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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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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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10.08.19
    남원 땅에 피어난 꽹과리의 꽃, 유명철 명인 (8)
  2. 2010.08.17
    춤추고 노래한 외로운 고승, 장태남 명인 (4)
  3. 2010.08.14
    꽹과리에 미쳐 떠돈 부포꽃, 김문달 명인 (4)
  4. 2010.08.07
    미국 처녀도 반해서 뽀뽀한 춤, 하보경 명인 (9)
  5. 2010.08.04
    바람 따라 사라지는 흙의 노래, 박갑근 명인 (2)
  6. 2010.07.22
    핏줄을 타고났나, 신이 내렸나, 김석출 명인 (11)
  7. 2010.07.20
    옹골진 토박이의 꽹과리 신명, 김봉열 명인 (8)
  8. 2010.07.01
    민족 무술 '태껸' 부흥의 중시조, 신승 명인 (19)
  9. 2010.06.21
    '산유화'로 맺어진 민요 인생, 박홍남 명인 (6)
  10. 2010.04.24
    소릿길을 받쳐준 '고수' 한평생, 김득수 명인 (8)
  11. 2009.05.05
    장관 껍데기 훌훌 벗고 광대로 돌아와보니 (24)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전라도 쪽으로 내려가다 익산에 이르면 기찻길이 '호남선'과 '전라선'으로 나뉩니다.

호남선은 익산에서 김제, 정읍, 장성, 광주를 거쳐 나주, 목포에 이르게 되고 전라선은 전주, 남원, 구례, 곡성을 거쳐 순천, 여수에 이르게 됩니다. 예전에는 전라선이 통과하는 지역을 '전라 좌도'라 하고, 호남선이 통과하는 지역을 '전라 우도'라 했습니다. 농악도 그 구분에 따라 전라 좌도 지방에서 치는 농악을 '전라 좌도 농악', 전라 우도 지방에서 치는 농악을 '전라 우도 농악'이라고 합니다.

전라 좌도 농악의 꽹과리 명인 유명철은 어려서부터 좌도 농악 가락을 뼛속 깊이 새기며 자랐습니다.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00088904

그의 집안은 대대로 남원군 금지면 상귀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남원토박이로 땅과 재산이 넉넉한 부농이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대에 와서 집안이 망해버렸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유선장 씨가 의병 운동에 가담하여 1937년에 일경에게 고문을 당해서 돌아가시게 되자, 재산은 몰수당하고 집안은 풍지박산이 나버린 것입니다.

그 통에 그의 부친인 유한준 씨는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채 남의 집 머슴으로 품을 팔며 숨어지내야 했습니다. 1942년에 아들 명철을 낳았을 때에도 그는 땅 한뙈기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러는 중에 틈틈이 배운 꽹과리 솜씨는 인근에 당해낼 사람이 없을 만큼 뛰어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부친은 전라도에서 가장 뛰어난 상쇠로 꼽히는 지창근 명인에게 꽹과리를 배웠는데, 해방되기 전까지는 죄인 자식이라 그 솜씨를 맘대로 펼치지 못하다가 해방이 되자 이곳 저곳에 불려다니며 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전국 농악 경연대회가 열렸을 때는 전라북도의 대표 상쇠로 나가게 되었고, 거기서 이름을 떨치게 된 그의 부친은 전국을 휩쓸고 다니며 상쇠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그 통에 돈도 벌고 소원하던 농토도 장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이 다닌 것이 '포장걸립'이여, 포장쳐 놓고 돈받고 농악을 치는 거지. 그런디 어려서 아버님 치시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따라서 치는디, 그것이 무슨 가락이고 언제 치는 가락인지는 몰랐어도 치는 법만은 이미 머릿속에 다 들어가 버렸어. 그러고 농악칠 때 상모 돌리는 걸 흉내내는 걸 보고 아버님이 솔방울로 상모를 만들어 주셨는디, 내가 그걸 돌리면 다들 귀엽고 예쁘다고 칭찬이 자자했지.”

그렇게 신나게 농악을 치면서 다니다가 6.25를 맞은 그의 부친은 그 난리 통에도 순창군 쌍치면에 농악을 치러 갔다가 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밤에 굿을 치면 인민군이 습격해 오니까 치지 말라고 지서에서 만류한 사실을 모르고 밤늦게까지 굿을 친 겁니다. 그 통에 지서에 잡혀들어가서 순경들에게 “무지무지허게 뚜드려 맞은 끝에” 골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1951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일본 순사한테 매맞아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지서 순경한테 매맞아 돌아가시게 되니 그의 집안은 두 번 풍지박산이 난 셈입니다.

골병든 아버지의 병간호로 집안 살림은 모두 날아가버리고, 누나와 동생과 함께 홀어머니 손에 남게 된 열 살 난 소년은 학교 공부도 때려치우고 곧바로 농삿일에 뛰어들었습니다.

농사짓는 틈틈이 머슴들과 어울려서 농악을 치게 되었는데, 이미 어려서 아버지에게 배운 가락으로 그 또래에서는 당해낼 사람이 없는 소년 상쇠가 되었습니다. 그는 열여섯 살이 되자 자기 또래의 청년들을 모아 농악단을 만들 만큼 농악에 미쳐 있었습니다.

“그때가 자유당 시절이었는디, 사월 초파일에 전국 농악경연대회가 열린다고 혀서 나도 우리 마을 청년들을 모아서 농악대를 조직혔지. 면에서 농악에 조예가 있는 분들한테 배워감서 연습을 혀서 출전을 혔는디 내가 상쇠 노릇을 혔지.
그때 전국에서 농악 잘 하시는 분들은 다 나왔는디 내가 치는 것을 이분들이 보고 ‘앗다 저놈이 누구 자식이냐?’ 이렇게 말이 나왔다 말이여. 그분들 보기에 장래성이 있어보였다 이거지.
끝나고 나닝게 그분들이 부르시더니 ‘니가 아무개 자식이냐?’ 묻고 야단이더만. 그렇다고 혔더니 ‘니 부친이 그런 유명헌 분인디 이대로는 안되겠다. 니가 이 중에서 제일 맘에 드는 분을 찍어라.’ 하시더란 말이여. 선생이 제자를 고르는 게 아니라 제자가 선생을 고르게 되었지. 그래서 강태문 선생을 찍었더니 모두들 ‘니가 역시 잘 봤다. 그럼 그 분 따라댕김서 좀 배워봐라.’ 하기에 그 뒤로 강태문 씨를 따라댕겼지.”

남원군 조산면에 살던 강태문 명인은 그의 아버지 유한준 명인이 상쇠로 활약할 때 부쇠로 따라다니던 사람으로 역시 전라 좌도 상쇠의 일인자로 꼽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강태문 명인을 이 년쯤 따라 다니면서 상쇠의 길을 닦았습니다.

출처 : http://openjb.co.kr/bbs/view.php%3Fid%3...no%3D229

농악의 지휘자 겸 통솔자라고 할 수 있는 상쇠는 꽹과리를 치는 솜씨도 뛰어나야 될 뿐 아니라, 굿을 치는 순서에도 밝아야 되고, 스무 명에서 많으면 사오십 명이 되는 농악단 전원을 통솔하는 통솔력과 지도력까지 갖춰야 하기 때문에 농악대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상쇠 노릇을 할 사람은 처음부터 오로지 상쇠만을 따라다니면서 상쇠가 하는 모든 행동거지와 꽹과리 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정초에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집의 액을 몰아내고 복을 빌어주는 '마당밟이굿'을 어떻게 치고, 김맬 때 치는 '두레 풍장'은 어떻게 치고, 김매기가 끝나고 치는 '호미씻이굿'이나, 농사 끝나고 마을의 당산에서 치는 '당굿'이나, 집 지을 때 치는 '집들이굿', 다리 놓을 때 치는 '다리굿'과 같은 갖가지 굿은 어떻게 치는지 알아야 합니다.

또 마당밟이굿을 치더라도 마을에 들어가서 당산신에게 굿치는 것을 아뢰는 '당산굿'과 집의 마당에 들어가서 치는 '마당굿', 부엌에 가서 치는 '정지굿', 장독에 가서 치는 '장꽝굿', 우물에 가서 치는 '샘굿', 곳간에서 치는 '곳간굿', 대청마루에서 치는 '고사굿', 마을공터에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판을 벌이는 '판굿', 굿을 끝내고 마을 밖으로 나오면서 치는 '날당산굿'은 어떻게 치는가 하는 굿의 진행을 속속들이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때와 장소에 따라서 판을 줄이기도 하고 늘이기도 하며, 청중들의 반응에 따라서 가락도 적절히 변화시키고, 주최측의 요구에 맞추어서 생략할 부분과 강조할 부분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또 '외마치', '두마치', '세마치', '풍류', '굿거리', '오방진', '덩더궁이', '영산', '잔지래기' 같은 갖가지 가락을 변화무쌍하게 구사하면서 장구나 북이나 징과 같은 앞치배들과 화음이 흥겹게 어우러지도록 지휘를 해야 합니다. 또 창부나 중이나 양반이나 각시나 할멈이나 대포수나 무동으로 분장하여 춤도 추고 재담도 하는 뒤치배들의 흥도 돋우어주어야 합니다.

게다가 단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여러 단원들의 의견을 존중해서 의사를 결정하는 통솔력까지 배워야 하니, 부처님 살찌고 마르고가 석수장이 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농악의 성공과 실패는 상쇠의 능력에 결정적으로 좌우됩니다. 

“강태문 씨는 가락도 좋고 진법에도 밝고 통솔력도 있는 분이셨어. 근데 통 자세허게 가르쳐 주시질 않어. 그저 보고 배와라 하는 식이여. 그래도 기초가 있어서 이 년 쯤 따라 댕기고 나니 주위에서 선생보다 낫다는 소리가 나오더만. 그분은 그때 이미 나이가 연로하셨으니 부포놀음 같은 것은 젊은 나를 당해낼 수가 없었지.”

유명철 명인의 부포놀음. 출처 : http://tvpot.daum.net/my/PlaylistClipLi...verseseq

그는 가락도 뛰어났지만 특히 '부들상모'를 휘휘 돌리기도 하고, 콕콕 찧기도 하고, 앞뒤로 떠넘기기도 하는 '부포놀음'을 잘해 “좌도 부들상모는 유명철이” 하는 말이 나올 만큼 잘 돌렸습니다. 

우도 농악에서 쓰는 '뻣상모'와 달리 좌도 농악은 기러기털이나 두루미털이나 독수리털의 연한 털로 연꽃처럼 만들어 상모에 매달아 놓은 '부들상모'를 사용합니다. 부드러운 상모를 콕콕 찧고 돌아가는 '전조시', 부포를 앞뒤로 세우는 '개꼬리치기', 한 바퀴씩 돌리는 '좌우치기', 두 바퀴씩 돌리는 '사사'와 같은 부포놀음은 자긋자긋하고 오밀조밀한 몸놀림이 농악 가락과 어우러져서 한껏 흥을 돋우어줍니다.

부들상모의 도면. 출처 : http://gugung.com.ne.kr/pungmul/pung07.html

몸에 물이 올라 힘이 용솟음칠 무렵에 그런 솜씨를 지니게 되었으니 그는 가는 곳마다 인기를 독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터에 강태문 명인이 병으로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배웠지만 '판굿'을 제대로 못 배워 그것을 마저 익히려던 차에 스승을 잃어버린 그는 곡성에 사는 상쇠 기창수 명인을 닷새 동안 따라다니며 판굿을 익혔습니다.

판굿이란 농악을 치는 중에 판을 벌여 놓고 농악의 기예를 총망라해서 푸짐하게 보여주는 판입니다. 

제대로 다 하려면 밤을 새워 놀 만큼 농악의 진수가 담겨있는 게 판굿입니다. 지방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그가 배운 판굿의 순서를 일견해 봅니다.  

-1채부터 7채까지의 가락을 선보인다.
-오방진 가락을 치며 오방으로 진풀이를 한다.
-‘호호’ 하며 치배들을 부르는 '호호굿'을 친 다음, 우도 농악에는 없고 좌도 농악에만 독특하게 전해오는 가락인 '영산가락' - '소쩍새 가락'이라고도한다-을 친다.
-상쇠와 부쇠, 상쇠와 장고가 서로 가락을 주고 받는 '미직'- '품앗이굿'이라고도 한다-을 친다.
-장고 가락에 맞춰서 춤을 추는 '춤굿'을 친다.
-짝을 지어서 등을 맞추는 '등지기'를 친다.
-대포수가 재담도 하고 연극도 하는 '도둑잽이굿'을 친다.
-영기 두 개로 문을 만들고 문을 들락거리며 '문굿'을 친다.
-“갈랍니다.” 하고 하직하는 '날당산굿'을 친다.
-장고나 꽹과리나 북을 치는 모든 단원들이 한 사람씩 나와서 개인기를 자랑하는 '개인놀음'을 하는 것으로 끝을 낸다.

“기창수 씨는 우리 부친이 활약할 때 쌍벽을 이루시던 명인으로 판굿의 대가여. 그 판굿에서 개인의 솜씨가 발휘되는 것이 개인놀음인디, 개인놀음은 잘 해도 단체놀음을 못 허는 사람이 있고, 개인놀음은 못 해도 단체놀음을 잘 허는 사람이 있지.
근디 개인놀음을 잘 허는 사람일수록 자기 고집이 세고 협화성이 부족해서 자기 위주로 나가고 남의 지시를 안 받으니 같이 어울리기가 어렵지. 농악대에서 문제가 생길 때 보면 그런 사람들이 꼭 개입이 되어 있어. 그럴 때 조정하고 해결하는 것이 상쇠의 역할이여.”

기창수 명인에게 판굿을 모두 익힌 그는 제1회 전국 민속경연대회가 열렸을 때 상쇠로 출전하여 전국에서 1등을 했습니다. 그 상으로 '특별 흥행허가'를 얻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포장걸립을 했습니다.

그해 겨울 고향에 돌아와서 곡성에 살던 한정자와 혼인을 한 그는 이듬해 단체가 해산되자 다시 집에 돌아와 있다가, 스물한 살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제대한 뒤에 구례농고에서 농악반을 만들어 강사로 초빙하자 3년 동안 농악강사로 다니면서 학교측의 도움을 얻어 못 배웠던 중학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뒤 전주농고에서 4년쯤 가르치고, 수지중학교에서 2년쯤 가르치다가 서울에서 농악학원하는 사람의 초빙을 받아 가르쳐도 봤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점점 활력을 잃어가는 농악의 현실에 대해 매서운 항변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농악은 없어져 버리고 말어. 여그도 민요니 농악이니 찾으러 다니는 사람들은 많이 오지만 다 필요없어. 학생들은 현실적으로 논문이나 쓰고, 정부는 말로만 농악 진흥한다고 떠들고, 교수나 학자는 농악을 골동품으로 취급하고, 신문이나 잡지는 어쩌다가 한 번씩 쓰고는 생색내고, 그래가지고는 아무것도 안돼. 정부가 정책적으로 농악연구실이든 뭐든 그런 것을 만들어서 기능을 가진 사람을 급료를 주어서 생활 걱정 안 하고 연수하면서 문하생을 가르치게 하고, 모든 학교 교육에서 의무적으로 농악을 배우게 하기 전에는 절대 살어날 수가 없다고 봐.”

그러나 그는 항변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고향의 농악을 살리기 위해 발벗고 나섰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남도문화재나 민속경연대회나 전주대사습과 같은 농악 발표회에 나가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여 남원 농악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지금 그는 남원 농악의 대부로서, 또 전라도를 대표하는 농악의 예인으로서 존경과 사랑 속에 행복한 말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호리호리한 몸매와 안경낀 눈 뒤에서 총명하게 빛나는 예인의 재능은 어려서부터 일찍 꽃이 피었고, 그 꽃은 고향의 땅에서 향기를 품어내며 활짝 피어난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나라 골골에서 이러한 예인들의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길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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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도솔가>가 만들어진 내력을 이야기하는 내용 중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신라 경덕왕 19년인 서기 760년, 하루는 해가 둘이 떠서 서로 교대하여 지지 않는 괴변이 생겼다.
그러자 일관이 말하기를 '범패승'을 데려다가 <산화공덕>이라는 노래를 부르면 괜찮을 것이라고 하여 왕은 단을 쌓고 범패승을 기다렸다.
그때 월명이라는 중이 지나가므로 왕이 불러 '범패'를 부르라 하니, 그 중은 오직 향가만을 알 뿐 '범패'를 모른다고 했다.

향가를 잘불렀던 월명스님도 부를 줄 몰랐던 인도음악인 '범패'는 아마 그 무렵에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절에서 재를 지내거나 예불을 올릴 때 쓰이게 된 듯합니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지내는 제사인 <상주권공재>, 저승의 십대왕에게 행운을 비는 의식인 <십왕각배재>, 물속의 외로운 혼을 위로하는 제사인 <수륙재>, 국가의 안녕이나 죽은 자를 위해서 지내는 제사인 <영산재>와 같은 의식을 거행할 때 부르는 노래인 범패는 가곡, 판소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성악곡 중의 하나로 꼽힙니다.

범패를 부르는 범패승.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00138648

서양의 그레고리 찬가처럼 장단도 없고, 가락도 없고, 감정도 없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한없이 느리게 부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요즘의 음악 정서와는 너무도 다른 먼 옛날의 이국적이고도 원시적인 음악 세계를 느끼게 됩니다.

깊은 산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범종 소리같이 그윽하고 고요하고 심오한 범패 소리는 경건한 종교 음악인 탓에 부르는 태도도 세속의 노래와 사뭇 다릅니다.

“고개를 흔들고 눈을 두리번거리면 안돼. 몸도 흔들지 말고, 뜻을 생각하면서 정성스럽게 잡념을 몰아내고 무아의 경지에서 소리를 해야지.”

범패승('어산' 또는 '인도승'이라고도 합니다)인 벽응 장태남 명인은 경기도 김포군 월곳면에 있는 ‘문수사’라는 작은 절의 주지였습니다.

겨울날씨답지 않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80년대의 어느 날, 문수산 자락에 자리잡은 문수사 안방에서 만난 귀가 크고 길며 미간이 넓고 흰 눈썹이 길게 돋은 스님에게서는 맘씨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와 같은 인자한 분위기가 풍겨왔습니다.

1909년 경기도 파주군 장마루촌에서 농사짓는 장용식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을 때만 해도 그의 집은 근방에서 알아주는 부잣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삼 년을 내리 흉년을 당하고 나니 싸그리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첫해는 홍수가 져서 남의 논은 다 놔두고 우리 논만 물에 실려가 농사를 망치더니, 둘째 해는 이상한 돌림병이 들어서 벼이삭이 픽픽 쓰러지는 통에 농사를 망치고, 셋째 해는 한참 잘 자라던 벼가 된서리를 맞아서 다 죽어 버렸어. 그렇게 삼 년을 연속 망하다 보니 완전히 폐농이 되어 버렸어.
아버님은 성미가 장대같이 곧아서 빚지고는 못 사는 분이라 땅 팔아서 빚갚아 버리고, 아들들은 남의 집에 머슴으로 나눠주고, 여기서 강만 건너면 갈 수 있는 장단이라는 이북땅에 ‘화장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에 나무도 때주고 잡일도 하는 부목으로 들어갔어. 그때 내가 여덟 살 때라.”

길게 머리를 땋고,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짚신을 신고 절에 간 소년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게만 여겨졌습니다. 여스님들만 모여 사는 미타암 곁에 있는 집에 이사한 뒤 부목으로 들어간 아버지는 가자마자 절에서 나무를 패고 불을 땠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이 왔다갔다 하는데 난 처음에 남잔 줄 았았지 . 그런데 목소리를 들어보니 여자야. 여자가 머리 빡빡 깍은 모습을 생전 처음 보니 참 이상해. 제사를 지낸다고 인절미를 하고, 가래떡을 하고, 과일을 깎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한 비구니 스님이 오더니 ‘부처님 종 땡땡 울리고 나서 이 인절미 먹어라.’ 하더란 말이야. 나를 거지로 알고 그러시나 싶어 창피하여 그 길로 집에 도망가서 한 사나흘을 절에 안 갔지.”

