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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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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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창'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10.08.18
    '깊은 사랑'이 그리운 비취새, 안비취 명창 (4)
  2. 2010.07.14
    달을 지고 세월을 노래하니, 김월하 명창 (20)
  3. 2010.06.24
    담백하고 깊은 경기민요의 멋, 묵계월 명창 (6)
  4. 2010.06.14
    나를 '광대'라 부르지 마라, 정광수 명창 (2)
  5. 2010.06.10
    강원도의 흥, 한, 멋, '정선 아라리' 최봉출 명창 (9)
  6. 2010.06.08
    오기로 버틴 판소리 외길, 한승호 명창 (7)
  7. 2010.05.31
    고집스럽고 튼튼한 땅의 소리, 강도근 명창 (6)
  8. 2010.05.25
    노래 잘하고 일 잘한 '만 년 처녀', 김길임 명창 (5)
  9. 2009.09.04
    「서편제」의 영감을 준「조선창극사」 (24)
  10. 2009.05.15
    나의 스승 박초월 명창 생각하니 눈물난다 (16)
  11. 2009.05.13
    스타킹, 폴포츠와 수잔보일의 감동 배워라 (43)
  12. 2009.05.11
    명창들은 정말 목에서 피를 토했을까? (20)
  13. 2009.05.05
    장관 껍데기 훌훌 벗고 광대로 돌아와보니 (24)

1926년에 종로구 효자동에서 태어난 안비취 명창은 어려서부터 춤과 노래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신동이었습니다. 

"어려서 할머니가 내 당사주를 보면 춤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대요.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할머니가 어쩌다 무당을 불러다 집안에서 굿을 벌이면 하루 종일 구경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는 걸 흉내내곤 했지요. 학교 다닐 때도 춤추고 노래 부르는 소질이 뛰어나서 선생님들께 칭찬을 듣곤 했어요."
 
그러나 그녀가 춤 추고 노래 부르는 것에 대해 집안에서는 절대 반대였습니다. 아버지는 펄펄 뛰고, 오빠는 집안 망신이라며 동생이 노래 부르면 자살까지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녀가 말을 안 들으니까 목을 쳐서 죽여 버리라고까지 난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 죽어도 춤과 노래를 배우고 싶었던 그녀는 당차게 집을 뛰쳐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청운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니까 열세 살 무렵의 일입니다. 요샛말로 하자면 무단가출을 한 셈인데, 그녀의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하숙비와 학비를 보내 주신 덕에 청진동에 하숙을 구한 뒤 조선권번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조선권번에서 그 당시 궁중 음악과 궁중 무용의 최고 권위자였던 하규일 명인에게 꿈에도 그리던 춤과 노래를 배웠습니다. 예전에 권번은 그 학습 내용이나 분위기가 요즈음의 예술 학교보다도 더 엄격하고 열심이었습니다. 

하규일 명인은 이왕직 아악부에 계시면서 조선 권번의 학감을 겸했는데, 체구가 자그마한 분이 어찌나 엄하고 무서웠던지 모두들 어려워 말도 제대로 못 붙였다고 합니다. 

하규일 선생의 동상. 출처 : http://cafe.daum.net/abchouse/Yda/882

그녀의 예명인 '비취'도 하규일 명인이 지어 주셨습니다. 본명은 안복식인데 얼마 동안은 왜 그런 이름을 지어 줬느냐고 물어 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조금 지나서 슬그머니 물었더니 비취는 빨갛고 파란털을 가진 조그맣고 맵시 있는 새의 이름인데, 그녀의 인상이 그 새처럼 귀엽고 예뻐서 그렇게 지어 주셨다는 거였습니다. 

이처럼 겉으로는 엄했지만 속으로는 정도 있고 멋도 있던 하규일 명인에게 가곡과 가사와 함께 <춘앵전>, <연화대무>, <사고무> 와 같은 궁중 무용을 2년 동안 배우고 졸업을 할 무렵에 그만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하 명인이 돌아가신 뒤에는 수제자인 이병성 명인에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분들은 모두 궁중 음악과 궁중 무용을 하신 분들이라 민속 음악이나 민속 무용은 절대 못하게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민속 음악과 무용 쪽에 점점 더 끌려들어 갔습니다.그래서 선생님들 몰래 그 당시 민속 무용의 최고 권위자인 한성준 명인에게 승무를 배우고, 경·서도 민요의 최정식 명창에게 12잡가를 배웠습니다.

경·서도 민요는 '긴잡가'와 '잡잡가'로 나뉘어집니다. 긴잡가는 <유산가>, <제비가>, <춘향가>, <십장가>, <적벽가>, <선유가>, <출인가>, <박물가>, <평양가>, <집장가>, <형장가>, <달거리>의 12잡가를 말하고 잡잡가는 흔히 경기 민요니 서도 민요니 하는 것들입니다. 잡가라고 하니까 잡스러운 노래 같은 인상을 주지만 그게 아닙니다. 판소리의 다섯 바탕, 다섯 마당과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잡가 열두 마당, 열두 바탕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맑고 튼튼한 목소리를 타고 났습니다. 

"판소리하는 분들은 피도 토하고 똥물도 먹는다는데, 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한 번은 백일 기도를 하면 산신이 도와서 명창이 된다고 하길래 지금의 청와대 뒷산 약수터에서 백일 공부를 했는데, 그때도 목이 쉬지 않았어요. 새벽에 산책나온 노인들이 너무 연습을 많이 하면 목이 상한다고 조심하라고 했지만, 조금 부었다가 다시 풀리고 해서 이날까지 목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어요. 그렇게 공부를 하다가 최정식 선생님을 따라서 ‘깊은 사랑’ 에 간 뒤 소리꾼으로 인정을 받았지요."

예전에 땅속에다 움을 파고 방을 꾸며 놓고서 사람들이 모여 놀도록 되어 있는 곳을 '깊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반지하 사랑방' 같은 곳인데, 이름도 근사한 이곳이 음악가들에게는 사설 공연장 역할을 했습니다.

"선생님을 따라서 선배 언니들 하고 그곳엘 갔더니, 보료 깔고 병풍 치고 노인네들이 빙 둘러앉아 있는 거예요. 그곳에서 밤을 새워 소리를 했지요. 그분들이 말하자면 서울에서 소리 속을 제일 깊이 아는 귀명창들이예요. 그분들 앞에서 심사를 받은 겁니다.
큰절을 한 다음 단정하게 앉아서 시조 여창, 남창에서부터 긴잡가, 잡잡가까지 내리부르는데 꼼짝않고 앉아서 듣고 계시다가 중간에 잠깐 쉬면서 담배를 피우시고 다락문을 열어 연기를 뺀 다음 다시 꼼짝 않고 앉아 계시는 거예요.
저희들도 귤, 소금, 날계란만 조금씩 먹어 가면서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눈 한 번 못 돌리고 소리를 했지요. 하고 났더니 그분들이 이런 저런 평을 하시면서 유망하다고 하시더군요. 그때는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천정이 낮으니까 소리가 퍼지지 않고 내리 누르는 통에 혼이 났는데, 그래도 잘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뛸 듯이 기쁘더군요. 그게 말하자면 소리꾼이 되는 신고식 같은 거라고 할까요?"

그렇게 어려운 신고식을 치른 뒤부터 그녀는 방송에도 나갈 수 있게 됐습니다.

열다섯 살 무렵, 첫 방송을 나가게 됐을 때입니다. 잔뜩 긴장한 채 옷을 입고 화장을 하며 부산을 떨고 있자니 경성 방송국에서 보낸 차가 왔습니다. 최정식 명인, 선배 언니 둘, 그리고 대금 잘 불기로 유명하던 김기선 명인, 그녀 이렇게 다섯 명이 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어찌나 사지가 떨리는지 두 손으로 무릎을 꽉 잡고 벌벌 떨고 있었더니 김기선 명인이 그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비취야!"
"네?"
"내가 호도를 가져올 걸 그랬다."

그녀는 무슨 말씀인가 하고 어리둥절해서 대답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김기선 명인이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릎을 그렇게 꽉 잡고 있으니 무릎 사이에다 호도를 넣으면 깨질 것이 아니냐?"

차 안이 웃음바다가 됐지만 어린 그녀는 어찌나 떨리는지 웃지도 못했습니다. 방송국에 들어갔더니 다다미 방에 마이크가 있고 그곳에서 노래를 하는데, 김 명인이 또 그녀에게 농담을 하는 거였습니다.

"비취야!"
"네?"
"네가 명창이 되고 싶지?"
".........?"
"네가 명창이 되려면 이 마이크에다 큰절을 해라."
"아이, 싫어요!"
"싫으면 관두려무나, 여기 처음 오는 사람은 다 큰절을 하는데, 안 하는 사람은 명창이 못 된다. 그러니 명창되기 싫거든 그만둬라."

안비취 소녀가 둘러보니 김 명인의 얼굴 표정이 아주 진지하고, 주위 분들도 그렇다는 표정들을 하고 계셨습니다. 소녀는 쑥스럽긴 했지만 큰절 한 번하고 명창 소리 듣는 게 낫겠다 싶어 마이크 앞에 엎드려 곱게 큰절을 했습니다. 그러자 또 한 번 웃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뒤 두고두고 그 일이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참 소박했던 시절의 일화입니다.

그때가 1940년이 지났을 때이니 한창 태평양 전쟁중이었습니다. 

공출하고, 징용나가고, 아주 험악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녀는 선배나 선생님들을 따라 군부대에 위문 공연을 다니며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때 국악이 없어질 뻔했어요. 가사까지 일본말로 불러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실망도 되고 회의도 생겨서 열여덟 살에 강기준이라는 은행원의 재취로 들어갔지요."

해방 후에는 승무, 판소리, 민요, 민속, 만담을 한데 섞어 가설 무대를 꾸민 단체와 함께 다니기도 했습니다. 신불출이라는 불세출의 만담가가 꾸민 단체였습니다.

"신불출씨는 정말 대단한 분이셨어요. 안경 쓰고 인물은 못 생겼는데, 어찌나 재주꾼인지 말도 못 해요. 그 분이 만담을 하면 울다 웃다 사람들이 정신을 잃을 지경이예요. 연극에 연출에 만담에 모두 다 천재예요. 거기다가 왜정 때는 유치장을 자주 드나드셨지요. 만담 중에 애국적인 말을 꼭 집어넣었거든요. 겁 없이 막 해댔죠. 6.25때 북으로 올라가셨다는데 지금은 어찌 됐는지 몰라요." 

그러나 유랑극단의 고생은 말로 다 못 할 지경이었습니다. 출연료를 못 받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밥값 못 내서 여관에 잡혀 있기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래도 그때가 그립네요. 요새는 주로 현대식 극장에서 공연을 하지만, 분위기나 관중과의 일체감이 옛날의 가설 무대만 못한 것 같아요." 

1959년 해방 후 처음으로 <춘향전>을 가지고 일본에 교포 위문 공연 갔을 때의 일화도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연출은 최상덕과 이서구와 박진 씨가 공동으로 맡았고, 박귀희 명창과 임춘앵 명인이 번갈아서 이도령을 맡았고, 연극 배우 복혜숙 씨가 고창현감, 그 당시 최고의 판소리 명창이었던 임방울 씨가 운봉현감을 맡았고, 그녀는 행수 기생을 맡아서 변사또 잔치 때 '춘향무'를 잠깐 췄습니다. 

"하루는 임방울 씨한테 제가 불평을 털어 놨지요. 지루해서 못 살겠으니 얼른 고국에 갔으면 좋겠다구요. 그랬더니 ‘그거 큰일났군요.’ 하시대요. 
그날 저녁 고오베에서 공연을 하는데 이도령이 어사출도를 해서 난리가 난 판인데, 객석에서 ‘와’ 하며 웃음소리가 나는 거 아녜요? 그래서 보니 운봉현감 분장을 한 임방울씨가 빤스만 입고 아랫도리를 홀랑 벗은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더니 장치로 쓴 기둥에 올라갔다 미끌어지곤 하며 난리를 부리니 이도령이고 춘향이고 배를 잡고 난리가 났지요.
어찌어찌 그 장면을 간신히 끝내고 나오니까 임 선생님이 ‘이젠 지루한 게 좀 풀리셨습니까?’하시는 거예요. 어찌나 우스웠던지 지금도 기억이 새로와요."

출처 : http://www.gugakcd.pe.kr/music_detail.a...SSCD-011

1962년에 초대 회장 이소향 씨 뒤를 이어 2대 민요연구회 회장이 된 뒤 우리 음악의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다 1975년에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영달보다 우리 음악의 쇠락에 대해 더 마음 아파했습니다. 

“옛날에는 후진들이 좋은 선생님 모시려고 돈을 싸가지고 다녔지요. 요샛말로 레슨을 한 번 받으려면 학비 말고도 담배 사드리고 양칫물 떠다 드리고 갖은 정성을 다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가 되었어요. 선생님이 제자를 모셔야 돼요. 소리 공부 열심히 하라고 나무라면 오히려 제자들이 선생님같이 고생하고 사시려면 뭐하려고 배우느냐면서 나를 나무란답니다.
그러면 내가 한마디 하지요. 내가 처음 이걸 배울 때는 돈을 벌려는 것도 아니었고, 인간 문화재 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소리가 좋아 소리에 미쳐서 집까지 뛰쳐나와 노래부르고 살다 보니 예까지 왔다. 노래 못 부르면 죽는다 하고 스스로 미쳐서 해야지 돈 벌려고, 인기 얻으려고, 문화재 지정받으려고 하다 보면 좋고 바른 소리가 나오지 못하는 법이며 곧 실망할 것이라고 하지요. 헌데 그 말이 먹혀 들어가질 않아요.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죠.”

출처 : http://www.gayo114.com/musicColumn/musi...Fno%3D71

서른네 살 때 남편을 잃고 혼자서 자녀들을 훌륭하게 길러낸 그녀는 노래하다가 죽을 수만 있다면 행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소망대로 1997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곱고 화사한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다가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화려하고 밝은 모습 한켠에는 우리 음악의 미래에 대한 어둡고 쓸쓸함이 묻어 있어 저를 가슴 아프게 했습니다.

"말할 수 없이 외롭습니다. 소리를 들어 주는 사람도 갈수록 줄어들고, 제자들도 딴 생각만 하고, 방송에서까지 외면당하는 실정이니 더 외롭지요. 수백 년 수천 년을 내려온 우리 노래들이 수십 년 사이에 대중가요의 그늘에 묻혀 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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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하 명창의 시조나 가곡을 들으면 너무도 청아하고 맑은 그녀의 소리에 빠져들게 됩니다.

달빛 아래 고운 한복을 입은 여인이 숲속의 정자에 앉아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같은 노래를 부르면 누구나 그 신비하고 고운 목소리에 넋이 나가고 말 것입니다. 김월하 명창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런 장면을 상상하게 됩니다.

또한 가벼운 화장 아래 숨어있는 그녀의 미모나, 단정한 한복을 입고 앉은 고운 자태나, 거침없이 창공을 타고 나르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현실의 남루함을 뛰어 넘는 천계의 우아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현실 생활은 너무도 남루하여 그녀의 과거지사를 처음 듣는 사람은 적어도 몇 차례 긴 한숨을 몰아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김월하 명창은 1918년에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습니다.

무슨 기구한 팔자를 타고났는지 애달픈 그녀의 인생 행로는 너무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1910년대 말에 창궐했던 호열자 -콜레라-가 그녀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두 오빠의 목숨을 하루 아침에 앗아갔기 때문입니다. 염까지 한 어미의 차가운 시신을 더듬으며 젖을 먹겠다고 울던 어린 아기는 그때 겨우 두 살박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졸지에 식구 넷을 한꺼번에 잃은 그녀의 아버지는 거의 실성하다시피 하여 집을 나가 소식 없이 떠돌아다녔고, 고아 아닌 고아가 된 그녀의 세 자매는 저마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으니 큰언니는 외가로, 둘째언니는 수원 어느 집의 민며느리로, 그리고 자신은 이모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모집에서 이 년쯤을 보낸 그녀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 살던 유씨 부인의 수양딸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유씨 부인 역시 유일한 피붙이인 친정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으므로 수양딸인 그녀가 합세하여 여성 3대만 모여 사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양 어머니와 할머니는 첫인상부터 점잖은 분으로 말씀도 흔하지 않으셨고, 또 함부로 물을 수도 없어서 어찌해서 두 분만 사시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요. 두 분은 바느질 일로 살림을 꾸리는 듯했는데 보통 바느질이 아니라 대갓집에서 부탁하는 중한 일감들이었어요. 워낙 맵씨가 곱고 야무졌기 때문에 일감은 퍽 많은 편이었습니다.”

그녀를 피붙이처럼 돌봐 주면서도 엄했던 두 모녀 밑에서 지체있는 집안의 아녀자가 알아야 할 법도와 지켜야 할 행실을 익히며 성장했습니다. 그 당시 그녀의 이름은 유정환이었고, 스스로도 그 이름에 어떤 저항감이나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제 피붙이들과는 연락도 왕래도 전혀 없었으니까 제 뿌리가 무엇인지 알 길도 없었고 알고 싶을 턱도 없었지요. 그런데 시집 간 이듬해인가 수원에 있던 언니가 찾아와서 아버지가 와 기다리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저는 만나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십 몇 년을 잊고 지낸 데다가 행여라도 시집에서 알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서서 그랬지요.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한 참 뒤에 수원 언니가 급히 좀 내려와 달라는 전보를 쳤기에 영문도 모르고 수원에 내려가니 그곳에 아버님이 계시더군요.”

거기서까지 아버지를 외면할 수가 없어서 자식된 예를 차렸습니다. 오랜 방랑생활에 절어서 초췌한 모습의 아버지는 이제는 다 자라서 혼례까지 올린 여식에게 차마 다시 되뇌이고 싶지 않은 과거지사를 들려 주었고, 그녀의 이름은 유정환이 아니라 김덕순이라는 사실도 일러 주었습니다.

그녀는 그때까지 까마득하게 몰랐던 그 충격스런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었노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기구한 과거에 대한 일말의 회한이야 어찌 없을까마는 그때 이미 그녀는 희로애락을 쉽사리 드러내보이는 법이 없는 아녀자들이 거쳤던 극기 훈련을 이미 끝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녀가 혼례를 올리고 모녀 3대 집에서 나온 것은 열여섯 살 때였습니다.

남편은 양주 군청에 다녔습니다. 살림살이 어느 구석에도 빈틈이 없는 어여쁘고 현숙한 아내를 남편은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또 아내가 공부나 예능에도 재주가 있고 총명한 것을 아까워해서 서울 묘동 교회 부설 ‘묘동 학원’ 야간부 고등과에 진학시킬 만큼 깬 사람이었습니다.

남편의 자전거 뒤에 실려 묘동 학원 야간부에 다니던 시절이 아마도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이후 이 땅에서 벌어진 비극이 그녀의 집안에도 예외없이 들이닥쳤기 때문입니다.

