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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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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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에 해당되는 글 10건

  1. 2010.08.21
    퇴계와 두향의 사랑, 사실일까 허구일까? (11)
  2. 2010.06.14
    나를 '광대'라 부르지 마라, 정광수 명창 (2)
  3. 2010.05.28
    너무도 아름다운 비련의 주인공, 무희 '이진' (11)
  4. 2010.04.22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박동진 명창 (24)
  5. 2009.08.25
    연극·연예지망생에게 '희망'의 선물을 주자. (24)
  6. 2009.08.22
    맹렬 기생과 가왕 송흥록의 사랑이야기 (26)
  7. 2009.08.12
    「봄봄」김유정의 혈서 '녹주, 너를 사랑한다!' (38)
  8. 2009.07.13
    나의 연극 인생을 지켜 준 '수호천사' (23)
  9. 2009.07.02
    [편견타파 릴레이] 우리가 기생이냐? (24)
  10. 2009.05.05
    장관 껍데기 훌훌 벗고 광대로 돌아와보니 (24)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은 천원짜리 지폐의 주인공일 정도로 우리 국민 들이 성인처럼 존경하는 학자입니다.

출처 : http://ask.nate.com/qna/view.html%3Fn%3D5881801

그의 초상화나 글들은 매우 엄격하고 진지하고 학문에 몰두한 선비의 기풍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퇴계의 전혀 다른 면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바로  단양 신선봉 아래 '두향묘' 전해 오는 퇴계와 두향과의 사랑이야기가 그것입니다.

퇴계는 평생 두 번 결혼을 했습니다. 21세 때 김해 허씨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세 아들을 낳은 후 결혼 6년 만에 산후풍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번째 아내 권씨와 재혼했지만, 그녀 역시 퇴계가 46세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두 아내를 잃고 홀아비가 된 퇴계는 1548년 1월 단양군수로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부임한 지 한 달 만에 둘째 아들 채(寀)가 또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48세였던 퇴계는 계속되는 가족들의 죽음으로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 무렵, 그는 명기 두향과 만나게 됩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두향은 어려서 일찍 부모을 잃고 단양고을 퇴기인 수양모 밑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녀는 열세 살 에 '기적(妓籍)'에 올려졌으며, 열여섯 살에 황초시란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결혼 석 달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어쩔 수 없이 다시 기생이 되어 단양 관기로 활동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녀는 용모가 빼어나고, 거문고를 잘 탔고, 시와 그림을 좋아했습니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왔을 때 이팔청춘 16세에 남편과 사별한 미모의 기생과, 두 아내와 사별한 채 아들까지 잃어 슬픔에 젖어 있던 48세의 홀아비가 만난 것입니다.

소설가 정비석 씨가 쓴「명기열전(名妓列傳)」에는 두 사람의 만남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가 소설적 상상을 덧붙여 애절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슬픔과 비탄에 젖은 채 묵묵히 시를 쓰고 글을 읽는 퇴계를 두향은 마음속으로 사모하게 됩니다. 두향은 사랑의 정표로 여러 가지 선물을 드렸으나 퇴계는 번번히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두향은 포기하지 않고 선생께서 무엇을 가장 좋아하시는지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 매화를 무척 사랑해서 매화를 읊은 시가 수십 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전국을 수소문해서 희다 못해 푸른 빛이 나는 최상품의 백매화를 구했습니다. 그 매화를 선생께 드리니, 선생께서도 "매화야 못 받을 것 없지." 하시며 동헌 뜰 앞에 심고 즐겼습니다.

그후 퇴계는 두향의 재능을 어여삐 여겨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의 정은 점점 깊어지고, 마침내 사랑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매화를 통해 맺어진 두 사람의 사랑은 각별하였습니다. 

출처 : http://blog.ohmynews.com/songpoet/150126

두향과 퇴계는 경치가 빼어난 강선대를 즐겨 유람했습니다. 총명하고 거문고와 시와 그림에 조예가 있던 두향은 퇴계와의 교분을 통해 그 세계가 더욱 깊어지고, 고매한 영혼의 소유자로 성숙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열 달도 안되어 끝나고 맙니다. 넷째 형인 이해(李瀣)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형제가 같은 도에서 근무하는 것을 피하는 제도 때문에 퇴계가 경상도 풍기 군수로 옮겨가게 된 것입니다.

두향으로서는 청천의 벽력이었습니다. 짧은 사랑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이별은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두 사람은 밤이 깊도록 말없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윽고 퇴계가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구나.”

두향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시 한 수를 썼습니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 제
어느덧 술 다 하고 님 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그날 밤의 이별은 결국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졌습니다.

퇴계가 단양을 떠날 때. 그의 짐 속엔 두향이가 준 수석 두 개와 매화 화분 한 개가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퇴계는 평생 동안 그 매화를 가까이 두고 두향을 보듯 애지중지했습니다.

1570년 퇴계가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도 자신의 죽음보다 매화의 목마름을 염려할 정도로 매화 사랑이 깊었습니다. 제자 이덕홍은 이렇게 전합니다.

"초여드렛날 아침, 선생은 일어나자마자 제자들에게 `매화에 물을 주라'고 말씀하였다. 오후가 되자 맑은 날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흰눈이 수북이 내렸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누워있던 자리를 정리하라고 하였다. 제자들이 일으켜 앉히자 선생은 앉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곧 구름이 걷히고 눈도 그쳤다."

한편 퇴계가 단양을 떠나자, 두향은 ‘퇴적계(退籍屆)’를 제출했습니다. 신임 사또에게 ‘이황을 사모하는 몸으로 기생을 계속할 수 없다’며 기적에서 이름을 없애달라고 간청해 기생을 면했습니다.

그 뒤 두향은 퇴계와 자주 갔던 강선대가 내려다보이는 강 언덕에 초막을 짓고 은둔생활을 하며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았습니다. 퇴계의 죽음 소식을 들은 두향은 도산서원까지 달려가 멀리서 절을 한 후 돌아왔습니다. 그후 두향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무덤을 강선대 위에 만들어주오. 내가 퇴계선생을 모시고 자주 시문을 논하던 곳이라오."

너무도 일찍 생을 마감한 그녀는 강선대 가까이에 묻혔고, 그로부터 단양 기생들은 강선대에 오르면 반드시 두향의 무덤에 술 한 잔을 올리고 놀았다고 전합니다.

퇴계와 두향의 추억이 어린 강선대는 충주댐을 만들 때 수몰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두향묘'는 그녀를 기리는 사람들에 의해 1984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장됐습니다.
 

두향의 무덤. 출처 :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6page%3D

그런데 과연 이 사랑이야기는 사실일까요?

조선 후기 문장가인 이광려가 두향묘의 정경을 읊은 한시에 그녀의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두향은 실존인물로 보입니다. 

외로운 무덤 길가에 누웠는데
물가 모래밭에 붉은 꽃 그림자 어리어 있으라
두향의 이름 잊혀 질 때라야 강선대 바위도 없어지겠지

하지만 퇴계와 두향의 사랑을 공식적으로 밝힌 문헌은 아직까지 확인된 것이 없습니다. 1977년 단양군이 펴낸 「단양군지」는 강선대를 소개하면서 '명기 두향의 묘가 있다'고 했을 뿐입니다.

퇴계와 두향의 관계가 처음 언급된 것은 위에 소개한대로 1970년대 후반에 씌여진 정비석의 소설 「명기열전」이었습니다. 정씨는 퇴계 문중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두향편'을 엮었다고 합니다.

그후 퇴계학연구원이 1980년에 낸 「퇴계일화선」에도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런데 그 책의 저자는 다름 아닌 정비석 씨였습니다.

문헌을 통해 퇴계를 연구하는 학자 중에는 퇴계가 두향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 이유로 다음의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듭니다.

첫째, 퇴계가 단양군수로 갔던 1548년은 퇴계 생애 중 정치적으로 위험한 시기였다는 겁니다. 그보다 3년 전에 일어난 을사사화에서 간신히 죽음을 면한 퇴계가 자신을 호시탐탐 노리는 정적들을 피해 지방으로 피한 때라는 겁니다.

둘째, 퇴계가 단양에 도착한 다음 달에 둘째 아들이 죽고, 고을의 행정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텐데 그런 한가한 사랑을 할 여유가 있었겠느냐는 겁니다.

셋째, 퇴계가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근거로 듭니다. 1541년 관서 지방에 출장을 갔다 오는 길에 평양에 머물렀을 때, 평안도 관찰사가 유명한 기생을 시켜 접대하려 했는데도 끝내 거부했다는 기록이 전해 올 정도로 여색에 대해 담백했던 퇴계가 그리 쉽게 사랑에 빠졌겠느냐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퇴계와 두향의 러브스토리는 오로지 소설가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허구일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비석 씨가 어떤 증언을 토대로 소설을 썼는지는 알 수 없어도, 두향이 실존인물이고 퇴계와 단양에서 만났다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으로 위험하고 아들의 죽음까지 겹쳤다면 퇴계는 정신적으로 무척 불안하고 외로웠을 겁니다. 슬픔에 지치고 세파에 시달린 중년 선비의 외로운 모습은 젊은 여인의 가슴 속에 모성애와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켰을 겁니다.

또 다른 고을 수령들처럼 여색을 탐하지도 않고, 기생이라고 하여 함부로 대하거나 성희롱을 하지도 않고, 정성을 다해 민정을 살피고 학문에 정진하는 그의 모습은 그녀의 마음 속에 존경과 사랑의 열정을 불러 일으켰을 겁니다. 

그리하여 두향이 먼저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시했을 것이고, 매화를 통해 정신적으로 교감을 나누던 퇴계도 두향에게 깊은 정을 느꼈을 겁니다. 두향과 헤어진 후 평생 홀로 살며 벼슬과 학문에만 몰두한 퇴계의 행적을 볼 때, 퇴계는 그녀에 대한 감정을 글을 통해 노출시킬 수 없었고 매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제아무리 성인처럼 추앙 받는 학자나 성직자라 할지라도 정신적 교감을 기초로 한 이성과의 사랑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런 위인의 인간적인 체취를 느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단양군 단성면에서는 1979년부터 매년 <두향제>를 열고 있습니다. 두향제를 주관하는 쪽에서는 퇴계와 두향의 사랑이야기는 단양에서 있었던 실제 역사가 분명하다는 입장입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사실인지 허구인지는 두향의 무덤 아래 출렁이는 충주호 물결만이 알고 있을 테지만, 저는 외로운 두향의 무덤에 술 한 잔 올리며 두 사람의 순수한 사랑을 기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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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수 명창은 자신이 소리 광대로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안 친척들이나 친구들 앞에서도 여간해서는 판소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국악인의 최고 명예인 인간문화재가 되고, 광대가 전통예능인으로 우대 받는 세상에 살면서도 예전의 천대와 편견을 잊지 못했던 탓입니다.
 

