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블로그 이미지
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 2,524,476Total hit
  • 37Today hit
  • 167Yesterday hit

'동편제'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0.05.31
    고집스럽고 튼튼한 땅의 소리, 강도근 명창 (6)
  2. 2010.05.23
    목은 꺾였어도 최고의 공력, 박봉술 명창 (6)
  3. 2010.05.18
    4대째 이어지는 외곬수 고집, 정권진 명창 (8)
  4. 2010.02.10
    지리산 '동편제' 소리 여행 다녀왔어요 (25)
  5. 2009.09.04
    「서편제」의 영감을 준「조선창극사」 (24)
  6. 2009.08.22
    맹렬 기생과 가왕 송흥록의 사랑이야기 (26)
  7. 2009.06.06
    '서편제'와 '동편제', 통합의 소리판이 그립다. (19)
  8. 2009.05.21
    나는 언제쯤 <서편제> 족쇄에서 벗어날까? (41)
전라북도 남원 땅이라고 하면 누구나 춘향이를 떠올리거나 판소리를 떠올릴 것입니다.

실제로 남원군은 국악의 본거지라 할 만큼 수많은 명인명창을 길러냈습니다.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에서 태어나 판소리의 중시조로 일컬어지며 ‘가왕’이란 칭호로써 판소리계 최고 명창으로 떠받들어지는 송흥록 명창,
그의 아들 송우룡 명창,
송우룡의 아들로써 일제시대 판소리계의 왕자로서 일세를 울리다 간 송만갑 명창,
남원군 수지면에서 태어나 송만갑과 함께 일제시대에 이름을 떨친 유성준 명창,
유성준과 송만갑의 제자인 김정문 명창,
남원시에서 1900년에 태어나 여자 명창으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 간 이화중선 명창과 그의 동생 이중선 명창,
운봉면 화수리에서 1915년에 태어나 최고의 여자 명창 중 한 명으로 활약했으며 저의 스승이기도 한 박초월 명창 등등.......


모두가 남원 땅에서 태어난 명창들입니다.

남원에 있는 광한루. 출처 : http://www.lsphoto.co.kr/%3Fdocument_srl%3D616

이밖에도 많은 명인명창들이 일제시대인 1921년에 광한루 안에 세워진 <남원권번>에서 판소리나 시조나 가야금이나 춤 등을 배우고 가르치며 활동했습니다.

남원권번은 그후 일본 경찰의 강압으로 광한루 밖으로 쫒겨 나 민가에서 국악교습소 노릇을 해오다가, 1977년 11월에 광한루 건너 요천 곁의 금암산 기슭에 아담한 한옥을 세워 <남원국악원>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새롭게 증축된 남원 <국립민속국악원> 출처 : http://korean.visitkorea.or.kr/kor/ti/e...6cat2%3D

강도근 명창은 1973년에 남원국악원 창악 강사로 자리를 잡은 뒤, 1996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오로지 이곳에서 제자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살아 온 남원 판소리계의 기둥입니다.

1918년에 남원시 향교동에서 강원종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농사일에 재미를 붙이며 열심히 땅을 가는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는 틈틈이 귀동냥으로 얻어 들은 농부가나 판소리 가락을 흥얼거리면 주위에서 ‘얼씨구 절씨구’ 하며 목이 좋고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그 재주를 썩히기 아까우니 정식으로 소리공부를 하라고 주위에서 자꾸 권하는 통에 17살이 되었을 무렵, 주천면에 살고 있던 김정문 명창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김정문 명창의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2년쯤 공부를 했습니다.

“한 2년 공부허다가 선생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어. 젊은 나이에 심장마빈가 뭔가로 돌아가셨어. 그래 집에 돌아와 있다가 20살쯤 되었을 때 서울에 올라가서 조선 성악 연구회에 갔지.
그곳에서 송만갑 선생님헌티 소리공부를 했지. 김정문 선생이 그 양반 제자였기 땜시로 나도 당연히 그 양반한티 배워야 헌다고 생각헌 거여. 그런디 그때 선생님이 일흔 일곱 살인가 되셨으니 몸이 불편하셔서 잘 안 나와. 그런디 공부헌지 얼마 안돼서 선생님이 또 돌아가셨어.
그래서 구레 사는 박만조씨가 수십 년 동안 송만갑 선생님허고 사귀면서 그 사설이나 가락을 알고 계시기 땜시 그분한티 찾아가서 조금 배우고, 전라도 광양 땅에 이진영씨가 송만갑 선생한티 공부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서 조금 배웠어. 아무튼지 죽어도 동편 소리가 좋다허고 동편만 찾었으니께.”

그가 그토록 애타게 찾은 동편 소리는 송흥록으로부터 시작해서 송우룡과 송만갑을 거쳐 내려오는 송씨 집안의 소리로 그들이 전라도의 동쪽 지방인 구례나 남원에서 살았기 때문에 ‘동편제’라고 불리는 소릿제입니다. ‘서편제’가 장단의 변화가 많고 섬세하고 기교가 풍부한데 견주어서, 동편제는 장단이 똑똑 떨어지고 웅장하고 단순 소박한 것을 특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열심으로 공부를 하는 판인디, 어느날 갑자기 목소리가 변했어. 장가 가기 전이라 전부터 나를 좋아하던 여자하고 딱 하룻밤 잤는디, 그 이튿날 소리를 해보닝께 뒤통수에 무거운 돌을 매단 것 같고 목이 갈려서 독아지 깨지는 소리가 나.”

여자하고 딱 하룻밤 잔 것 때문에 목이 상했다는 것은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남자 명창들이 젊었을 때 목이 상해서 고생한 경험을 얘기하는데, 그 원인이 거의 여자 아니면 술인 것으로 보아 젊은 시절에 정력을 함부로 낭비하는 것이 소리하는 데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남자는 사춘기를 벗어나면 어떻든 목이 갈려서 소리가 변하게 되어 있어. 그렇게 갈라져서 안 나오기가 십 년이 가. 그 재난을 이기고 뚫고 올라오지를 못해. 목이 안 나오니 생활은 안돼. 애는 터지고 부아가 나서 견딜 수가 없으니 술이나 퍼 먹고 좌절해 버려. 어렸을 때 명창 소리 들은 것 다 소용없고, 남들이 비웃기나 허고, 앞날은 암담허고.....나는 이십 년간 그 고생을 견뎠어. 없어진 소리를 되찾을라고 말도 못헐 고생을 혔지.”

그는 지리산 밑에 있는 쌍계사나 순천의 선암사나 남원산성 같은 곳에 가서 죽어라고 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전 같은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창극 단체에도 잠깐 몸을 담았는데 인기 있는 선배 명창들의 뒷바라지나 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울적한 세월을 2년쯤 보낸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버렸습니다. 그 뒤 해방이 되고서도 여기 저기 창극단에 끼어 공연을 하곤 했지만, 일만 끝나면 부지런히 공향에 내려오곤 했습니다.

“창극단을 따라 다니면서도 농사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어. 내가 본시 농사꾼이라 일허는 것이 좋아. 남들은 일허기 싫어서 소리헌답시고 건달처럼 지내는디 나는 밭에서 지게 지고 하루 종일 일허고 나면 몸이 개운허고 기분이 좋아. 그렁게 판소리허는 사람들도 모두 다 알아. 저 사람은 소리허는 것보다 농사를 더 좋아허는 사람이다 그렇게 알아 버려.”

이렇듯 생활에 튼튼한 뿌리를 내린 명창이기 때문에 그의 판소리는 건강한 생활에서 오는 소박함과 강인함이 특징입니다.

“나는 서울 사람들허고 판이 달러. 그 사람들은 창이면 창, 연극이면 연극으로 먹고 살아야것다 허고 나선 사람들이지만 나는 내 손으로 농사지어서 먹고 살어. 그것이 나는 좋아. 서울 사람들이 촌놈이라고 비웃어도 나는 오히려 그 사람들을 비웃네. 나는 돈을 싸줌서 서울서 살라고 혀도 못 살어. 그리고 서울 가면 사람이 버려. 옛날에도 멀쩡한 청년들이 소리헌다고 서울 가서는 게집질에 술에 아편에 몸버린 사람 많았어. 그러니 우리는 촌에서 농사 짓고 사는 게 마음 편하고 좋아.”

이렇듯 도도하게 땅을 지키며 소리를 다듬어 온 그는 차츰차츰 목소리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나이 마흔이 넘었을 때 비로소 고음과 저음을 마음대로 구사하고 몇 시간을 계속해서 소리해도 목소리가 변하지 않는 ‘득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약간 쉰 듯한 수리성인 그의 목소리는 가늘고 단단하며 고음이 강하고 튼튼합니다. 특히 그의 음질은 옛날 송만갑 명창의 음질을 많이 닮았고, 기교를 부리지 않고 통성으로 뽑아 냄으로써 동편제 소리의 특성을 가장 잘 전해 준다고 평가받습니다.

어쨌든 그는 서울 사는 소리꾼에게서는 보기 드문 고집과 힘을 지니고 있는 느낌을 주는데, 이는 오로지 돈과 출세와 인기와 명예를 멀리 떠난 그의 튼튼한 생활 덕분이라 하겠습니다.

“그 전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논에서 살았는디 나이가 등게 그것도 맘대로 안돼. 인제는 일허는 것이 힘이 들어. 거기다가 여기 국악원에 애들이 워낙 많어. 그애들 가르치다가 하루해가 다 가버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찾아 오는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그의 목은 하루도 쉴 날이 없었습니다.

국민학생에서부터 고등학생까지 하루에 쉰 명쯤 되는 제자들은 그의 덕으로 전국에서 벌어지는 학생 국악경연대회는 모조리 휩쓸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갖춘 ‘무서운 아이들’로 성장했습니다.