처음에는 수줍어서 며칠 안 갔지만 그뒤로는 낯이 익어 매일 절에서 살다시피했습니다. 제사할 때 봉지에다 사과, 밤, 대추를 싸서 나눠주고 떡도 먹고 과자도 먹으며 밤새워 노는 모습도 재미있었고, 머리 깎은 여스님들이 종치고 예불 올리는 염불 소리도 듣기 좋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같은 또래의 사미스님들과 절 뒷산에서 토끼를 쫓고 밤도 따고 칡도 캐며 노는 재미가 으뜸이었습니다. 그런데 짓궂은 빡빡머리 사미스님들은 어린 신도의 긴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놀려대곤 했습니다. 긴 머리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되기 싫었던 소년은 어머니에게 머리를 깎아달라고 졸랐습니다.

처음에 반대하던 어머니는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해 드디어 열세  살이 되던 해의 삼월 삼짓날에 머리를 깎고 계를 받은 뒤 사미승이 되었습니다.

화장사에는 극락암, 죽두암, 미타암 같은 암자가 아홉 개 있었는데 한꺼번에 제사를 지낼 정도로 신도 수가 많았습니다. 그런 만큼 재를 올릴 때의 노래인 범패나, 나비춤, 바라춤을 잘 하는 스님이 많이 있었습니다.

큰 재를 올릴 때는 밖에서 유명한 범패승을 청해 들였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귀동냥, 눈동냥으로 모든 의식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수계스님인 황청하 스님에게 벙패를 배울 때에는 함께 배우는 동료 중에서 제일 잘 한다고 칭찬을 듣곤 했습니다.

“황청하 스님은 서울에 있는 화계사에서 오셨는데, 화계사는 어찌나 재가 많았는지 화계사 부목이 공양재를 할 줄 안다고 할 만큼 큰 절이여. 그분에게서 기초를 배우고 우리 절의 사형인 김보성 스님에게 훗소리를 배웠지. 그뒤 그분의 스승인 이범호 큰 인도스님에게 짓소리를 마저 배웠어.”

절에서 쓰이는 노래는 음악적인 형태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나뉩니다.

재를 올리는 의식을 담당한 '안채비'들이 부르는 <안채비소리>, 다른 곳에서 초청해온 범패 전문 스님들이 부르는 <겉채비소리>, 그밖에 민속 음악의 가락에 가사를 얹어서 부르는 <화청>이나 <회심곡>이 있습니다.

안채비소리는 흔히 <염불>이라고 알려져 있는 노래로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을 민요의 엮음 가락처럼 촘촘하게 엮어 나갑니다.

겉채비소리는 '훗소리'와 '짓소리'로 나누어지는데 좁은 의미의 범패는 이 겉채비소리만을 가리킵니다.

훗소리는 대개 한문으로 된 찬양시를 혼자서 길게 부르는 형식이고, 짓소리는 훗소리를 모두 배운 범패승들이 한문으로 된 산문이나 산스크리트어로 된 경전을 반드시 합창으로 부릅니다.

예전에는 일흔두 가지가 있었다고 하나 오늘날에는 거의 사라졌고, 몇몇 범패 스님이 '인성', '거영산', '관욕게', '식영산', '거불'과 같은 열세 곡만을 부를 수 있을 뿐입니다.

고고형이 1929년에 지은 <이조불교>라는 책에 보면 “근년까지 경성 교외 백련사에 만월이라는 노승이 있어 범패로 유명하였다. 원래 경성의 동서산에 각각 만월이 있어 실력이 서로 백중하였다. 이 만월은 서만월이라고 한다.” 고 씌여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서만월의 여러 제자 중에 이범호 스님이 있고, 그 스님의 제자로 김보성 스님이 있으니, 장태남 스님은 서만월의 손자 제자뻘이 된다 하겠습니다.

“이 범패가 하도 어렵고 재미가 없어서 모두들 조금씩 배우다가 다 나가 떨어지고 제대로 못 배웠어. 그런데 나는 재미를 느껴서 혼자 산에서도 익히고 길 가면서도 익혀. 그러니 선생님들이 재주가 있다고 귀여워 하셔.
내가 음악에 재주가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라. 우리 절이 박연폭포 가는 길에 있어서 폭포에 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우리 절에 들렀다 원통사에서 자고 가는데, 이 사람들이 장구 치고 호적 불고 떠들썩하게 놀아. 그 호적소리가 어찌나 듣기가 좋은지 혼자서 호적 들고 산골짜기에 들어 가서 흉내내어 불어. 그래서 들려주면 모두 잘한다고 해.
그 후 호적 불고 박연폭포까지 길 안내하기도 했지. 한번은 서울에 갔는데 동양극장 단원들이 손님을 청하느라 풍물을 치고 대취타를 불면서 거리를 누비는데 산에서 못 들어본 정통 소리라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들어서 귀에 익혔어. 그래도 귀동냥으로 배운 소리라 처음과 끝을 몰라. 그래서 동대문 밖 숭인동에 있는 방생원에 있으면서 윤만순 씨라는 분에게 제대로 길을 닦았지.”

화장사를 근거로 삼고, 서울 홍은동의 백련사나 숭인동의 방생원을 연락처로 삼아 여기 저기 다니면서 젊은 범패 스님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스물한 살 때에 어떤 스님의 손녀딸로 어머니가 데려다 길러 온 처녀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때는 대처승과 독신승이 서로 다투지 않던 시절이라, 결혼한 뒤에도 계속해서 전국을 떠돌며 이 절에서 저 절로 재를 지내러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서른한 살이 되던 해에 몸담고 있던 화장사를 떠나 서울 청담동에 있는 삼각사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설흔 살 무렵인가 백련사에서 범패 인간문화재로 함께 지정을 받으신 박송암 스님을 처음 만나 같이 범패를 부르고 재미있게 놀았지. 그러다가 헤어졌는데 황해도 성불사에서 만나 한 번 같이 불렀어. 그후 봉원사에서 본격적으로 같이 범패를 불렀는데, 그 친교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어.”

박송암 스님과 그는 마치 서만월과 동만월이 쌍벽을 이루었던 것처럼 우리나라 범패의 우뚝 선 두 봉우리였습니다.

송암 스님의 목소리가 맑고 청아하고 고음이 잘 나오는데 견주어서, 벽응 스님의 목소리는 무게 있고 깊이 있고 포근하고 구수하고 담담하고 저음이 잘 나옵니다.

서로의 특색 있는 목소리로 화음을 이루어가며 그들은 젊은 범패스님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의 어수선한 시국에 그들 역시 범패만 부르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젊은 스님들은 징용으로 끌려가고 서른이 넘은 스님들은 보국대란 명목으로 부역을 나가야했던 시절에, 그는 김포공항 길 닦는 보국대에서 한동안 일을 하다가 강화 황산도에서 길 닦는 중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일을 하던 중 비행기가 날아와서 폭격을 하는데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그 며칠 뒤에 집에 가서 들으니 사람들이 천황폐하가 항복했다고 수군수군해. ‘목 달아날 소리 하지도 마라.’고 하고서 길로 나오니까 양철통이나 세숫대야를 두들기면서 만세를 부르고 난리가 났어.”

절에서도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던 그들인지라 해방은 무척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사찰령'은 그 감격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습니다.

대처승은 왜색이라고 하여 독신승과 구별하여 태고종과 조계종을 갈라놓은 게 탈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전까지는 한 승적에 같이 올라 사이좋게 지내던 대처승과 독신승이 수십 년간 피투성이 싸움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조계종과 태고종이 옛날부터 갈라져 싸워온 것과 같은 인식을 사람들에게 주었고, 범패를 위주로 하는 태고종의 의식은 멸시받고 소외당했습니다.

절에서 재를 올리기 위해 할 수 없이 청하기는 하지만, 옛날처럼 다정하고 우호 있는 분위기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편견이 점점 굳어져 가고 있는 것을 벽응 스님은 못내 안타까워했습니다.

“범패 뿐만 아니라 불교 의식을 거행할 때 바라춤, 나비춤을 추는 것을 '작법'이라고 하는데, 범패스님들은 모두 그것을 할 줄 알지. 그런데 어떤 스님들은 중이 무슨 춤을 추느냐며 못마땅하게 여긴단 말이야. 이것이 모두 해방 뒤에 생긴 편견들이지.
그리고 가사짓는 법, 가사 입는 법에서부터 가사 색깔까지 지금은 마구잽이야. 제대로 아는 이가 없어. 그래서 내가 중곡동에 있는 원릉원이란 곳에서 불교의 의법을 가르치는데 모두 어렵고 까다롭다고 나가 떨어져. 그러니 옛법은 이제 모두 망가졌어.”

바라춤을 추는 범패승. 출처 : http://www.mediabuddha.net/print_paper....r%3D2503

자기가 입는 가사를 손수 바느질해 가며 옛법대로 지어서 입을 만큼 고지식하고 경건한 그는 지나치게 옛법을 무시하고 참선과 경전에만 치중하는 요즘의 풍토를 못내 안타까워 했습니다.

6.25때 피난 와서 잠깐 묵은 뒤, 주지가 열반하자 여러 사람의 권고로 눌러 앉게 된 문수사 주지 노릇을 하면서 몇 번이나 구석지고 가난한 절을 떠나 서울로 올라갈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동네 주민들이 말리는 통에 그곳에서 평생을 지내다 열반하셨습니다.

“절동네 쳐놓고 부처님 신심 있는 동네가 없는데 여기는 신도가 많아. 이곳이 가난한 동네라 어떤 신도는 ‘뭐가 있어야 부처님께 바치지.’ 하고 걱정을 해.
그럼 내가 ‘부처님이 당신더러 뭐 가지고 오라고 했소? 당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논에 가서 보리 이삭 떨어진 거 주워. 그걸 절구에다 찧어서 보리공양 올리고 부처님한테 기도 드려.’ 하면 그들은 ‘그래도 돼요?’ 하고 되물어. 되고 말고가 어디있나 정성이 문제지.
절이란 데가 쌀이 흔한 곳이야. 여름이면 바구미가 나고 쌀이 썩다시피 해. 보리 고개 때 가난한 사람들이 쌀 얻으러 와. 열 말을 얻어가면 가을에 열닷말을 가져와. 이게 뭐냐고 물으면 장리래. 이자라 이거지. ‘나는 고리대금업자 아냐!’ 하고 호통을 치고 도로 주어 보내. 그 덕에 인심을 잃지 않고 지낸 모양이야. 내 소원이 고아원이나 양로원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그 꿈을 영영 이루지 못하고 한세상 가는가봐.”

장태남 스님. 출처 : http://www.lba.or.kr/gnu/inmul/list.php...ge%3D107

탄식 끝에 회색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범종을 두드리며 저녁 예불을 올리는 그의 모습에서 비로소 경건한 고승의 모습이 내비치고 있었으니, 이는 오로지 오동나무 떡갈나무 사이에서 산새를 벗삼아 아침 저녁으로 '음성공양'을 올린 그의 오랜 공덕 탓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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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마을의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나, 비가 안 와서 기우제를 지낼 때나, 추석이나 정월대보름 같은 명절날에 놀이를 벌일 때나, 농사를 지을 때나, 집을 짓거나 다리를 놓을 때면 반드시 농악을 쳤습니다.

http://www.pttv.go.kr/pt/a1_NewsData_vi...6sstr%3D

이런 때 농악을 치는 풍물패들은 마을의 한 일원으로 마을을 위한 음악을 연주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을 예전에는 ‘두레패’니 ‘두렁패’니 하는 말로 불렀습니다. 이들은 풍물치는 것을 생업으로 삼지 않고 농사를 짓거나 다른 직업을 가지고 살면서 틈틈이 농악을 칩니다. 따라서 이들의 기예는 소박하고 집단적입니다.

이들과 달리 풍물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어디든지 떠돌아다니면서 농악을 치는 사람을 ‘뜬패’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어느 한 마을만을 위한 농악보다는 자기의 기예를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찾아다니기 때문에 기교가 뛰어나고 개인적입니다.

풍물패 중에서 꽹꽈리치는 사람을 ‘쇠잽이’ 또는 그냥 ‘쇠’라고 하는데, 이 ‘쇠’ 역시 그 활동의 모습에 따라서 ‘두렁쇠’와 ‘뜬쇠’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떤 ‘쇠잽이’가 두렁쇠냐, 뜬쇠냐 하는 구분은 간단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느 ‘뜬쇠’든지 처음에는 ‘두렁쇠’로 출발하는 법이고, 어느 ‘두렁쇠’든지 기예가 뛰어나면 ‘뜬쇠’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두렁쇠의 역할도 하고 뜬쇠의 역할도 하는 중간적인 사람도 있기 때문에 딱 잘라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살펴 볼 때 전라도의 산간 지방에서 행해지는 좌도 농악에 두렁쇠가 많고, 전라도의 평야지대에서 행해지는 우도 농악에 뜬쇠가 많은 것은 무척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좌도굿의 상쇠들은 가락이 고풍스러우며 다른 악기와의 어울림 곧 ‘합굿’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반면에 우도굿의 상쇠들은 가락이 화려하며 개인의 기예가 중심이 되는 ‘개인놀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상쇠 유순자 명인. 출처 : http://www.cjac.or.kr/home/cjac.php%3Fm...id%3D402

전라북도 김제군은 전라도에서 가장 넓은 김제, 만경 평야를 끼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당연히 전라우도굿 가락이 전해져 오고 있고, 이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꽹꽈리 치다 돌아가신 상쇠 김문달 명인 역시 두렁쇠보다 뜬쇠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

“백구면에서 김문달이 하면, 꽹꽈리땜시 논 열다섯 마지기 팔아 먹은 사람이라고 소문이 쫙 나 있어. 젊어서부터 한 번 집을 나갔다치면, 반 년이고 일 년이고 팔도를 돌아 댕기다가 일이 없으면 집에 와서 좀 쉬고, 그러다가 일이 생기면 또 훌쩍 떠나가버리고는 했응게. 그러니 집안 살림은 엉망이 되고, 가지고 있던 살림마저 거덜이 나버린 것이제.”

그 기질은 그의 부친 김치덕씨에게서 부전자전으로 물려받은 것입니다. 1907년 4월 10일에 김제군 백구면 부용리에서 태어난 그는 갓난 아기 때부터 부친이 치는 북소리와 풍물소리를 자장가로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의 부친은 백구면에서 유명한 한량으로 판소리를 좋아해서 소리북도 잘 쳤고, 농악을 좋아해서 자기 돈을 들여 농악단을 만들어서 치고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자니 자연히 살림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농 소리를 들을 만큼 재산이 넉넉하던 터라 김문달은 어린 시절에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때는 농사짓는 틈틈이 정월 대보름날에 지신밟기굿도 치고, 모내기를 끝내고서는 술맥이굿도 치고, 칠월칠석이나 백중 같은 날에는 사흘씩 굿을 치기도 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굿만 쳤다허면 신이 나서 따라 댕기는디, 내가 어쩌다가 꽹꽈리를 잡고 칠라고 허먼 어른들이 못 치게 말려. 그리서 동네 꼬마들끼리 모여서 오동나무 잎사귀로 고깔을 만들어서 쓰고, 양철 쪼가리 줏어다가 꽹꽈리를 만들고, 부엌에서 양푼을 훔쳐다가 징을 만들어서 우리끼리 두들겨대고 춤을 추고 놀았어. 그것이 어찌나 재미나던지 어른들도 껄껄거리고 웃었지. 나는 그때도 양철때기로 상쇠 노릇을 했어.”

꽹꽈리 치는 사람은 그 솜씨에 따라 맨 앞에서 치는 ‘상쇠’와, 그 다음에서 치는 ‘중쇠’와 맨 끝에서 치는 ‘종쇠’ 또는 ‘끝쇠’의 서열이 있습니다. 이 서열은 대단히 엄격해서 ‘중쇠’나 ‘끝쇠’가 상쇠가 되려면 대단히 오랜 경험과 숙달된 기량이 있어야 됩니다.

이 재주많은 '꼬마 상쇠'는 동네 어른들의 귀염을 받으면서 상쇠로서의 꿈을 무럭무럭 키워갔습니다. 서당글도 못 배우고 학교 문턱에도 안 가본 그의 관심은 오로지 꽹꽈리에 쏠려 있었고, 이를 안 아버지는 그를 정읍에 사는 김도삼 상쇠에게 맡겼습니다. 김도삼 명인은 우도굿의 대가로 전라도에서는 최고 ‘웃길’로 꼽히는 사람이었습니다.

김도삼 명인은 꽹꽈리에 미친 꼬마를 자식같이 사랑하며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꽹꽈리를 가르칠 때에는 매우 엄격하여, 따라 친 가락이 틀리거나 제대로 받아내지를 못하면 종아리를 때리곤 했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꽹꽈리를 배우고 상쇠가 지녀야 할 여러 기예를 배우는 동안, 그의 부친은 세상을 떠나고 그는 견습생에서 끝쇠가 되었습니다.

비록 끝쇠지만 당당히 판에 나가서 솜씨를 보인 지 몇 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스승인 김도삼 명인이 돌아가시게 되어 그의 수제자이자 중쇠였던 현판쇠가 상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도 한 계단 높아져서 중쇠가 되었고, 현판쇠를 따라다니면서 오륙 년쯤 친 뒤에 그는 스스로 독립해서 상쇠가 되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상쇠가 되자 그 역시 선배 상쇠들이 했던 것처럼 여기 저기 불려다니며 굿을 했고, 때로는 포장걸궁을 꾸며서 전국을 떠돌기도 했습니다.

“포장걸궁이란 것은 포장쳐 놓고 돈 받고 굿치는 것이여. 말뚝 한 스무 개쯤을 박아놓고 광목을 빙 둘러서 쳐 놓고는 십 전씩 받았어. 가끔씩 소리꾼도 불러다 함께 놀기도 했는디, 이놈의 것이 어떻게 된 게 회계를 보면 남는 때보다 밑지는 때가 많어. 그러니 논만 세 필지 팔아 먹고 때려쳐 버렸지.”

혼인을 해 놓고도 농사고 뭣이고 때려치우고 홀어머니를 맡겨 놓은 채 밖으로 돌아다니다가 섣달 그믐이나 팔월 열 나흘이나 돼서 얼굴을 비치고, 돈이 생기면 다른 색시하고 연애하는 데에 다 써버린 뒤 빈털터리가 되어서 돌아오는 신랑을 새색시 김순이는 군말 한 번 하지 않고 웃으면서 맞이하고 웃으면서 보냈습니다. 그러한 색시의 수더분하고 따뜻한 품에서 지친 몸을 쉬고 있던 그에게 이번에는 징용장이 덜컥 날아 들었습니다.

꼼짝없이 붙들려 기차로 엿새 동안을 타고 가서 나전이라는 곳의 굴 속에서 전기공사 작업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세 번 죽었다가 살아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작업하던 굴이 폭격을 받는 통에 한 번 죽으려다가 살아나더니, 그 다음에는 돌림병인 염병에 걸렸습니다. 같은 방을 쓰던 동료들이 모두 죽어가는 동안에도 그는 목숨을 부지하다가 병원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기차를 타다가 걷다가 하면서 한 달 열흘 만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질병과 굶주림과 피곤함으로 초죽음이 되어서 돌아온 그를 어머니와 부인은 지성으로 간호했습니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건강을 되찾은 그는 '배운 것이 도적질'이라고 또 다시 굿을 치고 다녔습니다. 이미 우도굿 상쇠로는 이름이 났던 터라, 해방 뒤에 왁자하게 벌어진 놀이판과 굿판에 여기저기 불러가며 신나게 굿을 치고 놀았습니다.

좌도굿에 견주어서 우도굿은 볼거리가 많고, 의상도 화려하고, 개인기가 뛰어나고, 가락도 다양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인기를 끌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오랫동안 포장걸궁을 다닌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관중의 수준과 판의 상황에 맞추어서 판을 짜 나가고 때로는 즉흥적으로 가락을 변화시키거나 재담을 넣거나 하여 지루하지 않게 판을 끌어가는 솜씨가 뛰어났습니다.

게다가 그는 꽹꽈리 솜씨뿐만 아니라 '부포놀음'도 뛰어났는데, 우도 농악의 부포는 좌도 농악의 상쇠가 쓰는 부들부들한 ‘부들상모’가 아닌 ‘뻣상모’를 씁니다.

뻣상모 도면. 출처 : : http://gugung.com.ne.kr/pungmul/pung07.html

기러기나 고니의 털을 엮어서 만든 부포의 물체 속에 철사를 넣어서 뻣뻣하게 만든 상모를 쓰고서 이리저리 돌리기도 하고, 세웠다 꺾기도 하고, 콕콕 찍기도 하고, 빙빙 돌렸다가 위로 발딱 세우기도 하는 재주는, 가락을 다 배운 뒤에도 따로 또 훈련해야 하는 어려운 재주입니다. 이런 재주가 솜씨있게 발휘되면 단조롭던 놀이판에 바짝 신명이 솟구치고 갑자기 생기와 활기가 넘쳐나게 됩니다.

