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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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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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07.28
    이 시대의 백결 선생, 거문고의 한갑득 명인
  2. 2010.05.13
    '서편제'에 특별출연한 김무규 단소 명인 (11)
  3. 2009.12.23
    거문고로 15만 대군을 물리친 제갈공명 (20)
  4. 2009.08.30
    지리산의 겨울, 판소리와의 기이한 인연. (23)
지금으로부터 80년쯤 전에 거문고의 백낙준 명인이 거문고에 전라도의 무속 음악과 판소리의 가락을 얹어 '거문고 산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자 유식한 선비들과 선비들의 영향을 받은 음악인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비난을 해댔습니다. 그보다 20년쯤 전에 가야금의 김창조 명인이 '가야금 산조'를 만들었을 때 여기 저기서 감탄과 칭찬의 말이 오가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반응이었습니다. 이는 거문고와 가야금이 지니고 있는 음악의 특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겨난 일입니다.

가야금이 규중의 아낙이나 기생들의 사랑을 받는 악기였다면, 거문고는 '군자의 벗'이라하여 마음을 닦고 뜻을 기르는 데에 쓰였기 때문에 ‘모든 악기의 우두머리’ 로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 온 터였습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_blog/photoList.do...3D679834

이렇듯 고상하고 점잖은 악기를 가지고 천박한 세속의 가락을 타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이단이요, 불경하기 짝이 없는 짓으로 여겼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거문고 산조를 비판한 것입니다.

그러나 백낙준 명인은 주위의 눈총에도 굴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산조 가락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전해 오던 거문고의 곡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묘한 가락이 그의 거문고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의 거문고 속에서는 슬프게 흐느끼다가, 호탕하게 웃어대다가, 바람처럼 속삭이다가, 시냇물처럼 재잘거리다가, 무섭게 호령하다가, 애절하게 통곡하는 ‘세속’ 의 온갖 정서가 찬란하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러한 세속의 정서는 거문고에서 금기로 여겨오던 것이었지만, 그것이 워낙 진하고 간곡한 삶의 냄새를 전해 주는 탓에 그를 비판하던 사람들도 마침내 하나 둘씩 그의 가락을 좋아하게 되어 드디어 거문고 산조의 창시자로 백낙준 명인을 찬양하게까지 되었습니다.

백낙준 명인은 그렇듯 어렵게 만든 산조가락을 박석기, 신쾌동, 김종기에게 전해 줬고 박석기 명인은 한갑득 명인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한갑득 명인이 거문고 산조를 배울 때만 해도 나라 안에 산조를 켜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습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음악가 집안이여. 할아버님 성함이 한덕만인디 대금을 잘 부시고 가야금도 명인이셨고, 아버님 성함은 성태인디 할아버지한테 가야금을 배웠다가 나중에 명창 김채만씨한티 판소리를 배워서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어. 내 나이 열두 살 됐을 때 아버님이 세상을 뜨셨지.”

아버지가 세상을 뜰 무렵 어린 한갑득은 안기옥이라는 명인에게서 가야금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되지 않은 열세 살쯤 되었을 무렵, 백낙준 명인이 광주에 공연을 왔을 때 우연히 그의 거문고 산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거문고 산조를 들었는디 어린 마음에도 참 좋아. 가야금 산조를 몇 년 배웠고, 어려서부터 음악에 젖어 살아왔으니 어렸다고 해도 이에 귀는 뚫려 있었거든. 그런데 들어보니 참 좋아. 가야금 산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씩씩하고 남자답고 깊고 무거운 맛이 울려 나온단 말이여. 그래서 거문고를 배울라고 여기 저기 알아보니 창평에 사는 박석기라는 사람이 거문고를 잘한대. 그래서 자전거를 빌려타고 창평까지 오십 리 길을 달려갔지.”

박석기 명인은 전남 담양군 창평 고을의 소문난 갑부였습니다. 일찍이 동경 대학을 나온 인텔리로 일본에서 야구를 배워와 우리나라에 보급시킨 체육인으로도 알려져 있는 터였고, 국악을 좋아해서 판소리와 거문고를 익힌 한량이었습니다. 그의 집에는 국악인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렸습니다. 그는 그 사람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며 후하게 대접하고 그들에게서 음악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는 거문고를 좋아해 백낙준 명인에게 십 년 동안 거문고를 배워 그의 수제자로 인정을 받을 만큼 실력을 쌓았습니다.

“그 양반은 생기기도 잘생기고, 마음도 넉넉한 사람이여. 찾아가서 ‘내가 한성태 씨 아들인디 거문고를 배우러 왔으니 가르쳐 주시오.’ 하니 두말없이 가르쳐 주겠다고 하더구만. 그날부터 그 집에서 먹고 자고 배우는디, 그때 박동실 명창한테서 김소희, 박초월, 한애순이 판소리를 배우고 있었고, 악기하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렸어.”