그동안 국악에 끼친 공로로 ‘한국국악협회 공로상’(1981), ‘남원시민의상 문화상’(1985), ‘KBS국악대상’(1986), ‘자랑스러운 전북인의 상 대상’(1988) 등을 수상하였으며 198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의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30여 년 동안에 수백 명의 문하생을 길러냈습니다. 안숙선, 오갑순, 성우향, 김정숙, 한농선, 홍성덕, 강정흥, 전인삼 등 명창과 많은 국악인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습니다. 고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꼬박 학생과 마주 앉아 직접 북장단을 치면서 목청을 돋구고, 소리 하나하나를 일일이 교정해주었습니다

“서울서는 소리 가르치는디 5만 원도 받고 10만 원도 받는다고 허는디 그것 몹쓸 일이여. 소리공부 허는 학생치고 부잣집 애들이 없는디 누가 그렇게 많은 돈을 내고 공부를 허것어. 여그서도 국악원을 운영허느라고 7,8천 원씩 받고 있지만 소리는 돈 안 받고 가르쳐야 돼. 선생 먹고 살 것은 정부에서 보조해 주고, 제자들은 무료로 정성껏 길러내야 앞으로 국악이 발전허게 돼.”

앞으로 남원에서 명창이 나오게 된다면 이는 오로지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소리는 돈 안 받고 가르쳐야 된다고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를 하다가 돌아가신 고집스럽고 꿋꿋한 스승의 덕일 것입니다.

강도근 명창의 후계자 전인삼 명창. 출처 : http://www.postech.ac.kr/k/student/cult...ex8.html
트랙백 0 AND COMMENT 6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스피어에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목은 껶였어도 소릿길을 빛낸 박봉술 명창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새벽 3,4시, 옆에서 쿨쿨 잠을 자고 있는 어린 아들의 입에 아버지가 앵두사탕을 슬며시 넣어 주며 흔들어 깨웁니다.

“봉술아, 봉술아!”
“.....예!”
“잠이 깨냐?”
“예!”
“그럼 아버지 따라 해봐라. 둥둥둥 내 사랑 어허 둥둥 내 사랑----”
"둥둥둥 내 사랑 어허 둥둥 내 사랑"
 
소년은 어렴풋한 잠결에 앵두사탕을 빨아 먹으면서 아버지를 따라 판소리를 부릅니다. 자신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차세대 명창으로 승승장구하던 아들 박봉래가  33세의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뜨자, 박만조씨는 이제 막 10살을 넘은 막내 아들 봉술에게 자신이 직접 판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21년에 전라남도 구례군 용방면 중방리에서 박만조씨의 5형제 중 막내로 태어 난 박봉술 소년은 이렇듯 아버지의 판소리에 대한 집념 때문에 소리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한약방을 운영하던 그의 부친은 오래 전부터 판소리에 심취해 있었는데, 특히 송만갑 명창과 교분이 두터워서 그에게 판소리를 직접 배우기도 하고, 큰아들인 박봉래를 그의 제자로 집어넣어 소리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 꿈이 꺾이자, 형에게 판소리를 배우던 막내아들에게 당신의 꿈을 걸어보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동네 친구들과 놀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던 봉술 소년은 차츰 판소리에 재미를 붙여 낮에도 열심히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그 뒤 ‘꽃기운이 올라’ 소리에 힘도 생기고 소릿길에 눈이 뜨이자, 명창이 되어 일세를 울리려는 욕망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리하여 16
살에 서울로 상경한 봉술 소년은 드디어 <조선성악연구회>에서 꿈에도 그리던 송만갑 명창을 만나 그에게 소리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송만갑 명창은 구한말과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이 나라 방방곡곡에 이름을 드날린 최고의 명창입니다. 박봉술 명창의 회고에 따르면 ‘송 명창 사진만 보아도 오갈이 들어서 소리 못하는 명창이 많을’ 정도로 뛰어난 명창이었습니다.

“우리 선생이 소리만 허시면 그 자그마한 몸 어디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쇳소리 같은 '철성'이 몸으로 파고든단 말이여. 그러면 등골이 오싹오싹혀지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 있들 못허게 헌단 말여.
그리고 이 대목이 좋으면 저 대목이 좋고, 저 대목이 좋으면 이 대목이 좋고 해서 마디마디 소리가 좋고, 또 어떻게나 '상청'이 잘 나는지 상청을 질러대면 앵벌 날아가는 소리가 에--엥 에--엥 허고 나와서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단 말여.
거그다 또 같은 노래를 헐 때마다 달리 혀. 말하자면 즉흥적으로 작곡도 허고 편곡도 허는 거지. 그런디 그것이 또 이렇게 불러도 좋고 저렇게 불러도 좋아. 수만 번을 불러서 소리를 뚜르르 꿰고 있으니 그런 재주가 나오는 거지. 우리 선생님이 그만큼 공력이 좋았어.”

박봉술은 “나는 평생에 우리 송선생님 한 분한테만 소리를 배웠다”고 말할 만큼 송만갑 명창의 소릿제를 많이 물려받은 명창입니다.

송만갑 명창(좌)과 박봉술 명창(우). 출처 : http://news.d.paran.com/snews/newsview2...r%3D2009

그렇듯 소년 명창으로서 귀여움을 받으며 공부를 하고, 밤에는 ‘놀음’ 다녔습니다. 놀음이란 요샛말로 밤무대를 뛴다는 말인데 그때의 이름난 요정인 명월관, 식도원, 국일관과 같은 곳에 불려가서 판소리를 하면 어른 명창의 절반 값인 5원이 출연료인 ‘소리채’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1년쯤 지났을 때 갑자기 목이 ‘괄리기’ 시작했습니다.

변성기가 되어 목이 잘 쉬고 고음이 나지 않고 소리가 탁해지는 것을 목이 괄린다고 합니다. 그럴 때는 소리를 잠시 쉬거나 성대를 보살펴가며 연습해야 하는데, 조급한 마음에 
고향으로 내려 와 지리산의 쌍계사에서 백일 공부를 혼자 시작한 것이 평생의 탈이 되고 말았습니다. 너무 무리한 나머지 안타깝게도 목이 ‘꺾이고’ 만 것입니다.

예전과 같은 맑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탁한 음색으로 변하고, 고음은 꽉 잠겨서 나오지 않으니 
그는 울적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왓습니다. 그 다음 해에 타고 난 목청과 애간장을 녹이는 목구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임방울 명창을 따라 일본 순회공연에 참가했지만, 목이 꺾인 그는 보잘 것 없는 단역을 맡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석 달쯤 순회공연을 한 뒤에 다시 고향에 돌아 오기도 하는 동안 해방이 되고 창극단들이 ‘비온 뒤 대나무 순 열리 듯’ 자꾸자꾸 생겨 이 단체 저 단체 따라 다니며 재미있는 일도 많이 겪었고 고생도 ‘직사하게’ 했습니다.

그럭저럭 결혼도 하고 전라남도 순천시로 이사해서 살게 되었는데,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여순반란사건’을 겪게 되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4·3사태가 확산되자, 이승만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국군 제14연대를 급파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지창수·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민간인을 학살할 수 없다고 반발하며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친일파 처단'과 '조국통일' 등의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켜 일대 혼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번은 길을 가다가 반란군의 검문에 걸렸는데, 손을 내밀어보라고 해서 내밀었습니다. 그랬더니 느닷없이 뺨을 때리면서 “이거 개놈의 새끼 아니냐?”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손이 하얗고 못이 안 박혀 있으니 일 안 하고 놀고먹는 반동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저, 저는 소리 허는 사람입니다“
“소리가 뭐냐?”
“창이요.”
“창? 창이 뭐냐?”
“노래요.”
“노래? 그럼 노래 한번 해봐라”
"(두 손을 하늘로 올린 채 벌벌 떨면서) 둥둥둥 내 사랑 어허 둥둥 내 사랑.....”
“오, 그게 소리구나. 너 그럼 이승만 찬양하고 김일성 나쁘다고 노래 안 했냐?”
“아뇨. 나는 춘향가, 흥보가 이런 노래만 부르요.”
“그럼 우리 김일성 수령 동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봐라.”
“나는 그런 거 부를 줄 모르요. 그저 옛날 선생님한테 배운 노래만 겨우 부를 줄 아요.”

그 말을 들은 반란군은 허허 웃더니 공중에다 대고 총을 한 발 쏜 다음 어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도 당원들이 수시로 찾아 와서 공산당에 가입해서 소리로 활약하라고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섭고 싫어서 못 마시는 막걸리를 잔뜩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게 취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날은 편하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도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취한 척 하며 드러누워 버리곤 했습니다. 그 '술' 덕분에 어지러운 시절을 죽지 않고 간신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 뒤 순천에 국악원이 생기자 소리선생으로 지내면서 점차 술이 늘어갔습니다. 남모를 괴로움이 그를 점점 술꾼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소리를 안 알어줘. 바디는 좋고 공력은 있다고들 하지만 목이 꺾였응께 알어주는 사람이 드물어. 기껏 힘들여서 소리허고 나면 오천 원, 만 원씩 던져주니 오장이 상허고 울화가 나서 에잇 잡것, 나도 먹을 것이나 실컷 먹고 시간이나 때우자 허고 같이 앉어서 술을 먹어 버려”

이런 저런 울화가 쌓여 나중에는 ‘술이 봉 걸리 박’이란 별명까지 얻을 만큼 '술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한때는 공부에 정진하려고 술을 끊어보기도 했습니다.

“한 삼 년 끊어 봤제. 그런디 술을 안 먹고 조심을 혀봐도 별것이 없어. 영양실조만 걸려”

그래서 차라리 ‘영양가 있는’ 안주를 먹으면서 술을 마시는 게 몸에도 좋고 정신에도 좋을 것 같아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틈틈이 소리꾼으로서 활동을 하였지만 쟁쟁한 명창들의 그늘에 가려 그의 소리는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러다가는 평생의 공부가 죽도 밥도 안되겠다 싶어 '이를 갈고' 성공해보자고 결심한 끝에 1970년에 혼자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열심히
제자를 가르치고 공연 활동도 활발하게 한 보람이 있어 드디어 52살 되던 해인 1973년에 판소리 「적벽가」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판소리에서 무엇보다 '공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명창이었습니다.


'공력'이란 소리를 짜나가는 솜씨를 일컫는 말입니다. 목청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소리의 흐름과 가사 내용이 조화를 이루고, 가지고 나가는 소릿길에 무궁무진한 변화가 있고, 장단의 이음새가 자유자재하여 천변만화, 조화무궁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공력이 높다고 합니다. 제아무리 목청이 좋고 고음과 저음을 마음대로 구사하여도, 변화가 없이 무미건조하게 소리를 하면 공력이 없다고하여 높이 쳐주질 않습니다.

