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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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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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에 해당되는 글 15건

  1. 2010.08.30
    오은선 의혹, 히말라야 산신들이 노하겠다 (31)
  2. 2010.08.27
    4대강을 위한 '시애틀의 잠못 이루는 연설' (14)
  3. 2010.08.24
    '스무살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이 뭘까? (16)
  4. 2010.08.21
    퇴계와 두향의 사랑, 사실일까 허구일까? (11)
  5. 2010.08.19
    남원 땅에 피어난 꽹과리의 꽃, 유명철 명인 (8)
  6. 2010.08.18
    '깊은 사랑'이 그리운 비취새, 안비취 명창 (4)
  7. 2010.08.17
    춤추고 노래한 외로운 고승, 장태남 명인 (4)
  8. 2010.08.15
    내팽개친 국사 교육, 어디서 배워야 하나? (42)
  9. 2010.08.14
    꽹과리에 미쳐 떠돈 부포꽃, 김문달 명인 (4)
  10. 2010.08.12
    얇은 사 하얀 고깔 춤추는 나비, 이매방 명인 (6)
  11. 2010.08.11
    맑은 영혼의 마지막 궁중광대, 김천흥 명인 (8)
  12. 2010.08.09
    죽음의 사막을 '기적의 숲'으로 만든 여인 (12)
  13. 2010.08.07
    미국 처녀도 반해서 뽀뽀한 춤, 하보경 명인 (9)
  14. 2010.08.04
    바람 따라 사라지는 흙의 노래, 박갑근 명인 (2)
  15. 2010.08.02
    내 가슴에 불을 지른 고등학교 은사 선생님 (38)
산악인 오은선 씨의 '칸첸중가 등정 의혹'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SBS TV '그것이 알고 싶다'는 지난 8월 21일 <정상의 증거는 신(神)만이 아는가-오은선 칸첸중가 등정의 진실>을 방송했습니다.

출처 :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93069944

정상 등반의 증거로 제시된 사진 2장에 대한 의혹, 지난해 11월 대한산악연맹 주재로 열린 비밀 모임에서 제기된 각종 의혹, 셰르파 3명의 엇갈린 증언(누르바는 정상 등반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옹추는 정상 등반을 주장하고, 나머지 1명은 침묵을 지켰다.) 등을 토대로 제작진은 오은선씨의 해명을 촉구했습니다.

방송 이후 논란이 커지자 대한산악연맹은 8월 27일 칸첸중가에 올랐던 박영석, 엄홍길, 김웅식, 한왕용, 김재수, 김창호 등 산악인들의 의견을 토대로 오은선 씨가 칸첸중가 정상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각종 의혹에 대해 오은선 씨는 반박 기자회견을 곧 열겠다고 했습니다. 오 씨 측은 SBS의 방송 내용이나 연맹 회의의 결정에 문제가 있고, 자신은 확실히 정상 등반을 했다는 입장입니다.

작년 5월 6일에 이루어졌던 칸첸중가 등반이 1년도 훨씬 넘은 지금 왜 이토록 문제가 되는 걸까요?

아마도 올해 4월27일 여성 산악인으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모두 오르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과 함께 논란이 점화된 듯합니다. 오은선 씨는 안나푸르나 정상 등반에 성공하면서 히말라야 14좌 완등의 새 역사를 쓴 것으로 보도됐고, KBS는 등반 과정을 생중계했습니다. 이 엄청난 업적에 대해 온 국민들은 열광하고 축하했습니다.

출처 : http://www.etimes.net/service/lucky_200...o_living

그러나 그 이후 의혹이 계속 제기되었습니다. 그녀와 14좌 여성 최초 완등을 다투는 스페인의 파사반이 강하게 의혹을 제기했고, 히말라야 산악인들의 인증 대모인 홀리 여사는 ‘논쟁 중’이란 판단 속에 한국 산악계의 평가에 맡겨 놓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국제 산악계에 고산 등정을 인증하는 기구가 따로 있지 않기 때문에 인증은 산악인 스스로 해야 합니다. 따라서 칸첸중가 등정 의혹을 해소하는 것도 오은선씨의 몫입니다. 이 의혹에 대한 본인의 기자회견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누구도 그 진위를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 정황이나 여론은 갈수록 의혹이 깊어지는 쪽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고산 등정에 대한 의혹은 뿌리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1786년 프랑스의 자크 발마와 미셸 파카르는 몽블랑 등정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발마는 몽블랑 최초 등정의 업적을 독점하기 위해 파카르가 동상에 걸려 오르지 못했고, 자기 혼자 올랐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진상이 밝혀져 파카르의 등정도 인정됐습니다.

1906년 미국의 프레드릭 쿡이 매킨리 산을 등정했다면서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증거로 내놓았고, 그는 부와 명예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1913년 스턱과 카스턴스가 매킨리 산에 올라 쿡의 사진이 정상이 아니라 낮은 봉우리였음을 밝혀냈습니다.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는 세계 두 번째로 14좌를 모두 올랐는데도 1981년에 오른 마칼루 산의 등정 사진을 못 찍었기 때문에 의혹에 휩싸였습니다. 그 후 1982년 5월에 한국의 산악인 허영호 씨가 쿠쿠츠카가 놓고 간 마스코트를 발견해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세계 산악계에 고봉 등정에 대한 의혹과 조작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 기록이 몰고 오는 엄청난 부와 명예 때문입니다.

미국 기자 마이클 코더스는 「에베레스트의 진실」이란 책에서 돈에 오염된 히말라야의 실체를 밝혔습니다. 베이스캠프엔 텐트 500채에 1000명이 북적이고, 음식과 술을 팔고, 마약에 매춘까지 이루어지는데 2억 원을 내면 대행사가 팀 구성에서부터 장비 운반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주는 등 상행위로 전락한 등반의 실태를 까발리고, 에베레스트는 '인간성의 무덤'이 됐다고 개탄했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세계 최고의 산봉우리들을 오른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건강한 남성들도 해발 3.000미터부터는 호홉곤란과 체력저하로 한계를 느끼는데, 5.000미터 이상의 고지를 오르는 것은 그야말로 철인 같은 체력을 가져야 가능한 일입니다.

게다가 히말라야 8000m급 14개봉 즉 에베레스트(8848m), K2(8611m), 칸첸중가(8586m), 로체(8516m), 마칼루(8463m), 초오유(8201m), 다울라기리(8167m), 마나슬루(8163m), 낭가파르바트(8126m), 안나푸르나(8091m), 가셰르브룸1봉(8068m), 브로드피크(8047m), 가셰르브룸2봉(8035m), 시샤팡마(8027m) 등을 모두 오른다는 것은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위업입니다. 그 위업을 여성의 몸으로, 그것도 14번이나 시도했다는 것은 초인적인 체력과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엄두도 못 낼 일입니다.

오은선 씨가 착오로 실수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짙은 안개속의 악천후 때문에 정상의 방향을 잘못 잡았고, 사진에 대한 설명에도 뭔가 착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좀 더 솔직하고 속시원한 해명을 하지 않은 채 의혹에 대해 감정적 대응으로 일관하는 모습은 안타깝기만 하군요. 제가 지금까지 찬미하고 존경해왔던 극기와 강인함의 화신 같은 그녀의 이미지가 자꾸 무너지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어쨌든 기자회견에서 그녀의 실추된 명예가 다시 회복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히말라야 14좌 등반이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입니다. 

그 지옥 같은 싸움을 이기고 '정상에 오른(정복한 게 아니라)' 사람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돈과 명예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돈과 명예에 대한 집착 때문에 이기심과 거짓과 속임수가 난무하는 '인간성의 무덤'이 자꾸 만들어진다면 슬픈 일입니다. 그건 산에 대한 모독이며, 산악인의 정신을 파괴시키는 행위입니다.

칸첸중가 산. 출처 : http://buno.tistory.com/1091

칸첸중가 산의 최정상은 ‘신성(神性)’을 지녔다 해서 밟지 않는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자연과 산에 대한 외경심은 뒷전으로 밀어놓고 돈 싸움, 명예 싸움에 혈안이 되어 자신의 숲과 계곡과 바위와 만년설을 더럽히는 산악인들의 행태에 '히말라야 산신'들의 분노가 폭발하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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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인디언 지도자로 세알트(Sealth 1786년~ 1866년), 일명 '시애틀'이란 이름의 추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젊어서 용감한 전사로 이름을 날렸으며, 두와미시 족과 스콰미쉬 족의 연합 대추장으로서 크게 존경을 받는 지도자였다고 합니다.

세알트 추장의 이미지. 출처 : http://blog.daum.net/_blog/rss/rssList....Page%3D4

1854년, 미국대통령 피어스에 의해 파견된 백인 대표자들이 그에게 15만 불에 6천만 평에 달하는 땅의 권리를 넘기는 조약서에 서명을 하라고 강요하였습니다. 물론 서명을 안 하면 당장이라도 전쟁을 벌일 태세였습니다. 전쟁을 하게 되면 수많은 동족이 희생될 것을 염려한 그는 몇날 밤을 고민한 끝에 조약서에 서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서명하기 전에 그는 백인들 앞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그 연설을 두와미시 족의 언어를 배운 헨리 A. 스미스라는 백인의사가 기록했습니다. 그 연설문은 오랫동안 원문이 공개되지 않은 채 부분 부분 공개되다가, 1976년의 미국독립 200주년을 기념한 '고문서 비밀해제'로 120년 만에 햇볕을 보게 됩니다.

여기 소개하는 그의 연설문은 그동안 녹색평론, 법정 스님, 류시화 시인 등에 의해 소개되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명문입니다. 하지만 제게는 마치 요즘의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천둥과 같은 외침으로 들려옵니다.

출처 : http://kr.blog.yahoo.com/zephyrakim/22

나와 함께 온, 지금 당신들 앞에 서 있는 한 무리의 이 사람들은 나의 부족이며 나는 그들의 추장이다.

우리는 왜 이곳에 왔는가? 연어떼를 구경하기 위해서다. 올해의 첫 연어떼가 강물로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연어는 우리의 주된 식량이기 때문에 연어떼가 일찌감치 큰 무리를 지어 강의 위쪽으로 거슬러오는 걸 보는 일만큼 우리에게 즐거운 건 없다.

그 숫자를 보고서 우리는 다가오는 겨울에 식량이 풍부할 것인가를 미리 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더없이 기쁜 까닭은 그 때문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연어떼가 햇살에 반짝이며 춤추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 또 한 번의 행복한 겨울이 우리를 찾아올 것을 짐작한다.

우리가 무리를 이루어 몰려왔다고 해서 전투를 벌이려고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 달라. 나는 당신들이 우리의 땅에 온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다. 당신들과 우리는 모두가 이 대지의 아들들이며, 어느 한 사람 뜻 없이 만들어진 사람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들은 이 땅에 와서, 이 대지 위에 무엇을 세우고자 하는가?

어떤 꿈을 당신들의 아이들에게 들려주는가?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그저 땅을 파헤치고 건물을 세우고 나무들을 쓰러뜨릴 뿐이다. 그래서 행복한가? 연어 떼를 바라보며 다가올 겨울의 행복을 짐작하는 우리만큼 행복한 것인가?

'워싱턴의 대추장(미국대통령 피어스를 말함)'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대추장은 우정과 선의의 말도 함께 보냈다. 그가 답례로 우리의 우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그로서는 친절한 일이다. 그의 부족은 숫자가 많다. 그들은 초원을 뒤덮은 풀과 같다. 하지만 나의 부족은 적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다음에 드문드문 서 있는 들판의 나무들과 같다.

백인 대추장은 우리의 땅을 사고 싶다는 제의를 하며 우리에게는 아무런 불편 없이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그대들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볼 것이다. 우리가 땅을 팔지 않으면 백인이 총을 들고 와서 우리 땅을 빼앗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따사로움을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 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인디언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인디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

워싱턴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온 것은 곧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달라는 것과 같다. 대추장은 우리만 따로 편히 살 수 있도록 한 장소를 마련해 주겠다고 한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안을 잘 고려해보겠지만, 우리에게 있어 이 땅은 거룩한 것이기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울과 강을 흐르는 이 반짝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피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을 팔 경우에는 이 땅이 거룩한 것이라는 걸 기억해 달라. 거룩할 뿐만 아니라, 호수의 맑은 물속에 비추인 신령스러운 모습들 하나하나가 우리네 삶의 일들과 기억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음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준다. 카누를 날라주고, 자식들을 길러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에게 하듯 강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아침 햇살 앞에서 산안개가 달아나듯이 인디언은 백인 앞에서 언제나 뒤로 물러났지만, 우리 조상들의 유골은 신성한 것이고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다. 그러니 이 언덕, 이 나무, 이 땅덩어리는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다.

백인은 우리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인에게는 땅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똑같다. 그들은 한밤중에 와서는 필요한 것을 빼앗아 가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땅은 백인들에게 형제가 아니라 적이며, 그것을 다 정복했을 때 그들은 또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백인은 거리낌 없이 아버지의 무덤을 내팽개치는가 하면, 아이들에게서 땅을 빼앗고도 개의치 않는다. 아버지의 무덤과 아이들의 타고난 권리는 잊혀지고 만다. 백인은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저 하늘을 마치 양이나 목걸이처럼 사고 약탈하고 팔 수 있는 것으로 대한다. 백인의 식욕은 땅을 삼켜 버리고, 오직 사막만을 남겨놓을 것이다.

모를 일이다. 우리의 방식은 그대들과는 다르다. 그대들의 도시의 모습은 인디언의 눈에 고통을 준다. 백인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봄 잎새 날리는 소리나 벌레들의 날개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다. 인디언은 미개하고 무지하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도시의 소음은 귀를 모욕하는 것만 같다. 쏙독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한밤중 연못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나는 인디언이라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내음을 사랑한다. 만물이 숨결을 나누고 있으므로 공기는 인디언에게 소중한 것이다. 짐승들, 나무들, 그리고 인간은 같은 숨결을 나누고 산다. 백인은 자기가 숨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여러 날 동안 죽어가고 있는 사람처럼, 그는 악취에 무감각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대들에게 땅을 팔게 되더라도 우리에게 공기가 소중하고, 또한 공기는 그것이 지탱해 주는 온갖 생명과 신령스러운 기운을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베풀어준 바람은 그의 마지막 한숨도 받아준다. 바람은 또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준다. 우리가 우리 땅을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잘 간수해서 백인들도 들꽃들로 향기로워진 바람을 맛볼 수 있는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그러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즉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개인이니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나는 초원에서 썩어가고 있는 수많은 들소를 본 일이 있는데, 모두 달리는 기차에서 백인들이 총으로 쏘고는 그대로 내버려둔 것들이었다. 연기를 뿜어대는 철마가 우리가 오직 생존을 위해서 죽이는 들소보다 어째서 더 중요한지를 모르는 것도 우리가 미개인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짐승들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이 사라져버린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맺어져 있다. 그대들이 온 이후로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제 삶은 끝났고, 살아남는 일 만이 시작되었다. 이 넓은 대지와 하늘은 삶을 살 때는 더없이 풍요로웠지만, 살아남는 일에 있어서는 더없이 막막한 곳일 따름이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딛고 선 땅이 우리 조상의 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이 땅을 존경할 수 있도록, 그 땅이 우리 종족의 삶들로 충만해 있다고 말해 주라.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을 그대들의 아이들에게도 가르치라. 땅은 우리 어머니라고, 땅 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들들에게도 닥칠 것이니, 그들이 땅에다 침을 뱉으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주는 피와도 같이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그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는 짓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종족을 위해 그대들이 마련해준 곳으로 가라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는 떨어져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우리가 여생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패배의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의 전사들은 수치심에 사로잡혔으며, 패배한 이후로 헛되이 나날을 보내면서 단 음식과 독한 술로 그들의 육신을 더럽히고 있다.

우리가 어디서 우리의 나머지 나날을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 많은 날이 남아있지도 않다. 몇 시간 혹은 몇 번의 겨울이 더 지나가면, 이 땅에 살았거나 숲 속에서 조그맣게 무리를 지어 지금도 살고 있는 위대한 부족의 자식들 중 살아남아서 한때 그대들만큼이나 힘세고 희망에 넘쳤던 사람들의 무덤을 슬퍼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우리 부족의 멸망을 슬퍼해야 하는가? 부족이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인간들은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 가는 존재이다. 자기네 하나님과 친구처럼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백인들조차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백인들 또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가지는 우리 모두의 하나님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땅을 소유하고 싶어하듯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하느님이며, 그의 자비로움은 인디언에게나 백인에게나 똑같은 것이다.

이 땅은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이므로, 땅을 해치는 것은 그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다.

백인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갈 것이다. 어쩌면 다른 종족보다 더 빨리 사라질지 모른다. 계속해서 그대들의 잠자리를 더럽힌다면, 어느 날 밤 그대들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멸망할 때, 그대들을 이 땅에 보내주고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그대들에게 이 땅과 인디언을 지배할 권한을 허락해 준 하느님에 의해 그대들은 불태워질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불가사의한 신비이다. 언제 들소들이 모두 살육되고, 야생마가 길들여지고, 은밀한 숲 구석구석이 수많은 인간들의 냄새로 가득차고, 풀이 우거진 언덕이 '말하는 쇠줄'(전화선)로 더럽혀질 것인지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숲은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독수리는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날랜 조랑말과 사냥에 작별을 고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의 끝이자 죽음의 시작이다.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가 거기에 동의한다면 그대들이 약속한 보호구역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서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마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 인디언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가 다만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기억될 때라도, 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백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의 심장의 고동을 사랑하듯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우리가 돌본 것처럼 이 땅을 돌보아 달라. 당신들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이 땅의 기억을 지금처럼 마음속에 간직해 달라. 온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대들의 아이들을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이.

한 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하나님은 하나라는 것을. 이 땅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백인들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연어떼를 보았으니 이제 나와 나의 부족은 행복한 얼굴로 돌아간다. 어쩌면 또 한 번의 행복한 겨울은 짐작에 그칠 뿐, 나의 부족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꿈인지 모른다. 당신들 백인들에게 밀려, 살아남기 위해 고통 받아야 할 막막한 겨울 들판으로 뿔뿔이 떠나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본 연어떼의 반짝이는 춤을 나의 부족은 잊지 못할 것이다.

이것으로 내 말을 마친다.


출처 : http://seerdeborah.blogspot.com/2010/08..._17.html

당시 피어스 대통령은 인디언들의 마음을 달래는 제스츄어였는지 그 지역을 세알트 추장의 이름을 백인들이 발음하기 쉽게 고친 '시애틀Seattle'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영화 <시애틀의 잠못 이루는 밤>으로 우리에게도 친근한 시애틀은 이렇듯 신성한 땅과 부족의 몰락을 앞두고 '잠못 이뤘던' 세알트 추장과, 정든 고향을 떠나 보호지역으로 들어가게 된 인디언들의 슬픔이 담겨져 있는 도시입니다.

시애틀에 있는 세알트 추장의 동상. 출처 : http://www.necrosant.net/zbxe/25349

세알트의 연설문은 원본이 환경론자들에 의해 여러번 개작되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고, 그가 백인에게 이용당한 지도자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런 의혹이나 평가에도 불구하고, 연설문의 내용 자체는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세알트 추장이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 대지, 강, 연어, 새, 사슴들 모두 지금의 시애틀에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시애틀뿐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 곳곳에서 인디언들의 땅과 삶은 철저히 수탈되고 파괴되었습니다.

이렇듯 백인들에 의해 짓밟히고 무시 당했던 그의 연설문은 지금도 여전히 지구촌 곳곳의 수많은 개발론자과 건설론자들의 손에 의해 무참히 갈기갈기 찢기고 있습니다.

저는 특히 그가 강과 물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4대강 사업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개울과 강을 흐르는 이 반짝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피다.....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준다. 카누를 날라주고, 자식들을 길러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에게 하듯 강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자비하게 강바닥을 파헤치는 덤프트럭과 크레인의 굉음에 묻혀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한반도의 어머니 대지 위를 흐르는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형제들은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제들의 외침은 철저히 무시되고 짓밟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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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을 앞둔 딸아이에게 선물하면 좋을 듯해서 산 책인데, 오히려 제가 더 재미있게 읽은 책이 있습니다.



「스무살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What I wish I knew when I was 20)」이라..."나는 스무살 때 어떤 일을 하고 있었나? 내가 다시 스무살이 된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을까? 내가 스무살에 이 책을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등등 다양한 생각을 하며 제 청춘을 되새김하게 만들어준 책입니다.

이 책은 저자 티나 실리그가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인기리에 진행한 '기업가 정신과 혁신'이라는 강의를 정리한 책입니다.

이 책은 특히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시점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 줄 듯합니다. 수많은 경영 사례와 대학 강의 중 창의적으로 과제를 풀어내는 학생들의 이야기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어서 공감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합니다.

이 책은 먼저 진부하고 평범한 학교 교육을 매섭게 비판합니다.

학교에서는 대개 학생을 개인별로 평가하고, 상대평가에 따라 성적을 매긴다. 다시 말해 누군가 승자가 되면 누군가는 패자가 된다. 이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조직이 돌아가는 방식과도 커다란 차이가 있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나 원칙이 실제로 사회에서 먹히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으로 인생을 시작할 때 많은 스트레스와 혼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학교에서는 선다형 시험으로 정답을 하나만 요구하지만, 사회에선 문제에 대한 해답이 여럿일 경우가 많습니다.   

