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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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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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제'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0.07.02
    저 깊숙한 혼의 소리, 상여소리꾼 최 명인 (7)
  2. 2010.06.26
    이 시대 문화예술인들의 화두, 김제동 (35)
  3. 2009.08.26
    '쑥대머리' 임방울, 노전대통령 노제의 '추억' (28)
  4. 2009.07.30
    공권력에 포위된 40분...난 피가 말랐다. (31)
  5. 2009.06.02
    "노제" 하늘에 뜬 오색채운에 관한 명상 (41)
  6. 2009.05.31
    노무현 전대통령 "노제"총감독의 뒷이야기 (428)
  7. 2009.05.28
    의문의 죽음, 그러나 여전히 화두는 "사람!" (44)

제가 상여소리꾼 최 명인을 찾아 고향인 전주를 찾았던 80년대, 그가 일하는 <남밭 상여도가>는 풍남문 둑길 안쪽에 허름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호남제일문’ 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풍남문 바로 옆에는 남문 시장이 자리잡고 있고, 그 시장 한켠에 <남밭상여도가>라는 낡은 간판이 붙어 있는 허름한 집이 있었습니다. 
   

 출처 : http://blog.joins.com/media/index.asp%3...Type%3D1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드나들 여유 밖에 없는 작은 문을 지나 네댓개의 돌계단을 걸어 내려가니, 하루종일 햇볕이 들지 않을 것 같은 음침한 집의 복도가 나왔습니다. 눅눅한 습기와 어둑한 그늘이 만들어내는 적막한 분위기가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시장의 소란한 분위기와 너무도 대조적이어서 처음 찾아간 방문객을 무척 당황하게 만드는 그러한 집이었습니다.

최 노인은 평생 동안 그 집에서  죽은 사람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살아 온 할아버지입니다. 사람을 꺼리는 눈매나 표정이 없는 얼굴에 깊게 패어 있는 주름살들에서 예사롭지 않은 그의 삶을 읽을 수 있어서 살아 온 얘기부터 듣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첫마디부터 “이름도 밝힐 수 없고 사진도 찍을 수 없응게 그것부터 약속혀야 얘기를 허겄소”라고 야무지게 말하는 그를 보니 삶의 얘기가 쉽사리 나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선 상여도가에 관한 얘기부터 듣기로 마음먹고 '선바 상여도가'니 '남밭 상여도가'와 같은 이상한 간판 글씨가 무슨 말인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건 간판 쓰는 이가 잘못 써서 그런거요. ‘선바’는 ‘서문 밖’, ‘남밭’은 ‘남문 밖’, 이렇게 써야 맞는디 말 나오는 대로 쓰다 보닝게 그렇게 정해져 버렸지요. ‘서문 밖 상여도가’는 젊은 사람들이나, 병원에서 죽은 시체나, 사고로 죽은 시체들을 파묻어 주고 품삯을 받는 디고 본 상여 일은 여그서 맡고 있지요.”

자기의 신상과 관계없는 걸 물어 보아서 그런지 최 노인의 말투에서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졌습니다. 그는 ‘남밭 상여도가’의 내력을 이것저것 늘어놓았습니다.

“여그가 임경업 장군 자손이 대대로 주인 노릇을 혀 나온 디요. 임경업 장군의 셋째 손이 있었는디 임 장군이 역적으로 몰려서 돌아가시게 되닝가니 먹고 살 것이 없어서 여그로 내려오게 됐답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삼십대를 내려오다가 요 전대에 주인이 바뀌었지요. 그 전에는 터가 워낙 쎄서 임 씨 아니고서는 혀 먹들 못혔지요.”

상두도가라고 부르기도 하는 '상여도가'는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커다란 도회지에는 한 두 개 쯤은 있었던, 요샛말로 부르자면 ‘관인 장의사 조합’이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크고 작은 장례일을 돌봐 주느라고 분주했었을 상여도가는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 생겨난 '영구차'에 밀려서 그 일거리가 점점 줄어들었고, 새로 생겨난 '장의사'들이 상여도가의 역할을 하는 통에 쓸모가 없어져서 하나씩 둘씩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상여도가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들은 나이들어 죽거나, 천대받던 신분을 숨기고 다른 직업을 찾아 떠나 버렸습니다.

최 노인은 임경업 장군의 사당에 얽힌 전설, 임 씨 집안에서 묘를 훌륭하게 써서 그 아들들이 대학교 교수도 하고 고등학교 선생도 한다는 것과 같은 상여도가의 ‘역사’들을 점점 신이 나서 얘기했습니다.

저는 그의 얘기에 신이 오른 틈을 타서, “임 씨 집안 역사도 재미있는데 할아버지의 ‘역사’를 들으면 더 재미있겠다”고 운을 떼었습니다. 그랬더니 최 노인의 얼굴이 갑자기 침울하게 변하더니 목소리에서 힘이 싹 가셨습니다.

“내 살아 나온 역사? 그런 건 들어서 뭐 헐라고요? 모다 쓸데없는 짓이요.”

꼬박 꼬박 존대말을 쓰며 신상 얘기를 물어 볼 때마다 엉뚱한 얘기로 말꼬리를 돌리는 그에게서 툭 터 놓은 삶의 ‘역사’를 듣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고향이요? 여그 전주지요. 근디 내가 네 살 났을 적에 부모가 다 돌아가셔서 아무도 없으닝가니 붙는다는 것이 여그 와서 붙는디 남의 집이 아니라 그전 주인 임 씨네허고 나허고 이종간이라. 이종간이라도 남 한가지지, 자기네는 잘 살고 나는 못 사는디 헐 수가 있간디요.”

최 노인의 할아버지는 비단 장수였습니다.

요새로 말하자면 포목 도매상이었는데, 장사가 잘 되어 돈 궁한 줄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재산을 이어받은 아버지가 ‘삼십륙기’라는 중국 놀음에 빠져서 집안의 재산을 모두 거덜내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최 노인이 네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고, 곧 이어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최 노인은 아버지나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도 못한 채, 거렁뱅이 고아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상여도가에 들어가서 잔심부름을 해 주면서 자라났습니다. 그렇게 10년이 넘게 커 나오는 동안에 여러 가지 상여 일을 손에 익힌 그는 스무살쯤이 되자 한 사람 몫의 일을 맡아 돈을 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벌이는 천헌 벌이라도 돈은 귀엽게 잘 벌려서” 제법 돈푼깨나 손에 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물네살 때 “속 알고 마음 착한 전주 시악시”한테 장가를 갔습니다.

“그때에는 노동자가 장가가기 힘들었어요. 다들 천허게 알어서 딸을 주들 안혔거든요.”

그가 말한 ‘노동자’란 상여도가에서 일을 해 주고 품삯을 버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무당, 백정, 노비, 중, 고리장이, 광대, 기생 들과 함께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천대를 받으며 힘겹게 살아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일 중에서도 가장 궂은 일 곧 죽은 사람의 몸을 거두거나, 뼈를 골라 모으거나, 무덤을 파고 시체를 묻거나, 땅에 묻혀 있는 시체를 다시 파내어 다른 곳에 옮기거나, 상여가 나갈 때에 상여를 메는 일이었습니다. 

출처 : http://blog.jangheung.go.kr/main_board....page%3D6

하는 일이 그토록 궂은 일이었던 만큼 품삯은 다른 노동 보다 많았습니다. 그래서 농촌의 막벌이 일군이나 지게꾼이나 놀음하다가 거덜난 포목 장수들이 상여도가에 눌러앉아 ‘벌어 먹다가’ 돈이 모아지면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최 노인과 같이 오랜 수업 시대를 거친 ‘전문가’는 그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했는데 그런 대우를 받으려면 그만한 솜씨를 지녀야 했습니다. 장례에 관한 모든 범절과 일속을 샅샅이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묘 자리도 지관만큼이나 눈 밝게 보아야 하고, 애기를 밴 채 죽은 부인의 '하문'에 손을 넣어 애기를 꺼내는 일과 같은 특수한 기술도 알아야 합니다. 

“상여 나가는 법이 참 어려운 법이요. 우리 같은 전문가들이 허먼 문제가 없지만, 요새는 그골 풍습대로 계꾼들이 상여를 메기도 허고 친구들이 메기도 허닝게 그 사람들을 연습시켜야 허요. 왜냐? 내 소리를 받아서 ‘어행 어행’ 허던가 ‘어노 어노’ 혀야 되는디 처음 허는 사람들은 맞추기가 힘이 들거든요. 그렇게 출상 전날 밤에 연습을 허기도 허지요.”