이렇게 신명나게 굿을 치며 다니던 그에게 6.25 사변은 색다른 경험을 하게 해 주었습니다.

“전쟁이 났을 때 피난갈 데도 없고 히서 그냥 집에 있었는디, 인민군이 들어 왔어. 오더니 직업이 뭐냐고 물어. 그리서 농사를 짓는디, 그보다 꽹꽈리가 내 직업이라고 했더니 아 그러냐고 험서 내 손을 잡고 악수를 허고 좋아서 막 웃더란 말이여. 그리더니 북을 가지고 와서 둥둥 거림서 같이 치자고 허더니 대우를 기막히게 히 주더란 말여. 부자나 순경 가족들은 막 데려다가 죽이고 때리고 그러는디, 우리들은 아주 칙사 대접을 허고 동무, 동무험서 친허게 대허드라고. 그렇게 여름에 들어와서 가을에 추수헐 때까지 인민군이 있었는디, 추수허기 전에 우리 대한민국 군인들이 들어옹게 가들이 도망가 버리드만. 나참 인민군이 그렇게 농악을 좋아하는지 그때 처음 알았어.”

농악으로 인민군에게 ‘대우’도 받아 본 그는 전쟁이 끝나자 ‘백구농악단’을 조직했습니다. 자기와 함께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장구를 쳐 왔던 박판금 명인과 징을 치는 김성기 명인 등이 중심이 되어 이십 명쯤되는 단원을 모아 오륙 년쯤 돌아다녔습니다.

세 아들과 딸 한 아이가 아버지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만큼 맹렬하게 굿을 치고 다녔지만 남은 것은 빚과 단원들의 원망과 실의뿐이었습니다. 결국 ‘백구농악단’은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뒤로 그는 농악단 단장 노릇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단장이란게 기량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사교 수단도 좋아야 하고 돈쓰는 법도 알아야 하는데, 자기는 도무지 그런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줄을 뒤늦게야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단체에서 교섭이 들어오면 개인 자격으로 참가해서 상쇠 노릇을 했습니다. 그때 마침 지금의 익산인 이리에 농악단이 생겨나는 바람에 그는 이리농악단의 상쇠가 되어 각종 대회에 나가서 상을 휩쓸었습니다.

이리농악. 출처 : http://korean.visitkorea.or.kr/kor/ti/e...3D130040

“내가 나가기만 허먼 면대회든 군대회든 전주대사습대회든 전국 민속경연대회든 어디든지 가서 상을 타와. 일등을 못 허먼 이등이라도 타온단 말이여. 그 덕에 이리농악단이 1985년에 문화재가 됐지. 나는 기능보유자가 되고, 허참. 그런디 달랑 나 혼자만 이리에 가서 문화재가 되어 놓으니 우리 백구농악단들이 어찌나 서운히 허는지, 내가 시방도 마음이 아프고 그 사람들 한티 미안혀. 그 사람들 실력이 절대로 다른 농악단보다 뒤떨어지들 않는디, 단체가 없응게 활동을 못 헌단 말이여. 장구치는 박판금이는 시방 문화재가 되고도 남을 실력이여. 내가 볼 적에는 장구로는 시방 우리나라서 최고 실력자다 이말이여.”

그는 그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였습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아직도 백구농악단에 대한 정열과 자부심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걸 보면 “허리도 아프고 팔뚝도 아프고 잘 때는 ‘아이고’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아프다가도 꽹꽈리만 들으면 씻은 듯이 나아버린다.” 는 그의 말이 허술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작달막한 키에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쓴 눈가에는 검버섯과 주름이 돋아 있고 허리는 굽어 영락없이 쓸쓸한 시골 할아버지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꽹꽈리만 들면 갑자기 걸음새가 가벼워지고 사뿐거리면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눈에는 총기가 서렸던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방랑과 꽹꽈리에 미쳐서 보낸 곡절많은 예인의 한평생이 번쩍 한무리의 섬광으로 응축되어 나타나는 것만 같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숙연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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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지방에 전해 오는 민요 중 가장 유명한 민요는 <밀양 아리랑>일 것입니다.
날좀 보소 날좀 보소 날조곰 보소
동지섣달 꽃본 듯이 날좀 보소
아리랑 닥궁 스리랑 닥궁
아리리가 났네
아리랑 어절시구 잘 넘어간다

담 넘어 갈 때는 큰 맘을 먹고
문고리 잡고서 발발 떤다
아리랑 닥궁 스리랑 닥궁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어절시구 잘 넘어간다

이 <밀양 아리랑>은 전라도 지방에 전해 오는 <진도 아리랑>과 강원도 지방에 전해 오는 <강원도 아리랑>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리랑으로 꼽힙니다.

그런데 다른 지방의 아리랑에 견주어 <밀양 아리랑>은 특히 가락이 흥겹고 장단도 빠르며 경쾌합니다.
각 지방의 민요가 그 고장의 풍토나 인심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때 <밀양 아리랑>이 이렇듯 흥겹고 경쾌한 것은 밀양 지방의 땅이 풍족하고 인심이 넉넉한 데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의 <밀양도호부>편에 보면 밀양이 “긴 내를 굽어 당기고 넓은 들을 팽팽히 얼싸안고 있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숭상하게 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실제로 밀양군은 오늘날에도 경상남도 안에서 가장 농업이 성한 곳으로 꼽힐 뿐만 아니라, 갖가지 민속놀이가 다양하게 전해 내려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밀양 백중놀이>나 <밀양 새터 가을굿>이나 <감내의 줄당기기>나 <용호놀이> 같은 놀이들이 새롭게 발굴되어 소개되었고, 그 중에서도 <백중놀이>는 밀양의 이름을 나라 안에 널리 떨치게 만들어서 밀양하면 백중놀이를 연상할 만큼 유명해졌습니다.

출처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01_02_04

하늘 위에 상제님 천하 용왕님
바람기 순조롭고 벌구잡충 없이 하며
금년 농사 잘도 해서 총각 신세 면케 하고
앞논에 용신님 뒷논에 용신님
들쥐도 막아 주고 나는 새도 막아 주고
회기종도 막아 주고 흰무리도 막아 주소

농신제 축문을 읽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백중놀이는 힘겨운 세벌 논매기를 끝낸 백중날, 곧 9월 보름을 전후한 용날에 동네 머슴들이 모여서 벌이는 놀이였습니다.

마당 한가운데에 저릅대로 만든 '농신대'를 세우고 동네 사람들이 쌀이나, 콩, 돈, 축원문을 넣은 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둥그렇게 둘러서서 세 번 절하며 그 해의 풍년과 복을 빈 다음, 그 해에 농사를 제일 잘한 장원을 지게 목발로 만든 ‘작두말’에 태우고 머슴들끼리 놀이판을 벌입니다.

그 판에 양반이 끼어들어 거드름을 부리며 '양반춤'을 추면 머슴들과 부엌 일하는 여인들인 '정지꾼'들이 여기 저기서 나타나 병신춤으로 양반을 놀리고, 쫓겨난 양반은 범부 차림으로 다시 나타나 서민들과 어울려 '범부춤'을 흥겹게 춥니다.

그런 다음 북잽이들이 큰 북을 메고 나와 밀양 백중놀이에만 유일하게 전해오는 '오북춤'을 춥니다. 이 오북춤은 '오행'과 '오기'가 순조롭기를 빌며 '오체'가 성하고 '오곡'이 잘되고 '오복'을 누릴 수 있기를 비는 뜻이 담겨 있는데, 이 오북춤이 끝나면 모든 놀이꾼과 구경꾼이 한데 어우러져서 마지막 뒤풀이를 합니다.

하보경 명인은 밀양 읍내에서 이 놀이를 제일 오랫동안 놀아온 춤꾼입니다.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인지도 정확하게 기억 못할 만큼 오래 살다 돌아가신 그는, 나이는 잊어버렸어도 백중놀이에 대해서만은 어느 것 하나 잊어 버린 것이 없을 만큼 뼛속 깊이 이 놀이가 배어있는 분이었습니다.

출처 : http://www.gallerywa.co.kr/column1.asp%...dx%3D864

1909년인가 1905년인가에 하성옥의 큰아들로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친은 이미 밀양 읍내에서 이름난 북잽이였습니다.

부친은 놀이를 좋아해서 읍내에서 놀이가 벌어질 때는 앞장을 서서 놀았고, 어느 때는 풍물패를 조직해서 이 동네 저 동네 떠돌아 다니며 서너 달씩 집을 비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단체가 해산되면 집에다 악기를 풀어놓고 흩어지는데, 돈을 못 벌었거나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열흘이나 보름씩 그의 집에서 쉬어 가기도 했습니다. 하보경 소년은 어려서부터 늘상 그 어른들이 치는 풍물소리를 듣고 그 어른들이 추는 춤을 보며 자랐고, 틈만 나면 그들에게서 춤과 악기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밀양보통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이미 웬만한 장단이나 춤은 따라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지만 아버지의 눈이 무서워 드러내 놓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은 놀이를 좋아할 망정 아들만은 공부를 착실히 해서 면서기 같은 훌륭한 인물이 되어주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아들이 남 앞에서 북치고 노는 것을 엄하게 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명절마다 벌어지는 푸짐한 마을 놀이 때면 그는 엉덩이가 들썩거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밀양은 산이 좋고 들이 넓고 물이 좋고 하니께네, 보리도 잘되고 나락도 잘돼, 소 없는 집이 없고, 머슴없는 집이 없는 기라. 백중날 날받이 옷도 해주고 음식도 해주고 푸짐하게 노는데, 우째 신이 나는지 하루 종일 따라 다녀도 재미가 있는 기라.”

천성이 춤과 놀이에 무한히 끌려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데다가,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친구들의 영향으로 악기와 춤의 기초를 다진 그가 얌전하게 학교 공부나 하길 바란다는 것은 고양이 앞에 생선을 놓고 먹지 말라는 것과 같은 요구였습니다.

결국 그는 열여섯 살 무렵에 아버지 몰래 놀이판에서 북을 치고 말았습니다.

솜씨를 인정받은 그는 스무 살 무렵에는 춤까지 출 수 있게 되었는데, 같은 쪽의 손과 발이 함께 움직이는 '걸음새'와, 퉁기는 듯한 느낌을 주는 '배김새'와, 턱을 묘하게 끄덕거리는 독특한 '고개놀림'과 같은 양반춤의 진한 맛이 그의 몸 구석구석에서 배어 나오자, 보는 구경꾼들이 탄성을 올렸습니다. 그 뒤로 그는 일약 멋진 춤꾼으로 읍내에서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 덕에 장옥도라는 처녀와의 혼담도 쉽사리 이루어져 장가도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춤 잘 추고 놀기 좋아하는 밀양 멋쟁이로 이름이 드높아져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다니는 재미에 맛을 붙일 무렵, 아버지가 병에 걸려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스물네 살쯤 되었을 때에 부친이 세상을 뜨자,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본계’ 계원이 되었습니다.

보본계는 백년이 넘게 내려오는 밀양 읍내의 놀이계로, 마흔 명쯤 되는 계원들이 정초에 읍내를 돌아다니며 지신밟기를 해주고, 봄에 한차례 모여서 걸판지게 노는 단체였습니다. 이 계원들은 저마다 악기나 노래나 춤에 재주가 있어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읍내 한량들이 서로 다투어 계원이 되고 싶어했지만, 웬만큼 솜씨가 없으면 계원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계에 젊은 계원이 되었으니 한량인 그로서는 대단히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나쁜 짓’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무서운 아버지도 안 계시겠다, 물려받은 재산은 넉넉하여 부농 소리를 듣는 살림이니 의식주 걱정없겠다, 얼굴 잘생기고 젊고 멋있겠다, 춤 잘 추고 놀기 좋아하겠다, 아무튼 그에게는 '방탕'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셈이었습니다.

어디에 놀이판이 벌어졌다 하면 불원천리하고 달려가고, 씨름판이 벌어졌다 하면 다시 바람같이 달려가서 심판을 보며 신나게 놀고, 어디에 예쁜 기생이 있다 하면 부리나케 옷 빼입고 놀러가는 통에 그 많던 재산이 조금씩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윷놀이에 미치지만 않았어도 부친의 재산을 다 날려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밀양의 하보경, 삼칸집 너머로 던져도 모가 난다.”는 말이 나올 만큼 이름난 내기 윷꾼이던 그는 결국 재산을 다 날린 다음 손을 톡톡 털었습니다.

일본 식민지 말기의 전쟁 바람은 밀양에도 불어 닥쳐 놀이판은 금지당하고, 술 마시고 놀음을 하면 잡혀가고, 쇠로 된 악기는 모두 전쟁물자로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고생스럽고 재미없는 시절을 간신히 넘긴 그는 해방이 되자마자 친구들과 ‘5.3 친목계’를 조직하여 마음껏 놀기로 작정했습니다.

보본계의 뜻을 이어받아 조직된 5.3친목계에는 타관 객지에 흩어져 있던 재주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북춤 잘 추는 김상용 명인, 권채입 명인, 이재원 명인, 김달수 명인과 꽹과리 잘 치는 정한목 명인, 김타업 명인과 징 잘 치는 김석화 명인 등이 중심이 되어 정초에 지신밟기 하고 봄에 한차례 크게 놀았습니다.

그 단체가 점점 발전하여 1960년에 한국사단법인 밀양국악협회가 탄생되었고, 1980년에는 민속예술보존협회가 생겨났습니다. 그해 10월에 제주시에서 벌어진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은 뒤 중요 무형 문화재 68호로 지정받고 하보경 명인이 <양반춤>과 <범부춤>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받게 되자, '밀양백중놀이'는 갑자기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여기 저기 초청공연을 갖게 되고, 1981년 8월에는 미국의 국제 무용단 초청으로 하보경 명인이 대표로 미국에도 갔다오고, 1982년에는 김타업 명인이 상쇠 예능보유자로 지정 받게 되고, 거의 해마다 두세 번은 민속제나 예술제에서 가장 인기있는 종목으로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백중놀이의 참가자들은 모두 저마다 재주가 뛰어나고 신명이 넘쳐 흘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흥겨움에 겨워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중에서도 하보경 명인의 춤은 보는 사람의 넋을 빼앗아버릴 만큼 뛰어났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에 하얀 띠를 맵시있게 두른 그가 십 년이 넘게 기른 하얀 수염을 바람에 휘날리며 하얀 도포를 입고 검은 관을 쓰고 미투리 신고 하얀 부채를 손에 들고 '양반춤'을 추거나, 하얀 중의적삼에 상투를 꼽고 웃댕기를 매고 미투리 신고서 '범무춤'을 추거나, 흰 중의적삼에 상투 꽂고 짚신 신고 큰북을 메고 북채를 손에 들고 딱딱딱 하면서 '북춤'을 출 때면 그의 말대로 “미국 처녀도 반해서 볼따구에 뽀뽀를 할” 지경이었습니다.

출처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01_02_04

그의 춤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의 춤이 “삶 속에서 우러나온 생활의 멋과 소박함과 흥겨움이 조화를 이룬 건강한 춤”이라고 찬미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잘 짜여진 무대무용과 교태가 가득한 기방춤에 맛들인 사람들은 그의 춤이 “촌스럽고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다.” 고 혹평하기도 합니다.

그런 예술가들의 현란한 말에 주눅들린 그는 그래서 누가 자기 춤에 대해서 물어보면 자신을 낮추며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 춤은 춤도 아닌 기라. 서울서 춤추는 사람들 얼매나 잘 추나? 그런 사람들한테 비하모 내는 춤춘다꼬 말도 몬하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이렇게 반문함으로써 일침을 놓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 춤은 예전부터 내려오는 것을 그대로 추는 춤이라. 사람들이 그걸 알아주고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건데 우리 춤이 엉터리라 카모, 우리 조상님들이 추던 춤들이 전부 엉터리란 말이가?”

오늘날 이 나라 춤의 대부분이 일제시대의 권번에서 추어오던 기방춤의 변형인 현상을 걱정해 온 사람들에게는 그의 춤이 가진 토속성과 소박함을 찬미합니다.

본디 삶과 일 속에서 나왔으면서도 예술은 지금 그것들과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아직도 일과 놀이 속에서 멋들어지게 춤이 추어지고, 거기서 얻어진 신명이 다시 삶 속으로 되돌아가 삶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 멋진 삶의 현장에서 평생 동안 춤을 추며 살아온 그의 춤은 사위 하나하나의 세련미와 예술성을 따지기에 앞서 이미 몸으로 전해오는 진한 땅 냄새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고한 예술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끈끈한 삶의 정서인 것입니다.

젊어서부터 가정을 돌보지 않고 멋과 흥에 취해 살아 온 그이지만 그래도 아들 둘과 딸 셋을 모두 번듯하게 키워 놓았고, 큰 아들이 낳은 손자 용부는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아 그의 북춤 전수자가 되었습니다.

성격이 느긋하고, 골치아픈 일 싫어하고, 신나는 일만 있으면 만사를 제쳐 놓고, 걱정거리가 있어도 껄껄거리고 웃으며 넘긴 낙천성과 대범함이 그의 춤을 푸지고 신명나게 만들어주고, 1997년 90여세가 다 될 때까지 장수하다 돌아가시게 한 비결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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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익산군은 부여 지방과 함께 마한·백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곳입니다.

기름진 황톳빛 땅과 나지막한 구릉들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어 사람 살기 딱 좋은 곳이라는 느낌을 주는 이 지방에는, 고대 문화의 중심지답게 미륵탑이나 왕궁탑과 같은 유적이 많이 남아 있고, 민속놀이나 민요와 같은 문화 유산들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군 안의 삼기면 검지마을의 농요는 다른 지방에서 들을 수 없는 독특한 가락을 지니고 있어 전북지방의 대표적인 농요 보존 마을이 되었습니다. 마을 동편으로 미륵산을 마주 바라보며 자리잡은 검지마을은 백 가구가 채 못 되는 주민들이 오순도순 모여서 살고 있는, 아담하고 조용한 전형적인 전라도의 촌마을입니다.

이 마을에는 농삿일을 하면서 부르는 여러 노래들이 풍부하게 전해오고 있습니다. 

모를 심을 때 부르는 노래인 <농부가>,
김을 매면서 부르는 노래인 <만물 산야>,
벼를 베며 부르는 노래인 <벼베는 산야>,
볏단을 져나르면서 부르는 노래인 <등짐 노래>,
타작하면서 부르는 노래인 <타작 노래>,
절구통에 방아를 찧으면서 부르는 노래인 <방아찧기 노래>,
산에서 지게에 나뭇짐을 지고 오면서 지게 목발을 두드리면서 부르는 노래인 <지게 목발 노래>,
여인들이 다듬이질을 하면서 나무하러 나간 낭군을 그리는 노래인 <도의가>,
서동요의 설화를 내용으로 담은 <선화공주 노래>,
<산타령>, <콩꺾자 콩꺾자>, <상사소리>, <작대기타령>, <꿩타령>, <둥당게타령>.....

출처 : http://100.nate.com/dicsearch/pimage.ht...26v%3D43

한 세기 전만 해도 백성들이 일을 할 때나 놀 때나 사랑을 할 때 그들의 한과 흥을 풀어 주는 가장 가까운 삶의 벗이었던 이 주옥 같은 노래들이 세태의 변화에도 굴하지 않고 이 마을에 살아남아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참으로 값지고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들은 저절로 살아남은 게 아니었습니다. 한 농부의 희생적이고도 집념어린 노력이 없었던들, 이 노래들은 일찍이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린 또 하나의 아까운 문화유산이 될 뻔했습니다.

박갑근 명인은 이 고장 민요의 산 증인이자, 계승자이자, 발굴자이자, 최고의 실력있는 노래꾼이었습니다.

