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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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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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10.07.31
    "왔구나, 배뱅이가 왔소이다!", 이은관 명창 (10)
  2. 2010.07.28
    이 시대의 백결 선생, 거문고의 한갑득 명인
  3. 2010.07.27
    소 따라 장 따라 떠도는 인생, 이판동 명인 (4)
  4. 2010.07.25
    "일어나서 외쳐라!", 김귀옥 판사의 명판결 (78)
  5. 2010.07.22
    핏줄을 타고났나, 신이 내렸나, 김석출 명인 (11)
  6. 2010.07.20
    옹골진 토박이의 꽹과리 신명, 김봉열 명인 (8)
  7. 2010.07.17
    19세기 조선 유부녀의 위험한 불꽃 사랑 (13)
  8. 2010.07.14
    달을 지고 세월을 노래하니, 김월하 명창 (20)
  9. 2010.07.12
    피 속에 흐르는 씻김굿 가락, 박병천 명인 (16)
  10. 2010.07.09
    말뚝이, 문둥이의 절절한 한, 이윤순 명인 (13)
  11. 2010.07.07
    '장구 귀신에 씌운' 장구의 대가, 신기남 명인 (14)
  12. 2010.07.05
    이문열 작가의 인터넷 '집단사기' 발언을 보고 (229)
  13. 2010.07.02
    저 깊숙한 혼의 소리, 상여소리꾼 최 명인 (7)
  14. 2010.07.01
    민족 무술 '태껸' 부흥의 중시조, 신승 명인 (19)
"왔구나~ 왔소이다~~배뱅이가 왔소이다~~~~"

'이은관 하면 배뱅이굿, 배뱅이굿 하면 이은관'이라고 할만큼 이은관 명창은 나라 안에서 <배뱅이굿>을 가장 뛰어나게 불러 젖힐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웬만한 여자의 목소리보다도 더 높이 올라가는 그 고운 목소리로 한없이 높게 뻗어냈다가 때로는 간드러지게 때로는 구슬프게 엮어나가는 그의 노랫가락을 듣고 있노라면, 막혔던 속이 확 뚫리듯 시원하고 개운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또 사이사이 끼워 넣는 재담은 구수하고 멋스러워 때로는 폭소를 터뜨리게 하고, 때로는 실눈을 뜨고 조용히 웃게 하니,「배뱅이굿」을 연기하는 그의 솜씨는 가히 일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처 : http://child.junggu.seoul.kr/h/h03/h030...EC%3DAAC


그는 1917년 11월 27일에 강원도 이천면 회산리에서 평범한 농부인 이윤하의 8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산에 나무하러 가면서도 "나무하러 가세 나무하러 가세, 상상마루에 올라가세" 하는 산타령을 지게 작대기로 장단을 맞추면서 곧잘 불러 젖히던 아버님의 핏줄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소리에 귀가 밝은 소년으로 동네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자라났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배우는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하는 창가라든가,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하는 동요를 곧잘 불러 학예회 때는 반드시 뽑혀 나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또 친구들과 개울에 나가 미역감고 놀 때는 <신고산타령>이나 <닐니리야> 같은 민요를 불러서 동무들한테 부러움과 찬사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철원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는 공부보다는 노래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3학년때 그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는 일대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때가 열아홉 살 땐데 철원극장에서 콩쿠르 대회가 열렸거든. 근데 내가 거기서 <창부타령>하고 <사설 난봉가>를 불러서 일등상을 탔어요. 그 길로 학교를 때려치우고 서울로 올라갔지요. 그때는 서울만 가면 금세 출세하는 줄 알았지. 어찌어찌해서 경성방송국에서 <초한가>를 불렀는데, 그것이 고향에 알려져 가지고 나중에 집에 내려가니 환영이 대단해요. 요릿집에 불려가서 소리도 하고, 여자들의 프로포즈도 받아보고, 아무튼 촌놈이 노래 하나로 출세한 거지요."

방송국의 위력은 대단해서 학교를 그만두고 집을 나간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부친이나, 신혼의 재미도 누려보지 못하고 소박맞은 듯이 서러워하던 젊은 아내도 라디오에 나온 그의 출세를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 http://www.gugakebook.com/master/list/c...tart%3D0


이렇게 남들은 명창이나 된 듯이 추켜세우고 좋아했지만, 소리를 하면 할수록 그의 마음 속에는 불만이 커져가기만 했습니다.

천성적으로 재주를 타고났다고는 하지만 유성기 판이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배운 솜씨로는 결코 일류가 될 수 없다는 자각이 싹튼 것입니다. 그는 남몰래 고민하다가 다시 집을 뛰쳐나가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을 찾아 공부를 하려고 서울로 올라 온 그는 적당한 선생님을 찾지 못해 얼마간 방황하다가 황해도 황주 권번의 소리선생인 이인수 명창을 알게 되어 황주로 갔습니다.

"황주하고 서울을 왔다갔다 하면서 한 삼 년 간 공부했지. 황주에서는 이 선생님 댁에서 먹고 자면서 공부했는데, 선생님 성품이 너그롭고 인자하셔서 아주 잘 가르쳐 주셨어. 그 선생님에게 <배뱅이굿>하고 서도민요를 배웠지."

서울에 김 정승, 이 정승, 최 정승, 세 사람이 있었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명산에 기도하여 딸 하나씩을 낳았는데 이 정승의 딸은 세월네, 김 정승의 딸은 네월네, 최 정승의 딸은 배뱅이였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세월네와 네월네는 시집을 가서 잘 사는데 배뱅이는 어느 날 시주를 받으러 왔던 상좌중과 사랑에 빠진다.
상좌중이 계교를 써서 배뱅이의 방에 숨어 들어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 절로 돌아간 뒤 소식이 없으니 배뱅이는 상사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그런데 평양의 어느 건달이 이 동네 막걸리집에서 배뱅이의 내력을 다 알아가지고 능청스런 울음과 넋두리로 배뱅이의 부모를 속여 많은 재물을 얻어 가지고 돌아간다.

이 배뱅이의 이야기를 민요가락에 얹어서 흥겹게 부르는 <배뱅이굿>은 이인수 명창의 스승인 김관준 명창이 창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황해도 지방에 전해오는 배뱅이의 이야기를 황해도소리를 중심으로 하여 경기도, 강원도, 함경도의 민요나 잡가들을 중간중간에 넣어가면서 소리꾼 한 사람이 엮어 나가는 이 소리는 전라도 지방의 판소리와 그 형태가 아주 비슷합니다.

한 시간쯤 걸리는 이 <배뱅이굿>에는 '긴 염불', '자진 염불', '황해도 뱃노래', '사설난봉가', '어랑타령', '강원도 아리랑', '창부타령', '장타령', '장님 송경'과 같은 노래들이 쉰 곡쯤 나오는데 김관준 명창은 이 노래들을 그의 아들인 김종조 명창과 제자인 최순경 명창, 이인수 명창에게 전해 주어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이라 합니다.

세 사람 중에 최순경 명창이 제일 먼저 유성기에 "소리를 박아서" 세상에는 최순경 명창이 <배뱅이굿>의 일인자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 뒤에 김종조 명창이 취입하여 그도 얼마간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이인수 명창은 레코드 취입을 못해서 세상에는 동료 두 사람 만큼 널리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은관 명창의 말에 따르면 이인수 명창이 다른 두 사람보다 "재담도 잘하고, 짓거리도 잘 하고, 소리도 성량이 크고, 고음이 잘 나고, 남성적이어서" 제일 실력이 좋았다고 합니다.

서울에 와서는 왕십리에 살던 이명길 명창에게 <노래가락>, <창부타령>, <청춘가>, <사발가>와 같은 경기민요를 배웠습니다.

또 마포에 사는 최경식 명창에게는 시조를 배워 소리의 기초를 모두 닦은 뒤 황해도 장연의 권번에서 소리선생을 잠깐 했습니다. 그뒤 서울에 와서 김봉업 명창이 주관이 되어 꾸민 가설극장을 따라 이천에서 일 주일쯤 공연도 했습니다.

"김봉업 씨는 줄타기의 명수로 유명했던 분이고, 해금도 잘 타시던 대단한 명인이셨어. 그분 단체에서 공연을 하고 서울역에 내렸는데 만담 잘 하시기로 유명했던 박춘복 씨가 나와 있어.
'아니 형님 어떻게 왔소?' 하니까 '아무 말 말고 나하고 어디 좀 가세.' 하더니 택시를 타고 종로 익선동의 골목에 가더니 어느 집에 들어가는 거야. 그 집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 박춘복 씨가 인사를 시키는데 알고보니 그 사람이 그 유명한 신불출 씨라. 내가 레코드판 껍데기에서 많이 봤던 바로 그 얼굴이야. 나는 그만 감격해 버렸지."

신불출 명인은 본래 연극배우로 무대 활동을 하다가 만담가로 변신해서 당대 최고의 만담가로 활약하던 사람으로 당시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고 합니다. 그의 만담들은 우습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민족 정신을 고취하고 일본에 대한 풍자나 독립을 고취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걸핏하면 공연이 끝나고 경찰서 신세를 지기도 하고, 공연중에 수갑을 차고 잡혀가기도 했지만 굽히지 않고 용감하게 버틴 신화적인 만담가로서 그 당시 대중들의 우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은관 명창 역시 고향에서 신불출의 <대머리 영감>이나 <엉터리>, <견우직녀>, <홍길동>과 같은 만담이 '박힌' 유성기를 들으면서 동네 사랑방에서 동치미 국물 마시면서 웃고 울던 기억이 생생했습니다. 그때 무한히 동경했던 별 같은 우상을 직접 만났으니 가슴이 떨리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그는 신불출 명인과 인사를 나눈 뒤 다음날 다시 만나 <배뱅이굿>을 들려 주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준비를 단단히 하고 다음날 그 집에 갔더니 신불출 선생하고 연극 연출가이신 박진 선생하고 신불출 씨 어머니하고 누이동생 둘, 이런 분들이 앉아있더란 말이야. 그 앞에서 소리를 하는데 아무튼 어떻게 열심히 불렀던지 박진 씨가 눈에 수건을 대고 울었어. 그 덕에 며칠 뒤에 청계천에 있는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할 때 뽑혀서 출연하게 됐지."

그때의 출연자로는 박춘복과 송흥란이 재담을 하고, 이은관과 김계출이 낮과 밤에 교대로 <배뱅이굿>을 하고 마지막에 신불출이 만담을 했습니다.

김계출 명창은 그보다 4년 선배되는 사람으로 그 전에도 놀이판에서 한번 같이 놀아봤던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배뱅이굿> 이라 해도 계보가 조금 달라서 김계출은 슬픈 내용이 많이 있었고, 이은관은 웃기는 내용이 많이 있는 편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김계출이 먼저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에 이은관은 그를 따라잡기 위해서 비상수단을 썼습니다.

한량 중에 친한 사람 하고 짜서 그가 소리할 때에 박수치고 발구르면서 잘한다고 소리지르도록 했더니 사람들이 멋 모르고 따라서 잘 한다고 소리치는 통에 김계출은 점점 소리에 기가 죽어 목이 쉬고 이은관은 점점 신이 나서 공연이 끝날 무렵에는 두 사람의 솜씨가 뚜렷이 차이가 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다음 공연인 대구 공연 때에는 그 혼자 뽑혀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국민복 입고 무대에서 삼십 분쯤 소리를 하는데 사람들이 좋아서 소리를 지르고 재청을 하라고 난리 법석이라. 그때 기분이 좋아서 신불출 선생한테 가니 수고했네 한마디 뿐이야. 뭐라고 칭찬이라도 해줄 줄 알았는데 너무 냉랭해서 실망했지. 그런데 또 사업부 일을 보던 김광산 씨가 ‘자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나면 안 되네.’ 하시는 말을 듣고 보니 이해가 가. 내가 어린 나이에 너무 인기가 좋으면 배짱을 부릴까 염려해서 그러신 거지.”

사실 염려한 대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자 그에게 곧바로 유혹의 손길이 들어왔습니다. 신불출 명인의 여자 제자였던 김윤심 씨가 독립해서 서과불, 곤일평과 같은 만담가들과  단체를 만들어 가지고 그에게 함께 하자고 제의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불출의 단체만 따라다녔습니다.

신불출 명인은 일본이 창씨를 하라고 하니까 “에하라 노아라”라고 풍자 섞인 개명을 할 만큼 반일정신이 투철했던 사람이지만, 일제 말기의 예술인 동원 정책에는 어쩔 수 없이 굴복하여 잠시 그들에게 이용되어 위문공연을 다녔습니다.

이은관 명창도 단체를 따라 전국 각지를 순회하고 함경도 산수갑산에서 만주까지 감자국수나 풀빵으로 허기를 때우며 배고픔과 피로에 시달리면서 고달픈 공연 여행을 다녀야 했습니다. 그때의 젊은이로서 징용을 면하려면 단체를 따라다니면서 일본에 협력하는 길밖에 없었고, 그게 싫으면 산속으로 숨어다니든지 징용을 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좌익 단체와 우익 단체가 대립하여 심각한 싸움이 벌어졌는데 신불출 명인은 좌익 계열의 연극 단체에서 공연을 하다가 끝내 북으로 올라가 소식을 알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은관 명창은 해방이 된 후 바로 신불출의 단체와 헤어져서 대한국악원 민요부의 일원이 되어 그쪽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민요부에는 박천복, 장소팔, 김옥심, 이은주, 고백화, 묵계월과 같은 경기민요와 서도민요의 명창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과 함께 여기저기 공연도 다니고 민요 보급활동도 활발히 했습니다.

그러다가 6.25 사변이 끝난 얼마 뒤에 고려 영화사에서 <배뱅이굿>을 영화로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와 난생 처음으로 영화도 찍게 되었습니다.

감독에 양주남, 조감독에 김수용, 건달박수에 이은관, 함경도 할머니에 복혜숙, 돌쇠에 박흥수 등이 모여 반 년이 넘게 고생하며 만든 이 영화는 그런 대로 흥행에 성공하여 그때 조감독이었던 김수용은 감독 첫작품으로 장소팔, 백금녀, 이은관, 박흥수를 등장시켜 <공처가>라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 뒤 <낙화유수>라는 영화에서는 뱃노래를 부르고 <두견새 우는 마을>에서는 상여소리를 불러 영화를 찍고, 레코드 녹음하고, 장소팔과 유랑극단을 만들어 3, 4년간 떠돌아 다니기도 하고, 일본이나 미국이나 월남에 공연 다니기도 하고, 민속 예술학원을 설립해서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대한국악협회 이사를 지내기도 하며 바쁜 세월을 보낸 결과 1984년에 서도소리의 인간 문화재로 지정받게 되었습니다.

“이 <배뱅이굿>이 어떤 이야기를 노래와 재담으로 엮어나가는 것은 남도 판소리하고 비슷해. 그렇지만 음악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나지. 판소리가 무게와 깊이가 있고 단조가 많다면 <배뱅이굿>은 경쾌하고 단순하고 장조가 많아.
또 서도민요 창법이 남도민요하고는 확실히 달라서 남도쪽에서는 뱃속에서 뽑아올리는 통성으로 거칠고 꿋꿋하게 소리를 내지만 우리는 맑고 고운 목소리를 주장하지. 또 경기민요하고는 비슷한 점도 많지만 다른 점도 많아. 경기민요가 부드럽고 간드러지게 넘어간다면 서도민요는 좀더 심하게 소리를 떨지. 그것을 조는 목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이 모두 그 지형 산세를 따라서 생겨난 특징일 거야. 어쨌든 나는 맑고 높은 소리가 자유자재로 난다고 사람들이 감탄을 하고 했지.”

그렇듯 고운 목청과 튼튼한 성대를 타고 났던 그도 한때 목이 쉬어 좌절한 적이 있었습니다. 6.25 뒤 전라도 순회공연을 갔는데 공연을 마치고 트럭타고 숙소까지 오는 길에 마침 비가 내리는데도 소리를 부르고 놀다가 다음날 목이 잔뜩 쉬어 버렸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목이 풀리지 않고 점점 쉬어가기만 하니까 그는 소리를 포기하려고 공연을 사양하고 집에서 쉬었습니다. 그런데 한 2년쯤 쉬고 나니까 소리가 제대로 돌아와 다시 공연을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인인 남상욱 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육 남매를 거의 다 출가시키고 조촐하게 지내는 그의 말년은 다복합니다.

출처 : http://blog.joins.com/media/index.asp%3...3D200801

아흔 살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아직 건강하고 목소리 또한 낭낭하여 간간이 공연도 다닐 수 있습니다. 작년 12월 제가 위원장을 맡은 전주세계소리축제 송년 기념 공연인 <광대의 노래>에 출연하신 그는 배뱅이굿과 함께 트럼펫 연주까지 멋들어지게 들려하셔서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습니다. 정말 기네스 북에라도 올리고 싶은 분입니다. 

아직도 그의 얼굴에 늘상 웃음이 떠나지 않고 몸에서는 훈훈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소리 하나로 한 세상을 웃고 울리며 살아온 그의 삶이 이루어 놓은 아름다운 공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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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80년쯤 전에 거문고의 백낙준 명인이 거문고에 전라도의 무속 음악과 판소리의 가락을 얹어 '거문고 산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자 유식한 선비들과 선비들의 영향을 받은 음악인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비난을 해댔습니다. 그보다 20년쯤 전에 가야금의 김창조 명인이 '가야금 산조'를 만들었을 때 여기 저기서 감탄과 칭찬의 말이 오가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반응이었습니다. 이는 거문고와 가야금이 지니고 있는 음악의 특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겨난 일입니다.

가야금이 규중의 아낙이나 기생들의 사랑을 받는 악기였다면, 거문고는 '군자의 벗'이라하여 마음을 닦고 뜻을 기르는 데에 쓰였기 때문에 ‘모든 악기의 우두머리’ 로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 온 터였습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_blog/photoList.do...3D679834

이렇듯 고상하고 점잖은 악기를 가지고 천박한 세속의 가락을 타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이단이요, 불경하기 짝이 없는 짓으로 여겼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거문고 산조를 비판한 것입니다.

그러나 백낙준 명인은 주위의 눈총에도 굴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산조 가락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전해 오던 거문고의 곡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묘한 가락이 그의 거문고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의 거문고 속에서는 슬프게 흐느끼다가, 호탕하게 웃어대다가, 바람처럼 속삭이다가, 시냇물처럼 재잘거리다가, 무섭게 호령하다가, 애절하게 통곡하는 ‘세속’ 의 온갖 정서가 찬란하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러한 세속의 정서는 거문고에서 금기로 여겨오던 것이었지만, 그것이 워낙 진하고 간곡한 삶의 냄새를 전해 주는 탓에 그를 비판하던 사람들도 마침내 하나 둘씩 그의 가락을 좋아하게 되어 드디어 거문고 산조의 창시자로 백낙준 명인을 찬양하게까지 되었습니다.

백낙준 명인은 그렇듯 어렵게 만든 산조가락을 박석기, 신쾌동, 김종기에게 전해 줬고 박석기 명인은 한갑득 명인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한갑득 명인이 거문고 산조를 배울 때만 해도 나라 안에 산조를 켜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습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음악가 집안이여. 할아버님 성함이 한덕만인디 대금을 잘 부시고 가야금도 명인이셨고, 아버님 성함은 성태인디 할아버지한테 가야금을 배웠다가 나중에 명창 김채만씨한티 판소리를 배워서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어. 내 나이 열두 살 됐을 때 아버님이 세상을 뜨셨지.”

아버지가 세상을 뜰 무렵 어린 한갑득은 안기옥이라는 명인에게서 가야금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되지 않은 열세 살쯤 되었을 무렵, 백낙준 명인이 광주에 공연을 왔을 때 우연히 그의 거문고 산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거문고 산조를 들었는디 어린 마음에도 참 좋아. 가야금 산조를 몇 년 배웠고, 어려서부터 음악에 젖어 살아왔으니 어렸다고 해도 이에 귀는 뚫려 있었거든. 그런데 들어보니 참 좋아. 가야금 산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씩씩하고 남자답고 깊고 무거운 맛이 울려 나온단 말이여. 그래서 거문고를 배울라고 여기 저기 알아보니 창평에 사는 박석기라는 사람이 거문고를 잘한대. 그래서 자전거를 빌려타고 창평까지 오십 리 길을 달려갔지.”

박석기 명인은 전남 담양군 창평 고을의 소문난 갑부였습니다. 일찍이 동경 대학을 나온 인텔리로 일본에서 야구를 배워와 우리나라에 보급시킨 체육인으로도 알려져 있는 터였고, 국악을 좋아해서 판소리와 거문고를 익힌 한량이었습니다. 그의 집에는 국악인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렸습니다. 그는 그 사람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며 후하게 대접하고 그들에게서 음악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는 거문고를 좋아해 백낙준 명인에게 십 년 동안 거문고를 배워 그의 수제자로 인정을 받을 만큼 실력을 쌓았습니다.

“그 양반은 생기기도 잘생기고, 마음도 넉넉한 사람이여. 찾아가서 ‘내가 한성태 씨 아들인디 거문고를 배우러 왔으니 가르쳐 주시오.’ 하니 두말없이 가르쳐 주겠다고 하더구만. 그날부터 그 집에서 먹고 자고 배우는디, 그때 박동실 명창한테서 김소희, 박초월, 한애순이 판소리를 배우고 있었고, 악기하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렸어.”

박석기 명인은 그에게 거문고 산조와 정악가락을 모두 전수해 주었습니다. 창평과 광주를 오락가락하며 거문고 공부를 끝낸 그는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그야말로 ‘푸른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광주 촌놈이 서울에 무작정 올라와서 대뜸 꿈을 이룰 수는 없었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어서 종로 낙원시장 근천에 하숙을 하며 무료하게 한두 달을 지냈습니다.

그런던 어느날, 마침내 그에게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하숙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는디 밖에 누가 와서 광주에서 온 한갑득 씨가 누굽니까 헌단 말이여. 그래 내가 한갑득이오. 허닝께 선생님을 뵙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나를 따라갑시다 헌단 말이여.
그래서 그 사람을 따라 가니 지금 단성사 옆 골목으로 돌아가더니 웬 커다란 한옥집으로 들어가더란 말이여. 따라가보니 대청마루에 수염 허연 노인네들이 탕건쓰고 갓쓰고 옥관자 달고 도포 입고 담뱃대 물고 떡 앉어 있더란 말이여. 그래 노인네들헌디 절을 했더니, ‘이놈아 니가 어린놈이 거문고 산조를 배웠다니 한번 타 봐라.’ 하더만. 그래서 덜덜 떨면서 배운 대로 탔지.”

그가 들어간 집은 식민지 시대 국악인들의 집합소였던 ‘조선성악연구회’였습니다. '수염 허연 노인네'들은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열 같은 원로 명창들이었고, 젊은 여자와 남자들은 정남희, 조상선, 오태석, 박녹주와 같은 신인 명창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거문고 산조의 ‘젊은 별’ 이었던 신쾌동도 앉아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는 스승 박석기에게서 배운 가락을 열심히 탔습니다. 그러자 노인네들이 얼굴에 웃음을 지으면서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신쾌동 씨가 나보다 세 살이 많은디 그 사람도 그때 놀랬다고 하드만, 어쟀든 그날 저녁부터 외출을 받게 되었어. ‘외출’이란 공연을 하는 건디 요새로 말하자면 밤무대를 뛰는 거여. 식도원에서 몇 시, 명월관에서 몇 시, 국일관에서 몇 시, 이렇게 예약을 받아놓고 외출을 나가는디, 한번 나가면 십 원이 보통이고 손님 인심이 좋으면 하룻밤에 오십 원을 벌 때도 있어. 그때부터 출세를 헌 거지.”

1919년 12월 12일, 광주시 수교동에서 태어나 스무 살이 되도록 광주와 창평 부근에서만 살아오던 촌놈이 느닷없이 출세를 하여 쌀 한 가마니에 일원오십 전하고 밥 한 그릇에 오 전씩 하던 시절에 하룻밤에 십 원도 벌고 오십 원도 벌었으니 그 씀씀이가 헤펐을 것은 물어보지 않아도 뻔한 일입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물어 보았더니 “그거야 친구들 만나 다 먹고 놀았지.” 하며 그런 당연한 말을 뭐 하러 물어 보느냐는 듯이 툭 내뱉는 그의 말에서 한량스러웠던 젊은 시절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술과 노름과 친구와 여자와 인기와 돈... 서울 생활이 가져다 준 이런 달콤한 유혹에 한껏 빠진 그는 그 시절 최고 멋쟁이로 옷차림에도 남달리 돈을 들였습니다. 당항라 바지에, 모시 께끼 저고리를 입고, 한산 모시 두루마기를 척 걸쳐 입고, 번쩍번쩍 윤이 나는 칠피 구두를 신고서 신나게 바람을 피우고 다녔습니다.

그런 바람둥이가 진도에서 명창으로 이름이 높던 박동준의 맏딸인 박보아를 만나고서는 그녀에게 홀딱 빠져 버렸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소리를 익히고 성악연구회에서 송만갑, 정정열 명창에게 소리를 익혀 신인 명창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한 박보아는 소리도 잘하고 얼굴도 예뻐서 여러 사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던 처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 역시 한갑득의 거문고 소리에 반해 열렬히 사랑을 하다가 부모의 반대도 무릅쓰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때가 스물세 살 되었을 땐데 결혼하고 삼 년쯤 지나서 해방이 되었지. 해방이 되니까 여기저기 국극 단체가 생기더란 말이여. 그래 우리도 ‘삼성국극단’을 만들었지. 마누라의 동생, 그러니까 내 처제가 박옥진이라고 소리 잘하고 연주도 잘했거든 그래서 박보아, 박옥진 그리고 한갑득 이렇게 세 별이 모였다고 해서 삼성국극단이라고 이름을 붙인 거여. 나는 반주도 해주고, 작곡도 해주고, 단체운영도 하면서 같이 다녔지.”

창극단체를 운영하며 팔도를 돌아다니는 동안에 그의 거문고 솜씨는 신쾌동 명인과 더불어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명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진전을 보였습니다. 특히 스승에게서 배운 가락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창작한 가락을 많이 섞어서 타기 때문에 그의 산조는 변화무쌍하고 자유자재함에서 아무도 따를 수 없는 독특한 맛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출처 : http://gugakcd.com/shop/%3Fdoc%3Dbbs/gn...%3D09...