출상 전날 밤에 상여를 꾸며 가지고 예행 연습을 하는 것을 ‘대뜨리’ 또는 ‘다드레기’ 또는 '다시래기'라고 합니다. 그것은 떠나려는 영혼을 위안하는 구실도 하고 출상 예행 연습의 구실도 하고 슬픔에 잠긴 상주를 위로하는 구실도 하도록 마련된 풍습인 듯합니다.

“그런디 상여 메는 것만 어려운 게 아니라 사람 죽고 나서 허는 일 모두가 어렵다닝게요. 요새는 모다 쉽게들 허는가 봅디다만 그것은 우리식허고 틀려요. 그런디 제 법대로 허자먼 한이 없으닝게 요새는 될 수 있으먼 돈 안 들이고 간단허게 허지요.”

그 한없이 어려운 ‘우리 식’의 장례법을 '간단하게' 알아 볼까요.

사람이 죽으면 가장 먼저 ‘수족을 거둬서’ 칠성판 위에 뉘어 놓습니다. 그 다음에 죽은 사람의 적삼을 쳐들고 “김해 김 씨(성에 따라서) 복 복 복”하고 소리치면서 지붕 위로 던집니다. 그것을 ‘초혼’이라고 합니다.

노무현 전대통령 <노제> 때의 '초혼' 장면.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3D940100

초혼이 끝나면 대문 앞에 밥과 나물과 짚신과 동전을 내어 놓습니다. 죽은 사람을 데리러 온 저승 사자가 먹을 밥과 신을 신과 차비입니다. 그 다음에 시체의 몸을 씻습니다. 그것을 ‘염’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향나무 삶은 물로 시체를 씻었지만 지금은 향료를 탄 물이나 방부제를 탄 물을 수건이나 솜에 묻혀서 씻습니다. 그 다음에 수의를 입혀서 손을 싸매고, 솜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홑이불로 몸을 싸서 묶습니다. 이것이 ‘소렴’입니다.
 
소렴이 끝난 시체를 관에 옮기는데 먼저 관 밑 바닥에 ‘지금(地衾)’이라는 베를 깔고, 그 위에 베개를 놓고, 시체를 관에 넣습니다. 시체 위에 ‘천금(天衾)’을 덮고 솜이나 백지로 관을 채운 뒤에, 관 뚜껑을 덮고 나무못을 칩니다. 이로써 ‘대렴’이 끝납니다.

대렴이 끝나면 영혼이 의지할 곳이 없어졌으므로 죽은 사람의 사진이나 초상화 곧 ‘영좌’를 모셔 놓습니다. 그 영좌 앞에 제물을 차려 놓고 상복을 입고 제사를 지냅니다. 그것을 ‘성복제’라고 합니다. 성복제가 끝나면 비로소 조문객이 인사를 합니다.

성복한 지 사흘이나, 닷새나, 이레나, 아흐레 만에 상여를 내가는데 요즘은 보통 사흘 만에 내갑니다. 관을 묶는 ‘절관줄’을 일곱매 묶은 다음에 맏상주를 빼놓은 상주들인 ‘복인’들이 양쪽에서 관을 듭니다. 방 네 구석을 돌아나가서 마당에 내어 놓은 뒤에 마당에 내온 관을 상여 위에 올려 놓고 제상을 차립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이 집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받는 제사입니다. 그 제사를 ‘발인제’라고 합니다.

맏상주가 잔을 올리고 모두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면 ‘발인축’을 읽습니다. 동네의 글 잘 하는 사람이나 최 노인과 같은 앞소리꾼이 영혼이 저승질을 편안히 가도록 빌어 주는 ‘영인기가 왕즉유택 재진견례 영결종천’ 이라는 축문을 음률에 맞추어 읽고 나면, 곡이 슬프게 울려 퍼집니다.

그런 다음에 ‘관하아-음 보살’이나 ‘관세으-음 보살’ 이라는 앞소리꾼의 소리를 신호로 해서 상여꾼이 일제히 상여를 멥니다. 앞소리꾼의 지휘에 따라 집을 한 바퀴 돈 다음, 집 정면을 향하여 바로 서서 세 번 울렸다 내렸다 하며 하직 인사를 합니다.

그 다음 앞소리꾼이 상여 소리를 시작하면 상여꾼들이 소리를 받아 후렴을 부르며 집을 나섭니다. 요령을 손에 쥔 앞소리꾼이 요령을 흔들면서 선창을 하면 상여를 메고 가는 상여꾼들이 후렴을 합창하며 걸음을 떼어 놓습니다. 최 노인은 어려서부터 상여도가를 드나드는 유명한 앞소리꾼들과 함께 지내며 그 사람들에게서 대받음으로 소리를 물려받았습니다.

상여 소리는 그 가사나 곡조나 후렴이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고 같은 지방의 소리라고 해도 부르는 사람에 따라서 조금씩 다릅니다. 가사는 주로 인생의 허무함이나 이별의 슬픔이나 저승에서의 복된 삶에 대한 바람을 담고 있고, 때로는 죽은 사람의 이력이나 인품이나 살았을 적에 이룬 업적을 추모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출처 :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3D326756

불쌍하다 이내 일신 인간 하직 망극하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진다고 설워말아
명년 삼월 봄이 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우리 인생 한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북망 산천 돌아갈 제 어찌 할꼬 산심 험로
한정 없난 길이로다 언제 다시 돌아오리
이 세상을 하직하니 불쌍하고 가련하다
.......

상여 소리의 곡조는 대체로 비통하고 애절하기 때문에 소리를 높이 띄워 올려서 통곡하듯이 내지릅니다. 최 노인은 자기가 소리를 내지르면 십리 밖에서도 들린다고 했습니다. 전주를 다녀온 뒤에 한국 방송 공사에서 녹음해 놓은 최 노인의 상여 소리를 들어 보았는데, 그 소리에 어느 앞소리꾼이나 판소리 명창이 따르지 못한 한이 절절이 서려 있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거의 전부를 죽음이 얽혀 있는 곳에서 살아 온 그의 삶을 모르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한이었습니다. 오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그의 비통한 목소리에는 가는 넋을 달래 주고 넋을 떠나 보내는 사람들의 슬픔을 위로해 주는 힘도 깃들어 있었지만, 그보다는 슬픔이 없던 사람까지도 통곡하게 만드는 힘이 더 강하게 깃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죽어서 땅에 묻히는 일이 참 '한심헌' 노릇이거든요. 그렁게 소리도 한심허게 해 줘야지요. 그래야 상주들도 눈물을 빠치고요.”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마는 날 일러 주오
어너 어너 어너리 넘차 어하너
황천 길이 멀다더니
문턱 밑이 황천 길이로구나
어너 어너 어너리 넘차 어허너
먹던 밥그릇 덮어 놓고
먹던 수저 그대로 두고 북망 산천이 웬일인가
어너 어너 어너리 넘차 어하너

하늘로 멀리 퍼져 나가는 상여 소리에 맞춰서 상여가 나아가면 상주들이 통곡을 하며 그 뒤를 따릅니다. 상여 행렬의 맨 앞에는 죽은 사람의 관직이나 본관 성씨를 쓴 ‘명정대’가 서고, 그 뒤에 관을 닦는 데에 쓰는 삼베 헝겊을 매단 ‘공포대’가 따르고, 그 뒤에 무늬를 새긴 널조각을 긴 자루에 매단 ‘운삽’과 ‘불삽’이 따릅니다. 그 뒤에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글을 매단 ‘조기’가 섭니다.

옛날에는 북을 치고 칼춤을 추면서 잡귀를 몰아내는 사람이 그 뒤에 따랐다고 하나 지금은 그것이 없습니다. 상여가 나가다가 가기 어려운 험한 길이나 시냇물을 만나면 행상을 멈춥니다. 그러면 친척들이 앞으로 나와 상여 앞 새끼줄에 돈을 끼워 놓고 절을 하며 어서 가자고 타이릅니다. 돈이 모이는 것을 보고 상여는 다시 움직입니다.

“그거야 다 벌어먹는 풍속으로 그러는 거지요. 호상인디 심심허게 그냥 갈 수가 없다고 버티먼 새끼줄에 돈을 꽂아 주지요. 그 돈을 모아서 술도 먹고 놀음도 허지요. 근디 그런 풍속도 요새는 많이 없어졌어요.” 

