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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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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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10.05.31
    고집스럽고 튼튼한 땅의 소리, 강도근 명창 (6)
  2. 2010.05.28
    너무도 아름다운 비련의 주인공, 무희 '이진' (11)
  3. 2010.05.25
    노래 잘하고 일 잘한 '만 년 처녀', 김길임 명창 (5)
  4. 2010.05.23
    목은 꺾였어도 최고의 공력, 박봉술 명창 (6)
  5. 2010.05.20
    두 동강난 5·18, '임을 위한 행진곡'의 운명은? (16)
  6. 2010.05.18
    4대째 이어지는 외곬수 고집, 정권진 명창 (8)
  7. 2010.05.15
    천안함, 역사의 '미궁'으로 침몰할 것인가? (25)
  8. 2010.05.13
    '서편제'에 특별출연한 김무규 단소 명인 (11)
  9. 2010.05.10
    마니산에 숨어 사는 '여도사'의 5천년의 꿈 (17)
  10. 2010.05.08
    북에 미쳐 집안 망친 불효 인생, 김명환 명인 (10)
  11. 2010.05.06
    4대강을 향한 눈물의 외침, '강은 살아있다' (16)
  12. 2010.05.04
    '춤추는 가얏고'의 주인공, 함동정월 명인 (4)
  13. 2010.05.02
    가야금 12줄에 꽃핀 여성 파워, 박귀희 명창 (8)
전라북도 남원 땅이라고 하면 누구나 춘향이를 떠올리거나 판소리를 떠올릴 것입니다.

실제로 남원군은 국악의 본거지라 할 만큼 수많은 명인명창을 길러냈습니다.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에서 태어나 판소리의 중시조로 일컬어지며 ‘가왕’이란 칭호로써 판소리계 최고 명창으로 떠받들어지는 송흥록 명창,
그의 아들 송우룡 명창,
송우룡의 아들로써 일제시대 판소리계의 왕자로서 일세를 울리다 간 송만갑 명창,
남원군 수지면에서 태어나 송만갑과 함께 일제시대에 이름을 떨친 유성준 명창,
유성준과 송만갑의 제자인 김정문 명창,
남원시에서 1900년에 태어나 여자 명창으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 간 이화중선 명창과 그의 동생 이중선 명창,
운봉면 화수리에서 1915년에 태어나 최고의 여자 명창 중 한 명으로 활약했으며 저의 스승이기도 한 박초월 명창 등등.......


모두가 남원 땅에서 태어난 명창들입니다.

남원에 있는 광한루. 출처 : http://www.lsphoto.co.kr/%3Fdocument_srl%3D616

이밖에도 많은 명인명창들이 일제시대인 1921년에 광한루 안에 세워진 <남원권번>에서 판소리나 시조나 가야금이나 춤 등을 배우고 가르치며 활동했습니다.

남원권번은 그후 일본 경찰의 강압으로 광한루 밖으로 쫒겨 나 민가에서 국악교습소 노릇을 해오다가, 1977년 11월에 광한루 건너 요천 곁의 금암산 기슭에 아담한 한옥을 세워 <남원국악원>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새롭게 증축된 남원 <국립민속국악원> 출처 : http://korean.visitkorea.or.kr/kor/ti/e...6cat2%3D

강도근 명창은 1973년에 남원국악원 창악 강사로 자리를 잡은 뒤, 1996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오로지 이곳에서 제자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살아 온 남원 판소리계의 기둥입니다.

1918년에 남원시 향교동에서 강원종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농사일에 재미를 붙이며 열심히 땅을 가는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는 틈틈이 귀동냥으로 얻어 들은 농부가나 판소리 가락을 흥얼거리면 주위에서 ‘얼씨구 절씨구’ 하며 목이 좋고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그 재주를 썩히기 아까우니 정식으로 소리공부를 하라고 주위에서 자꾸 권하는 통에 17살이 되었을 무렵, 주천면에 살고 있던 김정문 명창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김정문 명창의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2년쯤 공부를 했습니다.

“한 2년 공부허다가 선생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어. 젊은 나이에 심장마빈가 뭔가로 돌아가셨어. 그래 집에 돌아와 있다가 20살쯤 되었을 때 서울에 올라가서 조선 성악 연구회에 갔지.
그곳에서 송만갑 선생님헌티 소리공부를 했지. 김정문 선생이 그 양반 제자였기 땜시로 나도 당연히 그 양반한티 배워야 헌다고 생각헌 거여. 그런디 그때 선생님이 일흔 일곱 살인가 되셨으니 몸이 불편하셔서 잘 안 나와. 그런디 공부헌지 얼마 안돼서 선생님이 또 돌아가셨어.
그래서 구레 사는 박만조씨가 수십 년 동안 송만갑 선생님허고 사귀면서 그 사설이나 가락을 알고 계시기 땜시 그분한티 찾아가서 조금 배우고, 전라도 광양 땅에 이진영씨가 송만갑 선생한티 공부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서 조금 배웠어. 아무튼지 죽어도 동편 소리가 좋다허고 동편만 찾었으니께.”

그가 그토록 애타게 찾은 동편 소리는 송흥록으로부터 시작해서 송우룡과 송만갑을 거쳐 내려오는 송씨 집안의 소리로 그들이 전라도의 동쪽 지방인 구례나 남원에서 살았기 때문에 ‘동편제’라고 불리는 소릿제입니다. ‘서편제’가 장단의 변화가 많고 섬세하고 기교가 풍부한데 견주어서, 동편제는 장단이 똑똑 떨어지고 웅장하고 단순 소박한 것을 특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열심으로 공부를 하는 판인디, 어느날 갑자기 목소리가 변했어. 장가 가기 전이라 전부터 나를 좋아하던 여자하고 딱 하룻밤 잤는디, 그 이튿날 소리를 해보닝께 뒤통수에 무거운 돌을 매단 것 같고 목이 갈려서 독아지 깨지는 소리가 나.”

여자하고 딱 하룻밤 잔 것 때문에 목이 상했다는 것은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남자 명창들이 젊었을 때 목이 상해서 고생한 경험을 얘기하는데, 그 원인이 거의 여자 아니면 술인 것으로 보아 젊은 시절에 정력을 함부로 낭비하는 것이 소리하는 데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남자는 사춘기를 벗어나면 어떻든 목이 갈려서 소리가 변하게 되어 있어. 그렇게 갈라져서 안 나오기가 십 년이 가. 그 재난을 이기고 뚫고 올라오지를 못해. 목이 안 나오니 생활은 안돼. 애는 터지고 부아가 나서 견딜 수가 없으니 술이나 퍼 먹고 좌절해 버려. 어렸을 때 명창 소리 들은 것 다 소용없고, 남들이 비웃기나 허고, 앞날은 암담허고.....나는 이십 년간 그 고생을 견뎠어. 없어진 소리를 되찾을라고 말도 못헐 고생을 혔지.”

그는 지리산 밑에 있는 쌍계사나 순천의 선암사나 남원산성 같은 곳에 가서 죽어라고 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전 같은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창극 단체에도 잠깐 몸을 담았는데 인기 있는 선배 명창들의 뒷바라지나 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울적한 세월을 2년쯤 보낸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버렸습니다. 그 뒤 해방이 되고서도 여기 저기 창극단에 끼어 공연을 하곤 했지만, 일만 끝나면 부지런히 공향에 내려오곤 했습니다.

“창극단을 따라 다니면서도 농사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어. 내가 본시 농사꾼이라 일허는 것이 좋아. 남들은 일허기 싫어서 소리헌답시고 건달처럼 지내는디 나는 밭에서 지게 지고 하루 종일 일허고 나면 몸이 개운허고 기분이 좋아. 그렁게 판소리허는 사람들도 모두 다 알아. 저 사람은 소리허는 것보다 농사를 더 좋아허는 사람이다 그렇게 알아 버려.”

이렇듯 생활에 튼튼한 뿌리를 내린 명창이기 때문에 그의 판소리는 건강한 생활에서 오는 소박함과 강인함이 특징입니다.

“나는 서울 사람들허고 판이 달러. 그 사람들은 창이면 창, 연극이면 연극으로 먹고 살아야것다 허고 나선 사람들이지만 나는 내 손으로 농사지어서 먹고 살어. 그것이 나는 좋아. 서울 사람들이 촌놈이라고 비웃어도 나는 오히려 그 사람들을 비웃네. 나는 돈을 싸줌서 서울서 살라고 혀도 못 살어. 그리고 서울 가면 사람이 버려. 옛날에도 멀쩡한 청년들이 소리헌다고 서울 가서는 게집질에 술에 아편에 몸버린 사람 많았어. 그러니 우리는 촌에서 농사 짓고 사는 게 마음 편하고 좋아.”

이렇듯 도도하게 땅을 지키며 소리를 다듬어 온 그는 차츰차츰 목소리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나이 마흔이 넘었을 때 비로소 고음과 저음을 마음대로 구사하고 몇 시간을 계속해서 소리해도 목소리가 변하지 않는 ‘득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약간 쉰 듯한 수리성인 그의 목소리는 가늘고 단단하며 고음이 강하고 튼튼합니다. 특히 그의 음질은 옛날 송만갑 명창의 음질을 많이 닮았고, 기교를 부리지 않고 통성으로 뽑아 냄으로써 동편제 소리의 특성을 가장 잘 전해 준다고 평가받습니다.

어쨌든 그는 서울 사는 소리꾼에게서는 보기 드문 고집과 힘을 지니고 있는 느낌을 주는데, 이는 오로지 돈과 출세와 인기와 명예를 멀리 떠난 그의 튼튼한 생활 덕분이라 하겠습니다.

“그 전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논에서 살았는디 나이가 등게 그것도 맘대로 안돼. 인제는 일허는 것이 힘이 들어. 거기다가 여기 국악원에 애들이 워낙 많어. 그애들 가르치다가 하루해가 다 가버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찾아 오는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그의 목은 하루도 쉴 날이 없었습니다.

국민학생에서부터 고등학생까지 하루에 쉰 명쯤 되는 제자들은 그의 덕으로 전국에서 벌어지는 학생 국악경연대회는 모조리 휩쓸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갖춘 ‘무서운 아이들’로 성장했습니다.

그동안 국악에 끼친 공로로 ‘한국국악협회 공로상’(1981), ‘남원시민의상 문화상’(1985), ‘KBS국악대상’(1986), ‘자랑스러운 전북인의 상 대상’(1988) 등을 수상하였으며 198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의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30여 년 동안에 수백 명의 문하생을 길러냈습니다. 안숙선, 오갑순, 성우향, 김정숙, 한농선, 홍성덕, 강정흥, 전인삼 등 명창과 많은 국악인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습니다. 고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꼬박 학생과 마주 앉아 직접 북장단을 치면서 목청을 돋구고, 소리 하나하나를 일일이 교정해주었습니다

“서울서는 소리 가르치는디 5만 원도 받고 10만 원도 받는다고 허는디 그것 몹쓸 일이여. 소리공부 허는 학생치고 부잣집 애들이 없는디 누가 그렇게 많은 돈을 내고 공부를 허것어. 여그서도 국악원을 운영허느라고 7,8천 원씩 받고 있지만 소리는 돈 안 받고 가르쳐야 돼. 선생 먹고 살 것은 정부에서 보조해 주고, 제자들은 무료로 정성껏 길러내야 앞으로 국악이 발전허게 돼.”

앞으로 남원에서 명창이 나오게 된다면 이는 오로지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소리는 돈 안 받고 가르쳐야 된다고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를 하다가 돌아가신 고집스럽고 꿋꿋한 스승의 덕일 것입니다.

강도근 명창의 후계자 전인삼 명창. 출처 : http://www.postech.ac.kr/k/student/cult...ex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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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에 너무도 아름다운 이유로 비련의 주인공인 된 궁중무희가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이진(Li-Tsin)'. 그녀의 빼어난 미모와 우아한 무용에 반한 젊은 프랑스 외교관이 그녀를 열렬히 사랑한 데서부터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신경숙의 소설 <리진>에 실린 김동성 화백의 리진 초상.
출처 :
http://likecho.tistory.com/entry/%25EC%...580%2599

그녀와 사랑에 빠진 프랑스 외교관(3대 공사인 빅토르 콜랭 드 프랑시로 밝혀 짐)이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진과 사랑에 빠진 3대 프랑스 공사 빅토르 콜랭 드 프랑시(1853~1922).
출처 : http://www.movist.com/article/read.asp%...%3D12999

"나는 그녀와 결혼할 겁니다. 이진의 마음씨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이 이단(異端)의 나라에서 그녀는 한 여신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녀는 천사로서 대우받을 권리를 가질 것입니다."

이렇듯 이진에게 사정없이 매혹 당한 그는 본국에서 소환 명령이 오자, 고종에게 자신의 사랑을 얘기하고 그녀를 '기증' 받아 프랑스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가정교사를 들여 프랑스 말을 가르치고, 프랑스 문화를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놀라운 재능으로 새로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지만, 외로운 외국 생활이 쉽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울증에 빠졌고, 몸이 쇠약해져갔습니다. 

김동성 화백의 삽화. 출처 : http://likecho.tistory.com/entry/%25EC%...580%2599

"서양의 습한 안개가 동양의 따뜻한 햇볕에 그을은 그녀의 이마에 검은 빛을 그리웠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자, 옛날의 생활로 돌아 간 빅토르 콜랭은 '여신'처럼 숭배하고 '천사'처럼 떠받들던 이진에게 소홀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 한국의 규방을 복원해 줄 정도로 관심을 잃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다시 한국에 파견되어 이진과 함께 조선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오자마자 이진에게 평소 앙심을 품고 있던 어느 고관이 궁중에 소속된 노비인 그녀의 신분을 앞세워 기생들의 조직인 '교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펼쳐진 무희로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얇은 금조각을 삼키고" 스스로 생명을 끊어버렸습니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거의 100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905년 무렵에 2대 프랑스 공사로 조선에서 근무했던 끌라르 보띠에(Madame Claire Vautier)와 이뽀리트 프랑땡(Hippolyte Frandin) 두 사람이 쓴 「한국에서(En Coree)」 라는 수필집을 프랑스 리옹3대학의 이진명 교수가 번역해서 재불한인 잡지인 <한인>에 1979년 4월호에 소개했고, 그 책을 다시 불문학자인 김상희 부산대 교수와 국문학자인 김성언 서울대 교수가 번역해서「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 」이라는 제목으로 2002년 무렵에 출간했습니다. 


