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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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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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57건

  1. 2011.10.12
    죽음의 균과 함께 보낸 15년 청춘 (11)
  2. 2011.01.05
    추운 겨울날 , 아들을 군대에 보내며 (94)
  3. 2010.10.20
    '가을의 기도'로 포스팅을 시작하며 (18)
  4. 2010.09.27
    전주세계소리축제 관계로 블로그 쉽니다. (37)
  5. 2010.08.02
    내 가슴에 불을 지른 고등학교 은사 선생님 (38)
  6. 2010.05.10
    마니산에 숨어 사는 '여도사'의 5천년의 꿈 (17)
  7. 2010.04.26
    봄향기 가득한 무주 안성 장날의 '장터 여행' (30)
  8. 2010.04.05
    반장 권력 등에 업고 학우 괴롭힌 죄 고백 (41)
  9. 2010.03.25
    손으로 쓴 어머니 편지 다시 보니 눈물난다 (28)
  10. 2010.02.10
    지리산 '동편제' 소리 여행 다녀왔어요 (25)
  11. 2010.02.05
    첫 직장 응시했던 '자기소개서' 다시보니 (42)
  12. 2010.01.31
    화산재 날리는 활화산과 조선 침략의 흔적 (21)
  13. 2010.01.28
    일본 큐슈의 지옥 온천과 아소 활화산 여행 (26)
  14. 2010.01.03
    무주의 설경과 함께 새해를 시작하며 (53)
  15. 2009.12.26
    청춘의 고독 가르쳐 준 아버지, 나의 아버지! (30)
  16. 2009.12.16
    '교사와 여제자의 가난한 사랑이야기' 후기 (20)
  17. 2009.12.13
    '교사와 여제자'의 가난한 사랑이야기 (77)
  18. 2009.11.12
    수능날 아침, 시험장에 아들을 보내며.. (48)
  19. 2009.11.09
    아름다운 소녀의 편지 받고 가슴 설레다. (50)
  20. 2009.11.03
    불효자식 사랑했던 아버지가 그립다. (40)
  21. 2009.11.01
    어머니를 '천사'로 만든 아버지의 사랑법 (99)
  22. 2009.10.26
    결혼기념일, 아내에게 시 한 편 바치며... (32)
  23. 2009.10.23
    외국인들 마음 녹인 '물고기 작전' 놀랍다. (29)
  24. 2009.10.13
    '격정만리' 사건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28)
  25. 2009.10.08
    저 거대한 말벌집, 어찌하오리까? (56)
  26. 2009.10.04
    사랑하는 나의 딸 아리에게! (42)
  27. 2009.10.02
    서울살이 한가위, 고향 생각 절로 난다. (36)
  28. 2009.10.01
    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쟁 '파업전야' 사건 (41)
  29. 2009.09.30
    최초의 외국순회 공연 '아시아의 외침' (22)
  30. 2009.09.29
    '극단 아리랑'의 창단과 이어지는 연극 행진 (29)

꿈 많은 19살, 나는 최고의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서울사대 독어과의 문을 들어섰다.
 
그러나 나의 꿈은 현실의 벽에 부딪쳐 표류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학비와 숙식을 해결하느라 서울의 최하층 유랑민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오늘은 이 집, 내일은 저 집으로 얼굴 아는 친구나 선후배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그리고 끊임없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시간제 그룹지도도 하고, 개인 지도도 하고, 입주해서 먹고 자며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2학년 봄에 우연히 연극반 연습실에 놀러 갔다가 배우 한 사람이 안 나와 대본 대신 읽어준 게 계기가 되어 사대연극반원이 되고 말았다. 그 뒤 낭만적이고 예술적인 연극반의 분위기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그러나 연극에 대한 나의 열정은 참으로 무모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밤을 새운 연습과 공연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일이었고, 그 외의 모든 것은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생활은 무질서하고 방탕해졌다. 매일같이 술에 절어 지내면서 예술적 영감에 가득 찬 천재인 양 행세하고, 세속적인 모든 것을 경멸하고, 교만과 자만심에 가득 찬 허세 덩어리가 되어 갔다.
 
그러다가 3학년 말에 덜컥 병에 걸리고 말았다. ‘활동성 중등증’ 즉 2기 결핵이었다. 주사약과 약병으로 가득 찬 방에서 나는 날개 꺾인 새처럼 외로웠다. 결핵과 싸우는 동안 나는 양의의 치료에 의지하지 않고, 여러 한의사와 돌팔이 도사와 무면허 약사들의 치료를 받았다. 양약을 먹으면 토하고 구역질이 나고 몸이 견디질 못할 정도로 거부반응이 있어서 도저히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집안 형편에 장남이 병에 시달리니 내 병은 온 가족의 걱정거리였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누이들도 결핵에 좋다는 음식이나 약들을 챙겨주느라 무척 마음을 썼다.

나는 단전호흡도 해보고, 침과 뜸과 한약과 홍삼 등 수많은 치료법을 내 몸에 직접 실험했다. 조금씩의 효험은 봤지만 근본적인 치료는 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투병하며 지내다보니 웬만한 의사는 우습게 아는 골치 아픈 환자였다. 친구들과 함께 놀러 다닐 때도 가슴에 품은 죽음의 균을 의식해야 하는 우울한 청춘이었다. 미열과 식은땀, 각혈은 내 청춘의 동반자였다. 이렇듯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까지 나는 결핵과의 싸움으로 몸과 영혼이 엄청 시달렸다. 그런 몸으로 연극을 하고 영화를 하고 판소리를 했으니 뭐 하나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체력이 약해서 공연을 하고 나면 꼼짝 못하고 쉬어야 했고, 호흡기가 약하니 판소리도 마음대로 부를 수 없었다. 배우나 작가나 연출가로 활동하고 싶은 예술적 욕망은 갈수록 높아졌지만 체력이 받쳐주지 못하니 가슴속의 울화만 쌓여갔다.

그렇게 15년을 끌어오던 결핵이 결혼 2년 만에 말끔히 나아버린 일은 내 인생을 새롭게 전환시킨 사건이었다. 결혼한 다음날부터 아내는 양의와 한의 모두를 찾아다니며 몸에 좋다는 약과 음식은 구할 수 있는 대로 구해서 먹이고, 효험이 있다는 곳은 어디든 나를 끌고 다녔다. 심지어는 예수의 은총으로 병을 낫게 해준다는 기도사에게도 끌고 갔다. 나 역시 결혼 생활을 하고 아이도 낳으려면 병을 고쳐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양약과 한약도 함께 먹고 기도원에도 다녔다.

그런지 2년쯤 지난 어느 날, 예약된 날에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와 균 검사를 했다. 그런데 오호라! 놀랍게도 완치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아내와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병원 앞에서 끌어안았다. 결핵이 낫고 난 뒤에는 간염에 걸려 2년간 투병을 했고, 항생제 복용의 후유증으로 위염과 장염으로도 한동안 고생했으나 모두 ‘격퇴’했다. 지금 나는 아내의 헌신적인 간호와 사랑 덕에 건강하고 활기 있는 중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병마와의 싸움으로 힘겹게 보낸 청춘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건강하고 활기 찬 청춘을 보낼 수만 있다면, 나는 젊음의 타오르는 열정 따위는 얼마든지 절제하며 살 수 있을 듯싶다.

(*경향신문 10월 11자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 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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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들을 군대에 보냈습니다. 

전부터 군대는 빨리 갔다 오는 게 좋다고 얘기를 했더니 마음 속에 담아 두었다가 대학교 1학년 말에 스스로 신청을 하더군요. 보름 동안 거의 매일같이 친구들과의 환송회로 바쁘더니 그제 밤에는 머리를 빡빡 깎고 들어 와서 "아빠, 어때요?"하고 깎은 머리를 보여주더군요.

"와, 우리 아들 잘 생겼다!"

하는 아빠의 대답에 멋적게 씩 웃으며 자기 방에 들어가 코를 골며 자는 아들의 모습이 웬지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어제 아침, 온 가족이 함께 먹는 아침 밥상에서 "이제 이 맛있는 엄마 밥을 당분간 못 먹겠네요"하며 맛있게 밥을 먹는 아들의 모습은 무척 어른스러워 보였습니다.

아들과 엄마와 함께 의정부로 향했습니다. 

<306 보충대>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군 부대 안으로 향했습니다. 아직 녹지 않은 눈길을 한참 걸어가려니 유난히 추위가 느껴지더군요. 초등학교 운동장처럼 생긴 부대 입구에 수많은 입영자와 가족들이 모였습니다. 국민의례를 하고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지키는 영광에 살았다......"는 군가를 합창할 때 웬지 가슴이 울컥하더군요. 

사실 전 젊은 시절 몸에 병이 있어서 방위 4개월 하다가 중도 탈락한 사람이기 때문에 군 생활에 대한 경험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떤 군가도 저에게 추억을 주거나 특별한 의미로 다가 온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 아들이 앞으로 매일 저런 군가를 부르며 지낸다고 생각하니 곡조와 가사 하나나하가 새롭게 다가 오더군요. 

대대장의 짤막한 인삿말 끝에 가족과 헤어져 부대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이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엄마는 내내 아들의 손을 잡고 아쉬워하더니 아들이 운동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 눈물을 보이더군요. 절대 울지 않고 웃으며 보낸다고 아들하고 약속했다고 웃으며 손을 흔드는 엄마의 마음을 아들은 알고 있겠지요. 



내가 잘 모르는 세계로 첫 발을 내딛는 아들의 모습은 제게 묘한 기분이 들게 해주었습니다.

더욱이 남북 관계가 갈수록 불안해지는 시기라서 괜한 걱정이 들 때면 가슴이 조여오기도 하더군요. 제발 저 젊은이들이 동족 젊은이들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습니다.

"전쟁이 나면 저런 어린애들만 총알받이로 죽는 것 아녀? 저 애들이 뭘 안다고 죽어야 돼?"

손자를 보내는 어느 할머니가 큰소리로 외치더군요. 엄마 역시 전쟁을 상상만 해도 겁이 나는 모양입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들의 마음은 모두 같을 것입니다. 제발 전쟁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길 빌 뿐입니다.    

집에 돌아와 텅빈 아들의 방을 보니 비로소 아들의 빈자리가 실감이 났습니다.

엄마는 새벽까지 잠을 못이루며 뒤척이더군요. 저 역시 잠이 오지 않는 새벽, 아들의 빈 방을 바라보며 이 글을 씁니다. 우리가 따뜻한 집에서 보내는 동안, 아들은 낯선 밥을 먹고 낯선 사람들과 낯선 숙소에서 잠을 자고 있겠지요. 오늘부터 차가운 겨울 바람 아래 눈밭을 뒹굴며 고단한 훈련병의 생활이 시작되겠지요. 잠꾸러기 아들이 새벽 기상 시간에 잘 적응이나 할 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아들에게 보냅니다.  
 
아들아,

아빠에게는 아직도 철부지 어린이로만 생각되던 네가
어느새 성년이 되었구나. 

이제 비로소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네가 자랑스럽다. 
 
넌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응력이 뛰어나니 
군 생활도 즐겁고 씩씩하게 잘 해내리라고 믿는다. 
 
네 인생의 소중한 한 고비,
너의 꿈을 향한 도약의 세월이라 생각하고 
늠름한 청년이 되어 다시 만나자~

널 사랑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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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세계소리축제>가 끝날 때까지 당분간 블로그를 중단한다고 했는데, 행사 끝나고 심한 몸살 감기를 앓는 통에 20일이 넘게 블로그를 쉬었네요. 그동안 보내주신 관심과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가을이 되었으니 스킨도 새로 손질하고, 김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로 포스팅을 시작합니다.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


출처 :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10095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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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잘 쉬셨나요?

폭우로 범벅이 된 한가위였지만 오랫만에 가족들이 만나 차례도 지내고 정담도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셨겠지요. 

전 저희 집에서 차례를 지낸 추석 날 빼고는 <전주세계소리축제> 관계로 마음 부산한 연휴를 보냈습니다. 이제 10월 1일부터 시작되는 소리축제가 나흘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오늘 전주로 내려가 10월 5일까지 전주에 머무를 계획입니다. 

개막공연의 총감독으로서 연습과 리허설을 진행하고, 조직위원장으로서 리셉션과 공연과 행사 전반을 살펴보려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런 저런 걱정으로 잠을 설치곤 합니다. 소리축제의 김정수 예술감독님은 며칠 전 꿈속에서 축제가 열렸는데, 관객이 한 명도 오지 않아 울다가 깨어났다고 합니다.

이처럼 축제에 오신 관객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담당자들을 엄청난 엄무에 시달리고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 답니다. 무릇 모든 예술도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축제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관객들이 만족 속에 돌아가게 되면 그 모든 고통과 스트레스는 봄눈 녹 듯 사라지고 행복한 성취감을 느끼게 되지요. 바로 그 느낌을 위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위해 뛰고 있답니다.  

저와 함께 일하는 소리축제 직원들도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명절도 반납한 채 휴일도 없이 밤늦게까지 뛰어 다니고 있답니다. 열정과 패기로 똘똘 뭉쳐 너무도 성실히 축제 준비를 하고 있는 직원들에게 고마운 마음 뿐입니다.

올해는 전주세계소리축제 10년이 되는 해이고, 제가 위원장을 맡은지 2년차에 개최되는 축제이기 때문에 전북 도민들과 주변의 기대도 많고 그에 따른 부담도 많답니다. 최선을 다해서 행사 진행과 공연 하나하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와 응원보내주시면 저와 함께 소리축제 직원들에게 큰 힘이 될 듯 합니다.  

전주에 머무는 동안에는 차분히 글을 쓸 여유가 없을 듯 하여 당분간 블로그에 글을 못올릴 듯 싶습니다. 그대신 온라인의 이웃들에게 '트위터'와 '페이스 북'을 이용해서 짧은 소식을 전할까 합니다. 

전주세계소리축제 관련 정보는 아래 소개하는 홈페이지를 찾아 보시면 상세하게 나와 있구요, 제 페이스북과 트위터 계정도 링크 걸어 놓을께요.   

전주세계소리축제 홈페이지
 http://www.sorifestival.com
   
김명곤 트위터 
http://twtkr.com/myunggon



김명곤 페이스북(가입안하신 분은 이 기회에 가입해서 친구 맺어주세요)
http://www.facebook.com/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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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앨프리드 화이트헤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보통 선생님은 지껄인다.
좋은 선생님은 잘 가르친다.
훌륭한 선생님은 스스로 해 보인다.
위대한 선생님은 가슴에 불을 지른다.

그동안 저의 인생에서 '제 가슴에 불을 지른' 위대한 선생님은 여러 분이 계십니다만 그 중 고등학교 때 불을 지른 선생님으로 제가 가장 존경했던 분은 박시중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그 분이 지른 불은 제 가슴속에서 아직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고 2였던 1970년의 여름, 어느 여학교에서 부임해 오신 선생님은 후덕하게 잘 생긴 얼굴에 뚱뚱한 체구를 가지신 분으로 국어와 함께 한문 과목을 담당하셨는데, 저는 그 선생님을 한문 시간에 처음 만났습니다. 

그런데 첫 수업 시간, 선생님은 저를 너무도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한문 교과서에 실린 딱딱한 한문은 참고만 하고, 지금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한문을 가르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뒤로 선생님은 중국 최고의 시인인 두보나 이태백의 시편들, 「십팔사략(十八史略)」이라는 역사책에 나오는 중국 영웅들과 지략가들과 현자들의 무용담,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 이황 선생의 「퇴계문(退溪文)」 등 한문으로 씌여진 최고의 문장들을 멋진 서예체의 글씨와 해학한 한문학의 지식과 역사 지식을 섞어 가면서 가르쳐주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문학지망생이었고, 고전과 한문학에 목말라 있던 저는 그 선생님의 수업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2학년이 지나 고3이 되어서도 저는 선생님의 수업을 빠뜨리지 않고 들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한문이나 국어시간을 이용해서 영어나 수학 공부를 하던 그 시절에, 저는 오히려 다른 과목 수업을 빼먹고 선생님의 한문과 국어 수업을 몰래 청강했을 만큼 탐닉했습니다.

서울로 올라와서 대학교 시험을 치른 날 밤, 저는 서울 친척집의 골방에 엎드려서 박시중 선생님에게 길고 긴 편지를 썼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선생님과 개인적인 면담을 하거나 얘기를 나눈 적이 없이 저 혼자서만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있었기에 저를 소개하는 글로 서두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암울하고 힘들고 입시 공부에 숨이 막혔던 고등학교 시절에 선생님의 수업은 저에게 영혼의 숨통을 틔워주는 귀중한 시간이었다는 내용과, 3학년 때 이황의 「퇴계문 전편」만 배웠는데 후편도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마침글로 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도 멋진 달필로 쓴 장문의 편지를 바로 보내 주셨습니다.



지금도 그 편지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고, 제 가슴에 불을 지른 스승에게서 받은 유일한 편지이기에 앞부분을 소개합니다.

보내 준 편지 참으로 반갑게 받아 보았네.

무료하던 차에 자네 편지는 무기력한 나에게 생기를 고취해 주었네. 바로 답신을 내려던 것이 이렇게 지연되어 미안하네. 통근하느라고 그리 되었으니 양해있기를 바라네.

내가 어찌 명곤군을 기억 못할 것인가? 언젠가 독후감 써낸 것들을 검토하다가 자네 <초사> 독후감을 보고 어찌나 흐뭇했는지. 그래 전교생에 시범적으로 낭독하여 주도록 했었지. “觀鳳一羽에 知五色之具(봉의 깃 하나를 보면 다섯 색깔 갖춘 것을 알 수 있다.-필자 주)”라는 말도 있듯이 한 가지를 미루어 여러 가지를 짐작했네.

자네 독서력이나 감상력이 뛰어난 것보다 허영과 물욕의 와중에서 인간을 상실해 가는 판국에 자네의 정심수학(正心修學)하는 마음의 자세가 출중함을 느끼었네. 학문하는 사람의 태도로서 저 굴원의 말한 바 “擧世皆濁에 我獨淸이요, 衆人皆醉에 我獨醒 (세상이 온통 흐려져 있는데 나 혼자만이 맑고 깨끗하였고, 사람들 모두가 이욕에 취했는데 나 혼자만이 맑은 정신이었네-필자 주)”와 같은 의연한 자세가 확립되어야 가히 후일이 기대되는 큰 인물이 될 줄로 아네.

물질에 눌려 패기조차 잃은 속물들은 마땅히 타기해야 하네. 자네는 명석한데다가 시종(始終)을 분명히 하려는 학구적인 천성이 구비되었으니 꼭 대성할 것으로 기대된 바가 크네. 퇴계문을 후반만 써보내니 많이 음미해 보도록........

이 내용과 함께 상당한 분량의 「퇴계문 후편」을 친필로 모두 적어 보내 주셨습니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정종 한 병을 사들고 댁으로 찾아 갔더니 너무 반가워하셨습니다. 저와 함께 정종을 거나하게 드신 뒤에 “자네가 대학생이 되었으니 이젠 이런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하시며 한문학 고전이 가득 찬 책장에서 「순자(旬子)」를 꺼내어 함께 읽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선생님께서 수업 시간이면 꼭 제가 보냈던 편지를 후배들에게 읽어주시면서 제 얘기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 뒤로 가끔씩 뵈러 가면 고전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없어서 가르치는 재미가 없다고 쓸쓸해하시다가, 몇 년 뒤에 지병이 도져서 너무도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전 지금도 박시중 선생님이 보내주신 편지와 고등학생 시절에 선생님이 칠판에 적어주셨던 한문의 시귀들을 적은 노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다른 노트들은 다 버렸어도 그 노트 속에는 제 가슴에 타올랐던 문학과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전 그 뒤 선생님의 기대처럼 학문의 길로 가지 못하고 연극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제가 예술을 하면서도 우리의 전통과 판소리와 고전의 아름다움에 심취할 수 있었던 것은 예민하고 열정적이던 고등학교 시절, 제 가슴속에 고전 사랑의 불을 질러 준 박시중 선생님의 은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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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은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쌓았다는 '참성단(塹星壇)'이 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있는 참성단.

저는 그동안 마니산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는데, 얼마 전에 친구가 마니산 중턱의 어느 암자에 꼭 소개하고 싶은 '여도사' 있다고 해서 바람도 쐴 겸 가게 되었습니다. 