행상길의 반쯤을 가게 되면 ‘노제’를 행합니다. 상여를 내려 놓은 다음 그 앞에 돗자리를 깔고, 뒤에는 병풍을 치고, 그릇에 음식을 차려 놓고, 맏상주부터 차례로 잔을 올리고 두 번 절한 다음에 곡을 하며 물러섭니다. 친척이나 친구들도 모두 잔을 올리고 두 번 절하고 나서,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골고루 나눠 먹은 뒤에 다시 행상을 계속합니다.
 

노무현 전대통령 <노제> 장면. 출처 :
http://www.cbs.co.kr/nocut/show.asp%3Fi...D1162108

묘지에 가까운 산기슭에 이르면 앞소리꾼은 상여 소리를 조금 빠르게 하여 일심으로 매겨 줍니다. 상여꾼들도 빠른 박자로 ‘간살 보살, 간살 보살’하고 후렴을 합창합니다.

산에 올라가서 ‘산신제’를 지낸 뒤에는 ‘하관’을 합니다. 상여꾼이 관을 맨 새끼를 푼 다음,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발치를 남쪽으로 향하게 하여 관을 무덤 속에 내려 놓습니다. 관의 뚜껑만 보이도록 옆자리를 흙으로 메우고, 관뚜껑을 공포로 깨끗이 닦은 다음, 관 곁에 운삽과 불삽을 끼어 놓고 관 위에 명정을 덮습니다.

출처 : http://www.110ja.com/sub/plist3_1.htm%3...r_id%3D7

죽은 이의 가족들이옷자락에 흙을 담아 명정 위에 붓고 발치에 가서 곡을 합니다. 그 다음에 일꾼들이 흙을 퍼붓습니다. 흙이 관 자리를 메워 평지와 같게 되면 ‘평토제’를 지냅니다. 평토제가 끝나면 객토로 둥글게 봉분을 만든 뒤에 잔디를 입히고, 발로 밟아 다집니다. 그 다음에 산을 내려와 오던 길을 다시 걸어 상가에 돌아와서, 밥과 술을 먹으며 피로를 풉니다.

이 모든 과정은 지방에 따라서도 다르고, 상갓집 형편에 따라서 더해지기도 하고 덜해지기도 합니다. 더구나 요즘에는 현대적으로 생략되어 간편하게 진행됩니다.

최 노인은 상여소리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이와 같은 장례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골고루 돌봐 주는 일을 해왔습니다.

“요새는 상만 당해 놨지 돈이 많이 있어도 어찌 헐 줄을 몰라요. 이것저것을 다 가르쳐 줘야지요. 그러니 대우는 잘 받지요.”

그런데 대접은 잘 해 주면서도 말을 낮추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더라고 말하며 최 노인은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요새는 별로 그런 사람은 없는디 그래도 촌에 가먼 머리가 깜깜헌 양반들이  ‘허소’를 허지요. 어떤 때는 젊은 사람이 늙은 사람보고 말을 함부로 헌단 말여요. 그럼 그냥 받어 주지요. 왜냐? 돈, 돈 땜에 그 천대를 그냥 받는 거지요. 그런디 만약에 돈도 많이 안 줌서 반말을 허먼 한소리 허지요. ‘니가 뭔디 돈도 적게 줌서 허소를 팽팽허고 방거드러지게 노느냐?’ 허고 한마디 해 준단 말이요.”

천대를 받는 것을 그토록 마음 아파하면서도 그가 평생 동안 다른 직업에 눈을 돌리지 않고 그 일만 해 온 것은 그 일의 돈벌이가 좋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번돈으로 그는 널따란 집을 장만하고 아이들의 공부도 시켰습니다. 그 아들들이 장성해서 지금은 좋은 일자리에서 ‘대우받음서’ 살고 있습니다.

그토록 자랑스러운 자수성가를 하기까지 꾸준히 주검만을 돌보며 살아 온 그는 자기 죽음에 대한 준비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완주군 이서면 삼태동에 좋은 자리를 골라 충청도에서 하는 식으로 미리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고 햇습니다.

“외로와요. 내 앞에 있던 사람은 모다 죽고 나 혼자뿐이요. 내가 여그 앉어 있으먼 내 앞에서 담배 필 수도 없고 말벗도 안 되닝게 모다 나가 버려요. 일 나갈 때도 재미가 없고 놀 때도 재미가 없어요.
집에 가도 마찬가지요. 큰며느리는 학교 교사라고 나가서 없고, 나는 방에서 혼자 살어요. 마누라허고도 딴 방을 쓰지요. 늙은이들 끼리 등어리도 긁어 줌서 재미있게 지낼래도 자식들이 숭을 볼까 봐서 한 십년 넘게 딴방을 써요.
자식들은 일허지 말고 놀라고 허는디 말로만 그러지 용돈을 많이 주들 안 혀요. 그러고 내가 번 돈으로 반찬도 사 가고, 손자들 먹을 것도 사 가고, 그런 재미가 있응게 그냥 노느니 여그나와 있는 거지요. 그렇게 고생인지 설움인지 모르고 지내요.”

최 노인은 끝까지 이름 밝히기와 사진 찍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자식들이 모두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자기 아버지가 그런 ‘천한 벌이’를 했다고 세상에 알려지면 좋을 게 있겠느냐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저는 그 대신에 상여소리나 들려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자 그는 사람들이 “싫어허닝게” 큰 소리로 할 수 없다고 하며 소리를 죽여서 몇 마디의 상여소리를 들려 주었습니다.

“못 오시네 못 오시네
한번 가면 못 오시네
인생 아차 죽어지면
육진장포 일곱매를
상하로 질끈 동여매어
북망산천을 돌아들 적
송죽으로 울을 삼고
두견 접동 벗이 되어
산은 첩첩 밤은 깊은디
처량헌 게 인생 넋이로구나
세월아 세월아 오고 가지를 말어라
아까운 이내 운명 마지막 간다.”

최 노인과 작별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거리에 진눈개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질척거리는 시장길을 빠져나와 한벽루 쪽으로 난 전주천 둑길을 걸었습니다.

어둠에 덮인 전주천 물을 바라보는 저의 귀에는 최 노인이 남의 귀를 꺼려 속삭이듯이 들려 준 상여 소리가 끈질기게 맴돌고 있었습니다. 어느 곳에도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지만 제게는 어느 명인명창보다도 소중한 또 한 사람의 명인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최 노인은 제게는 '최 명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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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제가 노무현 전대통령의 영결식 노제 총감독을 맡았을 때 김제동씨는 사회자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유서의 내용을 나름대로 재해석한 ‘아름다운’ 말들로 사회 멘트를 장식해서 '김제동 어록' 유행시켰습니다. 1년이 지난 뒤, 그는 1주기 추모식의 사회자로 다시 참여했고 그 여파로 Mnet의 쇼MC에서 사퇴하게 되었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에 ‘아름다운’ 말로 애도를 표한 개그맨이 정치적 문제로 일자리를 잃어야 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출처 : http://h21.hani.co.kr/section-021013000...027.html

김제동이라는 연예인이 이 시대의 정치권력과 겪는 갈등을 보면서, 그의 선배라 할 수 있는 옛 시대 광대들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연산군 때 ‘공길’이라는 광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연산군의 황음무도함을 풍자하는 놀이를 자주 벌였는데, 그 일이 발각되어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옥에 갇힌 뒤부터 단식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묻는 연산군에게 그는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했습니다.
 

논어에 이르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어버이는 어버이다워야 하며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고 했는데,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비록 창고에 곡식이 가득한 들
내 어찌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 ‘아름다운’ 말에 분노한 연산군에 의해 공길은 처참하게 매를 맞고 유배를 당했습니다. 그의 이 짤막한 에피소드는 재능 있는 작가와 감독에 의해 연극 <이(爾)>와 영화 <왕의 남자>로 재탄생되어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러시아에 ‘블라디미르 레이니도비치 두로프’라는 광대가 있었습니다. 그 또한 공길이처럼 러시아를 지배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풍자하는 놀이를 벌인 죄목으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도 감옥에 가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어릿광대의 왕이다.
하지만 결코 왕의 어릿광대는 아니다.
우리는 지고한 대중의 어릿광대다.

구한말에 활약했던 몇몇 기생·광대들의 다음과 같은 일화도 무척 시사적입니다. 먼저 일제 침략에 항거해 독약을 마시고 자결한 유학자 황현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오는 이야기. 

