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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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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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요'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0.08.04
    바람 따라 사라지는 흙의 노래, 박갑근 명인 (2)
  2. 2010.06.28
    대만 고산족 원주민 마을 원정기 (17)
  3. 2009.11.29
    전주세계소리축제 '광대의 노래' 이벤트 (39)
  4. 2009.10.15
    '우리 소리 우리 음악' 선물 이벤트합니다. (43)
  5. 2009.05.05
    장관 껍데기 훌훌 벗고 광대로 돌아와보니 (24)
전라북도 익산군은 부여 지방과 함께 마한·백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곳입니다.

기름진 황톳빛 땅과 나지막한 구릉들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어 사람 살기 딱 좋은 곳이라는 느낌을 주는 이 지방에는, 고대 문화의 중심지답게 미륵탑이나 왕궁탑과 같은 유적이 많이 남아 있고, 민속놀이나 민요와 같은 문화 유산들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군 안의 삼기면 검지마을의 농요는 다른 지방에서 들을 수 없는 독특한 가락을 지니고 있어 전북지방의 대표적인 농요 보존 마을이 되었습니다. 마을 동편으로 미륵산을 마주 바라보며 자리잡은 검지마을은 백 가구가 채 못 되는 주민들이 오순도순 모여서 살고 있는, 아담하고 조용한 전형적인 전라도의 촌마을입니다.

이 마을에는 농삿일을 하면서 부르는 여러 노래들이 풍부하게 전해오고 있습니다. 

모를 심을 때 부르는 노래인 <농부가>,
김을 매면서 부르는 노래인 <만물 산야>,
벼를 베며 부르는 노래인 <벼베는 산야>,
볏단을 져나르면서 부르는 노래인 <등짐 노래>,
타작하면서 부르는 노래인 <타작 노래>,
절구통에 방아를 찧으면서 부르는 노래인 <방아찧기 노래>,
산에서 지게에 나뭇짐을 지고 오면서 지게 목발을 두드리면서 부르는 노래인 <지게 목발 노래>,
여인들이 다듬이질을 하면서 나무하러 나간 낭군을 그리는 노래인 <도의가>,
서동요의 설화를 내용으로 담은 <선화공주 노래>,
<산타령>, <콩꺾자 콩꺾자>, <상사소리>, <작대기타령>, <꿩타령>, <둥당게타령>.....

출처 : http://100.nate.com/dicsearch/pimage.ht...26v%3D43

한 세기 전만 해도 백성들이 일을 할 때나 놀 때나 사랑을 할 때 그들의 한과 흥을 풀어 주는 가장 가까운 삶의 벗이었던 이 주옥 같은 노래들이 세태의 변화에도 굴하지 않고 이 마을에 살아남아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참으로 값지고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들은 저절로 살아남은 게 아니었습니다. 한 농부의 희생적이고도 집념어린 노력이 없었던들, 이 노래들은 일찍이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린 또 하나의 아까운 문화유산이 될 뻔했습니다.

박갑근 명인은 이 고장 민요의 산 증인이자, 계승자이자, 발굴자이자, 최고의 실력있는 노래꾼이었습니다.

그는 익산 농요보존회 회장이란 직함이 아무래도 어색하게만 여겨졌던는 갈 곳 없는 농부였습니다. 다른 농부와 다른 점이라고는 노래를 좋아하고 남보다 노래를 ‘쬐끔’ 잘 하는 것 뿐이라는 겸손하고 조용하고 점잖은 검지마을 토박이였습니다.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박해명의 3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비록 농사를 지으며 살기는 했지만 한학을 하시고 예의와 체통을 중히 여기는 할아버지의 완고한 고집 때문에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노래라는 것도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마을에서 농삿일을 할 때면 풍물을 신나게 두드리며 풍장을 쳤고, 앞소리꾼이 소리를 매기면 마을 사람들이 구성진 목으로 뒷소리를 받으며 신명나게 일들을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유난히도 그 노랫소리에 끌려서 하루 종일 논두렁에 서서 소리를 따라 부르곤 하던 박갑근 소년은 열 살 쯤 되었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금족령이 풀려서 삼기보통학교에는 다닐 수 있었지만, 아버지 역시 완고한 분이었던지라 노래를 부르거나 꽹과리를 치다가 들키면 혼줄이 나곤 했습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창가를 부르면 선생님들이랑 친구들이 잘 부른다고 했고, 또 유행가를 부르면 다들 가수로 나가라고 혔지. 그런디 동네에만 들어가면 꿀먹은 벙어리가 되니 미칠 노릇이여. 요기서 한참 걸어가면 푸다리라는 동네가 있는데, 거그 주막이 있었어. 젊어서 친구들허고 그 주막에서 술마시고 올 때면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면서 오는디. 절반쯤 오면 딱 그쳐야 혀.
노래 소리가 우리 동네에 들릴 만헌 디서부터 벙어리가 되어 오는 거여. 왜 그렇게 노래를 금혔는고 허니, 이 동네가 본래 이름이 묵지여. 먹을 쓰는 선비들이 많이 난 곳이래. 그래 그 전통이 있어서 그런지 농사짓는 분들도 양반 행세를 좋아해서 상놈처럼 풍장치고 노래부르는 것을 금헌 거여.”

그런 집안과 마을의 분위기 때문에 소리의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평범한 농사꾼으로 자라난 그는 열일곱 살되던 해에 주소애라는 색시한테 장가를 들었습니다. 장가를 들었지만 일제 말기의 탄압은 신혼을 즐길 여유마저 빼앗아 가버릴 만큼 가혹했습니다.

“참말로 힘든 시절이었지. 전쟁이다, 징용이다 혀서 젊은 남자는 까딱 잘못허다가는 끌려가서 죽고, 농사는 지어봐야 공출이라고 다 뺏기고 그릇 가진 것, 쇠붙이 있는 것, 하다못해 꽹과리까지 다 긁어가 버리니 안 죽고 사는 것이 천행이었지. 그런 판에 노래부르고 꽹과리 칠 정신이 있것능가. 몇 해 동안 입다물고 근근히 살다보니 자연히 노래의 맥이 끊어졌지.”

