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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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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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번'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0.08.11
    맑은 영혼의 마지막 궁중광대, 김천흥 명인 (8)
  2. 2010.08.07
    미국 처녀도 반해서 뽀뽀한 춤, 하보경 명인 (9)
  3. 2010.06.14
    나를 '광대'라 부르지 마라, 정광수 명창 (2)
  4. 2010.05.18
    4대째 이어지는 외곬수 고집, 정권진 명창 (8)
  5. 2010.04.22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박동진 명창 (24)
  6. 2009.05.11
    명창들은 정말 목에서 피를 토했을까? (20)

예전에 궁중음악과 민속음악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었습니다.

신분도 다르고, 음악의 성격도 다르고, 음악을 듣는 청중도 달랐습니다. 따라서 궁중음악인과 민속음악인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 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국악계 내부에 미묘한 갈등의 흐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 무형 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과 제39호 <처용무>의 예능 보유자인 김천흥 명인은 그런 갈등에서 무척 자유로운 분입니다.

그는 민속무용과 궁중무용, 민속음악과 궁중음악을 고루 익혔고, 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전통을 전수해 오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는 일들을 무리없이 해 온 분입니다.

1909년 2월 9일에 서울 중구 황학동에서 목수 일을 하던 김재희 씨의 셋째아들로 그가 태어났을 때, 우리나라는 이미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있는 참이었습니다.

1910년에 한일 합방이 되자 조선 왕실이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그에 따라 궁중 음악 담당 부서인 '장악원'도 해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년에 네 번 지내는 제사와 임금의 생일 같은 행사에는 궁중 음악인 '아악(雅樂)'을 연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허가를 얻어 서울의 서대문구 새문안 교회 뒷골목에 있던 '봉상소' 안에 ‘이왕직 아악부’를 설립했습니다. 봉상소는 궁중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이는 음식을 만들어 바치는 곳이었습니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궁중 음악가들은 그곳에 모여 일본 총독부에서 열리는 행사와 문묘와 종묘의 제사 때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1918년에 아악 부원 1기생을 모집하여 아악을 전수하고, 그들이 졸업하자 다시 1922년에 2기생을 모집했습니다.

소년 김천흥은 정동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서당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악부에 들어가면 공부도 시켜주고 장학금도 한 달에 15원씩 주고 학용품도 다 대준다는 말을 듣고 그 길로 2기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곳에서 3년 동안 일본어, 한문, 산수, 습자와 같은 일반과목과 종묘 제례악과 문묘악  등의 아악에 쓰이는 여러 가지 기초를 골고루 공부했습니다.

민속 음악이 사람의 귀에 여러 가지 정서를 호소하여 끊임없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데 견주어서, 아악은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하고 단정하게 만듭니다.

“즐거웁되 질탕하지 않고, 슬프되 비통하지 않고, 단아하고 담담한 음악이 참된 음악” 이라는 음악론에 따라 만들어진 아악의 음률을 듣노라면 마음이 가라앉다 못해 나중에는 지루해져서 하품마저 나올 지경이라, 여간한 정성과 인내가 없이는 쉽사리 이 음악과 친해지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요란하고 빠르고 자극적인 현대 유행음악에 길들여진 젊은이들에게는 역사극에서 나올 법한 차림을 하고 편종, 피리, 적, 소, 생황, 해금, 축어, 박과 같은 이상한 악기들을 하염없이 길게 느릿느릿 연주하는 아악의 연주 모습을 보게 되면 그만 한국의 고전음악은 이상하고 어렵고 재미없는 것이라고 단정지어 버릴 것입니다. 그만큼 아악은 대중의 음악 정서와는 전혀 다른 음악 세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악은 조선 왕조가 망하기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궁중의 제사나 외국사신 접대나 왕족의 생일과 같은 궁중 행사를 벌일 때에만 쓰이던 음악이었기 때문에 민중들은 그 음악을 들을 기회도 없었습니다. 

또한 아악에 종사하는 음악가들은 대대로 궁중에 몸을 담고 그 음악의 전통을 지키고 가꾸는 데에만 온힘을 기울였으므로 그들이 민속음악과 접촉할 기회는 매우 적었습니다.

“그때 우리를 가르친 선생님은 모두 여러 대에 걸쳐서 아악사 노릇을 해 오던 집안 출신이셨는데 지금의 교장격인 '아악사장'은 명완벽 선생님이었구, 그 밑의 '아악사'는 요새 교감 같은 건데 김영제 선생님과 함화진 선생님이 계셨어.
함화진 선생님은 <증보 가곡 원류>, <조선 음악 통론> 같은 귀중한 음악이론서를 남기신 분으로 거문고, 가야금, 양금을 가르치셨고, 김영제 선생님은 바깥 세상과 일체 왕래를 안 하시고 오로지 악기 공부에만 골몰하신 분으로 피리, 대금, 해금과 같은 악기의 악보를 채보하여 남기셨는데, 가야금과 이론을 가르치셨어. 그 밖에 '아악수장'이 여덟 분이 계셨고, 그 밑에 '아악수'가 여럿 있고, 또 그 밑에 '아악수보'가 있었지.”

이왕직 아악부에 들어간 이듬해인 1923년, 그의 나이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에 순종 황제의 50세 생일 잔치가 인정전에서 벌어진다는 계획이 세워지자 학교는 갑자기 부산해졌습니다.

아악을 연주할 때에는 여자 ‘무령’들이 춤을 추어야 하는데, 장악원이 해산됐을 때 무령들도 함께 해산되어 춤추는 일을 그만 두거나 권번에 들어가 기생 노릇을 하였으므로 그들을 다시 불러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 중에서 무동을 뽑아 춤을 가르쳤는데 김천흥도 무동으로 뽑혀 겨울 내내 아악부에서 합숙을 하면서 <춘앵전>, <장생보연지무>, <보상무>, <포구락>, <무고>, <수연장>, <봉래의>, <황연무>, <가인전목단>, <처용무>와 같은 궁중무를 배웠습니다.

“궁중무용이 한 마흔 가지가 되는데 내가 배운 것은 열 가지 쯤 되지. 그런데 이 춤은 한없이 느린 장단에 맞추는 몸짓이라 발걸음 하나, 팔 올리는 동작 하나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몰라.”

이렇듯 힘든 수련을 거쳐서 순종 임금과 왕후, 그리고 여러 왕족들과 일본 총독, 경무총감, 군사령관과 같은 거물들이 보는 앞에서 벌벌 떨면서 춘 춤이 그의 첫 무대가 되었습니다.

그후 1926년까지 춤과 음악을 익힌 그는 졸업할 무렵 학생들에게 전공 악기를 정해줄 때 “너는 몸이 약하니 해금을 하라!” 는 스승의 명령에 군소리 한 번 하지 못하고 해금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가다가 가다가 듣노라
부엌에 가다가 듣노라
사슴이 장대에 올라서
해금을 켜는 걸 듣노라.

사슴이 해금을 켠다는 재미있는 가사로 <청산별곡>에 등장하는 해금은 ‘깽깽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낑깽낑깽' 하는 독특한 소리를 냅니다.

본디 중국 동북방 유목민족의 악기가 중국에 전해졌다가 고려 때에 송나라에서 다른 악기와 함께 들어와 처음에는 궁중의 제례와 잔치에 사용되었는데, 지금은 아악과 민속악에 두루 쓰이는 악기입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_blog/photoList.do...3D738949

그는 해금의 명인인 이순용과 이원근에게 해금을 배웠습니다. 해금은 음량이 피리나 대금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주음 악기가 되지 못하고 그 악기들을 보조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해금으로 <여민락>, <상영산>, <수연장지곡>, <장춘불로지곡>, <보태평>, <수제천>, <중광지곡>, <만파정식지곡>과 같은 음악들을 익힌 그는 졸업한 뒤에 '아악수보'로 임명되어 연주자 생활을 하다가 차차 급수가 올라가서 '아악수'와 '아악수장'까지 지내게 되었습니다.

“아악수장 7년 하다가 아악부를 그만 뒀지. 그만 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많았지만 그 중에 하나가 월급에 불만이 많았던거야. 월급 책정이 제멋대로이고 규정도 없이 올렸다 내렸다 뒤죽박죽이야. 그래서 싸우고 나와 버렸지. 나와서 조금 있으니 하규일 씨가 권번 양성소로 오라고 해서 잠깐 가 있었지.”

하규일은 가곡과 가사의 명인으로 권번에서 기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아악부에 있을 때부터 그와 친분을 맺어 가곡, 가사, 시조를 틈틈이 배웠기 때문에 즐거이 그의 청을 따랐습니다.

그러다가 1941년 조선 총독부 학무과 산하에 조선음악협회가 생겼을 때, 그 협회의 회원이 되어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악사인 함화진이 주축이 되고 이론가인 박헌봉, 연극인인 현철, 판소리 명창인 이동백, 박녹주, 조상선 등이 모여서 만든 이 협회는 아악과 판소리와 민속 무용과 경·서도 민요의 명인들이 총집합하여 부민관에서 창단 기념공연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새로 말하자면 민간단체가 아니고 어용단체인 셈인데, 이 단체라도 등에 업지 않고서는 도저히 공연을 할 수가 없는 시절이었어. 어쨌든 창단 공연에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총독부 사람이 놀랠 지경이었지.”