진주 기생 ‘산홍’이가 검무를 잘 춘다는 소문을 듣고, 내무대신 이시홍이 천금을 주고 산홍이를 사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산홍이는 그 제안을 일거에 거절하며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했습니다.

내 비록 천한 기생의 몸이지만,
일본에 나라를 판 오적의 두목에게
몸을 팔지 않겠다.

이 말에 크게 노한 이시홍은 그녀를 잡아다 무자비하게 때렸다고 합니다.

판소리 <서편제>를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소리 광대 '박유전'은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무과 벼슬까지 하고 그의 사랑채에 수시로 출입했습니다. 그러다가 민비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대원군이 중국으로 망명하자, 민비파의 보복을 피해 전라도에 숨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자 한양으로 올라갔습니다. 얼마 뒤, 대원군이 죽고 한일 합방이 되자 그는 나라 잃은 가객이 노래 부를 수 없다며 전라도 어느 땅에 칩거하다가 한겨울에 굶어 죽었습니다.

같은 시절에 '정가소'라는 ‘재담 광대’(요즘으로 치면 개그맨)가 있었습니다. 그는 북촌의 양반집 사랑방을 돌아다니며 정치나 시사 문제를 풍자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의 장기는 '흥인군 곳간 점고'였습니다.

흥인군은 대원군의 형으로 동생의 권력을 빙자하여 뇌물 받기를 좋아해서 엄청난 치부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흥인군은 집안에 아홉 개의 곳간을 지어놓고 공물들을 가득 쌓아놓았는데, 정가소는 이른 아침마다 곳간 문을 열고 공물을 헤아리는 흥인군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하여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 같은 시기에 '정동'이라는 재담 광대가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모든 권력과 금력을 장악한 안동 김씨의 비리와 부정부패와 권력남용 등을 풍자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김씨 일파가 보낸 하수인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위에 예로 든 기생·광대 즉 옛시대의 문화예술인들이 활동했던 시대는 철저한 계급사회였습니다.

그토록 권위적이며 봉건적인 시대에, 사회적 약자였던 그들이 그토록 저항적이며 진취적인 소신을 가지고 활동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문화예술인들과 정치권력의 갈등은 한일합방과 일제의 식민지배로 인해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항적’이며 ‘진취적’인 문화예술인들은 철저히 제거되었습니다. 

또한 해방 이후 좌·우익의 이념 대립은 그들에게 분명한 정치적 선택을 강요했기 때문에 문화예술인들은 어쩔 수 없이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문화예술인들은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정치권력을 따르게 되었고, 남한의 문화예술인들은 자유민주주의로 무장한 정치권력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남한의 역대 정치권력은 그들을 ‘관리’하고 ‘통제’했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의 ‘일부’ ‘불온한’ 문화예술인들은 군사정부의 독재적이고 폭압적인 권력에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그들은 민주와 통일과 인권과 평등의 기치를 드높이 내걸고 저항적이고 진보적인 문화예술운동을 펼쳤습니다. ‘90년대 말에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탄생되자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습니다. 

관리와 통제 정책은 지원과 육성 정책으로 변했습니다. 검열 제도가 사라지고, 표현의 자유와 자율성이 신장되었습니다. 문화예술가들은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표현을 하고, 소신껏 발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0년 현재, 그 결과는 다시 참담해졌습니다.

문화예술계의 좌파·우파 편가르기는 무자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기관장 인사 파동, 방송 장악 시도, 표현의 자유 위축 등도 급속도로 심화되었습니다.

그러더니 급기야 비판적 문화예술인들의 ‘목줄조이기’라는 구시대적 작태까지 등장한 것입니다. 이제 연예인들을 포함한 문화예술인들은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에게 적당히 이용당하며 살아 온 옛 시절로 돌아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문화예술인들에게 다시 한 번 정치적 각성이 필요한 시기가 왔습니다. ‘지고한 대중’의 삶 속에 뛰어 들어, ‘저항적’이고 ‘진취적’으로 살다 간 옛 시대 광대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문화예술인들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 김제동은 어느새 이 시대 문화예술계의 ‘화두(話頭)’가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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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판소리계 최고의 로맨티스트' 임방울 명창(1904년~1961년)을 소개하겠습니다.

임방울 명창은 을사보호 조약을 맺기 1년 전인 1904년에, 전남 광산군 수성마을에서 아버지 임경학씨와 어머니 김나주씨의 팔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세습 예술가 집안이었고, 본 이름은 승근인데 방울 같은 소리를 내며 크라고 방울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외삼촌이자 국창이라 불리던 서편제의 김창환 명창에게 기초를 닦았고, 자라면서 여러 명창들에게 배운 뒤, 15세 무렵에는 동편제의 유성준 명창에게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유성준 명창은 성질이 급하고 괴퍅해서 어린 임방울은 기다란 담뱃대로 머리통을 수도 없이 얻어 맞았다고 합니다. 같이 공부하던 여자애들을 맨발로 북 위에 한 시간씩 세워두기도 했다니, 제가 연기했던 「서편제」의 유봉보다 더 지독한 선생님이었나 봅니다.

임방울은 목소리가 맑고 청아하면서도 슬픈 느낌을 주고, 고음과 저음이 시원시원하게 터져나오고, 어떠한 경우에도 목이 쉬지 않을 정도로 좋은 성대를 타고 났습니다.

그런데 변성기를 맞아 소리가 마음대로 나오지 않자 골방에 틀어박혀 문을 걸어 잠그고 연습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이 무렵의 임방울 명창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그가 무덤가에서 하루종일 소리공부를 하는데 원하는 소리가 죽어도 안나오자 "마마(천연두)에 걸리면 목이 트인다는데 마마나 걸려라!"하고 소원을 빌었더니 과연 천연두에 걸려서 소리가 트이고, 그 대신 얼굴이 얽었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이처럼 소리 공부에 전력을 기울인 뒤, 그는 대명창이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스물을 갓 넘은 1925년 9월, '조선명창연주회'가 매일신보사 주최로 열렸습니다. 명창들의 노래를 듣기 위해 관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먼저 그의 외삼촌인 김창환 명창과 당대 최고의 명창인 송만갑 명창, 이동백 명창, 정정렬 명창들이 특별출연으로 무대에 올라 소리를 했습니다.

그뒤를 이어 무릎 위로 올라간 짧은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땅딸막한 키에, 약간 얽은 데다가 별로 잘생기지 않은 얼굴의 임방울이 무대에 나타났습니다. 초라한 행색의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판소리 「춘향가」 중 <옥중가(獄中歌)>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寂寞獄房) 찬 자리에
생각나는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이 노래는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힌 춘향이가 한양으로 떠나 간 이몽룡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목에 칼을 쓰고 산발한 머리가 마치 쑥대처럼 생겼고, 얼굴은 창백하게 귀신처럼 생겼다고  해서 '쑥대머리 귀신형용'이란 충격적인 가사로 노래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참혹한 지경에서도 일편단심 사랑하는 님을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이 너무도 절실하게 묘사된 명곡입니다. 오페라로 치면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이나 <공주는 잠 못 이루고>와 같은 대표적인 아리아인 것입니다.


뱃속에서 바로 소리를 뽑아서 내는 통성에 약간 쉰듯 칼칼하게 터져나오는 수리성을 섞어, 춘향이의 비통처절한 심정을 애절하게 토해내는 임방울의 판소리는 단박에 청중을 휘어잡았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춘향이의 심정이 절망적인 시대의 정서와 어울어지면서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습니다. 이 노래가 바로 불후의 명곡이 된 <쑥대머리>인 것입니다.


 
그 공연 이후 임방울은 하루 아침에 명창의 반열에 올랐고, 콜럼비아 레코드나 빅터 레코드나 OK 레코드와 같은 유명 음반사가 앞다투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의 출세작 <쑥대머리>가 실린 음반은 한반도와 만주와 일본까지 불티나게 팔려나가, 각 음반사마다 12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기록을 세웠습니다. 

그후 1930년 전국명창대회에서 장원의 영광을 차지한 임방울은 본격적인 소리꾼으로 나서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연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즈음, 광주의 기관장들이 환영파티를 열어 준 '송학원'이라는 요릿집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임방울이 소년시절에 광주의 부잣집에서 고용살이를 했는데, 그 집에 동갑내기의 아름다운 딸이 있었습니다. 소녀와 소년은 철부지의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소녀의 부모가 반대하는 통에 소년은 그 집을 떠나야 했고, 소녀는 어느 부잣집 아들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후 소녀의 결혼 생활은 실패로 끝났고, 광주에서 송학원이란 요릿집을 차리고 예명을 김산호주로 지은 소녀는 광주 유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여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날, 그 자리에서, 명창이 되어 돌아 온 임방울과 여주인 김산호주가 십여년도 훨씬 흐른 뒤에 해후를 한 겁니다. 그동안 서로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두 연인은 곧바로 불같은 사랑을 불태웠습니다.