한동안 끊어졌던 노래 소리가 해방이 되자 다시 살아났습니다.

물론 예전처럼 성하지는 않았지만 해방이 되었다는 기쁨과 오랫동안 금지됐던 신명을 마음껏 풀어보려는 갈망 때문에 한결 흥겨웁게 노래를 부르고 풍장을 쳤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휩쓸렸는지 완고하기만 하던 그의 아버지는 동네 어른들과 어울려 시조를 자주 불렀습니다. 아버지 역시 시조 솜씨로 동네에서 따를 사람이 없었는데, 아들에게도 넌지시 시조를 배워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는 얼씨구나 하고 일가 어른과 동네 어른들한테 귀동냥으로 조금씩 시조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부르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가르쳐 주고, 또 그들도 체계가 있도록 배운 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가락이 뒤죽박죽이 되어서 때려 치우고 말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들어 왔던 민요를 부르고 싶어했습니다.

그러자 때마침 민요를 마음껏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동생들 둘이 대학을 다니는데, 집의 농사만으로는 도저히 학비 대기가 어려워 맏형인 그가 동네 품앗이 일을 해서 학비를 대게 된 것입니다. 품앗이 일이라는 게 이논 저논 돌아다니면서 하루 종일 일만 하는 것이니, 그 힘겨운 일을 잊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저절로 노래 공부가 된 것입니다.

“그때가 서른이 좀 넘었을 때인디, 한 7,8년간 일을 험서 아침 먹고 호미 메고 나가면 저녁에 해질 때까지 억시게 불러댔지. 같이 일을 하던 친구가 여덟 명이 있었는데, 돌아가면서 주고 받고 부름서 일을 하면 어느새 하루가 가.”

그때에 그가 부른 노래들은 모두 마을에서 앞소리 잘 매기는 어른들한테 귀동냥으로 배운 노래들이었는데, 그분들 역시 그 전 어른들한테 귀동냥으로 배운 터였습니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 때까지 올라가는지 알 수 없어도 아무튼 굉장히 오래된 노래들인 것만은 확실한 <농부가>나, <긴방아>,<자진방아>,<방아찧기 노래>들을 억세게 불러대서 어느덧 인근 마을에까지 소리 잘 하는 젊은이로 이름이 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귀동냥만 해서 배울 것이 아니라 좀더 확실하게 선생한테 배우자는 생각이 들어 십 리쯤 되는 이웃마을 독산에서 소리선생을 하고 있던 강옥도라는 여자에게서 판소리를 잠깐 배웠습니다.

“저녁밥 먹고 십 리를 걸어가서 소리 한마디씩 배우고 오는디, 판소리가 민요보다 훨씬 어려워. <공도 난이>란 단가 한 마디만 배우고 그만 뒀는디, 그때 같이 배우던 친구들하고 친해져서 율계를 짜서 틈만 나면 어울려서 분통 같은 방에서 소리하고 시조 부르고 놀았지. 아무튼 한창 소리할 때는 목청이 얼마나 좋았던지. 여기서 석양 무렵에 여럿이 소리를 지르면 십 리 밖에 있는 미륵산까지 들렸응게.”

그렇게 농사짓는 틈틈이 좋아하는 노래나 부르면서 조용하게 살던 그를 시끄러운 세상으로 끌어내려는 유혹이 닥쳐 온 것은 그의 나이 쉰이 된 1970년이었습니다.

그때 익산 지방에서는 해마다 ‘마한민속제’가 열리고 있었는데, 이 마을에서 농요가 불려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관계자 한 사람이 찾아와 그 축제에 나가기를 권유한 것입니다.

그는 이 마을에서 불리고 있는 노래만으로는 부족하니 모심기에서 방아찧기까지 농사짓는 과정에 따라 부르는 농요들을 발굴해서 정리해 보라고 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그런 것을 어떻게 하며, 있다는 말을 들었어도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누가 부르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발굴을 하느냐며 극구 사양하던 그는 관계자의 끈질긴 설득에 그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한편으로 좋아하는 노래를 한번 본 때 있게 배워서 부르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무엇보다 대회에 나가서 상도 타고 이름도 내면 보람도 있을 것 같아서 그는 1970년 한 해 여름을 민요 채집하는 데에 다 보냈습니다.

“어디에 사는 누가 잘 헌다는 소문을 듣고 찾어가서 들어보면 시원찮어. 속으로 그런 것도 소리라고 허냐는 생각이 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배워놓고 별스런 사람을 다 만나서 얘기듣고 소리를 들어봐. 내가 소리 귀가 밝어서 웬만헌 노래는 한두 번 들으면 금새 가락을 외워버링게, 배우는 디 어려움은 없었어. 근디 진짜배기 소리는 안 나오더란 말여. 그러다가 남산에 사는 김노인한테서 <산야>를 배운 것이 큰 수확이었지.”

<산야>는 김을 매거나 벼를 벨 때 부르는 노래인데, 검지마을 노인네들이 “7, 8월에 <산야>가 금강을 타고 넘어오면 처량하여 듣기 좋았다.”고 회상할 뿐, 그 가락은 전혀 들을 수가 없던 노래였습니다. 그 귀한 가락을 다행히 익산군 낭산면 성남리에 사는 김순덕이 알고 있어 배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창법은 남도 창법하고 달라 경상도의 메나리 창법과 비슷하고, 어떤 사람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산유화가>가 바로 <산야>라고 하기도 하고, 백제가 망한 슬픔을 노래한 곡이라고도 하기도 하지만, 아직 자세히 연구된 적은 없습니다.