출처 : http://www.ncktpa.go.kr/html/jsp/ncktpa...5A6%25AC

그러나 그가 1909년 7월 28일에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났을 때만 해도 판소리 광대가 되는 것은 천민의 신분을 벗어나 출세와 돈과 명예가 보장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잘만하면 임금 앞에서 소리도 하고 벼슬도 받을 수 있는 '화려한 직업'이었습니다.

그 역시도 그의 스승인 김창환 명창을 통해서 출세의 꿈을 키웠습니다.

“우리집이 나주군 봉산면 복룡리에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정창업 명창이시고, 아버님도 소리를 좋아하셔서 어려서부터 판소리를 즐겨 듣곤 했지. 17살 됐을 때에 아버님이 김창환 선생님 댁에 보내 거기서 먹고 자면서 배우게 됐지."
 
정광수 명창은 자신이 다산 정약용의 방계 7대손이고, 철종과 고종 연간에 어전광대로 활동한 서편소리의 대가 정창업 명창의 손자라는 것을 자랑으로 꼽습니다. 어려서 ‘천자문’과 ‘사략(史略)’을 뗀 뒤, 김창환 명창의 제자로 판소리의 길에 들어선 것도 그가 평생 자랑하는 일입니다.

김창환 명창은 고종 황제 앞에서 판소리를 하여 정3품의 명예벼슬인 당상관직을 받고 돈도 많이 번 뒤, 전남 나주군 삼도면 양화리의 절골이라는 곳에 넓은 터를 잡아 풍족한 말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풍신이 잘 생기시고, 행실이 분명하고, 효자시고, 인격이 갖추어진 분이셨어. 소리로 말하자면 송만갑 명창은 강한 상청으로 음이 높아 귀에 쟁쟁 울리고 정확하여 축음기에도 잘 받는 소리였는디, 우리 선생님은 음의 폭이 넓고 굵고 후령음이 무서웠지.
특히 우리 선생님은 늘상 인격을 강조하셔서 성악은 인간이 되어야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 그리고 고종 황제를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지 동네 뒷산에 사당을 지어서 그분 영정을 모셔놓고 날마다 올라갔다 내려 오셨어. 그 분 밑에서 5년쯤 배웠지.”

그러다가 어느덧 스물두세 살이 되어 ‘꽃기운’이 펄펄 살아나는 청춘이 되었습니다.

“내 자랑은 아니지만 그 무렵에는 풍신이 좋았어. 몸집이 두텁고 점잖고 또 예쁜 구석도 있어서 어른들이 귀여워했지. 그러니 나도 자연히 벌렁거리는 마음이 생겨. 남들이 하도 잘 생기고 소리 잘한다고 추어대니까 정말 그런 줄 알고 으스댔지. 그러다가 목포에 있는 권번에 성악 강사로 가게 됐지. 말하자면 첫 취직인 셈이여.”

목포 권번의 강사를 하며 지내는 동안, 재기발랄한 젊은 기생들 틈에서 잘 생기고 소리 잘하는 젊은 총각이 선생님 노릇을 하려니 그 속이 온전할 리가 없었습니다.

“안되겠어. 여자들 속에서 연애나 하고 공부는 못 허고 가르치기만 하니 실력이 줄어. 그리고 여자들이 어찌 극성스럽게 구는지 내 개인 시간을 온통 빼앗아 가고, 이 여자 저 여자가 나를 사이에 두고 싸움을 벌이는 통에 골치가 아파서 못 있겄어. 그래서 그만 두고 나와 삼성암이란 암자에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지.”

수많은 여성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암자에서 먹고 자면서 2년 동안 스승도 없이 그야말로 죽자사자 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무리한 연습으로 몸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암자 뒤에 있는 절벽에서 하루종일 소리를 지르면 목이 잠겨. 어찌나 목이 잠기는지 스님한테 밥 달라는 소리도 못혔어. 그래도 구슬땀을 흘리면서 소리를 지르면 소리가 살살 터져나와. 그 소리를 '지름상성'이라고 혀. 한없이 높은 소리가, 자기도 생전에 들어보지 못한 소리가 어디에선가 튀어나와. 그 소리에 미쳐. 제 소리에 제가 반해 가지고 아침부터 절벽 끝에 있는 석대에 올라가서 소리허고 점심 먹고 또 허고......
그러기를 일년쯤 하니까 소리는 좋아졌는디 몸에 이상이 왔어. 힘만 조금 쓰면 창자가 나올라고 혀. 탈장기가 생긴 거지. 겁 없이 무식하게 힘을 썼으니 뱃속이 온전할 리가 있을 거여. 그 후유증 때문에 많이 고생을 혔어.”

방법이야 어떻든 지독한 공부 덕분에 그의 소리 기량은 한껏 늘었고, 탈장도 치료가 되었습니다. 그는 순천 권번에서 성악 강사를 하다가 유성준 명창에게 더 공부를 하려고 진주로 갔습니다.

유성준 명창은 순천에 살던 장자백 명창의 제자로 소리제가 좋고 공력이 있어서 독특한 실력을 인정 받던 명창이었습니다. 특히 「수궁가」를 잘해서 많은 제자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전세방 하나 얻어 놓고 봄, 여름 동안 공부를 하는디 기초가 있어 놓으니까 번쩍번쩍 공부가 잘 돼. 그래서 <수궁가>, <적벽가>를 다 떼고 집에 돌아오는데 선생님이 정이 들어서 우시는 거여. 선생님뿐만 아니라 그 진주 권번의 수많은 기생 중에서도 우는 사람 많었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울린 그는 29살이 되었을 때, 드디어 서울로 올라와 ‘조선 성악 연구회’를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소리 실력을 인정 받아 바로 경성 방송국에 가서 녹음을 하고, 공부하면서 공연다니는 생활을 3,4년 하던 끝에 신의주에서 해방을 맞게 된 그는 본가가 있는 장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스무살 때에 장흥 사는 안삼차라는 장흥 사는 처녀에게 장가든 뒤로 소리 공부한다 소리 선생한다 하며 잠시도 집에 붙어 있질 않았지만, 아내는 군소리 한 마디 없이 살림을 꾸려 나갔습니다. 그 뒤 광주 권번에 일자리가 생기자, 아예 광주로 살림을 옮겨 그곳에서 3년쯤 지내다가 6.25전쟁을 맞았습니다.

"가족들 데리고 피난 다니느라 죽을 고생했지. 수복되고 다시 광주에 가서 가르치고 있다가 이듬해에 광주 국악원을 창립했고, 2년 뒤에 불화가 생겨서 민속예술원을 따로 만들어 강사 노릇을 했지. 그 일에 발목이 잡혀서 20년을 광주에서 살다보니, 이럭저럭 광주가 제2의 고향이 되고 말았어"

정든 광주에서 20년쯤 지내던 그는 결국 동료들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서울로 올라왔고, 1964년에는 판소리 「수궁가」의 인간문화재가 되었습니다.

“소리라는 것, 즉 음악에는 예의 체통이 있어. 칠정과 희로애락을 살리고 인의예지를 살리는 것이 소리니 함부로 곡조를 내두르고 허망히 하면 안될 것이여. 목성음으로만 듣기 좋게 흥얼거리고 놀기 좋게 불러도 안 되며, 법통과 격식에 맞게 정중히 해야 될 것이여.”

이렇듯 고상한 음악관을 가지게 된 탓에 그는 아무데서나 소리를 하지 않았고, 소리꾼으로서의 활동도 그리 활발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소리 광대 된 것을 부끄러워 하는 것은 아니여. 다만 세상에서 처신하며 살아가려니 꺼리는 게 많아서 그러는 거여. 내가 아무리 내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겨도 사람들이 안 알어주는디 어쩔 것이여. 그리서 난 누가 날 광대라고 부르는 걸 싫어혀. 집안이나 종친회에도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몰라.”

이처럼 광대들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이 사회의 뿌리깊은 편견에 정중한 처신으로 항거하며 지내던 그는 2003년 11월 2일, 판소리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재' 지정받기 닷새 전에 삶을 마무리했습니다. 

지금은 광대를 천대하는 일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서양의 광대들에 비해 초라한 대접을 받는 전통 광대들의 현실을 볼 때, 그의 항거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나름대로의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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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에 너무도 아름다운 이유로 비련의 주인공인 된 궁중무희가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이진(Li-Tsin)'. 그녀의 빼어난 미모와 우아한 무용에 반한 젊은 프랑스 외교관이 그녀를 열렬히 사랑한 데서부터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신경숙의 소설 <리진>에 실린 김동성 화백의 리진 초상.
출처 :
http://likecho.tistory.com/entry/%25EC%...580%2599

그녀와 사랑에 빠진 프랑스 외교관(3대 공사인 빅토르 콜랭 드 프랑시로 밝혀 짐)이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진과 사랑에 빠진 3대 프랑스 공사 빅토르 콜랭 드 프랑시(1853~1922).
출처 : http://www.movist.com/article/read.asp%...%3D12999

"나는 그녀와 결혼할 겁니다. 이진의 마음씨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이 이단(異端)의 나라에서 그녀는 한 여신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녀는 천사로서 대우받을 권리를 가질 것입니다."

이렇듯 이진에게 사정없이 매혹 당한 그는 본국에서 소환 명령이 오자, 고종에게 자신의 사랑을 얘기하고 그녀를 '기증' 받아 프랑스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가정교사를 들여 프랑스 말을 가르치고, 프랑스 문화를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놀라운 재능으로 새로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지만, 외로운 외국 생활이 쉽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울증에 빠졌고, 몸이 쇠약해져갔습니다. 

김동성 화백의 삽화. 출처 : http://likecho.tistory.com/entry/%25EC%...580%2599

"서양의 습한 안개가 동양의 따뜻한 햇볕에 그을은 그녀의 이마에 검은 빛을 그리웠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자, 옛날의 생활로 돌아 간 빅토르 콜랭은 '여신'처럼 숭배하고 '천사'처럼 떠받들던 이진에게 소홀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 한국의 규방을 복원해 줄 정도로 관심을 잃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다시 한국에 파견되어 이진과 함께 조선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오자마자 이진에게 평소 앙심을 품고 있던 어느 고관이 궁중에 소속된 노비인 그녀의 신분을 앞세워 기생들의 조직인 '교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펼쳐진 무희로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얇은 금조각을 삼키고" 스스로 생명을 끊어버렸습니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거의 100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905년 무렵에 2대 프랑스 공사로 조선에서 근무했던 끌라르 보띠에(Madame Claire Vautier)와 이뽀리트 프랑땡(Hippolyte Frandin) 두 사람이 쓴 「한국에서(En Coree)」 라는 수필집을 프랑스 리옹3대학의 이진명 교수가 번역해서 재불한인 잡지인 <한인>에 1979년 4월호에 소개했고, 그 책을 다시 불문학자인 김상희 부산대 교수와 국문학자인 김성언 서울대 교수가 번역해서「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 」이라는 제목으로 2002년 무렵에 출간했습니다. 


