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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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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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초월'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0.05.31
    고집스럽고 튼튼한 땅의 소리, 강도근 명창 (6)
  2. 2010.05.02
    가야금 12줄에 꽃핀 여성 파워, 박귀희 명창 (8)
  3. 2010.04.22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박동진 명창 (24)
  4. 2010.02.10
    지리산 '동편제' 소리 여행 다녀왔어요 (25)
  5. 2009.08.26
    '쑥대머리' 임방울, 노전대통령 노제의 '추억' (28)
  6. 2009.08.08
    평생 인연 맺어진 첫 직장「뿌리깊은 나무」 (26)
  7. 2009.05.15
    나의 스승 박초월 명창 생각하니 눈물난다 (16)
  8. 2009.05.11
    명창들은 정말 목에서 피를 토했을까? (20)
  9. 2009.05.05
    장관 껍데기 훌훌 벗고 광대로 돌아와보니 (24)
전라북도 남원 땅이라고 하면 누구나 춘향이를 떠올리거나 판소리를 떠올릴 것입니다.

실제로 남원군은 국악의 본거지라 할 만큼 수많은 명인명창을 길러냈습니다.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에서 태어나 판소리의 중시조로 일컬어지며 ‘가왕’이란 칭호로써 판소리계 최고 명창으로 떠받들어지는 송흥록 명창,
그의 아들 송우룡 명창,
송우룡의 아들로써 일제시대 판소리계의 왕자로서 일세를 울리다 간 송만갑 명창,
남원군 수지면에서 태어나 송만갑과 함께 일제시대에 이름을 떨친 유성준 명창,
유성준과 송만갑의 제자인 김정문 명창,
남원시에서 1900년에 태어나 여자 명창으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 간 이화중선 명창과 그의 동생 이중선 명창,
운봉면 화수리에서 1915년에 태어나 최고의 여자 명창 중 한 명으로 활약했으며 저의 스승이기도 한 박초월 명창 등등.......


모두가 남원 땅에서 태어난 명창들입니다.

남원에 있는 광한루. 출처 : http://www.lsphoto.co.kr/%3Fdocument_srl%3D616

이밖에도 많은 명인명창들이 일제시대인 1921년에 광한루 안에 세워진 <남원권번>에서 판소리나 시조나 가야금이나 춤 등을 배우고 가르치며 활동했습니다.

남원권번은 그후 일본 경찰의 강압으로 광한루 밖으로 쫒겨 나 민가에서 국악교습소 노릇을 해오다가, 1977년 11월에 광한루 건너 요천 곁의 금암산 기슭에 아담한 한옥을 세워 <남원국악원>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새롭게 증축된 남원 <국립민속국악원> 출처 : http://korean.visitkorea.or.kr/kor/ti/e...6cat2%3D

강도근 명창은 1973년에 남원국악원 창악 강사로 자리를 잡은 뒤, 1996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오로지 이곳에서 제자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살아 온 남원 판소리계의 기둥입니다.

1918년에 남원시 향교동에서 강원종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농사일에 재미를 붙이며 열심히 땅을 가는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는 틈틈이 귀동냥으로 얻어 들은 농부가나 판소리 가락을 흥얼거리면 주위에서 ‘얼씨구 절씨구’ 하며 목이 좋고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그 재주를 썩히기 아까우니 정식으로 소리공부를 하라고 주위에서 자꾸 권하는 통에 17살이 되었을 무렵, 주천면에 살고 있던 김정문 명창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김정문 명창의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2년쯤 공부를 했습니다.

“한 2년 공부허다가 선생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어. 젊은 나이에 심장마빈가 뭔가로 돌아가셨어. 그래 집에 돌아와 있다가 20살쯤 되었을 때 서울에 올라가서 조선 성악 연구회에 갔지.
그곳에서 송만갑 선생님헌티 소리공부를 했지. 김정문 선생이 그 양반 제자였기 땜시로 나도 당연히 그 양반한티 배워야 헌다고 생각헌 거여. 그런디 그때 선생님이 일흔 일곱 살인가 되셨으니 몸이 불편하셔서 잘 안 나와. 그런디 공부헌지 얼마 안돼서 선생님이 또 돌아가셨어.
그래서 구레 사는 박만조씨가 수십 년 동안 송만갑 선생님허고 사귀면서 그 사설이나 가락을 알고 계시기 땜시 그분한티 찾아가서 조금 배우고, 전라도 광양 땅에 이진영씨가 송만갑 선생한티 공부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서 조금 배웠어. 아무튼지 죽어도 동편 소리가 좋다허고 동편만 찾었으니께.”

그가 그토록 애타게 찾은 동편 소리는 송흥록으로부터 시작해서 송우룡과 송만갑을 거쳐 내려오는 송씨 집안의 소리로 그들이 전라도의 동쪽 지방인 구례나 남원에서 살았기 때문에 ‘동편제’라고 불리는 소릿제입니다. ‘서편제’가 장단의 변화가 많고 섬세하고 기교가 풍부한데 견주어서, 동편제는 장단이 똑똑 떨어지고 웅장하고 단순 소박한 것을 특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열심으로 공부를 하는 판인디, 어느날 갑자기 목소리가 변했어. 장가 가기 전이라 전부터 나를 좋아하던 여자하고 딱 하룻밤 잤는디, 그 이튿날 소리를 해보닝께 뒤통수에 무거운 돌을 매단 것 같고 목이 갈려서 독아지 깨지는 소리가 나.”

여자하고 딱 하룻밤 잔 것 때문에 목이 상했다는 것은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남자 명창들이 젊었을 때 목이 상해서 고생한 경험을 얘기하는데, 그 원인이 거의 여자 아니면 술인 것으로 보아 젊은 시절에 정력을 함부로 낭비하는 것이 소리하는 데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남자는 사춘기를 벗어나면 어떻든 목이 갈려서 소리가 변하게 되어 있어. 그렇게 갈라져서 안 나오기가 십 년이 가. 그 재난을 이기고 뚫고 올라오지를 못해. 목이 안 나오니 생활은 안돼. 애는 터지고 부아가 나서 견딜 수가 없으니 술이나 퍼 먹고 좌절해 버려. 어렸을 때 명창 소리 들은 것 다 소용없고, 남들이 비웃기나 허고, 앞날은 암담허고.....나는 이십 년간 그 고생을 견뎠어. 없어진 소리를 되찾을라고 말도 못헐 고생을 혔지.”

그는 지리산 밑에 있는 쌍계사나 순천의 선암사나 남원산성 같은 곳에 가서 죽어라고 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전 같은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창극 단체에도 잠깐 몸을 담았는데 인기 있는 선배 명창들의 뒷바라지나 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울적한 세월을 2년쯤 보낸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버렸습니다. 그 뒤 해방이 되고서도 여기 저기 창극단에 끼어 공연을 하곤 했지만, 일만 끝나면 부지런히 공향에 내려오곤 했습니다.

“창극단을 따라 다니면서도 농사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어. 내가 본시 농사꾼이라 일허는 것이 좋아. 남들은 일허기 싫어서 소리헌답시고 건달처럼 지내는디 나는 밭에서 지게 지고 하루 종일 일허고 나면 몸이 개운허고 기분이 좋아. 그렁게 판소리허는 사람들도 모두 다 알아. 저 사람은 소리허는 것보다 농사를 더 좋아허는 사람이다 그렇게 알아 버려.”

이렇듯 생활에 튼튼한 뿌리를 내린 명창이기 때문에 그의 판소리는 건강한 생활에서 오는 소박함과 강인함이 특징입니다.

“나는 서울 사람들허고 판이 달러. 그 사람들은 창이면 창, 연극이면 연극으로 먹고 살아야것다 허고 나선 사람들이지만 나는 내 손으로 농사지어서 먹고 살어. 그것이 나는 좋아. 서울 사람들이 촌놈이라고 비웃어도 나는 오히려 그 사람들을 비웃네. 나는 돈을 싸줌서 서울서 살라고 혀도 못 살어. 그리고 서울 가면 사람이 버려. 옛날에도 멀쩡한 청년들이 소리헌다고 서울 가서는 게집질에 술에 아편에 몸버린 사람 많았어. 그러니 우리는 촌에서 농사 짓고 사는 게 마음 편하고 좋아.”

이렇듯 도도하게 땅을 지키며 소리를 다듬어 온 그는 차츰차츰 목소리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나이 마흔이 넘었을 때 비로소 고음과 저음을 마음대로 구사하고 몇 시간을 계속해서 소리해도 목소리가 변하지 않는 ‘득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약간 쉰 듯한 수리성인 그의 목소리는 가늘고 단단하며 고음이 강하고 튼튼합니다. 특히 그의 음질은 옛날 송만갑 명창의 음질을 많이 닮았고, 기교를 부리지 않고 통성으로 뽑아 냄으로써 동편제 소리의 특성을 가장 잘 전해 준다고 평가받습니다.

어쨌든 그는 서울 사는 소리꾼에게서는 보기 드문 고집과 힘을 지니고 있는 느낌을 주는데, 이는 오로지 돈과 출세와 인기와 명예를 멀리 떠난 그의 튼튼한 생활 덕분이라 하겠습니다.

“그 전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논에서 살았는디 나이가 등게 그것도 맘대로 안돼. 인제는 일허는 것이 힘이 들어. 거기다가 여기 국악원에 애들이 워낙 많어. 그애들 가르치다가 하루해가 다 가버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찾아 오는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그의 목은 하루도 쉴 날이 없었습니다.

국민학생에서부터 고등학생까지 하루에 쉰 명쯤 되는 제자들은 그의 덕으로 전국에서 벌어지는 학생 국악경연대회는 모조리 휩쓸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갖춘 ‘무서운 아이들’로 성장했습니다.

그동안 국악에 끼친 공로로 ‘한국국악협회 공로상’(1981), ‘남원시민의상 문화상’(1985), ‘KBS국악대상’(1986), ‘자랑스러운 전북인의 상 대상’(1988) 등을 수상하였으며 198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의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30여 년 동안에 수백 명의 문하생을 길러냈습니다. 안숙선, 오갑순, 성우향, 김정숙, 한농선, 홍성덕, 강정흥, 전인삼 등 명창과 많은 국악인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습니다. 고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꼬박 학생과 마주 앉아 직접 북장단을 치면서 목청을 돋구고, 소리 하나하나를 일일이 교정해주었습니다

“서울서는 소리 가르치는디 5만 원도 받고 10만 원도 받는다고 허는디 그것 몹쓸 일이여. 소리공부 허는 학생치고 부잣집 애들이 없는디 누가 그렇게 많은 돈을 내고 공부를 허것어. 여그서도 국악원을 운영허느라고 7,8천 원씩 받고 있지만 소리는 돈 안 받고 가르쳐야 돼. 선생 먹고 살 것은 정부에서 보조해 주고, 제자들은 무료로 정성껏 길러내야 앞으로 국악이 발전허게 돼.”

앞으로 남원에서 명창이 나오게 된다면 이는 오로지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소리는 돈 안 받고 가르쳐야 된다고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를 하다가 돌아가신 고집스럽고 꿋꿋한 스승의 덕일 것입니다.

강도근 명창의 후계자 전인삼 명창. 출처 : http://www.postech.ac.kr/k/student/cult...ex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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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생소한 분들이 많고, 내용도 그리 흥미롭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미래의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스피어에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판소리와 가야금병창으로 화려한 예술의 꽃을 피우다 돌아가신 박귀희 명창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본디 남자들만의 독무대이던 판소리계에 여성 명창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부터입니다.

신재효의 제자이고 대원군의 사랑을 받던 진채선이라는 명창이 나타난 이후로 이화중선 명창이 일제 시대에 대단한 인기를 끌자, 수많은 소녀들이 판소리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박녹주, 김소희, 박초월 명창과 더불어 판소리계에서 여성의 지위를 한껏 높인 박귀희 명창도 그런 소녀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1921년 2월 6일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서 태어난 오계화 소녀(훗날의 박귀희 명창)는 대구시 봉산동에 있던 외갓집에서 대구 공립보통학교에 다녔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길 건너 작은 집에서 날마다 노래소리가 들려왔는데, 자기도 모르게 그 소리에 끌려 어린 기생들이 배우는 단가와 판소리를 귀동냥으로 익혔습니다.

어떤 때는 학교를 빠져가며 몰래 따라 배웠고, 반 년쯤 지나면서부터는 가까이 가서 큰 소리로 따라 불렀습니다. 그러니 소리 선생인 손광제의 눈에 안 뜨일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선생이 불러서 이름을 묻고 소리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인지라 귀동냥으로 익힌 <만고강산>이라는 단가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선생은 당장 외갓집에 찾아가서 명창 될 소질이 있으니 국악을 가르치라고 권했습니다. 

