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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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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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나무'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07.07
    '장구 귀신에 씌운' 장구의 대가, 신기남 명인 (14)
  2. 2010.02.05
    첫 직장 응시했던 '자기소개서' 다시보니 (42)
  3. 2009.08.14
    영원한 봄처녀, 나의 어머니! (36)
  4. 2009.08.08
    평생 인연 맺어진 첫 직장「뿌리깊은 나무」 (26)

신기남 명인은 ‘농악 장구의 대가’였습니다. 

요즘의 젊은이들에게는 장구가 무척 낯설고 예스러운 악기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우리 음악에 길들여진 시골 사람들에게 장구는 다른 어떤 악기보다도 친근하고 멋스러운 악기로 사랑을 받았습니다. 농촌 사람 치고 장구 한 가락 못 치는 사람이 없을 만큼 우리 민중의 생활 속에 깊이 파고 들어 그들의 흥과 한을 풀어내는 데에 한몫을 단단히 해 온 악기였습니다.

장구는 그 쓰임새가 굉장히 넓어서 궁중 음악인 정악을 비롯해서 산조, 무속 음악, 잡가, 민요, 농악에 이르기까지 두루 쓰입니다. 본디는 서역의 악기였으나 중국의 송나라를 거쳐 고려 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뒤로 우리나라 악기가 되었습니다.

소나무나 오동나무로 만든 울림통의 양쪽에 개가죽이나 말가죽이나 소가죽을 매어 놓고, 대로 만든 채로 그 가죽을 쳐서 소리를 냅니다. 장구의 오른쪽 가죽을 '채편'이라 하고, 왼쪽 가죽을 '북편'이라고 하는데 두 곳의 소리가 서로 다릅니다. 말가죽이나 개가죽으로 만든 채편에서는 밝고 화려한 소리가 나고, 소가죽으로 만든 북편에서는 깊고 무거운 소리가 납니다.

출처 : http://www.topianet.co.kr/topia/4/4u/u4...0002.htm

이렇듯 장구는 우리나라 전통 음악에서 두루 쓰이고 있지만, 장구의 진짜 맛은 농악에서 우러나옵니다. 다른 때는 반주 악기 구실 밖에 못하는 데 농악에서는 꽹과리, 북, 징과 어울려 합주 악기로서 한몫을 단단히 하고, 또 ‘구정놀이’를 할 때는 독주 악기로서 빛을 내기 때문입니다.

구정놀이는 농악을 치는 순서 중에 장구 치는 사람이 혼자 나와 장구를 치면서 이리저리 뛰기도 하고 맵시있게 춤도 추고 솜씨를 자랑하는 것을 말하는데, 신기남 명인은 전라도 지방에서 이 구정놀이의 대가로 꼽혔던 사람입니다.

구정놀이 하는 모습.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GE_CD%3D

정확하고 법도에 맞는 붙임새, 완벽하게 조화된 가락의 이음새, 느릿하게 흘러갈 때는 저절로 춤이 나올 만큼 흥겹게 치다가도 급하게 몰아갈 때는 숨이 가빠올 만큼 격하게 휘몰아치는 표현의 다양함, 이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장구와 함께 살아오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솜씨입니다.

신기남 명인은 전라북도 정읍군 소성면 대용리에서 1914년 1월 6일에 농부인 신봉득의 아홉 남매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려서부터 마을에서 '굿'을 치기만 하면 사족을 못 쓰고 쫓아다녔습니다. 굿은 요즘의 ‘농악’을 일컫는 말인데, 그때는 농악이라고 부르지 않고 ‘풍물’이니 ‘풍장’이니 ‘매구’니 ‘두레’니 하는 말로 불렀습니다.

정월 보름이나 팔월 한가위 같은 명절이 돌아오면 온 마을에 풍물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꽹과리, 장구, 북, 징, 나팔을 든 ‘치배’들이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당산에 올라가서 '당산제'를 지내기도 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복을 빌어 주는 '마당밟기'도 하고, 저녁에는 마을 공터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잽이들의 온갖 재주를 보여 주는 '판굿'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집집마다 굿패들을 한두 사람씩 맡아 옷감을 떠다가 옷을 새로 해 주고, 고깔도 만들어 씌어 주고, 밥 짓고 떡 하고 술을 빚어 굿패들과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먹고 마시며 며칠 동안 노래하고 춤추고 푸짐하게 놀았습니다. 힘겨운 농사일로 피곤한 날들을 보내는 농부들에게 며칠이나마 푸짐하게 먹고 굿패와 더불어 춤추고 노래하는 것은 신명나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때에 역시 가장 신나는 것은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굿패를 따라 다니며 떡도 집어먹고, 술도 훔쳐먹고, 노래도 따라 부르고, 춤도 흉내내어 추어 보며 바쁘게 돌아 다닙니다.