49장으로 나눠서 여러가지 한국의 풍물을 소개한 글로 구성된 이 책의 내용 중 <35장 궁중의 기생들과 한 한국 여인의 비극>이라는 짧막한 글에 위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글에서는 이진의 빛나고 깊은 눈을 '영혼의 꽃(Fleur d'Ame)'이라고 부를 만큼 그녀를 찬미하고 있습니다. 

저는 2005년에 부산대학교에 강연을 갔다가 번역자인 김상희 교수에게서 그 책을 선물로 받고, 오랫동안 이 이야기에 심취했습니다. 

프랑스 공사와 결혼한 조선의 궁중무희, 그녀의 프랑스 생활, 귀환, 자살.......오페라 「나비부인」과 비슷한 이야기이지만 뭔가 다르고, 일제시대도 아닌 구한말에 예술가적 영혼을 지닌 한 여인이 프랑스 파리에서 겪었을 많은 사건과 혼란들.....

그런데 자료를 찾아보니 몇 가지 의문점도 발견되었습니다.

첫째, 이진이라는 궁중무희의 존재를 증명해 줄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천민 계급인 기생이니 호적도 있을리가 없겠지만 프랑스 공사와 결혼을 했다면 당시 궁중에서 상당한 화제가 되었을 것이고, '이왕직 아악부'나 '교방부' 등 음악이나 무용을 담당했던 궁내의 광대나 기생에 대한 기록도 있을 법한데 아직까지 그녀에 대한 국내의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 그녀와 결혼했다는 프랑스 공사의 이름과 그의 출생지나 외교관으로서의 근무 기록은 어느 정도 밝혀졌는데, 그녀와의 결혼 여부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이진은 그와 어떤 관계였던 것일까요? 애인? 동거인?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세째, 그녀가 귀국한 뒤 다시 궁안으로 들어갈 때, 왜 그 빅토르 콜랭은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 책에 씌인대로 '사악한 제도에 한 번 저항해보지도 않고 비겁하게도 그녀를 포기'해 버린 것인가? 그녀는 버림 받은 슬픔 때문에 자결한 것인가? 아니면 신분의 족쇄에 얽혀 비참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항거로 생을 끊은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비밀스러운 안개에 싸여 있는 아름다운 무희의 이야기는 오히려 그런 의문점 때문에 저에게 더욱 흥미진진한 상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면 좋겠다는 구상을 하며 지내고 있던 중, 놀랍게도 그 이야기를 소재로 한 소설이 나오더군요.

김탁환씨의 「리심(파리의 조선 궁녀)」와 신경숙씨의 「리진」이 거의 동시에 출간된 것입니다.
 


두 분 소설가도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 집필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이야기는 이미 뛰어 난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작품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반가운 마음에 그 소설들을 읽었습니다. 과연 똑 같은 자료를 가지고 씌어졌지만, 두 소설의 구성이나 스토리나 분위기는 너무도 다르더군요. 또 제가 구상했던 이야기와도 너무도 달랐습니다.  

짤막하지만 흥미롭고 상상을 자극하는 '춤 추는 여인'의 이야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진. 출생도 알 수 없고 생존 여부도 확인되지 않지만, 수많은 남성들의 찬미 속에 비극적으로 죽어 간 여인. 그녀의 삶은 여전히 저에게 한없는 상상의 날개를 달아줍니다. 저는 여전히 '영혼의 꽃' 이진에게 매료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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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송흥록 명창, 박초월 명창, 임방울 명창, 박녹주 명창 등 명인명창에 대한 이야기를  띄엄띄엄 올렸는데 앞으로는 좀더 자주 전에 제가 발표했던 명인명창에 대한 글들을 손질해서 올려볼까 합니다. 그래서 '명인명창 이야기'라는 카테고리도 만들었습니다. 
아마 네티즌들에게는 생소한 분들이 많고, 내용도 그리 흥미롭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미래의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 끝에 시작합니다. 첫번째 타자는 대중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으로 박동진 명창을 선택했습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아마 판소리는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이 말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겁니다. 박동진이라는 노명창이 CF 광고에 나와서 한 대사지요. "또 제비 후리러 나간다~"하는 소리 대목도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겁니다. 모두가 박동진 명창의 광고 속의 멘트가 히트한 결과 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처음부터 판소리계의 스타로 활동한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50세가 넘어서야 명창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06/asp/ce...21203303

그 놀라운 집념과 열정의 이야기를 펼쳐 볼까 합니다. 
 
1968년에 국립국악원 강당에서 박동진이라는 소리꾼이 <흥보가>를 5시간 동안 쉬지 않고 완창한다고 하자 국악계에서는 ‘참 별일이 났다’고 수군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박동진이라는 소리꾼은 그때까지만 해도 김연수, 임방울, 김소희, 박초월과 같은 쟁쟁한 명창들의 그늘에 가려 별로 이름을 내밀지 못하던 소리꾼인데다가, 그런 소리꾼이 소리 한바탕을 완창으로 부른다는 것은 보통 무모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5시간을 쉬지 않고 불러 젖히는 데다가, 그 소리목이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힘이 있고, 고음과 저음을 마음대로 구사하였으며, 몸짓과 대사가 구성지고 익살맞고 재미있어서 5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가 버리자 그 소리판을 구경한 관객들과 소리꾼들과 기자들이 모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 이듬해에 <춘향가> 한바탕을 그 당시 명동에 있었던 국립극장에서 8시간 동안 쉬지 않고 부르자 소리 솜씨는 제쳐 두고라도 어떻게 한 인간이 8시간이나 계속해서 소리를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얘기로 온 장안이 시끌시끌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박동진이라는 소리꾼은 쟁쟁한 판소리 명창들의 대열에 끼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완창 소리꾼으로 이름이 높아졌습니다. 그 뒤 많은 소리꾼들이 그의 성공에 힘입어 완창 판소리 발표회를 가짐으로써 완창 발표가 마치 유행처럼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다른 소리꾼들은 일생에 한두 번 하기도 어려운 완창 소리판을 그 뒤로도 일 년에 한 번 또는 두 번씩 쉬지 않고 열었던 그의 정열과 집념은 무섭고 놀랍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어려운 일을 이를 악물고 해낸 데에는 그의 실패와 좌절이 큰 몫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1916년 7월 12일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무룡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 대에 몇 백 석을 거두며 부유하게 살던 그의 집안은 이미 아버지 대에 가세가 기울어 그는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 겪는 배고픔과 설움을 일찍부터 체험해야 했습니다.

여덟살이 될 때까지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익힌 그는 충남 대덕군 진잠면에 있는 진잠 보통학교를 4년 만에 어렵게 졸업한 뒤 대전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는 학비를 대기가 힘에 부쳤지만 아들이 중학교를 졸업한 뒤 면서기라도 해서 집안 살림을 도와줄 것을 기대한 그의 아버지는 꼬박꼬박 학비와 하숙비를 대주었습니다.

그렇게 학교를 다닌 지 4년이 되어 졸업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그의 앞날을 확 바꿔 놓고 집안에 평지풍파를 일으킬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지금 대전극장이 들어 선 자리에 <협률사>라는 단체가 들어와서 소리판을 연다기에 무심코 구경을 갔다가 그만 넋을 빼앗긴 것입니다.

조선 천지를 들썩이게 하던 이동백, 이화중선, 이중선, 장판개, 김창룡과 같은 최고의 명창들이 벌이는 소리판에서 넋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목석같은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소년 박동진은 온 몸이 달아오르고, 등에 소름이 끼치고, 귓전이 간질거리고, 오금이 저려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린 소년의 마음에 불을 지펴놓고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버렸습니다. 소년은 며칠 동안 학교 공부도 집어치우고 무대에 서서 소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다가 한숨을 쉬며 신세를 한탄한 끝에, 그예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소리를 배우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마침 이동백 명창의 고수로 따라다니던 지동백씨가 연기군에 산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지동근은 판소리로 이름을 날릴 만할 때에 목이 나빠져서 판소리를 그만 두고 땅재주를 하거나 북을 치면서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지동근은 자기는 판소리를 가르칠 수 없다며 “청양군 정산면 백공리에 가면 손병두라는 사람이 있는데 바탕소리는 못하지만 토막소리는 맛있게 잘 한다“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길로 집에 돌아 와 부모님께 자기의 결심을 여쭸습니다.

짐작한대로 아버지는 노발대발하고 매를 때리고 욕설을 퍼붓기까지 했습니다. “몇 달 있으면 졸업인데 무슨 미친 병이 들어서 광대짓을 하려느냐”고 펄펄 뛰며 야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집을 꺾지 않고 집을 나와 버렸습니다.

그때가 18살 되던 해 여름이었습니다. 물어물어 손병두씨 집을 찾아가서 나무도 하고 꼴도 베어 주며 머슴살이를 하다시피 일 년을 지내며 소리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사랑가'나 '옥중가' 같은 토막소리를 반 년쯤 배우고 나니 손병두씨도 가르칠 밑천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을 눈치 채고 선생 곁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손 선생의 부친인 손필모씨가 청양군 청장면에 있는 미륵당이라는 집에 그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 집은 행세깨나 하는 양반 집안이었는데 인사를 마치고 술상이 들어온 뒤, 주인 영감의 명령이 떨어지자 아들, 손주, 며느리들이 저마다 가야금, 거문고, 피리, 젓대, 양금, 해금 등을 끼고 앉아 '풍류'를 연주하는 것이었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풍류 가락에 넋을 잃고 연주가 끝났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앉아 있는데 손필모씨가 “이놈이 내 아들 제자인데 소질이 있는가 없는가 봐 주시요”하고 소개를 했습니다.

장구를 치던 주인 영감은 “어디 한 번 소리를 들어 보자”면서 북을 가지고 앉았습니다. 그래 겁을 바짝 내며 손병두에게 배운 소리를 하고나니 영감이 “네가 소질이 있기는 있는데 명창이 되려면 지금 선생으로는 안 된다. 이 집은 선배 대명창들이 한 번씩 다녀가셨던 집이다. 서울에 가면 정정렬 명창이 있는데 그 분이 <춘향가>는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러니 그 분한테 배우도록 해라”하며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길로 손병두 선생을 떠나 정정렬 명창을 찾아 서울로 올라가는데 일이 안 되려는지 도중에 서울 못 갈 일이 생겨버렸습니다.