선생은 그녀를 당대의 최고 여성 명창인 이화중선에게 소개시켰고, 그녀의 소리를 들어 본 이화중선 명창은 바로 입단을 허락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을 따라 순회 공연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조선팔도는 물론이고 만주, 훈춘, 봉천까지 다녔어요. 물론 고생을 무척했지만 그때는 오로지 명창 되려는 생각에 참을 수 있었지요. 자나 깨나 명창 될 생각뿐이고, 꿈을 꾸어도 명창 꿈을 꿨어요. 닭을 먹을 때도 목소리에 좋다는 울대만 먹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명창 꿈에 부푼 소녀에게 떠돌이 창극단 생활은 차분히 공부할 시간을 마련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음해 여름, 공연이 없어서 단체가 쉬고 있을 때 고향으로 내려 가 대구의 용인사에서 조학진 명창에게 100일 공부를 하며 <적벽가>와 <춘향가>를 배운 뒤, 19살 때에는 김소희 명창과 함께 광주 지실마을에 살고 있는 박동실 명창을 찾아 가 <흥보가>와 <심청가>를 배우고, 21살 때에는 하동 쌍계사에서 임방울 명창과 함께 유성준 명창에게 <수궁가>를 배웠습니다.

이렇듯 틈틈이 연마한 솜씨를 인정받아 임방울, 박초월과 함께 ‘동일 창극단’ 조직했을 때에는 주인공 역할을 도맡아 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그녀의 목소리가 굵고 낮은 탓에 흥보나 이도령과 같은 남자 역할을 가끔씩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뒷날 여성 국극단을 탄생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해방 전에 일본에 레코드 취입하러 갔을 때에 ‘송죽가극단’이라고 하는 여자들만으로 만들어진 단체 공연을 구경했는데 기가 막히게 잘해요. 연기며 의상이며 노래며 춤이며 나무랄 데가 없고, 관객들의 반응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나라도 저런 단체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남자들하고 단체 생활을 하다보면 연애를 하고 애기를 낳아서 애기까지 끌고 다니는데, 여관의 좁은 방에서 애기 기저귀 널어놓고 복작거리는 생활이 지겹다 못해 환멸감까지 느낄 지경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오랫동안 여자들만으로 만들어진 창극단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해방 뒤에 박녹주 선배하고 상의했더니 대뜸 좋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김소희, 임유앵, 임춘앵, 김경희씨와 함께 '여성 국악 동우회' 만들었는데 뜻밖에 관중들의 반응이 좋았어요.”

1949년 2월에 김아부가 쓴 <햇님 달님>을 서울의 시공관에서 공연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놀라운 인기를 끌었습니다. 햇님 왕자는 박귀희, 달님 공주는 김소희, 햇님 아버지를 박녹주가 맡아서 했는데 우리나라 처음으로 여성들만 출연하는 창극인데다 의상과 무대장치가 화려하다보니 특히 여성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공연장의 유리창이 수없이 부서졌습니다. 부산의 공회단에서 공연을 할 때는 임신 열 달째가 된 부인이 사람들 틈에 끼어 빠져 나가지 못해 그 자리에서 해산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 젊은 처녀들이 햇님 왕자를 만나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통에 변장을 하고 달아나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인기 덕에 “돈을 가마니에 쓸어 담을 만큼” 많이 벌자 수많은 여성 국극 단체들이 생겨나서 야담이나 전설들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6.25이후로 여성 국극은 점점 인기를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할 때는 궁녀 한 사람이라도 창을 잘 하고 잠깐 나오는 엿장수 한 사람이라도 소리 실력도 있고 연기도 좋아서 손님들이 좋아했는데, 단체가 많아지다 보니까 한 단체에 두세 사람만 소리를 잘하고 나머지는 소리 들을 맛도 없고 연기 볼 맛도 없고, 아마 그래서 손님이 떨어진 것 같아요.”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0449293

그녀는 판소리를 주로 닦아 온 명창이었지만 가야금 가락에 판소리 한 대목씩을 얹어서 부르는 ‘가야금 병창’에도 명인의 경지에 이른 솜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솜씨 때문에 1971년에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을 때는 곤혹스러운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지정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판소리로 해야 될지, 가야금 병창으로 해야 될지 한동안 말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가야금 병창을 하는 사람은 드물고 귀하니까 그 맥을 잇는 의미에서 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의 예능보유자가 됐지요.”

그녀가 가야금과 인연을 맺은 것은 15살 무렵이었습니다. 처음 만난 선생은 강태홍 명인이었는데 그녀는 이상하게도 가야금에 깊이 빠져 들었습니다. 그 뒤 창극단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가야금 병창의 일인자이며 창극계의 명배우로 알려진 오태석 명인에게 열심히 가야금을 익혔기 때문에 어느덧 그녀의 솜씨는 스승의 법통을 이어받은 유일한 후계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출처 : http://jigurecords.co.kr/bbs/board.php%...page%3D4

“내가 이 길로 가려고 태어났는지 어려서부터 뭐든지 배우면 남보다 빨리 익혔어요. 하나를 배우면 그 다음 것까지 알아낼 정도였으니 선생님들이 모두 놀라면서 귀여워해 주셨지요.”

그녀는 제자 복이 많아 재능이 뛰어난 제자들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현재 판소리계 최고의 프리마돈나인 안숙선 명창 그의 제자요, 연극과 마당놀이와 뮤지컬을 오가며 눈부신 재능을 발휘하는 배우 김성녀도 그의 제자요, 강정숙·오갑순 등은 그녀의 법통을 이어받은 가야금 병창의 명인이요, 박범훈·김덕수 등 국악계의 리더로 활약하고 있는 명인들도 그녀의 제자입니다.

게다가 재복도 많아서 대부분의 국악인들이 말년을 가난하고 불우하게 보내는 데 비해서 그녀의 말년은 윤택하고 풍요로웠습니다. 종로구 운니동에 있던 전통 한옥식 여관인 ‘운당여관’의 여주인으로서 그녀의 경제력은 국악계의 어느 누구보다도 탄탄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재산을 1960년대에 박헌봉, 박초월 명창 등과 함께 설립한 '국악예술학교'를 위해 쾌척한 일로 국악인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녀는 후진들을 가르치고 국악계의 어른으로서 바쁜 말년을 보내다가 1993년 7월 14일에 이 세상을 떴습니다.

박귀희 명창은 저의 스승인 박초월 명창 언니라고 부르며 각별하게 지낸 사이여서 저는 스승을 따라 그녀의 공연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가야금 병창을 할 때면 판소리로 익힌 목 성음과, 창극을 하면서 익힌 몸짓과, 가야금으로 익힌 우아함이 서로 어우러져서 잠시도 관객의 한 눈을 팔지 못하게 했습니다.

쪽진 머리에 산호잠을 찌르고 화문석을 깐 무대에 앉아, 무릎에 가야금을 올려놓고 어깨춤을 추며 손으로 가야금 줄을 희롱하는 그 몸짓은 너무도 화사하고 흥겹고 교태가 흘러넘쳤습니다.

그녀가 가야금을 안고 노래를 부르는 순간, 사랑과 이별로 얼룩진 한 많은 세월이 어느 새 화사하고 밝고 아름다운 꿈의 세월로 변하고 마는 느낌을 받았던 나는 위대한 예술의 힘에 그저 놀라고 감탄하고 도취할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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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송흥록 명창, 박초월 명창, 임방울 명창, 박녹주 명창 등 명인명창에 대한 이야기를  띄엄띄엄 올렸는데 앞으로는 좀더 자주 전에 제가 발표했던 명인명창에 대한 글들을 손질해서 올려볼까 합니다. 그래서 '명인명창 이야기'라는 카테고리도 만들었습니다. 
아마 네티즌들에게는 생소한 분들이 많고, 내용도 그리 흥미롭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미래의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 끝에 시작합니다. 첫번째 타자는 대중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으로 박동진 명창을 선택했습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아마 판소리는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이 말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겁니다. 박동진이라는 노명창이 CF 광고에 나와서 한 대사지요. "또 제비 후리러 나간다~"하는 소리 대목도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겁니다. 모두가 박동진 명창의 광고 속의 멘트가 히트한 결과 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처음부터 판소리계의 스타로 활동한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50세가 넘어서야 명창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06/asp/ce...21203303

그 놀라운 집념과 열정의 이야기를 펼쳐 볼까 합니다. 
 
1968년에 국립국악원 강당에서 박동진이라는 소리꾼이 <흥보가>를 5시간 동안 쉬지 않고 완창한다고 하자 국악계에서는 ‘참 별일이 났다’고 수군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박동진이라는 소리꾼은 그때까지만 해도 김연수, 임방울, 김소희, 박초월과 같은 쟁쟁한 명창들의 그늘에 가려 별로 이름을 내밀지 못하던 소리꾼인데다가, 그런 소리꾼이 소리 한바탕을 완창으로 부른다는 것은 보통 무모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5시간을 쉬지 않고 불러 젖히는 데다가, 그 소리목이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힘이 있고, 고음과 저음을 마음대로 구사하였으며, 몸짓과 대사가 구성지고 익살맞고 재미있어서 5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가 버리자 그 소리판을 구경한 관객들과 소리꾼들과 기자들이 모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 이듬해에 <춘향가> 한바탕을 그 당시 명동에 있었던 국립극장에서 8시간 동안 쉬지 않고 부르자 소리 솜씨는 제쳐 두고라도 어떻게 한 인간이 8시간이나 계속해서 소리를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얘기로 온 장안이 시끌시끌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박동진이라는 소리꾼은 쟁쟁한 판소리 명창들의 대열에 끼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완창 소리꾼으로 이름이 높아졌습니다. 그 뒤 많은 소리꾼들이 그의 성공에 힘입어 완창 판소리 발표회를 가짐으로써 완창 발표가 마치 유행처럼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다른 소리꾼들은 일생에 한두 번 하기도 어려운 완창 소리판을 그 뒤로도 일 년에 한 번 또는 두 번씩 쉬지 않고 열었던 그의 정열과 집념은 무섭고 놀랍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어려운 일을 이를 악물고 해낸 데에는 그의 실패와 좌절이 큰 몫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1916년 7월 12일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무룡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 대에 몇 백 석을 거두며 부유하게 살던 그의 집안은 이미 아버지 대에 가세가 기울어 그는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 겪는 배고픔과 설움을 일찍부터 체험해야 했습니다.

여덟살이 될 때까지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익힌 그는 충남 대덕군 진잠면에 있는 진잠 보통학교를 4년 만에 어렵게 졸업한 뒤 대전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는 학비를 대기가 힘에 부쳤지만 아들이 중학교를 졸업한 뒤 면서기라도 해서 집안 살림을 도와줄 것을 기대한 그의 아버지는 꼬박꼬박 학비와 하숙비를 대주었습니다.

그렇게 학교를 다닌 지 4년이 되어 졸업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그의 앞날을 확 바꿔 놓고 집안에 평지풍파를 일으킬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지금 대전극장이 들어 선 자리에 <협률사>라는 단체가 들어와서 소리판을 연다기에 무심코 구경을 갔다가 그만 넋을 빼앗긴 것입니다.

조선 천지를 들썩이게 하던 이동백, 이화중선, 이중선, 장판개, 김창룡과 같은 최고의 명창들이 벌이는 소리판에서 넋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목석같은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소년 박동진은 온 몸이 달아오르고, 등에 소름이 끼치고, 귓전이 간질거리고, 오금이 저려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린 소년의 마음에 불을 지펴놓고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버렸습니다. 소년은 며칠 동안 학교 공부도 집어치우고 무대에 서서 소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다가 한숨을 쉬며 신세를 한탄한 끝에, 그예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소리를 배우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마침 이동백 명창의 고수로 따라다니던 지동백씨가 연기군에 산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지동근은 판소리로 이름을 날릴 만할 때에 목이 나빠져서 판소리를 그만 두고 땅재주를 하거나 북을 치면서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지동근은 자기는 판소리를 가르칠 수 없다며 “청양군 정산면 백공리에 가면 손병두라는 사람이 있는데 바탕소리는 못하지만 토막소리는 맛있게 잘 한다“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길로 집에 돌아 와 부모님께 자기의 결심을 여쭸습니다.