그는 익산 농요보존회 회장이란 직함이 아무래도 어색하게만 여겨졌던는 갈 곳 없는 농부였습니다. 다른 농부와 다른 점이라고는 노래를 좋아하고 남보다 노래를 ‘쬐끔’ 잘 하는 것 뿐이라는 겸손하고 조용하고 점잖은 검지마을 토박이였습니다.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박해명의 3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비록 농사를 지으며 살기는 했지만 한학을 하시고 예의와 체통을 중히 여기는 할아버지의 완고한 고집 때문에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노래라는 것도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마을에서 농삿일을 할 때면 풍물을 신나게 두드리며 풍장을 쳤고, 앞소리꾼이 소리를 매기면 마을 사람들이 구성진 목으로 뒷소리를 받으며 신명나게 일들을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유난히도 그 노랫소리에 끌려서 하루 종일 논두렁에 서서 소리를 따라 부르곤 하던 박갑근 소년은 열 살 쯤 되었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금족령이 풀려서 삼기보통학교에는 다닐 수 있었지만, 아버지 역시 완고한 분이었던지라 노래를 부르거나 꽹과리를 치다가 들키면 혼줄이 나곤 했습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창가를 부르면 선생님들이랑 친구들이 잘 부른다고 했고, 또 유행가를 부르면 다들 가수로 나가라고 혔지. 그런디 동네에만 들어가면 꿀먹은 벙어리가 되니 미칠 노릇이여. 요기서 한참 걸어가면 푸다리라는 동네가 있는데, 거그 주막이 있었어. 젊어서 친구들허고 그 주막에서 술마시고 올 때면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면서 오는디. 절반쯤 오면 딱 그쳐야 혀.
노래 소리가 우리 동네에 들릴 만헌 디서부터 벙어리가 되어 오는 거여. 왜 그렇게 노래를 금혔는고 허니, 이 동네가 본래 이름이 묵지여. 먹을 쓰는 선비들이 많이 난 곳이래. 그래 그 전통이 있어서 그런지 농사짓는 분들도 양반 행세를 좋아해서 상놈처럼 풍장치고 노래부르는 것을 금헌 거여.”

그런 집안과 마을의 분위기 때문에 소리의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평범한 농사꾼으로 자라난 그는 열일곱 살되던 해에 주소애라는 색시한테 장가를 들었습니다. 장가를 들었지만 일제 말기의 탄압은 신혼을 즐길 여유마저 빼앗아 가버릴 만큼 가혹했습니다.

“참말로 힘든 시절이었지. 전쟁이다, 징용이다 혀서 젊은 남자는 까딱 잘못허다가는 끌려가서 죽고, 농사는 지어봐야 공출이라고 다 뺏기고 그릇 가진 것, 쇠붙이 있는 것, 하다못해 꽹과리까지 다 긁어가 버리니 안 죽고 사는 것이 천행이었지. 그런 판에 노래부르고 꽹과리 칠 정신이 있것능가. 몇 해 동안 입다물고 근근히 살다보니 자연히 노래의 맥이 끊어졌지.”

한동안 끊어졌던 노래 소리가 해방이 되자 다시 살아났습니다.

물론 예전처럼 성하지는 않았지만 해방이 되었다는 기쁨과 오랫동안 금지됐던 신명을 마음껏 풀어보려는 갈망 때문에 한결 흥겨웁게 노래를 부르고 풍장을 쳤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휩쓸렸는지 완고하기만 하던 그의 아버지는 동네 어른들과 어울려 시조를 자주 불렀습니다. 아버지 역시 시조 솜씨로 동네에서 따를 사람이 없었는데, 아들에게도 넌지시 시조를 배워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는 얼씨구나 하고 일가 어른과 동네 어른들한테 귀동냥으로 조금씩 시조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부르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가르쳐 주고, 또 그들도 체계가 있도록 배운 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가락이 뒤죽박죽이 되어서 때려 치우고 말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들어 왔던 민요를 부르고 싶어했습니다.

그러자 때마침 민요를 마음껏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동생들 둘이 대학을 다니는데, 집의 농사만으로는 도저히 학비 대기가 어려워 맏형인 그가 동네 품앗이 일을 해서 학비를 대게 된 것입니다. 품앗이 일이라는 게 이논 저논 돌아다니면서 하루 종일 일만 하는 것이니, 그 힘겨운 일을 잊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저절로 노래 공부가 된 것입니다.

“그때가 서른이 좀 넘었을 때인디, 한 7,8년간 일을 험서 아침 먹고 호미 메고 나가면 저녁에 해질 때까지 억시게 불러댔지. 같이 일을 하던 친구가 여덟 명이 있었는데, 돌아가면서 주고 받고 부름서 일을 하면 어느새 하루가 가.”

그때에 그가 부른 노래들은 모두 마을에서 앞소리 잘 매기는 어른들한테 귀동냥으로 배운 노래들이었는데, 그분들 역시 그 전 어른들한테 귀동냥으로 배운 터였습니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 때까지 올라가는지 알 수 없어도 아무튼 굉장히 오래된 노래들인 것만은 확실한 <농부가>나, <긴방아>,<자진방아>,<방아찧기 노래>들을 억세게 불러대서 어느덧 인근 마을에까지 소리 잘 하는 젊은이로 이름이 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귀동냥만 해서 배울 것이 아니라 좀더 확실하게 선생한테 배우자는 생각이 들어 십 리쯤 되는 이웃마을 독산에서 소리선생을 하고 있던 강옥도라는 여자에게서 판소리를 잠깐 배웠습니다.

“저녁밥 먹고 십 리를 걸어가서 소리 한마디씩 배우고 오는디, 판소리가 민요보다 훨씬 어려워. <공도 난이>란 단가 한 마디만 배우고 그만 뒀는디, 그때 같이 배우던 친구들하고 친해져서 율계를 짜서 틈만 나면 어울려서 분통 같은 방에서 소리하고 시조 부르고 놀았지. 아무튼 한창 소리할 때는 목청이 얼마나 좋았던지. 여기서 석양 무렵에 여럿이 소리를 지르면 십 리 밖에 있는 미륵산까지 들렸응게.”

그렇게 농사짓는 틈틈이 좋아하는 노래나 부르면서 조용하게 살던 그를 시끄러운 세상으로 끌어내려는 유혹이 닥쳐 온 것은 그의 나이 쉰이 된 1970년이었습니다.

그때 익산 지방에서는 해마다 ‘마한민속제’가 열리고 있었는데, 이 마을에서 농요가 불려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관계자 한 사람이 찾아와 그 축제에 나가기를 권유한 것입니다.

그는 이 마을에서 불리고 있는 노래만으로는 부족하니 모심기에서 방아찧기까지 농사짓는 과정에 따라 부르는 농요들을 발굴해서 정리해 보라고 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그런 것을 어떻게 하며, 있다는 말을 들었어도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누가 부르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발굴을 하느냐며 극구 사양하던 그는 관계자의 끈질긴 설득에 그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한편으로 좋아하는 노래를 한번 본 때 있게 배워서 부르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무엇보다 대회에 나가서 상도 타고 이름도 내면 보람도 있을 것 같아서 그는 1970년 한 해 여름을 민요 채집하는 데에 다 보냈습니다.

“어디에 사는 누가 잘 헌다는 소문을 듣고 찾어가서 들어보면 시원찮어. 속으로 그런 것도 소리라고 허냐는 생각이 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배워놓고 별스런 사람을 다 만나서 얘기듣고 소리를 들어봐. 내가 소리 귀가 밝어서 웬만헌 노래는 한두 번 들으면 금새 가락을 외워버링게, 배우는 디 어려움은 없었어. 근디 진짜배기 소리는 안 나오더란 말여. 그러다가 남산에 사는 김노인한테서 <산야>를 배운 것이 큰 수확이었지.”

<산야>는 김을 매거나 벼를 벨 때 부르는 노래인데, 검지마을 노인네들이 “7, 8월에 <산야>가 금강을 타고 넘어오면 처량하여 듣기 좋았다.”고 회상할 뿐, 그 가락은 전혀 들을 수가 없던 노래였습니다. 그 귀한 가락을 다행히 익산군 낭산면 성남리에 사는 김순덕이 알고 있어 배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창법은 남도 창법하고 달라 경상도의 메나리 창법과 비슷하고, 어떤 사람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산유화가>가 바로 <산야>라고 하기도 하고, 백제가 망한 슬픔을 노래한 곡이라고도 하기도 하지만, 아직 자세히 연구된 적은 없습니다.

영감아 영감아
육칠월 만물에 메뚜기 뒷다리한티
채어 죽은 영감아
부귀다남 백년동락 사잤더니
나 홀로 두고 어디를 갔나 영감아

이처럼 슬픈 가사에 한없이 처량하고 길게 빼는 애절한 가락은 너무도 듣는 사람의 가슴을 후벼 파기 때문에 산천초목이 슬픔에 겨워 운다고 하여 함부로 못 불렀고, 더욱이 칠월 안에는 입 밖에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말이 전해 올 만큼 매우 독특한 사연을 담고 있는 노래입니다.

<산야>를 배운 그는 “아무래도 꽁지가 빠진 것 같아서” 타작할 때 부르는 노래를 찾아 헤매다가 역시 성남리에 박씨 노인이 알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후딱 배워 버렸습니다.

한 해 여름과 겨울을 꼬박 노래 배우고 정리하고 연습하는 데 바친 그와 그의 계원들은 1971년에 ‘마한민속제’에서 첫선을 보였습니다.

민속학자나 국악인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이렇게 좋은 민요가 원형대로 살아 있다니 놀랍다.” 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 통에 자신을 가진 그들은 그해 10월에 전주에서 벌어진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출전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박갑근씨 개인상만 타고 아무런 상을 타지 못했습니다.

회원들은 실망하기도 하고 원통해 하기도 하며 다시 한 번 나가자고 열을 올렸습니다. 그 덕에 그는 또 한번 고생을 해야만 했습니다. 1972년 한 해 여름내내 그는 <지게 목발 노래>를 발굴하러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습니다.

<지게 목발 노래>는 산에서 나무를 한 뒤 지게에 나뭇짐을 지고 오면서 지게 목발을 두드리며 부르는 노래들인데, <산타령>, <초부가>, <초동가>, <등짐 노래>, <작대기 타령>들을 모아서 1972년에 다시 출전했습니다.

본래 등짐 지는 일이나 나무하는 일은 일 자체가 특정한 리듬이 없고, 다른 일에 비해서 집단성이 적기 때문에 전해오는 노래가 극히 적었던 터에 <익산 목발 노래>의 등장은 대단히 인기를 끌어서 결국 문공부 장관상을 타게 되었습니다.

출처 : http://www.cha.go.kr/newinfo/Culresult_...DCD%3D22

그뒤 1973년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고, 1977년에는 또 한 번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출전하여 국무총리상을 탔고, 1983년에는 마을 한가운데에 익산 농요 전수관을 짓고, 1984년에 박갑근 명인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민속제나 국악제에 나가기도 하고 방송국에서 녹화도 해가는 통에 신문에도 많이 나고 유명해졌지만 속으로는 문제점이 한 두 가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옛날에는 모여서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일하다가 말고도 와. 궁뎅이가 들썩거려서 앉어 있을 수가 없다는 거여. 그런디 요새는 노래 한번 헐라면 여간 애를 써야 모이는게 아녀. 왜냐하면 실제로 논일을 험서 그 노래를 불러야 신이 나는 법인디, 요새는 일험서 부르질 않어.
제초제를 뿌리고 김을 안 매니 긴 방앗노래를 부를 일이 없고, 세 벌 김매기인 만두레를 안허니 <산야>도 부를 일이 없고, 타작 노래, 방아찧기 노래도 다 마찬가지여. 사는 방식이 달라지닝게 그 노래들이 다 쓸모가 없어져 버렸어. 거그다가 요새 젊은 사람들이 이런 노래 배울라고를 안혀.
이 마을 젊은이들도 이 노래 아는 사람이 몇 안돼. 거그다가 자꾸 고향을 뜨네. 돈 번다고 나가고 공부 헌다고 나가고 서울로만 가. 그러니 지금 젊은 후계자가 한 사람도 없어. 이러다가는 이 노래들도 얼마 안가 다 없어져 버리고 말 거여.”

없어져 가는 노래 붙들고 안달하는 자신이 싫어서 작년에는 농요보존회 회장 노릇도 그만 두려고 했는데, 회원들이 만류하는 통에 그러지도 못하고 후계자 기를 걱정과, 초청공연 연습할 걱정과 전수관 운영할 걱정과, 농사지을 걱정을 한꺼번에 하느라, 그러지 않아도 늙어서 약해진 몸을 움직이기가 부쩍 힘들어졌지만, 아직도 노래 이야기만 나오면 두 눈에 생기가 돌고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라 지칠 줄 모르고 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역시 평범한 농사꾼으로만 살다 가기에는 그와 소리와의 인연이 너무 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사람은 살림도 안 허고 소리에 미친 놈이다 허는 말을 들어야 이 짓을 허지, 살림 잘 헌다 소리 듣고는 이 노릇 못 혀. 내가 이 노릇 험서 밥먹고 살아 온 것이 다행이여. 배우느라 갈치느라 걱정 근심이 떠날 날이 없고, 나쁠 때는 일 년에 석 달을 집을 비우고 돌아다녀. 참 골치 아픈 일도 많고 고생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내 팔자로 알고 불평 한마디 안 허고 지내왔네.”

이렇듯 평생을 민요와의 인연에 순종하고 그 노래들을 사랑하며 갈고 닦다 돌아가신 한 농부의 영혼은 여전히 이 나라 산천 방방곡곡 논과 들과 산과 바다를 떠돌며 삶의 노래인 민요를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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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가 '굿하는 사람이다', 곧 '무당이다'라고 하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점쟁이나 푸닥거리나 미신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어서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미친 여자나 엑소시스트에 나오는 신들린 소녀를 머리 속에 떠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도대체 무당이 명인 명창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기분 나빠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무당과 무속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깊이 연구한 사람들은 무당이 목사나 신부나 스님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종교의 사제이며,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찬송가나 염불과 다름없는 엄숙하고 경건한 종교 음악이며, 그들이 읊어대는 사설은 성경이나 불경의 여러 말씀과 다를 바 없는 귀한 말씀이라는 걸 압니다.

그러나 외국에서 들어온 수많은 신들의 위세에 짓눌려서 우리 조상들이 수천년 동안 모셔 오던 민족의 신들은 우리 문화 속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고, 그 신을 모시는 성직자인 무당들도 오랫동안 사회의 밑바닥 천민으로 혹세무민하는 무리라는 편견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무당들은 자신들이 지녀온 기예를 예술로 내세우기 시작했고, 또 예술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들의 기예는 인정을 받기도 했습니다.

동해안 무속의 뛰어난 무당인 김석출 명인도 사람들이 자신을 무당으로보다는 예술가로서 알아 주기를 바랬습니다.

경상남북도와 강원도를 잇는 동해안 마을에서는 해마다, 또는 3년, 4년, 5년, 7년, 10년 마다 한 번씩 '별신굿'이 벌어졌습니다.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빌고 바다에서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벌이는 그 굿은 그 뛰어난 예술성과 오락성 덕분에 구경꾼들이 많이 몰려들어 언제나 푸짐한 굿판이 되곤 했습니다.

출처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01_02_01

그 굿판을 이끌어가는 노래 잘 하고, 춤 잘 추고, 재담 잘 하고, 악기 잘 치는 여러 뛰어난 무당 중에서도 김석출 명인은 그 솜씨나 경험이나 연륜으로 보아서 첫손에 꼽을 수 있는 명인이었습니다. 경상도에서는 남자 무당을 '박수', ‘화랭이’ 또는 ‘양중’이란 말로 부릅니다.

그는 '부정굿'이나 '일월맞이굿'이나 '골매기청좌굿'이나 '당맞이굿'이나 '성조굿'이나 '마당밟이굿'이나 '화해굿'이나 '세존굿'이나 '조상굿'이나 '천왕굿'이나 '심청굿'이나 '군웅굿'이나 '손님굿'이나 '계면굿'이나 '용왕굿'이나 '탈놀음굿'이나 '거리굿'과 같은 갖가지 굿의 사설을 재미있고 구성지게 읊어 댈 뿐만 아니라, 탈놀음굿이나 거리굿과 같이 연극성이 강한 굿을 할 때에는 일류 배우 못지않게 뛰어난 연기를 보여 주고, 잽이를 할 때에는 징이나 장고나 꽹과리니 북이나 제금 어느 것을 손에 잡아도 절묘한 장단을 마음대로 구사하고, 날라리 부는 솜씨는 나라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만하고, '덤불국화'라든가 '출화작약'이라든가 '사계화'와 같은 종이꽃 만드는 솜씨라든가, 대금을 만드는 솜씨 또한 전문가 대접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출처 : http://www.artpusan.or.kr/board/moim00....a%3Ddesc

이렇듯 그가 갖가지 기예를 두루 갖춘 데에는 그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집안 내력과 신이 내린 재능이 고루 작용하고 있습니다.

1922년 2월 29일에 경상북도 포항시 환호동에서 김성수의 둘째아들로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 이선옥 명인과 함께 할아버지 김천득 명인과 할머니 이옥분 명인의 뒤를 이어 무업을 하고 있었고, 큰아버지 김범수 명인와 큰어머니 김운화 명인, 작은아버지 김영수 명인과 작은어머니 이영파 명인도 무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부근에서 ‘날리던’ 무당인 어머니 이선옥 명인은 맏아들 호출과 큰딸 외동과 둘째아들 석출과 셋째아들 재출까지 낳고 병이 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살림을 떠맡아 오던 아내가 죽게 되자 살 길이 없어진 그의 아버지는 어린 아이들을 돛단배에 태우고, 동생과 어머니가 무업을 하고 있는 강원도 삼척군 건덕면 교가리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무업을 하고 있던 할머니 이옥분 명인은 불쌍한 어린 손자들을 자그마한 움막에서 재우며 걷어먹였습니다. 그때 다섯 살밖에 안된 어린 석출은 할머니가 고사나 굿을 하러 다닐 때 누이와 동생과 함께 졸래졸래 따라다니며, 밥도 얻어 먹고 떡이며 과일이며 나물을 얻어먹었습니다.

그동안 함경도 원산이나 구룡이나 청진 너머 소련 땅에까지 무업을 하러 다니던 그의 아버지는 고생스런 방랑 생활을 일 년만에 끝내고 경주로 내려와서 설달이라는 여자를 얻어 살림을 차렸습니다. 그래서 '애비 없는 무당 아들'이라고 동네 아이들에게 발길질 당하고, 돌팔매질 당하며 불쌍하게 자라던 어린 아이들은 아버지를 따라 경주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달이 엄마가 데리고 온 이복형제들과 매일같이 싸우고 울고 매맞고 쫓겨 났다 쫓겨 오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글 배울 시간도 없고 학교 갈 시간도 없이 여덟 살이 되고 다른 할 일은 없고 해서 굿판을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징이나 꽹과리나 제금을 조금씩 두드려 보고, 어른들이 부르는 노래도 흉내내어 흥얼거리는데 개구쟁이에다 버르장머리는 없어도 기억력이 좋고 재주가 좋아서 어른들이 가끔씩 “니 내중에 큰 화랭이 된데이” 하고 칭찬하곤 했습니다.

그가 배운 경상도 무속은 전라도 무속이나 제주도 무속과 마찬가지로 “세습무속”입니다.

즉 경기도나 평안도나 황해도와 같은 경기 이북 지방의 무속이 주로 신내린 무당이 이끌어가는 “강신 무속”이기 때문에 무당의 예술성보다는 신령함에 더 의존하는 데에 견주어서, 세습무들은 집안의 무업을 이어받아 춤이나 노래나 사설이나 악기를 다루는 예술적 능력을 닦아 온 사람들입니다.

굿을 보는 관객들도 경기 이북 지방에서는 무당이 신통한지 못한지에 관심이 많지만, 경상도나 전라도에서는 무당이 굿을 잘하는지 못하는지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전라도나 경상도의 굿판을 보면 거의 공연 예술과 같은 형태를 가지게 되고, 실제로 굿에 쓰인 춤이나 음악은 전라도나 경상도 민속 예술의 뿌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는 굿판에서 살다시피하며 굿에 필요한 갖가지 기예를 어른들에게 전수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열일곱 살 때부터 첫째 무당 노릇을 하기 시작했는데 “꽃 잘 만들지, 징 장구 잘 치지, 소리 잘 하지. 머, 무당 딸 있는 사람은 다 사위 삼을라꼬.” 하던 판에 작은어머니의 이웃 마을에서 무업을 하던 변재춘의 딸 변난호와 열아홉 살에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주 시내에 첫 살림을 차리고 굿을 하러 다니다가 스물한 살이 됐을 때 비로소 ‘온 섬’ 출연료를 받는 어른 무당이 되었습니다. 어린 무당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출연료를 못 받거나, 어른들이 주는 대로 푼돈을 받거나, 조금 대우를 받는 경우는 ‘반 섬’이라 하여 어른의 반절을 받는 것이 관례인데 장가도 가고 첫딸도 나은 덕에 어른 대접을 받아 '온 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때는 일제 말이라 “콩 배급받고, 풀 베고, 놋쇠 걷어가고, 굿 하는 기 발각되몬 순사들이 당 뿌수고 칼 빼서 휘두르몬 우리는 징 장구 들고 달려가 숨고, 유치장에 가서 죽을 매 맞고 시말서 쓰던” 시절이라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니 새 세상이 왔다고 포항 시내에서 지신밟기를 할 때 형이 설장구 메고, 동생이 꽹과리 치고, 김석출은 날라리 불고, 보름 동안 마음껏 신명을 플어냈습니다.