터벅터벅 걸어서 유성까지 나왔을 때 마침 공주의 부자인 김 갑순이 궁술대회를 열고 기생들을 데리고 노는데, 저녁에 천막을 쳐 놓고 사당패들이 소리판을 벌이는 걸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구경꾼들 틈에 끼어 소리를 듣는데 이미 소릿길을 조금 안 그의 귀에 사당패의 장바닥 소리가 가소롭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자청해서 무대로 올라가 소리를 한 마디 했더니 “야, 그거 투가리보다 장맛이다”하며 “재청이요, 산청이요” 한 것이 오청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리를 끝내고 잠을 자려는데 느닷없이 곱게 차려 입은 중년 여인이 찾아와서 “아까 소리한 학생이 누고? 니 우리 방에 온나”하지 않겠습니까? 그 여자를 따라 여관으로 가니 의젓한 중년 신사가 앉아 있다가 “내 김천 서 치과의사하는 사람인데 너 김천 가서 기생 선생할래?”하며 이 말 저 말 얘기를 했습니다. 들어보니 그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생겨 두말없이 그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올라가려다가 거꾸로 내려가게 된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그는 중년 여인이 경영하는 진양옥이란 선술집에서 손님 앞에서 소리하며 하룻밤에 50전도 벌고 1원도 벌면서 몇 달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명월관이라는 요릿집에서 기생들 소리를 가르쳐 달라고 하여 꽃같은 기생 스무 명쯤을 모아 놓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소리를 배우지도 못하고 토막 소리 몇 대목 가지고 밥벌이하면서 누구를 가르치는 일이 항시 마음에 걸리던 차에 공주 대제암에서 정정렬 명창이 소리를 가르친다는 얘기를 듣고 대번에 기차를 타고 절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스승 운이 없으려는지 조상선, 김여란, 김초앵과 같은 쟁쟁한 신인 명창 12명이 한 시간씩 꼬박 열두 시간 동안 선생님을 붙잡아 놓고 있는 통에 도저히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여름이면 절간 아무데서나 잠을 자며 귀동냥이라도 할 텐데 엄동설한에 그럴 수도 없고 해서 다시 대구 봉산동에 와서 술집 기생들의 소리선생을 하며 지냈습니다.

얼굴도 “빤질빤질하게” 잘 생긴데다가 소리 잘 하고 멋이 있는 젊은 총각이 젊은 여자들 틈에서 지내다보니 “만사가 맨숭맨숭하기만 할 수는 없어서” 가끔씩 연애 사건을 저지르곤 했습니다. 대두에서는 대구 경찰서 고등계 형사의 조카인 일본 여자 대학생과 연애를 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가서 모진 매를 맞고 갖은 협박을 당한 끝에 강제로 쫒겨나다시피 경주 권번으로 옮겼습니다. 또 경주에서는 얼굴 예쁘고 인기 있던 기생 김난윤의 짝사랑에 말려들어 호되게 곤경을 치루는 등, 여자들 등쌀에 시달렷습니다.

결국 그는 그 생활을 청산해야겠다는 결심 끝에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습니다.

“내가 여자들한테 인기는 있었구만. 그런디 그것이 좋은 것이 아녀. 젊은 놈 신세 망치기 딱 좋은 것이라. 더욱이 소리 공부하는 사람은 여색을 조심해야 돼. 지동근씨가 나헌티 헌 말이 있네. 젊어서 여자를 알면 소리를 망치게 되니 여자 보기를 원수 보듯이 해야 한다고 하셨어. 성공만 하면 여자는 줄줄이 따라오는 법이니 성공할 때까지 절대 여자를 가까이 말라고 말이여. 그런디 한창 기운이 좋을 적에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는가. 서울 와서도 맨 연애만 허고 다녔지”

22살에 서울에 와서 조선 성악 연구회에 다니며 꿈에 그리던 정정렬 명창에게 소리공부도 하고 명월관, 식도원 같은 요리집에서 소리를 하며 돈도 벌었습니다. 노명창들을 모시고 북만주, 신의주, 상해, 무창, 북경, 남경, 서주까지 공연을 다녔습니다. 또 김창진, 조학진 같은 명창에게 소리공부를 하며 몇 해를 보내는 동안 그의 앞에는 소리꾼으로서 밝은 미래와 성공이 열리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거침없이 돈도 쓰고 한껏 멋을 부리고 신식 여학생들과 뻔질나게 연애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25살이 되던 해에 무서운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목이 안 나와. 고음이 안 나오고, 숨이 짧아지고, 소리가 갈라지고, 허리도 아프고, 소리 기운이 싹 없어져 버렸어. 한약도 써 보고 목을 쑥으로 떠보기도 하며 별별 짓을 다 했지만 소용이 없어. 목이 그 지경이 되니 무대에 서면 집어치우라고 소리지르니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고, 무엇보다 내 인생이 이것으로 끝이구나 생각하니 죽고 싶은 생각밖에 안 나”

그러던 차에 고향 집에서 옥천에 사는 색시와 혼인을 하라는 전갈이 오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대뜸 혼인을 해버렸습니다. 실의에 잠긴 마음을 그렇게 해서라도 달래보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그에게 안정과 행복을 가져다 주기는 커녕 도리어 무거운 짐만 짊어지게 했습니다.

그는 그 짐에서 벗어나고 잃어버린 목도 찾을 겸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그러자니 자연 가정을 돌보지 않게 되어 아내는 집을 떠나게 되고, 그 아내에게서 낳은 자식마저 저 세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불러들인 불행이지만 자신으로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어 더욱 더 실의와 좌절 속에서 세월을 보내는 동안 해방이 되고 그의 나이 30살이 되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그는 해방 뒤에 생긴 여성창극 단체인 <햇님국극단>에 들어 갔습니다.

그 단체에는 박초월, 김소희, 박귀희, 조금앵, 김경애와 같이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던 여자 명창들이 있었는데 그는 그 단체에서 고수도 하고, 무대감독도 하고, 작곡도 하며 그들의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그 뒤 김연수 명창이 이끄는 <우리 국악단>에서도 무대 뒷일을 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때의 쓰라린 경험과 명창들의 그늘에 가려 그들의 뒤치닥거리를 하며 느꼈던 열등감, 무대감독을 하며 익힌 무대 경험들이 '재기'를 위한 밑거름이 될 줄이야 그 당시는 아무도,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기에는 숨은 공신이 있었습니다. 

함께 창극단의 스탭 일을 하던 중 사랑을 하게 되어 마지막까지 해로한 둘째부인 변기씨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없었던들 그의 재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1962년에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들어 간 그는 남들은 전성기를 지나서 활동을 마무리 짓는 나이에 골방에 틀어박혀 아침 여섯시부터 정오까지 꼼짝 않고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그 뒷바라지를 지성스럽게 했을뿐더러 돈 못 벌어 온다고 잔소리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또 소리공부하다가 절망에 빠진 그가 소리 집어치우고 다른 일을 하겠다고 하면 극구 말리며 다른 생각 말고 소리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러한 아내의 내조 덕분에 그는 10여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로지 소리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만 52살이 된 1968년에 <흥보가> 5시간 완창 발표회를 갖고, 1969년에 <춘향가> 8시간 완창발표회를 한 다음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를 차례차례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 뒤에 그는 계속해서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 <강를매화전>과 같이 가사와 곡을 잃어버린 것으로 알려진 노래들을 다시 가사를 찾고 곡을 붙여서 발표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된 그는 1970년에 주태익이라는 극작가가 판소리 사설체로 쓴 <예수전>에 곡을 붙여 5시간 동안 불렀고, 그 뒤 <팔려 간 요셉>이라는 노래도 창작해서 전국 교회를 돌며 신자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또 1973년에는 <이순신전>을 불러 창작 판소리에 대한 국악계와 일반인들 사이에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407031

“십 년 동안 목숨을 걸어 놓고 공부를 헌 결과여. 내가 젊어서 못된 짓을 많이 혀서 목을 버려 놓았응게 목만 다시 찾으면 죽어도 원이 없다 허고 일심으로 공부를 허니까 목이 다시 찾아 와. 그래도 고음이 예전처럼 안 나와서 나 혼자 연구를 혔지. 처음에 '암성'으로 가늘게 내다가 점점 기운을 넣어서 '통성'으로 내는 거여. 옛날 임방울 명창도 이런 말씀을 허셨지. 소리를 많이 허면 가느다란 '실목'이 나오느니라. 그것을 많이 허면 그 목이 차차 굵어져서 통성이 되는디 그 단계가 어려운 것이니라. 허셨는디 내가 혀 보닝게 정말 어려워요. 실목을 통성으로 변화시키기가 소리공부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여. 그 단계를 통과혀야만 득음을 혔다고 헐 수가 있는거지”

그 어려운 단계를 통과한 명창에 대한 예우로 나라에서는 1973년에 판소리 <적벽가>의 인간문화재로 그를 지정했습니다.

그는 그 뒤 국립창극단의 단원이 되고, 1978년에는 단장이 되어 1981년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창극단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는 더 바빠져서 남들은 은퇴할 나이까지 각종 판소리 관련 교육이나 수없이 밀려오는 초청 공연, 방송 출연, 음반 취입, 게다가 광고 출연까지 젊은이 못지 않게 분주하게 보내다가 87세인 2003년에 세상을 떴습니다.

인생의 후반기인 50세에 재기해서 30년의 전성기를 보낸 그는 깊은 고난의 길을 걸어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무서운 집념과 미래에 대한 도전, 그리고 열정으로 충만한 노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뜬 '대기만성' 형의 명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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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끔 연극이나 국악이나 연예계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을 만나 일종의 상담을 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연극배우 지망생들과 대화를 했습니다.
 

대부분 꿈과 현실 사이에서 좌절하기도 하고,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는 마음을호소
하더군요. 그들의 말을 듣는 동안 저의 지망생 시절이 오버랩되더군요.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6,70년대에는 학생들 사이에서 검사, 판사, 의사, 교사 같은 “사”자 직업이 최고 인기였습니다.

그 무렵에는 연극이나 연예계를 지망하는 학생은 아예 말을 꺼내지도 못했습니다. 집에서는 불호령이 떨어질테고, 친구나 선생님들로부터도 '날라리'나 '딴따라'라는 비웃음을 받을 게 뻔하기 때문이었습니다.김이석의
「실비명」이란 소설은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예술을 좋아하는 딸과 이를 반대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력거꾼인 아버지는 딸이 의사가 되기를 원하지만, 춤과 노래에 미친 딸은 요정에서 춤을 추다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다.
 
아버지는 딸을 강제로 간호사를 시키지만, 그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 딸은 몸이 병들어 간다.
 
초췌하게 변한 딸의 모습을 본 아버지가 병원 일을 그만 두게 한 뒤 인력거에 딸을 태우고 오다가 차에 치어 죽게 되고, 몇 년 뒤에 결국 기생이 된 딸은 다시는 인력거를 타지 않는다.




그렇게 천대받고 무시 당하던 이 직업이, 요즘 들어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직업 중 상한가의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를 타고 전국적으로 수많은 연극영화과나 방송 연예과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몇몇 대학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교육환경이 대단히 열악합니다.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극장이나 연습실이나 기자재 등이 충분히 준비되지 않고, 공연예술계나 연예계와 긴밀한 네트워크도 되어 있지 않은 학교에서 불충분한 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이 해마다 수없이 배출되고 있지만, 취업에 대한 전망은 매우 비관적입니다.

그래서 요즘 각 대학의 연극·영화·연예 관련 학과들이 젊은이들의 허영과 무모한 꿈을 부추겨 수많은 실업자를 길러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공연예술계나 연예계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는 매우 불안정한 직종입니다.

이 직업에는 타고난 재능과, 그 재능을 길러 줄 스승이나 선배, 그 재능을 꽃 피울 수 있는 주변 여건, 그리고 오랫동안의 불안한 생활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의지와 신념이 필수적입니다.