짐작한대로 아버지는 노발대발하고 매를 때리고 욕설을 퍼붓기까지 했습니다. “몇 달 있으면 졸업인데 무슨 미친 병이 들어서 광대짓을 하려느냐”고 펄펄 뛰며 야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집을 꺾지 않고 집을 나와 버렸습니다.

그때가 18살 되던 해 여름이었습니다. 물어물어 손병두씨 집을 찾아가서 나무도 하고 꼴도 베어 주며 머슴살이를 하다시피 일 년을 지내며 소리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사랑가'나 '옥중가' 같은 토막소리를 반 년쯤 배우고 나니 손병두씨도 가르칠 밑천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을 눈치 채고 선생 곁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손 선생의 부친인 손필모씨가 청양군 청장면에 있는 미륵당이라는 집에 그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 집은 행세깨나 하는 양반 집안이었는데 인사를 마치고 술상이 들어온 뒤, 주인 영감의 명령이 떨어지자 아들, 손주, 며느리들이 저마다 가야금, 거문고, 피리, 젓대, 양금, 해금 등을 끼고 앉아 '풍류'를 연주하는 것이었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풍류 가락에 넋을 잃고 연주가 끝났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앉아 있는데 손필모씨가 “이놈이 내 아들 제자인데 소질이 있는가 없는가 봐 주시요”하고 소개를 했습니다.

장구를 치던 주인 영감은 “어디 한 번 소리를 들어 보자”면서 북을 가지고 앉았습니다. 그래 겁을 바짝 내며 손병두에게 배운 소리를 하고나니 영감이 “네가 소질이 있기는 있는데 명창이 되려면 지금 선생으로는 안 된다. 이 집은 선배 대명창들이 한 번씩 다녀가셨던 집이다. 서울에 가면 정정렬 명창이 있는데 그 분이 <춘향가>는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러니 그 분한테 배우도록 해라”하며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길로 손병두 선생을 떠나 정정렬 명창을 찾아 서울로 올라가는데 일이 안 되려는지 도중에 서울 못 갈 일이 생겨버렸습니다.

터벅터벅 걸어서 유성까지 나왔을 때 마침 공주의 부자인 김 갑순이 궁술대회를 열고 기생들을 데리고 노는데, 저녁에 천막을 쳐 놓고 사당패들이 소리판을 벌이는 걸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구경꾼들 틈에 끼어 소리를 듣는데 이미 소릿길을 조금 안 그의 귀에 사당패의 장바닥 소리가 가소롭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자청해서 무대로 올라가 소리를 한 마디 했더니 “야, 그거 투가리보다 장맛이다”하며 “재청이요, 산청이요” 한 것이 오청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리를 끝내고 잠을 자려는데 느닷없이 곱게 차려 입은 중년 여인이 찾아와서 “아까 소리한 학생이 누고? 니 우리 방에 온나”하지 않겠습니까? 그 여자를 따라 여관으로 가니 의젓한 중년 신사가 앉아 있다가 “내 김천 서 치과의사하는 사람인데 너 김천 가서 기생 선생할래?”하며 이 말 저 말 얘기를 했습니다. 들어보니 그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생겨 두말없이 그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올라가려다가 거꾸로 내려가게 된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그는 중년 여인이 경영하는 진양옥이란 선술집에서 손님 앞에서 소리하며 하룻밤에 50전도 벌고 1원도 벌면서 몇 달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명월관이라는 요릿집에서 기생들 소리를 가르쳐 달라고 하여 꽃같은 기생 스무 명쯤을 모아 놓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소리를 배우지도 못하고 토막 소리 몇 대목 가지고 밥벌이하면서 누구를 가르치는 일이 항시 마음에 걸리던 차에 공주 대제암에서 정정렬 명창이 소리를 가르친다는 얘기를 듣고 대번에 기차를 타고 절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스승 운이 없으려는지 조상선, 김여란, 김초앵과 같은 쟁쟁한 신인 명창 12명이 한 시간씩 꼬박 열두 시간 동안 선생님을 붙잡아 놓고 있는 통에 도저히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여름이면 절간 아무데서나 잠을 자며 귀동냥이라도 할 텐데 엄동설한에 그럴 수도 없고 해서 다시 대구 봉산동에 와서 술집 기생들의 소리선생을 하며 지냈습니다.

얼굴도 “빤질빤질하게” 잘 생긴데다가 소리 잘 하고 멋이 있는 젊은 총각이 젊은 여자들 틈에서 지내다보니 “만사가 맨숭맨숭하기만 할 수는 없어서” 가끔씩 연애 사건을 저지르곤 했습니다. 대두에서는 대구 경찰서 고등계 형사의 조카인 일본 여자 대학생과 연애를 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가서 모진 매를 맞고 갖은 협박을 당한 끝에 강제로 쫒겨나다시피 경주 권번으로 옮겼습니다. 또 경주에서는 얼굴 예쁘고 인기 있던 기생 김난윤의 짝사랑에 말려들어 호되게 곤경을 치루는 등, 여자들 등쌀에 시달렷습니다.

결국 그는 그 생활을 청산해야겠다는 결심 끝에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습니다.

“내가 여자들한테 인기는 있었구만. 그런디 그것이 좋은 것이 아녀. 젊은 놈 신세 망치기 딱 좋은 것이라. 더욱이 소리 공부하는 사람은 여색을 조심해야 돼. 지동근씨가 나헌티 헌 말이 있네. 젊어서 여자를 알면 소리를 망치게 되니 여자 보기를 원수 보듯이 해야 한다고 하셨어. 성공만 하면 여자는 줄줄이 따라오는 법이니 성공할 때까지 절대 여자를 가까이 말라고 말이여. 그런디 한창 기운이 좋을 적에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는가. 서울 와서도 맨 연애만 허고 다녔지”

22살에 서울에 와서 조선 성악 연구회에 다니며 꿈에 그리던 정정렬 명창에게 소리공부도 하고 명월관, 식도원 같은 요리집에서 소리를 하며 돈도 벌었습니다. 노명창들을 모시고 북만주, 신의주, 상해, 무창, 북경, 남경, 서주까지 공연을 다녔습니다. 또 김창진, 조학진 같은 명창에게 소리공부를 하며 몇 해를 보내는 동안 그의 앞에는 소리꾼으로서 밝은 미래와 성공이 열리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거침없이 돈도 쓰고 한껏 멋을 부리고 신식 여학생들과 뻔질나게 연애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25살이 되던 해에 무서운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목이 안 나와. 고음이 안 나오고, 숨이 짧아지고, 소리가 갈라지고, 허리도 아프고, 소리 기운이 싹 없어져 버렸어. 한약도 써 보고 목을 쑥으로 떠보기도 하며 별별 짓을 다 했지만 소용이 없어. 목이 그 지경이 되니 무대에 서면 집어치우라고 소리지르니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고, 무엇보다 내 인생이 이것으로 끝이구나 생각하니 죽고 싶은 생각밖에 안 나”

그러던 차에 고향 집에서 옥천에 사는 색시와 혼인을 하라는 전갈이 오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대뜸 혼인을 해버렸습니다. 실의에 잠긴 마음을 그렇게 해서라도 달래보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그에게 안정과 행복을 가져다 주기는 커녕 도리어 무거운 짐만 짊어지게 했습니다.

그는 그 짐에서 벗어나고 잃어버린 목도 찾을 겸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그러자니 자연 가정을 돌보지 않게 되어 아내는 집을 떠나게 되고, 그 아내에게서 낳은 자식마저 저 세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불러들인 불행이지만 자신으로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어 더욱 더 실의와 좌절 속에서 세월을 보내는 동안 해방이 되고 그의 나이 30살이 되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그는 해방 뒤에 생긴 여성창극 단체인 <햇님국극단>에 들어 갔습니다.

그 단체에는 박초월, 김소희, 박귀희, 조금앵, 김경애와 같이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던 여자 명창들이 있었는데 그는 그 단체에서 고수도 하고, 무대감독도 하고, 작곡도 하며 그들의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그 뒤 김연수 명창이 이끄는 <우리 국악단>에서도 무대 뒷일을 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때의 쓰라린 경험과 명창들의 그늘에 가려 그들의 뒤치닥거리를 하며 느꼈던 열등감, 무대감독을 하며 익힌 무대 경험들이 '재기'를 위한 밑거름이 될 줄이야 그 당시는 아무도,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기에는 숨은 공신이 있었습니다. 

함께 창극단의 스탭 일을 하던 중 사랑을 하게 되어 마지막까지 해로한 둘째부인 변기씨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없었던들 그의 재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1962년에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들어 간 그는 남들은 전성기를 지나서 활동을 마무리 짓는 나이에 골방에 틀어박혀 아침 여섯시부터 정오까지 꼼짝 않고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그 뒷바라지를 지성스럽게 했을뿐더러 돈 못 벌어 온다고 잔소리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또 소리공부하다가 절망에 빠진 그가 소리 집어치우고 다른 일을 하겠다고 하면 극구 말리며 다른 생각 말고 소리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러한 아내의 내조 덕분에 그는 10여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로지 소리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만 52살이 된 1968년에 <흥보가> 5시간 완창 발표회를 갖고, 1969년에 <춘향가> 8시간 완창발표회를 한 다음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를 차례차례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 뒤에 그는 계속해서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 <강를매화전>과 같이 가사와 곡을 잃어버린 것으로 알려진 노래들을 다시 가사를 찾고 곡을 붙여서 발표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된 그는 1970년에 주태익이라는 극작가가 판소리 사설체로 쓴 <예수전>에 곡을 붙여 5시간 동안 불렀고, 그 뒤 <팔려 간 요셉>이라는 노래도 창작해서 전국 교회를 돌며 신자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또 1973년에는 <이순신전>을 불러 창작 판소리에 대한 국악계와 일반인들 사이에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407031

“십 년 동안 목숨을 걸어 놓고 공부를 헌 결과여. 내가 젊어서 못된 짓을 많이 혀서 목을 버려 놓았응게 목만 다시 찾으면 죽어도 원이 없다 허고 일심으로 공부를 허니까 목이 다시 찾아 와. 그래도 고음이 예전처럼 안 나와서 나 혼자 연구를 혔지. 처음에 '암성'으로 가늘게 내다가 점점 기운을 넣어서 '통성'으로 내는 거여. 옛날 임방울 명창도 이런 말씀을 허셨지. 소리를 많이 허면 가느다란 '실목'이 나오느니라. 그것을 많이 허면 그 목이 차차 굵어져서 통성이 되는디 그 단계가 어려운 것이니라. 허셨는디 내가 혀 보닝게 정말 어려워요. 실목을 통성으로 변화시키기가 소리공부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여. 그 단계를 통과혀야만 득음을 혔다고 헐 수가 있는거지”

그 어려운 단계를 통과한 명창에 대한 예우로 나라에서는 1973년에 판소리 <적벽가>의 인간문화재로 그를 지정했습니다.

그는 그 뒤 국립창극단의 단원이 되고, 1978년에는 단장이 되어 1981년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창극단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는 더 바빠져서 남들은 은퇴할 나이까지 각종 판소리 관련 교육이나 수없이 밀려오는 초청 공연, 방송 출연, 음반 취입, 게다가 광고 출연까지 젊은이 못지 않게 분주하게 보내다가 87세인 2003년에 세상을 떴습니다.

인생의 후반기인 50세에 재기해서 30년의 전성기를 보낸 그는 깊은 고난의 길을 걸어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무서운 집념과 미래에 대한 도전, 그리고 열정으로 충만한 노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뜬 '대기만성' 형의 명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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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뱀사골이 있는 산내면 면사무소에 김용근이란 공무원이 계십니다. 

그의 부친은 평생 농사를 지은 농부였는데, 공무원이 된 아들에게 절대 7급 이상의 고위공무원이 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고위 관료가 되면 서민들을 괴롭히게 되니 하위 관료로서 서민들에게 봉사하며 사는 게 옳은 길이라고 하셨답니다.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들어 20여 년간 고향인 산내면에서 봉사하며 현재 7급 공무원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부친도 훌륭하지만 그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아 온 아드님도 훌륭합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도 못 말린 한 가지 병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의 '판소리병'이었습니다. 그는 지리산 부근에서 전승되어 오는 동편제 판소리에 '미쳐서' 지금까지 판소리 명창들의 유적을 탐방하고 자료 조사를 하는 데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기록도 거의 없고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전국을 떠도는 통에 가족관계도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명창들의 삶을 기록한다는 것은 정말 지난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토지대장이나 호적 등을 조사하고, 명창과 관련된 모든 곳을 직접 답사하고, 생존자나 관련자들의 증언을 채록하고, 그들의 삶의 흔적을 직접 체험해 보기도 하며 오랫동안 고독한 조사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3년 전 미당 서정주 시인의 조카이며 시인인 이주리님과 남원에서 만나 서로 뜻이 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 함께 유적지를 돌아다니고 자료 조사를 하며 언젠가 지리산 판소리 명창들의 이야기를 대하소설로 엮어 낼 꿈을 꾸고 있습니다. 