신기남도 그런 아이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농악대의 갖가지 풍물 중에 그는 유달리 장구소리에 넋을 뺏겼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방에서 목침을 몰래 꺼내다가 장구 대신 에깨에 걸머지고 굿판으로 달려가기 일쑤였고, 집에서는 장구소리를 흉내내어 손바닥으로 방바닥이고 마룻바닥이고 솥뚜껑 위고 어디나 두드리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손을 떨면 복이 달아난다고 못하게 말렸습니다. 말로 해서 안 되자 피가 나게 매도 때렸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못된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들에게 장구를 가르치기로 마음먹고, 어느 날 마을에 굿패가 들어왔을 때 전라도에서 설장구로 이름난 김홍집 명인에게 음식과 입성을 대주기로 하고 아들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김홍집은 성질이 불같이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걸핏하면 겨우 열 살밖에 안 된 어린 제자를 때리고 욕하고 벌을 주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요새 세상에 그 개가죽 뚜드리는 법 좀 가르친다고” 매를 때렸다가는 “당장에 장구를 발로 차 버리고 달아나 버릴” 테지만 그는 달아나지 않고 열심히 장구를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정읍에 가지고 있던 땅을 몽땅 팔아 큰아버지가 사는 임실로 이사를 갔는데, 운세가 좋지 않았는지 그 해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농사를 몽땅 망쳤고 아버지는 큰아버지와 낚시질을 한다고 저수지에 갔다가 함께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뒤로 홀로 된 어머니는 올망졸망한 아홉 남매를 먹이고 입히느라 갖은 고생을 다했습니다. 그가 장구를 열심히 배운 데에는 이런 까닭도 있었습니다. “내가 배우지 못 했응게, 긍게 어디 가서 봉급 생활도 못 허고 헝게, 이거라도 열심히 배워서 한국에서 제일인자가 되야서 어머님께 효도를 드려야겄다”는 생각으로 그는 더 열심히 장구를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스물두어살이 되었을 때 김제에서 마을 회관을 세우는 걸립굿에서 장구를 치는데, 구경꾼들이 들어서서 앞에서 치는 김홍집을 제자인 신기남의 뒤에 갖다 세우는 바람에 스승은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를 떴습니다. 그로써 둘은 갈라져서 저마다 다른 굿판으로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오늘날처럼 농악이 시들하지 않고 마을마다 농악이 활발하게 공연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점차로 솜씨좋은 ‘장구잽이’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창극단을 따라 전국을 떠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창극단이 공연을 할 때에는 으레 농악단이 따랐습니다. 먼저 농악대가 나팔을 불고 장구, 꽹과리, 징을 치면 멀리서도 풍물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굿판에 모여들므로 창극단에 농악패가 어울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농악이 ‘앞과장’을 맡아서 사람을 모으고 흥을 돋우어 놓으면 창극이 소리와 극으로 ‘뒷과장’을 맡아서 사람들을 울리고 웃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판소리 명창들이 조직한 창극단에 농악 단원으로 어울려 같이 다니게 되었습니다.

