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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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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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0.04.24
    소릿길을 받쳐준 '고수' 한평생, 김득수 명인 (8)
  2. 2009.08.30
    지리산의 겨울, 판소리와의 기이한 인연. (23)
  3. 2009.08.12
    「봄봄」김유정의 혈서 '녹주, 너를 사랑한다!' (38)
  4. 2009.08.08
    평생 인연 맺어진 첫 직장「뿌리깊은 나무」 (26)
  5. 2009.05.15
    나의 스승 박초월 명창 생각하니 눈물난다 (16)
그동안 명인명창에 대한 이야기를  띄엄띄엄 올렸는데 앞으로는 좀더 자주 전에 제가 발표했던 명인명창에 대한 글들을 손질해서 올려볼까 합니다. 그래서 '명인명창 이야기'라는 카테고리도 만들었습니다. 
아마 네티즌들에게는 생소한 분들이 많고, 내용도 그리 흥미롭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미래의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스피어에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 끝에 시작합니다. 오늘은 지난 번에 소개한 박동진 명창과 단짝이 되어 북 치는 '고수(鼓手)' 이름을 날린 김득수 명인입니다. 

“이 쌔려 죽일 놈아, 북 좀 잘 쳐라.”
“그렇지!”
“눈 구녁을 쑥 뺄 놈이 대답은 잘 허는구나.”
“암먼.”
“정신 똑바로 차려, 이 발꼬락을 지질 놈아.”
“좋다!”

누가 들으면 당장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멱살을 잡고 덤벼들 욕설에 고수가 “그렇지!”, “좋다!”, “얼씨구!", "암먼!” 하면서 넉살좋게 받아내는 일이 소리판에서는 곧잘 벌어집니다.

욕 잘 하고 음담패설 잘 하고 재담 잘 하는 소리꾼한테는 고수가 곧잘 재담의 희생물이 되는데, 어떤 고수는 소리꾼이 자기에게 욕을 하거나 재담으로 놀리는 것을 싫어하여 대꾸를 안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김득수 명인은 소리꾼과 재담을 나누는 것을 즐겨했던 고수입니다. 특히 그의 오랜 벗으로 평생을 소리판에서 함께 지내온 박동진 명창과 소리판을 벌일 때에는 두 사람의 호흡이 척척 맞아 떨어집니다.

“아이구, 저 놈이 발뒤꿈치에 감기가 걸려서 북을 잘 칠랑가 모르겠네.”
“소리만 잘혀 봐, 북이 저절로 쳐지지”
“오냐, 내 아들놈아”
“그렇지!”

이런 재담 덕분에 소리판은 생기가 넘치고 훨씬 재미있어집니다. 이것은 그가 재담을 꾸미고 받아넘기는 솜씨가 뛰어난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고수는 소리꾼을 받쳐주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예술관에 철저한 탓이기도 합니다. 

“북은 장단을 정확하게 짚어서 시끄럽지 않고 조용하게 소리를 받쳐주어야 하는 법이여. 차가 잘 다닐 수 있도록 길을 잘 닦아야하는 것 처럼 북이 장단과 추임새로 소릿길을 닦아 주어야 혀.
소리가 나가다가 구렁에 빠질라고 허면 얼씨구 하고 추어주어서 빨리 지나가게 허고, 슬플 때는 북가락도 줄이고 추임새로 슬프게 분위기를 맞춰서 넣어 주고, 소리가 웅장할 때에는 북소리도 크고 추임새도 크게 하게 하고, 바쁘게 주워 섬길 때는 또 그런 분위기를 내주어야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청중들이 즐거워하도록 분위기를 잡아 주는 것이 중요혀. 그래서 나는 기회만 있으면 소리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한테 소리를 잘하고 못 하고는 청중들한테 달렸다고 허지. 소리꾼이 소리 잘 하도록 실컷 추어주고 받쳐줘라. 그래서 일고수 이명창이 아니라 ‘일청중 이고수 삼명창’이란 말은 내가 만들어낸 말이여.”

위에 소개한 말의 앞부분은 「서편제」에서 유봉이 아들에게 북을 가르치면서 호통을 치는 대사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렇듯 그가 철저하게 소리꾼을 받쳐주는 고수의 역할을 주장하게 된 데에는 본래 북보다 소리를 먼저 배운 그의 경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에서 김행원의 7형제 중 다섯째 아들로 1917년 7월 17일에 태어났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취미로 말도 기르고 진돗개를 길러 사냥을 즐기던 그의 부친은 정초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북, 장고, 징, 꽹과리로 풍물을 칠 때에나, 모를 심으면서 상사 소리를 할 때에는 언제나 으뜸가는 북잽이로 나설 만큼 북춤 추는 솜씨가 뛰어났고 판소리 북도 곧잘 치던 멋쟁이였습니다. 게다가 그의 집 뒤에는 조선시대 음악인들의 모임 장소라 할 수 있는 '신청(神廳)'이 있어서 노래 소리와 악기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집안과 마을의 음악적인 분위기에 흠씬 젖어서 자란 그는 진도보통학교에 다니던 일곱 살 무렵부터 채두인이라는 진도 소리꾼에게 남도민요와 육자배기와 판소리를 배우러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시골의 명창에게 깊은 판소리를 배우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열세 살 무렵에 집을 떠나 전남 목포에 있는 권번을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소리 선생으로 있던 오수암이란 젊은 명창에게 귀동냥으로 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영광군 법성포에 있는 명월관의 초빙을 받아 그곳의 여자들에게 소리를 가르쳐 주는 강사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니까 귀엽고 예쁘고 목이 좋아서 소리도 듣기 좋으닝게 여자들한티 인기가 대단혔지. 그 덕에 한참 동안 요정 소리 선생으로 떠돌아 다닌 세월이 시작됐어.”

그곳에서 3년쯤 지난 뒤에 부산으로 가서 김광월이라는 여자 명창을 수양누이 삼아 그의 집에서 지내다가, 경북 경주군 감포읍의 달성관이라는 요정 주인에게 붙잡혀  그곳에서 2년간 소리선생 노릇을 했습니다.

그 뒤 울산 권번에 6개월쯤 있다가 경주 권번에서 1년쯤 지낼 적에 그곳에서 가야금을 가르치던 박상근의 권유로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박상근 씨는 가야금의 인간 문화재이신 성금연의 스승인데 참말로 가야금 잘 타신 명인이었어. 그 박상근 선생님하고 김천에 있는 명월관에 들렀지. 박동진이가 그곳에서 소리를 가르치고 있길래 같이 가자고 해서 셋이 상경을 했어.”

스물을 갓 지난 두 젊은 소리꾼은 ‘조선 성악 연구소’의 대명창 선생 밑에서 공부를 하며 명창에의 꿈을 키워 나갔습니다.

선생님들이 창극 단체를 꾸며 일 년 동안 조선 팔도와 만주 지방을 순회 공연 다닐 때에는 함께 따라다니며 무대 경험과 소리의 기량을 한껏 넓혀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풍성함은 잠시뿐이었고 곧이어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젊은이들은 징용이나 징병으로 끌려가고, 순사의 검문 검색은 나날이 심해지는 불안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때 징병 안 갈라고 죽을 고생했어. 공연을 해도 작품을 일본말로 해야 돼. <흥보전>을 할 때에는 흥보자식들이 일본에 충성하러 즐겁게 군대에 간다는 내용을 넣어야 했어. 그러다가 창극단에서 나와 연극 단체를 따라 다니기도 했지.”