강화군 온수리의 좁은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다가 산골 입구에서 차를 내려 진달래가 소담하게 피어 있는 산을 올라갔습니다. 


봄내음이 상큼한 산길을 친구와 함께 반시간쯤 걷다보니 산중턱에 부스러진 기왓장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폐허가 나타나더군요. 
 


폐허 아랫쪽에 '천제암 궁지'라는 안내판이 서 있었습니다.


예전에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제기와 제물 등을 준비하던 '제궁터'라고 합니다. 고려 무렵에 세워졌을 거라고 추정을 하지만 정확한 건립 연대와 역사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불에 타서 사라진 이 유적지를 몇 년 전에 군에서 터만 조금 다듬어 놓고 안내판 하나 달랑 세워 놓았다고 합니다. 


제궁터 옆에 작은 철문으로 보호한 우물이 있더군요. 철문을 열고 물을 마셨습니다. 물맛이 시원하고 깨끗하더군요. 친구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곳 사람들은 그 우물이 단군 시대부터 있었고, 5천 년 동안 한 번도 마르지 않았다고 말한다는데,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우물터 위 약간 가파른 산길을 10여미터 올라가니 슬레이트 지붕에 시멘트 벽을 한 조그마한 움집이 나타났습니다. 


집의 뒷 마당에 서서 주위를 살피다보니 이상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바위가 눈에 띄더군요. 마치 윷놀이판처럼 생긴 이 무늬는 바로 이곳이 한반도의 배꼽에 해당하는 곳을 알리는 표식이라고 합니다. 그 말도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집의 앞쪽으로 돌아서니 한 중년 부인이 저희를 맞이합니다. 바로 그 분이 친구가 소개하고 싶어 한 여도사 '송월(松月) 법사'입니다.    

저희를 반갑게 맞이 한 부인은 자신이 기거하는 비좁은 골방에서 자신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열정에 가득차서 이야기하는 그녀에게서 도저히 믿기 어려운 놀라운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인천에서 남편과 함께 활발하게 건설 관계 사업을 하며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던 기독교 신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20여년 전부터 시름시름 몸이 아팠답니다. 병원은 말할 것도 없고, 한약과 기도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병이 낫지 않았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사람이 귀신에 씌인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길래 영적 능력이 깊다는 목사님을 찾아가서 안수기도도 여러차례 받고, 도가 높다는 스님을 초청해서 법회도 열고,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서 굿도 여러 차례했지만 전혀 차도가 없이 몸은 점점 더 말라가고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밤마다 꿈에 산속의 폐허와 쓰러져 가는 움집과  할아버지와 관세음보살 같은 이미지들이 나타나고, "너는 그 곳을 찾아 가야 산다!"는 환청이 자꾸 들리더랍니다. 

그래서 그동안 꿈 속에 나타난 폐허를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녔답니다. 그러던 중 마니산 참성단에서 기도를 하고 내려 오다가 자신도 모르게 발길에 끌려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그 폐허와 움집이 바로 꿈속에 보이던 그곳이었답니다. 

그 움집은 본래 산림보호원들이 잠시 머물기 위해서 지은 가건물이었는데,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 버려져 있던 곳이었답니다. 그런데 쓰레기와 오물로 가득 찬 집안으로 들어가보니 방 2개와 부엌이 있는데, 작은 방 안에 한 번도 쓰지 않고 비닐로 곱게 포장해 놓은 자개장롱과 경대 등이 세워져 있더랍니다. 

그녀의 이야기에 따르면 자개장롱과 경대는 이곳에서 수도하던 '도사' 남겨 놓으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분 역시 이곳에서 홀로 수도하며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자기가 죽은 후 이곳을 '단군 성지' 일으킬 여성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며 자개 장롱과 경대를 미리 사 놓고, 그 속에 자신이 그려 놓은 단군 성지의 조감도와 편지 등을 남겨 놓았다는 겁니다. 

장롱과 경대는 방안에 있으니 제 눈으로 확인을 했지만, 그 도사가 남겨줬다는 유품을 보여 달라고 하기는 예의에 어긋난 것 같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부인이 허황된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전 그저 놀라서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할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움집에 오자마자 너무도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해져서 그곳에서 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놀라서 반대했지만 그곳에서 살아야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그녀의 완강한 고집에 양보했답니다. 남편은 한동안 인천에서 오고가며 그녀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등을 가져다 주었답니다.   

그녀는 폐허가 된 움집을 가꾸며 혼자 살았답니다. 인적 없는 산속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오로지 꿈속의 신령들과 교류하며 참성단에 오르고, 그들이 꿈속에서 가르쳐 주는대로 기도하고 먹고 자며 지내는 동안 그녀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건강해지기 시작했답니다. 대꼬챙이처럼 말랐던 몸에 살집이 붓고, 혈색도 돌아왔답니다. 지금은 어느 누구보다 씩씩하고, 목소리도 우렁찹니다. 

그래도 산 아래 마을에서는 그녀를 미친 여자나 무당이나 귀신 들린 마녀 취급을 하며 멀리 했답니다. 그런데 점차로 무당처럼 점을 치거나 굿을 하거나 돈을 받지도 않고, 그저 순수하게 단군신을 모시고 지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부터 지금은 그녀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녀가 꿈속에 본 이미지를 토대로 하여 제작되었다는 단군 영정.

그녀는 그곳에서 홀로 지낸 지 10년이 되어 간다고 합니다. 

그녀의 꿈은 움집 아래쪽에 있는 '천제암 궁지' 폐허를 복원하여 '단군 성지'로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문화재 관리를 담당한 군청을 수도 없이 찾아가서 나라에서 복원해주기를 청했지만, 예산타령만할 뿐 진척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제 그녀는 문화재청이나 군청에 하소연하는 걸 포기하고 자기가 스스로 그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남은 여생을 신의 뜻을 받들어 단군 성지를 만드는 것이라며, 단군 영정을 모시는 이 방에서 일심으로 기도를 하며 지냅니다. 


그녀는 자기는 종교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무당도 아니고, 단군교도 아니고, 증산교도 아니고, 사이비 교주도 아니라고 합니다. 전국 각지에서 무당이나 스님이나 도사들이 간간이 기도를 하러 이곳을 찾아오지만 그녀는 그들과도 별로 교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고, 잡귀잡신에 들려서 허무맹랑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바르지 못한 마음으로 사술을 부리는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저는 참으로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직접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미화하지도 않았고, 신격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저 신들이 시키는대로 신들의 뜻을 받들고 사는 무식한 여자라고 자신을 표현했습니다.

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현상에 어느 정도 흥미를 가지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 현상이나 무턱대고 믿을만큼 영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제가 경험하지 못하고 들어보지 못한 신비스러운 현상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상식적인 사람일 뿐입니다.

송월 법사와 헤어져 산을 내려오는 내내 과연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의문에 휩싸였습니다. 친구는 그녀가 이루려고 하는 단군 성지의 꿈을 알리고 싶어서 나를 소개한 거였지만 저는 아직 그녀가 모신다는 단군신에 대해서도 궁금한 게 많습니다.

과연 5천 년전의 단군은 어떤 존재이었기에 저처럼 한 여성을 10년 동안이나 이 산속에 잡아두고 있는 걸까요? 만약 그 여성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단군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가 되길 원하는 걸까요?
 

움집에서 바라 본 마니산 참성단.

이처럼 많은 의문을 간직한 채 돌아 온 저의 귀에는 헤어질 때 들려 준 그녀의 말이 아직도 맴돌고 있습니다.

"신령들하고 노는 건 차라리 쉬운데, 인간들하고 지내는 게 훨씬 더 어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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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아내와 함께 무주 안성읍의 5일장에 갔습니다


오후라서 그런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평소의 인적 없는 거리에 비하면 활기가 넘칩니다.


시골장의 정겨운 물건들을 이리기웃 저리기웃하며 구경하고 다녔습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꽃나무를 세워 놓고 파는 이 곳에서 나무 몇 그루를 사곤 합니다.


처음에는 서울의 '양재 꽃시장'에서 몇 그루씩 사가지고 가서 심었는데 생존률이 저조하더군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장날에 맞춰서 이 곳에서 나무를 삽니다. 올해는 호두 나무 2그루와 자두와 복숭아 1그루, 그리고 분홍 철쭉 5그루를 샀습니다.


제가 '나무아저씨'라고 부르는 주인 아저씨가 시골의 농원에서 직접 기른 나무들이라 뿌리가 튼실해서 잘 자랍니다. 


길가의 찐빵집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네요. 집에 가지고 가서 먹으려고 찐빵과 만두 1인분씩을 시켰습니다.


단골이라고 알아본 주인아줌마가 인심 좋게 1개를 더 얹어서 쪄줍니다.


배가 고파지자 제가 좋아하는 할머니의 돼지갈비집에 들렀습니다.


남편이 일찍 돌아가신 뒤 이곳에서 사십 년이 넘게 장사를 하시면서 아들과 딸들을 공부가르치고 시집 장가까지 잘 보낸 '복쟁이 할머니'이십니다. 메뉴판에 이것저것 써놓았어도 오로지 연탄불에 굽는 돼지갈비만 파는 건 읍내 사람들은 다 아는 일입니다.


점심 때나 저녁 때나 장날에나 평일에나 언제든 이 비좁은 곳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건 오로지 푸짐한 할머니의 인심과 깔끔하고 맛있는 반찬 때문이지요. 돼지갈비 2인분이 깜짝 놀랄 정도로 푸짐하게 나옵니다.


왜 이렇게 많이 주느냐고 물으니 "다들 이렇게 많이 주면 뭐가 남느냐고들 그려. 그려도 내 집서 밥 먹고 배부르게 먹고 갔다는 말을 들어야 기분이 좋제"하며 맘씨 좋게 웃으십니다. 인심 좋은 할머니 덕분에 우리는 배부르고 기분좋게 돼지갈비 2인분에 동동주 반되를 마셨습니다. 

동동주가 너무 맛있어서 어디서 만든 거냐고 물었더니 읍내 '막걸리 도가'에서 산 거라고 합니다. 


당장 읍내 골목 안에 있는 '안성주조장' 찾았습니다.


술맛 나게 생긴 주인아저씨가 막걸리 한 사발을 맛보라고 그냥 줍니다. 그야말로 시원하고 감칠맛 나는 생막걸리가 목으로 시원하게 넘어갑니다.
 

'안성 생막걸리' 2병과 아무런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청주' 2병을 사니 가슴이 뿌듯합니다. 장터 거리로 나오니 멀리 덕유산의 산자락이 눈에 들어오는군요.


읍내에서 마을로 돌아오는 길목에 늘어 선 벗꽃 가로수 길에 벗꽃이 아름답게 피었군요.



길가의 민들레와 들꽃들도 봄맞이를 하고 있군요.


'구름샘 마을' 입구 길가의 산속에 피어 난 진달래도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저 멀리 산중턱에 정겨운 우리 마을에 보입니다.     


오랫만에 따뜻한 인심과 싱그러운 봄향기를 맛본 '장터 여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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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전주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5학년까지 반장 노릇을 했습니다.

1학년 때는 담임선생님이 저를 무척 예뻐하셔서 반장으로 뽑아 주셨고, 2학년 때부터는 학생들의 투표로 선출되어 5학년 때까지 반장을 했습니다. 내성적이고 남 앞에서 설치는 성격이 아닌데도 막상 멍석을 깔아 놓으면 잘도 교단 앞에 나갔던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이 옛날 얘기하라고 하면 앞에 나가서 동화 얘기를 하기도 했고, 노래하라고 하면 서슴없이 나가서 동요를 불러대곤 했으니까요.

한번은 저의 반장 권력이 강력한 도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4학년 때 저하고 앙숙으로 지냈던 깡패 대장 비슷한 아이가 바로 그 도전자였습니다. 선생님이 안 계실 때면 제가 자습을 시키곤 했는데 그 아이가 선동을 해 반대파를 모아서 소란하게 만들고, 떠드는 아이들을 제지시키면 저한테 대들게 해서 싸움을 붙이곤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자기가 직접 싸움을 걸지 않고 부하를 시켜서 싸우게 만드는데, 저는 꼭 그 전술에 걸려들어 수업 끝나고 한적한 공원에 가서 그 애 부하들하고 싸웠습니다. 그러면 번번이 제가 이겨서 그 아이 코피가 터지게 되고, 그 아이는 울면서 저희 집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느 날, 그 깡패 대장이 자기 집에 저를 초대했습니다. 전주에서 조금 벗어난 변두리 마을에 있는 가난한 초가집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전주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거의가 초가집이 있는 시골이었습니다. 그 애는 집에 가는 동안에 호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말했습니다.

“사실은 너하고 사귀고 싶어서 그런 거다. 우리 사귀자.”
“그래 좋다.”

화끈하게 화해한 우리는 울타리에 피어 있는 호박잎을 말아 담배랍시고 만들어 그 아이 골방에서 어른들 몰래 콜록거리며 피워댔습니다. 그 뒤로 깡패 대장의 '지원'을 받은 저의 권력은 탄탄대로였습니다. 그런데 그 권력으로 인해 학우들의 가슴에 못을 박은 2가지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 중 하나는 전주 KBS 방송국 '어린이 합창단 응모 사건'입니다. 

그 당시 KBS 어린이 합창단은 노래하는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학교 합창반에서 활동하던 저와 몇몇 어린이들이 지망을 했는데, 그 중에 저희 반 부반장도 지망을 했습니다. 얼굴이 깨끗한 미소년에 심약한 소년이었던 부반장은 노래를 참 잘 불렀지만 노래라면 누구한테도 지기 싫어하는 저한테 눌려서 우리 반에서는 노래의 2인자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방송국의 발표 결과 저는 탈락되고 부반장이 합격하는 '대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를 저한테 안겨 준 부반장 아이가 밉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 심정을 미리 짐작한 저의 부하들은 그 뒤로 부반장 아이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빽으로 어린이 합창단을 들어갔다는 루머도 퍼뜨리고, 그 아이가 노래를 부르면 야유를 하기도 했고, 어린이 합창단이라고 잘난 체 한다고 괜한 트집을 잡기도 했습니다. 저는 모른 채 하면서도 속으로 고소해 했습니다. 그 후 그 아이는 반장 눈치 보느라 학교에서는 점점 노래를 부르기 힘들어 했습니다. 저는 노래 1등이라는 지위를 계속 누렸지만,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그 아이의 눈동자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볼펜 도난' 사건입니다.

역시 4학년 어느 날의 쉬는 시간에 제 앞에 앉은 아이가 멋진 외국제 볼펜을 가지고 와서 제게 자랑을 했습니다. 아마 외국에 나갔다 돌아 온 부모님이 선물한 볼펜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볼펜에 넋이 나간 저는 저도 모르게 그 아이 필통에서 볼펜을 훔쳐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밤을 새우며 그 볼펜으로 일기도 쓰고 숙제도 한 저는 다음 날 수업 시간에 또다시 그 볼펜을 꺼내어 쓰기 시작했습니다.

밤새도록 볼펜을 찾았을 그 아이는 제가 쓰고 있는 볼펜을 보자마자 "이 도둑 놈, 내 볼펜 내놔!"하고 소리쳤습니다. 조금만 더 쓰고 그 아이에게 돌려주려고 했던 저는 '도둑놈'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뭐야? 이 볼펜은 내꺼야!" 하고 마주 소리쳤습니다. 그 아이는 어이가 없어서 눈을 뒤집어까며 자기 볼펜이라고 소리치고 항의했지만, 저도 지지 않고 눈을 부라리며 '내 볼펜'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거짓말이 제 입에서 술술 나왔습니다.   

반 아이들이 모여 들어 누구 말이 맞는지 따져 보았지만 목격자가 없으니 오로지 그 아이와 제 진술로만 판단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아이들은 당연히 반장 편이 됐습니다. 그 아이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 말도 잇지 못하고 저를 노려봤지만, 저도 그 아이한테 지지 않고 노려보며 "나를 도둑놈으로 모함하는 나쁜 놈!"이라고 몰아부쳤습니다.
 
그러자 제 부하들이 그 아이를 끌고 가며 반장한테 까불지 말라고 위협했습니다. 그 아이는 기가 죽어 더 이상 저한테 대들지 못했지만, 억울함에 가득 찬 그 아이의 눈동자를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학우들이지만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는 그들의 두려움과 억울함에 가득 찬 눈동자는 지금까지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혹 그 사건의 당사자나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학우들이 있다면 무릎이라도 꿇고 용서를 빌고 싶은 심정입니다. 

친구들이여, 보잘 것 없는 반장 권력을 휘두르며 '왕따 작전'과 '거짓말 작전'으로 착한 학우들을 괴롭힌 비열한 반장을 용서해 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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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주변 사람들하고 메일이나 핸드폰 메시지로 소식을 주고 받다보니 직접 펜을 들어 편지를 쓴지 까마득히 오래 되었네요.

그러다보니 손으로 직접 쓴 편지를 받아 볼 일도 거의 없어졌군요. 지난 주말 문득 손으로 쓴 편지들이 보고 싶어 오랫만에 먼지 쌓인 박스를 꺼내어 낡은 편지뭉치들을 훑어봤습니다. 

대학생 때 집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하다보니 누이들에게 받은 편지들이 많았고, 특히 아버님은 사나흘에 한 번씩 편지를 보내셨더군요. 방학 때나 휴학을 하고 집으로 내려와 있을 때 친구들이 보낸 편지나 엽서도 많이 남아 있고, 아내하고 연애를 하거나 신혼 시절에 주고 받은 편지들도 한아름 쌓여 있더군요. 

청춘의 외로움과 즐거움과 불안을 함께 나눈 많은 사연들을 읽으며 한숨도 쉬었다가 울다가 웃다가 멍하니 추억에 잠겼다가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돌아가신 어머님의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딱 2통만 남아 있더군요.



첫번째 편지는 1971년 1월, 제가 대학 시험 보려고 서울 친척집에 올라와서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입니다. 그 무렵 우리 식구들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아 경남 진해에 사는 이모집에 잠시 몸을 의탁하며 요양을 하고 계실 때입니다.

명곤이 보아라.

너의 편지 반가히 받았다.
며칠 전에 집으로 너에게와 아버지께 편지했는데 못 보고 서울에 왔구나.
사대를 지원한 것은 잘했다.
어디든지 너의 실력이 당할만한 데 보는 것이 좋은 일이다. 
이번 시험에 합격할만 해야지.
꼭 합격해야지.
시험 잘 보아라.
아버지께서도 편지가 와서 너는 형님네 집에 있을 줄 알고 그리 편지낼까 했었는데 외삼촌 집으로 갔구나.
아무래도 낯이 익으니까.
아이들도 너의 친동생과 같지.
살림이 망하니까 아이들(우리 누이와 형제들)도 불쌍하지. 딱하구나.
시험이 끝나면 형님 집에도 가보련.
시험 잘 보고 합격을 바란다. 
이곳 이모집도 다 편안하시고 아기도 참 귀여웁다. 
oo이(사촌동생)도 잘 뛰어 놀고.
난 오래 쉴까 생각했더니 우리집 가고파서 곧 내려가야겠다.
24일 경에나 가야겠다.
oo이(세째누이)도 26일날 간다고 했어.
아들 편지를 처음 받아보니 참 반갑구나.
다음 전주에서 만나자.

1.16 엄마씀


다음 편지는 1971. 3. 16이라고 봉투에 적혀 있는 걸로 봐서 입학 2달 뒤 첫 하숙집에서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군요.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 와 아버님과 함께 동생들을 보살피며 지내고 계실 때입니다.

아들 보아라.

너의 편지 자세한 모든 것, 자세한 곤란과 모든 자질구레한 곤란을 다 이기고 나가겠다 하는 결심을 듣고 어머니는 한껏 마음이 놓인다.
그래야지.
아버지가 다녀오셔서 또 자세한 이야기는 들었다마는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해라.
너의 생활이 퍽으나 유쾌하고 희망에 차 있고, 기대를 갖고 있는 너이니까 곤란을 이겨나가고 열심히 공부해라. 
너는 모든 곤란을 이기고 열심히 나가리라고 너를 믿는다. 
나의 몸은 항상 그만하다. 걱정말어라.
교복 입고 조그마한 사진 하나 찍어서 보내라. 
하숙집 음식이 너의 입맛이 잘 맞아서 잘 밥을 먹느냐. 
음식에 주의도 하고 학교에서 가까와서 점심도 와서 먹게 되겠다.
한 방에 있는 학생도 매우 착실하고 얌전하다면서. 참 잘했다.
나는 참 기쁘다.
벌써 아들이 커서 서울 가 공부를 하고 이렇게 편지를 쓰니 매우 즐거웁구나.
따뜻한 봄이 되면 서울에 가 보겠다.
oo이(여동생)도 학교를 넣든지 기술을 가르치든지 해야할텐데 그대로 있다. 
oo이(남동생)도 요새는 공부를 열심히 한다.
다음에 미루고 이만 쓰겠다.
할 말은 많은데.....         