“요새는 문화재 지정이니 뭐니 해서 선생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하라고 하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여. 선생한테는 기본 가락을 배우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지 재주껏 편곡도 허고 창작도 해서 타야 좋지. 밤낮 배운 대로만 허면 그건 밥만 먹고 똥만 싸는 꼴이지.
내가 내 가락을 타는디 ‘어떻게 가락을 잘 만들어서 듣는 사람의 심장을 건드려 주나.’ 허고 끊임없이 연구를 허니 가락이 한정이 없어. 수시로 변해. 공연 때마다 다르고 켤 때마다 달라.
그리고 즉흥적인 멋이 있어야 허니 한 음 켜 놓고 그 다음에 동으로 갈지 남으로 갈지 북으로 갈지 서로 갈지 몰라. 그래서 산조가 어려운 거고, 그래서 산조가 좋은 거여. 판소리도 마찬가지여. 내가 가락을 연구할 때 엤날 명창 선생님들의 소리가 많이 참조가 됐는디 그 양반들 소리가 그려. 자유자재허고, 신출귀몰허고, 구석구석 기묘허고, 마음대로 사람을 울리고 웃기고, 그래서 국악이 좋은 거여.”

 <삼국사기>에 기록된 거문고의 유래를 살펴보면 중국의 악기와 우리의 전통악기인 '고'를 섞어서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진나라 사람이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내왔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아나 그 성음과 타는 법을 알지 못하므로 나랏사람으로서 능히 그 소리를 낳고 이것을 탈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후하게 상을 주겠다 하였더니, 이때에 왕산악이 그 본 모양을 그대로 두고 많이 제도를 고치어서 아주 새로운 악기를 만들고 겸하여 곡조를 백여 곡을 지어 이를 아뢰매 검은 두루미가 내려와 춤을 추었으므로 드디어 '현악금'이라 이름하고 뒤에 줄여서 그저 '현금'이라 하였다.”

거문고는 그뒤 신라 사람 옥보고에게 전해졌고, 옥보고는 지리산에 들어가 새로 30곡을 지어 속명득에게 전하고 속명득은 이를 또 귀금 선생에게 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거문고는 중국과의 인연 때문인지 남쪽의 가야 지방에서 생긴 가야금이 서민적이고 통속적이고 익히기 수월한 것과 달리 귀족적이고 고답적이고 익히기 어려운 특성을 지녀왔습니다.

그런 특성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좋아하는 선비들의 기호에 딱 맞아 예로부터 '금'과 '서'는 선비 수업의 필수과목으로 꼽혀 왔습니다.

그리고 가락의 운용에 있어서도 감정을 절제하고 조화롭고 평정하게 이끌어 나가는 것을 으뜸으로 쳤으니 슬퍼하고, 분노하고, 웃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삶의 진한 정서는 천하고 격이 낮은 것으로 여겨져 산조가 생기기 전까지 거문고는 세속의 가락과 인연을 맺지 못한 채 수백 년을 지내왔던 것입니다.

거문고의 몸통은 앞면은 오동나무를 쓰는데 돌 위에서 자란 오동나무로 만든 것을 으뜸으로 치고 뒷면은 밤나무를 씁니다. 줄은 모두 여섯 줄인데 대현이 가장 굵고 문현, 무현, 괘상청, 괘하청, 유현의 순으로 가늘어집니다.

출처 : http://www.jinodyssey.co.kr/zeroboard/v...c05b737c

타는 법은 거문고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술대'를 잡고, 왼손으로는 줄을 희롱합니다. 나직하게 고르면 속삭임처럼 다정하고, 세게 치면 소낙비처럼 요란하며, 맑고 흐리고 그윽하고 기쁘고 노여웁고 거세고 부드러운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음색을 가진 거문고는 십 년쯤 공부해야 비로소 소리를 갖출 수 있을 만큼 배우기 어렵습니다.

이렇듯 어려운 거문고에 반해 한평생 거문고 하나만을 안고 살아온 그는 처세할 줄도 치부할 줄도 모르는 대쪽 같은 성격 때문에 삼양동의 셋집에서 부인과 처제를 거느리고 어렵게 살다가 1987년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떠나기 전, 그는 기회만 있으면 ‘쓸모없는 문화재’ 푸념을 늘어놓곤 했습니다.

“문화재라는 것이 빛좋은 개살구여. 쌀 한 가마니 사고 나면 싹 없어지는 돈 조끔 주면서 별별 귀찮은 일은 다 시켜. 말이 좋아 인간 문화재지 사는 꼬라지는 인간 쓰레기여. 내가 어떤 때는 챙피하고 서러워서 이 길로 들어선 게 원망스럽고 죽고만 싶어. 이젠 거문고 소리 알아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

이렇듯 비참한 노후를 보내다 가신 그에게서 설날에 떡방아 찧을 쌀이 없다고 바가지를 긁는 아내에게 거문고로 <방아타령>을 들려주었다는 '백결 선생'의 그림자를 본 것은 저의 지나친 상상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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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명인명창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소를 팔고 사는 일의 '명인급 쇠거간' 한 분을 소개합니다. <뿌리깊은 나무> 기자 시절에 만난 그는 너무도 솔직하고 호탕한 모습으로 제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분입니다.   

 “소나 사람이나 매한가지여. 눈구녁 하나 보먼 그 놈이 잘 될 놈인지 못 될 놈인지 대번에 알아 버리는 벱이여.”

출처 : http://ask.nate.com/qna/view.html%3Fn%3D8456379

점잖게 서 있는 암소의 궁둥이를 “철썩”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으로 야무지게 때리며 이판동 노인이 고함치듯 말했습니다. 삼백 마리가 넘게 물려들어 비벼대는 소들의 울음 소리가 어찌나 시끄러운지 바로 옆에 붙어 서서 얘기를 나누는데도 마치 강을 사이에 두고 얘기를 나누듯이 소리를 질러대야 했습니다.

“눈구녁을 어떻게 보나요?”
“눈구녁이 우뭉허니 깊어 놓으먼 성질이 못된 놈이고, 툭 불거져서 순하게 생겨야 그게 좋은 소여. 사람도 마찬가지여. 사위를 삼더라도 그놈 눈구녁 하나 보고 말 한자리 시켜 보면 그놈이 마누라 굶길 놈인지 안 굶길 놈인지 대번에 알아 버리제.”

이 노인은 소의 아랫배를 손가락으로 꾹꾹 찔러대며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었는지 소고삐를 쥐고 있던 중개인이 험악한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이생원, 이놈 눈구녁 하나 보고 오십만원에 사쇼” 하고 되받았습니다. 이판동 노인은 그 중개인을 힐끗 보더니 “이놈아, 오십만원이면 너무 싸다, 육십만원 허면 내가 사마” 하며 손을 툭툭 털고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는 송아지들이 옹기종기 매어져 있는 곳으로 가서 송아지 한 마리의 고삐를 잡고서 “이 소 임자놈이 누구여?”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이렇게 해야 빨리 나온당게” 하고 눈을 찡긋해 보이며 개구쟁이처럼 장난스럽게 말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옆에서 다 듣고 있던 마흔 살쯤 된 중개인이 씁쓸한 얼굴로 “여기 있시오” 하고 나섰습니다. “얼매여?” 하고 이 노인이 묻자, 중개인은 귀찮다는 말투로 십오만팔천 원이라고 대꾸했습니다. 이 노인은 송아지를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놀리는 말투로 “쬐깐 놈이 통도 크네. 여보시오, 천 원만 깎어!” 하고 말했습니다.

이 노인의 말투에서 흥정을 하려는 낌새가 없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인지 중개인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먼 산만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 노인은 “이놈아, 거간놈이 흥정은 안허고 뭐혀?” 하면서 중개인의 어깨를 잡아 끌어 땅에다 메치려는 듯한 시늉을 해보였습니다. 중개인은 늘 그런 일을 당해 온 양 익숙하게 몸을 빼치며 “거간놈, 거간놈 허지 마쇼!” 하고 투덜거렸습니다.

이 노인은 도망가려는 그를 연신 따라붙으며 “나도 거간놈 허다가 나왔다. 이놈아 거간놈이란 말이 별난 말이간디? 중개인이란 말여, 중개인!” 하고 우스갯소리를 섞어가며 그를 놀려댔습니다. 옆에 서 있는 사람들도 그의 재담을 한 마디씩 거드는 통에 그가 가는 곳은 다른 곳보다 훨씬 시끌짝했습니다.

출처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34.HTML


쇠거간인 이판동씨를 제가 만난 때는 1970년대말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78세였는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허리가 꼿꼿하고, 걸음새가 가벼웁고, 말소리에 뱃심이 잔뜩 든 할아버지였습니다. 전라북도 정읍군 소성면에 자리 잡고 있는 정읍 쇠전에서 그 근방에 사는 쇠거간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재미난 할아버지를 소개해달라고 청했을 때, 선뜻 그를 소개해 줬을 만큼 쇠전과의 인연이 해묵은 할아버지입니다.

고삐줄을 매는 데 쓰려고 세워 놓은 말뚝을 사이에 두고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이판동 노인은 대뜸 “나는 한평생 쇠전을 따라댕긴 사람이여. 그런디 이 쇠전이란 디가 도적놈 소굴이여. 나는 도적놈 대장이고” 하고 주위를 휘둘러보며 기세 좋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조그마한 몸 위에 하얀 한복을 차려입고 노르스름한 중절모를 맵시있게 눌러 쓴 차림새와 함께 걸직하게 나오는 그의 첫마디에 휠씬 입맛이 당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다니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는 빽빽하게 서 있는 소의 사이사이를 잘도 빠져 다니면서 소의 값을 물어 보기도 하고, 능숙한 손길로 소 몸뚱이의 이곳저곳을 만져 보기도 하고, 낯익은 중개인과 장난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그의 몸가짐에서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도 기력은 젊은이 못지 않게 팔팔하다”고 은근히 뽐내 보려는 어린 아이 같은 순진함이 엿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도가 지나친 탓이지, 아니면 그날따라 그의 힘이 부쩍 솟은 탓인지는 몰라도 잠시도 한곳에 서 있지 않고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어느 새 소 열 마리를 사이에 둔 거리만큼 멀리 가 버리는 통에 그의 뒤를 쫓아다니느라고 애를 먹어야 했습니다.

더구나 고개를 잔뜩 빼어 들고 소 잔등 너머로 희끗희끗 보이는 하얀 한복과 중절모만 바라보며 뒤를 따라다니다 보니 쇠똥과 쇠오줌으로 범벅이 된 땅을 찬찬히 살피면서 걸을 겨를이 없어서 그가 중개인하고 장난을 칠 때마다 제 바지 가랑이에는 소가 내갈기는 똥이 땅에 떨어질 때 튀어나온 쇠똥이 한점씩 늘어가고, 그가 소의 값을 물어 볼 때마다 제 구두 윗창에는 노르끼리한 쇠똥이 자꾸 올라 앉았습니다.

하지만 이 노인은 쇠전 안의 소들을 모조리 한번씩 훑어볼 듯한 기세로 쉴 새 없이 입을 놀려 재담을 뿌리면서, 때로는 판소리 가락을 구성지게 흥얼거리면서, 이 소에서 저 소로 휘휘거리고 돌아다녔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축은 소입니다.

농사일을 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일꾼으로서, 물건을 나르는 짐꾼으로서, 또 죽은 뒤에 살과 내장은 맞좋은 음식으로서, 뿔과 가죽과 털은 갖가지 가공품의 재료로서 어느 것 한 가지 버릴 것 없이 두루 쓰이는 귀중한 가축입니다.

허허, 이름이 소로구나
의 있고 겸손하고
부지런도 할서이고
남을 위해 몸 바치고
사람에게 점잖으기
네 몸밖에 또 있을까
온갖 짐승 다 있어도
모도 모도 꾀만 피는데
이 천지 무궁토록
살고 살고 자꾸 살아
천하 백성 도와 주고
평야 평야 너른 들도
네 몸 아니면 뭐가 되나
허허, 이름이 소로구나

이렇듯 민요 가락에 실려서까지 사랑을 받던 소도 주인의 형편이 어렵게 되면 팔리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출처 : http://www.nemopan.com/photo_life/78769.../page/37

그래서 쇠전에 끌려 가서 새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말뚝에 매여 있어야 합니다. 쇠전은 “쇠장”, “소시장”, 또는 “우시장”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소뿐만이 아니라 양이나 돼지나 염소 같은 가축들의 거래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가축 시장”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중개인은 흔히 “쇠거간”이라고 부르고 때로는 “소중매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들의 등록된 이름은 “축우 중개인”입니다. 그들은 부탁 받은 소의 흥정을 붙여주고 흥정이 이루어졌을 때에는 그에 따른 수당을 자기의 수입으로 삼고 있습니다.

또 쇠전에는 소를 팔고 사는 농민들 말고도 직업적으로 소를 팔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쇠장수”라고 하는데, 관공서의 문서에는 “우상인”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들은 정식으로 등록 된 직업인이 아니고 비공식 직업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소의 거래라는 것이 몇십만 원에서 몇백만 원이 오고가는 커다란 거래기 때문에 그 거래의 속판에 여간한 비밀이 깃들어 있는 게 아닙니다. 이판동 노인이 첫 마디에서부터 “쇠전이 도적놈 소굴”이라고 외친 것만 보아도, 소의 거래를 둘러싸고 온갖 시비가 분분하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습니다.

이판동 노인은 젊은 시절부터 쇠판에 뛰어들어 쇠장수 노릇을 해오다가 늘그막에는 등록된 축우중개인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순살에 “정년 퇴직”을 하여 그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아는 사람의 부탁을 받아 소를 팔아 주기도 하고 하면서 “담배값이나 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등록이 안 된 “무허가” 소중개인인 셈입니다. 그래서 그가 소 흥정을 붙이려 할 때에 관리 사무소에서 “이판동씨, 소 고삐 놓으시오” 하고 소리치는 때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등록된 중개인들이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면서 “그려도 내가 나타나면 모다 벌벌 떨제. 제놈들의 속판을 훤히 아니께 안 떨고 배길 재간이 있어?” 하고 호기롭게 말했습니다.

“거간놈 끄트머리가 좋은 놈이 없더라네. 이 놈의 디가 아는 놈이 아는 놈 죽이는 디여. 그러게 도적놈 소굴이랑게. 나는 도적놈 대장이고.”

그 말이 그렇게도 자랑스러운지 그는 자기가 “도적놈 대장” 이라고 두 번씩이나 말했습니다. 그래 좋은 기회 다 싶어 “도적놈 대장이시라니 도적 기술이 환하시겠네요? 한 두 가지만 가르쳐 주세요” 하고 졸랐습니다.

그러자 그는 여기저기 고함을 쳐 대며 소를 팔고 있는 스무명 남짓한 중개인들을 쓱 둘러 보더니 “아 저기 있는 사람들이 모다 내 동지고 내 부하인디, 그 사람들 밥줄을 끊어서야 쓰겄는가? 그냥 여기 있는 놈들이 다 도적놈인 줄만 알면 되어” 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무어라 대꾸도 하기 전에 그는 한쪽 담 곁의 구석진 말뚝에 매어져 있는 암소 곁으로 가더니 그 소의 고삐를 쥐고 있는 중개인에게 “얼매여?” 하고 물었습니다. 중개인은 소잔등이를 철썩 치면서 “사팔이요”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이 노인의 얼굴이 이제까지 실없던 표정에서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싹 변했습니다.

그는 고삐를 중개인에게서 넘겨 받아 소를 몰아 보기도 하고, 목덜미의 멍에 자욱을 훑어보기도 하고, 등의 털을 쓸어보기도 하고, 멀찍이 물러서서 뒷짐을 지고 한참 바라 보기도 하더니 중개인의 소매를 끌고 담 곁의 귀퉁이로 데리고 갔습니다.

“내 사돈이 살 것이여.”
“사돈도 시세대로만 주쇼.”
“아, 이 사람아. 싸게 살라니께 사돈 찾제.”

이런 말들을 주고 받으며 담 곁 모퉁이로 가더니 마주 보고 앉아서 한참을 쑥덕였습니다. 그때 그들이 귀엣말로 속살일 때 드러난 표정이 참으로 심각하고 은근해서 그제야 “도적놈의 소굴”이라는 이 노인의 말이 실감이 났습니다.

한참 동안 둘이서 쑥덕이더니 중개인은 다른 곳으로 가고, 이 노인은 서른쯤 되어 보이는 사내 곁으로 가서 “주민등록증 내 놔” 하고 말했습니다. 소 곁에 엉거주춤 서 있던 사내는 잠바 주머니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어 이 노인에게 주면서 “얼마에 판대요?” 하고 물었습니다.

이 노인은 주민등록증을 받아 쥐면서 “얼매든 내 맘에 들먼 사고, 내 맘에 안 들먼 안 산다” 하고 내뱉듯이 말하더니 그 중개인이 데리고 온, 역시 서른쯤 되어 보이는 사내에게 “당신이 소 임자여?” 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내는 땅에다 침을 탁 뱉으며 “병원 갈라고 파는 소요!” 하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노인은 “병원은 내가 갈란다” 하고 말하더니 중개인의 소매를 끌고, 소가 틈을 이루어 놓은 구석으로 가서 다시 한참 동안 둘이 쑥덕거렸습니다.

얘기를 마친 다음에 이 노인과 중개인은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을 데리고 관리 사무소에 가서 중개 수수료를 내고 등록을 했습니다. 등록을 마치고 나서는 다시 모두 소를 매어 놓았던 자리에 모여 앉아 돈을 교환했습니다.

소를 사 가는 사내가 배띠로 묶어서 배에 차고 온 돈뭉치를 끌러 땅에 내려 놓자, 소를 파는 사내가 한 뭉치씩 집어서 돈을 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돈을 내주는 사람이나 돈을 받는 사람이나 그 표정들이 하도 비장하고 엄숙해서 감히 그 자리에 끼어 들어 무어라 말을 걸어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이 노인은 돈을 세는 것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다시 조금 전의 활기를 되찾아서 제게 농을 걸었습니다.

“저 중개인 녀석이 댁보고 형사냐 뭐냐고 허길래 나허고 무관한 사람인디 한 대 치먼 가 버리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잡것이 아무말도 못허대.”

나는 이 노인의 우스개소리에 대꾸를 못할 만큼 긴장한 채 그들의 거래하는 모습을 열심히 지켜보았지만, 거래 방법이 하도 비밀스럽고 은근해서 그 내막을 확실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개인의 남을 꺼리는 눈빛이나 중개를 해 주어서 얼마나 벌었는지 대답을 안해 주는 이 노인의 태도로 보아 그 바닥의 속사정이 간단치는 않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소의 부정한 거래 방법 중에 “메기치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중개인이 소를 팔려는 사람에게 미리 천원에서 삼천원쯤의 선금을 주고 중개의 권리를 사는 방법입니다. 한번 그 중개인에게 소를 팔 권리를 맡긴 사람은 그 소가 하루 종일 안 팔리더라도 마음대로 다른 중개인에게 맡길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 중개인과 싸워서 소를 빼앗았다고 하더라도 그 소를 다른 중개인에게 맡길 도리가 없습니다. 동료 중개인에게 농간할 건덕지가 쥐어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중개인에게 넘어간 소는 자칫하면 “후려치기”라는 수법을 당합니다.

소를 맡은 중개인은 매매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아침에는 시세보다 비싸게 올려 부릅니다. 예를 들어 이십사만원쯤이 제 값인 소를 이십육만원이나 이십칠만원쯤으로 올려 부릅니다. 그러면 소 임자는 멋 모르고 좋아하지만 시세보다 비싼 소가 팔릴 리가 없으니 소 임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져서 점심 때가 지나 오후가 되어 장이 거의 파할 무렵에는 시세보다 싼 값으로라도 좋으니 팔아 달라고 조르게 됩니다.

그 때쯤 해서 중개인은 자기와 미리 약속이 되어 있는 사람과 흥정을 붙여 시세보다 훨씬 싼 값으로 소를 팔게 합니다. 소를 팔지 않고 도로 데려가는 소 임자도 있지만, 대개는 다시 한번 장에 나가게 되면 중개인의 차삯과 술값과 밥값으로 싸게 파는 돈보다 돈이 더 들게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개인의 말을 따르게 됩니다.

중개인은 자기의 부하뻘 되는 '하매인'을 살 사람으로 꾸며서 자기가 그 소를 사기도 하고, 자기가 직접 사지 않을 때에는 싸게 산 만큼의 돈에서 비공식 중개료를 받습니다. 이런 '후려치기' 수법은 타관에서 온 쇠장수나 친분이 두텁지 않은 소 임자에게 자주 쓰이고 아는 사람의 소를 중개할 때에는 조심을 합니다. 그러나 이 노인이 “아는 놈이 아는 놈을 죽인다”고 말한 것을 보면 아는 사이에도 얼마쯤의 술수를 부리는 것이 보통인 모양입니다.

“벌중개”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쇠전 밖에서 소의 매매를 중개해 주는 방법입니다. 중개 수수료를 내지 않고 매매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의 돈이 절약되고, 중개인은 수수료 한푼이라도 더 받아낼 수 있기 때문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매매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예부터 쇠전 밖에서의 매매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서 주막이나 길 한모퉁이에서 비밀스럽게 거래를 합니다. 보통은 쇠전 안에서 입으로 거래를 끝낸 뒤에 관리 사무소에는 소가 안 팔려서 끌고 나간다고 해 놓고, 쇠전 밖으로 나와 적당한 장소에서 돈을 교환합니다. 만약에 이런 불법 매매가 적발됐을 때에는 중개 수수료에다 벌금을 더해서 내야 되고, 심할 때에는 중개인 자격증을 내어 놓아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무 직원들의 관리가 철저해서 위에서 말한 부정한 거래가 적은 쇠전에서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고 소를 거래할 수 있지만, 직원들과 중개인들이 짜고서 그런 거래를 일삼아 하고 서로 돈을 나누어 먹는 쇠전에서는 농민들의 피해가 대단합니다. 그러므로 부정이 많은 쇠전은 사람들이 잘 찾아가지 않아서 점점 시들어 가고, 운영 관리가 철저한 곳은 사람들이 자꾸 몰려들어 점점 번창해 갑니다.

전라도 근방에서는 가장 큰 쇠전으로 꼽히는 남원장에 갔을 때, 관리 사무소에서 마이크로 “고삐를 풀어 놓고 자꾸 걷게 하는 소는 물 먹인 소입니다. 소가 물을 먹은 것을 감추려고 자꾸 걷게 하는 것이니 그런 소는 사지 마십시오” 하고 안내 방송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관리 사무소에서 그렇게 성의를 보이기 때문에 그 장이 번창하는 게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중개인들이 소의 흥정에서 부리는 농간은 여러 가지가 있어서 쇠전 운영의 큰 문제점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소의 매매를 경매로 하자는 의견이 검토된 일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횡성, 춘천, 강릉 같은 강원도 몇곳과 청주, 조치원, 담양 같은 충청도의 몇곳에는 소 경매 시장이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매 방법은 도살용 소에나 가능한 방법이지 일소에는 적당치 않은 방법입니다. 도살용 소는 몸무게에 따라서 값을 매기면 되지만, 일소는 몸무게만으로는 값을 매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살이 쪘어도 좋지 않은 소가 있고, 버쩍 여위었어도 훌륭한 소가 있습니다.

이 노인의 말에 따르면 남이 비싸게 사는 소를 자기는 싸게 사기도 하고, 남이 싸게 사는 소를 비싸게 사기도 한다고 합니다.

소를 살펴보고서 그것이 좋은 소인지 아닌지를 가려 내어 그것에 맞는 값을 매기는 솜씨는 오랜 경험이 없이는 지니기 힘든 솜씨입니다.

소를 보는 기초적인 상식으로는 입이 짧고 넓어야 좋고, 배가 넓고 크고 처지지 않아야 좋고, 뿔과 뿔 사이와 뿔의 크기가 알맞아야 좋고, 뿔이 뒤로 재껴 있거나 앞으로 굽지 않아야 좋고, 눈꼬리가 째지지 않아야 좋고, 앞가슴이 환하게 열려야 좋고, 털이 짧고 윤기가 있고 부드러워야 좋고, 궁둥이가 처지지 않아야 좋고, 얼굴이나 배나 궁둥이에 흰 점이 없어야 좋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이 툭 불거져서 선명해야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기초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소의 모든 장단점을 가려내려면 오랜 경험이 없이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농민들은 곧잘 속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팔려고 내어 놓은 소의 결점을 숨기고 싶어할 것이며, 중개인도 자기의 잇속에 따라서 소의 결점을 감추고 값을 엉뚱하게 매겨 팔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는 사람 쪽에서도 자기가 믿을 만한 사람 중에 소를 잘 보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데리고 가게 됩니다. 이판동 노인의 경우가 아마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는 소를 살 사람이 자기 사돈인데 그 사람의 부탁으로 자기가 소를 골라 주었다고 말하며 “소를 잘못 사면 돌아오는 장에 또 팔아야 된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을 만한 사이라는 “사돈 사이”에도 어떠한 알지 못할 속판이 끼어 있는지는 그들 자신과 하늘만이 알 일입니다.

이판동 노인은 소를 산 사내가 홍시 두 개와 종이돈 몇장을 주머니에 넣어 줄 때까지 쇠전 안을 싸다니다가 “이제 차삯을 벌었으닝게 그만 나가제” 하면서 쇠전을 나섰습니다.

우리는 쇠전 곁에 늘어서 있는 밥집 가운데 한 집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봉놋방의 한 구석에 앉아서 비빔밥을 청해 놓고 사방을 둘러 보니 쇠전에서 나온 사람들이 밥을 먹거나 막걸리를 마시면서 커다란 소리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봉놋방이 밥상만 다 치워 놓으면 영락없이 놀음방으로 변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요새도 쇠전 부근에서 놀음판이 자주 벌어지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쇠전에서 돈이 왔다 갔다 허닝게 도박 상습단에 걸려서 앞발 들어 버린 사람 많었제. 옛날처럼 성허지는 않어도 요새도 술잔 먹은 김에 몸뚱이에 돈은 지녔겄다 푸덕푸덕 허다가 애꿎은 돈 날리는 놈 많어.”
“그럼 할아버지도 놀음 많이 하셨겠네요.”
“놀음이고 뭣이고 우리는 그저 각시에만 정신이 빠져서 각시헌티 돈을 다 써 버렸으니께.”

이 노인이 헛기침을 해 가며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헛기침 속에 은근히 각시 자랑을 해 보고 싶어하는 기미가 엿보여서 어떤 각시한테 그렇게 돈을 다 써 버렸느냐고 바싹 다가서며 물었습니다. 이판동 노인은 멋지게 자란 허연 수염을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더니 한마디 한마디에 맛을 들여가며 말했습니다.