징병에 끌려 갈 위험이 닥치자 박동진 명창과 함께 경남 도운과 위문단에 끼여서 공연을 다니던 중에 부산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쉴 새 없이 팔도를 떠돌아 다니느라 결혼할 엄두조차 못 내다가 해방되기 한 해 전 스물여덟 살에 늦장가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새색시와 신혼 생활의 재미도 채 나누지 않고 해방이 되자마자 목포로 가서 ‘진도 창극단’을 만들어 면면촌촌을 다니며 판소리와 민요와 토막창극을 들려 주며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김연수 명창이 창극단을 만들자 그곳에 가담했다가 그 단체가 해산된 후 김소희, 박후성 명창과 함께 ‘국극협단’을 창설하여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단체를 따라다니며 정처없이 떠도니 집안을 돌볼 수가 있어야지. 그러니 번번이 아내가 떠났어. 자식이 오 남매가 있는데 다 어미가 달라. 내가 스스로 지은 죄가 있으니 떠난 사람을 원망을 안 혀. 그때에는 아무튼 창극 단체 꾸미고 운영하는 데에만 온 정신이 팔려 있었응게.”

광주에서 단체를 재조직하려고 뛰어다니다가 실패하여 방황하고 있던 그는 서울에 올라와서 김연수 명창과 손을 잡고 단체를 만들어 다시 떠돌아 다니게 되었습니다.

“대구서 임춘앵 여성 국극단하고 경합이 붙어 동아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판인데 사람이 수없이 몰려와서 대만원을 이뤘어. 이제 그동안 진 빚을 갚을 수가 있겠다고 좋아하는 판인데 하루 공연하고 나니 그 이튿날 새벽에 6.25가 터져버렸어. 단원들하고 거지 생활이 시작됐지.”

대구에서 김해극장으로 옮겨서 피난민 위안 공연을 할 때, 낙동강 작전으로 함안 지방의 17만 인구가 김해로 피난을 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통해 거처할 방마저 구하기 힘들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비어 있는 어느 장삿집에서 여배우들과 함께 물장사를 하며 어려운 피난 생활을 보낸 그는 전쟁이 끝나자 단원들을 데리고 부산을 거쳐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단체 만들어 다닌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여. 작품을 만드는 일도 어렵고, 극장 잡고 사람 모으는 일도 어렵고, 허가 받고 지방 돌아다니는 일도 어려워. 그 중에서 지방 건달이나 한량들 텃세 막아내는 일이 가장 어려워. 어딜 가나 단체가 가면 괜히 시비 걸고 여배우들 집적거리는 건달들이 있는디 그런 사람들하고 싸움이 벌어지면 으레 내가 도맡아 나섰지.”

그는 한창 때에 양손에 칼을 들고 팬티바람으로 수십 명하고 싸운 전력으로 ‘진도 쌍칼’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건달 세계에서 알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평소 때는 사람 좋고 너그럽다가도 국악인을 천대하고 괴롭히는 사람만 만나면 무섭게 돌변해서 '박치기로 받아 버리고 사정없이 쥐어패는' 통에 국악계에서는 의협심과 인정으로 뭉친 사나이라는 칭송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의협심은 70년대에 국악협회가 뇌물과 공금 횡령과 기생 수출로 벌집 쑤셔 놓은 꼴이 되었을 때 여지없이 발휘되었습니다. 그는 권력자들의 위세에 눌려 바른 말을 못 하던 국악인들의 대변자가 되어 이사장과 간부들을 몰아내고 협회를 혁신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그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소리꾼을 뒷받침하는 단체의 기획이나 고수 노릇을 많이 하고 벌어들인 신망의 덕도 또한 컸습니다.

“난 본래 소리꾼으로 출발했는디 소리꾼으로 대성 못 허고 고수로 돌았지. 그것은 소리공부할 때에 한성준, 정원섭, 김재선 같은 북의 대가들에게 북을 함께 배운 받침이 있어서 단체에서 소리꾼보다 고수 노릇을 많이 하다 보니 지금은 북으로 인간 문화재가 되어 버렸지.”

한성준은 일제시대에 승무와 북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고, 정원섭 역시 판소리와 북에 통달했던 사람이고, 김재선 역시 북의 대가로 일세를 날린 사람입니다. 이들과 함께 공연을 다니며 배운 실력으로 어느덧 그는 북 치는 데에 아무도 따르지 못할 솜씨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소리하는 데에 잘 하고 못 하고 고비가 있듯이 북치는 데에도 잘 치고 못 치는 고비가 있어. 그저 또박또박 장단만 짚어서는 맛이 안 나. 고수는 반주자와 지휘자를 겸해서 소리가 험한 길로 가면 좋은 길로 가게 인도하고, 빠르면 느리게, 느리면 빠르게 음양을 맞추어 줄 줄 아는 데에서 제 솜씨가 나오는 거여.
소리도 마찬가지여. 선생에게 배운 대로 또박또박 박자 음정만 맞추는 건 진열장 소리여. 흉내 소리지. 거기서 넓힐 수도 좁힐 수도 없어. 옛날 선생들은 안 그랬어. 자유자재여. 흥이 안 나면 별 거 아니다가도 한번 흥이 나면 손님들이 앉았다 일어났다 어쩔 줄을 모르고,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떨려서 소리듣고 나면 온몽이 아플 정도여.
똑같은 음식도 간을 맞추는 데 따라 다르듯이 똑같은 선생한테 배운 소리도 제가 간을 넣어야 맛이 나는 거여. 선생을 뛰어 넘고 푹 솟아야 진짜 명창이여. 옛말에도 서당서 공부 잘 헌 놈은 붓장사 허고 공부 못 헌 놈은 영의정 헌다고 했어. 글만 많이 알아서 융통성없는 놈보다 흡글을 됫글로 말글로 섬글로 노적글로 풀어먹을 줄 아는 놈이 성공헌다는 말이지. 말허자면 창의성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여. 그런디 요새는 문화재 보호니 뭐니 해서 그런 창의성이 다 사라져 버리고 말었어.”

획일적인 문화재 전수 정책을 비판하는 그의 말투는 날카롭고 매서우면서도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배어 있어 듣는 사람도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단어 하나 장단 하나도 바꾸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전통의 보존이라는 문제와 예술적 창의력과 개성을 살려 새로운 시대의 전통예술을 창작하는 문제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야 할지는 우리 국악계 전체가 안고 있는 숙제인 것입니다.

국립국악원 자문위원, 한국 국악협회 이사로서 국악계의 든든한 대들보로 활동하던 그는 제자들과 자식들과 그를 좋아하여 끊임없이 찾아오는 후배들에 둘러싸여 외롭지 않은 말년을 지내다가 1990년 5월 21일에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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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쯤 당진의 가을바다를 서성이던 저는 겨울이 되자, L의 하숙집을 떠나 지리산으로 갔습니다.

 



그때의 심정은 죽을 때 죽더라도 지리산 <상선암(上禪庵)>에서 죽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상선암은 구례읍 부근에 있는 <천은사(泉隱寺)>의 부속 암자인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독서모임인 고전독서회의 여름 수련회를 갔던 곳입니다.

폐허가 된 절간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예쁜 여학생들과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고, 구들장이 여기저기 망가진 절의 방에 누워, 깨어진 기와지붕 위로 반짝반짝 빛나던 별을 바라보며 하룻밤을 지샜던 추억이 너무도 그리워 무작정 그곳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옷가지와 책 몇 권이 든 가방을 들고 구례에서 버스 타고 천은사에서 내린 다음, 눈 쌓인 지리산의 중턱에 자리 잡은 상선암까지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기어' 올라갔습니다.