임방울은 2년 간 송학원의 내실에 숨어 살며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습니다. 세상에서는 임방울이 잠적했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전속계약을 한 OK 레코드 회사에서는 그의 행방을 찾느라 혈안이 되었습니다. 

미색이 빼어났던 김산호주는 천하명창 임방울을 2년 동안 송학원의 내실에 숨겨 놓은 채, 사랑의 포로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임방울은 자신의 목소리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토록 기름졌던 목소리가 탁해지고, 고음이 마음대로 나오지 않고, 소리를 조금만 질러도 땀이 뻘뻘 나는 것이었습니다.

대경실색한 그는 어느 날, 산호주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지리산으로 떠나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그는 지리산 토굴에 숨어 살며 소리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임방울의 행방을 알지 못한 채, 미칠듯한 그리움과 슬픔에 빠진 산호주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천지사방을  수소문한 끝에 간신히 임방울의 행방을 알아 낸 산호주는 임방울이 소리공부를 하는 토굴 앞에서 만나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임방울은 끝내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깊은 절망에 빠져 집으로 돌아 온 산호주는 임방울을 애타게 그리다가 병이 깊어져, 마침내 30세도 안된 꽃 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산호주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임방울은 죽어가는 애인을 가슴에 껴안고 슬피 울며 즉석에서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습니다. 그것이 바로 <추억>이라는 노래입니다.


앞산도 첩첩허고
뒷산도 첩첩헌디

혼은 어디로 향하신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럇든가

그리쉽게 가럇거든

당초에 나오지를 말았거나
왔다가면 그저나 가지

노던 터에다 값진 이름을 두고가며
동무에게 정을 두고 가서

가시는 임을 하직코 가셨지만
세상에 있는 동무들은
백년을 통곡헌들

보러 올 줄을 어느 뉘가 알며
천하를 죄다 외고 다닌들

어느 곳에서 만나 보리오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전생에 무슨 함의로
이 세상에 알게 되어서

각도각골 방방곡곡 다니던 일을
곽 속에 들어서도 나는 못잊겄네

원명이 그뿐이었든가
이리 급작스리 황천객이 되얏는가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어데를 가고서 못오는가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을 보고지고



이 노래가 바로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울광장 '노제' 때 안숙선 명창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제가 판소리를 배우던 젊은 시절, 이 노래에 얽힌 비극적 사랑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여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오다가, 사랑하던 노전대통령을 떠나보내는 국민들의 마음을 이 노래에 실어 보내드렸던 것입니다.

이후 박초월 명창 등과 <동일 창극단>을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하며 최고의 명창으로 대중들을 울리고 웃기던 임방울 명창은 1961년 공연 도중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5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상 처음 국악예술인장으로 치러진 임방울 명창의 장례식에는 200여 명의 여류 명창들이 소복을 입고 길을 가며 상여소리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행렬 끝에 100여 명의 거지가 눈물을 흘리며 따라와 눈길을 끌었습니다. 공연 때마다 거지들은 무료로 관람시켰던 임방울 명창에 대한 추모의 표시였습니다.


10여세부터 여러 스승으로부터 '서편제'와 '동편제'를 모두 사사받아 자신의 고유한 가풍을 수립한 전설적 명창 임방울. 

민족사의 흐름에서 가장 불행했던 시기이자, 판소리 역사에서 가장 시련과 수난이 많았던 일제 침략기에 민초들의 한을 노래한 명창 임방울. 

김창환, 이동백, 송만갑 같은 선배 가객들처럼 조선시대의 벼슬 하나 지낸 바 없고, 후배 명창들처럼 인간문화재로 대접 한 번 받아보지 못한 불운한 시대의 진정한 광대 임방울. 

평생 양복 입기를 싫어하며 흰색 한복 두루마기를 즐겨 입고, 수많은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소외된 민초들의 아픔을 위로해주던 아름다운 가객 임방울.

공연 때 마이크 쓰기를 꺼려 했고, 입에 발린 공치사나 돈 받기를 외면했으며, 번돈은 불우한 이웃에게 아낌없이 써버려 유족에게 아무런 유산도 남기지 않은 풍류남아 임방울.

조선왕조가 저물어가는 때에 태어나 민족사의 혼란 속에서 유랑의 생애를 마친 임방울은 우리의 비극적 시대를 대표하는 명창이었습니다.


그의 출생지인 광주시 광산구 송정공원에 세워진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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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마이뉴스의 '광장을 열어라' 특별 기획 시리즈 제1탄으로 저의 글이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글을 그대로 옮겨서 소개합니다. 


 
MB 정부의 집회시위의 자유에 대한 침해와 광장공포증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경찰의 서울광장 경찰버스 봉쇄가 이어지고 있고, 서울시는 문화행사 이외에는 사용 제한을 내걸었습니다.  광장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시민사회와 야당은 광장의 위기에 맞서 주민직접발의라는 직접민주주의의 방법으로 광장을 시민의 품으로 찾아오는 서울광장조례개정운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와 공동으로 '광장을 열어라'는 주제로 공동기획을 진행합니다. 독자여러분의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오마이뉴스·참여연대·참여사회연구소 공동 기획, 광장을 열어라 ①]

우리에게는 본디 '광장'이란 게 없었다. 우리말 중 광장과 가장 가까운 단어로는 '마당'을 꼽을 수 있겠다. 마을의 공터 마당이든, 장터 마당이든, 커다란 대갓집의 앞마당이든,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인 마당에서는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다양한 삶의 행위들이 펼쳐졌다. 

씨뿌리기나 김매기나 추수를 끝낸 민초들은 마당에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축제를 벌였다. 낮에는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기며 풍물을 치기도 하고, 밤이 되면 횃불을 켜고 모여 앉아 밤을 새워 신명난 굿판을 벌였다.
 
우리의 전통예술인 탈춤, 풍물, 판소리, 남사당놀이 등은 마당에서 민초들과 함께 어울리던 마당의 예술이었고, 마당의 놀이였다. 마당에 모인 민초들은 함께 울고 웃으며 고단한 삶을 잠시 위로하고 휴식하며, 새로운 노동의 활력을 되찾았다.

그리고 마당은 때로 양반이나 지배 권력에게 위협적인 장소로 돌변하기도 했다. 수탈과 억압이 행해질 때는 분노한 민초들이 마당에 모여 학정과 비리를 성토하기도 하고, 때로는 떼를 지어 관아로 행진하기도 했다. 민란이나 동학혁명과 같은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이루어질 때는 '사발통문'을 돌려 삽시간에 수많은 군중들이 농기구와 죽창과 횃불을 들고 모여들기도 했다.

이렇듯 마당은 우리 민초들의 삶의 공간이요, 축제의 공간이요, 대화와 토론의 공간이요, 저항과 혁명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민주주의 초석이 된 공간, 광장




  
5월 29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가 열릴 예정인 서울광장이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 노란색 모자에 노란색 풍선을 든 시민들로 가득 차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남소연


이러한 마당의 의미를 근대화를 통해 서구적 개념과 섞어서 되살려낸 공간이 '광장'이다. 2500여년 전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아고라(agora)'에 모여 토론하고 집회를 하던 것이 광장문화의 시작이었다. 아고라는 본래 시민들의 집회를 뜻하는 단어였는데, 집회가 열리는 장소로서의 의미가 덧붙여졌다. 로마 시대에는 '포럼(forum)'이 아고라의 역할을 했다.

이 아고라야말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 공간이다. 그리스 민주주의는 시민들과 귀족들 사이의 갈등과 투쟁을 통해 조금씩 발전되었다. 귀족들은 왕정을 물리치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들었지만, 그들 또한 시민들에게 억압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시민들은 그 권력에 대한 저항을 아고라에서의 대화나 토론이나 시위 등을 통해서 이루어냈다.

세계의 유서 깊은 도시에는 어김없이 아고라의 전통을 이어 받은 광장이 있다. 그리고 그 광장들은 억압적 권력과 시민들의 저항의 역사로 얼룩져 있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건이 벌어진 몇 광장의 예를 들어보자.