49장으로 나눠서 여러가지 한국의 풍물을 소개한 글로 구성된 이 책의 내용 중 <35장 궁중의 기생들과 한 한국 여인의 비극>이라는 짧막한 글에 위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글에서는 이진의 빛나고 깊은 눈을 '영혼의 꽃(Fleur d'Ame)'이라고 부를 만큼 그녀를 찬미하고 있습니다. 

저는 2005년에 부산대학교에 강연을 갔다가 번역자인 김상희 교수에게서 그 책을 선물로 받고, 오랫동안 이 이야기에 심취했습니다. 

프랑스 공사와 결혼한 조선의 궁중무희, 그녀의 프랑스 생활, 귀환, 자살.......오페라 「나비부인」과 비슷한 이야기이지만 뭔가 다르고, 일제시대도 아닌 구한말에 예술가적 영혼을 지닌 한 여인이 프랑스 파리에서 겪었을 많은 사건과 혼란들.....

그런데 자료를 찾아보니 몇 가지 의문점도 발견되었습니다.

첫째, 이진이라는 궁중무희의 존재를 증명해 줄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천민 계급인 기생이니 호적도 있을리가 없겠지만 프랑스 공사와 결혼을 했다면 당시 궁중에서 상당한 화제가 되었을 것이고, '이왕직 아악부'나 '교방부' 등 음악이나 무용을 담당했던 궁내의 광대나 기생에 대한 기록도 있을 법한데 아직까지 그녀에 대한 국내의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 그녀와 결혼했다는 프랑스 공사의 이름과 그의 출생지나 외교관으로서의 근무 기록은 어느 정도 밝혀졌는데, 그녀와의 결혼 여부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이진은 그와 어떤 관계였던 것일까요? 애인? 동거인?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세째, 그녀가 귀국한 뒤 다시 궁안으로 들어갈 때, 왜 그 빅토르 콜랭은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 책에 씌인대로 '사악한 제도에 한 번 저항해보지도 않고 비겁하게도 그녀를 포기'해 버린 것인가? 그녀는 버림 받은 슬픔 때문에 자결한 것인가? 아니면 신분의 족쇄에 얽혀 비참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항거로 생을 끊은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비밀스러운 안개에 싸여 있는 아름다운 무희의 이야기는 오히려 그런 의문점 때문에 저에게 더욱 흥미진진한 상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면 좋겠다는 구상을 하며 지내고 있던 중, 놀랍게도 그 이야기를 소재로 한 소설이 나오더군요.

김탁환씨의 「리심(파리의 조선 궁녀)」와 신경숙씨의 「리진」이 거의 동시에 출간된 것입니다.
 


두 분 소설가도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 집필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이야기는 이미 뛰어 난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작품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반가운 마음에 그 소설들을 읽었습니다. 과연 똑 같은 자료를 가지고 씌어졌지만, 두 소설의 구성이나 스토리나 분위기는 너무도 다르더군요. 또 제가 구상했던 이야기와도 너무도 달랐습니다.  

짤막하지만 흥미롭고 상상을 자극하는 '춤 추는 여인'의 이야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진. 출생도 알 수 없고 생존 여부도 확인되지 않지만, 수많은 남성들의 찬미 속에 비극적으로 죽어 간 여인. 그녀의 삶은 여전히 저에게 한없는 상상의 날개를 달아줍니다. 저는 여전히 '영혼의 꽃' 이진에게 매료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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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민요 <강강술래>를 잘 부른 김길임 명창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예전에 정월대보름이나 팔월 추석날이 되면, 동네 여자들이 모두 모여 손에 손을 마주 잡고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돌면서 <강강술래> 노래를 불렀습니다. 

출처 : http://ask.nate.com/qna/view.html%3Fn%3D8205333

이 노래는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전해져 왔지만, 특히 전라도의 남쪽 해안 지방에는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옛날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여그 우수영 앞에 있는 울돌목 바다에서 왜놈들 허고 싸울 적에, 싸울 사람이 없응께 허수애비를 만들어서 진도 앞 산에다 세워 놓고 강강술래처럼 손 잡고 빙빙 돌게 했디야. 시방은 진도대교를 놓니라고 울돌목 여울을 매웠는디, 옛날에는 소용돌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배가 지나갔다 허먼 물속으로 들어가버링께 그리서 임진왜란서 이순신 장군이 이겼대야.”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 선두리에서 1927년에 태어난 김길임 명창은 어려서부터 울돌목에 얽힌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 끝에 불리워지는 <강강술래>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가난한 농부 김대표씨의 8남매 중에서 맏딸로 태어난 그녀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어려서부터 물 긷고, 빨래하고, 방아찧고, 밥하고, 동생들 보살피느라고 초등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 고생이야 말도 못하지라. 우수영 장에 오먼 물도 못 얻어 먹는다는 말이 있을만큼 물이 귀히서, 우물 밑에 조금씩 괴는 물을 뜰라고 우물 밑에 내려가서 바가지로 닥닥 훑어서 떠갖고는 갖다 붓고 갖다 붓고 허기를 밤새도록 힜응께. 겨울이먼 손이 꽁꽁 얼고 얼굴에 고드름이 허옇게 매달링게, 어린 것이 얼마나 추웠겄어.”

그렇게 고달픈 생활 속의 유일한 낙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노래를 잘 불러서 <육자배기>나 <아리랑 타령>이나 <강강술래>를 아기 때부터 흥얼거릴 수 있었고, 또 “어매 태겨서” 곧 어머니를 닮아서 목소리가 곱고 구성지게 잘 불렀기 때문에 길임이 처녀가 노래를 부르기만 하면 사람들이 몰려 들어 “잘한다”, “한 번 더 해라”, 추켜 세우는 통에 재미가 나서 자꾸자꾸 불렀습니다.

특히 정월대보름이나 팔월 추석이나 단옷날 같은 명절 때면 마을 처녀 중에서 제일 인기있는 가수 노릇을 톡톡히 했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북을 잘 치시고, 어머니는 노래를 잘 부르시고, 큰오빠허고 작은 오빠는 장구도 잘 치고 노래도 잘 히서 당골네 가족이라고들 힜어. 나도 별나게 노래를 잘헌다고들 혔는디 아버지가 무서워서 집에서는 노래를 못 힜지. 그려도 친구들허고 모여서 놀 때는 신나게 불러 버맀어.”

출처 : http://opentory.joins.com/index.php/%25...59E%2598

달 떠온다 달 떠온다
동해 동창에 달 떠온다
저 달이 뉘 달이냐
강호방네 달이로다
강호방은 어디 가고
저 달 뜬 줄을 모르는가

하는 가사를 길임이 처녀가 처량한 곡조에 얹어 '늦은 중머리'로 길게 내뽑으면 동네 처녀들이 달을 바라보며 손을 잡고 천천히 움직이면서 “강강술래 강강술래”하고 받습니다.

양에 양에 양임이는
시집 가던 사흘만에
바느질을 하라 하여
겨와 기름 불을 켜고
섶뉘비고 짚뉘비고
아랫강에 개가 짓고
건너강에 닭이 울어
잠이 와서 잠잤더니
시아버지 호령소리
시어머니 기침소리
에라 이거 못 살것네

하며 시집살이를 한탄하는 가사를 조금 빠른 '중중머리'로 '낭창낭창' 부르면 처녀들과 갓 시집 간 새댁들이 '나붓나붓' 걸어가면서 “강강술래 강강술래‘하고 후렴을 받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andongb/Mvql/143?docid=18pnN|Mvql|143|20080912204712

뛰어보세 뛰어보세
억신억신 뛰어보세
높은 마당 깊어지고
깊은 마당 얕어지네
억신억신 뛰어보세

하며 '자진머리'로 넘어가면 모두들 다리를 들썩이고, 어깨를 출렁이고, 댕기머리 휘날리며, 원을 그리고 빙빙 돕니다.

그러다가 “남생이 놀아라 절래 절래 놀아라“ 하고 선창하면 ’남생아 놀아라 절래 절래 잘 논다” 하고 받고,
“고사리 대사리 꺾자 너무 대사리 꺾자 유자꽁꽁 재미나 넘자 아장아장 버리여“ 하며 아장아장 걷기도 하고,
”청애 청애 엮자” 하면서 뒷사람이 앞사람 어깨를 잡고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기도 하고,
“몰자 몰자 덕석 몰자“ 하면서 덕석몰이를 하기도 하고,
허리를 보듬어 안고 ”진주 새끼 잘룩잘룩 가사리 벗이여“ 하고 노래를 부르다가 “잡았네 잡았네 진주 새끼 잡았네” 하면 앞사람이 뒷사람을 잡고 꼬리따기를 하기도 하고,
“밟자 밟자 기와를 밟자” 하면서 기와 밟는 시늉도 하고,
“가마 타세” 하면 세 사람이 손 넣고 한 사람이 그 위에 가마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놀기도 합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andongb/Mvql/143?docid=18pnN|Mvql|143|20080912204712

그러다 보면 어느 새 달이 지고 희부옇게 동이 터오곤 했습니다.

밤새도록 뛰어 놀던 처녀들은 빨갛게 상기된 볼에 웃음을 띄우고 '욱신욱신' 쑤시는 다리를 끌고 집으로 돌아와 방에 쓰러져서 단잠을 자고 난 다음, 다시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방아를 찧고 빨래를 했습니다.

빨래를 하면서는 “날씨가 좋아서 빨래를 갔더니만 모진 놈 만나서 돌베개 배었네 덩기 둥당에 둥당덩” 하고 <둥당에 타령>을 부르며 킥킥거리기도 했습니다.

방아를 찧으면서는 “에양 에양 에에야 어허 이것이 방아로구나” 하며 <방아 타령>을 부르고, 도리깨질을 할 때는 <도리깨 노래>도 부르고, 밭에서 일을 할 때는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하면서 <아리랑 타령>을 부르며 동네 처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던 길임이 처녀도 어느덧 나이가 스물이 되어 장승환이란 총각한테 시집을 가더니 남편 따라 인천으로 덜렁 떠났습니다.

“그 사람의 본 고향은 우수영인디, 목포서 자람서 배를 탔디야. 인천서도 커다란 고깃배 기관장을 혔는디, 돈은 잘 벌어다 줬어도 배 타고 나가먼 보름만에도 오고 한 달만에도 오고 바람 불먼 설 달만에도 옹께 부부 정이란 걸 통 모르고 살았어. 그러다가 삼 년 뒤에 6.25 사변을 만나서 나 혼자 친정으로 내려왔는디 나중에 들응께 인천서 죽었디야. 그렁게 시방은 그 사람 얼굴도 기억을 못혀.”

스무 살에 시집 가서 3년만에 청상과부가 된 '노래 잘부르는 길임이'는 다시 친정에서 빨래하고, 방아 찧고, 물 긷고, 밭일을 하며, 노래부르고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27살이 되었을 때 오빠 친구이며 잘 생긴 홀아비인 홍준철씨를 만나 두 번째 시집을 갔습니다.

노래를 잘 부르지는 못해도 듣기는 좋아해서 임방울 명창의 레코드를 틀어 놓고 혼자 듣곤 했던 36살의 홀아비는 노래 잘부르고 일 잘하는 색시를 얻자 입이 헤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 부부에게는 근심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내가 사주에 무자식이 끼어서 애기를 못 낳아. 점을 치먼 남자로 태어났으먼 나라의 녹을 먹고 만 군사를 거느릴 팔잔디, 여자로 태어나서 자식도 없고 이 고생을 헌다는 거여. 우리가 자식없이 사는 게 딱했든지 큰 시숙님이 막내 아들을 양자로 들이라고 하셔서 그 놈이 아들 노릇을 허고 있지.”

한 가지 근심이 없어지고 나니 금새 또 다른 근심이 생겼습니다.

소장수를 하면서 돈을 잘 벌던 그녀의 남편은 ‘사주에 바람 풍자가 들어서’ 어딜 가나 여자가 줄줄 따랐습니다. 얼굴이 호인으로 잘 생기고 돈 잘 쓰고 놀기 좋아하는 한량을 마다하는 여자가 어디 있으며, 따라붙는 여자를 물리칠 한량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 사이에서 몸살을 앓는 건 '본각시'뿐이었습니다.

“말도 못허게 속썩었어. 그 사람이 오빠 친구만 아니라먼 당장에 나가버맀을 거여. 오빠 위신, 친정 체면 땜시 꾹꾹 참았어. 한 번은 한 바탕 싸우고 나가버린다고 무조건 집을 나왔는디 차부에 나옹께 갈 디가 있어야지. 친정에 갈 수도 없고 히서 셋째 동서네 집에 가서 하소연만 허다가 할 수 없이 돌아와 부렀어. 그리서 내가 시방도 조카들더러 신랑 잘 생긴 사람 얻지 말라고 혀.”

그러면서도 신랑 성질이 불 같아서 그렇지 싸우고 나면 금방 풀어지니까 지금까지 살았노라고 웃으며 얘기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잘 생긴 신랑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순박함이 어려 있었습니다. 남편 이야기를 하면서 가끔씩 수줍어하기도 하고 볼이 빨개지기도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저는 나이가 들었어도 처녀티가 나는 '만 년 처녀' 모습을 봤습니다. 

그렇게 속을 썩여 가면서도 때로는 오순도순 정도 나누고, 장이 열리는 날이면 집에다 주막을 만들어 술도 팔고, 친아들만큼이나 귀여운 양아들을 키우며 사느라 한 동안 노래를 잊고 살던 그녀에게 뜻밖에 다시 노래를 부를 기회가 왔습니다.

38살이 된 1965년에 볼일이 있어서 큰집에 갔다가 마침 서울에서 문화재 위원들이 <강강술래>를 할 줄 아는 아주머니들을 서른 명쯤 모아 놓고 녹음을 시켜가면서 조사를 하는 자리에 끼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뭣 때문에 그러는지도 모르고 자꾸 권하는 통에 아는 노래를 모두 불렀습니다.

그러고 난 지 얼마 뒤에 시숙님이 말하기를, “제수씨, 문화재 된다우”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문화재가 뭣이다요?”
“임방울씨나 이런 양반은 노래를 잘 불러서 문화재로 이름을 남기고 간다 안합디여? 제수씨가 인자 그런 사람이 되는 거다요.”
“오매, 내가 으떻게 임방울씨처럼 된다요?”