그런데 창단 공연이 끝난 뒤 극단협회라는 단체를 이끌고 있던 박진과 김관수 같은 사람이 자기 협회에 가입하라고 종용했습니다.

“그 사람들 얘기로는 창극이 연극이니까 자기 협회에 들어와야 된다는 게야. 우리는 창극이 왜 연극이냐 음악이지 하고 맞서서 굉장한 논쟁이 벌어졌지. 어쨌든 우리가 고집을 부리고 안 들어가니까 이 사람들이 경찰국을 이용해 가지고 우리 공연을 방해했어. 그러니 공연 허가가 안 나는 거야. 불순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공연이니까 안 된다는 거야. 그래서 단체를 학무국에서 정보국으로 옮겼지. 요새로 말하자면 정보부 같은 곳이야.”

정보국으로 옮긴 다음에는 대본을 모두 일본말로 직역하여 조사를 받은 뒤 허가를 얻어 공연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산업전사 위문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광산이나 군수 공장에 가기도 하고, 군위문 공연도 다니고, 독립운동가나 사회주의자와 같은 사상범 선도 교육단체인 대화숙 주최로 북한 일대와 만주를 순회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연 내용 중에 일본을 선전하고 전쟁에 나가라고 선전하는 것은 없었어. 뭐, 문학가들은 그런 강연도 많이 하고 연극인들은 그런 연극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저 전통 창극하고 영산회상 같은 것만 공연했어.
그렇지만 어쨌든 일본에 협력한 것은 사실이겠지.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을 욕할 수는 없어. 그때는 전시라서 화류계도 모두 철거됐을 때니 요정 같은 데서 돈을 벌 수도 없구. 다른 공연은 허가가 안 나니 그런 공연이라도 안 하면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든지, 굶어 죽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어.”

그 역시 굶어 죽지 않으려고 단체를 따라다니며 사무도 보고 악기 반주도 하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임석 경관이 일본어로 된 대사와 공연 내용이 틀리면 표시해 두었다가 공연이 끝난 뒤 단장과 단원들을 죽도록 두들겨 패는 그런 살벌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도 별별 비상한 수단을 다 써서 징용을 피해가면서, 조선 천지 안 돌아다닌 곳 없이 돌아다니며 뼈저린 고생을 하던 중에 해방을 맞았습니다.

해방이 된 뒤에는 좌익의 '음악 동맹'과 우익의 '대한 국악원' 사이에 심한 논쟁과 갈등이 생겨 대한 국악원의 무용이사였던 그는 분쟁을 해결하느라고 분주히 뛰어다녔습니다. 게다가 6.25가 나기 두 해 전에는 아악부가 폐지될 지경에 이르자 이왕직 아악부의 후배인 이주환 명인의 요청으로 아악부 일까지 맡게 되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6.25가 나던 무렵에 그는 대한 국악원 안에 생긴 학생 국악동우회의 창립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북쪽에서 민청 사람들이 오더니 우리 사무실을 비우라는 거야. 그리고 악기도 없애 버리겠다고 해서 부랴부랴 덕수궁 박물관 밑에다 악기를 숨겨 놨지. 그때 숨겨 놨던 악기들이 지금 국립국악원에서 쓰고 있는 것들이야.
모두들 어쩔 줄 모르고 매일같이 비원 앞 느티나무에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는데, 사상 교육을 실시한다고 모두들 모이라는 거야.
그러던 어느 날, 부산에 공연을 갔다가 소식이 끊어졌던 조상선, 정남희, 임소향이가 얼굴이 시커매서 들어와. 부산에서 서울까지 죽을 고생을 걸어왔다는 거야. 그러더니 이제 새 세상이 왔다고 좋아하더란 말이야.
그러다가 혜화동 교회에 예술인들이 총집합해서 강연을 받을 때였는데, 폭격이 시작되고 수라장이 벌어졌어. 그래 성경린 씨하고 나하고는 몰래 도망쳐서 빠져나왔고 나머지 사람들도 어찌어찌해서 살아났는데, 그 세 사람은 북쪽 사람들을 따라서 올라갔지.”

월북했거나 납북된 국악인들에 대한 자료가 소상하게 밝혀 있지 않은 터에 그의 증언은 나름대로 귀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특히 오랫동안 국악 단체의 사무장 일을 보면서 그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경험한 덕분에 단체와 단체 간에 생기는 알력이나, 단체가 생기고 없어지게 된 배경과 원인을 훤히 알고 있으므로 현대 국악의 소중한 자료들을 많이 지니고 있는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찌됐든 6.25가 끝난 뒤 1955년에 국립국악원이 생기자 그는 무용가 협회의 이사가 되었고, 그뒤로도 국악과 무용 양쪽 단체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틈틈이 작품발표회도 가졌습니다.

1956년에 궁중무를 무대화한 첫 발표회를 가졌고, 1959년에 무용극 <처용랑>과 몇 개의 소품으로 2차 발표회를 가졌습니다. 1963년에는 무용극 <봉산 탈춤>과 <흥부 놀부>로 3차 발표회를 가졌고, 1969년에는 무용극 <만파식적>과 소품들로 4차 발표회를 가졌습니다. 또 1972년에는 무악 생활 50주년 기념 5차 발표회를 가졌는데 발표회의 내용이 거의 춤이었기 때문에 국악계보다는 무용계에서 그의 이름이 높게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출처 : http://www.donga.com/fbin/output%3Fn%3D...08200074

“현대무용하고 발레만 안 했지 우리나라 춤은 안 배운 게 없이 다 배웠어. 왜정 때에 한성준 선생한테 승무를 배웠고, 해방 뒤에는 한국 가면극 연구회에서 봉산 탈춤, 강령 탈춤, 양주 산대놀이, 통영 오광대, 나비춤, 학무, 바라춤 이것 저것 보고 배우고 한 탓에 전부 잘 추지는 못 해도 잘잘못은 가릴 수 있게 됐지. 그리고 내가 만든 무용극은 전부 내가 대본을 쓰고 연출하고 출연한 거라 어디에서나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어.”

이렇듯 춤에 몰두해 지내오면서도 아악의 연구에도 함께 힘을 쏟아왔기에 1969년에 종묘 제례악 무형 문화재 예능 보유자로 지정받을 때 모두들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특히 그 무렵에 이왕직 아악부원 1기생들은 거의 다 세상을 떠나고 2기생 중 몇 사람만 지정을 받았는데, 그나마도 지정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흔히 아악이 중국 음악을 본뜬 것 아닌가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아. <문묘악>이나 <제례악>은 본디 우리나라에서 쓰던 음악이고, 당악 계통으로 <낙양춘>이나 <보허자> 같은 게 있는데 그것도 몇 백 년 내려오는 동안에 우리나라 음악에 동화되었다고 봐야해.
내가 얼마 전 대만에서 그 나라 전통음악을 들어 봤는데 우리 것하고 달라. 그러나 어찌됐든 아악이 뭔가 현대적이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민속 음악과 활발한 교류를 해서 낡은 때를 벗어야 하는 것만은 사실이야.”

이것은 궁중무를 추는 사람이 탈춤을 춘다는, 옛날에는 꿈에도 생각 못할 파격적인 행동을 했고, 또 해금을 가지고서도 아악과 함께 쉴 새 없이 민속음악과 민속무의 반주를 해 온 그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맑고 아름답고 연한 음색으로 주음 악기들을 빛내 주면서 은근히 큰 몫을 차지하는 해금처럼, 그의 일생도 단체의 장으로서 국악계의 우두머리로서 빛났던 삶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고 빛나게 하는 숨은 일꾼으로서 은근하고 튼튼하고 끈질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출처 : http://www.gugakcd.pe.kr/music_detail.a...A-52/53C

“춤추고 노래하는 게 즐겁고 좋은 줄 알지만 그게 아니야. 완벽한 예술을 하려면 고생을 각오해야 돼. 나는 평생 살아오면서 죽을 때까지 배운다는 정신으로 살아왔어. 또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되기 때문에 평생 고생문이 훤해.”

그 '훤한 고생문‘을 마다하지 않고 2007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한눈 팔지 않고 살았으니, 그의 얼굴과 눈빛이 물결에 씻긴 조약돌처럼 맑고 깨끗하게 빛나는 것은 외길 인생의 아름다운 결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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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지방에 전해 오는 민요 중 가장 유명한 민요는 <밀양 아리랑>일 것입니다.
날좀 보소 날좀 보소 날조곰 보소
동지섣달 꽃본 듯이 날좀 보소
아리랑 닥궁 스리랑 닥궁
아리리가 났네
아리랑 어절시구 잘 넘어간다

담 넘어 갈 때는 큰 맘을 먹고
문고리 잡고서 발발 떤다
아리랑 닥궁 스리랑 닥궁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어절시구 잘 넘어간다

이 <밀양 아리랑>은 전라도 지방에 전해 오는 <진도 아리랑>과 강원도 지방에 전해 오는 <강원도 아리랑>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리랑으로 꼽힙니다.