영감아 영감아
육칠월 만물에 메뚜기 뒷다리한티
채어 죽은 영감아
부귀다남 백년동락 사잤더니
나 홀로 두고 어디를 갔나 영감아

이처럼 슬픈 가사에 한없이 처량하고 길게 빼는 애절한 가락은 너무도 듣는 사람의 가슴을 후벼 파기 때문에 산천초목이 슬픔에 겨워 운다고 하여 함부로 못 불렀고, 더욱이 칠월 안에는 입 밖에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말이 전해 올 만큼 매우 독특한 사연을 담고 있는 노래입니다.

<산야>를 배운 그는 “아무래도 꽁지가 빠진 것 같아서” 타작할 때 부르는 노래를 찾아 헤매다가 역시 성남리에 박씨 노인이 알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후딱 배워 버렸습니다.

한 해 여름과 겨울을 꼬박 노래 배우고 정리하고 연습하는 데 바친 그와 그의 계원들은 1971년에 ‘마한민속제’에서 첫선을 보였습니다.

민속학자나 국악인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이렇게 좋은 민요가 원형대로 살아 있다니 놀랍다.” 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 통에 자신을 가진 그들은 그해 10월에 전주에서 벌어진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출전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박갑근씨 개인상만 타고 아무런 상을 타지 못했습니다.

회원들은 실망하기도 하고 원통해 하기도 하며 다시 한 번 나가자고 열을 올렸습니다. 그 덕에 그는 또 한번 고생을 해야만 했습니다. 1972년 한 해 여름내내 그는 <지게 목발 노래>를 발굴하러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습니다.

<지게 목발 노래>는 산에서 나무를 한 뒤 지게에 나뭇짐을 지고 오면서 지게 목발을 두드리며 부르는 노래들인데, <산타령>, <초부가>, <초동가>, <등짐 노래>, <작대기 타령>들을 모아서 1972년에 다시 출전했습니다.

본래 등짐 지는 일이나 나무하는 일은 일 자체가 특정한 리듬이 없고, 다른 일에 비해서 집단성이 적기 때문에 전해오는 노래가 극히 적었던 터에 <익산 목발 노래>의 등장은 대단히 인기를 끌어서 결국 문공부 장관상을 타게 되었습니다.

출처 : http://www.cha.go.kr/newinfo/Culresult_...DCD%3D22

그뒤 1973년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고, 1977년에는 또 한 번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출전하여 국무총리상을 탔고, 1983년에는 마을 한가운데에 익산 농요 전수관을 짓고, 1984년에 박갑근 명인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민속제나 국악제에 나가기도 하고 방송국에서 녹화도 해가는 통에 신문에도 많이 나고 유명해졌지만 속으로는 문제점이 한 두 가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옛날에는 모여서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일하다가 말고도 와. 궁뎅이가 들썩거려서 앉어 있을 수가 없다는 거여. 그런디 요새는 노래 한번 헐라면 여간 애를 써야 모이는게 아녀. 왜냐하면 실제로 논일을 험서 그 노래를 불러야 신이 나는 법인디, 요새는 일험서 부르질 않어.
제초제를 뿌리고 김을 안 매니 긴 방앗노래를 부를 일이 없고, 세 벌 김매기인 만두레를 안허니 <산야>도 부를 일이 없고, 타작 노래, 방아찧기 노래도 다 마찬가지여. 사는 방식이 달라지닝게 그 노래들이 다 쓸모가 없어져 버렸어. 거그다가 요새 젊은 사람들이 이런 노래 배울라고를 안혀.
이 마을 젊은이들도 이 노래 아는 사람이 몇 안돼. 거그다가 자꾸 고향을 뜨네. 돈 번다고 나가고 공부 헌다고 나가고 서울로만 가. 그러니 지금 젊은 후계자가 한 사람도 없어. 이러다가는 이 노래들도 얼마 안가 다 없어져 버리고 말 거여.”

없어져 가는 노래 붙들고 안달하는 자신이 싫어서 작년에는 농요보존회 회장 노릇도 그만 두려고 했는데, 회원들이 만류하는 통에 그러지도 못하고 후계자 기를 걱정과, 초청공연 연습할 걱정과 전수관 운영할 걱정과, 농사지을 걱정을 한꺼번에 하느라, 그러지 않아도 늙어서 약해진 몸을 움직이기가 부쩍 힘들어졌지만, 아직도 노래 이야기만 나오면 두 눈에 생기가 돌고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라 지칠 줄 모르고 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역시 평범한 농사꾼으로만 살다 가기에는 그와 소리와의 인연이 너무 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사람은 살림도 안 허고 소리에 미친 놈이다 허는 말을 들어야 이 짓을 허지, 살림 잘 헌다 소리 듣고는 이 노릇 못 혀. 내가 이 노릇 험서 밥먹고 살아 온 것이 다행이여. 배우느라 갈치느라 걱정 근심이 떠날 날이 없고, 나쁠 때는 일 년에 석 달을 집을 비우고 돌아다녀. 참 골치 아픈 일도 많고 고생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내 팔자로 알고 불평 한마디 안 허고 지내왔네.”

이렇듯 평생을 민요와의 인연에 순종하고 그 노래들을 사랑하며 갈고 닦다 돌아가신 한 농부의 영혼은 여전히 이 나라 산천 방방곡곡 논과 들과 산과 바다를 떠돌며 삶의 노래인 민요를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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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대만의 고산족 마을과 인도 뉴델리를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초청 공연을 위한 사전 답사 여행이었습니다. 
제가 총감독을 맡아서 진행하고 있는 소리축제 개막공연 <천년의 사랑 여행(가제)> 중 2부에서 중국 소주 곤극단, 캄보디아 왕실 예술단, 인도 전통 무용단, 대만 고산족의 민요 등이 우리 출연자들과 함께 출연하고, 특별 공연으로 각 나라들의 개별 공연도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협의할 사항들이 많아서 가게 된 것입니다. 우선 '대만편'을 올리고, 다음에 '인도편'을 올리겠습니다.