임방울씨라 하면 어렸을 때 ‘협률사’라는 창극단이 포장 치고 공연을 할 때 진도까지 걸어가서 포장을 들치고 몰래 숨어 들어가 <춘향전>이나 <장화홍련전> 같은 창극을 보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에 송만갑이나 임방울 같은 명창의 노래는 소녀의 가슴에 깊이 파고 들어 “부모만 안 무서웠으면 그런디로 따라 댕길” 생각도 할만큼 흠뻑 빠진 적이 있지만, 자기가 그런 명창과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는 그때 모였던 다른 아주머니들을 제치고 제일 어린 나이로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 <강강술래> 예능보유자가 되었습니다.

문화재가 뭔지도 몰랐던 그녀는 처음에는 귀찮기만 했습니다. 밭에서 일하면 면에서 사이드 카 타고 와서 말 시키고, 사진 찍고, 노래 불러보라고 하며 퍽도 귀찮게 굴었습니다. 한 3년간을 “돈도 안 줌서” 귀찮게 굴더니, 드디어 40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돈 만 원이 나왔습니다.

“돈이 나옹께 우리집 양반이 면장님이나 시숙님한티 점심이나 한끼 잘 대접허라고 하셔서 면장님한테 찾아갔더니 깜짝 놀라시며 이 돈은 그런디다 쓰면 안된다고 바람직하게 쓰시라고 허시는 거여. 그리서 우리집 양반을 드맀더니 목포 가서 서 돈짜리 반지 사고, 내 여름 옷 한 벌 사고, 여비 쓰고 돌아오셨대. 그리서 우리집 양반은 시방도 그 반지를 껴.”

난생 처음 받아 본 나랏돈이 그리도 기뻤던지 그녀는 퍽도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 뒤로 꼬박꼬박 돈이 나오고, 사람들 대우도 달라지고, 제자들 가르치라고 연수비도 나왔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군에서 행사가 있을 때 나가서 소리를 하자니 집에서 하던 술장사는 자연히 때려치우게 됐습니다. 그뒤 대전에서 열렸던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우수영 농요>로 나가서 국무총리 상을 받고, 진주에서 벌어진 전국 민속경연대회에서 대통령 상을 탄 뒤로 해남 우수영의 <강강술래>와 <농요>는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디 내가 마흔 두살 때 간이랑 쓸개에 병이 들어서 대수술을 두 번이나 했어. 그리서 그런 대회에 나갈 때는 몸이 안 좋아서 제자가 앞소리를 허고 나는 받는 소리만 혔지. 그 뒤로 몸이 좋아지기는 혔지만 인자 나이가 들응께 힘이 부쳐서 제자들 갈치기만 허지 내가 직접 소리는 안 혀.”

그녀는 해남이나 진도를 왔다갔다 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군민의 날이나 전라남도 문화재가 열릴 때 제자들을 데리고 나가 소리를 하는 것 말고는 평소 살던대로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밭에 나가 일을 했습니다.

다만 옛날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그런 행사 때가 아니면 좀체로 일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월대보름이나 팔월 추석날이 되어도 사람들이 모여서 풍물을 치고 푸짐하게 놀지도 않고, 강강술래를 부르며 놀던 처녀들은 모두 서울로 떠나고 없으니 빈 달만 적막하게 동산에 걸려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디 민요는 백성들의 일과 놀이를 더욱 풍요롭고 건강하게 해주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노래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삶도 변했고, 일의 성질도 변했고, 노는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그러다보니 민요는 삶의 노래가 아닌 행사의 노래로 변하고 말았고, 백성들의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노래가 되고 말았습니다.

꽃 다운 나이에 한복 곱게 차려 입고 나붓나붓 춤을 추며 강강수월래를 부르던 '만 년 처녀' 김길임 명창. 그녀는 옛날의 처녀 시절을 그리워하다가 1999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와 함께 달빛 아래 신비롭게 펼쳐지던 여인들의 풍요롭고 아름다운 노래들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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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스피어에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목은 껶였어도 소릿길을 빛낸 박봉술 명창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새벽 3,4시, 옆에서 쿨쿨 잠을 자고 있는 어린 아들의 입에 아버지가 앵두사탕을 슬며시 넣어 주며 흔들어 깨웁니다.

“봉술아, 봉술아!”
“.....예!”
“잠이 깨냐?”
“예!”
“그럼 아버지 따라 해봐라. 둥둥둥 내 사랑 어허 둥둥 내 사랑----”
"둥둥둥 내 사랑 어허 둥둥 내 사랑"
 
소년은 어렴풋한 잠결에 앵두사탕을 빨아 먹으면서 아버지를 따라 판소리를 부릅니다. 자신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차세대 명창으로 승승장구하던 아들 박봉래가  33세의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뜨자, 박만조씨는 이제 막 10살을 넘은 막내 아들 봉술에게 자신이 직접 판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21년에 전라남도 구례군 용방면 중방리에서 박만조씨의 5형제 중 막내로 태어 난 박봉술 소년은 이렇듯 아버지의 판소리에 대한 집념 때문에 소리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한약방을 운영하던 그의 부친은 오래 전부터 판소리에 심취해 있었는데, 특히 송만갑 명창과 교분이 두터워서 그에게 판소리를 직접 배우기도 하고, 큰아들인 박봉래를 그의 제자로 집어넣어 소리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 꿈이 꺾이자, 형에게 판소리를 배우던 막내아들에게 당신의 꿈을 걸어보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동네 친구들과 놀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던 봉술 소년은 차츰 판소리에 재미를 붙여 낮에도 열심히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그 뒤 ‘꽃기운이 올라’ 소리에 힘도 생기고 소릿길에 눈이 뜨이자, 명창이 되어 일세를 울리려는 욕망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리하여 16
살에 서울로 상경한 봉술 소년은 드디어 <조선성악연구회>에서 꿈에도 그리던 송만갑 명창을 만나 그에게 소리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송만갑 명창은 구한말과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이 나라 방방곡곡에 이름을 드날린 최고의 명창입니다. 박봉술 명창의 회고에 따르면 ‘송 명창 사진만 보아도 오갈이 들어서 소리 못하는 명창이 많을’ 정도로 뛰어난 명창이었습니다.

“우리 선생이 소리만 허시면 그 자그마한 몸 어디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쇳소리 같은 '철성'이 몸으로 파고든단 말이여. 그러면 등골이 오싹오싹혀지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 있들 못허게 헌단 말여.
그리고 이 대목이 좋으면 저 대목이 좋고, 저 대목이 좋으면 이 대목이 좋고 해서 마디마디 소리가 좋고, 또 어떻게나 '상청'이 잘 나는지 상청을 질러대면 앵벌 날아가는 소리가 에--엥 에--엥 허고 나와서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단 말여.
거그다 또 같은 노래를 헐 때마다 달리 혀. 말하자면 즉흥적으로 작곡도 허고 편곡도 허는 거지. 그런디 그것이 또 이렇게 불러도 좋고 저렇게 불러도 좋아. 수만 번을 불러서 소리를 뚜르르 꿰고 있으니 그런 재주가 나오는 거지. 우리 선생님이 그만큼 공력이 좋았어.”

박봉술은 “나는 평생에 우리 송선생님 한 분한테만 소리를 배웠다”고 말할 만큼 송만갑 명창의 소릿제를 많이 물려받은 명창입니다.

송만갑 명창(좌)과 박봉술 명창(우). 출처 : http://news.d.paran.com/snews/newsview2...r%3D2009

그렇듯 소년 명창으로서 귀여움을 받으며 공부를 하고, 밤에는 ‘놀음’ 다녔습니다. 놀음이란 요샛말로 밤무대를 뛴다는 말인데 그때의 이름난 요정인 명월관, 식도원, 국일관과 같은 곳에 불려가서 판소리를 하면 어른 명창의 절반 값인 5원이 출연료인 ‘소리채’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1년쯤 지났을 때 갑자기 목이 ‘괄리기’ 시작했습니다.

변성기가 되어 목이 잘 쉬고 고음이 나지 않고 소리가 탁해지는 것을 목이 괄린다고 합니다. 그럴 때는 소리를 잠시 쉬거나 성대를 보살펴가며 연습해야 하는데, 조급한 마음에 
고향으로 내려 와 지리산의 쌍계사에서 백일 공부를 혼자 시작한 것이 평생의 탈이 되고 말았습니다. 너무 무리한 나머지 안타깝게도 목이 ‘꺾이고’ 만 것입니다.

예전과 같은 맑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탁한 음색으로 변하고, 고음은 꽉 잠겨서 나오지 않으니 
그는 울적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왓습니다. 그 다음 해에 타고 난 목청과 애간장을 녹이는 목구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임방울 명창을 따라 일본 순회공연에 참가했지만, 목이 꺾인 그는 보잘 것 없는 단역을 맡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석 달쯤 순회공연을 한 뒤에 다시 고향에 돌아 오기도 하는 동안 해방이 되고 창극단들이 ‘비온 뒤 대나무 순 열리 듯’ 자꾸자꾸 생겨 이 단체 저 단체 따라 다니며 재미있는 일도 많이 겪었고 고생도 ‘직사하게’ 했습니다.

그럭저럭 결혼도 하고 전라남도 순천시로 이사해서 살게 되었는데,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여순반란사건’을 겪게 되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4·3사태가 확산되자, 이승만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국군 제14연대를 급파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지창수·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민간인을 학살할 수 없다고 반발하며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친일파 처단'과 '조국통일' 등의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켜 일대 혼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번은 길을 가다가 반란군의 검문에 걸렸는데, 손을 내밀어보라고 해서 내밀었습니다. 그랬더니 느닷없이 뺨을 때리면서 “이거 개놈의 새끼 아니냐?”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손이 하얗고 못이 안 박혀 있으니 일 안 하고 놀고먹는 반동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저, 저는 소리 허는 사람입니다“
“소리가 뭐냐?”
“창이요.”
“창? 창이 뭐냐?”
“노래요.”
“노래? 그럼 노래 한번 해봐라”
"(두 손을 하늘로 올린 채 벌벌 떨면서) 둥둥둥 내 사랑 어허 둥둥 내 사랑.....”
“오, 그게 소리구나. 너 그럼 이승만 찬양하고 김일성 나쁘다고 노래 안 했냐?”
“아뇨. 나는 춘향가, 흥보가 이런 노래만 부르요.”
“그럼 우리 김일성 수령 동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봐라.”
“나는 그런 거 부를 줄 모르요. 그저 옛날 선생님한테 배운 노래만 겨우 부를 줄 아요.”

그 말을 들은 반란군은 허허 웃더니 공중에다 대고 총을 한 발 쏜 다음 어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도 당원들이 수시로 찾아 와서 공산당에 가입해서 소리로 활약하라고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섭고 싫어서 못 마시는 막걸리를 잔뜩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게 취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날은 편하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도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취한 척 하며 드러누워 버리곤 했습니다. 그 '술' 덕분에 어지러운 시절을 죽지 않고 간신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 뒤 순천에 국악원이 생기자 소리선생으로 지내면서 점차 술이 늘어갔습니다. 남모를 괴로움이 그를 점점 술꾼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소리를 안 알어줘. 바디는 좋고 공력은 있다고들 하지만 목이 꺾였응께 알어주는 사람이 드물어. 기껏 힘들여서 소리허고 나면 오천 원, 만 원씩 던져주니 오장이 상허고 울화가 나서 에잇 잡것, 나도 먹을 것이나 실컷 먹고 시간이나 때우자 허고 같이 앉어서 술을 먹어 버려”

이런 저런 울화가 쌓여 나중에는 ‘술이 봉 걸리 박’이란 별명까지 얻을 만큼 '술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한때는 공부에 정진하려고 술을 끊어보기도 했습니다.

“한 삼 년 끊어 봤제. 그런디 술을 안 먹고 조심을 혀봐도 별것이 없어. 영양실조만 걸려”

그래서 차라리 ‘영양가 있는’ 안주를 먹으면서 술을 마시는 게 몸에도 좋고 정신에도 좋을 것 같아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틈틈이 소리꾼으로서 활동을 하였지만 쟁쟁한 명창들의 그늘에 가려 그의 소리는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러다가는 평생의 공부가 죽도 밥도 안되겠다 싶어 '이를 갈고' 성공해보자고 결심한 끝에 1970년에 혼자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열심히
제자를 가르치고 공연 활동도 활발하게 한 보람이 있어 드디어 52살 되던 해인 1973년에 판소리 「적벽가」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판소리에서 무엇보다 '공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명창이었습니다.


'공력'이란 소리를 짜나가는 솜씨를 일컫는 말입니다. 목청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소리의 흐름과 가사 내용이 조화를 이루고, 가지고 나가는 소릿길에 무궁무진한 변화가 있고, 장단의 이음새가 자유자재하여 천변만화, 조화무궁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공력이 높다고 합니다. 제아무리 목청이 좋고 고음과 저음을 마음대로 구사하여도, 변화가 없이 무미건조하게 소리를 하면 공력이 없다고하여 높이 쳐주질 않습니다.

“옛날 명창들 소리를 들으면 가지고 나가다가 느닷없이 신기허고 묘헌 소리가 나온단 말여. 헌디 요즘은 그런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

그것도 그럴 것이 요즘은 문화재 전수에 지나치게 많은 비중이 주어져서 스승에게 배운 그대로 하지 않고 가사 하나 장단 하나만 바꾸어도 큰일 나는 줄로 알고 있으니, 개개인의 개성과 특성이 살아나지 않고 비슷비슷한 ‘복사 소리’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요즘 학자나 이론가들이 동편제니 서편제니 나누는디 나는 그런 거 안 따지네. 동편제는 무겁고 맺음새가 분명허고 서편제는 애원성이 많고 끝을 길게 끌고 허는 특징들이 있다고들 허지만, 그런 것들이 서로 오고가며 배우고 가르치고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은 뚜렷하게 구별 지을 특성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어. 괜스리 파벌만 생기고.
옛날에는 누구한테 배웠든지 간에 그 사람이 소리 잘 허먼 알아줬고 선생님한티 배운 것도 자기가 자꾸 고쳐감서 자기에 맞는 소리로 짰던 것이지 요새처럼 그렇게 빡빡허게 허들 안했어”

그의 소리를 처음 들어 보는 사람들은 안으로 꽉 잠겨서 탁한 음색이 나오고, 고음으로 올라갈 때는 가늘게 뽑는 가성인 ‘암성’으로 들릴 듯 말듯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왜 그를 명창이라고 하는지 의심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자꾸 듣게 되면, 저음인 ‘하성’의 웅장함과 걸걸함, 그리고 소리를 질질 끌거나 잔 멋을 부리지 않고 곧 ‘소리에 꼬리를 달지 않고’ 씩씩하고 꿋꿋하고 거뜬거뜬하게 몰고 나가는 남성다운 소릿길, 그리고 아기자기하고 변화무쌍하게 구사하는 장단의 변화, 들으면 들을수록 감칠맛이 나고 깊이 있고 무게 있는 그의 소리에 점점 끌려 들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의 소리가 나라에서 제일 공력이 많은 소리라고 감탄을 하게 됩니다.