또 무엇무엇을  하면 안되고 규칙을 어기면 안된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은 곳이 학교인데 인생에서는 ‘규칙을 깨야' 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습관적인 사고방식에 갇혀 여러 가능성을 지나쳐버리고, 고정관념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기 자신을 제한시켜 살아갑니다.

그러나 저자는 원래부터 '안전지대'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고정관념을 과감히 깨고, 자기 앞에 전개될 수 많은 길을 향해 걸어가라고 권합니다.

안전지대에서 나오는 것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나 고정관념에 도전한다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도전에는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은 게 인생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실패’라는 단어를 전혀 다른 의미로 씁니다. 대부분 실패는 우리가 피해 가야 할 장애물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실패는 자산이다.’ 라고 강조합니다. 실패를 해보아야 또 다시 그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 더 노력하여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실패가 성공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도 쉬운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제가 애플에서 잘리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애플에서의 퇴출경험은 정말 쓰디쓴 약이었지만, 환자에게 꼭 필요한 약이었던 것 같습니다. 때때로 인생은 당신의 뒤통수를 세게 치는 법입니다"
- 2005,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 축사 중에서

이 책의 결론은 마지막 장에 나와 있듯이 '당신 스스로를 허락하라' 입니다.

고정관념에 의문을 품고,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끊임없이 실험하고, 실패하고, 나아갈 길을 스스로 설계하고, 능력의 한계를 믿지 말고 그것 이상의 무언가를 시도해도 좋다고 당신 스스로에게 허락을 내리라는 뜻이다. 

스무살에서 30년이 훨신 지난 지금, 전 이 책을 통하여 오히려 20대가 된 듯한 느낌을 받고, 제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안전지대 밖으로 나오면,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도전하면,
불가능하다는 고정관념을 버리면,
터무니없어 보이는 기회를 붙잡으면,
당신 눈앞에 무한한 가능성이 나타날 것이다.

책의 제목은 '스무 살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이지만 그 내용은 치열한 현실에서 고군분투 하고 있는 모든 세대를 위한 책인 듯 합니다. 지금 무언가에 도전을 하고 싶다면 이 책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잡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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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은 천원짜리 지폐의 주인공일 정도로 우리 국민 들이 성인처럼 존경하는 학자입니다.

출처 : http://ask.nate.com/qna/view.html%3Fn%3D5881801

그의 초상화나 글들은 매우 엄격하고 진지하고 학문에 몰두한 선비의 기풍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퇴계의 전혀 다른 면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바로  단양 신선봉 아래 '두향묘' 전해 오는 퇴계와 두향과의 사랑이야기가 그것입니다.

퇴계는 평생 두 번 결혼을 했습니다. 21세 때 김해 허씨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세 아들을 낳은 후 결혼 6년 만에 산후풍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번째 아내 권씨와 재혼했지만, 그녀 역시 퇴계가 46세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두 아내를 잃고 홀아비가 된 퇴계는 1548년 1월 단양군수로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부임한 지 한 달 만에 둘째 아들 채(寀)가 또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48세였던 퇴계는 계속되는 가족들의 죽음으로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 무렵, 그는 명기 두향과 만나게 됩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두향은 어려서 일찍 부모을 잃고 단양고을 퇴기인 수양모 밑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녀는 열세 살 에 '기적(妓籍)'에 올려졌으며, 열여섯 살에 황초시란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결혼 석 달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어쩔 수 없이 다시 기생이 되어 단양 관기로 활동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녀는 용모가 빼어나고, 거문고를 잘 탔고, 시와 그림을 좋아했습니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왔을 때 이팔청춘 16세에 남편과 사별한 미모의 기생과, 두 아내와 사별한 채 아들까지 잃어 슬픔에 젖어 있던 48세의 홀아비가 만난 것입니다.

소설가 정비석 씨가 쓴「명기열전(名妓列傳)」에는 두 사람의 만남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가 소설적 상상을 덧붙여 애절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슬픔과 비탄에 젖은 채 묵묵히 시를 쓰고 글을 읽는 퇴계를 두향은 마음속으로 사모하게 됩니다. 두향은 사랑의 정표로 여러 가지 선물을 드렸으나 퇴계는 번번히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두향은 포기하지 않고 선생께서 무엇을 가장 좋아하시는지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 매화를 무척 사랑해서 매화를 읊은 시가 수십 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전국을 수소문해서 희다 못해 푸른 빛이 나는 최상품의 백매화를 구했습니다. 그 매화를 선생께 드리니, 선생께서도 "매화야 못 받을 것 없지." 하시며 동헌 뜰 앞에 심고 즐겼습니다.

그후 퇴계는 두향의 재능을 어여삐 여겨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의 정은 점점 깊어지고, 마침내 사랑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매화를 통해 맺어진 두 사람의 사랑은 각별하였습니다. 

출처 : http://blog.ohmynews.com/songpoet/150126

두향과 퇴계는 경치가 빼어난 강선대를 즐겨 유람했습니다. 총명하고 거문고와 시와 그림에 조예가 있던 두향은 퇴계와의 교분을 통해 그 세계가 더욱 깊어지고, 고매한 영혼의 소유자로 성숙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열 달도 안되어 끝나고 맙니다. 넷째 형인 이해(李瀣)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형제가 같은 도에서 근무하는 것을 피하는 제도 때문에 퇴계가 경상도 풍기 군수로 옮겨가게 된 것입니다.

두향으로서는 청천의 벽력이었습니다. 짧은 사랑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이별은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두 사람은 밤이 깊도록 말없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윽고 퇴계가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구나.”

두향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시 한 수를 썼습니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 제
어느덧 술 다 하고 님 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그날 밤의 이별은 결국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졌습니다.

퇴계가 단양을 떠날 때. 그의 짐 속엔 두향이가 준 수석 두 개와 매화 화분 한 개가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퇴계는 평생 동안 그 매화를 가까이 두고 두향을 보듯 애지중지했습니다.

1570년 퇴계가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도 자신의 죽음보다 매화의 목마름을 염려할 정도로 매화 사랑이 깊었습니다. 제자 이덕홍은 이렇게 전합니다.

"초여드렛날 아침, 선생은 일어나자마자 제자들에게 `매화에 물을 주라'고 말씀하였다. 오후가 되자 맑은 날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흰눈이 수북이 내렸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누워있던 자리를 정리하라고 하였다. 제자들이 일으켜 앉히자 선생은 앉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곧 구름이 걷히고 눈도 그쳤다."

한편 퇴계가 단양을 떠나자, 두향은 ‘퇴적계(退籍屆)’를 제출했습니다. 신임 사또에게 ‘이황을 사모하는 몸으로 기생을 계속할 수 없다’며 기적에서 이름을 없애달라고 간청해 기생을 면했습니다.

그 뒤 두향은 퇴계와 자주 갔던 강선대가 내려다보이는 강 언덕에 초막을 짓고 은둔생활을 하며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았습니다. 퇴계의 죽음 소식을 들은 두향은 도산서원까지 달려가 멀리서 절을 한 후 돌아왔습니다. 그후 두향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무덤을 강선대 위에 만들어주오. 내가 퇴계선생을 모시고 자주 시문을 논하던 곳이라오."

너무도 일찍 생을 마감한 그녀는 강선대 가까이에 묻혔고, 그로부터 단양 기생들은 강선대에 오르면 반드시 두향의 무덤에 술 한 잔을 올리고 놀았다고 전합니다.

퇴계와 두향의 추억이 어린 강선대는 충주댐을 만들 때 수몰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두향묘'는 그녀를 기리는 사람들에 의해 1984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장됐습니다.
 

두향의 무덤. 출처 :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6page%3D

그런데 과연 이 사랑이야기는 사실일까요?

조선 후기 문장가인 이광려가 두향묘의 정경을 읊은 한시에 그녀의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두향은 실존인물로 보입니다. 

외로운 무덤 길가에 누웠는데
물가 모래밭에 붉은 꽃 그림자 어리어 있으라
두향의 이름 잊혀 질 때라야 강선대 바위도 없어지겠지

하지만 퇴계와 두향의 사랑을 공식적으로 밝힌 문헌은 아직까지 확인된 것이 없습니다. 1977년 단양군이 펴낸 「단양군지」는 강선대를 소개하면서 '명기 두향의 묘가 있다'고 했을 뿐입니다.

퇴계와 두향의 관계가 처음 언급된 것은 위에 소개한대로 1970년대 후반에 씌여진 정비석의 소설 「명기열전」이었습니다. 정씨는 퇴계 문중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두향편'을 엮었다고 합니다.

그후 퇴계학연구원이 1980년에 낸 「퇴계일화선」에도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런데 그 책의 저자는 다름 아닌 정비석 씨였습니다.

문헌을 통해 퇴계를 연구하는 학자 중에는 퇴계가 두향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 이유로 다음의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듭니다.

첫째, 퇴계가 단양군수로 갔던 1548년은 퇴계 생애 중 정치적으로 위험한 시기였다는 겁니다. 그보다 3년 전에 일어난 을사사화에서 간신히 죽음을 면한 퇴계가 자신을 호시탐탐 노리는 정적들을 피해 지방으로 피한 때라는 겁니다.

둘째, 퇴계가 단양에 도착한 다음 달에 둘째 아들이 죽고, 고을의 행정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텐데 그런 한가한 사랑을 할 여유가 있었겠느냐는 겁니다.

셋째, 퇴계가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근거로 듭니다. 1541년 관서 지방에 출장을 갔다 오는 길에 평양에 머물렀을 때, 평안도 관찰사가 유명한 기생을 시켜 접대하려 했는데도 끝내 거부했다는 기록이 전해 올 정도로 여색에 대해 담백했던 퇴계가 그리 쉽게 사랑에 빠졌겠느냐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퇴계와 두향의 러브스토리는 오로지 소설가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허구일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비석 씨가 어떤 증언을 토대로 소설을 썼는지는 알 수 없어도, 두향이 실존인물이고 퇴계와 단양에서 만났다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으로 위험하고 아들의 죽음까지 겹쳤다면 퇴계는 정신적으로 무척 불안하고 외로웠을 겁니다. 슬픔에 지치고 세파에 시달린 중년 선비의 외로운 모습은 젊은 여인의 가슴 속에 모성애와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켰을 겁니다.

또 다른 고을 수령들처럼 여색을 탐하지도 않고, 기생이라고 하여 함부로 대하거나 성희롱을 하지도 않고, 정성을 다해 민정을 살피고 학문에 정진하는 그의 모습은 그녀의 마음 속에 존경과 사랑의 열정을 불러 일으켰을 겁니다. 

그리하여 두향이 먼저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시했을 것이고, 매화를 통해 정신적으로 교감을 나누던 퇴계도 두향에게 깊은 정을 느꼈을 겁니다. 두향과 헤어진 후 평생 홀로 살며 벼슬과 학문에만 몰두한 퇴계의 행적을 볼 때, 퇴계는 그녀에 대한 감정을 글을 통해 노출시킬 수 없었고 매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제아무리 성인처럼 추앙 받는 학자나 성직자라 할지라도 정신적 교감을 기초로 한 이성과의 사랑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런 위인의 인간적인 체취를 느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단양군 단성면에서는 1979년부터 매년 <두향제>를 열고 있습니다. 두향제를 주관하는 쪽에서는 퇴계와 두향의 사랑이야기는 단양에서 있었던 실제 역사가 분명하다는 입장입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사실인지 허구인지는 두향의 무덤 아래 출렁이는 충주호 물결만이 알고 있을 테지만, 저는 외로운 두향의 무덤에 술 한 잔 올리며 두 사람의 순수한 사랑을 기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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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전라도 쪽으로 내려가다 익산에 이르면 기찻길이 '호남선'과 '전라선'으로 나뉩니다.

호남선은 익산에서 김제, 정읍, 장성, 광주를 거쳐 나주, 목포에 이르게 되고 전라선은 전주, 남원, 구례, 곡성을 거쳐 순천, 여수에 이르게 됩니다. 예전에는 전라선이 통과하는 지역을 '전라 좌도'라 하고, 호남선이 통과하는 지역을 '전라 우도'라 했습니다. 농악도 그 구분에 따라 전라 좌도 지방에서 치는 농악을 '전라 좌도 농악', 전라 우도 지방에서 치는 농악을 '전라 우도 농악'이라고 합니다.

전라 좌도 농악의 꽹과리 명인 유명철은 어려서부터 좌도 농악 가락을 뼛속 깊이 새기며 자랐습니다.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00088904

그의 집안은 대대로 남원군 금지면 상귀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남원토박이로 땅과 재산이 넉넉한 부농이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대에 와서 집안이 망해버렸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유선장 씨가 의병 운동에 가담하여 1937년에 일경에게 고문을 당해서 돌아가시게 되자, 재산은 몰수당하고 집안은 풍지박산이 나버린 것입니다.

그 통에 그의 부친인 유한준 씨는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채 남의 집 머슴으로 품을 팔며 숨어지내야 했습니다. 1942년에 아들 명철을 낳았을 때에도 그는 땅 한뙈기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러는 중에 틈틈이 배운 꽹과리 솜씨는 인근에 당해낼 사람이 없을 만큼 뛰어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부친은 전라도에서 가장 뛰어난 상쇠로 꼽히는 지창근 명인에게 꽹과리를 배웠는데, 해방되기 전까지는 죄인 자식이라 그 솜씨를 맘대로 펼치지 못하다가 해방이 되자 이곳 저곳에 불려다니며 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전국 농악 경연대회가 열렸을 때는 전라북도의 대표 상쇠로 나가게 되었고, 거기서 이름을 떨치게 된 그의 부친은 전국을 휩쓸고 다니며 상쇠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그 통에 돈도 벌고 소원하던 농토도 장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이 다닌 것이 '포장걸립'이여, 포장쳐 놓고 돈받고 농악을 치는 거지. 그런디 어려서 아버님 치시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따라서 치는디, 그것이 무슨 가락이고 언제 치는 가락인지는 몰랐어도 치는 법만은 이미 머릿속에 다 들어가 버렸어. 그러고 농악칠 때 상모 돌리는 걸 흉내내는 걸 보고 아버님이 솔방울로 상모를 만들어 주셨는디, 내가 그걸 돌리면 다들 귀엽고 예쁘다고 칭찬이 자자했지.”

그렇게 신나게 농악을 치면서 다니다가 6.25를 맞은 그의 부친은 그 난리 통에도 순창군 쌍치면에 농악을 치러 갔다가 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밤에 굿을 치면 인민군이 습격해 오니까 치지 말라고 지서에서 만류한 사실을 모르고 밤늦게까지 굿을 친 겁니다. 그 통에 지서에 잡혀들어가서 순경들에게 “무지무지허게 뚜드려 맞은 끝에” 골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1951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일본 순사한테 매맞아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지서 순경한테 매맞아 돌아가시게 되니 그의 집안은 두 번 풍지박산이 난 셈입니다.

골병든 아버지의 병간호로 집안 살림은 모두 날아가버리고, 누나와 동생과 함께 홀어머니 손에 남게 된 열 살 난 소년은 학교 공부도 때려치우고 곧바로 농삿일에 뛰어들었습니다.

농사짓는 틈틈이 머슴들과 어울려서 농악을 치게 되었는데, 이미 어려서 아버지에게 배운 가락으로 그 또래에서는 당해낼 사람이 없는 소년 상쇠가 되었습니다. 그는 열여섯 살이 되자 자기 또래의 청년들을 모아 농악단을 만들 만큼 농악에 미쳐 있었습니다.

“그때가 자유당 시절이었는디, 사월 초파일에 전국 농악경연대회가 열린다고 혀서 나도 우리 마을 청년들을 모아서 농악대를 조직혔지. 면에서 농악에 조예가 있는 분들한테 배워감서 연습을 혀서 출전을 혔는디 내가 상쇠 노릇을 혔지.
그때 전국에서 농악 잘 하시는 분들은 다 나왔는디 내가 치는 것을 이분들이 보고 ‘앗다 저놈이 누구 자식이냐?’ 이렇게 말이 나왔다 말이여. 그분들 보기에 장래성이 있어보였다 이거지.
끝나고 나닝게 그분들이 부르시더니 ‘니가 아무개 자식이냐?’ 묻고 야단이더만. 그렇다고 혔더니 ‘니 부친이 그런 유명헌 분인디 이대로는 안되겠다. 니가 이 중에서 제일 맘에 드는 분을 찍어라.’ 하시더란 말이여. 선생이 제자를 고르는 게 아니라 제자가 선생을 고르게 되었지. 그래서 강태문 선생을 찍었더니 모두들 ‘니가 역시 잘 봤다. 그럼 그 분 따라댕김서 좀 배워봐라.’ 하기에 그 뒤로 강태문 씨를 따라댕겼지.”

남원군 조산면에 살던 강태문 명인은 그의 아버지 유한준 명인이 상쇠로 활약할 때 부쇠로 따라다니던 사람으로 역시 전라 좌도 상쇠의 일인자로 꼽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강태문 명인을 이 년쯤 따라 다니면서 상쇠의 길을 닦았습니다.

출처 : http://openjb.co.kr/bbs/view.php%3Fid%3...no%3D229

농악의 지휘자 겸 통솔자라고 할 수 있는 상쇠는 꽹과리를 치는 솜씨도 뛰어나야 될 뿐 아니라, 굿을 치는 순서에도 밝아야 되고, 스무 명에서 많으면 사오십 명이 되는 농악단 전원을 통솔하는 통솔력과 지도력까지 갖춰야 하기 때문에 농악대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상쇠 노릇을 할 사람은 처음부터 오로지 상쇠만을 따라다니면서 상쇠가 하는 모든 행동거지와 꽹과리 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정초에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집의 액을 몰아내고 복을 빌어주는 '마당밟이굿'을 어떻게 치고, 김맬 때 치는 '두레 풍장'은 어떻게 치고, 김매기가 끝나고 치는 '호미씻이굿'이나, 농사 끝나고 마을의 당산에서 치는 '당굿'이나, 집 지을 때 치는 '집들이굿', 다리 놓을 때 치는 '다리굿'과 같은 갖가지 굿은 어떻게 치는지 알아야 합니다.

또 마당밟이굿을 치더라도 마을에 들어가서 당산신에게 굿치는 것을 아뢰는 '당산굿'과 집의 마당에 들어가서 치는 '마당굿', 부엌에 가서 치는 '정지굿', 장독에 가서 치는 '장꽝굿', 우물에 가서 치는 '샘굿', 곳간에서 치는 '곳간굿', 대청마루에서 치는 '고사굿', 마을공터에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판을 벌이는 '판굿', 굿을 끝내고 마을 밖으로 나오면서 치는 '날당산굿'은 어떻게 치는가 하는 굿의 진행을 속속들이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때와 장소에 따라서 판을 줄이기도 하고 늘이기도 하며, 청중들의 반응에 따라서 가락도 적절히 변화시키고, 주최측의 요구에 맞추어서 생략할 부분과 강조할 부분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또 '외마치', '두마치', '세마치', '풍류', '굿거리', '오방진', '덩더궁이', '영산', '잔지래기' 같은 갖가지 가락을 변화무쌍하게 구사하면서 장구나 북이나 징과 같은 앞치배들과 화음이 흥겹게 어우러지도록 지휘를 해야 합니다. 또 창부나 중이나 양반이나 각시나 할멈이나 대포수나 무동으로 분장하여 춤도 추고 재담도 하는 뒤치배들의 흥도 돋우어주어야 합니다.

게다가 단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여러 단원들의 의견을 존중해서 의사를 결정하는 통솔력까지 배워야 하니, 부처님 살찌고 마르고가 석수장이 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농악의 성공과 실패는 상쇠의 능력에 결정적으로 좌우됩니다. 

“강태문 씨는 가락도 좋고 진법에도 밝고 통솔력도 있는 분이셨어. 근데 통 자세허게 가르쳐 주시질 않어. 그저 보고 배와라 하는 식이여. 그래도 기초가 있어서 이 년 쯤 따라 댕기고 나니 주위에서 선생보다 낫다는 소리가 나오더만. 그분은 그때 이미 나이가 연로하셨으니 부포놀음 같은 것은 젊은 나를 당해낼 수가 없었지.”

유명철 명인의 부포놀음. 출처 : http://tvpot.daum.net/my/PlaylistClipLi...verseseq

그는 가락도 뛰어났지만 특히 '부들상모'를 휘휘 돌리기도 하고, 콕콕 찧기도 하고, 앞뒤로 떠넘기기도 하는 '부포놀음'을 잘해 “좌도 부들상모는 유명철이” 하는 말이 나올 만큼 잘 돌렸습니다. 

우도 농악에서 쓰는 '뻣상모'와 달리 좌도 농악은 기러기털이나 두루미털이나 독수리털의 연한 털로 연꽃처럼 만들어 상모에 매달아 놓은 '부들상모'를 사용합니다. 부드러운 상모를 콕콕 찧고 돌아가는 '전조시', 부포를 앞뒤로 세우는 '개꼬리치기', 한 바퀴씩 돌리는 '좌우치기', 두 바퀴씩 돌리는 '사사'와 같은 부포놀음은 자긋자긋하고 오밀조밀한 몸놀림이 농악 가락과 어우러져서 한껏 흥을 돋우어줍니다.