“어떤 각시가 아니라 각시가 사방 팔방에 여러 명 있었고만. 지금은 다 죽고 두 명만 남었네만.... 젊었을 적에는 이놈 가서 돈 주고 저놈 가서 돈 주고 허느라고 쇠장사 해서 번 돈이 손에 남아 날 틈이 없었제. 그놈의 얘기를 다 허자면 심청전 엮제.”

사람들이 자꾸 밀려 들어 느긋하게 앉아 얘기를 나누기가 어렵겠기에 부지런히 밥을 먹고 밥집을 나왔습니다.

“옛날에는 이 장에서 묵고 저 장에서 묵을라니께 부안에도 작은 마누라가 하나 있었고, 줄포에도 하나 있었고, 신태인에도 있었고.... 아무튼지 장마다 하나씩은 있었제. 그런디 이젠 다 죽고 줄포에 있는 마누라허고 신태인에 있는 마누라허고만 남았어.”

바깥으로 나오니까 더 힘이 솟는지 이 노인은 기차 정거장으로 향하는 포장된 국도를 활개치고 걸어가며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내가 이 담에 죽어도 거꾸로 죽을 것이네. 이 근방에 홀애미치고 안찌른 놈이 없고, 남의 유부녀 속도 어지간히 긁어 놓았제. 그저 그 구녁만 합천 해인사 뽄나게 좋다 허고, 내일 모가지가 떨어져도 그것이 제일이다- 하고 미쳐서 지랄을 떨었으닝게.”
“그것이 그렇게 좋던가요?”
“말이라고 허는가? 그 속에 한번 넣어 놓는다 치먼 만사가 해결이고, 그 속에서 살림을 헌다 치먼 몇해고 살림 걱정은 안해도 될 것이여. 그게 다 쇠전 따라댕김서 생긴 정력이라. 그런디 이보게, 지나고 보니께 모두 후회가 나. 빡빡 얽고 째보라도 큰마누라가 좋데. 다른 것들은 그때만 조께 좋고 그만이라.”

그러면서도 이 노인은 신태인에 가면 큰마누라가 있는 본집보다 작은마누라가 있는 작은 집에 더 자주 가게 되더라며 껄껄 거리고 웃었습니다.

밥집에서 밥을 먹을 때에 아들이 일곱이고 딸이 다섯이라고 했던 그의 말이 생각나서 자식들이 아버지 바람 때문에 속 많이 썩혔겠다고 하니까,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 신명나게 침방울을 튀겼습니다.

“말헐 것이 있겄능가? 기생한티서 난 자식이 있는디 그놈이 가슴 찧고 학교도 마다 허도 돌아다니지 않는가? 시방 스물둘인디 어디 가서 돈 쪼끔 벌어야 각시집에다 다 내던지고 다니는 판이여. 근묵자흑이라, 애비 놈이 그러먼 자식도 따라서 그러는 벱이여. 자식들만 그러겄능가? 큰마누라 고생도 어지간했지. 그런디 이보게, 마누라 데리고 사는 게 전쟁하는 거 한가지여. 수가 있었야 데리고 살제, 안그러먼 허구헌 날 시끄럽기만 허네.”

길가 양쪽에는 사람 손에 고삐를 쥐인 소들이 줄을 지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소들 가운데에는 흥정이 이루어져서 낯선 주인 손에 끌려가는 소들도 있었을테고, 흥정이 이뤄지지 않아서 옛 주인 손에 끌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소도 있었을 것입니다. 모두들 저마다 길고 긴 사연을 품고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판동 노인과 저는 정거장에 이를 때까지 쉴 새 없이 얘기를 나누며 걸었습니다. 그는  “와가리 영감”이란 자기의 별명에 부끄럽지 않게 잠시도 입을 멈추지 않고, 평생 동안 담아 놓았던 사연들을 거침 없이 쏟아 놓았습니다.

그는 기차를 타면서 내일은 신태인 장에 갈 것이고, 모레는 부안장에 갈 거라고 했습니다. 기차가 출발하자, 그는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드는 저를 보고 껄껄거리며 호탕하게 웃더니 주머니 속에 남겨 두었던 홍시를 꺼내어 입에 덥석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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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초, 서울 서초동 가정법원청사 소년법정에서 있었던 어느 판결의 이야기입니다.

지인을 통해서 뒤늦게 알게 되었는데, 너무도 감동적인 판결이라 저 혼자 알고 있기 아까워 전합니다.

피고인 A양(16)은 서울 도심에서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 등을 훔쳐 달아난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A양은 작년 가을부터 14건의 절도·폭행을 저질러 이미 한 차례 소년 법정에 섰던 전력이 있었습니다. 법대로 한다면 '소년보호시설 감호위탁' 같은 무거운 보호 처분을 받을 수 있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김귀옥 부장판사는 이날 A양에게 아무 처분도 내리지 않는 '불처분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가 내린 처분은 '법정에서 일어나 외치기'뿐이었습니다. 김 판사가 다정한 목소리로 '피고는 일어나 봐' 하고 말하자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던 A양이 쭈뼛쭈뼛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김 판사가 말했습니다.

"자, 날 따라서 힘차게 외쳐 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예상치 못한 재판장의 요구에 잠시 머뭇 거리던 A양이 나직하게 "나는 세상에서…"라며 입을 뗐습니다.

"자, 내 말을 크게 따라 해 봐.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큰 소리로 따라 하던 A양은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라고 외칠 때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김 판사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A양이 범행에 빠져든 가슴 아픈 사정을 감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A양은 본래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간호사를 꿈꾸던 발랄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작년 초, 남학생 여러명에게 끌려가 집단폭행을 당하면서 그녀의 삶은 급속하게 바뀌었습니다.

A양은 그 사건의 후유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고,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신체 일부가 마비되기까지 했습니다. 심리적 고통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A양은 그 뒤 학교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했고, 비행 청소년과 어울리면서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김 판사는 울고 있는 A양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가해자로 재판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가해자라고 쉽사리 말하겠어요? 아이의 잘못이 있다면 자존감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존감을 찾게 하는 처분을 내려야지요."

그 말을 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진 김 판사는 눈물범벅이 된 A양을 법대(法臺) 앞으로 불러세웠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중요할까. 그건 바로 너야. 그 사실만 잊지 않으면 돼. 그러면 지금처럼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러고는 두 손을 쭉 뻗어 A양의 손을 꽉 잡았습니다.

"마음 같아선 꼭 안아주고 싶은데, 우리 사이를 법대가 가로막고 있어 이 정도밖에 못 해주겠구나."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ol...l_no%3D2

이 재판은 비공개로 열렸지만 서울가정법원 내에서 화제가 되면서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법정에 있던 A양의 어머니도 펑펑 울었고, 재판 진행을 돕던 법정 관계자들의 눈시울도 빨개졌습니다. 저도 이 이야기를 읽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흘렀습니다

법정에서 울음을 터뜨린 소녀의 미래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녀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건 보호 감호라는 법적인 처분보다 자존감을 살리는 자신을 향한 외침이었을 거라는 겁니다.

"일어나서 힘차게 외쳐라!"

정말 아름다운 명판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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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가 '굿하는 사람이다', 곧 '무당이다'라고 하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점쟁이나 푸닥거리나 미신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어서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미친 여자나 엑소시스트에 나오는 신들린 소녀를 머리 속에 떠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도대체 무당이 명인 명창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기분 나빠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무당과 무속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깊이 연구한 사람들은 무당이 목사나 신부나 스님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종교의 사제이며,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찬송가나 염불과 다름없는 엄숙하고 경건한 종교 음악이며, 그들이 읊어대는 사설은 성경이나 불경의 여러 말씀과 다를 바 없는 귀한 말씀이라는 걸 압니다.

그러나 외국에서 들어온 수많은 신들의 위세에 짓눌려서 우리 조상들이 수천년 동안 모셔 오던 민족의 신들은 우리 문화 속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고, 그 신을 모시는 성직자인 무당들도 오랫동안 사회의 밑바닥 천민으로 혹세무민하는 무리라는 편견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무당들은 자신들이 지녀온 기예를 예술로 내세우기 시작했고, 또 예술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들의 기예는 인정을 받기도 했습니다.

동해안 무속의 뛰어난 무당인 김석출 명인도 사람들이 자신을 무당으로보다는 예술가로서 알아 주기를 바랬습니다.

경상남북도와 강원도를 잇는 동해안 마을에서는 해마다, 또는 3년, 4년, 5년, 7년, 10년 마다 한 번씩 '별신굿'이 벌어졌습니다.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빌고 바다에서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벌이는 그 굿은 그 뛰어난 예술성과 오락성 덕분에 구경꾼들이 많이 몰려들어 언제나 푸짐한 굿판이 되곤 했습니다.

출처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01_02_01

그 굿판을 이끌어가는 노래 잘 하고, 춤 잘 추고, 재담 잘 하고, 악기 잘 치는 여러 뛰어난 무당 중에서도 김석출 명인은 그 솜씨나 경험이나 연륜으로 보아서 첫손에 꼽을 수 있는 명인이었습니다. 경상도에서는 남자 무당을 '박수', ‘화랭이’ 또는 ‘양중’이란 말로 부릅니다.

그는 '부정굿'이나 '일월맞이굿'이나 '골매기청좌굿'이나 '당맞이굿'이나 '성조굿'이나 '마당밟이굿'이나 '화해굿'이나 '세존굿'이나 '조상굿'이나 '천왕굿'이나 '심청굿'이나 '군웅굿'이나 '손님굿'이나 '계면굿'이나 '용왕굿'이나 '탈놀음굿'이나 '거리굿'과 같은 갖가지 굿의 사설을 재미있고 구성지게 읊어 댈 뿐만 아니라, 탈놀음굿이나 거리굿과 같이 연극성이 강한 굿을 할 때에는 일류 배우 못지않게 뛰어난 연기를 보여 주고, 잽이를 할 때에는 징이나 장고나 꽹과리니 북이나 제금 어느 것을 손에 잡아도 절묘한 장단을 마음대로 구사하고, 날라리 부는 솜씨는 나라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만하고, '덤불국화'라든가 '출화작약'이라든가 '사계화'와 같은 종이꽃 만드는 솜씨라든가, 대금을 만드는 솜씨 또한 전문가 대접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출처 : http://www.artpusan.or.kr/board/moim00....a%3Ddesc

이렇듯 그가 갖가지 기예를 두루 갖춘 데에는 그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집안 내력과 신이 내린 재능이 고루 작용하고 있습니다.

1922년 2월 29일에 경상북도 포항시 환호동에서 김성수의 둘째아들로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 이선옥 명인과 함께 할아버지 김천득 명인과 할머니 이옥분 명인의 뒤를 이어 무업을 하고 있었고, 큰아버지 김범수 명인와 큰어머니 김운화 명인, 작은아버지 김영수 명인과 작은어머니 이영파 명인도 무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부근에서 ‘날리던’ 무당인 어머니 이선옥 명인은 맏아들 호출과 큰딸 외동과 둘째아들 석출과 셋째아들 재출까지 낳고 병이 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살림을 떠맡아 오던 아내가 죽게 되자 살 길이 없어진 그의 아버지는 어린 아이들을 돛단배에 태우고, 동생과 어머니가 무업을 하고 있는 강원도 삼척군 건덕면 교가리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무업을 하고 있던 할머니 이옥분 명인은 불쌍한 어린 손자들을 자그마한 움막에서 재우며 걷어먹였습니다. 그때 다섯 살밖에 안된 어린 석출은 할머니가 고사나 굿을 하러 다닐 때 누이와 동생과 함께 졸래졸래 따라다니며, 밥도 얻어 먹고 떡이며 과일이며 나물을 얻어먹었습니다.

그동안 함경도 원산이나 구룡이나 청진 너머 소련 땅에까지 무업을 하러 다니던 그의 아버지는 고생스런 방랑 생활을 일 년만에 끝내고 경주로 내려와서 설달이라는 여자를 얻어 살림을 차렸습니다. 그래서 '애비 없는 무당 아들'이라고 동네 아이들에게 발길질 당하고, 돌팔매질 당하며 불쌍하게 자라던 어린 아이들은 아버지를 따라 경주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달이 엄마가 데리고 온 이복형제들과 매일같이 싸우고 울고 매맞고 쫓겨 났다 쫓겨 오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글 배울 시간도 없고 학교 갈 시간도 없이 여덟 살이 되고 다른 할 일은 없고 해서 굿판을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징이나 꽹과리나 제금을 조금씩 두드려 보고, 어른들이 부르는 노래도 흉내내어 흥얼거리는데 개구쟁이에다 버르장머리는 없어도 기억력이 좋고 재주가 좋아서 어른들이 가끔씩 “니 내중에 큰 화랭이 된데이” 하고 칭찬하곤 했습니다.

그가 배운 경상도 무속은 전라도 무속이나 제주도 무속과 마찬가지로 “세습무속”입니다.

즉 경기도나 평안도나 황해도와 같은 경기 이북 지방의 무속이 주로 신내린 무당이 이끌어가는 “강신 무속”이기 때문에 무당의 예술성보다는 신령함에 더 의존하는 데에 견주어서, 세습무들은 집안의 무업을 이어받아 춤이나 노래나 사설이나 악기를 다루는 예술적 능력을 닦아 온 사람들입니다.

굿을 보는 관객들도 경기 이북 지방에서는 무당이 신통한지 못한지에 관심이 많지만, 경상도나 전라도에서는 무당이 굿을 잘하는지 못하는지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전라도나 경상도의 굿판을 보면 거의 공연 예술과 같은 형태를 가지게 되고, 실제로 굿에 쓰인 춤이나 음악은 전라도나 경상도 민속 예술의 뿌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는 굿판에서 살다시피하며 굿에 필요한 갖가지 기예를 어른들에게 전수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열일곱 살 때부터 첫째 무당 노릇을 하기 시작했는데 “꽃 잘 만들지, 징 장구 잘 치지, 소리 잘 하지. 머, 무당 딸 있는 사람은 다 사위 삼을라꼬.” 하던 판에 작은어머니의 이웃 마을에서 무업을 하던 변재춘의 딸 변난호와 열아홉 살에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주 시내에 첫 살림을 차리고 굿을 하러 다니다가 스물한 살이 됐을 때 비로소 ‘온 섬’ 출연료를 받는 어른 무당이 되었습니다. 어린 무당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출연료를 못 받거나, 어른들이 주는 대로 푼돈을 받거나, 조금 대우를 받는 경우는 ‘반 섬’이라 하여 어른의 반절을 받는 것이 관례인데 장가도 가고 첫딸도 나은 덕에 어른 대접을 받아 '온 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때는 일제 말이라 “콩 배급받고, 풀 베고, 놋쇠 걷어가고, 굿 하는 기 발각되몬 순사들이 당 뿌수고 칼 빼서 휘두르몬 우리는 징 장구 들고 달려가 숨고, 유치장에 가서 죽을 매 맞고 시말서 쓰던” 시절이라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니 새 세상이 왔다고 포항 시내에서 지신밟기를 할 때 형이 설장구 메고, 동생이 꽹과리 치고, 김석출은 날라리 불고, 보름 동안 마음껏 신명을 플어냈습니다.

그 전부터 날라리 부는 법을 배우기는 했어도 워낙 시끄러운 악기라서 남이 들을까 두려워 산골이나 언덕 밑이나 집없는 바닷가에서 남몰래 불었는데, 해방이 되고서는 입이 얼얼하도록 불어 댄 것입니다.

'호적' 또는 '태평소'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날라리'는 중국의 서북방에 사는 유목 민족이 쓰던 악기로 중국을 거쳐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찍부터 궁중 음악의 대취타나 군대의 취악에 쓰이다가 점차 민간에 널리 전해지면서, 풍물을 치거나 굿을 할 때 중요한 악기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놀기 좋아하고 행동이 헤픈 사람을 '날라리'라고 하는데, 그 악기가 워낙 아무데나 잘끼어서 시끄럽게 연주되다보니 그런 말이 생겨난 게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대추나무나 중국 버드나무인 화류목을 깎아 가운데를 비게 하여 관대를 만들고, 위에 일곱 구멍을 뚫고 아래에는 한 구멍을 뚫은 다음, 놋쇠나 구리로 만든 나발을 답니다. 나발 반대편 관대의 끝에 끼우는 빨대는 갈대를 깎아서 쓰거나 기러기 깃털 뿌리를 밥솥에 쪄서 숫돌에 갈아 구멍을 뚫어 만든 것을 썼는데, 요즈음은 플라스틱 빨대를 많이 씁니다.
그 무렵에 날라리 잘 불기로 이름난 사람으로는 호적 시나위로 천하제일이라는 평을 듣던 김봉기 명인과, 쌍호적을 잘 불던 신참문 명인과, 상주에서 무업을 하던 염상태 명인과, 봉사 악사 김재수 명인과, 시나위를 불면 “결딴나는 가락”이라고 칭찬을 듣던 방태준 명인 등이 있었는데, 이들이 모두 해방 뒤에 생긴 국악 단체의 악사가 되어 전국을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한창 날라리에 맛을 들인 김석출은 어디에 단체가 왔다는 말만 들으면 날라리를 들고 가서 사흘씩 나흘씩 그 단체에서 먹고 자며 날라리의 대가들과 합주를 하기도 하고, 부족한 점을 그들에게 배우기도 하며 솜씨를 늘여 나갔습니다.

“단체가 왔다 하면 죽어라꼬 쫓아가는 기라. 바지 가랑이에다 돈 만 원쯤 숨겨 놓고 가서 내 돈 내고 단체를 따라다니는 기라. 단체가 돈을 못 벌 때는 밥 한 그릇 가지고 아버지 아들들이 나눠 먹고 점심도 없이 하루 두 끼 먹는 기 다반사니, 내 돈 내서 밥 사주고 호적 배왔는 기라. 내는 그때 굿해서 돈 잘벌었으니, 뭐 내가 가모 다들 환영을 했제.”

그렇게 배운 솜씨로 단체의 악사들이 풍물을 치면서 시내에 광고를 도는 ‘마찌마리’를 할 때 날라리를 불어 주기도 하고, 판소리도 몇 대목 배우고, 대금 만드는 법도 배워 웬만한 전문가가 만든 대금보다도 음질이 더 좋은 대금을 만들어 악사들에게 선물도 수없이 했습니다.

특히 임방울이나 김연수나 박동진과 같은 판소리 명창들과 사귀는 동안에 그는 판소리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 어른들이 부르는 판소리를 귀동냥해서 토막으로 배운 데다가, 국악에 귀가 열려 있던 터라 부끄럽지 않을 만큼 소리 실력을 얻게 되어 굿을 할 때 가끔씩 판소리 한 대목씩 부르기도 하고 적당한 사설을 지어 창작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굿할 때 “학자님들이 그런 대목만 나오면 녹음기를 찰칵 꺼 버리는” 것을 보고 점점 삼가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판소리나 국악에 대한 관심을 날라리에 쏟아넣었는데, 그 결과로 나온 것이 그가 자랑해 마지 않는 <호적 산조>입니다.

“옛날 선생님들이 호적을 잘 불기는 했어도 십 분을 넘게 불 가락이 없었는 기라. 한 가락 불고, 또 되풀이해서 불고, 그라이 단조롭고 맛도 없어. 천하제일 명선생의 가락도 십 분 넘으면 그기 그 가락인 기라. 그래 김석출이가 호적 산조를 생각해 낸 기라. 내는 한 시간이면 한 시간, 두 시간이면 두 시간, 사흘이면 사흘, 얼마든지 다른 가락으로 불 수 있으니 호적 산조는 김석출이가 전무후무한 기라.”

그가 이렇게 호언장담을 한 만하기도 한 것이 날라리 가락이란 고작해야 궁중음악의 대취타 가락이나 경기 시나위, 전라도 시나위, 동해안 무속 시나위에서 쓰이는 몇 개의 가락이 전해 올 뿐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에는 다양한 가락이 전해오는 모양이라. 육이오 때 중공군들이 꽹과리 치고 날라리 불면서 쳐들어올 때 무슨 가락 불면 전진하고, 무슨 가락 불면 후퇴하는 걸 다 날라리가 했는기라. 또 내가 우연히 중국 우동집에서 주인 내실에 들어가 중국 호적 레코드를 들은 적이 있는데, 사람 죽어서 치르는 장례식을 할 때 호적 가락이 바뀌는데 따라서 곡하고 절하고 상여 나가고 하는기라. 그란데 그 사람들이 잘 불어. 호적 일고여덟 개를 같이 부는데 기가 막히게 잘 불어!"

중국 날라리에 비해 너무도 단조로운 날라리 가락을 다양하게 만들 길은 산조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끊임없이 산조 가락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산조(散調)'는 시나위 가락을 일정한 장단에 맞춰 연주하는 기악 독주곡을 말합니다. '흐튼 가락'이란 이름 그대로 즉흥성이 강조된 음악 형식으로, 19세기 말엽에 김창조 명인이 가야금 산조를 만든 것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그 뒤 백낙준 명인이 거문고 산조를 만들고, 대금이나 아쟁 그리고 단소도 대가들에 의해서 산조 가락이 만들어져서 지금가지 전해 옵니다. 그 뒤 산조는 그 즉흥적이면서도 풍부한 표현력 때문에 많은 음악가들이 자신의 새로운 창작을 곁들여 변화되고 발전되어 왔습니다. 

김석출 명인이 만들어낸 호적 산조도 가락의 흐름이나 장단의 구성에서 가야금 산조나 대금 산조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가 호적 산조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나자 그와 친했던 국악인들은 대단한 관심을 보여주었지만, 대부분의 국악인들은 "굿쟁이가 굿이나 하지 산조는 또 뭐냐?"고 하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서울의 소극장인 공간 사랑에서 사물놀이패의 합주와 어울려 호적산조를 발표하자,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김석출의 산조가 호적을 살렸다"고 감탄했습니다. 

"옛날 양반들 부는대로 날라리를 불면 산조 가락이 안 나와. 내는 빨대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가지고 이빨로 살살 물었다 놨다 하면서 재주를 부리지. 그래야 산조 가락의 맛을 낼 수 있는기라. 갈대나 기러기 깃털뿌리로 만든 옛날 빨대로는 이로 물어서 내는 음색을 못내. 이로 물면 빨대가 붙어버리는 기라. 그러니 앞니로 재주 부리는 성음은 내가 처음 발견한 기라"

그는 이렇듯 어렵게 만들어 낸 산조 가락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녹음도 해놓고, 틈만 나면 콧소리로 흥얼거리면서 연습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은 방음장치가 되어 있지 않아서 마음대로 날라리를 불 수가 없고, 산이나 공원에 가서 불면 산책 나온 사람들이 불평을 해대는 통에 마음대로 연습할 수가 업었습니다. 그래서 굿판이 벌어지면 연습도 할 겸 발표도 할 겸 해서 산조 가락을 마음것 뽐내어 불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형제들과, 그의 두 아내에게서 난 자식들과, 조카들이 모두 직접으로나 간접으로 무업과 관련되는 일을 하고 있어 거대한 무당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일이 창피하다고 집을 뛰쳐나간 사람도 있었지만, 인간문화재로서 대접을 받고 보니 이제는 오히려 무당 집안 출신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손들까지 생겨나게 되어 집안 어른으로서의 권위도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호적 산조에는 시나위나 대취타 가락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은 한과 서러움이 배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지지리도 가난하고 불쌍하게" 자라 온 그의 어린 시절과 천대 받고 멸시 받으며 살아 온 그의 삶의 역정에서 마음 깊은 곳에 깊숙이 자리 잡은 응어리들이 다 쏟아져 나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그 모든 응어리들이 다 쏟아져 나올 때까지 산조 가락을 갈고 닦아 마지막 남은 삶을 날라리 산조로 마무리하고 2005년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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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사람들에게는 농악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풍물은 예전에는 '굿'이나 '매구' 또는 '풍장' 등으로 불렸습니다. 

정초에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액을 몰아내고 복을 빌어 주는 '마당밟이굿'을 쳤고, 김맬 때는 농부들끼리 계 비슷한 모임인 두레를 짜서 '두레 풍장'을 치기도 했습니다. 김매기가 끝난 칠월에는 '호미씻이굿'을 쳐서 고된 일을 하는 농부들을 위로하기도 했고, 시월 농사가 끝나면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당산에서 '당굿'을 치며 감사의 놀이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또 농사 일에만 굿을 친 게 아니라, 바닷가 마을에서는 뱃사람들이 무사히 고기를 많이 잡아 오도록 기원하는 '배치기 풍장'을 쳤고, 절에서는 '절굿'을, 집 지을 때에는 '집들이굿'을, 다리를 놓을 때는 '다리굿'을 쳤습니다.

이밖에도 나라의 행사나 군사 훈련이나 전쟁 때나 사냥할 때나 상여나갈 때와 같이 백성들의 의식과 일과 놀이에 안 쓰인 곳 없이 두루 쓰였으니, 농악은 어느 음악 유산보다 우리 민족의 삶에 깊숙이 연결된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악 연주하는 것을 ‘굿친다, 매구친다, 풍장친다, 풍물친다.’ 라고 합니다. 이때에 쓰이는 악기인 '굿물' 또는 '사물'에는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와 같은 타악기와 태평소, 나팔과 같은 관악기가 있습니다. 그 중 꽹과리는 풍물 중의 으뜸이 되는 악기입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_blog/rss/rssList....age%3D10

이 꽹과리를 ‘꽹쇠’ 또는 그냥 ‘쇠’ 라고만 부르기도 하는데, 풍물의 가락은 모두 꽹과리의 신호에 맞추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꽹과리의 연주자인 '쇠잽이' 중에서도 수석 연주자 곧 '상쇠'의 가락이 변화하는 데 따라 모든 풍물 연주자 곧 '치배'들이 함께 변하므로, 풍물을 치는 판에서는 상쇠가 요즘의 악단지휘자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상쇠는 여러 가지 꽹과리 가락을 솜씨 있게 잘 쳐야 할 뿐 아니라, 악기를 연주하는 '앞치배'들과 창부나 중이나 양반이나 각시나 할멈이나 대포수나 무동과 같은 여러 인물로 분장하여 춤도 추고 재담도 하며 관중들의 흥을 돋구는 구실을 하는 '뒤치배' 또는 '잡색'들과, 영기나 농기와 같은 깃대를 드는 기잽이와 같은 모든 풍물패를 거느리는 데 필요한 통솔력도 갖추어야 합니다.