비록 '목이 꺾여' 한세상을 울린 명창은 못 되고 말았지만 어느 명창보다 소리 연륜이 깊고 공력 높은 스승에게서 갈고 닦은 덕에 누구에게도 공력이 뒤떨어지지 않던 그는, 후학에 대한 안타까움을 남긴 채 1989년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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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기념식'이 정부 개최 7년 만에 두 동강이 나고 말았습니다.

국가보훈처가 기념식 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않기로 한 데 따른 반발로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가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국가보훈처 주관의 '5.18 3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고, '망월동 구 묘역'에서 별도로 기념식을 치른 것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 기념식.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32449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않은 기념식.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3282141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도청에서 전사한 윤상원 열사와, 1979년 겨울에 노동현장에서 일하다 숨진 박기순 열사의 '영혼 결혼식'을 다룬 노래굿 「넋풀이」에서 처음 불려졌습니다.

백기완 선생의 시 '묏비나리'에서 가사를 따와 황석영씨가 가사를 쓰고, 광주지역 작곡가였던 김종률씨가 작곡을 했지요. 그 뒤, 1982년에 제작된 음반 <넋풀이-빛의 결혼식>에 수록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80년대 군부 독재의 살벌했던 시절, 이 노래는 거리에서 술집에서 무대에서 광장에서 젊은이들과 시민들의 가슴을 뜨겁게 해주고, '새 날'을 향해 흔들리지 않게 '맹세'를 다져주고, '깨어나서' 외치게 해주었습니다.

그후 민주화운동은 물론이고 각종 시민사회단체나 노동단체나 학생단체의 집회에서 '민중의례'의 일부로서 널리 불리며 애국가 만큼이나 많이 합창되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우리나라 대부분 집회에서는 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랬던 이 노래가 이제는 찬밥 신세가 되어가나 봅니다.

국가보훈처뿐만 아니라  행정안전부에서도 최근에 공무원 노조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 포함된 민중의례를 하지 못하도록 각 지자체에 공문을 내려보냈으며, 공무원 노조의 5·18 성지순례를 금지시키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기념사도 총리 명의로 축소되었습니다. 5.18단체들은 정부가 5·18민주화운동을 홀대하고 있다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한 평생 나가자’고 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으며, ‘흔들리지 말자’고 다짐할 사람이 또한 얼마나 되겠으며, ‘깨어나서’ ‘뜨거운 함성’을 외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동안 5·18은 그 용어에서부터 역사적 굴곡을 겪어 왔습니다. 

80년대 초에는 '광주사태', '광주반란' 등의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민주화를 열망하던 시민과 학생들은 '광주 민중 항쟁' 혹은 '광주 민주화 운동'이란 용어를 썼지만 군부의 무서운 통제와 억압 때문에 지하에서나 은밀하게 사용되던 용어였습니다. 그 말을 쓰던 사람들은 수배되거나, 감옥에 가거나, 갖은 수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총을 든 공수부대원이 도망치던 시민을 쫓아 곤봉으로 내리치고 군홧발로 밟고 있다. | 5·18기념재단 제공

지금 우리는 5·18을 '광주 민주화 운동'이나 '광주 민중항쟁'이나 '광주 성역화' 등의 용어로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고,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도 2004년부터 정부가 직접 주관해 오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다시 5·18과 <임을 위한 행진곡>이 광주와 한국 민주주의의 또 다른 상처가 되어가는 역사의 현장이 눈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30년 동안 5·18의 전국화와 세계화를 추진해 왔던 각계의 노력도 두 동강이 났습니다.

이제 이 노래와 더불어 5·18은 급속도로 우리 사회의 찬밥 신세가 되어 갈 것입니다. 아마 내년 행사는 행사의 규모나 예산이나 참여폭도 줄어들 것이고, 해가 지날수록 우리 사회에서 점점 그 의미가 축소될 것입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뒤로 돌아가는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5·18과 <임을 위한 행진곡>의 운명은 어떻게 되어 갈까요? 노래 하나를 부르지 않으려고 행사를 두 동강 낸 정부의 옹졸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앞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운명은 어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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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의 대표적 유파로 '동편제'와 '서편제'가 있습니다.

동편제는 섬진강의 동쪽 지방인 구례, 곡성, 남원 등에 전해 오던 소릿제로 송흥록- 송광록-송우룡- 송만갑 등으로 내려오는 '송씨 가문'의 판소리를 원조로 치죠. 이 소릿제가 최고의 세력을 뽐내며 인기상승 중이던 구한말, 섬진강의 서쪽 지방인 보성에 박유전 명창이 '혜성같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소릿제는 송씨 가문의 소리와 너무도 달랐지만, 인기가 하늘을 찌를만큼 높다보니 애호가와 제자들 사이에 서로 자기네 소리가 최고라는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라도 판소리가 '동편제', '서편제'로 갈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보성읍 대야리 강산마을 송정강 기슭에 있는 박유전 명창 예적비(오른쪽).
출처 :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l_no%3D2

박유전 명창은 1834년에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태어나, 전라남도 보성군 대야리 강산(岡山)마을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얼굴이 빡빡 얽고 눈이 하나밖에 없어 누가 봐도 못생긴 얼굴이었다는데, 그런 그가 판소리만 하면 그 못생긴 얼굴이 '꽃으로 보일만큼' 매력적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는 저음인 '하성(下聲)'이 장군 소리와 같이 우렁차고, 소리가 둥글둥글하여 거름진 땅과 같이 기름지고, 우조나 계면조와 같은 운율의 흐름이 뚜렷하고, 소리의 높낮음과 빠르고 느림과 맑고 탁함에 추호도 어긋남이 없이 정연한 소리를 했습니다.

그 무렵 수많은 판소리 광대의 최고 후원자였던 대원군은 특히 그의 소리를 좋아해서 "박유전의 소리가 강산(江山)에서 천하제일"이라고 추켜 세우곤 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그의 호를 박 명창의 고향마을 이름과 자신의 칭찬을 합쳐 '강산'이라고 지어줬답니다.

그래서 그의 소릿제를 '서편제'라고도 하고, '강산제(江山制, 岡山制)'라고도 하게 된 겁니다. 운현궁의 사랑채에 기거하며 대원군의 총애를 받던 그는 무과(武科)에 급제해서 선달 벼슬도 받고, 한쪽 눈을 가릴 수 있는 '오수경(둥그런 검은 안경)'과 '금토시(최고급 팔목가리개)'까지 하사 받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대원군의 지극한 총애를 받던 그는 민비에게 권력을 빼앗긴 대원군이 중국으로 망명하자 민비 일파의 보복을 피해 남으로 내려오다가, 전라남도 나주에서 정재근을 만나 그의 사랑채에 숨어 살게 되었습니다. 

정재근에게 판소리를 기르치면서 지내던 중, 대원군이 다시 득세를 하자 정재근의 일곱 살 난 조카 정응민도 함께 데리고 한양에 올라갔습니다. 어린 정응민은 운현궁 사랑채에서 판소리를 배우며,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고향에 한 번도 내려가지 않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대원군이 죽고 한일합방이 되자 박유전 명창은 “나라 잃은 가객이 살아서 뭐하느냐”라고 탄식하며 노래부르기를 그치고, 사골로 내려가서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음식을 전폐한 채 한 겨울에 굶어 죽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오기도 하는 '충성과 절개의 명창'입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정응민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리에 돌아 온 뒤, 광대로서의 활동을 중단한 채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나라 잃은 가객'에 대한 스승의 정신을 잊지 못한 그는 세상 출입을 끊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제자를 삼아 소리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정응민 명창 사진과 그를 기린 벽소 이영민의 시.
출처 :
http://www.pansoricenter.org/skin_104/5...ndex.php

정권진 명창은 바로 이 고집스런 '농사꾼 명창'인 정응민 명창의 외아들입니다. 

1927년 10월 15일에 태어난 어린 권진은 사랑채에서 들려오는 판소리에 남달리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서당에 다닐 무렵에는 아버지의 제자들이 부르는 웬만한 판소리는 따라서 흥얼거릴 수 있을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판소리 부르는 것을 엄하게 금지했습니다.

“명창이 되려면 수십 년을 공을 쌓아야 되는디, 그 공을 학문하는 데에 쓰면 몸도 편하고 훨씬 많은 일을 할텐디, 대우도 못 받고 고되기만 한 판소리를 허면 죽을란다”

이런 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판소리 근처만 빙빙 돌며 애를 태워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아버지의 친구들이 “언제까지나 일제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혼은 판소리밖에 없으니 독립되면 판소리가 빛을 볼 것이다. 아들도 애국자 만들려면 판소리를 가르쳐라” 하며 갖은 말로 권유하는 통에 간신히 허락이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열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에 부산 동래 권번에 소리선생으로 있던 아버지의 수제자 박기채에게 소리를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정응민 명창에게 소리를 배우던 제자로는 김연수, 정광수, 김준섭과 같은 쟁쟁한 소리꾼들이 있었는데 박기채는 그 중에서도 정응민이 가장 아끼던 제자였습니다.

부산에서 낮에는 양복점 점원 노릇을 하고, 밤에는 소리 공부하기를 4,5년쯤 하던 정권진은 열아홉살이 되던 해에 고향에서 장복순과 혼인을 했습니다. 혼
인한 지 한 달 만에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선언한 뒤, 강진에 있는 고성사라는 절에서 공부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내가 판소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 년 기한을 잡고 절에 독공을 하러 들어가니 만일 기다릴 수가 없다면 떠나도 좋소”

집과 절을 오가며 판소리 공부를 하는 동안 해방이 되고 6.25전쟁이 터졌지만, 아내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 이후로도 그의 아내는 군산이나 대구나 대전 국악원과 같은 곳에 창악 강사로 초청되어 떠돌아다니는 남편을 한결같이 기다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1962년에 국립 창극단이 설립되자 초창기 단원이 되어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창
극단에서 1년쯤 지낸 뒤, 창극단을 그만 두고 국악예술학교의 창악 강사로 근무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공연 활동도 계속한 그는 1964년에 「심청가」 인간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느 명창보다 가사 내용에 대한 이해가 밝고 판소리에 대한 이론이 정연한 명창이었습니다.

그것은 박유전의 강산제 판소리를 3대를 이어 수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유전 명창은 대원군과 교분을 맺으며 지내는 동안 많은 양반 선비들과 벼슬아치들을 만났을 것이고, 그들의 도움으로 가사 내용과 창악 이론에 안목을 높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강산제의 문파에 전해 내려오는 <광대론>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대명창이 되는 길은 '정심', '정음', '사채'에 달려 있다 하겠다.
'정심'이란 바르고 맑은 마음이니, 그 나라 음악을 듣고 그 나라 정치를 알아 볼 수 있듯이 가객의 소리를 듣고 가객의 인격을 알아 볼 수 있다. 심청가를 부르는 가객이 심청가를 청중에게 권하면서 자신이 불효를 하면 열기가 없는 죽은 소리요, 자신이 효를 행하면 생명감이 있고 기가 충만하고 진수가 담겨 참된 소리가 되는 법이니 소리 이전에 자신의 인격과 참다운 사람됨을 권하고자 한다. 
'정음'이란 소리를 엄격하게 성심것 하여 득음의 경지에 이르러야 된다는 말이고,
'사채'란 품위 단정한 동작 곧 너름새이니 사채가 무게 있고 민첩하고 발 하나를 떼어도 정중함이 있어야 하며, 사방으로 이유없이 활보한다든가, 쓸데없이 부채질을 자주 한다든가, 난잡한 태도를 보여 품격이 떨어지면 올바른 사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강산제 판소리의 사설은 고상하고 점잖은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육담이나 음담패설이나 욕설은 없애거나 극히 절제해서 사용하고, 인물 묘사도 우아하고 장중함을 그 기본으로 깔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적벽가」에 나오는 조조가 다른 명창들의 '적벽가'에는 간사하고 교활하게 그려져 있는데 반해, '강산제 적벽가'에는 위엄 있는 장수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와 함께 음악표현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슬픔을 강조한다든가, 무절제하게 웃음을 유발시킨다든가, 간사스러운 성음을 내는 것을 극히 싫어하여 대장부의 꿋꿋하고 웅장한 성음을 주장하고, 우조와 계면조와 같은 선율의 차이를 분명히 하며, 장단의 부침새가 정교하고 분명한 것을 좋아합니다.

이는 모두가 강산 박유전이 지녔던 소리의 장점이 모두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강산제 판소리의 '바른 마음'과 '바른 소리'와 '바른 몸가짐'에 대한 주장과, 그 소리의 대장부다운 기상과, 그 사설의 품위 있고 단정한 표현과, 그 장단의 정교하고 변화무쌍한 부침새는 다른 소리제가 따를 수 없는 품격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강산제 소리제의 후계자인 정권진 명창의 판소리에 대한 남다른 고집과 안목은 이 소리제를 올바로 전수하는 데에 단단한 받침목이 되었습니다.



“요새 소리 좀 한다는 후배나 제자들더러 공부를 더 하라고 허며 돈이 있어야 공부허네, 처 자식을 벌어 먹여야 공부허네, 뒷받침이 없네, 하며 갖은 핑계를 대는디, 그 모두가 구실에 지나지 않어. 오로지 일심으로 공부에만 전념허면 지금 인심으로도 후원자가 생겨나서 처자식 굶어죽게 안 만들어”

그는 무엇보다도 공부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명창입니다. 그래서 타고난 목청이나 재능만 가지고 한몫 벌어 보려고 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합니다. 자기 자신도 대성하지 못한 미숙한 소리꾼으로 여겼던 그는 소리꾼들이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강조 했습니다.

