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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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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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에 해당되는 글 15건

  1. 2010.06.29
    신화와 예술과 영감의 젖줄, 인도 여행기 (18)
  2. 2010.06.28
    대만 고산족 원주민 마을 원정기 (17)
  3. 2010.06.26
    이 시대 문화예술인들의 화두, 김제동 (35)
  4. 2010.06.24
    담백하고 깊은 경기민요의 멋, 묵계월 명창 (6)
  5. 2010.06.21
    '산유화'로 맺어진 민요 인생, 박홍남 명인 (6)
  6. 2010.06.19
    이 무슨 해괴한 '전쟁 시나리오' 공모인가? (29)
  7. 2010.06.18
    '집단 사고의 덫'에 빠진 지성의 추락이여 (23)
  8. 2010.06.16
    이 구슬픈 혼의 소리, 상여소리꾼 윤만식 (7)
  9. 2010.06.14
    나를 '광대'라 부르지 마라, 정광수 명창 (2)
  10. 2010.06.12
    배를 띄운 민심은 배를 엎어버리기도 한다 (15)
  11. 2010.06.10
    강원도의 흥, 한, 멋, '정선 아라리' 최봉출 명창 (9)
  12. 2010.06.08
    오기로 버틴 판소리 외길, 한승호 명창 (7)
  13. 2010.06.06
    우리 가슴에 불 지른 위대한 스님, 문수여! (15)
  14. 2010.06.04
    6.2선거, 분노한 ‘침묵의 다수’가 승리했다 (29)
  15. 2010.06.03
    '진주 검무'에 서린 논개의 혼, 성계옥 명무 (11)

지난 주에 대만의 고산족 마을과 인도 뉴델리를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초청 공연을 위한 사전 답사 여행이었습니다. '대만편'에 이어 '인도편'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인도!
나의 성씨인 김해김씨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후가 태어난 곳!
신라승 혜초가 1300년 전 4년 동안 외로운 구도의 여행을 한 뒤 <왕 오천축국전(往 五天竺國傳)>이란 불후의 여행기를 남긴 곳! 
성경의 15배나 되는 인류 최고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가 이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해 내려 오는 곳!
젊은 시절부터 너무도 가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뒤늦게 인연이 닿아 중년의 황혼기에 찾게 된 곳!
수많은 시인들과 철학자들과 예술가들과 명상가들에게 영감의 젖줄을 제공해 주는 곳!
 
오래 전부터 인도의 신화와 음악과 예술에 심취되어 있던 저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타이페이 공항에서 델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타이페이에서 홍콩을 경유, 델리 공항까지 거의 10시간 넘게 비행기 안에 갇혀 있다가 공항밖으로 나오니 무더운 열대의 공기가 확 밀려 들더군요. 하지만 건기라서 그런지 후덥지근하지 않아 오히려 따끈하고 포근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밤중에 도착했기 때문에 호텔에 짐을 풀고 바로 잠을 잤습니다.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호텔 방 밖으로 뉴델리의 나즈막한 시내 풍경이 이국적으로 펼쳐지더군요.
 


둘째날은 하루 종일 뉴델리 시내의 여기저기를 다니며 문화탐방을 했습니다. 먼저 뉴델리를 방문한 사람들은 반드시 둘러보고 간다는 '인디아 게이트'로 향했습니다. 2차 대전 때의 전몰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 놓았다는 인디아 게이트는 한창 보수 공사 중이더군요.


주변에 널찍한 공원이 펼쳐져 있는 인디아 게이트에서 직선으로 연결된 도로 끝에 대통령 관저와 국회의사당과 정부 청사등 여러 관공서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저는 권위적인 그 건물들보다도 공원 여기저기에서 물건도 팔고 구경도 하는 남루한 서민들의 모습에 눈길이 가더군요.



현대와 전통, 가난과 부유함, 흙먼지와 최첨단 산업 등 극과 극이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는 오늘날의 인도는 거센 변화의 용트림을 틀고 있는 거대한 용광로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 장터에서도 볼 수 있었던 '신기료 장수'가 앉아 있는 골목 바로 뒤에 멋진 현대식 디자인으로 지어진 국립현대미술관이 서 있었습니다. 마침 수백 년 전의 전통 민화에서 근현대 작가의 작품들까지 한 눈에 펼쳐 놓은 '인도 회화의 흐름전'이 전시되고 있더군요. 한 작품 한 작품이 매우 독특하고 처음 보는 작품들이어서 오랫만에 눈이 호강을 했습니다.   



점심으로 아담한 인도식 식당에서 북인도식 전통 음식을 먹었습니다. 의외로 음식이 맛깔스럽고 소스도 우리 입맛에 잘 맞더군요. 식당 안의 손님들이 모두 음식을 손으로 먹길래 우리도 문화 체험을 위해 손가락으로 먹어 보았는데 의외로 맛있었습니다. 옛날 우리 엄마들이 김치 가닥을 손으로 쭉쭉 찢어 밥에 얹어 먹던 맛이 바로 이런 맛 아닐까요?



혼잡한 시간에 자동차로 시내를 오고가다보니 인도의 차도는 차선이 거의 지켜지지 않더군요. 사람과 자전거와 모바일차와 자동차가 서로 엉켜서 다니는 통에 끼어들기는 보통이고, 차선 외의 길로도 사정없이 비켜 가고, 심지어 어떤 차는 반대 차선을 넘어 역주행도 서슴치 않더군요. 처음에는 가슴이 덜컹거리며 겁이 났지만, 그게 인도의 자동차 문화라니 빨리 적응하는 길밖에는 방법이 없을 듯해서 될 수 있으면 창밖을 보지 않고 얘기를 나누며 <국립 연극원>에 당도했습니다.



외국인들까지 포함해서 전국에서 모여 든 학생들이 거의 국비와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니고, 졸업생들이 대부분 유명한 배우나 연출가로 활동하기 때문에 학생들의 학교에 대한 긍지가 대단하다는군요. 방학 중인데도 학교 교정 한쪽에서 땀흘리며 연습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니, 문득 방학도 미팅도 데이트도 없이 연극에 미쳐 보낸 제 대학 시절이 그리워지더군요.  



국립 연극원과 바로 한 건물처럼 이어져 있는 <국립 까탁 무용원>을 둘러봤습니다.



마침 안내 겸 통역을 해주시는 김은정씨가 그 무용원에서 10여년 간 인도의 전통 춤을 공부하고 계시는 분이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또 우리가 초청하려는 예술가들이 바로 '까탁 춤'의 대가들이기 때문에 사전 조사 차원에서 대단히 유익했습니다.

‘까탁Kathak’은  ‘까타’라고도 하는데 ‘이야기꾼’이라는 뜻입니다. 수많은 인도의 전통 무용 중에서 독특하게도 이야기와 무용이 함께 어울어져서 즉흥적으로 연희되는 춤입니다.
먼 옛날 힌두사원에서 <마하바라타>나 <라마야나>와 같은 힌두신들의 서사시를 소리꾼이 옆에서 노래를 하며 이야기를 낭송하면 음악가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무용가는 그 내용에 맞는 몸짓으로 그 긴 이야기를 표현했는데, 수천 년 내려오는 동안 그 몸짓 하나하나가 매우 정교하고 상징적으로 다듬어져서 몸으로 이야기가 가능한 상태까지 된 것입니다.



고목이 늘어 서 있는 까탁 무용원의 교정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남녀 무용수들의 모습이 무척 정겹게 보였습니다. 



김은정씨의 안내로 저녁에는 <젊은 무용수의 밤(A Young Dancer's Festival)> 공연을 봤습니다.



몇몇 유파의 무용 명인에게 배운 제자 중 가장 뛰어 난 젊은 제자들에게 발표 기회를 주고, 앞으로의 대성을 위헤 마련한 공연인 듯 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인도의 모든 극장은 '무조건 무료'라는 겁니다. 티켓을 살 필요도 없고, 예매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극장에 가서 아무데나 앉아서 보고 오면 된다니 신기한 일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연이나 돈이 많이 드는 공연도 일종의 공연진흥센터 같은 데서 지원을 해서 무료로 공연한다니, 인도의 경제력을 볼 때 그 예산의 규모와 지원 시스템이 어떻게 되는지 매우 흥미롭더군요. 나중에 차분히 알아 볼 생각입니다.



게다가 공연 전에 관계자가 나와서 인사말을 한다든지, 공연 중에 사진을 맘대로 찍을 수 있다든지, 우리의 공연 질서와는 너무도 다른 극장 문화에 놀랐습니다. 마치 예전 우리 시골의 가설무대 분위기였습니다. 그동안 세계 여러나라의 극장을 다녀보고 공연도 봤지만 정식 극장에서 그토록 자유분방하게 관람하는 문화는 처음이었습니다. 실제로 공연 중에 사진을 찍는 건 물론이고, 도중에 일어나서 나가는 관객 때문에 공연  분위기가 산만해지더군요. 관객에게는 너무도 편안한 문화지만, 공연자들에게는 매우 힘든 관람 문화 아닐까 생각이 들더군요.


다음날, 드디어 올해 <전주 세계 소리축제> 인도 초청공연을 후원하는 <인도국제교류센터(ICCR)> 사무실에서 ‘까탁’ 춤의 대가인 판딧 비르주 마하라즈 명인을 만났습니다.



장난끼 많은 얼굴에 아담한 키의 마하라즈 명인은 대대로 내려오는 까탁 춤의 명인 집안에서 음악과 무용을 배웠고, 스스로 다양한 창작도 해 오신 대가입니다. 이미 칠순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현역으로 활동을 하시니 전통 예술가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계시다고 합니다.

제가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마하라즈 명인의 제자이며 안무가인 샤스와티 센 명인이 자신이 이끄는 20여명의 무용단이 펼칠 공연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아이디어를 내더군요. 두 분 다 한국 공연이 처음이라 잔뜩 흥분해 있고, 기대가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하라즈 명인은 대화에 깊이 끼어들지는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가끔 웃기나 하고 콧소리를 흥얼거리며 뭔가를 끄적거리기도 하더군요. 샤스와티와 우리가 아주 기분 좋게 이야기를 마치니 마하라즈 선생이 종이를 쓱 내미는데 저와 소리축제 기획자 한지영씨의 얼굴을 스케치한 그림이었습니다. 종이 뒤편에는 방금 적은 즉흥시를 썼다는데 내용이 뭔지 물어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이토록 그림과 시와 음악과 무용 모든 부분에 천재적이고 창의적인 감각을 아직도 잃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머와 위트가 번뜩여서 공연할 때 사람들을 즐겁게 웃기는 걸 좋아하는 매우 순수한 영혼을 가진 예술가였습니다. 두 분은 우리를 무척 좋아한다는 표현을 멋진 몸짓으로 표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아쉬움을 안고 10월 1일 전에 전주에서 만나 연습할 약속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한 번 가면 반드시 또 가게 된다는 인도. 하지만 언제 다시 밟게 될 줄 모르는 인도의 땅을 아쉽게 떠나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TRACKBACK 3 AND COMMENT 18
지난 주에 대만의 고산족 마을과 인도 뉴델리를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초청 공연을 위한 사전 답사 여행이었습니다. 
제가 총감독을 맡아서 진행하고 있는 소리축제 개막공연 <천년의 사랑 여행(가제)> 중 2부에서 중국 소주 곤극단, 캄보디아 왕실 예술단, 인도 전통 무용단, 대만 고산족의 민요 등이 우리 출연자들과 함께 출연하고, 특별 공연으로 각 나라들의 개별 공연도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협의할 사항들이 많아서 가게 된 것입니다. 우선 '대만편'을 올리고, 다음에 '인도편'을 올리겠습니다.

대만 여행에는 경희대학교의 호텔관광 경영학과 교수인 윌리엄 헌터씨 부부가 안내 및 통역으로 동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헌터의 아내인 브루산 바사젠느씨가 바로 대만 고산족 중의 한 부족인 '루카이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번 공연과 관련되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캐나다 출신인 헌터 교수가 대만 대학 재직 중에 서로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제주 대학으로 옮긴 남편을 따라 제주 생활 4년, 서울 생활 1년을 보내고 있던 터에 저희와 인연이 닿아 공연 초청을 위해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오전에 타이페이 공항에 내려 고속열차를 타고 카우슝에 도착, 거기서 임대 봉고를 타고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 첩첩산중 '우타이' 마을에 도착하니 거의 저녁이 다 되더군요.



해발 1천 미터 이상의 깊은 산골에 사는 고산족 원주민은 대만 전체에 14개 종족 20만 명쯤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400년 전쯤 중국 본토에서 '한족'과 '하카족'이 건너오면서부터 이 땅의 지배자에서 피지배자로 밀려난 그들은 산골에 뿔뿔이 흩어 살며 그들의 독특한 언어와 풍습을 지금까지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루카이족은 약 1만 명쯤이 남아 있는데, 그 중 '우타이(霧台)' 마을에는 3천 명쯤이 살고 있고 이웃 산골에도 3천 명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오지 탐험 프로그램에나 나올듯한 원시적인 마을을 상상했는데, 아주 멋스러운 전통 가옥과 현대식 가옥이 함께 어울어진 마을의 풍경에 놀랐습니다.



마을 건너 산에는 선녀가 내려 와서 목욕할 것 같은 길다란 폭포가 걸려 있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마을 아래 펼쳐져 있더군요.



예전에는 산 아래로 내려가는 산길을 머리나 등에 짐을 이고지고 하루종일 걸어 다니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는데, 10여 년 전부터 찻길이 뚫려 봉고나 승용차가 다닌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 산길이 좁고 위험해서 버스는 다닐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후 변화 때문인지 2005년도부터 태풍 피해가 갑자기 심해져서 길이 파손되고 산사태로 집이 무너지기도 하는 대형 재해가 매년 발생했답니다. 그래서 한 해 20만 명이 넘게 찾아오던 관광객이 뚝 끊어지는 통에 주민들의 걱정이 태산이라는군요.

산사태로 여기저기 무너진 산의 모습.

헌터 교수 부부의 만남과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와 대만 원주민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며 마을 구경을 한 다음, 그들이 방학 때마다 몇 개월 씩 10년 동안 직접 돌과 흙을 져 나르며 지었다는 집도 살펴보았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아시아에 심취해서 캐나다의 고향을 떠나 아시아 여러 나라를 떠돌며 미술과 조각과 여행과 연구와 강의로 살아가는 헌터의 내력이 궁금해 자세히 물어봤더니 그에게도 캐나다 인디언 원주민의 피가 섞여 있다더군요.

산골 고향에 오자 생기가 돌아 연신 자기 마을의 곳곳을 안내해주고 기뻐하는 브루산의 모습을 보니 두 사람 다 이 높고 높은 땅과 전생의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브루산이 자기 어머니의 집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 부족의 전통 의상과 자수를 전수해 온 명인입니다. 그녀의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브루산 자신까지 3대에 걸쳐서 그 솜씨를 이어오고 있답니다.



브루산의 어머니가 만든 옷입니다. 매우 정교하고 섬세한 솜씨가 정말 인간문화재급이더군요.



마을에 여관이 없어서 민박을 준비했다며 안내한 민박집에 들어서는 순간, 너무도 아름답게 꾸며 놓은 집의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아기자기한 정원이며 집안 곳곳에 놓여 있는 조각상들이 예사롭지 않아서 물어 봤더니 역시 그 집의 주인이 석공예와 목공예의 명인이랍니다.



방으로 들어가는 문짝에 새겨진 조각이 우리 장승을 보는 듯 무척 정겹습니다. 다른 집에도 이런 문이 있는 걸로 봐서 문에 조각을 하는 것은 이 부족의 전통인 듯 합니다. 문짝 하나, 전등갓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주인의 예술적 손길이 닿지 않은 게 없더군요.



사냥꾼의 전통과 삶의 이야기를 갖가지 그림과 조각과 공예품으로 전수해 오고 있는 장인의 집에 누우니 마치  먼 옛날 사냥꾼의 집에 하룻밤 묵어 가는 나그네와 같은 심정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꿈에서도 사슴과 왕뱀들이 저를 둘러싸며 놀았답니다.



새벽에 잠이 깨니 새끼 도룡뇽과 개미들과 이름 모를 산새들이 아침부터 분주합니다. 아열대 기후라서 겨울에도 눈이 안 내리고 난방이 없어도 충분히 지낼 수 있다는군요.

마침 오전에 이 마을 초등학교 졸업식이 있다고 해서 잠깐 들렀습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통틀어 역 30여명쯤 되는 졸업생들과 학부형들이 산이 훤히 보이는 마을 회관에 모여 교장 선생님과 읍장 등 유지들의 말씀을 듣고 있더군요. 물론 지루한 어른들의 말은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 표정이었습니다.



마을 중앙에 자리잡은 민속박물관에 딸린 회관에 이번 공연에 참가할 민요 가수들이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저를 환영하는 안내장을 붙여 놓은 회관에 들어가니 10여명이 넘는 출연진들이 전통의상과 머리에 쓰는 꽃관을 쓰고 30분 정도 시연회를 했습니다.