박석기 명인은 그에게 거문고 산조와 정악가락을 모두 전수해 주었습니다. 창평과 광주를 오락가락하며 거문고 공부를 끝낸 그는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그야말로 ‘푸른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광주 촌놈이 서울에 무작정 올라와서 대뜸 꿈을 이룰 수는 없었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어서 종로 낙원시장 근천에 하숙을 하며 무료하게 한두 달을 지냈습니다.

그런던 어느날, 마침내 그에게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하숙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는디 밖에 누가 와서 광주에서 온 한갑득 씨가 누굽니까 헌단 말이여. 그래 내가 한갑득이오. 허닝께 선생님을 뵙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나를 따라갑시다 헌단 말이여.
그래서 그 사람을 따라 가니 지금 단성사 옆 골목으로 돌아가더니 웬 커다란 한옥집으로 들어가더란 말이여. 따라가보니 대청마루에 수염 허연 노인네들이 탕건쓰고 갓쓰고 옥관자 달고 도포 입고 담뱃대 물고 떡 앉어 있더란 말이여. 그래 노인네들헌디 절을 했더니, ‘이놈아 니가 어린놈이 거문고 산조를 배웠다니 한번 타 봐라.’ 하더만. 그래서 덜덜 떨면서 배운 대로 탔지.”

그가 들어간 집은 식민지 시대 국악인들의 집합소였던 ‘조선성악연구회’였습니다. '수염 허연 노인네'들은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열 같은 원로 명창들이었고, 젊은 여자와 남자들은 정남희, 조상선, 오태석, 박녹주와 같은 신인 명창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거문고 산조의 ‘젊은 별’ 이었던 신쾌동도 앉아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는 스승 박석기에게서 배운 가락을 열심히 탔습니다. 그러자 노인네들이 얼굴에 웃음을 지으면서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신쾌동 씨가 나보다 세 살이 많은디 그 사람도 그때 놀랬다고 하드만, 어쟀든 그날 저녁부터 외출을 받게 되었어. ‘외출’이란 공연을 하는 건디 요새로 말하자면 밤무대를 뛰는 거여. 식도원에서 몇 시, 명월관에서 몇 시, 국일관에서 몇 시, 이렇게 예약을 받아놓고 외출을 나가는디, 한번 나가면 십 원이 보통이고 손님 인심이 좋으면 하룻밤에 오십 원을 벌 때도 있어. 그때부터 출세를 헌 거지.”

1919년 12월 12일, 광주시 수교동에서 태어나 스무 살이 되도록 광주와 창평 부근에서만 살아오던 촌놈이 느닷없이 출세를 하여 쌀 한 가마니에 일원오십 전하고 밥 한 그릇에 오 전씩 하던 시절에 하룻밤에 십 원도 벌고 오십 원도 벌었으니 그 씀씀이가 헤펐을 것은 물어보지 않아도 뻔한 일입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물어 보았더니 “그거야 친구들 만나 다 먹고 놀았지.” 하며 그런 당연한 말을 뭐 하러 물어 보느냐는 듯이 툭 내뱉는 그의 말에서 한량스러웠던 젊은 시절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술과 노름과 친구와 여자와 인기와 돈... 서울 생활이 가져다 준 이런 달콤한 유혹에 한껏 빠진 그는 그 시절 최고 멋쟁이로 옷차림에도 남달리 돈을 들였습니다. 당항라 바지에, 모시 께끼 저고리를 입고, 한산 모시 두루마기를 척 걸쳐 입고, 번쩍번쩍 윤이 나는 칠피 구두를 신고서 신나게 바람을 피우고 다녔습니다.

그런 바람둥이가 진도에서 명창으로 이름이 높던 박동준의 맏딸인 박보아를 만나고서는 그녀에게 홀딱 빠져 버렸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소리를 익히고 성악연구회에서 송만갑, 정정열 명창에게 소리를 익혀 신인 명창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한 박보아는 소리도 잘하고 얼굴도 예뻐서 여러 사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던 처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 역시 한갑득의 거문고 소리에 반해 열렬히 사랑을 하다가 부모의 반대도 무릅쓰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때가 스물세 살 되었을 땐데 결혼하고 삼 년쯤 지나서 해방이 되었지. 해방이 되니까 여기저기 국극 단체가 생기더란 말이여. 그래 우리도 ‘삼성국극단’을 만들었지. 마누라의 동생, 그러니까 내 처제가 박옥진이라고 소리 잘하고 연주도 잘했거든 그래서 박보아, 박옥진 그리고 한갑득 이렇게 세 별이 모였다고 해서 삼성국극단이라고 이름을 붙인 거여. 나는 반주도 해주고, 작곡도 해주고, 단체운영도 하면서 같이 다녔지.”