여자 명창인 이화중선이 꾸민 ‘남율 회사’ 에 들어가서는 거의 반 년 동안이나 한반도 곳곳을 순회하고, 일본의 시모노세끼와 만주의 봉천에까지 가서 공연을 했습니다. 또 임방울이나 김연수와 같은 명창들이 만든 창극단을 따라서 전국을 돌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여자들하고 많이 놀았습니다. “여그 가도 각시 저그 가도 각시 천지가 각시여” 라는 말을 얼마쯤 눅여 들어 주더라도 그의 한량스러웠던 몸가짐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그의 바람기 때문에 퍽이나 가슴을 앓았을 터인데도 그의 아내는 이제껏 바가지 한번 긁지 않아 그걸 고맙게 여기는 신 명인은 “이제 와서 다 지내 놓고 나니 그것들은 그때만 쬐께 좋고 늙고 얽고 뻐드러져도 본각시가 제일”이라고 은근히 본각시 자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기남 명인은 제가 뿌리깊은 나무 민중자서전 <어떻게 허먼 똑똑헌 제자 한 놈 두고 죽을꼬?>를 쓰기 위해 만났던 80년대, 임실군 운암면 기암리에 있는 오두막에서 참으로 쓸쓸하게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출처 : http://www.hwbook.com/mart/search.php3%...6p%3D204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입석’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두 시간쯤 산길을 달려가니 임실군 운암면 입석리에 이르더군요. 그곳에서 기암리 가는 길을 물어 삼십분쯤 다시 들길을 걸어가니 지금은 '옥정호'라고 불리는 '운암 저수지'의 한 모서리가 나타나고, 그 저수지 옆길에서 왼쪽으로 접어 들어 조금 걸어가니 열두엇 되는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기슭에 이르렀습니다. 그 마을의 어귀에 서 있는 정자 나무를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담배’라는 간판이 처마 밑 대들보 위에 매달려 있는 초라한 집이 첫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해 예순여덟이던 신기남 명인은 아내와 함께 그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지게를 메고 갈퀴를 지고서 손수 농사를 지어 먹고 나무 등짐을 해다가 불을 때며, 아내는 집안살림이며 농사의 잔일을 도맡아 하면서 고생스럽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기암리는 운암 저수지의 수몰 피해를 입은 수재민들이 모여서 이룬 마을 중의 하나였습니다. 1965년에 운암댐이 완성되어 물이 점차 차들어오자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주민들은 저수지 부근의 고지대로 올라가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신기남 명인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이 썩어 버리고 죽어버린 마을이라고 한탄했습니다. 가난한 산골 생활에 지친 그의 아내는 도시로 나가서 살자고 조르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도시에서 죽으면 공동묘지에나 묻힐 텐데 그 꼴을 어떻게 당하느냐고, 고생스럽더라도 선산이 있는 이곳에서 살다 죽자고 말하며 아내를 달랩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고생스런 산골 생활이 못내 한스러워 서울이나 군산에서 살고 싶은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의 집 비좁은 마당에는 닭장도 있고, 돼지우리도 있고, 소 외양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닭도 없고, 돼지도 없고, 소도 없었습니다. 장마만 지면 논밭이 모두 물속에 잠겨 버리는 통에 애써 농사를 지어 봐야 일 년 양식을 채우기에도 힘겨운 형편이니 닭이니 돼지니 소가 남아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 부부는 농사로 못 채우는 양식을 담배 장사를 해서 채우고 있었습니다. 비좁은 방 한구석에 담배를 쌓아 놓고 ‘풍년초’도 팔고, ‘새마을’도 팔고, ‘환희’도 팔고 있었습니다.

기운이 팔팔하던 이십 년 전만해도 전국 농악 대회의 개인 부문에서 우승을 해서 대통령상을 받기도 하고, 제4회 전국 대사습 대회에서 개인 특기상을 받기도 하며 화려한 세월을 보냈지만 그런 일들도 이제는 먼지 낀 상패와 함께 희미한 옛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고생스런 살림을 하면서도 신기남 명인은 자기에게 장구를 배우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집에서 먹이고 재워 가며 정성스럽게 가르쳤습니다.

배우는 사람 보다 더 열을 내어 농사를 하는 틈틈이 장구통을 차고 앉아 ‘개가죽을 두드렸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하루종일이라도 쭈그리고 앉아 자신의 살아 온 얘기를 들려줄만큼 기운이 팔팔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뒤 제가 두번째 찾아갔을 때, 그는 중풍으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말도 못하고 정신도 못 차리고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병세가 중했는데, 다행히 손발이 마비되는 위험한 고비를 넘겨서 말도 하고 사지도 마음대로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그의 눈은 빛을 잃고 깊게 잠기어 있었으며, 입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가끔씩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남편을 안타까이 바라보는 그의 아내는 ‘장구 귀신이 씌였나 비여’ 하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봄볕이 따가운 어느 날 오후, 서울서 내려온 무례한 손님이 아직 완전히 회복도 하지 못한 병자에게 장구소리를 들려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는 조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벽장 속에서 장구를 꺼내왔습니다. 아내가 장구통을 마루 위에 내려 놓자, 신기남 명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병자답지 않게 익숙하고 재빠른 동작으로 장구통을 자기 앞에 끌어다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침착하게 장구채를 잡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다스름’을 넣었습니다. 장구소리가 제대로 나는지 다스려 보는 것입니다.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서 장구소리를 들어 보더니 점차 힘을 넣어 가락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정기 정기 정 저르르르 저정기 저기 정저르르르 정정 저기저정기 저저정 쿵”