그런데 다른 지방의 아리랑에 견주어 <밀양 아리랑>은 특히 가락이 흥겹고 장단도 빠르며 경쾌합니다.
각 지방의 민요가 그 고장의 풍토나 인심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때 <밀양 아리랑>이 이렇듯 흥겹고 경쾌한 것은 밀양 지방의 땅이 풍족하고 인심이 넉넉한 데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의 <밀양도호부>편에 보면 밀양이 “긴 내를 굽어 당기고 넓은 들을 팽팽히 얼싸안고 있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숭상하게 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실제로 밀양군은 오늘날에도 경상남도 안에서 가장 농업이 성한 곳으로 꼽힐 뿐만 아니라, 갖가지 민속놀이가 다양하게 전해 내려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밀양 백중놀이>나 <밀양 새터 가을굿>이나 <감내의 줄당기기>나 <용호놀이> 같은 놀이들이 새롭게 발굴되어 소개되었고, 그 중에서도 <백중놀이>는 밀양의 이름을 나라 안에 널리 떨치게 만들어서 밀양하면 백중놀이를 연상할 만큼 유명해졌습니다.

출처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01_02_04

하늘 위에 상제님 천하 용왕님
바람기 순조롭고 벌구잡충 없이 하며
금년 농사 잘도 해서 총각 신세 면케 하고
앞논에 용신님 뒷논에 용신님
들쥐도 막아 주고 나는 새도 막아 주고
회기종도 막아 주고 흰무리도 막아 주소

농신제 축문을 읽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백중놀이는 힘겨운 세벌 논매기를 끝낸 백중날, 곧 9월 보름을 전후한 용날에 동네 머슴들이 모여서 벌이는 놀이였습니다.

마당 한가운데에 저릅대로 만든 '농신대'를 세우고 동네 사람들이 쌀이나, 콩, 돈, 축원문을 넣은 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둥그렇게 둘러서서 세 번 절하며 그 해의 풍년과 복을 빈 다음, 그 해에 농사를 제일 잘한 장원을 지게 목발로 만든 ‘작두말’에 태우고 머슴들끼리 놀이판을 벌입니다.

그 판에 양반이 끼어들어 거드름을 부리며 '양반춤'을 추면 머슴들과 부엌 일하는 여인들인 '정지꾼'들이 여기 저기서 나타나 병신춤으로 양반을 놀리고, 쫓겨난 양반은 범부 차림으로 다시 나타나 서민들과 어울려 '범부춤'을 흥겹게 춥니다.

그런 다음 북잽이들이 큰 북을 메고 나와 밀양 백중놀이에만 유일하게 전해오는 '오북춤'을 춥니다. 이 오북춤은 '오행'과 '오기'가 순조롭기를 빌며 '오체'가 성하고 '오곡'이 잘되고 '오복'을 누릴 수 있기를 비는 뜻이 담겨 있는데, 이 오북춤이 끝나면 모든 놀이꾼과 구경꾼이 한데 어우러져서 마지막 뒤풀이를 합니다.

하보경 명인은 밀양 읍내에서 이 놀이를 제일 오랫동안 놀아온 춤꾼입니다.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인지도 정확하게 기억 못할 만큼 오래 살다 돌아가신 그는, 나이는 잊어버렸어도 백중놀이에 대해서만은 어느 것 하나 잊어 버린 것이 없을 만큼 뼛속 깊이 이 놀이가 배어있는 분이었습니다.

출처 : http://www.gallerywa.co.kr/column1.asp%...dx%3D864

1909년인가 1905년인가에 하성옥의 큰아들로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친은 이미 밀양 읍내에서 이름난 북잽이였습니다.

부친은 놀이를 좋아해서 읍내에서 놀이가 벌어질 때는 앞장을 서서 놀았고, 어느 때는 풍물패를 조직해서 이 동네 저 동네 떠돌아 다니며 서너 달씩 집을 비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단체가 해산되면 집에다 악기를 풀어놓고 흩어지는데, 돈을 못 벌었거나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열흘이나 보름씩 그의 집에서 쉬어 가기도 했습니다. 하보경 소년은 어려서부터 늘상 그 어른들이 치는 풍물소리를 듣고 그 어른들이 추는 춤을 보며 자랐고, 틈만 나면 그들에게서 춤과 악기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밀양보통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이미 웬만한 장단이나 춤은 따라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지만 아버지의 눈이 무서워 드러내 놓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은 놀이를 좋아할 망정 아들만은 공부를 착실히 해서 면서기 같은 훌륭한 인물이 되어주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아들이 남 앞에서 북치고 노는 것을 엄하게 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명절마다 벌어지는 푸짐한 마을 놀이 때면 그는 엉덩이가 들썩거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밀양은 산이 좋고 들이 넓고 물이 좋고 하니께네, 보리도 잘되고 나락도 잘돼, 소 없는 집이 없고, 머슴없는 집이 없는 기라. 백중날 날받이 옷도 해주고 음식도 해주고 푸짐하게 노는데, 우째 신이 나는지 하루 종일 따라 다녀도 재미가 있는 기라.”

천성이 춤과 놀이에 무한히 끌려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데다가,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친구들의 영향으로 악기와 춤의 기초를 다진 그가 얌전하게 학교 공부나 하길 바란다는 것은 고양이 앞에 생선을 놓고 먹지 말라는 것과 같은 요구였습니다.

결국 그는 열여섯 살 무렵에 아버지 몰래 놀이판에서 북을 치고 말았습니다.

솜씨를 인정받은 그는 스무 살 무렵에는 춤까지 출 수 있게 되었는데, 같은 쪽의 손과 발이 함께 움직이는 '걸음새'와, 퉁기는 듯한 느낌을 주는 '배김새'와, 턱을 묘하게 끄덕거리는 독특한 '고개놀림'과 같은 양반춤의 진한 맛이 그의 몸 구석구석에서 배어 나오자, 보는 구경꾼들이 탄성을 올렸습니다. 그 뒤로 그는 일약 멋진 춤꾼으로 읍내에서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 덕에 장옥도라는 처녀와의 혼담도 쉽사리 이루어져 장가도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춤 잘 추고 놀기 좋아하는 밀양 멋쟁이로 이름이 드높아져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다니는 재미에 맛을 붙일 무렵, 아버지가 병에 걸려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스물네 살쯤 되었을 때에 부친이 세상을 뜨자,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본계’ 계원이 되었습니다.

보본계는 백년이 넘게 내려오는 밀양 읍내의 놀이계로, 마흔 명쯤 되는 계원들이 정초에 읍내를 돌아다니며 지신밟기를 해주고, 봄에 한차례 모여서 걸판지게 노는 단체였습니다. 이 계원들은 저마다 악기나 노래나 춤에 재주가 있어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읍내 한량들이 서로 다투어 계원이 되고 싶어했지만, 웬만큼 솜씨가 없으면 계원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계에 젊은 계원이 되었으니 한량인 그로서는 대단히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나쁜 짓’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무서운 아버지도 안 계시겠다, 물려받은 재산은 넉넉하여 부농 소리를 듣는 살림이니 의식주 걱정없겠다, 얼굴 잘생기고 젊고 멋있겠다, 춤 잘 추고 놀기 좋아하겠다, 아무튼 그에게는 '방탕'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셈이었습니다.

어디에 놀이판이 벌어졌다 하면 불원천리하고 달려가고, 씨름판이 벌어졌다 하면 다시 바람같이 달려가서 심판을 보며 신나게 놀고, 어디에 예쁜 기생이 있다 하면 부리나케 옷 빼입고 놀러가는 통에 그 많던 재산이 조금씩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윷놀이에 미치지만 않았어도 부친의 재산을 다 날려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밀양의 하보경, 삼칸집 너머로 던져도 모가 난다.”는 말이 나올 만큼 이름난 내기 윷꾼이던 그는 결국 재산을 다 날린 다음 손을 톡톡 털었습니다.

일본 식민지 말기의 전쟁 바람은 밀양에도 불어 닥쳐 놀이판은 금지당하고, 술 마시고 놀음을 하면 잡혀가고, 쇠로 된 악기는 모두 전쟁물자로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고생스럽고 재미없는 시절을 간신히 넘긴 그는 해방이 되자마자 친구들과 ‘5.3 친목계’를 조직하여 마음껏 놀기로 작정했습니다.

보본계의 뜻을 이어받아 조직된 5.3친목계에는 타관 객지에 흩어져 있던 재주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북춤 잘 추는 김상용 명인, 권채입 명인, 이재원 명인, 김달수 명인과 꽹과리 잘 치는 정한목 명인, 김타업 명인과 징 잘 치는 김석화 명인 등이 중심이 되어 정초에 지신밟기 하고 봄에 한차례 크게 놀았습니다.

그 단체가 점점 발전하여 1960년에 한국사단법인 밀양국악협회가 탄생되었고, 1980년에는 민속예술보존협회가 생겨났습니다. 그해 10월에 제주시에서 벌어진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은 뒤 중요 무형 문화재 68호로 지정받고 하보경 명인이 <양반춤>과 <범부춤>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받게 되자, '밀양백중놀이'는 갑자기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여기 저기 초청공연을 갖게 되고, 1981년 8월에는 미국의 국제 무용단 초청으로 하보경 명인이 대표로 미국에도 갔다오고, 1982년에는 김타업 명인이 상쇠 예능보유자로 지정 받게 되고, 거의 해마다 두세 번은 민속제나 예술제에서 가장 인기있는 종목으로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백중놀이의 참가자들은 모두 저마다 재주가 뛰어나고 신명이 넘쳐 흘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흥겨움에 겨워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중에서도 하보경 명인의 춤은 보는 사람의 넋을 빼앗아버릴 만큼 뛰어났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에 하얀 띠를 맵시있게 두른 그가 십 년이 넘게 기른 하얀 수염을 바람에 휘날리며 하얀 도포를 입고 검은 관을 쓰고 미투리 신고 하얀 부채를 손에 들고 '양반춤'을 추거나, 하얀 중의적삼에 상투를 꼽고 웃댕기를 매고 미투리 신고서 '범무춤'을 추거나, 흰 중의적삼에 상투 꽂고 짚신 신고 큰북을 메고 북채를 손에 들고 딱딱딱 하면서 '북춤'을 출 때면 그의 말대로 “미국 처녀도 반해서 볼따구에 뽀뽀를 할” 지경이었습니다.