저는 전북 지역 인터넷 신문인 <투데이안>의 대표 엄범희님의 소개로 두 분을 만난 뒤로  그들이 조사했던 자료와 아직 발표되지 않은 귀한 글들을 볼 수 있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들의 판소리에 대한 무한한 열정과 대하소설에 대한 집념과 꿈은 저를 부끄럽게 할 정도였습니다.   

함께 소릿길 탐방을 할 기회를 바라던 우리는 어렵게 일정을 맞춘 끝에 드디어 1박 2일의 '지리산 소릿길' 탐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전주에서 소리축제의 회의를 마친 저는 점심 후에 남원으로 향했습니다. 약속 장소인 광한루 주차장에 당도하니 두 분과 함께 글로벌 농촌 인재협회 사무처장인 박찬용님이 봉고를 운전하며 우리 일행을 안내해주시더군요.

오른쪽부터 김용근님, 이주리님, 박찬용님.

우리는 남원에서 차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로 향했습니다.
비전마을은 옛날부터 전라도와 경상도가 통하는 중요한 통로여서 주막과 객주집이 많았고 풍광이 아름다워 찾는 이가 많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인근에는 거문고의 전설적 명인인 옥보고가 살았다는 옥계동, 해발 695미터의 바위산인 황산, 구룡폭포 등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비전마을 가까운 곳에 있는 남쪽 구릉에는 이성계가 왜군을 무찌른 전투를 기념하는 '황산대첩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비전마을에 있는 '송흥록 명창의 생가' 찾았습니다. 아래 동상의 주인공이기도 한 송흥록 명창은 '가왕(歌王)'이라 불리기도 하는 전설적인 명창입니다. (*그의 자화상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동상의 모습은 '상상 속의 그대'입니다.)
 

앉아서 북을 치는 이는 송흥록 명창의 동생인 송광록으로 형의 고수로 따라다니다가 나중에 명창이 되었습니다. 송흥록의 판소리는 아들 송우룡, 송우룡의 아들 송만갑으로 3대에 걸쳐서 집안으로 전수되었습니다. 속가 제자인 박만순, 양학천, 김정문, 유성준 등도 당대를 울린 대명창들입니다. 이처럼 송흥록의 집안은 동편제 판소리의 명가이며 종가입니다.


판소리는 송흥록 명창을 기점으로 일대 전기를 맞게 됩니다. 송흥록 이전의 판소리는 지역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선율과 장단으로 불렀는데 송흥록에 의해 통합되어 오늘날의 판소리 형태로 정착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송흥록을 '판소리의 중시조'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송흥록 명창의 생가와 나란히 저의 스승인 '박초월 명창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스승이 돌아가신 뒤 10여 년 전에 다녀 간 기억이 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스승의 탄생과 집안 내력에 대해 김용근님을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도 의미 있는 방문이 되었습니다. 박초월 명창에 대해서는 저의 글 <나의 스승 박초월 명창 생각하니 눈물난다>http://dreamnet21.tistory.com/10을 참고하시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비전마을을 떠난 우리는 운봉읍 화수리에 있는 '국악의 성지'를 찾았습니다. 


국악선인묘역, 납골묘, 사당, 전시체험관 등을 갖추고 2007년 10월에 개관한 국악의 성지에는 옥보고 명인이나 송흥록 명창 등 대표적인 국악인의 묘와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현대식 2층 한옥으로 세워진 전시체험관에는 국악과 관련된 많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 유독 저의 눈길을 끄는 낡은 공책이 있었습니다. 동편제 판소리를 오롯이 지켜 온 남원의 소리스승 강도근 명창이 제자들의 수업료 납부 상황을 적어 놓은 공책입니다. 전형적인 옛서체로 정성스럽게 적어 놓은 그의 꼼꼼한 성격이 보이는군요. 그 분은 평생토록 남원국악원에서 안숙선, 이난초, 전인삼 명창을 비롯한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냈습니다.


국악의 성지에서 참배를 마친 우리는 인월면 성산리에 있는 '흥보마을'로 갔습니다. 

판소리 <흥보가> 중의 첫가사로 '옛날 경상-전라 두 얼품에 놀보 흥보가 살았는데 놀보는 형이요, 흥보는 아우였다'로 시작되는 바로 그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는 뒷산의 '연비산(제비가 날아오른 산)'이라든가, '까막고개''화초장 다리' 같이 흥보가에 나오는 지명들이 전해지고 있어 1993년에 흥보마을로 지정됐습니다. 하지만 흥보가 실제로 그 마을에 살았는지, 그리고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니고 생존인물인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어서 산내면 백장마을에 있는 '변강쇠 공원'을 들렀습니다. 

판소리 <변강쇠가>에 나오는 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전해오는 이 마을에는 남근을 상징하는 '근원바위'나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아들을 낳았다는 '수태바위', '남근목', '강쇠바위' 등 변강쇠 관련 지명이 있어 2000년부터 변강쇠 공원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경상도 쪽 함양에도 변강쇠 마을이 있다는데 어느 마을이 '원조'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울 듯 싶습니다. 공원에 세워진 현대식 조각상이 재미있더군요.


배가 고파진 우리는 저녁 노을이 아름답게 번지는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은 <귀거래사> 식당에 들렀습니다. 중국의 전원시인 도연명의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전원이 무성하니 나 돌아가리라'하는 싯귀가 떠오르는 고즈녁한 집이더군요.
 

정말 정갈하고 맛있는 산채 정식이었습니다. '뱀사골'이라는 인상적인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산내면은 사과와 흑돼지와 곳감의 산지이며 수많은 약초와 산채들의 보고입니다.  


어둠이 내리자 우리 일행은 산내면 상황리에 있는 <노고지리> 산장에서 여장을 풀었습니다.


올해 지리산에서 처음 받아 낸 '고로쇠물'과 주인 아저씨가 직접 담갔다는 '양귀비술' 마시며 우리는 밤새도록 판소리와 예술과 전통문화와 농촌문화의 현실과 꿈에 대한 정담을 나누었습니다.

산공기의 상쾌함을 느끼며 새벽에 일어나 찍은 산장과 주변 지리산의 모습이 신비롭군요.  


방마다 '꽃의 향기는 천리를 가고 정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花香千里 人情萬里)'라는 글귀를 나무에 조각을 해서 걸어 놓은 주인 아저씨는 소도시의 시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이곳에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진도개와 아침 산책을 나온 그의 얼굴이 지리산을 닮아 넉넉하고 푸근합니다. 


밤에 차를 타고 달려 온 엄범희님까지 합세해서 일행이 늘었습니다. 소릿길 탐방을 할 명창들의 유적지는 많이 남아 있지만, 오전밖에 시간이 없으니 다음에 2차 탐방을 하기로 한 우리는 부근에 있는 '한지 장인'과 바위굴을 뚫어 법당을 만든 '서암정사'를 찾기로 했습니다. 

오른쪽부터 엄범희님, 김용근님, 이주리님.

우리는 차가운 고원의 공기를 마시며 산내면 하황리에 있는 '한지 장인 신평식'님의 한지 공장에 들렀습니다.

공장이라기보다 움막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듯한 이곳에서 평생 한지를 만들어 온 그는 옛부터 내려 온 방법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전통한지의 명인입니다. 


마을 뒷산 계곡에서 흐르는 이 맑은 물을 사용하여 한지를 만듭니다.


많은 한지 명인들이 양잿물이나 표백제나 기계식 공법을 도입하여 한지를 만드는 데 비해 그는 부친으로부터 전수 받은 옛방식을 조금도 고치지 않고 오롯이 전수해 오고 있습니다.    


아직 인간문화재로 지정도 되지 않았다니 한 장 한 장 정성을 다해 만들어가는 그의 한지가 언젠가 그 맥이 끊어지지 않을지 걱정됩니다.


한지 명인과 아쉬운 작별을 한 우리는 경남 함양군 마천리 벽송사 입구의 <서암정사(瑞岩精舍)>로 향했습니다.
 

40여년 전에 지리산 심산유곡에 있는 <벽송사(碧松寺)>에서 수행을 하던 원공스님은 500미터쯤 떨어진 산속을 산책하던 중, 갖가지 바위들이 신비스럽고 상서로운 기운으로 늘어서 있고 장엄하게 솟은 앞산 연화봉이 연꽃처럼 펼쳐진 풍광에 넋을 잃고 서서 그곳에 불사를 일으키겠다는 원을 세우게 됩니다. 


1975년에 터를 고르기 시작해 공사를 시작했지만 토지의 소유권 문제, 국립공원의 건축 허가 문제, 공사 자금 조달의 문제 등의 수많은 어려움 때문에 불사는 하염없이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백송사의 젊은 주지로 불같은 추진력과 깊은 불심을 지닌 법인스님이 부임해 오면서부터 불사는 빠르게 진척되기 시작했습니다.

서암정사 주지 법인 스님.

많은 불사 중에서 가장 힘들고 놀라운 불사는 '석굴법당'이었습니다.


거대한 바위를 뚫어서 법당을 짓고, 사면의 벽과 천장 전체를 그림과 글씨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원공 스님의 디자인을 토대로 하여 석공들이 조각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6명의 석공이 1989년부터 조각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 하나 둘 떠나고 나중에는 홍덕희 석공만이 10년 이상 절에 머물면서 2001년에 완성했다는 이 석굴은 국내에서 가장 거대하고 예술적으로도 뛰어난 석굴입니다.
  

석굴법당의 본존불인 아마타불의 미소가 불국사의 석굴암 부처님처럼 정겹습니다.

제 생각에 이 석굴법당은 100년쯤 세월이 흐른 뒤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고도 남을 훌륭한 현대의 문화유산입니다.


두 스님의 놀라운 집념과 원력으로 지어진 불가사의한 이 도량은 불보살의 상서로운 기운이 충만한 곳입니다.


옥보고 명인, 송흥록 명창, 박초월 명창, 강도근 명창, 신평식 장인, 원공스님, 법인스님, 홍덕희 석공.....지리산 골짝골짝에 이런 분들의 숨결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게 놀랍습니다.
 

또 이들을 사랑하고 지키고 있는 김용근님, 이주리님, 박찬용님, 엄범희님 등....
대한민국의 문화는 바로 이런 분들의 열정과 집념 어린 노력에 의해 지켜지고 발전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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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판소리계 최고의 로맨티스트' 임방울 명창(1904년~1961년)을 소개하겠습니다.

임방울 명창은 을사보호 조약을 맺기 1년 전인 1904년에, 전남 광산군 수성마을에서 아버지 임경학씨와 어머니 김나주씨의 팔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세습 예술가 집안이었고, 본 이름은 승근인데 방울 같은 소리를 내며 크라고 방울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외삼촌이자 국창이라 불리던 서편제의 김창환 명창에게 기초를 닦았고, 자라면서 여러 명창들에게 배운 뒤, 15세 무렵에는 동편제의 유성준 명창에게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유성준 명창은 성질이 급하고 괴퍅해서 어린 임방울은 기다란 담뱃대로 머리통을 수도 없이 얻어 맞았다고 합니다. 같이 공부하던 여자애들을 맨발로 북 위에 한 시간씩 세워두기도 했다니, 제가 연기했던 「서편제」의 유봉보다 더 지독한 선생님이었나 봅니다.

임방울은 목소리가 맑고 청아하면서도 슬픈 느낌을 주고, 고음과 저음이 시원시원하게 터져나오고, 어떠한 경우에도 목이 쉬지 않을 정도로 좋은 성대를 타고 났습니다.

그런데 변성기를 맞아 소리가 마음대로 나오지 않자 골방에 틀어박혀 문을 걸어 잠그고 연습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이 무렵의 임방울 명창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그가 무덤가에서 하루종일 소리공부를 하는데 원하는 소리가 죽어도 안나오자 "마마(천연두)에 걸리면 목이 트인다는데 마마나 걸려라!"하고 소원을 빌었더니 과연 천연두에 걸려서 소리가 트이고, 그 대신 얼굴이 얽었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이처럼 소리 공부에 전력을 기울인 뒤, 그는 대명창이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스물을 갓 넘은 1925년 9월, '조선명창연주회'가 매일신보사 주최로 열렸습니다. 명창들의 노래를 듣기 위해 관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먼저 그의 외삼촌인 김창환 명창과 당대 최고의 명창인 송만갑 명창, 이동백 명창, 정정렬 명창들이 특별출연으로 무대에 올라 소리를 했습니다.