말끔하게 새 단장이 된 암자까지 숨이 턱에 차서 간신히 다다른 저는, 툇마루에 앉는 순간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상선암>의 최근 모습. 정면의 툇마루가 기절했던 곳이고, 오른쪽 뒤꼍에 제가 묵었던 골방이 있습니다.

깨어나 보니 따뜻한 방안에 이불까지 덮고 누워 있더군요. 머리맡에 두 청년이 앉아 있다가 제가 눈을 뜨자 한 청년이 급히 물그릇을 주며 “이거 꿀물이니 드시쇼!” 하는 것이었습니다. 

꿀물을 먹고 나니 또 한 청년이 “몸을 바로 누워 보쇼!”하면서 온몸 여기저기 지압을 해 주었습니다.

꿀물 준 W는 벌을 치는 청년이었고, 지압을 해준 H는 중국무술인 십팔기의 고단자였습니다. W는 벌통을 상선암 근처에 풀어 놓고 있었고, H는 무술 수련한다고 암자에 묵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암자에는 스님은 안 계시고 중년의 '여보살'이 관리하고 있었고, 김씨라 불리는 늙은 ‘불목하니’ 영감님이 나무, 청소, 불때기와 같은 잔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사정을 들은 그들은 저를 따뜻하게 거두어주었습니다. 마침 보살님의 아들이 고등학교 시험을 볼 때라 저는 가끔씩 아들 공부를 가르치며, 공짜로 몇 달 동안 맛있는 절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저는 중국 무술의 소림권, 무당권, 태극권, 팔괘장, 내공, 외공, 단전호흡, 장풍, 팔단금법 등의 현란한 세계를 알려 주는 H의 말에 푹 빠졌습니다. 

저는 그 전부터 무협소설과 무협영화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특히 김용이나 와룡생 같은 작가들이 펼쳐 주는 무림의 세계는 제게 황홀하기 그지없는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여 주었습니다.

그 중 지금도 잊지 못하는 최고의 무협영화는 「유성호접검(流星胡蝶劍)」이었습니다. 김용과 더불어 무협소설의 대표 작가인 고룡의 원작 소설을 각색해 만든 그 영화는 음모와 배신, 그리고 남녀 간의 아름다운 사랑이 정교하게 얽혀 있는 무협영화의 고전입니다.

대학 1학년 방학인지 2학년 방학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친구와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다른 무협영화가 짜장면이라면 「유성호접검」은 탕수육이다!”고 감탄하며, 중국집에서 빼갈을 실컷 마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제가 좋아하는 고룡의 작품 중에 「초류향」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풍류와 여자와 도박을 즐기는 무림고수 초류향과, 냉정하고 현실적인 희빙안, 고독하고 말이 없는 살수 일점홍 등이 중원과 사막을 종횡하며 대마두(大魔頭)와 벌이는 서사적 이야기는 저를 사정없이 매혹시켰습니다.

이렇듯 무림과 무공에 대한 사전 준비가 되어 있던 터라, 저는 말솜씨 좋은 H가 들려주는 무술과 관련된 과장된 경험과 온갖 무술가, 도사들의 이야기에 도취하였습니다.

또 그가 스승의 비밀 금고에서 훔쳐내어 몰래 베꼈다며 비밀스럽게 보여주는 <내공비급(內功秘及)>을 베끼며, 언젠가 나도 ‘장풍’을 날리는 무림의 고수가 되겠다는 허황된 꿈을 키웠습니다.

암자의 골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호흡을 하고, 향을 피우고, 밤에는 암자 마당에서 H가 가르쳐주는 소림권의 기초 동작들을 익혔습니다.

십팔기를 가르쳐 준 H와 구례읍의 사진관에서 찍은 기념 사진.

그런데 거기서 판소리와의 기이한 인연이 또 이어졌습니다. 처자도 없이 상선암에서 산지 몇 년이 된 불목하니 김씨 할아버지가 북도 잘 치고 젊었을 때 판소리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해 여름, 김제국악원에서 처음으로 판소리를 들은 뒤 자나깨나 판소리에 심취해 있던 저에게, 그 소식은 귀에 번쩍 뜨이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할아버지께 판소리 좀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저녁 먹고 자기 방으로 오라고 해서 우리 셋은 할아버지 방에 모였습니다. 할아버지 방에는 이부자리 한 채와 옷 몇 가지, 그리고 낡은 북 하나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풍년초' 담배 잎을 종이에 말며 말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구식 노래는 배워서 뭐 할라고 그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할아버지는 중머리 북 장단도 가르쳐 주고, 심청가 한대목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맑은 공기에 따뜻한 절밥을 배부르게 먹고, 벌꿀과 로얄젤리도 가끔씩 얻어먹고, 친구들과 더덕을 캔다고 산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단전호흡과 기공으로 몸보신을 하니 몸이 점점 좋아졌습니다.
 
처음 올 때는 죽을 힘을 다해 기어 올라왔던 산길을, 나중에는 천은사에서 상선암까지 단숨에 오르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산길을 오르내리면서 우리는 고래고래 판소리를 불러댔습니다.

그러던 중 구례에 단소의 명인이 살고 계시다는 소문을 들은 우리는 지체 없이 그 분을 찾아나섰습니다. 구례읍내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산길을 물어물어 걸어 간 끝에, 절골 마을에 사는 김무규 명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대단한 고대광실이었을 퇴락한 기와집에 살고 계셨던 김무규 명인은 단소와 북과 거문고의 명인이셨습니다.

그러나 지주이며 양반댁 엘리트 출신이고, 그의 부인 역시 한말의 대학자이며 일본의 침략에 항거해 자결하신 매천 황현의 손녀이실 만큼 명문가의 자제라는 지위 때문인지 직업적인 연주 생활은 안 하신 분입니다.

백경 김무규 명인(1908~1994)의 연주 모습.

다만 그의 단소는 전설적인 단소의 명인인 전추산에게 배웠기 때문에 매우 귀한 가락으로 평가 받습니다.

호리호리하고 깐깐하게 생긴 명인은 가지고 간 꿀 한통을 드리며 단소를 배우러 왔다는 산 청년들에게 퉁명스럽게 첫마디를 꺼내셨습니다.

“이 어려운걸 뭐 하러 배우려 하는가?”

그러면서도 먼 길을 걸어 온 정성이 갸륵했던지, 다음에 한번 찾아오라고 허락을 하셨습니다.

며칠 뒤에 다시 찾아가니 집 뒤에 있는 대나무 숲에서 대를 잘라 단소 세 자루를 만들어 놓으셨다가 선물로 주며, 단소 부는 법의 기초부터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제가 판소리에 관심이 있는 걸 아시고 김소희 명창이 여름이면 제자들과 함께 자기 집에 연습을 하러 오기도 한다고 하시며, 명창들과 관련된 옛날 얘기를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아쉽게도 그 분에게 몇 번 밖에 단소를 배우지 못하고, 몇 달 뒤에 복학해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연은 끊어지지 않아 나중에 어느 잡지에 그 분의 이력을 소개하는 인터뷰 기사도 쓰고, 인간문화재가 되신 뒤 「서편제」 촬영할 때 그 분을 임권택 감독에게 소개해서 절골의 퇴락한 기와집과 대숲이 멋지게 등장하고, 새하얀 한복을 입고 거문고를 치는 그 분의 모습도 영상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영화가 개봉된 지 얼마 뒤에 돌아가셨으니, 아마 「서편제」가 그 분의 마지막 연주를 담은 필름이 되었을 겁니다.