대만 여행에는 경희대학교의 호텔관광 경영학과 교수인 윌리엄 헌터씨 부부가 안내 및 통역으로 동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헌터의 아내인 브루산 바사젠느씨가 바로 대만 고산족 중의 한 부족인 '루카이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번 공연과 관련되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캐나다 출신인 헌터 교수가 대만 대학 재직 중에 서로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제주 대학으로 옮긴 남편을 따라 제주 생활 4년, 서울 생활 1년을 보내고 있던 터에 저희와 인연이 닿아 공연 초청을 위해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오전에 타이페이 공항에 내려 고속열차를 타고 카우슝에 도착, 거기서 임대 봉고를 타고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 첩첩산중 '우타이' 마을에 도착하니 거의 저녁이 다 되더군요.



해발 1천 미터 이상의 깊은 산골에 사는 고산족 원주민은 대만 전체에 14개 종족 20만 명쯤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400년 전쯤 중국 본토에서 '한족'과 '하카족'이 건너오면서부터 이 땅의 지배자에서 피지배자로 밀려난 그들은 산골에 뿔뿔이 흩어 살며 그들의 독특한 언어와 풍습을 지금까지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루카이족은 약 1만 명쯤이 남아 있는데, 그 중 '우타이(霧台)' 마을에는 3천 명쯤이 살고 있고 이웃 산골에도 3천 명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오지 탐험 프로그램에나 나올듯한 원시적인 마을을 상상했는데, 아주 멋스러운 전통 가옥과 현대식 가옥이 함께 어울어진 마을의 풍경에 놀랐습니다.



마을 건너 산에는 선녀가 내려 와서 목욕할 것 같은 길다란 폭포가 걸려 있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마을 아래 펼쳐져 있더군요.



예전에는 산 아래로 내려가는 산길을 머리나 등에 짐을 이고지고 하루종일 걸어 다니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는데, 10여 년 전부터 찻길이 뚫려 봉고나 승용차가 다닌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 산길이 좁고 위험해서 버스는 다닐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후 변화 때문인지 2005년도부터 태풍 피해가 갑자기 심해져서 길이 파손되고 산사태로 집이 무너지기도 하는 대형 재해가 매년 발생했답니다. 그래서 한 해 20만 명이 넘게 찾아오던 관광객이 뚝 끊어지는 통에 주민들의 걱정이 태산이라는군요.

산사태로 여기저기 무너진 산의 모습.

헌터 교수 부부의 만남과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와 대만 원주민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며 마을 구경을 한 다음, 그들이 방학 때마다 몇 개월 씩 10년 동안 직접 돌과 흙을 져 나르며 지었다는 집도 살펴보았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아시아에 심취해서 캐나다의 고향을 떠나 아시아 여러 나라를 떠돌며 미술과 조각과 여행과 연구와 강의로 살아가는 헌터의 내력이 궁금해 자세히 물어봤더니 그에게도 캐나다 인디언 원주민의 피가 섞여 있다더군요.

산골 고향에 오자 생기가 돌아 연신 자기 마을의 곳곳을 안내해주고 기뻐하는 브루산의 모습을 보니 두 사람 다 이 높고 높은 땅과 전생의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브루산이 자기 어머니의 집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 부족의 전통 의상과 자수를 전수해 온 명인입니다. 그녀의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브루산 자신까지 3대에 걸쳐서 그 솜씨를 이어오고 있답니다.



브루산의 어머니가 만든 옷입니다. 매우 정교하고 섬세한 솜씨가 정말 인간문화재급이더군요.



마을에 여관이 없어서 민박을 준비했다며 안내한 민박집에 들어서는 순간, 너무도 아름답게 꾸며 놓은 집의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아기자기한 정원이며 집안 곳곳에 놓여 있는 조각상들이 예사롭지 않아서 물어 봤더니 역시 그 집의 주인이 석공예와 목공예의 명인이랍니다.



방으로 들어가는 문짝에 새겨진 조각이 우리 장승을 보는 듯 무척 정겹습니다. 다른 집에도 이런 문이 있는 걸로 봐서 문에 조각을 하는 것은 이 부족의 전통인 듯 합니다. 문짝 하나, 전등갓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주인의 예술적 손길이 닿지 않은 게 없더군요.



사냥꾼의 전통과 삶의 이야기를 갖가지 그림과 조각과 공예품으로 전수해 오고 있는 장인의 집에 누우니 마치  먼 옛날 사냥꾼의 집에 하룻밤 묵어 가는 나그네와 같은 심정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꿈에서도 사슴과 왕뱀들이 저를 둘러싸며 놀았답니다.



새벽에 잠이 깨니 새끼 도룡뇽과 개미들과 이름 모를 산새들이 아침부터 분주합니다. 아열대 기후라서 겨울에도 눈이 안 내리고 난방이 없어도 충분히 지낼 수 있다는군요.

마침 오전에 이 마을 초등학교 졸업식이 있다고 해서 잠깐 들렀습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통틀어 역 30여명쯤 되는 졸업생들과 학부형들이 산이 훤히 보이는 마을 회관에 모여 교장 선생님과 읍장 등 유지들의 말씀을 듣고 있더군요. 물론 지루한 어른들의 말은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 표정이었습니다.



마을 중앙에 자리잡은 민속박물관에 딸린 회관에 이번 공연에 참가할 민요 가수들이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저를 환영하는 안내장을 붙여 놓은 회관에 들어가니 10여명이 넘는 출연진들이 전통의상과 머리에 쓰는 꽃관을 쓰고 30분 정도 시연회를 했습니다.


베틀을 놓고 일을 하는 여인들의 노래, 백합화를 머리에 꽂고 사랑 노래를 부르는 여인들의 삼중창, 남자와 여자의 결혼을 축하하며 흥겹게 부르는 기쁨의 노래 등이 이 세상에서 만 명만이 사용하고 있는 루카이족의 언어에 실려 흘러 나왔습니다.

그들은 전문 가수도 아니고 일하면서 틈틈이 옛노래를 배워 온 주민들이었지만, 저는 그들의 소박하면서도 단순하고 진솔하고 아름다운 노래에 취했습니다. 

