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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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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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0.06.26
    이 시대 문화예술인들의 화두, 김제동 (35)
  2. 2009.12.13
    '교사와 여제자'의 가난한 사랑이야기 (77)
  3. 2009.10.15
    '우리 소리 우리 음악' 선물 이벤트합니다. (43)
  4. 2009.09.18
    '호모 노마드', 유목민의 시대가 올 것인가? (45)
  5. 2009.09.04
    「서편제」의 영감을 준「조선창극사」 (24)
  6. 2009.07.01
    어느 남사당 명인과의 하룻밤 (21)
  7. 2009.05.05
    장관 껍데기 훌훌 벗고 광대로 돌아와보니 (24)

1년 전, 제가 노무현 전대통령의 영결식 노제 총감독을 맡았을 때 김제동씨는 사회자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유서의 내용을 나름대로 재해석한 ‘아름다운’ 말들로 사회 멘트를 장식해서 '김제동 어록' 유행시켰습니다. 1년이 지난 뒤, 그는 1주기 추모식의 사회자로 다시 참여했고 그 여파로 Mnet의 쇼MC에서 사퇴하게 되었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에 ‘아름다운’ 말로 애도를 표한 개그맨이 정치적 문제로 일자리를 잃어야 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출처 : http://h21.hani.co.kr/section-021013000...027.html

김제동이라는 연예인이 이 시대의 정치권력과 겪는 갈등을 보면서, 그의 선배라 할 수 있는 옛 시대 광대들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연산군 때 ‘공길’이라는 광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연산군의 황음무도함을 풍자하는 놀이를 자주 벌였는데, 그 일이 발각되어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옥에 갇힌 뒤부터 단식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묻는 연산군에게 그는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했습니다.
 

논어에 이르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어버이는 어버이다워야 하며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고 했는데,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비록 창고에 곡식이 가득한 들
내 어찌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 ‘아름다운’ 말에 분노한 연산군에 의해 공길은 처참하게 매를 맞고 유배를 당했습니다. 그의 이 짤막한 에피소드는 재능 있는 작가와 감독에 의해 연극 <이(爾)>와 영화 <왕의 남자>로 재탄생되어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러시아에 ‘블라디미르 레이니도비치 두로프’라는 광대가 있었습니다. 그 또한 공길이처럼 러시아를 지배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풍자하는 놀이를 벌인 죄목으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도 감옥에 가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어릿광대의 왕이다.
하지만 결코 왕의 어릿광대는 아니다.
우리는 지고한 대중의 어릿광대다.

구한말에 활약했던 몇몇 기생·광대들의 다음과 같은 일화도 무척 시사적입니다. 먼저 일제 침략에 항거해 독약을 마시고 자결한 유학자 황현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오는 이야기. 

진주 기생 ‘산홍’이가 검무를 잘 춘다는 소문을 듣고, 내무대신 이시홍이 천금을 주고 산홍이를 사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산홍이는 그 제안을 일거에 거절하며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했습니다.

내 비록 천한 기생의 몸이지만,
일본에 나라를 판 오적의 두목에게
몸을 팔지 않겠다.

이 말에 크게 노한 이시홍은 그녀를 잡아다 무자비하게 때렸다고 합니다.

판소리 <서편제>를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소리 광대 '박유전'은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무과 벼슬까지 하고 그의 사랑채에 수시로 출입했습니다. 그러다가 민비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대원군이 중국으로 망명하자, 민비파의 보복을 피해 전라도에 숨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자 한양으로 올라갔습니다. 얼마 뒤, 대원군이 죽고 한일 합방이 되자 그는 나라 잃은 가객이 노래 부를 수 없다며 전라도 어느 땅에 칩거하다가 한겨울에 굶어 죽었습니다.

같은 시절에 '정가소'라는 ‘재담 광대’(요즘으로 치면 개그맨)가 있었습니다. 그는 북촌의 양반집 사랑방을 돌아다니며 정치나 시사 문제를 풍자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의 장기는 '흥인군 곳간 점고'였습니다.

흥인군은 대원군의 형으로 동생의 권력을 빙자하여 뇌물 받기를 좋아해서 엄청난 치부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흥인군은 집안에 아홉 개의 곳간을 지어놓고 공물들을 가득 쌓아놓았는데, 정가소는 이른 아침마다 곳간 문을 열고 공물을 헤아리는 흥인군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하여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 같은 시기에 '정동'이라는 재담 광대가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모든 권력과 금력을 장악한 안동 김씨의 비리와 부정부패와 권력남용 등을 풍자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김씨 일파가 보낸 하수인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위에 예로 든 기생·광대 즉 옛시대의 문화예술인들이 활동했던 시대는 철저한 계급사회였습니다.

그토록 권위적이며 봉건적인 시대에, 사회적 약자였던 그들이 그토록 저항적이며 진취적인 소신을 가지고 활동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문화예술인들과 정치권력의 갈등은 한일합방과 일제의 식민지배로 인해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항적’이며 ‘진취적’인 문화예술인들은 철저히 제거되었습니다. 

또한 해방 이후 좌·우익의 이념 대립은 그들에게 분명한 정치적 선택을 강요했기 때문에 문화예술인들은 어쩔 수 없이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문화예술인들은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정치권력을 따르게 되었고, 남한의 문화예술인들은 자유민주주의로 무장한 정치권력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남한의 역대 정치권력은 그들을 ‘관리’하고 ‘통제’했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의 ‘일부’ ‘불온한’ 문화예술인들은 군사정부의 독재적이고 폭압적인 권력에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그들은 민주와 통일과 인권과 평등의 기치를 드높이 내걸고 저항적이고 진보적인 문화예술운동을 펼쳤습니다. ‘90년대 말에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탄생되자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습니다. 

관리와 통제 정책은 지원과 육성 정책으로 변했습니다. 검열 제도가 사라지고, 표현의 자유와 자율성이 신장되었습니다. 문화예술가들은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표현을 하고, 소신껏 발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0년 현재, 그 결과는 다시 참담해졌습니다.