베틀을 놓고 일을 하는 여인들의 노래, 백합화를 머리에 꽂고 사랑 노래를 부르는 여인들의 삼중창, 남자와 여자의 결혼을 축하하며 흥겹게 부르는 기쁨의 노래 등이 이 세상에서 만 명만이 사용하고 있는 루카이족의 언어에 실려 흘러 나왔습니다.

그들은 전문 가수도 아니고 일하면서 틈틈이 옛노래를 배워 온 주민들이었지만, 저는 그들의 소박하면서도 단순하고 진솔하고 아름다운 노래에 취했습니다. 

저는 개막공연의 내용을 설명하고, 그들과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누며 여러 준비 사항들에 대해 합의했습니다. 모두들 한국에 처음 가는 분들이라 흥분과 설레임에 가득 찬 눈빛이었습니다.



정성스럽게 마련한 점심을 먹으며 담소를 나눈 뒤, 그들은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 환송의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10월 1일 개막공연 전에 전주에서 만나 연습하기로 약속을 한 뒤 산을 내려 오는 우리 일행을 민속박물관 위에 세워 놓은 조각상들이 전송하고 있었습니다. 


트랙백 1 AND COMMENT 17

1년 전, 제가 노무현 전대통령의 영결식 노제 총감독을 맡았을 때 김제동씨는 사회자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유서의 내용을 나름대로 재해석한 ‘아름다운’ 말들로 사회 멘트를 장식해서 '김제동 어록' 유행시켰습니다. 1년이 지난 뒤, 그는 1주기 추모식의 사회자로 다시 참여했고 그 여파로 Mnet의 쇼MC에서 사퇴하게 되었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에 ‘아름다운’ 말로 애도를 표한 개그맨이 정치적 문제로 일자리를 잃어야 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출처 : http://h21.hani.co.kr/section-021013000...027.html

김제동이라는 연예인이 이 시대의 정치권력과 겪는 갈등을 보면서, 그의 선배라 할 수 있는 옛 시대 광대들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연산군 때 ‘공길’이라는 광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연산군의 황음무도함을 풍자하는 놀이를 자주 벌였는데, 그 일이 발각되어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옥에 갇힌 뒤부터 단식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묻는 연산군에게 그는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했습니다.
 

논어에 이르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어버이는 어버이다워야 하며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고 했는데,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비록 창고에 곡식이 가득한 들
내 어찌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 ‘아름다운’ 말에 분노한 연산군에 의해 공길은 처참하게 매를 맞고 유배를 당했습니다. 그의 이 짤막한 에피소드는 재능 있는 작가와 감독에 의해 연극 <이(爾)>와 영화 <왕의 남자>로 재탄생되어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러시아에 ‘블라디미르 레이니도비치 두로프’라는 광대가 있었습니다. 그 또한 공길이처럼 러시아를 지배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풍자하는 놀이를 벌인 죄목으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도 감옥에 가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어릿광대의 왕이다.
하지만 결코 왕의 어릿광대는 아니다.
우리는 지고한 대중의 어릿광대다.

구한말에 활약했던 몇몇 기생·광대들의 다음과 같은 일화도 무척 시사적입니다. 먼저 일제 침략에 항거해 독약을 마시고 자결한 유학자 황현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오는 이야기. 

진주 기생 ‘산홍’이가 검무를 잘 춘다는 소문을 듣고, 내무대신 이시홍이 천금을 주고 산홍이를 사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산홍이는 그 제안을 일거에 거절하며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했습니다.

내 비록 천한 기생의 몸이지만,
일본에 나라를 판 오적의 두목에게
몸을 팔지 않겠다.

이 말에 크게 노한 이시홍은 그녀를 잡아다 무자비하게 때렸다고 합니다.

판소리 <서편제>를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소리 광대 '박유전'은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무과 벼슬까지 하고 그의 사랑채에 수시로 출입했습니다. 그러다가 민비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대원군이 중국으로 망명하자, 민비파의 보복을 피해 전라도에 숨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자 한양으로 올라갔습니다. 얼마 뒤, 대원군이 죽고 한일 합방이 되자 그는 나라 잃은 가객이 노래 부를 수 없다며 전라도 어느 땅에 칩거하다가 한겨울에 굶어 죽었습니다.

같은 시절에 '정가소'라는 ‘재담 광대’(요즘으로 치면 개그맨)가 있었습니다. 그는 북촌의 양반집 사랑방을 돌아다니며 정치나 시사 문제를 풍자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의 장기는 '흥인군 곳간 점고'였습니다.

흥인군은 대원군의 형으로 동생의 권력을 빙자하여 뇌물 받기를 좋아해서 엄청난 치부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흥인군은 집안에 아홉 개의 곳간을 지어놓고 공물들을 가득 쌓아놓았는데, 정가소는 이른 아침마다 곳간 문을 열고 공물을 헤아리는 흥인군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하여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 같은 시기에 '정동'이라는 재담 광대가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모든 권력과 금력을 장악한 안동 김씨의 비리와 부정부패와 권력남용 등을 풍자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김씨 일파가 보낸 하수인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위에 예로 든 기생·광대 즉 옛시대의 문화예술인들이 활동했던 시대는 철저한 계급사회였습니다.

그토록 권위적이며 봉건적인 시대에, 사회적 약자였던 그들이 그토록 저항적이며 진취적인 소신을 가지고 활동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문화예술인들과 정치권력의 갈등은 한일합방과 일제의 식민지배로 인해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항적’이며 ‘진취적’인 문화예술인들은 철저히 제거되었습니다. 

또한 해방 이후 좌·우익의 이념 대립은 그들에게 분명한 정치적 선택을 강요했기 때문에 문화예술인들은 어쩔 수 없이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문화예술인들은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정치권력을 따르게 되었고, 남한의 문화예술인들은 자유민주주의로 무장한 정치권력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남한의 역대 정치권력은 그들을 ‘관리’하고 ‘통제’했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의 ‘일부’ ‘불온한’ 문화예술인들은 군사정부의 독재적이고 폭압적인 권력에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그들은 민주와 통일과 인권과 평등의 기치를 드높이 내걸고 저항적이고 진보적인 문화예술운동을 펼쳤습니다. ‘90년대 말에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탄생되자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습니다. 

관리와 통제 정책은 지원과 육성 정책으로 변했습니다. 검열 제도가 사라지고, 표현의 자유와 자율성이 신장되었습니다. 문화예술가들은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표현을 하고, 소신껏 발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0년 현재, 그 결과는 다시 참담해졌습니다.

문화예술계의 좌파·우파 편가르기는 무자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기관장 인사 파동, 방송 장악 시도, 표현의 자유 위축 등도 급속도로 심화되었습니다.

그러더니 급기야 비판적 문화예술인들의 ‘목줄조이기’라는 구시대적 작태까지 등장한 것입니다. 이제 연예인들을 포함한 문화예술인들은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에게 적당히 이용당하며 살아 온 옛 시절로 돌아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문화예술인들에게 다시 한 번 정치적 각성이 필요한 시기가 왔습니다. ‘지고한 대중’의 삶 속에 뛰어 들어, ‘저항적’이고 ‘진취적’으로 살다 간 옛 시대 광대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문화예술인들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 김제동은 어느새 이 시대 문화예술계의 ‘화두(話頭)’가 되고 말았습니다. 

트랙백 1 AND COMMENT 35

요즘의 우리에게 '민요'는 설날이나 추석 같은 특별한 날에나 들어볼 수 있는 특수한 노래입니다.

하지만 일본이 이 나라를 지배하기 전까지만 해도 민요는 수천 년 동안 이 땅의 백성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려 온 대표적인 '민중의 노래'였습니다.

한반도의 곳곳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 온 수천 편의 토속 민요들이 있었습니다. 그 노래들은 제쳐두고 <경기민요>, <서도민요>, <남도민요>로 크게 나뉘어지는 대표적인 애창 민요만을 보더라도, 그 생생한 표현력과 풍부한 음악성으로 듣는 사람에게 다양한 정서를 제공해 줍니다. 이 좁은 땅 안에 어찌 그리도 지역에 따라 창법이나 선율이 확연히 다른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전라도 지역에 전해 오는 남도민요는 뱃속에서 소리를 끌어내어 목에서 갖가지 조화를 부립니다. 어던 노래는 꿋꿋하면서도 박력이 있고, 어떤 노래는 비장하고 처절한가 하면, 어떤 노래는 흥겹고 신명이 절로 납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무게가 있고 뱃속에서 통성을 뽑아내는 발성을 합니다.

이북 지역에 전해 오는 서도민요는 콧소리가 많이 들어가면서 꺾어 넘겨서 끄는 목을 주로 사용하는데, 애절하고 슬픈 가락을 많이 사용합니다. 

경기 민요는 곱고 예쁘게 나가다가 섬세하게 떨고 끌어 잡아당기고 조이는 목을 주로 사용하며,
슬픈 노래보다 경쾌하고 흥겨운 노래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남도민요나 판소리를 하는 명창들에게는 판소리의 가락이 지니고 있는 비장함이나, 비극적인 어두움이나, 해학적인 분위기가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묘한 성품을 느낄 수 있는데 비해 경기민요를 부르는 명창들에게서는 그 가락처럼 밝고 경쾌하고 화려한 성품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저의 편견일까요?

그거야 어찌됐든 <경기 12잡가>로 인간문화재가 된 묵계월 명창은 경기민요의 곱고 화려한 분위기와 다르게 소박하면서도 꾸밈없는 창법으로 새로운 맛을 보여주는 명창입니다.

출처 : http://www.gayo114.com/musicColumn/musi...Fno%3D71

“내가 어려서부터 키도 작고 다른 재주도 없었는데, 유독 노래부르는 재주만은 유별났어요. 우리집이 서울 광희동 지금 을지로 계림극장 건너편에 있었는데,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나 어디서 주워들은 노래를 그렇게 흉내를 잘 내었어요.
또 우리집 부근에 민요 부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노래 연습하는 걸 오다가다 듣고는 그 흉내를 잘 냈어요.”

1921년 10월 21일에 이윤기씨의 다섯 딸 중 넷째딸로 태어난 그녀는 방산보통학교에 다닐 때까지만해도 노래 흉내 잘 내는 소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녀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인연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버님이 명주실 꼬아서 매듭 만드는 일을 하셨는데 집안 형편은 괜찮은 편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열한두 살쯤 되었을 때, 동네에서 노래부르고 활 쏘러 다니는 한량 노인이 내가 노래부르는 걸 듣더니 이 아이는 노래를 가르쳐야 하니 자기에게 맡기라고 아버지를 졸랐어요.
아버지가 그럴 수가 없다고 거절하니까, 이번에는 어머니를 구슬러서 아이의 장래를 위한 일이라고 끈덕지게 졸라대는 통에 종로 2가의 낙원동에서 혼자 살고 계시던 이씨라는 부인에게 수양딸로 들어갔지요. 그 양어머니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은인이랍니다."

광희동의 ‘문 밖’에서 종로 ‘문 안’으로 들어가게 된 소녀는 학교도 그만 두고 양어머니와 함께 살며 마음껏 노래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양어머니의 돌아가신 남편 성이 묵씨라서 이름도 이경옥에서 묵계월로 고치고, 그 동네에서 노래를 가르치던 이광식이라는 소리꾼에게 노래공부를 시작하게 된 그녀는 새로운 생활이 신기하고 재미있기만 했습니다.

“이광식 선생님에게서 시조로부터 시작해서 여창 지름, 남창 지름 그리고 12잡가를 배우는데, 제가 열심히 하고 또 목이 말을 잘 들어 빨리빨리 배우니까 선생님이 무척 좋아하셨어요.
거기서 일년 반쯤 배웠는데, 한량 노인이 더 좋은 선생님에게 맡기라고 어머니에게 권유하여 김태식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어요. 거기서 일 년쯤 배우고 있는데, 본격적으로 노래를 할려면 권번에서 배워야 한다고 해서 조선권번에 나가 주수봉 선생님에게 공부를 했지요.”

경기민요의 노래 공부는 대개 시조를 배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잡가를 배우는 것으로 끝납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긴아리랑>, <이별가>, <도라지타령>, <구 아리랑>, <노랫가락>, <창부타령>, <방아타령>, <한강수타령>, <경복궁타령>, <양산도>, <천안삼거리>, <오봉산 타령>, <개성난봉가(박연 폭포)> 같은 민요들은 공부를 하는 동안에 저절로 익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경기민요의 독특한 개성을 보여 주는 잡가는 ‘긴 노래’라고도 불리는데 민요도 아니요, 가곡이나 가사나 시조와 같은 정악 계통의 노래도 아니면서  조선말기에 민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독특한 노래입니다. 

본래는 <유산가>, <제비가>, <적벽가>, <소춘향가>, <선유가>, <집장가>, <형장가>, <평양가>의 여덟 가지가 서울의 8잡가로 불렸는데 여기에 <달거리>, <십장가>, <출인가>, <방물가>가 합쳐져서 12잡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노래들이 언제부터 불리었지는 문헌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 없고, 작곡자나 작사자도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잡가 잘 부르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구한말에는 추교신, 조기준, 박춘경과 같은 명창들이 이름을 날렸고, 그밖에도 한다하는 소리꾼들이 이곳저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권번에서 가곡을 배우려고 했어요. 그때 가곡 선생님은 하규일씨라고 가곡으로는 나라 안에서 으뜸이시고 명성이 대단한 분이셨어요.
그런데 그 분이 내 목소리를 들어보시더니 내 목이 좋기는 한데 청이 낮고 굵어서 가곡에는 안 맞다고 하세요. 가곡은 목청이 높고 가늘고 섬세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잡가를 배우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주수봉 선생님한테 ‘긴 노래’를 배우고 있는데 하루는 어떤 노인이 찾아 오셔서 내 노래를 듣더니 ‘너 나한테 한 가락 배워봐라’하면서 뭘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삼설기>라는 노래인데 그 귀한 노래를 뭣인지도 모르고 흥이 나서 배웠지요. 열다섯 살 때의 일이예요.”

<삼설기(三說記)>는 노래가 아니고 '송시(誦詩)', 곧 글에 가락을 얹어 읽어 내려가는 것인데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어려운 가락입니다.

세 사람의 선비가 낮잠을 자다가 한꺼번에 죽게 되어 사자에게 이끌리어 저승으로 가서 재판을 받는다.
그런데 죽을 때가 안 된 사람을 잡아들였음이 밝혀져 도로 살려 보낼 적에 각기 자기 소원을 말하게 된다.
한 사람은 높은 벼슬을 달라 하고, 또 한 사람은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하여 그 사람들은 자기 소원대로 되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이 이런 소원을 이야기한다.
"‘명당에 터를 잡아 만 권의 책을 쌓아 두고 거문고 벗을 삼고 앞내에 고기 낚고 뒷뫼에 약을 심어 아들 형제 딸 하나에 내외손이 번성하여 병 없고 성한 몸이 수삼갑자를 누리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노발대발하여 자기도 못할 것을 해달랜다고 야단을 친다.

이것이 간단한 <삼설기>의 줄거리입니다. 원래 사설이 어렵고 길어서 외우기가 힘들고 가락도 까다로워 부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이문원이라는 사람이 묵계월 소녀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그 선생님은 ‘노래를 나만 알고 죽으면 어떡하니? 배우려는 놈도 없고 또 배우려는 놈이 있어도 목이 안되더라’고 하시면서 열심히 가르쳐 주셨어요. 한 일 년 배우고 나니까 어지간히 흉내낼 수 있데요. 그러자 그 어른이 신이 나서 자기가 다니는 사랑방에 데리고 다녔지요.”

그때는 방송이나 레코드판이나 무대공연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소리꾼들의 소리판은 주로 잔치집이나 사랑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살림이 조금 풍족한 사람들은 으레 집 안에 사랑채를 지어 놓고 한량들을 불러서 노는 풍류가 있었는데, 이문원은 이 사랑방 저 사랑방 떠돌아다니며 노래를 들려주면서 살아가던 노인이었습니다.

그를 따라다니면서 사랑방의 청중들에게 귀여움과 인기를 독차지한 어린 소녀는 그 뒤 최종식이라는 민요의 대가에게 민요를 배우러 찾아갔습니다.

“양어머니가 무조건하고 뒤를 대주시니까 좋은 선생님 찾아서 공부를 원없이 했지요. 최정식 선생님은 민요로 입신(立神)했다는 말을 들은 분인데, 노래도 잘하셨지만 작사나 작곡도 잘 하셔서 지금 많이들 부르고 있는 <풍등가>나 <금강산 타령>은 그 분이 만드신 노래로 크게 히트를 했어요.”

그렇게 꾸준히 공부하던 중에 드디어 방송 출현의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양어머니가 방송국에 청을 넣어서 출연하게 되었지요. 방송국 차가 집까지 와서 나를 데려가데요.
방송국에 들어 가 벌벌 떨면서 <유산가>와 <제비가>를 하는데 그저 또박또박 배운 대로 했지요. 그랬더니 방송국장 되시는 분이 기특하다고 하시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출연료로 3원인가 5원인가를 주셨어요.
방송국 차가 집에까지 바래다 줘서 어머니한테 달려갔더니, 어머니는 내가 과거 급제나 한 듯이 좋아하셨지요.”