출처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01_02_04

그의 춤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의 춤이 “삶 속에서 우러나온 생활의 멋과 소박함과 흥겨움이 조화를 이룬 건강한 춤”이라고 찬미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잘 짜여진 무대무용과 교태가 가득한 기방춤에 맛들인 사람들은 그의 춤이 “촌스럽고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다.” 고 혹평하기도 합니다.

그런 예술가들의 현란한 말에 주눅들린 그는 그래서 누가 자기 춤에 대해서 물어보면 자신을 낮추며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 춤은 춤도 아닌 기라. 서울서 춤추는 사람들 얼매나 잘 추나? 그런 사람들한테 비하모 내는 춤춘다꼬 말도 몬하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이렇게 반문함으로써 일침을 놓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 춤은 예전부터 내려오는 것을 그대로 추는 춤이라. 사람들이 그걸 알아주고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건데 우리 춤이 엉터리라 카모, 우리 조상님들이 추던 춤들이 전부 엉터리란 말이가?”

오늘날 이 나라 춤의 대부분이 일제시대의 권번에서 추어오던 기방춤의 변형인 현상을 걱정해 온 사람들에게는 그의 춤이 가진 토속성과 소박함을 찬미합니다.

본디 삶과 일 속에서 나왔으면서도 예술은 지금 그것들과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아직도 일과 놀이 속에서 멋들어지게 춤이 추어지고, 거기서 얻어진 신명이 다시 삶 속으로 되돌아가 삶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 멋진 삶의 현장에서 평생 동안 춤을 추며 살아온 그의 춤은 사위 하나하나의 세련미와 예술성을 따지기에 앞서 이미 몸으로 전해오는 진한 땅 냄새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고한 예술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끈끈한 삶의 정서인 것입니다.

젊어서부터 가정을 돌보지 않고 멋과 흥에 취해 살아 온 그이지만 그래도 아들 둘과 딸 셋을 모두 번듯하게 키워 놓았고, 큰 아들이 낳은 손자 용부는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아 그의 북춤 전수자가 되었습니다.

성격이 느긋하고, 골치아픈 일 싫어하고, 신나는 일만 있으면 만사를 제쳐 놓고, 걱정거리가 있어도 껄껄거리고 웃으며 넘긴 낙천성과 대범함이 그의 춤을 푸지고 신명나게 만들어주고, 1997년 90여세가 다 될 때까지 장수하다 돌아가시게 한 비결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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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수 명창은 자신이 소리 광대로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안 친척들이나 친구들 앞에서도 여간해서는 판소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국악인의 최고 명예인 인간문화재가 되고, 광대가 전통예능인으로 우대 받는 세상에 살면서도 예전의 천대와 편견을 잊지 못했던 탓입니다.
 

출처 : http://www.ncktpa.go.kr/html/jsp/ncktpa...5A6%25AC

그러나 그가 1909년 7월 28일에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났을 때만 해도 판소리 광대가 되는 것은 천민의 신분을 벗어나 출세와 돈과 명예가 보장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잘만하면 임금 앞에서 소리도 하고 벼슬도 받을 수 있는 '화려한 직업'이었습니다.

그 역시도 그의 스승인 김창환 명창을 통해서 출세의 꿈을 키웠습니다.

“우리집이 나주군 봉산면 복룡리에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정창업 명창이시고, 아버님도 소리를 좋아하셔서 어려서부터 판소리를 즐겨 듣곤 했지. 17살 됐을 때에 아버님이 김창환 선생님 댁에 보내 거기서 먹고 자면서 배우게 됐지."
 
정광수 명창은 자신이 다산 정약용의 방계 7대손이고, 철종과 고종 연간에 어전광대로 활동한 서편소리의 대가 정창업 명창의 손자라는 것을 자랑으로 꼽습니다. 어려서 ‘천자문’과 ‘사략(史略)’을 뗀 뒤, 김창환 명창의 제자로 판소리의 길에 들어선 것도 그가 평생 자랑하는 일입니다.

김창환 명창은 고종 황제 앞에서 판소리를 하여 정3품의 명예벼슬인 당상관직을 받고 돈도 많이 번 뒤, 전남 나주군 삼도면 양화리의 절골이라는 곳에 넓은 터를 잡아 풍족한 말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풍신이 잘 생기시고, 행실이 분명하고, 효자시고, 인격이 갖추어진 분이셨어. 소리로 말하자면 송만갑 명창은 강한 상청으로 음이 높아 귀에 쟁쟁 울리고 정확하여 축음기에도 잘 받는 소리였는디, 우리 선생님은 음의 폭이 넓고 굵고 후령음이 무서웠지.
특히 우리 선생님은 늘상 인격을 강조하셔서 성악은 인간이 되어야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 그리고 고종 황제를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지 동네 뒷산에 사당을 지어서 그분 영정을 모셔놓고 날마다 올라갔다 내려 오셨어. 그 분 밑에서 5년쯤 배웠지.”

그러다가 어느덧 스물두세 살이 되어 ‘꽃기운’이 펄펄 살아나는 청춘이 되었습니다.

“내 자랑은 아니지만 그 무렵에는 풍신이 좋았어. 몸집이 두텁고 점잖고 또 예쁜 구석도 있어서 어른들이 귀여워했지. 그러니 나도 자연히 벌렁거리는 마음이 생겨. 남들이 하도 잘 생기고 소리 잘한다고 추어대니까 정말 그런 줄 알고 으스댔지. 그러다가 목포에 있는 권번에 성악 강사로 가게 됐지. 말하자면 첫 취직인 셈이여.”

목포 권번의 강사를 하며 지내는 동안, 재기발랄한 젊은 기생들 틈에서 잘 생기고 소리 잘하는 젊은 총각이 선생님 노릇을 하려니 그 속이 온전할 리가 없었습니다.

“안되겠어. 여자들 속에서 연애나 하고 공부는 못 허고 가르치기만 하니 실력이 줄어. 그리고 여자들이 어찌 극성스럽게 구는지 내 개인 시간을 온통 빼앗아 가고, 이 여자 저 여자가 나를 사이에 두고 싸움을 벌이는 통에 골치가 아파서 못 있겄어. 그래서 그만 두고 나와 삼성암이란 암자에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지.”

수많은 여성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암자에서 먹고 자면서 2년 동안 스승도 없이 그야말로 죽자사자 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무리한 연습으로 몸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암자 뒤에 있는 절벽에서 하루종일 소리를 지르면 목이 잠겨. 어찌나 목이 잠기는지 스님한테 밥 달라는 소리도 못혔어. 그래도 구슬땀을 흘리면서 소리를 지르면 소리가 살살 터져나와. 그 소리를 '지름상성'이라고 혀. 한없이 높은 소리가, 자기도 생전에 들어보지 못한 소리가 어디에선가 튀어나와. 그 소리에 미쳐. 제 소리에 제가 반해 가지고 아침부터 절벽 끝에 있는 석대에 올라가서 소리허고 점심 먹고 또 허고......
그러기를 일년쯤 하니까 소리는 좋아졌는디 몸에 이상이 왔어. 힘만 조금 쓰면 창자가 나올라고 혀. 탈장기가 생긴 거지. 겁 없이 무식하게 힘을 썼으니 뱃속이 온전할 리가 있을 거여. 그 후유증 때문에 많이 고생을 혔어.”

방법이야 어떻든 지독한 공부 덕분에 그의 소리 기량은 한껏 늘었고, 탈장도 치료가 되었습니다. 그는 순천 권번에서 성악 강사를 하다가 유성준 명창에게 더 공부를 하려고 진주로 갔습니다.

유성준 명창은 순천에 살던 장자백 명창의 제자로 소리제가 좋고 공력이 있어서 독특한 실력을 인정 받던 명창이었습니다. 특히 「수궁가」를 잘해서 많은 제자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전세방 하나 얻어 놓고 봄, 여름 동안 공부를 하는디 기초가 있어 놓으니까 번쩍번쩍 공부가 잘 돼. 그래서 <수궁가>, <적벽가>를 다 떼고 집에 돌아오는데 선생님이 정이 들어서 우시는 거여. 선생님뿐만 아니라 그 진주 권번의 수많은 기생 중에서도 우는 사람 많었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울린 그는 29살이 되었을 때, 드디어 서울로 올라와 ‘조선 성악 연구회’를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소리 실력을 인정 받아 바로 경성 방송국에 가서 녹음을 하고, 공부하면서 공연다니는 생활을 3,4년 하던 끝에 신의주에서 해방을 맞게 된 그는 본가가 있는 장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스무살 때에 장흥 사는 안삼차라는 장흥 사는 처녀에게 장가든 뒤로 소리 공부한다 소리 선생한다 하며 잠시도 집에 붙어 있질 않았지만, 아내는 군소리 한 마디 없이 살림을 꾸려 나갔습니다. 그 뒤 광주 권번에 일자리가 생기자, 아예 광주로 살림을 옮겨 그곳에서 3년쯤 지내다가 6.25전쟁을 맞았습니다.

