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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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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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10.10.29
    법정스님이 산속에서 ‘사철가’를 불렀다니 (12)
  2. 2010.05.31
    고집스럽고 튼튼한 땅의 소리, 강도근 명창 (6)
  3. 2010.05.23
    목은 꺾였어도 최고의 공력, 박봉술 명창 (6)
  4. 2010.05.18
    4대째 이어지는 외곬수 고집, 정권진 명창 (8)
  5. 2010.05.13
    '서편제'에 특별출연한 김무규 단소 명인 (11)
  6. 2010.04.24
    소릿길을 받쳐준 '고수' 한평생, 김득수 명인 (8)
  7. 2009.09.25
    내가 생각하는 판소리 이야기 (34)
  8. 2009.09.04
    「서편제」의 영감을 준「조선창극사」 (24)
  9. 2009.08.30
    지리산의 겨울, 판소리와의 기이한 인연. (23)
  10. 2009.08.26
    '쑥대머리' 임방울, 노전대통령 노제의 '추억' (28)
  11. 2009.08.18
    내가 만난 최고의 관객 DJ를 추모하며 (91)
  12. 2009.07.29
    이청준님, '당신의 천국'에서 잘 계신지요? (32)
  13. 2009.06.06
    '서편제'와 '동편제', 통합의 소리판이 그립다. (19)
  14. 2009.05.21
    나는 언제쯤 <서편제> 족쇄에서 벗어날까? (41)
  15. 2009.05.05
    장관 껍데기 훌훌 벗고 광대로 돌아와보니 (24)
  16. 2009.05.03
    50대 후반의 컴맹인 내가 블로거가 되다니 (49)

요즘 지방에 다닐 일이 많다보니 고속도로 휴게실의 할인서점에서 4,000원이나 5,000원에 좋은 책을 사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얼마 전에도 법정스님의 산문집 <오두막 편지>를 발견하곤 얼른 샀습니다. 하얀 책 표지에 까만 글씨, 붓선으로만 그려진 조촐한 공양 그릇 하나, 마치 스님의 편지 한묶음을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강원도 산골, 전기도 들지 않는 깊은 오두막에서 스님은 개울물을 길어다 밥을 해먹고 장작을 패서 불을 지피고 차를 달입니다. 그리고 예불하고 참선하는 틈틈이 책을 읽고 세상을 향해 편지를 썼습니다. 단순하고 충만한 삶을 산 스님이 순수한 정신과 영혼의 언어로 쓴 편지들은 시처럼 아름답습니다.


오두막의 일상을 그릴 때는 아름답고 서정적이며, 우리 사회에 쓴소리를 던질 때는 열정적이고 서슬이 퍼렇고 패기가 넘치며,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부드럽고 감성적인 어조로 우리의 가슴을 파고듭니다.
 

예불을 마치고 뜰에 나가 새벽달을 바라보았다. 중천에 떠있는 열여드레 달이 둘레에 무수한 별들을 거느리고 있다. 잎이 져버린 돌배나무 그림자가 수묵으로 그린 그림처럼 뜰 가에 번진다. 달빛이 그려 놓은 그림이라 나뭇가지들이 실체보다도 부드럽고 푸근하다.



스님은 이처럼 아름답고 소박한 오두막 생활을 통해 우리를 정화시킵니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속에 발을 담고 살아가는 우리의 눈을 자연과 우주로 넓혀 줍니다.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참된 인간의 모습을 일깨워 주는 엄하면서도 자애로운 스승의 모습이 글 속에 오롯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스님의 다른 면을 볼 수 있는 글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노래 부르는 스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별밤 아래서 나는 밤이 이슥하도록 노래를 불렀다. 곁에 들을 사람이 없으니 마음 놓고 18번, 19번을 죄다 쏟아 놓았다. 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즉흥적으로 작사, 작곡을 해서 부른다. 그날 있었던 일을 오페라 가수처럼 노래로 부르고 있으면 아주 즐거워진다. 반주는 시냇물 소리가 알아서 해준다......<뜰에 해바라기가 피었네> 중


이어서 스님이 ‘오두막이 들썩거리도록’ 창을 부르곤 했다는 대목에선 추임새가 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영화 <서편제>를 보고 나서 한때는 입버릇처럼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어제는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하구나....’로 시작되는 <사철가>를 불렀다. 한참을 부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슬퍼져서 목소리가 촉촉이 젖을 때도 있었다......



별빛 쏟아지는 산속의 암자에서 독경이나 염불이 아닌 유행가나 창을 목이 터져라 불러대며, 때론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스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저는 너무도 스님이 그리워졌습니다. 이런 줄 진작 알았으면 돌아가시기 전에 불원천리 찾아가서라도 스님과 마주 앉아 밤새도록 판소리를 부르다 올 걸 하는 생각에 눈시울이 젖어 들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아직도 법정스님의 글을 그리워 할까요? 바로 이런 스님의 인간적인 빛과 향기가 우리를 감동시키기 때문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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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 땅이라고 하면 누구나 춘향이를 떠올리거나 판소리를 떠올릴 것입니다.

실제로 남원군은 국악의 본거지라 할 만큼 수많은 명인명창을 길러냈습니다.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에서 태어나 판소리의 중시조로 일컬어지며 ‘가왕’이란 칭호로써 판소리계 최고 명창으로 떠받들어지는 송흥록 명창,
그의 아들 송우룡 명창,
송우룡의 아들로써 일제시대 판소리계의 왕자로서 일세를 울리다 간 송만갑 명창,
남원군 수지면에서 태어나 송만갑과 함께 일제시대에 이름을 떨친 유성준 명창,
유성준과 송만갑의 제자인 김정문 명창,
남원시에서 1900년에 태어나 여자 명창으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 간 이화중선 명창과 그의 동생 이중선 명창,
운봉면 화수리에서 1915년에 태어나 최고의 여자 명창 중 한 명으로 활약했으며 저의 스승이기도 한 박초월 명창 등등.......


모두가 남원 땅에서 태어난 명창들입니다.

남원에 있는 광한루. 출처 : http://www.lsphoto.co.kr/%3Fdocument_srl%3D616

이밖에도 많은 명인명창들이 일제시대인 1921년에 광한루 안에 세워진 <남원권번>에서 판소리나 시조나 가야금이나 춤 등을 배우고 가르치며 활동했습니다.

남원권번은 그후 일본 경찰의 강압으로 광한루 밖으로 쫒겨 나 민가에서 국악교습소 노릇을 해오다가, 1977년 11월에 광한루 건너 요천 곁의 금암산 기슭에 아담한 한옥을 세워 <남원국악원>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새롭게 증축된 남원 <국립민속국악원> 출처 : http://korean.visitkorea.or.kr/kor/ti/e...6cat2%3D

강도근 명창은 1973년에 남원국악원 창악 강사로 자리를 잡은 뒤, 1996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오로지 이곳에서 제자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살아 온 남원 판소리계의 기둥입니다.

1918년에 남원시 향교동에서 강원종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농사일에 재미를 붙이며 열심히 땅을 가는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는 틈틈이 귀동냥으로 얻어 들은 농부가나 판소리 가락을 흥얼거리면 주위에서 ‘얼씨구 절씨구’ 하며 목이 좋고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그 재주를 썩히기 아까우니 정식으로 소리공부를 하라고 주위에서 자꾸 권하는 통에 17살이 되었을 무렵, 주천면에 살고 있던 김정문 명창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김정문 명창의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2년쯤 공부를 했습니다.

“한 2년 공부허다가 선생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어. 젊은 나이에 심장마빈가 뭔가로 돌아가셨어. 그래 집에 돌아와 있다가 20살쯤 되었을 때 서울에 올라가서 조선 성악 연구회에 갔지.
그곳에서 송만갑 선생님헌티 소리공부를 했지. 김정문 선생이 그 양반 제자였기 땜시로 나도 당연히 그 양반한티 배워야 헌다고 생각헌 거여. 그런디 그때 선생님이 일흔 일곱 살인가 되셨으니 몸이 불편하셔서 잘 안 나와. 그런디 공부헌지 얼마 안돼서 선생님이 또 돌아가셨어.
그래서 구레 사는 박만조씨가 수십 년 동안 송만갑 선생님허고 사귀면서 그 사설이나 가락을 알고 계시기 땜시 그분한티 찾아가서 조금 배우고, 전라도 광양 땅에 이진영씨가 송만갑 선생한티 공부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서 조금 배웠어. 아무튼지 죽어도 동편 소리가 좋다허고 동편만 찾었으니께.”

그가 그토록 애타게 찾은 동편 소리는 송흥록으로부터 시작해서 송우룡과 송만갑을 거쳐 내려오는 송씨 집안의 소리로 그들이 전라도의 동쪽 지방인 구례나 남원에서 살았기 때문에 ‘동편제’라고 불리는 소릿제입니다. ‘서편제’가 장단의 변화가 많고 섬세하고 기교가 풍부한데 견주어서, 동편제는 장단이 똑똑 떨어지고 웅장하고 단순 소박한 것을 특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열심으로 공부를 하는 판인디, 어느날 갑자기 목소리가 변했어. 장가 가기 전이라 전부터 나를 좋아하던 여자하고 딱 하룻밤 잤는디, 그 이튿날 소리를 해보닝께 뒤통수에 무거운 돌을 매단 것 같고 목이 갈려서 독아지 깨지는 소리가 나.”

여자하고 딱 하룻밤 잔 것 때문에 목이 상했다는 것은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남자 명창들이 젊었을 때 목이 상해서 고생한 경험을 얘기하는데, 그 원인이 거의 여자 아니면 술인 것으로 보아 젊은 시절에 정력을 함부로 낭비하는 것이 소리하는 데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남자는 사춘기를 벗어나면 어떻든 목이 갈려서 소리가 변하게 되어 있어. 그렇게 갈라져서 안 나오기가 십 년이 가. 그 재난을 이기고 뚫고 올라오지를 못해. 목이 안 나오니 생활은 안돼. 애는 터지고 부아가 나서 견딜 수가 없으니 술이나 퍼 먹고 좌절해 버려. 어렸을 때 명창 소리 들은 것 다 소용없고, 남들이 비웃기나 허고, 앞날은 암담허고.....나는 이십 년간 그 고생을 견뎠어. 없어진 소리를 되찾을라고 말도 못헐 고생을 혔지.”

그는 지리산 밑에 있는 쌍계사나 순천의 선암사나 남원산성 같은 곳에 가서 죽어라고 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전 같은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창극 단체에도 잠깐 몸을 담았는데 인기 있는 선배 명창들의 뒷바라지나 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울적한 세월을 2년쯤 보낸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버렸습니다. 그 뒤 해방이 되고서도 여기 저기 창극단에 끼어 공연을 하곤 했지만, 일만 끝나면 부지런히 공향에 내려오곤 했습니다.

“창극단을 따라 다니면서도 농사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어. 내가 본시 농사꾼이라 일허는 것이 좋아. 남들은 일허기 싫어서 소리헌답시고 건달처럼 지내는디 나는 밭에서 지게 지고 하루 종일 일허고 나면 몸이 개운허고 기분이 좋아. 그렁게 판소리허는 사람들도 모두 다 알아. 저 사람은 소리허는 것보다 농사를 더 좋아허는 사람이다 그렇게 알아 버려.”

이렇듯 생활에 튼튼한 뿌리를 내린 명창이기 때문에 그의 판소리는 건강한 생활에서 오는 소박함과 강인함이 특징입니다.

“나는 서울 사람들허고 판이 달러. 그 사람들은 창이면 창, 연극이면 연극으로 먹고 살아야것다 허고 나선 사람들이지만 나는 내 손으로 농사지어서 먹고 살어. 그것이 나는 좋아. 서울 사람들이 촌놈이라고 비웃어도 나는 오히려 그 사람들을 비웃네. 나는 돈을 싸줌서 서울서 살라고 혀도 못 살어. 그리고 서울 가면 사람이 버려. 옛날에도 멀쩡한 청년들이 소리헌다고 서울 가서는 게집질에 술에 아편에 몸버린 사람 많았어. 그러니 우리는 촌에서 농사 짓고 사는 게 마음 편하고 좋아.”

이렇듯 도도하게 땅을 지키며 소리를 다듬어 온 그는 차츰차츰 목소리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나이 마흔이 넘었을 때 비로소 고음과 저음을 마음대로 구사하고 몇 시간을 계속해서 소리해도 목소리가 변하지 않는 ‘득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약간 쉰 듯한 수리성인 그의 목소리는 가늘고 단단하며 고음이 강하고 튼튼합니다. 특히 그의 음질은 옛날 송만갑 명창의 음질을 많이 닮았고, 기교를 부리지 않고 통성으로 뽑아 냄으로써 동편제 소리의 특성을 가장 잘 전해 준다고 평가받습니다.

어쨌든 그는 서울 사는 소리꾼에게서는 보기 드문 고집과 힘을 지니고 있는 느낌을 주는데, 이는 오로지 돈과 출세와 인기와 명예를 멀리 떠난 그의 튼튼한 생활 덕분이라 하겠습니다.

“그 전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논에서 살았는디 나이가 등게 그것도 맘대로 안돼. 인제는 일허는 것이 힘이 들어. 거기다가 여기 국악원에 애들이 워낙 많어. 그애들 가르치다가 하루해가 다 가버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찾아 오는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그의 목은 하루도 쉴 날이 없었습니다.

국민학생에서부터 고등학생까지 하루에 쉰 명쯤 되는 제자들은 그의 덕으로 전국에서 벌어지는 학생 국악경연대회는 모조리 휩쓸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갖춘 ‘무서운 아이들’로 성장했습니다.

그동안 국악에 끼친 공로로 ‘한국국악협회 공로상’(1981), ‘남원시민의상 문화상’(1985), ‘KBS국악대상’(1986), ‘자랑스러운 전북인의 상 대상’(1988) 등을 수상하였으며 198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의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30여 년 동안에 수백 명의 문하생을 길러냈습니다. 안숙선, 오갑순, 성우향, 김정숙, 한농선, 홍성덕, 강정흥, 전인삼 등 명창과 많은 국악인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습니다. 고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꼬박 학생과 마주 앉아 직접 북장단을 치면서 목청을 돋구고, 소리 하나하나를 일일이 교정해주었습니다

“서울서는 소리 가르치는디 5만 원도 받고 10만 원도 받는다고 허는디 그것 몹쓸 일이여. 소리공부 허는 학생치고 부잣집 애들이 없는디 누가 그렇게 많은 돈을 내고 공부를 허것어. 여그서도 국악원을 운영허느라고 7,8천 원씩 받고 있지만 소리는 돈 안 받고 가르쳐야 돼. 선생 먹고 살 것은 정부에서 보조해 주고, 제자들은 무료로 정성껏 길러내야 앞으로 국악이 발전허게 돼.”

앞으로 남원에서 명창이 나오게 된다면 이는 오로지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소리는 돈 안 받고 가르쳐야 된다고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를 하다가 돌아가신 고집스럽고 꿋꿋한 스승의 덕일 것입니다.

강도근 명창의 후계자 전인삼 명창. 출처 : http://www.postech.ac.kr/k/student/cult...ex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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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스피어에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목은 껶였어도 소릿길을 빛낸 박봉술 명창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새벽 3,4시, 옆에서 쿨쿨 잠을 자고 있는 어린 아들의 입에 아버지가 앵두사탕을 슬며시 넣어 주며 흔들어 깨웁니다.