그뒤를 이어 무릎 위로 올라간 짧은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땅딸막한 키에, 약간 얽은 데다가 별로 잘생기지 않은 얼굴의 임방울이 무대에 나타났습니다. 초라한 행색의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판소리 「춘향가」 중 <옥중가(獄中歌)>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寂寞獄房) 찬 자리에
생각나는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이 노래는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힌 춘향이가 한양으로 떠나 간 이몽룡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목에 칼을 쓰고 산발한 머리가 마치 쑥대처럼 생겼고, 얼굴은 창백하게 귀신처럼 생겼다고  해서 '쑥대머리 귀신형용'이란 충격적인 가사로 노래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참혹한 지경에서도 일편단심 사랑하는 님을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이 너무도 절실하게 묘사된 명곡입니다. 오페라로 치면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이나 <공주는 잠 못 이루고>와 같은 대표적인 아리아인 것입니다.


뱃속에서 바로 소리를 뽑아서 내는 통성에 약간 쉰듯 칼칼하게 터져나오는 수리성을 섞어, 춘향이의 비통처절한 심정을 애절하게 토해내는 임방울의 판소리는 단박에 청중을 휘어잡았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춘향이의 심정이 절망적인 시대의 정서와 어울어지면서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습니다. 이 노래가 바로 불후의 명곡이 된 <쑥대머리>인 것입니다.


 
그 공연 이후 임방울은 하루 아침에 명창의 반열에 올랐고, 콜럼비아 레코드나 빅터 레코드나 OK 레코드와 같은 유명 음반사가 앞다투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의 출세작 <쑥대머리>가 실린 음반은 한반도와 만주와 일본까지 불티나게 팔려나가, 각 음반사마다 12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기록을 세웠습니다. 

그후 1930년 전국명창대회에서 장원의 영광을 차지한 임방울은 본격적인 소리꾼으로 나서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연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즈음, 광주의 기관장들이 환영파티를 열어 준 '송학원'이라는 요릿집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임방울이 소년시절에 광주의 부잣집에서 고용살이를 했는데, 그 집에 동갑내기의 아름다운 딸이 있었습니다. 소녀와 소년은 철부지의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소녀의 부모가 반대하는 통에 소년은 그 집을 떠나야 했고, 소녀는 어느 부잣집 아들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후 소녀의 결혼 생활은 실패로 끝났고, 광주에서 송학원이란 요릿집을 차리고 예명을 김산호주로 지은 소녀는 광주 유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여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날, 그 자리에서, 명창이 되어 돌아 온 임방울과 여주인 김산호주가 십여년도 훨씬 흐른 뒤에 해후를 한 겁니다. 그동안 서로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두 연인은 곧바로 불같은 사랑을 불태웠습니다.

임방울은 2년 간 송학원의 내실에 숨어 살며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습니다. 세상에서는 임방울이 잠적했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전속계약을 한 OK 레코드 회사에서는 그의 행방을 찾느라 혈안이 되었습니다. 

미색이 빼어났던 김산호주는 천하명창 임방울을 2년 동안 송학원의 내실에 숨겨 놓은 채, 사랑의 포로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임방울은 자신의 목소리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토록 기름졌던 목소리가 탁해지고, 고음이 마음대로 나오지 않고, 소리를 조금만 질러도 땀이 뻘뻘 나는 것이었습니다.

대경실색한 그는 어느 날, 산호주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지리산으로 떠나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그는 지리산 토굴에 숨어 살며 소리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임방울의 행방을 알지 못한 채, 미칠듯한 그리움과 슬픔에 빠진 산호주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천지사방을  수소문한 끝에 간신히 임방울의 행방을 알아 낸 산호주는 임방울이 소리공부를 하는 토굴 앞에서 만나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임방울은 끝내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깊은 절망에 빠져 집으로 돌아 온 산호주는 임방울을 애타게 그리다가 병이 깊어져, 마침내 30세도 안된 꽃 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산호주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임방울은 죽어가는 애인을 가슴에 껴안고 슬피 울며 즉석에서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습니다. 그것이 바로 <추억>이라는 노래입니다.


앞산도 첩첩허고
뒷산도 첩첩헌디

혼은 어디로 향하신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럇든가

그리쉽게 가럇거든

당초에 나오지를 말았거나
왔다가면 그저나 가지

노던 터에다 값진 이름을 두고가며
동무에게 정을 두고 가서

가시는 임을 하직코 가셨지만
세상에 있는 동무들은
백년을 통곡헌들

보러 올 줄을 어느 뉘가 알며
천하를 죄다 외고 다닌들

어느 곳에서 만나 보리오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전생에 무슨 함의로
이 세상에 알게 되어서

각도각골 방방곡곡 다니던 일을
곽 속에 들어서도 나는 못잊겄네

원명이 그뿐이었든가
이리 급작스리 황천객이 되얏는가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어데를 가고서 못오는가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을 보고지고



이 노래가 바로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울광장 '노제' 때 안숙선 명창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제가 판소리를 배우던 젊은 시절, 이 노래에 얽힌 비극적 사랑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여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오다가, 사랑하던 노전대통령을 떠나보내는 국민들의 마음을 이 노래에 실어 보내드렸던 것입니다.

이후 박초월 명창 등과 <동일 창극단>을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하며 최고의 명창으로 대중들을 울리고 웃기던 임방울 명창은 1961년 공연 도중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5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상 처음 국악예술인장으로 치러진 임방울 명창의 장례식에는 200여 명의 여류 명창들이 소복을 입고 길을 가며 상여소리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행렬 끝에 100여 명의 거지가 눈물을 흘리며 따라와 눈길을 끌었습니다. 공연 때마다 거지들은 무료로 관람시켰던 임방울 명창에 대한 추모의 표시였습니다.


10여세부터 여러 스승으로부터 '서편제'와 '동편제'를 모두 사사받아 자신의 고유한 가풍을 수립한 전설적 명창 임방울. 

민족사의 흐름에서 가장 불행했던 시기이자, 판소리 역사에서 가장 시련과 수난이 많았던 일제 침략기에 민초들의 한을 노래한 명창 임방울. 

김창환, 이동백, 송만갑 같은 선배 가객들처럼 조선시대의 벼슬 하나 지낸 바 없고, 후배 명창들처럼 인간문화재로 대접 한 번 받아보지 못한 불운한 시대의 진정한 광대 임방울. 

평생 양복 입기를 싫어하며 흰색 한복 두루마기를 즐겨 입고, 수많은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소외된 민초들의 아픔을 위로해주던 아름다운 가객 임방울.

공연 때 마이크 쓰기를 꺼려 했고, 입에 발린 공치사나 돈 받기를 외면했으며, 번돈은 불우한 이웃에게 아낌없이 써버려 유족에게 아무런 유산도 남기지 않은 풍류남아 임방울.

조선왕조가 저물어가는 때에 태어나 민족사의 혼란 속에서 유랑의 생애를 마친 임방울은 우리의 비극적 시대를 대표하는 명창이었습니다.


그의 출생지인 광주시 광산구 송정공원에 세워진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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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후 일 년쯤 지난 1977년 3월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도 연극에 빠져서 ‘예술가 지망 백수’로 허우적거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장남이란 책임 때문에 연극을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열심히 취직자리를 알아보던 중,『뿌리깊은 나무』잡지사의 기자 공모 광고를 우연히 신문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몇 달 전에 서점에서 산 『뿌리깊은 나무』의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 어린 탐색이 제 취향과 딱 들어맞아서 애독자로 지냈던 터라, 주저하지 않고 서류를 내고 시험을 봤습니다. 다행히도 연세대학교 출신의 재원인 김인숙씨와 함께 합격해서 대망의 ‘첫 직장’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글 고치기로 '악명' 높았던 『뿌리깊은 나무』.

한창기 사장님을 비롯해서 윤구병 편집부장, 김형윤, 설호정, 강창민, 박종만, 김영옥 등 내노라하는 문장가들이 모여 있던 잡지사인지라 동료나 선후배들과도 즐겁게 지냈고, 취재하고 글 쓰는 기자로서의 일도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유일하게 싫어했던 일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필자들이 보내 온 원고를 손질하는 일이었습니다.

『뿌리깊은 나무』의 ‘글 고치기’는 글쟁이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습니다. 한글 전용, 가로쓰기, 지식인 언어와 민중 언어의 조화, 국어의 얼개와 어휘에 대한 탐구를 통한 편집과 교열―이것이 『뿌리깊은 나무』가 남의 글을 '마음대로 뜯어고치는' 당당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당대 이름난 문장가들의 글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사정없이 뜯어 고쳐져서 재조립이 되다보니 그런 일을 처음 당하는 필자들은 노발대발하고 원고를 집어 던지며 화를 냈습니다. 그래도 정성을 다해서 설명하면 대개는 누그러져서 포기하곤 했습니다.

글을 다듬어나가는 동안 문장 공부도 많이 하고 글에 대한 무서움도 알아 갔지만, 기본적으로 내 글을 쓰는 시간보다 남의 글을 다듬는 시간이 많다보니 일 자체에 대한 의욕은 많이 감소되었습니다.


나를 매혹시킨 <브리태니커 판소리 감상회>.

그 대신 회사에 대한 애정과 일에 대한 나의 의욕을 북돋워준 멋진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브리태니커 판소리 감상회>가 그것이었습니다.

칠십 명쯤 앉을 수 있는 1층 회의실을 임시 공연장으로 만들어, 일주일에 한 번씩 한 시간쯤 명창들을 초청해「춘향가」나「심청가」나「흥보가」나「수궁가」나「적벽가」의 완창을 무료로 감상하는 공연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완창이 서너 시간씩 걸렸기 때문에 한 작품 당 2회나 3,4회에 나누어서 진행되었습니다. 그 무렵에 조상현, 정권진, 성우향, 오정숙과 같은 쟁쟁한 명창들의 소리를 완창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소리북도 김명환, 김득수, 김동준 등 당대 최고의 고수들이 쳤으니 정말 귀하디 귀한 소리판이었습니다. 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 감상회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 중, 박록주 명창이 출연한 소리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무대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때 이미 80세가 넘은 나이로 병마와 싸우고 계셨던 노명창은 제자의 발표 무대에 격려사를 하기 위해 제자들의 부축을 받고 무대 위로 올라섰습니다.

젊은 시절, <동백꽃>의 작가 김유정의 짝사랑을 받아 유명세를 탔던 박록주 명창은 김소희, 박초월 명창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여류 명창이었다. 


“내가 소리를 한지 한 60년이 되어 가는데, 이제 조금 귀가 뚫리려 하니까 숨도 차고 곧 골로 갑니다.”

하시더니 지팡이를 짚고 앞줄에 앉아 있는 노인들을 죽 바라보면서 농담을 했습니다.

“내가 어려서 소리할 때 자주 오셨던 저 분들도, 인제 나와 함께 골로 가게 생겼네요.”

그러자 앞에 앉은 노인 몇 분이 “얼씨구!”하면서 소리쳤습니다.

“지금 내가 숨도 차고 목도 안 나오고 해서 소리를 하러 나온 건 아니지마는, 우리 제자 길을 닦아주기 위해서 잠깐 단가 한 마디 하고 내려갑니다.”

관객의 박수와 함께 노명창의 노래가 시작되었습니다.

백발이 섧고 섧다
백발이 섧고 섧네
나도 어제 청춘이더니
오늘 백발 한심하다 

노명창은 가만히 서서 조용조용 노래를 부르다가 중간에 부채를 좍 펼쳤습니다. 그러자 “얼씨구!”, “좋다!”하는 추임새로 객석이 요란하게 들썩거렸습니다.

노명창은 목이 메는 듯 노래를 다 마치지 않고 중간에 퇴장하셨습니다. 그녀가 퇴장한지 한참이 지나도록 객석의 박수와 함성소리는 요란했습니다.
 
노래 부르던 명창도, 그 노래를 듣던 올드 팬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청춘의 추억과 노년의 외로움과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회한에 잠겨 어쩔 줄 모르는 듯 했습니다.

29살의 어린 저 역시 무언지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가슴 속에서 차올라 눈물을 흘렸습니다.