"가족들 데리고 피난 다니느라 죽을 고생했지. 수복되고 다시 광주에 가서 가르치고 있다가 이듬해에 광주 국악원을 창립했고, 2년 뒤에 불화가 생겨서 민속예술원을 따로 만들어 강사 노릇을 했지. 그 일에 발목이 잡혀서 20년을 광주에서 살다보니, 이럭저럭 광주가 제2의 고향이 되고 말았어"

정든 광주에서 20년쯤 지내던 그는 결국 동료들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서울로 올라왔고, 1964년에는 판소리 「수궁가」의 인간문화재가 되었습니다.

“소리라는 것, 즉 음악에는 예의 체통이 있어. 칠정과 희로애락을 살리고 인의예지를 살리는 것이 소리니 함부로 곡조를 내두르고 허망히 하면 안될 것이여. 목성음으로만 듣기 좋게 흥얼거리고 놀기 좋게 불러도 안 되며, 법통과 격식에 맞게 정중히 해야 될 것이여.”

이렇듯 고상한 음악관을 가지게 된 탓에 그는 아무데서나 소리를 하지 않았고, 소리꾼으로서의 활동도 그리 활발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소리 광대 된 것을 부끄러워 하는 것은 아니여. 다만 세상에서 처신하며 살아가려니 꺼리는 게 많아서 그러는 거여. 내가 아무리 내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겨도 사람들이 안 알어주는디 어쩔 것이여. 그리서 난 누가 날 광대라고 부르는 걸 싫어혀. 집안이나 종친회에도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몰라.”

이처럼 광대들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이 사회의 뿌리깊은 편견에 정중한 처신으로 항거하며 지내던 그는 2003년 11월 2일, 판소리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재' 지정받기 닷새 전에 삶을 마무리했습니다. 

지금은 광대를 천대하는 일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서양의 광대들에 비해 초라한 대접을 받는 전통 광대들의 현실을 볼 때, 그의 항거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나름대로의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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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의 대표적 유파로 '동편제'와 '서편제'가 있습니다.

동편제는 섬진강의 동쪽 지방인 구례, 곡성, 남원 등에 전해 오던 소릿제로 송흥록- 송광록-송우룡- 송만갑 등으로 내려오는 '송씨 가문'의 판소리를 원조로 치죠. 이 소릿제가 최고의 세력을 뽐내며 인기상승 중이던 구한말, 섬진강의 서쪽 지방인 보성에 박유전 명창이 '혜성같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소릿제는 송씨 가문의 소리와 너무도 달랐지만, 인기가 하늘을 찌를만큼 높다보니 애호가와 제자들 사이에 서로 자기네 소리가 최고라는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라도 판소리가 '동편제', '서편제'로 갈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보성읍 대야리 강산마을 송정강 기슭에 있는 박유전 명창 예적비(오른쪽).
출처 :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l_no%3D2

박유전 명창은 1834년에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태어나, 전라남도 보성군 대야리 강산(岡山)마을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얼굴이 빡빡 얽고 눈이 하나밖에 없어 누가 봐도 못생긴 얼굴이었다는데, 그런 그가 판소리만 하면 그 못생긴 얼굴이 '꽃으로 보일만큼' 매력적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는 저음인 '하성(下聲)'이 장군 소리와 같이 우렁차고, 소리가 둥글둥글하여 거름진 땅과 같이 기름지고, 우조나 계면조와 같은 운율의 흐름이 뚜렷하고, 소리의 높낮음과 빠르고 느림과 맑고 탁함에 추호도 어긋남이 없이 정연한 소리를 했습니다.

그 무렵 수많은 판소리 광대의 최고 후원자였던 대원군은 특히 그의 소리를 좋아해서 "박유전의 소리가 강산(江山)에서 천하제일"이라고 추켜 세우곤 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그의 호를 박 명창의 고향마을 이름과 자신의 칭찬을 합쳐 '강산'이라고 지어줬답니다.

그래서 그의 소릿제를 '서편제'라고도 하고, '강산제(江山制, 岡山制)'라고도 하게 된 겁니다. 운현궁의 사랑채에 기거하며 대원군의 총애를 받던 그는 무과(武科)에 급제해서 선달 벼슬도 받고, 한쪽 눈을 가릴 수 있는 '오수경(둥그런 검은 안경)'과 '금토시(최고급 팔목가리개)'까지 하사 받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대원군의 지극한 총애를 받던 그는 민비에게 권력을 빼앗긴 대원군이 중국으로 망명하자 민비 일파의 보복을 피해 남으로 내려오다가, 전라남도 나주에서 정재근을 만나 그의 사랑채에 숨어 살게 되었습니다. 

정재근에게 판소리를 기르치면서 지내던 중, 대원군이 다시 득세를 하자 정재근의 일곱 살 난 조카 정응민도 함께 데리고 한양에 올라갔습니다. 어린 정응민은 운현궁 사랑채에서 판소리를 배우며,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고향에 한 번도 내려가지 않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대원군이 죽고 한일합방이 되자 박유전 명창은 “나라 잃은 가객이 살아서 뭐하느냐”라고 탄식하며 노래부르기를 그치고, 사골로 내려가서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음식을 전폐한 채 한 겨울에 굶어 죽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오기도 하는 '충성과 절개의 명창'입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정응민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리에 돌아 온 뒤, 광대로서의 활동을 중단한 채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나라 잃은 가객'에 대한 스승의 정신을 잊지 못한 그는 세상 출입을 끊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제자를 삼아 소리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정응민 명창 사진과 그를 기린 벽소 이영민의 시.
출처 :
http://www.pansoricenter.org/skin_104/5...ndex.php

정권진 명창은 바로 이 고집스런 '농사꾼 명창'인 정응민 명창의 외아들입니다. 

1927년 10월 15일에 태어난 어린 권진은 사랑채에서 들려오는 판소리에 남달리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서당에 다닐 무렵에는 아버지의 제자들이 부르는 웬만한 판소리는 따라서 흥얼거릴 수 있을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판소리 부르는 것을 엄하게 금지했습니다.

“명창이 되려면 수십 년을 공을 쌓아야 되는디, 그 공을 학문하는 데에 쓰면 몸도 편하고 훨씬 많은 일을 할텐디, 대우도 못 받고 고되기만 한 판소리를 허면 죽을란다”

이런 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판소리 근처만 빙빙 돌며 애를 태워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아버지의 친구들이 “언제까지나 일제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혼은 판소리밖에 없으니 독립되면 판소리가 빛을 볼 것이다. 아들도 애국자 만들려면 판소리를 가르쳐라” 하며 갖은 말로 권유하는 통에 간신히 허락이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열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에 부산 동래 권번에 소리선생으로 있던 아버지의 수제자 박기채에게 소리를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정응민 명창에게 소리를 배우던 제자로는 김연수, 정광수, 김준섭과 같은 쟁쟁한 소리꾼들이 있었는데 박기채는 그 중에서도 정응민이 가장 아끼던 제자였습니다.

부산에서 낮에는 양복점 점원 노릇을 하고, 밤에는 소리 공부하기를 4,5년쯤 하던 정권진은 열아홉살이 되던 해에 고향에서 장복순과 혼인을 했습니다. 혼
인한 지 한 달 만에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선언한 뒤, 강진에 있는 고성사라는 절에서 공부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내가 판소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 년 기한을 잡고 절에 독공을 하러 들어가니 만일 기다릴 수가 없다면 떠나도 좋소”

집과 절을 오가며 판소리 공부를 하는 동안 해방이 되고 6.25전쟁이 터졌지만, 아내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 이후로도 그의 아내는 군산이나 대구나 대전 국악원과 같은 곳에 창악 강사로 초청되어 떠돌아다니는 남편을 한결같이 기다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1962년에 국립 창극단이 설립되자 초창기 단원이 되어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창
극단에서 1년쯤 지낸 뒤, 창극단을 그만 두고 국악예술학교의 창악 강사로 근무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공연 활동도 계속한 그는 1964년에 「심청가」 인간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느 명창보다 가사 내용에 대한 이해가 밝고 판소리에 대한 이론이 정연한 명창이었습니다.