판소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 김제국악원의 여자명창과 지리산 상선암의 불목하니와 구례의 김무규 명인이 차례로 제 인생에 등장하더니 마침내 다음해 겨울에 박초월 명창과의 만남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상상도 하지 않았던 판소리와의 인연이 마치 누군가의 연출로 한 장면 한 장면 이어지듯, 제 인생의 무대에 펼쳐진 것입니다. 전 지금도 그 기이한 인연에 신기해하며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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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올린 <평생 인연 맺어진 첫 직장「뿌리깊은 나무」>란 글 중에 박록주 명창에 대한 짧은 에피소드를 소개했었습니다.

그때 이미 80세가 넘은 나이로 병마와 싸우고 계셨던 노명창은 제자의 발표 무대에 격려사를 하기 위해 제자들의 부축을 받고 무대 위로 올라섰습니다.

“내가 소리를 한지 한 60년이 되어 가는데, 이제 조금 귀가 뚫리려 하니까 숨도 차고 곧 골로 갑니다.”

하시더니 지팡이를 짚고 앞줄에 앉아 있는 노인들을 죽 바라보면서 농담을 했습니다.

“내가 어려서 소리할 때 자주 오셨던 저 분들도, 인제 나와 함께 골로 가게 생겼네요.”

그러자 앞에 앉은 노인 몇 분이 “얼씨구!”하면서 소리쳤습니다.

“지금 내가 숨도 차고 목도 안 나오고 해서 소리를 하러 나온 건 아니지마는, 우리 제자 길을 닦아주기 위해서 잠깐 단가 한 마디 하고 내려갑니다.”

관객의 박수와 함께 노명창의 노래가 시작되었습니다.

백발이 섧고 섧다
백발이 섧고 섧네
나도 어제 청춘이더니
오늘 백발 한심하다



그 이야기를 쓰면서 박록주 명창에 대해 따로 포스팅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박록주 명창은 남달리 비극적인 개인사와, 『봄봄』, 『동백꽃』의 작가인 김유정이 격정적인 사랑을 바친 여인으로서 유명한 일화를 남긴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박록주(朴綠珠) 명창은 1905년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친 박중근은 집안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노름과 술로 세월을 보낸 한량이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12세 때, 고향에 판소리나 춤이나 줄타기 등의 갖가지 전통예술을 보여주는 순회 공연단체인 <협률사>가 들어왔습니다. 

박록주의 부친이 그 공연 중 판소리 명창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돈도 제일 많이 버는 것을 보고서, 평소 목소리가 우렁차고 노래를 잘 부르는 박록주를 명창으로 길러 돈벌이시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 손에 억지로 이끌려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박기홍 명창의 문하에 들어가서 소리 공부를 한
 박록주는 얼마 뒤부터 경상도 곳곳에 불려다니며 판소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생기는 족족 그의 부친이 놀음값과 술값으로 써버렸다고 합니다. 

그녀는 다시 부친의 손에 끌려 대구로 가서 기생 수업을 받습니다. 당시 그녀는 소녀 명창으로 이름이 알려져서 하룻밤 초청료로 10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쌀 한 가마니가 50전 할 때의 일이니 대단한 수입이었죠. 

그 뒤 17세 되던 1921년에 원산 명창대회에서 만난 남백우와 혼인을 하여 첩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독립지사였다는 남백우는 박록주의 재능을 높이 사서 "그대의 목소리는 만인의 것이 되어야 한다."며 그녀를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1922년, 박록주는 서울로 가서 당대 최고의 명창인 송만갑에게 판소리를 배웠습니다. 그 이후 눈부신 활동을 하며 전성기를 보내던 1928년 봄, 그녀는 '운명의 스토커' 김유정을 만나게 됩니다.
 



김유정이 박록주를 처음 만난 것은 지금의 휘문고등학교인 휘문고보 4학년 때였습니다. 그들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박록주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이후 김유정은 박록주의 공연에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사랑을 호소하는 편지를 띄웠으나 번번이 무시되었습니다. 그러자 김유정의 연정은 점점 불타 오르기 시적했습니다.

그는 그녀의 집에 찾아가 적극적으로 사랑을 호소하였습니다. 호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혈서로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하고,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패기와 열정에 넘치는 구애이기는 하였으나, 제가 보기에도 정상을 넘어 선 그의 구애 방식은 여성의 사랑을 얻기엔 너무도 일방적이고 서투른 것이었다고 보여집니다.

게다가 김유정보다 3살이나 나이도 많고 기생 신분이었던 박록주는 끝끝내 그의 사랑을 거절합니다. 박록주 명창은 늘그막의 인터뷰에서 막무가내로 집에 찾아 와서 사랑을 고백하는 김유정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합니다.
 


무슨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편지질이오?
학생이 기생과 무슨 연애를 하자는 말이오?
학생이 이러면 나도 가슴이 아프오.
공부를 끝내면 다시 나를 찾아 주시오.

(박록주 명창의 회상기 <여보, 도련님 날 데려가오>에서)



김유정은 1908년 지금의 강원도 춘천군 신동면 증리인 실레마을에서 부친 김춘식씨의 2남 6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내노라 하는 부농이었지만 유정이
7살 되던 해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뜨고, 그 2년 뒤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가장이 된 형은 잦은 난봉과 가정 폭력을 서슴지 않아 잡안의 재산은 탕진되고, 유정은 갈 곳도 없어 삼촌에게 얹혀 지내게 되는데,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던 청춘 시절에 박록주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하루도 빼지 않고 보낸 그의 편지는 되돌려지거나 찢어지거나 불태워지고, 사랑을 얻지 못한 그는 깊은 절망과 좌절에 빠집니다.

1929년 3월, 휘문고보를 졸업한 김유정은 연희 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지만 두 달 여만에 제명 당하고 맙니다. 그 무렵에도 그는 박록주에게 계속 연애편지를 보내고, 끈질긴 구애를 계속합니다.

김유정은 혈서와 협박과 애원으로 가득한 거의 스토커에 가까운 열렬한 구애를 3년 동안이나 계속합니다. 그러나 박록주는 끝끝내 김유정을 차갑게 대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당시의 조선극장 지배인 신모씨와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1929년 3월, 박록주는 여전히 자신을 갈취하며 괴롭히는 부친에 대한 원망과, 자신을 배신한 신씨와의 애정관계를 비관하여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김유정 못지 않게 박록주도 외로움과 격정에 시달리는 성격이었던 모양입니다. 

박록주가 자살에서 깨어나니 김유정이 병실에서 머릿맡을 지키고 있었다는군요. 그렇다고 그녀의 마음이 돌아서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1930년 여름, 마침내 김유정은 박록주의 사랑을 얻는 것을 포기하고 실레마을로 돌아옵니다. 얼마 뒤 1931년에 박록주는 경제적으로 그녀를 후원하는 김종익과 재혼하였습니다.

사랑을 잃은 김유정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한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폐결핵 등의 병을 얻은 뒤, 병과 가난에 시달리며 
소설쓰기에 매진합니다. 

드디어 1935년 『따라지 목숨』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1등으로 당선되고 『노다지』가 중앙일보에 가작으로 당선된 뒤
,『봄봄』,『금따는 콩밭』,『만무방』같은 작품들을 발표하였고, 1936년에도『동백꽃』,『봄과 따라지』,『슬픈 이야기』등을 연이어 발표하여 뛰어난 소설가로 유명해지고, 이상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과 교류도 하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19
37년 3월 29일 김유정은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삼십여 편의 작품을 남겨 놓은 채, 아내도 없고 슬하의 자식도 없이 홀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편 박록주는 해방 후 김소희, 박귀희 등의 여류 명창들과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6. 25 때는 월북을 강요 당하기도 했으며, 전쟁통에 한쪽 눈을 실명하여 그 뒤로 검은 안경을 쓰고 다녔습니다. 