장구가 무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그맣게 속삭이기도 하고,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느릿하게 흥얼거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손을 놀릴 때마다 조그마한 장구통 안에서 온갖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신기남 명인은 자기가 병자라는 것도, 아내가 옆에 서서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것도, 그의 장구 가락을 좋아하는 마을 노인들이 넋을 잃고서 듣고 있는 것도 까마득히 잊은 채 장구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의 장구소리는 '썩어 버리고 죽어 버린' 마을을 맴돌다가 저수지의 푸른 물을 건너 앞산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날이 갈수록 시들어 가는 이 나라 전통 음악의 귀한 가락 하나가 점점 짙어져 가는 산그늘 속으로 스러져 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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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옛 노트들을 정리하다가 노트 사이에 낀 낡은 종이 몇 장을 발견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제가 28세 무렵, 첫 직장인 <뿌리깊은 나무>의 응시서류에 첨부했던 '자기 소개서' 초고더군요.
낙서장처럼 지저분하지만 까마득히 잊고 있던 글을 보니 무척 반가웠습니다. 
정서를 해서 보낸 최종 원고는 사라졌지만, 기억을 더듬어 초고를 약간 다듬어 정리해 봤습니다.
제 청춘의 '구직'에 대한 꿈과 열망을 엿볼 수 있는 글이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기록으로 남깁니다.
마지막 문장 이후는 생각이 나지 않아 미완으로 남겨둡니다.

 



바람이 많고 황폐한 땅에 나무가 한 그루 자라는데, 아직 줄기는 가늘고 가지는 연약하나 뿌리가 깊어 가히 앞날의 무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강물이 샘에서 시작하듯 나무 또한 그 뿌리에서 모든 것이 시작하며, 새벽빛이 맑으면 그날의 태양이 밝고, 샘이 깊으면 강물이 마르지 않듯이, 나무 또한 뿌리가 깊을수록 땅 위의 수확이 풍성합니다.

그러나 뿌리는 땅속에 있어 그 깊이를 알 수 없고 다만 그 솟아나온 가지나 잎을 보아 뿌리의 깊이를 측량할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의 한계인지라 사람들은 치밀하게 따지고 재고 시험해 보나 결국 얻는 건 그릇된 판단과 뒤바뀐 지식, 그리고 오해입니다.

물론 나무는 바람과 추위를 이기고 우람한 모습을 드러내게 될 터이지만 그 전에 나무에게 필요한 건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자기 뿌리의 깊이를 알아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따뜻한 보살핌입니다. 그것이 있음으로서 나무는 더 빨리, 더 높이 자라는 것입니다.

옛 말에 천리마를 구하려는 사람은 천리마의 뼈를 천 냥에 샀다 했습니다. 또 큰 인물을 얻으려는 어떤 사람은 닭소리만 잘 내는 사람도 그를 밑에 두어 후히 대접했다 했습니다.

저는 감히 천리마나 큰 인물이라고 자만하지 못하나 천리마의 뼈나 닭소리를 내는 사람이 되어 천리마나 큰 인물을 끌어들이는 전초의 한몫을 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약 저의 뿌리가 다른 나무보다 깊다고 믿고 보살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온 힘을 다해 성장할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뿌리깊은 나무>사에서 추구하는 많은 것들에 대해 저는 존경과 대결의 자세로 지켜보아 왔습니다. 존경이란 제가 어려서부터 간직하고 키워오던 많은 꿈들을 그곳에서 저보다 먼저 그것도 감탄할만하게 눈앞에 펼쳐 놨다는데 대한 존경이고, 대결이란 눈앞에 펼쳐진 것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허점을 찾아내려는, 그리하여 내 꿈에 대한 반성의 거름으로 삼고 새로운 꿈을 만들어내려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제가 그동안 공부했던 것은 독어과 출신답지 않게 한국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문화의 모든 형태와 본질, 특히 한국 문화의 원형을 찾으려 참으로 잡다한 것들을 공부했고 약간의 결실도 있었습니다.

그 대신 상식과 어학 실력은 남보다 뒤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직의 문턱에 있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결점이지만 저의 약점을 솔직히 밝혀드리는 것은 저의 장점이 결점을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뿌리깊은 나무>사의 이념과 그 사업 내용이 제가 참으로 하려 했던 것, 하고 싶던 것들이어서 제 능력이 미치는 한 온힘을 다해 결점을 복구할 결심이 섰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때는 주로 문학 방면에서 활동을 했고, 대학교에 들어와서는 방송과 연극 활동을 하면서 한국학에 몰두하여 예술, 종교, 철학 등 여러 가지를 조금씩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기쁨으로 삼는 것은 이러한 개개의 지식과 활동보다 공부한 모든 것을 종합하여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는 것입니다......(미완)


이 자기소개서를 보낸 뒤 서류심사에 합격한 저는 100여명의 응모자 중 2명을 뽑는 2차 심사의 좁은 관문을 통과해서 근무하던 중, 심각한 '연극병(?)'이 발병하는 통에 1년 뒤에 정든 직장을 떠났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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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고향 전주에 저하고 친한 클래식 키타리스트가 있는데, 얼마 전에 자신의 콘서트에서 청중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머니'가 뭔지 아세요?
(청중들) 돈!
그거 보다 더 좋은 머니가 많이 있는데 아세요?
(청중들) .....?
할머니! 아주머니! 호주머니!
(청중들) 아하.....
에그머니! 슬그머니!
(청중들) 하하하...
그 중에서 가장 귀한 머니가 뭔지 아세요?
(청중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머니는 '머니머니'해도 '어머니'랍니다!
(청중들) 박수!
지금 들려드릴 연주곡을 키타 치는 자식 때문에 속 많이 태우셨을 제 어머니에게 바칩니다.  