유일하게 남은 2통의 어머니 편지를 읽는 동안 마치 조용조용하고 잔잔한 어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맞춤법이 맞지 않는 글자들마저도 어머니의 손길인 듯 다정하기만 했습니다. 집을 떠난 아들에게 난생 처음 편지를 쓰면서 어머니는 얼마나 기뻐하고 가슴 설레이셨을까요?


전 이 편지들을 읽는 동안 어머니의 편지를 공개하고 싶어졌습니다. 

왜냐구요? 좀 더 자주 어머니에게 편지 쓰지 못한 불효가 뼈에 사무쳤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수많은 아들 딸들에게 저처럼 후회하지 말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자주 육필로 편지를 쓰라고 권하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뿐 아니라 형제, 자매, 친구, 선배, 스승 등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수십 년 뒤에  수많은 추억과 웃음과 눈물과 사랑을 전해 줄 편지를 자주 쓰라고 권하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살아 숨쉬는 손길이 스며 든 편지로 좀더 자주, 좀더 많이 사랑을 나누시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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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뱀사골이 있는 산내면 면사무소에 김용근이란 공무원이 계십니다. 

그의 부친은 평생 농사를 지은 농부였는데, 공무원이 된 아들에게 절대 7급 이상의 고위공무원이 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고위 관료가 되면 서민들을 괴롭히게 되니 하위 관료로서 서민들에게 봉사하며 사는 게 옳은 길이라고 하셨답니다.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들어 20여 년간 고향인 산내면에서 봉사하며 현재 7급 공무원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부친도 훌륭하지만 그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아 온 아드님도 훌륭합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도 못 말린 한 가지 병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의 '판소리병'이었습니다. 그는 지리산 부근에서 전승되어 오는 동편제 판소리에 '미쳐서' 지금까지 판소리 명창들의 유적을 탐방하고 자료 조사를 하는 데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기록도 거의 없고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전국을 떠도는 통에 가족관계도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명창들의 삶을 기록한다는 것은 정말 지난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토지대장이나 호적 등을 조사하고, 명창과 관련된 모든 곳을 직접 답사하고, 생존자나 관련자들의 증언을 채록하고, 그들의 삶의 흔적을 직접 체험해 보기도 하며 오랫동안 고독한 조사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3년 전 미당 서정주 시인의 조카이며 시인인 이주리님과 남원에서 만나 서로 뜻이 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 함께 유적지를 돌아다니고 자료 조사를 하며 언젠가 지리산 판소리 명창들의 이야기를 대하소설로 엮어 낼 꿈을 꾸고 있습니다. 

저는 전북 지역 인터넷 신문인 <투데이안>의 대표 엄범희님의 소개로 두 분을 만난 뒤로  그들이 조사했던 자료와 아직 발표되지 않은 귀한 글들을 볼 수 있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들의 판소리에 대한 무한한 열정과 대하소설에 대한 집념과 꿈은 저를 부끄럽게 할 정도였습니다.   

함께 소릿길 탐방을 할 기회를 바라던 우리는 어렵게 일정을 맞춘 끝에 드디어 1박 2일의 '지리산 소릿길' 탐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전주에서 소리축제의 회의를 마친 저는 점심 후에 남원으로 향했습니다. 약속 장소인 광한루 주차장에 당도하니 두 분과 함께 글로벌 농촌 인재협회 사무처장인 박찬용님이 봉고를 운전하며 우리 일행을 안내해주시더군요.

오른쪽부터 김용근님, 이주리님, 박찬용님.

우리는 남원에서 차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로 향했습니다.
비전마을은 옛날부터 전라도와 경상도가 통하는 중요한 통로여서 주막과 객주집이 많았고 풍광이 아름다워 찾는 이가 많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인근에는 거문고의 전설적 명인인 옥보고가 살았다는 옥계동, 해발 695미터의 바위산인 황산, 구룡폭포 등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비전마을 가까운 곳에 있는 남쪽 구릉에는 이성계가 왜군을 무찌른 전투를 기념하는 '황산대첩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비전마을에 있는 '송흥록 명창의 생가' 찾았습니다. 아래 동상의 주인공이기도 한 송흥록 명창은 '가왕(歌王)'이라 불리기도 하는 전설적인 명창입니다. (*그의 자화상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동상의 모습은 '상상 속의 그대'입니다.)
 

앉아서 북을 치는 이는 송흥록 명창의 동생인 송광록으로 형의 고수로 따라다니다가 나중에 명창이 되었습니다. 송흥록의 판소리는 아들 송우룡, 송우룡의 아들 송만갑으로 3대에 걸쳐서 집안으로 전수되었습니다. 속가 제자인 박만순, 양학천, 김정문, 유성준 등도 당대를 울린 대명창들입니다. 이처럼 송흥록의 집안은 동편제 판소리의 명가이며 종가입니다.


판소리는 송흥록 명창을 기점으로 일대 전기를 맞게 됩니다. 송흥록 이전의 판소리는 지역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선율과 장단으로 불렀는데 송흥록에 의해 통합되어 오늘날의 판소리 형태로 정착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송흥록을 '판소리의 중시조'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송흥록 명창의 생가와 나란히 저의 스승인 '박초월 명창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스승이 돌아가신 뒤 10여 년 전에 다녀 간 기억이 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스승의 탄생과 집안 내력에 대해 김용근님을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도 의미 있는 방문이 되었습니다. 박초월 명창에 대해서는 저의 글 <나의 스승 박초월 명창 생각하니 눈물난다>http://dreamnet21.tistory.com/10을 참고하시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비전마을을 떠난 우리는 운봉읍 화수리에 있는 '국악의 성지'를 찾았습니다. 


국악선인묘역, 납골묘, 사당, 전시체험관 등을 갖추고 2007년 10월에 개관한 국악의 성지에는 옥보고 명인이나 송흥록 명창 등 대표적인 국악인의 묘와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현대식 2층 한옥으로 세워진 전시체험관에는 국악과 관련된 많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 유독 저의 눈길을 끄는 낡은 공책이 있었습니다. 동편제 판소리를 오롯이 지켜 온 남원의 소리스승 강도근 명창이 제자들의 수업료 납부 상황을 적어 놓은 공책입니다. 전형적인 옛서체로 정성스럽게 적어 놓은 그의 꼼꼼한 성격이 보이는군요. 그 분은 평생토록 남원국악원에서 안숙선, 이난초, 전인삼 명창을 비롯한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냈습니다.


국악의 성지에서 참배를 마친 우리는 인월면 성산리에 있는 '흥보마을'로 갔습니다. 

판소리 <흥보가> 중의 첫가사로 '옛날 경상-전라 두 얼품에 놀보 흥보가 살았는데 놀보는 형이요, 흥보는 아우였다'로 시작되는 바로 그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는 뒷산의 '연비산(제비가 날아오른 산)'이라든가, '까막고개''화초장 다리' 같이 흥보가에 나오는 지명들이 전해지고 있어 1993년에 흥보마을로 지정됐습니다. 하지만 흥보가 실제로 그 마을에 살았는지, 그리고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니고 생존인물인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어서 산내면 백장마을에 있는 '변강쇠 공원'을 들렀습니다. 

판소리 <변강쇠가>에 나오는 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전해오는 이 마을에는 남근을 상징하는 '근원바위'나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아들을 낳았다는 '수태바위', '남근목', '강쇠바위' 등 변강쇠 관련 지명이 있어 2000년부터 변강쇠 공원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경상도 쪽 함양에도 변강쇠 마을이 있다는데 어느 마을이 '원조'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울 듯 싶습니다. 공원에 세워진 현대식 조각상이 재미있더군요.


배가 고파진 우리는 저녁 노을이 아름답게 번지는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은 <귀거래사> 식당에 들렀습니다. 중국의 전원시인 도연명의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전원이 무성하니 나 돌아가리라'하는 싯귀가 떠오르는 고즈녁한 집이더군요.
 

정말 정갈하고 맛있는 산채 정식이었습니다. '뱀사골'이라는 인상적인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산내면은 사과와 흑돼지와 곳감의 산지이며 수많은 약초와 산채들의 보고입니다.  


어둠이 내리자 우리 일행은 산내면 상황리에 있는 <노고지리> 산장에서 여장을 풀었습니다.


올해 지리산에서 처음 받아 낸 '고로쇠물'과 주인 아저씨가 직접 담갔다는 '양귀비술' 마시며 우리는 밤새도록 판소리와 예술과 전통문화와 농촌문화의 현실과 꿈에 대한 정담을 나누었습니다.

산공기의 상쾌함을 느끼며 새벽에 일어나 찍은 산장과 주변 지리산의 모습이 신비롭군요.  


방마다 '꽃의 향기는 천리를 가고 정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花香千里 人情萬里)'라는 글귀를 나무에 조각을 해서 걸어 놓은 주인 아저씨는 소도시의 시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이곳에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진도개와 아침 산책을 나온 그의 얼굴이 지리산을 닮아 넉넉하고 푸근합니다. 


밤에 차를 타고 달려 온 엄범희님까지 합세해서 일행이 늘었습니다. 소릿길 탐방을 할 명창들의 유적지는 많이 남아 있지만, 오전밖에 시간이 없으니 다음에 2차 탐방을 하기로 한 우리는 부근에 있는 '한지 장인'과 바위굴을 뚫어 법당을 만든 '서암정사'를 찾기로 했습니다. 

오른쪽부터 엄범희님, 김용근님, 이주리님.

우리는 차가운 고원의 공기를 마시며 산내면 하황리에 있는 '한지 장인 신평식'님의 한지 공장에 들렀습니다.

공장이라기보다 움막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듯한 이곳에서 평생 한지를 만들어 온 그는 옛부터 내려 온 방법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전통한지의 명인입니다. 


마을 뒷산 계곡에서 흐르는 이 맑은 물을 사용하여 한지를 만듭니다.


많은 한지 명인들이 양잿물이나 표백제나 기계식 공법을 도입하여 한지를 만드는 데 비해 그는 부친으로부터 전수 받은 옛방식을 조금도 고치지 않고 오롯이 전수해 오고 있습니다.    


아직 인간문화재로 지정도 되지 않았다니 한 장 한 장 정성을 다해 만들어가는 그의 한지가 언젠가 그 맥이 끊어지지 않을지 걱정됩니다.


한지 명인과 아쉬운 작별을 한 우리는 경남 함양군 마천리 벽송사 입구의 <서암정사(瑞岩精舍)>로 향했습니다.
 

40여년 전에 지리산 심산유곡에 있는 <벽송사(碧松寺)>에서 수행을 하던 원공스님은 500미터쯤 떨어진 산속을 산책하던 중, 갖가지 바위들이 신비스럽고 상서로운 기운으로 늘어서 있고 장엄하게 솟은 앞산 연화봉이 연꽃처럼 펼쳐진 풍광에 넋을 잃고 서서 그곳에 불사를 일으키겠다는 원을 세우게 됩니다. 


1975년에 터를 고르기 시작해 공사를 시작했지만 토지의 소유권 문제, 국립공원의 건축 허가 문제, 공사 자금 조달의 문제 등의 수많은 어려움 때문에 불사는 하염없이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백송사의 젊은 주지로 불같은 추진력과 깊은 불심을 지닌 법인스님이 부임해 오면서부터 불사는 빠르게 진척되기 시작했습니다.

서암정사 주지 법인 스님.

많은 불사 중에서 가장 힘들고 놀라운 불사는 '석굴법당'이었습니다.


거대한 바위를 뚫어서 법당을 짓고, 사면의 벽과 천장 전체를 그림과 글씨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원공 스님의 디자인을 토대로 하여 석공들이 조각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6명의 석공이 1989년부터 조각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 하나 둘 떠나고 나중에는 홍덕희 석공만이 10년 이상 절에 머물면서 2001년에 완성했다는 이 석굴은 국내에서 가장 거대하고 예술적으로도 뛰어난 석굴입니다.
  

석굴법당의 본존불인 아마타불의 미소가 불국사의 석굴암 부처님처럼 정겹습니다.

제 생각에 이 석굴법당은 100년쯤 세월이 흐른 뒤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고도 남을 훌륭한 현대의 문화유산입니다.


두 스님의 놀라운 집념과 원력으로 지어진 불가사의한 이 도량은 불보살의 상서로운 기운이 충만한 곳입니다.


옥보고 명인, 송흥록 명창, 박초월 명창, 강도근 명창, 신평식 장인, 원공스님, 법인스님, 홍덕희 석공.....지리산 골짝골짝에 이런 분들의 숨결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게 놀랍습니다.
 

또 이들을 사랑하고 지키고 있는 김용근님, 이주리님, 박찬용님, 엄범희님 등....
대한민국의 문화는 바로 이런 분들의 열정과 집념 어린 노력에 의해 지켜지고 발전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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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옛 노트들을 정리하다가 노트 사이에 낀 낡은 종이 몇 장을 발견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제가 28세 무렵, 첫 직장인 <뿌리깊은 나무>의 응시서류에 첨부했던 '자기 소개서' 초고더군요.
낙서장처럼 지저분하지만 까마득히 잊고 있던 글을 보니 무척 반가웠습니다. 
정서를 해서 보낸 최종 원고는 사라졌지만, 기억을 더듬어 초고를 약간 다듬어 정리해 봤습니다.
제 청춘의 '구직'에 대한 꿈과 열망을 엿볼 수 있는 글이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기록으로 남깁니다.
마지막 문장 이후는 생각이 나지 않아 미완으로 남겨둡니다.

 



바람이 많고 황폐한 땅에 나무가 한 그루 자라는데, 아직 줄기는 가늘고 가지는 연약하나 뿌리가 깊어 가히 앞날의 무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강물이 샘에서 시작하듯 나무 또한 그 뿌리에서 모든 것이 시작하며, 새벽빛이 맑으면 그날의 태양이 밝고, 샘이 깊으면 강물이 마르지 않듯이, 나무 또한 뿌리가 깊을수록 땅 위의 수확이 풍성합니다.

그러나 뿌리는 땅속에 있어 그 깊이를 알 수 없고 다만 그 솟아나온 가지나 잎을 보아 뿌리의 깊이를 측량할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의 한계인지라 사람들은 치밀하게 따지고 재고 시험해 보나 결국 얻는 건 그릇된 판단과 뒤바뀐 지식, 그리고 오해입니다.

물론 나무는 바람과 추위를 이기고 우람한 모습을 드러내게 될 터이지만 그 전에 나무에게 필요한 건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자기 뿌리의 깊이를 알아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따뜻한 보살핌입니다. 그것이 있음으로서 나무는 더 빨리, 더 높이 자라는 것입니다.

옛 말에 천리마를 구하려는 사람은 천리마의 뼈를 천 냥에 샀다 했습니다. 또 큰 인물을 얻으려는 어떤 사람은 닭소리만 잘 내는 사람도 그를 밑에 두어 후히 대접했다 했습니다.

저는 감히 천리마나 큰 인물이라고 자만하지 못하나 천리마의 뼈나 닭소리를 내는 사람이 되어 천리마나 큰 인물을 끌어들이는 전초의 한몫을 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약 저의 뿌리가 다른 나무보다 깊다고 믿고 보살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온 힘을 다해 성장할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뿌리깊은 나무>사에서 추구하는 많은 것들에 대해 저는 존경과 대결의 자세로 지켜보아 왔습니다. 존경이란 제가 어려서부터 간직하고 키워오던 많은 꿈들을 그곳에서 저보다 먼저 그것도 감탄할만하게 눈앞에 펼쳐 놨다는데 대한 존경이고, 대결이란 눈앞에 펼쳐진 것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허점을 찾아내려는, 그리하여 내 꿈에 대한 반성의 거름으로 삼고 새로운 꿈을 만들어내려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제가 그동안 공부했던 것은 독어과 출신답지 않게 한국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문화의 모든 형태와 본질, 특히 한국 문화의 원형을 찾으려 참으로 잡다한 것들을 공부했고 약간의 결실도 있었습니다.

그 대신 상식과 어학 실력은 남보다 뒤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직의 문턱에 있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결점이지만 저의 약점을 솔직히 밝혀드리는 것은 저의 장점이 결점을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뿌리깊은 나무>사의 이념과 그 사업 내용이 제가 참으로 하려 했던 것, 하고 싶던 것들이어서 제 능력이 미치는 한 온힘을 다해 결점을 복구할 결심이 섰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때는 주로 문학 방면에서 활동을 했고, 대학교에 들어와서는 방송과 연극 활동을 하면서 한국학에 몰두하여 예술, 종교, 철학 등 여러 가지를 조금씩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기쁨으로 삼는 것은 이러한 개개의 지식과 활동보다 공부한 모든 것을 종합하여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는 것입니다......(미완)


이 자기소개서를 보낸 뒤 서류심사에 합격한 저는 100여명의 응모자 중 2명을 뽑는 2차 심사의 좁은 관문을 통과해서 근무하던 중, 심각한 '연극병(?)'이 발병하는 통에 1년 뒤에 정든 직장을 떠났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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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여행 3일째, 우리 일행은 '신화로 둘러싸인 웅대한 자연의 보고'라는 '기리시마 국립공원'으로 이동했습니다.

입구에 세워진 불상들이 앙증맞고 귀엽군요.


분화구와 호수, 온천, 고원 등 12개의 화산군이 자리잡고 있는 이 공원은 일본에서도 가장  변화무쌍하고 웅대한 경치로 유명합니다.

아래 보이는 산은 백제 시대에 이주한 유민들이 바다 건너 한국 땅을 바라보며 고국에의 그리움을 달랬던 산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그래서 이름도 '한국산'이라고 한다는군요.


다카치호 산의 봉우리는 일본 건국과 관련된 신화로 유명합니다. 


그야말로 터키석처럼 피랗게 빛나는 칼데라 호수가 눈앞에 펼쳐지자 탄성이 절로 터져나오더군요. 신이나 선녀의 이야기가 절로 떠오를만큼 신비한 느낌을 주는 호수였습니다. 
 

따뜻한 햇볕과 상쾌한 공기 속에서 산책을 한 우리 일행은 '시로야마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시로야마 공원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유적지로 유명합니다.

사이고 다카모리(1827~1877 西鄕隆盛) 는 '도쿠가와 바쿠후(덕천막부德川幕府)' 말기의 정치가이며 사무라이였습니다. 도쿠가와 바쿠후를 전복시킨 '메이지 유신(명치유신明治維新)'의 지도자로 활약하여 천황제를 확립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무라이입니다.

그런데 그는 한국을 정복하자는 '정한론(征韓論)' 주창자로 한국에 널리 알려져 있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을 때 조선은 메이지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사절단을 3번이나 물리쳤습니다. 그와 그의 동지들은 조선을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던 중 사이고 다카모리는 기발한 제안을 내놓습니다. 자신이 특사로 조선을 방문한 뒤 일부러 무례한 행동을 하여 조선인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조선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는 정당한 구실을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제안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그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라고 강조함으로써 반대의견을 모두 물리쳤습니다.

여러 번에 걸친 탄원 끝에 그의 제안은 천황의 재가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파의 강경한 반대로 그 제안이 취소되자 격노한 사이고는 관직을 사임하고 가고시마로 돌아갔으며 몇몇 고위 장교들과 100여 명 이상의 근위군 장교들이 동반 사퇴했습니다. 

그후 천황정부의 취약점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천황제 확립의 영웅이 조선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사무라이들의 반란에 참가하여 패배한 끝에 활복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시로야마 공원 입구에는 그가 할복한 동굴을 비롯하여 그의 영혼을 달래는13개의 석가모니 동상들이 있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일본 화폐 중 1만엔권 지폐의 주인공이기도 하며, 이 지역 초등학교와 중고등학생들의 교복 단추에도 그의 얼굴이 새겨질만큼 현재도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인물입니다.

가고시마 시내를 굽어보는 높이 107m의 야산 정상 부근에 그의 모습을 본뜬 사진 촬영대가 서 있더군요.
 