해방이 되자 남편은 사업을 하여 재산을 모으는 한편 한민당에 관계하는 등 사회적 활동을 활발히 펼쳐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푼 희망도 6.25가 터지면서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남편은 용케 서울을 빠져나가 양주에 있던 본가에 피해 있었으나, 서울이 수복된 뒤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끌려간 뒤로 영원히 생사를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난리통에 남편과 재산을 잃은 데다가 적 치하에서 부역을 했다는 누명까지 뒤집어쓰게 되자, 그녀는 남편 친구한테서 한민당 당원증 하나를 얻어서 뒤늦게 홀로 피난길로 올랐습니다. 손재봉틀과 침구 등 남은 가재 도구를 되는 대로 챙겨서 집을 나선 그녀의 행선지는 당초에는 해인사였는데 정작 발을 디딘 곳은 부산이었습니다.

초기의 피난살이는 여느 피난민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낙동강 하구인 하단에서 푸성귀를 해다가 동대신동 시장에 내다팔기도 했고, 고추장 장사, 콩나물 장사에 하동 김 장사까지도 했습니다. 그런 장사치 생활의 재미도 짭짤했지만 그녀의 피난 보따리에서 나온 손재봉틀이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서울댁’은 알아 주는 기술자로 부상했습니다.

일찍이 수양어머니 밑에서 조선 옷 맵씨를 익혔고, 또한 양재 학원에 다니면서 양복 만드는 기술까지 배운 터라 무슨 일감이든지 막힐 게 없었습니다. 때마침 나일론 섬유류가 쏟아져 나올 무렵이어서 서울댁의 솜씨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느질이 큰일을 벌이고야 말았습니다.

먹는 것마저 귀찮을 만큼 일에만 매달려 열 달 쯤을 보낸 뒤에야 몸이 크게 상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며칠 시름시름 앓던 위병이 심해져서 급기야 꼼짝 못 하고 드러눕는 지경에 이르렀건만 객지에 홀로 떨어진 그를 돌봐줄 손길이 있을 턱이 없었습니다. 시집에 기별을 전할까 했다가도 남편마저 잃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만 할 따름이었습니다.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크게 비관한 나머지 그녀는 마침내 죽기로 작정하고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은 채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마침 그 즈음에 군의관으로 부산에 와 있던 시집의 일가가 소식을 듣고 그녀를 병원에 옮김으로써 위궤양으로 사경을 헤매던 그녀를 구해냈습니다.

국악으로 입신한 명창의 경우를 보면 대대로 무업에 종사해온 재인 집안의 내력을 가졌거나, 순회 극단의 공연에 반해서 가출을 했거나, 아니면 국악에 관심이 깊은 사람이 집안에 있었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에 견주면 김월하 명창의 경우는 희귀한 경우에 속합니다. 그녀가 여창 가곡의 명창으로서 무형 문화재가 된 것은 바로 그 위궤양 덕택이기 때문입니다.

“서너 달 동안 통원 치료를 하면서 차츰 생기를 찾을 무렵이었는데 동대신동에서 술도가를 경영하던 어르신 한 분이 저더러 아침 산책을 같이 가는 게 어떠냐고 그래요. 외간 남자하고 새벽 산책을 한다는 게 워낙 망측해서 딱 잘라서 거절했는데 그 집 아주머님까지 나서서 자꾸 권하는 바람에 새벽 산책을 나섰어요.
산책 가는 곳은 지금은 없어진 동대신동 구덕 수원지였는데 경치가 아주 굉장해요. 그래 그 양반을 따라 수원지에 들어가면 그 분은 거기서 모이는 분들과 말씀을 나누고 저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가 돌아오곤 했는데 거기 모이는 분들이 매일 시조 몇 수를 부르고 헤어지더군요. 저는 이만치서 귀동냥만 했지요.”

새벽에 수원지에 모인 사람들은 이름을 꼽으면 다 알 만한 법관과 고급 관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거기 모여서 난리중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전직 경찰서장이었던 최 아무개한테 시조를 배우던 '시우 동호인'들이었습니다.

새벽 산책이 잦아지면서 수원지에 모이는 사람들과 안면이 익어갈 무렵이었습니다. 시조창이 무척 어렵다는 술도갓집 주인의 말에 "뭔가 어렵냐"고 슬쩍 면박을 준 일이 있었는데, 그 일로 그녀는 그들 앞에서 귀동냥으로 익힌 시조를 한 수 뽑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배우지도 않은 그녀의 목에서 너무도 낭랑하고 곱고 선율이 정확한 시조가락이 흘러 나오자 좌중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가 그녀의 나이 서른여섯되던 해였습니다. 그녀는 당장 시조 동우회 모임의 스타가 되고 말았습니다. 

출처 : http://playin.innori.com/%3Fpage%3D300

그 일이 있은 뒤로 그녀의 인생은 급속하게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뿌리도 모른 채 유씨 부인의 수양딸 노릇을 한 ‘유정환 시대’와 자상하고 듬직한 남편과 함께 꿈 같은 세월 보낸 ‘김덕순 시대’는 막을 내리고 시조, 가사, 가곡에 걸쳐 여류 창악인으로 이름을 드날리는 ‘김월하 시대’가 열린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달을 지고 있다는 뜻의 고아하고 그윽한 아호 ‘월하(月荷)’도 그 모임에서 얻었습니다.

뜻밖의 데뷔에 성공한 그녀는 이제 피난민도 환자도 아니었습니다. 시조를 하는 동안 위궤양도 어느 덧 나아버려 그녀는 잃었던 건강마저 되찾았습니다. 

게다가 수원지에 모인 사람들의 주선으로 두봉 이병성 명창을 만나 정식으로 시조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병성 명창은 이왕직 아악부에서 하규일의 지도를 받은 시조창과 가곡의 큰 봉우리였는데, 국립국악원이 서울로 올라간 뒤에도 신병 때문에 남아서 그때 설립된 부산국악원에서 후진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김월하는 이병성 명창 밑에서 3년쯤 배우는 동안 시조와 12가사를 완창해 버리는 놀라운 학습 속도를 보였습니다.

“이병성 선생님 밑에서 몇 년 배우고 나니 일자리가 슬슬 생깁디다. 동래에 사는 유지들이 서른 명쯤 모여 시조창을 배우겠다고해서 거기 가서 시조를 가르쳤지요. 거기에서도 여러 분을 알게 되었고, 아무튼 시조가 대단한 인기를 모으던 시절이었어요. 여기 가서 가르치고 저기 가서 부르고...”

요즘 들으면 먼 옛날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시조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웬만한 모임이나 잔치는 물론이고, 혼례식의 축가도 시조창으로 부르거나, 심지어는 장례식 만가도 시조창으로 불리곤 했습니다. 그녀도 동래에서 시조를 가르쳤던 원예 고등학교 교장 김흥순의 영결식에서 시조로 만가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럴 즈음 그러니까 그녀의 나이 마흔한 살이었을 때, 이름을 더욱 드날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서울 중앙 방송국이 이승만 대통령 탄신 기념 명창 대회를 열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부산 시우 동호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그 대회에 나갔다가 시조 부문에서 1등을 차지함으로써 요즘말로 '떴습니다'. 오아시스 레코드 회사에서 취입을 하고, 방송에 출연하는가 하면, 서울 시조객들의 모임에 불려가는 등 갑자기 바쁜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명창 대회를 계기로 당대 최고의 율객으로 꼽히던 이주환 명창의 부름을 받은 것이 무엇보다도 뜻 깊은 일이었습니다. 국립국악원의 이주환 명창으로부터 가곡 수업을 받는 한편, 이병성 명창에게 시조와 가곡 수업을 계속하는 ‘서울 반, 부산 반’ 생활이었지만 그녀의 이름은 여기 저기서 회자되었고, 그녀의 창악 세계는 탄탄하게 구축되어갔습니다.

“가곡은 하면 할수록 어렵고 두려워요. 자신이 지닌 음성을 다 써야 하는 데다가 길게 뽑으면서도 잡스러운 목소리가 들어가면 안되니까 그게 좀 어려워요? 그래서 가곡을 높은 산꼭대기에서 우람한 통나무를 베어 끌어내리는 소리라고들 그러지요. 스님네들이 범패를 부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타고난 목소리와 재능을 가진 그녀의 학습은 일취월장했습니다.

시조의 모든 갈래를 두루 꿰뚫었는가 하면, 한시도 두루 익혔습니다. 또 거문고, 양금과 같은 기악에도 숨은 재능을 지니고 있던 그녀는 곧잘 자신의 스승은 ‘모두 열 세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창악에서 이론의 비중을 높게 매기지 않습니다. 음악은 감성으로 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 세계를 학술적으로나 관념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태도는 매우 독특한 계기로 뒤늦게 뛰어든 그녀의 학습 과정이 여느 국악인들과 구별되는 점에서도 연유될 수 있을 겁니다. 그와 함께 그녀의 천부적인 음악성을 바탕으로 하는 경험론적 자신감과 관련지어서 풀이할 수도 있겠습니다. 

피난지 부산에 도착한 지 꼭 한 달이 모자라는 십 년을 채우고 1961년 11월에 서울로 다시 올라온 뒤로 그녀는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거침없이 지냈습니다.

1969년에 국악협회 시조 분과위원장에 선임된 그녀는 1970년에 경향 각지에 산재한 시우회를 모은 전국 시우 단체 총연합회 회장에 추대되었습니다. 그리고 1973년에 중요 무형 문화재 제30호 여창 가곡예능 보유자로 지정됨으로 예인으로서의 길을 순탄하게 달려왔습니다. 1974년부터는 국립국악원 강사 및 연주원으로, 또 국악 예술 고등학교 강사로 나가면서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았으며 서울대, 한양대, 추계 예술대학교에 출강하여 후진 양성에도 진력을 다했습니다.

출처 : http://www.dreamrec.co.kr/new_dreamrec/...yword%3D

또한 그녀는 치산에도 솜씨를 보임으로써 국악인으로는 뒤지지 않는 재력을 지녔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치산술은 근검 절약일 뿐 달리 비방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그녀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가정부를 두지 않고 스스로 살림을 꾸렸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을 그녀는 1968년부터 남몰래 장학사업을 해오는데 썼습니다. 서울대 국악과 학생과 국악 고등학교 학생 중에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탐문하여 학비를 대주기 시작했습니다. 한때는 학생 수가 많아서 한꺼번에 목돈을 마련하느라고 진땀을 흘리기도 했지만, 한번 내뱉은 약속은 결코 어기지 않았습니다.

“학교를 세우는 게 제 필생의 소원이에요. 제가 가진 재산을 다 털면 그런대로 교사는 지을 수가 있겠는데 학교 부지를 마련할 형편까지는 못되는 게 안타까워요. 땅만 있으면 좋을 텐데...”

그녀는 자신이 학비를 대준 학생 중에 누구 누구가 유학을 가 있으며, 누구 누구가 대학 교수라고 꼽으면서 자신이 학교를 세우면 그들이 나와 강의를 맡아줄 것이라고 말하며 그날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그녀는 그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고대하면서 무척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그녀의 달력은 몇 시 어디라고 씌여 있는 강연 일정을 적은 글씨로 가득했습니다. 양평, 안성, 수원, 원주, 안양, 성남은 물론 서울 시내 이런 저런 연수원이나 교육원치고 그녀가 가 보지 않은 곳은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녀의 강연을 듣고 시조 카세트 테이프를 구한 사람은 회사 신입 사원에서부터 경찰서장, 기자, 학교장, 고급 관리, 장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습니다.

그렇게 부지런하게 모은 그녀의 재산은 1991년에 설립된 <월하문화재단>으로 남아 국악의 보급과 육성에 관한 그녀의 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996년에 이 세상을 뜰 때까지 그녀는 우리 것을 외면하는 요즘의 세태를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녀는 지금 천상의 어디에선가 달빛을 받으며 그 고운 목소리로 '못 이룬 꿈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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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우리에게 '민요'는 설날이나 추석 같은 특별한 날에나 들어볼 수 있는 특수한 노래입니다.

하지만 일본이 이 나라를 지배하기 전까지만 해도 민요는 수천 년 동안 이 땅의 백성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려 온 대표적인 '민중의 노래'였습니다.

한반도의 곳곳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 온 수천 편의 토속 민요들이 있었습니다. 그 노래들은 제쳐두고 <경기민요>, <서도민요>, <남도민요>로 크게 나뉘어지는 대표적인 애창 민요만을 보더라도, 그 생생한 표현력과 풍부한 음악성으로 듣는 사람에게 다양한 정서를 제공해 줍니다. 이 좁은 땅 안에 어찌 그리도 지역에 따라 창법이나 선율이 확연히 다른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전라도 지역에 전해 오는 남도민요는 뱃속에서 소리를 끌어내어 목에서 갖가지 조화를 부립니다. 어던 노래는 꿋꿋하면서도 박력이 있고, 어떤 노래는 비장하고 처절한가 하면, 어떤 노래는 흥겹고 신명이 절로 납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무게가 있고 뱃속에서 통성을 뽑아내는 발성을 합니다.

이북 지역에 전해 오는 서도민요는 콧소리가 많이 들어가면서 꺾어 넘겨서 끄는 목을 주로 사용하는데, 애절하고 슬픈 가락을 많이 사용합니다. 

경기 민요는 곱고 예쁘게 나가다가 섬세하게 떨고 끌어 잡아당기고 조이는 목을 주로 사용하며,
슬픈 노래보다 경쾌하고 흥겨운 노래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남도민요나 판소리를 하는 명창들에게는 판소리의 가락이 지니고 있는 비장함이나, 비극적인 어두움이나, 해학적인 분위기가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묘한 성품을 느낄 수 있는데 비해 경기민요를 부르는 명창들에게서는 그 가락처럼 밝고 경쾌하고 화려한 성품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저의 편견일까요?

그거야 어찌됐든 <경기 12잡가>로 인간문화재가 된 묵계월 명창은 경기민요의 곱고 화려한 분위기와 다르게 소박하면서도 꾸밈없는 창법으로 새로운 맛을 보여주는 명창입니다.

출처 : http://www.gayo114.com/musicColumn/musi...Fno%3D71

“내가 어려서부터 키도 작고 다른 재주도 없었는데, 유독 노래부르는 재주만은 유별났어요. 우리집이 서울 광희동 지금 을지로 계림극장 건너편에 있었는데,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나 어디서 주워들은 노래를 그렇게 흉내를 잘 내었어요.
또 우리집 부근에 민요 부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노래 연습하는 걸 오다가다 듣고는 그 흉내를 잘 냈어요.”

1921년 10월 21일에 이윤기씨의 다섯 딸 중 넷째딸로 태어난 그녀는 방산보통학교에 다닐 때까지만해도 노래 흉내 잘 내는 소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녀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인연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버님이 명주실 꼬아서 매듭 만드는 일을 하셨는데 집안 형편은 괜찮은 편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열한두 살쯤 되었을 때, 동네에서 노래부르고 활 쏘러 다니는 한량 노인이 내가 노래부르는 걸 듣더니 이 아이는 노래를 가르쳐야 하니 자기에게 맡기라고 아버지를 졸랐어요.
아버지가 그럴 수가 없다고 거절하니까, 이번에는 어머니를 구슬러서 아이의 장래를 위한 일이라고 끈덕지게 졸라대는 통에 종로 2가의 낙원동에서 혼자 살고 계시던 이씨라는 부인에게 수양딸로 들어갔지요. 그 양어머니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은인이랍니다."

광희동의 ‘문 밖’에서 종로 ‘문 안’으로 들어가게 된 소녀는 학교도 그만 두고 양어머니와 함께 살며 마음껏 노래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양어머니의 돌아가신 남편 성이 묵씨라서 이름도 이경옥에서 묵계월로 고치고, 그 동네에서 노래를 가르치던 이광식이라는 소리꾼에게 노래공부를 시작하게 된 그녀는 새로운 생활이 신기하고 재미있기만 했습니다.

“이광식 선생님에게서 시조로부터 시작해서 여창 지름, 남창 지름 그리고 12잡가를 배우는데, 제가 열심히 하고 또 목이 말을 잘 들어 빨리빨리 배우니까 선생님이 무척 좋아하셨어요.
거기서 일년 반쯤 배웠는데, 한량 노인이 더 좋은 선생님에게 맡기라고 어머니에게 권유하여 김태식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어요. 거기서 일 년쯤 배우고 있는데, 본격적으로 노래를 할려면 권번에서 배워야 한다고 해서 조선권번에 나가 주수봉 선생님에게 공부를 했지요.”

경기민요의 노래 공부는 대개 시조를 배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잡가를 배우는 것으로 끝납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긴아리랑>, <이별가>, <도라지타령>, <구 아리랑>, <노랫가락>, <창부타령>, <방아타령>, <한강수타령>, <경복궁타령>, <양산도>, <천안삼거리>, <오봉산 타령>, <개성난봉가(박연 폭포)> 같은 민요들은 공부를 하는 동안에 저절로 익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경기민요의 독특한 개성을 보여 주는 잡가는 ‘긴 노래’라고도 불리는데 민요도 아니요, 가곡이나 가사나 시조와 같은 정악 계통의 노래도 아니면서  조선말기에 민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독특한 노래입니다. 

본래는 <유산가>, <제비가>, <적벽가>, <소춘향가>, <선유가>, <집장가>, <형장가>, <평양가>의 여덟 가지가 서울의 8잡가로 불렸는데 여기에 <달거리>, <십장가>, <출인가>, <방물가>가 합쳐져서 12잡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노래들이 언제부터 불리었지는 문헌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 없고, 작곡자나 작사자도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잡가 잘 부르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구한말에는 추교신, 조기준, 박춘경과 같은 명창들이 이름을 날렸고, 그밖에도 한다하는 소리꾼들이 이곳저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권번에서 가곡을 배우려고 했어요. 그때 가곡 선생님은 하규일씨라고 가곡으로는 나라 안에서 으뜸이시고 명성이 대단한 분이셨어요.
그런데 그 분이 내 목소리를 들어보시더니 내 목이 좋기는 한데 청이 낮고 굵어서 가곡에는 안 맞다고 하세요. 가곡은 목청이 높고 가늘고 섬세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잡가를 배우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주수봉 선생님한테 ‘긴 노래’를 배우고 있는데 하루는 어떤 노인이 찾아 오셔서 내 노래를 듣더니 ‘너 나한테 한 가락 배워봐라’하면서 뭘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삼설기>라는 노래인데 그 귀한 노래를 뭣인지도 모르고 흥이 나서 배웠지요. 열다섯 살 때의 일이예요.”

<삼설기(三說記)>는 노래가 아니고 '송시(誦詩)', 곧 글에 가락을 얹어 읽어 내려가는 것인데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어려운 가락입니다.