부들상모의 도면. 출처 : http://gugung.com.ne.kr/pungmul/pung07.html

몸에 물이 올라 힘이 용솟음칠 무렵에 그런 솜씨를 지니게 되었으니 그는 가는 곳마다 인기를 독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터에 강태문 명인이 병으로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배웠지만 '판굿'을 제대로 못 배워 그것을 마저 익히려던 차에 스승을 잃어버린 그는 곡성에 사는 상쇠 기창수 명인을 닷새 동안 따라다니며 판굿을 익혔습니다.

판굿이란 농악을 치는 중에 판을 벌여 놓고 농악의 기예를 총망라해서 푸짐하게 보여주는 판입니다. 

제대로 다 하려면 밤을 새워 놀 만큼 농악의 진수가 담겨있는 게 판굿입니다. 지방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그가 배운 판굿의 순서를 일견해 봅니다.  

-1채부터 7채까지의 가락을 선보인다.
-오방진 가락을 치며 오방으로 진풀이를 한다.
-‘호호’ 하며 치배들을 부르는 '호호굿'을 친 다음, 우도 농악에는 없고 좌도 농악에만 독특하게 전해오는 가락인 '영산가락' - '소쩍새 가락'이라고도한다-을 친다.
-상쇠와 부쇠, 상쇠와 장고가 서로 가락을 주고 받는 '미직'- '품앗이굿'이라고도 한다-을 친다.
-장고 가락에 맞춰서 춤을 추는 '춤굿'을 친다.
-짝을 지어서 등을 맞추는 '등지기'를 친다.
-대포수가 재담도 하고 연극도 하는 '도둑잽이굿'을 친다.
-영기 두 개로 문을 만들고 문을 들락거리며 '문굿'을 친다.
-“갈랍니다.” 하고 하직하는 '날당산굿'을 친다.
-장고나 꽹과리나 북을 치는 모든 단원들이 한 사람씩 나와서 개인기를 자랑하는 '개인놀음'을 하는 것으로 끝을 낸다.

“기창수 씨는 우리 부친이 활약할 때 쌍벽을 이루시던 명인으로 판굿의 대가여. 그 판굿에서 개인의 솜씨가 발휘되는 것이 개인놀음인디, 개인놀음은 잘 해도 단체놀음을 못 허는 사람이 있고, 개인놀음은 못 해도 단체놀음을 잘 허는 사람이 있지.
근디 개인놀음을 잘 허는 사람일수록 자기 고집이 세고 협화성이 부족해서 자기 위주로 나가고 남의 지시를 안 받으니 같이 어울리기가 어렵지. 농악대에서 문제가 생길 때 보면 그런 사람들이 꼭 개입이 되어 있어. 그럴 때 조정하고 해결하는 것이 상쇠의 역할이여.”

기창수 명인에게 판굿을 모두 익힌 그는 제1회 전국 민속경연대회가 열렸을 때 상쇠로 출전하여 전국에서 1등을 했습니다. 그 상으로 '특별 흥행허가'를 얻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포장걸립을 했습니다.

그해 겨울 고향에 돌아와서 곡성에 살던 한정자와 혼인을 한 그는 이듬해 단체가 해산되자 다시 집에 돌아와 있다가, 스물한 살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제대한 뒤에 구례농고에서 농악반을 만들어 강사로 초빙하자 3년 동안 농악강사로 다니면서 학교측의 도움을 얻어 못 배웠던 중학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뒤 전주농고에서 4년쯤 가르치고, 수지중학교에서 2년쯤 가르치다가 서울에서 농악학원하는 사람의 초빙을 받아 가르쳐도 봤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점점 활력을 잃어가는 농악의 현실에 대해 매서운 항변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농악은 없어져 버리고 말어. 여그도 민요니 농악이니 찾으러 다니는 사람들은 많이 오지만 다 필요없어. 학생들은 현실적으로 논문이나 쓰고, 정부는 말로만 농악 진흥한다고 떠들고, 교수나 학자는 농악을 골동품으로 취급하고, 신문이나 잡지는 어쩌다가 한 번씩 쓰고는 생색내고, 그래가지고는 아무것도 안돼. 정부가 정책적으로 농악연구실이든 뭐든 그런 것을 만들어서 기능을 가진 사람을 급료를 주어서 생활 걱정 안 하고 연수하면서 문하생을 가르치게 하고, 모든 학교 교육에서 의무적으로 농악을 배우게 하기 전에는 절대 살어날 수가 없다고 봐.”

그러나 그는 항변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고향의 농악을 살리기 위해 발벗고 나섰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남도문화재나 민속경연대회나 전주대사습과 같은 농악 발표회에 나가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여 남원 농악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지금 그는 남원 농악의 대부로서, 또 전라도를 대표하는 농악의 예인으로서 존경과 사랑 속에 행복한 말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호리호리한 몸매와 안경낀 눈 뒤에서 총명하게 빛나는 예인의 재능은 어려서부터 일찍 꽃이 피었고, 그 꽃은 고향의 땅에서 향기를 품어내며 활짝 피어난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나라 골골에서 이러한 예인들의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길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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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에 종로구 효자동에서 태어난 안비취 명창은 어려서부터 춤과 노래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신동이었습니다. 

"어려서 할머니가 내 당사주를 보면 춤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대요.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할머니가 어쩌다 무당을 불러다 집안에서 굿을 벌이면 하루 종일 구경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는 걸 흉내내곤 했지요. 학교 다닐 때도 춤추고 노래 부르는 소질이 뛰어나서 선생님들께 칭찬을 듣곤 했어요."
 
그러나 그녀가 춤 추고 노래 부르는 것에 대해 집안에서는 절대 반대였습니다. 아버지는 펄펄 뛰고, 오빠는 집안 망신이라며 동생이 노래 부르면 자살까지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녀가 말을 안 들으니까 목을 쳐서 죽여 버리라고까지 난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 죽어도 춤과 노래를 배우고 싶었던 그녀는 당차게 집을 뛰쳐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청운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니까 열세 살 무렵의 일입니다. 요샛말로 하자면 무단가출을 한 셈인데, 그녀의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하숙비와 학비를 보내 주신 덕에 청진동에 하숙을 구한 뒤 조선권번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조선권번에서 그 당시 궁중 음악과 궁중 무용의 최고 권위자였던 하규일 명인에게 꿈에도 그리던 춤과 노래를 배웠습니다. 예전에 권번은 그 학습 내용이나 분위기가 요즈음의 예술 학교보다도 더 엄격하고 열심이었습니다. 

하규일 명인은 이왕직 아악부에 계시면서 조선 권번의 학감을 겸했는데, 체구가 자그마한 분이 어찌나 엄하고 무서웠던지 모두들 어려워 말도 제대로 못 붙였다고 합니다. 

하규일 선생의 동상. 출처 : http://cafe.daum.net/abchouse/Yda/882

그녀의 예명인 '비취'도 하규일 명인이 지어 주셨습니다. 본명은 안복식인데 얼마 동안은 왜 그런 이름을 지어 줬느냐고 물어 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조금 지나서 슬그머니 물었더니 비취는 빨갛고 파란털을 가진 조그맣고 맵시 있는 새의 이름인데, 그녀의 인상이 그 새처럼 귀엽고 예뻐서 그렇게 지어 주셨다는 거였습니다. 

이처럼 겉으로는 엄했지만 속으로는 정도 있고 멋도 있던 하규일 명인에게 가곡과 가사와 함께 <춘앵전>, <연화대무>, <사고무> 와 같은 궁중 무용을 2년 동안 배우고 졸업을 할 무렵에 그만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하 명인이 돌아가신 뒤에는 수제자인 이병성 명인에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분들은 모두 궁중 음악과 궁중 무용을 하신 분들이라 민속 음악이나 민속 무용은 절대 못하게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민속 음악과 무용 쪽에 점점 더 끌려들어 갔습니다.그래서 선생님들 몰래 그 당시 민속 무용의 최고 권위자인 한성준 명인에게 승무를 배우고, 경·서도 민요의 최정식 명창에게 12잡가를 배웠습니다.

경·서도 민요는 '긴잡가'와 '잡잡가'로 나뉘어집니다. 긴잡가는 <유산가>, <제비가>, <춘향가>, <십장가>, <적벽가>, <선유가>, <출인가>, <박물가>, <평양가>, <집장가>, <형장가>, <달거리>의 12잡가를 말하고 잡잡가는 흔히 경기 민요니 서도 민요니 하는 것들입니다. 잡가라고 하니까 잡스러운 노래 같은 인상을 주지만 그게 아닙니다. 판소리의 다섯 바탕, 다섯 마당과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잡가 열두 마당, 열두 바탕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맑고 튼튼한 목소리를 타고 났습니다. 

"판소리하는 분들은 피도 토하고 똥물도 먹는다는데, 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한 번은 백일 기도를 하면 산신이 도와서 명창이 된다고 하길래 지금의 청와대 뒷산 약수터에서 백일 공부를 했는데, 그때도 목이 쉬지 않았어요. 새벽에 산책나온 노인들이 너무 연습을 많이 하면 목이 상한다고 조심하라고 했지만, 조금 부었다가 다시 풀리고 해서 이날까지 목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어요. 그렇게 공부를 하다가 최정식 선생님을 따라서 ‘깊은 사랑’ 에 간 뒤 소리꾼으로 인정을 받았지요."

예전에 땅속에다 움을 파고 방을 꾸며 놓고서 사람들이 모여 놀도록 되어 있는 곳을 '깊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반지하 사랑방' 같은 곳인데, 이름도 근사한 이곳이 음악가들에게는 사설 공연장 역할을 했습니다.

"선생님을 따라서 선배 언니들 하고 그곳엘 갔더니, 보료 깔고 병풍 치고 노인네들이 빙 둘러앉아 있는 거예요. 그곳에서 밤을 새워 소리를 했지요. 그분들이 말하자면 서울에서 소리 속을 제일 깊이 아는 귀명창들이예요. 그분들 앞에서 심사를 받은 겁니다.
큰절을 한 다음 단정하게 앉아서 시조 여창, 남창에서부터 긴잡가, 잡잡가까지 내리부르는데 꼼짝않고 앉아서 듣고 계시다가 중간에 잠깐 쉬면서 담배를 피우시고 다락문을 열어 연기를 뺀 다음 다시 꼼짝 않고 앉아 계시는 거예요.
저희들도 귤, 소금, 날계란만 조금씩 먹어 가면서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눈 한 번 못 돌리고 소리를 했지요. 하고 났더니 그분들이 이런 저런 평을 하시면서 유망하다고 하시더군요. 그때는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천정이 낮으니까 소리가 퍼지지 않고 내리 누르는 통에 혼이 났는데, 그래도 잘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뛸 듯이 기쁘더군요. 그게 말하자면 소리꾼이 되는 신고식 같은 거라고 할까요?"

그렇게 어려운 신고식을 치른 뒤부터 그녀는 방송에도 나갈 수 있게 됐습니다.

열다섯 살 무렵, 첫 방송을 나가게 됐을 때입니다. 잔뜩 긴장한 채 옷을 입고 화장을 하며 부산을 떨고 있자니 경성 방송국에서 보낸 차가 왔습니다. 최정식 명인, 선배 언니 둘, 그리고 대금 잘 불기로 유명하던 김기선 명인, 그녀 이렇게 다섯 명이 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어찌나 사지가 떨리는지 두 손으로 무릎을 꽉 잡고 벌벌 떨고 있었더니 김기선 명인이 그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비취야!"
"네?"
"내가 호도를 가져올 걸 그랬다."

그녀는 무슨 말씀인가 하고 어리둥절해서 대답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김기선 명인이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릎을 그렇게 꽉 잡고 있으니 무릎 사이에다 호도를 넣으면 깨질 것이 아니냐?"

차 안이 웃음바다가 됐지만 어린 그녀는 어찌나 떨리는지 웃지도 못했습니다. 방송국에 들어갔더니 다다미 방에 마이크가 있고 그곳에서 노래를 하는데, 김 명인이 또 그녀에게 농담을 하는 거였습니다.

"비취야!"
"네?"
"네가 명창이 되고 싶지?"
".........?"
"네가 명창이 되려면 이 마이크에다 큰절을 해라."
"아이, 싫어요!"
"싫으면 관두려무나, 여기 처음 오는 사람은 다 큰절을 하는데, 안 하는 사람은 명창이 못 된다. 그러니 명창되기 싫거든 그만둬라."

안비취 소녀가 둘러보니 김 명인의 얼굴 표정이 아주 진지하고, 주위 분들도 그렇다는 표정들을 하고 계셨습니다. 소녀는 쑥스럽긴 했지만 큰절 한 번하고 명창 소리 듣는 게 낫겠다 싶어 마이크 앞에 엎드려 곱게 큰절을 했습니다. 그러자 또 한 번 웃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뒤 두고두고 그 일이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참 소박했던 시절의 일화입니다.

그때가 1940년이 지났을 때이니 한창 태평양 전쟁중이었습니다. 

공출하고, 징용나가고, 아주 험악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녀는 선배나 선생님들을 따라 군부대에 위문 공연을 다니며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때 국악이 없어질 뻔했어요. 가사까지 일본말로 불러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실망도 되고 회의도 생겨서 열여덟 살에 강기준이라는 은행원의 재취로 들어갔지요."

해방 후에는 승무, 판소리, 민요, 민속, 만담을 한데 섞어 가설 무대를 꾸민 단체와 함께 다니기도 했습니다. 신불출이라는 불세출의 만담가가 꾸민 단체였습니다.

"신불출씨는 정말 대단한 분이셨어요. 안경 쓰고 인물은 못 생겼는데, 어찌나 재주꾼인지 말도 못 해요. 그 분이 만담을 하면 울다 웃다 사람들이 정신을 잃을 지경이예요. 연극에 연출에 만담에 모두 다 천재예요. 거기다가 왜정 때는 유치장을 자주 드나드셨지요. 만담 중에 애국적인 말을 꼭 집어넣었거든요. 겁 없이 막 해댔죠. 6.25때 북으로 올라가셨다는데 지금은 어찌 됐는지 몰라요." 

그러나 유랑극단의 고생은 말로 다 못 할 지경이었습니다. 출연료를 못 받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밥값 못 내서 여관에 잡혀 있기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래도 그때가 그립네요. 요새는 주로 현대식 극장에서 공연을 하지만, 분위기나 관중과의 일체감이 옛날의 가설 무대만 못한 것 같아요." 

1959년 해방 후 처음으로 <춘향전>을 가지고 일본에 교포 위문 공연 갔을 때의 일화도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연출은 최상덕과 이서구와 박진 씨가 공동으로 맡았고, 박귀희 명창과 임춘앵 명인이 번갈아서 이도령을 맡았고, 연극 배우 복혜숙 씨가 고창현감, 그 당시 최고의 판소리 명창이었던 임방울 씨가 운봉현감을 맡았고, 그녀는 행수 기생을 맡아서 변사또 잔치 때 '춘향무'를 잠깐 췄습니다. 

"하루는 임방울 씨한테 제가 불평을 털어 놨지요. 지루해서 못 살겠으니 얼른 고국에 갔으면 좋겠다구요. 그랬더니 ‘그거 큰일났군요.’ 하시대요. 
그날 저녁 고오베에서 공연을 하는데 이도령이 어사출도를 해서 난리가 난 판인데, 객석에서 ‘와’ 하며 웃음소리가 나는 거 아녜요? 그래서 보니 운봉현감 분장을 한 임방울씨가 빤스만 입고 아랫도리를 홀랑 벗은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더니 장치로 쓴 기둥에 올라갔다 미끌어지곤 하며 난리를 부리니 이도령이고 춘향이고 배를 잡고 난리가 났지요.
어찌어찌 그 장면을 간신히 끝내고 나오니까 임 선생님이 ‘이젠 지루한 게 좀 풀리셨습니까?’하시는 거예요. 어찌나 우스웠던지 지금도 기억이 새로와요."

출처 : http://www.gugakcd.pe.kr/music_detail.a...SSCD-011

1962년에 초대 회장 이소향 씨 뒤를 이어 2대 민요연구회 회장이 된 뒤 우리 음악의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다 1975년에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영달보다 우리 음악의 쇠락에 대해 더 마음 아파했습니다. 

“옛날에는 후진들이 좋은 선생님 모시려고 돈을 싸가지고 다녔지요. 요샛말로 레슨을 한 번 받으려면 학비 말고도 담배 사드리고 양칫물 떠다 드리고 갖은 정성을 다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가 되었어요. 선생님이 제자를 모셔야 돼요. 소리 공부 열심히 하라고 나무라면 오히려 제자들이 선생님같이 고생하고 사시려면 뭐하려고 배우느냐면서 나를 나무란답니다.
그러면 내가 한마디 하지요. 내가 처음 이걸 배울 때는 돈을 벌려는 것도 아니었고, 인간 문화재 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소리가 좋아 소리에 미쳐서 집까지 뛰쳐나와 노래부르고 살다 보니 예까지 왔다. 노래 못 부르면 죽는다 하고 스스로 미쳐서 해야지 돈 벌려고, 인기 얻으려고, 문화재 지정받으려고 하다 보면 좋고 바른 소리가 나오지 못하는 법이며 곧 실망할 것이라고 하지요. 헌데 그 말이 먹혀 들어가질 않아요.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죠.”

출처 : http://www.gayo114.com/musicColumn/musi...Fno%3D71

서른네 살 때 남편을 잃고 혼자서 자녀들을 훌륭하게 길러낸 그녀는 노래하다가 죽을 수만 있다면 행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소망대로 1997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곱고 화사한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다가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화려하고 밝은 모습 한켠에는 우리 음악의 미래에 대한 어둡고 쓸쓸함이 묻어 있어 저를 가슴 아프게 했습니다.

"말할 수 없이 외롭습니다. 소리를 들어 주는 사람도 갈수록 줄어들고, 제자들도 딴 생각만 하고, 방송에서까지 외면당하는 실정이니 더 외롭지요. 수백 년 수천 년을 내려온 우리 노래들이 수십 년 사이에 대중가요의 그늘에 묻혀 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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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도솔가>가 만들어진 내력을 이야기하는 내용 중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신라 경덕왕 19년인 서기 760년, 하루는 해가 둘이 떠서 서로 교대하여 지지 않는 괴변이 생겼다.
그러자 일관이 말하기를 '범패승'을 데려다가 <산화공덕>이라는 노래를 부르면 괜찮을 것이라고 하여 왕은 단을 쌓고 범패승을 기다렸다.
그때 월명이라는 중이 지나가므로 왕이 불러 '범패'를 부르라 하니, 그 중은 오직 향가만을 알 뿐 '범패'를 모른다고 했다.

향가를 잘불렀던 월명스님도 부를 줄 몰랐던 인도음악인 '범패'는 아마 그 무렵에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절에서 재를 지내거나 예불을 올릴 때 쓰이게 된 듯합니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지내는 제사인 <상주권공재>, 저승의 십대왕에게 행운을 비는 의식인 <십왕각배재>, 물속의 외로운 혼을 위로하는 제사인 <수륙재>, 국가의 안녕이나 죽은 자를 위해서 지내는 제사인 <영산재>와 같은 의식을 거행할 때 부르는 노래인 범패는 가곡, 판소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성악곡 중의 하나로 꼽힙니다.

범패를 부르는 범패승.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00138648

서양의 그레고리 찬가처럼 장단도 없고, 가락도 없고, 감정도 없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한없이 느리게 부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요즘의 음악 정서와는 너무도 다른 먼 옛날의 이국적이고도 원시적인 음악 세계를 느끼게 됩니다.

깊은 산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범종 소리같이 그윽하고 고요하고 심오한 범패 소리는 경건한 종교 음악인 탓에 부르는 태도도 세속의 노래와 사뭇 다릅니다.

“고개를 흔들고 눈을 두리번거리면 안돼. 몸도 흔들지 말고, 뜻을 생각하면서 정성스럽게 잡념을 몰아내고 무아의 경지에서 소리를 해야지.”

범패승('어산' 또는 '인도승'이라고도 합니다)인 벽응 장태남 명인은 경기도 김포군 월곳면에 있는 ‘문수사’라는 작은 절의 주지였습니다.

겨울날씨답지 않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80년대의 어느 날, 문수산 자락에 자리잡은 문수사 안방에서 만난 귀가 크고 길며 미간이 넓고 흰 눈썹이 길게 돋은 스님에게서는 맘씨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와 같은 인자한 분위기가 풍겨왔습니다.

1909년 경기도 파주군 장마루촌에서 농사짓는 장용식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을 때만 해도 그의 집은 근방에서 알아주는 부잣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삼 년을 내리 흉년을 당하고 나니 싸그리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첫해는 홍수가 져서 남의 논은 다 놔두고 우리 논만 물에 실려가 농사를 망치더니, 둘째 해는 이상한 돌림병이 들어서 벼이삭이 픽픽 쓰러지는 통에 농사를 망치고, 셋째 해는 한참 잘 자라던 벼가 된서리를 맞아서 다 죽어 버렸어. 그렇게 삼 년을 연속 망하다 보니 완전히 폐농이 되어 버렸어.
아버님은 성미가 장대같이 곧아서 빚지고는 못 사는 분이라 땅 팔아서 빚갚아 버리고, 아들들은 남의 집에 머슴으로 나눠주고, 여기서 강만 건너면 갈 수 있는 장단이라는 이북땅에 ‘화장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에 나무도 때주고 잡일도 하는 부목으로 들어갔어. 그때 내가 여덟 살 때라.”