그 뒤로 가끔씩 방송국에 출연할 기회가 생겨 본격적으로 방송 활동을 하고, 무대에도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회사원이던 김영배와 중매 결혼을 하고 아기를 갖게 되자 활동이 뜸해졌습니다.

또 그때는 일제 말기의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때라 세상이 뒤숭숭하고 노래할 곳도 없었습니다. 무대라야 기껏 전선 위문공연이나 탄광촌 공연이 대부분이라, 아예 집에 들어 앉아버렸습니다.

해방이 되자 그녀는 무대에 서는 것을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는 남편을 설득하여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무대에서 춤도 추고 연극도 하고 갖가지 재주를 부리는데 나는 통 그런 재주가 없어요. 그저 딱 서서 노래만 했지 손도 안올렸댔어요.
해방 전에 조선에서 제일 가는 명무라는 한성준 선생님에게 승무를 잠깐 배운 적이 있는데 저는 키도 작고 몸매도 잘 빠진 편이 아닌데다가 춤에 대해서는 워낙 둔재였나봐요. 하도 못배우니까 선생님도 재미없어 하시고 나도 별로 흥미가 없어서 포기해 버렸어요. 그때 이를 악물고 버텼더라면 조금은 나아졌을텐데 그냥 끊어버리니까 몸이 말을 안 들어요. 요새는 조금씩 손도 올리고 발림도 하지만, 예전에는 그저 나무토막이었다니깐요. 그래도 소리가 좋다고 청하는 곳이 많아서 쩔쩔 맸어요.”

그렇게 바쁘게 지내다가 6.25 동란을 맞아 간신히 살아남을 만큼 고생을 했습니다.

“피난을 못 가서 남아 있는데 동네에 좌익 사상을 가진 부인네가 찾아 오더니 여성 동맹회 예술단에 가입하라는 거예요. 남편이 지하운동했다는 여잔데 노래만 하면 먹고 사는 것 문제 없게 해줄 테니 나오라고 어찌나 성화를 대는지 그것 거절하느라 혼났어요.
겨우 거절해 놓으니까 이번에는 회의에라도 나오라고 하는 거예요. 안 나가면 주목 받으니 할 수 없이 아기를 업고 나갔는데 연설하고 박수 치고 하는데 골이 아파 죽겠대요.
그래서 꾀를 내어 아기 볼기를 꼬집었지요. 아기가 울자 시끄러우니까 나가라고 해요. 그래서 빠져나오곤 하다가 부산으로 피난을 갔지요.”

전쟁이 끝나고 피난에서 돌아오니 노래할 곳이 많이 생겨 바쁘게 다니는 틈틈이 레코드 판도 찍었습니다. 그때에 젊은 경기 명창으로 아름을 날리던 김옥심, 이은주와 함께 신세계 레코드에서 12잡가와 민요를 넣은 것을 시작으로 여러 장의 레코드에 소리를 ‘박았습니다.’



그녀의 노래를 들어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녀의 목소리가 평범한 듯 하면서도 구수하고 성량이 풍부하며 담백하고 깊은 맛이 있다고 평합니다.

이것은 그녀와 함께 12잡가의 보유자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은 이은주 명창의 곱고 맑은 목소리나 안비취 명창의 강하면서도 섬세한 목소리와 다른 맛을 풍기면서, 그녀의 독특한 개성으로 인정 받아오고 있습니다.

“나는 제자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밖에 안 해요. 우리 공부할 때는 책도 없이 선생님 입만 보고 배웠다가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복습하고 화장실에서도 연습하는 등 밤낮으로 열심히 했는데 요새는 그렇게 열심히들 안 해요.
그리고 몇 년 배워 가락을 어지간히 익힌 다음에도 계속 다듬고 연구해서 자기 것으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흉내 소리밖에 안돼요. 다이아몬드를 만들려면 돌을 깎고 다듬어서 기가 막힌 공을 들여야 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양어머니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명창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원없이 공부를 하고,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복된 가정을 꾸려 왔습니다. 말년에는 소박하고 덕스러움을 좋아하는 애호가들과 제자들 덕분에 90세가 된 지금까지 무대에 서며 행복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이대로 노래 부르다 죽으면 더 이상 원이 없겠다.”는 게 그녀의 남은 소망이니 그 소망은 충분히 이루어지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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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유화>라고 하면 온 국민이 사랑하는 김소월의 시를 제일 먼저 떠올리실 겁니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이 <산유화>가 수천 년 전의 우리 민요라는 걸 아는 분은 많지 않을 겁니다. 「증보 동국 문헌비고」의 <백제 가곡조>에는 <산유화(山有花)>에 대한 유래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제에 <산유화>가 있는데 남녀가 사랑을 주고 받는 가사이고, 가락이 구슬프다” 

남녀가 사랑을 주고 받는 노래를 왜 구슬픈 가락으로 불렀을까요?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의 손에 백제가 망하자 수많은 궁녀와 여인들이 낙화암에서 꽃처럼 떨어져 죽었다. 
의자왕이 볼모로 중국으로 떠나는 날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부여군 입포리의 남당산에 올라가 눈물을 흘리며 전송했다.
그 뒤 백제의 여인들은 의자왕이 끌려가던 음력 8월 16일이면 남당산에 올라가 오랫동안 못 만났던 친정 식구들과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날이 되면 온 산이 아낙네들의 울긋불긋한 옷으로 꽃이 피어난 듯 했다. 
백제가 망한 뒤 부여지방에는 <산유화>라는 노래가 불려지게 되었는데, 그 가락이 너무도 처량하고 구슬퍼서 아니 우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은 부여 지방에 전해 오는 <산유화>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이렇듯 슬픈 망국의 역사가 깃들어 있으니 그 곡조가 슬플 만도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노래가 아득한 옛날에 불리워졌으니 이제는 사라진 노래라고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노래가 아직도 전해지고 있으며, 그 노래의 발굴자이며 전수자인 박홍남씨가 부여에서 외롭게 그 노래를 지키다 돌아가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 또한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산유화가>와 더불어 이 지방에 전해오는 민요와 민속놀이를 발굴하고 정리하고 보존했던 이 고장의 ‘문화재’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일을 하기까지는 참으로 ‘먼먼 젊음의 뒤안길’을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박홍남 명인은 1921년 11월 17일에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인 박운종씨는 평생토록 농사만 지으며 고생만 하다가 그가 9살이 되었을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딸들과 아들을 데리고 고창읍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고창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친 그는 부안농고에 들어갔습니다.

“농고에서는 농사 실습을 많이 혀. 모심기도 하고 벼베기도 하고 김매기도 허는디, 농사일에는 취미가 없고 농악 장단에만 미쳐서 다녔당께.”

출처 : http://www.buyeotour.net/02cultural/cul...c%3D2100

어려서부터 논두렁에서 농악을 칠 때마다 신이 나서 풍물패를 따라다니고, 가을에는 양철때기로 농악 가락을 두드리며 새를 쫓을 만큼 농악에 심취했던 그는 학교 공부는 '뒷전으로 돌리고' 농악에 미쳐서 배우러 다녔습니다.

부안의 유명한 상쇠인 이명보씨에게 꽹과리를 배운 그는, 장구가 배우고 싶어서 장구 선생님을 수소문했습니다. 김대근이라는 사람이 설장구를 잘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보니, 그는 이발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두말없이 이발소에 취직하여 이발 기술도 배우고 장구도 배웠습니다.

그렇게 농악을 배우러 다니는 동안, 그럭저럭 학교를 졸업하고 해방을 맞았습니다. 남들은 해방이 된 기쁨에 춤을 추었겠지만, 그는 농악을 마음껏 칠 수 있다는 기쁨에 춤을 추었습니다.

어머니는 농사에 뜻이 없고 자꾸만 밖으로 도는 아들을 붙잡아 두려고 스물다섯이 되던 해에 장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색시 김복녀는 신혼을 제대로 보내지도 못하고 생과부가 되어야 했습니다. 남편이 <별님창극단>이라는 단체를 따라 훌쩍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쉴 새 없이 객지를 떠돌아다니고 집에 붙어 있질 않았어. 그러니 어머님한테는 불효자식이고, 부인한테는 못된 남편이었어. 일년내내 독수공방을 시키다가 설이나 추석 때 불쑥 나타나서 며칠있다가 또 훌쩍 떠나고는 했응께.
그리도 어찌어찌 애기는 생겨나서 자식들은 크는디, 나는 살림이 어떻게 되가는지 통 알지를 못했으니 애비로서는 빵점이었지. 젊은 시절을 참으로 분별없고 분수없이 보냈어.”

그 ‘분별없고 분수없는’ 행실의 첫걸음으로 <별님창극단>에 들어 간 그는 잔심부름을 하거나 꽹과리를 치면서 관객을 끌어모으는 궂은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러다가 창극의단역도 맡아서 하곤 했는데, 그렇게 삼년쯤 고생하다보니 나중엔 역할이 커져서 <춘향전>의 주인공인 이몽룡 역할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키가 자그마하고 예쁘장하니 이도령 역에는 손색이 없었지만, 판소리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소리가 안되니 무대 뒤에서 다른 사람이 판소리를 하고 주인공은 입만 달싹거리는 이상한 창극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판소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창극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창극단을 그만둔 뒤, 부안에 있는 전옥수라는 소리 선생을 찾아가서 소리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북가락을 배운 뒤, 단가와 <심청가>나 <춘향가>의 토막소리를 배운 그는 이듬해에 광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소리선생을 수소문한 그는 창극단을 하다가 병을 얻은 박영실이라는 소리꾼이 장성에서 휴양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곧장  달려가 서너달쯤 선생님 집에 붙어 살며 판소리를 배웠습니다. 그 뒤로 그는 오랫동안 판소리 강사 생활을 하게 됩니다.

정읍국악원에서 7,8개월, 군산 음악원에서 3년, 부안국악원에서 얼마......이렇게 여러 국악원을 돌아다니던 그는 어느 날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들었습니다. 남원국악원장 이한량이라는 사람이 여성농악단을 조직해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데, 인기가 아주 좋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해방 뒤에 생겨난 여성 국극단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던 때인지라, 여성만으로 농악단을 조직하는 것은 인기를 끌기에 충분한 기획이었습니다. 그는 여자들을 모아 장구와 꽹과리를 1년쯤 가르친 뒤, 여성농악단을 만들어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집에서는 설만 쇠고 일년 내내 돌아다녔지. 고생 직사하게 하고 죽을 지경도 여러 번 겪었어. 열차 타고 굴속을 가다가 기차가 멈춰서 질식하려다가 살아 난 일도 있고, 배타고 가다가 타고 가던 배가 큰 객선 밑으로 들어갔다가 빠져 나온 일도 있고, 태풍을 만나서 배가 뒤집힐뻔 하기도 하고, 깡패들이 돈 내놓으라고 칼로 찢고 행패 부려 그걸 말리느라고 곤욕을 치르기도 하고, 아무튼 별별 사건이 다 많았지. 그래도 그게 재미있어서 6.25 사변을 겪을 때까지 그러고 돌아다녔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을은 묘하게도 절반은 대한민국 군대가 점령하고, 절반은 인민공화국 군대가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그 통에 그의 가족도 이산가족이 되어 들판 건너에 사는 누님네는 대한민국 편이 되고, 그의 어머니와 식구들은 인민공화국 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뉘어진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모르고 있던 누나가 어느 날 친정어머니를 보려고 통행증도 없이 인민공화국의 영토를 ‘침범'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누나는 대번에 인민군에게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이쪽의 정보를 캐다가 저쪽에게 제공하려고 했다는 간첩 혐의였습니다. 누구를 만나러 왔느냐는 질문에 동생 이름을 대자, 그 역시 대번에 간첩죄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빨간 헝겊으로 눈이 가려진 그는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의 ‘경계선’까지 끌려갔습니다. 인민군은 파놓은 굴속에 들어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무리 잘못한 게 없다고 사정해도 듣지 않고 굴 속에 몰아 넣더니 열을 셀 때까지 죄를 자백하라고 했습니다.

자백할 죄를 생각하는 동안, 여덟을 세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눈을 감고 있을 때, 누군가 고함을 지르면서 헐레벌떡 굴속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을 분대의 연락 부장을 맡고 있던 동네 친구 권씨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 온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오더니 ‘이 사람은 농악 친다고 전국을 떠돌아다닌 사람이라 마을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렁게 역할을 줄래야 줄 수가 없고, 간첩질을 할래야 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허더란 말이여. 그 말 덕에 살아나왔지. 참 농악 치고 떠돌아 다닌 것이 그럴 때 나를 살려줄 줄이야 누가 알았나.”

그렇게 해서 살아 난 그는 전쟁이 끝나자 다시 예전의 단원들을 데리고 떠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불행한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공연 수익금 60만원을 가지고 오다가 소매치기를 당한 것입니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 논 열마지기를 팔아 그 돈을 메우고 충청 지방을 떠돌다가, 부여에 와서 여인숙에 짐을 풀었습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장날에 공연을 하려고만 하면 장날마다 비가 내렸습니다. 그 통에 설흔 다섯명이나 되는 단원들은 보름 동안 여인숙에만 죽치고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다시 집에 내려가 집을 팔아서 여인숙 빚을 갚고, 밀린 단원들 월급도 조금씩 준 뒤 단체를 해산시키고 말았습니다. 실로 9년만의 눈물겨운 해산이었습니다. 그 통에 그의 재산은 다 날아가버리고, 그 역시 오고 갈 데가 없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터에 부여국악원에서 강사를 부탁하자 두말없이 승낙해 버렸습니다.

“건물과 악기는 군에서 협조를 해줬는디 월급이 없어. 수업료라고 몇 푼 받지만 돈 없는 사람이 태반이니 못 내는 사람이 많고, 그나마도 1년이 지나면 회원이 되기 때문에 돈을 안내게 돼. 그러니 생계유지가 무척 곤란했지.”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인심 좋고 자신을 알아주는 분위기가 맘에 들어 한 십년간 제자들을 가르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1970년초에 국립창극단이 생기면서 지방 순회공연을 하는데 같이 가자는 전갈이 오자 또다시 역마살이 발동하여 서울로 훌쩍 떠났습니다. 김연수 명창과 조상현, 오정숙, 남해성과 같은 쟁쟁한 명창들과 함께 7,8개월 간 전국을 떠돌아다녔습니다. 그 뒤 장충동에 국립극장이 생겨 모두들 그곳으로 들어가자, 다시 부여로 내려 와 국악원 일을 보았습니다.

그 동안 거의 문을 닫다시피한 국악원은 그가 돌아오자 활기를 띄워 수강생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역시 이제는 떠돌이 생활에 지치기도 하고, 안주할 터를 닦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어 열심히 제자를 가르치며 성실하게 일을 했습니다.

몇 년 동안 닦은 그의 노력은 차츰 결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1975년에 열린 민속경연대회에 충청남도 대표로 서산면 붕기마을의 풍어놀이에 소리꾼으로 참가한 그가 '전래 민요'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미 판소리와 남도민요의 가락에 대해서는 알만큼 알았기 때문에 노동요의 힘찬 가락과 독특한 창법을 대하자, 자신도 모르게 그 멋과 맛에 흠뻑 빠진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참으로 뜻밖에 귀중한 사람과 만나게 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우리 국악원에 다니던 여자 수강생 한 분이 경기창을 하는데, 하루는 계원들과 노는 자리에 같이 가자고 하더란 말이여. 그래 같이 갔는디, 이병호라는 노인 집에서 노인 십여명이 모여서 술 한 잔씩 마시고 흥이 나니 목침돌림으로 노래 한자리씩 하더란 말이여.
그 중에 노인 두 사람이 일어나더니 노래를 하기 전에 ‘시방은 농촌에서 이런 거 했자 알아주지도 않는디, 옛날에 허던 노래라 한 번 헌다’ 하면서 한 사오십 분 노래를 주고 받더란 말이여. 그런디 그 노래가 어찌나 듣기 좋던지 홀딱 반했지. 이렇게 해서 <산유화>허고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이여.”

산유화야 산유화야
궁야평 너른 들에
논도 많고 밭도 많다
씨뿌리고 모 옮기어
충실허니 가꾸어서
성실하게 멪어보세
에-헤-에헤야-헤헤
에-헤-에여루 상-사-뒤-요-

산유화야 산유화야
입포 남당산은
어찌 그리 유정턴고
매년 팔월 십육일에
왼 아낙네 다 모인다
무슨 모의 있다던고
에-헤-에헤야-헤헤
에-헤-에여루 상-사-뒤-요-

산유화야 산유화야
사비강 맑은 물에
고기 잡는 어옹들아
온갖 고기 다 잡아도
경치 일랑은 낚지 마소
강산 풍경 좋을시고
에-헤-에헤야-헤헤
에-헤-에여루 상-사-뒤-요-

<산유화가>는 김을 매고, 벼를 베어서 타작하고, 볏단을 쌓아 키질을 하고, 알곡을 창고에 쌓기까지 농사일의 전 과정에 맞추어서 부르는 노동요입니다.

아득한 옛날 농사일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 지방에서 불리워졌던 노래들이 백제의 멸망과 더불어 문헌에 오르게 되고, 그 멸망의 애닯은 사연과 함께 면면히 전해 내려오다가 우연히 그의 귀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산유화가>에 흥분한 그는 바로 다음날 녹음기를 들고, 소리를 했던 세도면 장산리의 홍준기 노인 집에 찾아갔습니다.