게다가 예전과 달리 전국 각지에서 뛰어난 실력과 재능을 갖춘 지망생들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한정된 고용력 때문에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경우는 더 많아질 전망입니다.

어느 누구나 스타로서 성공하기 전에는 눈물어린 고통의 시간을 겪는 법입니다.

두 시간의 화려한 조명을 받기 위해서는 이백 시간 또는 이천 시간의 고통스러운 연습과 훈련이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이 직업을 택하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불나비처럼 잠깐 동안의 빛나는 순간만을 보고, 그 뒤의 어두운 생활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빨리 스타가 될 수 있는 가수나 영화배우나 텔런트나 모델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반면, 오랜 수련이 필요한 연극이나 무용이나 음악 등 공연 예술의 지망생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공연 예술들이야말로 연예인으로서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입니다. 발성과 화술, 몸짓 표현의 기본에 대한 철저한 훈련, 무대에 대한 이해, 예술가로서의 철학과 자세, 예술관, 드높은 이상은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진 기초예술을 통해 길러지고 그걸 응용해서 영화, 가요, 에니메이션, 방송 등의 대중 예술에 적절히 활용되는 게 기본입니다.

기초공사가 튼튼해야 건물이 무너지지 않듯이 기초가 튼튼해야 훌륭한 예술가로 성장하는 법입니다.

연예계든 공연예술계든 취업의 문은 아주 좁고 지망자는 너무 많아 경쟁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성공하려는 예술지망자들의 의지는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비정한 경쟁에서는 필연코 탈락자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 '좁은 문'의 경쟁에서 탈락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우울한 인생을 사는 일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젊은이들의 뒤에는 반드시 가족과 친지들의 갈등과 고통이 숨어 있습니다. 예전보다는 훨씬 그들을 이해하고 후원하고 격려하는 분위기지만, 아직도 자기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이 길을 가겠다고 할 때 대부분의 가족들은 불안해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비록 지금은 오디션에서 탈락하고 작품활동을 할 기회를 못 가진 지망생일지라도, 언젠가 그들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스타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지금 스타로 활동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초기에는 탈락과 실업의 아픔을 겪으며 한 발 한 발 높은 산을 오른 것입니다.

해마다 늘어가는 예술지망생들에게는 그들의 꿈을 이해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의 믿음과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들의 간절한 꿈이 꽃을 피우길 빌며, 쇼펜하우어의 <희망에 대하여>라는 글을 선물합니다.

 

희망은 마치 독수리의 눈빛과도 같다.

항상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먼 곳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희망이란 바로 나를 신뢰하는 것이다.

행운은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용기가 있는 사람을 따른다.

자신감을 잃어버리지 마라.

자신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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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는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서민들뿐만 아니라 양반들까지 포함해서 폭넓은 대중들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무렵의 판소리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려주는 시 한편을 소개해 볼까요? 18세기에 살았던 시인인 신위가 판소리 공연을 보고서 쓴 시입니다.

이따금 환호하는 외마디 소리
넓은 뜰엔 구경꾼이 구름같이 몰렸네
이 밤에 부질없이 횃불 걱정 마오
반달이 구름 끝에 걸려 있으니

요즘 인기가수의 야간공연 장면 같지 않아요? 그 무렵에 이름을 날리던 명창 중에 권삼득, 송흥록, 염계달, 모흥갑, 고수관, 신만엽, 김제철, 황해천 여덟 명을 뽑아서 ‘8명창’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난다긴다 하는 8명창보다 더 대단한 우춘대 명창을 찬양하여 쓴 시가 있는데 소개해 볼까요? 신위보다 약간 후배인 송만재라는 시인이 쓴 시입니다.

장안에 이름 높은 가객 우춘대
오늘에 누가 능히 그 소리를 잇나
술자리에서 한 곡 빼면 비단이 천 필
권삼득과 모흥갑은 아직 어린애

서민들은 비단 한 필 구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술자리에서 부른 노래 한곡에 비단 천 필이란 출연료를 받았다니 대단한 슈퍼스타였나 봅니다. 이처럼 판소리의 전성기였던 그 시절의 명창들은 그야말로 탄탄한 인기가도를 누리며 고액의 출연료를 받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평양감사 부임도> 중 명창 모흥갑의 판소리 공연 장면.

수많은 명창들 중에서도 명창 중의 명창으로 꼽히는 사람이 ‘가왕(歌王)' 송흥록입니다.

‘가왕’은 요즘의 ‘가수왕’과 같은 말입니다. '판소리의 중시조', '동편제의 비조' 등으로도 추앙 받는 송흥록 명창에게는 아주 재미있는 사랑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송흥록은 1780년쯤에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비전마을에서 태어나, 스무 살 무렵에 이미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그의 노래를 들으려고 아우성이었답니다.

한번은 대구감영에서「춘향가」를 불렀는데, 모두들 그의 노래에 감동해서 감격어린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예쁘고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기로 대구에서 가장 유명한 맹렬이란 기생만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송흥록은 그 기생을 눈 여겨 보았다가 이튿날 그녀의 집에 찾아 갔습니다. 술상을 앞에 놓고 방에 앉아 있으니, 한복을 예쁘게 차려 입은 맹렬이가 들어왔습니다.

맹렬 : 무슨 일로 오셨나요?
송흥록 : 왜 어젯밤에 내 노래를 듣고 한마디 말이 없었소?
맹렬 : 할 말이 없어서요.
송흥록 : 남의 노래를 듣고 할 말이 없다니 그런 말이 어디 있소?
맹령 : 꼭 말을 해야 하나요?
송흥록 : 꼭 듣고 싶소.

송흥록이 안달을 하며 보채니까 맹렬이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맹렬 : 송선생님이 명창은 명창이지만 아직도 부족한 대목이 있어요.
송흥록 : 그게 뭐요?
맹렬 : 귀곡성이 많이 부족해요.

‘귀곡성(鬼哭聲)’은 춘향이가 옥에 갇혀 있는 어느 날 밤에, 비가 내리고 바람이 으스스 부니 온갖 귀신들이 나와서 춘향이에게 달려드는 대목에 나오는 귀신소리입니다.

송흥록 : 귀곡성 어떤 점이 부족하오?
맹령 : 그걸 제가 어찌 알아요? 어쨌든 선생님 소리는 귀신소리는 아니예요.

맹렬이는 매몰차게 말을 하고 송흥록을 떠나 보냈습니다. 송흥록은 그 길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노래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는 귀곡성을 제대로 하려고 죽을 힘을 다해 연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웬 소년이 찾아왔습니다.

소년 : 송명창님!
송흥록 : 이 밤중에 누구냐?
소년 : 어떤 높은 어르신들이 송명창님을 모셔 오랍니다.
송흥록 : 왜 나를 찾느냐?
소년 : 송명창님의 판소리를 듣고 싶으시답니다.
송흥록 : 그 분들이 계시는 곳이 어디냐?
소년 : 저를 따라 오십시요.

송흥록은 소년을 따라서 대나무 숲이 우거진 어느 기와집에 갔습니다. 집안에는 수염이 하얀 노인 세 분이 갓을 쓰고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앉아 있었습니다.

노인 : 송명창 왔는가?
송흥록 : 예.
노인 : 우리들이 심심해서 자네 노래를 듣고자 불렀네.
송흥록 : 어느 대목을 원하십니까?
노인 :「춘향가」중 ‘옥중가’를 해보게.

송흥록은 높은 어르신들 앞이라 열심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나니까 노인들이 말했습니다.

노인 : 자네 노래가 다 좋은 데 귀곡성이 틀렸네.
송흥록 : 어떤 점이 틀렸습니까?
노인 : 가르쳐 줄 테니 따라 해보게.

송흥록은 노인들이 가르치는대로 따라 불렀습니다. 밤새도록 힘들게 노래 연습을 하고 났더니, 노인들이 그만하면 됐으니 술이나 한잔 하고 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송흥록은 술을 몇 잔 얻어 마시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밝아 깨어보니 어느 무덤가에 누워 있지 않겠어요? 무덤가에서 밤새 연습하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었던 겁니다. 그는 꿈속에서 노인들에게 배웠던 노래를 기억하여 그 유명한 ‘귀곡성’을 만들었습니다.

그 뒤에 다시 대구에 가서 판소리를 했습니다. 송흥록 명창은 노래를 하면서 맹렬이의 얼굴만 바라 봤습니다. 드디어 ‘귀곡성’을 하는 대목이 되었지요.

밤은 적적 깊었는데
사람 자취 고요하고
밤새 소리는 부웃 부웃
물소리는 주루루루루루루루루
도깨비는 휫휫
바람은 우루루루루루루루루루루루
번개 천둥이 치고
궂은 비는 퍼붓는데
귀신들은 둘씩 셋씩 짝을 지어
이히이히이히이히이히

송흥록 명창은 온 힘을 다바쳐 ‘귀곡성’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어디선가 으시시한 바람이 불어와서 촛불이 한꺼번에 꺼지고, 하늘 한쪽에서 귀신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신이 들린 소리라고 소리치며 열광적으로 박수를 쳐댔습니다. 맹렬이도 넋을 잃은 사람처럼 송흥록의 입만 쳐다보고 무어라 하여야 좋을지 모르는 모양이었습니다.
 

비전마을 송흥록 생가 앞에 서있는 송흥록의 동상.

그날 밤, 맹렬이가 송흥록의 방에 찾아와 문을 두드렸습니다.

맹렬 : 송명창님, 송명창님!
송흥록 : 누구요?

송흥록은 자다 말고 일어나 방문을 열었습니다. 맹렬이가 봇짐을 들고 방 밖에 서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송흥록 : 아니, 맹렬이 아니요?
맹렬 : 선생님, 이제 진짜 명창이 되셨어요.
송흥록 : 모두가 그대 덕분이요.
맹렬 : 그동안 저를 생각하셨나요?
송흥록 : 소리 공부하는 동안 그대 생각만 했소.
맹렬 : 저도 그 동안 선생님 생각 뿐이었어요.
송흥록 : 고맙소.
맹렬 : 우리 당장 떠나요.
송흥록 : 뭐요?
맹렬 : 시간이 없어요. 어서 짐을 싸세요.

사랑에 눈이 먼 두 사람은 그날 밤으로 대구를 떠나 송흥록의 고향인 운봉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예전에는 관청에 춤도 추고 악기도 연주하고 노래도 부르는 기생이 딸려 있었는데 그들을 ‘관기’라고 불렀습니다. 관기는 마음대로 결혼할 수도 없고 허락 없이 그 곳을 떠나서도 안되는데, 관기였던 맹렬이는 죽음을 무릅쓰고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도망 친 겁니다.