게다가 당산에서 치는 '당산굿'은 어떻게 치고, 우물에서 치는 '샘굿'은 어떻게 치며, 장독에서 축원 드리는 '청룡굿'은 어떻게 치고, 노래를 부르며 치는 굿인 '노래굿'을 할 때는 어떤 노래를 부르며, 상쇠와 중쇠가 꽹과리를 한가운데 놓고 춤을 추며 노는 놀이인 '일월놀음' 또는 '일광놀음'은 어떻게 치며, 상쇠와 중쇠가 교대로 가락을 치는 놀이인 '짝두름'은 어떻게 하는가 하는 가지가지 '군법'(농악 연주 순서) 에 통달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자진이나 오방진이나 쌍방울진과 같은 여러 가지 '진풀이' 또는 '진법'에도 뛰어나야 하니, 부처님 살찌고 마르고가 석수쟁이 손 끝에 달렸듯이 굿이 잘되고 못 되고는 오로지 상쇠의 솜씨와 경륜에 달려있다 할 것입니다.

솜씨 좋은 상쇠가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꽹과리 끈을 걸쳐놓고 나머지 세 손가락을 꽹과리 안쪽에 대고 왼손에는 꽹과리 채를 들고서 (왼손잡이는 그 반대) 외마치, 두마치, 세마치(삼채)를 위시해 풍류, 굿거리, 오방진, 덩덕궁이, 영산, 잔지래기(다드래기)와 같은 갖가지 가락들을 어떤 때는 구성지고 흥겹게, 어떤 때는 호탕하고 씩씩하게 몰아가는 그 가락의 오묘한 변화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솟구치게 함으로써 어깨춤이 절로 나고 궁둥이를 들썩이게 만듭니다.

거기에다 기러기털이나 닭털로 연꽃처럼 만든 '부포'를 매단 '상모'를 쓰고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 뒤로 넘기기도 하고, 앞으로 콕콕 찍기도 하고, 위로 올려세워 연꽃을 피웠다 오므렸다 하기도 하고, 휙 잡아돌리기도 하고, 사방으로 쪼기도 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얌전한 규방의 색시도 오금이 저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거기에다 노래라도 구성지게 곁들여 너울너울 춤을 추며 꽹과리를 치면 저절로 “얼씨구”, “좋다” 라는 탄성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출처 : http://cafe.cha.go.kr/brd/viewClubBrdAr...owGb%3DL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중평부락에 살고 있는 김봉열 명인은 그러한 상쇠 노릇을 평생 해 온 사람입니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한번도 그 마을에서 이사해 본 적이 없는 옹골진 토박이입니다. 누에머리봉, 닭날봉, 바구리봉, 퇴미봉과 같은 야트막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마을터에 서른 채쯤 되는 집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는 그 산골 마을에는 대대로 터를 일구어 온 함창 김씨들의 얘기가 곳곳에 깃들어 있습니다.

아주 오랜 옛적에는 벼슬을, 그것도 아주 높은 벼슬을 살았다는 조상들의 이력을 들으며 자란 그는 소시적에 장구도 잘 치고 상사 소리, 상여 소리도 잘 하시던 아버지 낙중씨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려서부터 굿소리에 남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농사 일을 할 때나 정월 보름이나 팔월 추석 같은 명절이 올 때마다 울려퍼지는 풍물소리가 너무나 좋아 졸래졸래 풍물패 뒤를 따라다니던 소년은 어느덧 양철대기를 두드려 스스로 웬만한 가락을 칠 수 있는 재능을 보였습니다.

아들이 두드리는 양철대기 소리를 듣고 그의 아버지는 좋은 선생을 붙여서 “때를 벗길라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때마침 진안군 백운면에 사는 김인철이라는 이름 난 상쇠를 데려다가 동네 사람들이 굿을 배울 기회를 마련하자 아들을 그곳에 보냈습니다. 김봉열은 그곳에서 다른 아이들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보여 동네 어른들이 “참 잘 배운다, 참 별일이 쌨다.” 며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가 스승에게 배우고 지금까지 오롯이 지녀 온 가락은 '호남좌도' 가락입니다.

풍물은 지역에 따라서 경기 풍물, 경북 풍물, 경남 풍물, 호남 우도 풍물, 호남 좌도 풍물로 나뉘는데, 서로 활발하게 오고가며 배우고 가르친 덕에 지역의 특성이 많이 사라져 버렸지만 예전에는 가락의 흐름이나 놀이의 형태가 많이 달랐습니다.

전라도의 동북 지방 곧 금산, 진산, 무주, 용담, 장수, 운봉, 구례, 남원, 임실, 곡성 같은 고을에 전해 내려오는 좌도굿은 경기도나 강원도의 굿에 견주어서 무동이 적고 잡색이 많습니다.

전라도의 서남 지방 곧 정읍, 김제, 부안, 영광, 장성, 화순 같은 고을에 전해 내려오는 우도굿과는 달리 치배들이 고깔을 쓰지 않고 전립 곧 벙거지를 주로 쓰며, 상모를 돌리는 윗놀이의 기교가 뛰어나고, 밑놀이인 굿가락에 잔가락이 적어 담백하고 빠른 편입니다.

그는 이런 좌도굿 가락을 배운 얼마 뒤에 진안군 상정면에서 열린 소방서 걸궁에 따라갔습니다. 다리를 놓거나 마을회관을 짓거나 소방서를 세우는 것과 같은 마을 공익 사업에 쓸 비용을 마련하려고 치는 굿을 ‘걸궁’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 걸궁에서 상쇠 다음의 제2연주자 자리인 '중쇠'(부쇠라고도 함)로 따라가서 일 주일 간 친 끝에 솜씨가 눈에 띄게 일취월장해서, 그 뒤로 상쇠로 승격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 http://www.topianet.co.kr/topia/4/4u/u4...0003.htm

열여덟 살에 이웃 마을에 사는 김귀례와 혼인을 한 뒤 삼 년쯤 농사를 짓다가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켰던 전쟁에 징용으로 끌려가는 걸 면하려고 '구루마'도 삼 년쯤 끌고, 발동기도 삼 년쯤 부려보고, '노가다'에서 '공구리'나 '목도질'도 하고, 마을 앞을 흐르는 개천에서 사금이 나와 사금도 칠 년쯤 파먹고, 손재주가 좋은 탓에 씨아나 물레나 베틀도 만들어서 팔아도 보고, 목수 일도 배워 집이니 정각이나 제각도 지어 보고, 생선장사나 콩 장사도 해보고 하며 “참으로 만고풍상이라더니 남의 농사 지어 갖고 공출이 심해서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안 해본 것 없이 고생을 험서” 살았지만 한 번도 고향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탓에 한 번도 상쇠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마을의 굿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전라도의 이름난 풍물쟁이들의 거개가 전국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며 굿으로 벌어 먹고 사는 남사당패 놀음이나, 포장을 쳐 놓고 창극도 하고 민요도 하는 포장 걸궁을 한 두 번씩 쳐 본 것에 견주어서 그의 경우는 좀 특이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 남사당패라는 것이 천하 망허는 패요. 그것이 순전히 돈벌라고 치는 굿인디, 남자들이 여자처럼 머리를 땋고 수건 들고 춤을 춰. 그러면 머슴들이 데리고 자. 말하자면 남색을 파는 거지. 또 마을 사람들이 돈을 안 내면 저녁내 쳐. 그 어릿광대들이 갖은 재주를 부려감서 돈을 뺏어 놔. 내가 열다섯 살 때 우리 마을에 그런 굿이 들어왔었고만. 그뒤로는 없어.
또 포장 걸궁 있잖여. 그것도 돈이 벌리면 좋지마는 돈이 안 벌려서 망허게 되면 장구치는 놈은 장구 가지고 가 버리고, 쇠치는 놈은 꽹과리 가지고 가버려. 그것들이 천하 망허는 패요.”

이렇듯 '천하 망허는 패'를 따라 떠돌아다니는 잽이는 ‘뜬쇠’라 부르고, 마을 굿만을 쳐온 사람들은 ‘두렁쇠’라 부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뜬쇠'와 '두렁쇠' 사이에 굉장한 차이나 있는 듯이 이야기를 하지만 실제로 그런 구분을 확실히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뜬쇠가 어느 마을에 정착해서 살며 마을굿을 치게 되면 두렁쇠의 역할을 하게 되고, 두렁쇠의 솜씨가 뛰어나면 뜬쇠가 되어 떠돌아다니며 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상쇠 김봉열 명인이 뜬쇠 노릇을 경험하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을이 워낙 외진 산골이라서 그의 솜씨가 다른 지방에 알려질 기회가 적었고, 전라도 지방의 뜬쇠는 주로 우도굿을 치는 잽이들이 맡았는데 그들과 교분을 맺을 기회가 없었고, 또 기회가 있더라도 우도굿과 좌도굿은 가락이나 굿놀음 방법이 서로 많이 다른 탓에 함께 어울려치기가 어려웠을 터입니다. 더욱이 좌도 지방에서는 마을 단위의 두레굿이 잘 전해 오는 편이어서 구태여 뜬쇠 노릇을 안 해도 얼마든지 굿을 치며 놀 수 있었다는 이유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환경 덕분에 그의 가락은 다른 지방의 가락과 섞이지 않고 좌도굿의 독특한 가락을 충실하게 보존하고 있는 점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굿도 여러 가지이지만 굿을 뼛속 깊이 아는 사람은 우리 굿을 알아줘. 다른 굿은 맛이 없어서 못 듣겠다고들 그려.” 

그의 말을 얼마쯤 눅여 주더라도 좌도굿 가락은 화려한 눈요깃거리의 굿으로 변질된 다른 지방의 굿에 견주어서 전통적이고 옛스러운 맛을 가장 많이 간직한 굿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 잽이들이 열 명이 있었는디 그 사람들이 다 솜씨들이 좋았어. 잘 쳤지. 근디 그 사람들이 다 죽어 버렸어.”

그 솜씨 좋은 잽이들이 다 죽은 뒤, 그 뒤를 이어 지금은 후배들이 치고 있지만 옛날만 못하다고 안타까워합니다.

전라북도 임실에서 걸궁 네 차례 치고, 전주 서신동에 다리를 놓는다고 해서 다리 걸궁 이레 치고, 서울에 올라가서 수색동에서 걸궁 친 것 말고는 고향을 떠나서 굿을 친 적이 없는 그도 세태가 변함에 따라 민속경연대회에 진안군 대표로 다섯 차례나 나가서 이등을 세 번 하고, 일등을 한 번 하고, 개인상 한 번 타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리고 금산농업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굿을 가르쳐서 대회가 있을 때마다 나가서 상을 휩쓸어 오게 했습니다.

그런 화려한 경력이 늘어남에 따라 그의 마을에서도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동네굿 안 친 지가 오래되었어. 이젠 굿 쳐야 사람들이 나오지도 않아. 굿이란 것이 사람이 모여야 재미있지. 아무도 안 보는디 뭐 할라고 칠 것이여.”

이런 현상은 우리 시골의 어느 마을에서나 일어나는 현상이니 크게 한탄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가워해야 할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여그 우리 동네가 본래 육십 가구가 살았는디 반절로 팍 줄어버렸어. 모다 서울로 가 버려서 집을 내놓아도 사 가는 사람이 없응게 그냥 빈집으로 남겨 놓고 올라가. 시방도 빈집이 여그 저그 쌨어. 거그다 젊은 것들은 씨알머리도 찾아볼 수가 없네. 모다 서울에 있어.
굿이란 것이 음양이 있어서 젊은 색시허고 총각들이 버글버글혀야 흥도 나고 재미가 있는 것인디, 맨 늙은이들끼리 뭐 헐라고 굿치고 굿 보고 할 것인가. 인제 굿이란 것도 다 끝나 버렸어.”

그는 탄식을 마친 뒤에 참으로 오랜만에 동네의 잽이들과 굿을 쳤습니다. '홍동지기'라는 붉은 바탕에 반소매 색동이 달린 옷을 입고, 부포 상모 벙거지를 쓰고, 고개를 좌우로 지긋거리며 눈썹을 옴질거리며 햇볕에 검게 탄 투박한 손으로 꽹과리를 쳤습니다. 칠순의 나이에도 꽹과리만 잡으면 젊은이처럼 가볍게 몸을 놀리고, 노인네답지 않게 눈이 빛나던 그도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해 1995년에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이 땅에 남은 또 하나의 귀한 가락이 이렇게 쓸쓸히 푸른 하늘 구름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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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점에 들렀다가 참으로 재미있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19세기 서울의 사랑- 절화기담, 포의교집(도서출판 여이연)』이란 책입니다. 이 책에는 19세기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두 편의 애정소설 <절화기담(折花奇談)><포의교집(布衣交集)>이 실려 있는데, 둘 다 작자 미상의 한문 소설로 길이는 중편 소설 정도입니다.



<절화기담>은 이생이라는 선비와 순매라는 유부녀의 아슬아슬한 상봉기이고, <포의교집>은 이생이라는 선비와 초옥이라는 유부녀의 연애담인데 이 글에서는 <포의교집>에 대해서만 얘기해보려 합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의 작가가 쓴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한 유부녀의 격정적이고 위험한 불꽃같은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초옥이지만, 소설의 초두는 이생의 사연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생은 명목만 양반인 충청도 출신의 사십줄에 들어 선 선비로 말솜씨는 있으나 글솜씨도 별로 없고, 친구나 선후배 사이에서도 별로 인정 받지 못하는 위인입니다.

고향집에는 젊은 아내가 있지만, 친구 따라 서울 와서 친구가 머무는 장진사 집에 더부살이를 하며 과거 공부 한답시고 가끔 친구들과 시문을 논하기도 하는, 그렇고 그런 중년의 사내입니다.

장진사 집은 중문 밖에 우물이 하나 있어 행랑 사람들이 물을 긷기 위해 수시로 드나들곤 했는데, 초옥이란 여자가 물을 길러 왔을 때 이생이 첫눈에 그녀에게 반하고 맙니다.

초옥은 나이 열일곱 살의 유부녀입니다. 

어려서 남영위궁의 시녀로 지낼 때 글을 배웠는데, 총명하고 글재주가 뛰어났습니다. 그녀는 뛰어난 여류 시인인 허난설헌의 글을 흠모하고, 글을 아는 남성과 시를 주고 받으며 흉금을 터놓고 문학과 인생을 얘기하는 '포의(布衣)'의 관계, 즉 대등하고 인격적인 관계맺기를 꿈꾸던 미모와 열정과 재능을 고루 갖춘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신분상의 제약으로 장진사 행랑에 세들어 살다가 이생을 만났을 때는 원하지 않는 남자와 혼인을 한 지 일 년쯤 지난 뒤였습니다. 남편과는 일종의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라 애정이라고는 없이 그저 형식적인 아내 노릇을 하며 살고 있던 초옥은 오다가다 눈여겨 본 이생을 마음에 담아둡니다.

한편 초옥에게 반한 이생은 그녀가 물을 긷거나 바느질하는 모습을 훔쳐보며 마음을 졸입니다. 그러나 한동안 속으로만 애를 태우다가,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초옥에게 물을 한 그릇 떠 오라고 청합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초옥은 이생과 밤새도록 문학과 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밤을 보내게 됩니다. 그날 밤 이생이 그녀에게 육체적인 접근을 하지 않자, 그녀는 이생에게 깊은 신뢰를 갖고 그와 ‘지기’로 지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생이 육체적인 접근 없이 밤을 보낸 것은, 이런저런 현실적인 걱정과 함께 초옥의 눈치를 보느라 그렇게 된 것일 뿐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초옥의 열렬한 사랑 앞에 이생은 번번이 어정쩡하게 몸을 사립니다.

원컨대 낭군께서는 하고 싶은 대로 하셔서 가슴에 깊은 응어리를 만들지 마셔요.
정이 있는데 토해내지 못하면 반드시 병이 나고, 병이 생기고 나면 애초에 몰랐던 것보다 못하지요.
그림자 속의 그리움, 그림 속의 사랑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낭군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피하지 않을 터인데, 한 동이 술을 어찌 마다하겠어요.

이생과 첫 잠자리를 갖기 직전에 초옥이 한 말입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사랑의 결합을 촉구한 초옥은 육체를 초월한 어떤 지점에서 두 사람의 사랑을 이끌어 갑니다. 초옥은 자신의 사랑에 대해 주저하거나 회의하는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는 자신과 마음이 통하는 어려운 처지의 남자를 만나 그를 뒷바라지하고자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는 태도로 당당하게 꿈꾸던 삶을 펼쳐 나갑니다.

이생과의 관계를 눈치 챈 남편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고 칼부림도 당하지만, 그녀의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 얼떨떨해질 지경으로 불륜 사실을 숨기려 들지 않습니다.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의 사랑을 공표하며 죽음을 선택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눈에도 잘했다고 보기 어려운 불륜을 저질러 놓고, 초옥은 '곧은 행동(貞行)'이었다고 선언합니다. 죽음으로 사랑을 관철시키는 초옥의 기세에 눌린 시아버지는 이생과의 관계를 모른 척 용인하기에 이릅니다.

반면 이생은 고향집의 아내도 있고, 초옥과 살림을 차릴 만큼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늘 어정쩡한 태도를 취합니다. 게다가 초옥의 진심마저 의심합니다. 저토록 적극적이고 열정적이니 자기보다 잘난 사내가 나타나면 그리로 가버리라 믿고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합니다.

그 반대로 초옥은 자신의 전부를 바쳐 이생을 사랑합니다. 인물도 볼품없고, 나이도 많고, 유부남이고, 학문도 부족한 선비를 사랑하는 초옥의 불같은 열정은 현실의 모든 조건을 초월하는 사랑의 화신인양 보여집니다.

초옥은 애초에 변변찮은 이생을 멋진 남성으로 오해한 것이 아닙니다. 초옥은 오로지 이생을 자신과 마음이 통하는 남성이라고 본 것입니다. 초옥은 이생과 인격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맺은 것이며, 이 관계를 승화시키고자 현실과 싸운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생에 대한 초옥의 열정은 강렬합니다.

이생과 한동안 헤어져 있을 때 이생의 친구인 장사선이 자신을 소유하고자 몸부림치는 부유하고 젊은 장중약과 맺어주려고 권유하자, 초옥은 이렇게 말하며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제 마음은 금석보다 굳어서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을 것이요, 불에 던져도 타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는 더 말씀하지 마세요.
만약 이 낭군이 장 낭군처럼 부유하고 젊었다면 전 돌아보지도 않았을 겁니다.
지금 이 세상의 번화한 도시에는 벼슬아치와 귀공자, 부유한 상인과 호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저는 이 모두 원치 않고 오로지 이 낭군만을 택했으니, 쇤네의 마음을 아시겠지요?

요즘 남성들이 들으면 참으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릴 명대사 아닙니까?

그런데도 헤어져 있는 동안 이런 사랑을 까마득히 모르고 초옥의 정절을 의심하기만 하던 이생은 어리석고 경솔하게도 장중약의 욕망을 초옥에게 전달하는 뚜쟁이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는 그의 결정적 실수였습니다. 초옥의 사랑에 대한 기본적 예의조차 배반한 사건이었지요. 초옥은 이생의 말을 듣는 순간, 한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낭군과 비록 혼인한 사이는 아니나, 사귀는 정이 혼인한 사이보다 나았던 것은 그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말씀하시는 것이 어찌 이리 망령되고 경솔하신지요?

자신이 이생에게 하찮은 여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천근처럼 무거운 이 말 끝에 초옥은 자신의 사랑을 거두어들입니다.

그 후 초옥의 “산 같던 정은 눈이 녹고 구름이 흩어지듯 사라지고, 금석 같던 약속은 바람에 우박이 날리듯 사라져” 다시는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 뒤 오랜 이별의 시간 끝에 민비의 가례를 앞두고, 궁중 잔치의 시중을 드는 '여령(女伶)'으로 차출돼 가는 초옥과 이생이 재회하게 됩니다. 이생은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초옥을 명단에서 빼주고, 영산홍 가지 하나를 꺾어 주며 옛정을 되살리려 이런 말을 합니다.

“이 꽃은 전날 봉선화에 비교하면 어떠하냐?”
“정말… 그 꽃이로군요.”
“너와 내가 이 꽃과 같이 활짝 피어나면 어떻겠느냐?”
“낭군께서는 오래지 않아 반드시 이 꽃과 더불어 활짝 피어나실 겁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끝났습니다.”

최선을 다해 사랑했지만 이미 ‘지기’가 아닌 옛사랑에 대해 초옥은 이렇게 깨끗하게 정리합니다.

미모와 지성에 열정까지 갖춘 그녀는 한 남성과의 진정한 ‘지기’ 관계를 꿈꿨지만, 봉건적 윤리나 남성중심주의 등의 장애에 부딪혀 상처 받았습니다.

남녀가 만나 서로 반하고, 불꽃 같은 사랑을 나누다가, 어느 순간 이별하고 사랑이 끝나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에 수없이 널려있습니다. 초옥의 슬픈 비극은 현재 우리 주변에서도 수없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이 끝났다고 울고불고 하지도 않았고, 구차하게 미련을 두지도 않았고,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열정을 바쳤던 사랑의 대상이 그녀가 꿈꾸던 이상형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자유로와졌으며, 사랑이 끝난 뒤에도 그녀의 자유로운 인생은 지속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과 이생 사이를 망가뜨렸던 장중약이란 사내와 교제를 지속한 것으로 회고됩니다.

그 후 중약과 영필에게서 들으니 양파(초옥)와 중약은 비록 정을 통하지는 않았지만 그 뒤로 서로 만나면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또 말하기를, 양파가 본 남편을 버리고 어디 떨어져 사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는데 정말 그러한지?

그녀의 후일담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인생의 한 순간에 선택한 위험하고 불꽃 같은 사랑을 위해 신분이나 제도나 사회의 통념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목숨까지 던지며 살다 간 초옥이란 여인이 우리 고전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초옥의 사랑은 남성을 위한 정절과 순결과 희생으로 범벅이 된 '춘향'이나 '운영'이나 '숙향'의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녀의 사랑은 현대 어느 여성의 사랑보다도 자주적이고, 주체적이고, 능동적입니다.

<포의교집>은 일반적인 애정소설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문제를 남성이 아닌 여성의 주체적인 행동 위주로 끌어감으로써, 아직도 봉건적 가치관에 찌들어 있는 우리 남성들의 일방적인 욕망을 교란시키고 단절시키는 혁명적인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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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하 명창의 시조나 가곡을 들으면 너무도 청아하고 맑은 그녀의 소리에 빠져들게 됩니다.

달빛 아래 고운 한복을 입은 여인이 숲속의 정자에 앉아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같은 노래를 부르면 누구나 그 신비하고 고운 목소리에 넋이 나가고 말 것입니다. 김월하 명창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런 장면을 상상하게 됩니다.

또한 가벼운 화장 아래 숨어있는 그녀의 미모나, 단정한 한복을 입고 앉은 고운 자태나, 거침없이 창공을 타고 나르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현실의 남루함을 뛰어 넘는 천계의 우아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현실 생활은 너무도 남루하여 그녀의 과거지사를 처음 듣는 사람은 적어도 몇 차례 긴 한숨을 몰아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김월하 명창은 1918년에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습니다.

무슨 기구한 팔자를 타고났는지 애달픈 그녀의 인생 행로는 너무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1910년대 말에 창궐했던 호열자 -콜레라-가 그녀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두 오빠의 목숨을 하루 아침에 앗아갔기 때문입니다. 염까지 한 어미의 차가운 시신을 더듬으며 젖을 먹겠다고 울던 어린 아기는 그때 겨우 두 살박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졸지에 식구 넷을 한꺼번에 잃은 그녀의 아버지는 거의 실성하다시피 하여 집을 나가 소식 없이 떠돌아다녔고, 고아 아닌 고아가 된 그녀의 세 자매는 저마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으니 큰언니는 외가로, 둘째언니는 수원 어느 집의 민며느리로, 그리고 자신은 이모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모집에서 이 년쯤을 보낸 그녀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 살던 유씨 부인의 수양딸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유씨 부인 역시 유일한 피붙이인 친정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으므로 수양딸인 그녀가 합세하여 여성 3대만 모여 사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양 어머니와 할머니는 첫인상부터 점잖은 분으로 말씀도 흔하지 않으셨고, 또 함부로 물을 수도 없어서 어찌해서 두 분만 사시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요. 두 분은 바느질 일로 살림을 꾸리는 듯했는데 보통 바느질이 아니라 대갓집에서 부탁하는 중한 일감들이었어요. 워낙 맵씨가 곱고 야무졌기 때문에 일감은 퍽 많은 편이었습니다.”

그녀를 피붙이처럼 돌봐 주면서도 엄했던 두 모녀 밑에서 지체있는 집안의 아녀자가 알아야 할 법도와 지켜야 할 행실을 익히며 성장했습니다. 그 당시 그녀의 이름은 유정환이었고, 스스로도 그 이름에 어떤 저항감이나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제 피붙이들과는 연락도 왕래도 전혀 없었으니까 제 뿌리가 무엇인지 알 길도 없었고 알고 싶을 턱도 없었지요. 그런데 시집 간 이듬해인가 수원에 있던 언니가 찾아와서 아버지가 와 기다리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저는 만나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십 몇 년을 잊고 지낸 데다가 행여라도 시집에서 알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서서 그랬지요.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한 참 뒤에 수원 언니가 급히 좀 내려와 달라는 전보를 쳤기에 영문도 모르고 수원에 내려가니 그곳에 아버님이 계시더군요.”

거기서까지 아버지를 외면할 수가 없어서 자식된 예를 차렸습니다. 오랜 방랑생활에 절어서 초췌한 모습의 아버지는 이제는 다 자라서 혼례까지 올린 여식에게 차마 다시 되뇌이고 싶지 않은 과거지사를 들려 주었고, 그녀의 이름은 유정환이 아니라 김덕순이라는 사실도 일러 주었습니다.

그녀는 그때까지 까마득하게 몰랐던 그 충격스런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었노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기구한 과거에 대한 일말의 회한이야 어찌 없을까마는 그때 이미 그녀는 희로애락을 쉽사리 드러내보이는 법이 없는 아녀자들이 거쳤던 극기 훈련을 이미 끝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녀가 혼례를 올리고 모녀 3대 집에서 나온 것은 열여섯 살 때였습니다.

남편은 양주 군청에 다녔습니다. 살림살이 어느 구석에도 빈틈이 없는 어여쁘고 현숙한 아내를 남편은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또 아내가 공부나 예능에도 재주가 있고 총명한 것을 아까워해서 서울 묘동 교회 부설 ‘묘동 학원’ 야간부 고등과에 진학시킬 만큼 깬 사람이었습니다.