“별것도 아닌 농요를 뭐헐라고 녹음허냐”는 노인을 설득하여 녹음을 한 그는 그 가락을 따라 불러봤습니다. 그러나 녹음기로는 도저히 제대로 배울 수가 없어서 홍노인을 국악원에 모시고 와서 반 년쯤 배웠습니다.

“장산리에 살던 임윤필이라는 분이 옛날에 <산유화>를 잘 했는디, 그 노래를 김학수씨가 배우고, 김학수씨는 홍준기씨한테 가르치고, 그 다음에 내가 이어받은 거여. 홍선생님 말씀에 옛날에는 이 <산유화>를 안허면 모를 안 심었당게 이 고장에서는 많이 불려졌던 모양이여. 그러다가 왜정 때 '물모'가 생기면서 안 부르게 된 거지.”

이 <산유화> 노래가 문헌에 나오는 <산유화가>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경남 지방에 전해 오는 산타령인 <산유해>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전북 익산 지방에 전해 오는 김매는 노래인 <산야>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것은 좀 더 전문적인 연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귀중한 백제 시대의 노동요가 끊어질뻔한 위기에서 구해진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는 이 노래들을 다듬어서 전국민속대회에 참가하여 상을 받았습니다. 그 뒤에도 <저산팔읍 길쌈놀이>라든가, <서산 벼가릿대 놀이>라든가, <공주 장승제>라든가, <청양 동화제>와 같은 민속 유산을 발굴하는 동안에 전문적인 연구가가 되다시피 했지만, 이러한 일들을 하게 한 원동력이 <산유화>에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습니다.

출처 : http://www.buyeotour.net/02cultural/cul...field%3D

"내 나름껏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혀. 남들에게 해 입히지 않고 노래로 즐거움과 위안을 주며 살아온 셈이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언제 어느 때 가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 같고…. 
아무튼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지만 사는 날까지 노래하고, 장구 치고, 열심히 가르치며 살고싶어. 산유화를 만난 인연으로 우리 민요의 보존을 위해 나름껏 신명을 바쳐온 것을 보람으로 여기고…"

2006년에 삶을 마감할 때까지 노래 하고, 장구 치고, 제자들 가르치면서 여한없이 살다 가신 그의 신명난 삶이 부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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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와 서울시교육청이 초중고생과 시민을 대상으로 '전쟁 시나리오'를 공모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60주년, 6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전형적인 재래전 틀에서 벗어나 현대전 특성에 맞는, 서울의 상황에서 발생 가능한 새로운 시나리오를 발굴하기 위해서" 공모를 한다는 겁니다.

응모의 세부 내용을 보니 "9·11 테러 사건에서 보듯이, 수도 서울은 인구가 밀집되고 산업이 집중된 곳으로, 만약 적이 공격한다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곳"이라며 ‘적의 입장에서 어떻게 공격할 것인지 상상력과 창의를 발휘하여 자유 형식으로 서술해 달라’고 주문했더군요.

서울시교육청은 재빠르게 지난 6월 18일, 서울 지역 2170여 개 초중고에 "각급 기관에서는 공모에 많은 인원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적극 홍보하기 바란다"고 공문을 보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교사와 시민들은 대부분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었습니다.
 

‘반공교육을 강요하던 군사정부시대에도 아이들한테 전쟁 시나리오를 쓰도록 하지는 않았다.’, ‘가뜩이나 전쟁 불안에 떠는 시민들에게 전쟁 시나리오를 쓰라는 것은 서울시의 폭력이다’, ‘평화와 화해를 강조해야 하는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에게 전쟁 의식을 부추기는 반교육적 행사를 한다’는 게 대부분의 반응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서울시 민방위담당관 관계자는 “시민들이 안보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있으니까 안보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공모를 기획했다”며 “안보는 공직자뿐 아니라 시민 모두가 생각해야 할 것이므로, 공모 대상을 확대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이 전쟁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안보 의식이 높아진다는 논리인데,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았던 군사정권 시대에도 들어보지 못한 해괴한 논리입니다. ‘70년대나 ’80년대에 유행했던 ‘간첩잡기 포스터 공모’나 ‘반공 글짓기 대회’는 전쟁놀이를 독려하는 이번 공모에 비하면 차라리 애교스러워 보입니다.

게다가 '상상력'과 '창의성'을 발휘하라니요? 상상력과 창의성을 가진 학생들과 시민들을 전쟁광으로 만들겠다는 것인가요? ‘창의 서울’이니 ‘디자인 서울’이니 떠들며 시민들의 세금을 쏟아 부은 ‘문화도시 서울’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나요?

천안함 사건 이후 남과 북이 극도로 긴장상태에 있는 이때, 전쟁 시나리오 공모는 불 위에 기름을 붓는 어처구니 없는 행위입니다. 정말 해도해도 너무 하다는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평화와 화해를 위해 전력을 기울여도 모자랄 이 살벌한 판국에, 시민과 학생들에게 군사적 대결 의식을 고취시키려고 하는 시대착오적 행태는 당장 중지해야 합니다. 서울시와 서울시교육청은 당장 공모 작업을 백지화하고, 서울 시민과 국민들에게 사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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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강 사업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점점 거세어지고 있습니다.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 수경 스님의 홀연한 잠적, 천주교 사제들의 삭발, 천주교 주교회의의 대규모 미사 집전, 전문가와 학계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한 사업 중단 요구.....

그렇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사업을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국회 대정부 질문에 출석한 정운찬 총리도 6·2 지방선거의 패배를 4대 강 사업에 대한 심판으로 보지 않으며, 규모를 줄이거나 속도를 조정할 생각이 없다고 단호하게 답변했습니다.

또 정 총리는 세종시 문제에 대해서도 '역사의식'과 '애국심'이 있으면 정략적으로 만든 세종시 원안을 지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참여연대가 천안함 조사결과에 대한 의혹을 유엔안보리 이사국에 발송한 문제에 대해서도 정 총리는 "국가 안보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국내 논의에 그치지 않고 국제기구에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한 것은 비이성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민군 합동조사단 조사결과 천안함 피격 사건은 명명백백히 북한의 도발로 밝혀지지 않았느냐"고 주장하며, "근거 없는 의혹에 근거해 정부 입장에 반하는 서한을 보내는 것은 국익에 반할 뿐 아니라 건전한 상식으로도 이해하기 힘들다"고 비난했습니다.

저는 이런 몇 가지 사안들에 대한 총리의 발언을 보면서 참으로 깊은 슬픔을 느꼈습니다. 

권력자나 정치인들이나 보수집단들은 이미 '집단사고'에 단련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발언에 대해서는 화가 날뿐 슬픈 감정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때 뛰어난 경제학자이며 서울대 총장으로서 지성인의 표상처럼 존경 받던 정 총리마저 ‘집단사고의 덫’ 갇힌 발언을 서슴지 않는 것을 보고, 우리 사회 지성의 추락 현장을 여실히 보는 듯하여 슬픔이 밀려 온 것입니다. 

'집단사고의 덫'이란 결집력이 강한 구성원들이 자기들 생각에 맞는 의견만 받아들이고, 자기들 생각과 다른 의견이나 증거들은 무시하거나 외면해 버리는 심리적 경향을 말합니다. 자기들의 생각은 틀릴 수 없다는 '무오류의 환상', 자기들이 그렇게 결정한 데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고 하는 자기합리화, 그리고 다른 의견은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에 빠져 태연하게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는 '사고의 덫'을 말합니다.

매사추세츠 대학 아이젠버그 경영대학원의 토머스 키다 (Thomas Kida) 교수는 그의 저서 「생각의 오류」에서 이런 '사고의 6가지 덫'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1. 과학적 수치보다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더 솔깃해 한다. 이야기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대상도 쉽게 신봉하게 된다. 그러한 믿음은 중요한 결정을 실패와 절망의 깊은 수렁으로 빠뜨릴 수도 있다.

2. 자기 생각에 의문을 품기보다 확신하려 든다. 자기 믿음과 기대를 확인시켜주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상충되는 쪽은 무시하거나 편리하게 재해석하는 습관을 유지할 경우, 머릿속 깊이 박혀 있는 편견이나 오해를 평생 풀 수 없게 된다.

3. 이 세상에는 운과 우연으로 이루어지는 일도 있음을 간과한다. 주식이나 미래를 예측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월스트리트저널> 같은 유명 잡지에서 특정 펀드를 초우량이라고 선전할 경우, 많은 이들이 의심 없이 그것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우연한 의견일 뿐이다.

4.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잘못 인식한다. 기대와 욕망 때문에 사람들은 때로 자신이 보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한다.

5. 지나치게 단순화해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정보와 사건이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 흘러가고 있는데, 시간과 노력을 줄인다는 목표 아래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정작 중요한 정보를 놓칠 수 있다.

6. 인간의 기억은 이따금 부정확하다. 특정 부분만 지나치게 확대해 남아 있기도 하고, 선택에 의해 지워지기도 한다. 또한 세월에 따라 그 옷을 달리 입기도 한다. 그러므로 기억에 의존할 때는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이 내용들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사람들이 '생각의 오류'를 저지르는 이유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심리'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생각의 오류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철저한 회의주의자'가 되는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회의주의만이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지름길임을 강조합니다. 철저한 회의를 거치지 않은 믿음은 광신이나 맹신에 그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원하는 이유는 삶에서 확실성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은 아주 복합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흑백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편이 더 편해도, 자신의 믿음을 확신하는 편이 더 마음 편해도, 우리가 모르는 것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중략)
무언가를 믿을 때는 엄격해야 한다.
믿음을 뒷받침해주는 확실한 증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믿음을 유보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본문 중에서

한 개인도 물론이지만, 한 국가가 생각의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지도자들이 집단사고의 덫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하는' 덫에 빠지면,  국가의 운명을 가름하는 정책의 결정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오류로부터 벗어나거나 오류를 줄이기 위해서는 권력 집단 안에 '철저한 회의주의자'가 있어야 합니다.

집단사고의 덫에서 벗어나 사소한 문제까지 꼼꼼하게 의심하고 분석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정책이 옳다고 믿기 전에 그 믿음의 근거를 살펴보고, 객관적 증거를 구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4대 강 사업, 세종시 사업, 천안함 사건......현재 우리 사회를 뒤흔드는 중대 사안에 대해 권력 집단이 획일화된 집단사고로 오판을 할 위험성은 상존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국민들이 그 오판의 위험성 때문에 자기 목숨을 희생하기도 하고, 항의를 하기도 하고, 국제 사회에 정부와 다른 의견을 보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권력 안의 사람들은  자기들 의견과 다른 행동을 하면 무조건 국익을 해치는 행위로 치부해버리는 집단사고의 덫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들의 결정이 국가의 미래를 위해 옳다고 하는 '애국적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사람은 확신과 신념에 찬 권력 집단의 대변인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대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철저한 회의주의자'입니다.

그리고 그 회의주의자를 수용할 수 있는 '지성적 포용력'입니다.
저는 정 총리와 같은 지성인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는데, 너무도 쉽게 집단사고의 덫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기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그의 입에서 튀어 나온  '역사의식', '애국심', '국가 안보', '국익'이라는 단어들 속에서 고통과 절망의 지난 역사가 헐떡이고 있는 것 같아 슬픈 것입니다. 

국가의 미래를 가름할 현재의 중대한 사안들에 대해 집단 사고의 덫에서 벗어난 '철저한 회의주의자'들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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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태어나서 한세상 살다 보면 결국은 죽음이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예전에는 부모 형제가 죽거나 일가친척이 죽거나 친구가 죽게 되면 꽃상여와 요령소리와 구슬픈 상여소리로 저승으로 떠나는 영혼을 보내주었습니다.

지금은 장의차에 실려 떠나는 주검들이 대부분이지만,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꽃상여 타고 요령소리 들으며 저세상으로 가는 것을 가장 복된 죽음으로 여겼습니다.

아직도 산골이나 어촌이나 농촌에는 가끔씩 상여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거제군은 그 중에서도 유난히 그 풍습이 잘 지켜지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1971년에 통영과 거제섬을 연결해 주는 거제대교가 놓이기 전까지 어느 곳보다 전래의 생활풍습을 잘 보존해 왔던 거제도는, 80년대까지도 상여를 보관해 놓고 초상이 났을 때 빌려 주는 '상여집'이 동네마다 있고 상여소리 잘하는 소리꾼도 고을마다 한두 명씩 있었습니다.

출처 : http://blog.joins.com/dutldi/3758244

윤만식씨는 그 많은 상여소리꾼 중에서 경험이 많고, 절차에 밝고, 소리도 구성지게 잘한다고 소문이 난 인기 상여소리꾼이었습니다.

그러나 1920년 고현읍 용산리에서 윤대근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농촌의 청년으로 자랄 때까지만 해도 그가 상여소리꾼이 되리라고는 꿈조차 꾸지 못했습니다.

그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한 채, 아버지가 짓던 농삿일 돕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자랐습니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노래에 소질이 있어서 동네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진도아리랑> 같은 노랫가락이나 판소리를 한 토막씩 부르면 곧잘 따라 부르기도 했고, 총각 시절에 노래부르며 놀 때는 '일류' 라는 소리도 들을 만큼 목소리도 좋고 노래도 잘 불렀지만 그때까지는 취미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의 삶은 한동안 노래와는 상관이 없이 진행됩니다.

일제 말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만주나 일본으로 떠나는 바람을 타고 형이 일본에 노무자 노릇을 하러 떠나자, 잘못하다가 보국대에 끌려가서 전쟁터에 나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에 부모 몰래 삼십 원을 훔쳐서 밀수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쿠슈에 있는 조선소에 노무자로 취직한 그는 이 년 뒤에 고향에 돌아와서 김또수라는 건너마을 색시에게 장가를 든 뒤, 새각시를 집에다 두고 다시 돈 벌러 일본에 건너갔습니다.

거기서 일 년쯤 돈을 벌고 있으니까 뜻밖에도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는 부랴부랴 짐을 꾸려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으며 모아 두었던 돈 삼천 엔을 챙겨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배를 탔습니다.

"부산에 내리니까 일본돈을 한국돈으로 바꾸락카는 기라.
그란데 이십 엔짜리 지폐 다섯 장을 한국돈으로 바꾸어 오십 원을 주는 기라. 돈 반절이 없어져 버리는 걸 보고 나머지는 안 바꾸고 감춰 가지고 집에 왔지.
그런데 바꿀 데가 없어 돈을 한 푼도 쓸 수 없는 기라. 그때 마침 오촌 당숙 되는 분이 노가다 일 하러 일본에 간다고 해, 그래 이천칠백 엔을 주고 일본에 가서 물건 좀 사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그 뒤로 끝내 안 왔다 아이가.
조총련이 돼서 이북에 갔다든가 우쨌다든가, 아무튼 그 통에 삼 년간 죽으라꼬 고생해서 모은 돈 한꺼번에 다 날리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삐릿지."

가슴 아픈 경험으로 '공수래 공수거'를 살짝 맛본 그는 다시 땅을 파고 밭을 일구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묵묵히 일을 하며 가끔씩 친구들과 어울려 좋아하는 노래나 부르면서 지내던 그에게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6.25가 터지자 군대에 들어가서 전쟁터를 떠돌아다니다가 인민군 총에 허벅다리를 맞은 것입니다.

"우째 맞았는지 모르지만 눈을 떠보니 나 혼자 있는기라. 하루 낮 하루 밤을 혼자서 벌벌 기어 간신히 구출은 됐는데, 피를 너무 많이 흘린데다 수술한다꼬 다리를 잡아 째는 통에 몸이 상해 삐리고 다리 수술 후유증까지 겹쳐서 그 뒤로 얼굴이 까매지고 관절염이 생겨 삐릿제."

한창 기운을 쓰고 일을 할 나이인 서른 무렵에 상이 용사가 되어 고향에 돌아온 그는 푹 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거제 포로수용소>가 들어서는 통에 곳곳에 수용소 건물이 세워지고, 그 땅에 살던 주민들은 천막을 들고 바닷가나 산속을 찾아 이리저리 쫓겨다니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십만 명이 넘는 인민군·중공군 포로들과, 이십만 명이 넘는 피난민과, 그들을 관리하는 국군·미군들과, 십만 명이 넘는 원주민이 좁은 섬 안에서 복작댔으니 그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을지 짐작이 가는 일입니다.

몸이 아파서 일도 못 하지, 집이 없어서 움막이나 천막에서 살지, 농사지을 땅도 없어 산골로 다니면서 밭곡식이나 길러 먹지, 온갖 어려움이 한꺼번에 몰려든 속에서도 간신히 살아 남아 옛집에 돌아오니 이번에는 부친이 덜컥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모친과 아내와 아이들을 거느린 '상이 용사' 가장이 되어 그럭저럭 살았습니다. 힘든 일은 못 했지만 그래도 다리의 상처가 차츰 아물어 웬만한 품앗이일도 하고, 농삿일을 쉬는 철에는 멸치 잡는 배를 타고 나가서 그물도 걷고 자잘한 뱃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중 이번에는 또 아내가 아들 다섯, 딸 하나를 남겨놓고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병이 들었는디 육지에 가서 치료를 못 할 형편이라 야바우 의사한테 치료를 받았는데 그기 탈이 난기라. 마누라 죽고 얼마 안 있어 또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그러다 보니 사람 죽는 일에 이골이 나 있는데, 하루는 동네에서 초상이 났다고 나보고 상여소리를 해보라 안 카나."