“봉술아, 봉술아!”
“.....예!”
“잠이 깨냐?”
“예!”
“그럼 아버지 따라 해봐라. 둥둥둥 내 사랑 어허 둥둥 내 사랑----”
"둥둥둥 내 사랑 어허 둥둥 내 사랑"
 
소년은 어렴풋한 잠결에 앵두사탕을 빨아 먹으면서 아버지를 따라 판소리를 부릅니다. 자신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차세대 명창으로 승승장구하던 아들 박봉래가  33세의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뜨자, 박만조씨는 이제 막 10살을 넘은 막내 아들 봉술에게 자신이 직접 판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21년에 전라남도 구례군 용방면 중방리에서 박만조씨의 5형제 중 막내로 태어 난 박봉술 소년은 이렇듯 아버지의 판소리에 대한 집념 때문에 소리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한약방을 운영하던 그의 부친은 오래 전부터 판소리에 심취해 있었는데, 특히 송만갑 명창과 교분이 두터워서 그에게 판소리를 직접 배우기도 하고, 큰아들인 박봉래를 그의 제자로 집어넣어 소리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 꿈이 꺾이자, 형에게 판소리를 배우던 막내아들에게 당신의 꿈을 걸어보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동네 친구들과 놀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던 봉술 소년은 차츰 판소리에 재미를 붙여 낮에도 열심히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그 뒤 ‘꽃기운이 올라’ 소리에 힘도 생기고 소릿길에 눈이 뜨이자, 명창이 되어 일세를 울리려는 욕망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리하여 16
살에 서울로 상경한 봉술 소년은 드디어 <조선성악연구회>에서 꿈에도 그리던 송만갑 명창을 만나 그에게 소리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송만갑 명창은 구한말과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이 나라 방방곡곡에 이름을 드날린 최고의 명창입니다. 박봉술 명창의 회고에 따르면 ‘송 명창 사진만 보아도 오갈이 들어서 소리 못하는 명창이 많을’ 정도로 뛰어난 명창이었습니다.

“우리 선생이 소리만 허시면 그 자그마한 몸 어디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쇳소리 같은 '철성'이 몸으로 파고든단 말이여. 그러면 등골이 오싹오싹혀지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 있들 못허게 헌단 말여.
그리고 이 대목이 좋으면 저 대목이 좋고, 저 대목이 좋으면 이 대목이 좋고 해서 마디마디 소리가 좋고, 또 어떻게나 '상청'이 잘 나는지 상청을 질러대면 앵벌 날아가는 소리가 에--엥 에--엥 허고 나와서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단 말여.
거그다 또 같은 노래를 헐 때마다 달리 혀. 말하자면 즉흥적으로 작곡도 허고 편곡도 허는 거지. 그런디 그것이 또 이렇게 불러도 좋고 저렇게 불러도 좋아. 수만 번을 불러서 소리를 뚜르르 꿰고 있으니 그런 재주가 나오는 거지. 우리 선생님이 그만큼 공력이 좋았어.”

박봉술은 “나는 평생에 우리 송선생님 한 분한테만 소리를 배웠다”고 말할 만큼 송만갑 명창의 소릿제를 많이 물려받은 명창입니다.

송만갑 명창(좌)과 박봉술 명창(우). 출처 : http://news.d.paran.com/snews/newsview2...r%3D2009

그렇듯 소년 명창으로서 귀여움을 받으며 공부를 하고, 밤에는 ‘놀음’ 다녔습니다. 놀음이란 요샛말로 밤무대를 뛴다는 말인데 그때의 이름난 요정인 명월관, 식도원, 국일관과 같은 곳에 불려가서 판소리를 하면 어른 명창의 절반 값인 5원이 출연료인 ‘소리채’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1년쯤 지났을 때 갑자기 목이 ‘괄리기’ 시작했습니다.

변성기가 되어 목이 잘 쉬고 고음이 나지 않고 소리가 탁해지는 것을 목이 괄린다고 합니다. 그럴 때는 소리를 잠시 쉬거나 성대를 보살펴가며 연습해야 하는데, 조급한 마음에 
고향으로 내려 와 지리산의 쌍계사에서 백일 공부를 혼자 시작한 것이 평생의 탈이 되고 말았습니다. 너무 무리한 나머지 안타깝게도 목이 ‘꺾이고’ 만 것입니다.

예전과 같은 맑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탁한 음색으로 변하고, 고음은 꽉 잠겨서 나오지 않으니 
그는 울적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왓습니다. 그 다음 해에 타고 난 목청과 애간장을 녹이는 목구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임방울 명창을 따라 일본 순회공연에 참가했지만, 목이 꺾인 그는 보잘 것 없는 단역을 맡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석 달쯤 순회공연을 한 뒤에 다시 고향에 돌아 오기도 하는 동안 해방이 되고 창극단들이 ‘비온 뒤 대나무 순 열리 듯’ 자꾸자꾸 생겨 이 단체 저 단체 따라 다니며 재미있는 일도 많이 겪었고 고생도 ‘직사하게’ 했습니다.

그럭저럭 결혼도 하고 전라남도 순천시로 이사해서 살게 되었는데,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여순반란사건’을 겪게 되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4·3사태가 확산되자, 이승만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국군 제14연대를 급파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지창수·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민간인을 학살할 수 없다고 반발하며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친일파 처단'과 '조국통일' 등의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켜 일대 혼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번은 길을 가다가 반란군의 검문에 걸렸는데, 손을 내밀어보라고 해서 내밀었습니다. 그랬더니 느닷없이 뺨을 때리면서 “이거 개놈의 새끼 아니냐?”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손이 하얗고 못이 안 박혀 있으니 일 안 하고 놀고먹는 반동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저, 저는 소리 허는 사람입니다“
“소리가 뭐냐?”
“창이요.”
“창? 창이 뭐냐?”
“노래요.”
“노래? 그럼 노래 한번 해봐라”
"(두 손을 하늘로 올린 채 벌벌 떨면서) 둥둥둥 내 사랑 어허 둥둥 내 사랑.....”
“오, 그게 소리구나. 너 그럼 이승만 찬양하고 김일성 나쁘다고 노래 안 했냐?”
“아뇨. 나는 춘향가, 흥보가 이런 노래만 부르요.”
“그럼 우리 김일성 수령 동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봐라.”
“나는 그런 거 부를 줄 모르요. 그저 옛날 선생님한테 배운 노래만 겨우 부를 줄 아요.”

그 말을 들은 반란군은 허허 웃더니 공중에다 대고 총을 한 발 쏜 다음 어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도 당원들이 수시로 찾아 와서 공산당에 가입해서 소리로 활약하라고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섭고 싫어서 못 마시는 막걸리를 잔뜩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게 취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날은 편하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도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취한 척 하며 드러누워 버리곤 했습니다. 그 '술' 덕분에 어지러운 시절을 죽지 않고 간신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 뒤 순천에 국악원이 생기자 소리선생으로 지내면서 점차 술이 늘어갔습니다. 남모를 괴로움이 그를 점점 술꾼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소리를 안 알어줘. 바디는 좋고 공력은 있다고들 하지만 목이 꺾였응께 알어주는 사람이 드물어. 기껏 힘들여서 소리허고 나면 오천 원, 만 원씩 던져주니 오장이 상허고 울화가 나서 에잇 잡것, 나도 먹을 것이나 실컷 먹고 시간이나 때우자 허고 같이 앉어서 술을 먹어 버려”

이런 저런 울화가 쌓여 나중에는 ‘술이 봉 걸리 박’이란 별명까지 얻을 만큼 '술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한때는 공부에 정진하려고 술을 끊어보기도 했습니다.

“한 삼 년 끊어 봤제. 그런디 술을 안 먹고 조심을 혀봐도 별것이 없어. 영양실조만 걸려”

그래서 차라리 ‘영양가 있는’ 안주를 먹으면서 술을 마시는 게 몸에도 좋고 정신에도 좋을 것 같아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틈틈이 소리꾼으로서 활동을 하였지만 쟁쟁한 명창들의 그늘에 가려 그의 소리는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러다가는 평생의 공부가 죽도 밥도 안되겠다 싶어 '이를 갈고' 성공해보자고 결심한 끝에 1970년에 혼자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열심히
제자를 가르치고 공연 활동도 활발하게 한 보람이 있어 드디어 52살 되던 해인 1973년에 판소리 「적벽가」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판소리에서 무엇보다 '공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명창이었습니다.


'공력'이란 소리를 짜나가는 솜씨를 일컫는 말입니다. 목청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소리의 흐름과 가사 내용이 조화를 이루고, 가지고 나가는 소릿길에 무궁무진한 변화가 있고, 장단의 이음새가 자유자재하여 천변만화, 조화무궁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공력이 높다고 합니다. 제아무리 목청이 좋고 고음과 저음을 마음대로 구사하여도, 변화가 없이 무미건조하게 소리를 하면 공력이 없다고하여 높이 쳐주질 않습니다.

“옛날 명창들 소리를 들으면 가지고 나가다가 느닷없이 신기허고 묘헌 소리가 나온단 말여. 헌디 요즘은 그런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

그것도 그럴 것이 요즘은 문화재 전수에 지나치게 많은 비중이 주어져서 스승에게 배운 그대로 하지 않고 가사 하나 장단 하나만 바꾸어도 큰일 나는 줄로 알고 있으니, 개개인의 개성과 특성이 살아나지 않고 비슷비슷한 ‘복사 소리’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요즘 학자나 이론가들이 동편제니 서편제니 나누는디 나는 그런 거 안 따지네. 동편제는 무겁고 맺음새가 분명허고 서편제는 애원성이 많고 끝을 길게 끌고 허는 특징들이 있다고들 허지만, 그런 것들이 서로 오고가며 배우고 가르치고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은 뚜렷하게 구별 지을 특성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어. 괜스리 파벌만 생기고.
옛날에는 누구한테 배웠든지 간에 그 사람이 소리 잘 허먼 알아줬고 선생님한티 배운 것도 자기가 자꾸 고쳐감서 자기에 맞는 소리로 짰던 것이지 요새처럼 그렇게 빡빡허게 허들 안했어”

그의 소리를 처음 들어 보는 사람들은 안으로 꽉 잠겨서 탁한 음색이 나오고, 고음으로 올라갈 때는 가늘게 뽑는 가성인 ‘암성’으로 들릴 듯 말듯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왜 그를 명창이라고 하는지 의심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자꾸 듣게 되면, 저음인 ‘하성’의 웅장함과 걸걸함, 그리고 소리를 질질 끌거나 잔 멋을 부리지 않고 곧 ‘소리에 꼬리를 달지 않고’ 씩씩하고 꿋꿋하고 거뜬거뜬하게 몰고 나가는 남성다운 소릿길, 그리고 아기자기하고 변화무쌍하게 구사하는 장단의 변화, 들으면 들을수록 감칠맛이 나고 깊이 있고 무게 있는 그의 소리에 점점 끌려 들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의 소리가 나라에서 제일 공력이 많은 소리라고 감탄을 하게 됩니다.



비록 '목이 꺾여' 한세상을 울린 명창은 못 되고 말았지만 어느 명창보다 소리 연륜이 깊고 공력 높은 스승에게서 갈고 닦은 덕에 누구에게도 공력이 뒤떨어지지 않던 그는, 후학에 대한 안타까움을 남긴 채 1989년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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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의 대표적 유파로 '동편제'와 '서편제'가 있습니다.

동편제는 섬진강의 동쪽 지방인 구례, 곡성, 남원 등에 전해 오던 소릿제로 송흥록- 송광록-송우룡- 송만갑 등으로 내려오는 '송씨 가문'의 판소리를 원조로 치죠. 이 소릿제가 최고의 세력을 뽐내며 인기상승 중이던 구한말, 섬진강의 서쪽 지방인 보성에 박유전 명창이 '혜성같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소릿제는 송씨 가문의 소리와 너무도 달랐지만, 인기가 하늘을 찌를만큼 높다보니 애호가와 제자들 사이에 서로 자기네 소리가 최고라는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라도 판소리가 '동편제', '서편제'로 갈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보성읍 대야리 강산마을 송정강 기슭에 있는 박유전 명창 예적비(오른쪽).
출처 :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l_no%3D2

박유전 명창은 1834년에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태어나, 전라남도 보성군 대야리 강산(岡山)마을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얼굴이 빡빡 얽고 눈이 하나밖에 없어 누가 봐도 못생긴 얼굴이었다는데, 그런 그가 판소리만 하면 그 못생긴 얼굴이 '꽃으로 보일만큼' 매력적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는 저음인 '하성(下聲)'이 장군 소리와 같이 우렁차고, 소리가 둥글둥글하여 거름진 땅과 같이 기름지고, 우조나 계면조와 같은 운율의 흐름이 뚜렷하고, 소리의 높낮음과 빠르고 느림과 맑고 탁함에 추호도 어긋남이 없이 정연한 소리를 했습니다.

그 무렵 수많은 판소리 광대의 최고 후원자였던 대원군은 특히 그의 소리를 좋아해서 "박유전의 소리가 강산(江山)에서 천하제일"이라고 추켜 세우곤 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그의 호를 박 명창의 고향마을 이름과 자신의 칭찬을 합쳐 '강산'이라고 지어줬답니다.

그래서 그의 소릿제를 '서편제'라고도 하고, '강산제(江山制, 岡山制)'라고도 하게 된 겁니다. 운현궁의 사랑채에 기거하며 대원군의 총애를 받던 그는 무과(武科)에 급제해서 선달 벼슬도 받고, 한쪽 눈을 가릴 수 있는 '오수경(둥그런 검은 안경)'과 '금토시(최고급 팔목가리개)'까지 하사 받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대원군의 지극한 총애를 받던 그는 민비에게 권력을 빼앗긴 대원군이 중국으로 망명하자 민비 일파의 보복을 피해 남으로 내려오다가, 전라남도 나주에서 정재근을 만나 그의 사랑채에 숨어 살게 되었습니다. 

정재근에게 판소리를 기르치면서 지내던 중, 대원군이 다시 득세를 하자 정재근의 일곱 살 난 조카 정응민도 함께 데리고 한양에 올라갔습니다. 어린 정응민은 운현궁 사랑채에서 판소리를 배우며,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고향에 한 번도 내려가지 않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대원군이 죽고 한일합방이 되자 박유전 명창은 “나라 잃은 가객이 살아서 뭐하느냐”라고 탄식하며 노래부르기를 그치고, 사골로 내려가서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음식을 전폐한 채 한 겨울에 굶어 죽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오기도 하는 '충성과 절개의 명창'입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정응민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리에 돌아 온 뒤, 광대로서의 활동을 중단한 채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나라 잃은 가객'에 대한 스승의 정신을 잊지 못한 그는 세상 출입을 끊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제자를 삼아 소리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정응민 명창 사진과 그를 기린 벽소 이영민의 시.
출처 :
http://www.pansoricenter.org/skin_104/5...ndex.php

정권진 명창은 바로 이 고집스런 '농사꾼 명창'인 정응민 명창의 외아들입니다. 

1927년 10월 15일에 태어난 어린 권진은 사랑채에서 들려오는 판소리에 남달리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서당에 다닐 무렵에는 아버지의 제자들이 부르는 웬만한 판소리는 따라서 흥얼거릴 수 있을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판소리 부르는 것을 엄하게 금지했습니다.

“명창이 되려면 수십 년을 공을 쌓아야 되는디, 그 공을 학문하는 데에 쓰면 몸도 편하고 훨씬 많은 일을 할텐디, 대우도 못 받고 고되기만 한 판소리를 허면 죽을란다”

이런 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판소리 근처만 빙빙 돌며 애를 태워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아버지의 친구들이 “언제까지나 일제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혼은 판소리밖에 없으니 독립되면 판소리가 빛을 볼 것이다. 아들도 애국자 만들려면 판소리를 가르쳐라” 하며 갖은 말로 권유하는 통에 간신히 허락이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열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에 부산 동래 권번에 소리선생으로 있던 아버지의 수제자 박기채에게 소리를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정응민 명창에게 소리를 배우던 제자로는 김연수, 정광수, 김준섭과 같은 쟁쟁한 소리꾼들이 있었는데 박기채는 그 중에서도 정응민이 가장 아끼던 제자였습니다.

부산에서 낮에는 양복점 점원 노릇을 하고, 밤에는 소리 공부하기를 4,5년쯤 하던 정권진은 열아홉살이 되던 해에 고향에서 장복순과 혼인을 했습니다. 혼
인한 지 한 달 만에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선언한 뒤, 강진에 있는 고성사라는 절에서 공부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내가 판소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 년 기한을 잡고 절에 독공을 하러 들어가니 만일 기다릴 수가 없다면 떠나도 좋소”

집과 절을 오가며 판소리 공부를 하는 동안 해방이 되고 6.25전쟁이 터졌지만, 아내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 이후로도 그의 아내는 군산이나 대구나 대전 국악원과 같은 곳에 창악 강사로 초청되어 떠돌아다니는 남편을 한결같이 기다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1962년에 국립 창극단이 설립되자 초창기 단원이 되어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창
극단에서 1년쯤 지낸 뒤, 창극단을 그만 두고 국악예술학교의 창악 강사로 근무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공연 활동도 계속한 그는 1964년에 「심청가」 인간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느 명창보다 가사 내용에 대한 이해가 밝고 판소리에 대한 이론이 정연한 명창이었습니다.