저는 개막공연의 내용을 설명하고, 그들과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누며 여러 준비 사항들에 대해 합의했습니다. 모두들 한국에 처음 가는 분들이라 흥분과 설레임에 가득 찬 눈빛이었습니다.



정성스럽게 마련한 점심을 먹으며 담소를 나눈 뒤, 그들은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 환송의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10월 1일 개막공연 전에 전주에서 만나 연습하기로 약속을 한 뒤 산을 내려 오는 우리 일행을 민속박물관 위에 세워 놓은 조각상들이 전송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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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조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는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올해 행사는 신종플루 때문에 취소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정성을 기울였던 개막공연을 잘 다듬어서 송년소리나눔  <광대의 노래> 란 제목으로 공연합니다.

12월 4일(금) 7시에 전주에 있는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모악당'에서 막을 올리는데, 10명을 초청할까 합니다.

송년 이벤트가 되는 셈이네요. 

모시기 어려운 최고의 명인명창들이 대거 출연하는 무대라 다시 만나기 어려운 기회입니다. 제가 작시로 참여도 했고, 잠깐 무대에서 축문을 읽기도 한답니다. 

11월 30일(월) 밤 10시까지 신청된 분 중 선착순으로 10명을 선정해서 초대장을 메일로 발송해 드리겠습니다. 한 분이 동반자 포함해서 2장을 신청해도 좋습니다. 그날 오시는 분들께는 블로그 기자단 이름으로 6시 30분에 무대에서 진행되는 명인명창 사진 촬영에도 참석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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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소리나눔 <광대의 노래>

한국 최고의 명인명창과 함께하는 따뜻한 국악무대

전주세계소리축제(조직위원장 김명곤)가 2009년 한 해를 보내며 송년소리나눔 <광대의 노래>를 무대에 올립니다.

역사적 헌정의 무대

오늘 12월 4일 저녁 7시,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에서 열리는 이번 무대는 국내 최초이자 최후가 될지도 모르는 역사적인 헌정무대로 우리나라 최고의 명인명창이 한 무대에 오르는 공연입니다. ‘광대’라는 두 글자 안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이름처럼 ‘넓고도 큰마음으로 기쁨과 슬픔, 외로움 같은 우리네 삶의 이야기들을 때로는 소리로, 때로는 악기로, 때로는 춤으로 풀어내는 창조자’들이 바로 광대들이기 때문입니다. 송년소리나눔 <광대의 노래>는 이러한 ‘광대의 노래’를 주제로, 천하를 호령하는 광대들의 삶과 우리 전통예술의 숭고한 역사를 돌아보는 창작공연 무대입니다.

창과, 민요, 합창, 기악, 무용이 어우러지는 무대

송년소리나눔 <광대의 노래>는 국악의 전 장르가 어우러져 하나의 이야기를 엮어가는 새로운 형식의 국악공연 무대로, 대서사의 시작(詩作)에 웅장한 국악관현악과 서양합창, 판소리합창 그리고 판소리 천하명창과 젊은 명창이 한 무대에 오르는 초대형 작품입니다.

이번 무대에는 판소리 대서사합창 ‘광대의 노래’가 올려집니다. 오늘 우리에게 판소리란 무엇인가 라는 화두를 가지고, 동리 신재효의 <광대가>를 모티브로 하여 신광대의 의미를 새로 묻습니다. 김명곤 위원장과 김태균이 작시를, 김대성이 작곡을 맡았으며, 국내최고의 국악관현악 지휘자 김재영과 박병도 연출가가 만나 본격적인 국악관현악과 합창앙상블을 연출합니다. 여기에 국립창극단 단원인 남상일 명창이 아니리 광대로 나와 맛과 흥을 더합니다.

송년소리나눔 <광대의 노래>는 총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무용과 축문낭송으로 이어질 열림의식에 이어 서장 ‘오라, 새생명을 부활하는 신광대의 터로’는 이번 공연의 의미를 전하는 첫 합창곡으로 광대 즉 전통예술인들의 예술혼을 통해 온 세상에 빛과 생명이 깃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제1장 ‘광대가’는 동리 신재효 선생의 <광대가>의 광대내력을 합창과 함께 송순섭, 조상현, 김일구 명창의 소리로 표현합니다. 광대의 덕목인 너름새와 득음, 사설을 노래하며, 어렵고도 어려운 광대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제2장 ‘오늘 광대, 광대 놀음’은 오랜 세월 어려움을 이겨내고 전통예술의 맥을 이어온 전통예술인 별들의 무대로, 악기는 악기로 춤은 춤으로 소리는 소리로 풍성한 한판이 벌어집니다.

이생강(대금), 박대성(아쟁), 김무길(거문고), 김영재(해금), 이종대(피리), 임경주(가야금), 이호용(징), 허봉수(장고) 등 명인들의 시나위 연주와 명무 이매방의 승무, 김백봉의 부채춤이 이어집니다. 이어, 백성들의 삶을 노래하는 신명나는 삼도민요가 뒤를 잇습니다. 경기민요에는 명창 이춘희, 이호연, 이선영, 서도민요에는 배뱅이굿 명창 이은관, 남도민요에는 명창 박송희, 조순애, 성우향의 구성진 소리가 흥겨운 무대를 장식합니다. 또한, 백인영(가야금) 명인을 중심으로 한 수성반주단이 민요의 멋을 돋웁니다.

제3장 ‘신광대가’는 신광대의 정신을 이야기합니다. 풍류와 인간, 생명과 민족을 위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깨우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광대를 상징하는 4인의 소리꾼이 각각 ‘풍류’, ‘생명’, ‘인간’, ‘민족’을 주제로 노래하며, 웅장한 합창으로 새로운 생명과 세상을 동트게하는 신광대판을 외칩니다.

종장 ‘광대여 일어나 천하를 움직여라’는 대단원의 문을 닫는 막으로 ‘새로운 광대판을 열어 세상을 움직이는 역사의 숨결 몰아 거침없는 사자후로 민족의 혼을 깨워 세계를 호령하고 온누리 온세상 새소리로 누비어라’는 메시지를 통해, 광대의 소리가 온 세상에 퍼져 새 세상 열어가기를 기원하는 웅장한 무대로 꾸며집니다.