무대도 없고 조명도 없고 병풍도 없는 그야말로 초라하고 벌거벗은 무대에서, 불편하기 짝이 없는 간이 철제 의자에 앉은 관객들과 예술가가 한 마음이 되어 인생과 영혼으로 교감하는 예술의 현장은 저에게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때 감상한 명창들의 소리와 소리판을 끌어가는 솜씨는 연극지망생이었던 저에게 오랫동안 소중한 자양분이 되어 주었습니다.

1974년부터 시작해서 1978년까지 약 백 회 동안 계속된 판소리 감상회는 한창기 사장이 아니면 생각해 낼 수 없는, 참으로 획기적이고 대담한 기획이었습니다.



그 감상회를 바탕으로 「브리태니커 판소리 전집」이나 「뿌리깊은 나무 판소리 다섯 마당」,「뿌리깊은 나무 산조 전집」,「뿌리깊은 나무 슬픈 소리」와 함께 주옥같은 음반들이 여럿 만들어진 것 또한 한 사장의 탁월한 안목과 기획력 덕분이라고 봅니다.




광대 노릇하려고 글을 배신하다니!

한창기 사장은 제가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한번은 〈숨어사는 외톨박이〉난을 맡게 되어 전라북도 전주에서 상여소리꾼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분의 삶을 취재하고 회사에 돌아오니 한사장님이 편집실에 들러 상여소리꾼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 보시다가 갑자기 “소리를 배운다니 상여소리도 할 줄 아나?”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할 줄 알죠.”
“한번 해 보게.”

한창 판소리에 열이 오른 새끼 광대였던 저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책상을 두드리며 「심청가」중 '곽씨부인 상여 나가는 대목'을 불렀습니다.

어너 어허너 어이가리 넘차 너화너
북망산이 머다더니 건너 앞산이
북망이로구나
어너 어허너 어이가리 넘차 너화너

느닷없는 소리판에 동료 기자들과 함께 한 사장님도 박수를 치며 무척 즐거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직장생활을 하는 중 저에게 병이 생겼습니다. 뼛속 깊이 스며든 ‘연극병’ 때문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마치 철창에 갇힌 맹수처럼 사무실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고, 우울증에 걸리고, 불면증에 소화장애가 오고, 연극과 판소리에 대한 갈증으로 가슴 속에 불길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결국 저는 일 년 만에 회사를 그만 두었습니다. 한사장님은 사직서를 들고 찾아 간 제게 농담처럼 “광대 노릇하려고 글을 배신하다니!” 하셨습니다.

연극병이 깊이 든 저의 귀에는 서운해 하신 말인지 격려차 하신 말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격려보다는 서운한 심정을 토로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생계의 위협에서 구해준 『뿌리깊은 나무

저는 잠시 배화여고의 독어 교사를 하다가 그 노릇도 그만두고 연극에 전념하게 되었는데, 그 결단의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생계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아선상(?)에서 헤매던 그 무렵의 저를 구해 준 것은 결국 『뿌리깊은 나무』와의 인연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번역도 하고 칼럼도 쓰며 연명을 하던 제게 『뿌리깊은 나무』 출판사의 객원 기자 노릇이 주어졌습니다.



「한국의 발견」 시리즈 중 〈전라북도〉 편을 맡아 이년 쯤 연명을 했고, 「뿌리깊은 나무 민중 자서전」 중 임실의 장구잽이인 신기남의 구술을 채록한「어떻게 허먼 똑똑헌 제자 한 놈 두고 죽을 꼬?」와 가야금 산조의 명인인 함동정월의 구술을 채록한「물을 건너 봐야 알고, 사람은 겪어 봐야 알거든」 편을 집필하며 연명했습니다. 다행히 그 일들이 끝날 무렵부터는 배우 일로 조금씩 출연료를 받은 덕분에 굶주림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한참 동안 연극과 영화 일로 분주히 보내느라 자주 뵙지 못하다가『뿌리깊은 나무』가 전두환 정권에 의해서 폐간당한 뒤 『샘이깊은 물』을 출판하고 있던 회사에 인사차 찾아갔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입은 양복을 이리저리 살펴보시더니 배우를 하려면 양복 입는 법을 알아야 한다면서 아메리칸 스타일과 유러피안 스타일의 양복이 어떻게 다른지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해 주고 나서, 나한테는 아메리칸 스타일이 어울릴 것 같으니 미국에 가게 되거든 꼭 “부룩스 브라더즈” 매장에서 양복을 사 입으라고 충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직까지 “부룩스 브라더스” 양복을 입어보지 못했지만 그 자상한 가르침을 언젠가는 실천할 생각입니다.

그 뒤로도 배우 노릇을 하기엔 너무도 한심한 저의 의상 감각에 대해 심히 염려를 해 주시고, 찾아 갈 때마다 세계 각국의 옷맵시와 관련된 지식을 전수해 주시곤 했습니다.

한번은 한국에 들어 와 있는 이태리 양복 매장을 소개한 뒤 『샘이깊은 물』의 편집장인 설호정씨와 편집 디자이너이신 이상철 선생에게 저를 데리고 가서 옷을 골라 주라고 지시(?)까지 했습니다. 그때 두 분이 골라 준 이태리제 캐주얼 황토색 윗도리와 곤색 바지가 어찌나 맘에 드는지 저는 단추가 떨어지고 허름해진 그 옷을 십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 즐겨 입습니다.

또「서편제」에서 제가 입고 나온 한복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손바느질로 한복을 만드는 여성에게 주문하여 정갈하게 만들어진 무명 한복 한 벌을 선사해주고, 한복 입는 법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해 주신 적도 있습니다.

그 뒤로도 종종 집사람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인사를 가면 본인이 아끼던 넥타이나 구두를 선물해 주시기도 하고, 어린 딸을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우리 말 교육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한창기 사장과의 끈질긴 인연

『뿌리깊은 나무』 잡지사 직원으로서의 인연은 일 년 밖에 맺어지지 않았지만, 한창기 사장과의 인연은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한창기 사장이 추구했던 우리말과 전통 문화에 대한 사랑에 저도 함께 심취했고, 그러한 일을 예술 현장에서 실천해 온 제 삶의 궤적과 맞물렸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좀 더 살아계셨더라면 제가 하고자 하는 일들에 대해 놀라운 식견으로 조언과 비판을 아끼지 않으셨을 텐데, 이승에 안계시니 아쉽고 그립습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1976년 3월 발행인 한창기, 편집장 윤구병 체제로 창간했다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폐간 당했다. 우리나라 잡지에서 처음으로 한글전용과 가로쓰기 편집을 했다. 서구의 문물을 소개하는 수준이던 70년대 지식인 사회에 한국적인 멋, 민중적 아름다움을 기조로 잡지 편집의 혁명을 가져왔다는 평을 받는다. 

발행인 한창기는 여느 국어학자보다 뛰어 난  재야 국어학자였고, 안목이 빼어난 문화재 수집가였고, 전통문화의 부활을 이끈 문화운동가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깊은 물』이라는 잡지의 편집인-발행인이었다. 『뿌리깊은 나무』가 태어난 지 21년 되던 1997년, 간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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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스승의 날만 되면 특별히 떠오르는 스승이 계십니다. 바로 저의 판소리 스승인 박초월 명창이십니다.                       .

박초월 스승과의 만남은 제가 대학교 3학년 학생이던 때였습니다.

눈이 펑펑 내리던 초겨울 어느 날, 군대 갔다가 휴가 나온 친구와 함께 비원 쪽으로 터덜터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다가 친구가 길가에 멈춰 서더니 간판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박초월 국악 전습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건물 4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친구는 김제에 있는 국악원에서 판소리를 조금 배웠고, 저는 그 친구 덕에 난생 처음 판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어 판소리에 심취해 있었기에 무조건 올라간 겁니다. 

북소리와 소녀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학원의 현관문을 기세 좋게 열고 들어간 친구가 
판소리를 몇 달 배웠다는 둥 너스레를 떨자 중년 남자 한 분이 북을 차고앉으면서 “소리를 배웠다니 한번 들어 보자”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당대 최고의 남자 명창이던 조상현씨였습니다.

친구는 김제에서 배웠던 '단가' 한 대목을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나니 소파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쉰 목소리로 하하거리고 웃었고, 소녀들도 킥킥거리고 웃었습니다. 친구는 본래 음치인데다가 박치까지 겸했으니 그럴 만도 했지요.

소파에 앉아서 웃던 할머니가 저를 가리키며 “저 사람도 소리 한번 들어 보자.”고 했습니다. 저는 얼굴을 붉히며 “저는 저 친구가 배우는 걸 구경만 해서 한 마디도 부를 줄 모릅니다.” 했습니다. 그러자 “소리를 배우러 왔다니 오늘부터 배워 보시게.”하면서 직접 북 앞에 앉으시는 거였습니다.

박초월 스승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박초월 명창(1917~1983). 호 미산. 본명 박삼순. <수궁가> 인간문화재.
김소희, 박녹주 명창과 함께 1930~1970년대 한국 여성 판소리계를 대표한 3대 여류명창 중 한 명이다. 
현재의 대표적인 남성 명창인 조통달은 박초월 명창의 조카이고, 가수 조관우는 조통달 명창의 아들이니 명창의 피가 손자인 조관우에게 이어졌다.

                   박초월 명창의 외손자인  가수 조관우.


저는 그날부터 열심히 학원에 다녔고, 친구는 저의 한 달분 수업료 6천원을 대신 내주고는 군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지 한 달 뒤에 수업료 낼 돈이 없어서 학원을 다니지 못하겠다고 하자, 선생님이 웃으며 그냥 다니라고 하셨습니다.

“자네는 서울대학교 학생이잖여...”

선생님이 말씀하신 학원비 면제 이유였습니다. 게다가 자취방도 없이 여기저기 기숙을 하며 보내던 제 딱한 사정을 아신 선생님은 크리스마스가 되자 목도리와 장갑을 선물로 주시며, 잠자리가 마땅찮으면 학원에서 자라고 하셨습니다. 오갈 데 없던 처지였던 저는 며칠 뒤부터 학원에서 잠을 잤습니다.

70년대의 대학가는 서구의 히피 문화가 휩쓸었던 때입니다. 장발에 청바지와 통기타와 미니스커트가 유행했습니다. 그런 문화적 분위기에서 살았던 제가 미쳐도 한참 미치고,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습니다.

대학교 졸업생이 학교는 안 가고 판소리 학원에서 먹고 자고, 선생님이 아침 일찍 싸들고 오시는 아침밥을 얻어 먹고, 하루 종일 전화 받고, 노래 가사도 써 주고, 학원생들 판소리 배울 때 같이 배우고, 학원생들 다 가고 나면 걸레질하고 소파에서 잠을 잤습니다. 참으로 괴상한, 그러나 너무도 행복한 나날들이었습니다.

밤에 잠이 안 오면 학원 창문 밖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단성사> 영화관의 화려한 영화 간판과 네온사인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는데, 십오 년쯤 뒤에 제가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한 「서편제」의 간판이 그 곳에 걸릴 줄 어찌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러다가 선생님의 외아들이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지자, 아예 서대문구 불광동에 있는 선생님 댁에 가정교사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아들의 공부를 가르쳐 주고, 선생님은 제게 노래를 가르쳐 주는 교환(?)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북도 칠 줄 모르는 초보 제자에게 한복을 입히고 집 마당에 병풍 치고 찍은 기념 사진.


선생님은 새벽 다섯 시면 불광산으로 아침 등산을 가는 게 첫 일과였습니다. 그때 집에는 전남 순천에서 소리를 배우러 올라온 예쁜 꼬마 국민학교 소녀가 있어서 함께 가곤 했지요.

우리는 산에 올라가 선생님을 따라서 발성 연습을 하고, 시조로 목을 풀기도 하고, 낮에 배웠던 대목 중에서 잘 안 되는 부분을 반복해서 연습하고 교정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참 하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몸도 가벼워져서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정이 많은 성격이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무한정으로 정을 쏟는 성격이었지요. 그중에서도 제게 쏟는 정은 무척 각별했어요. 마치 아들에게 하듯이 먹는 것 입는 것 모두를 챙겨 주고, 제가 외출을 할 때면 용돈까지 주시곤 했습니다.

게다가 소리 공부도 어찌나 극성스럽게 시키는지 다른 제자들이 질투할 정도였습니다. 또 제자 중에 대학을 나온 ‘선비’가 있다는 게 그렇게도 자랑스러운지 공연을 하러 가시거나, 방송국에 가시거나, 국악인들의 모임이 있을 때면 꼭 저를 데리고 가서 인사를 시키곤 하셨습니다.