길게 머리를 땋고,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짚신을 신고 절에 간 소년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게만 여겨졌습니다. 여스님들만 모여 사는 미타암 곁에 있는 집에 이사한 뒤 부목으로 들어간 아버지는 가자마자 절에서 나무를 패고 불을 땠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이 왔다갔다 하는데 난 처음에 남잔 줄 았았지 . 그런데 목소리를 들어보니 여자야. 여자가 머리 빡빡 깍은 모습을 생전 처음 보니 참 이상해. 제사를 지낸다고 인절미를 하고, 가래떡을 하고, 과일을 깎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한 비구니 스님이 오더니 ‘부처님 종 땡땡 울리고 나서 이 인절미 먹어라.’ 하더란 말이야. 나를 거지로 알고 그러시나 싶어 창피하여 그 길로 집에 도망가서 한 사나흘을 절에 안 갔지.”

처음에는 수줍어서 며칠 안 갔지만 그뒤로는 낯이 익어 매일 절에서 살다시피했습니다. 제사할 때 봉지에다 사과, 밤, 대추를 싸서 나눠주고 떡도 먹고 과자도 먹으며 밤새워 노는 모습도 재미있었고, 머리 깎은 여스님들이 종치고 예불 올리는 염불 소리도 듣기 좋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같은 또래의 사미스님들과 절 뒷산에서 토끼를 쫓고 밤도 따고 칡도 캐며 노는 재미가 으뜸이었습니다. 그런데 짓궂은 빡빡머리 사미스님들은 어린 신도의 긴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놀려대곤 했습니다. 긴 머리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되기 싫었던 소년은 어머니에게 머리를 깎아달라고 졸랐습니다.

처음에 반대하던 어머니는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해 드디어 열세  살이 되던 해의 삼월 삼짓날에 머리를 깎고 계를 받은 뒤 사미승이 되었습니다.

화장사에는 극락암, 죽두암, 미타암 같은 암자가 아홉 개 있었는데 한꺼번에 제사를 지낼 정도로 신도 수가 많았습니다. 그런 만큼 재를 올릴 때의 노래인 범패나, 나비춤, 바라춤을 잘 하는 스님이 많이 있었습니다.

큰 재를 올릴 때는 밖에서 유명한 범패승을 청해 들였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귀동냥, 눈동냥으로 모든 의식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수계스님인 황청하 스님에게 벙패를 배울 때에는 함께 배우는 동료 중에서 제일 잘 한다고 칭찬을 듣곤 했습니다.

“황청하 스님은 서울에 있는 화계사에서 오셨는데, 화계사는 어찌나 재가 많았는지 화계사 부목이 공양재를 할 줄 안다고 할 만큼 큰 절이여. 그분에게서 기초를 배우고 우리 절의 사형인 김보성 스님에게 훗소리를 배웠지. 그뒤 그분의 스승인 이범호 큰 인도스님에게 짓소리를 마저 배웠어.”

절에서 쓰이는 노래는 음악적인 형태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나뉩니다.

재를 올리는 의식을 담당한 '안채비'들이 부르는 <안채비소리>, 다른 곳에서 초청해온 범패 전문 스님들이 부르는 <겉채비소리>, 그밖에 민속 음악의 가락에 가사를 얹어서 부르는 <화청>이나 <회심곡>이 있습니다.

안채비소리는 흔히 <염불>이라고 알려져 있는 노래로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을 민요의 엮음 가락처럼 촘촘하게 엮어 나갑니다.

겉채비소리는 '훗소리'와 '짓소리'로 나누어지는데 좁은 의미의 범패는 이 겉채비소리만을 가리킵니다.

훗소리는 대개 한문으로 된 찬양시를 혼자서 길게 부르는 형식이고, 짓소리는 훗소리를 모두 배운 범패승들이 한문으로 된 산문이나 산스크리트어로 된 경전을 반드시 합창으로 부릅니다.

예전에는 일흔두 가지가 있었다고 하나 오늘날에는 거의 사라졌고, 몇몇 범패 스님이 '인성', '거영산', '관욕게', '식영산', '거불'과 같은 열세 곡만을 부를 수 있을 뿐입니다.

고고형이 1929년에 지은 <이조불교>라는 책에 보면 “근년까지 경성 교외 백련사에 만월이라는 노승이 있어 범패로 유명하였다. 원래 경성의 동서산에 각각 만월이 있어 실력이 서로 백중하였다. 이 만월은 서만월이라고 한다.” 고 씌여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서만월의 여러 제자 중에 이범호 스님이 있고, 그 스님의 제자로 김보성 스님이 있으니, 장태남 스님은 서만월의 손자 제자뻘이 된다 하겠습니다.

“이 범패가 하도 어렵고 재미가 없어서 모두들 조금씩 배우다가 다 나가 떨어지고 제대로 못 배웠어. 그런데 나는 재미를 느껴서 혼자 산에서도 익히고 길 가면서도 익혀. 그러니 선생님들이 재주가 있다고 귀여워 하셔.
내가 음악에 재주가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라. 우리 절이 박연폭포 가는 길에 있어서 폭포에 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우리 절에 들렀다 원통사에서 자고 가는데, 이 사람들이 장구 치고 호적 불고 떠들썩하게 놀아. 그 호적소리가 어찌나 듣기가 좋은지 혼자서 호적 들고 산골짜기에 들어 가서 흉내내어 불어. 그래서 들려주면 모두 잘한다고 해.
그 후 호적 불고 박연폭포까지 길 안내하기도 했지. 한번은 서울에 갔는데 동양극장 단원들이 손님을 청하느라 풍물을 치고 대취타를 불면서 거리를 누비는데 산에서 못 들어본 정통 소리라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들어서 귀에 익혔어. 그래도 귀동냥으로 배운 소리라 처음과 끝을 몰라. 그래서 동대문 밖 숭인동에 있는 방생원에 있으면서 윤만순 씨라는 분에게 제대로 길을 닦았지.”

화장사를 근거로 삼고, 서울 홍은동의 백련사나 숭인동의 방생원을 연락처로 삼아 여기 저기 다니면서 젊은 범패 스님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스물한 살 때에 어떤 스님의 손녀딸로 어머니가 데려다 길러 온 처녀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때는 대처승과 독신승이 서로 다투지 않던 시절이라, 결혼한 뒤에도 계속해서 전국을 떠돌며 이 절에서 저 절로 재를 지내러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서른한 살이 되던 해에 몸담고 있던 화장사를 떠나 서울 청담동에 있는 삼각사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설흔 살 무렵인가 백련사에서 범패 인간문화재로 함께 지정을 받으신 박송암 스님을 처음 만나 같이 범패를 부르고 재미있게 놀았지. 그러다가 헤어졌는데 황해도 성불사에서 만나 한 번 같이 불렀어. 그후 봉원사에서 본격적으로 같이 범패를 불렀는데, 그 친교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어.”

박송암 스님과 그는 마치 서만월과 동만월이 쌍벽을 이루었던 것처럼 우리나라 범패의 우뚝 선 두 봉우리였습니다.

송암 스님의 목소리가 맑고 청아하고 고음이 잘 나오는데 견주어서, 벽응 스님의 목소리는 무게 있고 깊이 있고 포근하고 구수하고 담담하고 저음이 잘 나옵니다.

서로의 특색 있는 목소리로 화음을 이루어가며 그들은 젊은 범패스님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의 어수선한 시국에 그들 역시 범패만 부르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젊은 스님들은 징용으로 끌려가고 서른이 넘은 스님들은 보국대란 명목으로 부역을 나가야했던 시절에, 그는 김포공항 길 닦는 보국대에서 한동안 일을 하다가 강화 황산도에서 길 닦는 중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일을 하던 중 비행기가 날아와서 폭격을 하는데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그 며칠 뒤에 집에 가서 들으니 사람들이 천황폐하가 항복했다고 수군수군해. ‘목 달아날 소리 하지도 마라.’고 하고서 길로 나오니까 양철통이나 세숫대야를 두들기면서 만세를 부르고 난리가 났어.”

절에서도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던 그들인지라 해방은 무척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사찰령'은 그 감격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습니다.

대처승은 왜색이라고 하여 독신승과 구별하여 태고종과 조계종을 갈라놓은 게 탈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전까지는 한 승적에 같이 올라 사이좋게 지내던 대처승과 독신승이 수십 년간 피투성이 싸움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조계종과 태고종이 옛날부터 갈라져 싸워온 것과 같은 인식을 사람들에게 주었고, 범패를 위주로 하는 태고종의 의식은 멸시받고 소외당했습니다.

절에서 재를 올리기 위해 할 수 없이 청하기는 하지만, 옛날처럼 다정하고 우호 있는 분위기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편견이 점점 굳어져 가고 있는 것을 벽응 스님은 못내 안타까워했습니다.

“범패 뿐만 아니라 불교 의식을 거행할 때 바라춤, 나비춤을 추는 것을 '작법'이라고 하는데, 범패스님들은 모두 그것을 할 줄 알지. 그런데 어떤 스님들은 중이 무슨 춤을 추느냐며 못마땅하게 여긴단 말이야. 이것이 모두 해방 뒤에 생긴 편견들이지.
그리고 가사짓는 법, 가사 입는 법에서부터 가사 색깔까지 지금은 마구잽이야. 제대로 아는 이가 없어. 그래서 내가 중곡동에 있는 원릉원이란 곳에서 불교의 의법을 가르치는데 모두 어렵고 까다롭다고 나가 떨어져. 그러니 옛법은 이제 모두 망가졌어.”

바라춤을 추는 범패승. 출처 : http://www.mediabuddha.net/print_paper....r%3D2503

자기가 입는 가사를 손수 바느질해 가며 옛법대로 지어서 입을 만큼 고지식하고 경건한 그는 지나치게 옛법을 무시하고 참선과 경전에만 치중하는 요즘의 풍토를 못내 안타까워 했습니다.

6.25때 피난 와서 잠깐 묵은 뒤, 주지가 열반하자 여러 사람의 권고로 눌러 앉게 된 문수사 주지 노릇을 하면서 몇 번이나 구석지고 가난한 절을 떠나 서울로 올라갈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동네 주민들이 말리는 통에 그곳에서 평생을 지내다 열반하셨습니다.

“절동네 쳐놓고 부처님 신심 있는 동네가 없는데 여기는 신도가 많아. 이곳이 가난한 동네라 어떤 신도는 ‘뭐가 있어야 부처님께 바치지.’ 하고 걱정을 해.
그럼 내가 ‘부처님이 당신더러 뭐 가지고 오라고 했소? 당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논에 가서 보리 이삭 떨어진 거 주워. 그걸 절구에다 찧어서 보리공양 올리고 부처님한테 기도 드려.’ 하면 그들은 ‘그래도 돼요?’ 하고 되물어. 되고 말고가 어디있나 정성이 문제지.
절이란 데가 쌀이 흔한 곳이야. 여름이면 바구미가 나고 쌀이 썩다시피 해. 보리 고개 때 가난한 사람들이 쌀 얻으러 와. 열 말을 얻어가면 가을에 열닷말을 가져와. 이게 뭐냐고 물으면 장리래. 이자라 이거지. ‘나는 고리대금업자 아냐!’ 하고 호통을 치고 도로 주어 보내. 그 덕에 인심을 잃지 않고 지낸 모양이야. 내 소원이 고아원이나 양로원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그 꿈을 영영 이루지 못하고 한세상 가는가봐.”

장태남 스님. 출처 : http://www.lba.or.kr/gnu/inmul/list.php...ge%3D107

탄식 끝에 회색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범종을 두드리며 저녁 예불을 올리는 그의 모습에서 비로소 경건한 고승의 모습이 내비치고 있었으니, 이는 오로지 오동나무 떡갈나무 사이에서 산새를 벗삼아 아침 저녁으로 '음성공양'을 올린 그의 오랜 공덕 탓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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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역사 문제를 풀어봅시다.

1. 신라가 우산국을 정복한 이후 울릉도와 함께 우리나라의 땅이 되었음에도 일본이 자신의 섬이라고 주장하는 울릉도의 부속 섬은 무엇인가?
2.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3. 우리나라 왕조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1번은 어느 고등학교 2학년 '한국 근현대사' 기말고사 문제입니다. 그런데 학생들의 정답률이 50%가 안되고, 독도 대신 제주도, 마라도, 심지어 대마도까지 쓴 답안이 많았습니다. 2번과 3번 문제는 서울시내 중상위권 고교 3학년 2개 학급을 대상으로 냈는데, 오답률이 무려 68%였습니다. 

출처 : http://dokdo.kcg.go.kr/sub01/img_pop.as...5B5%25B5

지난 8월5일에 방영된 MBC <후플러스> 「국사, 안 배워도 그만?」편에서 취재 보도한 내용입니다. 

<후플러스>의 취재 내용은 참으로 심각하더군요. 많은 고3 학생들이 국사를 선택하지 않았고, 서울 시내 한 고등학교에서는 문과 입시생 중에 3명만 국사를 선택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몇몇 반을 샘플로 하여 중학교 수준의 국사문제를 고3학생들에게 내주었더니 정답률이 무척 낮았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이해하는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대부분의 학생들이 관심도 없고, 기억도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대한민국 학생들의 형편없는 국사 실력,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요?

역시 입시 교육을 주범으로 꼽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현재 수험생들은 사회탐구 11과목 중 4과목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무적으로 국사를 선택하게끔 제도화한 서울대 지망생을 빼고는 모두 윤리나 사회문화 같은 비교적 부담이 적은 과목들을 선택하는 실정입니다.

이과생들은 아예 관심도 두지 않는 국사과목이 문과생들로부터도 외면 받고 있는 실정이며, 교사들조차도 이를 묵인하는 현실이 고등학교 교실의 현재 풍경인 것입니다.

수많은 대학교 중 서울대만 국사 시험을 보니 서울대 지망생들만 국사 공부를 합니다. 역사교육에 대한 서울대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다른 대학들은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내년부터 고등학교 국사가 선택과목으로 바뀌게 되니 역사를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학생은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2009년 교육 개정과 관련해서 교과부는 모든 과목의 선택과목화를 추진하면서 국사과목도 학생들의 자율권에 맡기는 원칙을 세웠다고 설명합니다. 국사만을 표적으로 개정한 것이 아니라 공통 기본 교육 과정을 1년 줄이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상황이란 얘기입니다.

이런 원칙이 왜 생겼는지 알 수 없어도 일선 교육 현장에서는 입시에 필요한 '국영수' 위주의 수업으로 재편되면서 학생들이 기피하는 국사 과목은 축소될 것이 뻔합니다. 의도하지 않았다 하도라도 결과적으로 국사 교육은 축소될 게 불을 보듯 뻔한데, 교과부는 아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모양입니다.

「국사, 안 배워도 그만?」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다른 나라 역사교육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근래 몇 년 간 일본은 한일 관계의 역사를 왜곡하는 새 교과서 만들기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독도 관련 분쟁 및 군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역사 교육 현실과 우리와의 마찰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중화주의 사상 강화에 따라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자주 국가가 아닌 중국 변방의 식민지로 강등시키기는 동북공정 문제가 우리와의 역사 갈등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MBC가 이 문제를 취재한 이유는 이와 같이 주변국들의 역사 왜곡으로 인한 문제들이 심각한 상황에서 고등학교 국사 과목마저 선택으로 돌리면, 점점 우리의 젊은이들이 자기나라 역사에 무지한 인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시작된 듯합니다.

그 우려와 함께 독일 20%, 프랑스 15.5%, 일본 10.1%, 중국 9.4% 등 세계 주요국들의 역사교육 비율에 비해 5.4%로 현저히 떨어지는 한국의 역사 수업 비율을 비교해서 소개했습니다. 국사 수업 비중도 적을 뿐만 아니라 교육 내용도 부실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국사 교육을 선택으로 돌리고도 아무런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는 정부의 지나친 낙관주의와 비이성적인 역사교육 정책은 정말 큰 문제입니다.

오늘은 광복절입니다. 나라를 잃고 식민지 노릇을 한 후유증이 얼마나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지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날입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_blog/hdn/ArticleC...gOpen%3D

우리 역사의 소중함을 광복절이 일 년에 한 번 일깨워주는 효과가 있다면, 국사 교육은 평생 동안 일깨워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국가의 정체성 확립에 국사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아는 문제입니다. 세계화를 향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우리 민족이 생존과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는 바른 국사 교육을 통해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해야만 합니다.

지금같은 국사 교육의 부실이 심화되다 보면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라는 걸 노래방에서나 배우는 때'가 오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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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마을의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나, 비가 안 와서 기우제를 지낼 때나, 추석이나 정월대보름 같은 명절날에 놀이를 벌일 때나, 농사를 지을 때나, 집을 짓거나 다리를 놓을 때면 반드시 농악을 쳤습니다.

http://www.pttv.go.kr/pt/a1_NewsData_vi...6sstr%3D

이런 때 농악을 치는 풍물패들은 마을의 한 일원으로 마을을 위한 음악을 연주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을 예전에는 ‘두레패’니 ‘두렁패’니 하는 말로 불렀습니다. 이들은 풍물치는 것을 생업으로 삼지 않고 농사를 짓거나 다른 직업을 가지고 살면서 틈틈이 농악을 칩니다. 따라서 이들의 기예는 소박하고 집단적입니다.

이들과 달리 풍물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어디든지 떠돌아다니면서 농악을 치는 사람을 ‘뜬패’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어느 한 마을만을 위한 농악보다는 자기의 기예를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찾아다니기 때문에 기교가 뛰어나고 개인적입니다.

풍물패 중에서 꽹꽈리치는 사람을 ‘쇠잽이’ 또는 그냥 ‘쇠’라고 하는데, 이 ‘쇠’ 역시 그 활동의 모습에 따라서 ‘두렁쇠’와 ‘뜬쇠’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떤 ‘쇠잽이’가 두렁쇠냐, 뜬쇠냐 하는 구분은 간단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느 ‘뜬쇠’든지 처음에는 ‘두렁쇠’로 출발하는 법이고, 어느 ‘두렁쇠’든지 기예가 뛰어나면 ‘뜬쇠’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두렁쇠의 역할도 하고 뜬쇠의 역할도 하는 중간적인 사람도 있기 때문에 딱 잘라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살펴 볼 때 전라도의 산간 지방에서 행해지는 좌도 농악에 두렁쇠가 많고, 전라도의 평야지대에서 행해지는 우도 농악에 뜬쇠가 많은 것은 무척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좌도굿의 상쇠들은 가락이 고풍스러우며 다른 악기와의 어울림 곧 ‘합굿’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반면에 우도굿의 상쇠들은 가락이 화려하며 개인의 기예가 중심이 되는 ‘개인놀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상쇠 유순자 명인. 출처 : http://www.cjac.or.kr/home/cjac.php%3Fm...id%3D402

전라북도 김제군은 전라도에서 가장 넓은 김제, 만경 평야를 끼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당연히 전라우도굿 가락이 전해져 오고 있고, 이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꽹꽈리 치다 돌아가신 상쇠 김문달 명인 역시 두렁쇠보다 뜬쇠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

“백구면에서 김문달이 하면, 꽹꽈리땜시 논 열다섯 마지기 팔아 먹은 사람이라고 소문이 쫙 나 있어. 젊어서부터 한 번 집을 나갔다치면, 반 년이고 일 년이고 팔도를 돌아 댕기다가 일이 없으면 집에 와서 좀 쉬고, 그러다가 일이 생기면 또 훌쩍 떠나가버리고는 했응게. 그러니 집안 살림은 엉망이 되고, 가지고 있던 살림마저 거덜이 나버린 것이제.”

그 기질은 그의 부친 김치덕씨에게서 부전자전으로 물려받은 것입니다. 1907년 4월 10일에 김제군 백구면 부용리에서 태어난 그는 갓난 아기 때부터 부친이 치는 북소리와 풍물소리를 자장가로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의 부친은 백구면에서 유명한 한량으로 판소리를 좋아해서 소리북도 잘 쳤고, 농악을 좋아해서 자기 돈을 들여 농악단을 만들어서 치고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자니 자연히 살림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농 소리를 들을 만큼 재산이 넉넉하던 터라 김문달은 어린 시절에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때는 농사짓는 틈틈이 정월 대보름날에 지신밟기굿도 치고, 모내기를 끝내고서는 술맥이굿도 치고, 칠월칠석이나 백중 같은 날에는 사흘씩 굿을 치기도 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굿만 쳤다허면 신이 나서 따라 댕기는디, 내가 어쩌다가 꽹꽈리를 잡고 칠라고 허먼 어른들이 못 치게 말려. 그리서 동네 꼬마들끼리 모여서 오동나무 잎사귀로 고깔을 만들어서 쓰고, 양철 쪼가리 줏어다가 꽹꽈리를 만들고, 부엌에서 양푼을 훔쳐다가 징을 만들어서 우리끼리 두들겨대고 춤을 추고 놀았어. 그것이 어찌나 재미나던지 어른들도 껄껄거리고 웃었지. 나는 그때도 양철때기로 상쇠 노릇을 했어.”

