 초라한 행색의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판소리 「춘향가」 중 <옥중가(獄中歌)>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寂寞獄房) 찬 자리에
생각나는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이 노래는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힌 춘향이가 한양으로 떠나 간 이몽룡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목에 칼을 쓰고 산발한 머리가 마치 쑥대처럼 생겼고, 얼굴은 창백하게 귀신처럼 생겼다고  해서 '쑥대머리 귀신형용'이란 충격적인 가사로 노래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참혹한 지경에서도 일편단심 사랑하는 님을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이 너무도 절실하게 묘사된 명곡입니다. 오페라로 치면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이나 <공주는 잠 못 이루고>와 같은 대표적인 아리아인 것입니다.


뱃속에서 바로 소리를 뽑아서 내는 통성에 약간 쉰듯 칼칼하게 터져나오는 수리성을 섞어, 춘향이의 비통처절한 심정을 애절하게 토해내는 임방울의 판소리는 단박에 청중을 휘어잡았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춘향이의 심정이 절망적인 시대의 정서와 어울어지면서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습니다. 이 노래가 바로 불후의 명곡이 된 <쑥대머리>인 것입니다.


 
그 공연 이후 임방울은 하루 아침에 명창의 반열에 올랐고, 콜럼비아 레코드나 빅터 레코드나 OK 레코드와 같은 유명 음반사가 앞다투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의 출세작 <쑥대머리>가 실린 음반은 한반도와 만주와 일본까지 불티나게 팔려나가, 각 음반사마다 12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기록을 세웠습니다. 

그후 1930년 전국명창대회에서 장원의 영광을 차지한 임방울은 본격적인 소리꾼으로 나서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연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즈음, 광주의 기관장들이 환영파티를 열어 준 '송학원'이라는 요릿집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임방울이 소년시절에 광주의 부잣집에서 고용살이를 했는데, 그 집에 동갑내기의 아름다운 딸이 있었습니다. 소녀와 소년은 철부지의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소녀의 부모가 반대하는 통에 소년은 그 집을 떠나야 했고, 소녀는 어느 부잣집 아들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후 소녀의 결혼 생활은 실패로 끝났고, 광주에서 송학원이란 요릿집을 차리고 예명을 김산호주로 지은 소녀는 광주 유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여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날, 그 자리에서, 명창이 되어 돌아 온 임방울과 여주인 김산호주가 십여년도 훨씬 흐른 뒤에 해후를 한 겁니다. 그동안 서로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두 연인은 곧바로 불같은 사랑을 불태웠습니다.

임방울은 2년 간 송학원의 내실에 숨어 살며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습니다. 세상에서는 임방울이 잠적했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전속계약을 한 OK 레코드 회사에서는 그의 행방을 찾느라 혈안이 되었습니다. 

미색이 빼어났던 김산호주는 천하명창 임방울을 2년 동안 송학원의 내실에 숨겨 놓은 채, 사랑의 포로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임방울은 자신의 목소리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토록 기름졌던 목소리가 탁해지고, 고음이 마음대로 나오지 않고, 소리를 조금만 질러도 땀이 뻘뻘 나는 것이었습니다.

대경실색한 그는 어느 날, 산호주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지리산으로 떠나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그는 지리산 토굴에 숨어 살며 소리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임방울의 행방을 알지 못한 채, 미칠듯한 그리움과 슬픔에 빠진 산호주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천지사방을  수소문한 끝에 간신히 임방울의 행방을 알아 낸 산호주는 임방울이 소리공부를 하는 토굴 앞에서 만나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임방울은 끝내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깊은 절망에 빠져 집으로 돌아 온 산호주는 임방울을 애타게 그리다가 병이 깊어져, 마침내 30세도 안된 꽃 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산호주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임방울은 죽어가는 애인을 가슴에 껴안고 슬피 울며 즉석에서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습니다. 그것이 바로 <추억>이라는 노래입니다.