창극단체를 운영하며 팔도를 돌아다니는 동안에 그의 거문고 솜씨는 신쾌동 명인과 더불어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명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진전을 보였습니다. 특히 스승에게서 배운 가락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창작한 가락을 많이 섞어서 타기 때문에 그의 산조는 변화무쌍하고 자유자재함에서 아무도 따를 수 없는 독특한 맛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출처 : http://gugakcd.com/shop/%3Fdoc%3Dbbs/gn...%3D09...

“요새는 문화재 지정이니 뭐니 해서 선생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하라고 하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여. 선생한테는 기본 가락을 배우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지 재주껏 편곡도 허고 창작도 해서 타야 좋지. 밤낮 배운 대로만 허면 그건 밥만 먹고 똥만 싸는 꼴이지.
내가 내 가락을 타는디 ‘어떻게 가락을 잘 만들어서 듣는 사람의 심장을 건드려 주나.’ 허고 끊임없이 연구를 허니 가락이 한정이 없어. 수시로 변해. 공연 때마다 다르고 켤 때마다 달라.
그리고 즉흥적인 멋이 있어야 허니 한 음 켜 놓고 그 다음에 동으로 갈지 남으로 갈지 북으로 갈지 서로 갈지 몰라. 그래서 산조가 어려운 거고, 그래서 산조가 좋은 거여. 판소리도 마찬가지여. 내가 가락을 연구할 때 엤날 명창 선생님들의 소리가 많이 참조가 됐는디 그 양반들 소리가 그려. 자유자재허고, 신출귀몰허고, 구석구석 기묘허고, 마음대로 사람을 울리고 웃기고, 그래서 국악이 좋은 거여.”

 <삼국사기>에 기록된 거문고의 유래를 살펴보면 중국의 악기와 우리의 전통악기인 '고'를 섞어서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진나라 사람이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내왔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아나 그 성음과 타는 법을 알지 못하므로 나랏사람으로서 능히 그 소리를 낳고 이것을 탈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후하게 상을 주겠다 하였더니, 이때에 왕산악이 그 본 모양을 그대로 두고 많이 제도를 고치어서 아주 새로운 악기를 만들고 겸하여 곡조를 백여 곡을 지어 이를 아뢰매 검은 두루미가 내려와 춤을 추었으므로 드디어 '현악금'이라 이름하고 뒤에 줄여서 그저 '현금'이라 하였다.”

거문고는 그뒤 신라 사람 옥보고에게 전해졌고, 옥보고는 지리산에 들어가 새로 30곡을 지어 속명득에게 전하고 속명득은 이를 또 귀금 선생에게 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거문고는 중국과의 인연 때문인지 남쪽의 가야 지방에서 생긴 가야금이 서민적이고 통속적이고 익히기 수월한 것과 달리 귀족적이고 고답적이고 익히기 어려운 특성을 지녀왔습니다.

그런 특성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좋아하는 선비들의 기호에 딱 맞아 예로부터 '금'과 '서'는 선비 수업의 필수과목으로 꼽혀 왔습니다.

그리고 가락의 운용에 있어서도 감정을 절제하고 조화롭고 평정하게 이끌어 나가는 것을 으뜸으로 쳤으니 슬퍼하고, 분노하고, 웃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삶의 진한 정서는 천하고 격이 낮은 것으로 여겨져 산조가 생기기 전까지 거문고는 세속의 가락과 인연을 맺지 못한 채 수백 년을 지내왔던 것입니다.

거문고의 몸통은 앞면은 오동나무를 쓰는데 돌 위에서 자란 오동나무로 만든 것을 으뜸으로 치고 뒷면은 밤나무를 씁니다. 줄은 모두 여섯 줄인데 대현이 가장 굵고 문현, 무현, 괘상청, 괘하청, 유현의 순으로 가늘어집니다.

출처 : http://www.jinodyssey.co.kr/zeroboard/v...c05b737c

타는 법은 거문고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술대'를 잡고, 왼손으로는 줄을 희롱합니다. 나직하게 고르면 속삭임처럼 다정하고, 세게 치면 소낙비처럼 요란하며, 맑고 흐리고 그윽하고 기쁘고 노여웁고 거세고 부드러운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음색을 가진 거문고는 십 년쯤 공부해야 비로소 소리를 갖출 수 있을 만큼 배우기 어렵습니다.

이렇듯 어려운 거문고에 반해 한평생 거문고 하나만을 안고 살아온 그는 처세할 줄도 치부할 줄도 모르는 대쪽 같은 성격 때문에 삼양동의 셋집에서 부인과 처제를 거느리고 어렵게 살다가 1987년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떠나기 전, 그는 기회만 있으면 ‘쓸모없는 문화재’ 푸념을 늘어놓곤 했습니다.