문화예술계의 좌파·우파 편가르기는 무자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기관장 인사 파동, 방송 장악 시도, 표현의 자유 위축 등도 급속도로 심화되었습니다.

그러더니 급기야 비판적 문화예술인들의 ‘목줄조이기’라는 구시대적 작태까지 등장한 것입니다. 이제 연예인들을 포함한 문화예술인들은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에게 적당히 이용당하며 살아 온 옛 시절로 돌아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문화예술인들에게 다시 한 번 정치적 각성이 필요한 시기가 왔습니다. ‘지고한 대중’의 삶 속에 뛰어 들어, ‘저항적’이고 ‘진취적’으로 살다 간 옛 시대 광대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문화예술인들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 김제동은 어느새 이 시대 문화예술계의 ‘화두(話頭)’가 되고 말았습니다. 

트랙백 1 AND COMMENT 35
<'교수와 여제자'의 애절한 사랑이야기>의 마지막 귀절에 저와 아내의 이야기를 간단히 언급했더니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더군요.
사생활 노출이 싫다고 펄펄 뛰며 반대하는 아내를 간신히 설득한 끝에 저와 아내의 이야기를 '살짝' 들려드릴 수 있게 됐습니다.
써놓고보니 저도 좀 계면쩍기는 하군요.ㅎㅎ   



아내와 저는 배화여고에서 만났습니다.

저는 28세 총각 선생으로, 아내는 고1의 여고생으로. 제가 허름한 양복 상의에 후즐그레한 바지를 입고 첫 수업을 하는 순간, 아내는 첫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제 부스스한 머리 뒤에서 새하얀 은빛 햇살이 퍼져 나오는 걸 봤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저는 첫 수업에서「춘향가」중의 <사랑가>를 학생들에게 들려줬습니다.

“독일어를 하는 것은 우리말을 잘하기 위해서이고, 우리말을 잘하려면 우리 음악을 잘 알아야 하는데, 우리 음악 중에서도 판소리가 가장 뛰어난 음악이다.” 등등 정말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판소리를 흥얼거리는 괴짜 독일어 선생은 학생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어떤 때는 불어반 학생들이 몰래 들어와 괴짜 독일어 선생의 수업을 듣기도 했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독일어보다도 제가 들려주는 시와 음악과 연극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대신 학생들의 독일어 실력은 수준 이하를 맴돌았을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교단에 서서 “아 베 체 데, 데어 데스 뎀 덴”과 「보리수」와 「로렐라이」와「황태자의 첫사랑」을 가르쳤고, 수많은 경쟁자들 속에서 말없이 저를 바라보던 소녀는 설레는 가슴으로 독일어 수업을 기다리고, 저의 모습을 보려고 교정을 서성이고, 밤마다 저의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아내의 고향은 전라남도 고흥군의 산골 마을.

장인어른은 저처럼 판소리를 좋아하시고 북도 치시던 멋쟁이였답니다. 3남 2녀의 둘째딸로 태어난 아내는 아담한 키에 고운 얼굴에 잘 웃고 명랑하면서도 수줍음이 많은 소녀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온 가족이 서울로 올라와 영등포구 고척동에서 조그마한 철물공장을 하며 살다가 구로동, 독산동으로 이사를 하는 동안 점점 재산이 불어나, 고등학교 때는 커다란 연립주택의 주인집 소녀로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학창 시절의 추억으로 끝나고 마는 선생님 짝사랑이 아내에게는 추억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밤마다 저의 이야기가 담뿍 담긴 일기를 쓰고, 저와 결혼해서 아기를 낳고, 저의 판소리를 듣고, 시골에서 채소를 키우며 오순도순 사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제가 학교를 떠나자 아내는 사흘 낮, 사흘 밤을 울었다고 합니다. 이것도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그 뒤 제가 어느 극단에서 연극 한다는 소문이 돌자 대학생이 된 여제자는 매일같이 신문의 문화면을 뒤적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연극을 할 때마다 아담하고 고운 얼굴을 한 여제자가 찾아 와 꽃다발을 주고는 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수십 명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가, 1년 뒤에는 열 명 쯤 중의 한 사람이었다가, 2년 뒤에는 몇 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가, 3년 뒤에는 단 한 사람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아내는 신문의 문화면을 읽으며 언제 있을지도 모르는 저의 공연을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공연 보러 가기 전날엔 흥분하고 들떠서 잠을 설치다가, 공연하는 동안엔 제 얼굴만 바라보다가, 공연이 끝난 뒤엔 잠깐 만나 몇 마디 말을 나누고 돌아와선, 베개를 꼭 끌어안고 미소를 띄며 잠을 잤다고 합니다.

극장 역시 저의 옷차림처럼 허름하고, 후즐그레하고, 비좁았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전혀 딴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깔깔거리며 웃고, 노래를 부르다가, 슬픈 목소리로 넋두리도 하다가, 다시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일 년에 한 번이나 두 번이나 세 번쯤 만났습니다.

그러는 동안 스승과 제자였던 두 남녀는 사제 관계와 연인 사이의 감정이 뒤섞인 묘한 만남을 한동안 계속했습니다. 아내는 제가 아버지와 단둘이 삼송리에 살 때에도 몇 번 찾아왔고, 고대 앞 길가의 자취방에서 극단아리랑 창단을 모의할 때도 가끔 찾아왔습니다.

어두컴컴하고,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고, 때 절은 이불이 널린 연습실 겸 침실에 찾아와,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청소도 해 주고 콩나물국도 끓여주는 여제자에게 저는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은 환상 속에서 꿈을 키우고, 한 사람은 어둠 속에서 무명 배우의 고달픈 세월을 보내는 동안 소녀가 어느덧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졸업 선물을 해줄 수도, 저녁을 사줄 수도 없을 만큼 가난했던 저는 소녀가 데리고 간 경양식 집에서 침울하게 맥주만 들이켰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결혼 얘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그 무렵에 병을 앓고 있었고, 영화나 연극을 하기는 했어도 수입이 형편없던 터라 결혼에 도통 자신이 없었습니다.