“옛날 명창들 소리를 들으면 가지고 나가다가 느닷없이 신기허고 묘헌 소리가 나온단 말여. 헌디 요즘은 그런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

그것도 그럴 것이 요즘은 문화재 전수에 지나치게 많은 비중이 주어져서 스승에게 배운 그대로 하지 않고 가사 하나 장단 하나만 바꾸어도 큰일 나는 줄로 알고 있으니, 개개인의 개성과 특성이 살아나지 않고 비슷비슷한 ‘복사 소리’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요즘 학자나 이론가들이 동편제니 서편제니 나누는디 나는 그런 거 안 따지네. 동편제는 무겁고 맺음새가 분명허고 서편제는 애원성이 많고 끝을 길게 끌고 허는 특징들이 있다고들 허지만, 그런 것들이 서로 오고가며 배우고 가르치고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은 뚜렷하게 구별 지을 특성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어. 괜스리 파벌만 생기고.
옛날에는 누구한테 배웠든지 간에 그 사람이 소리 잘 허먼 알아줬고 선생님한티 배운 것도 자기가 자꾸 고쳐감서 자기에 맞는 소리로 짰던 것이지 요새처럼 그렇게 빡빡허게 허들 안했어”

그의 소리를 처음 들어 보는 사람들은 안으로 꽉 잠겨서 탁한 음색이 나오고, 고음으로 올라갈 때는 가늘게 뽑는 가성인 ‘암성’으로 들릴 듯 말듯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왜 그를 명창이라고 하는지 의심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자꾸 듣게 되면, 저음인 ‘하성’의 웅장함과 걸걸함, 그리고 소리를 질질 끌거나 잔 멋을 부리지 않고 곧 ‘소리에 꼬리를 달지 않고’ 씩씩하고 꿋꿋하고 거뜬거뜬하게 몰고 나가는 남성다운 소릿길, 그리고 아기자기하고 변화무쌍하게 구사하는 장단의 변화, 들으면 들을수록 감칠맛이 나고 깊이 있고 무게 있는 그의 소리에 점점 끌려 들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의 소리가 나라에서 제일 공력이 많은 소리라고 감탄을 하게 됩니다.



비록 '목이 꺾여' 한세상을 울린 명창은 못 되고 말았지만 어느 명창보다 소리 연륜이 깊고 공력 높은 스승에게서 갈고 닦은 덕에 누구에게도 공력이 뒤떨어지지 않던 그는, 후학에 대한 안타까움을 남긴 채 1989년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트랙백 0 AND COMMENT 6

판소리의 대표적 유파로 '동편제'와 '서편제'가 있습니다.

동편제는 섬진강의 동쪽 지방인 구례, 곡성, 남원 등에 전해 오던 소릿제로 송흥록- 송광록-송우룡- 송만갑 등으로 내려오는 '송씨 가문'의 판소리를 원조로 치죠. 이 소릿제가 최고의 세력을 뽐내며 인기상승 중이던 구한말, 섬진강의 서쪽 지방인 보성에 박유전 명창이 '혜성같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소릿제는 송씨 가문의 소리와 너무도 달랐지만, 인기가 하늘을 찌를만큼 높다보니 애호가와 제자들 사이에 서로 자기네 소리가 최고라는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라도 판소리가 '동편제', '서편제'로 갈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보성읍 대야리 강산마을 송정강 기슭에 있는 박유전 명창 예적비(오른쪽).
출처 :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l_no%3D2

박유전 명창은 1834년에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태어나, 전라남도 보성군 대야리 강산(岡山)마을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얼굴이 빡빡 얽고 눈이 하나밖에 없어 누가 봐도 못생긴 얼굴이었다는데, 그런 그가 판소리만 하면 그 못생긴 얼굴이 '꽃으로 보일만큼' 매력적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는 저음인 '하성(下聲)'이 장군 소리와 같이 우렁차고, 소리가 둥글둥글하여 거름진 땅과 같이 기름지고, 우조나 계면조와 같은 운율의 흐름이 뚜렷하고, 소리의 높낮음과 빠르고 느림과 맑고 탁함에 추호도 어긋남이 없이 정연한 소리를 했습니다.

그 무렵 수많은 판소리 광대의 최고 후원자였던 대원군은 특히 그의 소리를 좋아해서 "박유전의 소리가 강산(江山)에서 천하제일"이라고 추켜 세우곤 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그의 호를 박 명창의 고향마을 이름과 자신의 칭찬을 합쳐 '강산'이라고 지어줬답니다.

그래서 그의 소릿제를 '서편제'라고도 하고, '강산제(江山制, 岡山制)'라고도 하게 된 겁니다. 운현궁의 사랑채에 기거하며 대원군의 총애를 받던 그는 무과(武科)에 급제해서 선달 벼슬도 받고, 한쪽 눈을 가릴 수 있는 '오수경(둥그런 검은 안경)'과 '금토시(최고급 팔목가리개)'까지 하사 받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대원군의 지극한 총애를 받던 그는 민비에게 권력을 빼앗긴 대원군이 중국으로 망명하자 민비 일파의 보복을 피해 남으로 내려오다가, 전라남도 나주에서 정재근을 만나 그의 사랑채에 숨어 살게 되었습니다. 

정재근에게 판소리를 기르치면서 지내던 중, 대원군이 다시 득세를 하자 정재근의 일곱 살 난 조카 정응민도 함께 데리고 한양에 올라갔습니다. 어린 정응민은 운현궁 사랑채에서 판소리를 배우며,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고향에 한 번도 내려가지 않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대원군이 죽고 한일합방이 되자 박유전 명창은 “나라 잃은 가객이 살아서 뭐하느냐”라고 탄식하며 노래부르기를 그치고, 사골로 내려가서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음식을 전폐한 채 한 겨울에 굶어 죽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오기도 하는 '충성과 절개의 명창'입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정응민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리에 돌아 온 뒤, 광대로서의 활동을 중단한 채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나라 잃은 가객'에 대한 스승의 정신을 잊지 못한 그는 세상 출입을 끊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제자를 삼아 소리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정응민 명창 사진과 그를 기린 벽소 이영민의 시.
출처 :
http://www.pansoricenter.org/skin_104/5...ndex.php

정권진 명창은 바로 이 고집스런 '농사꾼 명창'인 정응민 명창의 외아들입니다. 

1927년 10월 15일에 태어난 어린 권진은 사랑채에서 들려오는 판소리에 남달리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서당에 다닐 무렵에는 아버지의 제자들이 부르는 웬만한 판소리는 따라서 흥얼거릴 수 있을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판소리 부르는 것을 엄하게 금지했습니다.

“명창이 되려면 수십 년을 공을 쌓아야 되는디, 그 공을 학문하는 데에 쓰면 몸도 편하고 훨씬 많은 일을 할텐디, 대우도 못 받고 고되기만 한 판소리를 허면 죽을란다”

이런 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판소리 근처만 빙빙 돌며 애를 태워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아버지의 친구들이 “언제까지나 일제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혼은 판소리밖에 없으니 독립되면 판소리가 빛을 볼 것이다. 아들도 애국자 만들려면 판소리를 가르쳐라” 하며 갖은 말로 권유하는 통에 간신히 허락이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열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에 부산 동래 권번에 소리선생으로 있던 아버지의 수제자 박기채에게 소리를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정응민 명창에게 소리를 배우던 제자로는 김연수, 정광수, 김준섭과 같은 쟁쟁한 소리꾼들이 있었는데 박기채는 그 중에서도 정응민이 가장 아끼던 제자였습니다.

부산에서 낮에는 양복점 점원 노릇을 하고, 밤에는 소리 공부하기를 4,5년쯤 하던 정권진은 열아홉살이 되던 해에 고향에서 장복순과 혼인을 했습니다. 혼
인한 지 한 달 만에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선언한 뒤, 강진에 있는 고성사라는 절에서 공부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내가 판소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 년 기한을 잡고 절에 독공을 하러 들어가니 만일 기다릴 수가 없다면 떠나도 좋소”

집과 절을 오가며 판소리 공부를 하는 동안 해방이 되고 6.25전쟁이 터졌지만, 아내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 이후로도 그의 아내는 군산이나 대구나 대전 국악원과 같은 곳에 창악 강사로 초청되어 떠돌아다니는 남편을 한결같이 기다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1962년에 국립 창극단이 설립되자 초창기 단원이 되어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창
극단에서 1년쯤 지낸 뒤, 창극단을 그만 두고 국악예술학교의 창악 강사로 근무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공연 활동도 계속한 그는 1964년에 「심청가」 인간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느 명창보다 가사 내용에 대한 이해가 밝고 판소리에 대한 이론이 정연한 명창이었습니다.

그것은 박유전의 강산제 판소리를 3대를 이어 수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유전 명창은 대원군과 교분을 맺으며 지내는 동안 많은 양반 선비들과 벼슬아치들을 만났을 것이고, 그들의 도움으로 가사 내용과 창악 이론에 안목을 높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강산제의 문파에 전해 내려오는 <광대론>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대명창이 되는 길은 '정심', '정음', '사채'에 달려 있다 하겠다.
'정심'이란 바르고 맑은 마음이니, 그 나라 음악을 듣고 그 나라 정치를 알아 볼 수 있듯이 가객의 소리를 듣고 가객의 인격을 알아 볼 수 있다. 심청가를 부르는 가객이 심청가를 청중에게 권하면서 자신이 불효를 하면 열기가 없는 죽은 소리요, 자신이 효를 행하면 생명감이 있고 기가 충만하고 진수가 담겨 참된 소리가 되는 법이니 소리 이전에 자신의 인격과 참다운 사람됨을 권하고자 한다. 
'정음'이란 소리를 엄격하게 성심것 하여 득음의 경지에 이르러야 된다는 말이고,
'사채'란 품위 단정한 동작 곧 너름새이니 사채가 무게 있고 민첩하고 발 하나를 떼어도 정중함이 있어야 하며, 사방으로 이유없이 활보한다든가, 쓸데없이 부채질을 자주 한다든가, 난잡한 태도를 보여 품격이 떨어지면 올바른 사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강산제 판소리의 사설은 고상하고 점잖은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육담이나 음담패설이나 욕설은 없애거나 극히 절제해서 사용하고, 인물 묘사도 우아하고 장중함을 그 기본으로 깔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적벽가」에 나오는 조조가 다른 명창들의 '적벽가'에는 간사하고 교활하게 그려져 있는데 반해, '강산제 적벽가'에는 위엄 있는 장수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와 함께 음악표현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슬픔을 강조한다든가, 무절제하게 웃음을 유발시킨다든가, 간사스러운 성음을 내는 것을 극히 싫어하여 대장부의 꿋꿋하고 웅장한 성음을 주장하고, 우조와 계면조와 같은 선율의 차이를 분명히 하며, 장단의 부침새가 정교하고 분명한 것을 좋아합니다.