“문화재라는 것이 빛좋은 개살구여. 쌀 한 가마니 사고 나면 싹 없어지는 돈 조끔 주면서 별별 귀찮은 일은 다 시켜. 말이 좋아 인간 문화재지 사는 꼬라지는 인간 쓰레기여. 내가 어떤 때는 챙피하고 서러워서 이 길로 들어선 게 원망스럽고 죽고만 싶어. 이젠 거문고 소리 알아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

이렇듯 비참한 노후를 보내다 가신 그에게서 설날에 떡방아 찧을 쌀이 없다고 바가지를 긁는 아내에게 거문고로 <방아타령>을 들려주었다는 '백결 선생'의 그림자를 본 것은 저의 지나친 상상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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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미래의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스피어에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저와의 인연으로 「서편제」에 특별출연한 김무규 명인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영화「서편제」
에서 여주인공인 송화가 눈이 먼 후, 제가 맡은 역인 아버지 유봉과 함께 호젓한 산길을 걷다가 어느 퇴락한 기와집에 잠시 머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집의 주인이 하얀 한복을 입고 정자에 앉아 거문고를 켜고, 유봉이 그 앞에서 구음을 부릅니다. 바로 그 장면에 나왔던 거문고 연주의 주인공이 김무규 명인입니다.


이 분은 저하고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병이 걸려 휴학을 하고 지리산 '상선암'이란 암자에서 잠시 휴양하고 지내던 겨울날입니다. 그해 여름에 판소리를 처음 듣고 한창 판소리에 열이 올라있던 제 귀에 구례에 산다는 '단소 명인'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암자에서 만난 친구 2명과 함께 지체없이 그 명인을 찾아 나섰습니다.

구례읍내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산길을 물어물어 걸어 간 끝에, '절골' 마을에 사는 김무규 명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멋지고 고풍스러운 기와집을 찾아가니
호리호리한 명인이 우리를 맞았습니다.

그는 꿀 한통을 드리며 단소를 배우러 왔다는 '산 청년'들에게 “이 어려운걸 뭐 하러 배우려 하느냐?”하시면서도 먼 길을 걸어 온 정성이 갸륵했던지 다음에 한번 찾아오라고 허락을 하셨습니다.

며칠 뒤에 다시 찾아가니 집 뒤에 있는 대나무 숲에서 대를 잘라 단소 세 자루를 만들어 놓으셨다가 선물로 주며, 단소 부는 법의 기초부터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명인에게 단소를 배우던 이 방에서 촬영한 <서편제>의 한 장면.

그 분은 제가 판소리에 관심이 있는 걸 아시고는 김소희 명창이 여름이면 제자들과 함께 자기 집에 연습을 하러 오기도 한다고 하시며, 명창들과 관련된 옛날 얘기를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아쉽게도 그 분에게 몇 번 밖에 단소를 배우지 못하고, 몇 달 뒤에 복학해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연은 끊어지지 않아 나중에 그 분의 이력을 소개하는 인터뷰 기사도 쓰고,  「서편제」를 통해 제가 반했던 기와집과 대숲이 멋지게 등장하고, 새하얀 한복을 입고 거문고를 치는 그 분의 모습도 영상에 담을 수 있었으니 기이한 인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김무규 명인은 광대 출신이 아니라, 양반 집안에다가 천석꾼 부자집의 도련님이었습니다. 

삼백 년쯤 전에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된 그의 선조는 근면하고 검소하여 점차로 재산을 늘렸는데 그의 고조할아버지인 김영국은 진사 벼슬을 받아 집안을 일으켰고, 증조할아버지도 진사 벼슬을 받아 양반 집안으로서의 가통을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천석꾼 소리를 들을 만큼 재산이 불어났고, 그의 아버지 김형석은 가문의 영예를 더욱 떨치려고 옛집을 헐어 버리고 풍취 있고 우아한 집을 새로 지었습니다.

그와 함께 풍류객들을 불러들여 사랑채나 행랑채에다 재우고 밥을 먹이고 대접을 후히 하며 풍류를 즐겼습니다. 그래서 그가 태어난 1908년 무렵의 그의 집에는 이름을 날리던 쟁쟁한 음악인들이 쉴새없이 드나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려서부터 그의 주위에서는 거문고, 단소, 판소리, 시조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는 음악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서 아버지가 가야금 배우는 것을 어깨 너머로 보고 금세 흉내내기도 하고 단소나 거문고도 몰래몰래 '만지작거렸'습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그에게 정식으로 스승을 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국악은 취미삼아 듣는 것이고 외아들인 그의 갈 길을 오로지 학문의 길로 정해져 있음은 온 집안이 잘 알고 있었고, 또 스스로도 국악인이 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학교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구례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 올라가 배제중학과 중동중학교에서 중등 과정을 마쳤습니다. 16살에는 구례군 광의면 월곡리에 사는 황묘숙이라는 두 살 위의 처녀에게 장가를 갔습니다. 황묘숙은 매천 황 현의 손녀입니다. 황현은 조선조 말기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 하니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절개 곧은 선비입니다.