프랑스의 '콩코드 광장'은 본래 이름이 '루이15세 광장'이었는데 프랑스대혁명 이후에 루이 15세의 동상을 철거하고 단두대를 세운 뒤,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트와 혁명지도자인 당통과 로베스피에르 등 1000여명을 처형한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의 '붉은 광장'은 본래 이름이 '아름다운 광장'이었는데 사회주의 혁명 후 시위, 처형, 폭동, 연설의 주무대가 되었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체코의 '바츨라프 광장'은 1968년에 구 소련군이 시위대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여 수많은 시민을 학살한 '프라하의 봄'의 비극을 안고 있다.

중국의 '텐안먼(천안문) 광장'은 1919년의 5.4운동과 1976년의 4.5운동의 발상지로 중국 역사상 가장 주요한 국민적 운동이 벌어진 곳이었으나, 1989년의 대규모 민주화시위 도중 진압군의 발포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광장들은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아픔을 씻어내고 지금은 그 도시를 대표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세계적 이벤트나 축제의 중심지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역사의 무게를 가진 '서울광장'




2006년 월드컵 당시 한국팀의 선전을 기원하며 서울광장 거리응원단이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우리의 '서울광장'도 그 광장들 못지않게 만만치 않은 역사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서울광장이 2004년 현재의 모습으로 고쳐지기 전에는 '시청 앞 광장'이라 불렸고, 그 이전에는 '대한문 앞 광장'이라 불렸다.

1897년 무렵,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했다가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펼쳐보려고 대한문 앞을 중심으로 방사선형 도로를 만들고 앞쪽에 광장을 설치했다.

이 대한문 앞 광장에서 고종을 옹호하는 시위가 열렸고, 일제 강점기에는 애국지사들의 3.1만세 운동이 열렸다.

그 뒤 4.19혁명이나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주요 이슈가 있을 때마다, 이 광장은 국민들의 의사를 표출하는 공간으로 등장했다.

1980년대에는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의 물결이 시청 앞 광장을 뒤덮었고,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는 대규모 거리응원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산 쇠고기반대를 위한 촛불집회와 함께 수많은 문화행사들이 계속 펼쳐지면서, 서울광장은 우리나라 광장문화의 상징으로 '세계적 명성(?)'을 쌓았다.

최근 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서울광장의 개방을 둘러싸고 시민들과 당국이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다가 '노제(路祭)'를 계기로 잠시 개방된 적이 있다.
 
40분 동안 피가 말랐던 기억




  
5월 29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가 열릴 예정인 서울광장을 경찰이 개방하기로 약속한 오전7시를 넘기고도 차량을 철수하지 않고 봉쇄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남소연


노제가 열리던 5월 29일 오전 7시,
 
노제총감독이었던 나는 서울광장에 있었다. 그런데 7시에 경찰차량을 철수시키기로 약속한 경찰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시위진압차로 철통같이 광장을 에워싸고 있었다. 약속을 지킬 것을 강하게 요구했지만, 상부의 지시가 없기 때문에 철수할 수가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음향기재와 의상과 소품과 대형 북을 실은 차량들과 크레인 등이 경찰차에 막혀 광장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고, 스탭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발을 동동 굴러댔다. 11시에 시작하기로 한 노제를 치르려면 음향 테스트와 가수와 무용수와 배우들의 연습과 영상테스트 등을 한 번쯤은 해야 하는데, 만약 계속 철수가 늦어지면 행사가 엉망이 되어 대실패를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임자를 불러 상황을 설명하고 빨리 철수할 것을 강력하게 주문했다. 그러나 그들은 상부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요지부동이었다. 내가 행자부나 경찰청의 책임자를 수배해서 해결하려고 동분서주하는 동안, 대한문 앞길에 시민들과 차량이 몰려들더니 광장을 막은 경찰들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래를 틀기도 하고, 마이크로 경찰이 물러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시민들이 점점 더 모여들고 대한문 앞길이 항의하는 시민들의 인파로 뒤덮이자, 마침내 경찰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 시각이 7시 40분이었다. 모두들 초긴장 상태에서 최선을 다한 끝에 노제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지만, 그 40분 동안의 피말리는 긴장과 분노를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공권력에 포위된 텅 빈 광장은 더 이상 광장이 아니다. 정부는 서울광장에서 벌이는 대규모 집회나 행사를 불허할 뿐 아니라, 졸속으로 만든 조례를 통해 광장문화를 축소시키거나 없애버리려 시도하고 있다.

민심의 용광로이며, 소통의 광장이며, 신명의 놀이터였던 서울광장은 점점 서울의 고립된 섬으로 변해 가고 있다. 시위진압차에 둘러 싸여 시민들과 격리된 서울광장에게 묻고 싶다.

서울광장, 너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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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의 영결식을 마치고 추모 노제가 시작되던 1시 30분경, 시청 광장 서쪽 상공에 오색채운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채운(彩雲)이란?
 
여러 빛깔로 아롱진 고운 구름. 구름을 이루는 물방울이나 얼음 결정에 빛이 회절되어 고운 빛깔로 물들어 보인다. 
채운은 아름답기 때문에 서운(瑞雲), 경운(景雲), 자운(紫雲) 이라고도 하며, 큰 경사가 있을 징조라고 알려져 왔다.  

그 구름을 어떤 분들은 무지개라고 표현하시는데, 오색채운은 무지개하고 약간 다른 구름입니다. 


무지개는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씨에 자주 보여지는 현상인데 반해, 오색채운은 비와는 상관없이 맑은 날에 생기는 다섯가지 빛깔의 구름을 말합니다.

자주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은 평생에 한번 보기도 어렵다고하고,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상서로운 길조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채운 또는 오색채운을 검색해보니 근래 우리나라에서 몇 군데 채운이 발견되었더군요. 5월 19일 오전 제주시 사라봉 북쪽하늘에 채운이 40여분 간 관찰되었습니다.


5월 25일에는 부산 바닷가 남쪽 하늘에서 채운이 촬영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간간이 촬영된 사진이 있는 걸로 봐서 채운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 특이한 현상"이라고 보기는 어렵군요. 

고인의 넋이 오색채운으로 화하여 나타났다고 상상할 수도 있고, 온 국민의 슬픔과 애도에 하늘이 감응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자연 현상을 지나치게 미화한 해석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단순한 자연현상이 하필 그 때 그 하늘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시적인 상상력이 솟아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입니다. 

마침 정철용 시인의 시 중에 그러한 느낌과 잘 어울리는 시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시인이 하늘에 뜬 무지개를 보고서 딸에게 선사했던 아름다운 시를 오색채운에 대비시켜 봤습니다.   

무지개(오색채운) 선 곳에 비가 내린다

- 무지개(오색채운)에 관한 명상1, 딸에게 -

비 그친 뒤 하늘 저편에 무지개(오색채운)가 섰구나
환성을 지르는 네 눈빛이
무지개(오색채운) 색깔보다 더 곱구나
하지만 얘야,
저토록 황홀한 색깔로 빛나지만
그 색깔들이 약속하는 햇빛 찬란한 땅을
너는 한 번도 의심하지 않지만,
무지개(오색채운) 선 곳에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단다.
삶의 가장 아름다운 색깔은
슬픔의 빗방울들을 통과해야만
무지개(오색채운)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자세히 보면 어쩌면 알 수 있을지도 몰라,
태양을 등지지 않으면
무지개(오색채운)를 볼 수 없다는 것을,

그렇단다,
무지개(오색채운)는 빗방울들이 꾸는 태양의 꿈이란다.
빗속에서만 화려하게 피어나는 슬픈 무지개(오색채운)의 꿈,
삶이란
긴 슬픔 속에서 길어 올려야하는
짧은 기쁨의 순간이라는 것을,

오직 꿈꾸는 순간에만 주어지는 기쁨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는 너에겐
아빠의 빛바랜 무지개(오색채운)도 빛나 보이겠지만
무지개(오색채운) 선 곳엔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단다. 얘야.

애도와 추모의 소중한 시간들을 통해 언젠가  ‘빗속에서 피어나는 슬픈 오색채운’을 피워내고 싶습니다.

‘슬픔 속에서 길어 올린’, ‘삶의 가장 아름다운 빛깔’들로 오색채운을 빚어내고 싶습니다.

그 오색채운은 수많은 가슴 속의 ‘빗방울들이 꾸는’ 황홀한 ‘태양의 꿈’ 것입니다.