강한 일본, 조국을 위한 의분에 찬 죽음, 시무라이 다운 기개 등 사이고 다까모리에 대한 가이드의 긴 설명에 친구 한 명이 인상적인 코멘트를 던졌습니다. 

사이고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자면 '싸이코' 같은 사람이요.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리니 그만 설명하고 딴 데로 갑시다!

저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히며 가고시마의 상징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활화산인 '사쿠라지마'로 이동했습니다.


2만 3000년 전에 해저 화산으로 활동을 시작한 사쿠라지마는 지금까지 총 30여회 폭발하였으며, 1914년 폭발 때는 30억톤의 용암이 흘러내려 바다를 메우는 통에 섬이었던 사쿠라지마가 육지와 연결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하루에 수십 번에서 수백 번씩 작은 폭발이 있고 화산재가 날리는 위험한 산입니다. 


아리무라 용암 전망대는 1914년에 흘러내린 용암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곳곳에 기이한 모습의 용암 바위들이 서 있습니다.       


화산재가 계속 날리고 있어 길 위에도 수북히 쌓여 있더군요.


숙소로 돌아 온 우리 일행은 또다시 온천욕과 식사로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 뒤, 다음 날 '기리시마 신궁'으로 갔습니다.


원래의 기리시마 신궁은 6세기 중엽에 '니니기노미코토'를 신으로 모시고 다카치호의 산정에 세워졌지만, 지금 볼 수 있는 기리시마 신궁은 1715년 무렵에 개축된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 건국을 위해 타카치호 봉우리에 내려왔다는 건국신화의 주인공을 모시고 있는 신궁으로 주홍칠이 인상적인 매우 장엄하고 화려한 신전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단군 사당'과 같은 곳인데 참으로 정성스럽게 잘 꾸며져 있고, 전국 각지의 일본 사람들과 함께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 오는 곳입니다. 일본에는 전국 곳곳에 이런 신궁이나 신사가 12000여개나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 당집이나 사당으로 불리며 일제시대 때 철저히 파괴되거나 초라하게 버려진 우리의 신궁이나 신사가 비교되어 머리가 지끈거리더군요.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히며 2시간 동안 구마모토 성으로 이동했습니다.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 7년 여에 걸친 대공사 끝에 1607년에 완공했다고 합니다. 블로거 '일월산'님이 가또에 대해 쓴 글이 재미있군요.

풍신수길의 수하로서
임진왜란시 조선침략선발대
고시니 유끼나가(小西行長)와
더불어 선발 사령관으로서 울산에
상륙 영천 안동 문경를 거처 죽령을
넘어 한양의 동대문으로 들어온놈!

놈은 재주는 있었는지 축성기술의
대가답게 정유재란시 경남지방의
여러 성들을 축성 아즉까지 남아있음
죽일놈!! 입니다

성격이 포악하고 음훙하며 정유재란
시 함경도 지방에 까지 뭐하러 갔는지
갔다가 쪽발리 놈들 발에 동상이 걸려
반은 얼반 디졌다니더!! 
출처 : http://cafe.daum.net/kdae88/zy/686


 

임진왜란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어진 이 성은 적의 침입에 대비해 성벽을 가파르게 만들어 난공불락의 성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성곽 둘레만도 9km에 이르며 성의 중심인 천수각에 오르면 구마모토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입니다. 


기념관 안에 있는 성곽의 모형도입니다.


사무라이의 갑옷이 진열되어 있더군요. 조선 침략 때 입었던 옷일까요? 또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더군요. 


3째날과 마지막 날은 묘하게도 우리 역사와 관련이 깊은 장소를 둘러 보게 되었습니다.

'한국산'이 있는 기리시마 국립공원, 정한론의 주인공 유적이 있는 '시로야마 공원', 초라한 단군 사당과 비교되는 '기리시마 신궁', 임진왜란의 흔적이 묻어 있는 '구마모토 성'.....
 
왜 여행사들은 이러한 장소를 선택했을까요? 우리에게는 비극이지만 일본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역사 유적을 둘러보며 뭘 알려 주고 싶었던 걸까요?  

3박 4일의 여행 동안 큐슈는 아름다운 원시림과 계곡과 호수와 온천과 화산들의 풍경으로 저에게 생기와 활력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그런 한편 신사, 신궁, 성곽, 유적들이 던져 주는 역사의 아픔으로 인해 저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비행기를 탄 저는 많은 과제를 생각하며 3박 4일의 여정을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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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절친한 친구부부들과 함께 3박 4일의 '남북큐슈 종단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큐슈의 관문이자,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인 후쿠오카 공항에 내린 우리 일행은 곧바로 '다자이 후텐만구'라는 신사로 갔습니다.


이 신사는 '스기와라 미찌자네'라는 학문의 신을 모시고 있는 신사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율곡 이이나 퇴계 이황과 같은 대학자의 사당이라 그런지 입시철이면 입시생을 둔 학부모들이 많이 찾아 오는 곳이라고 합니다.   


간단하게 신사를 둘러 본 우리 일행은 일본 최고의 용출량을 자랑한다는 '온천의 천국 벳부'로 1시간 반쯤을 달렸습니다.

예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지옥 같은 곳이었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뱃부로 들어서니 과연 산이나 마을 곳곳의 땅속에서 흰 연기가 솟아나더군요.
  

'바다 지옥', '산 지옥', '귀신 지옥' 등 여러 지옥 이름이 붙은 온천 중에서 '가마토 지옥' 온천에 갔습니다.


가마토 지옥에는 1~6'초메'로 번호가 붙은 온천 6개가 있는데 제각기 생김새와 특징이 다릅니다.

1초메는 90도씨의 열탕이 올라오는 붉은색 온천입니다.


빨간 도깨비상이 세워진 2초메는 바위틈에서 100도씨의 증기가 솟아 오릅니다.



3초메는 85도씨의 하늘색 연못입니다.


4초메는 60도씨의 진흙이 끓어오르는 연못입니다.


5초메는 엄청난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95도씨의 열탕입니다.


6초메에서는 95도씨의 진흙탕이 끓어오릅니다.



열탕지옥에서 만난 관광객들은 대부분 한국말을 쓰는 분들이더군요. 그들은 '지옥의 손님'들을 위해 특별히 만든 족탕에 발을 담근 채 웃고 떠듭니다. 지옥에 온 게 아니라 마치 천국에 온 듯한 표정들이더군요.


지옥 온천 근처에 있는 상점에서 재미있는 이벤트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아래 보이는 그림의 미녀들을 보라고 하더니 그 위에 물을 확 뿌리더군요.


와, 갑자기 미녀가 벌거숭이가 되었습니다! 지워졌다가 다시 원상회복이 되는 특수 염료 때문이라는데 모두들 신기해하며 깔깔거리고 웃었습니다. 하지만 그림을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더군요. 같이 간 부인들 때문이었을까요....ㅎㅎ  


지옥 온천을 둘러 본 우리는 호텔에서 노천 온천을 즐긴 후 일본 정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맛있는 일식에 길들여진 탓인지 모두들 정갈하게 차려진 일식에 그닥 감동받는 눈치가 아니더군요. 특히 한국의 2배쯤 되어보이는 스시의 밥을 떼어내고 먹으려니까 가이드가 호텔측에서 제발 밥을 남기지 말아달라고 했다고 주의를 주더군요.
 

그 이후로도 여러 번 스시가 곁들여 나오는 일식을 먹었는데 그때마다 꽉꽉 쥐어 짜서 담은 밥 위에 조그마한 생선을 올려 놓은 스시를 다 먹자니 배가 불러서 다른 음식을 먹기가 힘들고 스시맛도 즐길 수가 없어 조금씩 떼어내게 되더군요.

그런데 수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스시의 밥을 떼어내고 먹는 것에 대해 그 지역의 식당들이 불평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밥의 양을 적게 해서 스시를 만들면 될텐데 그건 또 자기네 원칙이라 고칠 수 없다고 한다는군요. 손님들에 대한 서비스보다 자기들의 자존심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식당들의 융통성 없음에 불평을 하며 스시를 먹어야 했습니다. 

다음날, 우리 일행은  '유후인'으로 출발했습니다. 

유후인은 해발 453미터의 고지대에 위치한 한적한 시골 마을로 고급 휴양지로 인기가 높은 곳입니다.


마을 안쪽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킨린 호수'는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는 호수입니다. 바닥에서 샘물과 온천수가 함게 솟아나는 매우 독특한 호수의 풍경은 한폭의 수채화 같았습니다.


호수에서 바라본 유후인 마을의 모습입니다.
 

각종 민예품을 파는 상점과 개성있는 카페가 늘어 서 있고 조용한 자연을 즐길 수 있는 매력을 지닌 유후인은 NHK가 선정한 가장 일본적인 마을이기도 합니다. 이 마을에는 예술가들이 자주 찾아와 휴식을 취하며 작품의 영감을 얻기도 한다는군요. 


유후인을 떠난 우리는 큐슈의 상징인 '아소 활화산'으로 이동했습니다.

아소 화산은 세계에서 가장 큰 화구를 가졌으며, 현재도 활동 중인 화산입니다. 아쇼 일대는 약 3000만년 전부터 화산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일려져 있으며 현재의 아소산은 10만 년전의 대폭발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차가 산으로 올라갈수록 갑자기 날씨가 차가워지고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경치가 순식간에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눈서리와 눈꽃이 가득찬 듯한 이 풍경은 지하에서 올라오는 습기가 차가운 대기와 만나서 만들어낸 풍경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활동중인 아소산의 '나카다케' 화구는 하얀 분진과 연기를 내뿜고 있어서 가까이 갈 수가 없고 멀리서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화구 주변에 있는 가지각색의 용암은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비나 안개나 바람이 심하거나 유독가스가 분출되면 출입을 통제하는 통에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다는데 다행히 그날 바람은 많이 불었지만 출입을 통제하지는 않아 신비한 활화산의 풍경을 감상할 수가 있었습니다.


차가운 칼바람이 불어대는 계곡 근처에 죽은 자들의 영혼을 구원한다는 '지장보살'을 모시는 위패단이 있었습니다. 


잠시 죽은 자들을 위해 묵념을 한 뒤 산정에 있는 휴게소의 노점 상가에서 '말고기 꼬치'를 먹어봤습니다. 처음 먹어보는 말고기 꼬치인데 그닥 맛이 나쁘진 않더군요. 특이한 장소, 특이한 풍경, 특이한 날씨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소산을 떠난 우리는 구마모토현 북부에 위치한 '키쿠치 계곡'으로 갔습니다.


키쿠치 계곡은 키쿠치 강 상류 근처에 있는 4km에 걸쳐 이어진 계곡입니다.


폭포와 연못, 거대한 바위, 원시림 등의 자연 경관이 함께 어우러진 계곡을 산책 한 후 이틀 간의 여정을 마무리한 우리는 다음날의 여정을 위해 호텔에서 간단한 온천욕과 식사와 술을 마신 뒤 일찍 잠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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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아내와 함께 무주군 안성면의 구름샘 마을에 있는 움막을 찾았습니다.

새벽의 마을 입구에서 바라 본 구름샘 마을은 온통 새하얀 눈의 천국이었습니다. 우리는 마을 입구에 차를 세워 놓고 음식과 책과 컴퓨터가 든  배낭을 메고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의 찬바람에 코끝이 시리고 손도 얼어왔지만 오랫만에 걷는 눈길이라 기분은 더할 나위없이 상쾌했습니다. 30분쯤 눈길을 걸어 산중턱에 고즈녁히 자리 잡은 움막에 당도했습니다.
 



지난 가을에 저를 놀라게 했던 말벌집은 아직도 지붕 밑에 붙어 있었습니다. 이번 겨울에 저 말벌집을 떼어낼 일도 큰 숙제 중의 하나입니다.


간단하게 집안 청소를 마친 우리는 집 뒤에 있는 산길을 걸었습니다. 소나무와 전나무가 들어 찬 인적없는 눈 쌓인 산길을 뽀드득 뽀드득 걷다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습니다.


잔가지 사이에 올록볼록 쌓인 눈이 귀엽고 앙증맞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눈을 손으로 떠서 입에 넣어 보았습니다. 차가우면서도 신선한 눈의 감촉이 입안을 간지럽히다가 시원하게 목으로 넘어가더군요.



우리가 걷는 길 한쪽에 이름 모를 짐승의 발자국이 눈길 위로 죽 이어져 있었습니다.  혹시 백호랑이의 발자국?.....ㅎㅎ


멀리 아침 햇살이 번지는 덕유산의 산자락을 바라보며, 올 한해 모든 분들에게 새해 첫날의 눈과 같은 소담하고 깨끗한 축복이 내리길 기원했습니다. 


저 산 속 어딘가에서 호랑이가 힘차게 표효할 듯 합니다. 어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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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돌아가신 아버님의 기일입니다.
매년 형제들과 함께 저희집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 준비를 하며 아버지의 사진과 편지들을 정리하다가 문득 몇 가지 아버지와의 추억이 떠올라 블로그에 올립니다. 


총각 시절의 아버지.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성악에 심취했다고 합니다.

특히 러시아의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이며 러시아 민요는 그보다 더 잘 부르는 사람이 없다는 평을 받는 성악가 표도르 샬리아핀의 팬이었습니다. 음악에 대한 식견과 지식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술이 거나해지면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저의 누이들과 남동생도 모두 피아노나 키타를 치거나, 합창반이나 성가대를 하며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서 어떤 날은 때 아닌 가족 노래자랑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잔잔한 바다 위로/ 저 배는 떠나가며/ 노래를 부르니/ 나폴리라네----”로 시작하는 이태리 가곡 <먼 산타루치아>나 우리 가곡 <나물 캐는 처녀>를 자주 부르셨습니다.

푸른 잔디 길 위에 봄바람은 불고
아지랑이 잔잔히 끼인 어떤 날
나물 캐는 처녀는 언덕으로 다니며
고운 나물 찾나니 어여쁘다 그 손목
소 먹이던 목동이 손목 잡았네
새빨개진 얼굴로 뿌리치고 가노니
그의 굳은 마음 변함없다네
어여쁘다 그 처녀

평상시의 퉁명스럽고 거친 목소리가 노래를 부를 때면 아버지답지 않게 가늘게 떨리고 부드러운 가성으로 흘러나오는 게 신기해서, 저는 아버지가 노래 부르는 걸 참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사에 나오는 '나물 캐는 처녀'가 아버지와 굉장히 친했던 어떤 여자인 것만 같은 상상에 빠지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알듯 말듯 미소를 짓고 눈을 가늘게 뜨고 ‘처녀’니 ‘어여쁘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은 오직 그 노래를 부를 때뿐이어서 특별하고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나면 아버지는 다시 무뚝뚝하고 침울한 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와 함께 저의 즐거움도, 상상 속의 여자도 사라져버리곤 했습니다.

아버지를 회상할 때마다 저는 이렇듯 두 가지의 상반되는 기억들, 부드러움과 거칠음, 밝은 미소와 침울한 표정, 상냥함과 무뚝뚝함, 따뜻함과 차가움, 침묵과 고함 속에서 혼란에 빠지곤 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아버지를 닮아가는 저의 기질이 튀어나올 때마다 그 혼란은 더욱 더 커지기만 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복잡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내면세계가 있는 법이겠지만, 아버지의 기질과 사고는 남다른 것이어서 어린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참 많았습니다. 출생과 어린 시절의 성장에 얽힌 불우한 환경이 큰 원인이 아닐까 짐작은 하지만 꼭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렸을 때의 아버지는 칭찬에 무척 인색한 분이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에 반장이었고, 공부도 잘해서 선생님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학생이었는데 유독 아버지한테는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반장으로서 통솔력이 부족한 점, 내성적이고 대범하지 못한 성격에 대해 비판하시고 그걸 고치도록 엄격하게 요구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어쩌다 칭찬을 하더라도 그 말씀이 매우 간단하고 무뚝뚝해서 칭찬인지 뭔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런 태도는 그 당시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가진 가부장적인 태도였지만 어린 저는 참으로 서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서운함을 모두 가시게 해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입니다. 밤늦게까지 다음날 아침 자습시간에 제출할 산수 숙제를 하다가 피곤에 지쳐 그대로 엎드려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담임선생님은 호랑이 같은 분으로 학생들이 거의 매일 매를 맞고 지낼 때인지라, 저는 매 맞는 꿈에 가위 눌리다가 벌떡 일어나 부랴부랴 학교에 갔습니다. 숙제 검사를 할 때 비참한 심정으로 공책을 펼치는데, 세상에......뜻밖에 산수 숙제가 고스란히 풀어져 있는 게 아닙니까?
 
독특한 필체 때문에 아버지께서 밤에 대신 풀어놓은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아버지가 저를 사랑하고, 저에게 깊은 관심을 쏟고 계시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대학 다니러 집을 떠나 있을 동안에는 아버지와 수시로 편지를 교환했습니다. 편지에는 아들에 대한 걱정과 자상한 관심, 그리고 인생의 선배로서 자신의 철학을 전수해 주고자 하는 아버지의 배려가 담뿍 실려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지금도 저는 잊지 못합니다.



(의타심 없이 자기 창의력에 충실할 것)

청년은 고독하다

고독이야말로 오늘날 청년에게 주어진
유일하고 가능한 상태인 것이다.(특권)
고독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투쟁인 것이다.
소신대로, 솔직하게, 생각한대로 해보는 것이다.
청년이란 것은 해보고 실패하면 다시 시작하고,
또다시 고쳐 시작하고, 무한히 투쟁할 수 있다.
다시 고쳐 또 해도 기성인과는 달라서 흉이 없고,
오히려 칭찬 받는 시기이다.
자기에게 성실하고 대담함이 있어라.
교활하고 비굴함은 삼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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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와 여제자의 가난한 사랑이야기>에 대한 반응이 저와 아내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 전 글인 <교수와 여제자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쓰다가 문득 '교수'와 '교사'가 비슷하니 아내 이야기도 써보는 게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어 쓴 글입니다.

그런데 아내는 전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인터뷰나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얘기하는 걸 무척 싫어했고, 이번에도 펄펄 뛰며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매번 그렇듯이 저의 언변에 속아서 허락은 했지만, 포스팅을 한 첫날은 아예 글을 읽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고생과 총각선생의 가난한 러브스토리>란 제목으로 바뀌어서 다움메인에 소개가 되고, 4만 6천여 명의 조회에 70여 명의 댓글과 방문객의 글들이 찾아오고 인터넷 상에 기사화도 되는 뜻밖의 반응에 아내도 놀랐습니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친구나 친지들의 전화까지 받더니 그제서야 제 블로그에 들어가서 글을 보더군요. 그랬다가 자기 허락도 없이 고등학교 때의 사진을 올렸다고 또 한차례 혼났습니다.

그 사진은 결혼한 후 아내의 앨범에서 보았던 사진인데-제가 찍은 게 절대 아님-제가 무척 좋아하는 사진이라 아내 몰래 슬그머니 올린 겁니다.

아내는 말로는 "사람들이 미쳤나봐!" 했지만 이렇게 많은 분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준 것에 대해 쑥스러워 하면서도 은근히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댓글 하나하나를 읽으면서 웃기도 하고 얼굴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특히 줄타기 광대가 어쩌고 한 대화 부분에 대해 "아마 마지막 대화는 부부싸움이 아니었을지....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라고 쓴 '바람처럼~'님의 댓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깔깔거리고 웃으며 "어떻게 그걸 알아냈지?" 하고 즐거워 했습니다.

사실 그 대화는 부부싸움한 내용이거든요. 돈 때문에 힘들어 하는 아내하고 밤새도록 말다툼을 한 내용을 그럴싸하게 각색한 겁니다.

그리고 그많은 댓글에 어떻게 답글을 달거냐며 저를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는 밤을 새워서라도 답글을  달려고 마음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답글에다 우리의 사적인 내용을 또다시 반복하는 게 쑥스럽지 않은가 걱정을 한 겁니다. 그 의견이 옳을 듯 싶어 이 글로 방문해 주신 모든 분들에 대한 답글을 대신하게 된 겁니다. 혹 개인적으로 서운하신 분들이 있어도 양해해 주세요.     

이렇게 많은 분들이 저희의 만남과 살아 온 이야기에 관심을 보내 주신 것에 대해 아내와 함께 한없는 감사와 사랑을 드립니다. 