남편의 자전거 뒤에 실려 묘동 학원 야간부에 다니던 시절이 아마도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이후 이 땅에서 벌어진 비극이 그녀의 집안에도 예외없이 들이닥쳤기 때문입니다.

해방이 되자 남편은 사업을 하여 재산을 모으는 한편 한민당에 관계하는 등 사회적 활동을 활발히 펼쳐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푼 희망도 6.25가 터지면서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남편은 용케 서울을 빠져나가 양주에 있던 본가에 피해 있었으나, 서울이 수복된 뒤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끌려간 뒤로 영원히 생사를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난리통에 남편과 재산을 잃은 데다가 적 치하에서 부역을 했다는 누명까지 뒤집어쓰게 되자, 그녀는 남편 친구한테서 한민당 당원증 하나를 얻어서 뒤늦게 홀로 피난길로 올랐습니다. 손재봉틀과 침구 등 남은 가재 도구를 되는 대로 챙겨서 집을 나선 그녀의 행선지는 당초에는 해인사였는데 정작 발을 디딘 곳은 부산이었습니다.

초기의 피난살이는 여느 피난민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낙동강 하구인 하단에서 푸성귀를 해다가 동대신동 시장에 내다팔기도 했고, 고추장 장사, 콩나물 장사에 하동 김 장사까지도 했습니다. 그런 장사치 생활의 재미도 짭짤했지만 그녀의 피난 보따리에서 나온 손재봉틀이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서울댁’은 알아 주는 기술자로 부상했습니다.

일찍이 수양어머니 밑에서 조선 옷 맵씨를 익혔고, 또한 양재 학원에 다니면서 양복 만드는 기술까지 배운 터라 무슨 일감이든지 막힐 게 없었습니다. 때마침 나일론 섬유류가 쏟아져 나올 무렵이어서 서울댁의 솜씨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느질이 큰일을 벌이고야 말았습니다.

먹는 것마저 귀찮을 만큼 일에만 매달려 열 달 쯤을 보낸 뒤에야 몸이 크게 상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며칠 시름시름 앓던 위병이 심해져서 급기야 꼼짝 못 하고 드러눕는 지경에 이르렀건만 객지에 홀로 떨어진 그를 돌봐줄 손길이 있을 턱이 없었습니다. 시집에 기별을 전할까 했다가도 남편마저 잃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만 할 따름이었습니다.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크게 비관한 나머지 그녀는 마침내 죽기로 작정하고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은 채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마침 그 즈음에 군의관으로 부산에 와 있던 시집의 일가가 소식을 듣고 그녀를 병원에 옮김으로써 위궤양으로 사경을 헤매던 그녀를 구해냈습니다.

국악으로 입신한 명창의 경우를 보면 대대로 무업에 종사해온 재인 집안의 내력을 가졌거나, 순회 극단의 공연에 반해서 가출을 했거나, 아니면 국악에 관심이 깊은 사람이 집안에 있었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에 견주면 김월하 명창의 경우는 희귀한 경우에 속합니다. 그녀가 여창 가곡의 명창으로서 무형 문화재가 된 것은 바로 그 위궤양 덕택이기 때문입니다.

“서너 달 동안 통원 치료를 하면서 차츰 생기를 찾을 무렵이었는데 동대신동에서 술도가를 경영하던 어르신 한 분이 저더러 아침 산책을 같이 가는 게 어떠냐고 그래요. 외간 남자하고 새벽 산책을 한다는 게 워낙 망측해서 딱 잘라서 거절했는데 그 집 아주머님까지 나서서 자꾸 권하는 바람에 새벽 산책을 나섰어요.
산책 가는 곳은 지금은 없어진 동대신동 구덕 수원지였는데 경치가 아주 굉장해요. 그래 그 양반을 따라 수원지에 들어가면 그 분은 거기서 모이는 분들과 말씀을 나누고 저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가 돌아오곤 했는데 거기 모이는 분들이 매일 시조 몇 수를 부르고 헤어지더군요. 저는 이만치서 귀동냥만 했지요.”

새벽에 수원지에 모인 사람들은 이름을 꼽으면 다 알 만한 법관과 고급 관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거기 모여서 난리중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전직 경찰서장이었던 최 아무개한테 시조를 배우던 '시우 동호인'들이었습니다.

새벽 산책이 잦아지면서 수원지에 모이는 사람들과 안면이 익어갈 무렵이었습니다. 시조창이 무척 어렵다는 술도갓집 주인의 말에 "뭔가 어렵냐"고 슬쩍 면박을 준 일이 있었는데, 그 일로 그녀는 그들 앞에서 귀동냥으로 익힌 시조를 한 수 뽑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배우지도 않은 그녀의 목에서 너무도 낭랑하고 곱고 선율이 정확한 시조가락이 흘러 나오자 좌중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가 그녀의 나이 서른여섯되던 해였습니다. 그녀는 당장 시조 동우회 모임의 스타가 되고 말았습니다. 

출처 : http://playin.innori.com/%3Fpage%3D300

그 일이 있은 뒤로 그녀의 인생은 급속하게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뿌리도 모른 채 유씨 부인의 수양딸 노릇을 한 ‘유정환 시대’와 자상하고 듬직한 남편과 함께 꿈 같은 세월 보낸 ‘김덕순 시대’는 막을 내리고 시조, 가사, 가곡에 걸쳐 여류 창악인으로 이름을 드날리는 ‘김월하 시대’가 열린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달을 지고 있다는 뜻의 고아하고 그윽한 아호 ‘월하(月荷)’도 그 모임에서 얻었습니다.

뜻밖의 데뷔에 성공한 그녀는 이제 피난민도 환자도 아니었습니다. 시조를 하는 동안 위궤양도 어느 덧 나아버려 그녀는 잃었던 건강마저 되찾았습니다. 

게다가 수원지에 모인 사람들의 주선으로 두봉 이병성 명창을 만나 정식으로 시조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병성 명창은 이왕직 아악부에서 하규일의 지도를 받은 시조창과 가곡의 큰 봉우리였는데, 국립국악원이 서울로 올라간 뒤에도 신병 때문에 남아서 그때 설립된 부산국악원에서 후진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김월하는 이병성 명창 밑에서 3년쯤 배우는 동안 시조와 12가사를 완창해 버리는 놀라운 학습 속도를 보였습니다.

“이병성 선생님 밑에서 몇 년 배우고 나니 일자리가 슬슬 생깁디다. 동래에 사는 유지들이 서른 명쯤 모여 시조창을 배우겠다고해서 거기 가서 시조를 가르쳤지요. 거기에서도 여러 분을 알게 되었고, 아무튼 시조가 대단한 인기를 모으던 시절이었어요. 여기 가서 가르치고 저기 가서 부르고...”

요즘 들으면 먼 옛날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시조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웬만한 모임이나 잔치는 물론이고, 혼례식의 축가도 시조창으로 부르거나, 심지어는 장례식 만가도 시조창으로 불리곤 했습니다. 그녀도 동래에서 시조를 가르쳤던 원예 고등학교 교장 김흥순의 영결식에서 시조로 만가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럴 즈음 그러니까 그녀의 나이 마흔한 살이었을 때, 이름을 더욱 드날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서울 중앙 방송국이 이승만 대통령 탄신 기념 명창 대회를 열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부산 시우 동호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그 대회에 나갔다가 시조 부문에서 1등을 차지함으로써 요즘말로 '떴습니다'. 오아시스 레코드 회사에서 취입을 하고, 방송에 출연하는가 하면, 서울 시조객들의 모임에 불려가는 등 갑자기 바쁜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명창 대회를 계기로 당대 최고의 율객으로 꼽히던 이주환 명창의 부름을 받은 것이 무엇보다도 뜻 깊은 일이었습니다. 국립국악원의 이주환 명창으로부터 가곡 수업을 받는 한편, 이병성 명창에게 시조와 가곡 수업을 계속하는 ‘서울 반, 부산 반’ 생활이었지만 그녀의 이름은 여기 저기서 회자되었고, 그녀의 창악 세계는 탄탄하게 구축되어갔습니다.

“가곡은 하면 할수록 어렵고 두려워요. 자신이 지닌 음성을 다 써야 하는 데다가 길게 뽑으면서도 잡스러운 목소리가 들어가면 안되니까 그게 좀 어려워요? 그래서 가곡을 높은 산꼭대기에서 우람한 통나무를 베어 끌어내리는 소리라고들 그러지요. 스님네들이 범패를 부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타고난 목소리와 재능을 가진 그녀의 학습은 일취월장했습니다.

시조의 모든 갈래를 두루 꿰뚫었는가 하면, 한시도 두루 익혔습니다. 또 거문고, 양금과 같은 기악에도 숨은 재능을 지니고 있던 그녀는 곧잘 자신의 스승은 ‘모두 열 세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창악에서 이론의 비중을 높게 매기지 않습니다. 음악은 감성으로 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 세계를 학술적으로나 관념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태도는 매우 독특한 계기로 뒤늦게 뛰어든 그녀의 학습 과정이 여느 국악인들과 구별되는 점에서도 연유될 수 있을 겁니다. 그와 함께 그녀의 천부적인 음악성을 바탕으로 하는 경험론적 자신감과 관련지어서 풀이할 수도 있겠습니다. 

피난지 부산에 도착한 지 꼭 한 달이 모자라는 십 년을 채우고 1961년 11월에 서울로 다시 올라온 뒤로 그녀는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거침없이 지냈습니다.

1969년에 국악협회 시조 분과위원장에 선임된 그녀는 1970년에 경향 각지에 산재한 시우회를 모은 전국 시우 단체 총연합회 회장에 추대되었습니다. 그리고 1973년에 중요 무형 문화재 제30호 여창 가곡예능 보유자로 지정됨으로 예인으로서의 길을 순탄하게 달려왔습니다. 1974년부터는 국립국악원 강사 및 연주원으로, 또 국악 예술 고등학교 강사로 나가면서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았으며 서울대, 한양대, 추계 예술대학교에 출강하여 후진 양성에도 진력을 다했습니다.

출처 : http://www.dreamrec.co.kr/new_dreamrec/...yword%3D

또한 그녀는 치산에도 솜씨를 보임으로써 국악인으로는 뒤지지 않는 재력을 지녔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치산술은 근검 절약일 뿐 달리 비방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그녀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가정부를 두지 않고 스스로 살림을 꾸렸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을 그녀는 1968년부터 남몰래 장학사업을 해오는데 썼습니다. 서울대 국악과 학생과 국악 고등학교 학생 중에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탐문하여 학비를 대주기 시작했습니다. 한때는 학생 수가 많아서 한꺼번에 목돈을 마련하느라고 진땀을 흘리기도 했지만, 한번 내뱉은 약속은 결코 어기지 않았습니다.

“학교를 세우는 게 제 필생의 소원이에요. 제가 가진 재산을 다 털면 그런대로 교사는 지을 수가 있겠는데 학교 부지를 마련할 형편까지는 못되는 게 안타까워요. 땅만 있으면 좋을 텐데...”

그녀는 자신이 학비를 대준 학생 중에 누구 누구가 유학을 가 있으며, 누구 누구가 대학 교수라고 꼽으면서 자신이 학교를 세우면 그들이 나와 강의를 맡아줄 것이라고 말하며 그날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그녀는 그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고대하면서 무척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그녀의 달력은 몇 시 어디라고 씌여 있는 강연 일정을 적은 글씨로 가득했습니다. 양평, 안성, 수원, 원주, 안양, 성남은 물론 서울 시내 이런 저런 연수원이나 교육원치고 그녀가 가 보지 않은 곳은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녀의 강연을 듣고 시조 카세트 테이프를 구한 사람은 회사 신입 사원에서부터 경찰서장, 기자, 학교장, 고급 관리, 장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습니다.

그렇게 부지런하게 모은 그녀의 재산은 1991년에 설립된 <월하문화재단>으로 남아 국악의 보급과 육성에 관한 그녀의 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996년에 이 세상을 뜰 때까지 그녀는 우리 것을 외면하는 요즘의 세태를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녀는 지금 천상의 어디에선가 달빛을 받으며 그 고운 목소리로 '못 이룬 꿈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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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에 있는 진도는 다른 곳보다 유난히 예술의 향기가 짙게 배어 있는 섬입니다.

오래 전부터 문인들의 유배지로 각광을 받아 온 터라 선비들의 체취가 곳곳에 스며 있어, 그 영향으로 그림과 글과 풍류의 멋이 잔뜩 담겨 있습니다.

그 중에 그림으로는 소치 명인이, 글씨로는 소전 명인이, 음악으로는 박종기 명인이 꼽힙니다. 박종기 명인은 대금의 명인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었을 때,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잘라 고깃국을 끓여 삼 년 동안 더 사시게 했다는 전설적인 효자로도 꼽히는 분입니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무덤 곁에 움막을 만들어 놓고 삼 년 동안 거적대기 위에서 먹고 자며 무덤을 지켰는데, 그때 갈고 닦은 대금의 솜씨가 가히 신묘한 경지에 이르러 그가 대금을 불면 날짐승들이 갓에 날아와 앉았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대금으로 일가를 이룬 명인이었습니다. 게다가 대금에 판소리의 가락을 얹어서 '대금 산조'를 창시한 분이기도 합니다.

진도 씻김굿의 보유자 박병천 명인은 바로 박종기 명인의 손자입니다.

박종기 명인의 아들이며 그의 아버지인 박범준 명인은 피리도 불고 장고나 꽹가리를 치며 아내인 김소심이 굿을 할 때 잽이로 뒷바라지를 하던 터였으니, 1933년 11월 18일에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 274번지에서 태어난 박병천은 자연히 어릴 적부터 음악에 젖어 지내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할머니가 여러 분이 있었어. 양할머니, 친할머니, 외할머니가 한 집에 사셨는데 이분들이 잠을 재우면서 민요로 자장가를 불러주시고, 업고 다니면서도 쉴 새 없이 민요를 흥얼거리고, 눈만 뜨면 대금 소리, 피리 소리, 장구 소리, 북 소리가 들렸으니 음악에 눈이 안 떠질래야 안 떠질 수가 없었지.”

일곱 살도 되기 전에 이미 풍물가락이 몸에 밴 그는 부락에서 농악을 칠 때 '무동(舞童)'을 서서 그 예쁜 얼굴과 춤으로 인기를 독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락 저 부락에서 농악을 칠 때마다 돈 주고 사가는 인기 무동 노릇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학예회나 연극이나 콩쿠르 대회 같은 것이 있을 때에는 빠지지 않고 인기를 독차지하는 끼 있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로 건너가서 목포 상업중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 음악반에서 클라리넷을 불고, 음악반장도 하고, 권투부원도 하고, 하숙집에서 가까운 권번에 가끔씩 나가 판소리 북도 치는 재주있는 학생으로 거칠 것 없이 자유롭고 재미있는 생활을 했습니다.

집안에 자손이 귀하고 살림은 풍족하니 학비나 하숙비는 항상 넉넉하게 남아돌아 돈 잘 쓰고, 멋있고, 놀기 좋아하고, 싸움도 잘하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친구나 여자들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러다가 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6.25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고향으로 피난을 오니 내 위 형들은 전부 학도병, 의용군으로 가버리고 처녀하고 과부들 뿐이었어. 그때 진도에서 목포에 나가 공부하기가 지금 미국 유학 가기보다 힘들었을 때니 여자들만 웅성웅성한 곳에 멋쟁이 학생이 왔으니 가만 놔둘 것인가. 처녀들한티 기습도 많이 당했지.”

처녀들이 죽창 들고 모닥불 피우고 보초 서다가 인민군한테 잡혀가고, 인민군이 도망가면 국방군한테 잡혀가는 험난한 시절을 숨어서 보낸 그는 다시 목포로 올라와 선원을 양성하는 전문학교인 목포 상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체질적으로 배 타는 게 싫어 선원 되는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무당이 되어버렸습니다.

“장구 메고 굿하러 가면 친구들이나 동네 사람들의 시선이 옛날 같지가 않아. 그 많은 돈을 들여서 목포에서 유학까지 한 인텔리가 굿이나 한다고 천대하는 것 같아. 그래도 내가 좋은디 어쩔 거여. 어렸을 때는 학교 브라스밴드나 가요가 좋았지만 나이가 드니 기타 소리보다 가야금 소리가 좋고, 클라리넷 소리보다 대금 소리가 좋은 걸. 그래, 친구를 만나면 오히려 내가 넉살 좋고 염치 좋게 나 굿하러 가니 굿보러 오라고 소리쳤지.”

그는 진도에서 으뜸가는 무당인 어머니 김소심을 따라다니며 굿을 배우고 악사 노릇을 하면서 굿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황해도나 평안도 등 이북의 굿은 신 내린 ‘강신무’가 진행합니다. 그에 견주어서 한강 이남지방인 경기도나 경상도나 전라도는 대대로 집안에서 의식을 전수받은 ‘세습무’가 진행합니다. 그 중에서 전라도의 무속은 '살풀이춤'과 '시나위 가락'으로 춤이나 음악에서 뛰어난 예술성과 함축미를 지녀 우리나라 고전 무용과 고전 음악의 모태가 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죽은 사람의 혼을 씻어 ‘천궁’으로 보내는 의식인 '씻김굿'은 제대로 다 하려면 81시간이 걸리는 엄청난 의식으로 '성주굿', '부정거리'와 같은 다른 굿보다 훨씬 비장하고 종교적이고 예술적이어서 많은 예술가들에게 예술적 영감과 소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출처 : http://www.oneclick.or.kr/Contents/list...page%3D6

그는 어깨에 굳은 살이 박히도록 북과 장구를 메고 다니면서 그 굿을 속속들이 다 익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은 따갑기만 했습니다.

“내가 스물 한 살에 장가를 갔는디 얼마 안 가서 가정 파탄이 나고 말었어. 내가 무당이 되나까 아내가 죽자사자 반대하는 거여. 그래도 말을 안 들으니까 챙피하다고 도망가고 말았어. 아내가 그럴 정도니 다른 사람은 오죽 헐 거여.
사람들한티 천대받고 괄시받은 한이 어찌나 깊이 맺혔는지 쌈질, 각시질, 도박질 등 질이란 질은 안 해 본 게 없어. 내가 한참 깡패짓하고 다닐 때 별명이 '전남 번개'였응께. 길을 가면서도 주먹을 핀 적이 없어. 어떤 놈이 나를 업신여기고 해치지나 않나 허고 꼭 주먹 쥐고 다녔지. 그렇게 멸시 받는 것에 대한 반발과 오기로 이를 악물고 굿을 배운 거여. 그런디 배우고낭께, 음악을 알고낭께 사람이 순해져.”

한동안은 굿을 때려치우려고 배를 사서 어부 생활도 해보고, 구멍가게도 내고, 쌀 도매상도 해보고, 농사도 지어봤지만 모두 실패하고 풍족했던 집안의 살림만 없애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굿으로 다시 돌아와 진도실업 고등학교에서 국악 강사 노릇을 하면서 무가(巫歌)를 정리하고, 민요를 발굴하고, 장단을 채록하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진도 지방의 여기저기에서 불리워지고 있는 토속 민요에 남달리 애착을 느꼈습니다. 어려서 할머니 품에서 들었던 흥얼거림의 가락들이 그의 가슴 속에서 되살아났던 것입니다. 그 가락들에서 따뜻한 정과 푸근한 안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앉아서 부르는 민요인 <모 심는 소리>, <아리랑타령>, <화초사거리>, <개구리타령>, <흥타령>, <둥덩이타령> 같은 노래들과 일할 때 부르는 <뱃노래>, <술비소리>, <부뚜질노래> <불무질노래> 같은 노동요와, 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인 <강강수월래>, <기와 밟기> 노래같은 유희요와 어린애들이 놀면서 부르는 동요들을 정신없이 찾아다니며 배우고 채록했습니다.

“내가 어려서 나무하러 갈 때는 대나무에다 낫을 매는데, 그 대나무를 가지고 ‘발치기 발치기 발로 친다고 발치기, 손치기 손치기 손으로 친다고 손치기.’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대나무 넘기 놀이를 했어.
또 우리집에 말 키우는 목장이 있었는데 머슴들이 말 키우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누가 시집갈 때는 신부 가마를 메고서 '흘롱소리'를 하면서 흥겹게 메고 갔거든. 그런 소리는 참 씩씩하고 푸짐하고 흥겹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 그러게 그 나라 '길군악' 곧 행진곡을 들어보면 민족성을 알 수 있다는 말이 맞어.
소련은 눈 속에 장화를 신고 가야 하니 '쿵짝 쿵짝' 하는 무거운 두 박자이고, 이탈리아는 날씨가 맑고 명랑하니 '띠따띠따' 하면서 경쾌하거든. 우리나라는 뭐니뭐니해도 삼채가락이여. '캥캥 캥매캥 조오타', 이것이 우리 몸짓에 딱 들어 맞어.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고 소 걸음으로 흥겹게 어깨를 들썩이면서 걸어가는 걸음, 이것이 우리 장단의 기본이여.”

출처 : http://music.cyworld.com/artist.asp%3Fa...d%3D3316

이렇듯 민요에 대한 그의 열렬한 애정은 1971년에 전국 민속경연대회에서 남도 들노래팀을 가르쳐 국무총리상을 받은 것으로 결실을 보았습니다. 그 뒤 1972년에는 <강강수월래>로 출전하여 국무총리상을 받고, 그 이듬해에 다시 출전하여 역시 <강강수월래>로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1974년에는 <진도 만가>로 문공부 장관상을 받고, 그 다음해에는 <거문도 뱃노래>를 발표하고, 1976년에는 <진도 다시래기> 발표 공연을 갖기도 했습니다.

'다시래기'는 초상난 집에서 슬픔에 젖은 상주를 위로하기 위하여 재담과 노래를 잘 하는 광대들이 모여서 한판 우습게 노는 풍습을 말합니다. 그는 어렸을 때 본 기억을 되살려 생존하는 늙은 광대들을 찾아 하나하나 구술을 받아 복원시켜 놓은 것입니다.

“처음에 발표를 하니 모두들 비웃어. 생전 놀아보지도 못한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병신춤을 추게 하고 노래를 부르게 허니 아무래도 서툴렀지. 그렇지만 자꾸 하다보니 점점 신들이 올라서 나중에는 직업배우 뺨치게 잘들했어. 그래도 옛날 어른들 솜씨를 따라갈 수가 없지. 그분들은 밥 먹고 하는 일이 그거였응께. 그분들은 징 가운데가 닳아서 떨어질 정도로 풍물을 치고 굿을 해댔어.”

그렇듯 쉴 새 없이 경연대회에 나가고, 새로운 것을 발굴하고, 연습하고, 뜯어 고치는 그를 보고 주위의 오해도 많고 잡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기와 집념으로 버티어 나갔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그의 기량과 안목은 자꾸 넓어지고 깊어져 처음에는 출연자의 입장에서만 이해하던 공연물에 대한 안목이 점점 가르치는 사람과 객석에서 보는 사람의 입장으로 변해가면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몇 번의 수상으로 자신을 얻은 그는 드디어 자기의 특기인 씻김굿을 정식무대에서 발표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만해도 무당굿을 극장에서 올린다는 것은 무모하고 미친 짓으로 여겨졌던 터라 그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씻김굿의 기능을 가진 무당과 악사들을 모아 놓고 연습을 시켰지만 평생 동안 무대에 서보지 않은 사람들이니 무대 위에서 지켜야 할 약속들을 쉽게 이해할 리가 없었습니다. 차일 쳐놓고 현지에서 하던 경험만으로 사사건건 불평을 털어놓는 그들과 죽자사자 연습하여 마침내 서울을 가려고 목포행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출연자 한 사람이 못가겠다고 버티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아들이 자기 아버지가 진도에서 굿하는 것도 창피한데 서울까지 와서 하느냐고 결사 반대하니 못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난 그가 출연자를 바닷물 속에 빠뜨리는 소동을 벌인 끝에 겨우 서울에 올 수 있었습니다.

YMCA와 국립극장과 공간 사랑에서 차례로 씻김굿 발표회를 여니, 이번에는 세습무 집안의 국악인들이 외면하고 냉대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당과 관련된 자기 집안의 내력이 밝혀질까 꺼려해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들과도 왜 조상을 속이느냐고 다투면서 공연을 무사히 치뤘습니다. 그뒤에는 전국 굿 경연대회에서 황해도, 서울, 부산 지방의 무당들과 함께 전라도 지방의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굿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차츰 개선되고 예술로써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80년에 씻김굿 기능보유자로 인간문화재 제 7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출처 : http://www.soundspace.co.kr/bbs.php%3Ft...%26p%3D5

그러자 해외공연에의 길이 열려 1982년에는 국제 민속 예술제의 초청으로 유럽 6개국 순회공연을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LA올림픽 개관 축제 공연도 하고, 나카라과 민속 음악제에서는 금상도 받기도 하고, 1985년에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 민속 음악제에 국가대표로 나가서 유럽 7개국 순회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굿을 극장에서도 해보고 외국 가서도 해보니까 아무래도 현지에서 차일 쳐놓고 하는 분위기가 안 나와. 화려한 무대에서 조명이 좋고 마이크 있어봐야 제맛이 안 나. 전통의 재창조도 중요하지만 원형의 보존도 그만큼 중요한 거여. 민속경연대회도 마찬가지여. 상이 걸려 있으니 출전하는 사람들이 아름답고 화려하고 기술적으로만 치중을 혀. 그것은 올바른 길이 아니지. 내가 시골 생활만 허다가 서울 와서 산 지 몇 년이 되었는데 서울 와서 보니 모든 예술이 아름답고 기교적으로만 흐르고 있어. 그러면 안돼.”

그는 제자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장단을 가르칩니다.

춤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건 노래를 배우러 오는 사람인건 먼저 기본적인 장단을 익히게 한 후 다음 과정으로 들어갑니다.

“장단에도 음과 양이 있고 소삼 대삼이 있어. 높은 소리 뒤에는 낮은 소리가 있고 빠른 소리 뒤에는 느린 소리가 있어. 타령 한 장단이라도 집이 이루어져야 돼. 남자와 여자가 모여서 가정을 이루듯 암가락과 숫가락이 어우러져야 한 장단이 이루어지는 법이여. 순서가 틀려도 안돼. 그런데 요즘은 이런 것을 모르고 마구잽이로 치는 사람이 많어.”

이러한 그에게 끊임없이 국악계나 무용계의 중진들이 찾아옵니다. 집안에서 집안으로 이어진 튼튼한 가락과 몸짓은 어느 대학 교수의 이론보다도 막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를 이어 피를 타고 흐르는 음악성은 그의 아들에게도 이어졌습니다.