그것은 박유전의 강산제 판소리를 3대를 이어 수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유전 명창은 대원군과 교분을 맺으며 지내는 동안 많은 양반 선비들과 벼슬아치들을 만났을 것이고, 그들의 도움으로 가사 내용과 창악 이론에 안목을 높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강산제의 문파에 전해 내려오는 <광대론>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대명창이 되는 길은 '정심', '정음', '사채'에 달려 있다 하겠다.
'정심'이란 바르고 맑은 마음이니, 그 나라 음악을 듣고 그 나라 정치를 알아 볼 수 있듯이 가객의 소리를 듣고 가객의 인격을 알아 볼 수 있다. 심청가를 부르는 가객이 심청가를 청중에게 권하면서 자신이 불효를 하면 열기가 없는 죽은 소리요, 자신이 효를 행하면 생명감이 있고 기가 충만하고 진수가 담겨 참된 소리가 되는 법이니 소리 이전에 자신의 인격과 참다운 사람됨을 권하고자 한다. 
'정음'이란 소리를 엄격하게 성심것 하여 득음의 경지에 이르러야 된다는 말이고,
'사채'란 품위 단정한 동작 곧 너름새이니 사채가 무게 있고 민첩하고 발 하나를 떼어도 정중함이 있어야 하며, 사방으로 이유없이 활보한다든가, 쓸데없이 부채질을 자주 한다든가, 난잡한 태도를 보여 품격이 떨어지면 올바른 사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강산제 판소리의 사설은 고상하고 점잖은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육담이나 음담패설이나 욕설은 없애거나 극히 절제해서 사용하고, 인물 묘사도 우아하고 장중함을 그 기본으로 깔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적벽가」에 나오는 조조가 다른 명창들의 '적벽가'에는 간사하고 교활하게 그려져 있는데 반해, '강산제 적벽가'에는 위엄 있는 장수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와 함께 음악표현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슬픔을 강조한다든가, 무절제하게 웃음을 유발시킨다든가, 간사스러운 성음을 내는 것을 극히 싫어하여 대장부의 꿋꿋하고 웅장한 성음을 주장하고, 우조와 계면조와 같은 선율의 차이를 분명히 하며, 장단의 부침새가 정교하고 분명한 것을 좋아합니다.

이는 모두가 강산 박유전이 지녔던 소리의 장점이 모두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강산제 판소리의 '바른 마음'과 '바른 소리'와 '바른 몸가짐'에 대한 주장과, 그 소리의 대장부다운 기상과, 그 사설의 품위 있고 단정한 표현과, 그 장단의 정교하고 변화무쌍한 부침새는 다른 소리제가 따를 수 없는 품격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강산제 소리제의 후계자인 정권진 명창의 판소리에 대한 남다른 고집과 안목은 이 소리제를 올바로 전수하는 데에 단단한 받침목이 되었습니다.



“요새 소리 좀 한다는 후배나 제자들더러 공부를 더 하라고 허며 돈이 있어야 공부허네, 처 자식을 벌어 먹여야 공부허네, 뒷받침이 없네, 하며 갖은 핑계를 대는디, 그 모두가 구실에 지나지 않어. 오로지 일심으로 공부에만 전념허면 지금 인심으로도 후원자가 생겨나서 처자식 굶어죽게 안 만들어”

그는 무엇보다도 공부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명창입니다. 그래서 타고난 목청이나 재능만 가지고 한몫 벌어 보려고 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합니다. 자기 자신도 대성하지 못한 미숙한 소리꾼으로 여겼던 그는 소리꾼들이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강조 했습니다.

“잘 살고 배부르고 인기가 있으면 참다운 소리를 해치는 법이여. 학자가 배가 고파야 참다운 글을 쓰고, 정치가가 배가 고파야 참다운 정치를 하고, 병들어서 병원 생활을 해 봐야 환자의 괴로움을 알듯이 소리하는 사람도 고생을 하고 만고풍상을 겪은 뒤에야 겨우 뭔가 이루어지는 법이여.
판소리라는 게 전봇대와 같이 큰 뜻을 세우고 전력을 다해서 공부해 봤자 바늘 만큼밖에 이루어지지 못 허는 법인디, 하물며 놀고 마시고 각시질이나 하고 인기나 좇아 흘러다니다 보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는 법이지”

이는 그가 가난한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연마하여 깨달은 결론이기 때문에 몸으로 부딪쳐오는 진실함이 있습니다.

“옛적에 소리의 왕이라고 불렸던 명창 송흥록은 자기 소리를 알아주던 영의정 김병희가 죽으니 그를 따라 함흥에서 절사하시고, 강산 선생님도 자기 소리를 아끼던 대원군이 돌아가시자 그를 따라 순사하셨어.
이와 같이 참된 소리꾼은 부귀공명을 탐하지 않고 지조와 절개가 있었는데 요즈음은 돈만 주면 아무데나 가서 막 소리를 해대. 요즈음이 아니라 일제 때에도 권번 제도를 만들어가지고 기생방에서 소리를 하게 했어. 말하자면 민족예술을 화류계화시킨 거지.
예전에는 판소리에 삼강오륜이 있다 하여 명창들이 감찰이니 오위장이니 벼슬을 하며 정치의 도구로 쓰였는디 일제 때부터 놀고 먹고 ‘에야라 놀아라’ 식의 소리로 변한 거지. 그러니 소리꾼들의 생활도 무절제하고 방탕할 수밖에 없었지. 그러나 지금은 그러면 안돼. 지조와 절개를 가지고 민족혼을 일깨우는 사명을 소리꾼들이 짊어지고 나가야 돼.”

1986년에 세상을 뜬 그의 판소리에 대한 외곬수 고집을 정회천과 정회석 두 아들이 4대째 이어가고 있으니, '보성소리' 집안의 고집이 대단히 소중하고 값진 것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군요.


4대째 판소리를 이어가고 있는 정회석 명창. 출처 :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3D158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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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송흥록 명창, 박초월 명창, 임방울 명창, 박녹주 명창 등 명인명창에 대한 이야기를  띄엄띄엄 올렸는데 앞으로는 좀더 자주 전에 제가 발표했던 명인명창에 대한 글들을 손질해서 올려볼까 합니다. 그래서 '명인명창 이야기'라는 카테고리도 만들었습니다. 
아마 네티즌들에게는 생소한 분들이 많고, 내용도 그리 흥미롭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미래의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 끝에 시작합니다. 첫번째 타자는 대중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으로 박동진 명창을 선택했습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아마 판소리는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이 말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겁니다. 박동진이라는 노명창이 CF 광고에 나와서 한 대사지요. "또 제비 후리러 나간다~"하는 소리 대목도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겁니다. 모두가 박동진 명창의 광고 속의 멘트가 히트한 결과 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처음부터 판소리계의 스타로 활동한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50세가 넘어서야 명창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06/asp/ce...21203303

그 놀라운 집념과 열정의 이야기를 펼쳐 볼까 합니다. 
 
1968년에 국립국악원 강당에서 박동진이라는 소리꾼이 <흥보가>를 5시간 동안 쉬지 않고 완창한다고 하자 국악계에서는 ‘참 별일이 났다’고 수군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박동진이라는 소리꾼은 그때까지만 해도 김연수, 임방울, 김소희, 박초월과 같은 쟁쟁한 명창들의 그늘에 가려 별로 이름을 내밀지 못하던 소리꾼인데다가, 그런 소리꾼이 소리 한바탕을 완창으로 부른다는 것은 보통 무모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5시간을 쉬지 않고 불러 젖히는 데다가, 그 소리목이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힘이 있고, 고음과 저음을 마음대로 구사하였으며, 몸짓과 대사가 구성지고 익살맞고 재미있어서 5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가 버리자 그 소리판을 구경한 관객들과 소리꾼들과 기자들이 모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 이듬해에 <춘향가> 한바탕을 그 당시 명동에 있었던 국립극장에서 8시간 동안 쉬지 않고 부르자 소리 솜씨는 제쳐 두고라도 어떻게 한 인간이 8시간이나 계속해서 소리를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얘기로 온 장안이 시끌시끌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박동진이라는 소리꾼은 쟁쟁한 판소리 명창들의 대열에 끼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완창 소리꾼으로 이름이 높아졌습니다. 그 뒤 많은 소리꾼들이 그의 성공에 힘입어 완창 판소리 발표회를 가짐으로써 완창 발표가 마치 유행처럼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다른 소리꾼들은 일생에 한두 번 하기도 어려운 완창 소리판을 그 뒤로도 일 년에 한 번 또는 두 번씩 쉬지 않고 열었던 그의 정열과 집념은 무섭고 놀랍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어려운 일을 이를 악물고 해낸 데에는 그의 실패와 좌절이 큰 몫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1916년 7월 12일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무룡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 대에 몇 백 석을 거두며 부유하게 살던 그의 집안은 이미 아버지 대에 가세가 기울어 그는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 겪는 배고픔과 설움을 일찍부터 체험해야 했습니다.

여덟살이 될 때까지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익힌 그는 충남 대덕군 진잠면에 있는 진잠 보통학교를 4년 만에 어렵게 졸업한 뒤 대전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는 학비를 대기가 힘에 부쳤지만 아들이 중학교를 졸업한 뒤 면서기라도 해서 집안 살림을 도와줄 것을 기대한 그의 아버지는 꼬박꼬박 학비와 하숙비를 대주었습니다.

그렇게 학교를 다닌 지 4년이 되어 졸업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그의 앞날을 확 바꿔 놓고 집안에 평지풍파를 일으킬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지금 대전극장이 들어 선 자리에 <협률사>라는 단체가 들어와서 소리판을 연다기에 무심코 구경을 갔다가 그만 넋을 빼앗긴 것입니다.