이는 모두가 강산 박유전이 지녔던 소리의 장점이 모두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강산제 판소리의 '바른 마음'과 '바른 소리'와 '바른 몸가짐'에 대한 주장과, 그 소리의 대장부다운 기상과, 그 사설의 품위 있고 단정한 표현과, 그 장단의 정교하고 변화무쌍한 부침새는 다른 소리제가 따를 수 없는 품격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강산제 소리제의 후계자인 정권진 명창의 판소리에 대한 남다른 고집과 안목은 이 소리제를 올바로 전수하는 데에 단단한 받침목이 되었습니다.



“요새 소리 좀 한다는 후배나 제자들더러 공부를 더 하라고 허며 돈이 있어야 공부허네, 처 자식을 벌어 먹여야 공부허네, 뒷받침이 없네, 하며 갖은 핑계를 대는디, 그 모두가 구실에 지나지 않어. 오로지 일심으로 공부에만 전념허면 지금 인심으로도 후원자가 생겨나서 처자식 굶어죽게 안 만들어”

그는 무엇보다도 공부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명창입니다. 그래서 타고난 목청이나 재능만 가지고 한몫 벌어 보려고 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합니다. 자기 자신도 대성하지 못한 미숙한 소리꾼으로 여겼던 그는 소리꾼들이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강조 했습니다.

“잘 살고 배부르고 인기가 있으면 참다운 소리를 해치는 법이여. 학자가 배가 고파야 참다운 글을 쓰고, 정치가가 배가 고파야 참다운 정치를 하고, 병들어서 병원 생활을 해 봐야 환자의 괴로움을 알듯이 소리하는 사람도 고생을 하고 만고풍상을 겪은 뒤에야 겨우 뭔가 이루어지는 법이여.
판소리라는 게 전봇대와 같이 큰 뜻을 세우고 전력을 다해서 공부해 봤자 바늘 만큼밖에 이루어지지 못 허는 법인디, 하물며 놀고 마시고 각시질이나 하고 인기나 좇아 흘러다니다 보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는 법이지”

이는 그가 가난한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연마하여 깨달은 결론이기 때문에 몸으로 부딪쳐오는 진실함이 있습니다.

“옛적에 소리의 왕이라고 불렸던 명창 송흥록은 자기 소리를 알아주던 영의정 김병희가 죽으니 그를 따라 함흥에서 절사하시고, 강산 선생님도 자기 소리를 아끼던 대원군이 돌아가시자 그를 따라 순사하셨어.
이와 같이 참된 소리꾼은 부귀공명을 탐하지 않고 지조와 절개가 있었는데 요즈음은 돈만 주면 아무데나 가서 막 소리를 해대. 요즈음이 아니라 일제 때에도 권번 제도를 만들어가지고 기생방에서 소리를 하게 했어. 말하자면 민족예술을 화류계화시킨 거지.
예전에는 판소리에 삼강오륜이 있다 하여 명창들이 감찰이니 오위장이니 벼슬을 하며 정치의 도구로 쓰였는디 일제 때부터 놀고 먹고 ‘에야라 놀아라’ 식의 소리로 변한 거지. 그러니 소리꾼들의 생활도 무절제하고 방탕할 수밖에 없었지. 그러나 지금은 그러면 안돼. 지조와 절개를 가지고 민족혼을 일깨우는 사명을 소리꾼들이 짊어지고 나가야 돼.”

1986년에 세상을 뜬 그의 판소리에 대한 외곬수 고집을 정회천과 정회석 두 아들이 4대째 이어가고 있으니, '보성소리' 집안의 고집이 대단히 소중하고 값진 것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군요.


4대째 판소리를 이어가고 있는 정회석 명창. 출처 :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3D158423
트랙백 0 AND COMMENT 8

지리산 뱀사골이 있는 산내면 면사무소에 김용근이란 공무원이 계십니다. 

그의 부친은 평생 농사를 지은 농부였는데, 공무원이 된 아들에게 절대 7급 이상의 고위공무원이 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고위 관료가 되면 서민들을 괴롭히게 되니 하위 관료로서 서민들에게 봉사하며 사는 게 옳은 길이라고 하셨답니다.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들어 20여 년간 고향인 산내면에서 봉사하며 현재 7급 공무원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부친도 훌륭하지만 그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아 온 아드님도 훌륭합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도 못 말린 한 가지 병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의 '판소리병'이었습니다. 그는 지리산 부근에서 전승되어 오는 동편제 판소리에 '미쳐서' 지금까지 판소리 명창들의 유적을 탐방하고 자료 조사를 하는 데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기록도 거의 없고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전국을 떠도는 통에 가족관계도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명창들의 삶을 기록한다는 것은 정말 지난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토지대장이나 호적 등을 조사하고, 명창과 관련된 모든 곳을 직접 답사하고, 생존자나 관련자들의 증언을 채록하고, 그들의 삶의 흔적을 직접 체험해 보기도 하며 오랫동안 고독한 조사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3년 전 미당 서정주 시인의 조카이며 시인인 이주리님과 남원에서 만나 서로 뜻이 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 함께 유적지를 돌아다니고 자료 조사를 하며 언젠가 지리산 판소리 명창들의 이야기를 대하소설로 엮어 낼 꿈을 꾸고 있습니다. 

저는 전북 지역 인터넷 신문인 <투데이안>의 대표 엄범희님의 소개로 두 분을 만난 뒤로  그들이 조사했던 자료와 아직 발표되지 않은 귀한 글들을 볼 수 있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들의 판소리에 대한 무한한 열정과 대하소설에 대한 집념과 꿈은 저를 부끄럽게 할 정도였습니다.   

함께 소릿길 탐방을 할 기회를 바라던 우리는 어렵게 일정을 맞춘 끝에 드디어 1박 2일의 '지리산 소릿길' 탐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전주에서 소리축제의 회의를 마친 저는 점심 후에 남원으로 향했습니다. 약속 장소인 광한루 주차장에 당도하니 두 분과 함께 글로벌 농촌 인재협회 사무처장인 박찬용님이 봉고를 운전하며 우리 일행을 안내해주시더군요.

오른쪽부터 김용근님, 이주리님, 박찬용님.

우리는 남원에서 차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로 향했습니다.
비전마을은 옛날부터 전라도와 경상도가 통하는 중요한 통로여서 주막과 객주집이 많았고 풍광이 아름다워 찾는 이가 많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인근에는 거문고의 전설적 명인인 옥보고가 살았다는 옥계동, 해발 695미터의 바위산인 황산, 구룡폭포 등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비전마을 가까운 곳에 있는 남쪽 구릉에는 이성계가 왜군을 무찌른 전투를 기념하는 '황산대첩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비전마을에 있는 '송흥록 명창의 생가' 찾았습니다. 아래 동상의 주인공이기도 한 송흥록 명창은 '가왕(歌王)'이라 불리기도 하는 전설적인 명창입니다. (*그의 자화상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동상의 모습은 '상상 속의 그대'입니다.)
 

앉아서 북을 치는 이는 송흥록 명창의 동생인 송광록으로 형의 고수로 따라다니다가 나중에 명창이 되었습니다. 송흥록의 판소리는 아들 송우룡, 송우룡의 아들 송만갑으로 3대에 걸쳐서 집안으로 전수되었습니다. 속가 제자인 박만순, 양학천, 김정문, 유성준 등도 당대를 울린 대명창들입니다. 이처럼 송흥록의 집안은 동편제 판소리의 명가이며 종가입니다.


판소리는 송흥록 명창을 기점으로 일대 전기를 맞게 됩니다. 송흥록 이전의 판소리는 지역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선율과 장단으로 불렀는데 송흥록에 의해 통합되어 오늘날의 판소리 형태로 정착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송흥록을 '판소리의 중시조'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송흥록 명창의 생가와 나란히 저의 스승인 '박초월 명창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스승이 돌아가신 뒤 10여 년 전에 다녀 간 기억이 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스승의 탄생과 집안 내력에 대해 김용근님을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도 의미 있는 방문이 되었습니다. 박초월 명창에 대해서는 저의 글 <나의 스승 박초월 명창 생각하니 눈물난다>http://dreamnet21.tistory.com/10을 참고하시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비전마을을 떠난 우리는 운봉읍 화수리에 있는 '국악의 성지'를 찾았습니다. 


국악선인묘역, 납골묘, 사당, 전시체험관 등을 갖추고 2007년 10월에 개관한 국악의 성지에는 옥보고 명인이나 송흥록 명창 등 대표적인 국악인의 묘와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현대식 2층 한옥으로 세워진 전시체험관에는 국악과 관련된 많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 유독 저의 눈길을 끄는 낡은 공책이 있었습니다. 동편제 판소리를 오롯이 지켜 온 남원의 소리스승 강도근 명창이 제자들의 수업료 납부 상황을 적어 놓은 공책입니다. 전형적인 옛서체로 정성스럽게 적어 놓은 그의 꼼꼼한 성격이 보이는군요. 그 분은 평생토록 남원국악원에서 안숙선, 이난초, 전인삼 명창을 비롯한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냈습니다.


국악의 성지에서 참배를 마친 우리는 인월면 성산리에 있는 '흥보마을'로 갔습니다. 