“큰 아들놈이 초등학교 다닐 때인디 하루는 밖에 나갔다 집에 오니 이놈이 혼자서 장구를 치고 있어. 근디 가르쳐 주지도 않었는디 가락이 듣기 좋아. 그래 피는 못 속이는구나 생각하고 그 길로 목포로 가서 작은 장구를 사서 메어주고 달밤에 집앞 행길에서 장구를 가르쳤지. 그후 대금을 공부했는디 지금은 국립국악원에서 대금을 불고 있어.”

밖으로만 밖으로만 떠돌다보니 가정적으로는 불안해서 시련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모두 성장해 자기 길을 훌륭히 가는 걸 지켜보며 조용히 말년을 보내다 젊은 날의 오기와 반항과 집념 대신 인정 많고 훈훈한 중년 신사의 모습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니 이것은 성품을 순화시키고 심성을 맑게 하는 음악의 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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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이백 년 전, 낙동강에 큰 홍수가 났을 때,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초계 땅 밤마리 앞 언덕에 큰 궤짝이 하나 흘러 와 닿았다.
그 궤짝을 열어보니 탈과 탈놀이에 쓸 도구와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모두 손 대기를 싫어했으나, 인연이 있어서 닿은 것이니 탈놀이를 해야 한다고 하여 탈을 쓰고 그 책에 적힌 대로 말을 하니 참 재미있는 놀이가 되었다. 

이것은 밤마리 마을에 전해오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로 밤마리가 <오광대 탈놀음>의 시발지라는 학설의 자료로 종종 거론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 말고도 오광대의 발생지가 밤마리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서울에서 흘러온 장정 한 명이 밤마리 양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답니다. 그런데 주인의 구박이 말할 수 없이 심하여 참다못한 머슴이 탈을 몰래 만들어 두었다가 어느날 밤에 술을 잔뜩 마시고 탈을 쓰고 주인집 마당에 나가 춤을 추며 양반 욕을 퍼부었는데, 그게 오광대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몇 가지 전승 자료만으로 '오광대 탈놀음'의 시발지를 초계 밤마리로 못박기에는 여러 가지 무리가 있지만, 그곳이 근세에 와서 오광대 놀이를 많이 놀던 곳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낙동강은 1930년대까지만 해도 수심이 깊어 뱃길로 쓰였고, 안동까지도 소금배가 오르내렸다고 합니다. 따라서 밤마리는 강의 포구로 의령, 합천, 고령, 초계와 같은 지방의 물산이 모이는 집산지였고, 수시로 난장이 벌어져서 상인들이 광대패에게 돈을 주어 며칠씩 탈놀음을 했다고 합니다.

거기서부터 의령, 산청, 진주, 사천, 고성 등으로 탈놀이가 퍼져서 수영이나 동래나 부산진과 같은 낙동강의 왼쪽 지방에서는 ‘들놀음’을 뜻하는 ‘야류(野遊)’라 불리게 되고, 낙동강의 오른쪽 지방에서는 '오광대'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오광대 놀음이 남아 있는 곳은 통영과 가산과 진주와 마산과 고성이 있는데,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고성 오광대>가 가장 원형에 가깝게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이 다가오면 고성 몰디 뒷산의 도독골 산기슭 잔디밭에 놀이꾼들이 모여서 며칠씩 연습을 한 뒤에 풍물을 치면서 탈놀음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인근에서 수많은 구경꾼이 모여들어 흥청거리는 한판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이 놀이의 기능보유자 중에서 80년대에 제가 만났던 이윤순 명인이 어렸을 때만 해도 해마다 마을에 그런 놀이가 벌어져 소년의 마음을 들뜨게 했습니다.

1918년 5월 23일에 고성군 하일면 오방리에서 농사를 짓던 이원제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단소도 곧잘 불고 국악을 좋아하던 아버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려서부터 동네에 굿이 벌어지거나, 풍물을 치거나, 오광대 놀음을 할 때에는 신이 잔뜩 나서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가난한 살림 탓에 초등학교 1학년을 겨우 다니다 그만 두고 집에서 농삿일을 돌보고 있을 때 부친이 덜컥 중풍에 걸렸습니다. 한약을 달여 먹고 침쟁이가 말을 타고 들락거리는 법석을 떠는 동안에 얼마남지 않은 살림마저 약값으로 다 날아가버리자, 그의 형은 외갓집으로 떠나고 그 역시 집을 뛰쳐 나왔습니다.

주로 전라도 지방을 떠돌아다니면서 포목장사도 하고, 어물장사도 하고, 광산에도 다니던 열여덟 살 소년은 전라도의 멋과 흥에 한껏 빠져버려 장삿일이 신나기만 했습니다.

“전라도 53주를 빠진 데 없이 돌아다니는데, 그기는 막걸리 묵으로 가자꼬 안 하고 북치러 가자꼬 하는 기라. 북 못 치고 소리 한마디 못 하모 막걸리 집에서도 무시받고 한량 축에도 못 드는디가 전라돈 기라. 내 취미에는 딱 맞는 기지. 그래 판소리도 조끔 배우고 북도 조끔 배우고 술도 묵고 하면서 지냈는데, 우째 정이 들었는지 내중에는 마, 떠나기가 싫을 정도인 기라.”

그 떠나기 싫은 전라도를 오 년쯤 떠돌아다니면서 돈도 벌고 한량 놀음도 하면서 지내다가 스물셋이 됐을 때, 고향에 돌아와 하일면 수양리에 사는 김필선 색시에게 장가를 갔습니다.

그 사이에 아버님 병은 차도가 있어서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기에는 아직 힘이 부치는지라, 그는 신혼의 재미를 보기도 전에 다시 돈을 벌러 객지로 나가야했습니다. 삼사 년 동안 장사를 하면서 지내다가 8.15 해방이 되자 그는 고성으로 돌아와서 객지에서 배운 장사 솜씨를 발휘하여 집에다 물건을 들여 놓고 상인들을 데리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해방이 되이까네 일본놈들이 못 하게 해서 못 놀았던 오광대 놀음을 하는데, 우째 좋은지 미치겠능기라. 그래 탈놀음하는 노인들이 있던 고성 경로당에 찾아디니믄서 술도 사고 담배도 사고 물주 노릇을 하믄서 춤도 배우고 장고도 배왔제.”

그를 그토록 '미치게 했던' 오광대 놀음을 놀 때에는 먼저 풍물을 치고 길놀음을 하며 놀이가 벌어지는 마당에 도착합니다. 그 다음 첫째마당인 승무를 추는데 고깔을 쓰고 장삼을 입은 중이 각시를 유인하는 교태스러운 춤을 추면 각시도 요염한 춤으로 맞춤을 춥니다.

출처 : http://www.seelotus.com/gojeon/gojeon/m...-dae.htm

그 다음에 문둥이 광대가 문둥탈과 벙거지를 쓰고 굿거리 장단에 소고춤을 춥니다. 이윤순 명인의 말에 따르면 “부잣집 자식이 모진 병에 걸려서 손이 오그라지고 가슴에 한이 맺혀서 추는 춤인데, 제대로 추면 뼈가 아픈 춤”인 문둥북춤이 끝나면, 상놈 하인인 말뚝이가 양반들에게 모욕을 주며 희롱하다가 같이 어울려 춤을 추는 오광대 마당이 벌어집니다.

출처 : http://ask.nate.com/qna/view.html%3Fn%3D6109594

“집안이 쫄딱 망해 객지로 나와 양반 하는 짓을 보니 속이 끓고, 저도 알고 보면 근본있는 집안 자식이라, 양반 앞에서는 욕을 못 하고 서민들을 모아 놓고 탈을 쓰고 돌려 대면서 양반 욕을 하는” 이 마당은 평소에 서민들의 응어리진 한과 분노를 익살과 해학으로 돌려 치며 뼈있는 웃음과, 푸짐한 욕설과, 재치있는 풍자로 곳곳에 날카로움이 번뜩입니다.

말뚝이에게 놀림을 당한 양반들이 춤을 추고 있을 때에, ‘영노’라고도 하고 ‘비비’라고도 하는 양반 잡아먹는 괴물이 나와 양반을 붙잡고 마음대로 놀려대며 혼을 냅니다.

그 다음에 가정 비극을 탈놀음화한 ‘제밀지 마당’이 벌어집니다. 제밀지라는 젊은 각시와 살림을 차린 영감에게 본각시인 할미가 나타나 질투한 끝에 제밀지가 난 아이를 두고 첩하고 큰마누라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집니다. 할미가 아이를 죽이면, 제밀지도 달려들어 할미를 죽이고, 상도꾼이 할미의 상여를 메고 나갑니다.

출처 : http://www.ogwangdae.or.kr/

이 다섯마당의 놀이를 설흔 명쯤 되는 놀음꾼들이 춤을 추고 풍악을 울리면서 밤새도록 놀 때면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모닥불은 너울거리고, 모두들 신이 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온 몸이 욱신거릴 만큼 흥청댔습니다.

이윤순은 그 흥에 반해서 밥만 먹고 나면 경로당에 가서 장구치고 춤추고, 어떤 때는 기생도 데리고 와서 놀면서 그 속에 푹 파져서 지냈습니다.

“그란데, 다른 거는 다 좋은데 양반들을 놀리니께 양반들이 싫어 하고 광대 놀음 한다꼬 집안 어른들이나 친구들도 무시를 하는 기라. 이 고성이 양반 터가 세서 유림이나 향교 다니는 사람들은 우리를 기생이나 남사당 같은 천민 취급하는 기라. 전라도에서는 광대놀음한다꼬 무시를 안 하는데, 경상도는 마 그기 아닌 기라. 그 애로가 제일로 컷제.”

그래도 천성은 어쩔 수가 없어 그는 장구 잘 치는 정상수 명인에게 장구를 정식으로 배우고, 문둥북춤 잘 추던 홍승낙 명인이나, 승무를 잘 추던 천세봉 명인이나, 장구를 잘 치던 남상국 명인이나, 양반춤을 잘 추던 배갑문 명인이나 말뚝이 춤을 잘 추던 최응두 명인들과 어울려 춤도 배우고 <양산도>나 <육자배기>같은 노래도 배우면서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그러는 한편으로 시조에도 취미를 붙여서 시조회 회원이 되어 전라도 사람 양해식 명인이나, 삼천포 사는 김병용 명인이나, 하동 사는 장남기 명인이나, 함양 사는 김영식 명인과 같은 시조 사범들에게 틈틈이 시조를 배웠습니다.

“시조도 그렇고, 탈놀음도 그렇고, 옛날 어른들 모습을 그려보마 참 옛날 어른들 진멋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구마. 우째 그렇게 잘 만들고 잘 추고 잘 노는지, 누워서 가만히 생각해보마 참 기가 막힌 기라. 그라고 탈도 정신이 맺혀 있어서 슬픈 연기를 하모 꼭 탈이 우는 것 같은 기라. 장구도 그렇제. 그 작은 통 안에 무신 가락이 그리 많이 들었는지 평생을 치도 만족이 없으니...”

그는 노래도 배우고, 춤도 배우고, 악기도 배웠지만 춤은 뼈가 굳어서 그저 흉내내는 데서 그치고 노래는 늦게 배운 시조를 취미정도로 부르는 데서 그쳤습니다. 그러나 장구는 유달리 애착이 가고 솜씨도 뛰어나서 아무도 그를 따를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탈놀음 할 때는 '덧뵈기 가락'과 '굿거리 가락' 두 가지만 쓰이는 단순한 장구 가락이지만 그 간단한 4박 가운데에 무슨 가락이 들어가도 써먹을 수 있는 만큼 칠수록 어렵다고 합니다.

또 춤이나 노래하고 맞아 떨어져야 반주로써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춤과 노래의 속을 샅샅이 알아야 하고, 춤을 빠르게 추면 잔가락을 넣어 주고, 춤이 느리면 잔가락도 줄이고, 춤을 으쓱거리면 장구도 으쓱거리며 궁짝이 맞아야 하니 장구가 없으면 흥이 안나오고 춤을 살리고 죽이는 것이 오로지 장구잽이의 솜씨에 달려있다는 그의 말이 틀림없는 말이겠습니다.

물론 <오광대 탈놈음>의 반주 악기로 장구 말고도 꽹과리나 북이나 징과 같은 타악기 외에 단소와 호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단소와 호적은 불 줄 아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서 빠져버리고 지금은 사물만으로 반주를 합니다.

그 중에 가락을 이끌어가는 것은 꽹과리와 장구인데, 꽹과리는 꽹과리대로, 장구는 장구대로 가락을 엮어 가면서 치고, 춤의 맛을 살리는 데에는 장구 가락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장구만으로 탈놈음이 진행될 수도 있을 만큼 중요한 몫을 차지합니다.

그는 주로 장구를 치며 놀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탈놀음을 하는 것은 돈 버는 일이 아니라, 돈 쓰는 일이어서 장삿일이나 집안 살림이 조금씩 축나기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정상박의 <고성 오광대 대사> 후기에 보면 통영 오광대와 고성 오광대의 놀이판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연희자 자신도 흥이 나는 연기이기 때문에 연희자들이 주동이 되어,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일심계가 한가한 봄철에 모임을 가지게 되면, 밤에 자갈밭에서 오광대 연기를 하고 냇가의 고기를 잡아 국을 끓여 먹으며 하루를 즐긴다고 한다. 이때에는 구경꾼이 많이 모여드는 것은 물론이다. 8.15해방 후 고성 군민들이 오광대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고 흥미있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어 정월 보름과 추석을 기하여 읍내 가야극장과 시민극장에서 연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때엔 입장료를 받았으나 장터나 방내에서 연기할 때에는 비용을 주로 일심계원들이 부담하고 관객은 무료로 구경했다.”

계원들이 스스로 돈을 내고 춤추고 놀며 놀이판을 이어온 덕분에 오광대 놀음은 점점 윤기를 더해가서 1963년에는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게 되었고, 일 년에 한 번씩 서울로 올라가서 덕수궁이나 국립극장에서 공연발표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이윤순 명인도 1967년에 오광대 장구 예능 보유자로 인간 문화재 지정을 받게 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서 1973년에는 청주에서 열린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고, 1974년에는 부산에서 열린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까지 받게 되어 전국에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선배들의 뒤를 이어받아 문둥춤 잘 추는 조용배 명인이나, 승무 잘 추는 박갑준 명인이나, 양반 잘하는 허판세 명인이나, 제밀주를 잘 노는 허현도 명인이나, 말뚝이를 잘 노는 허중복 명인 같은 재주꾼들이 일심으로 모여서 흥겹게 놀아주고, 이윤순 명인과 같은 잽이들이 든든하게 받쳐준 탓에 고성 오광대는 갈수록 인기를 끌어서 전국 경연대회가 열릴 때마다 시범 공연을 다니고 봄이나 가을에 민속촌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읍이나 군의 행사가 있을 때는 반드시 등장하게 되었고, 여름방학 때나 겨울방학 때는 놀음을 배우러 오는 학생들이나 시민들 때문에 전수소 안이 터져나갈 지경이었습니다.

한 가지 흠이라면 공연 수익금이나 국가보조금이 보잘 것이 없어서, 경비 쓰고 나면 남는 게 없고, 생계에 전혀 도움이 안 되니 생업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매달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옛날에는 자기가 미쳐서 돈 쓰고 다니고 먹을 것이 없으면 고구마 먹으면서도 놀았으니, 그것에 비하면 많이 발전한 거라고 애써 좋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게다가 동외동 점촌부락에 번듯한 전수관 건물이 세워져서 체면도 서고 자랑스럽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정작 즐거워하고 좋아해야 할 고성 사람들의 흥미가 점점 시들어 가고 있는 점이라고 아쉬워했습니다.

하도 여러 번 봐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볼거리가 너무 많아서 그런지, 예전처럼 신명나게 구경을 하지 않고 멀거니 서 있다가 돌아가기가 일쑤고, 그나마도 오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대신 서울이나 다른 지방에서 오는 학생들은 점점 그 수나 열기가 더해가고 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고마워. 요새 학생들 장구도 잘 치고 꽹과리도 잘 치고 춤도 잘 추고 놀기도 잘 놀아. 요새는 디스코나 고고나 그런 양춤들을 다 춘다카는데, 탈춤 좋아하는 학생들이 이래 많으니까네 참 든든하제. 내는 회원들이 혹시 양춤을 추더라도 못 하게 말리는데, 그 춤이 풍기문란하고 미풍양속을 해치는 기라. 우리 선조들 노시는 게 얼마나 좋은데 서양놀음을 배우노. 농악이 나오면 산천초목도 춤을 추고, 판소리를 들으마 구절구절이 진 멋이 있고, 춤도 활개치고 추모 그 맵시가 기가 막히고, 옷도 우리 한복이 을매나 멋있는지, 학생들 의상을 입혀서 춤을 추게 하모 옛날 선인들 모습이 우러나오는 기라.”

출처 : http://www.emuseum.go.kr/relic.do%3Fact...3D130880

이렇듯 선인들의 멋에 잔뜩 취해 반평생을 살아온 그도 늙는 게 제일 섧고 한심하다는 생각에 잠겨 지낸다고 한탄했습니다. 좋아하는 술도 젊은 사람들하고는 어울릴 수가 없어 시조를 같이 부르는 늙은 벗들하고나 마시며, 가난하고 외롭게 지내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어느덧 그러한 삶의 서러움과 한이 절절이 배어있는 문둥탈이나 말뚝이탈의 그림자가 짙게 서려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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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남 명인은 ‘농악 장구의 대가’였습니다. 

요즘의 젊은이들에게는 장구가 무척 낯설고 예스러운 악기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우리 음악에 길들여진 시골 사람들에게 장구는 다른 어떤 악기보다도 친근하고 멋스러운 악기로 사랑을 받았습니다. 농촌 사람 치고 장구 한 가락 못 치는 사람이 없을 만큼 우리 민중의 생활 속에 깊이 파고 들어 그들의 흥과 한을 풀어내는 데에 한몫을 단단히 해 온 악기였습니다.

장구는 그 쓰임새가 굉장히 넓어서 궁중 음악인 정악을 비롯해서 산조, 무속 음악, 잡가, 민요, 농악에 이르기까지 두루 쓰입니다. 본디는 서역의 악기였으나 중국의 송나라를 거쳐 고려 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뒤로 우리나라 악기가 되었습니다.

소나무나 오동나무로 만든 울림통의 양쪽에 개가죽이나 말가죽이나 소가죽을 매어 놓고, 대로 만든 채로 그 가죽을 쳐서 소리를 냅니다. 장구의 오른쪽 가죽을 '채편'이라 하고, 왼쪽 가죽을 '북편'이라고 하는데 두 곳의 소리가 서로 다릅니다. 말가죽이나 개가죽으로 만든 채편에서는 밝고 화려한 소리가 나고, 소가죽으로 만든 북편에서는 깊고 무거운 소리가 납니다.

출처 : http://www.topianet.co.kr/topia/4/4u/u4...0002.htm

이렇듯 장구는 우리나라 전통 음악에서 두루 쓰이고 있지만, 장구의 진짜 맛은 농악에서 우러나옵니다. 다른 때는 반주 악기 구실 밖에 못하는 데 농악에서는 꽹과리, 북, 징과 어울려 합주 악기로서 한몫을 단단히 하고, 또 ‘구정놀이’를 할 때는 독주 악기로서 빛을 내기 때문입니다.

구정놀이는 농악을 치는 순서 중에 장구 치는 사람이 혼자 나와 장구를 치면서 이리저리 뛰기도 하고 맵시있게 춤도 추고 솜씨를 자랑하는 것을 말하는데, 신기남 명인은 전라도 지방에서 이 구정놀이의 대가로 꼽혔던 사람입니다.

구정놀이 하는 모습.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GE_CD%3D

정확하고 법도에 맞는 붙임새, 완벽하게 조화된 가락의 이음새, 느릿하게 흘러갈 때는 저절로 춤이 나올 만큼 흥겹게 치다가도 급하게 몰아갈 때는 숨이 가빠올 만큼 격하게 휘몰아치는 표현의 다양함, 이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장구와 함께 살아오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솜씨입니다.

신기남 명인은 전라북도 정읍군 소성면 대용리에서 1914년 1월 6일에 농부인 신봉득의 아홉 남매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려서부터 마을에서 '굿'을 치기만 하면 사족을 못 쓰고 쫓아다녔습니다. 굿은 요즘의 ‘농악’을 일컫는 말인데, 그때는 농악이라고 부르지 않고 ‘풍물’이니 ‘풍장’이니 ‘매구’니 ‘두레’니 하는 말로 불렀습니다.

정월 보름이나 팔월 한가위 같은 명절이 돌아오면 온 마을에 풍물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꽹과리, 장구, 북, 징, 나팔을 든 ‘치배’들이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당산에 올라가서 '당산제'를 지내기도 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복을 빌어 주는 '마당밟기'도 하고, 저녁에는 마을 공터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잽이들의 온갖 재주를 보여 주는 '판굿'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집집마다 굿패들을 한두 사람씩 맡아 옷감을 떠다가 옷을 새로 해 주고, 고깔도 만들어 씌어 주고, 밥 짓고 떡 하고 술을 빚어 굿패들과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먹고 마시며 며칠 동안 노래하고 춤추고 푸짐하게 놀았습니다. 힘겨운 농사일로 피곤한 날들을 보내는 농부들에게 며칠이나마 푸짐하게 먹고 굿패와 더불어 춤추고 노래하는 것은 신명나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때에 역시 가장 신나는 것은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굿패를 따라 다니며 떡도 집어먹고, 술도 훔쳐먹고, 노래도 따라 부르고, 춤도 흉내내어 추어 보며 바쁘게 돌아 다닙니다.

신기남도 그런 아이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농악대의 갖가지 풍물 중에 그는 유달리 장구소리에 넋을 뺏겼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방에서 목침을 몰래 꺼내다가 장구 대신 에깨에 걸머지고 굿판으로 달려가기 일쑤였고, 집에서는 장구소리를 흉내내어 손바닥으로 방바닥이고 마룻바닥이고 솥뚜껑 위고 어디나 두드리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손을 떨면 복이 달아난다고 못하게 말렸습니다. 말로 해서 안 되자 피가 나게 매도 때렸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못된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들에게 장구를 가르치기로 마음먹고, 어느 날 마을에 굿패가 들어왔을 때 전라도에서 설장구로 이름난 김홍집 명인에게 음식과 입성을 대주기로 하고 아들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김홍집은 성질이 불같이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걸핏하면 겨우 열 살밖에 안 된 어린 제자를 때리고 욕하고 벌을 주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요새 세상에 그 개가죽 뚜드리는 법 좀 가르친다고” 매를 때렸다가는 “당장에 장구를 발로 차 버리고 달아나 버릴” 테지만 그는 달아나지 않고 열심히 장구를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정읍에 가지고 있던 땅을 몽땅 팔아 큰아버지가 사는 임실로 이사를 갔는데, 운세가 좋지 않았는지 그 해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농사를 몽땅 망쳤고 아버지는 큰아버지와 낚시질을 한다고 저수지에 갔다가 함께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뒤로 홀로 된 어머니는 올망졸망한 아홉 남매를 먹이고 입히느라 갖은 고생을 다했습니다. 그가 장구를 열심히 배운 데에는 이런 까닭도 있었습니다. “내가 배우지 못 했응게, 긍게 어디 가서 봉급 생활도 못 허고 헝게, 이거라도 열심히 배워서 한국에서 제일인자가 되야서 어머님께 효도를 드려야겄다”는 생각으로 그는 더 열심히 장구를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스물두어살이 되었을 때 김제에서 마을 회관을 세우는 걸립굿에서 장구를 치는데, 구경꾼들이 들어서서 앞에서 치는 김홍집을 제자인 신기남의 뒤에 갖다 세우는 바람에 스승은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를 떴습니다. 그로써 둘은 갈라져서 저마다 다른 굿판으로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오늘날처럼 농악이 시들하지 않고 마을마다 농악이 활발하게 공연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점차로 솜씨좋은 ‘장구잽이’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창극단을 따라 전국을 떠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창극단이 공연을 할 때에는 으레 농악단이 따랐습니다. 먼저 농악대가 나팔을 불고 장구, 꽹과리, 징을 치면 멀리서도 풍물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굿판에 모여들므로 창극단에 농악패가 어울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농악이 ‘앞과장’을 맡아서 사람을 모으고 흥을 돋우어 놓으면 창극이 소리와 극으로 ‘뒷과장’을 맡아서 사람들을 울리고 웃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판소리 명창들이 조직한 창극단에 농악 단원으로 어울려 같이 다니게 되었습니다.

여자 명창인 이화중선이 꾸민 ‘남율 회사’ 에 들어가서는 거의 반 년 동안이나 한반도 곳곳을 순회하고, 일본의 시모노세끼와 만주의 봉천에까지 가서 공연을 했습니다. 또 임방울이나 김연수와 같은 명창들이 만든 창극단을 따라서 전국을 돌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여자들하고 많이 놀았습니다. “여그 가도 각시 저그 가도 각시 천지가 각시여” 라는 말을 얼마쯤 눅여 들어 주더라도 그의 한량스러웠던 몸가짐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그의 바람기 때문에 퍽이나 가슴을 앓았을 터인데도 그의 아내는 이제껏 바가지 한번 긁지 않아 그걸 고맙게 여기는 신 명인은 “이제 와서 다 지내 놓고 나니 그것들은 그때만 쬐께 좋고 늙고 얽고 뻐드러져도 본각시가 제일”이라고 은근히 본각시 자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기남 명인은 제가 뿌리깊은 나무 민중자서전 <어떻게 허먼 똑똑헌 제자 한 놈 두고 죽을꼬?>를 쓰기 위해 만났던 80년대, 임실군 운암면 기암리에 있는 오두막에서 참으로 쓸쓸하게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출처 : http://www.hwbook.com/mart/search.php3%...6p%3D204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입석’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두 시간쯤 산길을 달려가니 임실군 운암면 입석리에 이르더군요. 그곳에서 기암리 가는 길을 물어 삼십분쯤 다시 들길을 걸어가니 지금은 '옥정호'라고 불리는 '운암 저수지'의 한 모서리가 나타나고, 그 저수지 옆길에서 왼쪽으로 접어 들어 조금 걸어가니 열두엇 되는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기슭에 이르렀습니다. 그 마을의 어귀에 서 있는 정자 나무를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담배’라는 간판이 처마 밑 대들보 위에 매달려 있는 초라한 집이 첫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해 예순여덟이던 신기남 명인은 아내와 함께 그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지게를 메고 갈퀴를 지고서 손수 농사를 지어 먹고 나무 등짐을 해다가 불을 때며, 아내는 집안살림이며 농사의 잔일을 도맡아 하면서 고생스럽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기암리는 운암 저수지의 수몰 피해를 입은 수재민들이 모여서 이룬 마을 중의 하나였습니다. 1965년에 운암댐이 완성되어 물이 점차 차들어오자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주민들은 저수지 부근의 고지대로 올라가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신기남 명인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이 썩어 버리고 죽어버린 마을이라고 한탄했습니다. 가난한 산골 생활에 지친 그의 아내는 도시로 나가서 살자고 조르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도시에서 죽으면 공동묘지에나 묻힐 텐데 그 꼴을 어떻게 당하느냐고, 고생스럽더라도 선산이 있는 이곳에서 살다 죽자고 말하며 아내를 달랩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고생스런 산골 생활이 못내 한스러워 서울이나 군산에서 살고 싶은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의 집 비좁은 마당에는 닭장도 있고, 돼지우리도 있고, 소 외양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닭도 없고, 돼지도 없고, 소도 없었습니다. 장마만 지면 논밭이 모두 물속에 잠겨 버리는 통에 애써 농사를 지어 봐야 일 년 양식을 채우기에도 힘겨운 형편이니 닭이니 돼지니 소가 남아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 부부는 농사로 못 채우는 양식을 담배 장사를 해서 채우고 있었습니다. 비좁은 방 한구석에 담배를 쌓아 놓고 ‘풍년초’도 팔고, ‘새마을’도 팔고, ‘환희’도 팔고 있었습니다.