TRACKBACK 3 AND COMMENT 41

어제 노제를 마치고 밤 늦게 돌아 온 저는 곧바로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쑤시고, 열이 나고, 목도 부었더군요. 아침 먹고 잠 들었다가, 점심 먹을 때 일어났다가 다시 스르르 잠이 들었고, 저녁을 먹고 나서야 간신히 몸을 추스릴 수 있었습니다. 

아직 몸도 무겁고 슬픔도 가시지 않았지만 노제 총감독으로서의 소회를 빨리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이 글을 씁니다.


노제의 막을 열기까지

지난 일요일, 영결식과 노제의 총감독 제의을 받은 저는 기획과 연출 분야에서 저와 호흡이 잘 맞는 후배들에게 소식을 알렸습니다. 후배들은 만사를 제쳐 놓고 참여할 의사가 있음을 알려왔습니다.

노제(路祭)란?

운구행렬이 지나는 길에 돌아가신 분의 친지나 특별한 인연이 있는 장소를 지날 때, 잠시 멈추고 지내는 제사. 


월요일에는 하루종일 봉하마을 장례준비위원회 측과 긴밀하게 상의했습니다. 영결식은 전체 컨셉과 프로그램에 대해 제가 점검만 하고 모든 준비는 행정안전부의 국가의전팀에서 공식적으로 진행하며, 노제는 전적으로 제가 책임을 지고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몇몇 후배들과 노제의 기본적인 구성안을 만든 저는 화요일 오전에 기획연출팀을 소집했습니다. 이희진(기획), 유기형(연출) 김태균(구성작가), 김은영(기획부), 김수진(연출부), 송태성(기획부), 조영호, 조승현(영상), 배정혜(안무) 등 역전의 용사들이 속속 모여 들어 즉시 준비에 돌입했습니다.

저는 영결식과 노제 전체의 컨셉을 "사람 사는 세상-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로 잡고 구성안을 수정해가고 출연진을 확정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주제를 그렇게 잡은 이유에 대해서는 제 블로그의 <의혹의 죽음, 그래도 여전히 화두는 "사람!">이라는 글에서 설명했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사람 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몸을 바쳤고, 싸웠고, 분노했고, 도전하며 살아오셨습니다. '
사람'에 대한 사랑과 비전이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비판과 비난과 조롱과 저주에도 꿋꿋이 버터 오셨습니다. '
사람'에 대한 겸손한 존중심과 높은 윤리관과 엄격한 도덕율이 있었기에, 그 드높은 이상에 상처를 입힌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부엉이바위 아래 몸을 던지신 겁니다.

김제동(1부 사회), 안치환, 양희은, 윤도현, 우리나라, 도종환(2부 사회), 안진경(추모시), 김진경(추모시), 안숙선(추모창), 장시아(유서낭송) 등 모든 분들이 두말없이 출연을 승락하고, 협조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수요일쯤 돌발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국립무용단(진혼무), 국립창극단(혼맞이 노래), 국립국악관현악단(추모 연주)의 출연에 제동이 걸린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행정안전부로부터의 협조 공문이 문화부로 안왔다는 것이었지만, 제가 파악한 상황은 정부가 국가가의전으로서의 영결식은 어쩔 수 없이 치르지만, "노제"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협조만을 하려는 방침에 따라 국립예술단체가 노제에 참가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전에 민주열사들의 노제가 거대한 시위로 변화되는 체험을 여러 번 한 터라 그에 대해 거부감과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습니다. 그들은 국립단체가 끼어들지 않고 민간 무용가나 연주단으로 간단한 노제가 치러지는 걸 원하는 눈치였지만, 저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각오로 얼마 전까지 저와 손발을 맞추며 일을 했던 문화부와 국립극장를 강하게 압박했습니다. 

저는 국립극장장을 해봤기 때문에 최소한의 짧은 시간 안에 행사를 빛나게 해 줄 각 단체들의 역량을 잘 알고 있었고, 전적으로 저를 믿고 출연해 줄 단원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같이 화를 내며 이틀간의 실랑이를 벌인 끝에 국립무용단과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출연은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국립창극단만 단체 사정 상 11명의 단원을 다 파견할 수 없고, 5명밖에 파견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문화부도 더 이상 협조를 안하려 한다는 입장을 확인한 저는 기획진에게 국립예술단체 노조위원장의 입장을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윤석안 노조위원장은 오히려 비협조적인 극장의 처사에 화를 내며 극장장과 예술감독에게 항의를 하는 등 해결사로 나섰습니다. 결국 목요일 자정이 되어서야 모든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노제 1부의 막이 열리다.

드디어 5월 29일 오전 7시, 저는 시청광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7시에 경찰차량을 철수시키기로 약속한 경찰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었습니다.

 
한동안의 실랭이 끝에 7시 40분쯤 경찰차가 철수했습니다. 저희들은 밀려드는 인파와 수시로 발생하는 현장의 문제들을 점검하면서 10시 50분까지 리허설을 진행했습니다.


11시부터 영결식을 생중계로 방송한 뒤, 경복궁을 출발한 운구행렬이 도착하는 동안 1부 추모 공연 김제동씨의 사회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작곡가 윤민석씨가 추모 노래로 작곡한 <바보연가>를 노래패 '우리나라'가 부른 다음, 안치환씨가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등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가 울려 퍼지자 많은 시민들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어떤 이들은 노란 색 풍선을 하늘 높이 띄워 날리기도 했습니다. 


이어 양희은씨가 <상록수>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는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노 전 대통령이 직접 기타를 치며 불러 화제를 모았던 곡이기도 합니다.


김제동씨는 “여러분의 눈빛과 풍선이 언제나 푸른 상록수와 같은 역사가 되어 아이들에 비춰지길 바란다”고 염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YB(윤도현, 허준, 김진원, 박태희)는 <후회없어>와 <너를 보내고>를 불렀습니다. 윤도현은 “그분과 함께 한 곳은 바로 ‘사람사는 세상’이었습니다. 비록 그분의 몸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분이 남긴 뜻은 가슴 깊이 담겠습니다”며 노래를 열창했습니다.

노래패 ‘우리나라’의 <다시 광화문에서>도 울려 퍼졌습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우리 다시 만나요 다시 한번 오늘의 함성 그대로 간직해요."란 가사를 담은 노래는 전 국민을 하나로 묶은 이곳을 추억하자는 의미를 담아 더욱 애절하게 들렸습니다.

김재동씨는 1부의 마지막을 유서의 내용을 나름대로 재해석한 아름다운 말로 장식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이 당신에게 진 신세가 너무도 큽니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그 분에게 받은 사랑이 너무나 큽니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그 분으로 인해 받은 행복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짐 우리가 오늘부터 나눠지겠다고 다짐합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저희가 슬퍼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슴 속, 심장 속에 한조각 퍼즐처럼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미안해 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이야 말로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운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님의 뜻을 저희들이 운명처럼 받아들고 가겠습니다.
화장하라고 하셨습니다. 님을 뜨거운 불구덩이에서 태우는 것이 아니라, 저희들의 마음 속의 뜨거운 열정으로 우리 가슴 속의 열정으로 남기겠습니다.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기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 가슴 속에도 조그만 비석 하나씩 세우겠습니다.




노제 2부의 막이 열리다.


마침내 1시20분쯤 노무현 전대통령의 운구행렬이 노제가 열리는 서울광장 안으로 들어서자,
광장은 이내 눈물바다로 변했습니다. 어떤 이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기도 했으며, 어떤 이는 아예 목 놓아 울기도 했고, 하늘을 우러르며 소리없이 우는 이도 있었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소개로 무대에 오른 저는 "지금 이 자리는 노무현 전대통령과 모든 국민들이 영원한 인연을 맺는 자리로서 뜨거운 가슴으로 고인의 넋을 맞이하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국민들과 함께 하는 국민장,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 노제를 시작하겠습니다!" 라는 말로 개식선언을 한 뒤, 크레인에 올라 타고서 "해동조선 대한민국 제 16대 노무현 대통령 복~복~복~"을 외치는 초혼 의식으로 노제의 시작을 열었습니다.

초혼(招魂)이란? 

사람이 돌아가시면 고인이 살았던 집의 지붕 위에 올라가 고인이 평소에 입었던 옷을 흔들며 하늘을 향해 고인의 넋을 알리는 의식. 



이어서 향로를 맨 국립창극단의 <혼맞이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어너 어허어 넘차 어이가리 넘차 너화넘
북망산천이 머다더니 저 건너 봉화산이 북망이로구나
어너 어허어 넘차 어이가리 넘차 너화넘



비통하고 애절한 소리에 맞춰 국립무용단과 대전의 놀이패 우금치 단원들이 운구차를 한바퀴 돈 뒤 무대 위로 올라 가 진혼의식을 시작했습니다. 