판소리 <흥보가> 중의 첫가사로 '옛날 경상-전라 두 얼품에 놀보 흥보가 살았는데 놀보는 형이요, 흥보는 아우였다'로 시작되는 바로 그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는 뒷산의 '연비산(제비가 날아오른 산)'이라든가, '까막고개''화초장 다리' 같이 흥보가에 나오는 지명들이 전해지고 있어 1993년에 흥보마을로 지정됐습니다. 하지만 흥보가 실제로 그 마을에 살았는지, 그리고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니고 생존인물인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어서 산내면 백장마을에 있는 '변강쇠 공원'을 들렀습니다. 

판소리 <변강쇠가>에 나오는 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전해오는 이 마을에는 남근을 상징하는 '근원바위'나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아들을 낳았다는 '수태바위', '남근목', '강쇠바위' 등 변강쇠 관련 지명이 있어 2000년부터 변강쇠 공원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경상도 쪽 함양에도 변강쇠 마을이 있다는데 어느 마을이 '원조'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울 듯 싶습니다. 공원에 세워진 현대식 조각상이 재미있더군요.


배가 고파진 우리는 저녁 노을이 아름답게 번지는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은 <귀거래사> 식당에 들렀습니다. 중국의 전원시인 도연명의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전원이 무성하니 나 돌아가리라'하는 싯귀가 떠오르는 고즈녁한 집이더군요.
 

정말 정갈하고 맛있는 산채 정식이었습니다. '뱀사골'이라는 인상적인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산내면은 사과와 흑돼지와 곳감의 산지이며 수많은 약초와 산채들의 보고입니다.  


어둠이 내리자 우리 일행은 산내면 상황리에 있는 <노고지리> 산장에서 여장을 풀었습니다.


올해 지리산에서 처음 받아 낸 '고로쇠물'과 주인 아저씨가 직접 담갔다는 '양귀비술' 마시며 우리는 밤새도록 판소리와 예술과 전통문화와 농촌문화의 현실과 꿈에 대한 정담을 나누었습니다.

산공기의 상쾌함을 느끼며 새벽에 일어나 찍은 산장과 주변 지리산의 모습이 신비롭군요.  


방마다 '꽃의 향기는 천리를 가고 정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花香千里 人情萬里)'라는 글귀를 나무에 조각을 해서 걸어 놓은 주인 아저씨는 소도시의 시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이곳에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진도개와 아침 산책을 나온 그의 얼굴이 지리산을 닮아 넉넉하고 푸근합니다. 


밤에 차를 타고 달려 온 엄범희님까지 합세해서 일행이 늘었습니다. 소릿길 탐방을 할 명창들의 유적지는 많이 남아 있지만, 오전밖에 시간이 없으니 다음에 2차 탐방을 하기로 한 우리는 부근에 있는 '한지 장인'과 바위굴을 뚫어 법당을 만든 '서암정사'를 찾기로 했습니다. 

오른쪽부터 엄범희님, 김용근님, 이주리님.

우리는 차가운 고원의 공기를 마시며 산내면 하황리에 있는 '한지 장인 신평식'님의 한지 공장에 들렀습니다.

공장이라기보다 움막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듯한 이곳에서 평생 한지를 만들어 온 그는 옛부터 내려 온 방법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전통한지의 명인입니다. 


마을 뒷산 계곡에서 흐르는 이 맑은 물을 사용하여 한지를 만듭니다.


많은 한지 명인들이 양잿물이나 표백제나 기계식 공법을 도입하여 한지를 만드는 데 비해 그는 부친으로부터 전수 받은 옛방식을 조금도 고치지 않고 오롯이 전수해 오고 있습니다.    


아직 인간문화재로 지정도 되지 않았다니 한 장 한 장 정성을 다해 만들어가는 그의 한지가 언젠가 그 맥이 끊어지지 않을지 걱정됩니다.


한지 명인과 아쉬운 작별을 한 우리는 경남 함양군 마천리 벽송사 입구의 <서암정사(瑞岩精舍)>로 향했습니다.
 

40여년 전에 지리산 심산유곡에 있는 <벽송사(碧松寺)>에서 수행을 하던 원공스님은 500미터쯤 떨어진 산속을 산책하던 중, 갖가지 바위들이 신비스럽고 상서로운 기운으로 늘어서 있고 장엄하게 솟은 앞산 연화봉이 연꽃처럼 펼쳐진 풍광에 넋을 잃고 서서 그곳에 불사를 일으키겠다는 원을 세우게 됩니다. 


1975년에 터를 고르기 시작해 공사를 시작했지만 토지의 소유권 문제, 국립공원의 건축 허가 문제, 공사 자금 조달의 문제 등의 수많은 어려움 때문에 불사는 하염없이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백송사의 젊은 주지로 불같은 추진력과 깊은 불심을 지닌 법인스님이 부임해 오면서부터 불사는 빠르게 진척되기 시작했습니다.

서암정사 주지 법인 스님.

많은 불사 중에서 가장 힘들고 놀라운 불사는 '석굴법당'이었습니다.


거대한 바위를 뚫어서 법당을 짓고, 사면의 벽과 천장 전체를 그림과 글씨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원공 스님의 디자인을 토대로 하여 석공들이 조각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6명의 석공이 1989년부터 조각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 하나 둘 떠나고 나중에는 홍덕희 석공만이 10년 이상 절에 머물면서 2001년에 완성했다는 이 석굴은 국내에서 가장 거대하고 예술적으로도 뛰어난 석굴입니다.
  

석굴법당의 본존불인 아마타불의 미소가 불국사의 석굴암 부처님처럼 정겹습니다.

제 생각에 이 석굴법당은 100년쯤 세월이 흐른 뒤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고도 남을 훌륭한 현대의 문화유산입니다.


두 스님의 놀라운 집념과 원력으로 지어진 불가사의한 이 도량은 불보살의 상서로운 기운이 충만한 곳입니다.


옥보고 명인, 송흥록 명창, 박초월 명창, 강도근 명창, 신평식 장인, 원공스님, 법인스님, 홍덕희 석공.....지리산 골짝골짝에 이런 분들의 숨결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게 놀랍습니다.
 

또 이들을 사랑하고 지키고 있는 김용근님, 이주리님, 박찬용님, 엄범희님 등....
대한민국의 문화는 바로 이런 분들의 열정과 집념 어린 노력에 의해 지켜지고 발전되는 것 아닐까요?   

트랙백 0 AND COMMENT 25

판소리에 심취해 있던 대학 3학년 시절, 인사동의 고서점에서 우연히 정노식의「조선창극사」를 샀습니다.



그때는 우연히 보고 샀는데, 알고보니 판소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필독서인지라 지금까지 제 인생의 반려가 되어 준 소중한 책입니다. 

저자인 정노식은 누구일까요?

정노식(1891년~1965년) :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문학부를 졸업했으며,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3·1운동에 참여하여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 창립에 관여했다.

1946년 12월 남조선노동당 중앙본부 중앙위원으로 있다가, 1948년 월북해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노동당 중앙검사위원, 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 등을 지냈다.

저서로 〈조선창극사〉(1940)가 있는데, 이는 최초의 본격적인 판소리 저술로 꼽힌다. 〈조선창극사〉는 총 89명의 창자와 고수 1명, 그리고 신재효에 관한 약전(略傳) 등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 책에는 송만갑·이동백·전도성·김창룡·정정렬 등의 구술을 기록했고, 그밖에 판소리 관계 문헌, 조(調), 대가닥(制), 판소리의 기원 등에 관한 견해도 실려 있다.

-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그 당시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고,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한 독립운동가였던 저자는 어찌된 인연인지 몰라도 판소리와의 열렬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분노와 애정을 동반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머릿말에서 광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조선 사람이 광대의 소리는 좋아하면서
광대의 인격은 천대 멸시하는 현실에 분개하고.....
광대소리야말로 조선인의 심상이 들어 있는 소리요,
광대들이야말로 당당한 예술가이어늘 천대를 받아 왔으니
이제야말로 그 관념을 시정하여서
광대의 예술가적 가치와 사회적 위치를 모두 인식할 때다.


기생, 광대에 대한 편견이 시퍼렇던 일제초기에 일본유학을 갔다 온 지식인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와 비슷한 신분의 학자들이 광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예를 들어볼까요?

조선후기 실학의 대가이며, 수많은 후학들에게 존경받는 대학자인 다산 정약용은 정조에게 보낸 상소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광대가 봄과 여름이면 고기잡이를 좇아 어촌으로 모여들고,
가을과 겨울이면 추수를 바라고 농촌으로 쏠리는데,
특히 창촌에서는 사당, 창기, 주파, 화랑, 악공 등의 잡류들을 엄금해야 합니다.


정노식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일제시대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소개된 육당 최남선의 말씀입니다.


조선조의 재인, 광대들은
적극적으로 특별한 권장을 입지 못하고
무식, 무기력한 예인들이
사회 최하층적 지위에서 구차히 존속하다 보니까
거기 쇠잔이 있을 뿐이고 발달이 없으며
저락이 거듭될 뿐이지 향상을 볼 수 없음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조건 하에 있다 보니까
수천년을 하루같이 몸을 놀리는 기술과 우스개 놀이 쯤에 그치고
드디어 '다른 데만한'(필자 주 : 서양을 말합니다.) 
순희곡적 생장을 이루지 못하고 만 것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루바삐 그 방법을 개량하여
서구의 예술을 익히면
외국 사람들에게도 조소를 면하리라.


 


이러한 편견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던 그 시대에, 광대들에 대한 천대와 멸시에 분개한 저자는 무한한 애정을 담아 이 책을 쓴 것입니다.

그는 판소리 광대들을 찾아 여러 지방으로 여행도 하고, 생존한 광대나 나이 든 노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채집했습니다.

1940년에 출간된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판소리와 관련된 조선시대 선비들의 시와 기록, 판소리의 유래, 창법의 음악적 특징, '동편제'와 '서편제'의 유래 등이 설명됩니다.

후반부에서는 별처럼 빛나는 수많은 명창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아름다운 로맨스,
소리 공부를 반대하는 집안과의 목숨을 건 투쟁,
광대라고 천대하는 사회의 편견에 대한 반항,
소리 공부를 하는 동안의 눈물겨운 고생,
명창들의 출신과 판소리에 입문하게 된 사연,
스승으로부터 전수 받은 내용,
특기로 잘했다는 대목에 대한 소개 등......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 보따리들을 잔뜩 풀어놓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의 대부분이 명창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현장감이 풍부하고 매우 드라마틱합니다.