어려서부터 취미가 있어서 <회심곡>이나 <백발가> 같은 것은 귀동냥으로 외우고 있었고, 또 여름에 나무 그늘에서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고 있으면 동네 할머니들이 귀가 솔깃해 가지고 모여들 만큼 노래에 맛이 들어 있었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내의 초상을 치르느라 장례 절차와 죽음에 대해 나름대로 경험과 식견이 생겨 있었던 터라, 그는 처음 하는 상여소리를 '상주들 눈물이 쏙 빠지게' 잘해냈습니다.

'향두가', '향도가', '행도가', '상두가', '상여가', '회심가'와 같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상여소리는 상여를 메고서 묘지까지 가는 동안에 부르는 일종의 장송곡입니다.

출처 :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D8741700

요령을 손에 쥔 앞소리꾼이 요령을 흔들면서 선창을 하면 상여꾼들이 "어행 어행" 또는 "어허이 어하" 또는 "어느어노 어허노", "어너 어너 어너리 넘차 어하너"와 같은 후렴을 합창합니다.

곡조는 대체로 비통하고 애절하지만 지방에 따라 다르고 또 부르는 사람에 따라 창법과 곡조와 가사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불리워진 상여소리만 해도 수백 종에 이릅니다.

그중에서도 거제도의 상여소리는 섬이라는 특수한 지역 사정 때문인지 육지의 상여소리와 많이 다릅니다.

이곳에는 육지의 상여소리에는 찾아볼 수 없는 '긴 소리'가 있는데, 긴 소리는 상여가 나가기 전에 죽은 사람의 부모 형제와 일가 친척들을 모아 놓고 서러운 가사로 죽은 사람의 말을 전하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같이 살다가 영감이 먼저 죽으면, '허- 우리 이씨 부인 이내 말씀 들어 보게. 내가 오늘 가는 길에 부인에게 할 말 있네. 오늘까지 살아왔던 고생스런 살림살이 한가한 날 몇이 되며, 즐거운 날 얼마던가. 지난 세월 살펴보니 꿈결 같고 허무하네.....' 하며 죽은 영감의 말을 대신하여 그의 아들과 며느리와 사위와 일가 친척들에게 일일이 하직 인사를 합니다.

이 '긴 소리'를 얼마나 구성지게 또 얼마나 그 초상집의 정황에 맞게 부르느냐에 따라 소리꾼의 솜씨가 결정되는 게 이곳의 독특한 풍습입니다.

윤만식 노인은 이 '긴 소리'를 하는 데 있어서 즉흥적으로 가사를 잘 지어내고, 또 그 지어낸 가사가 죽은 이와 일가 친척들과의 관계를 여실하게 잘 그려 눈물을 쏙 빠뜨리기로 소문난 소리꾼입니다.

물론 이 솜씨는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고 꾸준한 노력으로 생긴 결과입니다. 그는 남모르게 가사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내가 본래 좋은 노래 있으면 가사를 베끼는 게 취민기라. 그란데 첫 소리를 하다 보이 여기저기서 해달라꼬 부탁이 오는데 아무래도 가사가 딸려.
그래가 어디서 좋은 소리 있다카모 달려가서 배우고 가사는 한글로 적어 달라꼬 해 가주고 암기하고, 또 누가 유식한 사람이 있다카모 달려가서 옛날 유명한 사람들 글귀도 주워 듣고, 판소리도 주워 듣고, 삼국지도 주워 듣고 해 가주고 문서를 자꾸 불렸제."

선소리꾼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문서'라고 하는데, 이 문서의 많고 적음과 내용의 좋고 나쁨이 선소리꾼의 생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초상집에서 긴 소리를 끝낸 뒤에도 상여를 메고 나갈 때 육지에서 치는 요령 대신 꽹과리를 치면서 '짧은 소리'를 합니다. 묘지까지 가는 동안 짧으면 두세 시간 길면 반나절 내내 소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 가사를 외우고 즉흥적으로 만들어 부르기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는 노인이 죽었을 때는 <회심곡>이나 <백발가>를 주로 부르고, 젊은 사람이 죽으면 <화초타령>과 <갑자문>을 주로 부르고, 그 밖에 <육군제왕 애찬시>라는 노래도 즐겨 부른다고 하는데, 이 모두가 한 번 부르는 데 한두 시간씩 걸립니다.

'어하넘 어하넘 어하리 넘차 어하넘' 하는 후렴에 맞춰 같은 가락을 조금씩 변화시켜 가면서 '이 세상에 나온 사람 뉘 덕으로 나왔는가' 또는 '일만화초가 피었구나 그 꽃 이름을 불러 보세' 또는 '장화 청류 소년들아 이내 노래를 들어 보게'로 시작되는 노래들을 불러 가다가 길에서 농부를 만나면 농부들한테 복도 빌어 주고, 다리가 피곤하면 쉬어 가자고 농도 하면서 묘지에 당도한 뒤 '산을 넘고 골을 넘어 명산을 찾았는데, 황천문이 어딨느냐 황천문을 열어라' 하고 상주들한테 장난하며 관을 내려놓으면 그의 임무는 끝이 납니다.

육지에서는 관을 묻고 봉분을 덮을 때 지경소리도 하고 달구소리도 하지만, 이곳에선 달구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출처 : http://www.jeonlado.com/v2/ch03.html%3F...r%3D8850

"아는 사람 부탁으로 몇 번 나가 소리를 하기는 했지만도 직업으로 할 생각을 없었제. 그란데 갈수록 청탁이 오는기라.
잘한다꼬 자꾸 부르러 오니 안 갈 수도 없고, 어떤 때는 억지로 끌려가서 소리하고, 그러다 보이 나중에는 본격적으로 하게 됐지. 한창 기운 좋고 소리가 잘 날 때는 날마다 가다시피 했다 아이가.
그때는 목도 안 갈리고 피곤하지도 않고 십 리 밖에서도 소리가 들릴 만큼 기운이 좋았는데, 지금은 산에 한 번씩 올라갈라면 숨이 가쁘고 소리를 한두 시간만 해도 목이 잔뜩 쉬어서 계속할 수가 없으니 이제 정년퇴직할 때가 됐는기라."

서른 해가 넘게 상여소리를 해오는 동안 한 번도 돈을 얼마 내라든가 돈이 적다든가 하는 투정을 부려 본 일이 없고 평생 동안 남과 다투어 본 일이 없을 만큼 점잖고 조용하게 처세를 하며 살아온 그는, 그 처세의 공덕으로 말년이 다복하여 특별히 괴로운 일도 속 썩을 일도 없다고 했습니다.

새벽 여섯 시에 신현읍 고현리에 있는 집을 나와 <고현장의사> 옆의 약국에서 건강 음료수 한 병 마시고 장의사 문을 열고 신문을 본 다음, 바로 옆에 있는 노인학교에 들러 놀기도 하고, 다방에 들러 젊은 마담하고 농담도 하다가, 장의사 일도 거들어 주다가, 상여소리 부탁이 있으면 나가서 일을 해주고, 없으면 그럭저럭 소일을 하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는 한가한 삶이 계속되었습니다.

"요새는 전화가 와도 될 수 있으면 거절을 하는데 그라모 '윤 선생 그럴 수 있습니까? 내하고 원수졌소?' 하고 따지는 통에 안 갈 수가 없는기라.
이 소리라 카는 게 오장육부에서 나오는 거라 얼매나 힘든지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니 그럴 수밖에 없지."

그렇게 거절을 해도 한 달에 대여섯 번은 일을 나갔다 와야 됩니다. 그 또래의 노인네들은 이러다가 그가 영영 소리를 못 하게 될까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니 죽고 나먼 누가 소리하꼬?"
"젊은 사람 쌔고 쌨는디 그 사람들이 하지."
"하이고 그까짓 것도 소리라꼬. 나 죽거든 니가 꼭 소리해야 한다. 니 소리 듣고 내가 죽어야 할 낀데."

노인네들은 이런 소리를 주고받으며 서글프게 웃습니다. 윤 명창은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죽으모 누가 소리를 해주나?' 하는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치곤 합니다.

제가 그를 만났던 이십 년 전, 그는 자기가 죽었을 때 긴 소리도 처량하게 잘 불러 아들들과 며느리와 손주들을 펑펑 울려 주고, 꽃상여 타고 선산 가는 길에 짧은 소리도 구성지게 잘 불러 저승길의 극락왕생을 빌어 주는, 그런 솜씨 좋은 상여소리꾼의 소리를 듣는 것을 마지막 남은 간절한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평생토록 남의 저승 가는 길을 소리로 빌어주며 살아온 그에게도 죽음의 그림자는 어김없이 찾아 와 이제 그의 상여소리는 저승에서나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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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수 명창은 자신이 소리 광대로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안 친척들이나 친구들 앞에서도 여간해서는 판소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국악인의 최고 명예인 인간문화재가 되고, 광대가 전통예능인으로 우대 받는 세상에 살면서도 예전의 천대와 편견을 잊지 못했던 탓입니다.
 

출처 : http://www.ncktpa.go.kr/html/jsp/ncktpa...5A6%25AC

그러나 그가 1909년 7월 28일에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났을 때만 해도 판소리 광대가 되는 것은 천민의 신분을 벗어나 출세와 돈과 명예가 보장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잘만하면 임금 앞에서 소리도 하고 벼슬도 받을 수 있는 '화려한 직업'이었습니다.

그 역시도 그의 스승인 김창환 명창을 통해서 출세의 꿈을 키웠습니다.

“우리집이 나주군 봉산면 복룡리에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정창업 명창이시고, 아버님도 소리를 좋아하셔서 어려서부터 판소리를 즐겨 듣곤 했지. 17살 됐을 때에 아버님이 김창환 선생님 댁에 보내 거기서 먹고 자면서 배우게 됐지."
 
정광수 명창은 자신이 다산 정약용의 방계 7대손이고, 철종과 고종 연간에 어전광대로 활동한 서편소리의 대가 정창업 명창의 손자라는 것을 자랑으로 꼽습니다. 어려서 ‘천자문’과 ‘사략(史略)’을 뗀 뒤, 김창환 명창의 제자로 판소리의 길에 들어선 것도 그가 평생 자랑하는 일입니다.

김창환 명창은 고종 황제 앞에서 판소리를 하여 정3품의 명예벼슬인 당상관직을 받고 돈도 많이 번 뒤, 전남 나주군 삼도면 양화리의 절골이라는 곳에 넓은 터를 잡아 풍족한 말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풍신이 잘 생기시고, 행실이 분명하고, 효자시고, 인격이 갖추어진 분이셨어. 소리로 말하자면 송만갑 명창은 강한 상청으로 음이 높아 귀에 쟁쟁 울리고 정확하여 축음기에도 잘 받는 소리였는디, 우리 선생님은 음의 폭이 넓고 굵고 후령음이 무서웠지.
특히 우리 선생님은 늘상 인격을 강조하셔서 성악은 인간이 되어야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 그리고 고종 황제를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지 동네 뒷산에 사당을 지어서 그분 영정을 모셔놓고 날마다 올라갔다 내려 오셨어. 그 분 밑에서 5년쯤 배웠지.”

그러다가 어느덧 스물두세 살이 되어 ‘꽃기운’이 펄펄 살아나는 청춘이 되었습니다.

“내 자랑은 아니지만 그 무렵에는 풍신이 좋았어. 몸집이 두텁고 점잖고 또 예쁜 구석도 있어서 어른들이 귀여워했지. 그러니 나도 자연히 벌렁거리는 마음이 생겨. 남들이 하도 잘 생기고 소리 잘한다고 추어대니까 정말 그런 줄 알고 으스댔지. 그러다가 목포에 있는 권번에 성악 강사로 가게 됐지. 말하자면 첫 취직인 셈이여.”

목포 권번의 강사를 하며 지내는 동안, 재기발랄한 젊은 기생들 틈에서 잘 생기고 소리 잘하는 젊은 총각이 선생님 노릇을 하려니 그 속이 온전할 리가 없었습니다.

“안되겠어. 여자들 속에서 연애나 하고 공부는 못 허고 가르치기만 하니 실력이 줄어. 그리고 여자들이 어찌 극성스럽게 구는지 내 개인 시간을 온통 빼앗아 가고, 이 여자 저 여자가 나를 사이에 두고 싸움을 벌이는 통에 골치가 아파서 못 있겄어. 그래서 그만 두고 나와 삼성암이란 암자에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지.”

수많은 여성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암자에서 먹고 자면서 2년 동안 스승도 없이 그야말로 죽자사자 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무리한 연습으로 몸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암자 뒤에 있는 절벽에서 하루종일 소리를 지르면 목이 잠겨. 어찌나 목이 잠기는지 스님한테 밥 달라는 소리도 못혔어. 그래도 구슬땀을 흘리면서 소리를 지르면 소리가 살살 터져나와. 그 소리를 '지름상성'이라고 혀. 한없이 높은 소리가, 자기도 생전에 들어보지 못한 소리가 어디에선가 튀어나와. 그 소리에 미쳐. 제 소리에 제가 반해 가지고 아침부터 절벽 끝에 있는 석대에 올라가서 소리허고 점심 먹고 또 허고......
그러기를 일년쯤 하니까 소리는 좋아졌는디 몸에 이상이 왔어. 힘만 조금 쓰면 창자가 나올라고 혀. 탈장기가 생긴 거지. 겁 없이 무식하게 힘을 썼으니 뱃속이 온전할 리가 있을 거여. 그 후유증 때문에 많이 고생을 혔어.”

방법이야 어떻든 지독한 공부 덕분에 그의 소리 기량은 한껏 늘었고, 탈장도 치료가 되었습니다. 그는 순천 권번에서 성악 강사를 하다가 유성준 명창에게 더 공부를 하려고 진주로 갔습니다.

유성준 명창은 순천에 살던 장자백 명창의 제자로 소리제가 좋고 공력이 있어서 독특한 실력을 인정 받던 명창이었습니다. 특히 「수궁가」를 잘해서 많은 제자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전세방 하나 얻어 놓고 봄, 여름 동안 공부를 하는디 기초가 있어 놓으니까 번쩍번쩍 공부가 잘 돼. 그래서 <수궁가>, <적벽가>를 다 떼고 집에 돌아오는데 선생님이 정이 들어서 우시는 거여. 선생님뿐만 아니라 그 진주 권번의 수많은 기생 중에서도 우는 사람 많었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울린 그는 29살이 되었을 때, 드디어 서울로 올라와 ‘조선 성악 연구회’를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소리 실력을 인정 받아 바로 경성 방송국에 가서 녹음을 하고, 공부하면서 공연다니는 생활을 3,4년 하던 끝에 신의주에서 해방을 맞게 된 그는 본가가 있는 장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스무살 때에 장흥 사는 안삼차라는 장흥 사는 처녀에게 장가든 뒤로 소리 공부한다 소리 선생한다 하며 잠시도 집에 붙어 있질 않았지만, 아내는 군소리 한 마디 없이 살림을 꾸려 나갔습니다. 그 뒤 광주 권번에 일자리가 생기자, 아예 광주로 살림을 옮겨 그곳에서 3년쯤 지내다가 6.25전쟁을 맞았습니다.

"가족들 데리고 피난 다니느라 죽을 고생했지. 수복되고 다시 광주에 가서 가르치고 있다가 이듬해에 광주 국악원을 창립했고, 2년 뒤에 불화가 생겨서 민속예술원을 따로 만들어 강사 노릇을 했지. 그 일에 발목이 잡혀서 20년을 광주에서 살다보니, 이럭저럭 광주가 제2의 고향이 되고 말았어"

정든 광주에서 20년쯤 지내던 그는 결국 동료들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서울로 올라왔고, 1964년에는 판소리 「수궁가」의 인간문화재가 되었습니다.

“소리라는 것, 즉 음악에는 예의 체통이 있어. 칠정과 희로애락을 살리고 인의예지를 살리는 것이 소리니 함부로 곡조를 내두르고 허망히 하면 안될 것이여. 목성음으로만 듣기 좋게 흥얼거리고 놀기 좋게 불러도 안 되며, 법통과 격식에 맞게 정중히 해야 될 것이여.”

이렇듯 고상한 음악관을 가지게 된 탓에 그는 아무데서나 소리를 하지 않았고, 소리꾼으로서의 활동도 그리 활발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소리 광대 된 것을 부끄러워 하는 것은 아니여. 다만 세상에서 처신하며 살아가려니 꺼리는 게 많아서 그러는 거여. 내가 아무리 내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겨도 사람들이 안 알어주는디 어쩔 것이여. 그리서 난 누가 날 광대라고 부르는 걸 싫어혀. 집안이나 종친회에도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몰라.”

이처럼 광대들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이 사회의 뿌리깊은 편견에 정중한 처신으로 항거하며 지내던 그는 2003년 11월 2일, 판소리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재' 지정받기 닷새 전에 삶을 마무리했습니다. 