그것은 박유전의 강산제 판소리를 3대를 이어 수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유전 명창은 대원군과 교분을 맺으며 지내는 동안 많은 양반 선비들과 벼슬아치들을 만났을 것이고, 그들의 도움으로 가사 내용과 창악 이론에 안목을 높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강산제의 문파에 전해 내려오는 <광대론>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대명창이 되는 길은 '정심', '정음', '사채'에 달려 있다 하겠다.
'정심'이란 바르고 맑은 마음이니, 그 나라 음악을 듣고 그 나라 정치를 알아 볼 수 있듯이 가객의 소리를 듣고 가객의 인격을 알아 볼 수 있다. 심청가를 부르는 가객이 심청가를 청중에게 권하면서 자신이 불효를 하면 열기가 없는 죽은 소리요, 자신이 효를 행하면 생명감이 있고 기가 충만하고 진수가 담겨 참된 소리가 되는 법이니 소리 이전에 자신의 인격과 참다운 사람됨을 권하고자 한다. 
'정음'이란 소리를 엄격하게 성심것 하여 득음의 경지에 이르러야 된다는 말이고,
'사채'란 품위 단정한 동작 곧 너름새이니 사채가 무게 있고 민첩하고 발 하나를 떼어도 정중함이 있어야 하며, 사방으로 이유없이 활보한다든가, 쓸데없이 부채질을 자주 한다든가, 난잡한 태도를 보여 품격이 떨어지면 올바른 사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강산제 판소리의 사설은 고상하고 점잖은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육담이나 음담패설이나 욕설은 없애거나 극히 절제해서 사용하고, 인물 묘사도 우아하고 장중함을 그 기본으로 깔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적벽가」에 나오는 조조가 다른 명창들의 '적벽가'에는 간사하고 교활하게 그려져 있는데 반해, '강산제 적벽가'에는 위엄 있는 장수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와 함께 음악표현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슬픔을 강조한다든가, 무절제하게 웃음을 유발시킨다든가, 간사스러운 성음을 내는 것을 극히 싫어하여 대장부의 꿋꿋하고 웅장한 성음을 주장하고, 우조와 계면조와 같은 선율의 차이를 분명히 하며, 장단의 부침새가 정교하고 분명한 것을 좋아합니다.

이는 모두가 강산 박유전이 지녔던 소리의 장점이 모두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강산제 판소리의 '바른 마음'과 '바른 소리'와 '바른 몸가짐'에 대한 주장과, 그 소리의 대장부다운 기상과, 그 사설의 품위 있고 단정한 표현과, 그 장단의 정교하고 변화무쌍한 부침새는 다른 소리제가 따를 수 없는 품격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강산제 소리제의 후계자인 정권진 명창의 판소리에 대한 남다른 고집과 안목은 이 소리제를 올바로 전수하는 데에 단단한 받침목이 되었습니다.



“요새 소리 좀 한다는 후배나 제자들더러 공부를 더 하라고 허며 돈이 있어야 공부허네, 처 자식을 벌어 먹여야 공부허네, 뒷받침이 없네, 하며 갖은 핑계를 대는디, 그 모두가 구실에 지나지 않어. 오로지 일심으로 공부에만 전념허면 지금 인심으로도 후원자가 생겨나서 처자식 굶어죽게 안 만들어”

그는 무엇보다도 공부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명창입니다. 그래서 타고난 목청이나 재능만 가지고 한몫 벌어 보려고 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합니다. 자기 자신도 대성하지 못한 미숙한 소리꾼으로 여겼던 그는 소리꾼들이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강조 했습니다.

“잘 살고 배부르고 인기가 있으면 참다운 소리를 해치는 법이여. 학자가 배가 고파야 참다운 글을 쓰고, 정치가가 배가 고파야 참다운 정치를 하고, 병들어서 병원 생활을 해 봐야 환자의 괴로움을 알듯이 소리하는 사람도 고생을 하고 만고풍상을 겪은 뒤에야 겨우 뭔가 이루어지는 법이여.
판소리라는 게 전봇대와 같이 큰 뜻을 세우고 전력을 다해서 공부해 봤자 바늘 만큼밖에 이루어지지 못 허는 법인디, 하물며 놀고 마시고 각시질이나 하고 인기나 좇아 흘러다니다 보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는 법이지”

이는 그가 가난한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연마하여 깨달은 결론이기 때문에 몸으로 부딪쳐오는 진실함이 있습니다.

“옛적에 소리의 왕이라고 불렸던 명창 송흥록은 자기 소리를 알아주던 영의정 김병희가 죽으니 그를 따라 함흥에서 절사하시고, 강산 선생님도 자기 소리를 아끼던 대원군이 돌아가시자 그를 따라 순사하셨어.
이와 같이 참된 소리꾼은 부귀공명을 탐하지 않고 지조와 절개가 있었는데 요즈음은 돈만 주면 아무데나 가서 막 소리를 해대. 요즈음이 아니라 일제 때에도 권번 제도를 만들어가지고 기생방에서 소리를 하게 했어. 말하자면 민족예술을 화류계화시킨 거지.
예전에는 판소리에 삼강오륜이 있다 하여 명창들이 감찰이니 오위장이니 벼슬을 하며 정치의 도구로 쓰였는디 일제 때부터 놀고 먹고 ‘에야라 놀아라’ 식의 소리로 변한 거지. 그러니 소리꾼들의 생활도 무절제하고 방탕할 수밖에 없었지. 그러나 지금은 그러면 안돼. 지조와 절개를 가지고 민족혼을 일깨우는 사명을 소리꾼들이 짊어지고 나가야 돼.”

1986년에 세상을 뜬 그의 판소리에 대한 외곬수 고집을 정회천과 정회석 두 아들이 4대째 이어가고 있으니, '보성소리' 집안의 고집이 대단히 소중하고 값진 것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군요.


4대째 판소리를 이어가고 있는 정회석 명창. 출처 :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3D158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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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미래의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스피어에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저와의 인연으로 「서편제」에 특별출연한 김무규 명인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영화「서편제」
에서 여주인공인 송화가 눈이 먼 후, 제가 맡은 역인 아버지 유봉과 함께 호젓한 산길을 걷다가 어느 퇴락한 기와집에 잠시 머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집의 주인이 하얀 한복을 입고 정자에 앉아 거문고를 켜고, 유봉이 그 앞에서 구음을 부릅니다. 바로 그 장면에 나왔던 거문고 연주의 주인공이 김무규 명인입니다.


이 분은 저하고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병이 걸려 휴학을 하고 지리산 '상선암'이란 암자에서 잠시 휴양하고 지내던 겨울날입니다. 그해 여름에 판소리를 처음 듣고 한창 판소리에 열이 올라있던 제 귀에 구례에 산다는 '단소 명인'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암자에서 만난 친구 2명과 함께 지체없이 그 명인을 찾아 나섰습니다.

구례읍내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산길을 물어물어 걸어 간 끝에, '절골' 마을에 사는 김무규 명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멋지고 고풍스러운 기와집을 찾아가니
호리호리한 명인이 우리를 맞았습니다.

그는 꿀 한통을 드리며 단소를 배우러 왔다는 '산 청년'들에게 “이 어려운걸 뭐 하러 배우려 하느냐?”하시면서도 먼 길을 걸어 온 정성이 갸륵했던지 다음에 한번 찾아오라고 허락을 하셨습니다.

며칠 뒤에 다시 찾아가니 집 뒤에 있는 대나무 숲에서 대를 잘라 단소 세 자루를 만들어 놓으셨다가 선물로 주며, 단소 부는 법의 기초부터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명인에게 단소를 배우던 이 방에서 촬영한 <서편제>의 한 장면.

그 분은 제가 판소리에 관심이 있는 걸 아시고는 김소희 명창이 여름이면 제자들과 함께 자기 집에 연습을 하러 오기도 한다고 하시며, 명창들과 관련된 옛날 얘기를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아쉽게도 그 분에게 몇 번 밖에 단소를 배우지 못하고, 몇 달 뒤에 복학해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연은 끊어지지 않아 나중에 그 분의 이력을 소개하는 인터뷰 기사도 쓰고,  「서편제」를 통해 제가 반했던 기와집과 대숲이 멋지게 등장하고, 새하얀 한복을 입고 거문고를 치는 그 분의 모습도 영상에 담을 수 있었으니 기이한 인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김무규 명인은 광대 출신이 아니라, 양반 집안에다가 천석꾼 부자집의 도련님이었습니다. 

삼백 년쯤 전에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된 그의 선조는 근면하고 검소하여 점차로 재산을 늘렸는데 그의 고조할아버지인 김영국은 진사 벼슬을 받아 집안을 일으켰고, 증조할아버지도 진사 벼슬을 받아 양반 집안으로서의 가통을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천석꾼 소리를 들을 만큼 재산이 불어났고, 그의 아버지 김형석은 가문의 영예를 더욱 떨치려고 옛집을 헐어 버리고 풍취 있고 우아한 집을 새로 지었습니다.

그와 함께 풍류객들을 불러들여 사랑채나 행랑채에다 재우고 밥을 먹이고 대접을 후히 하며 풍류를 즐겼습니다. 그래서 그가 태어난 1908년 무렵의 그의 집에는 이름을 날리던 쟁쟁한 음악인들이 쉴새없이 드나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려서부터 그의 주위에서는 거문고, 단소, 판소리, 시조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는 음악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서 아버지가 가야금 배우는 것을 어깨 너머로 보고 금세 흉내내기도 하고 단소나 거문고도 몰래몰래 '만지작거렸'습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그에게 정식으로 스승을 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국악은 취미삼아 듣는 것이고 외아들인 그의 갈 길을 오로지 학문의 길로 정해져 있음은 온 집안이 잘 알고 있었고, 또 스스로도 국악인이 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학교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구례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 올라가 배제중학과 중동중학교에서 중등 과정을 마쳤습니다. 16살에는 구례군 광의면 월곡리에 사는 황묘숙이라는 두 살 위의 처녀에게 장가를 갔습니다. 황묘숙은 매천 황 현의 손녀입니다. 황현은 조선조 말기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 하니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절개 곧은 선비입니다.

매천 황현의 초상화.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00290148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과 바다도 통곡하네
무궁화 강산이 무너지고 말았으니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역사를 돌이켜보니
인간으로서 선비 노릇 하기가 참으로 어려웁구나

그는 처가 쪽의 항일 사상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집에서 틈틈이 한문 공부를 하기도 하며 지내다가, 26살이 되었을 때에 다시 서울에 올라와 성균관대학교의 전신인 명륜전문학교에서 중국 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 유학을 가서 제대로 한학을 공부하려던 그의 꿈은 선친이 눈병에 걸려서 앞을 못 보게 되는 통에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집에 내려와 쉬게 되었는데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된 데 서 오는 절망감 때문에 몸이 많이 약해졌고, 또 일본 사람들의 행패가 갈수록 심해지는 통에 바깥에 나가기도 싫고 해서 집안에 틀어박혀 실의와 우울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를 위로하기 위해 선친이 그에게 단소를 배워 보라 권하며 추산 전용선을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전용선은 전추산으로 더 알려진 단소의 명인으로 전라북도 고부 사람입니다. 1888년에 태어나 스무 살 무렵부터 단소를 배우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정악 단소를 익히고 다음에 단소 산조를 창안한 사람으로 196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단소로는 전무후무한 명인이라는 평을 듣는 사람입니다. 조금 과장해서 '날던 새도 멈추고, 울던 짐승도 울음을 그치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들도 귀를 기울여 듣는' 전설적인 명인이라고 합니다.

추산 전용선의 음반. 출처 :  http://www.gugakcd.pe.kr/music_detail.a...RCD-1362

그런데 몸도 약한데다가 성격도 급하고 까다로워서 여간해서는 제자를 가르치지 않고 또 가르치다가도 제자가 조금만 못 따라하면 화를 버럭 내고 때려치우고 마는 사람이었답니다.

그러한 그가 김무규만은 남달리 사랑하여 해방이 될 때까지 꼭 십 년 간을 그 집을 왕래하며 정성을 기울여 가락을 전해 주었습니다. 김무규도 어려서부터 음악에 젖어 있던 터인데다, 일제 말기의 암담한 시절을 뜻 둘 데 없이 불우하게 보내느니 음악에나 마음 붙이고 살아보자 하며 열심히 불었습니다.

단소는 '단소 소리가 제대로 나면 절반 공부는 마친 셈'이라고 할 만큼 제 소리 내기가 어려운 악기입니다. 그러나 제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상영산, 중영산 같은 가락을 배우기 시작하면 그 맑고 청아한 음색에 반해서 사정없이 빠져 들게 됩니다.

그 역시 한동안 단소에 미쳐서 <영산회상>, <청성곡>, <굿거리> 등 스승이 지닌 가락을 차근차근 배워 나갔습니다. 그러는 틈틈이 서울에 올라가 종로 수송동에 있던 정악 전습소에서 거문고, 가야금, 양금, 해적, 세피리와 어우러져 '줄 풍류' 즐기기도 하고, 단소 독주로 이름을 높이기도 하고, 거문고의 대가인 우당 김윤덕에게 거문고 가락을 전해 받기도 하고, 또 조선성악역수회에 놀러 가서 명고수인 한성준에게 북가락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의 단소 솜씨가 점점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면서부터 단소 연주자로 나설 기회도 많았고 유혹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요청을 모두 물리치고 시골집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평생 야인이 되어 밭이나 갈다가 늙어서 죽겠노라고 호까지 '백경(白耕)'으로 지은 터라 스스로 '피리 부는 광대' 행세하기 꺼려 해서 무대에서나 '노는' 자리에서 단소 부는 것을 삼가 왔습니다. 그는 울적한 심사를 단소나 거문고로 달래거나, 활터에 나가 활을 쏘거나, 조선어학회 회원이 되어 국어 공부와 역사 공부에 정신을 쏟기도 하며 일제의 어두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한 세월이 십 년이 흘러 해방이 되자 그는 구례중학교에 몸을 담고 국어와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십 년쯤 교직 생활을 하며 교장까지 하다가 자유당 말기에는 정치 바람이 들어 민의원에 나섰다가 빚만 몽땅 지고 가산을 탕진했습니다. 민주공화당 때에도 국회의원 하려다가 돈만 날렸습니다.

그런 데에 쏟은 노력에 견주어서 기대했던 결실은 너무 보잘것없이 나이만 예순이 가까워 오니 정치 바람 타서 쏘다닌 게 모두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는 자각과 함께,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단소를 추켜들고 잊어버린 가락을 다시 찾고 잃었던 '짐' 찾았습니다.

"단소 부는 데에는 짐이 첫째지, 입김 말이여. 이 짐이 좋아서 일점 때가 없이 맑은 소리가 쟁반에서 옥구슬이 굴러가듯이 흘러 나와야 되는 법이여."

그 '짐'을 찾은 덕에 1985년에는 구례향제 줄풍류 단소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습니다. 그후로 그는 매일같이 십 리 길을 걸어 읍내 문화원에 들러 향토지를 쓰고, 학교에서 단소를 가르치고, 때때로 활터인 봉덕정에 들러 활을 쏘며 지냈습니다. 

80년대 후반 무렵, 제가 잡지 <음악동아>의 요청으로 그를 다시 찾았을 때 그의 집은 흥청대던 옛 자취는 모두 사라지고 퇴색한 건물의 곳곳에 먼지가 올라앉고 기와 지붕과 뜨락의 돌 위에는 푸른 이끼가 끼어 있는 쓸쓸한 고옥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연주 한 곡을 부탁하자 그는 소나무가 바라다 보이는 대청마루에 오랜만에 단소를 손에 들고 나타났습니다. 세월을 느끼게 하는 누르스름하게 변색한 두루마기를 단정히 차려 입고 정좌한 그는, 단소를 입에 대고 몇 번 짐을 넣어 다스려 본 뒤에 즐겨 부는 곡인 <청성곡>을 불기 시작했습니다.