그 후에 씌어진 판소리에 대한 많은 연구 서적들은 거의 모두 이 책의 내용을 기초로 수정 보완된 것들이기 때문에, 판소리에 대한 자료가 필요할 때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서편제」의 시나리오를 쓸 무렵, 제 머리 속에는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명창들의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그 이야기들이 시나리오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특히 다 쓰러져가는 움막에서 소리꾼 유봉이 <옥중가>에 나오는 '귀곡성'을 가르치다가, 자기 딸 송화에게 얘기하는 다음 대사는 전적으로 이 책에서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옛날 송 흥록이란 명창은 이 귀신소리를 어찌나 잘 불렀는지 밤에 이 대목을 하니까 바람이 불어서 촛불이 꺼졌단다.....


삼십여년이 넘는 세월을 제 서가에서 함께 살아 온 이 책은, 지금도 제게 명창의 혼령들과 교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줍니다.


트랙백 0 AND COMMENT 24

판소리는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서민들뿐만 아니라 양반들까지 포함해서 폭넓은 대중들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무렵의 판소리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려주는 시 한편을 소개해 볼까요? 18세기에 살았던 시인인 신위가 판소리 공연을 보고서 쓴 시입니다.

이따금 환호하는 외마디 소리
넓은 뜰엔 구경꾼이 구름같이 몰렸네
이 밤에 부질없이 횃불 걱정 마오
반달이 구름 끝에 걸려 있으니

요즘 인기가수의 야간공연 장면 같지 않아요? 그 무렵에 이름을 날리던 명창 중에 권삼득, 송흥록, 염계달, 모흥갑, 고수관, 신만엽, 김제철, 황해천 여덟 명을 뽑아서 ‘8명창’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난다긴다 하는 8명창보다 더 대단한 우춘대 명창을 찬양하여 쓴 시가 있는데 소개해 볼까요? 신위보다 약간 후배인 송만재라는 시인이 쓴 시입니다.

장안에 이름 높은 가객 우춘대
오늘에 누가 능히 그 소리를 잇나
술자리에서 한 곡 빼면 비단이 천 필
권삼득과 모흥갑은 아직 어린애

서민들은 비단 한 필 구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술자리에서 부른 노래 한곡에 비단 천 필이란 출연료를 받았다니 대단한 슈퍼스타였나 봅니다. 이처럼 판소리의 전성기였던 그 시절의 명창들은 그야말로 탄탄한 인기가도를 누리며 고액의 출연료를 받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평양감사 부임도> 중 명창 모흥갑의 판소리 공연 장면.

수많은 명창들 중에서도 명창 중의 명창으로 꼽히는 사람이 ‘가왕(歌王)' 송흥록입니다.

‘가왕’은 요즘의 ‘가수왕’과 같은 말입니다. '판소리의 중시조', '동편제의 비조' 등으로도 추앙 받는 송흥록 명창에게는 아주 재미있는 사랑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송흥록은 1780년쯤에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비전마을에서 태어나, 스무 살 무렵에 이미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그의 노래를 들으려고 아우성이었답니다.

한번은 대구감영에서「춘향가」를 불렀는데, 모두들 그의 노래에 감동해서 감격어린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예쁘고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기로 대구에서 가장 유명한 맹렬이란 기생만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송흥록은 그 기생을 눈 여겨 보았다가 이튿날 그녀의 집에 찾아 갔습니다. 술상을 앞에 놓고 방에 앉아 있으니, 한복을 예쁘게 차려 입은 맹렬이가 들어왔습니다.

맹렬 : 무슨 일로 오셨나요?
송흥록 : 왜 어젯밤에 내 노래를 듣고 한마디 말이 없었소?
맹렬 : 할 말이 없어서요.
송흥록 : 남의 노래를 듣고 할 말이 없다니 그런 말이 어디 있소?
맹령 : 꼭 말을 해야 하나요?
송흥록 : 꼭 듣고 싶소.

송흥록이 안달을 하며 보채니까 맹렬이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맹렬 : 송선생님이 명창은 명창이지만 아직도 부족한 대목이 있어요.
송흥록 : 그게 뭐요?
맹렬 : 귀곡성이 많이 부족해요.

‘귀곡성(鬼哭聲)’은 춘향이가 옥에 갇혀 있는 어느 날 밤에, 비가 내리고 바람이 으스스 부니 온갖 귀신들이 나와서 춘향이에게 달려드는 대목에 나오는 귀신소리입니다.

송흥록 : 귀곡성 어떤 점이 부족하오?
맹령 : 그걸 제가 어찌 알아요? 어쨌든 선생님 소리는 귀신소리는 아니예요.

맹렬이는 매몰차게 말을 하고 송흥록을 떠나 보냈습니다. 송흥록은 그 길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노래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는 귀곡성을 제대로 하려고 죽을 힘을 다해 연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웬 소년이 찾아왔습니다.

소년 : 송명창님!
송흥록 : 이 밤중에 누구냐?
소년 : 어떤 높은 어르신들이 송명창님을 모셔 오랍니다.
송흥록 : 왜 나를 찾느냐?
소년 : 송명창님의 판소리를 듣고 싶으시답니다.
송흥록 : 그 분들이 계시는 곳이 어디냐?
소년 : 저를 따라 오십시요.

송흥록은 소년을 따라서 대나무 숲이 우거진 어느 기와집에 갔습니다. 집안에는 수염이 하얀 노인 세 분이 갓을 쓰고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앉아 있었습니다.

노인 : 송명창 왔는가?
송흥록 : 예.
노인 : 우리들이 심심해서 자네 노래를 듣고자 불렀네.
송흥록 : 어느 대목을 원하십니까?
노인 :「춘향가」중 ‘옥중가’를 해보게.

송흥록은 높은 어르신들 앞이라 열심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나니까 노인들이 말했습니다.

노인 : 자네 노래가 다 좋은 데 귀곡성이 틀렸네.
송흥록 : 어떤 점이 틀렸습니까?
노인 : 가르쳐 줄 테니 따라 해보게.

송흥록은 노인들이 가르치는대로 따라 불렀습니다. 밤새도록 힘들게 노래 연습을 하고 났더니, 노인들이 그만하면 됐으니 술이나 한잔 하고 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송흥록은 술을 몇 잔 얻어 마시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밝아 깨어보니 어느 무덤가에 누워 있지 않겠어요? 무덤가에서 밤새 연습하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었던 겁니다. 그는 꿈속에서 노인들에게 배웠던 노래를 기억하여 그 유명한 ‘귀곡성’을 만들었습니다.

그 뒤에 다시 대구에 가서 판소리를 했습니다. 송흥록 명창은 노래를 하면서 맹렬이의 얼굴만 바라 봤습니다. 드디어 ‘귀곡성’을 하는 대목이 되었지요.

밤은 적적 깊었는데
사람 자취 고요하고
밤새 소리는 부웃 부웃
물소리는 주루루루루루루루루
도깨비는 휫휫
바람은 우루루루루루루루루루루루
번개 천둥이 치고
궂은 비는 퍼붓는데
귀신들은 둘씩 셋씩 짝을 지어
이히이히이히이히이히

송흥록 명창은 온 힘을 다바쳐 ‘귀곡성’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어디선가 으시시한 바람이 불어와서 촛불이 한꺼번에 꺼지고, 하늘 한쪽에서 귀신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신이 들린 소리라고 소리치며 열광적으로 박수를 쳐댔습니다. 맹렬이도 넋을 잃은 사람처럼 송흥록의 입만 쳐다보고 무어라 하여야 좋을지 모르는 모양이었습니다.
 

비전마을 송흥록 생가 앞에 서있는 송흥록의 동상.

그날 밤, 맹렬이가 송흥록의 방에 찾아와 문을 두드렸습니다.

맹렬 : 송명창님, 송명창님!
송흥록 : 누구요?

송흥록은 자다 말고 일어나 방문을 열었습니다. 맹렬이가 봇짐을 들고 방 밖에 서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송흥록 : 아니, 맹렬이 아니요?
맹렬 : 선생님, 이제 진짜 명창이 되셨어요.
송흥록 : 모두가 그대 덕분이요.
맹렬 : 그동안 저를 생각하셨나요?
송흥록 : 소리 공부하는 동안 그대 생각만 했소.
맹렬 : 저도 그 동안 선생님 생각 뿐이었어요.
송흥록 : 고맙소.
맹렬 : 우리 당장 떠나요.
송흥록 : 뭐요?
맹렬 : 시간이 없어요. 어서 짐을 싸세요.

사랑에 눈이 먼 두 사람은 그날 밤으로 대구를 떠나 송흥록의 고향인 운봉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예전에는 관청에 춤도 추고 악기도 연주하고 노래도 부르는 기생이 딸려 있었는데 그들을 ‘관기’라고 불렀습니다. 관기는 마음대로 결혼할 수도 없고 허락 없이 그 곳을 떠나서도 안되는데, 관기였던 맹렬이는 죽음을 무릅쓰고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도망 친 겁니다.

보기 드물게 정열이 넘치고 용기 있는 여성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맹렬이란 이름만큼이나 성격이 불 같아 화를 잘 내고 질투심도 많아서 남편이 공연을 갔다가 돌아오는 날짜가 하루만 지나도 난리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진주에서 송흥록을 초청해서 스므 날쯤 갔다 올 예정으로 떠났는데, 여러 사고가 생겨서 이삼 일 늦게 되었답니다. 송흥록은 그 사연을 자세히 적어 사람을 시켜 편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화가 난 맹렬이는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고 봇짐을 싸가지고 집을 나갔습니다.

심부름꾼 : 송명창님!

심부름꾼이 허겁지겁 돌아와서 송명창을 불렀습니다.

송흥록 : 그래, 편지는 전했느냐?
심부름꾼 : 아이구, 말도 마십쇼.
송흥록 : 무슨 소리냐?
심부름꾼 : 제가 가니까 마침 짐을 들고 어디 가시려다가 저와 만났어요.
송흥록 : 그래서?
심부름꾼 : 송명창님 심부름으로 왔다고 하면서 늦으시는 사연을 이 편지에 적어 보냈습니다. 하니까----
송흥록 : 하니까---
심부름꾼 : '그 놈의 거짓말 편지 읽으면 뭐해?’ 하면서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으시고---
송흥록 : 뜯어보지도 않았다구?
맹렬 : ‘다시는 나를 찾지 말라고 송명창에게 전하라’고 하시고는 휭 하니 집을 나가시더라고요.
송흥록 : 아이구, 이거 큰일 났구나!