그러한 선생님의 사랑 덕분에 저는 평생을 판소리에 몸담아 온 예술가의 겉과 속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책이나 이론적인 가르침을 통해서는 깨달을 수 없는,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광대의 삶에 대해서도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같은 스승 박초월 명창


선생님은 제자들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 피우는 걸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물론 성대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오랜 무대 생활의 체험으로 광대에게는 무엇보다 절제가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때로 옛날에 함께 판소리를 했던 사람들 중에 술이나 아편으로 폐인이 된 사람이 많았다는 얘기를 하시면서 술·담배에 절어 있으면 절대 명창이 될 수 없다고하셨습니다.

또 남녀 간의 이성 관계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하신 편이었습니다.

“사내는 계집 조심하고, 계집은 사내 조심해야 돼.”

옛날 선생님들은 제자가 방탕한 행동을 하면 여지없이 파문해버렸다는 말씀도 종종 하시곤 했습니다.

또 평상시의 몸가짐에서도 오랫동안 혼자 사시느라 그랬는지 무척 까다롭고 가리시는 게 많아 사람을 가려서 사귀는 편이었고, 약속 시간은 철저하게 지키셨습니다.

또 소리꾼이 술 몇 잔 얻어먹거나, 돈 몇 푼에 팔려서 취객의 흥을 돋우는 것은 옛날 얘기지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술자리나 잔칫집에서 노래 부르는 걸 철저하게 금하셨습니다.

그런 성격이셨으니 공연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지병인 당뇨병으로 고생하신 지 십 년도 넘었던 터라 평상시에도 건강을 위해서 세심하게 신경을 쓰시는 편이었지만, 공연 날짜가 확정되면 그날부터 집안은 초긴장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보약을 지어서 달여 먹거나 끼니때마다 몸의 기운을 돋워 주는 음식들을 정성스럽게 드시고, 사람과의 만남도 줄이고, 등산길에 체조도 하고, 발성 연습도 더욱 공들여 하십니다.

또 될 수 있으면 집안일에 신경을 덜 쓰고, 공연에만 정신을 집중하려 하십니다. 자신의 허약한 건강 상태를 극복하고 무대에서 최상의 판소리를 부르려는 선생님의 눈물겨운 노력을 보면서 나는 종종 숙연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는 동안, 제게는 새로운 음악 세계를 탐험하는 행복과 함께 힘겨운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차라리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더욱 빨리 판소리의 창법을 익힐 수 있었으련만, 노래만 하려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벨칸토 식 발성기관 때문에 호되게 고생했습니다.

그 시기의 저는 발성법뿐 아니라 그 동안 내가 쌓아왔던 음악에 대한 감각의 대수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탐험에 따른 고통치고는 정말 혹독한 시련의 세월이었습니다.

그 무렵의 저를 가장 괴롭힌 문제는 오페라와 판소리의 음악성에 대한 비교의 문제였습니다.

저는 판소리가 우리 것이기 때문에 좋아한 것이 아니고, 음악적으로 저를 끌어당겼기 때문에 좋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음악적 깊이와 표현력은 오페라와 견주어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판소리를 공부하면 할수록 타당한 생각으로 굳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판소리를 둘러 싼 외적 여건은 그런 생각을 증명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게 현실이었습니다.

판소리를 하는 성악가의 절대 부족,
그 성악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 공간의 열악함,
성악가를 좋아하는 팬들의 고령화와 절대적 감소추세,
새로운 판소리를 작곡할 수 있는 작가와 작곡자, 연출가의 빈곤함,
음반화에 필수적인 전문 기획자와 녹음 기사의 부족,
이 모든 조건에서 판소리는 오페라와 경쟁하기에는 너무도 척박한 환경에서 악전고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악전고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오페라나 서양 음악을 몰랐더라면 하지 않았을 고민으로 저는 오랫동안 끙끙대며 가슴앓이 했습니다.

저는 기초적인 민요나 단가를 배운 뒤,「흥보가」「수궁가」를 공부하고 있던 때라 공부에 대한 의욕은 대단했지만 연극일에 쫒겨서 가는 날보다 못 가는 날이 갈수록 많아졌습니다.

그 무렵 선생님은 무척 적적하고 쓸쓸해 하셨습니다. 당뇨병 증세가 심해지고 갈수록 건강이 나빠지자 아예 학원을 폐쇄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찾아오는 제자들만 가르치니, 제자 기다리고 가르치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었습니다.

또 공연 요청도 갈수록 줄어들어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잊혀져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싸여 무척 초조해 하셨습니다.

그 무렵 선생님은 남원군 운봉 땅에서 살 무렵, 아버지한테 지게작대기로 얻어 맞으면서도 판소리에 미쳤던 시절의 이야기를 종종 하시곤 하셨습니다.

집안에 기생이 나올까 걱정이 태산이셨던 아버님은 14살도 안 된 딸을 부잣집에 시집 보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첫날 밤도 치르지 않고 시집에서 도망 나와 남원 권번에 들어 가 판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에 서 있는 동편제의 시조인 송흥록 명창(1789년 경~1863년 경)의 동상.
그 뒤에 보이는 초가집이 박초월 명창이 자랐던 소녀 시절의 집.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재 소녀 명창이란 칭찬을 듣고, 열여섯 살 무렵에는 이미 명창 대회에서 일등을 한 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레코드 취입을 하고, 일본으로 서울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던 시절의 얘기는 화려하고 재미있었습니다.

1933년에 <조선 성악 연구회>에 들어가서 이화중선과 같은 여류 명창과 함께 대표적인 여류 명창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여성 창극단이 생겼을 때는 전국을 돌면서 뛰어난 노래와 연기로 수많은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던 그 시절의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있고 때로는 눈물겹기까지 했습니다.

  요즘의 <소녀시대>만큼이나 인기를 끌며 활약하던 시절에 찍은
  박초월 명창의 엣된 모습


사랑과 미움, 만남과 헤어짐, 화려함과 비참함, 방랑과 배고픔 같은 온갖 사연들이 소용돌이친 전성기의 영광은 늙으면 늙을수록, 또 주위가 적막해질수록 더욱더 빛을 발하며 선생님의 가슴속을 비춰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 무렵의 선생님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결사적으로 항거하고 있었습니다. 고적한 방안에서 가쁜 숨을 쉬고 손을 떨며 화장을 하시고는, 언제 올지 모를 제자를 하염없이 기다리시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가면 이를 악물고 북을 치며 소리를 가르쳐 주시곤 했습니다.

                       병든 몸으로 소리를 가르치던
                       스승님의 말년의 모습.


저는 선생님의 힘들어하시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공부하는 시간을 한 시간에서 삼십분으로 줄이고, 어떤 때는 혼자서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거나, 아니면 이야기만 나누다 오곤 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굳이 문밖까지 나와 제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쓸쓸하게 서 계시곤 했습니다. 그 모습이 등에 박혀 제 걸음은 무겁기만 했지만, 집에는 또 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로 중풍의 병환이 점점 깊어가는 아버님이 계시니 안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은 연극 공연이 끝나고 출연료를 받았는데, 그 돈으로는 도저히 쌀값과 아버지의 약값을 마련할 길이 없어 한숨을 쉬면서도 습관적으로 선생님 댁에 공부를 하러 갔습니다.

그날 마침 「흥보가」중에서 흥보 부인이 <가난타령>을 하면서 우는 대목을 배웠습니다.

가난이야 가난이야
원수 놈의 가난이야
잘 살고 못 살기는
삼신 제왕이 마련을 했나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불우 행사 한 일 없이
밤낮 주야로 벌었어도
삼순구식(三旬九食)을
면할 수가 없네

박초월 명창의 흥보가 중 '가난타령'

그런데 노래를 부르던 중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더니 그만 노래를 다 부르지 못하고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시더니 물으셨습니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어디 몸이 아픈가, 집안에 우환이 있는가?”

그래도 제가 대답 없이 울기만 하자 눈물을 글썽이며 곰곰 생각하시더니 틀림없이 그것 때문일 것이라는 듯이 조용히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사귀던 여자하고 헤어진 게지?^^”

저는 그런 쪽으로 결론을 내린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도 뜻밖이라 웃지도 울지도 못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눈물을 그치고 거짓말로 들러대기 시작했습니다.

“출판사 하는 친구에게 꾸어 준 돈이 있는데 그 친구가 망해서 그 돈을 못 받게 되었어요.”

저는 그때까지 연극을 하면서 친구와 함께 출판사를 차려서 돈을 잘 번다고 선생님을 속여 왔기 때문에 솔직한 사정을 도저히 얘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 얘기를 들은 선생님은 금세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시더니 서랍에서 오만 원을 꺼내어 제 손에 꼬옥 쥐어 주셨습니다.

그 돈으로 아버님께 약을 사드릴 수 있게 되었지만 저는 그 일이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지금도 <가난타령> 대목만 하려면 그때의 일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이렇듯 정 많고 눈물 많은 분이었기에 말년의 쓸쓸함을 어느 누구보다도 견디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건강이 허락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일 년에 몇 차례 있는 공연 요청을 한 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당뇨병이 점점 악화되어 체중이 줄어들고 기억력이 감퇴되고 목소리가 잠기게 되었는데도, 다른 국악인들을 만나면 건강이 좋아졌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 웃음 뒤의 슬픔, 그 짙은 화장 뒤의 주름살과, 무대에서의 갈채 뒤에 오는 기력 쇠진과 허탈을 모두 알고 있는 저는 선생님의 웃음이 밝으면 밝을수록 더욱더 불안하였습니다.

그 불안은 점점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어떤 공연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번은 「수궁가」를 하시던 중에 느닷없이「흥보가」가사가 튀어 나오더니, 중간에 가사를 잊어버리고 한참을 헤매시다가, 제자들이 무대 뒤에서 가사를 소리쳐서 일러준 덕에 간신히 한 대목을 때우고 나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처참한 선생님의 표정은 내 가슴을 사정없이 후비며 파고들었습니다.

또 한 번은 공연을 끝내고 나오시더니 부리나케 집으로 가자고 하시는 거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배에 힘을 쓰다가 자신도 모르게 설사가 나와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당뇨병의 말기 증세인 만성 설사에 시달리고 계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그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을 했으며, 그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된 것을 느낀 선생님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지 생각하곤 혼자서 남몰래 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촬영을 마치고 새벽에 돌아왔을 때, 집으로 박초월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깜짝 놀라 허둥지둥 달려가 보니 선생님의 집안에 제자들과 국악인들의 통곡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며 그렇게도 이승의 삶에 애착을 가졌던 선생님!
예순여섯이란 '젊은' 나이에 죽음을 기다리게 된 자신을 몹시도 안타까워 했던 선생님!

지금쯤 이승의 허공을 떠돌며 자식들과 제자들과 자신이 사랑을 쏟았던 사람들의 주변을 맴돌고 계실까요? 

선생님! 어디에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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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명창들에게는 '득음'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 전설 같은 일화들이 많이 전해 온다.  득음이란 '소리를 얻는 것' 곧 판소리가 필요로 하는 최고의 성악적 경지에 다다른다는 말이다. 

테너나 바리톤이나 베이스와 같이 음역에 맞추어 역할이 정해지는 오페라와 달리 판소리는 소리꾼 혼자서 최고의 고음에서부터 최저의 저음까지를 소화해야 한다.

또 <춘향가>나 <심청가> 같은 판소리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완창하기 위해서는 서너 시간에서 길게는 아홉 시간까지의 긴 시간 동안 성대를 쓰기 때문에 상상할 수 없을만큼 고된 수련을 필요로 한다. 

안숙선 명창의 열창하는 모습


예전에 판소리 공부를 하던 소리꾼들은 기생들에게 무용과 음악을 가르치던 사설 교육 기관인 권번이나, 명창 선생님이 사는 집을 오가며 기초 공부를 했다.

그 다음에 '독공'이라는 개인 훈련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주로 마을에서 떨어진 산속의 움막이나 절 같은 곳에서 소리 공부를 했다.

그러다보니 어떤 명창은 폭포수 아래에서 폭포소리를 이겨가며 수련을 했다든지, 어떤 명창은 토굴에서 북채 수백 개를 부러뜨려가며 수련을 했다는 등의 수많은 일화가 전해 온다.