조선 천지를 들썩이게 하던 이동백, 이화중선, 이중선, 장판개, 김창룡과 같은 최고의 명창들이 벌이는 소리판에서 넋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목석같은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소년 박동진은 온 몸이 달아오르고, 등에 소름이 끼치고, 귓전이 간질거리고, 오금이 저려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린 소년의 마음에 불을 지펴놓고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버렸습니다. 소년은 며칠 동안 학교 공부도 집어치우고 무대에 서서 소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다가 한숨을 쉬며 신세를 한탄한 끝에, 그예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소리를 배우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마침 이동백 명창의 고수로 따라다니던 지동백씨가 연기군에 산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지동근은 판소리로 이름을 날릴 만할 때에 목이 나빠져서 판소리를 그만 두고 땅재주를 하거나 북을 치면서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지동근은 자기는 판소리를 가르칠 수 없다며 “청양군 정산면 백공리에 가면 손병두라는 사람이 있는데 바탕소리는 못하지만 토막소리는 맛있게 잘 한다“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길로 집에 돌아 와 부모님께 자기의 결심을 여쭸습니다.

짐작한대로 아버지는 노발대발하고 매를 때리고 욕설을 퍼붓기까지 했습니다. “몇 달 있으면 졸업인데 무슨 미친 병이 들어서 광대짓을 하려느냐”고 펄펄 뛰며 야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집을 꺾지 않고 집을 나와 버렸습니다.

그때가 18살 되던 해 여름이었습니다. 물어물어 손병두씨 집을 찾아가서 나무도 하고 꼴도 베어 주며 머슴살이를 하다시피 일 년을 지내며 소리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사랑가'나 '옥중가' 같은 토막소리를 반 년쯤 배우고 나니 손병두씨도 가르칠 밑천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을 눈치 채고 선생 곁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손 선생의 부친인 손필모씨가 청양군 청장면에 있는 미륵당이라는 집에 그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 집은 행세깨나 하는 양반 집안이었는데 인사를 마치고 술상이 들어온 뒤, 주인 영감의 명령이 떨어지자 아들, 손주, 며느리들이 저마다 가야금, 거문고, 피리, 젓대, 양금, 해금 등을 끼고 앉아 '풍류'를 연주하는 것이었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풍류 가락에 넋을 잃고 연주가 끝났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앉아 있는데 손필모씨가 “이놈이 내 아들 제자인데 소질이 있는가 없는가 봐 주시요”하고 소개를 했습니다.

장구를 치던 주인 영감은 “어디 한 번 소리를 들어 보자”면서 북을 가지고 앉았습니다. 그래 겁을 바짝 내며 손병두에게 배운 소리를 하고나니 영감이 “네가 소질이 있기는 있는데 명창이 되려면 지금 선생으로는 안 된다. 이 집은 선배 대명창들이 한 번씩 다녀가셨던 집이다. 서울에 가면 정정렬 명창이 있는데 그 분이 <춘향가>는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러니 그 분한테 배우도록 해라”하며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길로 손병두 선생을 떠나 정정렬 명창을 찾아 서울로 올라가는데 일이 안 되려는지 도중에 서울 못 갈 일이 생겨버렸습니다.

터벅터벅 걸어서 유성까지 나왔을 때 마침 공주의 부자인 김 갑순이 궁술대회를 열고 기생들을 데리고 노는데, 저녁에 천막을 쳐 놓고 사당패들이 소리판을 벌이는 걸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구경꾼들 틈에 끼어 소리를 듣는데 이미 소릿길을 조금 안 그의 귀에 사당패의 장바닥 소리가 가소롭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자청해서 무대로 올라가 소리를 한 마디 했더니 “야, 그거 투가리보다 장맛이다”하며 “재청이요, 산청이요” 한 것이 오청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리를 끝내고 잠을 자려는데 느닷없이 곱게 차려 입은 중년 여인이 찾아와서 “아까 소리한 학생이 누고? 니 우리 방에 온나”하지 않겠습니까? 그 여자를 따라 여관으로 가니 의젓한 중년 신사가 앉아 있다가 “내 김천 서 치과의사하는 사람인데 너 김천 가서 기생 선생할래?”하며 이 말 저 말 얘기를 했습니다. 들어보니 그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생겨 두말없이 그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올라가려다가 거꾸로 내려가게 된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그는 중년 여인이 경영하는 진양옥이란 선술집에서 손님 앞에서 소리하며 하룻밤에 50전도 벌고 1원도 벌면서 몇 달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명월관이라는 요릿집에서 기생들 소리를 가르쳐 달라고 하여 꽃같은 기생 스무 명쯤을 모아 놓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소리를 배우지도 못하고 토막 소리 몇 대목 가지고 밥벌이하면서 누구를 가르치는 일이 항시 마음에 걸리던 차에 공주 대제암에서 정정렬 명창이 소리를 가르친다는 얘기를 듣고 대번에 기차를 타고 절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스승 운이 없으려는지 조상선, 김여란, 김초앵과 같은 쟁쟁한 신인 명창 12명이 한 시간씩 꼬박 열두 시간 동안 선생님을 붙잡아 놓고 있는 통에 도저히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여름이면 절간 아무데서나 잠을 자며 귀동냥이라도 할 텐데 엄동설한에 그럴 수도 없고 해서 다시 대구 봉산동에 와서 술집 기생들의 소리선생을 하며 지냈습니다.

얼굴도 “빤질빤질하게” 잘 생긴데다가 소리 잘 하고 멋이 있는 젊은 총각이 젊은 여자들 틈에서 지내다보니 “만사가 맨숭맨숭하기만 할 수는 없어서” 가끔씩 연애 사건을 저지르곤 했습니다. 대두에서는 대구 경찰서 고등계 형사의 조카인 일본 여자 대학생과 연애를 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가서 모진 매를 맞고 갖은 협박을 당한 끝에 강제로 쫒겨나다시피 경주 권번으로 옮겼습니다. 또 경주에서는 얼굴 예쁘고 인기 있던 기생 김난윤의 짝사랑에 말려들어 호되게 곤경을 치루는 등, 여자들 등쌀에 시달렷습니다.

결국 그는 그 생활을 청산해야겠다는 결심 끝에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습니다.

“내가 여자들한테 인기는 있었구만. 그런디 그것이 좋은 것이 아녀. 젊은 놈 신세 망치기 딱 좋은 것이라. 더욱이 소리 공부하는 사람은 여색을 조심해야 돼. 지동근씨가 나헌티 헌 말이 있네. 젊어서 여자를 알면 소리를 망치게 되니 여자 보기를 원수 보듯이 해야 한다고 하셨어. 성공만 하면 여자는 줄줄이 따라오는 법이니 성공할 때까지 절대 여자를 가까이 말라고 말이여. 그런디 한창 기운이 좋을 적에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는가. 서울 와서도 맨 연애만 허고 다녔지”

22살에 서울에 와서 조선 성악 연구회에 다니며 꿈에 그리던 정정렬 명창에게 소리공부도 하고 명월관, 식도원 같은 요리집에서 소리를 하며 돈도 벌었습니다. 노명창들을 모시고 북만주, 신의주, 상해, 무창, 북경, 남경, 서주까지 공연을 다녔습니다. 또 김창진, 조학진 같은 명창에게 소리공부를 하며 몇 해를 보내는 동안 그의 앞에는 소리꾼으로서 밝은 미래와 성공이 열리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거침없이 돈도 쓰고 한껏 멋을 부리고 신식 여학생들과 뻔질나게 연애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25살이 되던 해에 무서운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목이 안 나와. 고음이 안 나오고, 숨이 짧아지고, 소리가 갈라지고, 허리도 아프고, 소리 기운이 싹 없어져 버렸어. 한약도 써 보고 목을 쑥으로 떠보기도 하며 별별 짓을 다 했지만 소용이 없어. 목이 그 지경이 되니 무대에 서면 집어치우라고 소리지르니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고, 무엇보다 내 인생이 이것으로 끝이구나 생각하니 죽고 싶은 생각밖에 안 나”

그러던 차에 고향 집에서 옥천에 사는 색시와 혼인을 하라는 전갈이 오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대뜸 혼인을 해버렸습니다. 실의에 잠긴 마음을 그렇게 해서라도 달래보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그에게 안정과 행복을 가져다 주기는 커녕 도리어 무거운 짐만 짊어지게 했습니다.

그는 그 짐에서 벗어나고 잃어버린 목도 찾을 겸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그러자니 자연 가정을 돌보지 않게 되어 아내는 집을 떠나게 되고, 그 아내에게서 낳은 자식마저 저 세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불러들인 불행이지만 자신으로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어 더욱 더 실의와 좌절 속에서 세월을 보내는 동안 해방이 되고 그의 나이 30살이 되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그는 해방 뒤에 생긴 여성창극 단체인 <햇님국극단>에 들어 갔습니다.

그 단체에는 박초월, 김소희, 박귀희, 조금앵, 김경애와 같이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던 여자 명창들이 있었는데 그는 그 단체에서 고수도 하고, 무대감독도 하고, 작곡도 하며 그들의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그 뒤 김연수 명창이 이끄는 <우리 국악단>에서도 무대 뒷일을 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때의 쓰라린 경험과 명창들의 그늘에 가려 그들의 뒤치닥거리를 하며 느꼈던 열등감, 무대감독을 하며 익힌 무대 경험들이 '재기'를 위한 밑거름이 될 줄이야 그 당시는 아무도,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기에는 숨은 공신이 있었습니다. 