송흥록은 깜짝 놀라 모든 일을 다 제치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가보니 정말 맹렬이는 간 곳이 없고 빈집뿐이었습니다. 송흥록은 몇날며칠 맹렬이를 찾아 헤맨 끝에 진주고을을 다스리는 병사인 이경하를 모시는 수청기생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진주로 갔습니다. 송흥록이 왔다는 말을 듣고 진주병사가 송흥록을 불러 들였습니다.

진주병사 : 네가 명창이라고?
송흥록 :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줍니다.
진주병사 : 그럼 나하고 내기를 해 보겠느냐?
송흥록 : 어떤 내기를---?
진주병사 : 내 앞에서 판소리를 하는데, 나를 한 번 웃게 하고 또 한 번 울게 하면 상을 줄 것이나, 만일 그렇지 못하면 너의 목숨을 바쳐라.

그제서야 송흥록은 맹렬이 병사에게 가르쳐 준 내기인 줄 알아챘습니다.

송흥록 : 그렇게 하겠습니다.
진주병사 : 그대신 소리는 수궁가를 하여라.
송흥록 : ‘수궁가를? 아이고, 큰일 났구나.’

「수궁가」는 판소리 중에서도 울리고 웃기는 대목이 별로 없는 빡빡한 소리이니 송흥록은 속으로 걱정이 태산같았습니다.

드디어 소리판이 열렸습니다. 송흥록이 아무리 웃기려고 온갖 어리광을 다하여도 병사의 얼굴은 화가 난 듯 점점 굳어져만 갔습니다. 송흥록은 느닷없이 병사 앞으로 달려들어 “아저씨, 왜 안 웃으시오? 나를 죽이고 싶어 그러시오?”했더니 병사가 '픽!' 하고 웃었습니다.

송흥록은 그것을 보고 “우리 아저씨가 웃기는 하였다마는 또 어떻게 우는 꼴을 보나”하더니 토끼가 용궁에서 죽게 된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통곡하는 대목을 불렀습니다. 어찌나 슬프게 부르던지 모든 사람들이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병사도 슬픔을 참지 못해 돌아앉아서 슬쩍 수건을 눈에 대었습니다.

소리판을 마친 뒤 병사가 물었습니다.

진주병사 : 그래, 무슨 상을 원하느냐?
송흥록 : 맹렬이를 원하옵니다.
진주병사 : 맹렬이를?

병사가 맹렬이를 바라보니까 맹렬이가 송흥록과의 관계를 숨김없이 말했습니다. 맘씨 좋은 병사는 껄껄 웃으면서 둘이서 다시 살게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기구한 사연으로 재결합을 하였건만, 또다시 사랑싸움이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인기스타인 송흥록이 여기저기 공연을 다니느라 수시로 집을 비우는 데다가 여성들의 인기도 한 몸에 받았을테니 맹렬이가 화낼만도 하지 않았나 추측해보지만,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사랑싸움의 진상(?)은 알 길이 없습니다.

맹렬이도 한 성질하는 여성이었지만, 송흥록도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었나봅니다. 그러다보니 싸우는 일이 잦아지고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큰 싸움을 한 끝에 맹렬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소리치며 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송흥록은 바로 쫒아가서 화해를 하고 싶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말은 못하고 속에서는 더욱 더 화가 나고 슬픔이 밀려들었습니다. 맹렬이와 영영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온갖 감정이 불길처럼 끓어올라 노래가 터져 나왔습니다.

맹렬아 맹렬아
맹렬아 맹렬아
네 이년 잘 가거라
날 버리고 네가 가면
내가 너를 잊을소냐

어쩌고 하면서 슬프고, 외롭고, 사랑스럽고 하는 온갖 감정을 노래로 불렀습니다. 맹렬이는 문밖에서 듣고 있다가, 그만 봇짐을 내던지고 다시 돌아와 부등켜안고 울면서 화해했답니다.

정말 멋진 사랑 이야기지요? 그 두 분이 백년해로 했는지, 언제 어떻게 이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일제시대에 정노식이 쓴 『조선 창극사』라는 책에는 판소리 명창들에 얽힌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많이 소개되어 있답니다.






트랙백 1 AND COMMENT 26

영화 <서편제>가 세상에 나온 후, 제가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서편제와 동편제가 어떻게 다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 많은 분들이 잘못 알고 계신 상식이 '서편제는 전라도 판소리이고, 동편제는 경상도 판소리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잘못된 상식입니다. 

'동편제'와 '서편제' 모두 전라도에서 불리던 판소리의 유파입니다. 
판소리는 예부터 선생님에 따라서 가사의 내용이나 곡의 흐름이 다르고, 같은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제자라 할지라도 조금씩 고쳐 나가기 때문에 명창마다 그 내용이 다릅니다. 이것을 ‘유파’라고 하기도 하고, 무슨무슨 ‘제’라고도 합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두 유파가 전라도 땅을 가로 질러 흐르는 섬진강의 동쪽 지방에서 주로 전해왔던 ‘동편제’와, 섬진강의 서쪽 지방에서 주로 전해 왔던 ‘서편제’인 것입니다.

섬진강의 동쪽 지방에는 '동편제'가, 서쪽 지방에는 '서편제'가 전해져 왔다. 

'동편제'는 씩씩하며 음의 꾸밈이 적은데, '가왕(歌王)'이라고 불리운 송흥록을 시작으로 해서 그의 동생인 송광록, 송광록의 아들인 송우룡으로 이어지는 송씨 집안의 판소리 법통을 말합니다. 그들은 섬진강의 동쪽 지방인 구례, 곡성, 남원  쪽에서 주로 활동을 했습니다.


운봉면 화수리 비전마을에 있는 송흥록 명창 생가 앞 동상.

송흥록 명창 (1801년~1863년)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 출생. 8명창의 한 사람으로 가왕()의 칭호를 받았다. 판소리의 중시조()로서 모든 가조(調)를 집대성하는 한편, 매부인 김성옥()이 시작한 진양조를 자신의 노래에 도입, 완성하였다. 그의 창법은 발성초()가 극히 신중하였고, 웅건·청담한 창법을 가진 동편제(便)를 이룩하였다. 특히 《춘향가》 중의 〈옥중가()〉와 《변강쇠타령》 《적벽가()》 등을 잘 불렀다. -두산 백과사전

‘서편제’는 섬세하고 음의 꾸밈이 많은 판소리인데, 박유전 명창이 송씨 집안의 판소리와 대조적인 창법으로 만든 소리제입니다.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박유전은 목청이 뛰어나게 고왔던 명창인데, 그 무렵에 천하를 호령하던 대원군의 아낌을 받아서 벼슬까지 하고 그의 사랑채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명성황후와의 권력 다툼에서 권력을 뺏긴 대원군이 중국으로 도망가자, 명성황후의 복수를 피해 숨어 살았다고 합니다. 갖은 고생 끝에 대원군이 다시 권세를 잡자, 박유전 명창도 한양으로 올라와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대원군이 죽고 한일합방이 되자, 전라도 어느 땅에 숨어 살다가 한겨울에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전남 보성군 보성읍 보성공원에 있는 박유전 명창 추모비.

박유전 명창 (1835년~1906년)
전북 순창() 출생. 헌종 ·철종 ·고종 3조()에 걸쳐 살았고, 특히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무과()에 급제까지 하였다. 음색이 청아하였으며, 서편제(西便)에서 갈라진 강산제(/)를 창시하고 뒤에 제자 이날치()에게 그 창법을 전수하였다. 《춘향가》 중 <이별가>에 뛰어났으며, 독특한 창법을 구사하였다. -두산백과사전

그 분이 섬진강의 서쪽 지방인 보성, 강진, 해남 쪽에서 주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구례쪽 판소리를 ‘동편제’라 하고 보성쪽 판소리를 ‘서편제’라고 부르기 시작한 겁니다.

일제시대가 시작되기 전인 조선 말기에 ‘동편제’와 ‘서편제’는 서로 심하게 싸웠습니다. 스승들은 상대의 판소리를 깎아내리고 자기 판소리가 최고라고 우겼으며, 제자들도 편을 갈라서 서로 자기 스승이 최고라고 다투었습니다.

만약 '동편제' 스승에게 판소리를 배운 제자가 '서편제'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울려면 파문을 각오해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판에 두 파의 싸움을 멈추게 한 풍운의 사나이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송만갑이란 명창입니다.

송만갑 명창은 송흥록 명창의 손자이고, 송우룡 명창의 아들이니 완전히 ‘동편제’의 정통파 집안에서 자라난 사람입니다.

그는 일곱 살 무렵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소리를 배웠습니다. 그는 판소리의 천재 소년이라서 이미 열 살 무렵부터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서편제’ 소리에도 관심이 많아서 아버지 몰래 박유전 명창의 창법을 자기 소리에다 섞었습니다. 집안의 전통적 음악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 세계를 이루려고 노력한 거지요.

그러나 집안 어른들은 집안을 망치는 자식이라고 엄청나게 화를 냈습니다.

“만갑이 놈을 잡아들여라!”

아버지를 비롯해서 집안의 어른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모두들 판소리를 하거나 북을 치는 광대들이었지요. 송만갑은 화가 잔뜩 난 집안 어른들 앞에 꿇어 앉았습니다.

“네 이놈, 만갑아!”
“예!”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제가 무슨 죄를 졌습니까?”
“집안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네 멋대로 소리를 해?”
“저는 제멋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네 놈이 서편 소리를 하는 걸 들은 사람이 있는데도?”
“서편 소리에도 좋은 대목이 있어서 조금 섞어 부른 겁니다.”
“그게 집안의 전통을 무너뜨린 게 아니고 무엇이냐?”
“저는 동편이니 서편이니 가르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무엇이?”
“시대가 변했습니다. 소리꾼은 옷감 장수와 같아서 비단을 달라는 사람에게는 비단을 주고, 무명을 달라는 사람에게는 무명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저 놈의 목을 작두로 베어라!”