세 사람의 선비가 낮잠을 자다가 한꺼번에 죽게 되어 사자에게 이끌리어 저승으로 가서 재판을 받는다.
그런데 죽을 때가 안 된 사람을 잡아들였음이 밝혀져 도로 살려 보낼 적에 각기 자기 소원을 말하게 된다.
한 사람은 높은 벼슬을 달라 하고, 또 한 사람은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하여 그 사람들은 자기 소원대로 되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이 이런 소원을 이야기한다.
"‘명당에 터를 잡아 만 권의 책을 쌓아 두고 거문고 벗을 삼고 앞내에 고기 낚고 뒷뫼에 약을 심어 아들 형제 딸 하나에 내외손이 번성하여 병 없고 성한 몸이 수삼갑자를 누리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노발대발하여 자기도 못할 것을 해달랜다고 야단을 친다.

이것이 간단한 <삼설기>의 줄거리입니다. 원래 사설이 어렵고 길어서 외우기가 힘들고 가락도 까다로워 부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이문원이라는 사람이 묵계월 소녀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그 선생님은 ‘노래를 나만 알고 죽으면 어떡하니? 배우려는 놈도 없고 또 배우려는 놈이 있어도 목이 안되더라’고 하시면서 열심히 가르쳐 주셨어요. 한 일 년 배우고 나니까 어지간히 흉내낼 수 있데요. 그러자 그 어른이 신이 나서 자기가 다니는 사랑방에 데리고 다녔지요.”

그때는 방송이나 레코드판이나 무대공연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소리꾼들의 소리판은 주로 잔치집이나 사랑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살림이 조금 풍족한 사람들은 으레 집 안에 사랑채를 지어 놓고 한량들을 불러서 노는 풍류가 있었는데, 이문원은 이 사랑방 저 사랑방 떠돌아다니며 노래를 들려주면서 살아가던 노인이었습니다.

그를 따라다니면서 사랑방의 청중들에게 귀여움과 인기를 독차지한 어린 소녀는 그 뒤 최종식이라는 민요의 대가에게 민요를 배우러 찾아갔습니다.

“양어머니가 무조건하고 뒤를 대주시니까 좋은 선생님 찾아서 공부를 원없이 했지요. 최정식 선생님은 민요로 입신(立神)했다는 말을 들은 분인데, 노래도 잘하셨지만 작사나 작곡도 잘 하셔서 지금 많이들 부르고 있는 <풍등가>나 <금강산 타령>은 그 분이 만드신 노래로 크게 히트를 했어요.”

그렇게 꾸준히 공부하던 중에 드디어 방송 출현의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양어머니가 방송국에 청을 넣어서 출연하게 되었지요. 방송국 차가 집까지 와서 나를 데려가데요.
방송국에 들어 가 벌벌 떨면서 <유산가>와 <제비가>를 하는데 그저 또박또박 배운 대로 했지요. 그랬더니 방송국장 되시는 분이 기특하다고 하시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출연료로 3원인가 5원인가를 주셨어요.
방송국 차가 집에까지 바래다 줘서 어머니한테 달려갔더니, 어머니는 내가 과거 급제나 한 듯이 좋아하셨지요.”

그 뒤로 가끔씩 방송국에 출연할 기회가 생겨 본격적으로 방송 활동을 하고, 무대에도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회사원이던 김영배와 중매 결혼을 하고 아기를 갖게 되자 활동이 뜸해졌습니다.

또 그때는 일제 말기의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때라 세상이 뒤숭숭하고 노래할 곳도 없었습니다. 무대라야 기껏 전선 위문공연이나 탄광촌 공연이 대부분이라, 아예 집에 들어 앉아버렸습니다.

해방이 되자 그녀는 무대에 서는 것을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는 남편을 설득하여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무대에서 춤도 추고 연극도 하고 갖가지 재주를 부리는데 나는 통 그런 재주가 없어요. 그저 딱 서서 노래만 했지 손도 안올렸댔어요.
해방 전에 조선에서 제일 가는 명무라는 한성준 선생님에게 승무를 잠깐 배운 적이 있는데 저는 키도 작고 몸매도 잘 빠진 편이 아닌데다가 춤에 대해서는 워낙 둔재였나봐요. 하도 못배우니까 선생님도 재미없어 하시고 나도 별로 흥미가 없어서 포기해 버렸어요. 그때 이를 악물고 버텼더라면 조금은 나아졌을텐데 그냥 끊어버리니까 몸이 말을 안 들어요. 요새는 조금씩 손도 올리고 발림도 하지만, 예전에는 그저 나무토막이었다니깐요. 그래도 소리가 좋다고 청하는 곳이 많아서 쩔쩔 맸어요.”

그렇게 바쁘게 지내다가 6.25 동란을 맞아 간신히 살아남을 만큼 고생을 했습니다.

“피난을 못 가서 남아 있는데 동네에 좌익 사상을 가진 부인네가 찾아 오더니 여성 동맹회 예술단에 가입하라는 거예요. 남편이 지하운동했다는 여잔데 노래만 하면 먹고 사는 것 문제 없게 해줄 테니 나오라고 어찌나 성화를 대는지 그것 거절하느라 혼났어요.
겨우 거절해 놓으니까 이번에는 회의에라도 나오라고 하는 거예요. 안 나가면 주목 받으니 할 수 없이 아기를 업고 나갔는데 연설하고 박수 치고 하는데 골이 아파 죽겠대요.
그래서 꾀를 내어 아기 볼기를 꼬집었지요. 아기가 울자 시끄러우니까 나가라고 해요. 그래서 빠져나오곤 하다가 부산으로 피난을 갔지요.”

전쟁이 끝나고 피난에서 돌아오니 노래할 곳이 많이 생겨 바쁘게 다니는 틈틈이 레코드 판도 찍었습니다. 그때에 젊은 경기 명창으로 아름을 날리던 김옥심, 이은주와 함께 신세계 레코드에서 12잡가와 민요를 넣은 것을 시작으로 여러 장의 레코드에 소리를 ‘박았습니다.’



그녀의 노래를 들어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녀의 목소리가 평범한 듯 하면서도 구수하고 성량이 풍부하며 담백하고 깊은 맛이 있다고 평합니다.

이것은 그녀와 함께 12잡가의 보유자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은 이은주 명창의 곱고 맑은 목소리나 안비취 명창의 강하면서도 섬세한 목소리와 다른 맛을 풍기면서, 그녀의 독특한 개성으로 인정 받아오고 있습니다.

“나는 제자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밖에 안 해요. 우리 공부할 때는 책도 없이 선생님 입만 보고 배웠다가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복습하고 화장실에서도 연습하는 등 밤낮으로 열심히 했는데 요새는 그렇게 열심히들 안 해요.
그리고 몇 년 배워 가락을 어지간히 익힌 다음에도 계속 다듬고 연구해서 자기 것으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흉내 소리밖에 안돼요. 다이아몬드를 만들려면 돌을 깎고 다듬어서 기가 막힌 공을 들여야 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양어머니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명창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원없이 공부를 하고,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복된 가정을 꾸려 왔습니다. 말년에는 소박하고 덕스러움을 좋아하는 애호가들과 제자들 덕분에 90세가 된 지금까지 무대에 서며 행복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이대로 노래 부르다 죽으면 더 이상 원이 없겠다.”는 게 그녀의 남은 소망이니 그 소망은 충분히 이루어지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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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수 명창은 자신이 소리 광대로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안 친척들이나 친구들 앞에서도 여간해서는 판소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국악인의 최고 명예인 인간문화재가 되고, 광대가 전통예능인으로 우대 받는 세상에 살면서도 예전의 천대와 편견을 잊지 못했던 탓입니다.
 

출처 : http://www.ncktpa.go.kr/html/jsp/ncktpa...5A6%25AC

그러나 그가 1909년 7월 28일에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났을 때만 해도 판소리 광대가 되는 것은 천민의 신분을 벗어나 출세와 돈과 명예가 보장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잘만하면 임금 앞에서 소리도 하고 벼슬도 받을 수 있는 '화려한 직업'이었습니다.

그 역시도 그의 스승인 김창환 명창을 통해서 출세의 꿈을 키웠습니다.

“우리집이 나주군 봉산면 복룡리에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정창업 명창이시고, 아버님도 소리를 좋아하셔서 어려서부터 판소리를 즐겨 듣곤 했지. 17살 됐을 때에 아버님이 김창환 선생님 댁에 보내 거기서 먹고 자면서 배우게 됐지."
 
정광수 명창은 자신이 다산 정약용의 방계 7대손이고, 철종과 고종 연간에 어전광대로 활동한 서편소리의 대가 정창업 명창의 손자라는 것을 자랑으로 꼽습니다. 어려서 ‘천자문’과 ‘사략(史略)’을 뗀 뒤, 김창환 명창의 제자로 판소리의 길에 들어선 것도 그가 평생 자랑하는 일입니다.

김창환 명창은 고종 황제 앞에서 판소리를 하여 정3품의 명예벼슬인 당상관직을 받고 돈도 많이 번 뒤, 전남 나주군 삼도면 양화리의 절골이라는 곳에 넓은 터를 잡아 풍족한 말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풍신이 잘 생기시고, 행실이 분명하고, 효자시고, 인격이 갖추어진 분이셨어. 소리로 말하자면 송만갑 명창은 강한 상청으로 음이 높아 귀에 쟁쟁 울리고 정확하여 축음기에도 잘 받는 소리였는디, 우리 선생님은 음의 폭이 넓고 굵고 후령음이 무서웠지.
특히 우리 선생님은 늘상 인격을 강조하셔서 성악은 인간이 되어야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 그리고 고종 황제를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지 동네 뒷산에 사당을 지어서 그분 영정을 모셔놓고 날마다 올라갔다 내려 오셨어. 그 분 밑에서 5년쯤 배웠지.”

그러다가 어느덧 스물두세 살이 되어 ‘꽃기운’이 펄펄 살아나는 청춘이 되었습니다.

“내 자랑은 아니지만 그 무렵에는 풍신이 좋았어. 몸집이 두텁고 점잖고 또 예쁜 구석도 있어서 어른들이 귀여워했지. 그러니 나도 자연히 벌렁거리는 마음이 생겨. 남들이 하도 잘 생기고 소리 잘한다고 추어대니까 정말 그런 줄 알고 으스댔지. 그러다가 목포에 있는 권번에 성악 강사로 가게 됐지. 말하자면 첫 취직인 셈이여.”

목포 권번의 강사를 하며 지내는 동안, 재기발랄한 젊은 기생들 틈에서 잘 생기고 소리 잘하는 젊은 총각이 선생님 노릇을 하려니 그 속이 온전할 리가 없었습니다.

“안되겠어. 여자들 속에서 연애나 하고 공부는 못 허고 가르치기만 하니 실력이 줄어. 그리고 여자들이 어찌 극성스럽게 구는지 내 개인 시간을 온통 빼앗아 가고, 이 여자 저 여자가 나를 사이에 두고 싸움을 벌이는 통에 골치가 아파서 못 있겄어. 그래서 그만 두고 나와 삼성암이란 암자에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지.”

수많은 여성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암자에서 먹고 자면서 2년 동안 스승도 없이 그야말로 죽자사자 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무리한 연습으로 몸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암자 뒤에 있는 절벽에서 하루종일 소리를 지르면 목이 잠겨. 어찌나 목이 잠기는지 스님한테 밥 달라는 소리도 못혔어. 그래도 구슬땀을 흘리면서 소리를 지르면 소리가 살살 터져나와. 그 소리를 '지름상성'이라고 혀. 한없이 높은 소리가, 자기도 생전에 들어보지 못한 소리가 어디에선가 튀어나와. 그 소리에 미쳐. 제 소리에 제가 반해 가지고 아침부터 절벽 끝에 있는 석대에 올라가서 소리허고 점심 먹고 또 허고......
그러기를 일년쯤 하니까 소리는 좋아졌는디 몸에 이상이 왔어. 힘만 조금 쓰면 창자가 나올라고 혀. 탈장기가 생긴 거지. 겁 없이 무식하게 힘을 썼으니 뱃속이 온전할 리가 있을 거여. 그 후유증 때문에 많이 고생을 혔어.”

방법이야 어떻든 지독한 공부 덕분에 그의 소리 기량은 한껏 늘었고, 탈장도 치료가 되었습니다. 그는 순천 권번에서 성악 강사를 하다가 유성준 명창에게 더 공부를 하려고 진주로 갔습니다.

유성준 명창은 순천에 살던 장자백 명창의 제자로 소리제가 좋고 공력이 있어서 독특한 실력을 인정 받던 명창이었습니다. 특히 「수궁가」를 잘해서 많은 제자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전세방 하나 얻어 놓고 봄, 여름 동안 공부를 하는디 기초가 있어 놓으니까 번쩍번쩍 공부가 잘 돼. 그래서 <수궁가>, <적벽가>를 다 떼고 집에 돌아오는데 선생님이 정이 들어서 우시는 거여. 선생님뿐만 아니라 그 진주 권번의 수많은 기생 중에서도 우는 사람 많었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울린 그는 29살이 되었을 때, 드디어 서울로 올라와 ‘조선 성악 연구회’를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소리 실력을 인정 받아 바로 경성 방송국에 가서 녹음을 하고, 공부하면서 공연다니는 생활을 3,4년 하던 끝에 신의주에서 해방을 맞게 된 그는 본가가 있는 장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스무살 때에 장흥 사는 안삼차라는 장흥 사는 처녀에게 장가든 뒤로 소리 공부한다 소리 선생한다 하며 잠시도 집에 붙어 있질 않았지만, 아내는 군소리 한 마디 없이 살림을 꾸려 나갔습니다. 그 뒤 광주 권번에 일자리가 생기자, 아예 광주로 살림을 옮겨 그곳에서 3년쯤 지내다가 6.25전쟁을 맞았습니다.

"가족들 데리고 피난 다니느라 죽을 고생했지. 수복되고 다시 광주에 가서 가르치고 있다가 이듬해에 광주 국악원을 창립했고, 2년 뒤에 불화가 생겨서 민속예술원을 따로 만들어 강사 노릇을 했지. 그 일에 발목이 잡혀서 20년을 광주에서 살다보니, 이럭저럭 광주가 제2의 고향이 되고 말았어"

정든 광주에서 20년쯤 지내던 그는 결국 동료들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서울로 올라왔고, 1964년에는 판소리 「수궁가」의 인간문화재가 되었습니다.

“소리라는 것, 즉 음악에는 예의 체통이 있어. 칠정과 희로애락을 살리고 인의예지를 살리는 것이 소리니 함부로 곡조를 내두르고 허망히 하면 안될 것이여. 목성음으로만 듣기 좋게 흥얼거리고 놀기 좋게 불러도 안 되며, 법통과 격식에 맞게 정중히 해야 될 것이여.”

이렇듯 고상한 음악관을 가지게 된 탓에 그는 아무데서나 소리를 하지 않았고, 소리꾼으로서의 활동도 그리 활발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소리 광대 된 것을 부끄러워 하는 것은 아니여. 다만 세상에서 처신하며 살아가려니 꺼리는 게 많아서 그러는 거여. 내가 아무리 내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겨도 사람들이 안 알어주는디 어쩔 것이여. 그리서 난 누가 날 광대라고 부르는 걸 싫어혀. 집안이나 종친회에도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몰라.”

이처럼 광대들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이 사회의 뿌리깊은 편견에 정중한 처신으로 항거하며 지내던 그는 2003년 11월 2일, 판소리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재' 지정받기 닷새 전에 삶을 마무리했습니다. 

지금은 광대를 천대하는 일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서양의 광대들에 비해 초라한 대접을 받는 전통 광대들의 현실을 볼 때, 그의 항거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나름대로의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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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정선 아라리>의 지킴이 최봉출 명창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아리랑’은 한국을 대표하는 민요인 만큼, 이 나라 구석구석에 그 자취와 흔적을 남기고 있는 노래입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의 신하 7명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벼슬을 그만 두고 강원도의 깊은 산골인 정선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정선군 남면 낙동리 거칠현에서 밭을 일구고 산나물을 뜯어 먹으며 살던 그들은 쓰러져 간 고려의 옛 시절과 멀리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 하며 시를 지어 노래로 불렀습니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 장마가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며는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삼월이 아니라며는
두견새는 왜 우나

처음에 어려운 한시로 지어졌던 이 시는 차츰 사람들의 입에 올라 쉽고 친근한 우리말로 바뀌게 되었고, 가락도 점차 이 지방 민요의 가락에 얹혀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 주게” 하는 후렴도 붙고, 이 노래를 부르고 즐기는 사람들이 저마다 노랫말을 만들어 붙이는 통에 어느덧 오백 가지가 넘는 노랫말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해 옵니다.

그렇게 해서 전해진 <정선아라리>는 유난히 강원도의 지명과 풍물과 자연과 삶을 노랫말에 담고 있습니다.

아우라지 강가의 처녀 조각상. 출처 : http://roadtour.tistory.com/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를 건너 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님 그리워 나는 못살겠네

정선 읍내 물레방아는
물살을 안고 도는데
우리집의 낭군은
날 안고 돌 줄 몰라

아질아질 성마령
야속하다 꽃베리
지옥 같은 정선 읍내
십 년 간들 어이 가리

아우라지, 정선, 성마령, 꽃베리와 같은 강원도의 산이나 강이나 고갯마루들이 사랑, 이별, 만남, 죽음과 같은 삶의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배경으로 풍부하게 등장합니다. 이 가사와 가락은 이 고장 사람들에게 속속들이 전해져서 심메마니들은 산에서 약초를 캐면서, 농부들은 밭에서 일을 하면서, 여인네들은 나물을 캐고 김을 매면서, 자신들의 '흥 과 '한'과 '멋'을 이 노래에 실어서 불렀던 것입니다.

최봉출 명창이 정선군 북면 남평리에서 최승화씨의 4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던 1919년 무렵에도 이 고장에서 노래 부른다고 하면 곧 <정선 아라리>를 부른다는 말로 통할 만큼 이 노래는 일상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농꾼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 문전에도 가보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배고픔과 가난에 시달리면서 농사일로 잔뼈가 굵어가며 자랐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이 있었다면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노래를 마음껏 불러제치는 것이었습니다.

노래를 무척 좋아하는 아버지와 노래 잘 부르기로 소문난 형들에게 뒤질세라 그 역시 어려서부터 목청이 곱고 노래에 남다른 소질을 보여서, 언제나 소년 명창으로 꼽히는 실력을 보였습니다.