“잘 살고 배부르고 인기가 있으면 참다운 소리를 해치는 법이여. 학자가 배가 고파야 참다운 글을 쓰고, 정치가가 배가 고파야 참다운 정치를 하고, 병들어서 병원 생활을 해 봐야 환자의 괴로움을 알듯이 소리하는 사람도 고생을 하고 만고풍상을 겪은 뒤에야 겨우 뭔가 이루어지는 법이여.
판소리라는 게 전봇대와 같이 큰 뜻을 세우고 전력을 다해서 공부해 봤자 바늘 만큼밖에 이루어지지 못 허는 법인디, 하물며 놀고 마시고 각시질이나 하고 인기나 좇아 흘러다니다 보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는 법이지”

이는 그가 가난한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연마하여 깨달은 결론이기 때문에 몸으로 부딪쳐오는 진실함이 있습니다.

“옛적에 소리의 왕이라고 불렸던 명창 송흥록은 자기 소리를 알아주던 영의정 김병희가 죽으니 그를 따라 함흥에서 절사하시고, 강산 선생님도 자기 소리를 아끼던 대원군이 돌아가시자 그를 따라 순사하셨어.
이와 같이 참된 소리꾼은 부귀공명을 탐하지 않고 지조와 절개가 있었는데 요즈음은 돈만 주면 아무데나 가서 막 소리를 해대. 요즈음이 아니라 일제 때에도 권번 제도를 만들어가지고 기생방에서 소리를 하게 했어. 말하자면 민족예술을 화류계화시킨 거지.
예전에는 판소리에 삼강오륜이 있다 하여 명창들이 감찰이니 오위장이니 벼슬을 하며 정치의 도구로 쓰였는디 일제 때부터 놀고 먹고 ‘에야라 놀아라’ 식의 소리로 변한 거지. 그러니 소리꾼들의 생활도 무절제하고 방탕할 수밖에 없었지. 그러나 지금은 그러면 안돼. 지조와 절개를 가지고 민족혼을 일깨우는 사명을 소리꾼들이 짊어지고 나가야 돼.”

1986년에 세상을 뜬 그의 판소리에 대한 외곬수 고집을 정회천과 정회석 두 아들이 4대째 이어가고 있으니, '보성소리' 집안의 고집이 대단히 소중하고 값진 것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군요.


4대째 판소리를 이어가고 있는 정회석 명창. 출처 :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3D158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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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관련 조사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습니다. 

5월 20일의 한·미합동조사단 결과 발표를 앞두고 수많은 추측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 보도들을 종합해 보건대 '원인을 알 수 없는 외부폭발', 또는 '어뢰에 의한 폭발' 정도로 마무리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원인인지 또는 어떤 어뢰인지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의 조사가 필요하다며 미뤄 놓는 동안, 언론들은 북한의 소행으로 몰아가는 기사를 써대겠지요. 

그동안 
천안함의 연돌에서 화약성분이 검출되고, 해저의 모래와 자갈에서 화약흔이 검출된 것으로 알려졌을 때 군은 어뢰 파편일 '가능성'만 언급을 했을 뿐인데도 언론들을 앞다투어 '북한 어뢰의 버블제트 폭발'로 단정 짓는 기사를 써댔습니다. 참으로 교묘하고 손발이 잘맞는 여론 조작의 놀이판에 국민들은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3265102

지난 5월 5일 KBS 추적 60분 <천안함, 무엇을 남겼나?>는 그 놀이판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전문가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천안함 침몰의 의문점들을 조목조목 파헤친 파격적인 방송에 수많은 시청자들이 공감을 했습니다. 저 역시 그동안 KBS가 보여준 입장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에 공감을 했기 때문에 그 방송을 중심으로 의문점들을 되짚어봅니다.

먼저 생존 장병 중에 버블제트로 인한 물기둥을 본 사람이 없고, 물에 젖은 사람도 없고, 죽은 물고기떼와 같은 폭발 흔적이 없는 점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또 버블제트로 인한 폭발이라면 사고 때 관측된 인공지진파가 시차를 두고 두 번 나타나야 하는데 한 번밖에 나타나지 않은 점도 설명되어야 합니다.

▲ 천안함 침몰 당시 지진파는 일반적인 버블제트 소리 파형과 다르게 나타난다. ⓒKBS <추적 60분> 캡쳐

또 폭발이 있었다면 화상이나 고막이나 장기에 상처가 있어야 되는데 희생자나 생존자들 중 그런 상처가 한 명도 없는 점, 함미 바닥에 배가 긁힐 때 나타나는 스크래치의 흔적이 나타난 점, 스크류의 날이 안쪽으로 크게 휘어있는 점, 인양할 때 함미 밑바닥에 구멍이 뚫려서 물이 샌 점도 설명되어야 합니다.


▲ 인양되고 있는 천안함 함미의 모습. 바닥에 상처가 거의 없고 뚫린 구멍으로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KBS <추적 60분> 캡쳐

사고 다음날 희생자 가족들 앞에서 공개한 작전상황도에 표기된 '최초 좌초 6.4'라는 글씨도 계속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해군 관계자는 그 글씨가 유족 가운데 한 명이 작전상황도를 뺏어가 임의로 써 넣은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왜 그런 중대한 자료에 멋대로 그런 글씨를 썼는지, 또 군은 왜 그런 글씨가 써진 지도를 공개했는지도 함께 설명되어야 합니다.


▲ 군이 사고 발생 즉시 '최초 좌초' 지점을 표시했다고 해 뒤늦게 주목을 받았던 작전상황도. ⓒ아시아경제신문

이 의문들은 군에서 몇 가지 기록만 공개하면 금방 풀릴 수 있는 문제입니다.

먼저 'TOD 영상 기록'입니다. 군에서는 9시 4분 무렵에서 9시 24분 무렵까지의 20분간만 영상 기록이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TOD 담당 병사의 증언도 있어야하고 영상장비에 대한 재점검도 필요합니다. ㅣ

다음은 '교신기록'입니다. 군에서는 사고 당일 9시 15분에서 22분까지는 군 통신망을 통해서 교신한 기록이 없다고 하는데,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설명입니다.
 
'KNTDS(해군전술지휘통제시스템) 기록'도 공개해서 천안함이 정확히 어느 위치에서 어떤 사고를 당했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증거물인 '인양된 선체'를 공개해야 합니다.

이런 증거들이 공개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좌초설', '미군오폭설', '미잠수정과의 충돌설' 등이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동안 조사단의 활동과 조사에 대한 모
든 사항이 철저한 비밀에 싸여 있는 통에  더욱 큰 억측과 가설들을 양산해 냈습니다. 불필요한 혼선을 막기 위해 일부는 보안에 붙인다고 하더라도 조사단의 구성이나 조사 과정이나 최소한의 진행 상황은 공개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온 국민에게 슬픔을 안겨준 비극적인 사건의 진상 조사를 하면서 그토록 철저히 비밀주의로 일관하는 것은 스스로 국민들에게 불신을 자초한 처사입니다. 

김성찬 해군참모총장은 희생 장병들을 위한 영결식에서 '국민에게 고통을 준 세력을 끝까지 찾아내서 더 큰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접한 대부분의 국민들은 ‘고통을 준 세력’을 북한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세력의 제1순위는 군과 정부라고 생각합니다. 이해 할 수 없는 보고 지연과, 구조 과정의 난맥상과, 비밀에 싸인 조사과정까지 그 무엇 하나 고통을 주지 않는 부분이 없습니다. 군의 위기관리에 커다란 허점이 드러났고 군의 신뢰가 바닥에 떨어졌는데도, 군은 자신들의 문제를 반성하기보다 북한에 책임전가를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만일 북한이 버블제트 어뢰를 발사해서 침몰한 것이라면, 그 또한 군의 책임을 엄중하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북한의 잠수정이 한·미훈련중인데도 백령도 깊숙이 침투해서, 수중음향탐지기인 '소나'에도 걸리지 않은 채 빠르게 이동 중인 천안함을 버블제트 어뢰를 쏘아 명중시킨 후 몰래 북으로 귀환했다는 얘긴데, 참으로 신출귀몰한 북의 침입에 대해 우리 해군은 왜 그토록 무기력했단 말인가요.

막대한 국방비를 써서 최신예 무기들로 무장한 우리 해군이 그토록 무능하고 직무에 태만했다는 얘긴가요. 만약 그렇다면 북한에 비해 그토록 전력이 뒤떨어진 군을 우리 국민들이 어떻게 믿고 살란 말인가요. 이처럼 도저히 믿을 수도 없고 이해도 되지 않은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천안함은 영원히 역사의 '미궁'으로 침몰하고 말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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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미래의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스피어에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저와의 인연으로 「서편제」에 특별출연한 김무규 명인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영화「서편제」
에서 여주인공인 송화가 눈이 먼 후, 제가 맡은 역인 아버지 유봉과 함께 호젓한 산길을 걷다가 어느 퇴락한 기와집에 잠시 머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집의 주인이 하얀 한복을 입고 정자에 앉아 거문고를 켜고, 유봉이 그 앞에서 구음을 부릅니다. 바로 그 장면에 나왔던 거문고 연주의 주인공이 김무규 명인입니다.


이 분은 저하고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병이 걸려 휴학을 하고 지리산 '상선암'이란 암자에서 잠시 휴양하고 지내던 겨울날입니다. 그해 여름에 판소리를 처음 듣고 한창 판소리에 열이 올라있던 제 귀에 구례에 산다는 '단소 명인'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암자에서 만난 친구 2명과 함께 지체없이 그 명인을 찾아 나섰습니다.

구례읍내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산길을 물어물어 걸어 간 끝에, '절골' 마을에 사는 김무규 명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멋지고 고풍스러운 기와집을 찾아가니
호리호리한 명인이 우리를 맞았습니다.

그는 꿀 한통을 드리며 단소를 배우러 왔다는 '산 청년'들에게 “이 어려운걸 뭐 하러 배우려 하느냐?”하시면서도 먼 길을 걸어 온 정성이 갸륵했던지 다음에 한번 찾아오라고 허락을 하셨습니다.

며칠 뒤에 다시 찾아가니 집 뒤에 있는 대나무 숲에서 대를 잘라 단소 세 자루를 만들어 놓으셨다가 선물로 주며, 단소 부는 법의 기초부터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명인에게 단소를 배우던 이 방에서 촬영한 <서편제>의 한 장면.

그 분은 제가 판소리에 관심이 있는 걸 아시고는 김소희 명창이 여름이면 제자들과 함께 자기 집에 연습을 하러 오기도 한다고 하시며, 명창들과 관련된 옛날 얘기를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아쉽게도 그 분에게 몇 번 밖에 단소를 배우지 못하고, 몇 달 뒤에 복학해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연은 끊어지지 않아 나중에 그 분의 이력을 소개하는 인터뷰 기사도 쓰고,  「서편제」를 통해 제가 반했던 기와집과 대숲이 멋지게 등장하고, 새하얀 한복을 입고 거문고를 치는 그 분의 모습도 영상에 담을 수 있었으니 기이한 인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김무규 명인은 광대 출신이 아니라, 양반 집안에다가 천석꾼 부자집의 도련님이었습니다. 

삼백 년쯤 전에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된 그의 선조는 근면하고 검소하여 점차로 재산을 늘렸는데 그의 고조할아버지인 김영국은 진사 벼슬을 받아 집안을 일으켰고, 증조할아버지도 진사 벼슬을 받아 양반 집안으로서의 가통을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천석꾼 소리를 들을 만큼 재산이 불어났고, 그의 아버지 김형석은 가문의 영예를 더욱 떨치려고 옛집을 헐어 버리고 풍취 있고 우아한 집을 새로 지었습니다.

그와 함께 풍류객들을 불러들여 사랑채나 행랑채에다 재우고 밥을 먹이고 대접을 후히 하며 풍류를 즐겼습니다. 그래서 그가 태어난 1908년 무렵의 그의 집에는 이름을 날리던 쟁쟁한 음악인들이 쉴새없이 드나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려서부터 그의 주위에서는 거문고, 단소, 판소리, 시조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는 음악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서 아버지가 가야금 배우는 것을 어깨 너머로 보고 금세 흉내내기도 하고 단소나 거문고도 몰래몰래 '만지작거렸'습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그에게 정식으로 스승을 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국악은 취미삼아 듣는 것이고 외아들인 그의 갈 길을 오로지 학문의 길로 정해져 있음은 온 집안이 잘 알고 있었고, 또 스스로도 국악인이 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학교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구례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 올라가 배제중학과 중동중학교에서 중등 과정을 마쳤습니다. 16살에는 구례군 광의면 월곡리에 사는 황묘숙이라는 두 살 위의 처녀에게 장가를 갔습니다. 황묘숙은 매천 황 현의 손녀입니다. 황현은 조선조 말기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 하니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절개 곧은 선비입니다.

매천 황현의 초상화.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00290148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과 바다도 통곡하네
무궁화 강산이 무너지고 말았으니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역사를 돌이켜보니
인간으로서 선비 노릇 하기가 참으로 어려웁구나

그는 처가 쪽의 항일 사상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집에서 틈틈이 한문 공부를 하기도 하며 지내다가, 26살이 되었을 때에 다시 서울에 올라와 성균관대학교의 전신인 명륜전문학교에서 중국 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 유학을 가서 제대로 한학을 공부하려던 그의 꿈은 선친이 눈병에 걸려서 앞을 못 보게 되는 통에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집에 내려와 쉬게 되었는데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된 데 서 오는 절망감 때문에 몸이 많이 약해졌고, 또 일본 사람들의 행패가 갈수록 심해지는 통에 바깥에 나가기도 싫고 해서 집안에 틀어박혀 실의와 우울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를 위로하기 위해 선친이 그에게 단소를 배워 보라 권하며 추산 전용선을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전용선은 전추산으로 더 알려진 단소의 명인으로 전라북도 고부 사람입니다. 1888년에 태어나 스무 살 무렵부터 단소를 배우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정악 단소를 익히고 다음에 단소 산조를 창안한 사람으로 196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단소로는 전무후무한 명인이라는 평을 듣는 사람입니다. 조금 과장해서 '날던 새도 멈추고, 울던 짐승도 울음을 그치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들도 귀를 기울여 듣는' 전설적인 명인이라고 합니다.