함께 창극단의 스탭 일을 하던 중 사랑을 하게 되어 마지막까지 해로한 둘째부인 변기씨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없었던들 그의 재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1962년에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들어 간 그는 남들은 전성기를 지나서 활동을 마무리 짓는 나이에 골방에 틀어박혀 아침 여섯시부터 정오까지 꼼짝 않고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그 뒷바라지를 지성스럽게 했을뿐더러 돈 못 벌어 온다고 잔소리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또 소리공부하다가 절망에 빠진 그가 소리 집어치우고 다른 일을 하겠다고 하면 극구 말리며 다른 생각 말고 소리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러한 아내의 내조 덕분에 그는 10여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로지 소리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만 52살이 된 1968년에 <흥보가> 5시간 완창 발표회를 갖고, 1969년에 <춘향가> 8시간 완창발표회를 한 다음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를 차례차례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 뒤에 그는 계속해서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 <강를매화전>과 같이 가사와 곡을 잃어버린 것으로 알려진 노래들을 다시 가사를 찾고 곡을 붙여서 발표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된 그는 1970년에 주태익이라는 극작가가 판소리 사설체로 쓴 <예수전>에 곡을 붙여 5시간 동안 불렀고, 그 뒤 <팔려 간 요셉>이라는 노래도 창작해서 전국 교회를 돌며 신자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또 1973년에는 <이순신전>을 불러 창작 판소리에 대한 국악계와 일반인들 사이에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407031

“십 년 동안 목숨을 걸어 놓고 공부를 헌 결과여. 내가 젊어서 못된 짓을 많이 혀서 목을 버려 놓았응게 목만 다시 찾으면 죽어도 원이 없다 허고 일심으로 공부를 허니까 목이 다시 찾아 와. 그래도 고음이 예전처럼 안 나와서 나 혼자 연구를 혔지. 처음에 '암성'으로 가늘게 내다가 점점 기운을 넣어서 '통성'으로 내는 거여. 옛날 임방울 명창도 이런 말씀을 허셨지. 소리를 많이 허면 가느다란 '실목'이 나오느니라. 그것을 많이 허면 그 목이 차차 굵어져서 통성이 되는디 그 단계가 어려운 것이니라. 허셨는디 내가 혀 보닝게 정말 어려워요. 실목을 통성으로 변화시키기가 소리공부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여. 그 단계를 통과혀야만 득음을 혔다고 헐 수가 있는거지”

그 어려운 단계를 통과한 명창에 대한 예우로 나라에서는 1973년에 판소리 <적벽가>의 인간문화재로 그를 지정했습니다.

그는 그 뒤 국립창극단의 단원이 되고, 1978년에는 단장이 되어 1981년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창극단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는 더 바빠져서 남들은 은퇴할 나이까지 각종 판소리 관련 교육이나 수없이 밀려오는 초청 공연, 방송 출연, 음반 취입, 게다가 광고 출연까지 젊은이 못지 않게 분주하게 보내다가 87세인 2003년에 세상을 떴습니다.

인생의 후반기인 50세에 재기해서 30년의 전성기를 보낸 그는 깊은 고난의 길을 걸어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무서운 집념과 미래에 대한 도전, 그리고 열정으로 충만한 노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뜬 '대기만성' 형의 명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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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명창들에게는 '득음'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 전설 같은 일화들이 많이 전해 온다.  득음이란 '소리를 얻는 것' 곧 판소리가 필요로 하는 최고의 성악적 경지에 다다른다는 말이다. 

테너나 바리톤이나 베이스와 같이 음역에 맞추어 역할이 정해지는 오페라와 달리 판소리는 소리꾼 혼자서 최고의 고음에서부터 최저의 저음까지를 소화해야 한다.

또 <춘향가>나 <심청가> 같은 판소리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완창하기 위해서는 서너 시간에서 길게는 아홉 시간까지의 긴 시간 동안 성대를 쓰기 때문에 상상할 수 없을만큼 고된 수련을 필요로 한다. 

안숙선 명창의 열창하는 모습


예전에 판소리 공부를 하던 소리꾼들은 기생들에게 무용과 음악을 가르치던 사설 교육 기관인 권번이나, 명창 선생님이 사는 집을 오가며 기초 공부를 했다.

그 다음에 '독공'이라는 개인 훈련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주로 마을에서 떨어진 산속의 움막이나 절 같은 곳에서 소리 공부를 했다.

그러다보니 어떤 명창은 폭포수 아래에서 폭포소리를 이겨가며 수련을 했다든지, 어떤 명창은 토굴에서 북채 수백 개를 부러뜨려가며 수련을 했다는 등의 수많은 일화가 전해 온다.

일제시대에 판소리에 미친 정노식이란 학자가 입으로만 전해 오던 명창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음악 세계를 집대성해서 펴낸 <조선창극사>에는 그런 일화들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판소리사라 할 이 책은, 관극시(觀劇詩)를 비롯한 판소리와 연관된 한시(漢詩)들도 모아 놓았고, 판소리의 음악적 특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광대의 약전 및 그 예술>이라는 항목에서는 89명의 남녀 소릿광대와  고수 1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중에 일반인들이 궁금해하는 '전설(?)' 두 가지가 있다.  소리 공부를 할 때 '똥물을 먹는다'는 전설과, '목에서 피를 토한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나 역시 그 전설이 궁금해서 한창 소리 공부를 할 때 나의 스승이신 박초월 명창에게 여쭤봤다.

 나의 스승 박초월 명창의 소녀 시절 사진


그랬더니 첫 번 째 질문인 똥물에 대해서는 자신도 마셔본 적이 있다고 대답하셨다. 

난 얼굴을 찡그리며 "그 냄새 나는 것을 어떻게 마셔요?"하고 물었다. 박초월 명창은 웃으면서 "그걸 어떤 미친 놈이 그냥 마셔?" 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똥물 제조법'을 가르쳐 주셨다. 

똥물 제조법

1. 굵은 대나무 통 뚜꼉을 무명천으로 꼭꼭 감싼 다음,  변소간에 넣어 둔다.
2. 몇 개월 뒤  대나무 통을 꺼내면 천 사이로 스며 든 '맑은' 똥물이 가득 차 있게 된다.
3. 그 물을  뚝배기에 담아 펄펄 끓인다.(기생충 박멸 작전)
4. 물이 식으면 코를 한손으로 막은 다음 단숨에 마신다. 


왜 구린 냄새가 나는 똥물을 마셨을까? 

하루에 몇 시간 씩 매일같이 소리 연습을 하다 보면 누구나 성대가 붓고 열이 생겨서 목이 잠기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때 성대의 열을 내리고 잠긴 목을 틔워주는데 똥물이 효과가 있다는 민간의 속설이 전해져서 그 물을 마시는 것이다.

실제로 곤장을 맞아서 온 몸이 부은 사람이 똥물을 먹고 나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는 걸 보면, 몸의 독기를 빼고 부기를 내리고 열을 내리는데 똥물이 효과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박초월 명창은 자신도 어릴 때 몇 번 마셨고, 제자 중에도 마신 사람이 있지만 "그건 모두 약이 귀했던 옛날 얘기지 지금은 좋은 약이 많아져서 똥물 마시는 사람은 없다." 하셨다.


명창들은 정말 목에서 피를 토했나?

두 번 째 질문에 대해서는 '하하' 웃으시며 그건 좀 과장된 얘기라고 하셨다.

소리 공부를 하다보면 성대가 붓고, 염증이 생겨 목이 쉬는데 그걸 이기고 계속 소리를 지르다 보면 염증이 터져서 가래에 조금씩 피가 섞여 나오는 경우는 있어도 "피를 토한다는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고 있을 수도 없다"는 대답이었다.

마침 그 무렵에 모 방송국에서 송흥록이란 전설적인 명창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어 내보내고 있었는데, 절에서 혼자 노래 연습을 하다가 시뻘건 피를 입에서 울컥울컥 쏟아내는 장면이 있었다.

선생님과 함께 그 장면을 보던 중 "저 사람이 폐병에 걸렸나? 저게 무슨 일이냐?"하며 화를 내신 적이 있다. 작가나 연출이 피를 토한다는 전설에 대해 연구도 하지 않고 만든 엉터리 장면을 본 시청자들은 명창들이 모두 저렇게 한사발씩 피를 토하는 줄 알 거 아니냐는 걱정과 함께 말이다.

나 역시 소리 공부에 빠졌을 적에는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을 하기도 했고 목이 쉬어 고생도 많이 했지만, 똥물을 먹거나 피를 토한 적은 없었다.

또 내가 아는 주변의 명창들도 성대가 붓거나 염증이 생기고 조금씩 피가 섞여 나온 일로 고생을 하고 그걸 치료하기 위해 무던히 고생을 했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도, 울컥울컥 피를 토한 경험을 한 사람은 없었으니 전설은 전설로 남겨 놓을 일이다.  

그만큼 판소리 수련의 길은 멀고도 고통스러운 길이다. 그런 길을 걸어 명창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인간승리의 표본이다.


     전설적인 명창 송만갑(1865~1939).
     그는 74세의 생애 동안 오로지 판소리의 길에만 매진했던
     대명창이며, 판소리계의 가왕이라고 불리는 송흥록 명창의
     손자이기도 했다.


나는 그 멀고도 고통스러운 길을 가다가 중도 포기한 사람이기 때문에 꿋꿋이 그 길을 걸어 가는 명창들에게는 지금도 한없는 존경과 사랑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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