출처 : http://www.inilnet.com/bbs/zboard.php%3...o%3D1099

끊어질 듯 이어지다가 잔잔히 스러지고, 잦아지는 듯하다가 다시 처연하게 솟아올라 한없이 맑게 뻗어 나가다가 툭 떨어져 떨고, 다시 잔잔히 이어지는 가락의 변화에 귀를 기울이고 앉았노라니, 그 가락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고 어디선지 맑은 물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는 눈을 지긋이 내리감고 취한 듯 단소를 불고 있었고, 그러한 주인의 주름진 얼굴을 햇빛이 내려쪼이는 대청 마루 끝에 앉은 고양이 한 마리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집의 풍경과 그의 모습에 반한 저는 「서편제」를 찍던 1991년에 임권택 감독님에게 그 집을 소개했고, 그는 마지막 거문고 연주 모습을 영상에 남긴 채 199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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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명인명창에 대한 이야기를  띄엄띄엄 올렸는데 앞으로는 좀더 자주 전에 제가 발표했던 명인명창에 대한 글들을 손질해서 올려볼까 합니다. 그래서 '명인명창 이야기'라는 카테고리도 만들었습니다. 
아마 네티즌들에게는 생소한 분들이 많고, 내용도 그리 흥미롭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미래의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스피어에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 끝에 시작합니다. 오늘은 지난 번에 소개한 박동진 명창과 단짝이 되어 북 치는 '고수(鼓手)' 이름을 날린 김득수 명인입니다. 

“이 쌔려 죽일 놈아, 북 좀 잘 쳐라.”
“그렇지!”
“눈 구녁을 쑥 뺄 놈이 대답은 잘 허는구나.”
“암먼.”
“정신 똑바로 차려, 이 발꼬락을 지질 놈아.”
“좋다!”

누가 들으면 당장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멱살을 잡고 덤벼들 욕설에 고수가 “그렇지!”, “좋다!”, “얼씨구!", "암먼!” 하면서 넉살좋게 받아내는 일이 소리판에서는 곧잘 벌어집니다.

욕 잘 하고 음담패설 잘 하고 재담 잘 하는 소리꾼한테는 고수가 곧잘 재담의 희생물이 되는데, 어떤 고수는 소리꾼이 자기에게 욕을 하거나 재담으로 놀리는 것을 싫어하여 대꾸를 안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김득수 명인은 소리꾼과 재담을 나누는 것을 즐겨했던 고수입니다. 특히 그의 오랜 벗으로 평생을 소리판에서 함께 지내온 박동진 명창과 소리판을 벌일 때에는 두 사람의 호흡이 척척 맞아 떨어집니다.

“아이구, 저 놈이 발뒤꿈치에 감기가 걸려서 북을 잘 칠랑가 모르겠네.”
“소리만 잘혀 봐, 북이 저절로 쳐지지”
“오냐, 내 아들놈아”
“그렇지!”

이런 재담 덕분에 소리판은 생기가 넘치고 훨씬 재미있어집니다. 이것은 그가 재담을 꾸미고 받아넘기는 솜씨가 뛰어난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고수는 소리꾼을 받쳐주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예술관에 철저한 탓이기도 합니다. 

“북은 장단을 정확하게 짚어서 시끄럽지 않고 조용하게 소리를 받쳐주어야 하는 법이여. 차가 잘 다닐 수 있도록 길을 잘 닦아야하는 것 처럼 북이 장단과 추임새로 소릿길을 닦아 주어야 혀.
소리가 나가다가 구렁에 빠질라고 허면 얼씨구 하고 추어주어서 빨리 지나가게 허고, 슬플 때는 북가락도 줄이고 추임새로 슬프게 분위기를 맞춰서 넣어 주고, 소리가 웅장할 때에는 북소리도 크고 추임새도 크게 하게 하고, 바쁘게 주워 섬길 때는 또 그런 분위기를 내주어야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청중들이 즐거워하도록 분위기를 잡아 주는 것이 중요혀. 그래서 나는 기회만 있으면 소리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한테 소리를 잘하고 못 하고는 청중들한테 달렸다고 허지. 소리꾼이 소리 잘 하도록 실컷 추어주고 받쳐줘라. 그래서 일고수 이명창이 아니라 ‘일청중 이고수 삼명창’이란 말은 내가 만들어낸 말이여.”

위에 소개한 말의 앞부분은 「서편제」에서 유봉이 아들에게 북을 가르치면서 호통을 치는 대사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렇듯 그가 철저하게 소리꾼을 받쳐주는 고수의 역할을 주장하게 된 데에는 본래 북보다 소리를 먼저 배운 그의 경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에서 김행원의 7형제 중 다섯째 아들로 1917년 7월 17일에 태어났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취미로 말도 기르고 진돗개를 길러 사냥을 즐기던 그의 부친은 정초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북, 장고, 징, 꽹과리로 풍물을 칠 때에나, 모를 심으면서 상사 소리를 할 때에는 언제나 으뜸가는 북잽이로 나설 만큼 북춤 추는 솜씨가 뛰어났고 판소리 북도 곧잘 치던 멋쟁이였습니다. 게다가 그의 집 뒤에는 조선시대 음악인들의 모임 장소라 할 수 있는 '신청(神廳)'이 있어서 노래 소리와 악기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집안과 마을의 음악적인 분위기에 흠씬 젖어서 자란 그는 진도보통학교에 다니던 일곱 살 무렵부터 채두인이라는 진도 소리꾼에게 남도민요와 육자배기와 판소리를 배우러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시골의 명창에게 깊은 판소리를 배우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열세 살 무렵에 집을 떠나 전남 목포에 있는 권번을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소리 선생으로 있던 오수암이란 젊은 명창에게 귀동냥으로 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영광군 법성포에 있는 명월관의 초빙을 받아 그곳의 여자들에게 소리를 가르쳐 주는 강사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니까 귀엽고 예쁘고 목이 좋아서 소리도 듣기 좋으닝게 여자들한티 인기가 대단혔지. 그 덕에 한참 동안 요정 소리 선생으로 떠돌아 다닌 세월이 시작됐어.”

그곳에서 3년쯤 지난 뒤에 부산으로 가서 김광월이라는 여자 명창을 수양누이 삼아 그의 집에서 지내다가, 경북 경주군 감포읍의 달성관이라는 요정 주인에게 붙잡혀  그곳에서 2년간 소리선생 노릇을 했습니다.

그 뒤 울산 권번에 6개월쯤 있다가 경주 권번에서 1년쯤 지낼 적에 그곳에서 가야금을 가르치던 박상근의 권유로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박상근 씨는 가야금의 인간 문화재이신 성금연의 스승인데 참말로 가야금 잘 타신 명인이었어. 그 박상근 선생님하고 김천에 있는 명월관에 들렀지. 박동진이가 그곳에서 소리를 가르치고 있길래 같이 가자고 해서 셋이 상경을 했어.”

스물을 갓 지난 두 젊은 소리꾼은 ‘조선 성악 연구소’의 대명창 선생 밑에서 공부를 하며 명창에의 꿈을 키워 나갔습니다.

선생님들이 창극 단체를 꾸며 일 년 동안 조선 팔도와 만주 지방을 순회 공연 다닐 때에는 함께 따라다니며 무대 경험과 소리의 기량을 한껏 넓혀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풍성함은 잠시뿐이었고 곧이어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젊은이들은 징용이나 징병으로 끌려가고, 순사의 검문 검색은 나날이 심해지는 불안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때 징병 안 갈라고 죽을 고생했어. 공연을 해도 작품을 일본말로 해야 돼. <흥보전>을 할 때에는 흥보자식들이 일본에 충성하러 즐겁게 군대에 간다는 내용을 넣어야 했어. 그러다가 창극단에서 나와 연극 단체를 따라 다니기도 했지.”

징병에 끌려 갈 위험이 닥치자 박동진 명창과 함께 경남 도운과 위문단에 끼여서 공연을 다니던 중에 부산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쉴 새 없이 팔도를 떠돌아 다니느라 결혼할 엄두조차 못 내다가 해방되기 한 해 전 스물여덟 살에 늦장가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새색시와 신혼 생활의 재미도 채 나누지 않고 해방이 되자마자 목포로 가서 ‘진도 창극단’을 만들어 면면촌촌을 다니며 판소리와 민요와 토막창극을 들려 주며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김연수 명창이 창극단을 만들자 그곳에 가담했다가 그 단체가 해산된 후 김소희, 박후성 명창과 함께 ‘국극협단’을 창설하여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단체를 따라다니며 정처없이 떠도니 집안을 돌볼 수가 있어야지. 그러니 번번이 아내가 떠났어. 자식이 오 남매가 있는데 다 어미가 달라. 내가 스스로 지은 죄가 있으니 떠난 사람을 원망을 안 혀. 그때에는 아무튼 창극 단체 꾸미고 운영하는 데에만 온 정신이 팔려 있었응게.”

광주에서 단체를 재조직하려고 뛰어다니다가 실패하여 방황하고 있던 그는 서울에 올라와서 김연수 명창과 손을 잡고 단체를 만들어 다시 떠돌아 다니게 되었습니다.

“대구서 임춘앵 여성 국극단하고 경합이 붙어 동아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판인데 사람이 수없이 몰려와서 대만원을 이뤘어. 이제 그동안 진 빚을 갚을 수가 있겠다고 좋아하는 판인데 하루 공연하고 나니 그 이튿날 새벽에 6.25가 터져버렸어. 단원들하고 거지 생활이 시작됐지.”

대구에서 김해극장으로 옮겨서 피난민 위안 공연을 할 때, 낙동강 작전으로 함안 지방의 17만 인구가 김해로 피난을 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통해 거처할 방마저 구하기 힘들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비어 있는 어느 장삿집에서 여배우들과 함께 물장사를 하며 어려운 피난 생활을 보낸 그는 전쟁이 끝나자 단원들을 데리고 부산을 거쳐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단체 만들어 다닌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여. 작품을 만드는 일도 어렵고, 극장 잡고 사람 모으는 일도 어렵고, 허가 받고 지방 돌아다니는 일도 어려워. 그 중에서 지방 건달이나 한량들 텃세 막아내는 일이 가장 어려워. 어딜 가나 단체가 가면 괜히 시비 걸고 여배우들 집적거리는 건달들이 있는디 그런 사람들하고 싸움이 벌어지면 으레 내가 도맡아 나섰지.”

그는 한창 때에 양손에 칼을 들고 팬티바람으로 수십 명하고 싸운 전력으로 ‘진도 쌍칼’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건달 세계에서 알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평소 때는 사람 좋고 너그럽다가도 국악인을 천대하고 괴롭히는 사람만 만나면 무섭게 돌변해서 '박치기로 받아 버리고 사정없이 쥐어패는' 통에 국악계에서는 의협심과 인정으로 뭉친 사나이라는 칭송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의협심은 70년대에 국악협회가 뇌물과 공금 횡령과 기생 수출로 벌집 쑤셔 놓은 꼴이 되었을 때 여지없이 발휘되었습니다. 그는 권력자들의 위세에 눌려 바른 말을 못 하던 국악인들의 대변자가 되어 이사장과 간부들을 몰아내고 협회를 혁신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그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소리꾼을 뒷받침하는 단체의 기획이나 고수 노릇을 많이 하고 벌어들인 신망의 덕도 또한 컸습니다.

“난 본래 소리꾼으로 출발했는디 소리꾼으로 대성 못 허고 고수로 돌았지. 그것은 소리공부할 때에 한성준, 정원섭, 김재선 같은 북의 대가들에게 북을 함께 배운 받침이 있어서 단체에서 소리꾼보다 고수 노릇을 많이 하다 보니 지금은 북으로 인간 문화재가 되어 버렸지.”

한성준은 일제시대에 승무와 북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고, 정원섭 역시 판소리와 북에 통달했던 사람이고, 김재선 역시 북의 대가로 일세를 날린 사람입니다. 이들과 함께 공연을 다니며 배운 실력으로 어느덧 그는 북 치는 데에 아무도 따르지 못할 솜씨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소리하는 데에 잘 하고 못 하고 고비가 있듯이 북치는 데에도 잘 치고 못 치는 고비가 있어. 그저 또박또박 장단만 짚어서는 맛이 안 나. 고수는 반주자와 지휘자를 겸해서 소리가 험한 길로 가면 좋은 길로 가게 인도하고, 빠르면 느리게, 느리면 빠르게 음양을 맞추어 줄 줄 아는 데에서 제 솜씨가 나오는 거여.
소리도 마찬가지여. 선생에게 배운 대로 또박또박 박자 음정만 맞추는 건 진열장 소리여. 흉내 소리지. 거기서 넓힐 수도 좁힐 수도 없어. 옛날 선생들은 안 그랬어. 자유자재여. 흥이 안 나면 별 거 아니다가도 한번 흥이 나면 손님들이 앉았다 일어났다 어쩔 줄을 모르고,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떨려서 소리듣고 나면 온몽이 아플 정도여.
똑같은 음식도 간을 맞추는 데 따라 다르듯이 똑같은 선생한테 배운 소리도 제가 간을 넣어야 맛이 나는 거여. 선생을 뛰어 넘고 푹 솟아야 진짜 명창이여. 옛말에도 서당서 공부 잘 헌 놈은 붓장사 허고 공부 못 헌 놈은 영의정 헌다고 했어. 글만 많이 알아서 융통성없는 놈보다 흡글을 됫글로 말글로 섬글로 노적글로 풀어먹을 줄 아는 놈이 성공헌다는 말이지. 말허자면 창의성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여. 그런디 요새는 문화재 보호니 뭐니 해서 그런 창의성이 다 사라져 버리고 말었어.”

획일적인 문화재 전수 정책을 비판하는 그의 말투는 날카롭고 매서우면서도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배어 있어 듣는 사람도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단어 하나 장단 하나도 바꾸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전통의 보존이라는 문제와 예술적 창의력과 개성을 살려 새로운 시대의 전통예술을 창작하는 문제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야 할지는 우리 국악계 전체가 안고 있는 숙제인 것입니다.

국립국악원 자문위원, 한국 국악협회 이사로서 국악계의 든든한 대들보로 활동하던 그는 제자들과 자식들과 그를 좋아하여 끊임없이 찾아오는 후배들에 둘러싸여 외롭지 않은 말년을 지내다가 1990년 5월 21일에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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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몬스터님으로부터 릴레이 바통을 받았습니다. 릴레이의 주제는 '내가 생각하는 @@이야기'이고, 몬스터님은 저에게 <판소리>라는 주제로 바통을 넘기셨습니다. 몬스터님의 릴레이 글은http://culturemon.tistory.com/187 에 실려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판소리 이야기

저는 6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때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책 아래 온 국민이 <새마을 노래>를 합창하던 시절입니다. 새마을 노래의 2절을 아시나요?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초가집을 시멘트집으로, 기와 지붕은 스레트 지붕으로, 황토길은 아스팔트길로 바꾸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옛날 것, 초가집, 풍물, 굿....이런 것들은 비생산적이고 비능률적이고, 비효율적인 유산으로 치부되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근대화의 열풍 속에서 전통은 무너뜨리고 부셔버려야 하는 대상이었던 겁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저는 70년대에 대학교를 다녔습니다. 당시 저는 “사운드 오브 뮤직” 같은 뮤지컬 영화나 오페라 아리아나 이태리 민요에 열광하고, 서양의 고전 음악을 좋아했고, 독일에 유학 가길 희망했던 독문학도였습니다.

그러다가 1973년 대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판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느 시골 국악원에서 여자 명창이 아이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어느 곳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음악이었기 때문입니다.

제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은 베토벤의 열광적인 숭배자였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오페라 팬이었고, 누이들도 교회의 성가대나 학교의 합창반이었습니다. 그런 집안의 분위기 때문에 저도 이탈리아 민요나 오페라 아리아나 가곡을 즐겨 불렀습니다.