추산 전용선의 음반. 출처 :  http://www.gugakcd.pe.kr/music_detail.a...RCD-1362

그런데 몸도 약한데다가 성격도 급하고 까다로워서 여간해서는 제자를 가르치지 않고 또 가르치다가도 제자가 조금만 못 따라하면 화를 버럭 내고 때려치우고 마는 사람이었답니다.

그러한 그가 김무규만은 남달리 사랑하여 해방이 될 때까지 꼭 십 년 간을 그 집을 왕래하며 정성을 기울여 가락을 전해 주었습니다. 김무규도 어려서부터 음악에 젖어 있던 터인데다, 일제 말기의 암담한 시절을 뜻 둘 데 없이 불우하게 보내느니 음악에나 마음 붙이고 살아보자 하며 열심히 불었습니다.

단소는 '단소 소리가 제대로 나면 절반 공부는 마친 셈'이라고 할 만큼 제 소리 내기가 어려운 악기입니다. 그러나 제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상영산, 중영산 같은 가락을 배우기 시작하면 그 맑고 청아한 음색에 반해서 사정없이 빠져 들게 됩니다.

그 역시 한동안 단소에 미쳐서 <영산회상>, <청성곡>, <굿거리> 등 스승이 지닌 가락을 차근차근 배워 나갔습니다. 그러는 틈틈이 서울에 올라가 종로 수송동에 있던 정악 전습소에서 거문고, 가야금, 양금, 해적, 세피리와 어우러져 '줄 풍류' 즐기기도 하고, 단소 독주로 이름을 높이기도 하고, 거문고의 대가인 우당 김윤덕에게 거문고 가락을 전해 받기도 하고, 또 조선성악역수회에 놀러 가서 명고수인 한성준에게 북가락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의 단소 솜씨가 점점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면서부터 단소 연주자로 나설 기회도 많았고 유혹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요청을 모두 물리치고 시골집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평생 야인이 되어 밭이나 갈다가 늙어서 죽겠노라고 호까지 '백경(白耕)'으로 지은 터라 스스로 '피리 부는 광대' 행세하기 꺼려 해서 무대에서나 '노는' 자리에서 단소 부는 것을 삼가 왔습니다. 그는 울적한 심사를 단소나 거문고로 달래거나, 활터에 나가 활을 쏘거나, 조선어학회 회원이 되어 국어 공부와 역사 공부에 정신을 쏟기도 하며 일제의 어두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한 세월이 십 년이 흘러 해방이 되자 그는 구례중학교에 몸을 담고 국어와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십 년쯤 교직 생활을 하며 교장까지 하다가 자유당 말기에는 정치 바람이 들어 민의원에 나섰다가 빚만 몽땅 지고 가산을 탕진했습니다. 민주공화당 때에도 국회의원 하려다가 돈만 날렸습니다.

그런 데에 쏟은 노력에 견주어서 기대했던 결실은 너무 보잘것없이 나이만 예순이 가까워 오니 정치 바람 타서 쏘다닌 게 모두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는 자각과 함께,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단소를 추켜들고 잊어버린 가락을 다시 찾고 잃었던 '짐' 찾았습니다.

"단소 부는 데에는 짐이 첫째지, 입김 말이여. 이 짐이 좋아서 일점 때가 없이 맑은 소리가 쟁반에서 옥구슬이 굴러가듯이 흘러 나와야 되는 법이여."

그 '짐'을 찾은 덕에 1985년에는 구례향제 줄풍류 단소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습니다. 그후로 그는 매일같이 십 리 길을 걸어 읍내 문화원에 들러 향토지를 쓰고, 학교에서 단소를 가르치고, 때때로 활터인 봉덕정에 들러 활을 쏘며 지냈습니다. 

80년대 후반 무렵, 제가 잡지 <음악동아>의 요청으로 그를 다시 찾았을 때 그의 집은 흥청대던 옛 자취는 모두 사라지고 퇴색한 건물의 곳곳에 먼지가 올라앉고 기와 지붕과 뜨락의 돌 위에는 푸른 이끼가 끼어 있는 쓸쓸한 고옥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연주 한 곡을 부탁하자 그는 소나무가 바라다 보이는 대청마루에 오랜만에 단소를 손에 들고 나타났습니다. 세월을 느끼게 하는 누르스름하게 변색한 두루마기를 단정히 차려 입고 정좌한 그는, 단소를 입에 대고 몇 번 짐을 넣어 다스려 본 뒤에 즐겨 부는 곡인 <청성곡>을 불기 시작했습니다.

출처 : http://www.inilnet.com/bbs/zboard.php%3...o%3D1099

끊어질 듯 이어지다가 잔잔히 스러지고, 잦아지는 듯하다가 다시 처연하게 솟아올라 한없이 맑게 뻗어 나가다가 툭 떨어져 떨고, 다시 잔잔히 이어지는 가락의 변화에 귀를 기울이고 앉았노라니, 그 가락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고 어디선지 맑은 물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는 눈을 지긋이 내리감고 취한 듯 단소를 불고 있었고, 그러한 주인의 주름진 얼굴을 햇빛이 내려쪼이는 대청 마루 끝에 앉은 고양이 한 마리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집의 풍경과 그의 모습에 반한 저는 「서편제」를 찍던 1991년에 임권택 감독님에게 그 집을 소개했고, 그는 마지막 거문고 연주 모습을 영상에 남긴 채 199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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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은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쌓았다는 '참성단(塹星壇)'이 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있는 참성단.

저는 그동안 마니산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는데, 얼마 전에 친구가 마니산 중턱의 어느 암자에 꼭 소개하고 싶은 '여도사' 있다고 해서 바람도 쐴 겸 가게 되었습니다. 

강화군 온수리의 좁은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다가 산골 입구에서 차를 내려 진달래가 소담하게 피어 있는 산을 올라갔습니다. 


봄내음이 상큼한 산길을 친구와 함께 반시간쯤 걷다보니 산중턱에 부스러진 기왓장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폐허가 나타나더군요. 
 


폐허 아랫쪽에 '천제암 궁지'라는 안내판이 서 있었습니다.


예전에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제기와 제물 등을 준비하던 '제궁터'라고 합니다. 고려 무렵에 세워졌을 거라고 추정을 하지만 정확한 건립 연대와 역사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불에 타서 사라진 이 유적지를 몇 년 전에 군에서 터만 조금 다듬어 놓고 안내판 하나 달랑 세워 놓았다고 합니다. 


제궁터 옆에 작은 철문으로 보호한 우물이 있더군요. 철문을 열고 물을 마셨습니다. 물맛이 시원하고 깨끗하더군요. 친구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곳 사람들은 그 우물이 단군 시대부터 있었고, 5천 년 동안 한 번도 마르지 않았다고 말한다는데,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우물터 위 약간 가파른 산길을 10여미터 올라가니 슬레이트 지붕에 시멘트 벽을 한 조그마한 움집이 나타났습니다. 


집의 뒷 마당에 서서 주위를 살피다보니 이상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바위가 눈에 띄더군요. 마치 윷놀이판처럼 생긴 이 무늬는 바로 이곳이 한반도의 배꼽에 해당하는 곳을 알리는 표식이라고 합니다. 그 말도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집의 앞쪽으로 돌아서니 한 중년 부인이 저희를 맞이합니다. 바로 그 분이 친구가 소개하고 싶어 한 여도사 '송월(松月) 법사'입니다.    

저희를 반갑게 맞이 한 부인은 자신이 기거하는 비좁은 골방에서 자신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열정에 가득차서 이야기하는 그녀에게서 도저히 믿기 어려운 놀라운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인천에서 남편과 함께 활발하게 건설 관계 사업을 하며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던 기독교 신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20여년 전부터 시름시름 몸이 아팠답니다. 병원은 말할 것도 없고, 한약과 기도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병이 낫지 않았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사람이 귀신에 씌인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길래 영적 능력이 깊다는 목사님을 찾아가서 안수기도도 여러차례 받고, 도가 높다는 스님을 초청해서 법회도 열고,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서 굿도 여러 차례했지만 전혀 차도가 없이 몸은 점점 더 말라가고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밤마다 꿈에 산속의 폐허와 쓰러져 가는 움집과  할아버지와 관세음보살 같은 이미지들이 나타나고, "너는 그 곳을 찾아 가야 산다!"는 환청이 자꾸 들리더랍니다. 

그래서 그동안 꿈 속에 나타난 폐허를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녔답니다. 그러던 중 마니산 참성단에서 기도를 하고 내려 오다가 자신도 모르게 발길에 끌려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그 폐허와 움집이 바로 꿈속에 보이던 그곳이었답니다. 

그 움집은 본래 산림보호원들이 잠시 머물기 위해서 지은 가건물이었는데,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 버려져 있던 곳이었답니다. 그런데 쓰레기와 오물로 가득 찬 집안으로 들어가보니 방 2개와 부엌이 있는데, 작은 방 안에 한 번도 쓰지 않고 비닐로 곱게 포장해 놓은 자개장롱과 경대 등이 세워져 있더랍니다. 

그녀의 이야기에 따르면 자개장롱과 경대는 이곳에서 수도하던 '도사' 남겨 놓으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분 역시 이곳에서 홀로 수도하며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자기가 죽은 후 이곳을 '단군 성지' 일으킬 여성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며 자개 장롱과 경대를 미리 사 놓고, 그 속에 자신이 그려 놓은 단군 성지의 조감도와 편지 등을 남겨 놓았다는 겁니다. 

장롱과 경대는 방안에 있으니 제 눈으로 확인을 했지만, 그 도사가 남겨줬다는 유품을 보여 달라고 하기는 예의에 어긋난 것 같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부인이 허황된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전 그저 놀라서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할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움집에 오자마자 너무도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해져서 그곳에서 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놀라서 반대했지만 그곳에서 살아야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그녀의 완강한 고집에 양보했답니다. 남편은 한동안 인천에서 오고가며 그녀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등을 가져다 주었답니다.   

그녀는 폐허가 된 움집을 가꾸며 혼자 살았답니다. 인적 없는 산속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오로지 꿈속의 신령들과 교류하며 참성단에 오르고, 그들이 꿈속에서 가르쳐 주는대로 기도하고 먹고 자며 지내는 동안 그녀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건강해지기 시작했답니다. 대꼬챙이처럼 말랐던 몸에 살집이 붓고, 혈색도 돌아왔답니다. 지금은 어느 누구보다 씩씩하고, 목소리도 우렁찹니다. 

그래도 산 아래 마을에서는 그녀를 미친 여자나 무당이나 귀신 들린 마녀 취급을 하며 멀리 했답니다. 그런데 점차로 무당처럼 점을 치거나 굿을 하거나 돈을 받지도 않고, 그저 순수하게 단군신을 모시고 지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부터 지금은 그녀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녀가 꿈속에 본 이미지를 토대로 하여 제작되었다는 단군 영정.

그녀는 그곳에서 홀로 지낸 지 10년이 되어 간다고 합니다. 

그녀의 꿈은 움집 아래쪽에 있는 '천제암 궁지' 폐허를 복원하여 '단군 성지'로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문화재 관리를 담당한 군청을 수도 없이 찾아가서 나라에서 복원해주기를 청했지만, 예산타령만할 뿐 진척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제 그녀는 문화재청이나 군청에 하소연하는 걸 포기하고 자기가 스스로 그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남은 여생을 신의 뜻을 받들어 단군 성지를 만드는 것이라며, 단군 영정을 모시는 이 방에서 일심으로 기도를 하며 지냅니다. 


그녀는 자기는 종교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무당도 아니고, 단군교도 아니고, 증산교도 아니고, 사이비 교주도 아니라고 합니다. 전국 각지에서 무당이나 스님이나 도사들이 간간이 기도를 하러 이곳을 찾아오지만 그녀는 그들과도 별로 교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고, 잡귀잡신에 들려서 허무맹랑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바르지 못한 마음으로 사술을 부리는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저는 참으로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직접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미화하지도 않았고, 신격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저 신들이 시키는대로 신들의 뜻을 받들고 사는 무식한 여자라고 자신을 표현했습니다.

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현상에 어느 정도 흥미를 가지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 현상이나 무턱대고 믿을만큼 영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제가 경험하지 못하고 들어보지 못한 신비스러운 현상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상식적인 사람일 뿐입니다.

송월 법사와 헤어져 산을 내려오는 내내 과연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의문에 휩싸였습니다. 친구는 그녀가 이루려고 하는 단군 성지의 꿈을 알리고 싶어서 나를 소개한 거였지만 저는 아직 그녀가 모신다는 단군신에 대해서도 궁금한 게 많습니다.

과연 5천 년전의 단군은 어떤 존재이었기에 저처럼 한 여성을 10년 동안이나 이 산속에 잡아두고 있는 걸까요? 만약 그 여성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단군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가 되길 원하는 걸까요?
 

움집에서 바라 본 마니산 참성단.

이처럼 많은 의문을 간직한 채 돌아 온 저의 귀에는 헤어질 때 들려 준 그녀의 말이 아직도 맴돌고 있습니다.

"신령들하고 노는 건 차라리 쉬운데, 인간들하고 지내는 게 훨씬 더 어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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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미래의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스피어에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이니만치 부자 양반 출신으로 북에 미쳐서 집안을 망치고 '불효' 인생을 살면서도 고집스럽게 예술의 외길을 걷다 돌아가신 김명환 명인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고수 김명환 명인은 광대 집안 출신이 아닌 양반 집안 출신의 광대입니다.

그는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무창리에서 만석꾼 부자인 김용현의 막내 아들로 1913년에 태어났습니다. 옥과보통학교를 나오고 동경에 있는 고세이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는 부잣집 막내도련님으로 호사를 하며 살았을 뿐, 국악과는 전혀 인연을 맺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7살이 되었을 때 능주에 사는 조금안이란 색시와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처갓집에 놀러 갔다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일이 북을 배우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놀이판이 벌어졌는데 저마다 소리도 허고 북도 침서 노는디 나보고 북을 쳐보라고 헌단 말이여. 못 친다고 혔더니 바보 같은 사람이 북도 못치냐고 놀려먹드란 말여. 그리서 두고보자 내가 너희들보다 북을 잘 치고 말 것이다. 허고 선생을 찾아서 북을 배운 게 평생 이 길로 들어서게 되었어. 내 신세를 그르칠라고 그런 것이제. 공부나 착실히 했더라면 지금쯤 박사나 교수나 그런 것이 됐을틴디 그놈의 북에 미쳐 갖고 불효막심하게 이 모양 이 신세가 되고 말았어.”