'나는 방탕한 사람이다, 미래는 비참할 것이다, 나를 잊고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등등 두서없이 떠들어대는 제 말을 한참 동안 듣고 있던 소녀가 제 말을 막고 입을 열어 조용조용 얘기했습니다.

왕을 사랑하면 왕비가 되는 것이고,
거지를 사랑하면 거지 아내가 되는 거예요.
전 거지 아내가 되고 싶어요.

가난에 시달리고 예술에 시달리고 고독에 시달리던 저에게 그 말은 샘물과도 같은 활력을 주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군소리 집어치우고 장인 어르신과, 장모님과, 아내의 형제자매들을 차례로 만났습니다.

결국 제가 35살, 아내는 25살 때인 1986년 10월 26일에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아주 단촐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가난하고 초라한 결혼식이었지만 많은 연극 동료들와 친구들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어주고, 저를 들쳐메고서 신랑 다룬다고 발바닥도 때리며 떠들썩하고 즐겁게 축하해 주었습니다.

 
신혼여행은 제주도로 갔는데 극단아리랑 창단 작품「아리랑」의 제주 초청 공연이 잡히자 거기에 맞춰 결혼식 날을 잡은 터라, 신혼여행이 아니라 공연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첫날밤을 멋지게 보낸답시고 병약한 신랑이 목욕탕에서 아내를 안고 나오다가 미끄러져서 욕조 모서리에 허리를 부딪치는 통에 매일같이 한의원에 가서 침 맞고 찜질하고, 허리에 복대를 두르고 간신히 공연하고, 공연이 끝나면 여관에서 찜질하며 보냈습니다.

신혼여행이 아니라 저는 ‘투병여행’이 되었고, 아내는 ‘간병여행’이 되고 말았으니 우리의 결혼은 출발부터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제가 가난한 줄은 알았지만 그토록 알거지인 줄은 몰랐던 아내는 식을 올리기까지 여러 번 놀라기도 하고, 울기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러나 식을 올리고선 이내 거지 아내가 되어 친정에 가서 반찬도 얻어 오고 옷가지도 집어 오곤 했습니다.

딸이 태어나고 아들이 태어나는 출산과 양육의 세월동안 저는 정말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생활은 뜻대로 나아지지 않고 언제나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짜증과 싸움과 눈물과 고함과 화해가 얽히고 섥히는 정상적인(?) 결혼 생활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결혼 후 오년 쯤이 지난 어느날의 대화 한토막. 

아내 : 참 이상해요.
나 : 뭐가?
아내 : 당신은 아침부터 밤까지 쉴 새 없이 일을 하고, 하루도 쉬지 않고 노력하는데 왜 늘 생활에 쫒기고 불안하기만 하지요?
나 : 줄 타는 광대가 줄 위를 걸어가다가 발을 한 번 잘못 디디면 천길 벼랑 아래로 떨어져서 목숨을 잃고 말아. 나는 그런 줄 위를 걷고 있지. 그리고 당신도, 아기도, 우리 인간들 모두가 그런 운명의 줄 위를 걷고 있어. 정도는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불안하기는 다 마찬가지야.
아내 : 당신은 세상을 너무 어렵게 살아가려고 해요.
나 : 그게 내 특기야. 당신, 그런 나를 좋아했잖아?
아내 : 그때는 철부지 소녀였지만 지금은 살림을 하는 주부예요. 현실은 꿈을 자꾸 퇴색시켜요.
나 : 현실이 퇴색시키는 게 아니라 당신의 마음이 퇴색된 거야. 내게는 아직도 꿈이 있어. 그 꿈은 날이 갈수록 빛나고 커지고 있지. 당신도 함께 나눠 가지자구.
아내 : 당신은 그 꿈만 먹고 배가 부를지 몰라도 아이들이나 나는 그렇지 않아요. 나는 당신이 다른 배우들처럼 가난하고 비참한 말년을 보낼까 봐 걱정이예요.
나 : 나는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될까 하는 걱정보다도 아무런 좋은 작품도 남기지 못한 채, 또 이 시대의 삶에 대해 아무런 의미도 깨닫지 못한 채 허망하게 죽어 갈까 봐 그게 더 걱정이야.
아내 : 어쨌든 아이들하고 나는 당신이 타는 줄 위에서 불안에 떨 거예요.
나 : 그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열심히 줄 위를 걸어서 건너 편 절벽에 도착하는 방법뿐이야. 목숨을 내놓고 자기가 하는 일에 몰두해서 신념을 가지고 걸어가는 것! 나는 지금 온 힘을 다해서 걸어가고 있으니 당신도 뒤에서 신념을 가지고 따라와야지 불안하다고 줄을 흔들면 우리 식구 다 떨어지고 말아. 여보, 나와 함께 신념을 가지고 걸어가자구.
(주 : 실제로 이렇게 멋지게 얘기하지는 않았음.)

어쨌든 아내는 때로는 저의 언변에 속아, 때로는 소녀 시절의 환상에 속아서 불안하고 힘겨운 결혼 생활을 꾸려 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중년의 주부가 되어 때로는 어머니처럼 때로는 누이처럼 변덕쟁이 남편을 돌보고, 성인이 되어 가는 아이들과 씨름하며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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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제가 쓴 책 한 권이 나왔습니다.
상수리 출판사에서 출판한 「김명곤 아저씨가 들려주는 우리 소리 우리 음악」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어린이들을 위해 쓴 소중한 책이라서 블로그 이웃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벤트를 어떤 방식으로 해야할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여러 날 고민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책을 선물할까 고민고민하다가 할 수 없이 가장 평범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이 글이 발행된 2009년 10월 15일(목) 오후 5시까지 신청하신 분들 중 '선착순'으로 10명을 선정해서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책은 특별히 어린이들을 위한 우리 음악 책이니만큼 기왕이면 어린이를 자녀로 두신 분이나, 조카나 주변의 어린이에게 선물을 하실 분이 응모해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음악을 사랑하는 어린이라면 더욱 환영하구요. 