보기 드물게 정열이 넘치고 용기 있는 여성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맹렬이란 이름만큼이나 성격이 불 같아 화를 잘 내고 질투심도 많아서 남편이 공연을 갔다가 돌아오는 날짜가 하루만 지나도 난리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진주에서 송흥록을 초청해서 스므 날쯤 갔다 올 예정으로 떠났는데, 여러 사고가 생겨서 이삼 일 늦게 되었답니다. 송흥록은 그 사연을 자세히 적어 사람을 시켜 편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화가 난 맹렬이는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고 봇짐을 싸가지고 집을 나갔습니다.

심부름꾼 : 송명창님!

심부름꾼이 허겁지겁 돌아와서 송명창을 불렀습니다.

송흥록 : 그래, 편지는 전했느냐?
심부름꾼 : 아이구, 말도 마십쇼.
송흥록 : 무슨 소리냐?
심부름꾼 : 제가 가니까 마침 짐을 들고 어디 가시려다가 저와 만났어요.
송흥록 : 그래서?
심부름꾼 : 송명창님 심부름으로 왔다고 하면서 늦으시는 사연을 이 편지에 적어 보냈습니다. 하니까----
송흥록 : 하니까---
심부름꾼 : '그 놈의 거짓말 편지 읽으면 뭐해?’ 하면서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으시고---
송흥록 : 뜯어보지도 않았다구?
맹렬 : ‘다시는 나를 찾지 말라고 송명창에게 전하라’고 하시고는 휭 하니 집을 나가시더라고요.
송흥록 : 아이구, 이거 큰일 났구나!

송흥록은 깜짝 놀라 모든 일을 다 제치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가보니 정말 맹렬이는 간 곳이 없고 빈집뿐이었습니다. 송흥록은 몇날며칠 맹렬이를 찾아 헤맨 끝에 진주고을을 다스리는 병사인 이경하를 모시는 수청기생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진주로 갔습니다. 송흥록이 왔다는 말을 듣고 진주병사가 송흥록을 불러 들였습니다.

진주병사 : 네가 명창이라고?
송흥록 :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줍니다.
진주병사 : 그럼 나하고 내기를 해 보겠느냐?
송흥록 : 어떤 내기를---?
진주병사 : 내 앞에서 판소리를 하는데, 나를 한 번 웃게 하고 또 한 번 울게 하면 상을 줄 것이나, 만일 그렇지 못하면 너의 목숨을 바쳐라.

그제서야 송흥록은 맹렬이 병사에게 가르쳐 준 내기인 줄 알아챘습니다.

송흥록 : 그렇게 하겠습니다.
진주병사 : 그대신 소리는 수궁가를 하여라.
송흥록 : ‘수궁가를? 아이고, 큰일 났구나.’

「수궁가」는 판소리 중에서도 울리고 웃기는 대목이 별로 없는 빡빡한 소리이니 송흥록은 속으로 걱정이 태산같았습니다.

드디어 소리판이 열렸습니다. 송흥록이 아무리 웃기려고 온갖 어리광을 다하여도 병사의 얼굴은 화가 난 듯 점점 굳어져만 갔습니다. 송흥록은 느닷없이 병사 앞으로 달려들어 “아저씨, 왜 안 웃으시오? 나를 죽이고 싶어 그러시오?”했더니 병사가 '픽!' 하고 웃었습니다.

송흥록은 그것을 보고 “우리 아저씨가 웃기는 하였다마는 또 어떻게 우는 꼴을 보나”하더니 토끼가 용궁에서 죽게 된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통곡하는 대목을 불렀습니다. 어찌나 슬프게 부르던지 모든 사람들이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병사도 슬픔을 참지 못해 돌아앉아서 슬쩍 수건을 눈에 대었습니다.

소리판을 마친 뒤 병사가 물었습니다.

진주병사 : 그래, 무슨 상을 원하느냐?
송흥록 : 맹렬이를 원하옵니다.
진주병사 : 맹렬이를?

병사가 맹렬이를 바라보니까 맹렬이가 송흥록과의 관계를 숨김없이 말했습니다. 맘씨 좋은 병사는 껄껄 웃으면서 둘이서 다시 살게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기구한 사연으로 재결합을 하였건만, 또다시 사랑싸움이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인기스타인 송흥록이 여기저기 공연을 다니느라 수시로 집을 비우는 데다가 여성들의 인기도 한 몸에 받았을테니 맹렬이가 화낼만도 하지 않았나 추측해보지만,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사랑싸움의 진상(?)은 알 길이 없습니다.

맹렬이도 한 성질하는 여성이었지만, 송흥록도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었나봅니다. 그러다보니 싸우는 일이 잦아지고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큰 싸움을 한 끝에 맹렬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소리치며 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송흥록은 바로 쫒아가서 화해를 하고 싶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말은 못하고 속에서는 더욱 더 화가 나고 슬픔이 밀려들었습니다. 맹렬이와 영영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온갖 감정이 불길처럼 끓어올라 노래가 터져 나왔습니다.

맹렬아 맹렬아
맹렬아 맹렬아
네 이년 잘 가거라
날 버리고 네가 가면
내가 너를 잊을소냐

어쩌고 하면서 슬프고, 외롭고, 사랑스럽고 하는 온갖 감정을 노래로 불렀습니다. 맹렬이는 문밖에서 듣고 있다가, 그만 봇짐을 내던지고 다시 돌아와 부등켜안고 울면서 화해했답니다.

정말 멋진 사랑 이야기지요? 그 두 분이 백년해로 했는지, 언제 어떻게 이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일제시대에 정노식이 쓴 『조선 창극사』라는 책에는 판소리 명창들에 얽힌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많이 소개되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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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올린 <평생 인연 맺어진 첫 직장「뿌리깊은 나무」>란 글 중에 박록주 명창에 대한 짧은 에피소드를 소개했었습니다.

그때 이미 80세가 넘은 나이로 병마와 싸우고 계셨던 노명창은 제자의 발표 무대에 격려사를 하기 위해 제자들의 부축을 받고 무대 위로 올라섰습니다.

“내가 소리를 한지 한 60년이 되어 가는데, 이제 조금 귀가 뚫리려 하니까 숨도 차고 곧 골로 갑니다.”

하시더니 지팡이를 짚고 앞줄에 앉아 있는 노인들을 죽 바라보면서 농담을 했습니다.

“내가 어려서 소리할 때 자주 오셨던 저 분들도, 인제 나와 함께 골로 가게 생겼네요.”

그러자 앞에 앉은 노인 몇 분이 “얼씨구!”하면서 소리쳤습니다.

“지금 내가 숨도 차고 목도 안 나오고 해서 소리를 하러 나온 건 아니지마는, 우리 제자 길을 닦아주기 위해서 잠깐 단가 한 마디 하고 내려갑니다.”

관객의 박수와 함께 노명창의 노래가 시작되었습니다.

백발이 섧고 섧다
백발이 섧고 섧네
나도 어제 청춘이더니
오늘 백발 한심하다



그 이야기를 쓰면서 박록주 명창에 대해 따로 포스팅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박록주 명창은 남달리 비극적인 개인사와, 『봄봄』, 『동백꽃』의 작가인 김유정이 격정적인 사랑을 바친 여인으로서 유명한 일화를 남긴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박록주(朴綠珠) 명창은 1905년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친 박중근은 집안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노름과 술로 세월을 보낸 한량이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12세 때, 고향에 판소리나 춤이나 줄타기 등의 갖가지 전통예술을 보여주는 순회 공연단체인 <협률사>가 들어왔습니다. 

박록주의 부친이 그 공연 중 판소리 명창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돈도 제일 많이 버는 것을 보고서, 평소 목소리가 우렁차고 노래를 잘 부르는 박록주를 명창으로 길러 돈벌이시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 손에 억지로 이끌려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박기홍 명창의 문하에 들어가서 소리 공부를 한
 박록주는 얼마 뒤부터 경상도 곳곳에 불려다니며 판소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생기는 족족 그의 부친이 놀음값과 술값으로 써버렸다고 합니다. 

그녀는 다시 부친의 손에 끌려 대구로 가서 기생 수업을 받습니다. 당시 그녀는 소녀 명창으로 이름이 알려져서 하룻밤 초청료로 10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쌀 한 가마니가 50전 할 때의 일이니 대단한 수입이었죠. 

그 뒤 17세 되던 1921년에 원산 명창대회에서 만난 남백우와 혼인을 하여 첩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독립지사였다는 남백우는 박록주의 재능을 높이 사서 "그대의 목소리는 만인의 것이 되어야 한다."며 그녀를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1922년, 박록주는 서울로 가서 당대 최고의 명창인 송만갑에게 판소리를 배웠습니다. 그 이후 눈부신 활동을 하며 전성기를 보내던 1928년 봄, 그녀는 '운명의 스토커' 김유정을 만나게 됩니다.
 



김유정이 박록주를 처음 만난 것은 지금의 휘문고등학교인 휘문고보 4학년 때였습니다. 그들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박록주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이후 김유정은 박록주의 공연에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사랑을 호소하는 편지를 띄웠으나 번번이 무시되었습니다. 그러자 김유정의 연정은 점점 불타 오르기 시적했습니다.

그는 그녀의 집에 찾아가 적극적으로 사랑을 호소하였습니다. 호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혈서로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하고,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패기와 열정에 넘치는 구애이기는 하였으나, 제가 보기에도 정상을 넘어 선 그의 구애 방식은 여성의 사랑을 얻기엔 너무도 일방적이고 서투른 것이었다고 보여집니다.

게다가 김유정보다 3살이나 나이도 많고 기생 신분이었던 박록주는 끝끝내 그의 사랑을 거절합니다. 박록주 명창은 늘그막의 인터뷰에서 막무가내로 집에 찾아 와서 사랑을 고백하는 김유정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합니다.
 


무슨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편지질이오?
학생이 기생과 무슨 연애를 하자는 말이오?
학생이 이러면 나도 가슴이 아프오.
공부를 끝내면 다시 나를 찾아 주시오.

(박록주 명창의 회상기 <여보, 도련님 날 데려가오>에서)



김유정은 1908년 지금의 강원도 춘천군 신동면 증리인 실레마을에서 부친 김춘식씨의 2남 6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내노라 하는 부농이었지만 유정이
7살 되던 해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뜨고, 그 2년 뒤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가장이 된 형은 잦은 난봉과 가정 폭력을 서슴지 않아 잡안의 재산은 탕진되고, 유정은 갈 곳도 없어 삼촌에게 얹혀 지내게 되는데,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던 청춘 시절에 박록주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하루도 빼지 않고 보낸 그의 편지는 되돌려지거나 찢어지거나 불태워지고, 사랑을 얻지 못한 그는 깊은 절망과 좌절에 빠집니다.

1929년 3월, 휘문고보를 졸업한 김유정은 연희 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지만 두 달 여만에 제명 당하고 맙니다. 그 무렵에도 그는 박록주에게 계속 연애편지를 보내고, 끈질긴 구애를 계속합니다.