불효막심한 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그는 그 길로 옥과에 살고 있던 장판개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장판개 선생은 얼굴이 살짝 얽었었는디 북으로나 소리로나 당대 명인이었어. 그때 마흔도 넘은 양반이 내가 가면 서방님 왔다고 존대를 깎듯이 하면서 북을 가르쳐 줬지. 나는 양반의 자식이고 자기는 광대니, 그때는 그 차이가 옛날 미국에서 백인하고 흑인 차이 나듯이 차이가 났응게. 그런디 치면 칠수록 북이 재미가 나. 그리서 어디에 유명한 선생이 있다 하면 몇 백리라도 찾아 가. 돈을 얼마든지 써서라도 배워와야 직성이 풀리지 안 그러면 몸이 근질거려서 못 견뎌.”

부잣집 서방님이었기에 가능했던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해서 그는 고흥의 오성삼, 곡성의 신찬문, 능주의 주봉현과 같은 이름 높은 고수들을 만나 북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소리는 혼자서 연습을 할 수 있지만 북은 소리 없이 혼자서 연습이 안 됩니다. 

소리꾼들을 따라다니면서 연습을 해야 하는데 이름난 소리꾼들은 초보 고수한테 여간해서 소리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음식 대접하고 돈을 주어 가면서 소리를 청하고 그 대가로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

20살이 되었을 때는 서울에 올라가 '조선 성악 연구소'에서 명창들의 소리판에 끼어 북가락을 익혔습니다.

“그것도 쉬운 일이 아녀. 아직 미숙한 솜씬디 누가 소리를 해줄라고 허간디? 그 덕에 돈이 많이 깨졌지. 어찌됐든 송만갑, 이동백 같은 대명창들의 북을 쳐 본 사람으로 지금껏 살아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이렇듯 저돌적으로 북에 매달린 탓에 서울 온 지 얼마 뒤에 북 잘 치는 부자 한량이 나타났다는 평판을 들었습니다.

“난 바둑도 못 두고 장기도 못 두고 화투도 못 허고 마작도 못혀. 돈 있는 집 자식들이 대개 술과 노름과 계집질에 가산을 탕진허는디 나는 오로지 북 때문에 탕진헌 사람이여. 내 평생에 죄라면 북 친다고 자식 노릇 못 허고 부모 노릇 못 허고 재산 다 날린 죄밖에 없네. 내가 죄인은 큰 죄인이지.”

북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그의 눈빛은 열정으로 빛났습니다. 그러나 고생담을 이야기할 때는 금새 슬픔에 가득찬 충혈된 눈빛으로 변하곤 했습니다.

“내가 스스로 북에 미쳐서 그 고생을 했으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지. 그래서 뼈저린 지난 날을 생각하면 가슴속에서 불이 일어나. 해방되고 마누라가 병으로 죽으면서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지.”

그 전부터도 가세는 기울고 있었지만 만석꾼이라 불리던 부잣집이라서 남보기에는 번듯했는데 해방이 되자 형이 친일파로 몰려 가산을 몰수 당하고 사방에서 핍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 여순 반란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조카가 반란군에 잡혀갔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큰아들이 월북하는 통에 한동안 고통을 당했습니다.

“다른 놈들은 친일하고도 잘만 사는디 우리 집안은 쑥밭이 되도록 당했어. 그래도 나는 북치고 노래부르는 거 밖에는 모르는 놈이라고 봐줘서 변은 안 당했어. 마누라 죽고, 조카 잡혀가고, 큰아들 북으로 가서 소식을 모르고, 가산은 다 날려서 파산선고를 해버리고, 수중에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살아 갈 길은 막막허고 미치것대. 그때 누가 아편을 허면 고통이 잊어진다고 그려. 그리서 아편을 시작혔지. 내가 그 아편 때느라고 고생헌 생각을 허면 지금도 치가 떨려.”

딸 둘을 여동생 집에 맡기고 이집 저집 떠돌아 다니며 돈을 얻어서 아편 주사 맞고 구걸하다시피 하며 살아가는 그를 보고 모두들 폐인이 됐다고 하며 멀리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튼지 예술이 훌륭해. 내가 살아난 것이 예술 덕분이여. 아편을 하고 남들이 나를 페인 취급하니까 내 속에서 오기가 생기더란 말여. 내가 이대로 죽어서는 안되지. 내가 알고 있는 북가락이 내가 죽으면 끝나는 것 아니냐. 어찌됐든 살아야겠다. 이렇게 독허게 마음을 먹고 딱 끊었지.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 내가 오죽 허면 몸을 칼로 북북 그어버렸겄어. 아편 생각이 날 때마다 이런 놈은 죽어야 된다고 칼로 그었어. 그 흉터 자국이 지금도 있어. 내가 지금도 광주에 가면 대접을 받네. 북 잘 치는 고수로서가 아니라 아편쟁이가 아편 끊고 장수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그 일로 대접을 받아. 다른 아편쟁이는 다 병 나서 죽었어. 그러니 내가 무서운 놈은 무서운 놈이여.”

무서운 오기로 아편을 끊은 뒤 그는 보성에 살던 정응민 명창 집에 몇 년 간 기거하면서 북을 치다가 쉰이 가까워 오는 나이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지방에서 떠돌아다니기만 하다가는 영영 잊혀버린 사람이 될 것 같아 어찌됐든 서울의 국악계에서 인정을 받을 결심이었습니다.

이집 저집 떠돌아다니며 어렵게 지내 던 중, 판소리와 가야금산조의 명인인 함동정월을 만나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썩은 나무토막도 불붙일 만큼’ 예술적 열정이 넘치는 성격이었던 그는 그녀의 음악성에 탄복하여 하루종일 북을 치며 가야금 산조를 연습시켰습니다. 예술을 통해 두 사람은 하나가 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곤궁한 현실 때문에 결국 두 사람의 만남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새까만 후배들이 ‘철조망’을 쳐 놓고 그를 받아들여 주지 않아 한동안은 국악계 주변을 서성거리며 지내야 했습니다.

“같은 광대 출신이 아니라 ‘한량북’이라며 무시를 했어. 참 설움 많이 받았고만. 그런디 돌아가신 박녹주 명창허고 김여란 명창이 내 북을 지지혔지. 내 북 아니면 소리헐 맛이 안 난다고 말여. 그때부터 뚫고 들어갔지.”

그처럼 남다른 고통과 남모르는 설움을 겪으면서 ‘뚫고 들어 간’ 북이기에 그의 북에는 다른 고수들의 북과 달리 매서운 기운이 서려 있습니다.

“국민학생 소리를 허면 북도 국민학생 북이 나오고 대학원생 소리를 허면 북도 대학원생 북이 나오는 법이여. 나는 대학원 북을 쳐야 것는디 국민학생 소리를 허면 북칠 기분이 나것능가? 나는 소리가 귀에 들어와야 추임새도 나와. 그래서 추임새를 여간해서 안했더니 소리꾼들이 싫어해. 그리서 안 좋아도 ‘좋다!’ 허고 추임새를 해 주지. 돈을 받아야 헝게. 그래도 속으로는 즐겁지가 않지. 어쨌든 북 치는 사람은 언제 적군이 쳐들어올지 모른다 허고 정신무장을 단단히 허고 적을 봐야 혀.”

소리꾼을 적으로 딱 정해놓고 북을 치는 그의 모습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몸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고, 소리꾼을 쏘아보는 그의 눈초리는 독수리 눈처럼 매서웁습니다.

마치 소리꾼하고 자기하고 둘만 있다는 듯이, 둘이서 생사를 건 한 판 싸움을 벌여 보자는 듯이 맹렬한 기세로 북을 칩니다. 그처럼 서슬이 시퍼런 북 앞에서는 아무나 소리를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와 죽이 맞는 소리꾼은 한정되어 있고, 그 역시 자기가 좋아하는 소리꾼의 북만 치려고 했습니다.

‘강한 자 한티는 적이 많은 법잉게 그런 것을 두려워허지는 않어. 다만 욕을 허는 만큼 실력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자가 나왔으면 좋겠어. 누가 나를 이겨 주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내가 무릎을 꿇고 배우지. 정말 좋은 소리 좀 들어 봤으면 좋겠어. 그런디 인제는 그런 소리 듣기는 틀렸어. 인제 판소리는 죽었어.“

그렇듯 딱 잘라 말하는 성격 때문에 인심 잃고 따돌림 받으며 사방팔방에서 비난의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내가 한동안 소리 평론가 노릇을 하는 통에 미움을 많이 받았지. 그래도 헐 말은 해야 되는 성질인디 어쩔 것인가? 예전 선생님들의 소리에 비하면 요새 소리는 소리라고 할 수도 없어. 내가 이런 말 허면 소리꾼들이 전부 나를 죽일라고 헐 것이지만 사실인디 어쩔 것이여. 북도 마찬가지여. 요즘 북치네 허는 사람치고 '음양(陰陽)' 알고 북치는 사람 하나도 없어. 북이란 것이 자세, 수법, 음양, 강약에 모두 법도와 이치가 있는 법인디 예전 선생님들은 그걸 맞게 쳤는디 지금은 그저 아무렇게나 치고는 다 명고수래. 이런 말을 자꾸 하고 사교술이 없어서 인심을 못 얻지만 그런 나를 왜 문화재시켜주나. 다 실력 때문이지.”

1978년에 판소리 고법문화재가 된 것이 오로지 실력 때문이었음을 주장하던 그의 실력 제일주의에는 실력 있는 사람의 자부심이 가득 배어 있었습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놈이지만 아직도 북만 잡으면 나도 모를 힘이 난단 말이여. 그래도 한 가지 걱정은 있어. 내가 이러다 죽어버리면 내 뱃속에 있는 가락도 함께 사라져버리는 것 아니냐? 장지 종이에 들기름 쩔 듯이 꽉 쩔어 있는 이 북가락을 어느 놈한티 전해주고 죽느냐? 요새는 이것이 한 가지 근심이여.”

그는 오로지 북가락을 이어 줄 제자 근심을 하다가 결국 그 근심을 풀지 못한 채 1989년에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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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낙동강, 영산강, 금강....한반도를 누비며 흐르는 강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강은 살아 있다」
의 저자인 최병성 목사는 책을 쓰는 내내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가슴이 메어 글을 쓸 수 없을 때도 있었답니다. 그는 왜 그렇게 우는 걸까요? 강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4대강 살리기'란 이름으로 전 국토를 유린하는 광란의 삽질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4대강엔 포크레인 바퀴에 죽어 가는 생명의 신음이 흐릅니다.
강변 정화라는 이름으로 쫓겨나는 농민들의 탄식이 흐릅니다.
수자원 확보라는 미명 아래 댐과 저수지 건설로 삶의 터전에서 내몰리는 산골 주민들의 절규가 강물이 되어 흐릅니다.
지금 4대강엔 죽음의 행진곡이 가득할 뿐입니다.
(「강은 살아 있다」 머리말 중)



그는 울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4대강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사진으로 찍어 기록으로 남기고, 각 분야의 전문가를 만나고, 수많은 자료를 분석하여 4대강 사업의 진실과 거짓을 밝혀냈습니다. 특히 자신의 주장만을 담기보다 정부의 주장을 하나하나 사례를 들어가며 조목조목 반박했습니다.


정부는 ‘한반도 대운하 사업’ 국민의 저항에 막히자 ‘4대강 정비 사업’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러다 다시 ‘4대강 살리기’ 바꾼 뒤 그 사업을 통해 강이 살아나고 수질이 회복되고 홍수와 가뭄에서 해방된다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있습니다.

출처 : http://www.korea.kr/newsWeb/pages/brief...S0106006

그런 주장에 맞서 이 책에서는 우리보다 150년이나 앞서서 강을 '정비' 독일과 스위스가 다시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며 '강 살리기' 하는 이유는 뭔지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사례를 보면 선진국에서는 운하나 수로를 위해 강을 정비한 결과, 심각하게 죽어 간 강을 되살리느라 난리더군요.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뒤를 좇아 강을 죽이지 못해 난리를 떨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명확하게 알 수 있더군요.

모래톱이 아름다운 낙동강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한 가족의 사진과, 익사 위험 지역을 알리는 한강의 접근 금지 표지판 사진은 4대강 사업이 실현됐을 때 우리나라 강들이 어떻게 될지 미래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보를 설치하고 강을 깊숙하게 팜으로써 불러올 재앙을 저자는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그 사례 중의 하나로 도심의 휴식공간, 녹색을 도심에 끌어들인 친환경사업, 서울의 르네상스로 정부가 그토록 자랑하고 있는 청계천을 들고 있습니다. 청계천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면 4대강의 앞날도 명확하게 보일 거라는 겁니다. 

준공된 지 5년도 채 안 된 청계천은 이미 '지반침하' 시작되고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물길을 시멘트로 덮어버리고 인공적으로 낸 수로이기 때문에 청계천으로 흘러들던 자연의 물이 시멘트 옹벽에 막혀 흐르는 바람에 땅이 가라앉고 지반이 갈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인도의 보도블럭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인공으로 만든 하천엔 녹조가 빽빽이 끼어있습니다.   

지반침하가 시작된 청계천.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01342241

저자는 또 ‘물 부족 문제의 해결’이라는 주장의 허구를 들춰내면서, 오히려 4대강 사업이 계속되면 물 부족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단순히 물이 부족한 게 아니라 식수가 부족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미 낙동강에 지어진 부산과 경남 지역의 취수원을 진주 남강댐으로 옮기는 작업이 추진 중입니다. 왜 취수원을 옮기는 걸까요? 수질오염 때문입니다.
수질오염으로 인한 부작용의 우려 때문에 취수원을 옮기면서도 정부는 수질 오염이 없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이 책에는 1982년에 '정비'되기 전의 한강을 찍은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그 한강에선 놀랍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발을 담그고 헤엄을 치면서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사진 속의 한강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자연 그 자체였습니다.  

그랬던 한강이 어떻게 변했나요? 이제는 그저 깊고 시커먼 강물이 흐르는 '인공의 강'으로 변했습니다. 유람선과 모터보트를 탄 사람들만이 물살을 가까이 바라볼 수 있는 현재의 한강이 바로 우리가 바라볼 4대강의 미래 모습일 것입니다. 