그 전부터 날라리 부는 법을 배우기는 했어도 워낙 시끄러운 악기라서 남이 들을까 두려워 산골이나 언덕 밑이나 집없는 바닷가에서 남몰래 불었는데, 해방이 되고서는 입이 얼얼하도록 불어 댄 것입니다.

'호적' 또는 '태평소'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날라리'는 중국의 서북방에 사는 유목 민족이 쓰던 악기로 중국을 거쳐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찍부터 궁중 음악의 대취타나 군대의 취악에 쓰이다가 점차 민간에 널리 전해지면서, 풍물을 치거나 굿을 할 때 중요한 악기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놀기 좋아하고 행동이 헤픈 사람을 '날라리'라고 하는데, 그 악기가 워낙 아무데나 잘끼어서 시끄럽게 연주되다보니 그런 말이 생겨난 게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대추나무나 중국 버드나무인 화류목을 깎아 가운데를 비게 하여 관대를 만들고, 위에 일곱 구멍을 뚫고 아래에는 한 구멍을 뚫은 다음, 놋쇠나 구리로 만든 나발을 답니다. 나발 반대편 관대의 끝에 끼우는 빨대는 갈대를 깎아서 쓰거나 기러기 깃털 뿌리를 밥솥에 쪄서 숫돌에 갈아 구멍을 뚫어 만든 것을 썼는데, 요즈음은 플라스틱 빨대를 많이 씁니다.
그 무렵에 날라리 잘 불기로 이름난 사람으로는 호적 시나위로 천하제일이라는 평을 듣던 김봉기 명인과, 쌍호적을 잘 불던 신참문 명인과, 상주에서 무업을 하던 염상태 명인과, 봉사 악사 김재수 명인과, 시나위를 불면 “결딴나는 가락”이라고 칭찬을 듣던 방태준 명인 등이 있었는데, 이들이 모두 해방 뒤에 생긴 국악 단체의 악사가 되어 전국을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한창 날라리에 맛을 들인 김석출은 어디에 단체가 왔다는 말만 들으면 날라리를 들고 가서 사흘씩 나흘씩 그 단체에서 먹고 자며 날라리의 대가들과 합주를 하기도 하고, 부족한 점을 그들에게 배우기도 하며 솜씨를 늘여 나갔습니다.

“단체가 왔다 하면 죽어라꼬 쫓아가는 기라. 바지 가랑이에다 돈 만 원쯤 숨겨 놓고 가서 내 돈 내고 단체를 따라다니는 기라. 단체가 돈을 못 벌 때는 밥 한 그릇 가지고 아버지 아들들이 나눠 먹고 점심도 없이 하루 두 끼 먹는 기 다반사니, 내 돈 내서 밥 사주고 호적 배왔는 기라. 내는 그때 굿해서 돈 잘벌었으니, 뭐 내가 가모 다들 환영을 했제.”

그렇게 배운 솜씨로 단체의 악사들이 풍물을 치면서 시내에 광고를 도는 ‘마찌마리’를 할 때 날라리를 불어 주기도 하고, 판소리도 몇 대목 배우고, 대금 만드는 법도 배워 웬만한 전문가가 만든 대금보다도 음질이 더 좋은 대금을 만들어 악사들에게 선물도 수없이 했습니다.

특히 임방울이나 김연수나 박동진과 같은 판소리 명창들과 사귀는 동안에 그는 판소리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 어른들이 부르는 판소리를 귀동냥해서 토막으로 배운 데다가, 국악에 귀가 열려 있던 터라 부끄럽지 않을 만큼 소리 실력을 얻게 되어 굿을 할 때 가끔씩 판소리 한 대목씩 부르기도 하고 적당한 사설을 지어 창작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굿할 때 “학자님들이 그런 대목만 나오면 녹음기를 찰칵 꺼 버리는” 것을 보고 점점 삼가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판소리나 국악에 대한 관심을 날라리에 쏟아넣었는데, 그 결과로 나온 것이 그가 자랑해 마지 않는 <호적 산조>입니다.

“옛날 선생님들이 호적을 잘 불기는 했어도 십 분을 넘게 불 가락이 없었는 기라. 한 가락 불고, 또 되풀이해서 불고, 그라이 단조롭고 맛도 없어. 천하제일 명선생의 가락도 십 분 넘으면 그기 그 가락인 기라. 그래 김석출이가 호적 산조를 생각해 낸 기라. 내는 한 시간이면 한 시간, 두 시간이면 두 시간, 사흘이면 사흘, 얼마든지 다른 가락으로 불 수 있으니 호적 산조는 김석출이가 전무후무한 기라.”

그가 이렇게 호언장담을 한 만하기도 한 것이 날라리 가락이란 고작해야 궁중음악의 대취타 가락이나 경기 시나위, 전라도 시나위, 동해안 무속 시나위에서 쓰이는 몇 개의 가락이 전해 올 뿐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에는 다양한 가락이 전해오는 모양이라. 육이오 때 중공군들이 꽹과리 치고 날라리 불면서 쳐들어올 때 무슨 가락 불면 전진하고, 무슨 가락 불면 후퇴하는 걸 다 날라리가 했는기라. 또 내가 우연히 중국 우동집에서 주인 내실에 들어가 중국 호적 레코드를 들은 적이 있는데, 사람 죽어서 치르는 장례식을 할 때 호적 가락이 바뀌는데 따라서 곡하고 절하고 상여 나가고 하는기라. 그란데 그 사람들이 잘 불어. 호적 일고여덟 개를 같이 부는데 기가 막히게 잘 불어!"

중국 날라리에 비해 너무도 단조로운 날라리 가락을 다양하게 만들 길은 산조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끊임없이 산조 가락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산조(散調)'는 시나위 가락을 일정한 장단에 맞춰 연주하는 기악 독주곡을 말합니다. '흐튼 가락'이란 이름 그대로 즉흥성이 강조된 음악 형식으로, 19세기 말엽에 김창조 명인이 가야금 산조를 만든 것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그 뒤 백낙준 명인이 거문고 산조를 만들고, 대금이나 아쟁 그리고 단소도 대가들에 의해서 산조 가락이 만들어져서 지금가지 전해 옵니다. 그 뒤 산조는 그 즉흥적이면서도 풍부한 표현력 때문에 많은 음악가들이 자신의 새로운 창작을 곁들여 변화되고 발전되어 왔습니다. 

김석출 명인이 만들어낸 호적 산조도 가락의 흐름이나 장단의 구성에서 가야금 산조나 대금 산조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가 호적 산조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나자 그와 친했던 국악인들은 대단한 관심을 보여주었지만, 대부분의 국악인들은 "굿쟁이가 굿이나 하지 산조는 또 뭐냐?"고 하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서울의 소극장인 공간 사랑에서 사물놀이패의 합주와 어울려 호적산조를 발표하자,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김석출의 산조가 호적을 살렸다"고 감탄했습니다. 

"옛날 양반들 부는대로 날라리를 불면 산조 가락이 안 나와. 내는 빨대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가지고 이빨로 살살 물었다 놨다 하면서 재주를 부리지. 그래야 산조 가락의 맛을 낼 수 있는기라. 갈대나 기러기 깃털뿌리로 만든 옛날 빨대로는 이로 물어서 내는 음색을 못내. 이로 물면 빨대가 붙어버리는 기라. 그러니 앞니로 재주 부리는 성음은 내가 처음 발견한 기라"

그는 이렇듯 어렵게 만들어 낸 산조 가락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녹음도 해놓고, 틈만 나면 콧소리로 흥얼거리면서 연습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은 방음장치가 되어 있지 않아서 마음대로 날라리를 불 수가 없고, 산이나 공원에 가서 불면 산책 나온 사람들이 불평을 해대는 통에 마음대로 연습할 수가 업었습니다. 그래서 굿판이 벌어지면 연습도 할 겸 발표도 할 겸 해서 산조 가락을 마음것 뽐내어 불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형제들과, 그의 두 아내에게서 난 자식들과, 조카들이 모두 직접으로나 간접으로 무업과 관련되는 일을 하고 있어 거대한 무당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일이 창피하다고 집을 뛰쳐나간 사람도 있었지만, 인간문화재로서 대접을 받고 보니 이제는 오히려 무당 집안 출신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손들까지 생겨나게 되어 집안 어른으로서의 권위도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호적 산조에는 시나위나 대취타 가락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은 한과 서러움이 배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지지리도 가난하고 불쌍하게" 자라 온 그의 어린 시절과 천대 받고 멸시 받으며 살아 온 그의 삶의 역정에서 마음 깊은 곳에 깊숙이 자리 잡은 응어리들이 다 쏟아져 나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그 모든 응어리들이 다 쏟아져 나올 때까지 산조 가락을 갈고 닦아 마지막 남은 삶을 날라리 산조로 마무리하고 2005년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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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사람들에게는 농악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풍물은 예전에는 '굿'이나 '매구' 또는 '풍장' 등으로 불렸습니다. 

정초에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액을 몰아내고 복을 빌어 주는 '마당밟이굿'을 쳤고, 김맬 때는 농부들끼리 계 비슷한 모임인 두레를 짜서 '두레 풍장'을 치기도 했습니다. 김매기가 끝난 칠월에는 '호미씻이굿'을 쳐서 고된 일을 하는 농부들을 위로하기도 했고, 시월 농사가 끝나면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당산에서 '당굿'을 치며 감사의 놀이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또 농사 일에만 굿을 친 게 아니라, 바닷가 마을에서는 뱃사람들이 무사히 고기를 많이 잡아 오도록 기원하는 '배치기 풍장'을 쳤고, 절에서는 '절굿'을, 집 지을 때에는 '집들이굿'을, 다리를 놓을 때는 '다리굿'을 쳤습니다.

이밖에도 나라의 행사나 군사 훈련이나 전쟁 때나 사냥할 때나 상여나갈 때와 같이 백성들의 의식과 일과 놀이에 안 쓰인 곳 없이 두루 쓰였으니, 농악은 어느 음악 유산보다 우리 민족의 삶에 깊숙이 연결된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악 연주하는 것을 ‘굿친다, 매구친다, 풍장친다, 풍물친다.’ 라고 합니다. 이때에 쓰이는 악기인 '굿물' 또는 '사물'에는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와 같은 타악기와 태평소, 나팔과 같은 관악기가 있습니다. 그 중 꽹과리는 풍물 중의 으뜸이 되는 악기입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_blog/rss/rssList....age%3D10

이 꽹과리를 ‘꽹쇠’ 또는 그냥 ‘쇠’ 라고만 부르기도 하는데, 풍물의 가락은 모두 꽹과리의 신호에 맞추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꽹과리의 연주자인 '쇠잽이' 중에서도 수석 연주자 곧 '상쇠'의 가락이 변화하는 데 따라 모든 풍물 연주자 곧 '치배'들이 함께 변하므로, 풍물을 치는 판에서는 상쇠가 요즘의 악단지휘자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상쇠는 여러 가지 꽹과리 가락을 솜씨 있게 잘 쳐야 할 뿐 아니라, 악기를 연주하는 '앞치배'들과 창부나 중이나 양반이나 각시나 할멈이나 대포수나 무동과 같은 여러 인물로 분장하여 춤도 추고 재담도 하며 관중들의 흥을 돋구는 구실을 하는 '뒤치배' 또는 '잡색'들과, 영기나 농기와 같은 깃대를 드는 기잽이와 같은 모든 풍물패를 거느리는 데 필요한 통솔력도 갖추어야 합니다.

게다가 당산에서 치는 '당산굿'은 어떻게 치고, 우물에서 치는 '샘굿'은 어떻게 치며, 장독에서 축원 드리는 '청룡굿'은 어떻게 치고, 노래를 부르며 치는 굿인 '노래굿'을 할 때는 어떤 노래를 부르며, 상쇠와 중쇠가 꽹과리를 한가운데 놓고 춤을 추며 노는 놀이인 '일월놀음' 또는 '일광놀음'은 어떻게 치며, 상쇠와 중쇠가 교대로 가락을 치는 놀이인 '짝두름'은 어떻게 하는가 하는 가지가지 '군법'(농악 연주 순서) 에 통달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자진이나 오방진이나 쌍방울진과 같은 여러 가지 '진풀이' 또는 '진법'에도 뛰어나야 하니, 부처님 살찌고 마르고가 석수쟁이 손 끝에 달렸듯이 굿이 잘되고 못 되고는 오로지 상쇠의 솜씨와 경륜에 달려있다 할 것입니다.

솜씨 좋은 상쇠가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꽹과리 끈을 걸쳐놓고 나머지 세 손가락을 꽹과리 안쪽에 대고 왼손에는 꽹과리 채를 들고서 (왼손잡이는 그 반대) 외마치, 두마치, 세마치(삼채)를 위시해 풍류, 굿거리, 오방진, 덩덕궁이, 영산, 잔지래기(다드래기)와 같은 갖가지 가락들을 어떤 때는 구성지고 흥겹게, 어떤 때는 호탕하고 씩씩하게 몰아가는 그 가락의 오묘한 변화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솟구치게 함으로써 어깨춤이 절로 나고 궁둥이를 들썩이게 만듭니다.

거기에다 기러기털이나 닭털로 연꽃처럼 만든 '부포'를 매단 '상모'를 쓰고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 뒤로 넘기기도 하고, 앞으로 콕콕 찍기도 하고, 위로 올려세워 연꽃을 피웠다 오므렸다 하기도 하고, 휙 잡아돌리기도 하고, 사방으로 쪼기도 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얌전한 규방의 색시도 오금이 저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거기에다 노래라도 구성지게 곁들여 너울너울 춤을 추며 꽹과리를 치면 저절로 “얼씨구”, “좋다” 라는 탄성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출처 : http://cafe.cha.go.kr/brd/viewClubBrdAr...owGb%3DL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중평부락에 살고 있는 김봉열 명인은 그러한 상쇠 노릇을 평생 해 온 사람입니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한번도 그 마을에서 이사해 본 적이 없는 옹골진 토박이입니다. 누에머리봉, 닭날봉, 바구리봉, 퇴미봉과 같은 야트막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마을터에 서른 채쯤 되는 집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는 그 산골 마을에는 대대로 터를 일구어 온 함창 김씨들의 얘기가 곳곳에 깃들어 있습니다.

아주 오랜 옛적에는 벼슬을, 그것도 아주 높은 벼슬을 살았다는 조상들의 이력을 들으며 자란 그는 소시적에 장구도 잘 치고 상사 소리, 상여 소리도 잘 하시던 아버지 낙중씨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려서부터 굿소리에 남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농사 일을 할 때나 정월 보름이나 팔월 추석 같은 명절이 올 때마다 울려퍼지는 풍물소리가 너무나 좋아 졸래졸래 풍물패 뒤를 따라다니던 소년은 어느덧 양철대기를 두드려 스스로 웬만한 가락을 칠 수 있는 재능을 보였습니다.

아들이 두드리는 양철대기 소리를 듣고 그의 아버지는 좋은 선생을 붙여서 “때를 벗길라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때마침 진안군 백운면에 사는 김인철이라는 이름 난 상쇠를 데려다가 동네 사람들이 굿을 배울 기회를 마련하자 아들을 그곳에 보냈습니다. 김봉열은 그곳에서 다른 아이들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보여 동네 어른들이 “참 잘 배운다, 참 별일이 쌨다.” 며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가 스승에게 배우고 지금까지 오롯이 지녀 온 가락은 '호남좌도' 가락입니다.

풍물은 지역에 따라서 경기 풍물, 경북 풍물, 경남 풍물, 호남 우도 풍물, 호남 좌도 풍물로 나뉘는데, 서로 활발하게 오고가며 배우고 가르친 덕에 지역의 특성이 많이 사라져 버렸지만 예전에는 가락의 흐름이나 놀이의 형태가 많이 달랐습니다.

전라도의 동북 지방 곧 금산, 진산, 무주, 용담, 장수, 운봉, 구례, 남원, 임실, 곡성 같은 고을에 전해 내려오는 좌도굿은 경기도나 강원도의 굿에 견주어서 무동이 적고 잡색이 많습니다.

전라도의 서남 지방 곧 정읍, 김제, 부안, 영광, 장성, 화순 같은 고을에 전해 내려오는 우도굿과는 달리 치배들이 고깔을 쓰지 않고 전립 곧 벙거지를 주로 쓰며, 상모를 돌리는 윗놀이의 기교가 뛰어나고, 밑놀이인 굿가락에 잔가락이 적어 담백하고 빠른 편입니다.

그는 이런 좌도굿 가락을 배운 얼마 뒤에 진안군 상정면에서 열린 소방서 걸궁에 따라갔습니다. 다리를 놓거나 마을회관을 짓거나 소방서를 세우는 것과 같은 마을 공익 사업에 쓸 비용을 마련하려고 치는 굿을 ‘걸궁’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 걸궁에서 상쇠 다음의 제2연주자 자리인 '중쇠'(부쇠라고도 함)로 따라가서 일 주일 간 친 끝에 솜씨가 눈에 띄게 일취월장해서, 그 뒤로 상쇠로 승격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 http://www.topianet.co.kr/topia/4/4u/u4...0003.htm

열여덟 살에 이웃 마을에 사는 김귀례와 혼인을 한 뒤 삼 년쯤 농사를 짓다가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켰던 전쟁에 징용으로 끌려가는 걸 면하려고 '구루마'도 삼 년쯤 끌고, 발동기도 삼 년쯤 부려보고, '노가다'에서 '공구리'나 '목도질'도 하고, 마을 앞을 흐르는 개천에서 사금이 나와 사금도 칠 년쯤 파먹고, 손재주가 좋은 탓에 씨아나 물레나 베틀도 만들어서 팔아도 보고, 목수 일도 배워 집이니 정각이나 제각도 지어 보고, 생선장사나 콩 장사도 해보고 하며 “참으로 만고풍상이라더니 남의 농사 지어 갖고 공출이 심해서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안 해본 것 없이 고생을 험서” 살았지만 한 번도 고향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탓에 한 번도 상쇠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마을의 굿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전라도의 이름난 풍물쟁이들의 거개가 전국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며 굿으로 벌어 먹고 사는 남사당패 놀음이나, 포장을 쳐 놓고 창극도 하고 민요도 하는 포장 걸궁을 한 두 번씩 쳐 본 것에 견주어서 그의 경우는 좀 특이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 남사당패라는 것이 천하 망허는 패요. 그것이 순전히 돈벌라고 치는 굿인디, 남자들이 여자처럼 머리를 땋고 수건 들고 춤을 춰. 그러면 머슴들이 데리고 자. 말하자면 남색을 파는 거지. 또 마을 사람들이 돈을 안 내면 저녁내 쳐. 그 어릿광대들이 갖은 재주를 부려감서 돈을 뺏어 놔. 내가 열다섯 살 때 우리 마을에 그런 굿이 들어왔었고만. 그뒤로는 없어.
또 포장 걸궁 있잖여. 그것도 돈이 벌리면 좋지마는 돈이 안 벌려서 망허게 되면 장구치는 놈은 장구 가지고 가 버리고, 쇠치는 놈은 꽹과리 가지고 가버려. 그것들이 천하 망허는 패요.”