김유정은 혈서와 협박과 애원으로 가득한 거의 스토커에 가까운 열렬한 구애를 3년 동안이나 계속합니다. 그러나 박록주는 끝끝내 김유정을 차갑게 대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당시의 조선극장 지배인 신모씨와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1929년 3월, 박록주는 여전히 자신을 갈취하며 괴롭히는 부친에 대한 원망과, 자신을 배신한 신씨와의 애정관계를 비관하여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김유정 못지 않게 박록주도 외로움과 격정에 시달리는 성격이었던 모양입니다. 

박록주가 자살에서 깨어나니 김유정이 병실에서 머릿맡을 지키고 있었다는군요. 그렇다고 그녀의 마음이 돌아서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1930년 여름, 마침내 김유정은 박록주의 사랑을 얻는 것을 포기하고 실레마을로 돌아옵니다. 얼마 뒤 1931년에 박록주는 경제적으로 그녀를 후원하는 김종익과 재혼하였습니다.

사랑을 잃은 김유정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한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폐결핵 등의 병을 얻은 뒤, 병과 가난에 시달리며 
소설쓰기에 매진합니다. 

드디어 1935년 『따라지 목숨』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1등으로 당선되고 『노다지』가 중앙일보에 가작으로 당선된 뒤
,『봄봄』,『금따는 콩밭』,『만무방』같은 작품들을 발표하였고, 1936년에도『동백꽃』,『봄과 따라지』,『슬픈 이야기』등을 연이어 발표하여 뛰어난 소설가로 유명해지고, 이상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과 교류도 하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19
37년 3월 29일 김유정은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삼십여 편의 작품을 남겨 놓은 채, 아내도 없고 슬하의 자식도 없이 홀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편 박록주는 해방 후 김소희, 박귀희 등의 여류 명창들과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6. 25 때는 월북을 강요 당하기도 했으며, 전쟁통에 한쪽 눈을 실명하여 그 뒤로 검은 안경을 쓰고 다녔습니다. 



그녀는 음반 취입이나 무대 공연 등으로 많은 돈을 벌기도 했지만 돈이 생기면 모두 써버리는 성격 탓에,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
늑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강렬했던 그녀의 눈빛도 차츰 빛을 잃어갔습니다. 

남편도 없고 슬하의 자식도 없이 외롭고 가난하게 살며
셋방을 전전하던 박록주는 1979년 면목동의 단칸방에서 홀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유정이 죽은 뒤 남겨진 일기장에는 '녹주, 너를 사랑한다!' 혈서가 발견되었다고 하네요.

김유정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자신을 잊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은 박록주 명창은 훗날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아마 내가 그이에게 너무 박절하게 대했던 벌을 늦게 받아서 평생 가난하고 기를 거 없이 살았지 않았나 싶소.

그이가 그렇게 훌륭한 소설가인줄 알았더라면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보게 해 줄 것을 그랬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의 한 여인에 대한 집요한 짝사랑!

이승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홀로 쓸쓸하게' 세상을 뜬 두 분의 죽음은 너무도 닮았습니다. 아마도 저승에서 뒤늦은 사랑을 나누며 외로움을 달래고 계시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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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려서부터 음악이나 문학이나 미술 등 예술에 심취하는 취향이 너무도 강했습니다.

그런 저를 아버지는 엄하게 대하셨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저에 대한 애정은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님은 평생 동안 저에게 꾸지람이나 욕설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입가에 떠도는 따뜻한 미소가 어머니의 전매 특허였습니다.

서울에서 대학교 다니던 아들이 갑자기 연극에 미쳐 술독에 빠져 지내고, 방탕한(?) 생활 끝에 병에 걸려 집에 돌아왔을 때도 부모님은 한 마디도 나무라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병간호를 하셨습니다.

또 휴양하던 병자가 판소리에 미쳐서 노래를 불러대니 참다못한 옆집 아주머니가 어머니에게 “댁의 아드님이 무당될려고 저런 괴상한 노래를 부르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런대도 어머니는 빙긋 웃으시며 “우리 아들이 노래부르는 걸 좋아해요.” 하실 뿐이었습니다. 제가 기분이 나빠 한동안 판소리를 안 부르니까 어느 날 어머니는 “너 왜 무당 소리 안하냐?”고 하셨습니다. 제가 “그 소리가 듣기 좋아요?”하고 물으니 어머니는 “우리 아들이 하는 소리니 듣기 좋지.”하고 빙긋 웃으셨습니다.

대학 졸업 후 배화여고 독어교사를 하던 중「뻐꾹 뻑 뻐꾹」이란 연극에서 거지노인 역을 했는데, 그게 부모님에게 처음으로 보여드린 제 무대 연기였습니다.



공연을 보시고 돌아간 어머니께 어땠냐고 물으니까 “응, 영락없이 네 아버지 같더라. 그런데 네 이모가 거지 노릇은 다음에는 안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하며 웃으셨습니다.

아들이 대학 교수가 되기를 바라셨던 아버지는 제가 직장마저 그만 둔 뒤 연극을 하겠다고 하자 처음엔 실망하셨지만, 나중에는 진심으로 이해를 하고 신문에 연극이나 국악 기사가 나면 오려 두었다가 제 책상에 슬며시 놓아주시곤 했습니다. 

주변의 일가친척들이 오히려 왜 아들을 말리지 않느냐고 어머니를 비난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하신 대답은 언제나 똑 같았습니다.

“우리 아들이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야지요.”

부모님은 그렇게 아들을 믿은 대가로 혹독한 가난과 병마와 싸우며 힘들게 사시다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결혼하는 모습도 보지 못하시고, 「서편제」로 유명해지는 기쁨도 누리지 못하시고, 무명 배우의 부모로서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두 분 다 돌아가실 때까지 아들을 원망하거나 비난하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제가 돈벌이도 안 되고 독재 정권 밑에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진보적 연극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심하게 반대했더라면, 저는 연극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분은 언제나 저를 믿어주고, 든든한 후원자로서 존재하셨습니다. 전 두 분이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저의 '수호천사'가 되어 지켜주고 계실거라 믿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예술의 황량한 들판에서 버텨온 것은 오로지 부모님의 믿음과 사랑 덕분입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큰 ‘빽’이 되는지 실감합니다. 좌절하고 불안하고 절망에 빠질 때마다 저를 지탱해주는 것은 저 세상에서도 저를 응원하는 '수호천사'가 계시다는 든든함입니다.

왜 저의 부모님은 언제나 제 편이었을까요? 너무 일찍 돌아가시는 통에 그걸 여쭤보지 못한 게 한이 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부모님에게 여쭤보고 싶습니다. 제가 연극을 한다고 부모님을 실망시켰을 때 저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마음을 어떻게 잃지 않으셨느냐고.

언젠가는 제 꿈에 나타나 가르쳐주시겠지요.

그 가르침을 이어 받아 저도 우리 아이들의 ‘빽’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저 세상에 가서도 아이들과 이 세상의 수많은 외롭고 소외 당한 이들을 지켜주는 '수호천사'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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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나그네님과 예스비™님으로부터 릴레이 바톤을 이어받았습니다. 추천 감사드립니다.

[편견타파 릴레이]
1. 자신의 직종이나 전공 때문에 주위에서 자주 듣게 되는 이야기를 써주세요.
2. 다음 주자 3분께 바톤을 넘겨주세요.
3. 마감기한은 7월 31일까지 입니다.




몇 년 전에 어느 도의 국악원 단원들이 고위관료들의 술자리나 잔치 자리에 수시로 불려 가 노래를 부른 사례를 폭로하며 “우리가 기생이냐?”고 공개적으로 항의한 일이 있었습니다.

때아닌 “기생 논쟁”에 많은 분들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관료들의 구시대적인 관행을 꾸짖었습니다. 그 일은 곧 마무리되어 잠잠해졌지만, 봉건사회의 천민 계급이었던 기생이나 광대들의 예술혼으로 이어져 온 전통 예술에 대한 편견은 아직도 이 사회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의 판소리 스승인 고 박초월 명창은 고향이 남원군 운봉면인데 전라도 쪽에서 공연 초청이 오면 다른 때보다 유난히 신경이 예민해지고 가기 싫어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서울에서는 인간문화재로 “선생님” 대접을 받고 있는데, 고향에만 가면 술자리에서 “초월이, 소리 한마디 해봐”하는 노인 팬들의 무례함에 속이 상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평소에도 술자리에서 함부로 소리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신신 당부하셨습니다. 그 가르침 때문에 저 역시 술자리에서 소리하는 일을 조심스럽게 여기게 되었지만, 지금껏 지내오는 동안 그 가르침을 제대로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서편제> 이후 여러 모임이나 술자리에서 소리 한 마디 청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아 곤혹스러운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노래를 청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분위기와 예의가 필요한 법인데, 너무도 쉽게 소리 한 마디를 요구할 때마다 상대방이 기분 상하지 않게 거절하느라 진땀을 빼곤 했습니다.  저같은 아마추어가 그럴진대 국악에 몸담고 정진하는 예술가들은 그런 경우를 얼마나 많이 겪겠어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성악가에게 오페라 아리아를 청하기보다 판소리 명창에게 소리 한마디 청하는 걸 더 쉽게 생각합니다. 한술 더 떠서 민요나 판소리나 한국춤은 술자리에서 해야 진짜 맛이 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때로는 기생 점고를 통해 국악인을 희롱하는 변학도의 풍류 취향이 남아 있는 사회 지도층 인사도 종종 눈에 띕니다. 이런 시대 착오적인 풍류객들이 종종 예술가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어느 국악 콩쿨에서 입상한 젊은 여자 명창은 입상 축하 회식 자리에서 또 다시 판소리를 부르게 하고, 술시중까지 요구하는 주최사 사장님의 추태에 수치심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국악하는 여성이나 여가수나 여탈렌트나 여배우들을 술자리의 여흥을 돋우는 도우미나 하룻밤 잠자리 시중을 드는 고급 화류계 여성처럼 함부로 대하는 남성들의 편견 섞인 말이나 행동을 보면 저는 분노가 밀려 오곤 합니다. 장자연님의 자살에 대해 너무 마음이 아픈 것도 그런 편견이 젊은 여성의 마음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줬는지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나 전통 예술은 현대 대중 예술의 위세에 눌려 맥을 못 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진국일수록 자기 나라의 전통 예술을 지켜 내기 위해서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일본의 가부키나 중국의 경극, 인도의 전통극들은 일찍이 정부와 기업의 지원 아래 유럽이나 미국의 예술계에서 동양의 우수한 예술로 인정받고, 지금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또 유럽 각국도 미국 대중 문화에 대항해서 자국의 전통 예술을 살려 내기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화려하고 부유한 애호가들에 둘러싸인 서양의 전통 예술가들에 비해 소박한 촌로와 서민들에게 둘러싸인 이 나라 전통 예술의 현실이 너무 마음 아픕니다.  

많은 분들이 전통을 사랑하고 키워내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생활에서 전통은 아직도 편견 속에서 소홀하게 취급당하고 있으며, 때로는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수많은 전통 예술인들은 슬픔을 느끼면서도 오로지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힘겨운 삶을 지탱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스타 가수들이나 스타 탤런트들이 받는 것과 같은 고액의 개런티도 아니고, 정부로부터 받는 지원금을 두배 세배 올려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편견없는 사랑과 관심입니다. 그들이 예술가로서 진정한 자부심을 느끼고, 예술가로서 성장할 희망을 갖도록 마음을 써 주는 주변의 깊은 배려인 것입니다.