신청하실 분들은 자신의 연락처와 택배를 받을 주소, 
이 책을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은지 간단한 사연,
그리고 책을 받을 사람 이름
등을 적어서 제 메일로 보내주시면
메일이 도착한 순서대로 10명을 선정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사연이나 책 받을 사람 이름없이 주소만 보내주신 분들은 우선 순위에서 뒤로 밀리겠습니다. 좀 더 많은 분들에게 기회를 드리지 못하는 걸 용서해 주세요. 

제 메일 : arang0@empas.com

제 책에 대한 소개는 출판사에서 만든 보도자료로 대신하겠습니다.


신명 나고 흥겨운

우리 음악으로 배우는 역사와 문화

블로그 http://blog.naver.com/kyung_park

출간 의도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며 트로트를 부르는 쌍둥이 자매가 소개되어 화제가 되었어요. 지루하다고만 생각했던 우리 음악이 요즈음 새로운 옷을 입으며 사람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국악은 어렵고 다가가기 힘든 것으로 여기고 있어요. 영화 <서편제>에 남자주인공으로 출연하고 전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김명곤 아저씨가 들려주는 《우리 소리 우리 음악》 이야기는 우리 음악을 쉽고 재미있게 풀이해 어린이들이 우리 음악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어린이들이 우리 음악의 역사와 지식을 이해하고 흥겹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책이랍니다.


이 책의 특징

우리 음악은 선조들의 행복과 슬픔을 고스란히 담고 이어져 내려온 삶의 음악입니다. 《우리 소리 우리 음악》은 이러한 우리 음악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민족의 멋과 흥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고대시대부터 현대까지 대표적인 음악과 악기, 재미있는 음악 이야기 등을 시대별로 정리해서 초등학생이 알아야 할 우리 음악 지식을 모두 담았지요. 또한 어린이들이 우리 음악과 문화에 자부심을 가지고 시대에 발맞춰 창의적인 새로운 음악도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특별부록으로 우리 소리와 음악을 고대부터 삼국시대, 조선 시대별로 ‘음악으로 듣는 한국 음악사’ CD(국악방송, 국립국악원 선곡)에 모아 놓았어요. 거문고 독주인 <영산회상>, 조선시대의 궁중음악 <여민락>, 판소리 <사랑가> 등 대표적인 우리 소리와 우리 음악을 직접 CD로 들을 수 있습니다. 눈으로는 책을 읽고, 귀로는 음악을 들으며 우리 음악을 감각적으로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답니다.

 

 


저자의 말

우리 소리 여행을 떠나요!

많은 사람들이 ‘광대’라고 하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코에 빨간 공을 붙인 서양의 피에로나 어릿광대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광대는 익살스러운 표정과 몸짓을 하며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만을 뜻하지는 않아요. 한자로 ‘넓은 광(廣)’에 ‘큰 대(大)’로 쓰는 광대는 그 뜻대로 ‘크고 넓은 마음으로 기쁨과 슬픔, 외로움 같은 삶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창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큰 광대가 되어 어린이들이 우리 음악을 즐기고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답니다. 여러분은 서양 음악과 너무나 다른 음악 세계를 보여 주는 우리 음악을 딱딱하고 어려운 음악이라고 생각하나요? 우리 음악은 선조들의 행복과 슬픔을 고스란이 담고 이어져 내려온 삶의 노래예요. 우리 음악을 공부하면 우리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마음과 멋 그리고 흥도 느낄 수 있답니다.

자 그럼, 저와 함께 우리 음악 여행을 떠나 볼까요?


차례

1. 고대 우리 음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먼 옛날 고대의 우리 음악
노래와 춤이 있는 축제 같은 ‘굿’

2. 고유한 음악을 만든 삼국과 가야

거문고를 만든 고구려
일본에 음악을 전해 준 백제
노래의 나라, 신라
문화가 발달한 작은 나라, 가야

3. 불교 음악이 꽃피었던 통일신라시대

전통음악과 외래음악이 하나가 된 통일신라 음악

4. 고려시대에는 어떤 음악이 있었을까요?

궁중 음악의 발달
새로운 향악의 등장

5. 조선시대 음악

세종대왕의 음악 정책
민속악의 발달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 곁에 있던 민요
흥겨운 장단에 신명 나는 풍물놀이

6. 판소리와 일제강점기 음악

서민들을 위한 노래 판소리
노래하는 소리 광대
일본 침략으로 위기를 맞은 판소리

7. 새로운 우리 음악

해방 후 민족정신을 되살린 음악
친근한 음악으로 발전한 국악
퀴즈로 풀어 보는 로봇 이야기

특별부록 : 음악으로 듣는 한국 음악사 CD

김명곤 글|이인숙 그림

독자 대상 : 초등학생 3~6학년|출판사 : 상수리나무|발행일 : 2009년 10월 7일
ISBN 978-89-93397-10-9|값 11,000원|쪽수 104|판형 188×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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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석학인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가 쓴 「호모 노마드 Homo Nomad(유목하는 인간)」는 ‘정착민’과 ‘유목민’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불, 화폐, 종교, 예술, 철학, 민주주의, 시장경제 등 인류 5000년의 문명은 정착민들이 아니라 유목민들이 건설했다고 주장합니다.

유럽의 훈족이나, 스키타이족, 몽골리안 등 세계 역사상에 나타난 유목민들의 문화들을 소개한 뒤, 21세기는 ‘유목민적 가치관’을 가진 새로운 인간들이 대거 출현하게 되어있다고 전망했습니다.