죽은 자와 그를 사랑했던 여인의 비통한 슬픔을 주제로 구성된 <진혼무>가 추어지는 동안 안도현 시인의 추모시가 낭송되었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란 제목의 추모시를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절절한 추모의 뜻을 담아냈습니다.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
고마워요, 노무현 
아무런 호칭 없이 노무현이라고 불러도
우리가 바보라고 불러도 기꺼이 바보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아, 그러다가 거꾸로 달리는 미친 민주주의 기관차에서
당신은 뛰어내렸어요, 뛰어내려 으깨진 붉은 꽃잎이 되었어요
꽃잎을 두 손으로 받아주지 못해 미안해요
꽃잎을 두 팔뚝으로 받쳐주지 못해 미안해요
꽃잎을 두 가슴으로 안아주지 못해 미안해요
저 하이에나들이 밤낮으로 물어뜯은 게
한 장의 꽃잎이었다니요!···당신이 일어나야 한반도가 일어나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아아, 노무현 당신!




이어서 김진경 시인은 <노무현 살아오소서>라는 추모시에서 “바보 노무현, 그 작고 아름다운 상식이 꽃피는 나라로 살아오소서, 우리가 반드시 이룰터이니 그 아름다운 나라로 다시 오소서”라고 슬픔을 토로했습니다.

노무현 살아오소서

....아, 외로운 노무현

그 작고 아름다운 상식을 위한 싸움이야말로
가장 외롭고 힘든 싸움이라고
그 토닥이는 손길로 우리 다독이며 다시 살아오소서....



진혼무가 끝나고 안숙선 명창의 추모창이 이어졌습니다. 임방울 명창이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을 애도하여 창작한 <추억>이란 노래입니다. 가슴을 후벼 파는 진양조의 비통하고 애절한 가락이 서울 광장을 울렸습니다.

추억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데
님은 어디로 행하시는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려던가
그리 쉽게 가려거든 당초에 오지나 말 것을
왔다 가면 그냥 가지
모든 터에다 당신 이름을 두고 가면서
모두에게 슬픔만 남기고 가네.....



이어 도종환 시인이 “고인의 조각난 육신으로 정의로운 것들이 하나가 되고 뉘우치고 용서하고 화합해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는 멘트와 함께 추도 묵념을 이끌었습니다.


묵념이 끝난 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유서를 쪽방촌 출신의 사회복지사이며 시인인 정시아 님이 낭독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화장해라···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유서 낭독과 함께 대형 화면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전 영상이 펼쳐졌고, 시민들은 또 다시 눈물지었습니다.


노제의 절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즐겨 불렀던 <사랑으로>가 영상화면에서 육성으로 울려퍼진 순간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동안에 할 일이 또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란 가사가 흘러나오자 광장은 온통 눈물 바다를 이뤘습니다.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합창을 했습니다.



권양숙 여사와 아들 노건호 씨, 딸 노정연 씨도 눈믈을 쏟아냈으며, 시민들은 잔디밭에 주저앉아 목 놓아 통곡하기도 했습니다.

합창을 끝낸 시민들은 한 목소리로 “노무현 대통령 당신을 사랑합니다”고 외쳤습니다.
노제가 끝난 뒤 대다수의 시민들은 안치환씨와 우리나라와 함께 <상록수>, <아침이슬>,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의 노래를 부르며 운구행렬을 따라 서울역으로 걸었습니다.
 



노제를 끝내고

나중에 기사를 보니 노제가 진행되는 동안 하늘에 채운이 떴다더군요.

채운(彩雲)이란?
 
여러 빛깔로 아롱진 고운 구름. 구름을 이루는 물방울이나 얼음 결정에 빛이 회절되어 고운 빛깔로 물들어 보인다. 
채운은 아름답기 때문에 서운(瑞雲), 경운(景雲), 자운(紫雲) 이라고도 하며, 큰 경사가 있을 징조라고 알려져 왔다.  




저는 보지 못했지만 정말 평생에 몇 번 보기 힘들다는 오색 채운이 어렸다면, 아마도 하늘에 우리의 정성과 슬픔이 알려졌나 봅니다.


노제를 마치기까지 수십 명의 스탭들은 끼니도 거르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순간순간 발생되는 어려운 상황을 돌파해 가며, 그야말로 전쟁 같은 준비 과정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모든 출연진들과 사회자들도 점심까지 굶어가며 훌륭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주었습니다. 전 그들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구름 같이 몰려 와 뙤약볕에서 질서 정연하게 노제가 끝나기까지 함께 해주시고, 자발적으로 광장청소까지 해 주신 수많은 시민여러분, 각자의 집에서 회사에서 길거리에서 영결식과 노제를 시청해 주신 수많은 국민 여러분. 그 분들의 뜨거운 애도와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에 노제는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이들에게 뜨거운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마 고인도 하늘에서 모든 분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보내고 계실 겁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국민 여러분,
모두모두 감사해요!
모두모두 사랑해요!    
 






TRACKBACK 38 AND COMMENT 428

노무현 전대통령의 사망 직전 정황에 대한 의문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경호원은 1차 진술에서 담배에 관한 대화를 소개한 뒤,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하시길래 부엉이바위 주변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노 전 대통령이 투신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랬다가 "정토원으로 대통령의 심부름을 다녀오는 사이, 이미 부엉이바위에서 사라졌다"고  번복했고, 3차 진술에서 "부엉이바위 쪽으로 등산객이 접근해서 이를 제지한 뒤 돌아보니 대통령이 투신했다"고 계속 말을 바꾸고 있습니다.


경호원의 1차 진술에 의존해서 <노 전대통령,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의 의미>란 글을 써서 30만 명이 넘는 방문객을 맞은 저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글의 핵심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그 분의 마음 속에 들어 있던 것은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었다 해석이었고, 많은 분들이 그 해석에 애도와 공감을 표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칫하면 "하지도 않은 말을 가지고 고인을 미화했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게 됐습니다.  

게다가 장례준비위원회로부터 영결식 총감독 대한 제의를 받고, 5월 29일에 거행되는 전체 영결식의 컨셉을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로 잡자고 제안해서 동의를 받고, 그 컨셉에 맞춰서 시청 앞 광장에서 거행되는 "노제 문화행사"의 틀을 짜느라 10여 명의 기획연출팀들과 연 이틀 밤을 새다시피 하고 있던 저로서는 대단히 난감한 소식이었습니다.


아직 수사가 계속되고 있고, 경찰의 부실한 수사에 대한 전국민의 혼란과 분노 거세어지고 있기 때문에 결론이 어떻게 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로서는 만약 노 전대통령께서 경호원과 '사람'에 대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저의 글과 영결식의 컨셉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시급한 고민거리가 된 것입니다. 

잠을 못이루고 새벽까지 뒤척이며 제가 내린 결론은 "만약 경호원과 그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더라도, 그 분의 가슴속에 남은 마지막 말은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일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분은 "저기, 바람이 부네!", 또는 "저기, 새가 나르네!", 또는 "저기, 구름이 떠가네!"보다는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라는 말이 훨씬 더 어울리는 삶을 살아왔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언제나 "사람 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몸을 바쳤고, 싸웠고, 분노했고, 도전하며 살아오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비전이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비판과 비난과 조롱과 저주에도 꿋꿋이 버터 오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겸손한 존중심과 높은 윤리관과 엄격한 도덕율이 있었기에, 그 드높은 이상에 상처를 입힌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부엉이바위 아래 몸을 던지신 겁니다.



그런 분이 몸을 날리기 전에 '사람' 말고 다른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대화를 했건 안했건 전 그 분의 마지막을 그렇게 상상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저의 지극히 감상적인 상상이라고 비난하시면 그 비난 고스란히 받겠습니다. 

사실이야 어떻든, 저의 가슴 속에 담긴 그 분의 마지막 말은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영결식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적 주제어로서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노 전대통령께서 몸을 던져 우리에게 마지막 남기신 화두는 바로, "사람!"입니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빌며, 고인이 평소에 가장 즐겨 부르신 노래인 해바라기의 <사랑으로> 가사를 고인의 영전에 바칩니다.

사랑으로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불이 타는 가슴 가슴 마다 햇살이 다시 떠 오르네
아~~영원히 변치 않은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불이 타는 가슴 가슴 마다 햇살은 다시 떠 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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