이런 제게 판소리는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판소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혼자 국악 음반을 듣고 책을 보며 공부했습니다. 

대학교 4학년 말, 서울 종로의 단성사를 지나가다 ‘박초월 국악학원’을 발견하고 무작정 쳐들어갔습니다. 처음 배웠던 노래가 <진도 아리랑>이었는데, 제가 노래만 부르면 학생들이 깔깔거리고 웃었습니다.

선생님이 나중에 이유를 말씀하셨는데, 제가 판소리를 소프라노로 노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벨칸토 창법'으로 판소리를 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서구예술을 동경했고, 서구예술을 공부했고, 서구예술에 심취했던 제가 판소리를 배우면서부터 인생관도 바뀌고 삶의 태도도 바뀌었습니다. 

저는 제 고향을 싫어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가난의 흔적이 너무나 많은 그 곳을 떠나 서울로 가겠다는 일념으로 진학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도 누추한 한국을 빨리 떠나 독일에 갈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다 판소리에 빠지면서부터 거꾸로 전라도 말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전라도 말이 얼마나 다양한 표현과 영롱한 문학적 향기가 있는지 다시 배우게 되었습니다. 고향의 땅에 대해서도 다시 알게 되고, 고향에 대한 애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핏줄에 대한 애정 곧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사랑도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
통이란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았던 삶의 자취이고 향기인 것입니다. 

또 저는 한 동안 판소리를 배우면서도 판소리가 과연 음악적으로 얼마나 가치가 있는 지 오랫동안 의문을 품었습니다. 저는 마리오 란자나 프렝코 코렐리나 스테파뇨 같은 오페라 가수들이 세계에서 최고로 노래 잘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태리에서 오페라단이 왔는데, TV에서 그 사람들의 리허설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주고받는 게 노래가 아니라 말이더군요. 

그때까지 저는 오페라는 목에 힘주고 벨칸토 창법으로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태리 사람들은 자기 나라 말 가지고 자연스럽게 주고받다가 오페라를 부르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오페라가 그랬듯이 판소리는 우리말을 자연스럽게 주고받다가 노래가 되었다는 것. 판소리는 우리말을 그 중에서도 전라도 말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성악이고, 오페라는 이태리의 말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성악이니 무엇이 더 아름다운지 가릴 수가 없다는 걸 그 순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걸 깨달으면서 눈이 뜨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술에 대한 눈, 우리 전통을 보는 눈, 모든 것들이 새롭게 뜨인 겁니다.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자기 세계를 찾고 싶어 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찾으려고 하는 젊은이에게 전통은 억압적이고, 벗어나고 싶고, 파괴하고 싶은 대상으로 다가 옵니다.

그 테마가 「서편제」에 들어있습니다. 먹고 살기 힘든 판소리에 환멸을 느낀 젊은 아들이 소리꾼 유봉에게 대들다가 두들겨 맞고 가출을 합니다. 유봉은 하나 남은 의붓 딸의 눈을 멀게 만들지요.

겉으로는 소리의 명창 만들려고, 한을 심어주려고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도망 못가게 하려고, 전통에다가 묶어 두려고 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송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전통의 희생자입니다. 판소리에 집착하는 아버지 때문에 눈까지 멀고 모든 인생이 망가진 비극적 여인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중요한 대사가 나옵니다. 

유봉 : 송화야, 내가 네 눈을 멀게 했다. 알고 있었냐?
송화 : 알고 있었어요.
유봉 : 나를 용서해 줄 것이냐?

이 질문에 송화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용서를 한 거지요. 이게 「서편제」의 중요한 테마입니다.

젊은이는 전통을 파괴하고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전통과 화해하는 것, 전통을 용서하는 것, 또 전통을 그리워 하는 것입니다.

「서편제」이야기는 도망갔던 의붓아들이 그의 누이를 찾아서 헤매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자기가 버렸던 전통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여행을 떠나는 남자의 회상기입니다. 



전통은 바로 고향입니다.

우리의 영혼, 우리의 정서, 우리의 사고가 돌아가서 쉴 수 있는 곳. 쉬었다가 다시 또 새로운 힘을 찾아서 영감을 찾아 새로운 삶을 꾸려나갈 수 있게 해 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전통을 우리는 그동안 너무 무시했습니다. 그대신 남의 나라 전통은 너무도 열심히 배웠습니다. 
피아노, 바이올린, 클래식 음악, 발레.....서양의 전통예술들을 배우느라 엄청난 돈과 노력을 기울입니다. 

남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문화를 풍성하게 해주기 때문에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의 것을 열심히 배우면 배울수록, 자기 것을 비하하고 무시하는 부작용도 점점 커진다는 데 있습니다. 

판소리가 유럽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게 10여년 전입니다. '아비뇽 페스티발'이나 '파리 음악 축제'와 같은 유명 축제에 판소리가 소개된 뒤로, 유럽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판소리팬이 많이 생겼습니다. 

몇 년 전 프랑스에 갔을 때, 판소리를 좋아하는 프랑스 예술가들 몇몇에게 왜 판소리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전 세계에 이런 놀라운 예술이 없다는 겁니다. 한 인간이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동안 노래를 한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라는 겁니다. 

판소리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이 된 데에는 그런 유럽 판소리 팬들의 영향력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의 보물을 무시하는 동안 오히려 외국인들이 우리 전통의 가치를 더 깊이 알기 시작한 겁니다. 


칼 융이라는 심리학자는 “한 나라의 집단적 무의식은 유전이 된다.”고 말했다. 즉, 우리 핏속에 이어져 내려 온 무의식이 바로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저에게 전통이란, 또 판소리란 ‘나를 숨쉬게 하고, 나를 활기 있게 만들어 주고, 또 창조의 열정에 불타게 하는 소중한 원천이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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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에 심취해 있던 대학 3학년 시절, 인사동의 고서점에서 우연히 정노식의「조선창극사」를 샀습니다.



그때는 우연히 보고 샀는데, 알고보니 판소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필독서인지라 지금까지 제 인생의 반려가 되어 준 소중한 책입니다. 

저자인 정노식은 누구일까요?

정노식(1891년~1965년) :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문학부를 졸업했으며,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3·1운동에 참여하여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 창립에 관여했다.

1946년 12월 남조선노동당 중앙본부 중앙위원으로 있다가, 1948년 월북해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노동당 중앙검사위원, 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 등을 지냈다.

저서로 〈조선창극사〉(1940)가 있는데, 이는 최초의 본격적인 판소리 저술로 꼽힌다. 〈조선창극사〉는 총 89명의 창자와 고수 1명, 그리고 신재효에 관한 약전(略傳) 등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 책에는 송만갑·이동백·전도성·김창룡·정정렬 등의 구술을 기록했고, 그밖에 판소리 관계 문헌, 조(調), 대가닥(制), 판소리의 기원 등에 관한 견해도 실려 있다.

-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그 당시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고,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한 독립운동가였던 저자는 어찌된 인연인지 몰라도 판소리와의 열렬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분노와 애정을 동반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머릿말에서 광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조선 사람이 광대의 소리는 좋아하면서
광대의 인격은 천대 멸시하는 현실에 분개하고.....
광대소리야말로 조선인의 심상이 들어 있는 소리요,
광대들이야말로 당당한 예술가이어늘 천대를 받아 왔으니
이제야말로 그 관념을 시정하여서
광대의 예술가적 가치와 사회적 위치를 모두 인식할 때다.


기생, 광대에 대한 편견이 시퍼렇던 일제초기에 일본유학을 갔다 온 지식인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와 비슷한 신분의 학자들이 광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예를 들어볼까요?

조선후기 실학의 대가이며, 수많은 후학들에게 존경받는 대학자인 다산 정약용은 정조에게 보낸 상소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광대가 봄과 여름이면 고기잡이를 좇아 어촌으로 모여들고,
가을과 겨울이면 추수를 바라고 농촌으로 쏠리는데,
특히 창촌에서는 사당, 창기, 주파, 화랑, 악공 등의 잡류들을 엄금해야 합니다.


정노식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일제시대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소개된 육당 최남선의 말씀입니다.


조선조의 재인, 광대들은
적극적으로 특별한 권장을 입지 못하고
무식, 무기력한 예인들이
사회 최하층적 지위에서 구차히 존속하다 보니까
거기 쇠잔이 있을 뿐이고 발달이 없으며
저락이 거듭될 뿐이지 향상을 볼 수 없음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조건 하에 있다 보니까
수천년을 하루같이 몸을 놀리는 기술과 우스개 놀이 쯤에 그치고
드디어 '다른 데만한'(필자 주 : 서양을 말합니다.) 
순희곡적 생장을 이루지 못하고 만 것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루바삐 그 방법을 개량하여
서구의 예술을 익히면
외국 사람들에게도 조소를 면하리라.


 


이러한 편견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던 그 시대에, 광대들에 대한 천대와 멸시에 분개한 저자는 무한한 애정을 담아 이 책을 쓴 것입니다.

그는 판소리 광대들을 찾아 여러 지방으로 여행도 하고, 생존한 광대나 나이 든 노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채집했습니다.

1940년에 출간된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판소리와 관련된 조선시대 선비들의 시와 기록, 판소리의 유래, 창법의 음악적 특징, '동편제'와 '서편제'의 유래 등이 설명됩니다.

후반부에서는 별처럼 빛나는 수많은 명창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아름다운 로맨스,
소리 공부를 반대하는 집안과의 목숨을 건 투쟁,
광대라고 천대하는 사회의 편견에 대한 반항,
소리 공부를 하는 동안의 눈물겨운 고생,
명창들의 출신과 판소리에 입문하게 된 사연,
스승으로부터 전수 받은 내용,
특기로 잘했다는 대목에 대한 소개 등......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 보따리들을 잔뜩 풀어놓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의 대부분이 명창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현장감이 풍부하고 매우 드라마틱합니다.

그 후에 씌어진 판소리에 대한 많은 연구 서적들은 거의 모두 이 책의 내용을 기초로 수정 보완된 것들이기 때문에, 판소리에 대한 자료가 필요할 때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서편제」의 시나리오를 쓸 무렵, 제 머리 속에는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명창들의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그 이야기들이 시나리오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특히 다 쓰러져가는 움막에서 소리꾼 유봉이 <옥중가>에 나오는 '귀곡성'을 가르치다가, 자기 딸 송화에게 얘기하는 다음 대사는 전적으로 이 책에서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옛날 송 흥록이란 명창은 이 귀신소리를 어찌나 잘 불렀는지 밤에 이 대목을 하니까 바람이 불어서 촛불이 꺼졌단다.....


삼십여년이 넘는 세월을 제 서가에서 함께 살아 온 이 책은, 지금도 제게 명창의 혼령들과 교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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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쯤 당진의 가을바다를 서성이던 저는 겨울이 되자, L의 하숙집을 떠나 지리산으로 갔습니다.

 



그때의 심정은 죽을 때 죽더라도 지리산 <상선암(上禪庵)>에서 죽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상선암은 구례읍 부근에 있는 <천은사(泉隱寺)>의 부속 암자인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독서모임인 고전독서회의 여름 수련회를 갔던 곳입니다.

폐허가 된 절간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예쁜 여학생들과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고, 구들장이 여기저기 망가진 절의 방에 누워, 깨어진 기와지붕 위로 반짝반짝 빛나던 별을 바라보며 하룻밤을 지샜던 추억이 너무도 그리워 무작정 그곳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옷가지와 책 몇 권이 든 가방을 들고 구례에서 버스 타고 천은사에서 내린 다음, 눈 쌓인 지리산의 중턱에 자리 잡은 상선암까지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기어' 올라갔습니다.

말끔하게 새 단장이 된 암자까지 숨이 턱에 차서 간신히 다다른 저는, 툇마루에 앉는 순간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상선암>의 최근 모습. 정면의 툇마루가 기절했던 곳이고, 오른쪽 뒤꼍에 제가 묵었던 골방이 있습니다.

깨어나 보니 따뜻한 방안에 이불까지 덮고 누워 있더군요. 머리맡에 두 청년이 앉아 있다가 제가 눈을 뜨자 한 청년이 급히 물그릇을 주며 “이거 꿀물이니 드시쇼!” 하는 것이었습니다. 

꿀물을 먹고 나니 또 한 청년이 “몸을 바로 누워 보쇼!”하면서 온몸 여기저기 지압을 해 주었습니다.

꿀물 준 W는 벌을 치는 청년이었고, 지압을 해준 H는 중국무술인 십팔기의 고단자였습니다. W는 벌통을 상선암 근처에 풀어 놓고 있었고, H는 무술 수련한다고 암자에 묵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암자에는 스님은 안 계시고 중년의 '여보살'이 관리하고 있었고, 김씨라 불리는 늙은 ‘불목하니’ 영감님이 나무, 청소, 불때기와 같은 잔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사정을 들은 그들은 저를 따뜻하게 거두어주었습니다. 마침 보살님의 아들이 고등학교 시험을 볼 때라 저는 가끔씩 아들 공부를 가르치며, 공짜로 몇 달 동안 맛있는 절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저는 중국 무술의 소림권, 무당권, 태극권, 팔괘장, 내공, 외공, 단전호흡, 장풍, 팔단금법 등의 현란한 세계를 알려 주는 H의 말에 푹 빠졌습니다. 

저는 그 전부터 무협소설과 무협영화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특히 김용이나 와룡생 같은 작가들이 펼쳐 주는 무림의 세계는 제게 황홀하기 그지없는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여 주었습니다.

그 중 지금도 잊지 못하는 최고의 무협영화는 「유성호접검(流星胡蝶劍)」이었습니다. 김용과 더불어 무협소설의 대표 작가인 고룡의 원작 소설을 각색해 만든 그 영화는 음모와 배신, 그리고 남녀 간의 아름다운 사랑이 정교하게 얽혀 있는 무협영화의 고전입니다.

대학 1학년 방학인지 2학년 방학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친구와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다른 무협영화가 짜장면이라면 「유성호접검」은 탕수육이다!”고 감탄하며, 중국집에서 빼갈을 실컷 마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제가 좋아하는 고룡의 작품 중에 「초류향」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풍류와 여자와 도박을 즐기는 무림고수 초류향과, 냉정하고 현실적인 희빙안, 고독하고 말이 없는 살수 일점홍 등이 중원과 사막을 종횡하며 대마두(大魔頭)와 벌이는 서사적 이야기는 저를 사정없이 매혹시켰습니다.

이렇듯 무림과 무공에 대한 사전 준비가 되어 있던 터라, 저는 말솜씨 좋은 H가 들려주는 무술과 관련된 과장된 경험과 온갖 무술가, 도사들의 이야기에 도취하였습니다.

또 그가 스승의 비밀 금고에서 훔쳐내어 몰래 베꼈다며 비밀스럽게 보여주는 <내공비급(內功秘及)>을 베끼며, 언젠가 나도 ‘장풍’을 날리는 무림의 고수가 되겠다는 허황된 꿈을 키웠습니다.

암자의 골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호흡을 하고, 향을 피우고, 밤에는 암자 마당에서 H가 가르쳐주는 소림권의 기초 동작들을 익혔습니다.

십팔기를 가르쳐 준 H와 구례읍의 사진관에서 찍은 기념 사진.

그런데 거기서 판소리와의 기이한 인연이 또 이어졌습니다. 처자도 없이 상선암에서 산지 몇 년이 된 불목하니 김씨 할아버지가 북도 잘 치고 젊었을 때 판소리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해 여름, 김제국악원에서 처음으로 판소리를 들은 뒤 자나깨나 판소리에 심취해 있던 저에게, 그 소식은 귀에 번쩍 뜨이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할아버지께 판소리 좀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저녁 먹고 자기 방으로 오라고 해서 우리 셋은 할아버지 방에 모였습니다. 할아버지 방에는 이부자리 한 채와 옷 몇 가지, 그리고 낡은 북 하나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풍년초' 담배 잎을 종이에 말며 말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구식 노래는 배워서 뭐 할라고 그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할아버지는 중머리 북 장단도 가르쳐 주고, 심청가 한대목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맑은 공기에 따뜻한 절밥을 배부르게 먹고, 벌꿀과 로얄젤리도 가끔씩 얻어먹고, 친구들과 더덕을 캔다고 산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단전호흡과 기공으로 몸보신을 하니 몸이 점점 좋아졌습니다.
 