유목민이란 '한 가지 가치관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와 도전과 모험을 하면서 떠돌아다니는 사람', 그러한 인류형이라고 얘기합니다.

저자는 인류의 미래에는 세 가지 부류의 인간이 활동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 정착민 : 근대 이후 우리 사회를 이끌어 왔던 직업군. 경찰, 군인, 법률가, 공무원, 교사, 의사, 은행원, 농민 등.

2. 비자발적 유목민 : 어쩔 수 없이 떠돌이가 되는 사람들. 실직자, 노숙자, 외판원, 이주 노동자 등.

3. 자발적 유목민 : 독립적이고 창의적이고 전문적인 직업군. 연구원, 예술가, 엔터테인먼트 종사자, 프리랜서, 운동선수, 레저 관광업 종사자 등.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사대부, 판검사, 은행원, 군인, 경찰 등 정착민들이 지배해 온 사회였습니다. 
그러한 한국 사회에 민주화바람과 함께 유목민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습니다.

7, 80년대만 해도 고등학교 졸업생들에게 장래직업을 써내라고 하면 검사, 판사, 변호사, 의사, 교사 등의 정착형 직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중에 배우나 가수 같은 유목형 직업은 전교 몇 명 정도, 특수한 학생들이 지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직업을 물으면 많은 수의 학생들이 탤런트, 가수, 모델, 패션디자이너, 영화감독, 영화배우, 게임프로그래머 등의 유목형 직업을 원한다고 합니다.

또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디지털의 무한한 세계를 마음껏 떠돌며 새로운 문화와 가치를 창출해내는 '디지털유목민'은 세계에서도 첫손을 꼽을 정도로 우수하고 그 숫자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요즘 급속히 팽창하고 있는 블로그스피어의 수많은 블로거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디지털 유목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경제학자이며 저널리스트인 홀름 프리베와 사샤 로보는 인류의 미래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인류형에 대해 「창조의 시대를 여는 자-디지털 보헤미안」이란 책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발적 유목민'들은 변화를 지향하며 창조적이며 자유롭습니다. 이들 중에는 부모 잘 만난 ‘팔자 좋은 유목민’도 있지만, 그들보다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세계적인 정보 산업이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나 과학계를 이끄는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나 스티븐 호킹과 같은 ‘위대한 유목민’들이 주축이 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들의 숫자는 급증하고 있으며, 인류 문명의 창조자로서 이들의 역할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한편, '비자발적 유목민'들 또한 급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불안에 떨며 살기 때문에 '위태로운 유목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50대만 되면 자리에서 물러나고, 공무원도 예전처럼 정년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퇴직 연령이 점점 낮아지는 통에, 제아무리 능력 있는 정착민일지라도 언젠가는 직장을 잃고 비자발적 유목민이 되어 황무지를 떠돌게 되는 현실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청년 실업률이 높아져 20대의 비자발적 유목민들도 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세대를 막론하고 유목민들이 늘고 있고, 누구든 언젠가는 유목민이 되고, 그들의 자녀들도 언젠가는 유목민으로 살아가게 되니 모든 사회적 삶 속에서 유목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회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유목민의 증가는 정착민과의 갈등을 증폭시킵니다. 기존의 가치와 제도에 안주하고 안정적 사회시스템을 원하는 정착민들에게,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과 파괴를 통해 변화를 꿈꾸는 유목민들은 위협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개척적인 '유목정신'으로 무장되어 있고, 일탈과 파괴를 즐깁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사람들은 떠돌이, 괴짜, 광대, 집시, 보헤미안, 부랑자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천재, 창조자, 개혁가로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유목정신이란 ‘현재 자기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나 직업이나 현재의 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찾아서 모험을 꿈꾸는 자, 그러한 것을 추구하는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유목정신의 핵심은 바로 ‘창조’, ‘변화’, ‘도전’입니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물결이 밀려와 엄청나게 새로운 도전에 봉착하고 있는 현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유목정신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최근 우리나라가 다시 보수적 정착형 사회로 회귀하는 모양새가 보이기는 하지만, 정착형 사회에서 유목형 사회로 진화되어가는 세계 문명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을 거라고 봅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향후 ‘위대한 유목민’이 얼마나 배출되느냐 하는 과제는 한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입니다.

'위대한 유목민'들이 21세기의 시대정신을 정확히 포착하고, 변화와 도전과 창조의 세계를 펼쳐갈 때, '위태로운 유목민'들의 문제 또한 많은 부분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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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에 심취해 있던 대학 3학년 시절, 인사동의 고서점에서 우연히 정노식의「조선창극사」를 샀습니다.



그때는 우연히 보고 샀는데, 알고보니 판소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필독서인지라 지금까지 제 인생의 반려가 되어 준 소중한 책입니다. 

저자인 정노식은 누구일까요?

정노식(1891년~1965년) :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문학부를 졸업했으며,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3·1운동에 참여하여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 창립에 관여했다.

1946년 12월 남조선노동당 중앙본부 중앙위원으로 있다가, 1948년 월북해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노동당 중앙검사위원, 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 등을 지냈다.

저서로 〈조선창극사〉(1940)가 있는데, 이는 최초의 본격적인 판소리 저술로 꼽힌다. 〈조선창극사〉는 총 89명의 창자와 고수 1명, 그리고 신재효에 관한 약전(略傳) 등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 책에는 송만갑·이동백·전도성·김창룡·정정렬 등의 구술을 기록했고, 그밖에 판소리 관계 문헌, 조(調), 대가닥(制), 판소리의 기원 등에 관한 견해도 실려 있다.

-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그 당시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고,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한 독립운동가였던 저자는 어찌된 인연인지 몰라도 판소리와의 열렬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분노와 애정을 동반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머릿말에서 광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조선 사람이 광대의 소리는 좋아하면서
광대의 인격은 천대 멸시하는 현실에 분개하고.....
광대소리야말로 조선인의 심상이 들어 있는 소리요,
광대들이야말로 당당한 예술가이어늘 천대를 받아 왔으니
이제야말로 그 관념을 시정하여서
광대의 예술가적 가치와 사회적 위치를 모두 인식할 때다.