매천 황현의 초상화.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00290148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과 바다도 통곡하네
무궁화 강산이 무너지고 말았으니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역사를 돌이켜보니
인간으로서 선비 노릇 하기가 참으로 어려웁구나

그는 처가 쪽의 항일 사상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집에서 틈틈이 한문 공부를 하기도 하며 지내다가, 26살이 되었을 때에 다시 서울에 올라와 성균관대학교의 전신인 명륜전문학교에서 중국 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 유학을 가서 제대로 한학을 공부하려던 그의 꿈은 선친이 눈병에 걸려서 앞을 못 보게 되는 통에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집에 내려와 쉬게 되었는데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된 데 서 오는 절망감 때문에 몸이 많이 약해졌고, 또 일본 사람들의 행패가 갈수록 심해지는 통에 바깥에 나가기도 싫고 해서 집안에 틀어박혀 실의와 우울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를 위로하기 위해 선친이 그에게 단소를 배워 보라 권하며 추산 전용선을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전용선은 전추산으로 더 알려진 단소의 명인으로 전라북도 고부 사람입니다. 1888년에 태어나 스무 살 무렵부터 단소를 배우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정악 단소를 익히고 다음에 단소 산조를 창안한 사람으로 196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단소로는 전무후무한 명인이라는 평을 듣는 사람입니다. 조금 과장해서 '날던 새도 멈추고, 울던 짐승도 울음을 그치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들도 귀를 기울여 듣는' 전설적인 명인이라고 합니다.

추산 전용선의 음반. 출처 :  http://www.gugakcd.pe.kr/music_detail.a...RCD-1362

그런데 몸도 약한데다가 성격도 급하고 까다로워서 여간해서는 제자를 가르치지 않고 또 가르치다가도 제자가 조금만 못 따라하면 화를 버럭 내고 때려치우고 마는 사람이었답니다.

그러한 그가 김무규만은 남달리 사랑하여 해방이 될 때까지 꼭 십 년 간을 그 집을 왕래하며 정성을 기울여 가락을 전해 주었습니다. 김무규도 어려서부터 음악에 젖어 있던 터인데다, 일제 말기의 암담한 시절을 뜻 둘 데 없이 불우하게 보내느니 음악에나 마음 붙이고 살아보자 하며 열심히 불었습니다.

단소는 '단소 소리가 제대로 나면 절반 공부는 마친 셈'이라고 할 만큼 제 소리 내기가 어려운 악기입니다. 그러나 제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상영산, 중영산 같은 가락을 배우기 시작하면 그 맑고 청아한 음색에 반해서 사정없이 빠져 들게 됩니다.

그 역시 한동안 단소에 미쳐서 <영산회상>, <청성곡>, <굿거리> 등 스승이 지닌 가락을 차근차근 배워 나갔습니다. 그러는 틈틈이 서울에 올라가 종로 수송동에 있던 정악 전습소에서 거문고, 가야금, 양금, 해적, 세피리와 어우러져 '줄 풍류' 즐기기도 하고, 단소 독주로 이름을 높이기도 하고, 거문고의 대가인 우당 김윤덕에게 거문고 가락을 전해 받기도 하고, 또 조선성악역수회에 놀러 가서 명고수인 한성준에게 북가락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의 단소 솜씨가 점점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면서부터 단소 연주자로 나설 기회도 많았고 유혹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요청을 모두 물리치고 시골집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평생 야인이 되어 밭이나 갈다가 늙어서 죽겠노라고 호까지 '백경(白耕)'으로 지은 터라 스스로 '피리 부는 광대' 행세하기 꺼려 해서 무대에서나 '노는' 자리에서 단소 부는 것을 삼가 왔습니다. 그는 울적한 심사를 단소나 거문고로 달래거나, 활터에 나가 활을 쏘거나, 조선어학회 회원이 되어 국어 공부와 역사 공부에 정신을 쏟기도 하며 일제의 어두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한 세월이 십 년이 흘러 해방이 되자 그는 구례중학교에 몸을 담고 국어와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십 년쯤 교직 생활을 하며 교장까지 하다가 자유당 말기에는 정치 바람이 들어 민의원에 나섰다가 빚만 몽땅 지고 가산을 탕진했습니다. 민주공화당 때에도 국회의원 하려다가 돈만 날렸습니다.

그런 데에 쏟은 노력에 견주어서 기대했던 결실은 너무 보잘것없이 나이만 예순이 가까워 오니 정치 바람 타서 쏘다닌 게 모두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는 자각과 함께,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단소를 추켜들고 잊어버린 가락을 다시 찾고 잃었던 '짐' 찾았습니다.

"단소 부는 데에는 짐이 첫째지, 입김 말이여. 이 짐이 좋아서 일점 때가 없이 맑은 소리가 쟁반에서 옥구슬이 굴러가듯이 흘러 나와야 되는 법이여."