앞산도 첩첩허고
뒷산도 첩첩헌디

혼은 어디로 향하신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럇든가

그리쉽게 가럇거든

당초에 나오지를 말았거나
왔다가면 그저나 가지

노던 터에다 값진 이름을 두고가며
동무에게 정을 두고 가서

가시는 임을 하직코 가셨지만
세상에 있는 동무들은
백년을 통곡헌들

보러 올 줄을 어느 뉘가 알며
천하를 죄다 외고 다닌들

어느 곳에서 만나 보리오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전생에 무슨 함의로
이 세상에 알게 되어서

각도각골 방방곡곡 다니던 일을
곽 속에 들어서도 나는 못잊겄네

원명이 그뿐이었든가
이리 급작스리 황천객이 되얏는가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어데를 가고서 못오는가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을 보고지고



이 노래가 바로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울광장 '노제' 때 안숙선 명창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제가 판소리를 배우던 젊은 시절, 이 노래에 얽힌 비극적 사랑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여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오다가, 사랑하던 노전대통령을 떠나보내는 국민들의 마음을 이 노래에 실어 보내드렸던 것입니다.

이후 박초월 명창 등과 <동일 창극단>을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하며 최고의 명창으로 대중들을 울리고 웃기던 임방울 명창은 1961년 공연 도중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5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상 처음 국악예술인장으로 치러진 임방울 명창의 장례식에는 200여 명의 여류 명창들이 소복을 입고 길을 가며 상여소리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행렬 끝에 100여 명의 거지가 눈물을 흘리며 따라와 눈길을 끌었습니다. 공연 때마다 거지들은 무료로 관람시켰던 임방울 명창에 대한 추모의 표시였습니다.


10여세부터 여러 스승으로부터 '서편제'와 '동편제'를 모두 사사받아 자신의 고유한 가풍을 수립한 전설적 명창 임방울. 

민족사의 흐름에서 가장 불행했던 시기이자, 판소리 역사에서 가장 시련과 수난이 많았던 일제 침략기에 민초들의 한을 노래한 명창 임방울. 

김창환, 이동백, 송만갑 같은 선배 가객들처럼 조선시대의 벼슬 하나 지낸 바 없고, 후배 명창들처럼 인간문화재로 대접 한 번 받아보지 못한 불운한 시대의 진정한 광대 임방울. 

평생 양복 입기를 싫어하며 흰색 한복 두루마기를 즐겨 입고, 수많은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소외된 민초들의 아픔을 위로해주던 아름다운 가객 임방울.

공연 때 마이크 쓰기를 꺼려 했고, 입에 발린 공치사나 돈 받기를 외면했으며, 번돈은 불우한 이웃에게 아낌없이 써버려 유족에게 아무런 유산도 남기지 않은 풍류남아 임방울.

조선왕조가 저물어가는 때에 태어나 민족사의 혼란 속에서 유랑의 생애를 마친 임방울은 우리의 비극적 시대를 대표하는 명창이었습니다.


그의 출생지인 광주시 광산구 송정공원에 세워진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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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명창들에게는 '득음'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 전설 같은 일화들이 많이 전해 온다.  득음이란 '소리를 얻는 것' 곧 판소리가 필요로 하는 최고의 성악적 경지에 다다른다는 말이다. 

테너나 바리톤이나 베이스와 같이 음역에 맞추어 역할이 정해지는 오페라와 달리 판소리는 소리꾼 혼자서 최고의 고음에서부터 최저의 저음까지를 소화해야 한다.

또 <춘향가>나 <심청가> 같은 판소리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완창하기 위해서는 서너 시간에서 길게는 아홉 시간까지의 긴 시간 동안 성대를 쓰기 때문에 상상할 수 없을만큼 고된 수련을 필요로 한다. 

안숙선 명창의 열창하는 모습


예전에 판소리 공부를 하던 소리꾼들은 기생들에게 무용과 음악을 가르치던 사설 교육 기관인 권번이나, 명창 선생님이 사는 집을 오가며 기초 공부를 했다.

그 다음에 '독공'이라는 개인 훈련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주로 마을에서 떨어진 산속의 움막이나 절 같은 곳에서 소리 공부를 했다.

그러다보니 어떤 명창은 폭포수 아래에서 폭포소리를 이겨가며 수련을 했다든지, 어떤 명창은 토굴에서 북채 수백 개를 부러뜨려가며 수련을 했다는 등의 수많은 일화가 전해 온다.

일제시대에 판소리에 미친 정노식이란 학자가 입으로만 전해 오던 명창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음악 세계를 집대성해서 펴낸 <조선창극사>에는 그런 일화들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판소리사라 할 이 책은, 관극시(觀劇詩)를 비롯한 판소리와 연관된 한시(漢詩)들도 모아 놓았고, 판소리의 음악적 특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광대의 약전 및 그 예술>이라는 항목에서는 89명의 남녀 소릿광대와  고수 1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중에 일반인들이 궁금해하는 '전설(?)' 두 가지가 있다.  소리 공부를 할 때 '똥물을 먹는다'는 전설과, '목에서 피를 토한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나 역시 그 전설이 궁금해서 한창 소리 공부를 할 때 나의 스승이신 박초월 명창에게 여쭤봤다.