지금은 광대를 천대하는 일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서양의 광대들에 비해 초라한 대접을 받는 전통 광대들의 현실을 볼 때, 그의 항거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나름대로의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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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지방선거로 인해 정치권의 지형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정치권의 갈등은 만만치 않게 증폭될 것입니다. 
그에 따라 그동안 정부가 핵심적으로 추진해 온 정책들의 앞날도 험난해 보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정책이 ‘세종시 수정안’과 ‘4대강 살리기 사업’입니다.

4대강 사업에 대해 민주당은 6월 국회에서부터 철회나 수정을 요구할 계획이지만 청와대는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4대강 사업이 현 정부의 핵심정책인 만큼 이를 철회하거나 수정한다는 것은 정책의 기조가 붕괴된다는 위기의식이 깔려 있는 듯 합니다. 

한나라당도 4대강 사업을 전면 중단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반대 여론이 거세다는 것을 이번 선거에서 인식한 만큼 개선할 부분은 수정하거나 보완한다는 여지를 남겨 놓고 있습니다.

출처 :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3D60483

세종시 문제의 경우, 민주당 등 야권은 수정안을 폐기를 주장하고 있지만 청와대는 종전의 입장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청와대의 입장에 비해 한나라당에서는 수정안 추진 동력이 다소 떨어지는 분위기입니다. 새로운 전략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가 솔솔 흘러나옵니다.

출처 : http://www.asiae.co.kr/news/view.htm%3F...6sp%3DEC

이처럼 정치 지형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정치력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소통과 타협과 절충을 일상화해야 할 구조로 변한 것입니다. 이 구조에 적응하기 위한 최선의 비법은 오직 이번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민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에 따르는 길뿐입니다.

2010년 올해 초에 정치권에서 자주 오르내린 사자성어로 ‘여민동락(與民同樂)’, ‘상하동락(上下同樂)’, ‘수능재주 역능복주(水能載舟 亦能覆舟)’와 같은 말들이 있었습니다.

이번 선거는 정치인들의 입에 발린 그 말들이 현실 정치에서 얼마나 무서운 결과로 정치권을 휩쓸었는지 실감하게 해주었습니다. ‘민심과 함께 하지 않고(與民不同樂)’, ‘권력자가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지 않으면(上下不同樂)’ ‘배를 띄워준 민심이 언젠가는 배를 엎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 것입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 정치권은 민심의 흐름을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했을 것입니다. 말로는 언제나 민심을 들먹였지만, 그 민심이 얼마나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 잘못 파악된 흐름인지 알고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론조사도 믿을 수 없고, 시중에 떠도는 말들도 진의를 알기 어렵고 ,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민심의 흐름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제 정치권은 그 강물 속 보이지 않는 곳에 흐르고 있는 ‘바닥 민심’이 마치 '어뢰'처럼 다가 와서 자신들이 띄워 놓은 배를 엎어버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민심은 정치인들이 일신의 영달을 도모하거나, 권력욕과 출세를 달성하기 위해 일회용으로 쓰이는 도구가 아닙니다.

이번 선거는 그러한 정치권의 행태에 대한 민심의 매서운 경고이며 심판이었습니다. 정치권은 이 같은 민심을 제대로 파악하고 자기혁신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예전처럼 민심을 자신들 위주로 해석해서 불리한 민심에는 귀를 닫고, 유리한 민심만 귀에 담는 구태를 되풀이한다면 진정한 민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민심은 사심을 갖지 않고 진정으로 자신들을 위해 올바르게 일을 할 정치 일꾼을 원하고 있습니다. 강물의 깊은 바닥으로 내려가 바닥 민심을 찾아내어 그것을 채워주려고 노력하는 일꾼을 원하고 있습니다. 민심과 함께 웃고, 민심과 함께 울고, 민심과 함께 아파하는 일꾼을 목마르게 원하고 있습니다.

민심을 따르지 않는 정치 세력에 대해서는 언제든 그 배를 뒤집어엎을 무서운 흐름이 존재하고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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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정선 아라리>의 지킴이 최봉출 명창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아리랑’은 한국을 대표하는 민요인 만큼, 이 나라 구석구석에 그 자취와 흔적을 남기고 있는 노래입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의 신하 7명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벼슬을 그만 두고 강원도의 깊은 산골인 정선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정선군 남면 낙동리 거칠현에서 밭을 일구고 산나물을 뜯어 먹으며 살던 그들은 쓰러져 간 고려의 옛 시절과 멀리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 하며 시를 지어 노래로 불렀습니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 장마가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며는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삼월이 아니라며는
두견새는 왜 우나

처음에 어려운 한시로 지어졌던 이 시는 차츰 사람들의 입에 올라 쉽고 친근한 우리말로 바뀌게 되었고, 가락도 점차 이 지방 민요의 가락에 얹혀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 주게” 하는 후렴도 붙고, 이 노래를 부르고 즐기는 사람들이 저마다 노랫말을 만들어 붙이는 통에 어느덧 오백 가지가 넘는 노랫말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해 옵니다.

그렇게 해서 전해진 <정선아라리>는 유난히 강원도의 지명과 풍물과 자연과 삶을 노랫말에 담고 있습니다.

아우라지 강가의 처녀 조각상. 출처 : http://roadtour.tistory.com/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를 건너 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님 그리워 나는 못살겠네

정선 읍내 물레방아는
물살을 안고 도는데
우리집의 낭군은
날 안고 돌 줄 몰라

아질아질 성마령
야속하다 꽃베리
지옥 같은 정선 읍내
십 년 간들 어이 가리

아우라지, 정선, 성마령, 꽃베리와 같은 강원도의 산이나 강이나 고갯마루들이 사랑, 이별, 만남, 죽음과 같은 삶의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배경으로 풍부하게 등장합니다. 이 가사와 가락은 이 고장 사람들에게 속속들이 전해져서 심메마니들은 산에서 약초를 캐면서, 농부들은 밭에서 일을 하면서, 여인네들은 나물을 캐고 김을 매면서, 자신들의 '흥 과 '한'과 '멋'을 이 노래에 실어서 불렀던 것입니다.

최봉출 명창이 정선군 북면 남평리에서 최승화씨의 4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던 1919년 무렵에도 이 고장에서 노래 부른다고 하면 곧 <정선 아라리>를 부른다는 말로 통할 만큼 이 노래는 일상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농꾼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 문전에도 가보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배고픔과 가난에 시달리면서 농사일로 잔뼈가 굵어가며 자랐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이 있었다면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노래를 마음껏 불러제치는 것이었습니다.

노래를 무척 좋아하는 아버지와 노래 잘 부르기로 소문난 형들에게 뒤질세라 그 역시 어려서부터 목청이 곱고 노래에 남다른 소질을 보여서, 언제나 소년 명창으로 꼽히는 실력을 보였습니다.

게다가 동네 총각들과 함께 어울려 이웃 동네에 사는 정명로라는 명창에게 정식으로 <정선 아라리>를 배운 뒤로 그의 노래는 귀동냥 풍월에서 확실하게 전통 창법을 익힌 튼튼한 소리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정명로라는 분은 본래 한량인데 <정선 아라리>를 잘 부르기로 소문이 났던 사람이지. 그때 정선에 이름났던 명창으로 고덕명, 김천유, 박순태, 정명로 이런 분들이 있었는데, 나는 정명로씨하고 박순태 두 분한테 배왔지.”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오던 노래이니 그동안 이 노래를 뛰어나게 잘 불렀던 명창이 수도 없이 많았을 터이지만, 아깝게도 그들의 이름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다만 100여년 전쯤에 이 고장에서 이름을 떹치던 명창들은 입에서 입으로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1876년에 정선에서 태어나 소년 때부터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돌며 이름을 떨친 고덕명 명창입니다. 그는 가사도 잘 지어 불렀다고 하는데, 그가 죽은 뒤에 “아라리 잘하기는 고덕명이요, 한 번 가니 그 소리조차 그만일세”라는 가사가 만들어져서 그를 기릴 만큼 이 고장에서는 최고로 꼽히는 명창입니다.

또 1885년에 정선군 북면에서 태어나 인근을 두루 돌아다니며 아라리를 불렀던 김천유 명창이나, 1896년에 북면에서 태어나 함경도 원산이나 회령 등지를 떠돌아 다니면서 여장을 하고 <정선 아라리>를 불러 이름을 떨치고 음반 취입도 한 박순태 명창이나, 1900년에 평창에서 출생하여 정선의 북면에 옮겨와 살면서 명창으로 이름을 떨친 정명로 명창 등이 이 고장의 노래를 빛낸 명창들입니다.

이들 중 정명로 명창과 박순태 명창에게 직접 노래를 배운 그의 솜씨는 총각 때 이미 동네에 소문이 나서, 혼인식이나 환갑잔치 할 때 곧잘 불려가서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스물한살 때 같은 마을에 사는 전옥란에게 장가를 간 뒤로는 집안 살림 꾸려나가기에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제몫으로 가진 밭뙈기 하나도 없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옥수수, 감자, 메밀과 같은 밭농사 일을 쉴 새 없이 하며 살림을 꾸려 나갔습니다.

그러면서도 산에서 나무할 때나 밭에서 일할 때, 어려서부터 배운 아라리를 부르면 절로 신명이 나서 힘든 일도 수월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노래가 본래 <정선 아라리>가 맞는 이름인데, 요새는 <정선 아리랑>이라고 많이 부르대. 그런데 이 노래는 장단도 없고 악기도 필요없어요.
그저 여자들은 물 떠다 놓고 바가지 엎어 놓고 부르거나, 남자들은 지게 작대기를 두드리고, 술먹을 때는 젓가락으로 두드리면서 자기 신명에 맞추어서 부르는 거야.
그때는 잘 부르는 사람 못 부르는 사람없이 모두 다 부르고, 늙으나 점으나 다 좋아했으니 ‘아리리 잘한다’하고 소문이 나면 술도 공짜로 얻어 먹고 아주 인기가 최고였지.”

강원도 지방의 대표적 민요로는 <강원도 아리랑>과 <한 오백년>과 <정선 아라리>가 있는데, 세 노래의 맛이 조금씩 다릅니다.

아리 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 아리 얼씨구 노다가세
아주까리 동백아 여지마라
누구를 괴자고 머리에 기름

하고서 타령장단으로 부르는 <강원도 아리랑>은 소박한 가락이 흥겹고 경쾌하게 굽이굽이 넘어가는 맛이 있습니다.

한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
한 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대중가요만큼이나 널리 알려진  <한 오백년>은 한없이 애절하고 처량한 가락을 탄식하듯 애소하듯 절절이 뽑아내는 맛이 일품입니다.

<정선 아라리>는 ‘엮음 아리랑’과 ‘긴 아리랑’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임자 당신 나 싫다고 울 치고 담 치고
배추 김치 소금 치고
열무 김치 초 치고
칼로 물 벤듯이 그냥 싹 돌아서더니
이천 팔십리 다 못가서 왜 또 날 찾아왔나

‘엮음 아리랑’은 이런 가사들을 주섬주섬 엮어가는데, 그 가락이 들으면 들을수록 감칠 맛이 있고 구수한 것이 특색입니다. 그 가사 또한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것에서부터 생활의 고통, 인생의 허무함, 임을 향한 그리움 등 격조 높은 시에서부터 익살스러운 재담까지 다양하여 가만히 귀 기울여 듣노라면 절로 탄성을 발하게 하는 멋들어진 말들이 구석구석에 숨어 있습니다.

‘긴 아리랑’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 주소”하는 후렴에, 처량하고 슬픔에 겨우면서도 구성지게 풀어나가는 가락을 실어 부릅니다. 그 가락은 구슬프면서도 구성지고, 뚝배기 맛처럼 담백하면서도 깊이가 있어 듣는 사람의 가슴 속에 묵직하게 파고 듭니다.

가사도 수백 가지가 다양하게 전해 오는데, 한일합방 후부터 일제 말엽까지는 나라없는 민족의 서러움과 울분을 노래한 가사가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가사는 탄압을 받아 점점 사라지고, 애정과 남녀 관계를 읊은 노래가 주로 불렸습니다. 그런 판국에도 징용과 징병에 끌려가는 임을 애태워 하는 이런 가사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간다지 못간다지 얼마나 울었나
송정암 나루터가 한강수 되었소
일락서산에 해는 지고 싶어 지나
나를 두고 가시는 님은 가고 싶어 가나

또 해방 뒤에 최봉출 명창이 직접 지어서 불렀다고 하는 다음과 같은 가사들은 민요가 시대정신을 얼마나 훌륭히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인가를 증명하는 가사들입니다.

삼십육년 간 피지 못하던 무궁화꽃은
을유년 8.15에 만발했네
사발 그릇이 깨어지며는
두세쪽이 나는데
삼팔선이 깨어지며는
한덩어리로 뭉친다

한편으로 고달픈 농사일을 꾸려 가면서, 한편으로 <정선 아라리>를 부르면서 흥을 풀고, 술을 마시고, 때로는 바람도 피우면서 살던 그에게 뜻밖에 유명해질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961년 12월에 정선군에서 개최한 ‘아라리 경창 대회’에서 1등으로 입상한 것입니다.

“그때 상금으로 돈 6환을 받았는데 상당히 큰 돈이었어. 그리고 부상으로 드레스 미싱기를 받아서 그걸 맏며느리한테 물려줬지.
일등을 하고 나니까 여기저기서 노래 좀 해달라고 청이 오는데 어찌나 바쁜지 한달에 열흘쯤은 밖에서 노래 부르고 살아요. 그러니 집안은 돌볼 틈이 없고 농사일도 점점 소홀하게 됐지.”

그렇게 한 10년쯤을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노래도 부르고, 노래 안 부를 때는 집에서 일을 하고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에 광주에서 열린 전국민속경연 대회에 강원도 대표로 출전하여 1등 상을 탄 뒤 도 지방 무형문화재가 되자, 농사일을 아예 남에게 맡겨버리고 노래부르고 가르치는 일이 생업이 되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무대에 나가서 노래 부르는 것이 떨리고 겁이 나더니, 나중에는 떨리는 게 아니라 더 신이 나고 기분이 좋아져.
텔레비나 라디오에도 나가고 레코드 취입도 두 번이나 하고, 일년 중에 정선 군민의 날에 하는 ‘정선 아리랑제’나 민속예술경연대회 같은 때는 꼬박꼬박 나가고 그러다보니 이제는 일하면서는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되고, 무대에 서서만 노래부르는 습관이 들어버렸어.”

어찌됐든 그렇게 지내다가 부인이 저 세상으로 떠나자 역시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사는 이순옥 할머니와 재혼을 한 뒤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정선군 북면 구절리로 이사를 했습니다.

출처 : http://makcbg0.com.ne.kr/arijung14.htm


20여년 전 맑은 계곡이 흐르는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모롱이에 오롯이 들어 앉은 그의 집을 찾아 갔을 때, 두 내외가 오순도순 정을 주고 받으며 노후를 의탁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쓸쓸하면서도 정겨웁기 그지없었습니다.

“이 <정선아라리>는 정선 사람이 아니면 제 맛을 내질 못해. 그리고 요새 젊은 사람들이 부르는 것은 그 흉내나 내는 거지 제대로 부르는 것이 아니야.
또 라디오에서 무슨 가수가 우리 <정선 아라리>를 부르는 것은 엉뚱한 거야. 나도 한번 그렇게 불러보려고 해봤는데 안 돼요. 이 노래의 참맛을 알고 부르고 또 그 참맛을 제대로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이제 만나보기 어렵게 됐어”

시대의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노래를 지켜 온 이런 분들의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삶이 오늘의 우리에게 귀한 가락 또하나를 전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그의 삶이 소중하게만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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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한승호 명창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판소리의 내용이 복잡하고 다양한 것과 같이 소리꾼의 재주도 가지가지입니다.

목청이 좋은 소리꾼이 있는가 하면, 목청은 안좋아도 음악적인 표현력 곧 '목구성'이 뛰어난 소리꾼이 있고, 전체 판의 구성을 잘 짜는 곧 소리를 '가지고 노는' 솜씨가 뛰어난 소리꾼도 있습니다. 한승호 명창은 그 중에서도 ‘가지고 노는’ 소리를 가장 높이 치는 명창이었습니다.

“소리꾼은 목만 좋아 가지고는 안돼야. 전술이 있어야 돼. 소리를 가지고 놀면서 새 것이 자꾸 나와야지. 지루하게 한 것 또 하고 또 하면 누가 들을라고 헐 것이여.”