그 '짐'을 찾은 덕에 1985년에는 구례향제 줄풍류 단소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습니다. 그후로 그는 매일같이 십 리 길을 걸어 읍내 문화원에 들러 향토지를 쓰고, 학교에서 단소를 가르치고, 때때로 활터인 봉덕정에 들러 활을 쏘며 지냈습니다. 

80년대 후반 무렵, 제가 잡지 <음악동아>의 요청으로 그를 다시 찾았을 때 그의 집은 흥청대던 옛 자취는 모두 사라지고 퇴색한 건물의 곳곳에 먼지가 올라앉고 기와 지붕과 뜨락의 돌 위에는 푸른 이끼가 끼어 있는 쓸쓸한 고옥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연주 한 곡을 부탁하자 그는 소나무가 바라다 보이는 대청마루에 오랜만에 단소를 손에 들고 나타났습니다. 세월을 느끼게 하는 누르스름하게 변색한 두루마기를 단정히 차려 입고 정좌한 그는, 단소를 입에 대고 몇 번 짐을 넣어 다스려 본 뒤에 즐겨 부는 곡인 <청성곡>을 불기 시작했습니다.

출처 : http://www.inilnet.com/bbs/zboard.php%3...o%3D1099

끊어질 듯 이어지다가 잔잔히 스러지고, 잦아지는 듯하다가 다시 처연하게 솟아올라 한없이 맑게 뻗어 나가다가 툭 떨어져 떨고, 다시 잔잔히 이어지는 가락의 변화에 귀를 기울이고 앉았노라니, 그 가락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고 어디선지 맑은 물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는 눈을 지긋이 내리감고 취한 듯 단소를 불고 있었고, 그러한 주인의 주름진 얼굴을 햇빛이 내려쪼이는 대청 마루 끝에 앉은 고양이 한 마리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집의 풍경과 그의 모습에 반한 저는 「서편제」를 찍던 1991년에 임권택 감독님에게 그 집을 소개했고, 그는 마지막 거문고 연주 모습을 영상에 남긴 채 199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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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의 일로부터 한 발 물러서서 인생을 관조해야 할 나이에 쓸데없는 야망이나 권모술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 말일 것입니다. 그만큼 「삼국지」에는 세속의 모든 욕망들이 집결되어 첨예하게 드러납니다.

「삼국지」에서 가장 저의 눈길을 끄는 인물은 제갈공명입니다. 그의 지략과 충정은 삼국지 전편의 핵을 이룹니다. 그 중 저의 눈길을 끄는 인상 깊은 전투가 있습니다.

제갈공명과 사마의의 '서성(西城) 전투'입니다.

위나라의 장수 사마의가 '가정 전투'에서 마속의 군사를 쳐부수고, 15만의 대군과 함께 밤을 도와 달려옵니다. 저멀리 필생의 라이벌인 제갈공명이 지키는 서성이 보이자 사마의는 군사들을 독려합니다. 

게임 <삼국지>의 이미지. 출처 : http://ask.nate.com/knowhow/view.html?num=121354

한편, 변변한 장수 하나 남지 않은 채 2500여명의 병졸들이 지키고 있는 서성에서는 온 백성과 군사들이 하얗게 질린 낯으로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이제 서성의 함락은 시간 문제인 듯 보입니다. 제갈공명은 망루에 올라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질풍같이 말을 몰아 성 앞에 당도한 사마의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마치 자신을 환영하듯 활짝 열어젖힌 성문, 바닥을 쓸고 물을 뿌리며 태연한 백성들....
 
그때 어디선가 은은한 거문고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습니다. 

성 위의 망루를 바라보니 하얀 학창의를 입고 윤건을 쓴 제갈공명이 지그시 미소를 띠며 거문고를 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위나라 병사들도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영화 <적벽대전> 중 제갈공명으로 분한 금성무. 출처 : http://chany1995.tistory.com/192

한동안 생각에 잠긴 사마의는 틀림없이 성안에 함정이나 계교가 있을 거라고 확신한 끝에 전군에 철수령을 내리고 회군을 하게 됩니다. 

이 전투에 대해 후세 사람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석 자 거문고로 대군을 이겼도다
제갈량이 서성에서 적군을 물리칠 때
십오만 군사가 말머리를 돌리던 곳
후인들이 가리키며 아직도 의심하네

절대절명의 순간에 제갈공명이 보여 준 계략은 절묘합니다. 그런데 제가 주목하는 것은 그 계략이 '거문고'라는 예술적 기재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살벌한 전쟁터에서 거문고를 타는 제갈공명에게서 '문화적 혜안'을 읽습니다.

사마의가 돌아간 후 제갈공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마의는 내가 평생에 위험한 짓을 통해 희롱한 적이 없는 사람인 줄 알고 복병이 있을까봐 의심하여 퇴각한 것이다. 내 하도 곤핍하여 부득이 이 계책을 썼도다.