기생, 광대에 대한 편견이 시퍼렇던 일제초기에 일본유학을 갔다 온 지식인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와 비슷한 신분의 학자들이 광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예를 들어볼까요?

조선후기 실학의 대가이며, 수많은 후학들에게 존경받는 대학자인 다산 정약용은 정조에게 보낸 상소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광대가 봄과 여름이면 고기잡이를 좇아 어촌으로 모여들고,
가을과 겨울이면 추수를 바라고 농촌으로 쏠리는데,
특히 창촌에서는 사당, 창기, 주파, 화랑, 악공 등의 잡류들을 엄금해야 합니다.


정노식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일제시대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소개된 육당 최남선의 말씀입니다.


조선조의 재인, 광대들은
적극적으로 특별한 권장을 입지 못하고
무식, 무기력한 예인들이
사회 최하층적 지위에서 구차히 존속하다 보니까
거기 쇠잔이 있을 뿐이고 발달이 없으며
저락이 거듭될 뿐이지 향상을 볼 수 없음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조건 하에 있다 보니까
수천년을 하루같이 몸을 놀리는 기술과 우스개 놀이 쯤에 그치고
드디어 '다른 데만한'(필자 주 : 서양을 말합니다.) 
순희곡적 생장을 이루지 못하고 만 것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루바삐 그 방법을 개량하여
서구의 예술을 익히면
외국 사람들에게도 조소를 면하리라.


 


이러한 편견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던 그 시대에, 광대들에 대한 천대와 멸시에 분개한 저자는 무한한 애정을 담아 이 책을 쓴 것입니다.

그는 판소리 광대들을 찾아 여러 지방으로 여행도 하고, 생존한 광대나 나이 든 노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채집했습니다.

1940년에 출간된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판소리와 관련된 조선시대 선비들의 시와 기록, 판소리의 유래, 창법의 음악적 특징, '동편제'와 '서편제'의 유래 등이 설명됩니다.

후반부에서는 별처럼 빛나는 수많은 명창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아름다운 로맨스,
소리 공부를 반대하는 집안과의 목숨을 건 투쟁,
광대라고 천대하는 사회의 편견에 대한 반항,
소리 공부를 하는 동안의 눈물겨운 고생,
명창들의 출신과 판소리에 입문하게 된 사연,
스승으로부터 전수 받은 내용,
특기로 잘했다는 대목에 대한 소개 등......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 보따리들을 잔뜩 풀어놓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의 대부분이 명창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현장감이 풍부하고 매우 드라마틱합니다.

그 후에 씌어진 판소리에 대한 많은 연구 서적들은 거의 모두 이 책의 내용을 기초로 수정 보완된 것들이기 때문에, 판소리에 대한 자료가 필요할 때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서편제」의 시나리오를 쓸 무렵, 제 머리 속에는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명창들의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그 이야기들이 시나리오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특히 다 쓰러져가는 움막에서 소리꾼 유봉이 <옥중가>에 나오는 '귀곡성'을 가르치다가, 자기 딸 송화에게 얘기하는 다음 대사는 전적으로 이 책에서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옛날 송 흥록이란 명창은 이 귀신소리를 어찌나 잘 불렀는지 밤에 이 대목을 하니까 바람이 불어서 촛불이 꺼졌단다.....


삼십여년이 넘는 세월을 제 서가에서 함께 살아 온 이 책은, 지금도 제게 명창의 혼령들과 교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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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의 몸 속에 우연히 들어온 작은 모래알이 진주가 되듯이, 제 가슴속에서 진주처럼 자라고 있는 모래알 같은 추억이 있습니다.

판소리에 빠져 지내던 대학 졸업반 무렵, 어느 유명한 여성 무용수의 공연을 보러 친구와 함께 장충동에 있는 국립극장에 갔습니다. 무용 자체에 대한 흥미도 있었지만, 사실은 포스터에 찍힌 무용수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그저 한 번 춤 추는 모습만이라도 보려고 무작정 찾아간 것입니다.

티켓을 살 돈도 없었던 저는 친구와 함께 공연장 잔디밭 근처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무렵에 저와 친구는 거지처럼 가난한 고학생이었기 때문에 돈을 내고 티켓을 살 형편이 안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무렵에 보고 싶은 공연이 있으면 무조건 극장에 가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고 왔습니다. 아는 사람을 만나서 함께 들어가기도 하고, 약속한 사람이 안와서 티켓이 남은 손님에게 다가가 티켓을 구걸하기도 하고, 때로는 안내원을 구워 삶아서 무료 입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날도 어떤 수가 나겠지 하는 당당한(?) 계획을 가지고 일단 근처 잔디밭에서 정황을 살피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때 어깨에 자그마한 가방을 맨 노신사 한 분이 "아이, 덥다!"하면서 우리 곁 잔디밭에 앉았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판소리에 빠져 있는 대학생이고, 무용 공연을 보러왔는데 티켓이 없어서 못들어가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오늘 공연하는 무용수가 자기 제자라고 하며 자기를 따라 오라고 했습니다.

친구와 저는 그 분을 따라 무대 뒤로 들어가서 리허설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마지막 마무리 안무를 하시며, 우리에게 공연이 끝나고 나서 함께 술 한 잔을 하지고 청했습니다.
 