게다가 동네 총각들과 함께 어울려 이웃 동네에 사는 정명로라는 명창에게 정식으로 <정선 아라리>를 배운 뒤로 그의 노래는 귀동냥 풍월에서 확실하게 전통 창법을 익힌 튼튼한 소리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정명로라는 분은 본래 한량인데 <정선 아라리>를 잘 부르기로 소문이 났던 사람이지. 그때 정선에 이름났던 명창으로 고덕명, 김천유, 박순태, 정명로 이런 분들이 있었는데, 나는 정명로씨하고 박순태 두 분한테 배왔지.”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오던 노래이니 그동안 이 노래를 뛰어나게 잘 불렀던 명창이 수도 없이 많았을 터이지만, 아깝게도 그들의 이름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다만 100여년 전쯤에 이 고장에서 이름을 떹치던 명창들은 입에서 입으로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1876년에 정선에서 태어나 소년 때부터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돌며 이름을 떨친 고덕명 명창입니다. 그는 가사도 잘 지어 불렀다고 하는데, 그가 죽은 뒤에 “아라리 잘하기는 고덕명이요, 한 번 가니 그 소리조차 그만일세”라는 가사가 만들어져서 그를 기릴 만큼 이 고장에서는 최고로 꼽히는 명창입니다.

또 1885년에 정선군 북면에서 태어나 인근을 두루 돌아다니며 아라리를 불렀던 김천유 명창이나, 1896년에 북면에서 태어나 함경도 원산이나 회령 등지를 떠돌아 다니면서 여장을 하고 <정선 아라리>를 불러 이름을 떨치고 음반 취입도 한 박순태 명창이나, 1900년에 평창에서 출생하여 정선의 북면에 옮겨와 살면서 명창으로 이름을 떨친 정명로 명창 등이 이 고장의 노래를 빛낸 명창들입니다.

이들 중 정명로 명창과 박순태 명창에게 직접 노래를 배운 그의 솜씨는 총각 때 이미 동네에 소문이 나서, 혼인식이나 환갑잔치 할 때 곧잘 불려가서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스물한살 때 같은 마을에 사는 전옥란에게 장가를 간 뒤로는 집안 살림 꾸려나가기에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제몫으로 가진 밭뙈기 하나도 없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옥수수, 감자, 메밀과 같은 밭농사 일을 쉴 새 없이 하며 살림을 꾸려 나갔습니다.

그러면서도 산에서 나무할 때나 밭에서 일할 때, 어려서부터 배운 아라리를 부르면 절로 신명이 나서 힘든 일도 수월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노래가 본래 <정선 아라리>가 맞는 이름인데, 요새는 <정선 아리랑>이라고 많이 부르대. 그런데 이 노래는 장단도 없고 악기도 필요없어요.
그저 여자들은 물 떠다 놓고 바가지 엎어 놓고 부르거나, 남자들은 지게 작대기를 두드리고, 술먹을 때는 젓가락으로 두드리면서 자기 신명에 맞추어서 부르는 거야.
그때는 잘 부르는 사람 못 부르는 사람없이 모두 다 부르고, 늙으나 점으나 다 좋아했으니 ‘아리리 잘한다’하고 소문이 나면 술도 공짜로 얻어 먹고 아주 인기가 최고였지.”

강원도 지방의 대표적 민요로는 <강원도 아리랑>과 <한 오백년>과 <정선 아라리>가 있는데, 세 노래의 맛이 조금씩 다릅니다.

아리 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 아리 얼씨구 노다가세
아주까리 동백아 여지마라
누구를 괴자고 머리에 기름

하고서 타령장단으로 부르는 <강원도 아리랑>은 소박한 가락이 흥겹고 경쾌하게 굽이굽이 넘어가는 맛이 있습니다.

한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
한 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대중가요만큼이나 널리 알려진  <한 오백년>은 한없이 애절하고 처량한 가락을 탄식하듯 애소하듯 절절이 뽑아내는 맛이 일품입니다.

<정선 아라리>는 ‘엮음 아리랑’과 ‘긴 아리랑’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임자 당신 나 싫다고 울 치고 담 치고
배추 김치 소금 치고
열무 김치 초 치고
칼로 물 벤듯이 그냥 싹 돌아서더니
이천 팔십리 다 못가서 왜 또 날 찾아왔나

‘엮음 아리랑’은 이런 가사들을 주섬주섬 엮어가는데, 그 가락이 들으면 들을수록 감칠 맛이 있고 구수한 것이 특색입니다. 그 가사 또한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것에서부터 생활의 고통, 인생의 허무함, 임을 향한 그리움 등 격조 높은 시에서부터 익살스러운 재담까지 다양하여 가만히 귀 기울여 듣노라면 절로 탄성을 발하게 하는 멋들어진 말들이 구석구석에 숨어 있습니다.

‘긴 아리랑’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 주소”하는 후렴에, 처량하고 슬픔에 겨우면서도 구성지게 풀어나가는 가락을 실어 부릅니다. 그 가락은 구슬프면서도 구성지고, 뚝배기 맛처럼 담백하면서도 깊이가 있어 듣는 사람의 가슴 속에 묵직하게 파고 듭니다.

가사도 수백 가지가 다양하게 전해 오는데, 한일합방 후부터 일제 말엽까지는 나라없는 민족의 서러움과 울분을 노래한 가사가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가사는 탄압을 받아 점점 사라지고, 애정과 남녀 관계를 읊은 노래가 주로 불렸습니다. 그런 판국에도 징용과 징병에 끌려가는 임을 애태워 하는 이런 가사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간다지 못간다지 얼마나 울었나
송정암 나루터가 한강수 되었소
일락서산에 해는 지고 싶어 지나
나를 두고 가시는 님은 가고 싶어 가나

또 해방 뒤에 최봉출 명창이 직접 지어서 불렀다고 하는 다음과 같은 가사들은 민요가 시대정신을 얼마나 훌륭히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인가를 증명하는 가사들입니다.

삼십육년 간 피지 못하던 무궁화꽃은
을유년 8.15에 만발했네
사발 그릇이 깨어지며는
두세쪽이 나는데
삼팔선이 깨어지며는
한덩어리로 뭉친다

한편으로 고달픈 농사일을 꾸려 가면서, 한편으로 <정선 아라리>를 부르면서 흥을 풀고, 술을 마시고, 때로는 바람도 피우면서 살던 그에게 뜻밖에 유명해질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961년 12월에 정선군에서 개최한 ‘아라리 경창 대회’에서 1등으로 입상한 것입니다.

“그때 상금으로 돈 6환을 받았는데 상당히 큰 돈이었어. 그리고 부상으로 드레스 미싱기를 받아서 그걸 맏며느리한테 물려줬지.
일등을 하고 나니까 여기저기서 노래 좀 해달라고 청이 오는데 어찌나 바쁜지 한달에 열흘쯤은 밖에서 노래 부르고 살아요. 그러니 집안은 돌볼 틈이 없고 농사일도 점점 소홀하게 됐지.”

그렇게 한 10년쯤을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노래도 부르고, 노래 안 부를 때는 집에서 일을 하고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에 광주에서 열린 전국민속경연 대회에 강원도 대표로 출전하여 1등 상을 탄 뒤 도 지방 무형문화재가 되자, 농사일을 아예 남에게 맡겨버리고 노래부르고 가르치는 일이 생업이 되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무대에 나가서 노래 부르는 것이 떨리고 겁이 나더니, 나중에는 떨리는 게 아니라 더 신이 나고 기분이 좋아져.
텔레비나 라디오에도 나가고 레코드 취입도 두 번이나 하고, 일년 중에 정선 군민의 날에 하는 ‘정선 아리랑제’나 민속예술경연대회 같은 때는 꼬박꼬박 나가고 그러다보니 이제는 일하면서는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되고, 무대에 서서만 노래부르는 습관이 들어버렸어.”

어찌됐든 그렇게 지내다가 부인이 저 세상으로 떠나자 역시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사는 이순옥 할머니와 재혼을 한 뒤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정선군 북면 구절리로 이사를 했습니다.

출처 : http://makcbg0.com.ne.kr/arijung14.htm


20여년 전 맑은 계곡이 흐르는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모롱이에 오롯이 들어 앉은 그의 집을 찾아 갔을 때, 두 내외가 오순도순 정을 주고 받으며 노후를 의탁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쓸쓸하면서도 정겨웁기 그지없었습니다.

“이 <정선아라리>는 정선 사람이 아니면 제 맛을 내질 못해. 그리고 요새 젊은 사람들이 부르는 것은 그 흉내나 내는 거지 제대로 부르는 것이 아니야.
또 라디오에서 무슨 가수가 우리 <정선 아라리>를 부르는 것은 엉뚱한 거야. 나도 한번 그렇게 불러보려고 해봤는데 안 돼요. 이 노래의 참맛을 알고 부르고 또 그 참맛을 제대로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이제 만나보기 어렵게 됐어”

시대의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노래를 지켜 온 이런 분들의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삶이 오늘의 우리에게 귀한 가락 또하나를 전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그의 삶이 소중하게만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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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한승호 명창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판소리의 내용이 복잡하고 다양한 것과 같이 소리꾼의 재주도 가지가지입니다.

목청이 좋은 소리꾼이 있는가 하면, 목청은 안좋아도 음악적인 표현력 곧 '목구성'이 뛰어난 소리꾼이 있고, 전체 판의 구성을 잘 짜는 곧 소리를 '가지고 노는' 솜씨가 뛰어난 소리꾼도 있습니다. 한승호 명창은 그 중에서도 ‘가지고 노는’ 소리를 가장 높이 치는 명창이었습니다.

“소리꾼은 목만 좋아 가지고는 안돼야. 전술이 있어야 돼. 소리를 가지고 놀면서 새 것이 자꾸 나와야지. 지루하게 한 것 또 하고 또 하면 누가 들을라고 헐 것이여.”

소리를 '가지고 노는' 일은 어려서부터 판소리를 듣고 자라나, 판소리에 속속들이 통달한 대명창들에게 공부를 한 이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함부로 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출처 http://newslink.media.daum.net/news/20060628194005932

그가 1923년에 전라남도 광주시 금남로에서 한성태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 그의 부친은 근방에서 소리꾼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일반적인 소리꾼하고 다른 비밀이 있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동학 의병에 참가하신 뒤로 아버지도 의병에 가담하셨어. 그런디 한일합방이 되고 친구들은 모두 의병에 나가셨는디 아버지는 안 나가셨지.
왜냐하면 우리 아버님이 점잖고 선비 같은 분이신지라, 친구들이 자네는 투쟁헐 사람이 아니니 소리나 허고 가만이 앉아 있으소. 우리가 대신 싸울테니 하셨더래.
그래서 의병 명부에는 들었어도 의병 활동은 안 하시고 소리를 허시면서 생명을 보전혔는디, 그렇게 소리히서 번 돈을 몰래 서울에 가서 의병 친구들한티 주고 오셨대야. 말허자면 군자금 조달을 허신 거지.
가족들이야 그때는 그런 사실을 일체 몰랐지. 그러다가 내가 여덟살 때 돌아가셨는디, 마흔 살밖에 안되신 분이 하도 일본놈한티 불려가서 혼도 나고 분함을 많이 당해 골병 들어 돌아가신 거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광주 권번의 소리 선생이던 장판개 명창을 큰아버지라 부르며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그때에 명창들이 우리집에 자주 드나들었고, 아버님이 그 분들더러 형님이라고 불렀지. 또 아버님 처세가 점잖고, 의병 활동을 하는 줄 모두 알고 계셔서 속으로 모두 좋아하셨어. 그래서 그 분들에게서 조금씩 소리를 배우다가 장판개 선생님에게 친아들처럼 사랑을 받음서 공부를 했지.”

장판개 명창은 본래 땅재주를 넘다가 판소리로 길을 바꿨는데 북에도 일가를 이룬 명창이었습니다. 나라를 뺏긴 한이 맺혀 고향인 순창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광주 권번에서 초빙하여 소리 선생으로 온 터였습니다. 나중에 명창이 된 그의 아들 장영찬과 형님 아우하면서 소리 공부를 하던 그는 일 년쯤 공부를 한 뒤에 서울로 올라가서 조선성악연구회의 연구생이 되었습니다.

“낙원동 친척집에서 먹고 자면서 송만갑 선생님한티 배웠지. 그런디 이 분이 아버님한테도 스승이라 내가 걸음마할 때 나를 보셨다고 하시며 할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셔서 할아버지라고 불렀지.
이 분이 어찌나 귀여워 하시는지 다른 사람한테는 학채를 받는디 나한티는 안 받어. 안 받는 것은 고사허고 가끔씩 돈을 주셔. 밥 사먹으라고.”

그렇듯 사랑과 귀염을 받으며 소년 명창으로 자라난 그는 대명창들에게서 인자하면서도 엄격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특히 송만갑 명창은 나라 잃은 가객이 술 담배 먹고 방탕하면 안된다고 하며 제자들에게도 술 담배를 못 하게 했습니다. 송 명창은 체구는 조그마했으나 몸이 강철같이 튼튼해서 일흔이 넘도록 일선에서 활동하며, 후배들에게 두려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에게서 3,4년 간 공부를 한 뒤에 고향인 광주로 내려오니 광주의 애호가들이 서울 가서 배운 소리 한 번 해보라고 하는 통에 여기 저기 불려 다니며 소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소리를 듣고 난 노인들이 “대선생한테 배워서 소리는 좋은디, 소리를 참으로 헐라먼 김채만제를 배워야 허겄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김채만(1865~1911)은 이미 고인이 된 명창이라 본 적도 없고 소리조차 들은 적이 없었지만, 그의 소리제를 이어 받은 제자들이 몇몇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들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 소리는 선생님하테 배울 때보다 혼자 연구하며 제 길을 찾아갈 때가 제일 어려운 법이여. 그때는 누구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저 혼자서 깜깜한 산길을 가는 심정이었지.
나는 김채만 선생 제를 찾을라고 그 고생을 혔어. 근디 한 대목 두 대목 찾아서 해보니 정말 좋아. 진짜 깊은 소리맛을 아는 사람은 그 선생 소리를 안 좋아 할 수가 없어.”

김채만은 전라남도 능주에서 태어나 고종 때에 활약하다가 쉰 살 무렵에 세상을 떠난 명창입니다. 목청이 곱고 멋이 있고 고아하기로 당대에서 으뜸이었고, 장단이 변화무쌍하고 기묘한 성음으로 듣는 사람의 등짝에서 땀이 났다 추운기가 돌았다 눈물이 돌았다가 웃게 하는 재주가 다른 소리꾼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뛰어났다고 합니다.

“높은 음으로 올라갈 때는 낙락장송 높은 가지 끝끝터리 매달린 가지처럼 한없이 높은 공중에서 가지고 놀다가 뱅뱅 돌려서 탁 떨어뜨리면 귀머거리도 무릎을 친다는 소리였어. 그리고 성음, 장단, 선율에 통달을 해서 박자는 박자대로 달아 놓고 소리는 소리대로 가고......
여기다 갖다 놓고 저기다 갖다 놓아 소리를 벌려 놓은 다음에 기묘한 방법으로 몰아서 맺는 솜씨가 사람의 오장을 긁는단 말이여. 그리고 소리를 '통성(通聲)'으로 질러대는 것이 아니고 '암성(暗聲)'으로 막아서 올리고 '세성(細聲)'으로 가늘게 양념을 치는 기술이 뛰어 난 분이셨지.
그래서 노인들 말씀이 상청으로 위에서 가지고 노는 기술은 송만갑이 으뜸이고, 목청 크고 호령 잘하기로는 이동백이 으뜸이고, 사람의 오장육부를 갉아대기로는 김채만이 으뜸이라고들 하셨어.”

그는 스승에게 배운 소리를 연습하고, 또 새로운 소리를 찾아다니느라 여러 절을 떠돌아다니고, 어떤 때는 시골의 골방을 얻어 소리공부에 골몰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당시 판소리계 최고의 인기 스타였던 임방울 명창이 창극단을 꾸며 놓고 같이 활동하자고 “꼬이는 통에” 한동안 그와 함께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연을 했습니다.

“내가 소리를 배워서 여기 저기 불려다님서 푼돈 얻어 쓰고 포장 쳐 놓고 돈벌이 허는 거 안 좋아 허는디, 그때는 그거라도 안 허먼 극빈자들이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던 세상이라 할 수 없이 따라다녔지.
그리고 그때 극단을 움직이려면 반드시 '신민의례(臣民儀禮)', 요새로 말하자면 국민의례를 해야했어. 모두들 기립해서 동쪽을 향해서 절을 한 다음에 ‘고꼬꾸 신민노 가까이’ 어저고 하는 '황국 신민 서사'를 외워야 했어.
'나는 황국의 신민으로서 천황폐하께 충성을 하고' 어쩌고 하는 말이었는데 의병 활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분의 자식으로서 참 부끄러웠지.”

그러한 가운데 만주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때 만주 개척단 동포들이 보여 준 환호를 그는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그때에 유명한 유행가 가수였던 백년설, 장세정 이런 사람들하고 우리 국악단하고 같이 갔는디 개척단 제1단에는 전라도 광산군에 살다가 떠나 온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어.
근디 이 사람들이 유행가 할 때는 심드렁하다가 우리가 나가서 소리를 하니까 '얼씨구 절씨구' 춤을 추고 울고 불고 난리가 나버렸어. 마치고 나면 '또 해라!' 하는 통에 날을 새고 소리를 할 지경이었어.
제2단에는 경상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디 그곳에서도 어찌나 사람들이 열광을 하는지 데모가 날 지경이었응게.
그러자 우리를 데리고 온 일본 놈 단장이 ‘참으로 무서운 민족이다. 우리가 총 갖고 한국 사람 중국 사람 다 죽일 수는 있어도 저 정신은 도저히 죽일 수가 없다. 참으로 당신들 소리가 좋소. 내가 들어도 들을수록 좋소’ 하고 탄식을 허고 말았어. 그때 나도 국악이 얼마나 무서운 민족 정신을 가지고 있는가 확연히 깨달아버렸지.”

소리 광대로서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에 차츰 눈을 뜨게 됐을 무렵, 그에게 소집영장이 날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본놈들이 시작해 놓은 전쟁에 나가서 개죽음 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그 길로 ‘튀었습니다’.

광주에서 무등산을 넘어 능주로 튀고, 거기서 담양으로, 담양에서 다시 능주로 첩첩산중으로만 다니며 남의 집 헛간이나 쓰러져 가는 절방에서 고픈 배를 틀어잡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징병기피자의 고생을 몸서리 나게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광주 집으로 돌아오니 모두들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야단들이 났으나 그에게는 기쁨을 느낄 기운마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한참동안 집에서 쉰 뒤에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웠던 박동실 명창을 찾아갔습니다.

“저는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소리를 해야지.”
“소리 집어 치우고 농사나 짓고 싶어요.”
“그런 말 마라. 잘 살든 못 살든 이걸 배웠으니 이걸 버리면 안된다.”
"기운이 없어서 악쓸 힘도 없어요. 그리고 일본놈들한티 빌붙어서 소리허던 놈들이 해방이 됐다고 설치는 꼴도 보기 싫어요.“
“그렇다고 소리를 놓으면 되나. 어떻게든 꼭 소리를 하도록 해라.”