이렇듯 '천하 망허는 패'를 따라 떠돌아다니는 잽이는 ‘뜬쇠’라 부르고, 마을 굿만을 쳐온 사람들은 ‘두렁쇠’라 부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뜬쇠'와 '두렁쇠' 사이에 굉장한 차이나 있는 듯이 이야기를 하지만 실제로 그런 구분을 확실히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뜬쇠가 어느 마을에 정착해서 살며 마을굿을 치게 되면 두렁쇠의 역할을 하게 되고, 두렁쇠의 솜씨가 뛰어나면 뜬쇠가 되어 떠돌아다니며 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상쇠 김봉열 명인이 뜬쇠 노릇을 경험하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을이 워낙 외진 산골이라서 그의 솜씨가 다른 지방에 알려질 기회가 적었고, 전라도 지방의 뜬쇠는 주로 우도굿을 치는 잽이들이 맡았는데 그들과 교분을 맺을 기회가 없었고, 또 기회가 있더라도 우도굿과 좌도굿은 가락이나 굿놀음 방법이 서로 많이 다른 탓에 함께 어울려치기가 어려웠을 터입니다. 더욱이 좌도 지방에서는 마을 단위의 두레굿이 잘 전해 오는 편이어서 구태여 뜬쇠 노릇을 안 해도 얼마든지 굿을 치며 놀 수 있었다는 이유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환경 덕분에 그의 가락은 다른 지방의 가락과 섞이지 않고 좌도굿의 독특한 가락을 충실하게 보존하고 있는 점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굿도 여러 가지이지만 굿을 뼛속 깊이 아는 사람은 우리 굿을 알아줘. 다른 굿은 맛이 없어서 못 듣겠다고들 그려.” 

그의 말을 얼마쯤 눅여 주더라도 좌도굿 가락은 화려한 눈요깃거리의 굿으로 변질된 다른 지방의 굿에 견주어서 전통적이고 옛스러운 맛을 가장 많이 간직한 굿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 잽이들이 열 명이 있었는디 그 사람들이 다 솜씨들이 좋았어. 잘 쳤지. 근디 그 사람들이 다 죽어 버렸어.”

그 솜씨 좋은 잽이들이 다 죽은 뒤, 그 뒤를 이어 지금은 후배들이 치고 있지만 옛날만 못하다고 안타까워합니다.

전라북도 임실에서 걸궁 네 차례 치고, 전주 서신동에 다리를 놓는다고 해서 다리 걸궁 이레 치고, 서울에 올라가서 수색동에서 걸궁 친 것 말고는 고향을 떠나서 굿을 친 적이 없는 그도 세태가 변함에 따라 민속경연대회에 진안군 대표로 다섯 차례나 나가서 이등을 세 번 하고, 일등을 한 번 하고, 개인상 한 번 타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리고 금산농업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굿을 가르쳐서 대회가 있을 때마다 나가서 상을 휩쓸어 오게 했습니다.

그런 화려한 경력이 늘어남에 따라 그의 마을에서도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동네굿 안 친 지가 오래되었어. 이젠 굿 쳐야 사람들이 나오지도 않아. 굿이란 것이 사람이 모여야 재미있지. 아무도 안 보는디 뭐 할라고 칠 것이여.”

이런 현상은 우리 시골의 어느 마을에서나 일어나는 현상이니 크게 한탄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가워해야 할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여그 우리 동네가 본래 육십 가구가 살았는디 반절로 팍 줄어버렸어. 모다 서울로 가 버려서 집을 내놓아도 사 가는 사람이 없응게 그냥 빈집으로 남겨 놓고 올라가. 시방도 빈집이 여그 저그 쌨어. 거그다 젊은 것들은 씨알머리도 찾아볼 수가 없네. 모다 서울에 있어.
굿이란 것이 음양이 있어서 젊은 색시허고 총각들이 버글버글혀야 흥도 나고 재미가 있는 것인디, 맨 늙은이들끼리 뭐 헐라고 굿치고 굿 보고 할 것인가. 인제 굿이란 것도 다 끝나 버렸어.”

그는 탄식을 마친 뒤에 참으로 오랜만에 동네의 잽이들과 굿을 쳤습니다. '홍동지기'라는 붉은 바탕에 반소매 색동이 달린 옷을 입고, 부포 상모 벙거지를 쓰고, 고개를 좌우로 지긋거리며 눈썹을 옴질거리며 햇볕에 검게 탄 투박한 손으로 꽹과리를 쳤습니다. 칠순의 나이에도 꽹과리만 잡으면 젊은이처럼 가볍게 몸을 놀리고, 노인네답지 않게 눈이 빛나던 그도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해 1995년에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이 땅에 남은 또 하나의 귀한 가락이 이렇게 쓸쓸히 푸른 하늘 구름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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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이크, 하나 둘 이크.” 구령 소리가 매우 익살맞습니다.

구령에 맞추어 팔을 가슴 앞에서 휘휘 저어 대고, 한 발을 앞으로 쑥 내딛었다가 뒤로 살짝 거두면서 허리를 가볍게 돌리는 몸짓은 영락없는 춤입니다. 무서운 느낌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흥겹기까지 합니다.

두 사람이 마주 서서 한동안 그렇게 굼실대더니, 갑자기 한 사람이 발로 상대의 아랫배 근처를 내지릅니다. 공격을 받은 쪽은 휘휘 젓던 손으로 발을 탁 쳐내고, 자신의 발로 공격한 쪽의 얼굴을 원을 그리며 후려찹니다. 그러나 그 공격도 상대가 슬쩍 몸을 비키는 통에 헛발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역습을 당한 쪽은 틈새를 노려 왼발로 상대의 왼다리 안쪽을 차내어 낚시를 걸어 보지만, 상대는 발을 들어 오히려 상대에게 '딴죽'을 겁니다.

점점 거세어지고 날카로워지는 동작들을 보고 있으려니 흥겹던 기분이 싹 가시고 온몸에 긴장이 감돕니다. 춤사위 같던 손놀림-‘활개짓’- 이 먹이를 덮치는 맹수의 앞발처럼 매서웁고, 우스꽝스럽던 발의 움직임-‘품밟기’- 이 위험을 눈치 챈 학의 걸음처럼 신중합니다.

출처 : http://www.co-op.or.kr/data/coopnews2.h...o%3D1363

연습복에 땀이 흥건히 배이도록 승부를 내지 못하고, 빈틈을 찾으려고 노려보며 빙빙 도는 두 선수는 충주에 있는 ‘한국정통 무술 태껸 도장’의 관원들이었습니다.

관장인 신승(본명 신한승) 명인은 가무잡잡한 살결에 부리부리한 눈과 네모진 얼굴이 생김새부터 영락없이 무술가로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연신 제자들을 불러내어 둘씩 짝지어 겨루게 해 놓고, 저것은 무슨 기술 저것은 무슨 차기 하며 태껸 동작을 설명하는데 어찌나 열심히 얘기를 하는지 정작 시합을 하는 제자들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듯 싶었습니다. 

지금은 태껸이 많이 알려졌지만 제가 신승 명인을 만났던 80년대만 해도 태껸은 낯선 이름이었습니다. 칠순, 팔순이 넘은 노인들도 잘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어렸을 때에 태껸을 보았다는 노인들은 여럿 있었지만 직접 배운 사람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서울 서대문구 사직골에 사는 송덕기 명인과, 반포 아파트에 사는 김홍식 명인과 이들에게서 태껸을 전수받은 몇몇의 무술가와 함께 신승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송덕기 명인은 열너댓살 쯤에 스물아홉살 난 임호라는 사람에게 사직골 뒷산 잔디밭에서 태껸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가 태껸을 배울 때만 해도 서울의 사직골, 삼청동, 애오개와 같은 곳에 태껸꾼들이 많이 있어서 단오날이면 서로 이웃 마을 태껸꾼들과 솜씨를 겨루었다고 합니다.

고의 적삼에 솜버선을 신고 뒷산 잔디밭이나 개천 모래밭에서 연습도 하고 겨루기도 했으므로 특별한 도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한일 합방이 되자 일본 순사들이 태껸꾼을 모조리 잡아가는 통에 태껸을 하다가도 순사가 오면 와르르 달아났다가 다시 모여서 배우곤 하느라고 스승한테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평생 남하고 싸움 한 번 못했지만 팔순 나이에도 젊은 사람 한둘쯤은 움쩍도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그는 돋보기를 끼지 않고 신문을 보며 오십 년을 계속해 오는 활쏘기를 하려고 아침마다 활터인 황학정에 오를만큼 정정하게 사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송덕기 명인의 태껸.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00155937

김홍식 명인은 세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도 스물 남짓한 젊은 시절에 태껸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때의 서울은 웃대와 아랫대가 엄격히 구별 되어 있었고, 문안과 문밖 끼리도 구별이 엄했다고 합니다. 웃대는 인왕산 아래 쪽 곧 대궐에 가까운 쪽을 일컫는 말이었고 아랫대는 청계천 건너 쪽이며, 문안은 서울을 둘러싼 성문의 안 쪽이고 문밖은 그 바깥 쪽을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웃대는 주로 벼슬아치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세도가 대단해서 이것이 늘 불만인 아랫대 젊은이들이 가끔 웃대의 젊은이들에게 시비를 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웃대에서 태껸꾼들을 모아 아랫대에 시합을 청하게 되어 서로 시합을 벌였다는 겁니다. 

평상적인 시합을 할 때에는 ‘서기 태껸’이라고 해서 먼저 넘어지는 사람이 지는 것으로 승부를 겨루지만, 동네 사이의 감정이 나쁠 때에는 ‘결연 태껸’을 했다고 합니다. 결연 태껸은 서로 겨루다가 사람이 죽게 되어도 살인죄로 치지 않는다는 서약 아래 행하여지는 무서운 싸움이라고 합니다.

결연 태껸을 할 때 쓰던 기술은 잘못 쓰면 위험하기 때문에 비법으로 전해져서 여간해서는 배울 수 없었다고 합니다. 동네끼리 실력을 겨루는 무술로는 태껸말고도 씨름이나 활쏘기나 편싸움이 있었는데, 김홍식 노인은 어려서부터 즐겨 그런 무술들을 배워 겨루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그때 이름 높은 태껸꾼으로 박무경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구리팔개’라는 별명으로 불리었고 힘이 천하장사여서 그가 나타나면 상대편 사람들이 모두 도망쳤다고 합니다. 또 어떤 때는 문밖의 사람들이 도전해 오기도 했는데, 그런 경우엔 웃대와 아랫대가 한편이 되어 그들과 겨루었다고 합니다.

김홍식 명인은 여러 태껸꾼에게서 배웠는데 그때의 가르침이란 것이 그저 남이 하는 기술을 보고 혼자 흉내를 내고 있으면 오다가다 귀띔으로 일러 주는 정도라 깊은 기술은 배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잘하는 사람들 하는 걸 보면 무서웠어. 담장이고 뭐고 휙휙 날랐지. 두발로 휙 떠서 가슴을 차고 땅에 떨어지지 않고서 그 다음 사람을 찼으니까. 하지만 난 조금 밖에 못 배웠어. 첫째로 부모님이 죽어라 말리시는 걸. 건달들이나 하는 짓이라서... 게다가 일본놈들이 태껸한다 하면 모두 잡아다 죽였거든. 그래서 헐 수 없이 유도를 했지.”

어린애같이 흥겨워하면서 얘기를 하는 김홍식 명인은 숨이 가빠지는 것도 무릅쓰고 몸을 놀려 본을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태껸 고수의 솜씨. 출처 : http://koreanclicks.com/do-you-know/tae...5BB%25B8

신승 명인은 위의 두 명인에게 태껸을 배워 끊어지려던 태껸의 대를 이은 사람입니다. 

그는 1928년에 태어나 서울 왕십리에서 자랐는데,  경기도 연천군에 살던 작은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면 으레 태껸꾼들이 몇 사람씩 묵고 있어서 그들이 연습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작은 할아버지 신재희씨는 오백석이 넘는 부자로 활쏘기나 씨름 같은 걸 좋아해서 이름난 씨름꾼이나 반건달 같은 패거리들이 늘 그의 집 사랑방에 묵고 있었답니다.

그들 가운데 태껸꾼들도 일고여덟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 이씨, 김씨라고 불리던 두 사람의 실력이 가장 나았다고 합니다. 신승은 어린 마음에 노인네들이 발길질이나 하고 건달처럼 노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태껸꾼을 좋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래도 그 집에 가게 되면 자연히 구경을 하게 되어 가끔 흉내를 내보기는 했는데, 별스런 정성으로 한 것이 아니니 그저 어린아이의 장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구한말 어린이들의 태껸 사진. 출처 :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s...eSn%3D21

그러다가 그가 중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에 전쟁이 한창 치열해져서 학생 지원병을 모집했습니다. 그는 소년 전차병으로 지원해서 특별 휴가를 얻어 연천에 있는 작은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여름을 보낼 때 강가 백사장에서 오십쯤 된 중년들이 젊은이들을 차 넘기며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을 보고 슬며시 흥미가 당겨 조금씩 배워 보았습니다. 동작을 흉내내어 혼자 연습하고 있으면 오다가다 보고서 몸을 더 가라앉히라느니 발은 그렇게 차는 게 아니라느니 하며 한마디씩 귀띔으로 일러 주는 식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배우다 보니 웬만큼 태껸의 동작이 몸에 익을 만하게 되었는데, 그 뒤에 해방이 되고 서울에 돌아오게 되면서부터 태껸보다 레슬링에 열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스물아홉살이 되던 해에는 멜보른 올림픽의 후보 선수까지 되었다가 최종 선발 시합에서 고배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 레슬링을 그만두고 유도를 시작했는데, 그의 나이 마흔살쯤이 되었을 때에 어린 시절에 봤던 태껸을 찾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틈틈이 수소문하여 태껸을 했다는 사람들을 만나 보았으나 어렸을 때 본 동작이 아니라서 실망만 하고 있던 중, 신문에 실린 송덕기 명인의 기사를 읽고 서울로 찾아가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970년 초봄 무렵이었습니다. 송명인은 그의 끈질긴 간청에 못 이겨 봄 가을에 두어달씩 아침마다 활터 뒷산에서 동작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신승 명인의 태껸 시범. 출처 : http://www.cbinews.co.kr/news/quickView...%3D39750

그렇게 삼 년 쯤을 배운 뒤에 신승은 자신이 살고 있던 충주시에 도장을 내고 가르쳐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어달 배운 뒤에는 관원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이 태껸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고심을 하고 있던 터에 김홍식 명인을 만났더니 시대가 달라져서 태껸을 옛날 식으로 가르치면 아무도 배우려 들지 않을 테니, 처음에는 기본기를 모아서 가르치고 어려운 기술은 기본기를 익힌 다음에 가르쳐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태껸의 동작 가운데 기본이 될 만한 동작 스물다섯 가지를 기본 기술로 삼아 아이들에게 쉬운 동작부터 순서대로 가르쳐 보았더니 훨씬 빨리 배워 나갔습니다.

우선 서는 자세를 원품, 좌품, 우품으로 나누고, 발을 이리저리 옮기며 몸을 굽실대고 허리를 능청거리는 '품밟기'를 익숙해질 때까지 익히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 손을 앞 가슴 근처에서 위-아래 또는 양 옆으로 원을 그리며 저어 대는 '활개짓'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발 기술을 익히도록 하였습니다. 발장심으로 상대의 무릎을 차는 '깍음다리', 발등으로 상대의 발뒤꿈치를 바깥 쪽으로 잡아채어 뒤로 넘어지게 하는 '낚시걸이', 발장심으로 옆구리를 차는 '곁치기', 명치를 차는 '명치기', 발바닥으로 따귀를 때리는 '발따귀', 차 들어오는 상대의 발등을 발바닥으로 막는 '발등걸이', 발오금으로 상대의 발오금을 걸어 뒤로 넘기는 '딴죽', 그 밖에도 '얼렁발질', '돌개치기', '두발낭상', '깨끔다리' 따위의 다리 기술, 그 다음에 태껸에서 쓰는 손 기술로 엄지와 검지를 벌려 상대의 목을 쳐내는 '칼재비' 등도 익히게 하였습니다.

그런 기술들을 익히게 한 다음, 약속된 동작으로 마주 서서 겨루는 '마주걸이'를 익히게 한 뒤, 익숙해지면 약속없이 겨루는 '맞서기'를 익히도록 했습니다.

그러자니 자연히 급수도 매겨 줘야 했는데, 급수의 이름도 고유한 말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다른 무술에서 '급'이라 부르는 것을 ‘째’라고 정하고 '단'이라고 부르는 것을 ‘동’이라고 했습니다.

째는 첫째, 둘째 할 때의 째에서 빌어 왔고 동은 윷놀이에서 말이 모두 빠져 나왔을 때에 '한 동 났다', '두 동 났다'고 하는 말에서 따왔습니다. 그 이름을 정하는 데에도 송 명인과 김 명인과 상의하고 한글학자와도 상의하느라고 여간 힘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큰 어려움은 '태껸'이라는 이름을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남아 있는 문헌에 그 이름이 저마다 다르게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한글 학회에서 펴낸 <우리말 큰 사전>에는 ‘태껸’ 또는 ‘택견’이라 적혀 있습니다. 그 풀이를 보면 ‘한 발로 서로 맞은 편 사람의 다리를 차서 넘어뜨리는 경기’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먼저 나온 조선 총독부에서 펴낸 <조선어 대사전>에는 ‘택견’이라 해 놓고 ‘한쪽 발로 서로 넘어뜨리는 유희’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그보다 좀더 오랜 문헌으로 구한말의 시인인 최영년이 쓴 <해독죽지>라는 시집 속에 ‘탁견희’라는 제목을 가진 한시가 있습니다.

다리를 놀려 백 가지 기예를 겨루고
가벼이 날아 올라 상투 끝도 스치며
꽃다움을 다투니 저게 바로 풍류일세
상투머리 차 내리면 의기가 볼 만하네.

그 시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이 딸려 있습니다.

“옛 적에 다리를 놀리는 기술이 세속에 전해져 왔는데, 서로 마주 보고 서서 한쪽을 차서 넘어뜨리는 기술이었다. 그 솜씨로 봐서 셋으로 나누었는데 솜씨가 좋지 못한 사람은 다리를 찼고, 솜씨가 좋은 사람은 손으로 어깨를 밀쳤다. 솜씨가 훌륭해서 다리의 놀림이 날랜 사람은 상투를 차서 떨어뜨렸다. 이런 기술을 서로 겨루어 원수를 갚기도 하고 좋아하는 여자를 빼앗는 내기를 하기도 하니 관에서 이름 금하게 되었다. 그 뒤로 지금은 그 기술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이름을 탁견이라 한다.”

‘탁견’, ‘태껸’, ‘택견’ 중 이글에서는 최근에 가장 널리 쓰이는 '태껸'을 선택습니다. 몇십년 전까지 전해 오던 기예가 이렇듯 이름조차 종잡을 수 없을 만큼 갑자기 그 자취를 감추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태껸이 건달이나 한량패들의 기예이고 관에서 금하니 드러내 놓고 남을 가르치거나 남에게 배울 수가 없었던 터에, 일본의 무술인 탄압 정책으로 그나마 간신히 이어 오던 맥이 끓길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니 백 가지가 넘는다는 표현이 좀 과장된 말이라고는 해도 옛날에는 좀 더 많은 기술이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남아 있는 기술로써는 태껸의 온전한 모습을 알아내기가 힘이 듭니다.

맨손 무술에 관한 오래된 기록으로 고구려 산상왕 때에 만들어진 환도성 각저 무덤의 벽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웃통을 벗은 채로 한 손을 앞으로 내밀고 발을 낮추고 서서 서로 겨루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은 보는 이에 따라 씨름이라고도 하고 태권도라고도 하고 태껸이라고도 하니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출처 : http://ask.nate.com/qna/view.html%3Fn%3D6193252

그 뒤 고려 충혜왕 때에 ‘수박희’ 또는 ‘권법’이라는 무술이 유행하여 왕이 상춘정에 늘 나와 그것을 구경하니 수박희를 전문으로 개설하였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조선 왕조 실록>과 정조 때에 집대성 된 무술책인 <무예 도보 통지>에도 권박, 상박, 권법 따위의 여러 이름으로 수박희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그 수박희가 태껸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수박희를 우리 말로 '수벽치기'라고 하는데 손을 주로 쓰는 기술인 듯 합니다.