그 시대에는 아무리 음모와 술수가 횡행했더라도 그 사람의 평소 인품으로 행위의 진위를 판단했던가 봅니다. 제갈공명이 평소 계략을 남발하고 잔꾀를 부리는 사람이었다면 그 계략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너무도 많은 계략들이 남발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리고 그런 계략들로 인해 인간적 신뢰가 가벼워지고 결국 그 화가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건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아직 '나이가 들지 않은' 저에게「삼국지」는 오늘의 현실을 대입해 보고 숙제를 풀어보게 하는 재미있는 문제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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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쯤 당진의 가을바다를 서성이던 저는 겨울이 되자, L의 하숙집을 떠나 지리산으로 갔습니다.

 



그때의 심정은 죽을 때 죽더라도 지리산 <상선암(上禪庵)>에서 죽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상선암은 구례읍 부근에 있는 <천은사(泉隱寺)>의 부속 암자인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독서모임인 고전독서회의 여름 수련회를 갔던 곳입니다.

폐허가 된 절간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예쁜 여학생들과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고, 구들장이 여기저기 망가진 절의 방에 누워, 깨어진 기와지붕 위로 반짝반짝 빛나던 별을 바라보며 하룻밤을 지샜던 추억이 너무도 그리워 무작정 그곳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옷가지와 책 몇 권이 든 가방을 들고 구례에서 버스 타고 천은사에서 내린 다음, 눈 쌓인 지리산의 중턱에 자리 잡은 상선암까지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기어' 올라갔습니다.

말끔하게 새 단장이 된 암자까지 숨이 턱에 차서 간신히 다다른 저는, 툇마루에 앉는 순간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상선암>의 최근 모습. 정면의 툇마루가 기절했던 곳이고, 오른쪽 뒤꼍에 제가 묵었던 골방이 있습니다.

깨어나 보니 따뜻한 방안에 이불까지 덮고 누워 있더군요. 머리맡에 두 청년이 앉아 있다가 제가 눈을 뜨자 한 청년이 급히 물그릇을 주며 “이거 꿀물이니 드시쇼!” 하는 것이었습니다. 

꿀물을 먹고 나니 또 한 청년이 “몸을 바로 누워 보쇼!”하면서 온몸 여기저기 지압을 해 주었습니다.

꿀물 준 W는 벌을 치는 청년이었고, 지압을 해준 H는 중국무술인 십팔기의 고단자였습니다. W는 벌통을 상선암 근처에 풀어 놓고 있었고, H는 무술 수련한다고 암자에 묵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암자에는 스님은 안 계시고 중년의 '여보살'이 관리하고 있었고, 김씨라 불리는 늙은 ‘불목하니’ 영감님이 나무, 청소, 불때기와 같은 잔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사정을 들은 그들은 저를 따뜻하게 거두어주었습니다. 마침 보살님의 아들이 고등학교 시험을 볼 때라 저는 가끔씩 아들 공부를 가르치며, 공짜로 몇 달 동안 맛있는 절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저는 중국 무술의 소림권, 무당권, 태극권, 팔괘장, 내공, 외공, 단전호흡, 장풍, 팔단금법 등의 현란한 세계를 알려 주는 H의 말에 푹 빠졌습니다. 

저는 그 전부터 무협소설과 무협영화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특히 김용이나 와룡생 같은 작가들이 펼쳐 주는 무림의 세계는 제게 황홀하기 그지없는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여 주었습니다.

그 중 지금도 잊지 못하는 최고의 무협영화는 「유성호접검(流星胡蝶劍)」이었습니다. 김용과 더불어 무협소설의 대표 작가인 고룡의 원작 소설을 각색해 만든 그 영화는 음모와 배신, 그리고 남녀 간의 아름다운 사랑이 정교하게 얽혀 있는 무협영화의 고전입니다.

대학 1학년 방학인지 2학년 방학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친구와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다른 무협영화가 짜장면이라면 「유성호접검」은 탕수육이다!”고 감탄하며, 중국집에서 빼갈을 실컷 마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제가 좋아하는 고룡의 작품 중에 「초류향」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풍류와 여자와 도박을 즐기는 무림고수 초류향과, 냉정하고 현실적인 희빙안, 고독하고 말이 없는 살수 일점홍 등이 중원과 사막을 종횡하며 대마두(大魔頭)와 벌이는 서사적 이야기는 저를 사정없이 매혹시켰습니다.

이렇듯 무림과 무공에 대한 사전 준비가 되어 있던 터라, 저는 말솜씨 좋은 H가 들려주는 무술과 관련된 과장된 경험과 온갖 무술가, 도사들의 이야기에 도취하였습니다.