그녀는 음반 취입이나 무대 공연 등으로 많은 돈을 벌기도 했지만 돈이 생기면 모두 써버리는 성격 탓에,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
늑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강렬했던 그녀의 눈빛도 차츰 빛을 잃어갔습니다. 

남편도 없고 슬하의 자식도 없이 외롭고 가난하게 살며
셋방을 전전하던 박록주는 1979년 면목동의 단칸방에서 홀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유정이 죽은 뒤 남겨진 일기장에는 '녹주, 너를 사랑한다!' 혈서가 발견되었다고 하네요.

김유정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자신을 잊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은 박록주 명창은 훗날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아마 내가 그이에게 너무 박절하게 대했던 벌을 늦게 받아서 평생 가난하고 기를 거 없이 살았지 않았나 싶소.

그이가 그렇게 훌륭한 소설가인줄 알았더라면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보게 해 줄 것을 그랬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의 한 여인에 대한 집요한 짝사랑!

이승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홀로 쓸쓸하게' 세상을 뜬 두 분의 죽음은 너무도 닮았습니다. 아마도 저승에서 뒤늦은 사랑을 나누며 외로움을 달래고 계시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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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후 일 년쯤 지난 1977년 3월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도 연극에 빠져서 ‘예술가 지망 백수’로 허우적거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장남이란 책임 때문에 연극을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열심히 취직자리를 알아보던 중,『뿌리깊은 나무』잡지사의 기자 공모 광고를 우연히 신문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몇 달 전에 서점에서 산 『뿌리깊은 나무』의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 어린 탐색이 제 취향과 딱 들어맞아서 애독자로 지냈던 터라, 주저하지 않고 서류를 내고 시험을 봤습니다. 다행히도 연세대학교 출신의 재원인 김인숙씨와 함께 합격해서 대망의 ‘첫 직장’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글 고치기로 '악명' 높았던 『뿌리깊은 나무』.

한창기 사장님을 비롯해서 윤구병 편집부장, 김형윤, 설호정, 강창민, 박종만, 김영옥 등 내노라하는 문장가들이 모여 있던 잡지사인지라 동료나 선후배들과도 즐겁게 지냈고, 취재하고 글 쓰는 기자로서의 일도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유일하게 싫어했던 일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필자들이 보내 온 원고를 손질하는 일이었습니다.

『뿌리깊은 나무』의 ‘글 고치기’는 글쟁이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습니다. 한글 전용, 가로쓰기, 지식인 언어와 민중 언어의 조화, 국어의 얼개와 어휘에 대한 탐구를 통한 편집과 교열―이것이 『뿌리깊은 나무』가 남의 글을 '마음대로 뜯어고치는' 당당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당대 이름난 문장가들의 글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사정없이 뜯어 고쳐져서 재조립이 되다보니 그런 일을 처음 당하는 필자들은 노발대발하고 원고를 집어 던지며 화를 냈습니다. 그래도 정성을 다해서 설명하면 대개는 누그러져서 포기하곤 했습니다.

글을 다듬어나가는 동안 문장 공부도 많이 하고 글에 대한 무서움도 알아 갔지만, 기본적으로 내 글을 쓰는 시간보다 남의 글을 다듬는 시간이 많다보니 일 자체에 대한 의욕은 많이 감소되었습니다.


나를 매혹시킨 <브리태니커 판소리 감상회>.

그 대신 회사에 대한 애정과 일에 대한 나의 의욕을 북돋워준 멋진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브리태니커 판소리 감상회>가 그것이었습니다.

칠십 명쯤 앉을 수 있는 1층 회의실을 임시 공연장으로 만들어, 일주일에 한 번씩 한 시간쯤 명창들을 초청해「춘향가」나「심청가」나「흥보가」나「수궁가」나「적벽가」의 완창을 무료로 감상하는 공연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완창이 서너 시간씩 걸렸기 때문에 한 작품 당 2회나 3,4회에 나누어서 진행되었습니다. 그 무렵에 조상현, 정권진, 성우향, 오정숙과 같은 쟁쟁한 명창들의 소리를 완창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소리북도 김명환, 김득수, 김동준 등 당대 최고의 고수들이 쳤으니 정말 귀하디 귀한 소리판이었습니다. 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 감상회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 중, 박록주 명창이 출연한 소리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무대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때 이미 80세가 넘은 나이로 병마와 싸우고 계셨던 노명창은 제자의 발표 무대에 격려사를 하기 위해 제자들의 부축을 받고 무대 위로 올라섰습니다.

젊은 시절, <동백꽃>의 작가 김유정의 짝사랑을 받아 유명세를 탔던 박록주 명창은 김소희, 박초월 명창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여류 명창이었다. 


“내가 소리를 한지 한 60년이 되어 가는데, 이제 조금 귀가 뚫리려 하니까 숨도 차고 곧 골로 갑니다.”

하시더니 지팡이를 짚고 앞줄에 앉아 있는 노인들을 죽 바라보면서 농담을 했습니다.

“내가 어려서 소리할 때 자주 오셨던 저 분들도, 인제 나와 함께 골로 가게 생겼네요.”

그러자 앞에 앉은 노인 몇 분이 “얼씨구!”하면서 소리쳤습니다.

“지금 내가 숨도 차고 목도 안 나오고 해서 소리를 하러 나온 건 아니지마는, 우리 제자 길을 닦아주기 위해서 잠깐 단가 한 마디 하고 내려갑니다.”

관객의 박수와 함께 노명창의 노래가 시작되었습니다.

백발이 섧고 섧다
백발이 섧고 섧네
나도 어제 청춘이더니
오늘 백발 한심하다 

노명창은 가만히 서서 조용조용 노래를 부르다가 중간에 부채를 좍 펼쳤습니다. 그러자 “얼씨구!”, “좋다!”하는 추임새로 객석이 요란하게 들썩거렸습니다.

노명창은 목이 메는 듯 노래를 다 마치지 않고 중간에 퇴장하셨습니다. 그녀가 퇴장한지 한참이 지나도록 객석의 박수와 함성소리는 요란했습니다.
 
노래 부르던 명창도, 그 노래를 듣던 올드 팬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청춘의 추억과 노년의 외로움과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회한에 잠겨 어쩔 줄 모르는 듯 했습니다.

29살의 어린 저 역시 무언지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가슴 속에서 차올라 눈물을 흘렸습니다.

무대도 없고 조명도 없고 병풍도 없는 그야말로 초라하고 벌거벗은 무대에서, 불편하기 짝이 없는 간이 철제 의자에 앉은 관객들과 예술가가 한 마음이 되어 인생과 영혼으로 교감하는 예술의 현장은 저에게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때 감상한 명창들의 소리와 소리판을 끌어가는 솜씨는 연극지망생이었던 저에게 오랫동안 소중한 자양분이 되어 주었습니다.

1974년부터 시작해서 1978년까지 약 백 회 동안 계속된 판소리 감상회는 한창기 사장이 아니면 생각해 낼 수 없는, 참으로 획기적이고 대담한 기획이었습니다.



그 감상회를 바탕으로 「브리태니커 판소리 전집」이나 「뿌리깊은 나무 판소리 다섯 마당」,「뿌리깊은 나무 산조 전집」,「뿌리깊은 나무 슬픈 소리」와 함께 주옥같은 음반들이 여럿 만들어진 것 또한 한 사장의 탁월한 안목과 기획력 덕분이라고 봅니다.