선생님의 간곡한 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다시 소리를 하겠다고 다짐은 했으나 속속들이 골병이 든 쇠잔한 몸 때문에 용기가 안난 그는 집에 돌아와서 조용히 소리를 닦아 나갔습니다. 소리꾼의 길에 들어 선 사람이 흥행무대를 외면하고 정통 판소리의 길을 지켜가려니 그 고생이야 뻔한 노릇이었습니다.

“한 번은 서울에 장영찬이를 만나러 갔다가 소리 좋아하는 부자가 내 소리를 듣고 싶어한다고 히서 갔지. 소리를 하고 났더니 탄복을 하고 광주서 뭐하냐고 묻대.
'공부해요.' 그랬더니 '벌이가 없을텐데 어떻게 공부를 하지요?' 그래. '밀가루 한 푸대 사다 놓고 수제비 끓여 먹고 공부해요.' 그랬더니 옷 한 벌 맞추고 밀가루 몇 푸대 사라고 돈을 주대.
그래 내가 화를 벌컥 내면서 '그런 소리 마시오. 내가 소리 들려주고 남한티 돈 몇 푼 구걸하는 사람으로 보이오? 그런 소리 말고 인연이 닿아서 만났으니 즐겁게 놀고 헤어집시다.' 그러고 나서 그 사람 하고 며칠 동안을 밤낮없이 놀고 내려왔어.”

그토록 오기가 세고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인기 얻는 일에나 돈 버는 일에는 성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판소리의 공력은 누구보다 깊어져서 웬만큼 실력 있는 명창도 그 앞에서는 함부로 소리를 하지 못할 만큼 실력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의 소리는 소리의 맛이 깊고, 가운데에서 밀어 올리는 소리가 멋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늘게 뽑아 올리는 소리에는 미묘한 가락이 나오고, 특히 입 안에서 돌려내는 아구성이 변화무쌍하고 옛맛을 가장 많이 지닌 명창으로 인정받습니다.



그 뒤 서울로 올라 온 그는 1980년에 판소리 「적벽가」의 인간문화재로 지정 받게 되었습니다.

“판소리 허는 것은 팔자속이여. 타고 나야 돼. 지가 지 소리에 반해가지고 죽자 사자 소리를 허면 득음이 되고, 꿈에도 바라던 소리가 목에서 튀어 나오면 부귀공명이 문제가 아니여.
그러게 옛날에 아편 하시던 어떤 분이 '나는 약으로 아편쟁이인데 너는 소리로 아편쟁이로구나' 하고 말하더군. 그만큼 미쳐야 돼. 그리고 소리꾼도 여러 가지여. 돈만 주면 아무디나 가서 소리허는 놈 있고, 배가 고파 굶어 죽어도 안 헐디서는 소리 안 허는 놈이 있어. 또 소리를 못 쓰게 허는 놈은 인간성도 안 좋고, 소리를 잘 허는 놈은 인간성부터가 돼먹었어.
제자들을 가르쳐봐도 이것으로 목매달고 배우는 놈이 없어. 전부 벼슬허고 돈 벌라고 허지. 인기가 없고 돈도 못 버는 판소리를 누가 헐라고 헐 것이여. 우리같이 미친 사람들이나 허지 다른 사람은 못 혀. 국악이 우리 대까지는 근근히 연명이 되었는디, 우리가 가고 나면 아마 끝나고 말 거여.”

이처럼 국악의 현실에 대해 매섭고 분노에 찬 말을 서슴없이 토해내던 그의 판소리에 대한 오기와 고집은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공감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올 1월에 돌아가신 그의 오기와 고집이 후학들의 가슴에 오래오래 살아 남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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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 땅이라고 하면 누구나 춘향이를 떠올리거나 판소리를 떠올릴 것입니다.

실제로 남원군은 국악의 본거지라 할 만큼 수많은 명인명창을 길러냈습니다.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에서 태어나 판소리의 중시조로 일컬어지며 ‘가왕’이란 칭호로써 판소리계 최고 명창으로 떠받들어지는 송흥록 명창,
그의 아들 송우룡 명창,
송우룡의 아들로써 일제시대 판소리계의 왕자로서 일세를 울리다 간 송만갑 명창,
남원군 수지면에서 태어나 송만갑과 함께 일제시대에 이름을 떨친 유성준 명창,
유성준과 송만갑의 제자인 김정문 명창,
남원시에서 1900년에 태어나 여자 명창으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 간 이화중선 명창과 그의 동생 이중선 명창,
운봉면 화수리에서 1915년에 태어나 최고의 여자 명창 중 한 명으로 활약했으며 저의 스승이기도 한 박초월 명창 등등.......


모두가 남원 땅에서 태어난 명창들입니다.

남원에 있는 광한루. 출처 : http://www.lsphoto.co.kr/%3Fdocument_srl%3D616

이밖에도 많은 명인명창들이 일제시대인 1921년에 광한루 안에 세워진 <남원권번>에서 판소리나 시조나 가야금이나 춤 등을 배우고 가르치며 활동했습니다.

남원권번은 그후 일본 경찰의 강압으로 광한루 밖으로 쫒겨 나 민가에서 국악교습소 노릇을 해오다가, 1977년 11월에 광한루 건너 요천 곁의 금암산 기슭에 아담한 한옥을 세워 <남원국악원>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새롭게 증축된 남원 <국립민속국악원> 출처 : http://korean.visitkorea.or.kr/kor/ti/e...6cat2%3D

강도근 명창은 1973년에 남원국악원 창악 강사로 자리를 잡은 뒤, 1996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오로지 이곳에서 제자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살아 온 남원 판소리계의 기둥입니다.

1918년에 남원시 향교동에서 강원종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농사일에 재미를 붙이며 열심히 땅을 가는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는 틈틈이 귀동냥으로 얻어 들은 농부가나 판소리 가락을 흥얼거리면 주위에서 ‘얼씨구 절씨구’ 하며 목이 좋고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그 재주를 썩히기 아까우니 정식으로 소리공부를 하라고 주위에서 자꾸 권하는 통에 17살이 되었을 무렵, 주천면에 살고 있던 김정문 명창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김정문 명창의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2년쯤 공부를 했습니다.

“한 2년 공부허다가 선생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어. 젊은 나이에 심장마빈가 뭔가로 돌아가셨어. 그래 집에 돌아와 있다가 20살쯤 되었을 때 서울에 올라가서 조선 성악 연구회에 갔지.
그곳에서 송만갑 선생님헌티 소리공부를 했지. 김정문 선생이 그 양반 제자였기 땜시로 나도 당연히 그 양반한티 배워야 헌다고 생각헌 거여. 그런디 그때 선생님이 일흔 일곱 살인가 되셨으니 몸이 불편하셔서 잘 안 나와. 그런디 공부헌지 얼마 안돼서 선생님이 또 돌아가셨어.
그래서 구레 사는 박만조씨가 수십 년 동안 송만갑 선생님허고 사귀면서 그 사설이나 가락을 알고 계시기 땜시 그분한티 찾아가서 조금 배우고, 전라도 광양 땅에 이진영씨가 송만갑 선생한티 공부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서 조금 배웠어. 아무튼지 죽어도 동편 소리가 좋다허고 동편만 찾었으니께.”

그가 그토록 애타게 찾은 동편 소리는 송흥록으로부터 시작해서 송우룡과 송만갑을 거쳐 내려오는 송씨 집안의 소리로 그들이 전라도의 동쪽 지방인 구례나 남원에서 살았기 때문에 ‘동편제’라고 불리는 소릿제입니다. ‘서편제’가 장단의 변화가 많고 섬세하고 기교가 풍부한데 견주어서, 동편제는 장단이 똑똑 떨어지고 웅장하고 단순 소박한 것을 특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열심으로 공부를 하는 판인디, 어느날 갑자기 목소리가 변했어. 장가 가기 전이라 전부터 나를 좋아하던 여자하고 딱 하룻밤 잤는디, 그 이튿날 소리를 해보닝께 뒤통수에 무거운 돌을 매단 것 같고 목이 갈려서 독아지 깨지는 소리가 나.”

여자하고 딱 하룻밤 잔 것 때문에 목이 상했다는 것은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남자 명창들이 젊었을 때 목이 상해서 고생한 경험을 얘기하는데, 그 원인이 거의 여자 아니면 술인 것으로 보아 젊은 시절에 정력을 함부로 낭비하는 것이 소리하는 데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남자는 사춘기를 벗어나면 어떻든 목이 갈려서 소리가 변하게 되어 있어. 그렇게 갈라져서 안 나오기가 십 년이 가. 그 재난을 이기고 뚫고 올라오지를 못해. 목이 안 나오니 생활은 안돼. 애는 터지고 부아가 나서 견딜 수가 없으니 술이나 퍼 먹고 좌절해 버려. 어렸을 때 명창 소리 들은 것 다 소용없고, 남들이 비웃기나 허고, 앞날은 암담허고.....나는 이십 년간 그 고생을 견뎠어. 없어진 소리를 되찾을라고 말도 못헐 고생을 혔지.”

그는 지리산 밑에 있는 쌍계사나 순천의 선암사나 남원산성 같은 곳에 가서 죽어라고 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전 같은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창극 단체에도 잠깐 몸을 담았는데 인기 있는 선배 명창들의 뒷바라지나 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울적한 세월을 2년쯤 보낸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버렸습니다. 그 뒤 해방이 되고서도 여기 저기 창극단에 끼어 공연을 하곤 했지만, 일만 끝나면 부지런히 공향에 내려오곤 했습니다.

“창극단을 따라 다니면서도 농사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어. 내가 본시 농사꾼이라 일허는 것이 좋아. 남들은 일허기 싫어서 소리헌답시고 건달처럼 지내는디 나는 밭에서 지게 지고 하루 종일 일허고 나면 몸이 개운허고 기분이 좋아. 그렁게 판소리허는 사람들도 모두 다 알아. 저 사람은 소리허는 것보다 농사를 더 좋아허는 사람이다 그렇게 알아 버려.”

이렇듯 생활에 튼튼한 뿌리를 내린 명창이기 때문에 그의 판소리는 건강한 생활에서 오는 소박함과 강인함이 특징입니다.

“나는 서울 사람들허고 판이 달러. 그 사람들은 창이면 창, 연극이면 연극으로 먹고 살아야것다 허고 나선 사람들이지만 나는 내 손으로 농사지어서 먹고 살어. 그것이 나는 좋아. 서울 사람들이 촌놈이라고 비웃어도 나는 오히려 그 사람들을 비웃네. 나는 돈을 싸줌서 서울서 살라고 혀도 못 살어. 그리고 서울 가면 사람이 버려. 옛날에도 멀쩡한 청년들이 소리헌다고 서울 가서는 게집질에 술에 아편에 몸버린 사람 많았어. 그러니 우리는 촌에서 농사 짓고 사는 게 마음 편하고 좋아.”

이렇듯 도도하게 땅을 지키며 소리를 다듬어 온 그는 차츰차츰 목소리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나이 마흔이 넘었을 때 비로소 고음과 저음을 마음대로 구사하고 몇 시간을 계속해서 소리해도 목소리가 변하지 않는 ‘득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약간 쉰 듯한 수리성인 그의 목소리는 가늘고 단단하며 고음이 강하고 튼튼합니다. 특히 그의 음질은 옛날 송만갑 명창의 음질을 많이 닮았고, 기교를 부리지 않고 통성으로 뽑아 냄으로써 동편제 소리의 특성을 가장 잘 전해 준다고 평가받습니다.

어쨌든 그는 서울 사는 소리꾼에게서는 보기 드문 고집과 힘을 지니고 있는 느낌을 주는데, 이는 오로지 돈과 출세와 인기와 명예를 멀리 떠난 그의 튼튼한 생활 덕분이라 하겠습니다.

“그 전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논에서 살았는디 나이가 등게 그것도 맘대로 안돼. 인제는 일허는 것이 힘이 들어. 거기다가 여기 국악원에 애들이 워낙 많어. 그애들 가르치다가 하루해가 다 가버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찾아 오는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그의 목은 하루도 쉴 날이 없었습니다.

국민학생에서부터 고등학생까지 하루에 쉰 명쯤 되는 제자들은 그의 덕으로 전국에서 벌어지는 학생 국악경연대회는 모조리 휩쓸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갖춘 ‘무서운 아이들’로 성장했습니다.

그동안 국악에 끼친 공로로 ‘한국국악협회 공로상’(1981), ‘남원시민의상 문화상’(1985), ‘KBS국악대상’(1986), ‘자랑스러운 전북인의 상 대상’(1988) 등을 수상하였으며 198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의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30여 년 동안에 수백 명의 문하생을 길러냈습니다. 안숙선, 오갑순, 성우향, 김정숙, 한농선, 홍성덕, 강정흥, 전인삼 등 명창과 많은 국악인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습니다. 고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꼬박 학생과 마주 앉아 직접 북장단을 치면서 목청을 돋구고, 소리 하나하나를 일일이 교정해주었습니다

“서울서는 소리 가르치는디 5만 원도 받고 10만 원도 받는다고 허는디 그것 몹쓸 일이여. 소리공부 허는 학생치고 부잣집 애들이 없는디 누가 그렇게 많은 돈을 내고 공부를 허것어. 여그서도 국악원을 운영허느라고 7,8천 원씩 받고 있지만 소리는 돈 안 받고 가르쳐야 돼. 선생 먹고 살 것은 정부에서 보조해 주고, 제자들은 무료로 정성껏 길러내야 앞으로 국악이 발전허게 돼.”

앞으로 남원에서 명창이 나오게 된다면 이는 오로지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소리는 돈 안 받고 가르쳐야 된다고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를 하다가 돌아가신 고집스럽고 꿋꿋한 스승의 덕일 것입니다.

강도근 명창의 후계자 전인삼 명창. 출처 : http://www.postech.ac.kr/k/student/cult...ex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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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민요 <강강술래>를 잘 부른 김길임 명창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예전에 정월대보름이나 팔월 추석날이 되면, 동네 여자들이 모두 모여 손에 손을 마주 잡고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돌면서 <강강술래> 노래를 불렀습니다. 

출처 : http://ask.nate.com/qna/view.html%3Fn%3D8205333

이 노래는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전해져 왔지만, 특히 전라도의 남쪽 해안 지방에는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옛날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여그 우수영 앞에 있는 울돌목 바다에서 왜놈들 허고 싸울 적에, 싸울 사람이 없응께 허수애비를 만들어서 진도 앞 산에다 세워 놓고 강강술래처럼 손 잡고 빙빙 돌게 했디야. 시방은 진도대교를 놓니라고 울돌목 여울을 매웠는디, 옛날에는 소용돌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배가 지나갔다 허먼 물속으로 들어가버링께 그리서 임진왜란서 이순신 장군이 이겼대야.”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 선두리에서 1927년에 태어난 김길임 명창은 어려서부터 울돌목에 얽힌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 끝에 불리워지는 <강강술래>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가난한 농부 김대표씨의 8남매 중에서 맏딸로 태어난 그녀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어려서부터 물 긷고, 빨래하고, 방아찧고, 밥하고, 동생들 보살피느라고 초등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 고생이야 말도 못하지라. 우수영 장에 오먼 물도 못 얻어 먹는다는 말이 있을만큼 물이 귀히서, 우물 밑에 조금씩 괴는 물을 뜰라고 우물 밑에 내려가서 바가지로 닥닥 훑어서 떠갖고는 갖다 붓고 갖다 붓고 허기를 밤새도록 힜응께. 겨울이먼 손이 꽁꽁 얼고 얼굴에 고드름이 허옇게 매달링게, 어린 것이 얼마나 추웠겄어.”

그렇게 고달픈 생활 속의 유일한 낙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노래를 잘 불러서 <육자배기>나 <아리랑 타령>이나 <강강술래>를 아기 때부터 흥얼거릴 수 있었고, 또 “어매 태겨서” 곧 어머니를 닮아서 목소리가 곱고 구성지게 잘 불렀기 때문에 길임이 처녀가 노래를 부르기만 하면 사람들이 몰려 들어 “잘한다”, “한 번 더 해라”, 추켜 세우는 통에 재미가 나서 자꾸자꾸 불렀습니다.

특히 정월대보름이나 팔월 추석이나 단옷날 같은 명절 때면 마을 처녀 중에서 제일 인기있는 가수 노릇을 톡톡히 했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북을 잘 치시고, 어머니는 노래를 잘 부르시고, 큰오빠허고 작은 오빠는 장구도 잘 치고 노래도 잘 히서 당골네 가족이라고들 힜어. 나도 별나게 노래를 잘헌다고들 혔는디 아버지가 무서워서 집에서는 노래를 못 힜지. 그려도 친구들허고 모여서 놀 때는 신나게 불러 버맀어.”

출처 : http://opentory.joins.com/index.php/%25...59E%2598

달 떠온다 달 떠온다
동해 동창에 달 떠온다
저 달이 뉘 달이냐
강호방네 달이로다
강호방은 어디 가고
저 달 뜬 줄을 모르는가

하는 가사를 길임이 처녀가 처량한 곡조에 얹어 '늦은 중머리'로 길게 내뽑으면 동네 처녀들이 달을 바라보며 손을 잡고 천천히 움직이면서 “강강술래 강강술래”하고 받습니다.

양에 양에 양임이는
시집 가던 사흘만에
바느질을 하라 하여
겨와 기름 불을 켜고
섶뉘비고 짚뉘비고
아랫강에 개가 짓고
건너강에 닭이 울어
잠이 와서 잠잤더니
시아버지 호령소리
시어머니 기침소리
에라 이거 못 살것네

하며 시집살이를 한탄하는 가사를 조금 빠른 '중중머리'로 '낭창낭창' 부르면 처녀들과 갓 시집 간 새댁들이 '나붓나붓' 걸어가면서 “강강술래 강강술래‘하고 후렴을 받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andongb/Mvql/143?docid=18pnN|Mvql|143|20080912204712

뛰어보세 뛰어보세
억신억신 뛰어보세
높은 마당 깊어지고
깊은 마당 얕어지네
억신억신 뛰어보세

하며 '자진머리'로 넘어가면 모두들 다리를 들썩이고, 어깨를 출렁이고, 댕기머리 휘날리며, 원을 그리고 빙빙 돕니다.