일제시대에 판소리에 미친 정노식이란 학자가 입으로만 전해 오던 명창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음악 세계를 집대성해서 펴낸 <조선창극사>에는 그런 일화들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판소리사라 할 이 책은, 관극시(觀劇詩)를 비롯한 판소리와 연관된 한시(漢詩)들도 모아 놓았고, 판소리의 음악적 특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광대의 약전 및 그 예술>이라는 항목에서는 89명의 남녀 소릿광대와  고수 1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중에 일반인들이 궁금해하는 '전설(?)' 두 가지가 있다.  소리 공부를 할 때 '똥물을 먹는다'는 전설과, '목에서 피를 토한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나 역시 그 전설이 궁금해서 한창 소리 공부를 할 때 나의 스승이신 박초월 명창에게 여쭤봤다.

 나의 스승 박초월 명창의 소녀 시절 사진


그랬더니 첫 번 째 질문인 똥물에 대해서는 자신도 마셔본 적이 있다고 대답하셨다. 

난 얼굴을 찡그리며 "그 냄새 나는 것을 어떻게 마셔요?"하고 물었다. 박초월 명창은 웃으면서 "그걸 어떤 미친 놈이 그냥 마셔?" 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똥물 제조법'을 가르쳐 주셨다. 

똥물 제조법

1. 굵은 대나무 통 뚜꼉을 무명천으로 꼭꼭 감싼 다음,  변소간에 넣어 둔다.
2. 몇 개월 뒤  대나무 통을 꺼내면 천 사이로 스며 든 '맑은' 똥물이 가득 차 있게 된다.
3. 그 물을  뚝배기에 담아 펄펄 끓인다.(기생충 박멸 작전)
4. 물이 식으면 코를 한손으로 막은 다음 단숨에 마신다. 


왜 구린 냄새가 나는 똥물을 마셨을까? 

하루에 몇 시간 씩 매일같이 소리 연습을 하다 보면 누구나 성대가 붓고 열이 생겨서 목이 잠기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때 성대의 열을 내리고 잠긴 목을 틔워주는데 똥물이 효과가 있다는 민간의 속설이 전해져서 그 물을 마시는 것이다.

실제로 곤장을 맞아서 온 몸이 부은 사람이 똥물을 먹고 나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는 걸 보면, 몸의 독기를 빼고 부기를 내리고 열을 내리는데 똥물이 효과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박초월 명창은 자신도 어릴 때 몇 번 마셨고, 제자 중에도 마신 사람이 있지만 "그건 모두 약이 귀했던 옛날 얘기지 지금은 좋은 약이 많아져서 똥물 마시는 사람은 없다." 하셨다.


명창들은 정말 목에서 피를 토했나?

두 번 째 질문에 대해서는 '하하' 웃으시며 그건 좀 과장된 얘기라고 하셨다.

소리 공부를 하다보면 성대가 붓고, 염증이 생겨 목이 쉬는데 그걸 이기고 계속 소리를 지르다 보면 염증이 터져서 가래에 조금씩 피가 섞여 나오는 경우는 있어도 "피를 토한다는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고 있을 수도 없다"는 대답이었다.

마침 그 무렵에 모 방송국에서 송흥록이란 전설적인 명창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어 내보내고 있었는데, 절에서 혼자 노래 연습을 하다가 시뻘건 피를 입에서 울컥울컥 쏟아내는 장면이 있었다.

선생님과 함께 그 장면을 보던 중 "저 사람이 폐병에 걸렸나? 저게 무슨 일이냐?"하며 화를 내신 적이 있다. 작가나 연출이 피를 토한다는 전설에 대해 연구도 하지 않고 만든 엉터리 장면을 본 시청자들은 명창들이 모두 저렇게 한사발씩 피를 토하는 줄 알 거 아니냐는 걱정과 함께 말이다.

나 역시 소리 공부에 빠졌을 적에는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을 하기도 했고 목이 쉬어 고생도 많이 했지만, 똥물을 먹거나 피를 토한 적은 없었다.

또 내가 아는 주변의 명창들도 성대가 붓거나 염증이 생기고 조금씩 피가 섞여 나온 일로 고생을 하고 그걸 치료하기 위해 무던히 고생을 했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도, 울컥울컥 피를 토한 경험을 한 사람은 없었으니 전설은 전설로 남겨 놓을 일이다.  

그만큼 판소리 수련의 길은 멀고도 고통스러운 길이다. 그런 길을 걸어 명창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인간승리의 표본이다.


     전설적인 명창 송만갑(1865~1939).
     그는 74세의 생애 동안 오로지 판소리의 길에만 매진했던
     대명창이며, 판소리계의 가왕이라고 불리는 송흥록 명창의
     손자이기도 했다.


나는 그 멀고도 고통스러운 길을 가다가 중도 포기한 사람이기 때문에 꿋꿋이 그 길을 걸어 가는 명창들에게는 지금도 한없는 존경과 사랑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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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부 장관 직을 그만 둔지도 어느 덧 2년이 되어 간다.
그동안 TV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연기자로, 연극 <밀키웨이>에서는 극작과 연출가로, 최근에는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위원장으로서 즐겁고 바쁘게 살고 있다.
 

내가「대왕 세종」에 출연하고 있을 때, 모 일간지에 동정 기사가 실렸는데 그 기사의 제목이 한동안 여기저기서 화제가 됐다.


김명곤 씨 “장관 껍데기 훌훌~ 다시 광대로”

“장관이라는 껍데기를 훌훌 벗어 버리고 이제 천직인 광대로 탈바꿈해야죠. 걱정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허허.”

김명곤(55·사진)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내년 1월 방송 예정인 KBS 1TV 사극 ‘대왕 세종’(극본 윤선주·연출 김성근)에서 배우로 복귀한다. 1999년 자신이 연출한 연극 ‘유랑의 노래’에 출연한 지 8년 만이다.

그는 그동안 국립극장장과 문화부 장관을 지내면서 연기와 멀어졌다.김 전 장관은 ‘대왕 세종’에서 고려 황실의 후예로 조선 왕조의 전복을 꿈꾸는 옥환 역을 맡았다. 옥환은 어린 세종을 긴장하게 만드는 인물로 초반 30회까지 비중이 큰 역할이다. 그가 대하 사극에 출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D일보 2007년 10월 6일자 기사 중 일부)

나는 대학교 다닐 때만해도 광대라고 하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코에 빨간 공을 붙인 서양의 삐에로를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줄타기하는 광대를 처음 보았는데 그 광대가 줄에 올라서서 “이 줄타기가 옛날에는 화랑의 기예였소!.” 하길래 깜짝 놀랐다. "화랑이라면 신라 시대의 무사 집단인데 줄타기를 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며 광대에 관한 기록을 찾아봤다.

우리나라에 그윽하고 오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며 유교, 불교, 도교의 3교를 포함한 것으로 민중을 교화하는 것이다.

신라 시대의 학자인 고운 최치원이 쓴 글이다. 이 글을 바탕으로 역사가인 단재 신채호는 이렇게 썼다.
 

선가(仙家)는 신라의 국선 곧 '화랑'으로 보며, 그 시원은 삼한의 소도(蘇塗)의 제관으로 고구려의 '조의선인(鳥衣仙人)'이다.

이런 글들을 보니 고대사회에서 예술가들은 하늘에 국가적 제사를 지낼 때는 제관으로서 활동했고, 그들의 신분은 왕족이나 귀족에 속하는 상류계급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통일신라가 무너지고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화랑들과 함께 예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천민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광대”라는 말은 고려시대에 서역에서 들어 와 우리말로 정착된 외래어인데, 예술가를 지칭하는 단어인 광대가 화랭이, 재인 등의 용어와 뒤섞이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광대들은 기생, 무당, 중, 백정 등과 함께 천민계급으로 살아야 했다. 이들은 사대부나 평민들과 한 동네에서 살지도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하고,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자기들끼리 기예를 전수하면서,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고, 그들만의 독특한 사회를 꾸려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광대들에 대해 다산 정약용은 이런 상소문을 썼다.

광대가 봄·여름이면 고기잡이를 좇아 어촌으로 모여들고 가을과 겨울이면 추수를 바라고 농촌으로 쏠리는데, 특히 창촌에서는 사당, 창기, 주파, 화랑, 악공들의 잡류들을 엄금해야 합니다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본 <왕의 남자>는 이 무렵의 떠돌이 남사당 광대패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실학사상이 일어나고 평민 가사, 탈춤, 판소리 등의 가치를 양반들 중의 몇몇이 언급하게 되면서 광대들의 가치가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고종과 대원군이 권력을 쥐었던 무렵에는 광대들이 왕족이나 고위 관리들의 잔치에 초대받고, 심지어 명인, 명창, 국창 등의 이름으로 궁궐에 들어가 임금 앞에서 기예를 선보이며 많은 돈을 벌고 신분의 상승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조선이 망한 후 광대들은 또 다시 천대받게 된다. 그 상황은 일제시대의 학자인 육당 최남선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조의 재인, 광대들은 적극적으로 특별한 권장을 입지 못하고, '무식무기력한 예인'들이 사회 최하층적 지위에서 구차히 존재하다 보니까 거기 쇠잔이 있을 뿐이지 발달이 없으며 저락이 거듭될 뿐이지 향상을 볼 수 없음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조건 하에 있다 보니까 '수 천 년을 하루같이' '몸을 놀리는 기술'과 '우스개 놀이'쯤에 그치고 드디어 다른 데 만한 순희곡적 생장을 이루지 못하고 만 것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명 풍화에는 조금도 유익한 바가 없으니 이는 연희를 실시하는 자가 학문이 없어 '동양의 부패한 풍습'만 알 뿐이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했던 <서편제>는 이 무렵의 떠돌이 판소리 광대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나는 대학시절에 오페라나 이태리 민요나 가곡이나 뮤지컬이나 비틀즈 등의 서구음악의 열광적 팬이었고, 괴테나 세익스피어나 입센이나 도스토에프스키 등의 서구문학(독문학)에 심취했던 사람이다. 그러다 우연히 판소리를 알게 된 후로 내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고향인 전주를 무지 싫어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의 흔적이 너무나 짙은 그 곳을 어서 떠나 서울로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진학공부를 했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도 한국을 빨리 떠나 독일로 유학 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인간문화재인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면서 전라도 말이 그렇게 다양한 표현과 영롱한 문학적 향기가 있는가를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핏줄에 대한 애정 곧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나의 조상과 조국에 대한 사랑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전통은 박물관에 진열된 골동품이 아니다. 전통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았던 삶의 내용과 형식 곧 그 분들의 삶의 자취이고 향기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세월이 지나면 전통의 계승자가 될 것이며, 언젠가는 전통 그 자체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나에게 전통은 ‘나를 숨쉬게 하고, 나를 활기 있게 만들어 주고, 또 창조의 열정에 불타게 하는 소중한 원천이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무식무기력’한 광대들에게서 내 예술의 많은 부분을 배웠다. 나는 ‘수천 년을 하루같이’ ‘동양의 부패한 풍습'을 몸으로 전해 온 그들의 예술에 매혹 당하고 심취하고 깊이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들의 ‘몸을 놀리는 기술’ 속에서 삶의 깊은 애환과 감동을 보았고, 그들의 ‘우스개 놀이’ 속에서 예술적 창조의 편린을 보았다. 그들은 나의 스승이었고, 나의 애인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 종족의 일원이 되고자 ‘광대’라는 말을 쓴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연기, 연출, 극작, 경영, 행정에다가 연극, 영화, 국악, 방송 등 여러 분야에 간여하는 것을 보고 혼란스럽다고 한다. 

당신의 정체는 뭔가? 아마도 이게 그들의 질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나는 그 모든 것을 추구하는 광대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럼 당신은 어떤 광대가 되고 싶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
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라는 책에 나오는 발렌친 카그다예프라는 브리야트 족의 샤먼과 저자와의 대화로 대신하고자 한다.

질문 : 당신 삶의 목표는 무엇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

답변 : 훌륭한, 혹은 좋은 샤먼이란 자신이 함께 살아가는 민족을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는 좋은 샤먼이 되고 싶고, 따라서 우리 민족이 서로 도와가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본다.-----사랑을 나누고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모든 샤먼이 지녀야 할 미덕이다.

반면 모든 악과 문제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과 자연과 사물을 착취하는 데서 발생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인내하고 이해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남을, 상대방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상대가 원하기 전에 그가 원하는 것을 먼저 베풀어 주는 것이 사랑의 첩경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현자와 성자들이 설파했던 조화와 사랑, 이것의 실천자로서의 샤먼 곧 ‘무당’의 역할에 대한 바이칼 샤먼의 지혜로운 말이 ‘광대정신’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광대란 '넓은 광(廣), 큰 대(大)'라는 말 뜻 그대로 ‘넓고 큰’ 영혼으로 세계의 불화와 고통에 정면으로 마주 서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온 몸으로 감싸 안고 표현하는 예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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