꽹꽈리 치는 사람은 그 솜씨에 따라 맨 앞에서 치는 ‘상쇠’와, 그 다음에서 치는 ‘중쇠’와 맨 끝에서 치는 ‘종쇠’ 또는 ‘끝쇠’의 서열이 있습니다. 이 서열은 대단히 엄격해서 ‘중쇠’나 ‘끝쇠’가 상쇠가 되려면 대단히 오랜 경험과 숙달된 기량이 있어야 됩니다.

이 재주많은 '꼬마 상쇠'는 동네 어른들의 귀염을 받으면서 상쇠로서의 꿈을 무럭무럭 키워갔습니다. 서당글도 못 배우고 학교 문턱에도 안 가본 그의 관심은 오로지 꽹꽈리에 쏠려 있었고, 이를 안 아버지는 그를 정읍에 사는 김도삼 상쇠에게 맡겼습니다. 김도삼 명인은 우도굿의 대가로 전라도에서는 최고 ‘웃길’로 꼽히는 사람이었습니다.

김도삼 명인은 꽹꽈리에 미친 꼬마를 자식같이 사랑하며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꽹꽈리를 가르칠 때에는 매우 엄격하여, 따라 친 가락이 틀리거나 제대로 받아내지를 못하면 종아리를 때리곤 했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꽹꽈리를 배우고 상쇠가 지녀야 할 여러 기예를 배우는 동안, 그의 부친은 세상을 떠나고 그는 견습생에서 끝쇠가 되었습니다.

비록 끝쇠지만 당당히 판에 나가서 솜씨를 보인 지 몇 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스승인 김도삼 명인이 돌아가시게 되어 그의 수제자이자 중쇠였던 현판쇠가 상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도 한 계단 높아져서 중쇠가 되었고, 현판쇠를 따라다니면서 오륙 년쯤 친 뒤에 그는 스스로 독립해서 상쇠가 되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상쇠가 되자 그 역시 선배 상쇠들이 했던 것처럼 여기 저기 불려다니며 굿을 했고, 때로는 포장걸궁을 꾸며서 전국을 떠돌기도 했습니다.

“포장걸궁이란 것은 포장쳐 놓고 돈 받고 굿치는 것이여. 말뚝 한 스무 개쯤을 박아놓고 광목을 빙 둘러서 쳐 놓고는 십 전씩 받았어. 가끔씩 소리꾼도 불러다 함께 놀기도 했는디, 이놈의 것이 어떻게 된 게 회계를 보면 남는 때보다 밑지는 때가 많어. 그러니 논만 세 필지 팔아 먹고 때려쳐 버렸지.”

혼인을 해 놓고도 농사고 뭣이고 때려치우고 홀어머니를 맡겨 놓은 채 밖으로 돌아다니다가 섣달 그믐이나 팔월 열 나흘이나 돼서 얼굴을 비치고, 돈이 생기면 다른 색시하고 연애하는 데에 다 써버린 뒤 빈털터리가 되어서 돌아오는 신랑을 새색시 김순이는 군말 한 번 하지 않고 웃으면서 맞이하고 웃으면서 보냈습니다. 그러한 색시의 수더분하고 따뜻한 품에서 지친 몸을 쉬고 있던 그에게 이번에는 징용장이 덜컥 날아 들었습니다.

꼼짝없이 붙들려 기차로 엿새 동안을 타고 가서 나전이라는 곳의 굴 속에서 전기공사 작업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세 번 죽었다가 살아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작업하던 굴이 폭격을 받는 통에 한 번 죽으려다가 살아나더니, 그 다음에는 돌림병인 염병에 걸렸습니다. 같은 방을 쓰던 동료들이 모두 죽어가는 동안에도 그는 목숨을 부지하다가 병원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기차를 타다가 걷다가 하면서 한 달 열흘 만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질병과 굶주림과 피곤함으로 초죽음이 되어서 돌아온 그를 어머니와 부인은 지성으로 간호했습니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건강을 되찾은 그는 '배운 것이 도적질'이라고 또 다시 굿을 치고 다녔습니다. 이미 우도굿 상쇠로는 이름이 났던 터라, 해방 뒤에 왁자하게 벌어진 놀이판과 굿판에 여기저기 불러가며 신나게 굿을 치고 놀았습니다.

좌도굿에 견주어서 우도굿은 볼거리가 많고, 의상도 화려하고, 개인기가 뛰어나고, 가락도 다양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인기를 끌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오랫동안 포장걸궁을 다닌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관중의 수준과 판의 상황에 맞추어서 판을 짜 나가고 때로는 즉흥적으로 가락을 변화시키거나 재담을 넣거나 하여 지루하지 않게 판을 끌어가는 솜씨가 뛰어났습니다.

게다가 그는 꽹꽈리 솜씨뿐만 아니라 '부포놀음'도 뛰어났는데, 우도 농악의 부포는 좌도 농악의 상쇠가 쓰는 부들부들한 ‘부들상모’가 아닌 ‘뻣상모’를 씁니다.

뻣상모 도면. 출처 : : http://gugung.com.ne.kr/pungmul/pung07.html

기러기나 고니의 털을 엮어서 만든 부포의 물체 속에 철사를 넣어서 뻣뻣하게 만든 상모를 쓰고서 이리저리 돌리기도 하고, 세웠다 꺾기도 하고, 콕콕 찍기도 하고, 빙빙 돌렸다가 위로 발딱 세우기도 하는 재주는, 가락을 다 배운 뒤에도 따로 또 훈련해야 하는 어려운 재주입니다. 이런 재주가 솜씨있게 발휘되면 단조롭던 놀이판에 바짝 신명이 솟구치고 갑자기 생기와 활기가 넘쳐나게 됩니다.

이렇게 신명나게 굿을 치며 다니던 그에게 6.25 사변은 색다른 경험을 하게 해 주었습니다.

“전쟁이 났을 때 피난갈 데도 없고 히서 그냥 집에 있었는디, 인민군이 들어 왔어. 오더니 직업이 뭐냐고 물어. 그리서 농사를 짓는디, 그보다 꽹꽈리가 내 직업이라고 했더니 아 그러냐고 험서 내 손을 잡고 악수를 허고 좋아서 막 웃더란 말이여. 그리더니 북을 가지고 와서 둥둥 거림서 같이 치자고 허더니 대우를 기막히게 히 주더란 말여. 부자나 순경 가족들은 막 데려다가 죽이고 때리고 그러는디, 우리들은 아주 칙사 대접을 허고 동무, 동무험서 친허게 대허드라고. 그렇게 여름에 들어와서 가을에 추수헐 때까지 인민군이 있었는디, 추수허기 전에 우리 대한민국 군인들이 들어옹게 가들이 도망가 버리드만. 나참 인민군이 그렇게 농악을 좋아하는지 그때 처음 알았어.”

농악으로 인민군에게 ‘대우’도 받아 본 그는 전쟁이 끝나자 ‘백구농악단’을 조직했습니다. 자기와 함께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장구를 쳐 왔던 박판금 명인과 징을 치는 김성기 명인 등이 중심이 되어 이십 명쯤되는 단원을 모아 오륙 년쯤 돌아다녔습니다.

세 아들과 딸 한 아이가 아버지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만큼 맹렬하게 굿을 치고 다녔지만 남은 것은 빚과 단원들의 원망과 실의뿐이었습니다. 결국 ‘백구농악단’은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뒤로 그는 농악단 단장 노릇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단장이란게 기량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사교 수단도 좋아야 하고 돈쓰는 법도 알아야 하는데, 자기는 도무지 그런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줄을 뒤늦게야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단체에서 교섭이 들어오면 개인 자격으로 참가해서 상쇠 노릇을 했습니다. 그때 마침 지금의 익산인 이리에 농악단이 생겨나는 바람에 그는 이리농악단의 상쇠가 되어 각종 대회에 나가서 상을 휩쓸었습니다.

이리농악. 출처 : http://korean.visitkorea.or.kr/kor/ti/e...3D130040

“내가 나가기만 허먼 면대회든 군대회든 전주대사습대회든 전국 민속경연대회든 어디든지 가서 상을 타와. 일등을 못 허먼 이등이라도 타온단 말이여. 그 덕에 이리농악단이 1985년에 문화재가 됐지. 나는 기능보유자가 되고, 허참. 그런디 달랑 나 혼자만 이리에 가서 문화재가 되어 놓으니 우리 백구농악단들이 어찌나 서운히 허는지, 내가 시방도 마음이 아프고 그 사람들 한티 미안혀. 그 사람들 실력이 절대로 다른 농악단보다 뒤떨어지들 않는디, 단체가 없응게 활동을 못 헌단 말이여. 장구치는 박판금이는 시방 문화재가 되고도 남을 실력이여. 내가 볼 적에는 장구로는 시방 우리나라서 최고 실력자다 이말이여.”

그는 그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였습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아직도 백구농악단에 대한 정열과 자부심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걸 보면 “허리도 아프고 팔뚝도 아프고 잘 때는 ‘아이고’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아프다가도 꽹꽈리만 들으면 씻은 듯이 나아버린다.” 는 그의 말이 허술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작달막한 키에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쓴 눈가에는 검버섯과 주름이 돋아 있고 허리는 굽어 영락없이 쓸쓸한 시골 할아버지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꽹꽈리만 들면 갑자기 걸음새가 가벼워지고 사뿐거리면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눈에는 총기가 서렸던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방랑과 꽹꽈리에 미쳐서 보낸 곡절많은 예인의 한평생이 번쩍 한무리의 섬광으로 응축되어 나타나는 것만 같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숙연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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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시인의 <승무>는 전 국민이 애송하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훠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이 시에서 표현한 대로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을 나비처럼 곱게 차려 입고 그 위에 장삼을 입고 가사를 걸치고 길다란 소매를 허공에 뿌리며 추는 승무는 환상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종교적인 경건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출처 : http://juruby86.egloos.com/

우리나라 명무 중 승무와 살풀이춤의 대가로 꼽히는 이매방 명인은 자신의 승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을 하다가 그 사랑이 깨져서 중이 되었는디, 수도를 하다가 문득 옛날 생각이 나고 속세가 그리워 가슴 속에 왼갖 번뇌가 떠오른단 말이지요. 그래서 그걸 참다 못해 그 울분, 한 이런 것을 춤이나 북을 두드리는 것으로 해소할라고 추는 춤이 바로 승무라.”

불교적인 용어로 멋있게 설명하자면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기원하는 수도승의 내면 세계를 묘사한 춤이라는 말이 되겠지만, 그런 어려운 말보다 그의 말이 훨씬 현실감이 있어 보입니다.

이것은 그가 1927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뒤, 팔순이 넘은 지금까지 승무를 비롯한 전통 무용에 젖어 살아왔고, 특히 승무에서의 북춤은 제일인자라고 누구나 인정할 만큼 그 춤에 뼛속 깊이 통달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출처 : http://www.ibulgyo.com/news/read.asp%3F...%3D88236

“소리나 춤이나 타고 나야지 억지로 하면 안돼요. 관중이 천 명이고 만 명이고 간에 그 사람들을 잡았다 놨다 험서 관중들 오장을 속속들이 후벼 놓고 울려 놔야 명창이니 명무니 하는 이름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아무나 명창이 되고 명무가 될 수 있나요?”

스스로 자신의 춤이 명무라고 자부하는 것은 어려서부터 '춤추는 머시마'로 놀림을 당하면서도 한눈 팔지 않고 춤 속에서만 살아 온 자기 인생에 대한 자신감에서 우러나온 말이기 때문에 설득력을 지닙니다.

“세 살 때부터 누님들처럼 머리 땋고, 쪽 찌고, 머리 틀고, 치마 저고리 입고, 거울 앞에서 춤을 췄다니까 말해서 뭘 해요. 자라면서 남자애들하고는 안 놀고 맨 여자애들하고 소꿉장난하고 놀았어요. 주위에서는 이씨 가문에 만고에 없는 굿쟁이가 나올랑갑다 하면서 걱정들을 했지요.”

과연 주위에서 걱정한 대로 그는 일곱 살에 아버지 몰래 전라남도 목포 권번에서 이대조 명인에게 춤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대조 선생이 사실은 우리 할아버지예요. 우리 집안이 할아버지대까지 무업을 해 오다가 아버지께서 무업을 끊고 일체 자식들에게 그 일을 못 하게 했는데, 내가 다시 그 업을 이어받은 거지요. 그러니 피는 못 속이나 봐요.”

할아버지에게서 춤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허튼춤’을 배운 뒤에 광주에 와서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는 광주 권번에서 박영구 명인에게 승무와 북을 배우고 이창조 명인에게 검무를 배웠습니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ser...%3Dat007

“요새 와서 알게 된 건데 승무로 치면 내가 5대째라는 거예요. 맨 처음 승무를 창시한 분이 신방초 선생이고, 그 다음 이정선 선생, 그 다음이 김금옥 선생이고, 김금옥 선생의 제자로 한성준 선생과 박영구 선생이 있는데 한성준 선생 밑에서 한영숙 씨가 나오고, 박영구 선생 밑에서 내가 나왔다는 거지요."

승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뒤인 신라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고, 그밖에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주장이 있어 확실하게 단정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신방초 명인이 승무의 창시자라는 설은 문헌의 고증이 없으니 다만 원로 무용인들 사이에 전해 오는 계보를 추정해 올라갈 때 제일 ‘웃어른’으로 꼽히는 명인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는 게 무난할 듯합니다.

어쨌든 그러한 계보를 거쳐 전해진 승무를 그는 박영구 명인에게 회초리를 맞아가며 배웠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기가 막히게 춤을 추시고 소리북도 잘 치시는 멋쟁이였어요. 그런데 발을 약간 절어요. 그래도 춤추면 발을 저는지 몰라...
우리 선생님이 북을 치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물레를 타다가도 어깨춤을 절로 추곤 했으니께. 그 북가락을 내가 배우는디 참 배우는 방법이 옛날 식이라. 선생님이 북도 내주지를 않아서 함부로 칠 수도 없고, 감나무 가지 꺾어서 만든 북채를 가지고 입으로 몇 가락 배운 것을 돌담에서 혼자 돌을 두드림서 연습을 혀.
그러자니 손등이 벗겨지고 굳은 살이 박혀요. 다른 기생들은 힘들다고 다 집어치웠는데 나는 끝까지 버텼어. 선생님 눈치 봐서 기분 좋을 때 한 가락씩 사흘에 한 번 열흘에 한 번 그렇게 동냥하다시피 가락을 배웠어요. 요새 사람들이 들으면 야만적이고 원시적이라고 허지만 그렇게 배운 거라서 쉽게 잊혀지지 않아요.”

그렇게 '야만적이고 원시적으로' 배운 그의 북은 그 가락의 다양함이나 기교의 뛰어남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승무를 출 때는 누구나 ‘천수북’이라고 불리는 북을 앞에 놓고 북채 두 개로 ‘구래’라고 불리는 가죽 부분과 ‘변죽’이라 불리는 북 가장자리를 두드리며 북춤을 춥니다. 그런데 그 단순한 북춤 속에 엄청난 가락의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박영구 명인과 함께 서울에서 활동했던 명무 한성준은 승무나 학춤뿐만 아니라 소리북 잘 치기로도 당내에 따를 자가 없었지만 그의 북춤가락도 박영구 명인에 견주면 '재산이 많지 않다.'고 평가됩니다.

북춤의 ‘구정놀이’ 라고 부르는 여러 가락과, ‘세산조시’라고 부르는 휘모리의 여러 가락들은 농악 장단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풍물의 꽹과리 가락이나 장구 가락 그리고 북가락 등을 북채 두 개로 두드릴 수 있게 변화시킨 가락들이 대부분입니다. 거기에다 이매방 명인은 ‘엇머리’ 장단을 새로 창작하여 '재산'을 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북춤을 한번 보고 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북 가락은 싱거워서 들을 맛이 안 난다고 할 만큼 사람의 속을 울리는 묘한 힘이 있습니다.

“북춤 추는 시간이 삼 분에서 오 분 사이인데 남이 볼 때는 시원하고 쉬운 것 같아도 거기에다 엇붙임, 잉엇거리 같은 어려운 기교를 마스터 하려면 십 년 공부는 해야 돼요.”

그 역시 그 어려운 공부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공업학교 건축과에 다닐 때까지 계속했습니다. 열네 살에 명창 임방울이 주최한 명인 명창 대회에서 승무를 춘 뒤로 학교에서나 주위에서 ‘춤추는 머시마’라고 놀려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춤만 추었습니다.

그런 일과 함께 그의 성격은 더욱 더 여성화되어 갔고, 그 기질은 평생 동안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는 “한국 춤은 여자가 추어야 제 맛이 나고, 남자가 추더라도 여성적인 태도가 우러나야 그 맛이 제대로 난다.” 고 하며 여성화된 춤의 미학에 대해서 확고한 지론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탈춤이나 농악을 출 때의 춤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니 그것들과 비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승무나 살풀이를 추는 남자 춤꾼들의 거의 모두가 여성화되어 있고 여성화되지 않은 춤꾼이라도 씩씩하고 활발한 남성적 정서보다 부드럽고 연약한 여성적 정서를 위주로 춤을 추는 것에 대해서는 앞으로 우리 무용계가 풀어야 할 숙제로 꼽히기도 합니다.

“한국 춤은 덜렁이 왈가닥은 못 춰요. 성격이 차분하고, 얌전하고. 어딘가 애원이 깃들어 있고, 눈에 색이 흐르고, 그 눈에 변덕이 죽이 끓듯 하면서 온갖 감정을 나타내고, 슬프고, 아름답고, 어여쁘고, 수심이 가득 차고, 곱게 빗은 머리에서 머리카락 한 오라기가 살짜기 흘러 내려오듯이 교태가 있어야 그 춤이 제 맛이 나는 디 덜렁이 왈가닥이 어떻게 그 춤을 추어요?
장삼을 날리면서 그늘을 저어서 한을 만들어내고 고깔을 좌우로 놀려서 온갖 하소연을 해야 하는디, 요새 춤추는 사람들 보면 구르고 넘어지고 몸부림치고 가랑이 쩍쩍 벌리고 궁둥이 흔들어대니 그게 춤이에요? 지랄 염병하는 것이제.”

출처 : http://kr.blog.yahoo.com/siesindnochjung/2095

‘욕 대장’, ‘직사포’, ‘깡패’, '따발총‘이라는 많은 별명에 어울리게 그는 눈에 거슬리는 춤에 대해 매섭고 혹독한 비평을 큰 소리로 얘기했습니다.

문제야 어떻든지간에 그는 더욱 더 여성화되어 갔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을 따라 북경에 잠시 머물러 있을 때, 최근에 첸 카이거 감독이 만든 <매란방>이란 영화로 한국에도 소개된 적이 있는 중국의 전설적인 무용수 '매란방'에게 무용을 잠깐 배웠습니다. 그 뒤로 그는 매란방처럼 되는 것을 평생의 소망으로 삼을 만큼 깊이 빠졌습니다.

“매란방하면 우는 아기도 그친다던 유명한 무용가인데 남자에요. 기가 막힌 미남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여자 역할만 맡아서 여자 춤을 추면 여자고 남자고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어버린다니까요. 오죽하면 일본 천황이 반해서 자기 앞에서 춤을 추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했으니까요. 중국 평민들은 얼굴도 볼 수 없고, 그 사람이 공연하면 황제 귀족들만 와요.”

해방이 된 뒤에 목포 권번의 무용선생으로 있던 시절, 나이도 어리고 키도 작아 기생들한데 “뚜드려 맞기도” 많이 하다가 악극단이 유행하던 시절에는 ‘창공’이라는 단체를 따라다니며 밴드반주에 맞춰서 승무를 추기도 했습니다.

그뒤 광주 국악원으로 자리를 옮기고서는 전라남도 경찰국 선무 공작반의 무용단 단장이 되어 전남 일주 순회공연을 하기도 하고, 임방울이 만든 단체를 따라다니며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6.25 직후에는 육군 군예대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부산 유지들의 권유를 받아 부산 국악원의 무용강사 노릇을 하는 따위로 쉴 새 없이 떠돌아 다니며 춤을 췄습니다.

그러면서 북을 하나 놓고 치는 전통적인 '외고' 형식을 나름대로 바꾸어 보기도 했습니다.

1948년에 임방울이 목포역전 가설극장에서 명인 명창 대회를 열었을 때는 북을 셋 놓고 치는 '3고'를 선보였고, 1953년에 전라북도 군산에서 국악원 주최로 명인 명창 대회가 열렸을 때에는 '9고'를 선보였습니다. 1954년에는 서울 계림극장에서 ‘삼성 여성 국극단’의 창극에 특별 출연하여 '7고'를 선보였으며, 1955년에는 광주극장에서 ‘이매방 무용 발표회’를 열어 '5고'를 선보였습니다.

국립무용단의 북춤.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00354725

“요새 사방에서 북춤들을 많이 추는데 그게 어디서 나왔는지 아는 사람이 드물어요. 그런데 내가 만들어 놨으니까 하는 얘긴데, 외고나 삼고는 예술적인 가치가 충분히 있어요. 하지만 오고나 칠고, 구고, 십일고로 넘어가면 예술적인 면보다는 쇼적인 면이 강해요.”