그러다가 “남생이 놀아라 절래 절래 놀아라“ 하고 선창하면 ’남생아 놀아라 절래 절래 잘 논다” 하고 받고,
“고사리 대사리 꺾자 너무 대사리 꺾자 유자꽁꽁 재미나 넘자 아장아장 버리여“ 하며 아장아장 걷기도 하고,
”청애 청애 엮자” 하면서 뒷사람이 앞사람 어깨를 잡고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기도 하고,
“몰자 몰자 덕석 몰자“ 하면서 덕석몰이를 하기도 하고,
허리를 보듬어 안고 ”진주 새끼 잘룩잘룩 가사리 벗이여“ 하고 노래를 부르다가 “잡았네 잡았네 진주 새끼 잡았네” 하면 앞사람이 뒷사람을 잡고 꼬리따기를 하기도 하고,
“밟자 밟자 기와를 밟자” 하면서 기와 밟는 시늉도 하고,
“가마 타세” 하면 세 사람이 손 넣고 한 사람이 그 위에 가마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놀기도 합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andongb/Mvql/143?docid=18pnN|Mvql|143|20080912204712

그러다 보면 어느 새 달이 지고 희부옇게 동이 터오곤 했습니다.

밤새도록 뛰어 놀던 처녀들은 빨갛게 상기된 볼에 웃음을 띄우고 '욱신욱신' 쑤시는 다리를 끌고 집으로 돌아와 방에 쓰러져서 단잠을 자고 난 다음, 다시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방아를 찧고 빨래를 했습니다.

빨래를 하면서는 “날씨가 좋아서 빨래를 갔더니만 모진 놈 만나서 돌베개 배었네 덩기 둥당에 둥당덩” 하고 <둥당에 타령>을 부르며 킥킥거리기도 했습니다.

방아를 찧으면서는 “에양 에양 에에야 어허 이것이 방아로구나” 하며 <방아 타령>을 부르고, 도리깨질을 할 때는 <도리깨 노래>도 부르고, 밭에서 일을 할 때는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하면서 <아리랑 타령>을 부르며 동네 처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던 길임이 처녀도 어느덧 나이가 스물이 되어 장승환이란 총각한테 시집을 가더니 남편 따라 인천으로 덜렁 떠났습니다.

“그 사람의 본 고향은 우수영인디, 목포서 자람서 배를 탔디야. 인천서도 커다란 고깃배 기관장을 혔는디, 돈은 잘 벌어다 줬어도 배 타고 나가먼 보름만에도 오고 한 달만에도 오고 바람 불먼 설 달만에도 옹께 부부 정이란 걸 통 모르고 살았어. 그러다가 삼 년 뒤에 6.25 사변을 만나서 나 혼자 친정으로 내려왔는디 나중에 들응께 인천서 죽었디야. 그렁게 시방은 그 사람 얼굴도 기억을 못혀.”

스무 살에 시집 가서 3년만에 청상과부가 된 '노래 잘부르는 길임이'는 다시 친정에서 빨래하고, 방아 찧고, 물 긷고, 밭일을 하며, 노래부르고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27살이 되었을 때 오빠 친구이며 잘 생긴 홀아비인 홍준철씨를 만나 두 번째 시집을 갔습니다.

노래를 잘 부르지는 못해도 듣기는 좋아해서 임방울 명창의 레코드를 틀어 놓고 혼자 듣곤 했던 36살의 홀아비는 노래 잘부르고 일 잘하는 색시를 얻자 입이 헤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 부부에게는 근심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내가 사주에 무자식이 끼어서 애기를 못 낳아. 점을 치먼 남자로 태어났으먼 나라의 녹을 먹고 만 군사를 거느릴 팔잔디, 여자로 태어나서 자식도 없고 이 고생을 헌다는 거여. 우리가 자식없이 사는 게 딱했든지 큰 시숙님이 막내 아들을 양자로 들이라고 하셔서 그 놈이 아들 노릇을 허고 있지.”

한 가지 근심이 없어지고 나니 금새 또 다른 근심이 생겼습니다.

소장수를 하면서 돈을 잘 벌던 그녀의 남편은 ‘사주에 바람 풍자가 들어서’ 어딜 가나 여자가 줄줄 따랐습니다. 얼굴이 호인으로 잘 생기고 돈 잘 쓰고 놀기 좋아하는 한량을 마다하는 여자가 어디 있으며, 따라붙는 여자를 물리칠 한량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 사이에서 몸살을 앓는 건 '본각시'뿐이었습니다.

“말도 못허게 속썩었어. 그 사람이 오빠 친구만 아니라먼 당장에 나가버맀을 거여. 오빠 위신, 친정 체면 땜시 꾹꾹 참았어. 한 번은 한 바탕 싸우고 나가버린다고 무조건 집을 나왔는디 차부에 나옹께 갈 디가 있어야지. 친정에 갈 수도 없고 히서 셋째 동서네 집에 가서 하소연만 허다가 할 수 없이 돌아와 부렀어. 그리서 내가 시방도 조카들더러 신랑 잘 생긴 사람 얻지 말라고 혀.”

그러면서도 신랑 성질이 불 같아서 그렇지 싸우고 나면 금방 풀어지니까 지금까지 살았노라고 웃으며 얘기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잘 생긴 신랑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순박함이 어려 있었습니다. 남편 이야기를 하면서 가끔씩 수줍어하기도 하고 볼이 빨개지기도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저는 나이가 들었어도 처녀티가 나는 '만 년 처녀' 모습을 봤습니다. 

그렇게 속을 썩여 가면서도 때로는 오순도순 정도 나누고, 장이 열리는 날이면 집에다 주막을 만들어 술도 팔고, 친아들만큼이나 귀여운 양아들을 키우며 사느라 한 동안 노래를 잊고 살던 그녀에게 뜻밖에 다시 노래를 부를 기회가 왔습니다.

38살이 된 1965년에 볼일이 있어서 큰집에 갔다가 마침 서울에서 문화재 위원들이 <강강술래>를 할 줄 아는 아주머니들을 서른 명쯤 모아 놓고 녹음을 시켜가면서 조사를 하는 자리에 끼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뭣 때문에 그러는지도 모르고 자꾸 권하는 통에 아는 노래를 모두 불렀습니다.

그러고 난 지 얼마 뒤에 시숙님이 말하기를, “제수씨, 문화재 된다우”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문화재가 뭣이다요?”
“임방울씨나 이런 양반은 노래를 잘 불러서 문화재로 이름을 남기고 간다 안합디여? 제수씨가 인자 그런 사람이 되는 거다요.”
“오매, 내가 으떻게 임방울씨처럼 된다요?”

임방울씨라 하면 어렸을 때 ‘협률사’라는 창극단이 포장 치고 공연을 할 때 진도까지 걸어가서 포장을 들치고 몰래 숨어 들어가 <춘향전>이나 <장화홍련전> 같은 창극을 보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에 송만갑이나 임방울 같은 명창의 노래는 소녀의 가슴에 깊이 파고 들어 “부모만 안 무서웠으면 그런디로 따라 댕길” 생각도 할만큼 흠뻑 빠진 적이 있지만, 자기가 그런 명창과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는 그때 모였던 다른 아주머니들을 제치고 제일 어린 나이로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 <강강술래> 예능보유자가 되었습니다.

문화재가 뭔지도 몰랐던 그녀는 처음에는 귀찮기만 했습니다. 밭에서 일하면 면에서 사이드 카 타고 와서 말 시키고, 사진 찍고, 노래 불러보라고 하며 퍽도 귀찮게 굴었습니다. 한 3년간을 “돈도 안 줌서” 귀찮게 굴더니, 드디어 40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돈 만 원이 나왔습니다.

“돈이 나옹께 우리집 양반이 면장님이나 시숙님한티 점심이나 한끼 잘 대접허라고 하셔서 면장님한테 찾아갔더니 깜짝 놀라시며 이 돈은 그런디다 쓰면 안된다고 바람직하게 쓰시라고 허시는 거여. 그리서 우리집 양반을 드맀더니 목포 가서 서 돈짜리 반지 사고, 내 여름 옷 한 벌 사고, 여비 쓰고 돌아오셨대. 그리서 우리집 양반은 시방도 그 반지를 껴.”

난생 처음 받아 본 나랏돈이 그리도 기뻤던지 그녀는 퍽도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 뒤로 꼬박꼬박 돈이 나오고, 사람들 대우도 달라지고, 제자들 가르치라고 연수비도 나왔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군에서 행사가 있을 때 나가서 소리를 하자니 집에서 하던 술장사는 자연히 때려치우게 됐습니다. 그뒤 대전에서 열렸던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우수영 농요>로 나가서 국무총리 상을 받고, 진주에서 벌어진 전국 민속경연대회에서 대통령 상을 탄 뒤로 해남 우수영의 <강강술래>와 <농요>는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디 내가 마흔 두살 때 간이랑 쓸개에 병이 들어서 대수술을 두 번이나 했어. 그리서 그런 대회에 나갈 때는 몸이 안 좋아서 제자가 앞소리를 허고 나는 받는 소리만 혔지. 그 뒤로 몸이 좋아지기는 혔지만 인자 나이가 들응께 힘이 부쳐서 제자들 갈치기만 허지 내가 직접 소리는 안 혀.”

그녀는 해남이나 진도를 왔다갔다 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군민의 날이나 전라남도 문화재가 열릴 때 제자들을 데리고 나가 소리를 하는 것 말고는 평소 살던대로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밭에 나가 일을 했습니다.

다만 옛날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그런 행사 때가 아니면 좀체로 일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월대보름이나 팔월 추석날이 되어도 사람들이 모여서 풍물을 치고 푸짐하게 놀지도 않고, 강강술래를 부르며 놀던 처녀들은 모두 서울로 떠나고 없으니 빈 달만 적막하게 동산에 걸려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디 민요는 백성들의 일과 놀이를 더욱 풍요롭고 건강하게 해주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노래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삶도 변했고, 일의 성질도 변했고, 노는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그러다보니 민요는 삶의 노래가 아닌 행사의 노래로 변하고 말았고, 백성들의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노래가 되고 말았습니다.

꽃 다운 나이에 한복 곱게 차려 입고 나붓나붓 춤을 추며 강강수월래를 부르던 '만 년 처녀' 김길임 명창. 그녀는 옛날의 처녀 시절을 그리워하다가 1999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와 함께 달빛 아래 신비롭게 펼쳐지던 여인들의 풍요롭고 아름다운 노래들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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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에 심취해 있던 대학 3학년 시절, 인사동의 고서점에서 우연히 정노식의「조선창극사」를 샀습니다.



그때는 우연히 보고 샀는데, 알고보니 판소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필독서인지라 지금까지 제 인생의 반려가 되어 준 소중한 책입니다. 

저자인 정노식은 누구일까요?

정노식(1891년~1965년) :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문학부를 졸업했으며,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3·1운동에 참여하여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 창립에 관여했다.

1946년 12월 남조선노동당 중앙본부 중앙위원으로 있다가, 1948년 월북해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노동당 중앙검사위원, 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 등을 지냈다.

저서로 〈조선창극사〉(1940)가 있는데, 이는 최초의 본격적인 판소리 저술로 꼽힌다. 〈조선창극사〉는 총 89명의 창자와 고수 1명, 그리고 신재효에 관한 약전(略傳) 등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 책에는 송만갑·이동백·전도성·김창룡·정정렬 등의 구술을 기록했고, 그밖에 판소리 관계 문헌, 조(調), 대가닥(制), 판소리의 기원 등에 관한 견해도 실려 있다.

-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그 당시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고,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한 독립운동가였던 저자는 어찌된 인연인지 몰라도 판소리와의 열렬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분노와 애정을 동반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머릿말에서 광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조선 사람이 광대의 소리는 좋아하면서
광대의 인격은 천대 멸시하는 현실에 분개하고.....
광대소리야말로 조선인의 심상이 들어 있는 소리요,
광대들이야말로 당당한 예술가이어늘 천대를 받아 왔으니
이제야말로 그 관념을 시정하여서
광대의 예술가적 가치와 사회적 위치를 모두 인식할 때다.


기생, 광대에 대한 편견이 시퍼렇던 일제초기에 일본유학을 갔다 온 지식인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와 비슷한 신분의 학자들이 광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예를 들어볼까요?

조선후기 실학의 대가이며, 수많은 후학들에게 존경받는 대학자인 다산 정약용은 정조에게 보낸 상소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광대가 봄과 여름이면 고기잡이를 좇아 어촌으로 모여들고,
가을과 겨울이면 추수를 바라고 농촌으로 쏠리는데,
특히 창촌에서는 사당, 창기, 주파, 화랑, 악공 등의 잡류들을 엄금해야 합니다.


정노식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일제시대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소개된 육당 최남선의 말씀입니다.


조선조의 재인, 광대들은
적극적으로 특별한 권장을 입지 못하고
무식, 무기력한 예인들이
사회 최하층적 지위에서 구차히 존속하다 보니까
거기 쇠잔이 있을 뿐이고 발달이 없으며
저락이 거듭될 뿐이지 향상을 볼 수 없음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조건 하에 있다 보니까
수천년을 하루같이 몸을 놀리는 기술과 우스개 놀이 쯤에 그치고
드디어 '다른 데만한'(필자 주 : 서양을 말합니다.) 
순희곡적 생장을 이루지 못하고 만 것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루바삐 그 방법을 개량하여
서구의 예술을 익히면
외국 사람들에게도 조소를 면하리라.


 


이러한 편견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던 그 시대에, 광대들에 대한 천대와 멸시에 분개한 저자는 무한한 애정을 담아 이 책을 쓴 것입니다.

그는 판소리 광대들을 찾아 여러 지방으로 여행도 하고, 생존한 광대나 나이 든 노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채집했습니다.

1940년에 출간된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판소리와 관련된 조선시대 선비들의 시와 기록, 판소리의 유래, 창법의 음악적 특징, '동편제'와 '서편제'의 유래 등이 설명됩니다.

후반부에서는 별처럼 빛나는 수많은 명창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아름다운 로맨스,
소리 공부를 반대하는 집안과의 목숨을 건 투쟁,
광대라고 천대하는 사회의 편견에 대한 반항,
소리 공부를 하는 동안의 눈물겨운 고생,
명창들의 출신과 판소리에 입문하게 된 사연,
스승으로부터 전수 받은 내용,
특기로 잘했다는 대목에 대한 소개 등......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 보따리들을 잔뜩 풀어놓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의 대부분이 명창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현장감이 풍부하고 매우 드라마틱합니다.

그 후에 씌어진 판소리에 대한 많은 연구 서적들은 거의 모두 이 책의 내용을 기초로 수정 보완된 것들이기 때문에, 판소리에 대한 자료가 필요할 때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서편제」의 시나리오를 쓸 무렵, 제 머리 속에는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명창들의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그 이야기들이 시나리오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특히 다 쓰러져가는 움막에서 소리꾼 유봉이 <옥중가>에 나오는 '귀곡성'을 가르치다가, 자기 딸 송화에게 얘기하는 다음 대사는 전적으로 이 책에서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옛날 송 흥록이란 명창은 이 귀신소리를 어찌나 잘 불렀는지 밤에 이 대목을 하니까 바람이 불어서 촛불이 꺼졌단다.....


삼십여년이 넘는 세월을 제 서가에서 함께 살아 온 이 책은, 지금도 제게 명창의 혼령들과 교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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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스승의 날만 되면 특별히 떠오르는 스승이 계십니다. 바로 저의 판소리 스승인 박초월 명창이십니다.                       .

박초월 스승과의 만남은 제가 대학교 3학년 학생이던 때였습니다.

눈이 펑펑 내리던 초겨울 어느 날, 군대 갔다가 휴가 나온 친구와 함께 비원 쪽으로 터덜터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다가 친구가 길가에 멈춰 서더니 간판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박초월 국악 전습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건물 4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친구는 김제에 있는 국악원에서 판소리를 조금 배웠고, 저는 그 친구 덕에 난생 처음 판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어 판소리에 심취해 있었기에 무조건 올라간 겁니다. 

북소리와 소녀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학원의 현관문을 기세 좋게 열고 들어간 친구가 
판소리를 몇 달 배웠다는 둥 너스레를 떨자 중년 남자 한 분이 북을 차고앉으면서 “소리를 배웠다니 한번 들어 보자”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당대 최고의 남자 명창이던 조상현씨였습니다.

친구는 김제에서 배웠던 '단가' 한 대목을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나니 소파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쉰 목소리로 하하거리고 웃었고, 소녀들도 킥킥거리고 웃었습니다. 친구는 본래 음치인데다가 박치까지 겸했으니 그럴 만도 했지요.

소파에 앉아서 웃던 할머니가 저를 가리키며 “저 사람도 소리 한번 들어 보자.”고 했습니다. 저는 얼굴을 붉히며 “저는 저 친구가 배우는 걸 구경만 해서 한 마디도 부를 줄 모릅니다.” 했습니다. 그러자 “소리를 배우러 왔다니 오늘부터 배워 보시게.”하면서 직접 북 앞에 앉으시는 거였습니다.

박초월 스승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박초월 명창(1917~1983). 호 미산. 본명 박삼순. <수궁가> 인간문화재.
김소희, 박녹주 명창과 함께 1930~1970년대 한국 여성 판소리계를 대표한 3대 여류명창 중 한 명이다. 
현재의 대표적인 남성 명창인 조통달은 박초월 명창의 조카이고, 가수 조관우는 조통달 명창의 아들이니 명창의 피가 손자인 조관우에게 이어졌다.

                   박초월 명창의 외손자인  가수 조관우.


저는 그날부터 열심히 학원에 다녔고, 친구는 저의 한 달분 수업료 6천원을 대신 내주고는 군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지 한 달 뒤에 수업료 낼 돈이 없어서 학원을 다니지 못하겠다고 하자, 선생님이 웃으며 그냥 다니라고 하셨습니다.

“자네는 서울대학교 학생이잖여...”

선생님이 말씀하신 학원비 면제 이유였습니다. 게다가 자취방도 없이 여기저기 기숙을 하며 보내던 제 딱한 사정을 아신 선생님은 크리스마스가 되자 목도리와 장갑을 선물로 주시며, 잠자리가 마땅찮으면 학원에서 자라고 하셨습니다. 오갈 데 없던 처지였던 저는 며칠 뒤부터 학원에서 잠을 잤습니다.

70년대의 대학가는 서구의 히피 문화가 휩쓸었던 때입니다. 장발에 청바지와 통기타와 미니스커트가 유행했습니다. 그런 문화적 분위기에서 살았던 제가 미쳐도 한참 미치고,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습니다.

대학교 졸업생이 학교는 안 가고 판소리 학원에서 먹고 자고, 선생님이 아침 일찍 싸들고 오시는 아침밥을 얻어 먹고, 하루 종일 전화 받고, 노래 가사도 써 주고, 학원생들 판소리 배울 때 같이 배우고, 학원생들 다 가고 나면 걸레질하고 소파에서 잠을 잤습니다. 참으로 괴상한, 그러나 너무도 행복한 나날들이었습니다.

밤에 잠이 안 오면 학원 창문 밖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단성사> 영화관의 화려한 영화 간판과 네온사인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는데, 십오 년쯤 뒤에 제가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한 「서편제」의 간판이 그 곳에 걸릴 줄 어찌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러다가 선생님의 외아들이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지자, 아예 서대문구 불광동에 있는 선생님 댁에 가정교사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아들의 공부를 가르쳐 주고, 선생님은 제게 노래를 가르쳐 주는 교환(?)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북도 칠 줄 모르는 초보 제자에게 한복을 입히고 집 마당에 병풍 치고 찍은 기념 사진.