소리를 '가지고 노는' 일은 어려서부터 판소리를 듣고 자라나, 판소리에 속속들이 통달한 대명창들에게 공부를 한 이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함부로 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출처 http://newslink.media.daum.net/news/20060628194005932

그가 1923년에 전라남도 광주시 금남로에서 한성태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 그의 부친은 근방에서 소리꾼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일반적인 소리꾼하고 다른 비밀이 있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동학 의병에 참가하신 뒤로 아버지도 의병에 가담하셨어. 그런디 한일합방이 되고 친구들은 모두 의병에 나가셨는디 아버지는 안 나가셨지.
왜냐하면 우리 아버님이 점잖고 선비 같은 분이신지라, 친구들이 자네는 투쟁헐 사람이 아니니 소리나 허고 가만이 앉아 있으소. 우리가 대신 싸울테니 하셨더래.
그래서 의병 명부에는 들었어도 의병 활동은 안 하시고 소리를 허시면서 생명을 보전혔는디, 그렇게 소리히서 번 돈을 몰래 서울에 가서 의병 친구들한티 주고 오셨대야. 말허자면 군자금 조달을 허신 거지.
가족들이야 그때는 그런 사실을 일체 몰랐지. 그러다가 내가 여덟살 때 돌아가셨는디, 마흔 살밖에 안되신 분이 하도 일본놈한티 불려가서 혼도 나고 분함을 많이 당해 골병 들어 돌아가신 거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광주 권번의 소리 선생이던 장판개 명창을 큰아버지라 부르며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그때에 명창들이 우리집에 자주 드나들었고, 아버님이 그 분들더러 형님이라고 불렀지. 또 아버님 처세가 점잖고, 의병 활동을 하는 줄 모두 알고 계셔서 속으로 모두 좋아하셨어. 그래서 그 분들에게서 조금씩 소리를 배우다가 장판개 선생님에게 친아들처럼 사랑을 받음서 공부를 했지.”

장판개 명창은 본래 땅재주를 넘다가 판소리로 길을 바꿨는데 북에도 일가를 이룬 명창이었습니다. 나라를 뺏긴 한이 맺혀 고향인 순창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광주 권번에서 초빙하여 소리 선생으로 온 터였습니다. 나중에 명창이 된 그의 아들 장영찬과 형님 아우하면서 소리 공부를 하던 그는 일 년쯤 공부를 한 뒤에 서울로 올라가서 조선성악연구회의 연구생이 되었습니다.

“낙원동 친척집에서 먹고 자면서 송만갑 선생님한티 배웠지. 그런디 이 분이 아버님한테도 스승이라 내가 걸음마할 때 나를 보셨다고 하시며 할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셔서 할아버지라고 불렀지.
이 분이 어찌나 귀여워 하시는지 다른 사람한테는 학채를 받는디 나한티는 안 받어. 안 받는 것은 고사허고 가끔씩 돈을 주셔. 밥 사먹으라고.”

그렇듯 사랑과 귀염을 받으며 소년 명창으로 자라난 그는 대명창들에게서 인자하면서도 엄격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특히 송만갑 명창은 나라 잃은 가객이 술 담배 먹고 방탕하면 안된다고 하며 제자들에게도 술 담배를 못 하게 했습니다. 송 명창은 체구는 조그마했으나 몸이 강철같이 튼튼해서 일흔이 넘도록 일선에서 활동하며, 후배들에게 두려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에게서 3,4년 간 공부를 한 뒤에 고향인 광주로 내려오니 광주의 애호가들이 서울 가서 배운 소리 한 번 해보라고 하는 통에 여기 저기 불려 다니며 소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소리를 듣고 난 노인들이 “대선생한테 배워서 소리는 좋은디, 소리를 참으로 헐라먼 김채만제를 배워야 허겄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김채만(1865~1911)은 이미 고인이 된 명창이라 본 적도 없고 소리조차 들은 적이 없었지만, 그의 소리제를 이어 받은 제자들이 몇몇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들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 소리는 선생님하테 배울 때보다 혼자 연구하며 제 길을 찾아갈 때가 제일 어려운 법이여. 그때는 누구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저 혼자서 깜깜한 산길을 가는 심정이었지.
나는 김채만 선생 제를 찾을라고 그 고생을 혔어. 근디 한 대목 두 대목 찾아서 해보니 정말 좋아. 진짜 깊은 소리맛을 아는 사람은 그 선생 소리를 안 좋아 할 수가 없어.”

김채만은 전라남도 능주에서 태어나 고종 때에 활약하다가 쉰 살 무렵에 세상을 떠난 명창입니다. 목청이 곱고 멋이 있고 고아하기로 당대에서 으뜸이었고, 장단이 변화무쌍하고 기묘한 성음으로 듣는 사람의 등짝에서 땀이 났다 추운기가 돌았다 눈물이 돌았다가 웃게 하는 재주가 다른 소리꾼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뛰어났다고 합니다.

“높은 음으로 올라갈 때는 낙락장송 높은 가지 끝끝터리 매달린 가지처럼 한없이 높은 공중에서 가지고 놀다가 뱅뱅 돌려서 탁 떨어뜨리면 귀머거리도 무릎을 친다는 소리였어. 그리고 성음, 장단, 선율에 통달을 해서 박자는 박자대로 달아 놓고 소리는 소리대로 가고......
여기다 갖다 놓고 저기다 갖다 놓아 소리를 벌려 놓은 다음에 기묘한 방법으로 몰아서 맺는 솜씨가 사람의 오장을 긁는단 말이여. 그리고 소리를 '통성(通聲)'으로 질러대는 것이 아니고 '암성(暗聲)'으로 막아서 올리고 '세성(細聲)'으로 가늘게 양념을 치는 기술이 뛰어 난 분이셨지.
그래서 노인들 말씀이 상청으로 위에서 가지고 노는 기술은 송만갑이 으뜸이고, 목청 크고 호령 잘하기로는 이동백이 으뜸이고, 사람의 오장육부를 갉아대기로는 김채만이 으뜸이라고들 하셨어.”

그는 스승에게 배운 소리를 연습하고, 또 새로운 소리를 찾아다니느라 여러 절을 떠돌아다니고, 어떤 때는 시골의 골방을 얻어 소리공부에 골몰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당시 판소리계 최고의 인기 스타였던 임방울 명창이 창극단을 꾸며 놓고 같이 활동하자고 “꼬이는 통에” 한동안 그와 함께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연을 했습니다.

“내가 소리를 배워서 여기 저기 불려다님서 푼돈 얻어 쓰고 포장 쳐 놓고 돈벌이 허는 거 안 좋아 허는디, 그때는 그거라도 안 허먼 극빈자들이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던 세상이라 할 수 없이 따라다녔지.
그리고 그때 극단을 움직이려면 반드시 '신민의례(臣民儀禮)', 요새로 말하자면 국민의례를 해야했어. 모두들 기립해서 동쪽을 향해서 절을 한 다음에 ‘고꼬꾸 신민노 가까이’ 어저고 하는 '황국 신민 서사'를 외워야 했어.
'나는 황국의 신민으로서 천황폐하께 충성을 하고' 어쩌고 하는 말이었는데 의병 활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분의 자식으로서 참 부끄러웠지.”

그러한 가운데 만주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때 만주 개척단 동포들이 보여 준 환호를 그는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그때에 유명한 유행가 가수였던 백년설, 장세정 이런 사람들하고 우리 국악단하고 같이 갔는디 개척단 제1단에는 전라도 광산군에 살다가 떠나 온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어.
근디 이 사람들이 유행가 할 때는 심드렁하다가 우리가 나가서 소리를 하니까 '얼씨구 절씨구' 춤을 추고 울고 불고 난리가 나버렸어. 마치고 나면 '또 해라!' 하는 통에 날을 새고 소리를 할 지경이었어.
제2단에는 경상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디 그곳에서도 어찌나 사람들이 열광을 하는지 데모가 날 지경이었응게.
그러자 우리를 데리고 온 일본 놈 단장이 ‘참으로 무서운 민족이다. 우리가 총 갖고 한국 사람 중국 사람 다 죽일 수는 있어도 저 정신은 도저히 죽일 수가 없다. 참으로 당신들 소리가 좋소. 내가 들어도 들을수록 좋소’ 하고 탄식을 허고 말았어. 그때 나도 국악이 얼마나 무서운 민족 정신을 가지고 있는가 확연히 깨달아버렸지.”

소리 광대로서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에 차츰 눈을 뜨게 됐을 무렵, 그에게 소집영장이 날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본놈들이 시작해 놓은 전쟁에 나가서 개죽음 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그 길로 ‘튀었습니다’.

광주에서 무등산을 넘어 능주로 튀고, 거기서 담양으로, 담양에서 다시 능주로 첩첩산중으로만 다니며 남의 집 헛간이나 쓰러져 가는 절방에서 고픈 배를 틀어잡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징병기피자의 고생을 몸서리 나게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광주 집으로 돌아오니 모두들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야단들이 났으나 그에게는 기쁨을 느낄 기운마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한참동안 집에서 쉰 뒤에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웠던 박동실 명창을 찾아갔습니다.

“저는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소리를 해야지.”
“소리 집어 치우고 농사나 짓고 싶어요.”
“그런 말 마라. 잘 살든 못 살든 이걸 배웠으니 이걸 버리면 안된다.”
"기운이 없어서 악쓸 힘도 없어요. 그리고 일본놈들한티 빌붙어서 소리허던 놈들이 해방이 됐다고 설치는 꼴도 보기 싫어요.“
“그렇다고 소리를 놓으면 되나. 어떻게든 꼭 소리를 하도록 해라.”

선생님의 간곡한 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다시 소리를 하겠다고 다짐은 했으나 속속들이 골병이 든 쇠잔한 몸 때문에 용기가 안난 그는 집에 돌아와서 조용히 소리를 닦아 나갔습니다. 소리꾼의 길에 들어 선 사람이 흥행무대를 외면하고 정통 판소리의 길을 지켜가려니 그 고생이야 뻔한 노릇이었습니다.

“한 번은 서울에 장영찬이를 만나러 갔다가 소리 좋아하는 부자가 내 소리를 듣고 싶어한다고 히서 갔지. 소리를 하고 났더니 탄복을 하고 광주서 뭐하냐고 묻대.
'공부해요.' 그랬더니 '벌이가 없을텐데 어떻게 공부를 하지요?' 그래. '밀가루 한 푸대 사다 놓고 수제비 끓여 먹고 공부해요.' 그랬더니 옷 한 벌 맞추고 밀가루 몇 푸대 사라고 돈을 주대.
그래 내가 화를 벌컥 내면서 '그런 소리 마시오. 내가 소리 들려주고 남한티 돈 몇 푼 구걸하는 사람으로 보이오? 그런 소리 말고 인연이 닿아서 만났으니 즐겁게 놀고 헤어집시다.' 그러고 나서 그 사람 하고 며칠 동안을 밤낮없이 놀고 내려왔어.”

그토록 오기가 세고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인기 얻는 일에나 돈 버는 일에는 성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판소리의 공력은 누구보다 깊어져서 웬만큼 실력 있는 명창도 그 앞에서는 함부로 소리를 하지 못할 만큼 실력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의 소리는 소리의 맛이 깊고, 가운데에서 밀어 올리는 소리가 멋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늘게 뽑아 올리는 소리에는 미묘한 가락이 나오고, 특히 입 안에서 돌려내는 아구성이 변화무쌍하고 옛맛을 가장 많이 지닌 명창으로 인정받습니다.



그 뒤 서울로 올라 온 그는 1980년에 판소리 「적벽가」의 인간문화재로 지정 받게 되었습니다.

“판소리 허는 것은 팔자속이여. 타고 나야 돼. 지가 지 소리에 반해가지고 죽자 사자 소리를 허면 득음이 되고, 꿈에도 바라던 소리가 목에서 튀어 나오면 부귀공명이 문제가 아니여.
그러게 옛날에 아편 하시던 어떤 분이 '나는 약으로 아편쟁이인데 너는 소리로 아편쟁이로구나' 하고 말하더군. 그만큼 미쳐야 돼. 그리고 소리꾼도 여러 가지여. 돈만 주면 아무디나 가서 소리허는 놈 있고, 배가 고파 굶어 죽어도 안 헐디서는 소리 안 허는 놈이 있어. 또 소리를 못 쓰게 허는 놈은 인간성도 안 좋고, 소리를 잘 허는 놈은 인간성부터가 돼먹었어.
제자들을 가르쳐봐도 이것으로 목매달고 배우는 놈이 없어. 전부 벼슬허고 돈 벌라고 허지. 인기가 없고 돈도 못 버는 판소리를 누가 헐라고 헐 것이여. 우리같이 미친 사람들이나 허지 다른 사람은 못 혀. 국악이 우리 대까지는 근근히 연명이 되었는디, 우리가 가고 나면 아마 끝나고 말 거여.”

이처럼 국악의 현실에 대해 매섭고 분노에 찬 말을 서슴없이 토해내던 그의 판소리에 대한 오기와 고집은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공감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올 1월에 돌아가신 그의 오기와 고집이 후학들의 가슴에 오래오래 살아 남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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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31일 낙동강 제방에서 자신의 몸을 불사른 문수스님은 어떤 분일까요?

스님은 1986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시현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文殊) 보살’ 이름을 법명으로 받았습니다. 중앙승가대학교 재학시절에는 의협심이 강하고 대중을 이끄는 힘이 있어 총학생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여러 선원을 떠돌며 용맹정진하는 수도승의 길을 걸었습니다. 2006년에는 청도 대산사의 주지를 잠시 맡기도 했으나, 수행에 걸림돌이 된다며 주지직을 버렸습니다.

그 뒤 경북 군위의 지보사에서 3년 가까이 수행에만 전념했습니다. 스님의 수행이 어찌나 엄격한지 신자들마저 문수스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5월 31일 오전 7시20분 경, 문수 스님은 절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어느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샀습니다.

휘발유 통을 든 채 400m를 걸어서 4대강 사업 구간 중 가장 규모가 큰 낙동강의 제1지류인 위천이 보이는 강둑으로 올랐습니다.

오후 2시20분, 둑길 옆에서 큰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사람들이 가보니 불길 옆에 가지런히 접힌 승복과 흰 고무신이 놓여 있었고, 적삼과 그 옆에 놓인 종이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똑같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 폐기하라.
이명박 정권은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이명박 정권은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文殊

출처 :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3...%3D57040

고적한 선방에서 수행을 하는 동안 스님은 이명박 정권을 화두로 삼은 듯합니다. 자신의 몸을 불 태워 ‘소신공양(燒身供養)’이라는 충격요법을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현 정권의 오만과 독선에 대해 외롭게 명상을 하신 듯합니다.

1963년 6월 11일, 월남 고 딘 디엠 정권의 독재와 불교 탄압에 반대해 사이공 중심가에서 시민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몸울 불태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당시 73세의 꽝뚝 스님의 소신공양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3D960206

아침과 점심도 거른 채 오랜 시간 동안 강둑에 앉아서 스님은 생명이 꺼져가는 낙동강과 국토와 뭇생명들에 대해 홀로 고독하게, 무섭도록 뜨겁게 명상에 잠기신 듯합니다.

드디어 볼펜을 들어 승복에 이승의 간절한 마지막 ‘서원(誓願)’ 적고 고무신을 벗어 가지런히 놓은 다음, 휘발유를 자신의 몸에 끼얹고 불을 붙인 뒤 고요히 삼매에 빠지셨을 겁니다. 타오르는 그 육신의 고통을 극한의 수행력으로 참아내시며, 스스로 이 세상을 밝히는 한 줄기 불꽃이 되어 가셨을 겁니다.

문수스님의 산화에 대해 정부는 분신 자살로 몰아가는 분위기이고, 젊은 스님이 너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 아니냐고 못마땅해 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분의 평소 행적을 볼 때, 오랜 명상과 수행에서 나온 결단의 소신공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6월 4일 오전 10시, 스님의 영결식이 지보사 앞마당에서 거행됐습니다.

시종 장중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조계종 원로의원 월탄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 뜬 사람은 똑똑히 볼 것이며, 눈 어두운 사람은 차차 볼 것이다.
뭇 생명을 내 몸 같이 아끼고 아껴서 그 생명들을 살리기 위해 소신공양 올렸으니,
문수여 장하고 장하도다…”

스님의 시신은 다비장으로 향했고, “문수야, 불 들어간다”라는 외침과 함께 다시 한 번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그렇게 타들어간 불길은 못내 아쉬운 듯 다비장 주변을 휘휘 맴돌았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스님이 남기고 간 서원 때문일 것입니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3D960206

스님의 영혼은 지보사를 떠나 강둑을 지나 낙동강으로 달려가, 4대강과 한반도 주변을 빙빙 맴돌며 가난하고 소외되고 죽음을 눈앞에 둔 수많은 생명들을 위해 간절한 기원을 올리고 계실 것이 분명합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교육자인 앨프리드 화이트헤드는 이런 명언을 했습니다.

보통 교사는 지껄인다.
좋은 교사는 잘 가르친다.
훌륭한 교사는 스스로 해 보인다.
위대한 교사는 가슴에 불을 지른다.

이 말에 나온 교육자를 스님으로 바꿔 봤습니다.

보통 스님은 지껄인다.
좋은 스님은 잘 가르친다.
훌륭한 스님은 스스로 해 보인다.
위대한 스님은 가슴에 불을 지른다.