젊어서 쇼무대에 나섰더라면 떼돈을 벌었을 터이지만 그런 유혹을 뿌리치고 본격 무대에서만 춤을 춰 왔다고 자부하는 그는 그뒤로도 서울과 부산을 왔다갔다 하면서 무용 발표회를 열고, 외국을 수없이 들락거리며 해외 공연을 하고, 국내의 중요한 무용 공연에는 어김없이 출연하면서 그 명성을 높여 이제는 웬만한 춤의 문외한도 승무와 이매방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최고의 지위를 굳혔습니다.

그러나 재운은 신통치 않아서 궁색한 살림살이밖에 남은 게 없다는 그이지만 돈과 처세에 무능한 자신의 성격을 별로 탓하는 기색도 없습니다.

“어느 기자가 어떤 무용과 교수 집에 한번 갔다가 뒤로 넘어지게 놀랐대요. 그 집이 대통령 집보다도 더 으리으리하고 궁궐 같았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집에 와서 보고는 또 한번 놀랐대요. 그 집에 비해서 너무 초라하고 가난해서 그랬대요. 그래도 나는 웃어요. 어수룩한 예능계에서 남 등쳐먹고 돈 벌어서 살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무용심사다 대학 입학이다 할 때 엄청난 돈이 왔다갔다 하고 나도 그럴려면 그럴 수 있어요. 허지만 난 못 해요. 그게 어디 예술가입니까. 사기꾼 날강도지.”

울분만 끓어오르면 술을 마시고 직사포처럼 거침없이 바른 말을 해대는 성격 때문에 손해도 많이 보고 몸도 많이 상한 그는 그 좋아하던 술을 딱 끊어버렸습니다. 술을 끊으니 성격도 변해서 남의 욕도 덜하게 되고, 제자들 가르칠 때에도 예전처럼 무섭고 사납게 굴지 않고 많이 부드러워졌습니다.

타고난 성격 탓으로 신식 문물보다는 옛 것을 더 좋아하는 그는 노래도 판소리나 육자배기를 좋아합니다. 신식 노래라고 해야 겨우 고복수, 황금심, 이미자의 노래를 들을 정도이고, 요새 노래에는 아예 귀도 열지 않습니다.

“춤도 그래요. 원형과 기본을 버려서는 안돼요. 아무리 창작도 좋지만 어떻게 한국 춤의 기본이 곡선에서 직선으로 바뀌고, 자연스러운 동작이 태권도 같은 현대 무용으로 변합니까? 창작을 하더래도 원형을 지켜 가면서 조금씩 해야지... 요새 젊은 무용가들의 춤을 보면 이게 춤인지 지랄발광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에요.”

이렇듯 고직식하다 싶을 정도로 옛것을 고수하는 그의 고집도 요새 와서는 조금씩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이 너무 바뀌어서 도무지 그의 고집이 먹혀 들어가지 않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새 대학생들은 승무 추면 다 졸아요. 승무에서 염불 장단이 제일 멋있고 춤도 맛이 진진한 법인데, 염불 장단만 나오면 다 꾸벅꾸벅 졸다가 갑자기 북을 치면 그때야 박수가 나와요. 요새는 뭐든지 빠르고 미친 놈처럼 흔들어대야 좋아하니 원춤대로 추다가 손님 다 가 버리고 나 혼자 추면 뭐 해요?”

그렇게 걱정을 하면서도 춤 추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는 그는 그런 걱정과 한을 오로지 춤을 추며 풀어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쓸쓸해 합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가 '얇은 사 하이얀 고깔'로 춤을 출 때 왜 그토록 격렬하고 격정적이며 때로는 가슴이 저리도록 애닯고 슬픈 울림을 주는지 조금은 알 듯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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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궁중음악과 민속음악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었습니다.

신분도 다르고, 음악의 성격도 다르고, 음악을 듣는 청중도 달랐습니다. 따라서 궁중음악인과 민속음악인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 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국악계 내부에 미묘한 갈등의 흐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 무형 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과 제39호 <처용무>의 예능 보유자인 김천흥 명인은 그런 갈등에서 무척 자유로운 분입니다.

그는 민속무용과 궁중무용, 민속음악과 궁중음악을 고루 익혔고, 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전통을 전수해 오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는 일들을 무리없이 해 온 분입니다.

1909년 2월 9일에 서울 중구 황학동에서 목수 일을 하던 김재희 씨의 셋째아들로 그가 태어났을 때, 우리나라는 이미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있는 참이었습니다.

1910년에 한일 합방이 되자 조선 왕실이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그에 따라 궁중 음악 담당 부서인 '장악원'도 해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년에 네 번 지내는 제사와 임금의 생일 같은 행사에는 궁중 음악인 '아악(雅樂)'을 연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허가를 얻어 서울의 서대문구 새문안 교회 뒷골목에 있던 '봉상소' 안에 ‘이왕직 아악부’를 설립했습니다. 봉상소는 궁중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이는 음식을 만들어 바치는 곳이었습니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궁중 음악가들은 그곳에 모여 일본 총독부에서 열리는 행사와 문묘와 종묘의 제사 때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1918년에 아악 부원 1기생을 모집하여 아악을 전수하고, 그들이 졸업하자 다시 1922년에 2기생을 모집했습니다.

소년 김천흥은 정동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서당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악부에 들어가면 공부도 시켜주고 장학금도 한 달에 15원씩 주고 학용품도 다 대준다는 말을 듣고 그 길로 2기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곳에서 3년 동안 일본어, 한문, 산수, 습자와 같은 일반과목과 종묘 제례악과 문묘악  등의 아악에 쓰이는 여러 가지 기초를 골고루 공부했습니다.

민속 음악이 사람의 귀에 여러 가지 정서를 호소하여 끊임없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데 견주어서, 아악은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하고 단정하게 만듭니다.

“즐거웁되 질탕하지 않고, 슬프되 비통하지 않고, 단아하고 담담한 음악이 참된 음악” 이라는 음악론에 따라 만들어진 아악의 음률을 듣노라면 마음이 가라앉다 못해 나중에는 지루해져서 하품마저 나올 지경이라, 여간한 정성과 인내가 없이는 쉽사리 이 음악과 친해지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요란하고 빠르고 자극적인 현대 유행음악에 길들여진 젊은이들에게는 역사극에서 나올 법한 차림을 하고 편종, 피리, 적, 소, 생황, 해금, 축어, 박과 같은 이상한 악기들을 하염없이 길게 느릿느릿 연주하는 아악의 연주 모습을 보게 되면 그만 한국의 고전음악은 이상하고 어렵고 재미없는 것이라고 단정지어 버릴 것입니다. 그만큼 아악은 대중의 음악 정서와는 전혀 다른 음악 세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악은 조선 왕조가 망하기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궁중의 제사나 외국사신 접대나 왕족의 생일과 같은 궁중 행사를 벌일 때에만 쓰이던 음악이었기 때문에 민중들은 그 음악을 들을 기회도 없었습니다. 

또한 아악에 종사하는 음악가들은 대대로 궁중에 몸을 담고 그 음악의 전통을 지키고 가꾸는 데에만 온힘을 기울였으므로 그들이 민속음악과 접촉할 기회는 매우 적었습니다.

“그때 우리를 가르친 선생님은 모두 여러 대에 걸쳐서 아악사 노릇을 해 오던 집안 출신이셨는데 지금의 교장격인 '아악사장'은 명완벽 선생님이었구, 그 밑의 '아악사'는 요새 교감 같은 건데 김영제 선생님과 함화진 선생님이 계셨어.
함화진 선생님은 <증보 가곡 원류>, <조선 음악 통론> 같은 귀중한 음악이론서를 남기신 분으로 거문고, 가야금, 양금을 가르치셨고, 김영제 선생님은 바깥 세상과 일체 왕래를 안 하시고 오로지 악기 공부에만 골몰하신 분으로 피리, 대금, 해금과 같은 악기의 악보를 채보하여 남기셨는데, 가야금과 이론을 가르치셨어. 그 밖에 '아악수장'이 여덟 분이 계셨고, 그 밑에 '아악수'가 여럿 있고, 또 그 밑에 '아악수보'가 있었지.”

이왕직 아악부에 들어간 이듬해인 1923년, 그의 나이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에 순종 황제의 50세 생일 잔치가 인정전에서 벌어진다는 계획이 세워지자 학교는 갑자기 부산해졌습니다.

아악을 연주할 때에는 여자 ‘무령’들이 춤을 추어야 하는데, 장악원이 해산됐을 때 무령들도 함께 해산되어 춤추는 일을 그만 두거나 권번에 들어가 기생 노릇을 하였으므로 그들을 다시 불러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 중에서 무동을 뽑아 춤을 가르쳤는데 김천흥도 무동으로 뽑혀 겨울 내내 아악부에서 합숙을 하면서 <춘앵전>, <장생보연지무>, <보상무>, <포구락>, <무고>, <수연장>, <봉래의>, <황연무>, <가인전목단>, <처용무>와 같은 궁중무를 배웠습니다.

“궁중무용이 한 마흔 가지가 되는데 내가 배운 것은 열 가지 쯤 되지. 그런데 이 춤은 한없이 느린 장단에 맞추는 몸짓이라 발걸음 하나, 팔 올리는 동작 하나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몰라.”

이렇듯 힘든 수련을 거쳐서 순종 임금과 왕후, 그리고 여러 왕족들과 일본 총독, 경무총감, 군사령관과 같은 거물들이 보는 앞에서 벌벌 떨면서 춘 춤이 그의 첫 무대가 되었습니다.

그후 1926년까지 춤과 음악을 익힌 그는 졸업할 무렵 학생들에게 전공 악기를 정해줄 때 “너는 몸이 약하니 해금을 하라!” 는 스승의 명령에 군소리 한 번 하지 못하고 해금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가다가 가다가 듣노라
부엌에 가다가 듣노라
사슴이 장대에 올라서
해금을 켜는 걸 듣노라.

사슴이 해금을 켠다는 재미있는 가사로 <청산별곡>에 등장하는 해금은 ‘깽깽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낑깽낑깽' 하는 독특한 소리를 냅니다.

본디 중국 동북방 유목민족의 악기가 중국에 전해졌다가 고려 때에 송나라에서 다른 악기와 함께 들어와 처음에는 궁중의 제례와 잔치에 사용되었는데, 지금은 아악과 민속악에 두루 쓰이는 악기입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_blog/photoList.do...3D738949

그는 해금의 명인인 이순용과 이원근에게 해금을 배웠습니다. 해금은 음량이 피리나 대금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주음 악기가 되지 못하고 그 악기들을 보조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해금으로 <여민락>, <상영산>, <수연장지곡>, <장춘불로지곡>, <보태평>, <수제천>, <중광지곡>, <만파정식지곡>과 같은 음악들을 익힌 그는 졸업한 뒤에 '아악수보'로 임명되어 연주자 생활을 하다가 차차 급수가 올라가서 '아악수'와 '아악수장'까지 지내게 되었습니다.

“아악수장 7년 하다가 아악부를 그만 뒀지. 그만 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많았지만 그 중에 하나가 월급에 불만이 많았던거야. 월급 책정이 제멋대로이고 규정도 없이 올렸다 내렸다 뒤죽박죽이야. 그래서 싸우고 나와 버렸지. 나와서 조금 있으니 하규일 씨가 권번 양성소로 오라고 해서 잠깐 가 있었지.”

하규일은 가곡과 가사의 명인으로 권번에서 기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아악부에 있을 때부터 그와 친분을 맺어 가곡, 가사, 시조를 틈틈이 배웠기 때문에 즐거이 그의 청을 따랐습니다.

그러다가 1941년 조선 총독부 학무과 산하에 조선음악협회가 생겼을 때, 그 협회의 회원이 되어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악사인 함화진이 주축이 되고 이론가인 박헌봉, 연극인인 현철, 판소리 명창인 이동백, 박녹주, 조상선 등이 모여서 만든 이 협회는 아악과 판소리와 민속 무용과 경·서도 민요의 명인들이 총집합하여 부민관에서 창단 기념공연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새로 말하자면 민간단체가 아니고 어용단체인 셈인데, 이 단체라도 등에 업지 않고서는 도저히 공연을 할 수가 없는 시절이었어. 어쨌든 창단 공연에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총독부 사람이 놀랠 지경이었지.”

그런데 창단 공연이 끝난 뒤 극단협회라는 단체를 이끌고 있던 박진과 김관수 같은 사람이 자기 협회에 가입하라고 종용했습니다.

“그 사람들 얘기로는 창극이 연극이니까 자기 협회에 들어와야 된다는 게야. 우리는 창극이 왜 연극이냐 음악이지 하고 맞서서 굉장한 논쟁이 벌어졌지. 어쨌든 우리가 고집을 부리고 안 들어가니까 이 사람들이 경찰국을 이용해 가지고 우리 공연을 방해했어. 그러니 공연 허가가 안 나는 거야. 불순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공연이니까 안 된다는 거야. 그래서 단체를 학무국에서 정보국으로 옮겼지. 요새로 말하자면 정보부 같은 곳이야.”

정보국으로 옮긴 다음에는 대본을 모두 일본말로 직역하여 조사를 받은 뒤 허가를 얻어 공연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산업전사 위문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광산이나 군수 공장에 가기도 하고, 군위문 공연도 다니고, 독립운동가나 사회주의자와 같은 사상범 선도 교육단체인 대화숙 주최로 북한 일대와 만주를 순회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연 내용 중에 일본을 선전하고 전쟁에 나가라고 선전하는 것은 없었어. 뭐, 문학가들은 그런 강연도 많이 하고 연극인들은 그런 연극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저 전통 창극하고 영산회상 같은 것만 공연했어.
그렇지만 어쨌든 일본에 협력한 것은 사실이겠지.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을 욕할 수는 없어. 그때는 전시라서 화류계도 모두 철거됐을 때니 요정 같은 데서 돈을 벌 수도 없구. 다른 공연은 허가가 안 나니 그런 공연이라도 안 하면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든지, 굶어 죽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어.”

그 역시 굶어 죽지 않으려고 단체를 따라다니며 사무도 보고 악기 반주도 하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임석 경관이 일본어로 된 대사와 공연 내용이 틀리면 표시해 두었다가 공연이 끝난 뒤 단장과 단원들을 죽도록 두들겨 패는 그런 살벌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도 별별 비상한 수단을 다 써서 징용을 피해가면서, 조선 천지 안 돌아다닌 곳 없이 돌아다니며 뼈저린 고생을 하던 중에 해방을 맞았습니다.

해방이 된 뒤에는 좌익의 '음악 동맹'과 우익의 '대한 국악원' 사이에 심한 논쟁과 갈등이 생겨 대한 국악원의 무용이사였던 그는 분쟁을 해결하느라고 분주히 뛰어다녔습니다. 게다가 6.25가 나기 두 해 전에는 아악부가 폐지될 지경에 이르자 이왕직 아악부의 후배인 이주환 명인의 요청으로 아악부 일까지 맡게 되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6.25가 나던 무렵에 그는 대한 국악원 안에 생긴 학생 국악동우회의 창립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북쪽에서 민청 사람들이 오더니 우리 사무실을 비우라는 거야. 그리고 악기도 없애 버리겠다고 해서 부랴부랴 덕수궁 박물관 밑에다 악기를 숨겨 놨지. 그때 숨겨 놨던 악기들이 지금 국립국악원에서 쓰고 있는 것들이야.
모두들 어쩔 줄 모르고 매일같이 비원 앞 느티나무에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는데, 사상 교육을 실시한다고 모두들 모이라는 거야.
그러던 어느 날, 부산에 공연을 갔다가 소식이 끊어졌던 조상선, 정남희, 임소향이가 얼굴이 시커매서 들어와. 부산에서 서울까지 죽을 고생을 걸어왔다는 거야. 그러더니 이제 새 세상이 왔다고 좋아하더란 말이야.
그러다가 혜화동 교회에 예술인들이 총집합해서 강연을 받을 때였는데, 폭격이 시작되고 수라장이 벌어졌어. 그래 성경린 씨하고 나하고는 몰래 도망쳐서 빠져나왔고 나머지 사람들도 어찌어찌해서 살아났는데, 그 세 사람은 북쪽 사람들을 따라서 올라갔지.”

월북했거나 납북된 국악인들에 대한 자료가 소상하게 밝혀 있지 않은 터에 그의 증언은 나름대로 귀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특히 오랫동안 국악 단체의 사무장 일을 보면서 그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경험한 덕분에 단체와 단체 간에 생기는 알력이나, 단체가 생기고 없어지게 된 배경과 원인을 훤히 알고 있으므로 현대 국악의 소중한 자료들을 많이 지니고 있는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찌됐든 6.25가 끝난 뒤 1955년에 국립국악원이 생기자 그는 무용가 협회의 이사가 되었고, 그뒤로도 국악과 무용 양쪽 단체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틈틈이 작품발표회도 가졌습니다.

1956년에 궁중무를 무대화한 첫 발표회를 가졌고, 1959년에 무용극 <처용랑>과 몇 개의 소품으로 2차 발표회를 가졌습니다. 1963년에는 무용극 <봉산 탈춤>과 <흥부 놀부>로 3차 발표회를 가졌고, 1969년에는 무용극 <만파식적>과 소품들로 4차 발표회를 가졌습니다. 또 1972년에는 무악 생활 50주년 기념 5차 발표회를 가졌는데 발표회의 내용이 거의 춤이었기 때문에 국악계보다는 무용계에서 그의 이름이 높게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출처 : http://www.donga.com/fbin/output%3Fn%3D...08200074

“현대무용하고 발레만 안 했지 우리나라 춤은 안 배운 게 없이 다 배웠어. 왜정 때에 한성준 선생한테 승무를 배웠고, 해방 뒤에는 한국 가면극 연구회에서 봉산 탈춤, 강령 탈춤, 양주 산대놀이, 통영 오광대, 나비춤, 학무, 바라춤 이것 저것 보고 배우고 한 탓에 전부 잘 추지는 못 해도 잘잘못은 가릴 수 있게 됐지. 그리고 내가 만든 무용극은 전부 내가 대본을 쓰고 연출하고 출연한 거라 어디에서나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어.”

이렇듯 춤에 몰두해 지내오면서도 아악의 연구에도 함께 힘을 쏟아왔기에 1969년에 종묘 제례악 무형 문화재 예능 보유자로 지정받을 때 모두들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특히 그 무렵에 이왕직 아악부원 1기생들은 거의 다 세상을 떠나고 2기생 중 몇 사람만 지정을 받았는데, 그나마도 지정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흔히 아악이 중국 음악을 본뜬 것 아닌가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아. <문묘악>이나 <제례악>은 본디 우리나라에서 쓰던 음악이고, 당악 계통으로 <낙양춘>이나 <보허자> 같은 게 있는데 그것도 몇 백 년 내려오는 동안에 우리나라 음악에 동화되었다고 봐야해.
내가 얼마 전 대만에서 그 나라 전통음악을 들어 봤는데 우리 것하고 달라. 그러나 어찌됐든 아악이 뭔가 현대적이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민속 음악과 활발한 교류를 해서 낡은 때를 벗어야 하는 것만은 사실이야.”

이것은 궁중무를 추는 사람이 탈춤을 춘다는, 옛날에는 꿈에도 생각 못할 파격적인 행동을 했고, 또 해금을 가지고서도 아악과 함께 쉴 새 없이 민속음악과 민속무의 반주를 해 온 그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맑고 아름답고 연한 음색으로 주음 악기들을 빛내 주면서 은근히 큰 몫을 차지하는 해금처럼, 그의 일생도 단체의 장으로서 국악계의 우두머리로서 빛났던 삶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고 빛나게 하는 숨은 일꾼으로서 은근하고 튼튼하고 끈질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출처 : http://www.gugakcd.pe.kr/music_detail.a...A-52/53C

“춤추고 노래하는 게 즐겁고 좋은 줄 알지만 그게 아니야. 완벽한 예술을 하려면 고생을 각오해야 돼. 나는 평생 살아오면서 죽을 때까지 배운다는 정신으로 살아왔어. 또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되기 때문에 평생 고생문이 훤해.”

그 '훤한 고생문‘을 마다하지 않고 2007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한눈 팔지 않고 살았으니, 그의 얼굴과 눈빛이 물결에 씻긴 조약돌처럼 맑고 깨끗하게 빛나는 것은 외길 인생의 아름다운 결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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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읽고서 책꽂이에 꽂아 놓은 뒤, 힘든 일로 마음이 시달릴 때면 꺼내어 읽곤 하는 감동의 책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폭염이 내리쬐는 여름이면 더 생각 나는 그 책에는 믿을 수 없지만 실제로 벌어진 이야기가, 한 인간의, 아니 한 여인의 의지와 용기가 세상을 얼마만큼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바로 죽음의 사막을 기적의 숲으로 만든 여인 인위쩐(殷玉珍)의 이야기 「사막에 숲이 있다」입니다.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는 황무지에 참나무를 심어 세상에 없던 풍요로운 마을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인위쩐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사막에 나무를 심었습니다.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마오우쑤(毛烏素) 사막의 징베이탕(井背唐)은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입니다.