선생님은 새벽 다섯 시면 불광산으로 아침 등산을 가는 게 첫 일과였습니다. 그때 집에는 전남 순천에서 소리를 배우러 올라온 예쁜 꼬마 국민학교 소녀가 있어서 함께 가곤 했지요.

우리는 산에 올라가 선생님을 따라서 발성 연습을 하고, 시조로 목을 풀기도 하고, 낮에 배웠던 대목 중에서 잘 안 되는 부분을 반복해서 연습하고 교정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참 하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몸도 가벼워져서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정이 많은 성격이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무한정으로 정을 쏟는 성격이었지요. 그중에서도 제게 쏟는 정은 무척 각별했어요. 마치 아들에게 하듯이 먹는 것 입는 것 모두를 챙겨 주고, 제가 외출을 할 때면 용돈까지 주시곤 했습니다.

게다가 소리 공부도 어찌나 극성스럽게 시키는지 다른 제자들이 질투할 정도였습니다. 또 제자 중에 대학을 나온 ‘선비’가 있다는 게 그렇게도 자랑스러운지 공연을 하러 가시거나, 방송국에 가시거나, 국악인들의 모임이 있을 때면 꼭 저를 데리고 가서 인사를 시키곤 하셨습니다.

그러한 선생님의 사랑 덕분에 저는 평생을 판소리에 몸담아 온 예술가의 겉과 속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책이나 이론적인 가르침을 통해서는 깨달을 수 없는,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광대의 삶에 대해서도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같은 스승 박초월 명창


선생님은 제자들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 피우는 걸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물론 성대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오랜 무대 생활의 체험으로 광대에게는 무엇보다 절제가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때로 옛날에 함께 판소리를 했던 사람들 중에 술이나 아편으로 폐인이 된 사람이 많았다는 얘기를 하시면서 술·담배에 절어 있으면 절대 명창이 될 수 없다고하셨습니다.

또 남녀 간의 이성 관계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하신 편이었습니다.

“사내는 계집 조심하고, 계집은 사내 조심해야 돼.”

옛날 선생님들은 제자가 방탕한 행동을 하면 여지없이 파문해버렸다는 말씀도 종종 하시곤 했습니다.

또 평상시의 몸가짐에서도 오랫동안 혼자 사시느라 그랬는지 무척 까다롭고 가리시는 게 많아 사람을 가려서 사귀는 편이었고, 약속 시간은 철저하게 지키셨습니다.

또 소리꾼이 술 몇 잔 얻어먹거나, 돈 몇 푼에 팔려서 취객의 흥을 돋우는 것은 옛날 얘기지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술자리나 잔칫집에서 노래 부르는 걸 철저하게 금하셨습니다.

그런 성격이셨으니 공연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지병인 당뇨병으로 고생하신 지 십 년도 넘었던 터라 평상시에도 건강을 위해서 세심하게 신경을 쓰시는 편이었지만, 공연 날짜가 확정되면 그날부터 집안은 초긴장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보약을 지어서 달여 먹거나 끼니때마다 몸의 기운을 돋워 주는 음식들을 정성스럽게 드시고, 사람과의 만남도 줄이고, 등산길에 체조도 하고, 발성 연습도 더욱 공들여 하십니다.

또 될 수 있으면 집안일에 신경을 덜 쓰고, 공연에만 정신을 집중하려 하십니다. 자신의 허약한 건강 상태를 극복하고 무대에서 최상의 판소리를 부르려는 선생님의 눈물겨운 노력을 보면서 나는 종종 숙연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는 동안, 제게는 새로운 음악 세계를 탐험하는 행복과 함께 힘겨운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차라리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더욱 빨리 판소리의 창법을 익힐 수 있었으련만, 노래만 하려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벨칸토 식 발성기관 때문에 호되게 고생했습니다.

그 시기의 저는 발성법뿐 아니라 그 동안 내가 쌓아왔던 음악에 대한 감각의 대수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탐험에 따른 고통치고는 정말 혹독한 시련의 세월이었습니다.

그 무렵의 저를 가장 괴롭힌 문제는 오페라와 판소리의 음악성에 대한 비교의 문제였습니다.

저는 판소리가 우리 것이기 때문에 좋아한 것이 아니고, 음악적으로 저를 끌어당겼기 때문에 좋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음악적 깊이와 표현력은 오페라와 견주어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판소리를 공부하면 할수록 타당한 생각으로 굳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판소리를 둘러 싼 외적 여건은 그런 생각을 증명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게 현실이었습니다.

판소리를 하는 성악가의 절대 부족,
그 성악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 공간의 열악함,
성악가를 좋아하는 팬들의 고령화와 절대적 감소추세,
새로운 판소리를 작곡할 수 있는 작가와 작곡자, 연출가의 빈곤함,
음반화에 필수적인 전문 기획자와 녹음 기사의 부족,
이 모든 조건에서 판소리는 오페라와 경쟁하기에는 너무도 척박한 환경에서 악전고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악전고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오페라나 서양 음악을 몰랐더라면 하지 않았을 고민으로 저는 오랫동안 끙끙대며 가슴앓이 했습니다.

저는 기초적인 민요나 단가를 배운 뒤,「흥보가」「수궁가」를 공부하고 있던 때라 공부에 대한 의욕은 대단했지만 연극일에 쫒겨서 가는 날보다 못 가는 날이 갈수록 많아졌습니다.

그 무렵 선생님은 무척 적적하고 쓸쓸해 하셨습니다. 당뇨병 증세가 심해지고 갈수록 건강이 나빠지자 아예 학원을 폐쇄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찾아오는 제자들만 가르치니, 제자 기다리고 가르치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었습니다.

또 공연 요청도 갈수록 줄어들어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잊혀져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싸여 무척 초조해 하셨습니다.

그 무렵 선생님은 남원군 운봉 땅에서 살 무렵, 아버지한테 지게작대기로 얻어 맞으면서도 판소리에 미쳤던 시절의 이야기를 종종 하시곤 하셨습니다.

집안에 기생이 나올까 걱정이 태산이셨던 아버님은 14살도 안 된 딸을 부잣집에 시집 보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첫날 밤도 치르지 않고 시집에서 도망 나와 남원 권번에 들어 가 판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에 서 있는 동편제의 시조인 송흥록 명창(1789년 경~1863년 경)의 동상.
그 뒤에 보이는 초가집이 박초월 명창이 자랐던 소녀 시절의 집.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재 소녀 명창이란 칭찬을 듣고, 열여섯 살 무렵에는 이미 명창 대회에서 일등을 한 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레코드 취입을 하고, 일본으로 서울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던 시절의 얘기는 화려하고 재미있었습니다.

1933년에 <조선 성악 연구회>에 들어가서 이화중선과 같은 여류 명창과 함께 대표적인 여류 명창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여성 창극단이 생겼을 때는 전국을 돌면서 뛰어난 노래와 연기로 수많은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던 그 시절의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있고 때로는 눈물겹기까지 했습니다.

  요즘의 <소녀시대>만큼이나 인기를 끌며 활약하던 시절에 찍은
  박초월 명창의 엣된 모습


사랑과 미움, 만남과 헤어짐, 화려함과 비참함, 방랑과 배고픔 같은 온갖 사연들이 소용돌이친 전성기의 영광은 늙으면 늙을수록, 또 주위가 적막해질수록 더욱더 빛을 발하며 선생님의 가슴속을 비춰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 무렵의 선생님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결사적으로 항거하고 있었습니다. 고적한 방안에서 가쁜 숨을 쉬고 손을 떨며 화장을 하시고는, 언제 올지 모를 제자를 하염없이 기다리시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가면 이를 악물고 북을 치며 소리를 가르쳐 주시곤 했습니다.

                       병든 몸으로 소리를 가르치던
                       스승님의 말년의 모습.


저는 선생님의 힘들어하시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공부하는 시간을 한 시간에서 삼십분으로 줄이고, 어떤 때는 혼자서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거나, 아니면 이야기만 나누다 오곤 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굳이 문밖까지 나와 제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쓸쓸하게 서 계시곤 했습니다. 그 모습이 등에 박혀 제 걸음은 무겁기만 했지만, 집에는 또 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로 중풍의 병환이 점점 깊어가는 아버님이 계시니 안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은 연극 공연이 끝나고 출연료를 받았는데, 그 돈으로는 도저히 쌀값과 아버지의 약값을 마련할 길이 없어 한숨을 쉬면서도 습관적으로 선생님 댁에 공부를 하러 갔습니다.

그날 마침 「흥보가」중에서 흥보 부인이 <가난타령>을 하면서 우는 대목을 배웠습니다.

가난이야 가난이야
원수 놈의 가난이야
잘 살고 못 살기는
삼신 제왕이 마련을 했나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불우 행사 한 일 없이
밤낮 주야로 벌었어도
삼순구식(三旬九食)을
면할 수가 없네

박초월 명창의 흥보가 중 '가난타령'

그런데 노래를 부르던 중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더니 그만 노래를 다 부르지 못하고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시더니 물으셨습니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어디 몸이 아픈가, 집안에 우환이 있는가?”

그래도 제가 대답 없이 울기만 하자 눈물을 글썽이며 곰곰 생각하시더니 틀림없이 그것 때문일 것이라는 듯이 조용히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사귀던 여자하고 헤어진 게지?^^”

저는 그런 쪽으로 결론을 내린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도 뜻밖이라 웃지도 울지도 못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눈물을 그치고 거짓말로 들러대기 시작했습니다.

“출판사 하는 친구에게 꾸어 준 돈이 있는데 그 친구가 망해서 그 돈을 못 받게 되었어요.”

저는 그때까지 연극을 하면서 친구와 함께 출판사를 차려서 돈을 잘 번다고 선생님을 속여 왔기 때문에 솔직한 사정을 도저히 얘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 얘기를 들은 선생님은 금세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시더니 서랍에서 오만 원을 꺼내어 제 손에 꼬옥 쥐어 주셨습니다.

그 돈으로 아버님께 약을 사드릴 수 있게 되었지만 저는 그 일이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지금도 <가난타령> 대목만 하려면 그때의 일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이렇듯 정 많고 눈물 많은 분이었기에 말년의 쓸쓸함을 어느 누구보다도 견디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건강이 허락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일 년에 몇 차례 있는 공연 요청을 한 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당뇨병이 점점 악화되어 체중이 줄어들고 기억력이 감퇴되고 목소리가 잠기게 되었는데도, 다른 국악인들을 만나면 건강이 좋아졌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 웃음 뒤의 슬픔, 그 짙은 화장 뒤의 주름살과, 무대에서의 갈채 뒤에 오는 기력 쇠진과 허탈을 모두 알고 있는 저는 선생님의 웃음이 밝으면 밝을수록 더욱더 불안하였습니다.

그 불안은 점점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어떤 공연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번은 「수궁가」를 하시던 중에 느닷없이「흥보가」가사가 튀어 나오더니, 중간에 가사를 잊어버리고 한참을 헤매시다가, 제자들이 무대 뒤에서 가사를 소리쳐서 일러준 덕에 간신히 한 대목을 때우고 나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처참한 선생님의 표정은 내 가슴을 사정없이 후비며 파고들었습니다.

또 한 번은 공연을 끝내고 나오시더니 부리나케 집으로 가자고 하시는 거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배에 힘을 쓰다가 자신도 모르게 설사가 나와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당뇨병의 말기 증세인 만성 설사에 시달리고 계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그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을 했으며, 그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된 것을 느낀 선생님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지 생각하곤 혼자서 남몰래 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촬영을 마치고 새벽에 돌아왔을 때, 집으로 박초월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깜짝 놀라 허둥지둥 달려가 보니 선생님의 집안에 제자들과 국악인들의 통곡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며 그렇게도 이승의 삶에 애착을 가졌던 선생님!
예순여섯이란 '젊은' 나이에 죽음을 기다리게 된 자신을 몹시도 안타까워 했던 선생님!

지금쯤 이승의 허공을 떠돌며 자식들과 제자들과 자신이 사랑을 쏟았던 사람들의 주변을 맴돌고 계실까요? 

선생님! 어디에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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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브리튼스 갓 탤런트(Britain's got Talent)>란 영국의 방송프로그램을 알게 된 것은 폴 포츠 때문이었다. 

당시 어느 일간지에서 그에 관한 기사를 보자마자 구글로 검색해 들어 가 폴 포츠에 관한 동영상을 거의 섭렵하다시피 했다.

나는 판소리를 알기 전엔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나 "별은 빛나건만"이나 "축배의 노래" 같은 오페라 아리아에 심취했고, 스테파뇨나 베냐미노 질리나 호세 카레라스나 마리오 란자 같은 테너들의 열광적 팬이기도 했다. 

판소리를 배우는 동안에는 우리 명창들의 노래에 열광했지만, 사춘기 때 좋아했던 음악에 대한 향수 때문에 지금도 오페라 아리아를 들으면 예사롭지 않은 감정의 파도에 휩싸인다. 

그런 내게 핸드폰 판매원이고 지지리도 못 생기고 초라해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투란도트>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라는 노래 한 곡으로 세계적 스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눈에 번쩍 띄였고, 그의 청아한 목소리와 진실한 감정을 담은 노래는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슬프도록 긴장한 폴 포츠의 모습


그 뒤로 나는 틈 나는 대로 구글에 들어 가 그 프로그램과 관련된 동영상들을 보곤 했다. 과연 그 안에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흥미진진한 삶의 이야기가 있었다. 

최근에는 제2의 폴 포츠라고 불리는 수잔 보일 나타나 화제를 끌었다. 47세가 되도록 키스 한 번 못해 본 노처녀, 덥수룩한 볶은머리에 뚱뚱하고 못 생겼지만 유머스럽고 당당하기도 한 그녀가 뮤지컬 <레 미제라블> 중에서 "난 꿈을 꾸었네(I dreamed a Dream)"를 불러 준결승에 진출한 후 세계적 스타가 되었다.    

UNEMPLOYED (실업자, 실제로는 독신녀), 47. 소개 자막에서 영국인의 유머가 돋보인다. 


그녀의 뒤를 이어 마이클 잭슨의 "널 사랑하는 사람(Who's loving you)"을 부른 12세 소년 샤힌 자파골리, 낮에는 트럭운전사를 하고 밤에는 피자 배달을 한다며 뮤지컬 <레 미제라블> 중 장발잔의 아리아 "그를 집으로 돌아오게 해주세요(Bring him Home)" 를 부른 중년의 사내 제이미 퓨, 발레리나를 꿈꾸며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 중 "난 밤새 춤 출 수 있었어(I could have danced hole Night)"을 부른 10세의 소녀 홀리 스틸 등이 매주 심사를 통과할 때마다 세계적 화제를 터뜨리며 결승을 향한 불꽃 튀는 경쟁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길드홀 뮤직 앤 드라마 스쿨의 졸업생인 한국인 전자 바이올리니스트 손수경(Sue Son)양이 피아노를 치는 친구와 함께 출전했다가 예선에서 탈락한 뒤 혼자서 출전해보라는 심사위원의 제안에 <사계> 중 "폭풍(Storm)"으로 준결승에 진출해 예비스타로 주목을 받고 있다.

게다가 손수경은 가장 절친했던 친구가 자기를 버리고 혼자 출전한 데 마음이 상해 절교를 선언한 일로 '우정이냐? 스타의 길이냐?'라는 논란에 휩싸여 있어 한국 언론에 흥미로운 기사를 제공하고 있다.

친구와의 연주 후 혼자 출전할 수 있느냐는 심사위원의 질문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손수경 양.


그 프로그램의 목적은 영국의 방방곡곡에 숨어 있는 재능 있는 인재들을 발굴해서 세계적 스타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최종 결승에서 우승한 사람은 영국 여왕 앞에서 노래할 수 있는 기회와, 우리 돈 약 2억원 정도인 10만 파운드의 상금이 주어지고, 음반도 즉시 만들어진다.
 
그야말로 프로가 되기를 꿈꾸는 아마추어들에게는 황홀한 꿈의 무대다. 초라하고 못생긴 오리가 한순간에 아름다운 백조로 변신하는 신화의 무대다. 

그 무대를 위한 프로그램 기획자와 연출가의 전략은 대단히 치밀하다. 수천 명의 지원자 중에서 재능이 돋보이는 사람들을 선별해서 그들의 오디션 장면과, 출연자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진행자들과의 인터뷰 장면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그들이 오리새끼일 적의 모습을 화면에 미리 담아 놓는다. 

그 뒤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 무대와 같은 분위기가 나는 극장의 무대에 나온 참가자는-혹은 참가자들은- 객석의 관객들과 맨 앞 줄의 심사위원들을 바라보며 스스로 3분 정도의 무대를 끌어가야 한다. 

재능이 보이지 않거나 곡목 선정이 잘 못 됐거나 긴장해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탈락이 되고, 3명의 심사위원 전원 일치 "YES"를 받은 사람만이 준결승에 진출하고, 거기서 살아 남은 사람들이 연말의 최종 결승에서 승부를 가린다. 

그야말로 '재능의 진검 승부'가 펼쳐지는 현장이다. 게다가 객석을 꽉 채운 관객들은 출연자의 재능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낸다.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는 야유와 비웃음을 사정없이 보내고, 재능을 보이는 사람에게는 노래 한 소절 한 소절에 대해 아낌없는 박수갈채와 눈물로 성원을 보낸다.

예전 우리 소리판에서는 명창들의 노래에 대해 관객들이 '추임새'로 성원했다. "잘한다!", "좋다!", "얼씨구!"하고 소리치면 명창들은 더 신을 내서 소리를 하고, 소리가 맘에 안들면 "집어쳐라!" "그것도 소리냐?"하고 인정사정없이 소리쳤다. 

그런 사람들을 '귀명창'이라고 불렀는데 요즘 한국에서는 찾아 보기 힘들어진 귀명창들이 대거 영국으로 이주한 모양이다. 그 프로그램의 관객들은 폴 포츠나 수잔 보일이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환호와 갈채와 기립박수로 그들을 스타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폴 포츠의 노래에 열광하는 영국의 귀명창들.


게다가 스타를 키워내는 뛰어난 감각으로 세계적 음반기획자로 이름을 날리는 사이먼 코웰과 함께 심사를 보는 피어스 모건과 아만다, 이들의 심사방식도 매우 독특하다.

'다른 일을 찾아 봐라', '그런 실력으로 어떻게 나왔나?'와 같은 가차없는 독설로 출연자의 기를 팍팍 죽이기도 하고 눈물을 쑥 빠뜨리게 하기도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당신은 스타가 될 것이다', '재능이 놀랍다', '소름끼친다'는 등 최고의 찬사도 아끼지 않는다.   