광대 노릇하려고 글을 배신하다니!

한창기 사장은 제가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한번은 〈숨어사는 외톨박이〉난을 맡게 되어 전라북도 전주에서 상여소리꾼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분의 삶을 취재하고 회사에 돌아오니 한사장님이 편집실에 들러 상여소리꾼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 보시다가 갑자기 “소리를 배운다니 상여소리도 할 줄 아나?”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할 줄 알죠.”
“한번 해 보게.”

한창 판소리에 열이 오른 새끼 광대였던 저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책상을 두드리며 「심청가」중 '곽씨부인 상여 나가는 대목'을 불렀습니다.

어너 어허너 어이가리 넘차 너화너
북망산이 머다더니 건너 앞산이
북망이로구나
어너 어허너 어이가리 넘차 너화너

느닷없는 소리판에 동료 기자들과 함께 한 사장님도 박수를 치며 무척 즐거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직장생활을 하는 중 저에게 병이 생겼습니다. 뼛속 깊이 스며든 ‘연극병’ 때문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마치 철창에 갇힌 맹수처럼 사무실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고, 우울증에 걸리고, 불면증에 소화장애가 오고, 연극과 판소리에 대한 갈증으로 가슴 속에 불길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결국 저는 일 년 만에 회사를 그만 두었습니다. 한사장님은 사직서를 들고 찾아 간 제게 농담처럼 “광대 노릇하려고 글을 배신하다니!” 하셨습니다.

연극병이 깊이 든 저의 귀에는 서운해 하신 말인지 격려차 하신 말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격려보다는 서운한 심정을 토로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생계의 위협에서 구해준 『뿌리깊은 나무

저는 잠시 배화여고의 독어 교사를 하다가 그 노릇도 그만두고 연극에 전념하게 되었는데, 그 결단의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생계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아선상(?)에서 헤매던 그 무렵의 저를 구해 준 것은 결국 『뿌리깊은 나무』와의 인연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번역도 하고 칼럼도 쓰며 연명을 하던 제게 『뿌리깊은 나무』 출판사의 객원 기자 노릇이 주어졌습니다.



「한국의 발견」 시리즈 중 〈전라북도〉 편을 맡아 이년 쯤 연명을 했고, 「뿌리깊은 나무 민중 자서전」 중 임실의 장구잽이인 신기남의 구술을 채록한「어떻게 허먼 똑똑헌 제자 한 놈 두고 죽을 꼬?」와 가야금 산조의 명인인 함동정월의 구술을 채록한「물을 건너 봐야 알고, 사람은 겪어 봐야 알거든」 편을 집필하며 연명했습니다. 다행히 그 일들이 끝날 무렵부터는 배우 일로 조금씩 출연료를 받은 덕분에 굶주림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한참 동안 연극과 영화 일로 분주히 보내느라 자주 뵙지 못하다가『뿌리깊은 나무』가 전두환 정권에 의해서 폐간당한 뒤 『샘이깊은 물』을 출판하고 있던 회사에 인사차 찾아갔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입은 양복을 이리저리 살펴보시더니 배우를 하려면 양복 입는 법을 알아야 한다면서 아메리칸 스타일과 유러피안 스타일의 양복이 어떻게 다른지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해 주고 나서, 나한테는 아메리칸 스타일이 어울릴 것 같으니 미국에 가게 되거든 꼭 “부룩스 브라더즈” 매장에서 양복을 사 입으라고 충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직까지 “부룩스 브라더스” 양복을 입어보지 못했지만 그 자상한 가르침을 언젠가는 실천할 생각입니다.

그 뒤로도 배우 노릇을 하기엔 너무도 한심한 저의 의상 감각에 대해 심히 염려를 해 주시고, 찾아 갈 때마다 세계 각국의 옷맵시와 관련된 지식을 전수해 주시곤 했습니다.

한번은 한국에 들어 와 있는 이태리 양복 매장을 소개한 뒤 『샘이깊은 물』의 편집장인 설호정씨와 편집 디자이너이신 이상철 선생에게 저를 데리고 가서 옷을 골라 주라고 지시(?)까지 했습니다. 그때 두 분이 골라 준 이태리제 캐주얼 황토색 윗도리와 곤색 바지가 어찌나 맘에 드는지 저는 단추가 떨어지고 허름해진 그 옷을 십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 즐겨 입습니다.

또「서편제」에서 제가 입고 나온 한복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손바느질로 한복을 만드는 여성에게 주문하여 정갈하게 만들어진 무명 한복 한 벌을 선사해주고, 한복 입는 법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해 주신 적도 있습니다.

그 뒤로도 종종 집사람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인사를 가면 본인이 아끼던 넥타이나 구두를 선물해 주시기도 하고, 어린 딸을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우리 말 교육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한창기 사장과의 끈질긴 인연

『뿌리깊은 나무』 잡지사 직원으로서의 인연은 일 년 밖에 맺어지지 않았지만, 한창기 사장과의 인연은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한창기 사장이 추구했던 우리말과 전통 문화에 대한 사랑에 저도 함께 심취했고, 그러한 일을 예술 현장에서 실천해 온 제 삶의 궤적과 맞물렸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좀 더 살아계셨더라면 제가 하고자 하는 일들에 대해 놀라운 식견으로 조언과 비판을 아끼지 않으셨을 텐데, 이승에 안계시니 아쉽고 그립습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1976년 3월 발행인 한창기, 편집장 윤구병 체제로 창간했다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폐간 당했다. 우리나라 잡지에서 처음으로 한글전용과 가로쓰기 편집을 했다. 서구의 문물을 소개하는 수준이던 70년대 지식인 사회에 한국적인 멋, 민중적 아름다움을 기조로 잡지 편집의 혁명을 가져왔다는 평을 받는다. 

발행인 한창기는 여느 국어학자보다 뛰어 난  재야 국어학자였고, 안목이 빼어난 문화재 수집가였고, 전통문화의 부활을 이끈 문화운동가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깊은 물』이라는 잡지의 편집인-발행인이었다. 『뿌리깊은 나무』가 태어난 지 21년 되던 1997년, 간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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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스승의 날만 되면 특별히 떠오르는 스승이 계십니다. 바로 저의 판소리 스승인 박초월 명창이십니다.                       .

박초월 스승과의 만남은 제가 대학교 3학년 학생이던 때였습니다.

눈이 펑펑 내리던 초겨울 어느 날, 군대 갔다가 휴가 나온 친구와 함께 비원 쪽으로 터덜터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다가 친구가 길가에 멈춰 서더니 간판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박초월 국악 전습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건물 4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친구는 김제에 있는 국악원에서 판소리를 조금 배웠고, 저는 그 친구 덕에 난생 처음 판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어 판소리에 심취해 있었기에 무조건 올라간 겁니다. 

북소리와 소녀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학원의 현관문을 기세 좋게 열고 들어간 친구가 
판소리를 몇 달 배웠다는 둥 너스레를 떨자 중년 남자 한 분이 북을 차고앉으면서 “소리를 배웠다니 한번 들어 보자”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당대 최고의 남자 명창이던 조상현씨였습니다.

친구는 김제에서 배웠던 '단가' 한 대목을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나니 소파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쉰 목소리로 하하거리고 웃었고, 소녀들도 킥킥거리고 웃었습니다. 친구는 본래 음치인데다가 박치까지 겸했으니 그럴 만도 했지요.