그는 그 말 덕분에 키타 실력보다 말솜씨가 더 좋다는 평까지 받으며 콘서트를 멋지게 마무리했답니다.


오늘은 제 어머니가 돌아가신 기일입니다.

친구는 키타 연주를 어머니에게 바쳤지만, 저는 이 글을 저 세상에 계신 어머니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저는 아버지로부터도, 또 어머니의 형제들인 이모들로부터도 “너의 엄마는 천사이셨다.”는 말을 종종 들었습니다. 또 저의 누이들과 형제 그리고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남편과 자식들과 자매들한테 그런 칭송을 받으시는 걸 보면 어머니는 분명 저 세상에서 천사가 되어 행복하게 살고 계실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님 살아 생전에는 행복과 불행이 극심하게 교차된 삶을 사셨으니, 착한 마음으로 굴곡진 삶을 이어오신 보상으로 그런 칭송을 들으시는지도 모릅니다.

전북 봉동의 1남 5녀 딸부자집의 장녀로 태어난 어머니는 봉동에서 소문난 미인이셨다 합니다.

얼굴이 어여쁘고 얌전하고 전형적인 조선의 미인이셨던 어머니는 스무살에 자기보다 아홉 살 많은 노총각이셨던 아버지를 만나 시집을 오기까지, 행복하고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혼사진.

신혼 초에도 아버지는 의료기구 영업을 하시며 돈을 잘 벌었고, 어머니는 미용 기술을 익혀 전주 시내 한복판에 백합 미용실을 열어 백합처럼 '청초하고 우아하게' 사셨습니다.


부모님의 여행사진. 

홀로되신 시어머니와도 사이좋게 지내시며 딸 셋을 내리 낳고 첫아들인 저를 낳기까지 우리집에서는 그 시절에 구하기 힘든 피아노 소리와, 처녀 미용사 이모들의 웃음소리와, 어머니의 고운 미소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세 살 무렵, 집의 정원에서 어머니의 미소와 함께.

그러다가 제가 대여섯살이 되었을 무렵, 남의 빚보증 잘못 서 준 일로 미용실이 문을 닫고 살던 집도 팔고 전세로 옮기면서부터 가세가 급속히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전세에서 월세로, 월세에서 단칸 셋방으로 이삼년이 멀다 않고 이사를 다니는 통에 시내 중앙지에서 점점 변두리 동네로 흘러가게 되었고, 어머니는 화장품 외판원이든 이불장사든 닥치는대로 일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2남 4녀의 우리 형제들은 시커먼 보리밥과 밀가루 수제비도 가끔씩 거르며 허기를 매꿔야 했고, 온 식구가 밤 늦게까지 둘러 앉아 과자봉투에 풀붙이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힘든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불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을 경청하고 존경했으며, 남편에게 순종했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폭군은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의 모든 아버지처럼 무뚝뚝함과 고집과 울분과 술 그리고 이따금씩 내뱉는 고함소리가 있었지만, 단 한번도 아내에게 손찌검하는 것을 보지 못했을 만큼 어머니를 사랑했습니다.

몸이 허약한 어머니를 대신해서 집안의 잔일이나 청소를 부지런히 하실 뿐만 아니라, 한밤중이나 새벽에 일어나 연탄 갈아끼우는 일은 아예 도맡아 할만큼 자상한 면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우리집은 여전히 빚과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장사를 하기 위해 여기저기 다니시는 통에 집에 계신 날보다 안 계신 날이 더 많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중, 혈압에 이상이 생겨 한번 졸도를 하셨다가 쓰러지신 뒤로 급속히 몸이 약해지셨습니다. 다행히 아버지가 일자리를 얻어 월급을 받게 된 덕에, 제가 대학 다닐 때는 우리집이 조금은 정상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참으로 오랜만에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을 꾸리는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전셋집의 한뼘쯤 되는 뒷뜨락에 상추를 심고 강아지 한 마리와 토끼를 기르며,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렸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는 동안, 어머니는 점점 늙고 허약해지셨습니다. 그 곱던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허리도 굽고 걸음걸이도 뒤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집안 일을 하는 것도 힘들어 하셨고, 집으로 가는 언덕길을 오르내리기도 힘에 겨워 하셨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뿌리깊은 나무」 기자로 직장을 얻어 온 식구가 서울의 변두리에 모여 살게 되었을 때, 어머니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져 갔습니다. 그것이 간암의 말기 증세라는 병원의 진단을 받았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저는 가슴을 치며 연극병에 걸려 어머니의 고통을 미리 살피지 못한 불효를 자책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온 가족과 친척들도 평생 고생만 하다가 병마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안타까워 했습니다. 어머니는 복수와 혼수상태에 시달리다가 예순도 채 안된 젊은 나이에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천사같은 어머니를 그리워하시다가, 몇 년 뒤에 어머니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얼굴도 보지 못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무덤을 놀이터로 알고 자라난 손자 손녀.