먼 옛날에는 푸르고 비옥한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지만,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양떼와 무자비한 벌목이 사막화를 초래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징베이탕 지역은 황사의 발원지로 우물도 없고, 새도 나르지 않고, 풀 한 포기 없고 , 사람의 발자국도 없는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그 땅에 한 젊은 여인의 노력으로 기적의 숲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는 1985년, 인위쩐이 스무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죽은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아가 된 친구 아들 바이완샹이 사는 사막의 토굴 앞에 딸을 내려놓고 떠난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울며 애원하는 딸을 남겨 둔 채, 아버지는 "얘야, 이제 여기가 네 집이다"라는 말만 남긴 채 노새와 함께 돌아갔습니다.

출처 : http://leo.isloco.com/312

신혼집인 토굴의 풍경도 참담했습니다.

금방 주저앉을 것 같은 천장, 한숨 한 번만 크게 내쉬어도 흙이 우수수 떨어지는 벽, 다리가 부러진 식탁, 홀아비 냄새에 찌든 이불 한 채, 깨진 거울, 이 빠진 그릇만 있고 성한 냄비 하나 없는 부엌.....
 (본문 중에서)

처음에는 사막에서 헤매다 죽더라도 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바이완샹의 순한 눈망울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1주일 뒤, 가난하지만 착한 남편과 토굴 속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인위쩐은 바이완샹에게 자신들이 사는 곳에 꽃을 심어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들자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10년 안에 눈앞의 모든 모래 언덕을 숲으로 만들겠노라고 야무진 꿈을 다지며 분연히 일어섭니다.

인위쩐은 친척들이 준 양 한 마리를 팔아 나무 600그루를 사는 것으로 나무심기를 시작했습니다. 온종일 일한 품삯으로 묘목을 받아 심기를 반복합니다. 그때부터 그녀의 삶은 온통 사막과의 처절한 싸움에 바쳐졌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막의 악령에게 아기를 잃기도 했습니다.

1988년 3월 29일, 잊을 수 없는 그날도 아침 일찍 양수 묘목을 등에 업고 징베이탕 남쪽의 큰 모래 언덕을 넘어가는 길이었다. 현기증이 나면서 갑자기 쨍한 햇살이 눈을 찔렀다. 한 손으로 눈을 가리려는 순간, 그만 허방다리를 짚어 언덕 아래로 구르고 말았다. 등에 진 나뭇가지가 온몸을 찔러 댔다. 그게 사단이었다. 엄마 뱃속에서 9개월간 살았을 뿐 세상 구경도 해 보지 못한 아이는 황량한 모래 언덕에 묻혔다. 인위쩐이 정신을 차렸을 때, 남편 바이완샹은 피 묻은 모래를 움켜쥔 채 울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인위쩐은 첫째 아이를 조산하고, 둘째 아이를 사막에게 잃으면서도 나무심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밥보다 모래를 많이 먹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세월을 보내면서 나무와 사막의 생리를 하나하나 터득해 가는 동안, 그녀는 사막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이루어 나갔습니다.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을 펑펑 흘리던 스무 살 어린 신부 인위쩐은 이제 무쇠처럼 강하고 튼튼한 세 남매의 엄마가 됐습니다. 시련이 클수록 그녀는 질기고 강해졌습니다. 그 힘으로 죽음의 사막을 생명의 숲으로 바꿨습니다. 그녀는 이제 1400만 평의 사막에서 자라는 온갖 생명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사막 한가운데 펼쳐진 울창한 숲과, 갖가지 채소가 익어 가는 밭과, 가로수가 늘어선 길은 보는 이의 눈을 의심케 합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놀라운 기적은 지금 환경운동가들과 지구를 살리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확실한 희망의 표본이 되고 있습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_blog/hdn/ArticleC...gOpen%3D

인위쩐은 어느덧 중국의 사막 생태 복원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주요 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세상에 알려진 뒤 농업계 고등학교 학생들, 산둥 성의 군인들, 허베이 성의 정부 관리들, 산시 성의 농부와 유목민들이 끊임없이 찾아왔습니다. 버려졌던 땅에 숲이 생기고, 길이 뚫리고, 우물이 생기고, 전기가 들어오는 것을 본 친척들도 하나 둘 사막으로 들어왔습니다. 사람은커녕 풀조차 살기 힘들던 땅이 이제 옥수수, 참마, 메밀, 녹두 등의 곡식을 수확하는 풍요로운 땅이 되었습니다.

그 땅에 지금껏 다녀간 사람만도 수천 명이 넘고, 세계의 수많은 언론이 그녀를 소개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6년 식목일에 KBS 1TV '수요기획'에서 <숲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그녀의 삶을 소개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유명인사이며 비옥한 숲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새벽 4시에 일어나 나무에 물을 주고 모래바람을 맞으며 사막에 풀씨를 뿌리러 갑니다. 그녀의 놀라운 집념과 강인함은 사막뿐 아니라, 고통과 좌절에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희망의 꽃을 피워주었습니다. 그녀는 불모의 사막에 생명을 창조한 살아 있는 전설입니다.

출처 : http://kkhsoft.egloos.com/3321181


두 사람이 종일 일을 하고 얻은 것은 손가락 굵기의 백양나무 묘목 서른 그루였다. 많지도 않은 묘목이지만 그것을 실어 나를만한 수레도 없었으므로 부부는 묘목의 뿌리가 마르지 않도록 밑동을 꽁꽁 싼 뒤 아이처럼 등에 업고 집으로 향했다. 나무를 등에 업고 돌아오는 길은 왠지 모르게 멀지 않았다. 모래 언덕이 그새 한 자는 낮아진 듯했고, 빈손으로 갈 때보다 오히려 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아마 등에 업은 것이 그저 깡마른 묘목이 아니라 두 사람의 희망이며 꿈이기 때문이었으리라. 또 혼자가 아니라 둘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업고 온 묘목을 토굴 앞에 내려놓고 인위쩐은 그 길로 삽을 들었다. 어린 시절에 나무를 심어 보았기 때문에 두렵진 않았지만, 그때는 흙이었고 지금은 모래라는 차이가 있는 데다 뿌리가 흠뻑 젖도록 줄 물이 없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야지. 너희가 못 살면 나도 못 산다."

그녀는 나무의 자생력을 믿어 보기로 했다. 바람길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지대에 줄 맞춰 묘목을 심고 웅덩이에 찔끔찔끔 고이는 물을 몇 번씩 길어 날랐다. 그리고는 단 한 방울의 물이라도 옆으로 새지 않도록 손으로 모래를 쓸어 올려 둥그렇게 둑을 만드는 것이 나무를 위해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전부였다. 살고 죽는 문제는 전적으로 나무한테 달려 있었다. 반만이라도, 아니 열에 하나만이라도 살아남는다면 적어도 절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마음을 다졌다. 기적처럼 비가 내리기라도 하면 좋겠지만, 그녀가 나무 서른 그루를 다 심고 올려다본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그녀가 간절히 기다린 비는 내리지 않았다. 정수리에 불을 붙일 것처럼 이글대는 태양 아래 물기 하나 없는 모래 위, 사실 어린 나무들에게 무작정 살아남아 달라기에는 염치없는 환경이었다. 나무에게도 생존을 위한 조건이 있기 마련인데, 이건 해도 너무한 악조건이 아닌가? 더욱이 나무를 심은 날로부터 며칠 뒤에는 미운 모래바람이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와 정신을 쏙 빼놓고, 금이야 옥이야 업어다 심은 나무들을 무차별 습격했다. 드센 모래 장막의 행렬 끝에서 그녀가 본 것은 허리가 동강 나거나 모래를 무덤 삼아 죽은 나무들이었다. 그야말로 전멸이었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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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지방에 전해 오는 민요 중 가장 유명한 민요는 <밀양 아리랑>일 것입니다.
날좀 보소 날좀 보소 날조곰 보소
동지섣달 꽃본 듯이 날좀 보소
아리랑 닥궁 스리랑 닥궁
아리리가 났네
아리랑 어절시구 잘 넘어간다

담 넘어 갈 때는 큰 맘을 먹고
문고리 잡고서 발발 떤다
아리랑 닥궁 스리랑 닥궁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어절시구 잘 넘어간다

이 <밀양 아리랑>은 전라도 지방에 전해 오는 <진도 아리랑>과 강원도 지방에 전해 오는 <강원도 아리랑>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리랑으로 꼽힙니다.

그런데 다른 지방의 아리랑에 견주어 <밀양 아리랑>은 특히 가락이 흥겹고 장단도 빠르며 경쾌합니다.
각 지방의 민요가 그 고장의 풍토나 인심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때 <밀양 아리랑>이 이렇듯 흥겹고 경쾌한 것은 밀양 지방의 땅이 풍족하고 인심이 넉넉한 데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의 <밀양도호부>편에 보면 밀양이 “긴 내를 굽어 당기고 넓은 들을 팽팽히 얼싸안고 있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숭상하게 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실제로 밀양군은 오늘날에도 경상남도 안에서 가장 농업이 성한 곳으로 꼽힐 뿐만 아니라, 갖가지 민속놀이가 다양하게 전해 내려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밀양 백중놀이>나 <밀양 새터 가을굿>이나 <감내의 줄당기기>나 <용호놀이> 같은 놀이들이 새롭게 발굴되어 소개되었고, 그 중에서도 <백중놀이>는 밀양의 이름을 나라 안에 널리 떨치게 만들어서 밀양하면 백중놀이를 연상할 만큼 유명해졌습니다.

출처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01_02_04

하늘 위에 상제님 천하 용왕님
바람기 순조롭고 벌구잡충 없이 하며
금년 농사 잘도 해서 총각 신세 면케 하고
앞논에 용신님 뒷논에 용신님
들쥐도 막아 주고 나는 새도 막아 주고
회기종도 막아 주고 흰무리도 막아 주소

농신제 축문을 읽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백중놀이는 힘겨운 세벌 논매기를 끝낸 백중날, 곧 9월 보름을 전후한 용날에 동네 머슴들이 모여서 벌이는 놀이였습니다.

마당 한가운데에 저릅대로 만든 '농신대'를 세우고 동네 사람들이 쌀이나, 콩, 돈, 축원문을 넣은 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둥그렇게 둘러서서 세 번 절하며 그 해의 풍년과 복을 빈 다음, 그 해에 농사를 제일 잘한 장원을 지게 목발로 만든 ‘작두말’에 태우고 머슴들끼리 놀이판을 벌입니다.

그 판에 양반이 끼어들어 거드름을 부리며 '양반춤'을 추면 머슴들과 부엌 일하는 여인들인 '정지꾼'들이 여기 저기서 나타나 병신춤으로 양반을 놀리고, 쫓겨난 양반은 범부 차림으로 다시 나타나 서민들과 어울려 '범부춤'을 흥겹게 춥니다.

그런 다음 북잽이들이 큰 북을 메고 나와 밀양 백중놀이에만 유일하게 전해오는 '오북춤'을 춥니다. 이 오북춤은 '오행'과 '오기'가 순조롭기를 빌며 '오체'가 성하고 '오곡'이 잘되고 '오복'을 누릴 수 있기를 비는 뜻이 담겨 있는데, 이 오북춤이 끝나면 모든 놀이꾼과 구경꾼이 한데 어우러져서 마지막 뒤풀이를 합니다.

하보경 명인은 밀양 읍내에서 이 놀이를 제일 오랫동안 놀아온 춤꾼입니다.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인지도 정확하게 기억 못할 만큼 오래 살다 돌아가신 그는, 나이는 잊어버렸어도 백중놀이에 대해서만은 어느 것 하나 잊어 버린 것이 없을 만큼 뼛속 깊이 이 놀이가 배어있는 분이었습니다.

출처 : http://www.gallerywa.co.kr/column1.asp%...dx%3D864

1909년인가 1905년인가에 하성옥의 큰아들로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친은 이미 밀양 읍내에서 이름난 북잽이였습니다.

부친은 놀이를 좋아해서 읍내에서 놀이가 벌어질 때는 앞장을 서서 놀았고, 어느 때는 풍물패를 조직해서 이 동네 저 동네 떠돌아 다니며 서너 달씩 집을 비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단체가 해산되면 집에다 악기를 풀어놓고 흩어지는데, 돈을 못 벌었거나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열흘이나 보름씩 그의 집에서 쉬어 가기도 했습니다. 하보경 소년은 어려서부터 늘상 그 어른들이 치는 풍물소리를 듣고 그 어른들이 추는 춤을 보며 자랐고, 틈만 나면 그들에게서 춤과 악기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밀양보통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이미 웬만한 장단이나 춤은 따라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지만 아버지의 눈이 무서워 드러내 놓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은 놀이를 좋아할 망정 아들만은 공부를 착실히 해서 면서기 같은 훌륭한 인물이 되어주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아들이 남 앞에서 북치고 노는 것을 엄하게 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명절마다 벌어지는 푸짐한 마을 놀이 때면 그는 엉덩이가 들썩거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밀양은 산이 좋고 들이 넓고 물이 좋고 하니께네, 보리도 잘되고 나락도 잘돼, 소 없는 집이 없고, 머슴없는 집이 없는 기라. 백중날 날받이 옷도 해주고 음식도 해주고 푸짐하게 노는데, 우째 신이 나는지 하루 종일 따라 다녀도 재미가 있는 기라.”

천성이 춤과 놀이에 무한히 끌려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데다가,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친구들의 영향으로 악기와 춤의 기초를 다진 그가 얌전하게 학교 공부나 하길 바란다는 것은 고양이 앞에 생선을 놓고 먹지 말라는 것과 같은 요구였습니다.

결국 그는 열여섯 살 무렵에 아버지 몰래 놀이판에서 북을 치고 말았습니다.

솜씨를 인정받은 그는 스무 살 무렵에는 춤까지 출 수 있게 되었는데, 같은 쪽의 손과 발이 함께 움직이는 '걸음새'와, 퉁기는 듯한 느낌을 주는 '배김새'와, 턱을 묘하게 끄덕거리는 독특한 '고개놀림'과 같은 양반춤의 진한 맛이 그의 몸 구석구석에서 배어 나오자, 보는 구경꾼들이 탄성을 올렸습니다. 그 뒤로 그는 일약 멋진 춤꾼으로 읍내에서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 덕에 장옥도라는 처녀와의 혼담도 쉽사리 이루어져 장가도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춤 잘 추고 놀기 좋아하는 밀양 멋쟁이로 이름이 드높아져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다니는 재미에 맛을 붙일 무렵, 아버지가 병에 걸려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스물네 살쯤 되었을 때에 부친이 세상을 뜨자,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본계’ 계원이 되었습니다.

보본계는 백년이 넘게 내려오는 밀양 읍내의 놀이계로, 마흔 명쯤 되는 계원들이 정초에 읍내를 돌아다니며 지신밟기를 해주고, 봄에 한차례 모여서 걸판지게 노는 단체였습니다. 이 계원들은 저마다 악기나 노래나 춤에 재주가 있어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읍내 한량들이 서로 다투어 계원이 되고 싶어했지만, 웬만큼 솜씨가 없으면 계원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계에 젊은 계원이 되었으니 한량인 그로서는 대단히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나쁜 짓’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무서운 아버지도 안 계시겠다, 물려받은 재산은 넉넉하여 부농 소리를 듣는 살림이니 의식주 걱정없겠다, 얼굴 잘생기고 젊고 멋있겠다, 춤 잘 추고 놀기 좋아하겠다, 아무튼 그에게는 '방탕'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셈이었습니다.

어디에 놀이판이 벌어졌다 하면 불원천리하고 달려가고, 씨름판이 벌어졌다 하면 다시 바람같이 달려가서 심판을 보며 신나게 놀고, 어디에 예쁜 기생이 있다 하면 부리나케 옷 빼입고 놀러가는 통에 그 많던 재산이 조금씩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윷놀이에 미치지만 않았어도 부친의 재산을 다 날려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밀양의 하보경, 삼칸집 너머로 던져도 모가 난다.”는 말이 나올 만큼 이름난 내기 윷꾼이던 그는 결국 재산을 다 날린 다음 손을 톡톡 털었습니다.

일본 식민지 말기의 전쟁 바람은 밀양에도 불어 닥쳐 놀이판은 금지당하고, 술 마시고 놀음을 하면 잡혀가고, 쇠로 된 악기는 모두 전쟁물자로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고생스럽고 재미없는 시절을 간신히 넘긴 그는 해방이 되자마자 친구들과 ‘5.3 친목계’를 조직하여 마음껏 놀기로 작정했습니다.

보본계의 뜻을 이어받아 조직된 5.3친목계에는 타관 객지에 흩어져 있던 재주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북춤 잘 추는 김상용 명인, 권채입 명인, 이재원 명인, 김달수 명인과 꽹과리 잘 치는 정한목 명인, 김타업 명인과 징 잘 치는 김석화 명인 등이 중심이 되어 정초에 지신밟기 하고 봄에 한차례 크게 놀았습니다.

그 단체가 점점 발전하여 1960년에 한국사단법인 밀양국악협회가 탄생되었고, 1980년에는 민속예술보존협회가 생겨났습니다. 그해 10월에 제주시에서 벌어진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은 뒤 중요 무형 문화재 68호로 지정받고 하보경 명인이 <양반춤>과 <범부춤>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받게 되자, '밀양백중놀이'는 갑자기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여기 저기 초청공연을 갖게 되고, 1981년 8월에는 미국의 국제 무용단 초청으로 하보경 명인이 대표로 미국에도 갔다오고, 1982년에는 김타업 명인이 상쇠 예능보유자로 지정 받게 되고, 거의 해마다 두세 번은 민속제나 예술제에서 가장 인기있는 종목으로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백중놀이의 참가자들은 모두 저마다 재주가 뛰어나고 신명이 넘쳐 흘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흥겨움에 겨워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중에서도 하보경 명인의 춤은 보는 사람의 넋을 빼앗아버릴 만큼 뛰어났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에 하얀 띠를 맵시있게 두른 그가 십 년이 넘게 기른 하얀 수염을 바람에 휘날리며 하얀 도포를 입고 검은 관을 쓰고 미투리 신고 하얀 부채를 손에 들고 '양반춤'을 추거나, 하얀 중의적삼에 상투를 꼽고 웃댕기를 매고 미투리 신고서 '범무춤'을 추거나, 흰 중의적삼에 상투 꽂고 짚신 신고 큰북을 메고 북채를 손에 들고 딱딱딱 하면서 '북춤'을 출 때면 그의 말대로 “미국 처녀도 반해서 볼따구에 뽀뽀를 할” 지경이었습니다.

출처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01_02_04

그의 춤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의 춤이 “삶 속에서 우러나온 생활의 멋과 소박함과 흥겨움이 조화를 이룬 건강한 춤”이라고 찬미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잘 짜여진 무대무용과 교태가 가득한 기방춤에 맛들인 사람들은 그의 춤이 “촌스럽고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다.” 고 혹평하기도 합니다.

그런 예술가들의 현란한 말에 주눅들린 그는 그래서 누가 자기 춤에 대해서 물어보면 자신을 낮추며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 춤은 춤도 아닌 기라. 서울서 춤추는 사람들 얼매나 잘 추나? 그런 사람들한테 비하모 내는 춤춘다꼬 말도 몬하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이렇게 반문함으로써 일침을 놓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 춤은 예전부터 내려오는 것을 그대로 추는 춤이라. 사람들이 그걸 알아주고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건데 우리 춤이 엉터리라 카모, 우리 조상님들이 추던 춤들이 전부 엉터리란 말이가?”

오늘날 이 나라 춤의 대부분이 일제시대의 권번에서 추어오던 기방춤의 변형인 현상을 걱정해 온 사람들에게는 그의 춤이 가진 토속성과 소박함을 찬미합니다.

본디 삶과 일 속에서 나왔으면서도 예술은 지금 그것들과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아직도 일과 놀이 속에서 멋들어지게 춤이 추어지고, 거기서 얻어진 신명이 다시 삶 속으로 되돌아가 삶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 멋진 삶의 현장에서 평생 동안 춤을 추며 살아온 그의 춤은 사위 하나하나의 세련미와 예술성을 따지기에 앞서 이미 몸으로 전해오는 진한 땅 냄새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고한 예술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끈끈한 삶의 정서인 것입니다.

젊어서부터 가정을 돌보지 않고 멋과 흥에 취해 살아 온 그이지만 그래도 아들 둘과 딸 셋을 모두 번듯하게 키워 놓았고, 큰 아들이 낳은 손자 용부는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아 그의 북춤 전수자가 되었습니다.

성격이 느긋하고, 골치아픈 일 싫어하고, 신나는 일만 있으면 만사를 제쳐 놓고, 걱정거리가 있어도 껄껄거리고 웃으며 넘긴 낙천성과 대범함이 그의 춤을 푸지고 신명나게 만들어주고, 1997년 90여세가 다 될 때까지 장수하다 돌아가시게 한 비결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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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익산군은 부여 지방과 함께 마한·백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곳입니다.

기름진 황톳빛 땅과 나지막한 구릉들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어 사람 살기 딱 좋은 곳이라는 느낌을 주는 이 지방에는, 고대 문화의 중심지답게 미륵탑이나 왕궁탑과 같은 유적이 많이 남아 있고, 민속놀이나 민요와 같은 문화 유산들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군 안의 삼기면 검지마을의 농요는 다른 지방에서 들을 수 없는 독특한 가락을 지니고 있어 전북지방의 대표적인 농요 보존 마을이 되었습니다. 마을 동편으로 미륵산을 마주 바라보며 자리잡은 검지마을은 백 가구가 채 못 되는 주민들이 오순도순 모여서 살고 있는, 아담하고 조용한 전형적인 전라도의 촌마을입니다.