우리는 판소리 명창에게 우리를 소개해 주겠다는 그 분의 꼬임과, 처음 보는 무용인들과의 만남에 잔뜩 흥미가 생겨 장충동의 족발집에서 여러 한국무용인들과 술자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질펀하고 재미있는 술자리는 새벽녘까지 계속되었고, 술에 만취한 그 분과 그 분의 젊은 제자, 그리고 친구와 저 네 사람은 장충동 근처의 여관에 방 두개를 잡았습니다. 그 분은 굳이 저와 함께 자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친구는 그 분의 제자와 방을 쓰고, 전 그 분과 한 방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분이 저에게 성적인 요구를 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거절했으나, 술에 만취한 그 분은 밤새도록 저를 괴롭혔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거절하자 그이는 토라져 있다가 날이 밝자 술이 깬 목소리로 자신의 등을 꼬집어 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등을 꼬집어 주자 그 분은 금새 기분을 풀고 좋아하면서, 옛날 남사당에 삐리로 들어 갔을 때 늙은 남사당 스승들이 등을 꼬집어 달라고 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꼬집어 드렸는데 자신이 나이가 들어가니 남이 등 꼬집어 주는 게 너무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판소리와 전통예술에 대해 그토록 관심이 많은 저에 대해 칭찬을 해주시며, 제가 묻는대로 자신의 살아 온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주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남사당패에 들어가 '삐리(나이 어린 단원)'로 생활하면서 겪었던 기구한 이야기와,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피나는 수련을 통해 대가의 반열에 이르기까지 그 분이 겪었던 삶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저는 노예술가의 삶에 깊은 공감을 느꼈고, 그 분의 진한 외로움을 함께 느꼈고, 그 분의 성적인 취향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남사당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자료를 모으며, 언젠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극으로 꾸며 보겠다는 꿈을 키워왔습니다.

남사당이란?

남사당패가 언제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가 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몇몇 문헌에 의하면 이미 신라 이전에 유랑 예인 집단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을뿐입니다. 유랑예인 중 대표적인 것이 남사당패로서 이것은 1900년대 초까지 떠돌이 예인들의 대명사였습니다.

우두머리인 '꼭두쇠'를 중심으로 하여 독신 남자들만으로 구성된 남색사회로, 몇 해 전에 1000만 관객을 동원한 화제의 영화 『왕의 남자』에 소개된 남사당 광대들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남사당패의 생활이 쉽게 이해되실 겁니다.



그들은 마을의 큰 마당에서 밤새워 서민들을 위한 놀이판을 벌이고, 며칠 뒤면 짐을 싸들고 다른 마을을 향해 또다시 길을 떠나는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또 남자들만으로 구성되었으니 여성의 역할도 소화해야 되는 환경 속에서,
풍물과 버나돌리기와 꼭두각시 놀이와 탈춤과 땅재주넘기와 줄타기와 같은 어려운 기예들을 혹독한 훈련과정을 통해 익혀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천민으로 취급을 받으며 세속적이고 사회적인 삶에서 거세되고 추방되는 삶을 살았으며, 남색과 도박, 아편, 술, 싸움질 등 사회의 어두운 이면과 함께 하면서도 광대로서의 삶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좌절과 환멸로 점철된 그들의 삶을 지켜준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천민의 신분으로 겪어야만 하는 멸시와 굴욕을 이겨내며 유랑의 길을 떠났던, 그리고 굶주림과 방랑 속에서도 끊이지 않고 기예를 이어올 수 있었던 그들의 생명력은 무엇으로부터 나온 것일까요?

전 지금까지도 삼십여 년 전의 젊은 시절, 장충동의 허름한 여관 방에서 남사당 출신 명인과의 하룻밤을 보내며 품었던 그 질문의 해답을 찾아 헤매고 있는 중입니다.

그 질문의 해답을 찾는 날, 제 가슴속에서는 아름다운 진주 한 알이 탄생될 것입니다.  

    

    남사당(男寺黨)/ 노 천 명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같은 머리를 땋아 내리는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香丹)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 굴욕된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 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지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소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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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관광부 장관 직을 그만 둔지도 어느 덧 2년이 되어 간다.
    그동안 TV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연기자로, 연극 <밀키웨이>에서는 극작과 연출가로, 최근에는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위원장으로서 즐겁고 바쁘게 살고 있다.
     
    
    내가「대왕 세종」에 출연하고 있을 때, 모 일간지에 동정 기사가 실렸는데 그 기사의 제목이 한동안 여기저기서 화제가 됐다.


    김명곤 씨 “장관 껍데기 훌훌~ 다시 광대로”

    “장관이라는 껍데기를 훌훌 벗어 버리고 이제 천직인 광대로 탈바꿈해야죠. 걱정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허허.”

    김명곤(55·사진)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내년 1월 방송 예정인 KBS 1TV 사극 ‘대왕 세종’(극본 윤선주·연출 김성근)에서 배우로 복귀한다. 1999년 자신이 연출한 연극 ‘유랑의 노래’에 출연한 지 8년 만이다.

    그는 그동안 국립극장장과 문화부 장관을 지내면서 연기와 멀어졌다.김 전 장관은 ‘대왕 세종’에서 고려 황실의 후예로 조선 왕조의 전복을 꿈꾸는 옥환 역을 맡았다. 옥환은 어린 세종을 긴장하게 만드는 인물로 초반 30회까지 비중이 큰 역할이다. 그가 대하 사극에 출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D일보 2007년 10월 6일자 기사 중 일부)

    나는 대학교 다닐 때만해도 광대라고 하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코에 빨간 공을 붙인 서양의 삐에로를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줄타기하는 광대를 처음 보았는데 그 광대가 줄에 올라서서 “이 줄타기가 옛날에는 화랑의 기예였소!.” 하길래 깜짝 놀랐다. "화랑이라면 신라 시대의 무사 집단인데 줄타기를 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며 광대에 관한 기록을 찾아봤다.

    우리나라에 그윽하고 오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며 유교, 불교, 도교의 3교를 포함한 것으로 민중을 교화하는 것이다.

    신라 시대의 학자인 고운 최치원이 쓴 글이다. 이 글을 바탕으로 역사가인 단재 신채호는 이렇게 썼다.
     

    선가(仙家)는 신라의 국선 곧 '화랑'으로 보며, 그 시원은 삼한의 소도(蘇塗)의 제관으로 고구려의 '조의선인(鳥衣仙人)'이다.