기운이 팔팔하던 이십 년 전만해도 전국 농악 대회의 개인 부문에서 우승을 해서 대통령상을 받기도 하고, 제4회 전국 대사습 대회에서 개인 특기상을 받기도 하며 화려한 세월을 보냈지만 그런 일들도 이제는 먼지 낀 상패와 함께 희미한 옛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고생스런 살림을 하면서도 신기남 명인은 자기에게 장구를 배우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집에서 먹이고 재워 가며 정성스럽게 가르쳤습니다.

배우는 사람 보다 더 열을 내어 농사를 하는 틈틈이 장구통을 차고 앉아 ‘개가죽을 두드렸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하루종일이라도 쭈그리고 앉아 자신의 살아 온 얘기를 들려줄만큼 기운이 팔팔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뒤 제가 두번째 찾아갔을 때, 그는 중풍으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말도 못하고 정신도 못 차리고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병세가 중했는데, 다행히 손발이 마비되는 위험한 고비를 넘겨서 말도 하고 사지도 마음대로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그의 눈은 빛을 잃고 깊게 잠기어 있었으며, 입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가끔씩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남편을 안타까이 바라보는 그의 아내는 ‘장구 귀신이 씌였나 비여’ 하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봄볕이 따가운 어느 날 오후, 서울서 내려온 무례한 손님이 아직 완전히 회복도 하지 못한 병자에게 장구소리를 들려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는 조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벽장 속에서 장구를 꺼내왔습니다. 아내가 장구통을 마루 위에 내려 놓자, 신기남 명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병자답지 않게 익숙하고 재빠른 동작으로 장구통을 자기 앞에 끌어다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침착하게 장구채를 잡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다스름’을 넣었습니다. 장구소리가 제대로 나는지 다스려 보는 것입니다.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서 장구소리를 들어 보더니 점차 힘을 넣어 가락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정기 정기 정 저르르르 저정기 저기 정저르르르 정정 저기저정기 저저정 쿵”

장구가 무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그맣게 속삭이기도 하고,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느릿하게 흥얼거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손을 놀릴 때마다 조그마한 장구통 안에서 온갖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신기남 명인은 자기가 병자라는 것도, 아내가 옆에 서서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것도, 그의 장구 가락을 좋아하는 마을 노인들이 넋을 잃고서 듣고 있는 것도 까마득히 잊은 채 장구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의 장구소리는 '썩어 버리고 죽어 버린' 마을을 맴돌다가 저수지의 푸른 물을 건너 앞산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날이 갈수록 시들어 가는 이 나라 전통 음악의 귀한 가락 하나가 점점 짙어져 가는 산그늘 속으로 스러져 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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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작가의 중앙일보 7월 3일자 인터뷰가 논란을 일으키고 있군요.

그 기사 중 특히 인터넷에 대해 언급한 말들이 네티즌들의 거센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세종시 수정안 부결 문제를 언급하던 중에 이런 말로 포문을 열었습니다.

출처 : http://akdong2k.tistory.com/242

“사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인터넷이다. 인터넷의 ‘쌍방성’에 대해 집단적 오해가 있는 것 같다........쌍방성을 누리는 사람은 극소수다. 대다수는 일방적인 선전 선동의 대상으로만 존재한다.......(그 극소수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소수, 메커니즘을 잘 이용하는 소수다.......흔히 인터넷이 집단지성이라고 표현하는데, 오히려 집단최면이다. 심하게 말하면 집단사기, 집단선동이다.”

그러한 집단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들이) 부메랑을 맞게 될 때 정화 효과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흥기와 패퇴는 상당 부분 인터넷 때문이다. 그가 죽은 이유도 인터넷 때문이라고 본다. 신문 시대였다면 그렇게까지 안 됐다고 본다. 부메랑에 맞은 거라고 생각한다.”

노전대통령의 사망이 인터넷의 부메랑을 맞았기 때문이고, 모두들 그 부메랑을 당해봐야 정화가 될 것이라는 얘기죠. 그런데 그렇게 정화되기를 기다려 왔는데 아직 정화되지 않고 있으니 법적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재 인터넷에 적용되는 모욕죄, 명예훼손죄 등은 만들어질 때의 상황이 지금과 전혀 다르다.......내 경우 인터넷으로 명예가 훼손됐을 때 매번 고소했다면 19번쯤 됐을 거다. 하지만 변호사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대부분 소송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 비용은 비용대로 들고 소송을 통해 받아낼 수 있는 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소송을 하고 싶지만 소송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에 대한 그의 원망은 계속됩니다.

“적대감이 상승하면 적 개념이 확대된다. 예전에는 나하고 직접 치고받은 사람만 적이었다면, 나중에는 내 편에서 함께 싸우지 않고 가만히 있던 사람도 적이 된다.”

이 인터뷰 내용을 종합해보면 그는 네티즌들을 집단사기나 집단최면에 능한 몇몇 극소수의 농간에 놀아나는 어리석은 군중으로 보고 있는 듯 합니다. 그렇게 놀아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적이며, 자기가 당한 만큼 복수를 해서라도 정화시키고 싶은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가 왜 이처럼 인터넷에 대해 적대적 감정을 가진 걸까요?

그는 한국 사회의 대표적 지성인이자 인기소설을 쓰던 소설가로서 오랫동안 최고 문인의 지위를 누려왔습니다. 7, 80년대의 젊은이들은 그가 썼던 수많은 소설들에 열광하고 그 저자를 찬미했습니다. 7,80년대 문인 사이의 진보와 보수 논쟁이 있었지만 그것은 지식인들끼리의 문학적 논쟁이니 그에게 깊은 상처나 증오심을 심어주지는 않았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그를 따르는 수많은 애독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독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책 장례식' 사건 아니었나 추측해 봅니다. 하루아침에 독자들에게 외면 받으며 자신의 책이 불 태워지는 충격적인 사건은 존경받는 소설가였던 그에게는 너무도 견디기 힘든 상처였을 겁니다.

실제로 그는 2004년도에 <신들메를 고쳐매며>란 산문집의 출간을 다룬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 책을 불태운 놈들은 사람도 산채로 땅에 묻을 수 있다”고까지 증오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오늘날의 일부 지식인들을 ‘하류 포퓰리스트(인기영합주의자)’로 규정하고, 인터넷을 ‘타락한 광장’으로 비유했습니다. 그 ‘타락의 광장’을 조종하고 있는 사람들을 '탈레반'에 견주기도 했습니다.

이번의 인터뷰 발언은 그가 여전히 네티즌들에 대해 저주에 가까운 극도의 증오심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본인의 책이 불태워지는 끔찍한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그런 감정에 휩쓸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만을 토대로 인터넷 문화 전체를 집단사기나 집단선동으로 평가하는 것은 너무도 비이성적 발언입니다. 자신의 아픔과 분노는 개인적인 것입니다. 내가 당했다고 모든 네티즌들이 극소수 선동분자들에게 놀아나는 어리석은 군중들이며, 이성적이지 않은 집단최면에 걸린 무리이며, 그들을 끌고 가는 것은 사기꾼들 아니면 선동꾼들이라는 표현은 지나칩니다.

물론 인터넷은 완전한 공간이 아닙니다. 스펨메일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사생활 침해, 인격모독, 명예훼손, 해킹, 온라인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메일, 인터넷 뱅킹, 전자상거래, 블로그, 포털, 메신저, 트위터, 페이스북 등 현대 생활에 필수불가능한 기능과 새로운 소통을 담당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정보화 기술의 발전과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전세계적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입니다.

인터넷은 개방성이 생명입니다. 소수 언론의 정보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대중들이 이제는 수많은 인터넷 매체를 통하여 정보를 얻고, 판단하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네티즌들은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기만 하는 어리석은 군중이 아닙니다. 

독자적으로 정보를 검색하거나 분석하고, 스스로의 생각으로 토론도 하고, 댓글을 달기도 하고, 글이나 동영상을 퍼나르기도 하며 참여를 하는 것이 인터넷 세대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일방적으로 누구의 선동에 끌려 다니는 최면 걸린 군중이 아닙니다.

저도 최근에 인터넷의 세계에 뛰어들어 블로그도 하고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을 하면서 수많은 네티즌들과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서 제가 느낀 것은 너무도 많은 네티즌들이 각각의 영역에서 너무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발견이었습니다.

그들은 극소수의 선전에 놀아나는 우매한 '집단'이 아니라 각자의 지식과 전문성을 가지고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통해서 삶을 풍성하게 가꾸고 자신의 사회적·문화적 욕구를 표현하고 있는 '개인'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들과의 소통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고, 새로운 소통의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들 중에는 저와 의견이 다른 분들도 있었고, 때로는 욕설과 과도한 표현으로 저를 화나게 한 분도 있었지만 그 경험 또한 저의 생각을 되짚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네티즌들 중 이문열씨의 생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 중에 과도한 표현으로 님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의견이 맞는 사람들이 좀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집단적인 목소리를 낼 수도 있었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를 ‘타락한 광장’의 전체주의 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인터넷 문화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발언입니다.

권유하건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의 풍부한 감성과 지성인의 성찰로 디지털 문화를 다시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을 열고 네티즌들과 직접 소통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전히 님을 괴롭히고 있는 '무력감'으로부터 벗어나, 이 시대의 문인으로서 독자들의 사랑을 되찾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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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상여소리꾼 최 명인을 찾아 고향인 전주를 찾았던 80년대, 그가 일하는 <남밭 상여도가>는 풍남문 둑길 안쪽에 허름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호남제일문’ 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풍남문 바로 옆에는 남문 시장이 자리잡고 있고, 그 시장 한켠에 <남밭상여도가>라는 낡은 간판이 붙어 있는 허름한 집이 있었습니다. 
   

 출처 : http://blog.joins.com/media/index.asp%3...Type%3D1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드나들 여유 밖에 없는 작은 문을 지나 네댓개의 돌계단을 걸어 내려가니, 하루종일 햇볕이 들지 않을 것 같은 음침한 집의 복도가 나왔습니다. 눅눅한 습기와 어둑한 그늘이 만들어내는 적막한 분위기가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시장의 소란한 분위기와 너무도 대조적이어서 처음 찾아간 방문객을 무척 당황하게 만드는 그러한 집이었습니다.

최 노인은 평생 동안 그 집에서  죽은 사람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살아 온 할아버지입니다. 사람을 꺼리는 눈매나 표정이 없는 얼굴에 깊게 패어 있는 주름살들에서 예사롭지 않은 그의 삶을 읽을 수 있어서 살아 온 얘기부터 듣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첫마디부터 “이름도 밝힐 수 없고 사진도 찍을 수 없응게 그것부터 약속혀야 얘기를 허겄소”라고 야무지게 말하는 그를 보니 삶의 얘기가 쉽사리 나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선 상여도가에 관한 얘기부터 듣기로 마음먹고 '선바 상여도가'니 '남밭 상여도가'와 같은 이상한 간판 글씨가 무슨 말인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건 간판 쓰는 이가 잘못 써서 그런거요. ‘선바’는 ‘서문 밖’, ‘남밭’은 ‘남문 밖’, 이렇게 써야 맞는디 말 나오는 대로 쓰다 보닝게 그렇게 정해져 버렸지요. ‘서문 밖 상여도가’는 젊은 사람들이나, 병원에서 죽은 시체나, 사고로 죽은 시체들을 파묻어 주고 품삯을 받는 디고 본 상여 일은 여그서 맡고 있지요.”

자기의 신상과 관계없는 걸 물어 보아서 그런지 최 노인의 말투에서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졌습니다. 그는 ‘남밭 상여도가’의 내력을 이것저것 늘어놓았습니다.

“여그가 임경업 장군 자손이 대대로 주인 노릇을 혀 나온 디요. 임경업 장군의 셋째 손이 있었는디 임 장군이 역적으로 몰려서 돌아가시게 되닝가니 먹고 살 것이 없어서 여그로 내려오게 됐답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삼십대를 내려오다가 요 전대에 주인이 바뀌었지요. 그 전에는 터가 워낙 쎄서 임 씨 아니고서는 혀 먹들 못혔지요.”

상두도가라고 부르기도 하는 '상여도가'는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커다란 도회지에는 한 두 개 쯤은 있었던, 요샛말로 부르자면 ‘관인 장의사 조합’이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크고 작은 장례일을 돌봐 주느라고 분주했었을 상여도가는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 생겨난 '영구차'에 밀려서 그 일거리가 점점 줄어들었고, 새로 생겨난 '장의사'들이 상여도가의 역할을 하는 통에 쓸모가 없어져서 하나씩 둘씩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상여도가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들은 나이들어 죽거나, 천대받던 신분을 숨기고 다른 직업을 찾아 떠나 버렸습니다.

최 노인은 임경업 장군의 사당에 얽힌 전설, 임 씨 집안에서 묘를 훌륭하게 써서 그 아들들이 대학교 교수도 하고 고등학교 선생도 한다는 것과 같은 상여도가의 ‘역사’들을 점점 신이 나서 얘기했습니다.

저는 그의 얘기에 신이 오른 틈을 타서, “임 씨 집안 역사도 재미있는데 할아버지의 ‘역사’를 들으면 더 재미있겠다”고 운을 떼었습니다. 그랬더니 최 노인의 얼굴이 갑자기 침울하게 변하더니 목소리에서 힘이 싹 가셨습니다.

“내 살아 나온 역사? 그런 건 들어서 뭐 헐라고요? 모다 쓸데없는 짓이요.”

꼬박 꼬박 존대말을 쓰며 신상 얘기를 물어 볼 때마다 엉뚱한 얘기로 말꼬리를 돌리는 그에게서 툭 터 놓은 삶의 ‘역사’를 듣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고향이요? 여그 전주지요. 근디 내가 네 살 났을 적에 부모가 다 돌아가셔서 아무도 없으닝가니 붙는다는 것이 여그 와서 붙는디 남의 집이 아니라 그전 주인 임 씨네허고 나허고 이종간이라. 이종간이라도 남 한가지지, 자기네는 잘 살고 나는 못 사는디 헐 수가 있간디요.”

최 노인의 할아버지는 비단 장수였습니다.

요새로 말하자면 포목 도매상이었는데, 장사가 잘 되어 돈 궁한 줄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재산을 이어받은 아버지가 ‘삼십륙기’라는 중국 놀음에 빠져서 집안의 재산을 모두 거덜내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최 노인이 네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고, 곧 이어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최 노인은 아버지나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도 못한 채, 거렁뱅이 고아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상여도가에 들어가서 잔심부름을 해 주면서 자라났습니다. 그렇게 10년이 넘게 커 나오는 동안에 여러 가지 상여 일을 손에 익힌 그는 스무살쯤이 되자 한 사람 몫의 일을 맡아 돈을 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벌이는 천헌 벌이라도 돈은 귀엽게 잘 벌려서” 제법 돈푼깨나 손에 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물네살 때 “속 알고 마음 착한 전주 시악시”한테 장가를 갔습니다.

“그때에는 노동자가 장가가기 힘들었어요. 다들 천허게 알어서 딸을 주들 안혔거든요.”

그가 말한 ‘노동자’란 상여도가에서 일을 해 주고 품삯을 버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무당, 백정, 노비, 중, 고리장이, 광대, 기생 들과 함께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천대를 받으며 힘겹게 살아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일 중에서도 가장 궂은 일 곧 죽은 사람의 몸을 거두거나, 뼈를 골라 모으거나, 무덤을 파고 시체를 묻거나, 땅에 묻혀 있는 시체를 다시 파내어 다른 곳에 옮기거나, 상여가 나갈 때에 상여를 메는 일이었습니다. 

출처 : http://blog.jangheung.go.kr/main_board....page%3D6

하는 일이 그토록 궂은 일이었던 만큼 품삯은 다른 노동 보다 많았습니다. 그래서 농촌의 막벌이 일군이나 지게꾼이나 놀음하다가 거덜난 포목 장수들이 상여도가에 눌러앉아 ‘벌어 먹다가’ 돈이 모아지면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최 노인과 같이 오랜 수업 시대를 거친 ‘전문가’는 그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했는데 그런 대우를 받으려면 그만한 솜씨를 지녀야 했습니다. 장례에 관한 모든 범절과 일속을 샅샅이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묘 자리도 지관만큼이나 눈 밝게 보아야 하고, 애기를 밴 채 죽은 부인의 '하문'에 손을 넣어 애기를 꺼내는 일과 같은 특수한 기술도 알아야 합니다. 

“상여 나가는 법이 참 어려운 법이요. 우리 같은 전문가들이 허먼 문제가 없지만, 요새는 그골 풍습대로 계꾼들이 상여를 메기도 허고 친구들이 메기도 허닝게 그 사람들을 연습시켜야 허요. 왜냐? 내 소리를 받아서 ‘어행 어행’ 허던가 ‘어노 어노’ 혀야 되는디 처음 허는 사람들은 맞추기가 힘이 들거든요. 그렇게 출상 전날 밤에 연습을 허기도 허지요.”

출상 전날 밤에 상여를 꾸며 가지고 예행 연습을 하는 것을 ‘대뜨리’ 또는 ‘다드레기’ 또는 '다시래기'라고 합니다. 그것은 떠나려는 영혼을 위안하는 구실도 하고 출상 예행 연습의 구실도 하고 슬픔에 잠긴 상주를 위로하는 구실도 하도록 마련된 풍습인 듯합니다.

“그런디 상여 메는 것만 어려운 게 아니라 사람 죽고 나서 허는 일 모두가 어렵다닝게요. 요새는 모다 쉽게들 허는가 봅디다만 그것은 우리식허고 틀려요. 그런디 제 법대로 허자먼 한이 없으닝게 요새는 될 수 있으먼 돈 안 들이고 간단허게 허지요.”

그 한없이 어려운 ‘우리 식’의 장례법을 '간단하게' 알아 볼까요.

사람이 죽으면 가장 먼저 ‘수족을 거둬서’ 칠성판 위에 뉘어 놓습니다. 그 다음에 죽은 사람의 적삼을 쳐들고 “김해 김 씨(성에 따라서) 복 복 복”하고 소리치면서 지붕 위로 던집니다. 그것을 ‘초혼’이라고 합니다.

노무현 전대통령 <노제> 때의 '초혼' 장면.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3D940100

초혼이 끝나면 대문 앞에 밥과 나물과 짚신과 동전을 내어 놓습니다. 죽은 사람을 데리러 온 저승 사자가 먹을 밥과 신을 신과 차비입니다. 그 다음에 시체의 몸을 씻습니다. 그것을 ‘염’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향나무 삶은 물로 시체를 씻었지만 지금은 향료를 탄 물이나 방부제를 탄 물을 수건이나 솜에 묻혀서 씻습니다. 그 다음에 수의를 입혀서 손을 싸매고, 솜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홑이불로 몸을 싸서 묶습니다. 이것이 ‘소렴’입니다.
 
소렴이 끝난 시체를 관에 옮기는데 먼저 관 밑 바닥에 ‘지금(地衾)’이라는 베를 깔고, 그 위에 베개를 놓고, 시체를 관에 넣습니다. 시체 위에 ‘천금(天衾)’을 덮고 솜이나 백지로 관을 채운 뒤에, 관 뚜껑을 덮고 나무못을 칩니다. 이로써 ‘대렴’이 끝납니다.

대렴이 끝나면 영혼이 의지할 곳이 없어졌으므로 죽은 사람의 사진이나 초상화 곧 ‘영좌’를 모셔 놓습니다. 그 영좌 앞에 제물을 차려 놓고 상복을 입고 제사를 지냅니다. 그것을 ‘성복제’라고 합니다. 성복제가 끝나면 비로소 조문객이 인사를 합니다.

성복한 지 사흘이나, 닷새나, 이레나, 아흐레 만에 상여를 내가는데 요즘은 보통 사흘 만에 내갑니다. 관을 묶는 ‘절관줄’을 일곱매 묶은 다음에 맏상주를 빼놓은 상주들인 ‘복인’들이 양쪽에서 관을 듭니다. 방 네 구석을 돌아나가서 마당에 내어 놓은 뒤에 마당에 내온 관을 상여 위에 올려 놓고 제상을 차립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이 집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받는 제사입니다. 그 제사를 ‘발인제’라고 합니다.

맏상주가 잔을 올리고 모두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면 ‘발인축’을 읽습니다. 동네의 글 잘 하는 사람이나 최 노인과 같은 앞소리꾼이 영혼이 저승질을 편안히 가도록 빌어 주는 ‘영인기가 왕즉유택 재진견례 영결종천’ 이라는 축문을 음률에 맞추어 읽고 나면, 곡이 슬프게 울려 퍼집니다.

그런 다음에 ‘관하아-음 보살’이나 ‘관세으-음 보살’ 이라는 앞소리꾼의 소리를 신호로 해서 상여꾼이 일제히 상여를 멥니다. 앞소리꾼의 지휘에 따라 집을 한 바퀴 돈 다음, 집 정면을 향하여 바로 서서 세 번 울렸다 내렸다 하며 하직 인사를 합니다.

그 다음 앞소리꾼이 상여 소리를 시작하면 상여꾼들이 소리를 받아 후렴을 부르며 집을 나섭니다. 요령을 손에 쥔 앞소리꾼이 요령을 흔들면서 선창을 하면 상여를 메고 가는 상여꾼들이 후렴을 합창하며 걸음을 떼어 놓습니다. 최 노인은 어려서부터 상여도가를 드나드는 유명한 앞소리꾼들과 함께 지내며 그 사람들에게서 대받음으로 소리를 물려받았습니다.

상여 소리는 그 가사나 곡조나 후렴이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고 같은 지방의 소리라고 해도 부르는 사람에 따라서 조금씩 다릅니다. 가사는 주로 인생의 허무함이나 이별의 슬픔이나 저승에서의 복된 삶에 대한 바람을 담고 있고, 때로는 죽은 사람의 이력이나 인품이나 살았을 적에 이룬 업적을 추모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출처 :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3D326756

불쌍하다 이내 일신 인간 하직 망극하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진다고 설워말아
명년 삼월 봄이 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우리 인생 한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북망 산천 돌아갈 제 어찌 할꼬 산심 험로
한정 없난 길이로다 언제 다시 돌아오리
이 세상을 하직하니 불쌍하고 가련하다
.......

상여 소리의 곡조는 대체로 비통하고 애절하기 때문에 소리를 높이 띄워 올려서 통곡하듯이 내지릅니다. 최 노인은 자기가 소리를 내지르면 십리 밖에서도 들린다고 했습니다. 전주를 다녀온 뒤에 한국 방송 공사에서 녹음해 놓은 최 노인의 상여 소리를 들어 보았는데, 그 소리에 어느 앞소리꾼이나 판소리 명창이 따르지 못한 한이 절절이 서려 있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거의 전부를 죽음이 얽혀 있는 곳에서 살아 온 그의 삶을 모르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한이었습니다. 오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그의 비통한 목소리에는 가는 넋을 달래 주고 넋을 떠나 보내는 사람들의 슬픔을 위로해 주는 힘도 깃들어 있었지만, 그보다는 슬픔이 없던 사람까지도 통곡하게 만드는 힘이 더 강하게 깃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죽어서 땅에 묻히는 일이 참 '한심헌' 노릇이거든요. 그렁게 소리도 한심허게 해 줘야지요. 그래야 상주들도 눈물을 빠치고요.”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마는 날 일러 주오
어너 어너 어너리 넘차 어하너
황천 길이 멀다더니
문턱 밑이 황천 길이로구나
어너 어너 어너리 넘차 어허너
먹던 밥그릇 덮어 놓고
먹던 수저 그대로 두고 북망 산천이 웬일인가
어너 어너 어너리 넘차 어하너

하늘로 멀리 퍼져 나가는 상여 소리에 맞춰서 상여가 나아가면 상주들이 통곡을 하며 그 뒤를 따릅니다. 상여 행렬의 맨 앞에는 죽은 사람의 관직이나 본관 성씨를 쓴 ‘명정대’가 서고, 그 뒤에 관을 닦는 데에 쓰는 삼베 헝겊을 매단 ‘공포대’가 따르고, 그 뒤에 무늬를 새긴 널조각을 긴 자루에 매단 ‘운삽’과 ‘불삽’이 따릅니다. 그 뒤에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글을 매단 ‘조기’가 섭니다.

옛날에는 북을 치고 칼춤을 추면서 잡귀를 몰아내는 사람이 그 뒤에 따랐다고 하나 지금은 그것이 없습니다. 상여가 나가다가 가기 어려운 험한 길이나 시냇물을 만나면 행상을 멈춥니다. 그러면 친척들이 앞으로 나와 상여 앞 새끼줄에 돈을 끼워 놓고 절을 하며 어서 가자고 타이릅니다. 돈이 모이는 것을 보고 상여는 다시 움직입니다.

“그거야 다 벌어먹는 풍속으로 그러는 거지요. 호상인디 심심허게 그냥 갈 수가 없다고 버티먼 새끼줄에 돈을 꽂아 주지요. 그 돈을 모아서 술도 먹고 놀음도 허지요. 근디 그런 풍속도 요새는 많이 없어졌어요.” 