소파에 앉아서 웃던 할머니가 저를 가리키며 “저 사람도 소리 한번 들어 보자.”고 했습니다. 저는 얼굴을 붉히며 “저는 저 친구가 배우는 걸 구경만 해서 한 마디도 부를 줄 모릅니다.” 했습니다. 그러자 “소리를 배우러 왔다니 오늘부터 배워 보시게.”하면서 직접 북 앞에 앉으시는 거였습니다.

박초월 스승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박초월 명창(1917~1983). 호 미산. 본명 박삼순. <수궁가> 인간문화재.
김소희, 박녹주 명창과 함께 1930~1970년대 한국 여성 판소리계를 대표한 3대 여류명창 중 한 명이다. 
현재의 대표적인 남성 명창인 조통달은 박초월 명창의 조카이고, 가수 조관우는 조통달 명창의 아들이니 명창의 피가 손자인 조관우에게 이어졌다.

                   박초월 명창의 외손자인  가수 조관우.


저는 그날부터 열심히 학원에 다녔고, 친구는 저의 한 달분 수업료 6천원을 대신 내주고는 군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지 한 달 뒤에 수업료 낼 돈이 없어서 학원을 다니지 못하겠다고 하자, 선생님이 웃으며 그냥 다니라고 하셨습니다.

“자네는 서울대학교 학생이잖여...”

선생님이 말씀하신 학원비 면제 이유였습니다. 게다가 자취방도 없이 여기저기 기숙을 하며 보내던 제 딱한 사정을 아신 선생님은 크리스마스가 되자 목도리와 장갑을 선물로 주시며, 잠자리가 마땅찮으면 학원에서 자라고 하셨습니다. 오갈 데 없던 처지였던 저는 며칠 뒤부터 학원에서 잠을 잤습니다.

70년대의 대학가는 서구의 히피 문화가 휩쓸었던 때입니다. 장발에 청바지와 통기타와 미니스커트가 유행했습니다. 그런 문화적 분위기에서 살았던 제가 미쳐도 한참 미치고,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습니다.

대학교 졸업생이 학교는 안 가고 판소리 학원에서 먹고 자고, 선생님이 아침 일찍 싸들고 오시는 아침밥을 얻어 먹고, 하루 종일 전화 받고, 노래 가사도 써 주고, 학원생들 판소리 배울 때 같이 배우고, 학원생들 다 가고 나면 걸레질하고 소파에서 잠을 잤습니다. 참으로 괴상한, 그러나 너무도 행복한 나날들이었습니다.

밤에 잠이 안 오면 학원 창문 밖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단성사> 영화관의 화려한 영화 간판과 네온사인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는데, 십오 년쯤 뒤에 제가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한 「서편제」의 간판이 그 곳에 걸릴 줄 어찌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러다가 선생님의 외아들이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지자, 아예 서대문구 불광동에 있는 선생님 댁에 가정교사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아들의 공부를 가르쳐 주고, 선생님은 제게 노래를 가르쳐 주는 교환(?)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북도 칠 줄 모르는 초보 제자에게 한복을 입히고 집 마당에 병풍 치고 찍은 기념 사진.


선생님은 새벽 다섯 시면 불광산으로 아침 등산을 가는 게 첫 일과였습니다. 그때 집에는 전남 순천에서 소리를 배우러 올라온 예쁜 꼬마 국민학교 소녀가 있어서 함께 가곤 했지요.

우리는 산에 올라가 선생님을 따라서 발성 연습을 하고, 시조로 목을 풀기도 하고, 낮에 배웠던 대목 중에서 잘 안 되는 부분을 반복해서 연습하고 교정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참 하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몸도 가벼워져서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정이 많은 성격이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무한정으로 정을 쏟는 성격이었지요. 그중에서도 제게 쏟는 정은 무척 각별했어요. 마치 아들에게 하듯이 먹는 것 입는 것 모두를 챙겨 주고, 제가 외출을 할 때면 용돈까지 주시곤 했습니다.

게다가 소리 공부도 어찌나 극성스럽게 시키는지 다른 제자들이 질투할 정도였습니다. 또 제자 중에 대학을 나온 ‘선비’가 있다는 게 그렇게도 자랑스러운지 공연을 하러 가시거나, 방송국에 가시거나, 국악인들의 모임이 있을 때면 꼭 저를 데리고 가서 인사를 시키곤 하셨습니다.

그러한 선생님의 사랑 덕분에 저는 평생을 판소리에 몸담아 온 예술가의 겉과 속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책이나 이론적인 가르침을 통해서는 깨달을 수 없는,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광대의 삶에 대해서도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같은 스승 박초월 명창


선생님은 제자들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 피우는 걸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물론 성대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오랜 무대 생활의 체험으로 광대에게는 무엇보다 절제가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때로 옛날에 함께 판소리를 했던 사람들 중에 술이나 아편으로 폐인이 된 사람이 많았다는 얘기를 하시면서 술·담배에 절어 있으면 절대 명창이 될 수 없다고하셨습니다.

또 남녀 간의 이성 관계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하신 편이었습니다.

“사내는 계집 조심하고, 계집은 사내 조심해야 돼.”

옛날 선생님들은 제자가 방탕한 행동을 하면 여지없이 파문해버렸다는 말씀도 종종 하시곤 했습니다.

또 평상시의 몸가짐에서도 오랫동안 혼자 사시느라 그랬는지 무척 까다롭고 가리시는 게 많아 사람을 가려서 사귀는 편이었고, 약속 시간은 철저하게 지키셨습니다.

또 소리꾼이 술 몇 잔 얻어먹거나, 돈 몇 푼에 팔려서 취객의 흥을 돋우는 것은 옛날 얘기지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술자리나 잔칫집에서 노래 부르는 걸 철저하게 금하셨습니다.

그런 성격이셨으니 공연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지병인 당뇨병으로 고생하신 지 십 년도 넘었던 터라 평상시에도 건강을 위해서 세심하게 신경을 쓰시는 편이었지만, 공연 날짜가 확정되면 그날부터 집안은 초긴장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보약을 지어서 달여 먹거나 끼니때마다 몸의 기운을 돋워 주는 음식들을 정성스럽게 드시고, 사람과의 만남도 줄이고, 등산길에 체조도 하고, 발성 연습도 더욱 공들여 하십니다.

또 될 수 있으면 집안일에 신경을 덜 쓰고, 공연에만 정신을 집중하려 하십니다. 자신의 허약한 건강 상태를 극복하고 무대에서 최상의 판소리를 부르려는 선생님의 눈물겨운 노력을 보면서 나는 종종 숙연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는 동안, 제게는 새로운 음악 세계를 탐험하는 행복과 함께 힘겨운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차라리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더욱 빨리 판소리의 창법을 익힐 수 있었으련만, 노래만 하려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벨칸토 식 발성기관 때문에 호되게 고생했습니다.

그 시기의 저는 발성법뿐 아니라 그 동안 내가 쌓아왔던 음악에 대한 감각의 대수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탐험에 따른 고통치고는 정말 혹독한 시련의 세월이었습니다.

그 무렵의 저를 가장 괴롭힌 문제는 오페라와 판소리의 음악성에 대한 비교의 문제였습니다.

저는 판소리가 우리 것이기 때문에 좋아한 것이 아니고, 음악적으로 저를 끌어당겼기 때문에 좋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음악적 깊이와 표현력은 오페라와 견주어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판소리를 공부하면 할수록 타당한 생각으로 굳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판소리를 둘러 싼 외적 여건은 그런 생각을 증명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게 현실이었습니다.