또 그가 스승의 비밀 금고에서 훔쳐내어 몰래 베꼈다며 비밀스럽게 보여주는 <내공비급(內功秘及)>을 베끼며, 언젠가 나도 ‘장풍’을 날리는 무림의 고수가 되겠다는 허황된 꿈을 키웠습니다.

암자의 골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호흡을 하고, 향을 피우고, 밤에는 암자 마당에서 H가 가르쳐주는 소림권의 기초 동작들을 익혔습니다.

십팔기를 가르쳐 준 H와 구례읍의 사진관에서 찍은 기념 사진.

그런데 거기서 판소리와의 기이한 인연이 또 이어졌습니다. 처자도 없이 상선암에서 산지 몇 년이 된 불목하니 김씨 할아버지가 북도 잘 치고 젊었을 때 판소리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해 여름, 김제국악원에서 처음으로 판소리를 들은 뒤 자나깨나 판소리에 심취해 있던 저에게, 그 소식은 귀에 번쩍 뜨이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할아버지께 판소리 좀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저녁 먹고 자기 방으로 오라고 해서 우리 셋은 할아버지 방에 모였습니다. 할아버지 방에는 이부자리 한 채와 옷 몇 가지, 그리고 낡은 북 하나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풍년초' 담배 잎을 종이에 말며 말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구식 노래는 배워서 뭐 할라고 그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할아버지는 중머리 북 장단도 가르쳐 주고, 심청가 한대목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맑은 공기에 따뜻한 절밥을 배부르게 먹고, 벌꿀과 로얄젤리도 가끔씩 얻어먹고, 친구들과 더덕을 캔다고 산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단전호흡과 기공으로 몸보신을 하니 몸이 점점 좋아졌습니다.
 
처음 올 때는 죽을 힘을 다해 기어 올라왔던 산길을, 나중에는 천은사에서 상선암까지 단숨에 오르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산길을 오르내리면서 우리는 고래고래 판소리를 불러댔습니다.

그러던 중 구례에 단소의 명인이 살고 계시다는 소문을 들은 우리는 지체 없이 그 분을 찾아나섰습니다. 구례읍내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산길을 물어물어 걸어 간 끝에, 절골 마을에 사는 김무규 명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대단한 고대광실이었을 퇴락한 기와집에 살고 계셨던 김무규 명인은 단소와 북과 거문고의 명인이셨습니다.

그러나 지주이며 양반댁 엘리트 출신이고, 그의 부인 역시 한말의 대학자이며 일본의 침략에 항거해 자결하신 매천 황현의 손녀이실 만큼 명문가의 자제라는 지위 때문인지 직업적인 연주 생활은 안 하신 분입니다.

백경 김무규 명인(1908~1994)의 연주 모습.

다만 그의 단소는 전설적인 단소의 명인인 전추산에게 배웠기 때문에 매우 귀한 가락으로 평가 받습니다.

호리호리하고 깐깐하게 생긴 명인은 가지고 간 꿀 한통을 드리며 단소를 배우러 왔다는 산 청년들에게 퉁명스럽게 첫마디를 꺼내셨습니다.

“이 어려운걸 뭐 하러 배우려 하는가?”

그러면서도 먼 길을 걸어 온 정성이 갸륵했던지, 다음에 한번 찾아오라고 허락을 하셨습니다.

며칠 뒤에 다시 찾아가니 집 뒤에 있는 대나무 숲에서 대를 잘라 단소 세 자루를 만들어 놓으셨다가 선물로 주며, 단소 부는 법의 기초부터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제가 판소리에 관심이 있는 걸 아시고 김소희 명창이 여름이면 제자들과 함께 자기 집에 연습을 하러 오기도 한다고 하시며, 명창들과 관련된 옛날 얘기를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아쉽게도 그 분에게 몇 번 밖에 단소를 배우지 못하고, 몇 달 뒤에 복학해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연은 끊어지지 않아 나중에 어느 잡지에 그 분의 이력을 소개하는 인터뷰 기사도 쓰고, 인간문화재가 되신 뒤 「서편제」 촬영할 때 그 분을 임권택 감독에게 소개해서 절골의 퇴락한 기와집과 대숲이 멋지게 등장하고, 새하얀 한복을 입고 거문고를 치는 그 분의 모습도 영상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영화가 개봉된 지 얼마 뒤에 돌아가셨으니, 아마 「서편제」가 그 분의 마지막 연주를 담은 필름이 되었을 겁니다.

판소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 김제국악원의 여자명창과 지리산 상선암의 불목하니와 구례의 김무규 명인이 차례로 제 인생에 등장하더니 마침내 다음해 겨울에 박초월 명창과의 만남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상상도 하지 않았던 판소리와의 인연이 마치 누군가의 연출로 한 장면 한 장면 이어지듯, 제 인생의 무대에 펼쳐진 것입니다. 전 지금도 그 기이한 인연에 신기해하며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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