우리시대의 진정한 광대들이 한 자리에

이번 공연은 진정한 광대의 조건과 그들의 소리가 만들어 나갈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하는 무대인만큼,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인명창들이 한 무대에 오릅니다.

제1장 광대가의 독창부분에는 송순섭 명창, 조상현 명창, 김일구 명창이 차례로 무대에 오릅니다.

가왕 송흥록을 시조로 송광록, 송우룡, 송만갑, 박봉술로 이어지는 송판 적벽가의 계승자 송순섭 명창은 드물게 동편제 소리를 고수해온 명창으로 남성미 물씬 풍기는 장쾌하고 시원한 소리가 일품입니다.

조상현 명창은 보성제 소리를 가장 완벽하게 구사하는 명창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번 무대에서도 그의 완벽하게 조화된 연기와 타고난 성량으로,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 가운데 가장 우아하고 기품있는 소리로 평가받는 보성제 소리의 진수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김일구 명창은 남성 판소리 특유의 호방한 기개를 보여주면서도 미려한 성음으로 세세한 부분까지 섬세하게 표현하는 소리를 보여줍니다.

‘신광대가’에서는 염경애, 김경호, 이주은, 왕기철의 차세대 명창들이 차례로 무대에 오릅니다.

시나위합주에 출연하는 명인들의 면면도 만만치 않습니다. 대금에 이생강 명인, 아쟁에 박대성 명인, 거문고에 김무길 명인, 해금에 김영재 명인, 피리에 이종대 명인, 가야금에 임경주 명인, 징에 이호용 명인, 장고에 허봉수 명인 등 한분한분 모시기도 힘든 당대 최고의 기악명인들이 한 무대에 올라 시나위합주를 들려줍니다.

한국무용의 거장 이매방 명인은 힘 있고 선이 굵어 시원스런 느낌을 주는 승무를, 최승희 선생의 수제자로 잘 알려진 김백봉 명인은 그 자신이 창작해 이제는 한국의 대표춤이 된 부채춤을 보여줍니다.

흥겨운 경기민요와 서도민요, 남도민요도 무대에 오릅니다. 경기민요에는 이춘희, 이호연, 이선영 명창이, 서도민요에는 이은관 명창이, 남도민요에는 박송희, 조순애, 성우향 명창이 출연합니다. 백인영(가야금) 명인을 중심으로 한 수성반주단이 민요의 멋을 돋웁니다.

공연의 맥을 잡아줄 관현악과 합창에는 경기도립국악단과 전북도립창극단, 익산시립합창단, 대구그랜드에코오페라합창단, 전북도립무용단이 함께 웅장한 무대를 연출합니다.

김명곤 조직위원장은 “송년소리나눔 <광대의 노래>는 올해 전주세계소리축제에 관심을 갖고 응원해주신 여러분들과 우리국악을 사랑하시는 애호가 여러분들을 위해 마련한 무대로, 판소리와 민요, 합창, 기악, 무용 등 우리 국악의 여러 장르가 어우러져 천하를 호령하는 광대들의 삶과 우리전통예술의 숭고한 역사를 돌아보는 창작공연무대다”며, “오늘 무대로 우리 국악과 전주세계소리축제에 대한 아쉬움과 갈증을 달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송년소리나눔, 광대의 노래’는 무료공연으로, 전주세계소리축제조직위(063-232-8398)로 전화하셔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www.sorifestival.com)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공연은 7시부터입니다. 공연 시작 전 6시 30분에는 그날 공연하시는 명인명창 선생님들과 초청되시는 전국의 명인명창 선생님들 단체사진을 촬영할 예정입니다. 전국의 내로라는 명인명창 선생님들, 약 60여 분께서 함께 하시는 자리입니다. 단체사진 촬영은 기자님들께만 개방되는 행사로,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사진 촬영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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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제가 쓴 책 한 권이 나왔습니다.
상수리 출판사에서 출판한 「김명곤 아저씨가 들려주는 우리 소리 우리 음악」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어린이들을 위해 쓴 소중한 책이라서 블로그 이웃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벤트를 어떤 방식으로 해야할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여러 날 고민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책을 선물할까 고민고민하다가 할 수 없이 가장 평범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이 글이 발행된 2009년 10월 15일(목) 오후 5시까지 신청하신 분들 중 '선착순'으로 10명을 선정해서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책은 특별히 어린이들을 위한 우리 음악 책이니만큼 기왕이면 어린이를 자녀로 두신 분이나, 조카나 주변의 어린이에게 선물을 하실 분이 응모해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음악을 사랑하는 어린이라면 더욱 환영하구요. 

신청하실 분들은 자신의 연락처와 택배를 받을 주소, 
이 책을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은지 간단한 사연,
그리고 책을 받을 사람 이름
등을 적어서 제 메일로 보내주시면
메일이 도착한 순서대로 10명을 선정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사연이나 책 받을 사람 이름없이 주소만 보내주신 분들은 우선 순위에서 뒤로 밀리겠습니다. 좀 더 많은 분들에게 기회를 드리지 못하는 걸 용서해 주세요. 

제 메일 : arang0@empas.com

제 책에 대한 소개는 출판사에서 만든 보도자료로 대신하겠습니다.


신명 나고 흥겨운

우리 음악으로 배우는 역사와 문화

블로그 http://blog.naver.com/kyung_park

출간 의도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며 트로트를 부르는 쌍둥이 자매가 소개되어 화제가 되었어요. 지루하다고만 생각했던 우리 음악이 요즈음 새로운 옷을 입으며 사람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국악은 어렵고 다가가기 힘든 것으로 여기고 있어요. 영화 <서편제>에 남자주인공으로 출연하고 전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김명곤 아저씨가 들려주는 《우리 소리 우리 음악》 이야기는 우리 음악을 쉽고 재미있게 풀이해 어린이들이 우리 음악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어린이들이 우리 음악의 역사와 지식을 이해하고 흥겹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책이랍니다.