아버지는 길길이 화를 내며 만갑이를 죽이겠다고 서슬이 퍼랬습니다. 그러자 집안 어른들이 판소리 재주가 아까우니 죽이지는 말자고 아버지를 말렸습니다. 결국 집안 어른들은 송만갑을 파문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고, 그 후 송만갑은 다시는 집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고집 세고 자신감에 넘치던 송만갑은 그 뒤로 집을 떠나 조선팔도를 떠돌면서 판소리를 했습니다. 그 통에 더욱 유명해지고, 그의 판소리는 널리 퍼졌습니다.

그는 드디어 일제시대에 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창이 되었습니다. 송만갑 명창은 마음이 관대하고 제자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점점 명창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가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동편제’니 ‘서편제’니 하며 편을 가르지 말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때부터 '동편제' 명창과 '서편제' 명창이 서로 싸우지 않고 교류를 하게 됩니다.
 


송만갑 명창 (1865년~1939년)
전남 구례 출생. 명창 우룡()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판소리를 배워 10세 때 벌써 그 자질을 인정받았다. 창법은 종조() 흥록(祿)의 전통적 법제()에서는 많이 벗어났으나 통속()과 평이()를 신조로 한 동편(便)의 명창으로 알려졌다. 어전()에서 판소리를 불러 감찰()을 제수받았다. 1923년 조선성악연구회를 설립,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김정문() ·김광순() ·박녹주() ·박초월() 등의 제자들을 배출시켰다. 또 《춘향가》 《심청가》를 창극화했으며, 특히 《춘향가》 중에서도 <농부가()>를 잘 불렀다.  -두산백과사전

그는 국악인들의 전국적 모임인 <조선성악연구회>라는 단체의 수장으로서, 파벌과 유파를 초월한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그가  1939년에 세상을 뜰 때까지 우리 국악계는 그를 중심으로 단결하고 화목하게 지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분열과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대척을 하고 있는 유파들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상대와 싸웁니다. 상대의 인격을 모독하고, 조롱하고, 파괴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합니다. 극과 극의 원리주의에 입각한 검투사가 칭송 받습니다. 대화와 타협은 기회주의의 처신으로 배척됩니다. 증오와 분노와 저주의 에너지가 한반도의 하늘에 검은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시절이 이러하니 송만갑 명창의 통합과 화합과 관용의 리더쉽이 더욱 그립습니다. 영화 <서편제>에서 소리꾼 유봉이 죽기 전에 송화에게 남긴 유언과 같은 대사를 되새겨 봅니다.

"동편제는 무겁고 맺음새가 분명하다면, 서편제는 애절하고 정한이 많다고들 하지. 허지만 한을 넘어서게 되면, 동편제도 없고 서편제도 없고 득음(得音)의 경지만 있을 뿐이다."


       동편과 서편을 아우르며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처럼 통합의 소리판을 꿈꾸며....
트랙백 0 AND COMMENT 19

블로깅을 해보니 무엇보다 댓글이나 방명록이나 프로필 위젯 등을 통한 블로거들과의 소통이 재미있더군요.

대부분 <김명곤의 세상이야기>라는 타이틀의 제 이름을 보고서 "설마!" 하고 들어왔다가 "아, 그 사람이!"하면서 글을 남기고 가시곤 합니다. 

간혹 저를 민족극을 하던 연극 배우나 <바보선언>의 영화 배우, <뿌리깊은 나무> 잡지사의 기자, 또는 국립극장장이나 장관으로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대부분은 <서편제>의 소리꾼 배우로 더 많이 기억하고 글을 남겨 주십니다.

이렇듯 제 인생에서 <서편제>와의 인연은 너무도 강력해서 마치 족쇄처럼 저의 발을 묶어 놓습니다.  




 <서편제(西便制)>가 개봉된 1993년은 한국 영화사상 초유의 ‘1백만 관객 돌파’로 일대 사건이 벌어진 해였습니다.

지금은 전국 동시 개봉으로 상영 시스템이 바뀌고 천만 관객이 흔해져서 빛바랜 숫자가 되고 말았지만, 한 개의 개봉관에서 2·30만 명만 들어도 흥행 성공이라고 했던 그 무렵에 <단성사> 한 극장에서의 100만이란 숫자는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게다가 아무도 흥행하리라고 예측하지 못한 판소리를 소재로 한 영화였으니 그 충격은 더욱 컸습니다.

개봉하기 전 해인 92년 7월 말, 연극 관계 일로 분주한 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나 임권택 감독인데 의논할  일이 있으니 좀 봅시다.'

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동숭동의 한 카페에 나갔습니다.

김 선생님이 각색과 주연을 하면 나도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도 그만둘 것이오. 이청준 선생의 원작 소설인 <서편제>를 판소리 영화로 만들거요.”

"제가 지금까지 끊임없이 꿈꾸었던 일이니 만사를 제쳐놓고 하겠습니다”


판소리를 공부하면서 언젠가 판소리를 영상으로 담아 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살던 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감독님과 전남 해남의 대흥사 아랫마을에 있는 유선여관에 머무르며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해남에서 한 달 반 가량 지난 뒤, 서울에 올라 온 저는 본격적인 각색 작업에 들어 가 얼마 뒤에 시나리오의 초고를 만들었습니다.


원작자인 이청춘 선생님은 제가 각색하는 동안 단 한 마디도 간섭을 하지 않으시고, 원작과 각색은 다른 것이니 마음대로 하라고 오히려 저를 격려해주셨습니다. 

는 각색과 출연뿐만이 아니라 배우 선정의 문제, 판소리의 녹음과 선곡, 가사 수정 등 음악에 관련된 모든 일에 자문을 겸했고, 헌팅에서부터 촬영의 전 과정, 편집, 녹음, 믹싱까지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서편제>는 어느 작품보다도 저의 개인적 체험과 정서가 짙게 베인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유봉이라는 인물 속에는 제가 연극을 하고 판소리를 공부하면서 느꼈던 고통과 좌절감 그리고 처절한 집념 같은 것이 군데군데 배어 있어 때로는 저를 가슴 아프게 하기도 합니다.
 



애정과 정열, 이것이 제가 <서편제>에 참여하는 동안에 느꼈던 감정이었다면 이 작품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한창
시나리오를 쓰고 있을 때 그때 어느 영화사 제작부장과 나눈 대화 한 토막.

"선배님, 서편제라는 거 한다면서요?”
“응”
“그 영화 죽었다 깨나도 흥행이 안 됩니다!”
“왜?”
“첫째, 김명곤, 오정해를 누가 압니까?”
“그 말은 맞다. 나는 흥행 안 되는 배우고,
오정해는 판소리만 했던 신인배우이니까 흥행이 안되겠다.”
“둘째, 전통 가지고 영화해서 된 게 있습니까?
「씨받이」, 「물레야 물레야」, 「피막」.
외국영화제에 가서 상은 받을지 몰라도 흥행은 안됩니다. 
내 손에 장 지집니다.
흥행될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뽕」, 「어우동」, 여자들이 촛불 아래서 은은하게 
속곳 ,속속곳을 막 벗어줘야지 전통 가지고 흥행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바깥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이 영화의 작업에 참여한 모든 스탭과 출연진들은 “판소리가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며 판소리를 흥얼거리고 신이 나서 일들을 했습니다.



영화가 개봉되자 뜻밖에도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그 여파로 판소리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판소리의 유파에 ‘서편제’도 있고, ‘동편제’도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초등학생부터 할아버지까지 찾아오는 관객의 다양함, 끊임없이 이어지는 각계각층의 찬사, 언론과 방송의 엄청난 보도, 국내뿐 아니라 해외 동포들에게까지 파급되는 국악에 대한 새로운 관심!.

정말 ‘서편제 신드롬’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열풍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저 역시 그 열풍에 휩쓸려 몇 년간을 정신없이 지냈습니다.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 영화평론가협회 남우주연상, 자랑스러운 서울 시민상 등 생각지도 못했던 상복도 터졌습니다.



그 뒤 국립극장장과 문화부장관을 하는 동안에도 언제나 저의 이름 뒤에는 <서편제>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습니다.

지금도 많은 분들은 저를 장관보다 <서편제>의 아버지 유봉으로 더 많이 기억하시고, 친근감을 표현해 주십니다.

영화 한 편이 평생 그 사람의 인생을 따라 다니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일 겁니다.

저는 그 동안 여러 편의 영화와 연극을 하며 많은 활동을 해왔지만, 대부분이 <서편제>에 가려지고, 여지껏 <서편제>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한탄할 일입니다. 

저는 언제쯤이나 <서편제>의 족쇄에서 벗어날까요? 



하지만 그 족쇄는 저를 행복하게 해주었고, 앞으로도 제 인생을 더욱 행복하게 조여 줄 족쇄 아닐까요?

그런 족쇄를 평생 만나지 못하는 인생도 수두룩한데, 혹시 제가 복에 겨워 투정부리는 것 아닐까요?

맞아요! 제가 복에 겨워 잠깐 투정을 부린 겁니다. 

<서편제>는 제 기나긴 판소리 사랑의 결실을 맺게해 준 소중한 작품입니다. 제가 꾸던 많은 꿈들을 하나씩 이루어 갈 토대가 되어 준 귀중한 작품입니다. 앞으로 <서편제>를 뛰어 넘는 새로운 작품을 하라는 '꿈 너머 꿈'을 제시해 준 보물같은 작품입니다. 

<서편제>의 소리를 부를 수 있게 가르쳐주신 박초월 선생님, 한국문학사에 빛나는 원작 소설을 쓰신 이청준 선생님 제 투정을 들으시면 얼마나 서운하시겠어요?

잠깐 투정을 한 죄로 아깝게 먼저 이 세상을 떠나신 두 분의 영전에  "이 산 저 산"  단가를 바칩니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구나
      나도 어제는 청춘이더니
      오늘 백발 한심하다.
      --------

 

트랙백 0 AND COMMENT 41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306)
예술이야기 (55)
세상이야기 (52)
나의 이야기 (57)
책이야기 (50)
신화이야기 (6)
문화이야기 (46)
명인명창이야기 (40)

CALENDAR

«   2018/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