그건 오로지 많은 분들이 "거지의 아내가 되어도 좋다"라는 말을 했던 아내의 순수함에 감동 받은 때문일 겁니다. 저 역시 그 말에 감동 받아 결혼을 결심했지만, 지금의 아내는 "내가 왜 그런 멍청한 말을 했지?" 하며 웃습니다.

저는 결혼 전까지 어둡고 거친 삶을 살았습니다. 언제나 그랬던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는 파리한 청색의 분위기로 채색된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결혼 후에는 점점 밝고 명랑하고 부드러운 삶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환한 분홍빛의 분위기로 채색된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건 오로지 아내의 덕인 것입니다. 아내는 저와 정반대의 기질을 타고 나서 구김살이 없고 따뜻하고 명랑합니다.

물론 우리도 살아 오면서 말 못할 고통과 시련도 겪었고, 서로에 대해 실망도 하고 상처도 주고, 서로 다른 의견의 충돌로 밤새워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토록 자기를 가슴 아프게 하고 소리 지르면 화가 나서 한 달 쯤은 말도 안하거나 집을 나가버릴 것 같은데, 다음날이면 흔연하게 저를 대합니다. 사소한 문제로 싸운 다음에는 몇 시간도 안 돼 다 잊어버리고 깔깔 웃습니다.

저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성격입니다만, 그런
아내와의 삶을 통해 저의 못된 성격이 많이 교정 됐습니다. 남을 잘 배려하고 뒤끝 없고 남 의심할 줄 모르고 조금 어리숙하고 대범한 O형이 예민하고 세심하고 잘 삐지고 이기적인 A형을 만나 잘도 부대끼며 살아준 덕에 저도 많이 ‘사람이 됐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꾸려 살아가는 일이 어찌 행복과 웃음과 밝은 햇빛만 있겠습니까? 수많은 날들이 불행과 탄식과 눈물과 먹구름과 폭풍우로 점철되는 게 또한 인생 아니겠습니까?  

부부란 그런 날들을 서로 부대끼며 그러면서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듯 합니다. 인생의 고통과 행복, 어둠과 밝음, 절망과 희망을 함께 나누며 손을 잡고 걸어가는 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부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 아닐까요?

전 지금 새벽의 찬 기운을 느끼며 책상 앞에 앉아 있습니다. 

저희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과, 지금 이 시간 누군가를 따뜻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워하고 사랑하며 잠을 자고 계실 모든 분들의 머리맡에 제가 좋아하는 시 한 귀절을 선물로 드리고 저도 잠깐 눈을 붙이겠습니다.

사랑의 잠언

잠이 든 당신을 들여다봅니다.
어느 먼 길을 걸어와 지금 당신이 옆에 잠들어 있는지
불가사의하게 느껴집니다.
분명히 언젠가 낯선 타인이었을 당신이 
제 손이 미치는 곳에서 가벼운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게 마냥 신기합니다.
나 같은 남자 뭘 믿고 더없이 소중한 마음과 몸을 맡기고
저처럼 아늑한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지,
순간 순간 놀라면서도 전 눈물이 납니다.
그저 고맙고 감사해서 촛불 같은 당신 잠과 꿈을 깨뜨릴까  
조심조심하며 저는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뿐입니다.

김하인의 시집 <눈꽃 편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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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와 여제자'의 애절한 사랑이야기>의 마지막 귀절에 저와 아내의 이야기를 간단히 언급했더니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더군요.
사생활 노출이 싫다고 펄펄 뛰며 반대하는 아내를 간신히 설득한 끝에 저와 아내의 이야기를 '살짝' 들려드릴 수 있게 됐습니다.
써놓고보니 저도 좀 계면쩍기는 하군요.ㅎㅎ   



아내와 저는 배화여고에서 만났습니다.

저는 28세 총각 선생으로, 아내는 고1의 여고생으로. 제가 허름한 양복 상의에 후즐그레한 바지를 입고 첫 수업을 하는 순간, 아내는 첫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제 부스스한 머리 뒤에서 새하얀 은빛 햇살이 퍼져 나오는 걸 봤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저는 첫 수업에서「춘향가」중의 <사랑가>를 학생들에게 들려줬습니다.

“독일어를 하는 것은 우리말을 잘하기 위해서이고, 우리말을 잘하려면 우리 음악을 잘 알아야 하는데, 우리 음악 중에서도 판소리가 가장 뛰어난 음악이다.” 등등 정말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판소리를 흥얼거리는 괴짜 독일어 선생은 학생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어떤 때는 불어반 학생들이 몰래 들어와 괴짜 독일어 선생의 수업을 듣기도 했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독일어보다도 제가 들려주는 시와 음악과 연극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대신 학생들의 독일어 실력은 수준 이하를 맴돌았을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교단에 서서 “아 베 체 데, 데어 데스 뎀 덴”과 「보리수」와 「로렐라이」와「황태자의 첫사랑」을 가르쳤고, 수많은 경쟁자들 속에서 말없이 저를 바라보던 소녀는 설레는 가슴으로 독일어 수업을 기다리고, 저의 모습을 보려고 교정을 서성이고, 밤마다 저의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아내의 고향은 전라남도 고흥군의 산골 마을.

장인어른은 저처럼 판소리를 좋아하시고 북도 치시던 멋쟁이였답니다. 3남 2녀의 둘째딸로 태어난 아내는 아담한 키에 고운 얼굴에 잘 웃고 명랑하면서도 수줍음이 많은 소녀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온 가족이 서울로 올라와 영등포구 고척동에서 조그마한 철물공장을 하며 살다가 구로동, 독산동으로 이사를 하는 동안 점점 재산이 불어나, 고등학교 때는 커다란 연립주택의 주인집 소녀로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학창 시절의 추억으로 끝나고 마는 선생님 짝사랑이 아내에게는 추억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밤마다 저의 이야기가 담뿍 담긴 일기를 쓰고, 저와 결혼해서 아기를 낳고, 저의 판소리를 듣고, 시골에서 채소를 키우며 오순도순 사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제가 학교를 떠나자 아내는 사흘 낮, 사흘 밤을 울었다고 합니다. 이것도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그 뒤 제가 어느 극단에서 연극 한다는 소문이 돌자 대학생이 된 여제자는 매일같이 신문의 문화면을 뒤적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연극을 할 때마다 아담하고 고운 얼굴을 한 여제자가 찾아 와 꽃다발을 주고는 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수십 명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가, 1년 뒤에는 열 명 쯤 중의 한 사람이었다가, 2년 뒤에는 몇 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가, 3년 뒤에는 단 한 사람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아내는 신문의 문화면을 읽으며 언제 있을지도 모르는 저의 공연을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공연 보러 가기 전날엔 흥분하고 들떠서 잠을 설치다가, 공연하는 동안엔 제 얼굴만 바라보다가, 공연이 끝난 뒤엔 잠깐 만나 몇 마디 말을 나누고 돌아와선, 베개를 꼭 끌어안고 미소를 띄며 잠을 잤다고 합니다.

극장 역시 저의 옷차림처럼 허름하고, 후즐그레하고, 비좁았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전혀 딴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깔깔거리며 웃고, 노래를 부르다가, 슬픈 목소리로 넋두리도 하다가, 다시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일 년에 한 번이나 두 번이나 세 번쯤 만났습니다.

그러는 동안 스승과 제자였던 두 남녀는 사제 관계와 연인 사이의 감정이 뒤섞인 묘한 만남을 한동안 계속했습니다. 아내는 제가 아버지와 단둘이 삼송리에 살 때에도 몇 번 찾아왔고, 고대 앞 길가의 자취방에서 극단아리랑 창단을 모의할 때도 가끔 찾아왔습니다.

어두컴컴하고,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고, 때 절은 이불이 널린 연습실 겸 침실에 찾아와,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청소도 해 주고 콩나물국도 끓여주는 여제자에게 저는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은 환상 속에서 꿈을 키우고, 한 사람은 어둠 속에서 무명 배우의 고달픈 세월을 보내는 동안 소녀가 어느덧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졸업 선물을 해줄 수도, 저녁을 사줄 수도 없을 만큼 가난했던 저는 소녀가 데리고 간 경양식 집에서 침울하게 맥주만 들이켰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결혼 얘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그 무렵에 병을 앓고 있었고, 영화나 연극을 하기는 했어도 수입이 형편없던 터라 결혼에 도통 자신이 없었습니다.

'나는 방탕한 사람이다, 미래는 비참할 것이다, 나를 잊고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등등 두서없이 떠들어대는 제 말을 한참 동안 듣고 있던 소녀가 제 말을 막고 입을 열어 조용조용 얘기했습니다.

왕을 사랑하면 왕비가 되는 것이고,
거지를 사랑하면 거지 아내가 되는 거예요.
전 거지 아내가 되고 싶어요.

가난에 시달리고 예술에 시달리고 고독에 시달리던 저에게 그 말은 샘물과도 같은 활력을 주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군소리 집어치우고 장인 어르신과, 장모님과, 아내의 형제자매들을 차례로 만났습니다.

결국 제가 35살, 아내는 25살 때인 1986년 10월 26일에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아주 단촐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가난하고 초라한 결혼식이었지만 많은 연극 동료들와 친구들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어주고, 저를 들쳐메고서 신랑 다룬다고 발바닥도 때리며 떠들썩하고 즐겁게 축하해 주었습니다.

 
신혼여행은 제주도로 갔는데 극단아리랑 창단 작품「아리랑」의 제주 초청 공연이 잡히자 거기에 맞춰 결혼식 날을 잡은 터라, 신혼여행이 아니라 공연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첫날밤을 멋지게 보낸답시고 병약한 신랑이 목욕탕에서 아내를 안고 나오다가 미끄러져서 욕조 모서리에 허리를 부딪치는 통에 매일같이 한의원에 가서 침 맞고 찜질하고, 허리에 복대를 두르고 간신히 공연하고, 공연이 끝나면 여관에서 찜질하며 보냈습니다.

신혼여행이 아니라 저는 ‘투병여행’이 되었고, 아내는 ‘간병여행’이 되고 말았으니 우리의 결혼은 출발부터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제가 가난한 줄은 알았지만 그토록 알거지인 줄은 몰랐던 아내는 식을 올리기까지 여러 번 놀라기도 하고, 울기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러나 식을 올리고선 이내 거지 아내가 되어 친정에 가서 반찬도 얻어 오고 옷가지도 집어 오곤 했습니다.

딸이 태어나고 아들이 태어나는 출산과 양육의 세월동안 저는 정말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생활은 뜻대로 나아지지 않고 언제나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짜증과 싸움과 눈물과 고함과 화해가 얽히고 섥히는 정상적인(?) 결혼 생활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결혼 후 오년 쯤이 지난 어느날의 대화 한토막. 

아내 : 참 이상해요.
나 : 뭐가?
아내 : 당신은 아침부터 밤까지 쉴 새 없이 일을 하고, 하루도 쉬지 않고 노력하는데 왜 늘 생활에 쫒기고 불안하기만 하지요?
나 : 줄 타는 광대가 줄 위를 걸어가다가 발을 한 번 잘못 디디면 천길 벼랑 아래로 떨어져서 목숨을 잃고 말아. 나는 그런 줄 위를 걷고 있지. 그리고 당신도, 아기도, 우리 인간들 모두가 그런 운명의 줄 위를 걷고 있어. 정도는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불안하기는 다 마찬가지야.
아내 : 당신은 세상을 너무 어렵게 살아가려고 해요.
나 : 그게 내 특기야. 당신, 그런 나를 좋아했잖아?
아내 : 그때는 철부지 소녀였지만 지금은 살림을 하는 주부예요. 현실은 꿈을 자꾸 퇴색시켜요.
나 : 현실이 퇴색시키는 게 아니라 당신의 마음이 퇴색된 거야. 내게는 아직도 꿈이 있어. 그 꿈은 날이 갈수록 빛나고 커지고 있지. 당신도 함께 나눠 가지자구.
아내 : 당신은 그 꿈만 먹고 배가 부를지 몰라도 아이들이나 나는 그렇지 않아요. 나는 당신이 다른 배우들처럼 가난하고 비참한 말년을 보낼까 봐 걱정이예요.
나 : 나는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될까 하는 걱정보다도 아무런 좋은 작품도 남기지 못한 채, 또 이 시대의 삶에 대해 아무런 의미도 깨닫지 못한 채 허망하게 죽어 갈까 봐 그게 더 걱정이야.
아내 : 어쨌든 아이들하고 나는 당신이 타는 줄 위에서 불안에 떨 거예요.
나 : 그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열심히 줄 위를 걸어서 건너 편 절벽에 도착하는 방법뿐이야. 목숨을 내놓고 자기가 하는 일에 몰두해서 신념을 가지고 걸어가는 것! 나는 지금 온 힘을 다해서 걸어가고 있으니 당신도 뒤에서 신념을 가지고 따라와야지 불안하다고 줄을 흔들면 우리 식구 다 떨어지고 말아. 여보, 나와 함께 신념을 가지고 걸어가자구.
(주 : 실제로 이렇게 멋지게 얘기하지는 않았음.)

어쨌든 아내는 때로는 저의 언변에 속아, 때로는 소녀 시절의 환상에 속아서 불안하고 힘겨운 결혼 생활을 꾸려 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중년의 주부가 되어 때로는 어머니처럼 때로는 누이처럼 변덕쟁이 남편을 돌보고, 성인이 되어 가는 아이들과 씨름하며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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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2일,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리 아들의 수능시험날입니다.

새벽 5시, 밤새 잠을 설치고 먼저 일어난 아빠는 조용히 아침 블로깅을 시작합니다. 어젯밤부터 초긴장 상태인 엄마는 잠도 설친 상태로 6시부터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합니다. 집안은 묘한 긴장 속에 새벽의 정적에 싸여 있습니다.

6시 20분, 다른 날보다 10분 일찍 일어난 아들이 목을 캑캑거리며 기침을 해봅니다. 요즘 며칠 신종플루 때문에 조금만 목이 아프거나 기침이 나와도 예민해져 있었습니다. 건강하던 아들이 한달 전쯤부터 배가 아프다, 머리가 아프다, 목이 아프다, 트림이 나온다, 기침이 나온다....등등 몸이 불편함을 하소연하는 통에 엄마는 노이로제에 걸려 있습니다. 블로그에 글을 발행한 저는 일찍 샤워를 하고 시험장까지 아들 수송할 준비를 합니다. 

6시 30분, 전화벨이 울립니다. 미국의 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는 딸의 응원 전화입니다. 잊지 않고 동생에게 마음을 전해주는 딸이 대견합니다. 아들이 식탁에 앉자 우리 식구들만의 아침 구호가 식탁을 울립니다.

"사랑해요, 감사해요!"

참고로 우리 가족은 어느 종교에도 속하지 않은 무교파입니다.

아들이 아침을 먹는 동안 엄마는 부리나케 도시락을 준비합니다.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계란찜과 김치돼지찌개와 등심 몇 조각과 귤 몇 알이 도시락에 차곡차곡 담깁니다. 엄마는 이 반찬 메뉴를 정하기 위해 며칠 전부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더군요. 마지막에 친지들이 보내 온 선물 중에서 엄선된 초콜렛과 엿과 사탕이 추가됩니다.

아들이 샤워를 하는 동안, 엄마는 외출 준비를 합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아들이 엄마에게 묻습니다. 

"오늘 날씨 어때요?"
"안춥고, 날씨 좋다!"
"어제하고 똑같을까?

아들은 날씨도 걱정이 되나 봅니다.

7시 10분, 아빠는 먼저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서 네비게이션에 오늘의 시험장인 서울고등학교를 등록시켜 놓고 차를 지상으로 몰고 나옵니다. 평소라면 20분쯤 걸릴 곳을 50분 전에 출발합니다. 

엄마하고 아들이 차에 탑니다. 평소 차만 타면 곧바로 잠을 자던 아들은 눈을 좀 붙이라는 엄마의 성화에도 눈을 감지 못합니다. 

길거리는 차들의 물결로 혼잡합니다. 학교가 가까워질수록 혼잡은 더해 갑니다. 학교 가까운 골목 안에 차를 임시주차시켜 놓고 일가족은 차에서 내립니다. 학교 가는 길거리는 학생들과 학부모들로 혼잡합니다. 

아빠는 길거리에서 갑자기 사진을 찍습니다. 엄마와 아들은 갑자기 들이대는 아빠의 카메라에 실소를 터뜨립니다.



그때 뒤에서 아줌마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들의 친구 2명과 엄마들이 걸어오다가 사진 찍는 걸 보고 웃습니다.

"아이구, 뭐 좋은 날이라고 사진을 찍어요?"
"폭삭 썩은 얼굴일텐데..."
"아들들 땜에 엄마들도 폭삭 썩었어요!"

엄마들의 수다 속에 말없이 걸어가는 아들들의 뒷모습이 애처럽습니다.



교문 앞에 당도하니 예쁜 여학생들이 마스크와 핫백과 휴지등을 나눠 줍니다.



긴장한 표정의 아들이 들어가려 하자 문 앞에 도열해 있던 중동고등학교 후배 학생들이 외칩니다.

"차렷! 선배님, 화이팅!"

뜨거운 박수소리와 함께 아들이 교문 안으로 입장합니다. 후배들은 발을 구르며 우렁찬 목소리로 응원을 합니다.



한 마디도 알아 들을 수 없는 그들의 응원소리가 마치 전쟁에 나가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함성 같기도 합니다.

운동장을 걸어가는 아들의 등 뒤로 파란 하늘이 빛납니다. 저는 교문에 기대어서 아들의 미래가 저 하늘처럼 맑게 빛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들은 시험의 결과에 따라 대학을 가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던 대학일 수도 있고, 가고 싶지 않은 대학이 될 수도 있겠지요. 

공부보다는 놀기를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하고, 경영자가 되어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아들에게 수험생으로서 보낸 시절은 악몽일 수도 있는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목표를 위해 좋아하는 것을 희생하고 진학 준비를 한 그동안의 경험은 아들에게 인내심과 끈기를 길러 주었을 겁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아들은 장차 새로운 생활을 펼쳐나갈 것이고,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 나갈 겁니다. 그동안의 힘든 세월을 꿋꿋하게 견뎌 낸 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사랑스럽습니다. 

60만 수험생과 학부모님들에게도 저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사랑해요!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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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 일이 있어서 며칠 다녀 왔더니 아주 반가운 편지가 와 있더군요. 

yureka01님의 따님인 유서현양이 제가 보낸 <우리 소리 우리 음악> 책을 읽고 보낸 편지입니다.

연필로 또박또박 정성스럽게 쓴 편지를 받아 본지가 오래되다보니 너무도 정겹군요. 또 
지금까지 받아 본 가장 '어린 팬'의 편지이다보니 가슴도 설레었구요. 게다가 그 내용이 너무 조리정연하고 재미있어서 혼자만 이 기쁨을 누리기 아까워 함께 나누고 싶어 소개합니다. 



전 문화관광부 장관 김명곤 아저씨께,

안녕하세요? 저는 유서현이라고 합니다.

그 전에 아버지께서 김명곤 아저씨로부터 선물을 받으셨다고 하시더군요. 그 선물은 '우리 소리 우리 음악'이라는 책이었구요. 

그 책을 보니 먼 옛날 고대의 우리 음악과 지금 공부하고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가야 등에 관련된 우리 소리 우리 음악이 나와서 공부하는 데에 도움이 될 듯 합니다. 

또 통일신라시대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악기들의 종류를 보니 현악기의 종류는 가야금, 거문고, 비파 등이 있었고, 관악기인 대금, 중금, 소금 등이 있었던 것 같아요.

맨 뒷부분의 CD(*이후 나오는 영어 단어는 서현양이 쓴 그대로 임)를 들어보니 Track3에서 나온 악기는 주로 피리인 것 같습니다.
 
또 노래의 느낌을 보니! 왠지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게 맞는 것도 같고, 

Track11에 있는 노래는 음악시간에 배웠던 사랑가 같더군요. 이 책 덕분에 음악 시간에 배운 우리 음악을 제 마음 속에서 일깨워 준 것 같아요.