우리 ‘가슴에 불을 지른’ '위대한'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에 답하는 것은 이제 온전히 우리들의 몫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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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지방선거는 뜻밖의 결과로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 같은 결과가 나타난 것일까요? 가장 커다란 원인은 국민과의 소통을 무시한 채 각종 정책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던' 현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에도 많은 통로를 통해 국민들은 밀어붙이기식 국정운영에 대해 비판과 반대의 의견을 표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한나라당은 그 의견을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여론몰이를 위해 언론을 장악하고 국민과의 소통을 짓밟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 

선거가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그 시도는 성공하는 듯 보였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한나라당 압승'이 예상됐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여론조사의 반대로 나왔습니다. 여론조사 기관도 파악하지 못하는 '무서운 민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천안함을 침몰시킨 서해 바다의 검은 물결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비밀의 민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비밀의 민심은 6·2 지방선거를 통해 '쓰나미'처럼 한꺼번에 분출되어 선거판을 휩쓸었습니다. 그들은 여론조사에서 ‘부동층’이라고 알려진 국민들입니다. 그들이 이번 선거에서 거대한 위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그 '부동층'은 현 정권에 대한 심판 내지 분노의 정서를 가진 '무서운 침묵의 다수'였던 것입니다. 정권의 지나친 오만과 독선에 대해 심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들이 투표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표시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번 선거의 바탕에는 정부와 한나라당의 민심을 무시한 '불통 정책' 대한 분노가 깊게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불통 정책 중 다음 네 가지는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정책들임을 이번 선거는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첫째, '4대강 죽이기'인 '4대강 사업'을 즉각 중단하고 진정한 '4대강 살리기'로 전환해야 합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4대강 사업은 생명의 강을 콘크리트 인공 수로로 만드는 것입니다. 생태와 환경과 생명을 무시한 4대강 사업은 많은 국민들과 성직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고, 급기야 한 스님이 자신의 몸을 불태우면서까지 반대하는 엄청난 저항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이런 비판과 저항을 무시하고 계속 강행하는 것은 민심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 정책을 계속 밀어붙인다면 강 죽이기, 국토 망가뜨리기를 넘어서서 경제 죽이기로까지 귀결되고 말 것입니다.

둘째, 천안함 사건을 이용하여 '북풍'을 부추기지 말아야 합니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정부와 군의 대응에 대해 오바마 미 행정부와 일본 정부가 지지를 표명하자, 정부와 여당과 보수 언론은 신이 나서 북한에 대한 강경 정책을 밀어 붙였습니다. 거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국민들에게 위기 의식을 불어넣었습니다. 

거기에 발을 맞춰 선거 전에 진행된 여론조사나 전문가 분석에서는 천안함 사건이 한나라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이런 상황에 고무되어 그들은 천안함 사건이 정치적 '횡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던 모양입니다만, 민심은 정부의 대북한 강경 노선에 급제동을 걸었습니다. 북한과의 긴장 상태에 대한 반대, 천안함 사건의 조사 과정과 결과 발표에 대한 의혹 등이 ‘침묵의 다수’를 투표소로 향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 민심은 정부에게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추구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대북한 정책의 기조에 있어서 평화공존과 평화통일이 무엇인지 다시금 되짚어보라고 따끔한 회초리를 든 것입니다.

세째, 세종시를 원안대로 추진해야 합니다.

세종시 문제는 충청 지방의 민심을 듫끌게 했습니다. 여당 내에서도 강한 반대 세력이 있어서 정책에 균열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세종시 수정안을 밀어붙였습니다.

정운찬 총리의 두서없는 말실수나 행동에도 말없는 다수는 실망하고 분노했습니다. 그 실망과 분노는 앞으로 세종시에 대해 변화된 정책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째, 교육및 복지 정책을 수정해야 합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 보수 일색이던 시·도교육감에 진보 성향의 교육감이 대거 포진하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학생들이나 학교 간의 경쟁을 강화해서 교육경쟁력을 높인다는 '무한 경쟁' 교육 정책이 '보편적 창의성과 인성교육 강화' 정책으로 상당 부분 변경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 전교조 교사 169명의 대량 파면과 해임 방침도 철회해야 합니다. 한나라당과 관련된 교사들은 처벌하지 않고, 전교조 교사만 처벌하는 불공평한 정책에 대해 민심은 매섭게 제동을 걸었습니다.

청와대와 여당은 지금 선거 패배의 후폭풍에 쌓여 있습니다.

당대표와 비서실장이 사퇴를 선언하고, 비상대책회의를 꾸리고, 대대적인 쇄신과 개각설이 난무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적쇄신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정책의 쇄신입니다. 


보이지 않는 '침묵의 다수'가 앞으로도 정부 정책의 향방을 날카롭게 주시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민주당과 야권은 이번에 자신들을 기사회생시켜준 '침묵의 다수'가 이전 선거에서는 자신들을 철저하게 몰락시켰던 장본인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 선거는 야당의 승리가 아닌 '침묵의 다수'가 일구어 낸 승리라는 점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침묵의 다수'는 야권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맡길 수 있는 리더쉽과 비전을 가진 집단인가에 대해 여전히 매서운 비판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음도 두려운 마음으로 깊이 새겨야 합니다. 

민주화와 평화통일에 몸을 바치던 초심으로 돌아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올바른 정책을 개발하고, 혼신의 힘을 다바쳐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이번 선거를 자신들의 승리로 착각하고, 분열과 오만과 나태의 모습을 되풀이한다면 또다시 철저한 '몰락의 쓰나미'가 몰려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 선거에서 '견제'와 '균형'을 택한 국민들의 선택은 참으로 현명하고 지혜로왔습니다.

저는 이러한 국민들의 힘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게 꾸려져 나갈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정치 세력들은 이런 국민들의 숨은 민심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민심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 세력에 대해서는 언제든 '충격적인 표의 쓰나미' 휩쓸어버릴 '침묵의 다수'가 존재하고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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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진주 검무>의 명인 성계옥 명무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동경잡기」에 전하는 '검무(劍舞)'의 유래는 매우 비장하고 전투적입니다.

“황창랑은 신라 소년으로 7세의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적국인 백제에 들어 가 칼춤으로 이름을 날렸다.
백제왕이 소문을 전해 듣고 그를 불러 검무를 보았는데, 황창랑이 기회가 왔다 하고 검무를 추다가 드디어 백제왕을 칼로 찔러 죽이고, 황창랑 또한 잡혀 죽었다.
신라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그의 용모와 닮은 가면을 만들어 쓰고 그의 춤을 모방하여 추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전하는 검무이다.”


이러한 사연을 담은 검무는 ‘전복(戰服)’을 입고, ‘전립(戰笠)’을 쓰고, 가면을 쓰고, 진짜 칼을 들고, 남성적인 활달한 춤을 추는 무사들에 의해 오랫동안 추어져 왔습니다.

장유경 무용단의 창작무용 <검무>. 출처 : http://snilbo.co.kr/search.html%3Fimage...o_search

그러다가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어느 틈엔지 기생들이 우아하고 아름답게 추는 춤으로 바뀌었는데, 어떤 사연으로 검무가 그렇게 변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궁중 검무 무희의 복장. 출처 : http://kr.blog.yahoo.com/joy7473/2

어쨌든 이러저러한 이유로 해서 검무는 민속무용의 형태로 남게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진주 검무>는 그 춤가락이나 칼 쓰는 법이 궁중에서 추어지던 검무의 원형을 가장 많이 닮고 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검무로 꼽히고 있습니다.

성계옥 명인은 이 <진주 검무>의 보유자이자 계승자였고, 후원자이고, 교사였습니다.
 
전통예술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가 만연한 땅에서 진주 검무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스승과 동료들과 제자들의 숨은 노력과, 그들을 한 끈으로 묶어 놓을 수 있었던 그녀의 희생과 열정과 통솔력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검무를 추는 성계옥 명인. 출처 : http://media.daum.net/cplist/view.html%...%3Dsegye

그러나 그녀가 진주 검무와 인연을 맺기까지에는 한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습니다. 1927년 4월 29일에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의 시골 마을에서 성갑주씨의 육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난 그녀는 영특하고 지혜로운 어린 소녀로 주위에서 귀여움과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대지주이자 유학자였던 그녀의 부친이 독립운동에 관련됐다는 혐의로 헌병대에 끌려 가 고문을 당한 뒤 신경쇠약증에 걸리자 온 집안이 수라장이 되고, 그 통에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그녀는 진학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춤추고 노래하는 개화학교에 딸을 보낸다고 반대했던 어머니도 그녀가 모든 면에서 우수한 학생임을 알고 자랑스러워 했고, “속이 맑고 영리한 아이라 남자로 태어났으면 큰일을 했을텐데”하고 대견스러워 하던 아버지도 학교에 진학 못시킨 것을 후회할 만큼 영특했던 그녀는 질질 짜고 우는 대신, 동경에서 보내오는 강의록을 스승 삼아 중등학교 과정을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19살에 동경 의전을 나온 김상식씨와 결혼한 뒤에도 공부를 계속해서 21살에 준교사 시험에 합격할 만큼 그녀의 향학열은 대단했습니다. 

이렇듯 엄격하고 학구적인 성품의 그녀는 어느 봄날, 엉뚱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결혼하고 일 년이 넘도록 신랑 얼굴도 마주 못 보고 밥 묵을 때도 신랑이 쳐다보마 부끄러버 밥이 안 넘어가는 새색씨였는데, 어느 봄날에 동네 여자들이 뒷산에 모여서 야유회를 하는데 내는 새댁이라 끼지도 몬했지.
여자들이 술 마시고 장구 치고 춤을 추면서 노는데, 내가 불을 때다가 부지깽이를 들고 뒷마당에서 그걸 잠깐 보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넋을 잃고 한창 바라보다가 그만 나도 모르게 춤을 따라 춘 기라.
내 평소 성격 상 도저히 허용이 안되는데 우째서 그랬는지 지금도 몰라. 그때 그걸 남편이 본 기라. 싱긋 웃더니 ‘그렇게 추고 싶으모 놀러가지’하는데 우째 부끄럽던지 얼굴이 화끈거리고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었제.”

선비의 딸이 체통머리없는 행동을 했다고 스스로 한동안 근신할 만큼 '단정한' 그녀였던지라, 그런 이성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본능적인 ‘끼’가 몸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그 ‘끼’를 용납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뒤로도 한참동안 단정한 가정 부인의 생활을 꾸려나갔습니다.

그러다가 26살이 되었을 때, 남편이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려다가 익사하는 슬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청천에 벽력이었제. 한동안 식음도 전폐하고 드러누워 있었는데, 그러다가는 시어머님과 애들이 굶게 안 생겼나. 마침 준교사 자격증이 있어서 초등학교 교편을 잡을 수 있었지.
교원 생활을 하던 중에 강기례씨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이는 진주 권번 출신으로 명무라. 자기집에 교습소를 차려놓고 춤을 가르쳤는데, 방학 때면 한달씩 가고 평소에는 시간나는 대로 가서 배우는데 춤만 추면 모든 고통이 싹 가셔지고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기라.
아마 내가 사주에 ‘천예(天藝)’가 들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우쨌든 그때부터 예술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제.”

강기례 명인에게 승무와 한량무를 배운 뒤 가야금 산조도 배우면서 차츰 예술의 맛을 알아갈 무렵, 또다시 그녀에게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지주의 집안이라 하여 재산을 몰수당하고 부친이 돌아가시는 통에 순식간에 몰락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친정 망하고 남편 잃고 전쟁의 고생살이가 겹쳐서 그녀는 폐결핵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삼 년 동안 주사를 맞고 약을 먹으며 약해진 몸을 악착같이 회복시킨 그녀는 자식들과 살아갈 길을 궁리한 끝에 시골에 남아 있던 논을 팔아서 진주 시내에 조그마한 밥집을 차렸습니다.

혼자서 백반도 만들고 비빔밥도 만들어 정갈하게 상을 차린 정성의 덕으로 차츰 손님이 많아져서 나중에는 “손님끼리 박치기를 해서 이마가 붓기도 할 만큼”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러자, 또다시 춤을 배우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장사를 하는 틈틈이 승무도 배우고, 살풀이춤도 배우고, 가야금 산조도 배우며 한을 풀어 나갔습니다.

그렇게 한 십 년쯤 지난 뒤에야 드디어 <진주 검무>와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마흔 살이 좀 넘었을 때인데, 하루는 진주 검무 보유자이던 김자진 선생이 찾아와서 검무가 문화재로 지정돼서 전수자를 기를라꼬 하는데 해보겠냐고 하는 기라.
두말없이 따라가서 남강 옆에 세워진 문화원에 다니면서 하루에 한 시간씩 배웠제.
검무 선생님으로 이윤례, 최예분, 이음전 이런 분들이 계셨는데, 그 분들이 추는 검무는 그 분들의 스승인 최순희 선생님에게서 배운 기라.“

최완자라고도 불리는 최순희 명인은 '진주 교방'의 동기였다가 13살 때 중앙의 '장악원'에 뽑혀 예술 교육을 받은 뒤, 궁중에 들어 가 고종 황제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25살 때 진주 교방으로 낙향하여 권번에서 진주 기생들의 필수 과목인 검무를 가르쳤습니다.

조선조 말의 유학자인 황현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진주 기생 산홍이가 검무를 잘 춘다는 소문을 듣고 내무대신 이시홍이 천금을 주고 산홍이를 사겠다고 하자, ‘비록 천한 기생의 몸이지만 오적의 두목에게 몸을 팔지 않겠다’고 말해 크게 노한 이시홍이 그녀를 때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걸로 보아 이미 진주에는 기생들에 의해 검무가 추어지고 있었는데, 그 유래를 논개의 죽음에서 찾는 이가 많습니다.

진주 기생 논개가 왜군 장수의 몸을 끌어 안고 의암이라는 바위에서 남강에 몸을 던져 빠져 죽자 그 순절을 기려 해마다 <의암별제>를 지냈는데, 그때 기생들이 검무를 춘 게 <진주 검무>의 효시라는 겁니다.

진주 검무의 공연 모습. 출처 : http://www.photowang.net/%3Fmid%3Dgalle...l%3D2310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따르면 “고려 신우왕 11년에 이담이 계림(경주)에서 검무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 세조와 성종 사이에 살았던 김종직의 시문집인 「점필재선생집(佔畢齋先生集)」에도 “경주에서 황창의 검무를 보았으며, 이것이 처용무와 함께 연희되었다.”는 글이 있고,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동학도들이 검가를 부르며 검무를 추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특히 경상도 지방에 오랫동안 검무가 전해져 온 것은 확실한 듯합니다.

“이 춤사위들을 배우는데, 처음에는 멋도 없고 힘들고 어렵기만 해. 그래도 참고 오래오래 배우다보니 점점 맛이 나는데, 오히려 빠르게 움직이는 때보다 느린 장단에 천천히 출 때 더 흥이 나. 속춤을 출 줄 모르면 손이 아파서 잠시도 손들고 못 서 있지. 정중동의 맛을 아는데 한 십 년이 걸렸어요.”

십년이 지나 이수자가 되니 문화원 살림살이를 맡아야할 책임과, 전수자를 교육해야 할 책임과, 일반인에게 보급해야 할 책임이 그녀에게 한꺼번에 지워졌습니다. 그녀는 곰곰 생각한 끝에 장사를 그만 두고 검무와 관련된 일에만 전력투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게다가 때마침 '진주민속예술보존회관 건립'이라는 어려운 숙제마저 떠안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무지막지한 싸움’ 끝에 '진주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이 세워져서 남의 무용학원을 전전하며 초라하게 지내던 신세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일을 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진주 검무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던 중, 옛날의 학구열이 되살아난 그녀는 쉰여섯 살의 만학도로 고려대학원 한문교육학과에 입학하여 2년 뒤에 기어코 졸업하고 말았습니다.

또 문헌을 조사하다가 <의암별제>를 지낼 때 제기처럼 술이 달린 공을 문에 던져 집어 넣는 놀이를 춤과 노래를 섞어서 하는 <포구락>이란 놀이가 연희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고, 이윤례 선생의 기억을 되살려서 포구락 춤을 발굴했습니다. 그 춤으로 1984년에 민속경연대회에서 장관상을 타낸 것은 그녀의 끈질긴 학구열과 집념의 결과입니다.

성계옥 명인의 학구적이고 단아한 모습. 출처 : http://otr.kr/play/view.htm%3Fsid%3D611...ide%3D03

그런 공로를 인정 받아 '진주민속예술보존회' 회장이 된 그녀는 매일같이 잡무에 시달리고 제자들 뒤치다꺼리하다가 문득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개인의 기능을 열심히 연마해서 명무가 되는 기 낫겠는가, 아니면 진주 검무를 위해 뒷일을 하는 기 낫겠는가 이리저리 따져 보았제.
그란데 이 작은 조직 안에서 시기, 질투, 싸움, 반목이 그칠 새가 없는데 이걸 뜯어고치는 기 내 사명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고마 회원들 '종년' 노릇 하자꼬 작정해 버렸제.”

그뒤로 더욱 자신을 돌보지 않고 회관과 회원들의 일에 매달리는 틈틈이 새벽 여섯시에 혼자 회관에 나가 춤을 연습했습니다.

“예능이 뛰어난 사람은 통솔력이 없고, 학벌있고 능력있는 사람은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서 화합이 잘 안돼요. 빨리 유능하고 통솔력있고 개인사보다 공적인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나와야 할텐데 걱정이라.”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 검무>의 예능보유자였던 운창 성계옥 명인은 이렇듯 사라져 가는 민족예술의 앞날을 걱정하시다가 2009년 1월에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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