이 책의 특징

우리 음악은 선조들의 행복과 슬픔을 고스란히 담고 이어져 내려온 삶의 음악입니다. 《우리 소리 우리 음악》은 이러한 우리 음악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민족의 멋과 흥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고대시대부터 현대까지 대표적인 음악과 악기, 재미있는 음악 이야기 등을 시대별로 정리해서 초등학생이 알아야 할 우리 음악 지식을 모두 담았지요. 또한 어린이들이 우리 음악과 문화에 자부심을 가지고 시대에 발맞춰 창의적인 새로운 음악도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특별부록으로 우리 소리와 음악을 고대부터 삼국시대, 조선 시대별로 ‘음악으로 듣는 한국 음악사’ CD(국악방송, 국립국악원 선곡)에 모아 놓았어요. 거문고 독주인 <영산회상>, 조선시대의 궁중음악 <여민락>, 판소리 <사랑가> 등 대표적인 우리 소리와 우리 음악을 직접 CD로 들을 수 있습니다. 눈으로는 책을 읽고, 귀로는 음악을 들으며 우리 음악을 감각적으로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답니다.

 

 


저자의 말

우리 소리 여행을 떠나요!

많은 사람들이 ‘광대’라고 하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코에 빨간 공을 붙인 서양의 피에로나 어릿광대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광대는 익살스러운 표정과 몸짓을 하며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만을 뜻하지는 않아요. 한자로 ‘넓은 광(廣)’에 ‘큰 대(大)’로 쓰는 광대는 그 뜻대로 ‘크고 넓은 마음으로 기쁨과 슬픔, 외로움 같은 삶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창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큰 광대가 되어 어린이들이 우리 음악을 즐기고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답니다. 여러분은 서양 음악과 너무나 다른 음악 세계를 보여 주는 우리 음악을 딱딱하고 어려운 음악이라고 생각하나요? 우리 음악은 선조들의 행복과 슬픔을 고스란이 담고 이어져 내려온 삶의 노래예요. 우리 음악을 공부하면 우리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마음과 멋 그리고 흥도 느낄 수 있답니다.

자 그럼, 저와 함께 우리 음악 여행을 떠나 볼까요?


차례

1. 고대 우리 음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먼 옛날 고대의 우리 음악
노래와 춤이 있는 축제 같은 ‘굿’

2. 고유한 음악을 만든 삼국과 가야

거문고를 만든 고구려
일본에 음악을 전해 준 백제
노래의 나라, 신라
문화가 발달한 작은 나라, 가야

3. 불교 음악이 꽃피었던 통일신라시대

전통음악과 외래음악이 하나가 된 통일신라 음악

4. 고려시대에는 어떤 음악이 있었을까요?

궁중 음악의 발달
새로운 향악의 등장

5. 조선시대 음악

세종대왕의 음악 정책
민속악의 발달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 곁에 있던 민요
흥겨운 장단에 신명 나는 풍물놀이

6. 판소리와 일제강점기 음악

서민들을 위한 노래 판소리
노래하는 소리 광대
일본 침략으로 위기를 맞은 판소리

7. 새로운 우리 음악

해방 후 민족정신을 되살린 음악
친근한 음악으로 발전한 국악
퀴즈로 풀어 보는 로봇 이야기

특별부록 : 음악으로 듣는 한국 음악사 CD

김명곤 글|이인숙 그림

독자 대상 : 초등학생 3~6학년|출판사 : 상수리나무|발행일 : 2009년 10월 7일
ISBN 978-89-93397-10-9|값 11,000원|쪽수 104|판형 188×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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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부 장관 직을 그만 둔지도 어느 덧 2년이 되어 간다.
그동안 TV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연기자로, 연극 <밀키웨이>에서는 극작과 연출가로, 최근에는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위원장으로서 즐겁고 바쁘게 살고 있다.
 

내가「대왕 세종」에 출연하고 있을 때, 모 일간지에 동정 기사가 실렸는데 그 기사의 제목이 한동안 여기저기서 화제가 됐다.


김명곤 씨 “장관 껍데기 훌훌~ 다시 광대로”

“장관이라는 껍데기를 훌훌 벗어 버리고 이제 천직인 광대로 탈바꿈해야죠. 걱정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허허.”

김명곤(55·사진)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내년 1월 방송 예정인 KBS 1TV 사극 ‘대왕 세종’(극본 윤선주·연출 김성근)에서 배우로 복귀한다. 1999년 자신이 연출한 연극 ‘유랑의 노래’에 출연한 지 8년 만이다.

그는 그동안 국립극장장과 문화부 장관을 지내면서 연기와 멀어졌다.김 전 장관은 ‘대왕 세종’에서 고려 황실의 후예로 조선 왕조의 전복을 꿈꾸는 옥환 역을 맡았다. 옥환은 어린 세종을 긴장하게 만드는 인물로 초반 30회까지 비중이 큰 역할이다. 그가 대하 사극에 출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D일보 2007년 10월 6일자 기사 중 일부)

나는 대학교 다닐 때만해도 광대라고 하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코에 빨간 공을 붙인 서양의 삐에로를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줄타기하는 광대를 처음 보았는데 그 광대가 줄에 올라서서 “이 줄타기가 옛날에는 화랑의 기예였소!.” 하길래 깜짝 놀랐다. "화랑이라면 신라 시대의 무사 집단인데 줄타기를 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며 광대에 관한 기록을 찾아봤다.

우리나라에 그윽하고 오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며 유교, 불교, 도교의 3교를 포함한 것으로 민중을 교화하는 것이다.

신라 시대의 학자인 고운 최치원이 쓴 글이다. 이 글을 바탕으로 역사가인 단재 신채호는 이렇게 썼다.
 