처음 올 때는 죽을 힘을 다해 기어 올라왔던 산길을, 나중에는 천은사에서 상선암까지 단숨에 오르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산길을 오르내리면서 우리는 고래고래 판소리를 불러댔습니다.

그러던 중 구례에 단소의 명인이 살고 계시다는 소문을 들은 우리는 지체 없이 그 분을 찾아나섰습니다. 구례읍내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산길을 물어물어 걸어 간 끝에, 절골 마을에 사는 김무규 명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대단한 고대광실이었을 퇴락한 기와집에 살고 계셨던 김무규 명인은 단소와 북과 거문고의 명인이셨습니다.

그러나 지주이며 양반댁 엘리트 출신이고, 그의 부인 역시 한말의 대학자이며 일본의 침략에 항거해 자결하신 매천 황현의 손녀이실 만큼 명문가의 자제라는 지위 때문인지 직업적인 연주 생활은 안 하신 분입니다.

백경 김무규 명인(1908~1994)의 연주 모습.

다만 그의 단소는 전설적인 단소의 명인인 전추산에게 배웠기 때문에 매우 귀한 가락으로 평가 받습니다.

호리호리하고 깐깐하게 생긴 명인은 가지고 간 꿀 한통을 드리며 단소를 배우러 왔다는 산 청년들에게 퉁명스럽게 첫마디를 꺼내셨습니다.

“이 어려운걸 뭐 하러 배우려 하는가?”

그러면서도 먼 길을 걸어 온 정성이 갸륵했던지, 다음에 한번 찾아오라고 허락을 하셨습니다.

며칠 뒤에 다시 찾아가니 집 뒤에 있는 대나무 숲에서 대를 잘라 단소 세 자루를 만들어 놓으셨다가 선물로 주며, 단소 부는 법의 기초부터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제가 판소리에 관심이 있는 걸 아시고 김소희 명창이 여름이면 제자들과 함께 자기 집에 연습을 하러 오기도 한다고 하시며, 명창들과 관련된 옛날 얘기를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아쉽게도 그 분에게 몇 번 밖에 단소를 배우지 못하고, 몇 달 뒤에 복학해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연은 끊어지지 않아 나중에 어느 잡지에 그 분의 이력을 소개하는 인터뷰 기사도 쓰고, 인간문화재가 되신 뒤 「서편제」 촬영할 때 그 분을 임권택 감독에게 소개해서 절골의 퇴락한 기와집과 대숲이 멋지게 등장하고, 새하얀 한복을 입고 거문고를 치는 그 분의 모습도 영상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영화가 개봉된 지 얼마 뒤에 돌아가셨으니, 아마 「서편제」가 그 분의 마지막 연주를 담은 필름이 되었을 겁니다.

판소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 김제국악원의 여자명창과 지리산 상선암의 불목하니와 구례의 김무규 명인이 차례로 제 인생에 등장하더니 마침내 다음해 겨울에 박초월 명창과의 만남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상상도 하지 않았던 판소리와의 인연이 마치 누군가의 연출로 한 장면 한 장면 이어지듯, 제 인생의 무대에 펼쳐진 것입니다. 전 지금도 그 기이한 인연에 신기해하며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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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판소리계 최고의 로맨티스트' 임방울 명창(1904년~1961년)을 소개하겠습니다.

임방울 명창은 을사보호 조약을 맺기 1년 전인 1904년에, 전남 광산군 수성마을에서 아버지 임경학씨와 어머니 김나주씨의 팔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세습 예술가 집안이었고, 본 이름은 승근인데 방울 같은 소리를 내며 크라고 방울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외삼촌이자 국창이라 불리던 서편제의 김창환 명창에게 기초를 닦았고, 자라면서 여러 명창들에게 배운 뒤, 15세 무렵에는 동편제의 유성준 명창에게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유성준 명창은 성질이 급하고 괴퍅해서 어린 임방울은 기다란 담뱃대로 머리통을 수도 없이 얻어 맞았다고 합니다. 같이 공부하던 여자애들을 맨발로 북 위에 한 시간씩 세워두기도 했다니, 제가 연기했던 「서편제」의 유봉보다 더 지독한 선생님이었나 봅니다.

임방울은 목소리가 맑고 청아하면서도 슬픈 느낌을 주고, 고음과 저음이 시원시원하게 터져나오고, 어떠한 경우에도 목이 쉬지 않을 정도로 좋은 성대를 타고 났습니다.

그런데 변성기를 맞아 소리가 마음대로 나오지 않자 골방에 틀어박혀 문을 걸어 잠그고 연습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이 무렵의 임방울 명창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그가 무덤가에서 하루종일 소리공부를 하는데 원하는 소리가 죽어도 안나오자 "마마(천연두)에 걸리면 목이 트인다는데 마마나 걸려라!"하고 소원을 빌었더니 과연 천연두에 걸려서 소리가 트이고, 그 대신 얼굴이 얽었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이처럼 소리 공부에 전력을 기울인 뒤, 그는 대명창이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스물을 갓 넘은 1925년 9월, '조선명창연주회'가 매일신보사 주최로 열렸습니다. 명창들의 노래를 듣기 위해 관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먼저 그의 외삼촌인 김창환 명창과 당대 최고의 명창인 송만갑 명창, 이동백 명창, 정정렬 명창들이 특별출연으로 무대에 올라 소리를 했습니다.

그뒤를 이어 무릎 위로 올라간 짧은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땅딸막한 키에, 약간 얽은 데다가 별로 잘생기지 않은 얼굴의 임방울이 무대에 나타났습니다. 초라한 행색의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판소리 「춘향가」 중 <옥중가(獄中歌)>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寂寞獄房) 찬 자리에
생각나는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이 노래는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힌 춘향이가 한양으로 떠나 간 이몽룡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목에 칼을 쓰고 산발한 머리가 마치 쑥대처럼 생겼고, 얼굴은 창백하게 귀신처럼 생겼다고  해서 '쑥대머리 귀신형용'이란 충격적인 가사로 노래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참혹한 지경에서도 일편단심 사랑하는 님을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이 너무도 절실하게 묘사된 명곡입니다. 오페라로 치면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이나 <공주는 잠 못 이루고>와 같은 대표적인 아리아인 것입니다.


뱃속에서 바로 소리를 뽑아서 내는 통성에 약간 쉰듯 칼칼하게 터져나오는 수리성을 섞어, 춘향이의 비통처절한 심정을 애절하게 토해내는 임방울의 판소리는 단박에 청중을 휘어잡았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춘향이의 심정이 절망적인 시대의 정서와 어울어지면서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습니다. 이 노래가 바로 불후의 명곡이 된 <쑥대머리>인 것입니다.


 
그 공연 이후 임방울은 하루 아침에 명창의 반열에 올랐고, 콜럼비아 레코드나 빅터 레코드나 OK 레코드와 같은 유명 음반사가 앞다투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의 출세작 <쑥대머리>가 실린 음반은 한반도와 만주와 일본까지 불티나게 팔려나가, 각 음반사마다 12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기록을 세웠습니다. 

그후 1930년 전국명창대회에서 장원의 영광을 차지한 임방울은 본격적인 소리꾼으로 나서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연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즈음, 광주의 기관장들이 환영파티를 열어 준 '송학원'이라는 요릿집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임방울이 소년시절에 광주의 부잣집에서 고용살이를 했는데, 그 집에 동갑내기의 아름다운 딸이 있었습니다. 소녀와 소년은 철부지의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소녀의 부모가 반대하는 통에 소년은 그 집을 떠나야 했고, 소녀는 어느 부잣집 아들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후 소녀의 결혼 생활은 실패로 끝났고, 광주에서 송학원이란 요릿집을 차리고 예명을 김산호주로 지은 소녀는 광주 유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여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날, 그 자리에서, 명창이 되어 돌아 온 임방울과 여주인 김산호주가 십여년도 훨씬 흐른 뒤에 해후를 한 겁니다. 그동안 서로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두 연인은 곧바로 불같은 사랑을 불태웠습니다.

임방울은 2년 간 송학원의 내실에 숨어 살며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습니다. 세상에서는 임방울이 잠적했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전속계약을 한 OK 레코드 회사에서는 그의 행방을 찾느라 혈안이 되었습니다. 

미색이 빼어났던 김산호주는 천하명창 임방울을 2년 동안 송학원의 내실에 숨겨 놓은 채, 사랑의 포로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임방울은 자신의 목소리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토록 기름졌던 목소리가 탁해지고, 고음이 마음대로 나오지 않고, 소리를 조금만 질러도 땀이 뻘뻘 나는 것이었습니다.

대경실색한 그는 어느 날, 산호주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지리산으로 떠나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그는 지리산 토굴에 숨어 살며 소리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임방울의 행방을 알지 못한 채, 미칠듯한 그리움과 슬픔에 빠진 산호주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천지사방을  수소문한 끝에 간신히 임방울의 행방을 알아 낸 산호주는 임방울이 소리공부를 하는 토굴 앞에서 만나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임방울은 끝내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깊은 절망에 빠져 집으로 돌아 온 산호주는 임방울을 애타게 그리다가 병이 깊어져, 마침내 30세도 안된 꽃 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산호주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임방울은 죽어가는 애인을 가슴에 껴안고 슬피 울며 즉석에서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습니다. 그것이 바로 <추억>이라는 노래입니다.


앞산도 첩첩허고
뒷산도 첩첩헌디

혼은 어디로 향하신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럇든가

그리쉽게 가럇거든

당초에 나오지를 말았거나
왔다가면 그저나 가지

노던 터에다 값진 이름을 두고가며
동무에게 정을 두고 가서

가시는 임을 하직코 가셨지만
세상에 있는 동무들은
백년을 통곡헌들

보러 올 줄을 어느 뉘가 알며
천하를 죄다 외고 다닌들

어느 곳에서 만나 보리오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전생에 무슨 함의로
이 세상에 알게 되어서

각도각골 방방곡곡 다니던 일을
곽 속에 들어서도 나는 못잊겄네

원명이 그뿐이었든가
이리 급작스리 황천객이 되얏는가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어데를 가고서 못오는가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을 보고지고



이 노래가 바로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울광장 '노제' 때 안숙선 명창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제가 판소리를 배우던 젊은 시절, 이 노래에 얽힌 비극적 사랑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여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오다가, 사랑하던 노전대통령을 떠나보내는 국민들의 마음을 이 노래에 실어 보내드렸던 것입니다.

이후 박초월 명창 등과 <동일 창극단>을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하며 최고의 명창으로 대중들을 울리고 웃기던 임방울 명창은 1961년 공연 도중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5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상 처음 국악예술인장으로 치러진 임방울 명창의 장례식에는 200여 명의 여류 명창들이 소복을 입고 길을 가며 상여소리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행렬 끝에 100여 명의 거지가 눈물을 흘리며 따라와 눈길을 끌었습니다. 공연 때마다 거지들은 무료로 관람시켰던 임방울 명창에 대한 추모의 표시였습니다.


10여세부터 여러 스승으로부터 '서편제'와 '동편제'를 모두 사사받아 자신의 고유한 가풍을 수립한 전설적 명창 임방울. 

민족사의 흐름에서 가장 불행했던 시기이자, 판소리 역사에서 가장 시련과 수난이 많았던 일제 침략기에 민초들의 한을 노래한 명창 임방울. 

김창환, 이동백, 송만갑 같은 선배 가객들처럼 조선시대의 벼슬 하나 지낸 바 없고, 후배 명창들처럼 인간문화재로 대접 한 번 받아보지 못한 불운한 시대의 진정한 광대 임방울. 

평생 양복 입기를 싫어하며 흰색 한복 두루마기를 즐겨 입고, 수많은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소외된 민초들의 아픔을 위로해주던 아름다운 가객 임방울.

공연 때 마이크 쓰기를 꺼려 했고, 입에 발린 공치사나 돈 받기를 외면했으며, 번돈은 불우한 이웃에게 아낌없이 써버려 유족에게 아무런 유산도 남기지 않은 풍류남아 임방울.

조선왕조가 저물어가는 때에 태어나 민족사의 혼란 속에서 유랑의 생애를 마친 임방울은 우리의 비극적 시대를 대표하는 명창이었습니다.


그의 출생지인 광주시 광산구 송정공원에 세워진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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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대통령께서 서거하셨습니다.
이 땅을 빛낸 또 하나의 큰 별이 떨어지셨습니다.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고인의 못다 이룬 꿈이 아쉽습니다. 
고인의 서거를 애도하며 저와의 개인적인 추억, 특히 문화예술에 대한 고인의 애정을 엿볼 수 있는 잊지 못할 일화 한가지를 소개합니다.  
 

 

그 만남은 1993년의 겨울 어느날, <예술극장 한마당>이라는 허름한 소극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당시 고인은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패배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 갔다가 돌아와 '아시아-태평양 재단' 일에 전념하고 계실 때입니다. 

저는 극단아리랑의 대표겸 연출가로서 활동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서편제」의 주연배우로 대중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무렵입니다.

제가 창단공연으로 막을 올린 「아리랑」을 원안으로 하여, 권호웅 후배가 연출한「아리랑2」라는 작품을 공연하고 있을 때입니다.

뜻밖에도 '아시아-태평양 재단'으로부터 DJ께서 우리 공연을 보고 싶어 하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서편제」 영화를 관람하신 뒤 제가 극단아리랑을 운영하고 있다는 얘기를 잊지 않고 계시다가, 연극 공연 소식을 듣고 연락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1993년 11월 4일 일요일, 국회의원 10여명을 대동하고 공연시간인 3시가 되기 조금 전에 오신 DJ는 초대하겠다는 저의 호의를 무시(?)하고 굳이 티켓을 사서 관객들과 함께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소극장으로 들어가겠다고 우기셨습니다. 

제가 대표를 겸하고 있던 <예술극장 한마당>은 대학로에서 성북동으로 들어가는 혜화동 골목 길가 허름한 건물의 지하에 세들어 있던 100여석 정도의 소극장으로 퀴퀴한 냄새가 배어 있고, 어두컴컴하고, 주차장도 없고, 좌석은 좁고 기다랗게 이어져 있는 초라한 곳이었습니다.

젊은 관객들이야 소극장이 당연히 그런 줄 알고 오지만, 이미 대통령 후보까지 지내신 정계의 거물을 그런 누추한 장소에 모시자니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함께 오신 의원님들도 그 당시 난다긴다 하는 거물 정치인들인지라 소극장의 꼴이 그토록 험악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지, 다들 잘못 왔다는 듯 난처한 표정을 짓고 어쩔 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생각해도 와주신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다리까지 불편하신 분이 그런 비좁은 의자에서 두 시간 동안이나 연극을 보신다는 것은 또다른 고문(?)과 같이 무리한 일이라, 죄송하다는 얘기를 하고 다음에 좋은 극장에서 공연할 때 모시겠다고 했습니다.

제 말을 들은  DJ께서는 웃으시면서 그런 걱정하지 말고 공연이나 잘하라고 하시며 의원들에게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할 수 없이 두 분만 앉을 수 있게 허름한 간이의자를 부리나케 준비하여 특별석(?)을 마련했습니다.

이희호여사의 손을 잡고 두 시간 동안 즐겁게 공연을 감상하신 DJ는 수고하는 단원들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대학로의 소박한 고깃집에서 단원들과 국회의원들과 자리를 함께 하신 DJ는 식사가 나오기 전에 관람하신 공연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도 하고 감상도 얘기하시다가, 느닷없이 모 국회의원을 향해 이렇게 물어보시는 것이었습니다.