책 선물은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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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에는 제 삶의 한 토막 이야기들이 실리게 됩니다. 시간의 순서를 충실히 따르지 않고 그때 그때 기억나는 이야기들을 쓰기 때문에, 혹 혼란이 오시는 분들은 앞의 글들을 읽어보시면 참고가 되겠습니다.
전호에 <어머니를 천사로 만든 아버지의 사랑법>http://dreamnet21.tistory.com/admin/entry/edit/195을 쓰다보니, 문득 아버지에 대한 저의 뼈 아픈 불효행각이 생각나는군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제가 직장을 그만두고 연극에 전념할 때인 서른살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일 년쯤만 고생하면 연극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자신만만했었는데, 막상 그만두고 나니 모든 일이 생각처럼 풀려 나가질 않았습니다.

또 연극해서 먹고 살겠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되고 무모한 꿈이었는지도 차츰 알아가고 있던 터라, 저는 예술과 현실 사이에 짓눌리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얼마 뒤에, 아버지 역시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충격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매일 막걸리를 과도하게 드시다가 뇌출혈로 쓰러지셨습니다.

입이 비뚤어지고 눈은 초점을 잃고 말도 잊었지만, 다행히 침을 맞고 한방으로 치료한 효과가 좋아 차츰 회복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한번 파괴된 정신은 옛날 같지 않았습니다. 육체도 갑자기 늙고 쇠약해지셨습니다. 아버지를 돌봐주고 손톱도 깎아주고 말동무도 되어 주던 착한 누이동생이 시집을 간 뒤로, 살던 집을 떠나 경기도 삼송리의 단칸 셋방에서 아버지와 단 둘이 살게 되었습니다. 

연극 연습을 한다고 아침에 나가 밤중에 돌아 오기는 했지만, 생활비와 약값 걱정으로 제 어깨에는 천근 짐이 지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 날, 어둠이 내리기 직전의 일입니다. 

저녁 식사를 차려드리려고 부리나케 집에 들어서는 참인데, 집 옆 공터에 아버지가 연탄재 한 장을 두 손에 들고 서 계신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무심코 집옆의 가로등 근처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잠옷바람으로 연탄재를 버리려고 나오신 것인데, 잡초가 듬성듬성 나 있는 공터의 뒤쪽 구석에 있는 쓰레기장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돌아다니시는 것이었습니다.

떨리는 두 손으로 연탄재 한 장을 들고서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집 대문 근처에 가져다 놓았다가, 아니라고 생각되셨는지 다시 집어서 부엌 쪽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좁은 공터를 맴 돌며 한참을 헤맨 끝에, 드디어 쓰레기장의 연탄재더미 위에 가까스로 올려놓으셨습니다.

5분이 흘렀는지 10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저는 가로등 뒤에 몸을 숨기고 아버지를 도와주지 않은 채, 끝까지 그 모습을 관찰했습니다.

왜 그랬냐고요?

저는 중풍 걸린 노인이 연탄재 버리는 장면의 연기와 동선을 머릿속에 입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극 연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저를 위해 불편하신 몸으로 하루 종일 방과 부엌과 공터를 서성이며 연탄불을 갈고 밥상을 차려 놓으셨던 아버지에게 그따위 대응으로 일관한 제 불효가 뼈에 사무칩니다.

예술에 대한 자신의 고민에 겨워서 따뜻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던 이기적인 아들을 아버지는 왜 그리도 사랑하셨는지....

이따금 골방에서 한 이불을 덮어쓰고 도란도란 대화를 나눌 때 그렇게도 행복해 하시던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리면, 핏줄을 타고 흐르는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이 지금까지 아버지와 저를 연결시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앞줄 왼쪽부터 아버지, 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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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에는 제 삶의 한 토막 이야기들이 실리게 됩니다. 시간의 순서를 충실히 따르지 않고 그때 그때 기억나는 이야기들을 쓰기 때문에, 혹 혼란이 오시는 분들은 앞의 글들을 읽어보시면 참고가 되겠습니다. 

제 아내의 여자 후배 중에 시댁과 너무 사이좋게 지내는 여성이 있습니다.

작년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친아버지가 돌아가신 만큼이나 슬퍼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왜 그렇게 시댁, 특히 시아버지와 사이가 좋았는지 그 사연을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결혼 전 처음으로 시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시아버지 되실 분이 자신에게 한 첫 마디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이 집에 들어 선 너를 본 순간, 우리집에 '천사'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구나!

그 말을 들은 이후로 그 여성은 시댁에 갈 때마다 거울을 보며 '나는 천사야, 나는 천사야!" 혼잣말을 하며 갔다는 겁니다.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동안에도 시부모들은 그녀를 천사 대하듯 사랑해 주었고, 그녀도 시댁 식구들에게 천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군요. 

그 사연을 듣는 동안 제 머릿속에 아버지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 아버지는 자주 술에 취해 밤늦게 들어 오시곤 했습니다. 매번 그러신 건 아니지만, 어쩌다 기분 좋게 취하신 날 밤에는 집에 오시자마자 잠든 저와 누이들을 깨웁니다. 그냥 깨우는 게 아니라 잠자고 있는 자식들 얼굴에 자신의 턱을 마구마구 문지르시는 겁니다. 유난히 까끄럽고 무성한 아버지의 수염 때문에 우리들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곤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어머니는 부리나케 부엌에 들어 가셔서 밥상을 차려 내옵니다. 아버지는 아무리 늦게 들어 오셔도 반드시 어머니가 차려 주는 밥을 드시고 잠이 들기 때문에, 꽁보리밥에 된장국이라도 차려 와야 합니다.

밥상 앞에 앉은 아버지는 잠에 취한 자식들을 앉혀 놓고, 자신이 왜 직장을 그만 두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사는 지 길게길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주로 사장이 탈세를 한다든가 자기에게 부정한 일을 시킨다든가 종업원을 부당하게 수탈한다든가 하는, 그때에 어느 직장에서나 있을 수 있고 사장들이면 거개가 저지르는 부정과 비리에 대한 말씀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것들과 타협하지 않고 사는 자신의 인생철학을 나름대로 설득력 있게 일장 설파하시곤 했습니다.

그러나 저나 누이들은 돈 못 버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으로 뾰루퉁하게 듣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 곁에 앉아서 “맞아요, 맞아요!” 하며 맞장구를 치시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장연설을 마친 아버지는 맨 먼저 간장을 떠서 “맛있다!” 하고 입맛을 다십니다. 그런 다음  “우리 마누라 된장국이 세계 최고다!” 하고 연신 찬사를 늘어놓으며, 된장국에 꽁보리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십니다.

어머니는 기분이 좋아서 아버지 옆에 앉아 식사하시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십니다. 식사를 마치고 물을 한 대접 벌컥벌컥 마신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어머니에 대한 찬사를 한참 늘어 놓으십니다.

너희 엄마는 '천사'다!

아버지 얘기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쑥스러워 하면서도 아버지가 하는 말을 미소를 띠며 열심히 듣습니다.

어머니 '찬양(?)'을 마친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마누라, 우리 뽀뽀 한 번 할까?”  하며 부끄러워 뿌리치는 어머니를 붙잡고선 입을 한 번 맞춘 다음, 기분 좋게 코를 골며 잠이 드시곤 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술에 만취해 들어 온 남편에 대해 조금 전까지 품었던 불만이 스르르 사라지고, 어김없이 아버지를 멋있고 훌륭한 사나이로 생각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식들이나 주변의 일가친척들이 돈 못 버는 아버지 흉을 보면, 아버지 편을 들어가며 그 양반은 언젠가 꼭 훌륭한 일을 하실 분이라고 변호까지 하시곤 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여행한 아버지. 

며느리가 시아버지로부터 천사라 찬양을 받고,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천사라 찬양을 받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한 남성이 한 여성을 천사라 생각하는 일도 아름답지만, 한 여성이 한 남성을 천사라 생각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만 찬양할 게 아니라, 우리 주위에 살아 숨 쉬는 수많은 사람들을 천사로 찬양하며 산다면, 이 사회는 좀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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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내와의 결혼 23주년 기념일입니다.

얼마 전, 어느 선배가 부부관계에 대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부부 사이는
20대는 열정으로 대하고,

30대는 애정으로 대하고,
40대는 믿음으로 대하고,
50대는 동반자로 대하고,
60대는 간호하는 마음으로 대하라.

이 단계를 다 거치며 살기까지 부부 사이는 왜 그리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는지요? 열정이 애정으로 자리잡기까지 겪는 수많은 갈등과 싸움에 얽힌 사연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또 애정이 믿음으로 이어지지 못하여 믿음의 관계, 동반자의 관계, 간호하는 관계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헤어지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도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습니다. 
 
저 역시 서로의 장점만을 사랑하던 열정의 시기에서, 단점까지도 껴안아야 되는 애정의 시기, 믿음과 동반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아내의 가슴을 수없이 아프게 했습니다. 

우리가 동반자의 관계에서 간호하는 단계에 가기까지 또 어떤 험난한 역정이 가로 놓여 있을까요? 
그러나 한 사람 곁에 또 한 사람이 오랜 인생의 길동무로서, 그리고 늙고 쇠약해졌을 때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사람으로서 오랫동안 있어 준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축복 아닐까요?  

칼릴 지브란의 시 한 편을 결혼기념 선물로 아내에게 바칩니다.



나 그대에게


나 그대에게
아름다운 이름이고 싶네

차가운 바람 속에 그대 서 있을 때라도
그대 마음 따뜻하게 채워드릴 수 있는
그대의 사람이 되고 싶네

우리 서로에게 어려운 사람이길
바라지 않는 까닭에

그대 말하지 않는 부분의 아픔까지도
따뜻이 안아 드릴 수 있으면 좋겠네.

그대 잠드는 마지막 순간이나
그대 눈을 뜨는 시간 맨 처음에
문득 그대가 부르는 이름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우리 서로의 가슴 안에
가장 편안하고 진실한 이름이 되어

변하지 않는 진실로
그대 곁에 머물고 싶네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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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네팔에서 온 노동자 미누의 이야기를 쓰다보니 문득 20여 년 전에 네팔 등 아시아-태평양 여러 국가의 예술가들과 함께 15일 동안 함께 보낸 연수회의 추억이 떠오르는군요. 
<나의 이야기>에는 제 삶의 한 토막 이야기들이 실리게 됩니다. 시간의 순서를 충실히 따르지 않고 그때 그때 기억나는 이야기들을 쓰기 때문에, 혹 혼란이 오시는 분들은 앞의 글들을 읽어보시면 참고가 되겠습니다. 


1990년 6월, ‘아시아-태평양 문화예술 지도자 연수 대회’가 열렸을 때 일입니다.

10개국에서 온 17명의 문화예술인들이 15일 간 합숙하면서 서로의 경험과 지식을 교환하는 연수회였습니다. 참가자 면면을 살펴볼까요?

네팔의 배우 겸 시인인 고빈드 싱 라와트,
필리핀의 배우 겸 연출가인 어니 로마,
필리핀의 문화기획자인 카멜라 밀라도,
호주의 원주민 문화교육학 교수인 폴라 웨어,
호주 원주민 문화운동가인 헬렌 코르베트,
홍콩의 민중 극단 대표인 목 치우유,
홍콩의 배우인 정치링,
태국의 배우 겸 무용수인 프라디트 투아 프라샤르통,
방글라데시의 배우 겸 극작가이고 연출가인 마무누르 라쉬드,
인도네시아의 시인이며 거리극 배우인 위지 투쿨,
인도네시아의 여성운동가인 마리아 팍파한,
대만의 언론인이며 연극인인 정차오,
재일교표 연극인인 고규미와 안성민과 강효유,
한국측 대표인 저와 놀이패 한두레의 이종현,
한국측 진행으로 시인인 양문규와 후배 몇 명.
.
저는 연수회의 책임을 맡게 되었지만, 정부의 지원도 없이 가난한 예술인끼리의 교류 차원에서 마련한 행사라 진행비가 턱도 없이 부족해서 경비를 마련하느라 동분서주 해야 했습니다. 몇 군데 후원이나 협찬을 알아 봤지만 아시아-태평양 예술인 교류 연수라고 하니까 바로 거절을 하더군요. 아마 미국이나 프랑스나 영국과 같은 나라 예술가들과의 연수라고 했으면 후원과 협찬이 쉬웠겠지요.  

비행기 경비는 참가자들이 알아서 마련해 왔지만, 문제는 15일 동안 먹고 자는 데 드는 돈이었습니다. 저는 골머리를 앓아가며 가장 싼 숙박 장소를 물색하다가 청주에 있는 '매포 수련원'으로 정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위한 수련원으로 쓰는 곳인데, 유난히 숙박료가 싸서 우리가 가진 예산으로 떼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가자들이 공항에 도착하자 저는 일행들을 데리고 수련원으로 츨발했습니다.


부푼 기대를 안고 한국에 도착한 연수 참가자들.

매포수련원은 금강이 흐르는 강가의 숲속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건물은 낡고, 편의 시설은 거의 없고, 방은 침대도 없는 딱딱한 나무 바닥이었습니다. 기도나 찬송 등 종교의 수련을 위해 온 사람들에게는 문제되지 않을 곳이겠지만, 문화예술인들의 연수회를 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하고 불편한 곳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부자 나라 한국에서 하는 국제 행사이니만큼 근사한 호텔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잔뜩 하고 온 참가자들은, 졸지에 마룻바닥에서 담요 한 장 깔고 자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을 알고는 골이 나서 말도 없이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여름인데도 산속이라 그런지 밤공기가 차가워서 등이 시릴 지경인데다가, 아침에 식당에서 나오는 군대식 짠밥에는 모두들 기가 질려 억지로 입에 쑤셔 넣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저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금세 고쳐진다고 하는 샤워장의 모터는 안 돌아가는데다가 재래식 화장실에서 풍겨 오는 냄새 때문에 여자들은 화장실에만 가려면 어찌나 얼굴을 찡그리던지 미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해 회의 시간에 우리 한국의 예술가들은 이런 불편한 환경에서도 참고 견디며 창조적으로 지내는 것을 훈련의 한 과정으로 삼는다고 엄포를 놨더니,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당장에 조를 나누어 청소반, 진행반, 간식 나르는 반 등등의 일을 분담하며 진행을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연수 준비를 하는 필리핀의 연출가와 필자.

그 뒤로는 샤워기도 작동되고, 화장실 냄새에도 익숙해지고, 날씨는 더 더워져 밤에 춥지도 않아 지내기가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그러나 무더위 속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되는 연수 일정과,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때문에 분위기는 다시 침체되어 갔습니다. 매운 것을 못 먹는 네팔이나 방글라데시에서 온 참가자는 우리 반찬에는 손도 안 대고, 밥에다 우유를 붓고 설탕을 타서 꾸역꾸역 먹어대니, 식당의 할머니들은 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보다 못해 한국쪽 스탭으로 진행을 도와주던 양문규 시인이 우리가 워크샵을 하는 동안 강에 가서 그물로 물고기를 잡아왔습니다. 외국에서 온 손님들이 입맛을 잃고 고생하는 게 딱하고 너무 미안하니까 물고기 튀김이라도 먹일려고 동네에서 그물을 빌려 하루종일 고기잡이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너무나 많은 물고기가 잡혀서 3명의 한국 스탭들이 새벽 두 시까지 물고기의 배를 따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충청도 산골 출신으로 인정이 많고 털털한 성격인 양 시인의 작전은 주효했습니다. 모두들 물고기 배 따는 수돗가에 한 번씩 와서 보고는 자신들을 위해서 밤늦도록 고생하는 모습에 감격해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식사 때 제일 까다롭게 굴던 방글라데시 친구는 “정말 우리나라에 온 것 같다. 우리나라도 시골에 가면 이렇게 정이 많고 인정이 있다.”라고 하며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습니다.

방글라데시 연출가와 인도네시아 배우와 함께.

물고기를 튀겨서 소주와 함께 먹은 다음 날부터 모든 일정은 참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전체 연수는 기본 기량의 소개와 훈련, 각 나라의 문화에 대한 소개와 토론, 문화예술 지도 방법론의 소개와 토론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작품 창작과 달리 문화에 대한 소개와 토론이 위주인 딱딱한 프로그램이었지만 연습장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모두들 무슨 음식이든지 감사히 먹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불평을 하지 않고 우리를 이해하려 들었습니다.

낮에는 숨이 막히고 몸이 늘어지도록 덥고, 밤에는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모기에 물려 온몸을 긁어대는 통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지만 참가들은 춤, 노래, 연극, 미술, 문학 등의 예술적 표현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재미있고 창조적인 프로그램을 진행해 나갔습니다.

네팔의 배우, 필리핀의 문화기획자와 함께.

궁여지책이긴 했지만 ‘물고기 작전’의 놀라운 효과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숲이나 강이나 아침이슬과 같은 자연 환경은 인간이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원초적 정서를 일깨워줍니다.


거기에다 그물을 메고 강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 오는 행위는 동화와도 같고, 영화와도 같고, 또 어릴 적 추억과도 같은 훈훈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물고기를 삶고 밀가루를 발라 기름에 튀겨 술 한 잔을 나눠 먹으면서 마치 원시 공동체 사회의 일원이 된 것 같은 착각과 기쁨을 느낀 것은 저만의 감상은 아니었을 겁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러한 공동체 의식의 공유는 모든 사람을 친밀하게 결속시키고, 언어나 풍습이나 인종의 벽마저 무너뜨리는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확인한 체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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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에는 제 삶의 한 토막 이야기들이 실리게 됩니다. 시간의 순서를 충실히 따르지 않고 그때 그때 기억나는 이야기들을 쓰기 때문에, 혹 혼란이 오시는 분들은 앞의 글들을 읽어보시면 참고가 되겠습니다. 오늘은 저의 연극 활동 중 「격정만리」 공연과 관련됐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1991년 9월 무렵, 극단아리랑에서는 김명곤 작, 조항용 연출의 「격정만리(激情萬里)」를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격정만리」는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 때까지의 격동하는 시대 속에서 살다가 간 연극배우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1920년대의 '왜색 신파'로부터 '한국적 신파극'을 모색하는 시기의 이야기, 1930년대의 '신극' 운동과 '카프' 연극운동, 그들과 신파극과의 갈등, 1940년대 '친일연극'의 실상과 만주에서 활약하던 조선의용군의 '항일연극', 해방 이후 좌·우익 연극의 대립, 1950년의 전쟁과 극좌·극우 '선전극'의 대립 등 식민 지배와 분단으로 인한 역사의 비극이 주인공 연극배우의 삶을 중심으로 그려집니다.

또 한국연극사의 중요한 작품들이 극중극으로 보여져서 연극사의 흐름과 변천을 한눈에 살펴볼 수가 있게 짜여져 있습니다. 

일본 대중소설인 「곤지끼야사(金色夜叉)」를 번안한 신파극 「장한몽(長恨夢)」, 땅을 잃고 고국을 떠나는 농민들의 수난을 그린 박승희의 「아리랑 고개」, 송영의 카프 연극 「호신술」,「홍도야 우지마라」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도 되고 악극화도 된 임선규의「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북한의 혁명가극「피바다」의 원전으로 알려진 「혈해지창(血海之唱)」, 좌익 선동극인 신고송의 「서울 갔던 아버지」, 그 외에 고골리의 「검찰관」, 유치진의 친일연극「대추나무」 등이 주인공들의 연습 장면이나 공연 장면으로 잠깐씩 소개됩니다.  




이 작품은 한국연극협회가 주최하는 <서울연극제>의 자유참가작으로 선정되어 모든 홍보와 공연 계획도 거기에 맞춰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고동업, 권태원 등 극단아리랑의 배우들과 함께, 기성 연극배우들도 여럿 참여한 야심적인 기획이었습니다. 지금은 텔런트로 방송에서 맹활약하는 중견의 연극배우 최종원과, 지금은 여성 영화감독으로 활약하는 미모의 신인여배우 방은진 등이 흔쾌하게 작품에 참가하여 열심히 연습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내용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가진 <서울연극제> 집행위원들이 극단아리랑의 연습장에 와서 연습을 참관한 후, 우리하고는 상의 한마디 없이 전격적으로 '서울연극제 참가 취소' 결정을 내렸습니다.