<조선 무사 영웅전>을 쓴 안자산은 수박희를 설명하는 글 중에 “근래에도 청년들이 씨름과 다른 수박희를 행함이 있던 바, 소위 택견이라 하는 것이 그 종류다.” 라고 하여 수박희와 태껸을 같은 종류로 보고 있으나, 수박희의 그림과 설명이 들어 있는 <무예 도보 통지>를 보면 수박희는 그 모습이 태껸과 다른 점이 많고, 오히려 중국 권법에 가깝습니다.
역사가 신채호는 <조선 상고사>에 고구려 무사들이 연마하던 무예를 설명하면서, “혹 칼로 춤도 추며, 혹 활도 쏘며, 혹 깨끔질도 하며, 혹 태껸도 하며, 혹 강물을 깨고 물 속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며...” 라고 적어 고구려 때에 태껸을 했다고 설명했고 고려 때의 무예에 관한 글에서는, “공도의 수박희 곧 선비 경기의 일부분이니 수박이 중국에 들어가 권법이 되고 일본에 건너가 유도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기록을 찾아 보면 태껸보다 수박희가 더 자주 나오는데 정작 수박희는 그 기술이 끊겨서 전혀 모습을 알 수 없고, 태껸만이 희미하나마 전해져 온 점입니다.

또 이상한 일은 태껸을 보았다는 사람이나 했다는 사람이 모두 서울 사람인 점입니다. 시골에서는 태껸을 보았다는 사람도, 했다는 사람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욱더 이상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태껸'과 '태권도'를 혼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태껸과 태권도는 문외환이 보아도 다른 성질을 가진 무술임이 확실합니다. 잠깐 비교해 보면 태권도에는 공격과 방어의 일정한 모양세를 갖춘 '형'이라는 것이 있지만, 태껸에는 형이 없습니다. '형'과 비슷한 것으로 ‘본’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것은 틀에 박힌 공격과 방어의 형이 아니라 태껸꾼이 자기가 가진 기술 중에서 몇 가지 기술을 상대에게 보여 실력을 과시할 때 쓰는 것으로 그렇게 하는 것을 ‘본때를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더 다른 점은 태권도는 동작의 기본을 직선에 두고 맺고 끊는 것이 명확하지만, 태껸은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동작의 기본을 원에 둡니다. 또 태껸은 중국의 '쿵후'와도 달라 동작이 길게 흐르지 않고 순간의 탄력을 중요하게 여기며, 쿵후에서 자주 쓰이는 주먹쓰기가 없습니다.

태권도의 동작. 출처 : http://ask.nate.com/qna/view.html%3Fn%3D6146595

중국과 한국과 일본의 세 나라 무술이 서로 주위 무술의 영향을 받아 조금씩 변했으리라고는 짐작할 수 있지만 그래도 동작의 기본만은 쉽사리 변해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태껸이 우리의 고유한 몸짓을 지니고 있는 무술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신기한 기술, 오묘한 기술이란 것이 별 게 아니라 사실은 모두 기본 기술에서 나오는 것 아닙니까? 지금 태껸의 깊은 기술이 끊어졌다고 하지만 깊은 기술만 남고 기본 기술이 끊어진 것 보다는 차라리 잘 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현대의 무술은 옛날 무술과 달라서 경기가 되어야 합니다. 지붕을 날고 담을 뛰어넘는 오묘한 기술보다는 기본되는 기술을 널리 보급해서 청소년들의 몸과 마음을 건전하게 기르는 경기의 모양으로 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는 뒷날에 판단이 되겠지만 지금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태극기 하나만 덩그렇게 걸려 있는 시멘트 건물에서 땀을 흘리며 수련하고 있는 스물 남짓한 제자들을 바라보며 그가 하는 말이었습니다. 한달에 오백원씩 건물 사용료도 되지 않는 회비를 받는다는 그는 그나마도 안 받으면 애들이 시시하게 알고 오지도 않는다고 하며 쓸쓸해 했습니다.

송덕기 명인, 신승 명인과 그의 제자 정경화.
출처 : http://issue.media.daum.net/culture/091...%3Dsegye

그는 그 뒤로도 열정을 다 바쳐 태껸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그 결과 1983년에 태껸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송덕기 명인과 함께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 뒤에도 그는 1987년에 이 세상을 뜰 때까지 태껸의 보급과 후진양성에 진력했습니다. 그 덕에 충주에 <태껸전수관>이 건립되고 1998년부터 해마다 10월에 <세계무술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태껸은 그가 아니었으면 사라지고 말았을 겁니다. 신승 명인은 근대 태껸의 마지막 전승자였으며, 태껸 정립의 외로운 길에 평생을 바친 현대 태껸의 중시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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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유화>라고 하면 온 국민이 사랑하는 김소월의 시를 제일 먼저 떠올리실 겁니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이 <산유화>가 수천 년 전의 우리 민요라는 걸 아는 분은 많지 않을 겁니다. 「증보 동국 문헌비고」의 <백제 가곡조>에는 <산유화(山有花)>에 대한 유래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제에 <산유화>가 있는데 남녀가 사랑을 주고 받는 가사이고, 가락이 구슬프다” 

남녀가 사랑을 주고 받는 노래를 왜 구슬픈 가락으로 불렀을까요?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의 손에 백제가 망하자 수많은 궁녀와 여인들이 낙화암에서 꽃처럼 떨어져 죽었다. 
의자왕이 볼모로 중국으로 떠나는 날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부여군 입포리의 남당산에 올라가 눈물을 흘리며 전송했다.
그 뒤 백제의 여인들은 의자왕이 끌려가던 음력 8월 16일이면 남당산에 올라가 오랫동안 못 만났던 친정 식구들과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날이 되면 온 산이 아낙네들의 울긋불긋한 옷으로 꽃이 피어난 듯 했다. 
백제가 망한 뒤 부여지방에는 <산유화>라는 노래가 불려지게 되었는데, 그 가락이 너무도 처량하고 구슬퍼서 아니 우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은 부여 지방에 전해 오는 <산유화>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이렇듯 슬픈 망국의 역사가 깃들어 있으니 그 곡조가 슬플 만도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노래가 아득한 옛날에 불리워졌으니 이제는 사라진 노래라고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노래가 아직도 전해지고 있으며, 그 노래의 발굴자이며 전수자인 박홍남씨가 부여에서 외롭게 그 노래를 지키다 돌아가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 또한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산유화가>와 더불어 이 지방에 전해오는 민요와 민속놀이를 발굴하고 정리하고 보존했던 이 고장의 ‘문화재’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일을 하기까지는 참으로 ‘먼먼 젊음의 뒤안길’을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박홍남 명인은 1921년 11월 17일에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인 박운종씨는 평생토록 농사만 지으며 고생만 하다가 그가 9살이 되었을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딸들과 아들을 데리고 고창읍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고창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친 그는 부안농고에 들어갔습니다.

“농고에서는 농사 실습을 많이 혀. 모심기도 하고 벼베기도 하고 김매기도 허는디, 농사일에는 취미가 없고 농악 장단에만 미쳐서 다녔당께.”

출처 : http://www.buyeotour.net/02cultural/cul...c%3D2100

어려서부터 논두렁에서 농악을 칠 때마다 신이 나서 풍물패를 따라다니고, 가을에는 양철때기로 농악 가락을 두드리며 새를 쫓을 만큼 농악에 심취했던 그는 학교 공부는 '뒷전으로 돌리고' 농악에 미쳐서 배우러 다녔습니다.

부안의 유명한 상쇠인 이명보씨에게 꽹과리를 배운 그는, 장구가 배우고 싶어서 장구 선생님을 수소문했습니다. 김대근이라는 사람이 설장구를 잘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보니, 그는 이발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두말없이 이발소에 취직하여 이발 기술도 배우고 장구도 배웠습니다.

그렇게 농악을 배우러 다니는 동안, 그럭저럭 학교를 졸업하고 해방을 맞았습니다. 남들은 해방이 된 기쁨에 춤을 추었겠지만, 그는 농악을 마음껏 칠 수 있다는 기쁨에 춤을 추었습니다.

어머니는 농사에 뜻이 없고 자꾸만 밖으로 도는 아들을 붙잡아 두려고 스물다섯이 되던 해에 장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색시 김복녀는 신혼을 제대로 보내지도 못하고 생과부가 되어야 했습니다. 남편이 <별님창극단>이라는 단체를 따라 훌쩍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쉴 새 없이 객지를 떠돌아다니고 집에 붙어 있질 않았어. 그러니 어머님한테는 불효자식이고, 부인한테는 못된 남편이었어. 일년내내 독수공방을 시키다가 설이나 추석 때 불쑥 나타나서 며칠있다가 또 훌쩍 떠나고는 했응께.
그리도 어찌어찌 애기는 생겨나서 자식들은 크는디, 나는 살림이 어떻게 되가는지 통 알지를 못했으니 애비로서는 빵점이었지. 젊은 시절을 참으로 분별없고 분수없이 보냈어.”

그 ‘분별없고 분수없는’ 행실의 첫걸음으로 <별님창극단>에 들어 간 그는 잔심부름을 하거나 꽹과리를 치면서 관객을 끌어모으는 궂은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러다가 창극의단역도 맡아서 하곤 했는데, 그렇게 삼년쯤 고생하다보니 나중엔 역할이 커져서 <춘향전>의 주인공인 이몽룡 역할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키가 자그마하고 예쁘장하니 이도령 역에는 손색이 없었지만, 판소리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소리가 안되니 무대 뒤에서 다른 사람이 판소리를 하고 주인공은 입만 달싹거리는 이상한 창극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판소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창극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창극단을 그만둔 뒤, 부안에 있는 전옥수라는 소리 선생을 찾아가서 소리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북가락을 배운 뒤, 단가와 <심청가>나 <춘향가>의 토막소리를 배운 그는 이듬해에 광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소리선생을 수소문한 그는 창극단을 하다가 병을 얻은 박영실이라는 소리꾼이 장성에서 휴양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곧장  달려가 서너달쯤 선생님 집에 붙어 살며 판소리를 배웠습니다. 그 뒤로 그는 오랫동안 판소리 강사 생활을 하게 됩니다.

정읍국악원에서 7,8개월, 군산 음악원에서 3년, 부안국악원에서 얼마......이렇게 여러 국악원을 돌아다니던 그는 어느 날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들었습니다. 남원국악원장 이한량이라는 사람이 여성농악단을 조직해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데, 인기가 아주 좋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해방 뒤에 생겨난 여성 국극단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던 때인지라, 여성만으로 농악단을 조직하는 것은 인기를 끌기에 충분한 기획이었습니다. 그는 여자들을 모아 장구와 꽹과리를 1년쯤 가르친 뒤, 여성농악단을 만들어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집에서는 설만 쇠고 일년 내내 돌아다녔지. 고생 직사하게 하고 죽을 지경도 여러 번 겪었어. 열차 타고 굴속을 가다가 기차가 멈춰서 질식하려다가 살아 난 일도 있고, 배타고 가다가 타고 가던 배가 큰 객선 밑으로 들어갔다가 빠져 나온 일도 있고, 태풍을 만나서 배가 뒤집힐뻔 하기도 하고, 깡패들이 돈 내놓으라고 칼로 찢고 행패 부려 그걸 말리느라고 곤욕을 치르기도 하고, 아무튼 별별 사건이 다 많았지. 그래도 그게 재미있어서 6.25 사변을 겪을 때까지 그러고 돌아다녔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을은 묘하게도 절반은 대한민국 군대가 점령하고, 절반은 인민공화국 군대가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그 통에 그의 가족도 이산가족이 되어 들판 건너에 사는 누님네는 대한민국 편이 되고, 그의 어머니와 식구들은 인민공화국 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뉘어진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모르고 있던 누나가 어느 날 친정어머니를 보려고 통행증도 없이 인민공화국의 영토를 ‘침범'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누나는 대번에 인민군에게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이쪽의 정보를 캐다가 저쪽에게 제공하려고 했다는 간첩 혐의였습니다. 누구를 만나러 왔느냐는 질문에 동생 이름을 대자, 그 역시 대번에 간첩죄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빨간 헝겊으로 눈이 가려진 그는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의 ‘경계선’까지 끌려갔습니다. 인민군은 파놓은 굴속에 들어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무리 잘못한 게 없다고 사정해도 듣지 않고 굴 속에 몰아 넣더니 열을 셀 때까지 죄를 자백하라고 했습니다.

자백할 죄를 생각하는 동안, 여덟을 세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눈을 감고 있을 때, 누군가 고함을 지르면서 헐레벌떡 굴속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을 분대의 연락 부장을 맡고 있던 동네 친구 권씨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 온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오더니 ‘이 사람은 농악 친다고 전국을 떠돌아다닌 사람이라 마을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렁게 역할을 줄래야 줄 수가 없고, 간첩질을 할래야 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허더란 말이여. 그 말 덕에 살아나왔지. 참 농악 치고 떠돌아 다닌 것이 그럴 때 나를 살려줄 줄이야 누가 알았나.”

그렇게 해서 살아 난 그는 전쟁이 끝나자 다시 예전의 단원들을 데리고 떠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불행한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공연 수익금 60만원을 가지고 오다가 소매치기를 당한 것입니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 논 열마지기를 팔아 그 돈을 메우고 충청 지방을 떠돌다가, 부여에 와서 여인숙에 짐을 풀었습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장날에 공연을 하려고만 하면 장날마다 비가 내렸습니다. 그 통에 설흔 다섯명이나 되는 단원들은 보름 동안 여인숙에만 죽치고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다시 집에 내려가 집을 팔아서 여인숙 빚을 갚고, 밀린 단원들 월급도 조금씩 준 뒤 단체를 해산시키고 말았습니다. 실로 9년만의 눈물겨운 해산이었습니다. 그 통에 그의 재산은 다 날아가버리고, 그 역시 오고 갈 데가 없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터에 부여국악원에서 강사를 부탁하자 두말없이 승낙해 버렸습니다.

“건물과 악기는 군에서 협조를 해줬는디 월급이 없어. 수업료라고 몇 푼 받지만 돈 없는 사람이 태반이니 못 내는 사람이 많고, 그나마도 1년이 지나면 회원이 되기 때문에 돈을 안내게 돼. 그러니 생계유지가 무척 곤란했지.”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인심 좋고 자신을 알아주는 분위기가 맘에 들어 한 십년간 제자들을 가르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1970년초에 국립창극단이 생기면서 지방 순회공연을 하는데 같이 가자는 전갈이 오자 또다시 역마살이 발동하여 서울로 훌쩍 떠났습니다. 김연수 명창과 조상현, 오정숙, 남해성과 같은 쟁쟁한 명창들과 함께 7,8개월 간 전국을 떠돌아다녔습니다. 그 뒤 장충동에 국립극장이 생겨 모두들 그곳으로 들어가자, 다시 부여로 내려 와 국악원 일을 보았습니다.

그 동안 거의 문을 닫다시피한 국악원은 그가 돌아오자 활기를 띄워 수강생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역시 이제는 떠돌이 생활에 지치기도 하고, 안주할 터를 닦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어 열심히 제자를 가르치며 성실하게 일을 했습니다.

몇 년 동안 닦은 그의 노력은 차츰 결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1975년에 열린 민속경연대회에 충청남도 대표로 서산면 붕기마을의 풍어놀이에 소리꾼으로 참가한 그가 '전래 민요'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미 판소리와 남도민요의 가락에 대해서는 알만큼 알았기 때문에 노동요의 힘찬 가락과 독특한 창법을 대하자, 자신도 모르게 그 멋과 맛에 흠뻑 빠진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참으로 뜻밖에 귀중한 사람과 만나게 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우리 국악원에 다니던 여자 수강생 한 분이 경기창을 하는데, 하루는 계원들과 노는 자리에 같이 가자고 하더란 말이여. 그래 같이 갔는디, 이병호라는 노인 집에서 노인 십여명이 모여서 술 한 잔씩 마시고 흥이 나니 목침돌림으로 노래 한자리씩 하더란 말이여.
그 중에 노인 두 사람이 일어나더니 노래를 하기 전에 ‘시방은 농촌에서 이런 거 했자 알아주지도 않는디, 옛날에 허던 노래라 한 번 헌다’ 하면서 한 사오십 분 노래를 주고 받더란 말이여. 그런디 그 노래가 어찌나 듣기 좋던지 홀딱 반했지. 이렇게 해서 <산유화>허고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이여.”

산유화야 산유화야
궁야평 너른 들에
논도 많고 밭도 많다
씨뿌리고 모 옮기어
충실허니 가꾸어서
성실하게 멪어보세
에-헤-에헤야-헤헤
에-헤-에여루 상-사-뒤-요-

산유화야 산유화야
입포 남당산은
어찌 그리 유정턴고
매년 팔월 십육일에
왼 아낙네 다 모인다
무슨 모의 있다던고
에-헤-에헤야-헤헤
에-헤-에여루 상-사-뒤-요-

산유화야 산유화야
사비강 맑은 물에
고기 잡는 어옹들아
온갖 고기 다 잡아도
경치 일랑은 낚지 마소
강산 풍경 좋을시고
에-헤-에헤야-헤헤
에-헤-에여루 상-사-뒤-요-

<산유화가>는 김을 매고, 벼를 베어서 타작하고, 볏단을 쌓아 키질을 하고, 알곡을 창고에 쌓기까지 농사일의 전 과정에 맞추어서 부르는 노동요입니다.

아득한 옛날 농사일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 지방에서 불리워졌던 노래들이 백제의 멸망과 더불어 문헌에 오르게 되고, 그 멸망의 애닯은 사연과 함께 면면히 전해 내려오다가 우연히 그의 귀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산유화가>에 흥분한 그는 바로 다음날 녹음기를 들고, 소리를 했던 세도면 장산리의 홍준기 노인 집에 찾아갔습니다.

“별것도 아닌 농요를 뭐헐라고 녹음허냐”는 노인을 설득하여 녹음을 한 그는 그 가락을 따라 불러봤습니다. 그러나 녹음기로는 도저히 제대로 배울 수가 없어서 홍노인을 국악원에 모시고 와서 반 년쯤 배웠습니다.

“장산리에 살던 임윤필이라는 분이 옛날에 <산유화>를 잘 했는디, 그 노래를 김학수씨가 배우고, 김학수씨는 홍준기씨한테 가르치고, 그 다음에 내가 이어받은 거여. 홍선생님 말씀에 옛날에는 이 <산유화>를 안허면 모를 안 심었당게 이 고장에서는 많이 불려졌던 모양이여. 그러다가 왜정 때 '물모'가 생기면서 안 부르게 된 거지.”

이 <산유화> 노래가 문헌에 나오는 <산유화가>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경남 지방에 전해 오는 산타령인 <산유해>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전북 익산 지방에 전해 오는 김매는 노래인 <산야>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것은 좀 더 전문적인 연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귀중한 백제 시대의 노동요가 끊어질뻔한 위기에서 구해진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는 이 노래들을 다듬어서 전국민속대회에 참가하여 상을 받았습니다. 그 뒤에도 <저산팔읍 길쌈놀이>라든가, <서산 벼가릿대 놀이>라든가, <공주 장승제>라든가, <청양 동화제>와 같은 민속 유산을 발굴하는 동안에 전문적인 연구가가 되다시피 했지만, 이러한 일들을 하게 한 원동력이 <산유화>에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습니다.

출처 : http://www.buyeotour.net/02cultural/cul...field%3D

"내 나름껏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혀. 남들에게 해 입히지 않고 노래로 즐거움과 위안을 주며 살아온 셈이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언제 어느 때 가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 같고…. 
아무튼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지만 사는 날까지 노래하고, 장구 치고, 열심히 가르치며 살고싶어. 산유화를 만난 인연으로 우리 민요의 보존을 위해 나름껏 신명을 바쳐온 것을 보람으로 여기고…"

2006년에 삶을 마감할 때까지 노래 하고, 장구 치고, 제자들 가르치면서 여한없이 살다 가신 그의 신명난 삶이 부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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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명인명창에 대한 이야기를  띄엄띄엄 올렸는데 앞으로는 좀더 자주 전에 제가 발표했던 명인명창에 대한 글들을 손질해서 올려볼까 합니다. 그래서 '명인명창 이야기'라는 카테고리도 만들었습니다. 
아마 네티즌들에게는 생소한 분들이 많고, 내용도 그리 흥미롭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미래의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스피어에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 끝에 시작합니다. 오늘은 지난 번에 소개한 박동진 명창과 단짝이 되어 북 치는 '고수(鼓手)' 이름을 날린 김득수 명인입니다. 

“이 쌔려 죽일 놈아, 북 좀 잘 쳐라.”
“그렇지!”
“눈 구녁을 쑥 뺄 놈이 대답은 잘 허는구나.”
“암먼.”
“정신 똑바로 차려, 이 발꼬락을 지질 놈아.”
“좋다!”