DJ : 어이, OOO의원!
모의원 :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예!
DJ : 자네 지금까정 연극 맻편이나 봤능가?
모의원 : (더듬거리며) 아...예....아직 한편도....
DJ : 이 사람아, 정치허는 사람이 연극도 안보고 댕기믄 쓰겄능가?
모의원 : 죄송합니다. 바빠서....
DJ : 아무리 바뻐도 연극을 자주 보러 댕기소.
모의원 : (앉으며) 예, 알겠습니다!
DJ : 서편제까지 허신 김대표가 여그 이렇게 열악한 소극장에서 연극으 열정을 불태우는디 정치인들이 적극 관심을 가지고 지원도 허고 그려야 된단 말이시.
의원들 : 맞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해프닝에 모두들 웃으며 연극과 정치 얘기로 화기애애한 저녁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습니다. 그뒤 DJ께서는 금일봉과 함께 극단아리랑 의 후원회원으로 가입하여 우리들을 한껏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뒤 그 분과의 인연은 국립극장장과  대통령으로도 이어졌습니다만, 제 가슴 속에는 제가 연극에 열정을 불태우던 시절에 허름한 소극장을 찾아주신 고인의 영상이 너무도 뚜렷이 박혀 있습니다. 


누추한 골목길의 초라한 소극장에서 돈도 되지 않는 민족극을 하겠다고 땀을 흘리는 무명배우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격려하신 애정어린 관객,

초대 안하면 공연장에 오지도 않는 정치인들의 몰지각한 문화의식을 앞장 서서 깨뜨려주신 선구적 관객,

당당히 표를 사서 관객들과 함께 줄을 서서 입장해 주신 겸손한 관객,

추운 겨울 날의 오후를 소극장에서 함께 보낸 DJ는 제가 이제껏 만난 최고의 관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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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31일에 폐암으로 작고하신 이청준 선생님의 1주기가 다가오는군요.  

이청준(李淸俊, 1939-2008) 님은 전남 장흥 출생으로, 1960년 광주 제일 고등학교를 거쳐, 1966년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셨습니다. 1965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단편 '퇴원(退院)' 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셨지요. 그후 <사상계>,  <여원> 등 출판계에 종사하다가 그만둔 후 전업 소설가로 활발히 활동하셨고, <병신과 머저리>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셨으며. 이후 <이어도>, <잔인한 도시>, <살아 있는 늪> 등으로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창작집으로는 <별을 보여드립니다>(1971), <소문의 벽>(1972), <조율사>(1973), <가면의 꿈>(1975), <자서전들 쓰십시다>(1977), <예언자>(1977), <남도 사람>(1978), <살아있는 늪>(1980),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1981), <시간의 문>(1982), <비화밀교>(1985), <따뜻한 강>(1986) 등이 있고 장편으로는 <당신들의 천국>(1976), <춤추는 사제>(1979), <자유의 문>(1989), <인간인>(1991) 등이 있습니다.

한국의 현대문학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신 선생님을 그리며, 1년 전에 <세계일보>에 기고했던 추모의 글을 손질해서 올립니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92년 7월 말, 임권택 감독님으로부터「서편제」의 각색과 출연 제의를 받은 '사건'으로부터 시작됐지요.

그날부터 저는「남도사람」이라는 연작소설집 속에 실린「서편제」,「소리의 빛」,「선학동 나그네」등의 단편들을 꼼꼼히 읽고, 각색을 위해 선생님과의 만남을 준비했습니다.

한 세대를 풍미한 작가로서의 선생님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각색자와 원작자와의 만남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작자의 문학적 명성이 크고 높을수록 각색자는 더 큰 짐을 지게 마련이니까요.

그러나 술자리에서 각색에 대한 저의 고민을 얘기 듣고 나서, 선생님은 뜻밖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설과 영화는 엄연히 다르니 김 선생이 하고 싶은 대로 각색하시오. 그 대신 우리 막걸리나 자주 마십시다.”

그 후로 선생님의 고향인 장흥에도 함께 방문하여 치매에 걸려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님을 뵙기도 하고, 편하게 술잔을 나누는 자리도 여러 번 있었지만, 선생님은 단 한 번도 각색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에 있는 이청준님의 고향집.

저는 은발을 쓸어 올리고 우스갯소리를 섞어가며 은근하게 좌중을 유도하시는 선생님의 인품에 반했습니다. 또 가느다란 담배가 입에서 떠나지 않고 하얀 연기로 피어오르는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멋진 은발과 어울려 묘한 매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하얀 연기가 선생님의 수명을 앗아간 원흉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선생님의 판소리에 대한 애정과 식견은 저를 능가했습니다. 선생님은 저도 독문학을 전공했다는 걸 알고 “우째 이런 일이!”하고 놀라며, 판소리와 독문학으로 이어진 우리의 인연을 신기해하고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그 뒤 저하고는「조만득씨」라는 중편소설을 각색, 연출한「배꼽춤을 추는 허수아비」로 인연이 이어졌습니다. 그 연극을 할 때도 선생님은 즉석에서 허락하시고, 각색에 대해 저에게 무조건 일임하시고, 공연을 보시고 진심으로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게다가「서편제」는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저에게 안겨 주더니,「배꼽춤을 추는 허수아비」로는 현대연극상 최우수작품상과 연출상, 남우주연상 등을 휩쓸었으니 선생님과의 인연은 저의 인생에 영광의 빛을 더해 주었습니다.



「서편제」 이전에도 몇 작품이 영화화되었지만, 「서편제」 이후에 선생님의 소설들은 더욱 활발하게 영화화되었습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죽음을 다룬 「축제」.



「서편제」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천년학」.



「벌레이야기」란 원작 소설을 소재로 한 「밀양」.



그밖에도 수많은 감독과 연출가, 작가들에게 영감과 명예를 안겨 주신 선생님.

그러나 그런 화려한 빛의 그늘에 침잠하여 '창작의 고통은 천형'이라고 하신 선생님의 그 웅숭깊은 부끄러움, 고통, 죄의식, 낯설음은 우리를 엄숙한 내면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한 번 읽으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우리 영혼의 주위를 맴도는 선생님 작품의 마력은 바로 그 깊은 내면의 성찰에서 우러나오는 것 아닐까요?


선생님께서는 마지막 작품집인「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의 서문에서 "이런 자리 마련한 것이 부끄럽고, 소설을 욕심낸 것이 부끄럽고, 내 몸을 스스로 관리하지 못해 부끄럽고, 이웃에 대해 부끄럽다."고 하셨지요.

그 말씀이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자신에 대해 너무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너무도 이웃친지들의 소중함을 모르며 살고 있는 제 삶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뼈아픈 질책이셨습니다.

또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의 인터뷰에서 신화와 영혼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다고도 하셨고,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와 초의 선사와 소치 허유가 어우러지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도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남겨 놓으신 문학의 화두는 과연 누가 짊어지고 갈까요?

어느 누가 선생님이 차지했던 한국문학의 별자리를 이어갈까요? 어느 누가 선생님이 목숨을 걸고 사랑한 우리말의 순교자가 될까요?

소설보다 힘들게 암과 싸우다가 돌아가신 선생님, '당신의 천국'에서 잘 지내고 계신지요?

1년이 지난 지금, 선생님을 추모하며 선생님이 「서편제」에서 제일 좋아하셨던 <이 산 저 산>의 가사를 바칩니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구나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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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편제>가 세상에 나온 후, 제가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서편제와 동편제가 어떻게 다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 많은 분들이 잘못 알고 계신 상식이 '서편제는 전라도 판소리이고, 동편제는 경상도 판소리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잘못된 상식입니다. 

'동편제'와 '서편제' 모두 전라도에서 불리던 판소리의 유파입니다. 
판소리는 예부터 선생님에 따라서 가사의 내용이나 곡의 흐름이 다르고, 같은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제자라 할지라도 조금씩 고쳐 나가기 때문에 명창마다 그 내용이 다릅니다. 이것을 ‘유파’라고 하기도 하고, 무슨무슨 ‘제’라고도 합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두 유파가 전라도 땅을 가로 질러 흐르는 섬진강의 동쪽 지방에서 주로 전해왔던 ‘동편제’와, 섬진강의 서쪽 지방에서 주로 전해 왔던 ‘서편제’인 것입니다.

섬진강의 동쪽 지방에는 '동편제'가, 서쪽 지방에는 '서편제'가 전해져 왔다. 

'동편제'는 씩씩하며 음의 꾸밈이 적은데, '가왕(歌王)'이라고 불리운 송흥록을 시작으로 해서 그의 동생인 송광록, 송광록의 아들인 송우룡으로 이어지는 송씨 집안의 판소리 법통을 말합니다. 그들은 섬진강의 동쪽 지방인 구례, 곡성, 남원  쪽에서 주로 활동을 했습니다.


운봉면 화수리 비전마을에 있는 송흥록 명창 생가 앞 동상.

송흥록 명창 (1801년~1863년)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 출생. 8명창의 한 사람으로 가왕()의 칭호를 받았다. 판소리의 중시조()로서 모든 가조(調)를 집대성하는 한편, 매부인 김성옥()이 시작한 진양조를 자신의 노래에 도입, 완성하였다. 그의 창법은 발성초()가 극히 신중하였고, 웅건·청담한 창법을 가진 동편제(便)를 이룩하였다. 특히 《춘향가》 중의 〈옥중가()〉와 《변강쇠타령》 《적벽가()》 등을 잘 불렀다. -두산 백과사전

‘서편제’는 섬세하고 음의 꾸밈이 많은 판소리인데, 박유전 명창이 송씨 집안의 판소리와 대조적인 창법으로 만든 소리제입니다.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박유전은 목청이 뛰어나게 고왔던 명창인데, 그 무렵에 천하를 호령하던 대원군의 아낌을 받아서 벼슬까지 하고 그의 사랑채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명성황후와의 권력 다툼에서 권력을 뺏긴 대원군이 중국으로 도망가자, 명성황후의 복수를 피해 숨어 살았다고 합니다. 갖은 고생 끝에 대원군이 다시 권세를 잡자, 박유전 명창도 한양으로 올라와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대원군이 죽고 한일합방이 되자, 전라도 어느 땅에 숨어 살다가 한겨울에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전남 보성군 보성읍 보성공원에 있는 박유전 명창 추모비.

박유전 명창 (1835년~1906년)
전북 순창() 출생. 헌종 ·철종 ·고종 3조()에 걸쳐 살았고, 특히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무과()에 급제까지 하였다. 음색이 청아하였으며, 서편제(西便)에서 갈라진 강산제(/)를 창시하고 뒤에 제자 이날치()에게 그 창법을 전수하였다. 《춘향가》 중 <이별가>에 뛰어났으며, 독특한 창법을 구사하였다. -두산백과사전

그 분이 섬진강의 서쪽 지방인 보성, 강진, 해남 쪽에서 주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구례쪽 판소리를 ‘동편제’라 하고 보성쪽 판소리를 ‘서편제’라고 부르기 시작한 겁니다.

일제시대가 시작되기 전인 조선 말기에 ‘동편제’와 ‘서편제’는 서로 심하게 싸웠습니다. 스승들은 상대의 판소리를 깎아내리고 자기 판소리가 최고라고 우겼으며, 제자들도 편을 갈라서 서로 자기 스승이 최고라고 다투었습니다.

만약 '동편제' 스승에게 판소리를 배운 제자가 '서편제'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울려면 파문을 각오해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판에 두 파의 싸움을 멈추게 한 풍운의 사나이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송만갑이란 명창입니다.

송만갑 명창은 송흥록 명창의 손자이고, 송우룡 명창의 아들이니 완전히 ‘동편제’의 정통파 집안에서 자라난 사람입니다.

그는 일곱 살 무렵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소리를 배웠습니다. 그는 판소리의 천재 소년이라서 이미 열 살 무렵부터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서편제’ 소리에도 관심이 많아서 아버지 몰래 박유전 명창의 창법을 자기 소리에다 섞었습니다. 집안의 전통적 음악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 세계를 이루려고 노력한 거지요.

그러나 집안 어른들은 집안을 망치는 자식이라고 엄청나게 화를 냈습니다.

“만갑이 놈을 잡아들여라!”

아버지를 비롯해서 집안의 어른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모두들 판소리를 하거나 북을 치는 광대들이었지요. 송만갑은 화가 잔뜩 난 집안 어른들 앞에 꿇어 앉았습니다.

“네 이놈, 만갑아!”
“예!”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제가 무슨 죄를 졌습니까?”
“집안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네 멋대로 소리를 해?”
“저는 제멋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네 놈이 서편 소리를 하는 걸 들은 사람이 있는데도?”
“서편 소리에도 좋은 대목이 있어서 조금 섞어 부른 겁니다.”
“그게 집안의 전통을 무너뜨린 게 아니고 무엇이냐?”
“저는 동편이니 서편이니 가르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무엇이?”
“시대가 변했습니다. 소리꾼은 옷감 장수와 같아서 비단을 달라는 사람에게는 비단을 주고, 무명을 달라는 사람에게는 무명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저 놈의 목을 작두로 베어라!”

아버지는 길길이 화를 내며 만갑이를 죽이겠다고 서슬이 퍼랬습니다. 그러자 집안 어른들이 판소리 재주가 아까우니 죽이지는 말자고 아버지를 말렸습니다. 결국 집안 어른들은 송만갑을 파문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고, 그 후 송만갑은 다시는 집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고집 세고 자신감에 넘치던 송만갑은 그 뒤로 집을 떠나 조선팔도를 떠돌면서 판소리를 했습니다. 그 통에 더욱 유명해지고, 그의 판소리는 널리 퍼졌습니다.

그는 드디어 일제시대에 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창이 되었습니다. 송만갑 명창은 마음이 관대하고 제자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점점 명창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가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동편제’니 ‘서편제’니 하며 편을 가르지 말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때부터 '동편제' 명창과 '서편제' 명창이 서로 싸우지 않고 교류를 하게 됩니다.
 


송만갑 명창 (1865년~1939년)
전남 구례 출생. 명창 우룡()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판소리를 배워 10세 때 벌써 그 자질을 인정받았다. 창법은 종조() 흥록(祿)의 전통적 법제()에서는 많이 벗어났으나 통속()과 평이()를 신조로 한 동편(便)의 명창으로 알려졌다. 어전()에서 판소리를 불러 감찰()을 제수받았다. 1923년 조선성악연구회를 설립,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김정문() ·김광순() ·박녹주() ·박초월() 등의 제자들을 배출시켰다. 또 《춘향가》 《심청가》를 창극화했으며, 특히 《춘향가》 중에서도 <농부가()>를 잘 불렀다.  -두산백과사전

그는 국악인들의 전국적 모임인 <조선성악연구회>라는 단체의 수장으로서, 파벌과 유파를 초월한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그가  1939년에 세상을 뜰 때까지 우리 국악계는 그를 중심으로 단결하고 화목하게 지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분열과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대척을 하고 있는 유파들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상대와 싸웁니다. 상대의 인격을 모독하고, 조롱하고, 파괴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합니다. 극과 극의 원리주의에 입각한 검투사가 칭송 받습니다. 대화와 타협은 기회주의의 처신으로 배척됩니다. 증오와 분노와 저주의 에너지가 한반도의 하늘에 검은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시절이 이러하니 송만갑 명창의 통합과 화합과 관용의 리더쉽이 더욱 그립습니다. 영화 <서편제>에서 소리꾼 유봉이 죽기 전에 송화에게 남긴 유언과 같은 대사를 되새겨 봅니다.

"동편제는 무겁고 맺음새가 분명하다면, 서편제는 애절하고 정한이 많다고들 하지. 허지만 한을 넘어서게 되면, 동편제도 없고 서편제도 없고 득음(得音)의 경지만 있을 뿐이다."


       동편과 서편을 아우르며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처럼 통합의 소리판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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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깅을 해보니 무엇보다 댓글이나 방명록이나 프로필 위젯 등을 통한 블로거들과의 소통이 재미있더군요.

대부분 <김명곤의 세상이야기>라는 타이틀의 제 이름을 보고서 "설마!" 하고 들어왔다가 "아, 그 사람이!"하면서 글을 남기고 가시곤 합니다. 

간혹 저를 민족극을 하던 연극 배우나 <바보선언>의 영화 배우, <뿌리깊은 나무> 잡지사의 기자, 또는 국립극장장이나 장관으로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대부분은 <서편제>의 소리꾼 배우로 더 많이 기억하고 글을 남겨 주십니다.