행상길의 반쯤을 가게 되면 ‘노제’를 행합니다. 상여를 내려 놓은 다음 그 앞에 돗자리를 깔고, 뒤에는 병풍을 치고, 그릇에 음식을 차려 놓고, 맏상주부터 차례로 잔을 올리고 두 번 절한 다음에 곡을 하며 물러섭니다. 친척이나 친구들도 모두 잔을 올리고 두 번 절하고 나서,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골고루 나눠 먹은 뒤에 다시 행상을 계속합니다.
 

노무현 전대통령 <노제> 장면. 출처 :
http://www.cbs.co.kr/nocut/show.asp%3Fi...D1162108

묘지에 가까운 산기슭에 이르면 앞소리꾼은 상여 소리를 조금 빠르게 하여 일심으로 매겨 줍니다. 상여꾼들도 빠른 박자로 ‘간살 보살, 간살 보살’하고 후렴을 합창합니다.

산에 올라가서 ‘산신제’를 지낸 뒤에는 ‘하관’을 합니다. 상여꾼이 관을 맨 새끼를 푼 다음,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발치를 남쪽으로 향하게 하여 관을 무덤 속에 내려 놓습니다. 관의 뚜껑만 보이도록 옆자리를 흙으로 메우고, 관뚜껑을 공포로 깨끗이 닦은 다음, 관 곁에 운삽과 불삽을 끼어 놓고 관 위에 명정을 덮습니다.

출처 : http://www.110ja.com/sub/plist3_1.htm%3...r_id%3D7

죽은 이의 가족들이옷자락에 흙을 담아 명정 위에 붓고 발치에 가서 곡을 합니다. 그 다음에 일꾼들이 흙을 퍼붓습니다. 흙이 관 자리를 메워 평지와 같게 되면 ‘평토제’를 지냅니다. 평토제가 끝나면 객토로 둥글게 봉분을 만든 뒤에 잔디를 입히고, 발로 밟아 다집니다. 그 다음에 산을 내려와 오던 길을 다시 걸어 상가에 돌아와서, 밥과 술을 먹으며 피로를 풉니다.

이 모든 과정은 지방에 따라서도 다르고, 상갓집 형편에 따라서 더해지기도 하고 덜해지기도 합니다. 더구나 요즘에는 현대적으로 생략되어 간편하게 진행됩니다.

최 노인은 상여소리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이와 같은 장례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골고루 돌봐 주는 일을 해왔습니다.

“요새는 상만 당해 놨지 돈이 많이 있어도 어찌 헐 줄을 몰라요. 이것저것을 다 가르쳐 줘야지요. 그러니 대우는 잘 받지요.”

그런데 대접은 잘 해 주면서도 말을 낮추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더라고 말하며 최 노인은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요새는 별로 그런 사람은 없는디 그래도 촌에 가먼 머리가 깜깜헌 양반들이  ‘허소’를 허지요. 어떤 때는 젊은 사람이 늙은 사람보고 말을 함부로 헌단 말여요. 그럼 그냥 받어 주지요. 왜냐? 돈, 돈 땜에 그 천대를 그냥 받는 거지요. 그런디 만약에 돈도 많이 안 줌서 반말을 허먼 한소리 허지요. ‘니가 뭔디 돈도 적게 줌서 허소를 팽팽허고 방거드러지게 노느냐?’ 허고 한마디 해 준단 말이요.”

천대를 받는 것을 그토록 마음 아파하면서도 그가 평생 동안 다른 직업에 눈을 돌리지 않고 그 일만 해 온 것은 그 일의 돈벌이가 좋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번돈으로 그는 널따란 집을 장만하고 아이들의 공부도 시켰습니다. 그 아들들이 장성해서 지금은 좋은 일자리에서 ‘대우받음서’ 살고 있습니다.

그토록 자랑스러운 자수성가를 하기까지 꾸준히 주검만을 돌보며 살아 온 그는 자기 죽음에 대한 준비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완주군 이서면 삼태동에 좋은 자리를 골라 충청도에서 하는 식으로 미리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고 햇습니다.

“외로와요. 내 앞에 있던 사람은 모다 죽고 나 혼자뿐이요. 내가 여그 앉어 있으먼 내 앞에서 담배 필 수도 없고 말벗도 안 되닝게 모다 나가 버려요. 일 나갈 때도 재미가 없고 놀 때도 재미가 없어요.
집에 가도 마찬가지요. 큰며느리는 학교 교사라고 나가서 없고, 나는 방에서 혼자 살어요. 마누라허고도 딴 방을 쓰지요. 늙은이들 끼리 등어리도 긁어 줌서 재미있게 지낼래도 자식들이 숭을 볼까 봐서 한 십년 넘게 딴방을 써요.
자식들은 일허지 말고 놀라고 허는디 말로만 그러지 용돈을 많이 주들 안 혀요. 그러고 내가 번 돈으로 반찬도 사 가고, 손자들 먹을 것도 사 가고, 그런 재미가 있응게 그냥 노느니 여그나와 있는 거지요. 그렇게 고생인지 설움인지 모르고 지내요.”

최 노인은 끝까지 이름 밝히기와 사진 찍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자식들이 모두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자기 아버지가 그런 ‘천한 벌이’를 했다고 세상에 알려지면 좋을 게 있겠느냐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저는 그 대신에 상여소리나 들려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자 그는 사람들이 “싫어허닝게” 큰 소리로 할 수 없다고 하며 소리를 죽여서 몇 마디의 상여소리를 들려 주었습니다.

“못 오시네 못 오시네
한번 가면 못 오시네
인생 아차 죽어지면
육진장포 일곱매를
상하로 질끈 동여매어
북망산천을 돌아들 적
송죽으로 울을 삼고
두견 접동 벗이 되어
산은 첩첩 밤은 깊은디
처량헌 게 인생 넋이로구나
세월아 세월아 오고 가지를 말어라
아까운 이내 운명 마지막 간다.”

최 노인과 작별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거리에 진눈개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질척거리는 시장길을 빠져나와 한벽루 쪽으로 난 전주천 둑길을 걸었습니다.

어둠에 덮인 전주천 물을 바라보는 저의 귀에는 최 노인이 남의 귀를 꺼려 속삭이듯이 들려 준 상여 소리가 끈질기게 맴돌고 있었습니다. 어느 곳에도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지만 제게는 어느 명인명창보다도 소중한 또 한 사람의 명인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최 노인은 제게는 '최 명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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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이크, 하나 둘 이크.” 구령 소리가 매우 익살맞습니다.

구령에 맞추어 팔을 가슴 앞에서 휘휘 저어 대고, 한 발을 앞으로 쑥 내딛었다가 뒤로 살짝 거두면서 허리를 가볍게 돌리는 몸짓은 영락없는 춤입니다. 무서운 느낌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흥겹기까지 합니다.

두 사람이 마주 서서 한동안 그렇게 굼실대더니, 갑자기 한 사람이 발로 상대의 아랫배 근처를 내지릅니다. 공격을 받은 쪽은 휘휘 젓던 손으로 발을 탁 쳐내고, 자신의 발로 공격한 쪽의 얼굴을 원을 그리며 후려찹니다. 그러나 그 공격도 상대가 슬쩍 몸을 비키는 통에 헛발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역습을 당한 쪽은 틈새를 노려 왼발로 상대의 왼다리 안쪽을 차내어 낚시를 걸어 보지만, 상대는 발을 들어 오히려 상대에게 '딴죽'을 겁니다.

점점 거세어지고 날카로워지는 동작들을 보고 있으려니 흥겹던 기분이 싹 가시고 온몸에 긴장이 감돕니다. 춤사위 같던 손놀림-‘활개짓’- 이 먹이를 덮치는 맹수의 앞발처럼 매서웁고, 우스꽝스럽던 발의 움직임-‘품밟기’- 이 위험을 눈치 챈 학의 걸음처럼 신중합니다.

출처 : http://www.co-op.or.kr/data/coopnews2.h...o%3D1363

연습복에 땀이 흥건히 배이도록 승부를 내지 못하고, 빈틈을 찾으려고 노려보며 빙빙 도는 두 선수는 충주에 있는 ‘한국정통 무술 태껸 도장’의 관원들이었습니다.

관장인 신승(본명 신한승) 명인은 가무잡잡한 살결에 부리부리한 눈과 네모진 얼굴이 생김새부터 영락없이 무술가로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연신 제자들을 불러내어 둘씩 짝지어 겨루게 해 놓고, 저것은 무슨 기술 저것은 무슨 차기 하며 태껸 동작을 설명하는데 어찌나 열심히 얘기를 하는지 정작 시합을 하는 제자들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듯 싶었습니다. 

지금은 태껸이 많이 알려졌지만 제가 신승 명인을 만났던 80년대만 해도 태껸은 낯선 이름이었습니다. 칠순, 팔순이 넘은 노인들도 잘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어렸을 때에 태껸을 보았다는 노인들은 여럿 있었지만 직접 배운 사람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서울 서대문구 사직골에 사는 송덕기 명인과, 반포 아파트에 사는 김홍식 명인과 이들에게서 태껸을 전수받은 몇몇의 무술가와 함께 신승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송덕기 명인은 열너댓살 쯤에 스물아홉살 난 임호라는 사람에게 사직골 뒷산 잔디밭에서 태껸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가 태껸을 배울 때만 해도 서울의 사직골, 삼청동, 애오개와 같은 곳에 태껸꾼들이 많이 있어서 단오날이면 서로 이웃 마을 태껸꾼들과 솜씨를 겨루었다고 합니다.

고의 적삼에 솜버선을 신고 뒷산 잔디밭이나 개천 모래밭에서 연습도 하고 겨루기도 했으므로 특별한 도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한일 합방이 되자 일본 순사들이 태껸꾼을 모조리 잡아가는 통에 태껸을 하다가도 순사가 오면 와르르 달아났다가 다시 모여서 배우곤 하느라고 스승한테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평생 남하고 싸움 한 번 못했지만 팔순 나이에도 젊은 사람 한둘쯤은 움쩍도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그는 돋보기를 끼지 않고 신문을 보며 오십 년을 계속해 오는 활쏘기를 하려고 아침마다 활터인 황학정에 오를만큼 정정하게 사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송덕기 명인의 태껸.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00155937

김홍식 명인은 세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도 스물 남짓한 젊은 시절에 태껸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때의 서울은 웃대와 아랫대가 엄격히 구별 되어 있었고, 문안과 문밖 끼리도 구별이 엄했다고 합니다. 웃대는 인왕산 아래 쪽 곧 대궐에 가까운 쪽을 일컫는 말이었고 아랫대는 청계천 건너 쪽이며, 문안은 서울을 둘러싼 성문의 안 쪽이고 문밖은 그 바깥 쪽을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웃대는 주로 벼슬아치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세도가 대단해서 이것이 늘 불만인 아랫대 젊은이들이 가끔 웃대의 젊은이들에게 시비를 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웃대에서 태껸꾼들을 모아 아랫대에 시합을 청하게 되어 서로 시합을 벌였다는 겁니다. 

평상적인 시합을 할 때에는 ‘서기 태껸’이라고 해서 먼저 넘어지는 사람이 지는 것으로 승부를 겨루지만, 동네 사이의 감정이 나쁠 때에는 ‘결연 태껸’을 했다고 합니다. 결연 태껸은 서로 겨루다가 사람이 죽게 되어도 살인죄로 치지 않는다는 서약 아래 행하여지는 무서운 싸움이라고 합니다.

결연 태껸을 할 때 쓰던 기술은 잘못 쓰면 위험하기 때문에 비법으로 전해져서 여간해서는 배울 수 없었다고 합니다. 동네끼리 실력을 겨루는 무술로는 태껸말고도 씨름이나 활쏘기나 편싸움이 있었는데, 김홍식 노인은 어려서부터 즐겨 그런 무술들을 배워 겨루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그때 이름 높은 태껸꾼으로 박무경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구리팔개’라는 별명으로 불리었고 힘이 천하장사여서 그가 나타나면 상대편 사람들이 모두 도망쳤다고 합니다. 또 어떤 때는 문밖의 사람들이 도전해 오기도 했는데, 그런 경우엔 웃대와 아랫대가 한편이 되어 그들과 겨루었다고 합니다.

김홍식 명인은 여러 태껸꾼에게서 배웠는데 그때의 가르침이란 것이 그저 남이 하는 기술을 보고 혼자 흉내를 내고 있으면 오다가다 귀띔으로 일러 주는 정도라 깊은 기술은 배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잘하는 사람들 하는 걸 보면 무서웠어. 담장이고 뭐고 휙휙 날랐지. 두발로 휙 떠서 가슴을 차고 땅에 떨어지지 않고서 그 다음 사람을 찼으니까. 하지만 난 조금 밖에 못 배웠어. 첫째로 부모님이 죽어라 말리시는 걸. 건달들이나 하는 짓이라서... 게다가 일본놈들이 태껸한다 하면 모두 잡아다 죽였거든. 그래서 헐 수 없이 유도를 했지.”

어린애같이 흥겨워하면서 얘기를 하는 김홍식 명인은 숨이 가빠지는 것도 무릅쓰고 몸을 놀려 본을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태껸 고수의 솜씨. 출처 : http://koreanclicks.com/do-you-know/tae...5BB%25B8

신승 명인은 위의 두 명인에게 태껸을 배워 끊어지려던 태껸의 대를 이은 사람입니다. 

그는 1928년에 태어나 서울 왕십리에서 자랐는데,  경기도 연천군에 살던 작은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면 으레 태껸꾼들이 몇 사람씩 묵고 있어서 그들이 연습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작은 할아버지 신재희씨는 오백석이 넘는 부자로 활쏘기나 씨름 같은 걸 좋아해서 이름난 씨름꾼이나 반건달 같은 패거리들이 늘 그의 집 사랑방에 묵고 있었답니다.

그들 가운데 태껸꾼들도 일고여덟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 이씨, 김씨라고 불리던 두 사람의 실력이 가장 나았다고 합니다. 신승은 어린 마음에 노인네들이 발길질이나 하고 건달처럼 노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태껸꾼을 좋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래도 그 집에 가게 되면 자연히 구경을 하게 되어 가끔 흉내를 내보기는 했는데, 별스런 정성으로 한 것이 아니니 그저 어린아이의 장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구한말 어린이들의 태껸 사진. 출처 :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s...eSn%3D21

그러다가 그가 중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에 전쟁이 한창 치열해져서 학생 지원병을 모집했습니다. 그는 소년 전차병으로 지원해서 특별 휴가를 얻어 연천에 있는 작은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여름을 보낼 때 강가 백사장에서 오십쯤 된 중년들이 젊은이들을 차 넘기며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을 보고 슬며시 흥미가 당겨 조금씩 배워 보았습니다. 동작을 흉내내어 혼자 연습하고 있으면 오다가다 보고서 몸을 더 가라앉히라느니 발은 그렇게 차는 게 아니라느니 하며 한마디씩 귀띔으로 일러 주는 식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배우다 보니 웬만큼 태껸의 동작이 몸에 익을 만하게 되었는데, 그 뒤에 해방이 되고 서울에 돌아오게 되면서부터 태껸보다 레슬링에 열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스물아홉살이 되던 해에는 멜보른 올림픽의 후보 선수까지 되었다가 최종 선발 시합에서 고배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 레슬링을 그만두고 유도를 시작했는데, 그의 나이 마흔살쯤이 되었을 때에 어린 시절에 봤던 태껸을 찾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틈틈이 수소문하여 태껸을 했다는 사람들을 만나 보았으나 어렸을 때 본 동작이 아니라서 실망만 하고 있던 중, 신문에 실린 송덕기 명인의 기사를 읽고 서울로 찾아가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970년 초봄 무렵이었습니다. 송명인은 그의 끈질긴 간청에 못 이겨 봄 가을에 두어달씩 아침마다 활터 뒷산에서 동작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신승 명인의 태껸 시범. 출처 : http://www.cbinews.co.kr/news/quickView...%3D39750

그렇게 삼 년 쯤을 배운 뒤에 신승은 자신이 살고 있던 충주시에 도장을 내고 가르쳐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어달 배운 뒤에는 관원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이 태껸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고심을 하고 있던 터에 김홍식 명인을 만났더니 시대가 달라져서 태껸을 옛날 식으로 가르치면 아무도 배우려 들지 않을 테니, 처음에는 기본기를 모아서 가르치고 어려운 기술은 기본기를 익힌 다음에 가르쳐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태껸의 동작 가운데 기본이 될 만한 동작 스물다섯 가지를 기본 기술로 삼아 아이들에게 쉬운 동작부터 순서대로 가르쳐 보았더니 훨씬 빨리 배워 나갔습니다.

우선 서는 자세를 원품, 좌품, 우품으로 나누고, 발을 이리저리 옮기며 몸을 굽실대고 허리를 능청거리는 '품밟기'를 익숙해질 때까지 익히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 손을 앞 가슴 근처에서 위-아래 또는 양 옆으로 원을 그리며 저어 대는 '활개짓'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발 기술을 익히도록 하였습니다. 발장심으로 상대의 무릎을 차는 '깍음다리', 발등으로 상대의 발뒤꿈치를 바깥 쪽으로 잡아채어 뒤로 넘어지게 하는 '낚시걸이', 발장심으로 옆구리를 차는 '곁치기', 명치를 차는 '명치기', 발바닥으로 따귀를 때리는 '발따귀', 차 들어오는 상대의 발등을 발바닥으로 막는 '발등걸이', 발오금으로 상대의 발오금을 걸어 뒤로 넘기는 '딴죽', 그 밖에도 '얼렁발질', '돌개치기', '두발낭상', '깨끔다리' 따위의 다리 기술, 그 다음에 태껸에서 쓰는 손 기술로 엄지와 검지를 벌려 상대의 목을 쳐내는 '칼재비' 등도 익히게 하였습니다.

그런 기술들을 익히게 한 다음, 약속된 동작으로 마주 서서 겨루는 '마주걸이'를 익히게 한 뒤, 익숙해지면 약속없이 겨루는 '맞서기'를 익히도록 했습니다.

그러자니 자연히 급수도 매겨 줘야 했는데, 급수의 이름도 고유한 말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다른 무술에서 '급'이라 부르는 것을 ‘째’라고 정하고 '단'이라고 부르는 것을 ‘동’이라고 했습니다.

째는 첫째, 둘째 할 때의 째에서 빌어 왔고 동은 윷놀이에서 말이 모두 빠져 나왔을 때에 '한 동 났다', '두 동 났다'고 하는 말에서 따왔습니다. 그 이름을 정하는 데에도 송 명인과 김 명인과 상의하고 한글학자와도 상의하느라고 여간 힘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큰 어려움은 '태껸'이라는 이름을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남아 있는 문헌에 그 이름이 저마다 다르게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한글 학회에서 펴낸 <우리말 큰 사전>에는 ‘태껸’ 또는 ‘택견’이라 적혀 있습니다. 그 풀이를 보면 ‘한 발로 서로 맞은 편 사람의 다리를 차서 넘어뜨리는 경기’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먼저 나온 조선 총독부에서 펴낸 <조선어 대사전>에는 ‘택견’이라 해 놓고 ‘한쪽 발로 서로 넘어뜨리는 유희’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그보다 좀더 오랜 문헌으로 구한말의 시인인 최영년이 쓴 <해독죽지>라는 시집 속에 ‘탁견희’라는 제목을 가진 한시가 있습니다.

다리를 놀려 백 가지 기예를 겨루고
가벼이 날아 올라 상투 끝도 스치며
꽃다움을 다투니 저게 바로 풍류일세
상투머리 차 내리면 의기가 볼 만하네.

그 시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이 딸려 있습니다.

“옛 적에 다리를 놀리는 기술이 세속에 전해져 왔는데, 서로 마주 보고 서서 한쪽을 차서 넘어뜨리는 기술이었다. 그 솜씨로 봐서 셋으로 나누었는데 솜씨가 좋지 못한 사람은 다리를 찼고, 솜씨가 좋은 사람은 손으로 어깨를 밀쳤다. 솜씨가 훌륭해서 다리의 놀림이 날랜 사람은 상투를 차서 떨어뜨렸다. 이런 기술을 서로 겨루어 원수를 갚기도 하고 좋아하는 여자를 빼앗는 내기를 하기도 하니 관에서 이름 금하게 되었다. 그 뒤로 지금은 그 기술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이름을 탁견이라 한다.”

‘탁견’, ‘태껸’, ‘택견’ 중 이글에서는 최근에 가장 널리 쓰이는 '태껸'을 선택습니다. 몇십년 전까지 전해 오던 기예가 이렇듯 이름조차 종잡을 수 없을 만큼 갑자기 그 자취를 감추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태껸이 건달이나 한량패들의 기예이고 관에서 금하니 드러내 놓고 남을 가르치거나 남에게 배울 수가 없었던 터에, 일본의 무술인 탄압 정책으로 그나마 간신히 이어 오던 맥이 끓길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니 백 가지가 넘는다는 표현이 좀 과장된 말이라고는 해도 옛날에는 좀 더 많은 기술이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남아 있는 기술로써는 태껸의 온전한 모습을 알아내기가 힘이 듭니다.

맨손 무술에 관한 오래된 기록으로 고구려 산상왕 때에 만들어진 환도성 각저 무덤의 벽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웃통을 벗은 채로 한 손을 앞으로 내밀고 발을 낮추고 서서 서로 겨루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은 보는 이에 따라 씨름이라고도 하고 태권도라고도 하고 태껸이라고도 하니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출처 : http://ask.nate.com/qna/view.html%3Fn%3D6193252

그 뒤 고려 충혜왕 때에 ‘수박희’ 또는 ‘권법’이라는 무술이 유행하여 왕이 상춘정에 늘 나와 그것을 구경하니 수박희를 전문으로 개설하였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조선 왕조 실록>과 정조 때에 집대성 된 무술책인 <무예 도보 통지>에도 권박, 상박, 권법 따위의 여러 이름으로 수박희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그 수박희가 태껸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수박희를 우리 말로 '수벽치기'라고 하는데 손을 주로 쓰는 기술인 듯 합니다.

<조선 무사 영웅전>을 쓴 안자산은 수박희를 설명하는 글 중에 “근래에도 청년들이 씨름과 다른 수박희를 행함이 있던 바, 소위 택견이라 하는 것이 그 종류다.” 라고 하여 수박희와 태껸을 같은 종류로 보고 있으나, 수박희의 그림과 설명이 들어 있는 <무예 도보 통지>를 보면 수박희는 그 모습이 태껸과 다른 점이 많고, 오히려 중국 권법에 가깝습니다.
역사가 신채호는 <조선 상고사>에 고구려 무사들이 연마하던 무예를 설명하면서, “혹 칼로 춤도 추며, 혹 활도 쏘며, 혹 깨끔질도 하며, 혹 태껸도 하며, 혹 강물을 깨고 물 속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며...” 라고 적어 고구려 때에 태껸을 했다고 설명했고 고려 때의 무예에 관한 글에서는, “공도의 수박희 곧 선비 경기의 일부분이니 수박이 중국에 들어가 권법이 되고 일본에 건너가 유도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기록을 찾아 보면 태껸보다 수박희가 더 자주 나오는데 정작 수박희는 그 기술이 끊겨서 전혀 모습을 알 수 없고, 태껸만이 희미하나마 전해져 온 점입니다.

또 이상한 일은 태껸을 보았다는 사람이나 했다는 사람이 모두 서울 사람인 점입니다. 시골에서는 태껸을 보았다는 사람도, 했다는 사람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욱더 이상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태껸'과 '태권도'를 혼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태껸과 태권도는 문외환이 보아도 다른 성질을 가진 무술임이 확실합니다. 잠깐 비교해 보면 태권도에는 공격과 방어의 일정한 모양세를 갖춘 '형'이라는 것이 있지만, 태껸에는 형이 없습니다. '형'과 비슷한 것으로 ‘본’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것은 틀에 박힌 공격과 방어의 형이 아니라 태껸꾼이 자기가 가진 기술 중에서 몇 가지 기술을 상대에게 보여 실력을 과시할 때 쓰는 것으로 그렇게 하는 것을 ‘본때를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더 다른 점은 태권도는 동작의 기본을 직선에 두고 맺고 끊는 것이 명확하지만, 태껸은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동작의 기본을 원에 둡니다. 또 태껸은 중국의 '쿵후'와도 달라 동작이 길게 흐르지 않고 순간의 탄력을 중요하게 여기며, 쿵후에서 자주 쓰이는 주먹쓰기가 없습니다.

태권도의 동작. 출처 : http://ask.nate.com/qna/view.html%3Fn%3D6146595

중국과 한국과 일본의 세 나라 무술이 서로 주위 무술의 영향을 받아 조금씩 변했으리라고는 짐작할 수 있지만 그래도 동작의 기본만은 쉽사리 변해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태껸이 우리의 고유한 몸짓을 지니고 있는 무술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신기한 기술, 오묘한 기술이란 것이 별 게 아니라 사실은 모두 기본 기술에서 나오는 것 아닙니까? 지금 태껸의 깊은 기술이 끊어졌다고 하지만 깊은 기술만 남고 기본 기술이 끊어진 것 보다는 차라리 잘 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현대의 무술은 옛날 무술과 달라서 경기가 되어야 합니다. 지붕을 날고 담을 뛰어넘는 오묘한 기술보다는 기본되는 기술을 널리 보급해서 청소년들의 몸과 마음을 건전하게 기르는 경기의 모양으로 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는 뒷날에 판단이 되겠지만 지금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태극기 하나만 덩그렇게 걸려 있는 시멘트 건물에서 땀을 흘리며 수련하고 있는 스물 남짓한 제자들을 바라보며 그가 하는 말이었습니다. 한달에 오백원씩 건물 사용료도 되지 않는 회비를 받는다는 그는 그나마도 안 받으면 애들이 시시하게 알고 오지도 않는다고 하며 쓸쓸해 했습니다.

송덕기 명인, 신승 명인과 그의 제자 정경화.
출처 : http://issue.media.daum.net/culture/091...%3Dsegye

그는 그 뒤로도 열정을 다 바쳐 태껸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그 결과 1983년에 태껸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송덕기 명인과 함께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 뒤에도 그는 1987년에 이 세상을 뜰 때까지 태껸의 보급과 후진양성에 진력했습니다. 그 덕에 충주에 <태껸전수관>이 건립되고 1998년부터 해마다 10월에 <세계무술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태껸은 그가 아니었으면 사라지고 말았을 겁니다. 신승 명인은 근대 태껸의 마지막 전승자였으며, 태껸 정립의 외로운 길에 평생을 바친 현대 태껸의 중시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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