이 마을에는 농삿일을 하면서 부르는 여러 노래들이 풍부하게 전해오고 있습니다. 

모를 심을 때 부르는 노래인 <농부가>,
김을 매면서 부르는 노래인 <만물 산야>,
벼를 베며 부르는 노래인 <벼베는 산야>,
볏단을 져나르면서 부르는 노래인 <등짐 노래>,
타작하면서 부르는 노래인 <타작 노래>,
절구통에 방아를 찧으면서 부르는 노래인 <방아찧기 노래>,
산에서 지게에 나뭇짐을 지고 오면서 지게 목발을 두드리면서 부르는 노래인 <지게 목발 노래>,
여인들이 다듬이질을 하면서 나무하러 나간 낭군을 그리는 노래인 <도의가>,
서동요의 설화를 내용으로 담은 <선화공주 노래>,
<산타령>, <콩꺾자 콩꺾자>, <상사소리>, <작대기타령>, <꿩타령>, <둥당게타령>.....

출처 : http://100.nate.com/dicsearch/pimage.ht...26v%3D43

한 세기 전만 해도 백성들이 일을 할 때나 놀 때나 사랑을 할 때 그들의 한과 흥을 풀어 주는 가장 가까운 삶의 벗이었던 이 주옥 같은 노래들이 세태의 변화에도 굴하지 않고 이 마을에 살아남아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참으로 값지고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들은 저절로 살아남은 게 아니었습니다. 한 농부의 희생적이고도 집념어린 노력이 없었던들, 이 노래들은 일찍이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린 또 하나의 아까운 문화유산이 될 뻔했습니다.

박갑근 명인은 이 고장 민요의 산 증인이자, 계승자이자, 발굴자이자, 최고의 실력있는 노래꾼이었습니다.

그는 익산 농요보존회 회장이란 직함이 아무래도 어색하게만 여겨졌던는 갈 곳 없는 농부였습니다. 다른 농부와 다른 점이라고는 노래를 좋아하고 남보다 노래를 ‘쬐끔’ 잘 하는 것 뿐이라는 겸손하고 조용하고 점잖은 검지마을 토박이였습니다.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박해명의 3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비록 농사를 지으며 살기는 했지만 한학을 하시고 예의와 체통을 중히 여기는 할아버지의 완고한 고집 때문에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노래라는 것도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마을에서 농삿일을 할 때면 풍물을 신나게 두드리며 풍장을 쳤고, 앞소리꾼이 소리를 매기면 마을 사람들이 구성진 목으로 뒷소리를 받으며 신명나게 일들을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유난히도 그 노랫소리에 끌려서 하루 종일 논두렁에 서서 소리를 따라 부르곤 하던 박갑근 소년은 열 살 쯤 되었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금족령이 풀려서 삼기보통학교에는 다닐 수 있었지만, 아버지 역시 완고한 분이었던지라 노래를 부르거나 꽹과리를 치다가 들키면 혼줄이 나곤 했습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창가를 부르면 선생님들이랑 친구들이 잘 부른다고 했고, 또 유행가를 부르면 다들 가수로 나가라고 혔지. 그런디 동네에만 들어가면 꿀먹은 벙어리가 되니 미칠 노릇이여. 요기서 한참 걸어가면 푸다리라는 동네가 있는데, 거그 주막이 있었어. 젊어서 친구들허고 그 주막에서 술마시고 올 때면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면서 오는디. 절반쯤 오면 딱 그쳐야 혀.
노래 소리가 우리 동네에 들릴 만헌 디서부터 벙어리가 되어 오는 거여. 왜 그렇게 노래를 금혔는고 허니, 이 동네가 본래 이름이 묵지여. 먹을 쓰는 선비들이 많이 난 곳이래. 그래 그 전통이 있어서 그런지 농사짓는 분들도 양반 행세를 좋아해서 상놈처럼 풍장치고 노래부르는 것을 금헌 거여.”

그런 집안과 마을의 분위기 때문에 소리의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평범한 농사꾼으로 자라난 그는 열일곱 살되던 해에 주소애라는 색시한테 장가를 들었습니다. 장가를 들었지만 일제 말기의 탄압은 신혼을 즐길 여유마저 빼앗아 가버릴 만큼 가혹했습니다.

“참말로 힘든 시절이었지. 전쟁이다, 징용이다 혀서 젊은 남자는 까딱 잘못허다가는 끌려가서 죽고, 농사는 지어봐야 공출이라고 다 뺏기고 그릇 가진 것, 쇠붙이 있는 것, 하다못해 꽹과리까지 다 긁어가 버리니 안 죽고 사는 것이 천행이었지. 그런 판에 노래부르고 꽹과리 칠 정신이 있것능가. 몇 해 동안 입다물고 근근히 살다보니 자연히 노래의 맥이 끊어졌지.”

한동안 끊어졌던 노래 소리가 해방이 되자 다시 살아났습니다.

물론 예전처럼 성하지는 않았지만 해방이 되었다는 기쁨과 오랫동안 금지됐던 신명을 마음껏 풀어보려는 갈망 때문에 한결 흥겨웁게 노래를 부르고 풍장을 쳤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휩쓸렸는지 완고하기만 하던 그의 아버지는 동네 어른들과 어울려 시조를 자주 불렀습니다. 아버지 역시 시조 솜씨로 동네에서 따를 사람이 없었는데, 아들에게도 넌지시 시조를 배워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는 얼씨구나 하고 일가 어른과 동네 어른들한테 귀동냥으로 조금씩 시조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부르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가르쳐 주고, 또 그들도 체계가 있도록 배운 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가락이 뒤죽박죽이 되어서 때려 치우고 말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들어 왔던 민요를 부르고 싶어했습니다.

그러자 때마침 민요를 마음껏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동생들 둘이 대학을 다니는데, 집의 농사만으로는 도저히 학비 대기가 어려워 맏형인 그가 동네 품앗이 일을 해서 학비를 대게 된 것입니다. 품앗이 일이라는 게 이논 저논 돌아다니면서 하루 종일 일만 하는 것이니, 그 힘겨운 일을 잊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저절로 노래 공부가 된 것입니다.

“그때가 서른이 좀 넘었을 때인디, 한 7,8년간 일을 험서 아침 먹고 호미 메고 나가면 저녁에 해질 때까지 억시게 불러댔지. 같이 일을 하던 친구가 여덟 명이 있었는데, 돌아가면서 주고 받고 부름서 일을 하면 어느새 하루가 가.”

그때에 그가 부른 노래들은 모두 마을에서 앞소리 잘 매기는 어른들한테 귀동냥으로 배운 노래들이었는데, 그분들 역시 그 전 어른들한테 귀동냥으로 배운 터였습니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 때까지 올라가는지 알 수 없어도 아무튼 굉장히 오래된 노래들인 것만은 확실한 <농부가>나, <긴방아>,<자진방아>,<방아찧기 노래>들을 억세게 불러대서 어느덧 인근 마을에까지 소리 잘 하는 젊은이로 이름이 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귀동냥만 해서 배울 것이 아니라 좀더 확실하게 선생한테 배우자는 생각이 들어 십 리쯤 되는 이웃마을 독산에서 소리선생을 하고 있던 강옥도라는 여자에게서 판소리를 잠깐 배웠습니다.

“저녁밥 먹고 십 리를 걸어가서 소리 한마디씩 배우고 오는디, 판소리가 민요보다 훨씬 어려워. <공도 난이>란 단가 한 마디만 배우고 그만 뒀는디, 그때 같이 배우던 친구들하고 친해져서 율계를 짜서 틈만 나면 어울려서 분통 같은 방에서 소리하고 시조 부르고 놀았지. 아무튼 한창 소리할 때는 목청이 얼마나 좋았던지. 여기서 석양 무렵에 여럿이 소리를 지르면 십 리 밖에 있는 미륵산까지 들렸응게.”

그렇게 농사짓는 틈틈이 좋아하는 노래나 부르면서 조용하게 살던 그를 시끄러운 세상으로 끌어내려는 유혹이 닥쳐 온 것은 그의 나이 쉰이 된 1970년이었습니다.

그때 익산 지방에서는 해마다 ‘마한민속제’가 열리고 있었는데, 이 마을에서 농요가 불려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관계자 한 사람이 찾아와 그 축제에 나가기를 권유한 것입니다.

그는 이 마을에서 불리고 있는 노래만으로는 부족하니 모심기에서 방아찧기까지 농사짓는 과정에 따라 부르는 농요들을 발굴해서 정리해 보라고 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그런 것을 어떻게 하며, 있다는 말을 들었어도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누가 부르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발굴을 하느냐며 극구 사양하던 그는 관계자의 끈질긴 설득에 그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한편으로 좋아하는 노래를 한번 본 때 있게 배워서 부르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무엇보다 대회에 나가서 상도 타고 이름도 내면 보람도 있을 것 같아서 그는 1970년 한 해 여름을 민요 채집하는 데에 다 보냈습니다.

“어디에 사는 누가 잘 헌다는 소문을 듣고 찾어가서 들어보면 시원찮어. 속으로 그런 것도 소리라고 허냐는 생각이 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배워놓고 별스런 사람을 다 만나서 얘기듣고 소리를 들어봐. 내가 소리 귀가 밝어서 웬만헌 노래는 한두 번 들으면 금새 가락을 외워버링게, 배우는 디 어려움은 없었어. 근디 진짜배기 소리는 안 나오더란 말여. 그러다가 남산에 사는 김노인한테서 <산야>를 배운 것이 큰 수확이었지.”

<산야>는 김을 매거나 벼를 벨 때 부르는 노래인데, 검지마을 노인네들이 “7, 8월에 <산야>가 금강을 타고 넘어오면 처량하여 듣기 좋았다.”고 회상할 뿐, 그 가락은 전혀 들을 수가 없던 노래였습니다. 그 귀한 가락을 다행히 익산군 낭산면 성남리에 사는 김순덕이 알고 있어 배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창법은 남도 창법하고 달라 경상도의 메나리 창법과 비슷하고, 어떤 사람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산유화가>가 바로 <산야>라고 하기도 하고, 백제가 망한 슬픔을 노래한 곡이라고도 하기도 하지만, 아직 자세히 연구된 적은 없습니다.

영감아 영감아
육칠월 만물에 메뚜기 뒷다리한티
채어 죽은 영감아
부귀다남 백년동락 사잤더니
나 홀로 두고 어디를 갔나 영감아

이처럼 슬픈 가사에 한없이 처량하고 길게 빼는 애절한 가락은 너무도 듣는 사람의 가슴을 후벼 파기 때문에 산천초목이 슬픔에 겨워 운다고 하여 함부로 못 불렀고, 더욱이 칠월 안에는 입 밖에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말이 전해 올 만큼 매우 독특한 사연을 담고 있는 노래입니다.

<산야>를 배운 그는 “아무래도 꽁지가 빠진 것 같아서” 타작할 때 부르는 노래를 찾아 헤매다가 역시 성남리에 박씨 노인이 알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후딱 배워 버렸습니다.

한 해 여름과 겨울을 꼬박 노래 배우고 정리하고 연습하는 데 바친 그와 그의 계원들은 1971년에 ‘마한민속제’에서 첫선을 보였습니다.

민속학자나 국악인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이렇게 좋은 민요가 원형대로 살아 있다니 놀랍다.” 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 통에 자신을 가진 그들은 그해 10월에 전주에서 벌어진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출전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박갑근씨 개인상만 타고 아무런 상을 타지 못했습니다.

회원들은 실망하기도 하고 원통해 하기도 하며 다시 한 번 나가자고 열을 올렸습니다. 그 덕에 그는 또 한번 고생을 해야만 했습니다. 1972년 한 해 여름내내 그는 <지게 목발 노래>를 발굴하러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습니다.

<지게 목발 노래>는 산에서 나무를 한 뒤 지게에 나뭇짐을 지고 오면서 지게 목발을 두드리며 부르는 노래들인데, <산타령>, <초부가>, <초동가>, <등짐 노래>, <작대기 타령>들을 모아서 1972년에 다시 출전했습니다.

본래 등짐 지는 일이나 나무하는 일은 일 자체가 특정한 리듬이 없고, 다른 일에 비해서 집단성이 적기 때문에 전해오는 노래가 극히 적었던 터에 <익산 목발 노래>의 등장은 대단히 인기를 끌어서 결국 문공부 장관상을 타게 되었습니다.

출처 : http://www.cha.go.kr/newinfo/Culresult_...DCD%3D22

그뒤 1973년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고, 1977년에는 또 한 번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출전하여 국무총리상을 탔고, 1983년에는 마을 한가운데에 익산 농요 전수관을 짓고, 1984년에 박갑근 명인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민속제나 국악제에 나가기도 하고 방송국에서 녹화도 해가는 통에 신문에도 많이 나고 유명해졌지만 속으로는 문제점이 한 두 가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옛날에는 모여서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일하다가 말고도 와. 궁뎅이가 들썩거려서 앉어 있을 수가 없다는 거여. 그런디 요새는 노래 한번 헐라면 여간 애를 써야 모이는게 아녀. 왜냐하면 실제로 논일을 험서 그 노래를 불러야 신이 나는 법인디, 요새는 일험서 부르질 않어.
제초제를 뿌리고 김을 안 매니 긴 방앗노래를 부를 일이 없고, 세 벌 김매기인 만두레를 안허니 <산야>도 부를 일이 없고, 타작 노래, 방아찧기 노래도 다 마찬가지여. 사는 방식이 달라지닝게 그 노래들이 다 쓸모가 없어져 버렸어. 거그다가 요새 젊은 사람들이 이런 노래 배울라고를 안혀.
이 마을 젊은이들도 이 노래 아는 사람이 몇 안돼. 거그다가 자꾸 고향을 뜨네. 돈 번다고 나가고 공부 헌다고 나가고 서울로만 가. 그러니 지금 젊은 후계자가 한 사람도 없어. 이러다가는 이 노래들도 얼마 안가 다 없어져 버리고 말 거여.”

없어져 가는 노래 붙들고 안달하는 자신이 싫어서 작년에는 농요보존회 회장 노릇도 그만 두려고 했는데, 회원들이 만류하는 통에 그러지도 못하고 후계자 기를 걱정과, 초청공연 연습할 걱정과 전수관 운영할 걱정과, 농사지을 걱정을 한꺼번에 하느라, 그러지 않아도 늙어서 약해진 몸을 움직이기가 부쩍 힘들어졌지만, 아직도 노래 이야기만 나오면 두 눈에 생기가 돌고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라 지칠 줄 모르고 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역시 평범한 농사꾼으로만 살다 가기에는 그와 소리와의 인연이 너무 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사람은 살림도 안 허고 소리에 미친 놈이다 허는 말을 들어야 이 짓을 허지, 살림 잘 헌다 소리 듣고는 이 노릇 못 혀. 내가 이 노릇 험서 밥먹고 살아 온 것이 다행이여. 배우느라 갈치느라 걱정 근심이 떠날 날이 없고, 나쁠 때는 일 년에 석 달을 집을 비우고 돌아다녀. 참 골치 아픈 일도 많고 고생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내 팔자로 알고 불평 한마디 안 허고 지내왔네.”

이렇듯 평생을 민요와의 인연에 순종하고 그 노래들을 사랑하며 갈고 닦다 돌아가신 한 농부의 영혼은 여전히 이 나라 산천 방방곡곡 논과 들과 산과 바다를 떠돌며 삶의 노래인 민요를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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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앨프리드 화이트헤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보통 선생님은 지껄인다.
좋은 선생님은 잘 가르친다.
훌륭한 선생님은 스스로 해 보인다.
위대한 선생님은 가슴에 불을 지른다.

그동안 저의 인생에서 '제 가슴에 불을 지른' 위대한 선생님은 여러 분이 계십니다만 그 중 고등학교 때 불을 지른 선생님으로 제가 가장 존경했던 분은 박시중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그 분이 지른 불은 제 가슴속에서 아직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고 2였던 1970년의 여름, 어느 여학교에서 부임해 오신 선생님은 후덕하게 잘 생긴 얼굴에 뚱뚱한 체구를 가지신 분으로 국어와 함께 한문 과목을 담당하셨는데, 저는 그 선생님을 한문 시간에 처음 만났습니다. 

그런데 첫 수업 시간, 선생님은 저를 너무도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한문 교과서에 실린 딱딱한 한문은 참고만 하고, 지금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한문을 가르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뒤로 선생님은 중국 최고의 시인인 두보나 이태백의 시편들, 「십팔사략(十八史略)」이라는 역사책에 나오는 중국 영웅들과 지략가들과 현자들의 무용담,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 이황 선생의 「퇴계문(退溪文)」 등 한문으로 씌여진 최고의 문장들을 멋진 서예체의 글씨와 해학한 한문학의 지식과 역사 지식을 섞어 가면서 가르쳐주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문학지망생이었고, 고전과 한문학에 목말라 있던 저는 그 선생님의 수업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2학년이 지나 고3이 되어서도 저는 선생님의 수업을 빠뜨리지 않고 들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한문이나 국어시간을 이용해서 영어나 수학 공부를 하던 그 시절에, 저는 오히려 다른 과목 수업을 빼먹고 선생님의 한문과 국어 수업을 몰래 청강했을 만큼 탐닉했습니다.

서울로 올라와서 대학교 시험을 치른 날 밤, 저는 서울 친척집의 골방에 엎드려서 박시중 선생님에게 길고 긴 편지를 썼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선생님과 개인적인 면담을 하거나 얘기를 나눈 적이 없이 저 혼자서만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있었기에 저를 소개하는 글로 서두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암울하고 힘들고 입시 공부에 숨이 막혔던 고등학교 시절에 선생님의 수업은 저에게 영혼의 숨통을 틔워주는 귀중한 시간이었다는 내용과, 3학년 때 이황의 「퇴계문 전편」만 배웠는데 후편도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마침글로 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도 멋진 달필로 쓴 장문의 편지를 바로 보내 주셨습니다.



지금도 그 편지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고, 제 가슴에 불을 지른 스승에게서 받은 유일한 편지이기에 앞부분을 소개합니다.

보내 준 편지 참으로 반갑게 받아 보았네.

무료하던 차에 자네 편지는 무기력한 나에게 생기를 고취해 주었네. 바로 답신을 내려던 것이 이렇게 지연되어 미안하네. 통근하느라고 그리 되었으니 양해있기를 바라네.

내가 어찌 명곤군을 기억 못할 것인가? 언젠가 독후감 써낸 것들을 검토하다가 자네 <초사> 독후감을 보고 어찌나 흐뭇했는지. 그래 전교생에 시범적으로 낭독하여 주도록 했었지. “觀鳳一羽에 知五色之具(봉의 깃 하나를 보면 다섯 색깔 갖춘 것을 알 수 있다.-필자 주)”라는 말도 있듯이 한 가지를 미루어 여러 가지를 짐작했네.

자네 독서력이나 감상력이 뛰어난 것보다 허영과 물욕의 와중에서 인간을 상실해 가는 판국에 자네의 정심수학(正心修學)하는 마음의 자세가 출중함을 느끼었네. 학문하는 사람의 태도로서 저 굴원의 말한 바 “擧世皆濁에 我獨淸이요, 衆人皆醉에 我獨醒 (세상이 온통 흐려져 있는데 나 혼자만이 맑고 깨끗하였고, 사람들 모두가 이욕에 취했는데 나 혼자만이 맑은 정신이었네-필자 주)”와 같은 의연한 자세가 확립되어야 가히 후일이 기대되는 큰 인물이 될 줄로 아네.

물질에 눌려 패기조차 잃은 속물들은 마땅히 타기해야 하네. 자네는 명석한데다가 시종(始終)을 분명히 하려는 학구적인 천성이 구비되었으니 꼭 대성할 것으로 기대된 바가 크네. 퇴계문을 후반만 써보내니 많이 음미해 보도록........

이 내용과 함께 상당한 분량의 「퇴계문 후편」을 친필로 모두 적어 보내 주셨습니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정종 한 병을 사들고 댁으로 찾아 갔더니 너무 반가워하셨습니다. 저와 함께 정종을 거나하게 드신 뒤에 “자네가 대학생이 되었으니 이젠 이런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하시며 한문학 고전이 가득 찬 책장에서 「순자(旬子)」를 꺼내어 함께 읽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선생님께서 수업 시간이면 꼭 제가 보냈던 편지를 후배들에게 읽어주시면서 제 얘기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 뒤로 가끔씩 뵈러 가면 고전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없어서 가르치는 재미가 없다고 쓸쓸해하시다가, 몇 년 뒤에 지병이 도져서 너무도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전 지금도 박시중 선생님이 보내주신 편지와 고등학생 시절에 선생님이 칠판에 적어주셨던 한문의 시귀들을 적은 노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다른 노트들은 다 버렸어도 그 노트 속에는 제 가슴에 타올랐던 문학과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전 그 뒤 선생님의 기대처럼 학문의 길로 가지 못하고 연극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제가 예술을 하면서도 우리의 전통과 판소리와 고전의 아름다움에 심취할 수 있었던 것은 예민하고 열정적이던 고등학교 시절, 제 가슴속에 고전 사랑의 불을 질러 준 박시중 선생님의 은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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