어머니는 조그마한 일에도 기뻐하고, 낙천적이고,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는 분이었습니다. 또 남의 괴로움에는 한없이 따뜻한 마음으로 동정을 하지만, 자신의 고통은 남에게 알리지 않고 스스로 삭이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런 마음 씀씀이는 자식들에게도 한결 같았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한번도 매를 맞거나 큰소리로 꾸지람을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언제나 상냥한 미소로 저를 대하시고, 제가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자애로운 눈으로 저를 바라보시곤 했습니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남에게 불평을 하거나 남의 욕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토록 착하신 기질 때문에 이승에서 더욱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구원의 여성상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저에게 어머니는 '영원한 봄처녀'입니다.


'영원한 봄처녀', 어머니의 처녀 시절 모습.

어린시절, 어머니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은 모습으로 가끔씩 부르셨던 애창곡 <봄처녀>의 노랫말처럼요.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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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후 일 년쯤 지난 1977년 3월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도 연극에 빠져서 ‘예술가 지망 백수’로 허우적거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장남이란 책임 때문에 연극을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열심히 취직자리를 알아보던 중,『뿌리깊은 나무』잡지사의 기자 공모 광고를 우연히 신문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몇 달 전에 서점에서 산 『뿌리깊은 나무』의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 어린 탐색이 제 취향과 딱 들어맞아서 애독자로 지냈던 터라, 주저하지 않고 서류를 내고 시험을 봤습니다. 다행히도 연세대학교 출신의 재원인 김인숙씨와 함께 합격해서 대망의 ‘첫 직장’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글 고치기로 '악명' 높았던 『뿌리깊은 나무』.

한창기 사장님을 비롯해서 윤구병 편집부장, 김형윤, 설호정, 강창민, 박종만, 김영옥 등 내노라하는 문장가들이 모여 있던 잡지사인지라 동료나 선후배들과도 즐겁게 지냈고, 취재하고 글 쓰는 기자로서의 일도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유일하게 싫어했던 일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필자들이 보내 온 원고를 손질하는 일이었습니다.

『뿌리깊은 나무』의 ‘글 고치기’는 글쟁이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습니다. 한글 전용, 가로쓰기, 지식인 언어와 민중 언어의 조화, 국어의 얼개와 어휘에 대한 탐구를 통한 편집과 교열―이것이 『뿌리깊은 나무』가 남의 글을 '마음대로 뜯어고치는' 당당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당대 이름난 문장가들의 글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사정없이 뜯어 고쳐져서 재조립이 되다보니 그런 일을 처음 당하는 필자들은 노발대발하고 원고를 집어 던지며 화를 냈습니다. 그래도 정성을 다해서 설명하면 대개는 누그러져서 포기하곤 했습니다.

글을 다듬어나가는 동안 문장 공부도 많이 하고 글에 대한 무서움도 알아 갔지만, 기본적으로 내 글을 쓰는 시간보다 남의 글을 다듬는 시간이 많다보니 일 자체에 대한 의욕은 많이 감소되었습니다.


나를 매혹시킨 <브리태니커 판소리 감상회>.

그 대신 회사에 대한 애정과 일에 대한 나의 의욕을 북돋워준 멋진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브리태니커 판소리 감상회>가 그것이었습니다.

칠십 명쯤 앉을 수 있는 1층 회의실을 임시 공연장으로 만들어, 일주일에 한 번씩 한 시간쯤 명창들을 초청해「춘향가」나「심청가」나「흥보가」나「수궁가」나「적벽가」의 완창을 무료로 감상하는 공연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완창이 서너 시간씩 걸렸기 때문에 한 작품 당 2회나 3,4회에 나누어서 진행되었습니다. 그 무렵에 조상현, 정권진, 성우향, 오정숙과 같은 쟁쟁한 명창들의 소리를 완창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소리북도 김명환, 김득수, 김동준 등 당대 최고의 고수들이 쳤으니 정말 귀하디 귀한 소리판이었습니다. 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 감상회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 중, 박록주 명창이 출연한 소리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무대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때 이미 80세가 넘은 나이로 병마와 싸우고 계셨던 노명창은 제자의 발표 무대에 격려사를 하기 위해 제자들의 부축을 받고 무대 위로 올라섰습니다.