누가 들으면 당장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멱살을 잡고 덤벼들 욕설에 고수가 “그렇지!”, “좋다!”, “얼씨구!", "암먼!” 하면서 넉살좋게 받아내는 일이 소리판에서는 곧잘 벌어집니다.

욕 잘 하고 음담패설 잘 하고 재담 잘 하는 소리꾼한테는 고수가 곧잘 재담의 희생물이 되는데, 어떤 고수는 소리꾼이 자기에게 욕을 하거나 재담으로 놀리는 것을 싫어하여 대꾸를 안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김득수 명인은 소리꾼과 재담을 나누는 것을 즐겨했던 고수입니다. 특히 그의 오랜 벗으로 평생을 소리판에서 함께 지내온 박동진 명창과 소리판을 벌일 때에는 두 사람의 호흡이 척척 맞아 떨어집니다.

“아이구, 저 놈이 발뒤꿈치에 감기가 걸려서 북을 잘 칠랑가 모르겠네.”
“소리만 잘혀 봐, 북이 저절로 쳐지지”
“오냐, 내 아들놈아”
“그렇지!”

이런 재담 덕분에 소리판은 생기가 넘치고 훨씬 재미있어집니다. 이것은 그가 재담을 꾸미고 받아넘기는 솜씨가 뛰어난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고수는 소리꾼을 받쳐주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예술관에 철저한 탓이기도 합니다. 

“북은 장단을 정확하게 짚어서 시끄럽지 않고 조용하게 소리를 받쳐주어야 하는 법이여. 차가 잘 다닐 수 있도록 길을 잘 닦아야하는 것 처럼 북이 장단과 추임새로 소릿길을 닦아 주어야 혀.
소리가 나가다가 구렁에 빠질라고 허면 얼씨구 하고 추어주어서 빨리 지나가게 허고, 슬플 때는 북가락도 줄이고 추임새로 슬프게 분위기를 맞춰서 넣어 주고, 소리가 웅장할 때에는 북소리도 크고 추임새도 크게 하게 하고, 바쁘게 주워 섬길 때는 또 그런 분위기를 내주어야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청중들이 즐거워하도록 분위기를 잡아 주는 것이 중요혀. 그래서 나는 기회만 있으면 소리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한테 소리를 잘하고 못 하고는 청중들한테 달렸다고 허지. 소리꾼이 소리 잘 하도록 실컷 추어주고 받쳐줘라. 그래서 일고수 이명창이 아니라 ‘일청중 이고수 삼명창’이란 말은 내가 만들어낸 말이여.”

위에 소개한 말의 앞부분은 「서편제」에서 유봉이 아들에게 북을 가르치면서 호통을 치는 대사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렇듯 그가 철저하게 소리꾼을 받쳐주는 고수의 역할을 주장하게 된 데에는 본래 북보다 소리를 먼저 배운 그의 경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에서 김행원의 7형제 중 다섯째 아들로 1917년 7월 17일에 태어났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취미로 말도 기르고 진돗개를 길러 사냥을 즐기던 그의 부친은 정초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북, 장고, 징, 꽹과리로 풍물을 칠 때에나, 모를 심으면서 상사 소리를 할 때에는 언제나 으뜸가는 북잽이로 나설 만큼 북춤 추는 솜씨가 뛰어났고 판소리 북도 곧잘 치던 멋쟁이였습니다. 게다가 그의 집 뒤에는 조선시대 음악인들의 모임 장소라 할 수 있는 '신청(神廳)'이 있어서 노래 소리와 악기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집안과 마을의 음악적인 분위기에 흠씬 젖어서 자란 그는 진도보통학교에 다니던 일곱 살 무렵부터 채두인이라는 진도 소리꾼에게 남도민요와 육자배기와 판소리를 배우러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시골의 명창에게 깊은 판소리를 배우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열세 살 무렵에 집을 떠나 전남 목포에 있는 권번을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소리 선생으로 있던 오수암이란 젊은 명창에게 귀동냥으로 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영광군 법성포에 있는 명월관의 초빙을 받아 그곳의 여자들에게 소리를 가르쳐 주는 강사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니까 귀엽고 예쁘고 목이 좋아서 소리도 듣기 좋으닝게 여자들한티 인기가 대단혔지. 그 덕에 한참 동안 요정 소리 선생으로 떠돌아 다닌 세월이 시작됐어.”

그곳에서 3년쯤 지난 뒤에 부산으로 가서 김광월이라는 여자 명창을 수양누이 삼아 그의 집에서 지내다가, 경북 경주군 감포읍의 달성관이라는 요정 주인에게 붙잡혀  그곳에서 2년간 소리선생 노릇을 했습니다.

그 뒤 울산 권번에 6개월쯤 있다가 경주 권번에서 1년쯤 지낼 적에 그곳에서 가야금을 가르치던 박상근의 권유로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박상근 씨는 가야금의 인간 문화재이신 성금연의 스승인데 참말로 가야금 잘 타신 명인이었어. 그 박상근 선생님하고 김천에 있는 명월관에 들렀지. 박동진이가 그곳에서 소리를 가르치고 있길래 같이 가자고 해서 셋이 상경을 했어.”

스물을 갓 지난 두 젊은 소리꾼은 ‘조선 성악 연구소’의 대명창 선생 밑에서 공부를 하며 명창에의 꿈을 키워 나갔습니다.

선생님들이 창극 단체를 꾸며 일 년 동안 조선 팔도와 만주 지방을 순회 공연 다닐 때에는 함께 따라다니며 무대 경험과 소리의 기량을 한껏 넓혀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풍성함은 잠시뿐이었고 곧이어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젊은이들은 징용이나 징병으로 끌려가고, 순사의 검문 검색은 나날이 심해지는 불안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때 징병 안 갈라고 죽을 고생했어. 공연을 해도 작품을 일본말로 해야 돼. <흥보전>을 할 때에는 흥보자식들이 일본에 충성하러 즐겁게 군대에 간다는 내용을 넣어야 했어. 그러다가 창극단에서 나와 연극 단체를 따라 다니기도 했지.”

징병에 끌려 갈 위험이 닥치자 박동진 명창과 함께 경남 도운과 위문단에 끼여서 공연을 다니던 중에 부산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쉴 새 없이 팔도를 떠돌아 다니느라 결혼할 엄두조차 못 내다가 해방되기 한 해 전 스물여덟 살에 늦장가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새색시와 신혼 생활의 재미도 채 나누지 않고 해방이 되자마자 목포로 가서 ‘진도 창극단’을 만들어 면면촌촌을 다니며 판소리와 민요와 토막창극을 들려 주며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김연수 명창이 창극단을 만들자 그곳에 가담했다가 그 단체가 해산된 후 김소희, 박후성 명창과 함께 ‘국극협단’을 창설하여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단체를 따라다니며 정처없이 떠도니 집안을 돌볼 수가 있어야지. 그러니 번번이 아내가 떠났어. 자식이 오 남매가 있는데 다 어미가 달라. 내가 스스로 지은 죄가 있으니 떠난 사람을 원망을 안 혀. 그때에는 아무튼 창극 단체 꾸미고 운영하는 데에만 온 정신이 팔려 있었응게.”

광주에서 단체를 재조직하려고 뛰어다니다가 실패하여 방황하고 있던 그는 서울에 올라와서 김연수 명창과 손을 잡고 단체를 만들어 다시 떠돌아 다니게 되었습니다.

“대구서 임춘앵 여성 국극단하고 경합이 붙어 동아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판인데 사람이 수없이 몰려와서 대만원을 이뤘어. 이제 그동안 진 빚을 갚을 수가 있겠다고 좋아하는 판인데 하루 공연하고 나니 그 이튿날 새벽에 6.25가 터져버렸어. 단원들하고 거지 생활이 시작됐지.”

대구에서 김해극장으로 옮겨서 피난민 위안 공연을 할 때, 낙동강 작전으로 함안 지방의 17만 인구가 김해로 피난을 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통해 거처할 방마저 구하기 힘들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비어 있는 어느 장삿집에서 여배우들과 함께 물장사를 하며 어려운 피난 생활을 보낸 그는 전쟁이 끝나자 단원들을 데리고 부산을 거쳐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단체 만들어 다닌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여. 작품을 만드는 일도 어렵고, 극장 잡고 사람 모으는 일도 어렵고, 허가 받고 지방 돌아다니는 일도 어려워. 그 중에서 지방 건달이나 한량들 텃세 막아내는 일이 가장 어려워. 어딜 가나 단체가 가면 괜히 시비 걸고 여배우들 집적거리는 건달들이 있는디 그런 사람들하고 싸움이 벌어지면 으레 내가 도맡아 나섰지.”

그는 한창 때에 양손에 칼을 들고 팬티바람으로 수십 명하고 싸운 전력으로 ‘진도 쌍칼’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건달 세계에서 알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평소 때는 사람 좋고 너그럽다가도 국악인을 천대하고 괴롭히는 사람만 만나면 무섭게 돌변해서 '박치기로 받아 버리고 사정없이 쥐어패는' 통에 국악계에서는 의협심과 인정으로 뭉친 사나이라는 칭송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의협심은 70년대에 국악협회가 뇌물과 공금 횡령과 기생 수출로 벌집 쑤셔 놓은 꼴이 되었을 때 여지없이 발휘되었습니다. 그는 권력자들의 위세에 눌려 바른 말을 못 하던 국악인들의 대변자가 되어 이사장과 간부들을 몰아내고 협회를 혁신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그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소리꾼을 뒷받침하는 단체의 기획이나 고수 노릇을 많이 하고 벌어들인 신망의 덕도 또한 컸습니다.

“난 본래 소리꾼으로 출발했는디 소리꾼으로 대성 못 허고 고수로 돌았지. 그것은 소리공부할 때에 한성준, 정원섭, 김재선 같은 북의 대가들에게 북을 함께 배운 받침이 있어서 단체에서 소리꾼보다 고수 노릇을 많이 하다 보니 지금은 북으로 인간 문화재가 되어 버렸지.”

한성준은 일제시대에 승무와 북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고, 정원섭 역시 판소리와 북에 통달했던 사람이고, 김재선 역시 북의 대가로 일세를 날린 사람입니다. 이들과 함께 공연을 다니며 배운 실력으로 어느덧 그는 북 치는 데에 아무도 따르지 못할 솜씨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소리하는 데에 잘 하고 못 하고 고비가 있듯이 북치는 데에도 잘 치고 못 치는 고비가 있어. 그저 또박또박 장단만 짚어서는 맛이 안 나. 고수는 반주자와 지휘자를 겸해서 소리가 험한 길로 가면 좋은 길로 가게 인도하고, 빠르면 느리게, 느리면 빠르게 음양을 맞추어 줄 줄 아는 데에서 제 솜씨가 나오는 거여.
소리도 마찬가지여. 선생에게 배운 대로 또박또박 박자 음정만 맞추는 건 진열장 소리여. 흉내 소리지. 거기서 넓힐 수도 좁힐 수도 없어. 옛날 선생들은 안 그랬어. 자유자재여. 흥이 안 나면 별 거 아니다가도 한번 흥이 나면 손님들이 앉았다 일어났다 어쩔 줄을 모르고,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떨려서 소리듣고 나면 온몽이 아플 정도여.
똑같은 음식도 간을 맞추는 데 따라 다르듯이 똑같은 선생한테 배운 소리도 제가 간을 넣어야 맛이 나는 거여. 선생을 뛰어 넘고 푹 솟아야 진짜 명창이여. 옛말에도 서당서 공부 잘 헌 놈은 붓장사 허고 공부 못 헌 놈은 영의정 헌다고 했어. 글만 많이 알아서 융통성없는 놈보다 흡글을 됫글로 말글로 섬글로 노적글로 풀어먹을 줄 아는 놈이 성공헌다는 말이지. 말허자면 창의성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여. 그런디 요새는 문화재 보호니 뭐니 해서 그런 창의성이 다 사라져 버리고 말었어.”

획일적인 문화재 전수 정책을 비판하는 그의 말투는 날카롭고 매서우면서도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배어 있어 듣는 사람도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단어 하나 장단 하나도 바꾸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전통의 보존이라는 문제와 예술적 창의력과 개성을 살려 새로운 시대의 전통예술을 창작하는 문제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야 할지는 우리 국악계 전체가 안고 있는 숙제인 것입니다.

국립국악원 자문위원, 한국 국악협회 이사로서 국악계의 든든한 대들보로 활동하던 그는 제자들과 자식들과 그를 좋아하여 끊임없이 찾아오는 후배들에 둘러싸여 외롭지 않은 말년을 지내다가 1990년 5월 21일에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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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부 장관 직을 그만 둔지도 어느 덧 2년이 되어 간다.
그동안 TV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연기자로, 연극 <밀키웨이>에서는 극작과 연출가로, 최근에는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위원장으로서 즐겁고 바쁘게 살고 있다.
 

내가「대왕 세종」에 출연하고 있을 때, 모 일간지에 동정 기사가 실렸는데 그 기사의 제목이 한동안 여기저기서 화제가 됐다.


김명곤 씨 “장관 껍데기 훌훌~ 다시 광대로”

“장관이라는 껍데기를 훌훌 벗어 버리고 이제 천직인 광대로 탈바꿈해야죠. 걱정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허허.”

김명곤(55·사진)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내년 1월 방송 예정인 KBS 1TV 사극 ‘대왕 세종’(극본 윤선주·연출 김성근)에서 배우로 복귀한다. 1999년 자신이 연출한 연극 ‘유랑의 노래’에 출연한 지 8년 만이다.

그는 그동안 국립극장장과 문화부 장관을 지내면서 연기와 멀어졌다.김 전 장관은 ‘대왕 세종’에서 고려 황실의 후예로 조선 왕조의 전복을 꿈꾸는 옥환 역을 맡았다. 옥환은 어린 세종을 긴장하게 만드는 인물로 초반 30회까지 비중이 큰 역할이다. 그가 대하 사극에 출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D일보 2007년 10월 6일자 기사 중 일부)

나는 대학교 다닐 때만해도 광대라고 하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코에 빨간 공을 붙인 서양의 삐에로를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줄타기하는 광대를 처음 보았는데 그 광대가 줄에 올라서서 “이 줄타기가 옛날에는 화랑의 기예였소!.” 하길래 깜짝 놀랐다. "화랑이라면 신라 시대의 무사 집단인데 줄타기를 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며 광대에 관한 기록을 찾아봤다.

우리나라에 그윽하고 오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며 유교, 불교, 도교의 3교를 포함한 것으로 민중을 교화하는 것이다.

신라 시대의 학자인 고운 최치원이 쓴 글이다. 이 글을 바탕으로 역사가인 단재 신채호는 이렇게 썼다.
 

선가(仙家)는 신라의 국선 곧 '화랑'으로 보며, 그 시원은 삼한의 소도(蘇塗)의 제관으로 고구려의 '조의선인(鳥衣仙人)'이다.

이런 글들을 보니 고대사회에서 예술가들은 하늘에 국가적 제사를 지낼 때는 제관으로서 활동했고, 그들의 신분은 왕족이나 귀족에 속하는 상류계급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통일신라가 무너지고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화랑들과 함께 예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천민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광대”라는 말은 고려시대에 서역에서 들어 와 우리말로 정착된 외래어인데, 예술가를 지칭하는 단어인 광대가 화랭이, 재인 등의 용어와 뒤섞이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광대들은 기생, 무당, 중, 백정 등과 함께 천민계급으로 살아야 했다. 이들은 사대부나 평민들과 한 동네에서 살지도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하고,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자기들끼리 기예를 전수하면서,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고, 그들만의 독특한 사회를 꾸려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광대들에 대해 다산 정약용은 이런 상소문을 썼다.

광대가 봄·여름이면 고기잡이를 좇아 어촌으로 모여들고 가을과 겨울이면 추수를 바라고 농촌으로 쏠리는데, 특히 창촌에서는 사당, 창기, 주파, 화랑, 악공들의 잡류들을 엄금해야 합니다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본 <왕의 남자>는 이 무렵의 떠돌이 남사당 광대패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실학사상이 일어나고 평민 가사, 탈춤, 판소리 등의 가치를 양반들 중의 몇몇이 언급하게 되면서 광대들의 가치가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고종과 대원군이 권력을 쥐었던 무렵에는 광대들이 왕족이나 고위 관리들의 잔치에 초대받고, 심지어 명인, 명창, 국창 등의 이름으로 궁궐에 들어가 임금 앞에서 기예를 선보이며 많은 돈을 벌고 신분의 상승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조선이 망한 후 광대들은 또 다시 천대받게 된다. 그 상황은 일제시대의 학자인 육당 최남선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조의 재인, 광대들은 적극적으로 특별한 권장을 입지 못하고, '무식무기력한 예인'들이 사회 최하층적 지위에서 구차히 존재하다 보니까 거기 쇠잔이 있을 뿐이지 발달이 없으며 저락이 거듭될 뿐이지 향상을 볼 수 없음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조건 하에 있다 보니까 '수 천 년을 하루같이' '몸을 놀리는 기술'과 '우스개 놀이'쯤에 그치고 드디어 다른 데 만한 순희곡적 생장을 이루지 못하고 만 것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명 풍화에는 조금도 유익한 바가 없으니 이는 연희를 실시하는 자가 학문이 없어 '동양의 부패한 풍습'만 알 뿐이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했던 <서편제>는 이 무렵의 떠돌이 판소리 광대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나는 대학시절에 오페라나 이태리 민요나 가곡이나 뮤지컬이나 비틀즈 등의 서구음악의 열광적 팬이었고, 괴테나 세익스피어나 입센이나 도스토에프스키 등의 서구문학(독문학)에 심취했던 사람이다. 그러다 우연히 판소리를 알게 된 후로 내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고향인 전주를 무지 싫어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의 흔적이 너무나 짙은 그 곳을 어서 떠나 서울로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진학공부를 했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도 한국을 빨리 떠나 독일로 유학 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인간문화재인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면서 전라도 말이 그렇게 다양한 표현과 영롱한 문학적 향기가 있는가를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핏줄에 대한 애정 곧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나의 조상과 조국에 대한 사랑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전통은 박물관에 진열된 골동품이 아니다. 전통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았던 삶의 내용과 형식 곧 그 분들의 삶의 자취이고 향기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세월이 지나면 전통의 계승자가 될 것이며, 언젠가는 전통 그 자체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나에게 전통은 ‘나를 숨쉬게 하고, 나를 활기 있게 만들어 주고, 또 창조의 열정에 불타게 하는 소중한 원천이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무식무기력’한 광대들에게서 내 예술의 많은 부분을 배웠다. 나는 ‘수천 년을 하루같이’ ‘동양의 부패한 풍습'을 몸으로 전해 온 그들의 예술에 매혹 당하고 심취하고 깊이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들의 ‘몸을 놀리는 기술’ 속에서 삶의 깊은 애환과 감동을 보았고, 그들의 ‘우스개 놀이’ 속에서 예술적 창조의 편린을 보았다. 그들은 나의 스승이었고, 나의 애인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 종족의 일원이 되고자 ‘광대’라는 말을 쓴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연기, 연출, 극작, 경영, 행정에다가 연극, 영화, 국악, 방송 등 여러 분야에 간여하는 것을 보고 혼란스럽다고 한다. 

당신의 정체는 뭔가? 아마도 이게 그들의 질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나는 그 모든 것을 추구하는 광대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럼 당신은 어떤 광대가 되고 싶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
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라는 책에 나오는 발렌친 카그다예프라는 브리야트 족의 샤먼과 저자와의 대화로 대신하고자 한다.

질문 : 당신 삶의 목표는 무엇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

답변 : 훌륭한, 혹은 좋은 샤먼이란 자신이 함께 살아가는 민족을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는 좋은 샤먼이 되고 싶고, 따라서 우리 민족이 서로 도와가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본다.-----사랑을 나누고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모든 샤먼이 지녀야 할 미덕이다.

반면 모든 악과 문제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과 자연과 사물을 착취하는 데서 발생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인내하고 이해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남을, 상대방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상대가 원하기 전에 그가 원하는 것을 먼저 베풀어 주는 것이 사랑의 첩경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현자와 성자들이 설파했던 조화와 사랑, 이것의 실천자로서의 샤먼 곧 ‘무당’의 역할에 대한 바이칼 샤먼의 지혜로운 말이 ‘광대정신’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광대란 '넓은 광(廣), 큰 대(大)'라는 말 뜻 그대로 ‘넓고 큰’ 영혼으로 세계의 불화와 고통에 정면으로 마주 서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온 몸으로 감싸 안고 표현하는 예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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