이렇듯 제 인생에서 <서편제>와의 인연은 너무도 강력해서 마치 족쇄처럼 저의 발을 묶어 놓습니다.  




 <서편제(西便制)>가 개봉된 1993년은 한국 영화사상 초유의 ‘1백만 관객 돌파’로 일대 사건이 벌어진 해였습니다.

지금은 전국 동시 개봉으로 상영 시스템이 바뀌고 천만 관객이 흔해져서 빛바랜 숫자가 되고 말았지만, 한 개의 개봉관에서 2·30만 명만 들어도 흥행 성공이라고 했던 그 무렵에 <단성사> 한 극장에서의 100만이란 숫자는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게다가 아무도 흥행하리라고 예측하지 못한 판소리를 소재로 한 영화였으니 그 충격은 더욱 컸습니다.

개봉하기 전 해인 92년 7월 말, 연극 관계 일로 분주한 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나 임권택 감독인데 의논할  일이 있으니 좀 봅시다.'

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동숭동의 한 카페에 나갔습니다.

김 선생님이 각색과 주연을 하면 나도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도 그만둘 것이오. 이청준 선생의 원작 소설인 <서편제>를 판소리 영화로 만들거요.”

"제가 지금까지 끊임없이 꿈꾸었던 일이니 만사를 제쳐놓고 하겠습니다”


판소리를 공부하면서 언젠가 판소리를 영상으로 담아 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살던 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감독님과 전남 해남의 대흥사 아랫마을에 있는 유선여관에 머무르며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해남에서 한 달 반 가량 지난 뒤, 서울에 올라 온 저는 본격적인 각색 작업에 들어 가 얼마 뒤에 시나리오의 초고를 만들었습니다.


원작자인 이청춘 선생님은 제가 각색하는 동안 단 한 마디도 간섭을 하지 않으시고, 원작과 각색은 다른 것이니 마음대로 하라고 오히려 저를 격려해주셨습니다. 

는 각색과 출연뿐만이 아니라 배우 선정의 문제, 판소리의 녹음과 선곡, 가사 수정 등 음악에 관련된 모든 일에 자문을 겸했고, 헌팅에서부터 촬영의 전 과정, 편집, 녹음, 믹싱까지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서편제>는 어느 작품보다도 저의 개인적 체험과 정서가 짙게 베인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유봉이라는 인물 속에는 제가 연극을 하고 판소리를 공부하면서 느꼈던 고통과 좌절감 그리고 처절한 집념 같은 것이 군데군데 배어 있어 때로는 저를 가슴 아프게 하기도 합니다.
 



애정과 정열, 이것이 제가 <서편제>에 참여하는 동안에 느꼈던 감정이었다면 이 작품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한창
시나리오를 쓰고 있을 때 그때 어느 영화사 제작부장과 나눈 대화 한 토막.

"선배님, 서편제라는 거 한다면서요?”
“응”
“그 영화 죽었다 깨나도 흥행이 안 됩니다!”
“왜?”
“첫째, 김명곤, 오정해를 누가 압니까?”
“그 말은 맞다. 나는 흥행 안 되는 배우고,
오정해는 판소리만 했던 신인배우이니까 흥행이 안되겠다.”
“둘째, 전통 가지고 영화해서 된 게 있습니까?
「씨받이」, 「물레야 물레야」, 「피막」.
외국영화제에 가서 상은 받을지 몰라도 흥행은 안됩니다. 
내 손에 장 지집니다.
흥행될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뽕」, 「어우동」, 여자들이 촛불 아래서 은은하게 
속곳 ,속속곳을 막 벗어줘야지 전통 가지고 흥행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바깥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이 영화의 작업에 참여한 모든 스탭과 출연진들은 “판소리가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며 판소리를 흥얼거리고 신이 나서 일들을 했습니다.



영화가 개봉되자 뜻밖에도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그 여파로 판소리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판소리의 유파에 ‘서편제’도 있고, ‘동편제’도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초등학생부터 할아버지까지 찾아오는 관객의 다양함, 끊임없이 이어지는 각계각층의 찬사, 언론과 방송의 엄청난 보도, 국내뿐 아니라 해외 동포들에게까지 파급되는 국악에 대한 새로운 관심!.

정말 ‘서편제 신드롬’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열풍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저 역시 그 열풍에 휩쓸려 몇 년간을 정신없이 지냈습니다.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 영화평론가협회 남우주연상, 자랑스러운 서울 시민상 등 생각지도 못했던 상복도 터졌습니다.



그 뒤 국립극장장과 문화부장관을 하는 동안에도 언제나 저의 이름 뒤에는 <서편제>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습니다.

지금도 많은 분들은 저를 장관보다 <서편제>의 아버지 유봉으로 더 많이 기억하시고, 친근감을 표현해 주십니다.

영화 한 편이 평생 그 사람의 인생을 따라 다니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일 겁니다.

저는 그 동안 여러 편의 영화와 연극을 하며 많은 활동을 해왔지만, 대부분이 <서편제>에 가려지고, 여지껏 <서편제>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한탄할 일입니다. 

저는 언제쯤이나 <서편제>의 족쇄에서 벗어날까요? 



하지만 그 족쇄는 저를 행복하게 해주었고, 앞으로도 제 인생을 더욱 행복하게 조여 줄 족쇄 아닐까요?

그런 족쇄를 평생 만나지 못하는 인생도 수두룩한데, 혹시 제가 복에 겨워 투정부리는 것 아닐까요?

맞아요! 제가 복에 겨워 잠깐 투정을 부린 겁니다. 

<서편제>는 제 기나긴 판소리 사랑의 결실을 맺게해 준 소중한 작품입니다. 제가 꾸던 많은 꿈들을 하나씩 이루어 갈 토대가 되어 준 귀중한 작품입니다. 앞으로 <서편제>를 뛰어 넘는 새로운 작품을 하라는 '꿈 너머 꿈'을 제시해 준 보물같은 작품입니다. 

<서편제>의 소리를 부를 수 있게 가르쳐주신 박초월 선생님, 한국문학사에 빛나는 원작 소설을 쓰신 이청준 선생님 제 투정을 들으시면 얼마나 서운하시겠어요?

잠깐 투정을 한 죄로 아깝게 먼저 이 세상을 떠나신 두 분의 영전에  "이 산 저 산"  단가를 바칩니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구나
      나도 어제는 청춘이더니
      오늘 백발 한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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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부 장관 직을 그만 둔지도 어느 덧 2년이 되어 간다.
그동안 TV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연기자로, 연극 <밀키웨이>에서는 극작과 연출가로, 최근에는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위원장으로서 즐겁고 바쁘게 살고 있다.
 

내가「대왕 세종」에 출연하고 있을 때, 모 일간지에 동정 기사가 실렸는데 그 기사의 제목이 한동안 여기저기서 화제가 됐다.


김명곤 씨 “장관 껍데기 훌훌~ 다시 광대로”

“장관이라는 껍데기를 훌훌 벗어 버리고 이제 천직인 광대로 탈바꿈해야죠. 걱정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허허.”

김명곤(55·사진)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내년 1월 방송 예정인 KBS 1TV 사극 ‘대왕 세종’(극본 윤선주·연출 김성근)에서 배우로 복귀한다. 1999년 자신이 연출한 연극 ‘유랑의 노래’에 출연한 지 8년 만이다.

그는 그동안 국립극장장과 문화부 장관을 지내면서 연기와 멀어졌다.김 전 장관은 ‘대왕 세종’에서 고려 황실의 후예로 조선 왕조의 전복을 꿈꾸는 옥환 역을 맡았다. 옥환은 어린 세종을 긴장하게 만드는 인물로 초반 30회까지 비중이 큰 역할이다. 그가 대하 사극에 출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D일보 2007년 10월 6일자 기사 중 일부)

나는 대학교 다닐 때만해도 광대라고 하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코에 빨간 공을 붙인 서양의 삐에로를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줄타기하는 광대를 처음 보았는데 그 광대가 줄에 올라서서 “이 줄타기가 옛날에는 화랑의 기예였소!.” 하길래 깜짝 놀랐다. "화랑이라면 신라 시대의 무사 집단인데 줄타기를 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며 광대에 관한 기록을 찾아봤다.

우리나라에 그윽하고 오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며 유교, 불교, 도교의 3교를 포함한 것으로 민중을 교화하는 것이다.

신라 시대의 학자인 고운 최치원이 쓴 글이다. 이 글을 바탕으로 역사가인 단재 신채호는 이렇게 썼다.
 

선가(仙家)는 신라의 국선 곧 '화랑'으로 보며, 그 시원은 삼한의 소도(蘇塗)의 제관으로 고구려의 '조의선인(鳥衣仙人)'이다.

이런 글들을 보니 고대사회에서 예술가들은 하늘에 국가적 제사를 지낼 때는 제관으로서 활동했고, 그들의 신분은 왕족이나 귀족에 속하는 상류계급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통일신라가 무너지고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화랑들과 함께 예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천민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광대”라는 말은 고려시대에 서역에서 들어 와 우리말로 정착된 외래어인데, 예술가를 지칭하는 단어인 광대가 화랭이, 재인 등의 용어와 뒤섞이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광대들은 기생, 무당, 중, 백정 등과 함께 천민계급으로 살아야 했다. 이들은 사대부나 평민들과 한 동네에서 살지도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하고,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자기들끼리 기예를 전수하면서,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고, 그들만의 독특한 사회를 꾸려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광대들에 대해 다산 정약용은 이런 상소문을 썼다.

광대가 봄·여름이면 고기잡이를 좇아 어촌으로 모여들고 가을과 겨울이면 추수를 바라고 농촌으로 쏠리는데, 특히 창촌에서는 사당, 창기, 주파, 화랑, 악공들의 잡류들을 엄금해야 합니다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본 <왕의 남자>는 이 무렵의 떠돌이 남사당 광대패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실학사상이 일어나고 평민 가사, 탈춤, 판소리 등의 가치를 양반들 중의 몇몇이 언급하게 되면서 광대들의 가치가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고종과 대원군이 권력을 쥐었던 무렵에는 광대들이 왕족이나 고위 관리들의 잔치에 초대받고, 심지어 명인, 명창, 국창 등의 이름으로 궁궐에 들어가 임금 앞에서 기예를 선보이며 많은 돈을 벌고 신분의 상승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조선이 망한 후 광대들은 또 다시 천대받게 된다. 그 상황은 일제시대의 학자인 육당 최남선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조의 재인, 광대들은 적극적으로 특별한 권장을 입지 못하고, '무식무기력한 예인'들이 사회 최하층적 지위에서 구차히 존재하다 보니까 거기 쇠잔이 있을 뿐이지 발달이 없으며 저락이 거듭될 뿐이지 향상을 볼 수 없음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조건 하에 있다 보니까 '수 천 년을 하루같이' '몸을 놀리는 기술'과 '우스개 놀이'쯤에 그치고 드디어 다른 데 만한 순희곡적 생장을 이루지 못하고 만 것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명 풍화에는 조금도 유익한 바가 없으니 이는 연희를 실시하는 자가 학문이 없어 '동양의 부패한 풍습'만 알 뿐이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했던 <서편제>는 이 무렵의 떠돌이 판소리 광대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나는 대학시절에 오페라나 이태리 민요나 가곡이나 뮤지컬이나 비틀즈 등의 서구음악의 열광적 팬이었고, 괴테나 세익스피어나 입센이나 도스토에프스키 등의 서구문학(독문학)에 심취했던 사람이다. 그러다 우연히 판소리를 알게 된 후로 내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고향인 전주를 무지 싫어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의 흔적이 너무나 짙은 그 곳을 어서 떠나 서울로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진학공부를 했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도 한국을 빨리 떠나 독일로 유학 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인간문화재인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면서 전라도 말이 그렇게 다양한 표현과 영롱한 문학적 향기가 있는가를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핏줄에 대한 애정 곧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나의 조상과 조국에 대한 사랑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전통은 박물관에 진열된 골동품이 아니다. 전통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았던 삶의 내용과 형식 곧 그 분들의 삶의 자취이고 향기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세월이 지나면 전통의 계승자가 될 것이며, 언젠가는 전통 그 자체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나에게 전통은 ‘나를 숨쉬게 하고, 나를 활기 있게 만들어 주고, 또 창조의 열정에 불타게 하는 소중한 원천이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무식무기력’한 광대들에게서 내 예술의 많은 부분을 배웠다. 나는 ‘수천 년을 하루같이’ ‘동양의 부패한 풍습'을 몸으로 전해 온 그들의 예술에 매혹 당하고 심취하고 깊이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들의 ‘몸을 놀리는 기술’ 속에서 삶의 깊은 애환과 감동을 보았고, 그들의 ‘우스개 놀이’ 속에서 예술적 창조의 편린을 보았다. 그들은 나의 스승이었고, 나의 애인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 종족의 일원이 되고자 ‘광대’라는 말을 쓴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연기, 연출, 극작, 경영, 행정에다가 연극, 영화, 국악, 방송 등 여러 분야에 간여하는 것을 보고 혼란스럽다고 한다. 

당신의 정체는 뭔가? 아마도 이게 그들의 질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나는 그 모든 것을 추구하는 광대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럼 당신은 어떤 광대가 되고 싶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
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라는 책에 나오는 발렌친 카그다예프라는 브리야트 족의 샤먼과 저자와의 대화로 대신하고자 한다.

질문 : 당신 삶의 목표는 무엇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

답변 : 훌륭한, 혹은 좋은 샤먼이란 자신이 함께 살아가는 민족을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는 좋은 샤먼이 되고 싶고, 따라서 우리 민족이 서로 도와가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본다.-----사랑을 나누고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모든 샤먼이 지녀야 할 미덕이다.

반면 모든 악과 문제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과 자연과 사물을 착취하는 데서 발생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인내하고 이해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남을, 상대방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상대가 원하기 전에 그가 원하는 것을 먼저 베풀어 주는 것이 사랑의 첩경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현자와 성자들이 설파했던 조화와 사랑, 이것의 실천자로서의 샤먼 곧 ‘무당’의 역할에 대한 바이칼 샤먼의 지혜로운 말이 ‘광대정신’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광대란 '넓은 광(廣), 큰 대(大)'라는 말 뜻 그대로 ‘넓고 큰’ 영혼으로 세계의 불화와 고통에 정면으로 마주 서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온 몸으로 감싸 안고 표현하는 예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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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겨우 인터넷 검색이나 하고, 문서나 작성하고, 메일이나 교환하던 수준의 컴맹이다. 게임도 못하고, 채팅도 못하고, 사진 올리기도 못하는 내가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다.

무려 10만 명이 넘게 방문한 베스트 글 "김명곤 전 장관, 백지영 노래 듣고 눈물 흘리다"의 필자인 탐진강님의 전적인 권유와 가르침과 후원으로 시작한 도전이다. 한 달 반쯤 전, 참으로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된 님과의 인연이 내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게 해 줄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미니 홈피와 블로그의 차이점도 몰랐던 내게 블로그의 세계를 가르쳐주고, 그 무한한 가능성의 미래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고, 블로그의 개설과 글쓰기와 사진 올리기의 세세한 방법을 가르쳐 준 님께 감사 또 감사 드린다.

나는 지금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다. 나 혼자 수필을 쓰거나, 희곡이나 시나리오를 쓰거나,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를 하기 위해 자판을 두드릴 때는 느끼지 못했던 현상이다. 

지금 내가 두드리는 이 글이 발행 키를 누르는 즉시 수많은 미지의 블로거들에게 읽히고, 누군가가 내 글에 대한 반응을 보내 올 거라고 생각하니 흥분도 되고 마구마구 설레인다.


사춘기 때 연애 편지를 쓰면서 느꼈던 두려움과 설레임을 50대 후반의  이 나이에 다시 느끼다니!

앞으로 이 광대한 블로그의 신천지에서 어떻게 소통하며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 짝이 없지만, 초보 탐험가의 순진한 열정으로 조심스레 새로움의 첫발걸음을 내딛는다.

내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워져서 인사를 하면
이웃도 새로워진 얼굴을 하고
새로운 내가 되어 거리를 가면
거리도 새로운 모습을 한다.

<구상 시인의 ‘새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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