 
 예스비™님을 통해 바톤이 넘어온 경로

 1. 라라윈님 : 독서릴레이 + 새 릴레이 시작, 편견타파 릴레이

 2. 해피아름드리님 : 편견을 버리세요~~편견타파 릴레이...

 3. 검도쉐프님 : [편견타파 릴레이] 편견을 버리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4. 용짱님 : [편견타파 릴레이] 용짱은 된장남?

 5. 생각하는 사람님 : [편견타파 릴레이]생각이 없는 생각하는사람?

 6. White Rain님 : [편견타파 릴레이]남자가 팩하면 별난 사람?

 7. 코로돼지님 : [편견타파 릴레이] 고양이 키우면 유산해?

 8. 영웅전쟁님 : [편견타파 릴레이] 왼손잡이의 편견에서 벗어나자

 9. 아이미슈님 : [편견타파 릴레이] 보이는게 다가 아니다. 여자라고 어리다고 냅다 반말부터?

 10. leebok님 :  [편견타파릴레이]수학을 잘해야 과학자가 될수 있나요?

 11. 미국얄개님 :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주인공은 바로 자기자신

 12. 예스비™님 : 편견타파 릴레이_ 나이는 숫자에 불과 하다면서?
 



 
 바람나그네님을 통해 바톤이 넘어온 경로

 1. 라라윈님 : 독서릴레이 + 새 릴레이 시작, 편견타파 릴레이

 2. 해피아름드리님 : 편견을 버리세요~~편견타파 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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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용짱님 : [편견타파 릴레이] 용짱은 된장남?

 5. 생각하는 사람님 : [편견타파 릴레이]생각이 없는 생각하는사람?

 6. 라이너스님 : 비싼 카메라 든 사람은 정말 사진을 잘 찍을까? [편견 타파 릴레이]

 7. 펨께님 : [편견타파 릴레이] 편견은 무지다.

 8. 바람나그네님 : [편견타파 릴레이] 편견은 배척을 낳는다.


 


제가 바톤을 넘기고 싶은 분을 3분씩 추천합니다.

바람나그네님 쪽
1. 쏭군님 : 저한테 독서릴레이 바톤을 주셨으니 빚을 갚아야죠?
2. 뷰라님 : 방송계의 편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황금촉.
3. 정운현님 : 역사와 우리 사회에 대한 편견을 께뜨려주시는 분. 

예스비™님쪽
1. 곤이엄마님 : 시골 생활에 대한 도시인들의 편견을 깨뜨려 주시는 분.
2. 붉은방패님 : 물구나무 서서 세상을 보는 분.
3. heraus님 : '생각은 자유'라는 소신으로 글을 쓰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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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부 장관 직을 그만 둔지도 어느 덧 2년이 되어 간다.
그동안 TV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연기자로, 연극 <밀키웨이>에서는 극작과 연출가로, 최근에는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위원장으로서 즐겁고 바쁘게 살고 있다.
 

내가「대왕 세종」에 출연하고 있을 때, 모 일간지에 동정 기사가 실렸는데 그 기사의 제목이 한동안 여기저기서 화제가 됐다.


김명곤 씨 “장관 껍데기 훌훌~ 다시 광대로”

“장관이라는 껍데기를 훌훌 벗어 버리고 이제 천직인 광대로 탈바꿈해야죠. 걱정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허허.”

김명곤(55·사진)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내년 1월 방송 예정인 KBS 1TV 사극 ‘대왕 세종’(극본 윤선주·연출 김성근)에서 배우로 복귀한다. 1999년 자신이 연출한 연극 ‘유랑의 노래’에 출연한 지 8년 만이다.

그는 그동안 국립극장장과 문화부 장관을 지내면서 연기와 멀어졌다.김 전 장관은 ‘대왕 세종’에서 고려 황실의 후예로 조선 왕조의 전복을 꿈꾸는 옥환 역을 맡았다. 옥환은 어린 세종을 긴장하게 만드는 인물로 초반 30회까지 비중이 큰 역할이다. 그가 대하 사극에 출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D일보 2007년 10월 6일자 기사 중 일부)

나는 대학교 다닐 때만해도 광대라고 하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코에 빨간 공을 붙인 서양의 삐에로를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줄타기하는 광대를 처음 보았는데 그 광대가 줄에 올라서서 “이 줄타기가 옛날에는 화랑의 기예였소!.” 하길래 깜짝 놀랐다. "화랑이라면 신라 시대의 무사 집단인데 줄타기를 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며 광대에 관한 기록을 찾아봤다.

우리나라에 그윽하고 오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며 유교, 불교, 도교의 3교를 포함한 것으로 민중을 교화하는 것이다.

신라 시대의 학자인 고운 최치원이 쓴 글이다. 이 글을 바탕으로 역사가인 단재 신채호는 이렇게 썼다.
 

선가(仙家)는 신라의 국선 곧 '화랑'으로 보며, 그 시원은 삼한의 소도(蘇塗)의 제관으로 고구려의 '조의선인(鳥衣仙人)'이다.

이런 글들을 보니 고대사회에서 예술가들은 하늘에 국가적 제사를 지낼 때는 제관으로서 활동했고, 그들의 신분은 왕족이나 귀족에 속하는 상류계급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통일신라가 무너지고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화랑들과 함께 예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천민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광대”라는 말은 고려시대에 서역에서 들어 와 우리말로 정착된 외래어인데, 예술가를 지칭하는 단어인 광대가 화랭이, 재인 등의 용어와 뒤섞이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광대들은 기생, 무당, 중, 백정 등과 함께 천민계급으로 살아야 했다. 이들은 사대부나 평민들과 한 동네에서 살지도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하고,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자기들끼리 기예를 전수하면서,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고, 그들만의 독특한 사회를 꾸려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광대들에 대해 다산 정약용은 이런 상소문을 썼다.

광대가 봄·여름이면 고기잡이를 좇아 어촌으로 모여들고 가을과 겨울이면 추수를 바라고 농촌으로 쏠리는데, 특히 창촌에서는 사당, 창기, 주파, 화랑, 악공들의 잡류들을 엄금해야 합니다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본 <왕의 남자>는 이 무렵의 떠돌이 남사당 광대패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실학사상이 일어나고 평민 가사, 탈춤, 판소리 등의 가치를 양반들 중의 몇몇이 언급하게 되면서 광대들의 가치가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고종과 대원군이 권력을 쥐었던 무렵에는 광대들이 왕족이나 고위 관리들의 잔치에 초대받고, 심지어 명인, 명창, 국창 등의 이름으로 궁궐에 들어가 임금 앞에서 기예를 선보이며 많은 돈을 벌고 신분의 상승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조선이 망한 후 광대들은 또 다시 천대받게 된다. 그 상황은 일제시대의 학자인 육당 최남선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조의 재인, 광대들은 적극적으로 특별한 권장을 입지 못하고, '무식무기력한 예인'들이 사회 최하층적 지위에서 구차히 존재하다 보니까 거기 쇠잔이 있을 뿐이지 발달이 없으며 저락이 거듭될 뿐이지 향상을 볼 수 없음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조건 하에 있다 보니까 '수 천 년을 하루같이' '몸을 놀리는 기술'과 '우스개 놀이'쯤에 그치고 드디어 다른 데 만한 순희곡적 생장을 이루지 못하고 만 것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명 풍화에는 조금도 유익한 바가 없으니 이는 연희를 실시하는 자가 학문이 없어 '동양의 부패한 풍습'만 알 뿐이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했던 <서편제>는 이 무렵의 떠돌이 판소리 광대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나는 대학시절에 오페라나 이태리 민요나 가곡이나 뮤지컬이나 비틀즈 등의 서구음악의 열광적 팬이었고, 괴테나 세익스피어나 입센이나 도스토에프스키 등의 서구문학(독문학)에 심취했던 사람이다. 그러다 우연히 판소리를 알게 된 후로 내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고향인 전주를 무지 싫어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의 흔적이 너무나 짙은 그 곳을 어서 떠나 서울로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진학공부를 했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도 한국을 빨리 떠나 독일로 유학 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인간문화재인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면서 전라도 말이 그렇게 다양한 표현과 영롱한 문학적 향기가 있는가를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핏줄에 대한 애정 곧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나의 조상과 조국에 대한 사랑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전통은 박물관에 진열된 골동품이 아니다. 전통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았던 삶의 내용과 형식 곧 그 분들의 삶의 자취이고 향기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세월이 지나면 전통의 계승자가 될 것이며, 언젠가는 전통 그 자체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나에게 전통은 ‘나를 숨쉬게 하고, 나를 활기 있게 만들어 주고, 또 창조의 열정에 불타게 하는 소중한 원천이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무식무기력’한 광대들에게서 내 예술의 많은 부분을 배웠다. 나는 ‘수천 년을 하루같이’ ‘동양의 부패한 풍습'을 몸으로 전해 온 그들의 예술에 매혹 당하고 심취하고 깊이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들의 ‘몸을 놀리는 기술’ 속에서 삶의 깊은 애환과 감동을 보았고, 그들의 ‘우스개 놀이’ 속에서 예술적 창조의 편린을 보았다. 그들은 나의 스승이었고, 나의 애인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 종족의 일원이 되고자 ‘광대’라는 말을 쓴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연기, 연출, 극작, 경영, 행정에다가 연극, 영화, 국악, 방송 등 여러 분야에 간여하는 것을 보고 혼란스럽다고 한다. 

당신의 정체는 뭔가? 아마도 이게 그들의 질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나는 그 모든 것을 추구하는 광대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럼 당신은 어떤 광대가 되고 싶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
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라는 책에 나오는 발렌친 카그다예프라는 브리야트 족의 샤먼과 저자와의 대화로 대신하고자 한다.

질문 : 당신 삶의 목표는 무엇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

답변 : 훌륭한, 혹은 좋은 샤먼이란 자신이 함께 살아가는 민족을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는 좋은 샤먼이 되고 싶고, 따라서 우리 민족이 서로 도와가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본다.-----사랑을 나누고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모든 샤먼이 지녀야 할 미덕이다.

반면 모든 악과 문제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과 자연과 사물을 착취하는 데서 발생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인내하고 이해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남을, 상대방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상대가 원하기 전에 그가 원하는 것을 먼저 베풀어 주는 것이 사랑의 첩경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현자와 성자들이 설파했던 조화와 사랑, 이것의 실천자로서의 샤먼 곧 ‘무당’의 역할에 대한 바이칼 샤먼의 지혜로운 말이 ‘광대정신’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광대란 '넓은 광(廣), 큰 대(大)'라는 말 뜻 그대로 ‘넓고 큰’ 영혼으로 세계의 불화와 고통에 정면으로 마주 서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온 몸으로 감싸 안고 표현하는 예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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