젊은 시절, <동백꽃>의 작가 김유정의 짝사랑을 받아 유명세를 탔던 박록주 명창은 김소희, 박초월 명창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여류 명창이었다. 


“내가 소리를 한지 한 60년이 되어 가는데, 이제 조금 귀가 뚫리려 하니까 숨도 차고 곧 골로 갑니다.”

하시더니 지팡이를 짚고 앞줄에 앉아 있는 노인들을 죽 바라보면서 농담을 했습니다.

“내가 어려서 소리할 때 자주 오셨던 저 분들도, 인제 나와 함께 골로 가게 생겼네요.”

그러자 앞에 앉은 노인 몇 분이 “얼씨구!”하면서 소리쳤습니다.

“지금 내가 숨도 차고 목도 안 나오고 해서 소리를 하러 나온 건 아니지마는, 우리 제자 길을 닦아주기 위해서 잠깐 단가 한 마디 하고 내려갑니다.”

관객의 박수와 함께 노명창의 노래가 시작되었습니다.

백발이 섧고 섧다
백발이 섧고 섧네
나도 어제 청춘이더니
오늘 백발 한심하다 

노명창은 가만히 서서 조용조용 노래를 부르다가 중간에 부채를 좍 펼쳤습니다. 그러자 “얼씨구!”, “좋다!”하는 추임새로 객석이 요란하게 들썩거렸습니다.

노명창은 목이 메는 듯 노래를 다 마치지 않고 중간에 퇴장하셨습니다. 그녀가 퇴장한지 한참이 지나도록 객석의 박수와 함성소리는 요란했습니다.
 
노래 부르던 명창도, 그 노래를 듣던 올드 팬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청춘의 추억과 노년의 외로움과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회한에 잠겨 어쩔 줄 모르는 듯 했습니다.

29살의 어린 저 역시 무언지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가슴 속에서 차올라 눈물을 흘렸습니다.

무대도 없고 조명도 없고 병풍도 없는 그야말로 초라하고 벌거벗은 무대에서, 불편하기 짝이 없는 간이 철제 의자에 앉은 관객들과 예술가가 한 마음이 되어 인생과 영혼으로 교감하는 예술의 현장은 저에게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때 감상한 명창들의 소리와 소리판을 끌어가는 솜씨는 연극지망생이었던 저에게 오랫동안 소중한 자양분이 되어 주었습니다.

1974년부터 시작해서 1978년까지 약 백 회 동안 계속된 판소리 감상회는 한창기 사장이 아니면 생각해 낼 수 없는, 참으로 획기적이고 대담한 기획이었습니다.



그 감상회를 바탕으로 「브리태니커 판소리 전집」이나 「뿌리깊은 나무 판소리 다섯 마당」,「뿌리깊은 나무 산조 전집」,「뿌리깊은 나무 슬픈 소리」와 함께 주옥같은 음반들이 여럿 만들어진 것 또한 한 사장의 탁월한 안목과 기획력 덕분이라고 봅니다.




광대 노릇하려고 글을 배신하다니!

한창기 사장은 제가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한번은 〈숨어사는 외톨박이〉난을 맡게 되어 전라북도 전주에서 상여소리꾼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분의 삶을 취재하고 회사에 돌아오니 한사장님이 편집실에 들러 상여소리꾼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 보시다가 갑자기 “소리를 배운다니 상여소리도 할 줄 아나?”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할 줄 알죠.”
“한번 해 보게.”

한창 판소리에 열이 오른 새끼 광대였던 저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책상을 두드리며 「심청가」중 '곽씨부인 상여 나가는 대목'을 불렀습니다.

어너 어허너 어이가리 넘차 너화너
북망산이 머다더니 건너 앞산이
북망이로구나
어너 어허너 어이가리 넘차 너화너

느닷없는 소리판에 동료 기자들과 함께 한 사장님도 박수를 치며 무척 즐거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직장생활을 하는 중 저에게 병이 생겼습니다. 뼛속 깊이 스며든 ‘연극병’ 때문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마치 철창에 갇힌 맹수처럼 사무실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고, 우울증에 걸리고, 불면증에 소화장애가 오고, 연극과 판소리에 대한 갈증으로 가슴 속에 불길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결국 저는 일 년 만에 회사를 그만 두었습니다. 한사장님은 사직서를 들고 찾아 간 제게 농담처럼 “광대 노릇하려고 글을 배신하다니!” 하셨습니다.