    이런 글들을 보니 고대사회에서 예술가들은 하늘에 국가적 제사를 지낼 때는 제관으로서 활동했고, 그들의 신분은 왕족이나 귀족에 속하는 상류계급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통일신라가 무너지고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화랑들과 함께 예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천민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광대”라는 말은 고려시대에 서역에서 들어 와 우리말로 정착된 외래어인데, 예술가를 지칭하는 단어인 광대가 화랭이, 재인 등의 용어와 뒤섞이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광대들은 기생, 무당, 중, 백정 등과 함께 천민계급으로 살아야 했다. 이들은 사대부나 평민들과 한 동네에서 살지도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하고,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자기들끼리 기예를 전수하면서,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고, 그들만의 독특한 사회를 꾸려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광대들에 대해 다산 정약용은 이런 상소문을 썼다.

    광대가 봄·여름이면 고기잡이를 좇아 어촌으로 모여들고 가을과 겨울이면 추수를 바라고 농촌으로 쏠리는데, 특히 창촌에서는 사당, 창기, 주파, 화랑, 악공들의 잡류들을 엄금해야 합니다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본 <왕의 남자>는 이 무렵의 떠돌이 남사당 광대패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실학사상이 일어나고 평민 가사, 탈춤, 판소리 등의 가치를 양반들 중의 몇몇이 언급하게 되면서 광대들의 가치가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고종과 대원군이 권력을 쥐었던 무렵에는 광대들이 왕족이나 고위 관리들의 잔치에 초대받고, 심지어 명인, 명창, 국창 등의 이름으로 궁궐에 들어가 임금 앞에서 기예를 선보이며 많은 돈을 벌고 신분의 상승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조선이 망한 후 광대들은 또 다시 천대받게 된다. 그 상황은 일제시대의 학자인 육당 최남선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조의 재인, 광대들은 적극적으로 특별한 권장을 입지 못하고, '무식무기력한 예인'들이 사회 최하층적 지위에서 구차히 존재하다 보니까 거기 쇠잔이 있을 뿐이지 발달이 없으며 저락이 거듭될 뿐이지 향상을 볼 수 없음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조건 하에 있다 보니까 '수 천 년을 하루같이' '몸을 놀리는 기술'과 '우스개 놀이'쯤에 그치고 드디어 다른 데 만한 순희곡적 생장을 이루지 못하고 만 것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명 풍화에는 조금도 유익한 바가 없으니 이는 연희를 실시하는 자가 학문이 없어 '동양의 부패한 풍습'만 알 뿐이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했던 <서편제>는 이 무렵의 떠돌이 판소리 광대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나는 대학시절에 오페라나 이태리 민요나 가곡이나 뮤지컬이나 비틀즈 등의 서구음악의 열광적 팬이었고, 괴테나 세익스피어나 입센이나 도스토에프스키 등의 서구문학(독문학)에 심취했던 사람이다. 그러다 우연히 판소리를 알게 된 후로 내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고향인 전주를 무지 싫어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의 흔적이 너무나 짙은 그 곳을 어서 떠나 서울로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진학공부를 했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도 한국을 빨리 떠나 독일로 유학 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인간문화재인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면서 전라도 말이 그렇게 다양한 표현과 영롱한 문학적 향기가 있는가를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핏줄에 대한 애정 곧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나의 조상과 조국에 대한 사랑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전통은 박물관에 진열된 골동품이 아니다. 전통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았던 삶의 내용과 형식 곧 그 분들의 삶의 자취이고 향기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세월이 지나면 전통의 계승자가 될 것이며, 언젠가는 전통 그 자체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나에게 전통은 ‘나를 숨쉬게 하고, 나를 활기 있게 만들어 주고, 또 창조의 열정에 불타게 하는 소중한 원천이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무식무기력’한 광대들에게서 내 예술의 많은 부분을 배웠다. 나는 ‘수천 년을 하루같이’ ‘동양의 부패한 풍습'을 몸으로 전해 온 그들의 예술에 매혹 당하고 심취하고 깊이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들의 ‘몸을 놀리는 기술’ 속에서 삶의 깊은 애환과 감동을 보았고, 그들의 ‘우스개 놀이’ 속에서 예술적 창조의 편린을 보았다. 그들은 나의 스승이었고, 나의 애인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 종족의 일원이 되고자 ‘광대’라는 말을 쓴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연기, 연출, 극작, 경영, 행정에다가 연극, 영화, 국악, 방송 등 여러 분야에 간여하는 것을 보고 혼란스럽다고 한다. 

    당신의 정체는 뭔가? 아마도 이게 그들의 질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나는 그 모든 것을 추구하는 광대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럼 당신은 어떤 광대가 되고 싶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
    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라는 책에 나오는 발렌친 카그다예프라는 브리야트 족의 샤먼과 저자와의 대화로 대신하고자 한다.

    질문 : 당신 삶의 목표는 무엇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

    답변 : 훌륭한, 혹은 좋은 샤먼이란 자신이 함께 살아가는 민족을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는 좋은 샤먼이 되고 싶고, 따라서 우리 민족이 서로 도와가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본다.-----사랑을 나누고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모든 샤먼이 지녀야 할 미덕이다.

    반면 모든 악과 문제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과 자연과 사물을 착취하는 데서 발생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인내하고 이해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남을, 상대방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상대가 원하기 전에 그가 원하는 것을 먼저 베풀어 주는 것이 사랑의 첩경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현자와 성자들이 설파했던 조화와 사랑, 이것의 실천자로서의 샤먼 곧 ‘무당’의 역할에 대한 바이칼 샤먼의 지혜로운 말이 ‘광대정신’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광대란 '넓은 광(廣), 큰 대(大)'라는 말 뜻 그대로 ‘넓고 큰’ 영혼으로 세계의 불화와 고통에 정면으로 마주 서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온 몸으로 감싸 안고 표현하는 예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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