극단아리랑 앞으로 보낸 취소 공문에 따르면 이 작품이 “우리 신극사의 원류를 신파극으로부터 시작하여 1930년대의 좌익 연극운동인 카프로 이어져서 북한 김일성 체제하의 사회주의 연극을 거쳐, 오늘날 남한의 민중극 또는 민족극으로 계승되는 것으로 해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연극사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신파극, 신극, 좌익연극 어느 쪽에 어느 만큼의 비중을 두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예술관과 연극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제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그 동안 남한의 연극계는 <토월회>를 기점으로 한 신극운동의 흐름에 정통성을 부여해 왔고, 북한의 연극계는 김일성이 주도한 <항일혁명연극>에 그 정통성을 부여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양쪽 모두 분단적 역사관의 틀 속에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연극 행위는 지나치게 확대하거나 미화하고, 상대의 연극 행위는 지나치게 축소하거나 매도하는 잘못을 저질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연극사의 여러 자료들을 섭렵해 보니 신파극이나 좌익연극이나 신극 모두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작품을 썼기 때문에, 제가 한국연극의 흐름을 신파극에서 카프로, 그리고 김일성의 사회주의 연극으로 파악했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극중 인물 중 몇 사람이 친일적이고 친미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는 데 대해, “한국연극협회에 소속된 연극인들을 친일·친미의 반동적 연극 세력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한 취소 공문의 글은 지나친 자격지심의 발로라고 반박했습니다.

저는 극 중에 등장한 여러 인물들을 통해 굴절과 타협, 그리고 오욕의 역사 속에서 예술가들이 어떻게 대처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려고 했을 뿐, 그들을 통해 오늘날의 남한 연극인들을 매도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저는 한국연극협회에 공개 토론회를 제안했습니다. 공연을 직접 본 뒤, 저와 연극제 관계자들과 평론가들이 관객들 앞에서 토론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와, 집행위원회의 권리 남용에 대한 우려를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제기했습니다. 

몇몇 집행위원과 심사위원, 그리고 연습에 참관했던 위원 몇몇 분은 솔직하고도 양심적인 발언으로 집행부의 처사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또한 주변의 예술가나 예술단체들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집행부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참가취소 요구 서명 운동에 3백 명에 가까운 연극계 선후배들이 서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1차 공연과 2차 공연 내내 극장 안을 뜨겁게 달구었던 관객들의 유례없는 성원 등으로 많은 격려와 성원이 있었습니다. 그 해의 연극계를 뒤흔들었던 '격정만리 사건'은 연말이 되면서 잠잠해졌습니다. 

"연극하는 사람이 연극배우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면 무척 재미있을 것이다."

처음 이 작품의 구상을 시작했을 때, 저는 그렇게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소재를 깊이 파들어 가면 갈수록 재미있을 수 만은 없는 여러 문제들이 저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의 분단 시대는 예술가들에게 괴로운 선택을 강요한 시기였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쓰면서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보다, 그러한 선택이 몰고 온 비극에 촛점을 맞췄습니다. 제가 연극을 하면서 괴로워했던 문제들의 근원이 거기에 있었고, 그 문제들을 붙들어 안고 고민했던 동료, 선배, 후배들의 비극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비극은 21세기를 훌쩍 넘기고 있는 지금까지 끝나지 않고 있군요.

김윤수(전 국립현대미술관장), 김정헌(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황지우(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진중권(문화비평가), 신해철(가수), 윤도현(가수), 정관용(시사평론가), 신경민(방송인), 김제동(방송인), 손석희(방송인).....

요즘의 문화예술계에 불어닥치고 있는 '진보적 문화예술인 축출'의 회오리바람을 보면, 해방 후의 좌·우익 예술가 사이에 벌어졌던 갈등과 별로 다르지 않음을 느낍니다. 비록 그 표현 방식은 합법성과 합리성을 표방하고 있지만, 내면의 대립과 증오심은 더욱 은밀해지고 깊어진 듯 합니다.   


격정만리사건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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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구름샘 마을에 자그마한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와 흙으로 지은 스무 평짜리 토막에 책이며 잡동사니들을 잔뜩 쟁여 놓고, 가끔씩 내려와 글도 쓰고 책도 읽다 갑니다. 

경상남도 함양에서 볼일을 마친 아내와 저는 무주로 차를 몰았습니다. 두어달 동안 못내려 간지라 청소도 하고 풀도 벨겸 들르기로 한 겁니다.

동네 입구에 들어서니 탐스럽게 자란 코스모스가 우리를 반겨주더군요. 



나무들 사이에 고즈녘하게 자리잡은 소박한 우리집도 반가웠습니다. 


제가 짐을 내려 놓고 있을 때, 집 주변을 들러보던 아내가 이상한 비명을 질렀습니다.

"으아아아아아악!"

급히 아내 곁으로 가니 아내가 지붕 위를 쳐다보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엄청나게 커다란 말벌집이 마치 혹덩어리처럼 지붕 아래 달려 있었습니다. 



저도 처음 보는 거대한 말벌집을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말벌집 주변에는 말벌들이 윙윙거리며 분주하게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몇 달 전에는 딱따구리가 기둥을 쪼아 둥지를 만들더니, 이번에는 말벌집이라니.....

무주집에 관한 첫번째 글 <딱따구리와 동거하는 법 아는 분 없나요? http://dreamnet21.tistory.com/admin/entry/edit/3>에서 기둥에 둥지를 파는 딱따구리 이야기를 소개한 한 달 쯤 뒤에, 두번째 글 <저 딱따구리가 전생의 내 애인일까요http://dreamnet21.tistory.com/admin/entry/edit/42 > 에서 둥지 속 딱따구리 새끼들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글 중 딱따구리 사진이 나오는 부분을 다시 소개할께요.

구멍 속을 들여다보니 어느새 실팍하게 자란 딱따구리 새끼 너댓 마리가 입을 쫙 벌리며 먹이를 찾고 있었습니다. 
 

(중략)
밖에 의자를 놓고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가 간신히 기둥에 앉은 어미 딱따구리의 사진을 몇 장 찍기는 했지만, 형편 없는 실력의 핸드폰 사진이다보니 상태가 썩 좋지 않은 게 안타까웠습니다. 




위 사진과 글의 주인공인 딱따구리는 구멍 속에서 아기새들을 훌륭하게 키운 뒤, 아기새들과 함께 일가족 모두 둥지를 떠났습니다.

그런지 두 달도 채 안됐는데 이번에는 말벌들이 몰려 들어 거대한 말벌집을 만든 것입니다. 

새가 둥지를 트는 것은 상서로운 징조라는 새박사 윤무부님의 조언이 있었는데, 말벌이 둥지를 트는 것은 무슨 징조일까요? 

동네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가끔씩 말벌이 처마나 지붕에 집을 짓는 일이 있답니다. 벌집을 없애려면 망사를 뒤집어 쓰고 지붕 위로 올라가 홈키퍼 2통 정도를 뿌려야 하는데, 그러다 말벌에 쏘이면 큰일 난답니다. 잘못하면 죽기도 한다니 저로서는 엄두도 나지 않는 일입니다. 119 구조대를 부르면 벌집을 떼어준다는데, 이 고요한 산속에 구급차와 사람들이 들이닥쳐 소란을 피울 걸 생각하니 그도 엄두가 안납니다. 

한동안 여기저기 알아 본 아저씨가 겨울이 되면 말벌이 죽으니, 그때 올라가서 떼어내면 아주 좋은 약재로 쓸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말벌집이 어떤 약성분이 있는지 검색을 해봤습니다.


이미지 출처 : http://blog.naver.com/umlee250?Redirect=Log&logNo=70036449939

'약초블로그'를 운영하시는 산지(ais0207)님의 <노봉방의 효능과 복용법http://blog.naver.com/ajs0207.do?Redirect=Log&logNo=50025930391 >이란 글에 말벌집의 약효와 복용에 관한 상세한 소개가 실려 있더군요. 그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북한에서 펴낸 <동의학 사전>에서 말벌집(노봉방) 효능.

늦가을부터 초겨울 사이에 벌둥지를 채취하여 증기에 찌거나 햇볕에 말린 다음 죽은 벌과 번데기를 털어버리고 완전히 말린다. 

맛은 맵고 쓰고 짜며 성질은 평하다 간경, 위경에 작용한다.  풍을 없애고 해독하며 살충한다. 

항암작용, 혈액응고촉진작용, 강심작용, 이뇨작용, 강압작용(일시적이다.) 등이 실험적으로 밝혀졌다.  전간, 경간, 풍습으로 아픈 데, 치통, 부스럼, 유선염, 악창, 연주창, 비증, 이질 등에 쓴다.  유방암, 식도암, 위암, 비암, 인두암, 피부암, 간암, 폐암 등에도 쓴다.  민간에서는 신염에도 쓴다. 

<동의보감>에서 말벌집(노봉방)효능
말벌집을 살짝 볶아서 가루내어 먹거나 술에 타서 먹으면 정력이 강해진다고 기록.
말벌집 말린 것을 동전 6개 크기 정도 쪼개내어, 깨끗한 질그릇 냄비로 흰 재가 될때까지 볶는다.  음경이 크게 되기를 바라면 둘레에 바르고, 강해지기 바란다면 술에 타서 마시면 된다고 한다. 말벌집은 양기부족이나 조루증이나 정력이 쇠약해진 것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매우 크다.  또한 볶아서 가루내어 조금씩 먹으면 변강쇠처럼 정력이 좋아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체질이 바뀌어 겨울에 홑옷을 입고도 추위를 타지 않는다.

민간요법에서 말벌집(노봉방)효능

말벌집은 귀하게 쓰이는 한국 전통의 민간요법 약재료이다. 벌집은 무균상태이며 옛부터 숨은 보물이라하여 산삼보다 더 좋은 귀한 영양식품으로서 효능으로는 중풍, 기관지천식, 기관지염, 당뇨병, 간기능 개선, 유방암(염), 각종 신장염, 뱃속 염증, 종창, 통증, 기관지염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전해 내려 오고 있다. 

 
의학적으로 증명된 건 아니겠지만, <동의학 사전>이나 <동의보감>에 언급된 걸 보면 약재로 쓰이긴 한 모양입니다. 게다가 민간요법에서는 '숨은 보물'로 귀하게 여겼다는 말법집이 통째로 굴러 온 걸 보면 분명 흉조는 아니겠지요?


어쨌든 이 가을은 말벌들과 '동거하며' 함께 지내고, 겨울이 되면 헤어질 대책을 세워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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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딸 아리는 지금 교환학생으로 카네기 멜론 대학에서 예술경영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10월호 <여성중앙>의 청탁을 받아 딸에게 보내는 아빠의 편지를 썼는데, 그 글이 잡지에 실렸군요. 그리움을 담아 글과 함께 사진 몇장을 멀리 있는 딸에게 띄웁니다.

사랑하는 나의 딸 아리에게!

네가 떠날 때는 한 여름이었는데, 어느덧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가을이 되었구나. 네가 공부하고 있는 피츠버그는 날씨가 여기보다 춥다고 하니 걱정이 되는구나.

미국도 신종 플루 환자가 많이 발생했다는 소식에, 엄마 아빠 모두 걱정이 태산이란다. 외국 나가면 한 번씩 몸살을 겪는다니 각별히 건강에 신경을 쓰기 바란다. 

공항에서 아빠 엄마와 헤어지며 네 눈에 고였던 눈물이 아빠 가슴을 아직도 적시고 있는데, 얼마 전에 받은 너의 메일이 또 한 번 아빠 가슴을 적시는구나.

미국으로 떠나기 전, 공항에서.

사랑하는 아빠께!

아빠,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요.
지금껏 우리 가족이 한번도 떨어져서 지낸 적이 없어서 우리 가족 없는 삶은 정말 상상도 안가요.
항상 내 뒤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시는 우리 아빠!
이번에도 알게 모르게 많이 도와주신 거 넘 감사해요.
교환학생을 준비하면서도 많이 배우고 성장한 거 같아서, 또 앞으로 가서도 많이 배우고 성장할 거라서, 아빠 딸로서 자랑스러운 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너무 좋아요.
넓은 세계에서 많이 배우고 느끼고 돌아 올께요.
잘 할 수 있으니깐 너무 걱정 말아요.


아빠도 아리가 너무 보고 싶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적응하고, 학교도 맘에 들고, 재미도 느낀다니 기쁘구나. 아직은 언어도 불편하고, 음식도 불편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거야. 무대감독, 극장경영 같은 수업들도 영어로 하니 힘들겠지?


여기서 영어공부를 한다고는 했겠지만 그 사람들의 일상어는 속도가 빨라 집중하지 않으면 뭐라고 하는지 안 들리니 많이 피곤할 거야. 또 그곳의 수업은 주로 발표와 토론으로 이루어진다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수업이 별로 없었으니까 어려움이 많을 거야. 빨리 영어가 익숙해져서 발표도 하고,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도 교수나 학생들에게 알릴 수 있는 실력을 갖추면 좋겠구나.

네가 전화로 알린 소식 중에 예술학교만 다니다가 예술, 경영, 공대, 인문학과가 섞인 학교를 다니니까 좀 더 보는 눈이 넓어지고, 과마다 아이들 특성도 다르고, 외국인도 많고 나라마다 생각하는 것과 문화가 너무너무 다르니까 그런 것도 재미있고, 한국에만 있었으면 모르고 살았을만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좋다는 얘기에 아빠는 아리가 멋지게 생활하고 올 거라는 믿음이 생겼단다.

너에게 편지를 쓰다보니 너 어릴 적 일이 불현듯 떠오르는구나. 

아빠가 연출한 <유랑의 노래>라는 작품에 동생과 함께 남사당 삐리로 출연했을 때. 

네가 중학교 2학년 초였을 때 일이야. 아마 넌 기억하지 못할 거야. 어느 날 일찍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심각한 얼굴로 너와 면담 좀 하라고 하지 않겠니?

방학 동안에는 명랑하게 지내고 엄마하고도 사이좋게 보냈는데 개학한 첫날부터 엄마한테 짜증을 부리고 학교 갔다 온 뒤에도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컴퓨터 채팅만 한다는 거야. 네 방에 들어 가 엄마가 서운하게 하거나 잘못한 일이 있느냐고 물으니 없다고 하더구나. 그럼 공부 스트레스를 엄마에게 푸느냐고 따지니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네가 불쑥 던진 말은 나를 놀라게 했단다.

“학교 다니는 게 지겨워요.”

너의 고민을 들어보니 우리가 살고 있던 분당은 고등학교 숫자가 중학교 숫자보다 적기 때문에 일반 고등학교에 들어가려면 성적이 우수해야 하는데 뒤쳐진 성적을 따라 잡으려니 자신이 없다는 거야. 또 친구 중에 가수 한다고 학교 안 나오는 아이나 에니메이션 배우러 일본 유학 간다고 학교 안 나오는 아이가 부럽지만, 자신은 그럴 수도 없고, 간신히 일반 고등학교를 간다고 해도 일류대학을 못 들어가면 낙오자 취급받을 테니 학교 다니는 게 괴롭다는 것이었다.

너의 말을 듣는 동안 아빠는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의 능력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좌절감으로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절망에 빠져 괴로워한 아빠의 사춘기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야.

아빠가 겪었던 과정을 우리 딸은 좀 더 일찍 겪고 있었던 거지. 눈물을 흘리며 힘겹게 말을 이어 가는 너의 눈물을 닦아주며 고등학교를 가도 좋고 안 가도 좋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인생은 소중한 것이고, 아빠에게는 네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귀한 딸임을 여러 번 강조했지.

그리고 아빠가 보기에 너는 얼마든지 훌륭한 여성이 될 수 있으니 자신의 능력을 미리 포기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데까지 함께 노력해보고 다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고 격려했지.

그 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그런 고민은 사라지지 않았지. 네가 동경하는 삶은 노래든, 춤이든, 연기든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서 그 계통에서 성공한 젊은이가 되는 것이었지.

적성에 맞지 않는 수학이니, 과학이니, 사회니 하는 수업을 들으려 하루하루 등-하교를 반복하는 생활에 대해 힘들어 했지. 그렇다고 적당히 학교 다니다 시집을 가거나 평범하고 소박한 일자리를 얻어서 살아가겠다는 것도 아니었지. 너도 청소년은 꿈과 정열이 있어야 된다는 아빠 말에 중독된 탓인지 “평범하게 살기는 싫어!”하고 단호하게 외치곤 했지.

그랬던 네가 너의 적성에 맞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예술경영을 전공하게 되었고,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카네기 멜론에서 연극과 예술경영을 공부하게 되었구나.

그 어려운 시절을 크게 탈선하지 않고,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네 꿈을 위해 버텨 온 네가 자랑스럽다. 아빠는 정말 우리 아리가 자랑스럽단다. 한국의 어느 대학생이 스스로의 힘으로 교환학생이 되어 그 학교를 다닐 수 있겠니?

열릴 것 같지 않았던 카네기 멜론의 문을 두드려 열어젖힌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힘들 때마다 너를 응원하고 있는 아빠, 엄마, 동생을 떠올려보렴.

마지막으로 아빠가 아리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단다.

바로 '나비'라는 단어란다. 나비는 알에서, 애벌레, 번데기, 나방으로 변신을 거듭하지? 나비가 아름다운 날개옷을 입고 저 하늘을 자유롭게 날기까지 나비에게는 고통스런 ‘껍질 벗기’가 계속되지. 그냥 벗는 게 아니라 ‘완전히 벗기’, 즉 그냥 변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변화하기’인 거야.

껍질을 벗지 못하는 나비는 죽지. 그리고 그 껍질 벗기는 바로 ‘나’로부터 ‘비’롯 되는 변화인 거란다. 우리 인생은 화려한 날개짓과 고통스런 껍질벗기의 연속이란다.

나비 모양의 머리띠를 매고 생각에 잠긴 아리.

아리는 지금 껍질벗기의 고통과 기쁨을 동시에 맛보며 지내고 있으니, 머지않아 아름다운 날개옷을 입고 저 하늘을 훨훨 날 수 있을 거야. 

아빠도 여전히 그 꿈을 꾸며 살고 있단다. 엄마도 언제나 너를 걱정하며 동생을 보살피며 바쁘게 지내고 있단다. 사랑한다. 파이팅!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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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가 다가 오니 가을 하늘은 더욱 높고, 햇살은 더욱 따사로워 지는군요.
 
이천오백 만이 넘는 대인구가 새옷을 차려 입고, 선물보따리를 들고, 열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거나 자동차를 타고서 삼삼오오 찾아가는 곳은 어디인가요?

부모가 있고, 선산이 있고, 일가친척이 있고,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는 '고향'입니다.

고달프고 각박한 도시 생활에 지친 우리는 포근하고 아늑한 고향에서 휴식과 기쁨과 활력의 재충전을 하려고 귀향길을 재촉합니다.



저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고, 산소는 경기도 고양의 용미리 공원묘지에 있기 때문에 서울의 저희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추석을 쇱니다. 

그래서 추석이나 설날의 귀향전쟁을 경험하지 못하고, 오히려 한산해진 서울의 도로를 오고가며 성묘를 하고 명절을 치릅니다.

그래도 이맘 때가 되면 제 고향 전주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 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군요.

출처 : 이주봉여사의 '천연덕 생활' 블로그 중 전주 시내 진입로에 서 있는 서예 편액.

저는 전라북도 전주의 중앙동에서 태어나 고사동, 태평동, 진북동, 남노송동 등을 전전하며 살았으니 오갈 데 없는 전주 토박이인 셈입니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저의 초등학교 시절은 행복했던 추억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출처 : 미리르님이 찍은 전주시 전경.
 
시멘트 푸대로 야구 클럽을 만들고 동네 공터에서 고무공과 나무 막대기로 놀던 야구놀이, 
동네 앞 기찻길에 대못을 올려 놓았다가 기차가 지나간 뒤 납작해진 대못으로 뽀족칼 만들기,
보리 이삭 불에 까슬어 먹기,
벼이삭 출렁이는 논에서 메뚜기 잡아 구워먹기, 
맑은 물이 흐르던 전주천에서 피리잡기와 미역감기,
각시바위 아래 빨래터에서 놀기,
겨울이면 나무판에 철사를 끼운 스케이트로 얼음지치기,
그리고 무엇보다 낚시광이신 아버지와의 낚시질 가기.....

이 모든 추억들은 다시는 찾지 못할 미로 속의 보석처럼 제 가슴 속에 소중하게 남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찾아 본 진북동 동네의 골목길. 너무 많이 변해서 추억의 장소를 찾기 어려  웠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친구들과 전주 근교를 무던히도 싸돌아 다녔습니다. 또 새벽이면 좋아하는 노래 연습을 하려고 다가공원까지 구보로 뛰어가서 혼자 목청껏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좋아하는 여학생이 생기면 그녀의 집 뒷산에 올라가 <불 꺼진 창>, <남 몰래 흐르는 눈물> 같은 노래를 열심히 불러대곤 했습니다. 