   출연자들에게 저승사자가 되기도 하고 수호 천사가 되기도 하는
   심사위원들.


그들의 심사태도나 심사평은 조금 감상적이고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시청자들의 흥미를 끄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그들의 심사결과에 대해서도 특별한 잡음이 없는 걸 보면 나름대로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심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이 든다.
 
심사만 끝나면 욕설과 비방과 돈봉투에 대한 투서가 끊이지 않는 우리나라 여러 예술 경연대회와 비교되는 부러운 면이다. 게다가 준결승부터는 프로들의 무대 뺨치는 멋 있는 무대 연출로 시선을 끌고, 전국민 참여형 심사로 바뀌니 누군들 그 대회를 주목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때로 그 프로그램의 어두운 면이 논란이 되기도 한다. 제이미 퓨는 무대공포증 때문에 한번도 무대에 서 본 적이 없었다는 거짓말이 들통 나 비난을 받고 있고, 폴 포츠는 노래 실력에 비해 과대 포장된 것 아니냐는 클래식계의 비판도 있다. 또한 그 프로그램에서 발굴된 스타들이 반짝 스타로서 방송 산업과 음반 산업의 노리개 역할을 하다가 슬그머니 사라져버리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도 있다.

그러나 그런 어둠을 넘어서서 그 프로그램은 계속 세계의 주목을 받는 빛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거기에는 단순한 재능의 발굴만이 아닌 감동적인 삶의 이야기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어렵고 소외감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한 평범한 인간이 꿈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아 인생역전을 이루는 스토리는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인 것이다. 그 드라마는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다. 

우리에게도 그런 포맷의 프로그램으로 <스타킹(STARKING)>이 있다. 나도 스타킹을 즐겨보는 팬이다. 거기에도 눈물이 있고 삶의 애환이 있고 꿈이 있고 고난을 넘어 선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은 하나의 방송 프로그램으로서의 기능만을 한다. 거기서 배출된 스타들을 그야말로 '킹'으로 만들어 낼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 

참가자들은 예비 스타로서가 아니라 시청자들을 즐겁게 하는 출연진으로서의 역할에 더 방점이 찍혀 있다. 그들의 재능을 최대한 돋보이게 할 무대도 배경도 진행도 매우 허술하다. 그야말로 코미디 쇼의 어릿광대를 만들어내는 기능에 충실한 프로그램이다.

단적인 예로 폴 포츠와 최종 결승에서 2위로 아쉽게 졌지만 여러 개의 음반을 만들고 세계 무대를 돌아다니며 스타가 된 소녀 가수 코니 탤벗이 <스타킹>에 출연하여 맹인 소녀 피아니스트 강예은 양과 협연을 하며 "무지개 넘어(Over the Rainbow)"를 부르던 장면은 너무도 아쉬웠다.

그 소녀가 영국이나 홍콩이나 일본에 출연했을 때는 그 소녀의 음악성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연출이 되었는데 비해 <스타킹>에서는 마치 진기명기 쇼를 보는듯한 연출과 진행자들의 반응으로 인해 그 음악의 감동이 반감되어 버렸다.
 


어린 소녀들의 재능이 어른들을 위한 진기명기 쇼가 된 느낌의 아쉬운 무대.


<스타킹>이 진정한 스타의 산실이 되기 위해서는 참가자들의 재능을 최대한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세심하고 치밀한 연출이 있어야 한다.

MC나 보조 출연 연예인들이 주인공이 아닌, 진정으로 순수한 재능을 지닌 못난 오리들을 아름답고 화려한 백조로 탈바꿈 시켜주는 정성 어린 준비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과 재능에 대한 깊은 전문성과 애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단순히 시청율을 올리기 위한 과장과 웃음이 아니라 진정으로 진흙속의 진주를 발견해서 보석으로 만들려는 비전이 있어야 한다.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서의 품격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나라에도 전국 방방곡곡에 '숨은 인재(Talent)'들이 수없이 많다. 예로부터 '가무악' 곧 노래하고 춤 추고 악기 연주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인 우리 민족이다. 얼마든지 세계적 스타가 될 수 있는 풍부한 인적 자원을 지닌 나라다. 다만 스타를 만들어내는 '기획력'과 '전략'이 부족할 뿐이다.

미국의 ABC 방송이 그 프로그램의 성공을 보고서 "영국인들은 왜 이렇게 재능이 많은 거야?"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한다. 미국인만이 아니라 영국인이 아닌 대부분의 지구촌 사람들은 찬탄과 부러움과 시샘이 섞인 눈으로 <영국인은 재능이 있다(Britain's got Talent)>를 볼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어 "왜 한국인들은 그렇게 재능이 많은 거야?"라는 찬탄과 부러움과 시샘 좀 받아 봤으면 여한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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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명창들에게는 '득음'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 전설 같은 일화들이 많이 전해 온다.  득음이란 '소리를 얻는 것' 곧 판소리가 필요로 하는 최고의 성악적 경지에 다다른다는 말이다. 

테너나 바리톤이나 베이스와 같이 음역에 맞추어 역할이 정해지는 오페라와 달리 판소리는 소리꾼 혼자서 최고의 고음에서부터 최저의 저음까지를 소화해야 한다.

또 <춘향가>나 <심청가> 같은 판소리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완창하기 위해서는 서너 시간에서 길게는 아홉 시간까지의 긴 시간 동안 성대를 쓰기 때문에 상상할 수 없을만큼 고된 수련을 필요로 한다. 

안숙선 명창의 열창하는 모습


예전에 판소리 공부를 하던 소리꾼들은 기생들에게 무용과 음악을 가르치던 사설 교육 기관인 권번이나, 명창 선생님이 사는 집을 오가며 기초 공부를 했다.

그 다음에 '독공'이라는 개인 훈련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주로 마을에서 떨어진 산속의 움막이나 절 같은 곳에서 소리 공부를 했다.

그러다보니 어떤 명창은 폭포수 아래에서 폭포소리를 이겨가며 수련을 했다든지, 어떤 명창은 토굴에서 북채 수백 개를 부러뜨려가며 수련을 했다는 등의 수많은 일화가 전해 온다.

일제시대에 판소리에 미친 정노식이란 학자가 입으로만 전해 오던 명창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음악 세계를 집대성해서 펴낸 <조선창극사>에는 그런 일화들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판소리사라 할 이 책은, 관극시(觀劇詩)를 비롯한 판소리와 연관된 한시(漢詩)들도 모아 놓았고, 판소리의 음악적 특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광대의 약전 및 그 예술>이라는 항목에서는 89명의 남녀 소릿광대와  고수 1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중에 일반인들이 궁금해하는 '전설(?)' 두 가지가 있다.  소리 공부를 할 때 '똥물을 먹는다'는 전설과, '목에서 피를 토한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나 역시 그 전설이 궁금해서 한창 소리 공부를 할 때 나의 스승이신 박초월 명창에게 여쭤봤다.

 나의 스승 박초월 명창의 소녀 시절 사진


그랬더니 첫 번 째 질문인 똥물에 대해서는 자신도 마셔본 적이 있다고 대답하셨다. 

난 얼굴을 찡그리며 "그 냄새 나는 것을 어떻게 마셔요?"하고 물었다. 박초월 명창은 웃으면서 "그걸 어떤 미친 놈이 그냥 마셔?" 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똥물 제조법'을 가르쳐 주셨다. 

똥물 제조법

1. 굵은 대나무 통 뚜꼉을 무명천으로 꼭꼭 감싼 다음,  변소간에 넣어 둔다.
2. 몇 개월 뒤  대나무 통을 꺼내면 천 사이로 스며 든 '맑은' 똥물이 가득 차 있게 된다.
3. 그 물을  뚝배기에 담아 펄펄 끓인다.(기생충 박멸 작전)
4. 물이 식으면 코를 한손으로 막은 다음 단숨에 마신다. 


왜 구린 냄새가 나는 똥물을 마셨을까? 

하루에 몇 시간 씩 매일같이 소리 연습을 하다 보면 누구나 성대가 붓고 열이 생겨서 목이 잠기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때 성대의 열을 내리고 잠긴 목을 틔워주는데 똥물이 효과가 있다는 민간의 속설이 전해져서 그 물을 마시는 것이다.

실제로 곤장을 맞아서 온 몸이 부은 사람이 똥물을 먹고 나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는 걸 보면, 몸의 독기를 빼고 부기를 내리고 열을 내리는데 똥물이 효과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박초월 명창은 자신도 어릴 때 몇 번 마셨고, 제자 중에도 마신 사람이 있지만 "그건 모두 약이 귀했던 옛날 얘기지 지금은 좋은 약이 많아져서 똥물 마시는 사람은 없다." 하셨다.


명창들은 정말 목에서 피를 토했나?

두 번 째 질문에 대해서는 '하하' 웃으시며 그건 좀 과장된 얘기라고 하셨다.

소리 공부를 하다보면 성대가 붓고, 염증이 생겨 목이 쉬는데 그걸 이기고 계속 소리를 지르다 보면 염증이 터져서 가래에 조금씩 피가 섞여 나오는 경우는 있어도 "피를 토한다는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고 있을 수도 없다"는 대답이었다.

마침 그 무렵에 모 방송국에서 송흥록이란 전설적인 명창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어 내보내고 있었는데, 절에서 혼자 노래 연습을 하다가 시뻘건 피를 입에서 울컥울컥 쏟아내는 장면이 있었다.

선생님과 함께 그 장면을 보던 중 "저 사람이 폐병에 걸렸나? 저게 무슨 일이냐?"하며 화를 내신 적이 있다. 작가나 연출이 피를 토한다는 전설에 대해 연구도 하지 않고 만든 엉터리 장면을 본 시청자들은 명창들이 모두 저렇게 한사발씩 피를 토하는 줄 알 거 아니냐는 걱정과 함께 말이다.

나 역시 소리 공부에 빠졌을 적에는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을 하기도 했고 목이 쉬어 고생도 많이 했지만, 똥물을 먹거나 피를 토한 적은 없었다.

또 내가 아는 주변의 명창들도 성대가 붓거나 염증이 생기고 조금씩 피가 섞여 나온 일로 고생을 하고 그걸 치료하기 위해 무던히 고생을 했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도, 울컥울컥 피를 토한 경험을 한 사람은 없었으니 전설은 전설로 남겨 놓을 일이다.  

그만큼 판소리 수련의 길은 멀고도 고통스러운 길이다. 그런 길을 걸어 명창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인간승리의 표본이다.


     전설적인 명창 송만갑(1865~1939).
     그는 74세의 생애 동안 오로지 판소리의 길에만 매진했던
     대명창이며, 판소리계의 가왕이라고 불리는 송흥록 명창의
     손자이기도 했다.


나는 그 멀고도 고통스러운 길을 가다가 중도 포기한 사람이기 때문에 꿋꿋이 그 길을 걸어 가는 명창들에게는 지금도 한없는 존경과 사랑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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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부 장관 직을 그만 둔지도 어느 덧 2년이 되어 간다.
그동안 TV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연기자로, 연극 <밀키웨이>에서는 극작과 연출가로, 최근에는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위원장으로서 즐겁고 바쁘게 살고 있다.
 

내가「대왕 세종」에 출연하고 있을 때, 모 일간지에 동정 기사가 실렸는데 그 기사의 제목이 한동안 여기저기서 화제가 됐다.


김명곤 씨 “장관 껍데기 훌훌~ 다시 광대로”

“장관이라는 껍데기를 훌훌 벗어 버리고 이제 천직인 광대로 탈바꿈해야죠. 걱정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허허.”

김명곤(55·사진)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내년 1월 방송 예정인 KBS 1TV 사극 ‘대왕 세종’(극본 윤선주·연출 김성근)에서 배우로 복귀한다. 1999년 자신이 연출한 연극 ‘유랑의 노래’에 출연한 지 8년 만이다.

그는 그동안 국립극장장과 문화부 장관을 지내면서 연기와 멀어졌다.김 전 장관은 ‘대왕 세종’에서 고려 황실의 후예로 조선 왕조의 전복을 꿈꾸는 옥환 역을 맡았다. 옥환은 어린 세종을 긴장하게 만드는 인물로 초반 30회까지 비중이 큰 역할이다. 그가 대하 사극에 출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D일보 2007년 10월 6일자 기사 중 일부)

나는 대학교 다닐 때만해도 광대라고 하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코에 빨간 공을 붙인 서양의 삐에로를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줄타기하는 광대를 처음 보았는데 그 광대가 줄에 올라서서 “이 줄타기가 옛날에는 화랑의 기예였소!.” 하길래 깜짝 놀랐다. "화랑이라면 신라 시대의 무사 집단인데 줄타기를 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며 광대에 관한 기록을 찾아봤다.

우리나라에 그윽하고 오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며 유교, 불교, 도교의 3교를 포함한 것으로 민중을 교화하는 것이다.

신라 시대의 학자인 고운 최치원이 쓴 글이다. 이 글을 바탕으로 역사가인 단재 신채호는 이렇게 썼다.
 

선가(仙家)는 신라의 국선 곧 '화랑'으로 보며, 그 시원은 삼한의 소도(蘇塗)의 제관으로 고구려의 '조의선인(鳥衣仙人)'이다.

이런 글들을 보니 고대사회에서 예술가들은 하늘에 국가적 제사를 지낼 때는 제관으로서 활동했고, 그들의 신분은 왕족이나 귀족에 속하는 상류계급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통일신라가 무너지고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화랑들과 함께 예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천민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광대”라는 말은 고려시대에 서역에서 들어 와 우리말로 정착된 외래어인데, 예술가를 지칭하는 단어인 광대가 화랭이, 재인 등의 용어와 뒤섞이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광대들은 기생, 무당, 중, 백정 등과 함께 천민계급으로 살아야 했다. 이들은 사대부나 평민들과 한 동네에서 살지도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하고,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자기들끼리 기예를 전수하면서,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고, 그들만의 독특한 사회를 꾸려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광대들에 대해 다산 정약용은 이런 상소문을 썼다.

광대가 봄·여름이면 고기잡이를 좇아 어촌으로 모여들고 가을과 겨울이면 추수를 바라고 농촌으로 쏠리는데, 특히 창촌에서는 사당, 창기, 주파, 화랑, 악공들의 잡류들을 엄금해야 합니다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본 <왕의 남자>는 이 무렵의 떠돌이 남사당 광대패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실학사상이 일어나고 평민 가사, 탈춤, 판소리 등의 가치를 양반들 중의 몇몇이 언급하게 되면서 광대들의 가치가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고종과 대원군이 권력을 쥐었던 무렵에는 광대들이 왕족이나 고위 관리들의 잔치에 초대받고, 심지어 명인, 명창, 국창 등의 이름으로 궁궐에 들어가 임금 앞에서 기예를 선보이며 많은 돈을 벌고 신분의 상승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조선이 망한 후 광대들은 또 다시 천대받게 된다. 그 상황은 일제시대의 학자인 육당 최남선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조의 재인, 광대들은 적극적으로 특별한 권장을 입지 못하고, '무식무기력한 예인'들이 사회 최하층적 지위에서 구차히 존재하다 보니까 거기 쇠잔이 있을 뿐이지 발달이 없으며 저락이 거듭될 뿐이지 향상을 볼 수 없음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조건 하에 있다 보니까 '수 천 년을 하루같이' '몸을 놀리는 기술'과 '우스개 놀이'쯤에 그치고 드디어 다른 데 만한 순희곡적 생장을 이루지 못하고 만 것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명 풍화에는 조금도 유익한 바가 없으니 이는 연희를 실시하는 자가 학문이 없어 '동양의 부패한 풍습'만 알 뿐이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했던 <서편제>는 이 무렵의 떠돌이 판소리 광대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나는 대학시절에 오페라나 이태리 민요나 가곡이나 뮤지컬이나 비틀즈 등의 서구음악의 열광적 팬이었고, 괴테나 세익스피어나 입센이나 도스토에프스키 등의 서구문학(독문학)에 심취했던 사람이다. 그러다 우연히 판소리를 알게 된 후로 내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고향인 전주를 무지 싫어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의 흔적이 너무나 짙은 그 곳을 어서 떠나 서울로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진학공부를 했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도 한국을 빨리 떠나 독일로 유학 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인간문화재인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면서 전라도 말이 그렇게 다양한 표현과 영롱한 문학적 향기가 있는가를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핏줄에 대한 애정 곧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나의 조상과 조국에 대한 사랑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전통은 박물관에 진열된 골동품이 아니다. 전통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았던 삶의 내용과 형식 곧 그 분들의 삶의 자취이고 향기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세월이 지나면 전통의 계승자가 될 것이며, 언젠가는 전통 그 자체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나에게 전통은 ‘나를 숨쉬게 하고, 나를 활기 있게 만들어 주고, 또 창조의 열정에 불타게 하는 소중한 원천이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무식무기력’한 광대들에게서 내 예술의 많은 부분을 배웠다. 나는 ‘수천 년을 하루같이’ ‘동양의 부패한 풍습'을 몸으로 전해 온 그들의 예술에 매혹 당하고 심취하고 깊이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들의 ‘몸을 놀리는 기술’ 속에서 삶의 깊은 애환과 감동을 보았고, 그들의 ‘우스개 놀이’ 속에서 예술적 창조의 편린을 보았다. 그들은 나의 스승이었고, 나의 애인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 종족의 일원이 되고자 ‘광대’라는 말을 쓴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연기, 연출, 극작, 경영, 행정에다가 연극, 영화, 국악, 방송 등 여러 분야에 간여하는 것을 보고 혼란스럽다고 한다. 

당신의 정체는 뭔가? 아마도 이게 그들의 질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나는 그 모든 것을 추구하는 광대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럼 당신은 어떤 광대가 되고 싶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
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라는 책에 나오는 발렌친 카그다예프라는 브리야트 족의 샤먼과 저자와의 대화로 대신하고자 한다.

질문 : 당신 삶의 목표는 무엇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

답변 : 훌륭한, 혹은 좋은 샤먼이란 자신이 함께 살아가는 민족을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는 좋은 샤먼이 되고 싶고, 따라서 우리 민족이 서로 도와가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본다.-----사랑을 나누고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모든 샤먼이 지녀야 할 미덕이다.

반면 모든 악과 문제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과 자연과 사물을 착취하는 데서 발생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인내하고 이해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남을, 상대방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상대가 원하기 전에 그가 원하는 것을 먼저 베풀어 주는 것이 사랑의 첩경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현자와 성자들이 설파했던 조화와 사랑, 이것의 실천자로서의 샤먼 곧 ‘무당’의 역할에 대한 바이칼 샤먼의 지혜로운 말이 ‘광대정신’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광대란 '넓은 광(廣), 큰 대(大)'라는 말 뜻 그대로 ‘넓고 큰’ 영혼으로 세계의 불화와 고통에 정면으로 마주 서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온 몸으로 감싸 안고 표현하는 예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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