 나의 스승 박초월 명창의 소녀 시절 사진


그랬더니 첫 번 째 질문인 똥물에 대해서는 자신도 마셔본 적이 있다고 대답하셨다. 

난 얼굴을 찡그리며 "그 냄새 나는 것을 어떻게 마셔요?"하고 물었다. 박초월 명창은 웃으면서 "그걸 어떤 미친 놈이 그냥 마셔?" 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똥물 제조법'을 가르쳐 주셨다. 

똥물 제조법

1. 굵은 대나무 통 뚜꼉을 무명천으로 꼭꼭 감싼 다음,  변소간에 넣어 둔다.
2. 몇 개월 뒤  대나무 통을 꺼내면 천 사이로 스며 든 '맑은' 똥물이 가득 차 있게 된다.
3. 그 물을  뚝배기에 담아 펄펄 끓인다.(기생충 박멸 작전)
4. 물이 식으면 코를 한손으로 막은 다음 단숨에 마신다. 


왜 구린 냄새가 나는 똥물을 마셨을까? 

하루에 몇 시간 씩 매일같이 소리 연습을 하다 보면 누구나 성대가 붓고 열이 생겨서 목이 잠기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때 성대의 열을 내리고 잠긴 목을 틔워주는데 똥물이 효과가 있다는 민간의 속설이 전해져서 그 물을 마시는 것이다.

실제로 곤장을 맞아서 온 몸이 부은 사람이 똥물을 먹고 나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는 걸 보면, 몸의 독기를 빼고 부기를 내리고 열을 내리는데 똥물이 효과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박초월 명창은 자신도 어릴 때 몇 번 마셨고, 제자 중에도 마신 사람이 있지만 "그건 모두 약이 귀했던 옛날 얘기지 지금은 좋은 약이 많아져서 똥물 마시는 사람은 없다." 하셨다.


명창들은 정말 목에서 피를 토했나?

두 번 째 질문에 대해서는 '하하' 웃으시며 그건 좀 과장된 얘기라고 하셨다.

소리 공부를 하다보면 성대가 붓고, 염증이 생겨 목이 쉬는데 그걸 이기고 계속 소리를 지르다 보면 염증이 터져서 가래에 조금씩 피가 섞여 나오는 경우는 있어도 "피를 토한다는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고 있을 수도 없다"는 대답이었다.

마침 그 무렵에 모 방송국에서 송흥록이란 전설적인 명창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어 내보내고 있었는데, 절에서 혼자 노래 연습을 하다가 시뻘건 피를 입에서 울컥울컥 쏟아내는 장면이 있었다.

선생님과 함께 그 장면을 보던 중 "저 사람이 폐병에 걸렸나? 저게 무슨 일이냐?"하며 화를 내신 적이 있다. 작가나 연출이 피를 토한다는 전설에 대해 연구도 하지 않고 만든 엉터리 장면을 본 시청자들은 명창들이 모두 저렇게 한사발씩 피를 토하는 줄 알 거 아니냐는 걱정과 함께 말이다.

나 역시 소리 공부에 빠졌을 적에는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을 하기도 했고 목이 쉬어 고생도 많이 했지만, 똥물을 먹거나 피를 토한 적은 없었다.

또 내가 아는 주변의 명창들도 성대가 붓거나 염증이 생기고 조금씩 피가 섞여 나온 일로 고생을 하고 그걸 치료하기 위해 무던히 고생을 했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도, 울컥울컥 피를 토한 경험을 한 사람은 없었으니 전설은 전설로 남겨 놓을 일이다.  

그만큼 판소리 수련의 길은 멀고도 고통스러운 길이다. 그런 길을 걸어 명창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인간승리의 표본이다.


     전설적인 명창 송만갑(1865~1939).
     그는 74세의 생애 동안 오로지 판소리의 길에만 매진했던
     대명창이며, 판소리계의 가왕이라고 불리는 송흥록 명창의
     손자이기도 했다.


나는 그 멀고도 고통스러운 길을 가다가 중도 포기한 사람이기 때문에 꿋꿋이 그 길을 걸어 가는 명창들에게는 지금도 한없는 존경과 사랑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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