판소리를 하는 성악가의 절대 부족,
그 성악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 공간의 열악함,
성악가를 좋아하는 팬들의 고령화와 절대적 감소추세,
새로운 판소리를 작곡할 수 있는 작가와 작곡자, 연출가의 빈곤함,
음반화에 필수적인 전문 기획자와 녹음 기사의 부족,
이 모든 조건에서 판소리는 오페라와 경쟁하기에는 너무도 척박한 환경에서 악전고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악전고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오페라나 서양 음악을 몰랐더라면 하지 않았을 고민으로 저는 오랫동안 끙끙대며 가슴앓이 했습니다.

저는 기초적인 민요나 단가를 배운 뒤,「흥보가」「수궁가」를 공부하고 있던 때라 공부에 대한 의욕은 대단했지만 연극일에 쫒겨서 가는 날보다 못 가는 날이 갈수록 많아졌습니다.

그 무렵 선생님은 무척 적적하고 쓸쓸해 하셨습니다. 당뇨병 증세가 심해지고 갈수록 건강이 나빠지자 아예 학원을 폐쇄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찾아오는 제자들만 가르치니, 제자 기다리고 가르치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었습니다.

또 공연 요청도 갈수록 줄어들어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잊혀져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싸여 무척 초조해 하셨습니다.

그 무렵 선생님은 남원군 운봉 땅에서 살 무렵, 아버지한테 지게작대기로 얻어 맞으면서도 판소리에 미쳤던 시절의 이야기를 종종 하시곤 하셨습니다.

집안에 기생이 나올까 걱정이 태산이셨던 아버님은 14살도 안 된 딸을 부잣집에 시집 보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첫날 밤도 치르지 않고 시집에서 도망 나와 남원 권번에 들어 가 판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에 서 있는 동편제의 시조인 송흥록 명창(1789년 경~1863년 경)의 동상.
그 뒤에 보이는 초가집이 박초월 명창이 자랐던 소녀 시절의 집.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재 소녀 명창이란 칭찬을 듣고, 열여섯 살 무렵에는 이미 명창 대회에서 일등을 한 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레코드 취입을 하고, 일본으로 서울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던 시절의 얘기는 화려하고 재미있었습니다.

1933년에 <조선 성악 연구회>에 들어가서 이화중선과 같은 여류 명창과 함께 대표적인 여류 명창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여성 창극단이 생겼을 때는 전국을 돌면서 뛰어난 노래와 연기로 수많은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던 그 시절의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있고 때로는 눈물겹기까지 했습니다.

  요즘의 <소녀시대>만큼이나 인기를 끌며 활약하던 시절에 찍은
  박초월 명창의 엣된 모습


사랑과 미움, 만남과 헤어짐, 화려함과 비참함, 방랑과 배고픔 같은 온갖 사연들이 소용돌이친 전성기의 영광은 늙으면 늙을수록, 또 주위가 적막해질수록 더욱더 빛을 발하며 선생님의 가슴속을 비춰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 무렵의 선생님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결사적으로 항거하고 있었습니다. 고적한 방안에서 가쁜 숨을 쉬고 손을 떨며 화장을 하시고는, 언제 올지 모를 제자를 하염없이 기다리시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가면 이를 악물고 북을 치며 소리를 가르쳐 주시곤 했습니다.

                       병든 몸으로 소리를 가르치던
                       스승님의 말년의 모습.


저는 선생님의 힘들어하시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공부하는 시간을 한 시간에서 삼십분으로 줄이고, 어떤 때는 혼자서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거나, 아니면 이야기만 나누다 오곤 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굳이 문밖까지 나와 제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쓸쓸하게 서 계시곤 했습니다. 그 모습이 등에 박혀 제 걸음은 무겁기만 했지만, 집에는 또 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로 중풍의 병환이 점점 깊어가는 아버님이 계시니 안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은 연극 공연이 끝나고 출연료를 받았는데, 그 돈으로는 도저히 쌀값과 아버지의 약값을 마련할 길이 없어 한숨을 쉬면서도 습관적으로 선생님 댁에 공부를 하러 갔습니다.

그날 마침 「흥보가」중에서 흥보 부인이 <가난타령>을 하면서 우는 대목을 배웠습니다.

가난이야 가난이야
원수 놈의 가난이야
잘 살고 못 살기는
삼신 제왕이 마련을 했나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불우 행사 한 일 없이
밤낮 주야로 벌었어도
삼순구식(三旬九食)을
면할 수가 없네

박초월 명창의 흥보가 중 '가난타령'

그런데 노래를 부르던 중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더니 그만 노래를 다 부르지 못하고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시더니 물으셨습니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어디 몸이 아픈가, 집안에 우환이 있는가?”

그래도 제가 대답 없이 울기만 하자 눈물을 글썽이며 곰곰 생각하시더니 틀림없이 그것 때문일 것이라는 듯이 조용히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사귀던 여자하고 헤어진 게지?^^”

저는 그런 쪽으로 결론을 내린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도 뜻밖이라 웃지도 울지도 못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눈물을 그치고 거짓말로 들러대기 시작했습니다.

“출판사 하는 친구에게 꾸어 준 돈이 있는데 그 친구가 망해서 그 돈을 못 받게 되었어요.”

저는 그때까지 연극을 하면서 친구와 함께 출판사를 차려서 돈을 잘 번다고 선생님을 속여 왔기 때문에 솔직한 사정을 도저히 얘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 얘기를 들은 선생님은 금세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시더니 서랍에서 오만 원을 꺼내어 제 손에 꼬옥 쥐어 주셨습니다.

그 돈으로 아버님께 약을 사드릴 수 있게 되었지만 저는 그 일이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지금도 <가난타령> 대목만 하려면 그때의 일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이렇듯 정 많고 눈물 많은 분이었기에 말년의 쓸쓸함을 어느 누구보다도 견디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건강이 허락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일 년에 몇 차례 있는 공연 요청을 한 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당뇨병이 점점 악화되어 체중이 줄어들고 기억력이 감퇴되고 목소리가 잠기게 되었는데도, 다른 국악인들을 만나면 건강이 좋아졌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 웃음 뒤의 슬픔, 그 짙은 화장 뒤의 주름살과, 무대에서의 갈채 뒤에 오는 기력 쇠진과 허탈을 모두 알고 있는 저는 선생님의 웃음이 밝으면 밝을수록 더욱더 불안하였습니다.

그 불안은 점점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어떤 공연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번은 「수궁가」를 하시던 중에 느닷없이「흥보가」가사가 튀어 나오더니, 중간에 가사를 잊어버리고 한참을 헤매시다가, 제자들이 무대 뒤에서 가사를 소리쳐서 일러준 덕에 간신히 한 대목을 때우고 나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처참한 선생님의 표정은 내 가슴을 사정없이 후비며 파고들었습니다.

또 한 번은 공연을 끝내고 나오시더니 부리나케 집으로 가자고 하시는 거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배에 힘을 쓰다가 자신도 모르게 설사가 나와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당뇨병의 말기 증세인 만성 설사에 시달리고 계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그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을 했으며, 그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된 것을 느낀 선생님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지 생각하곤 혼자서 남몰래 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촬영을 마치고 새벽에 돌아왔을 때, 집으로 박초월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깜짝 놀라 허둥지둥 달려가 보니 선생님의 집안에 제자들과 국악인들의 통곡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며 그렇게도 이승의 삶에 애착을 가졌던 선생님!
예순여섯이란 '젊은' 나이에 죽음을 기다리게 된 자신을 몹시도 안타까워 했던 선생님!

지금쯤 이승의 허공을 떠돌며 자식들과 제자들과 자신이 사랑을 쏟았던 사람들의 주변을 맴돌고 계실까요? 

선생님! 어디에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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