선가(仙家)는 신라의 국선 곧 '화랑'으로 보며, 그 시원은 삼한의 소도(蘇塗)의 제관으로 고구려의 '조의선인(鳥衣仙人)'이다.

이런 글들을 보니 고대사회에서 예술가들은 하늘에 국가적 제사를 지낼 때는 제관으로서 활동했고, 그들의 신분은 왕족이나 귀족에 속하는 상류계급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통일신라가 무너지고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화랑들과 함께 예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천민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광대”라는 말은 고려시대에 서역에서 들어 와 우리말로 정착된 외래어인데, 예술가를 지칭하는 단어인 광대가 화랭이, 재인 등의 용어와 뒤섞이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광대들은 기생, 무당, 중, 백정 등과 함께 천민계급으로 살아야 했다. 이들은 사대부나 평민들과 한 동네에서 살지도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하고,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자기들끼리 기예를 전수하면서,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고, 그들만의 독특한 사회를 꾸려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광대들에 대해 다산 정약용은 이런 상소문을 썼다.

광대가 봄·여름이면 고기잡이를 좇아 어촌으로 모여들고 가을과 겨울이면 추수를 바라고 농촌으로 쏠리는데, 특히 창촌에서는 사당, 창기, 주파, 화랑, 악공들의 잡류들을 엄금해야 합니다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본 <왕의 남자>는 이 무렵의 떠돌이 남사당 광대패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실학사상이 일어나고 평민 가사, 탈춤, 판소리 등의 가치를 양반들 중의 몇몇이 언급하게 되면서 광대들의 가치가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고종과 대원군이 권력을 쥐었던 무렵에는 광대들이 왕족이나 고위 관리들의 잔치에 초대받고, 심지어 명인, 명창, 국창 등의 이름으로 궁궐에 들어가 임금 앞에서 기예를 선보이며 많은 돈을 벌고 신분의 상승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조선이 망한 후 광대들은 또 다시 천대받게 된다. 그 상황은 일제시대의 학자인 육당 최남선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조의 재인, 광대들은 적극적으로 특별한 권장을 입지 못하고, '무식무기력한 예인'들이 사회 최하층적 지위에서 구차히 존재하다 보니까 거기 쇠잔이 있을 뿐이지 발달이 없으며 저락이 거듭될 뿐이지 향상을 볼 수 없음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조건 하에 있다 보니까 '수 천 년을 하루같이' '몸을 놀리는 기술'과 '우스개 놀이'쯤에 그치고 드디어 다른 데 만한 순희곡적 생장을 이루지 못하고 만 것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명 풍화에는 조금도 유익한 바가 없으니 이는 연희를 실시하는 자가 학문이 없어 '동양의 부패한 풍습'만 알 뿐이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했던 <서편제>는 이 무렵의 떠돌이 판소리 광대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나는 대학시절에 오페라나 이태리 민요나 가곡이나 뮤지컬이나 비틀즈 등의 서구음악의 열광적 팬이었고, 괴테나 세익스피어나 입센이나 도스토에프스키 등의 서구문학(독문학)에 심취했던 사람이다. 그러다 우연히 판소리를 알게 된 후로 내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고향인 전주를 무지 싫어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의 흔적이 너무나 짙은 그 곳을 어서 떠나 서울로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진학공부를 했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도 한국을 빨리 떠나 독일로 유학 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인간문화재인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면서 전라도 말이 그렇게 다양한 표현과 영롱한 문학적 향기가 있는가를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핏줄에 대한 애정 곧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나의 조상과 조국에 대한 사랑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전통은 박물관에 진열된 골동품이 아니다. 전통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았던 삶의 내용과 형식 곧 그 분들의 삶의 자취이고 향기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세월이 지나면 전통의 계승자가 될 것이며, 언젠가는 전통 그 자체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나에게 전통은 ‘나를 숨쉬게 하고, 나를 활기 있게 만들어 주고, 또 창조의 열정에 불타게 하는 소중한 원천이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무식무기력’한 광대들에게서 내 예술의 많은 부분을 배웠다. 나는 ‘수천 년을 하루같이’ ‘동양의 부패한 풍습'을 몸으로 전해 온 그들의 예술에 매혹 당하고 심취하고 깊이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들의 ‘몸을 놀리는 기술’ 속에서 삶의 깊은 애환과 감동을 보았고, 그들의 ‘우스개 놀이’ 속에서 예술적 창조의 편린을 보았다. 그들은 나의 스승이었고, 나의 애인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 종족의 일원이 되고자 ‘광대’라는 말을 쓴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연기, 연출, 극작, 경영, 행정에다가 연극, 영화, 국악, 방송 등 여러 분야에 간여하는 것을 보고 혼란스럽다고 한다. 

당신의 정체는 뭔가? 아마도 이게 그들의 질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나는 그 모든 것을 추구하는 광대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럼 당신은 어떤 광대가 되고 싶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
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라는 책에 나오는 발렌친 카그다예프라는 브리야트 족의 샤먼과 저자와의 대화로 대신하고자 한다.

질문 : 당신 삶의 목표는 무엇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

답변 : 훌륭한, 혹은 좋은 샤먼이란 자신이 함께 살아가는 민족을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는 좋은 샤먼이 되고 싶고, 따라서 우리 민족이 서로 도와가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본다.-----사랑을 나누고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모든 샤먼이 지녀야 할 미덕이다.

반면 모든 악과 문제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과 자연과 사물을 착취하는 데서 발생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인내하고 이해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남을, 상대방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상대가 원하기 전에 그가 원하는 것을 먼저 베풀어 주는 것이 사랑의 첩경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현자와 성자들이 설파했던 조화와 사랑, 이것의 실천자로서의 샤먼 곧 ‘무당’의 역할에 대한 바이칼 샤먼의 지혜로운 말이 ‘광대정신’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광대란 '넓은 광(廣), 큰 대(大)'라는 말 뜻 그대로 ‘넓고 큰’ 영혼으로 세계의 불화와 고통에 정면으로 마주 서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온 몸으로 감싸 안고 표현하는 예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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