연극병이 깊이 든 저의 귀에는 서운해 하신 말인지 격려차 하신 말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격려보다는 서운한 심정을 토로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생계의 위협에서 구해준 『뿌리깊은 나무

저는 잠시 배화여고의 독어 교사를 하다가 그 노릇도 그만두고 연극에 전념하게 되었는데, 그 결단의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생계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아선상(?)에서 헤매던 그 무렵의 저를 구해 준 것은 결국 『뿌리깊은 나무』와의 인연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번역도 하고 칼럼도 쓰며 연명을 하던 제게 『뿌리깊은 나무』 출판사의 객원 기자 노릇이 주어졌습니다.



「한국의 발견」 시리즈 중 〈전라북도〉 편을 맡아 이년 쯤 연명을 했고, 「뿌리깊은 나무 민중 자서전」 중 임실의 장구잽이인 신기남의 구술을 채록한「어떻게 허먼 똑똑헌 제자 한 놈 두고 죽을 꼬?」와 가야금 산조의 명인인 함동정월의 구술을 채록한「물을 건너 봐야 알고, 사람은 겪어 봐야 알거든」 편을 집필하며 연명했습니다. 다행히 그 일들이 끝날 무렵부터는 배우 일로 조금씩 출연료를 받은 덕분에 굶주림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한참 동안 연극과 영화 일로 분주히 보내느라 자주 뵙지 못하다가『뿌리깊은 나무』가 전두환 정권에 의해서 폐간당한 뒤 『샘이깊은 물』을 출판하고 있던 회사에 인사차 찾아갔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입은 양복을 이리저리 살펴보시더니 배우를 하려면 양복 입는 법을 알아야 한다면서 아메리칸 스타일과 유러피안 스타일의 양복이 어떻게 다른지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해 주고 나서, 나한테는 아메리칸 스타일이 어울릴 것 같으니 미국에 가게 되거든 꼭 “부룩스 브라더즈” 매장에서 양복을 사 입으라고 충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직까지 “부룩스 브라더스” 양복을 입어보지 못했지만 그 자상한 가르침을 언젠가는 실천할 생각입니다.

그 뒤로도 배우 노릇을 하기엔 너무도 한심한 저의 의상 감각에 대해 심히 염려를 해 주시고, 찾아 갈 때마다 세계 각국의 옷맵시와 관련된 지식을 전수해 주시곤 했습니다.

한번은 한국에 들어 와 있는 이태리 양복 매장을 소개한 뒤 『샘이깊은 물』의 편집장인 설호정씨와 편집 디자이너이신 이상철 선생에게 저를 데리고 가서 옷을 골라 주라고 지시(?)까지 했습니다. 그때 두 분이 골라 준 이태리제 캐주얼 황토색 윗도리와 곤색 바지가 어찌나 맘에 드는지 저는 단추가 떨어지고 허름해진 그 옷을 십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 즐겨 입습니다.

또「서편제」에서 제가 입고 나온 한복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손바느질로 한복을 만드는 여성에게 주문하여 정갈하게 만들어진 무명 한복 한 벌을 선사해주고, 한복 입는 법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해 주신 적도 있습니다.

그 뒤로도 종종 집사람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인사를 가면 본인이 아끼던 넥타이나 구두를 선물해 주시기도 하고, 어린 딸을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우리 말 교육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한창기 사장과의 끈질긴 인연

『뿌리깊은 나무』 잡지사 직원으로서의 인연은 일 년 밖에 맺어지지 않았지만, 한창기 사장과의 인연은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한창기 사장이 추구했던 우리말과 전통 문화에 대한 사랑에 저도 함께 심취했고, 그러한 일을 예술 현장에서 실천해 온 제 삶의 궤적과 맞물렸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좀 더 살아계셨더라면 제가 하고자 하는 일들에 대해 놀라운 식견으로 조언과 비판을 아끼지 않으셨을 텐데, 이승에 안계시니 아쉽고 그립습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1976년 3월 발행인 한창기, 편집장 윤구병 체제로 창간했다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폐간 당했다. 우리나라 잡지에서 처음으로 한글전용과 가로쓰기 편집을 했다. 서구의 문물을 소개하는 수준이던 70년대 지식인 사회에 한국적인 멋, 민중적 아름다움을 기조로 잡지 편집의 혁명을 가져왔다는 평을 받는다. 

발행인 한창기는 여느 국어학자보다 뛰어 난  재야 국어학자였고, 안목이 빼어난 문화재 수집가였고, 전통문화의 부활을 이끈 문화운동가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깊은 물』이라는 잡지의 편집인-발행인이었다. 『뿌리깊은 나무』가 태어난 지 21년 되던 1997년, 간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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