전주의 <한벽루>에서 바라 본 전주천 풍경.


그 뒤로 연극, 영화, 판소리의 세계에서 활동해 오면서 이 직업을 택하게 된 것은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고향의 예술적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비록 어렸을 때는 가난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마음 때문에 일부러 고향을 멀리 한 적도 있지만, 고향에는 멀리 할수록 더 그리워지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그 신비한 힘이야말로 제가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마무리 하는 데 큰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깊어가는 가을 밤, 서울살이의 한가위를 보내며 그리운 고향생각에 잠시 잠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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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에는 제 삶의 한 토막 이야기들이 실리게 됩니다. 시간의 순서를 충실히 따르지 않고 그때 그때 기억나는 이야기들을 쓰기 때문에, 혹 혼란이 오시는 분들은 앞의 글들을 읽어보시면 참고가 되겠습니다. 오늘은 이어지는 연극 활동 중 표현의 자유와 관련됐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아시아의 외침」공연을 끝내고 돌아 온 1989년의 가을 무렵, 저는 문화운동패들이 각계의 후원으로 설립한 150석 규모의 소극장인 <예술극장 한마당>의 극장장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극장장이 된 얼마 뒤에 「파업전야」 상영 건으로 엄청난 파문이 일었습니다.

1990년 4월 무렵이었습니다. 그 당시 독립영화 제작소인 <장산곶매>가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그린 「파업전야」를 상영하기 위해 예술극장 한마당에 대관을 해 놓았는데, 상영을 며칠 앞두고 종로구청에서 상영을 하지 말라는 경고장이 날아왔습니다.



저는 이미 대관 계약서 작성이 끝났기 때문에 이유없이 계약해지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상영을 강행했습니다. 그랬더니, 상영 둘째날 오전에 전투 경찰이 들이닥쳐 영사기와 필름과 모든 자료를 압수해 갔습니다.

그런데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적인 파문을 몰고 왔습니다. 그 며칠 뒤, 제가 대표로 되어있는 <극단 아리랑>의 등록 취소가 강행된 것입니다.

취소 사유는 등록된 주소와 현재 주소가 다른 데 그걸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사 신고 안했다고 극단 등록을 취소한 사례는 전무후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분명히 「파업전야」와 관련된 의도적 탄압이라는 점을 들어 행정 무효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런 뒤에 또다시 한마당 극장과 동숭동 5개 극장의 건물주에게 건축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과태료가 부과되었습니다. 그 처분 역시 공연법과 상치되는 건축법으로 무고한 건물주에게 과태료를 부과한 일과, 다른 지역은 그대로 두고 유독 예술극장 한마당이 속해 있는 동숭동 지역의 소극장에만 행정처분을 내린 점등을 들어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더니 슬그머니 시행을 보류하더군요. 

그러더니 얼마 뒤에 영화를 제작한 장산곶매의 대표와 저를 함께 영화법 위반으로 고소했습니다. 법정에 가니 검사측에서 영화제작사 등록을 안하고 영화를 제작한 장산곶매와 상영한 극장의 대표가 공모(?)하여 영화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더군요. 

이에 반대해서 변호사는 상업영화가 아닌 16밀리 영화에는 제작사 등록 규정이 없는 점과, 한마당 극장은 단지 장소만을 게약에 의해 빌려 준 사실, 그리고 관례적으로 많은 소극장에서 소형영화나 실험영화를 상영해 온 점 등을 들어 검사의 기소가 부당함을 공박했습니다.  

극단 등록 취소 사건, 과태료 부과, 영화법 위반 등등 줄줄이 이어진 공세는 해를 넘겨 1991년까지 이어지면서 여러 방면의 문화예술계에 다각도의 탄압이 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까마득히 잊혀졌지만 그때의 기록을 참고로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지요. 진보적 미술인들의 주도로 <반아파르헤이트(인종차별)전>이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는데, 그 전시회 유치의 책임을 물어 예술의 전당 미술관장이 사임했습니다.

노래운동의 차원에서 만들어진 노래테이프 제작이 불법이라는 이유로 서노문협의 대표가 구속되었습니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 「오! 꿈의 나라」를 비롯한 독립영화들의 영화소극장 상영을 저지하기 위해 문화부가 영화소극장들을 '풍속영업규제법'으로 묶는 시행령을 통과시키려는 시도를 했고, 그 반대 운동과 관련해 영화계에 논란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저는 극단의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대표를 이성재씨로 모시고, <극단 아리랑>이라는 이름을 순서만 바꿔서 <아리랑 극단>으로 등록 신청을 했습니다. 법적 하자가 없는 신청 서류를 냈더니, 울며겨자 먹기로 등록허가가 나오더군요. 

그 「파업전야」 사건은 기나 긴 법정 투쟁 끝에 대법원에서 영화법의 규제 조항이 위헌이라는 판결이 남으로서, 예술계에서 표현의 자유 물꼬를 튼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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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에는 제 삶의 한 토막 이야기들이 실리게 됩니다. 시간의 순서를 충실히 따르지 않고 그때 그때 기억나는 이야기들을 쓰기 때문에, 혹 혼란이 오시는 분들은 앞의 글들을 읽어보시면 참고가 되겠습니다. 오늘은 처음으로 비행기 타고 외국 순회공연을 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아리랑 극단에서 열심히 연극을 하면서 간간이 영화 활동도 하던 1989년 5월의 일입니다.

저는 난생 처음으로 필리핀이란 나라를 가게 되었습니다. 「아시아의 외침(Cry of Asia)」이란 작품의 세계 순회공연을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한국, 필리핀, 일본,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파키스탄, 뉴질랜드, 인도 등 아시아・태평양 11개 나라의 음악인과 무용수와 배우 15명이 모여서 6개월간 프랑스,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네델란드, 홍콩, 한국, 필리핀을 순회하는 거창한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공연을 총괄적으로 준비한 필리핀의 <아시아 민중운동연합(Asian Council for People's Culture)>이 한국의 <민족예술인총연합>과 처음으로 교류하는 이 기획에 저는 재미교포 극단인 <비나리>의 단원 정승진과 함께 한국측 대표로 참가했습니다.

무덥고 후덥지근한 필리핀의 국립극장 연습실에서 만난 예술가들은 저를 무척 긴장시켰습니다. 모두들 자기 나라를 대표해서 왔다는 의식 때문인지 치열한 경쟁의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연습은 아침 아홉시부터 밤 열시까지 거의 잠시의 휴식도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었는데, 너무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우선 서로의 공통점을 찾기 위한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오전 시간은 몸풀기와 발성과 각 나라의 춤과 동작과 음악 및 악기 등에 대한 소개와 강습을 위주로 진행되었고, 점심을 먹고 30분쯤 쉰 다음 장면 구성에 대한 토론과 즉흥극 시연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필리핀에서의 연습 장면.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상대방 나라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상식 역시 거의 없었습니다. 게다가 저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영어가 서툴러 의사소통에 장애가 많아서 정신적으로 더 많이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혹독한 연습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차츰 서로의 공통점에 대해 눈을 떠가기 시작했습니다. 한 예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거의 모든 나라는 그들의 고유한 언어, 춤과 노래의 전통예술이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외세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그에 대한 저항, 독재, 빈부 격차, 전통의 파괴, 세대 간의 단절, 서구문화의 숭배, 언어의 혼란, 봉건 잔재, 여성의 억압 등등 대부분의 문제는 거의 모든 나라의 공통된 사회적 과제였습니다.

작품의 내용은 동남아시아의 신화를 소재로 하여 제국주의의 침략과 그에 대항하여 싸우는 아시아 민중들의 삶과 투쟁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전반적인 기초구성을 하여 한 달 동안 연습을 거친 우리는 필리핀의 연극인들을 대상으로 시연회를 가진 뒤, 유럽 순회의 첫 기착지인 프랑스로 출발했습니다. 

프랑스 남부의 아름다운 산간 마을인 오테루스의 마을회관에서 한 달간의 연습을 다시 계속했습니다. 또다시 아침 여덟시에 기상한 후 오후 열 시까지 연습과 토론, 각 나라들의 개별 공연 연습 등 거의 하루도 휴식이 없이 강행되는 훈련이 계속되었습니다. 

오테루스 마을 공터에서 마을 주민들을 관객 삼아 가진 시연회.

긴장 속에서 고된 연습을 마무리 짓고, <아비뇽 연극제>에 참가하기 위해 아비뇽으로 출발했습니다.

아비뇽은 프랑스 남부의 인구 10만쯤 되는 조그마한 도시입니다. 이곳은 연극제가 시작되기 전에는 로마 교황이 권력 싸움으로 쫒겨나 머물렀던 ‘아비뇽 유수’로 알려져 있던 유적지였습니다.

그러던 이 도시가 1947년에 장 빌라르라는 연극인에 의해 처음으로 연극제가 개최된 뒤, 프랑스의 모든 극단뿐 아니라 전 세계의 극단들이 참가를 열망하는 연극의 도시로 변모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공연은 성 마르시알 성당 소극장, 리스 미스트랄 학교 야외무대, 축제 본부 사무실이 있는 메종 드 업 극장 등에서 다섯 차례 계속되었습니다.

그 해에는약 3백 개쯤의 공연단이 아비뇽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아비뇽에는 상설극장이 열 개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많은 단체들의 공연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아비뇽 곳곳을 극장화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성당, 학교, 주차장, 지하실 등의 공연이 가능한 장소에 조명기구와 간이의자를 설치해서 마련된 1백여 개의 공연장에서는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에 네다섯 편의 연극이 공연되었습니다.

그나마 극장을 잡을 수 있는 단체는 선택된 편입니다. 수많은 무명의 젊은 연극인들은 극장도 없이 거리나 카페 같은 데서 공연을 하고, 기차역이나 캠핑장 같은 데서 잠을 자야 했습니다.

이 조그마한 도시의 중심가는 축제 기간 동안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과 연극인, 화가, 음악가 등 예술가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광장에서는 짙은 분장을 하고 악기를 든 젊은이들이 연주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념품과 갖가지 물건을 파는 장사치들이 손님을 끌기 위해 가지가지 기발한 몸짓과 의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아비뇽에서의 공연 장면.

우리 공연의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관객들은 매 공연마다 환호와 기립박수로 응답했습니다. 한번은 공연을 마치고 관객들과 토론을 하고 있을 때, 한쪽에 서서 열심히 제3세계의 정치 상황과 문화운동에 대해 질문을 하고 자기 의견을 얘기하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습니다.

토론이 끝나고 출연자들과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누는데, 그 사람이 당시의 프랑스 문화부 장관인 자크 랑이라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허름한 잠바를 입고 연극을 본 뒤 관객들 틈에 끼어 진지하게 토론을 하는 장관의 모습에서 문화국가인 프랑스의 면모를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비뇽 공연을 마친 뒤, 정승진과 저는 파리에서 「통일굿 아리랑」과 「금수궁가」 특별공연을 했습니다. 당시 파리에서 철학 공부를 하고 있던 후배 부부 L과 C가 기획을 한 공연이었습니다.

프랑스를 떠난 우리는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레스터, 글라스고 등지를 돌며 한 달간 공연했습니다.

공연과 함께 우리는 연극·무용·음악 등의 강습회와 각 참가국의 개별 공연, 그리고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동하느라 잠시도 쉴 새 없는 일정을 보냈습니다.

영국에서도 저는 시험 삼아 판소리 공연을 해보았는데, 뜻밖에도 반응이 적극적이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에게는 판소리가 가진 양식적 특성과 표현 방법이 대단히 새롭게 보였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한 반응은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함부르크, 빌레펠트, 하노퍼, 빈, 베를린 등 독일의 여러 도시를 유랑하며 본 공연인 「아시아의 외침」과 개별 공연과 강습회 등으로 쉴 새 없이 보냈는데, 특히 한국의 개별 공연인 「통일굿 아리랑」과 「금수궁가」에 대한 교포 학생들과 교민들의 열광은 그들이 이러한 문화의 향수를 얼마나 절실하게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알게 해주었습니다.

<아시아의 외침>의 한 장면.

다음 공연지는 오스트리아였습니다. 

잘츠부르크, 티롤, 인스부르그, 비엔나와 같은 도시는 산과 강과 집과 거리의 풍경이 고풍스러우면서도 그림같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숙소와 공연장을 오락가락하며 긴장 속에서 보내던 우리는 그런 경치를 즐길 여유를 갖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은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그런 경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스르르 잠이 들어버리곤 했습니다.

게다가 영국에서 단원 한 사람에게 찾아든 전염병 수두(水痘)가 독일에서 다른 단원에게 옮아가더니 오스트리아에서 또 다른 단원에게 연이어 전염되는 바람에 모두들 돌림병 때문에 신경과민이 되어있었고, 그밖에도 과로로 인한 갖가지 질병과 향수병과 신경쇠약 등에 시달려 모두들 지치고 생기를 잃어갔습니다.

유럽 순회의 마지막 공연지는 네덜란드였습니다.

그곳에서는 음식이 전혀 입에 맞지 않고 식사시간도 일정하지 않아 설사와 원치 않는 다이어트를 하며 이를 악물고 예정된 공연 일정을 치러야 했습니다. 저 역시 어느 날 공연을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하혈을 하는 통에, 공연이 끝난 뒤 하얀 의상 바지에 빨간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히 유럽 일정을 마치고, 아시아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홍콩 비행장에 첫발을 내딛으며 모든 단원들이 내뱉은 첫마디는 “야! 아시아다!”였습니다.

처음에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야! 유럽이다!”하고 외쳤던 아시아의 예술가들은 6개월만의 유럽 여행 끝에 자신들이 유럽에 대해 지녔던 환상이 얼마나 철부지와 같은 것이었는지, 유럽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아시아인이란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깨닫고 비로소 아시아에 대한 참다운 애정과 자각 속에서 환성을 올린 것입니다.

그 애정과 자각은 한국 공연에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서울에서의 공연과 문화패와의 만남, 풍성한 술판, 노래, 어깨동무, 광주의 망월동 묘지 참배, 또한 광주 공연 때 관객들의 노래, 박수, 환성, 걸판진 풍물 뒷풀이, 그리고 함박눈 내리는 밤의 상경 등은 모두에게 감동적이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일정을 끝내고 김포공항을 떠날 때, 그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한국 일정이 짧은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이들은 한국의 공연이 가장 성공적이었으며, 한국 문화를 직접 보고 듣고 겪은 것이 이번 전체 여행 중에서 가장 큰 수확이었음을 이구동성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아시아의 외침>의 한 장면. 

마지막 공연지는 필리핀의 마닐라였습니다.

우리는 반정부 투쟁으로 총격전이 벌어지는 마닐라 시가지 한 야외무대에서 무사히 공연을 마쳤습니다. 12월 10일의 공연을 끝으로 장장 7개월을 함께 살아온 아시아·태평양의 예술가들은 뿔뿔이 각자의 고국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싸우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의심하고, 때로는 화해하고 의지하고 사랑하며 미운정 고운정이 다 들었던 터라 공항은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이 길고 험난한 여정을 통해서 저는 문화예술의 국제 교류가 무엇인지, 그 과정은 얼마나 힘들고, 그 성취는 얼마나 큰 보람이 있는지 철저하고 혹독한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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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에는 제 삶의 한 토막 이야기들이 실리게 됩니다. 시간의 순서를 충실히 따르지 않고 그때 그때 기억나는 이야기들을 쓰기 때문에, 혹 혼란이 오시는 분들은 앞의 글들을 읽어보시면 참고가 되겠습니다. 오늘은 극단 아리랑의 창단과 연극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박초월 선생님 모두 돌아가시고 그야말로 천애고아 신세가 된 저는 남동생하고 둘이서 고대 앞 용두동의 길가 허름한 건물 2층에 방을 얻어 자취를 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1985년 겨울 무렵에 새로운 음모(?)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사대 연극반에서 술 마시고, 뒹굴고, 싸우고, 함께 부둥켜안고 울던 친구들과 그동안 연극을 함께 했던 친구들 몇몇이 모여 극단 창단을 모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창단 작품으로 제가 구상하고 있던 「아리랑」이라는 2인극을 하기로 하고, 극단 이름도 아예『극단 아리랑』으로 결정했습니다.

창단 자금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백만 원쯤을 빌려 그걸로 청계천 다니면서 철물 사가지고 무대 장치를 조립하고, 여기저기서 옷 빌려 의상으로 대신하고, 인쇄비며 대관료는 외상으로 때우며 연습을 진행했습니다.

제 자취방에 모여 몇 달 동안 연습 한 끝에 김명곤 작, 조항용 연출, 박제홍, 김명곤 출연, 음악 이성재의 연극「아리랑」이 막을 올렸습니다. 

민중화가 김봉준이 무료로 배경막을 그려주고, 지금은 중견배우로 연극과 영화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박용수가 무대감독을 맡고, 동생 김상곤이 진행을 하고, 지금은 영화계의 중견 프로듀서로 활약하고 있는 이관학이 조명을 하고, 지금 영화계의 맏형격 제작자인 유인택이 홍보를 하고, 나중에 저의 아내가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배화여고 출신의 대학생 제자였던 정선옥이 의상을 하고, 안타깝게 타계하신 굿 사진의 전문가이며 우리보다도 더 광대 기운이 충만한 사진작가 김수남 형이 무료로 사진을 찍어 주었으니 백만 원 제작비 치고는 초호화 진용이었습니다.

86년 7월 11일 인천 문예회관에서 첫 막을 연 이후 서울 미리내 소극장에서 막을 올렸는데, 뜻밖에 반응이 좋아 전국에서 초청이 들어오고 대학가에서도 인기 초청작이 되었습니다.
 

<아리랑>의 한 장면.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모티브로 해서 현대의 두 연극배우가 예술과 역사의 문제를 변신해 가면서 풀어가니 특히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같은 젊은 관객들에게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 뒤 신촌의 신선극장에서 장기 공연하면서 연습실도 얻게 되고, 단원들도 모집하여, 그 뒤 ‘아리랑호’는 어렵지만 연극의 바다 위를 출항하게 되었습니다.

<아리랑>의 한 장면.

아리랑 극단 창단의 숨은 공신 한 분이 계십니다. 지금 저의 장모님이십니다.「아리랑」의 극 중에서 제가 일본 여가수로 변신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기모노를 사기에는 돈이 없고 빌리려 해도 대여료가 엄두가 나지 않아 고민하고 있을 때, 의상 담당이던 지금의 아내가 사정을 알고서 ‘바느질의 대가’인 엄마에게 부탁했습니다.

동대문 포목점에서 천을 뜨고 일본 기모노 사진 몇 장을 전해 주었더니, 과연 얼마 뒤에 진홍색의 아름다운 기모노가 우리 손에 들어왔습니다. 얼굴도 모르던 예비 신랑감을 위해 난생 처음 만들어보는 기모노를 밤을 새워 바느질했을 장모님의 노고를 지금껏 못 갚아 드리고 있습니다.

<아리랑> 중 기모노 입은 여가수 장면.

창단작품 「아리랑」을 올린 뒤 저는 전에 공연했던 「장사의 꿈」을 임진택 연출, 김명곤, 조항용 출연으로 재공연을 했고, 그 뒤 동학혁명을 다룬 「갑오세 가보세」를 쓰고 연출했습니다.



<갑오세 가보세>의 장면들.

그 뒤에는 판소리 「수궁가」를 우리 시대에 맞는 가사로 바꾼 「금수궁가」를 공연해서 글자 하나 음 하나만 틀려도 얼굴을 찡그리고 수십 번 반복하게 하시며 소리를 전수해 주셨던 박초월 선생님께 반란도 도모했습니다.

<금수궁가>의 한 장면.

그 뒤 1988년에는 민주화 투쟁으로 체포된 양심수의 문제를 재판극으로 다룬 「인동초」를 쓰고 연출했습니다. 

     <인동초>의 한 장면.

이어서 철책선에서 근무하는 사병들의 갈등을 통해 분단 문제를 다룬 「불감증」이란 작품을 연출했습니다.

<불감증>의 한 장면.

이 무렵의 저는 배우로, 작가로, 연출가로, 극단의 대표 겸 제작자로 하루도 쉬지 않고 연습장과 공연장을 다니며 바쁘게 지냈습니다. 고단하고 가난했지만 창조의 열정에 불탔던 행복했던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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