정부는 4대강 사업은 깊이가 낮기 때문에 대운하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대운하는 아닐지 몰라도 4대강 사업은 7m 깊이로 강바닥을 다듬는 계획으로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 강이 만들어지면 수많은 배가 깊고 검푸른 물결 위로 엔진을 돌리며 지나다닐 것이고, 수많은 물고기들이 수질오염으로 죽어 갈 것입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sand5/3e0C/62?docid=1Goak|3e0C|62|20090313002758

정부는 4대강이 철새의 낙원이 될 것이고, 관광 명소로 개발되어 주변 경제가 살아나고, 34만 개의 일자리가 생긴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물고기의 죽음과 습지의 실종으로 철새들이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이 사라질 것이고,
관광 명소 개발은 부동산 투기와 난개발을 부추기며, 4대강 사업으로 창출되는 일자리는 대부분 일용노무직일뿐라고 주장합니다.

4대강 사업에 들어가는 22조의 돈을 보건과 복지에 투자한다면 제조업의 3배 이상 되는 일자리를 만들 수 있으며, 그 돈들이
지역 경제를 살리고 아이들을 교육하고 사회 복지를 확충하는 데 들어가야 할 돈이기 때문에 국민들의 살림살이는 더욱 나빠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반대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정부는 4대강 '정비' 공사를 강행하고 있습니다.

언론은 대부분 이에 대해 침묵하거나 외면하기 때문에 국민들이 잘 모르는 사이에 4대강에서는 중장비의 굉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부는 마치 군사작전을 치르듯 환경영향평가를 넉 달 만에 마치고, 거침없이 강을 파헤치고 물길을 막아 보를 쌓고 있습니다. 

4대강 공사 중인 낙동강 하류.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page%3D9

4대강 사업은 강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강을 죽이는 참 몹쓸 사업입니다.
국민이 4대강 사업의 실체를 아는 날, 4대강의 광기는 멈출 것입니다.
4대강의 생명들이 우리가 도와주기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유람선만 떠다니는 죽음의 수로를 원치 않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여울에 발을 담그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생명의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생명을 노래하는 맑은 여울의 속살거림이 언제나 우리 곁에 함께하길 마음 모아 기도합니다.
(책의 머릿말 중)

책을 읽는 내내 우리 국토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가슴이 답답해 오고 절망감이 물밀 듯 밀려 왔습니다.

그러나 저자
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합니다. 생명을 향한 절박함으로 힘과 지혜를 모은다면 아직 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맑음으로 생명을 끊임없이 잉태케 하는 여울은 여호와의 영광이 이 땅에 영원히 지속되게 하는 거룩한 성소요, 여울 물소리는 생명의 노랫소리입니다.
4대강 사업의 핵심은 강을 준설하고 보를 세워 모든 여울을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4대강 사업이 생명의 강을 파괴하는 잘못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여울을 파괴하여 수로로 만드는 건 물고기만이 아니라 한국을 찾아 오는 철새들을 내쫒는 생명 파괴의 재앙입니다.
(경향신문 2010년 5월 4일 기고글 <4대강 사업은 '권력의 테러'> 중에서) 


여울이 반짝이는 강. 출처 : http://blog.naver.com/barbara59/130051395470

아이들과 함께 여울에 발을 담그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생명의 추억을 만들고 싶은 꿈, 생명을 노래하는 맑은 여울의 속살거림이 언제나 우리 곁에 함께하길 바라는 꿈, 바로 그 꿈을 위해 저자는 강이 죽어가고 있는 걸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눈물로 외칩니다.

"강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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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산조의 함동정월 명인은 저하고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제가 「뿌리깊은 나무」 잡지사를 그만 두고 연극만 할 무렵, <뿌리깊은 나무 민중자서전 시리즈>의 ‘함동정월편’ 「물은 건너봐야 알고 사람은 겪어봐야 알거든」이라는 책의 집필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 무렵 그녀는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춤추는 가얏고」라는 TV드라마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을 때였습니다. 그녀를 수차례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녹음하고 책을 만드는 동안, 저는 너무도 고통으로 가득 찬 그녀의 삶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글은 그 책의 서문으로 썼던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함동정월 명인은 행복과 불행의 시계추를 극심하게 오간 자신의 삶을 ‘천국’과 ‘지옥’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녀의 ‘천국시절’ 1917년 8월 25일에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지로리에서 함금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기로 태어났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아버지 함일권씨는 병영의 관아에서 북을 치고 피리를 불던 악공이었지만 도중에 악공 노릇을 때려치우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큰오빠인 함률씨도 어렸을 때부터 대금과 가야금산조에 재능을 보였지만 도중에 때려치우고 평범한 농부로 살았습니다. 예인으로 살아오는 동안에 사회에서 받은 천대와 멸시를 견디지 못해 포기하지 않았을까 짐작은 해보지만 확실한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는 아버지나 오빠가 이미 음악과 인연을 끊은지 오래됐기 때문에 그녀는 평범한 농가의 소녀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집안이 망해 학교를 다니지 못할 형편이 되자, 아버지와 오빠가 그토록 끊으려고 했던 음악과의 인연이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학교에 못 가는 것이 서러워서 날마다 울고불고 지내는 딸이 안쓰러워서 어머니가 광주의 재산가인 김창수씨에게 양녀로 맡겼고, 11살 금덕 소녀는 양아버지의 주선으로 광주 권번에서 ‘예기(藝妓)’의 수업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1년 남짓 시조와 승무와 검무와 가야금의 기초 과정을 공부한 뒤에 고향에 돌아 온 금덕 소녀는 계속해서 여러 명인명창들에게 판소리와 가곡과 가야금 산조를 공부했습니다. 핏줄을 타고 전해 내려 온 재능 때문인지 음악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르고 총기가 뛰어났던 그녀는 모든 걸 잊고 오로지 음악 공부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녀는 6촌 형부였던 최옥산 명인에게 가야금 산조를 배웠는데, 그는 가야금 산조의 창시자로 알려진 김창조의 수제자였습니다.

예인 집안의 혈통과 명인명창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드는 병영이라는 지역의 음악적인 분위기, 그리고 남몰래 똥물까지 먹어 가며 공부했던 열정 덕분에 금덕 소녀의 음악적 재능은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4년쯤 고향에서 공부한 뒤 16살이 되던 해에 동아일보 지국장이었던 방씨의 손에 '머리를 얹은' 그녀는 17살에 정식으로 목포 권번에 이름을 올리고 예기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첫 남자인 방씨는 그녀가 '동정호에 뜬 달과 같이 어여쁘다'고 하여 ‘동정월’이라는 예명을 지어 주었습니다.

갸름하고 둥그스럼한 얼굴에 오똑한 콧날, 가냘프고도 균형 잡힌 몸매의 전형적인 조선 미인인데다가 음악과 춤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함동정월의 이름은 순식간에 목포의 사교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판소리도 하고 가야금도 타고 춤도 추며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러는 한편으로 '목우암'이라는 절에 들어 가 판소리 100일 공부를 하기도 하고, ‘광주 콩쿨 대회’에 입상해서 레코드 취입을 하러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인생은 재능과 자질을 고루 갖춘 소녀 명창으로서 성공이 보장된 분홍빛 삶이었습니다.

함동정월 명인의 아름다운 모습. 출처 : http://www.jinodyssey.co.kr/index2.htm

그러다 21살 되던 해에 서울에 올라와 생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녀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올라 온 그녀는 조선 권번에 이름을 올리고 명월관, 국일관, 식도원 같은 요정에서 예기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두 달 만에 정씨라는 부자의 소실로 들어감으로써 그 모든 활동이 정지되고, ‘지옥과 같은’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정씨에게는 이미 소실이 4명이 있었으니 그녀는 다섯 번째 부인이 된 셈인데 그들과의 시앗 싸움이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고, 음악 말고는 세상물정을 모르던 그녀는 번번이 당하는 쪽이었습니다.

소녀 시절의 열정을 다 바쳐 공부한 음악을 포기하고 바깥출입마저 금지 당한 채 나이 든 부자 서방의 애첩 노릇을 해야만 했던 그 시절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감옥 생활과 같은 암울함 속에서 낳은 아이들만이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태평양 전쟁을 겪으면서 그 집이 망하게 되어 계룡산 근처의 온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6.25 전쟁을 겪으면서 참담한 가난과 몇 아이의 죽음을 겪은 그녀는 남편과 헤어지고 대전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녀의 재능을 아끼던 국악인들의 주선으로 대전국악원장 노릇을 하게 된 그녀는 비로소 잃어버린 가락을 되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고생과 몸 고생으로 거칠어진 목으로 판소리 가사와 가락을 되찾아내고, 밭일로 굳어진 손가락을 움직여 최옥산 명인에게 배웠던 가야금 산조의 가락을 모두 찾아냈습니다.

그 뒤 서울로 올라 온 그녀는 올망졸망 딸린 5남매를 기르려고 요정에 나가서 기예를 파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모아 놓은 돈을 이 아무개라는 남자에게 사기 당한 뒤에 그 충격으로 정신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그 뒤로도 어렵게 지내 던 중, 쉰 살이 된 무렵에 판소리북의 명인인 김명환을 만나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김명환 명인은 함동정월의 음악성에 탄복하여 그 재능을 갈고 닦는 일을 스스로 맡고 나섰습니다. 그녀는 예술적 열정이 불타 오르던 김명환 명인과 마주 앉아 하루종일 가야금 연습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마다 최고 경지에 오른 예술가였으면서도 현실 생활에서는 배고프고 빈털털이였던 두 사람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한 채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국악인들은 흔히 그녀의 '최옥산류 가야금 산조'가 김명환 명인과의 삶에서 완성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또 북의 명인과 가야금 명인의 짧은 만남을 예술적이고 신비한 상상력으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 속에는 그이와의 예술적 교감을 회상하는 기억보다, 자신을 희생시켜가며 그와의 삶을 꾸렸는데 자신만이 고통의 수렁 속에 빠졌다는 배신감과 원한이 더 많이 남아 있어 듣는 저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그러던 터에 또 다른 불운이 그녀에게 닥쳐왔습니다. 사랑하던 막내 아들이 자살하여 그 슬픔으로 병이 날 지경이던 참에 방송국의 녹화를 하러 가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그녀마저 몸과 정신이 더욱 파괴되고 만 것입니다. 그 이듬해인 1980년에 가야금 산조 및 병창의 인간문화재로 지정 받게 되어 예술가로서 명예는 지켰지만, 삶의 고통을 해소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출처 : http://tong.nate.com/boxitem/post.do%3F...%3Dclist

그녀의 의식 속에는 언제나 그녀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 몇몇 사람의 그림자가 따라다녔습니다.

그녀는 그들이 한 패거리가 되어 늘 자기를 감시하고 괴롭히고 자기 방의 문을 따고서 뭔가를 훔쳐 간다는 느낌에 사로 잡히곤 했습니다. 그녀의 피해망상증은 김씨나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거나 대전이니 광주니 하는 단어만 들어도 곧바로 맹렬한 분노의 불꽃이 되어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 일말고도 그녀에게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분노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자신에게서 가야금을 배운 제자들이 ‘아직 멀어서’ 공부를 더 해야 되는데도 대학교수가 되어 자기보다 더 큰 명예를 누리는 것도 화가 나는 일이었습니다. 또 인간문화재라고 해서 관청에서 ‘한 달에 몇 푼 던져주고는’ 마음대로 부려먹으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화가 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어떤 때는 무형문화재 공연을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삶이 소재가 되어 「춤추는 가얏고」라는 제목의 책이 나오고, 그것이 다시 TV 드라마가 되어 방영된 일도 그녀를 화나게 했습니다. 그녀는 그 책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이금화라는 여자가 자신의 삶과 관계가 있다는 생각조차 안했습니다. 그런데 출판사나 방송국에서 실존 인물이라고 선전을 해대는 통에 국악인들이 전화를 해서 무엇 하러 그런 이야기를 해서 국악인을 망신시키냐고 욕을 해대니 그것도 화가 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왜 그렇게 이용되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채, 가난과 질병과 끈질기게 자신을 괴롭히는 망령들과 싸우다가 1994년 10월 12일에 ‘지옥’ 같은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갔습니다.

저는 지금도 면목동의 반지하 어두운 골방에 마주 앉아 조용조용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갑자기 벽을 바라보며 연결이 안 되는 말들을 내뱉고, 욕설과 원망과 저주의 말을 쏟아 붓던 그녀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너무도 아름답고 얌전하고 착하기만 했던 그 ‘예인(藝人)’ 무엇 때문에 그토록 혹독한 삶의 시련에 시달렸던 것일까요? 그녀의 삶과 예술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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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생소한 분들이 많고, 내용도 그리 흥미롭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미래의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스피어에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판소리와 가야금병창으로 화려한 예술의 꽃을 피우다 돌아가신 박귀희 명창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본디 남자들만의 독무대이던 판소리계에 여성 명창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부터입니다.

신재효의 제자이고 대원군의 사랑을 받던 진채선이라는 명창이 나타난 이후로 이화중선 명창이 일제 시대에 대단한 인기를 끌자, 수많은 소녀들이 판소리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박녹주, 김소희, 박초월 명창과 더불어 판소리계에서 여성의 지위를 한껏 높인 박귀희 명창도 그런 소녀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1921년 2월 6일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서 태어난 오계화 소녀(훗날의 박귀희 명창)는 대구시 봉산동에 있던 외갓집에서 대구 공립보통학교에 다녔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길 건너 작은 집에서 날마다 노래소리가 들려왔는데, 자기도 모르게 그 소리에 끌려 어린 기생들이 배우는 단가와 판소리를 귀동냥으로 익혔습니다.

어떤 때는 학교를 빠져가며 몰래 따라 배웠고, 반 년쯤 지나면서부터는 가까이 가서 큰 소리로 따라 불렀습니다. 그러니 소리 선생인 손광제의 눈에 안 뜨일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선생이 불러서 이름을 묻고 소리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인지라 귀동냥으로 익힌 <만고강산>이라는 단가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선생은 당장 외갓집에 찾아가서 명창 될 소질이 있으니 국악을 가르치라고 권했습니다. 

선생은 그녀를 당대의 최고 여성 명창인 이화중선에게 소개시켰고, 그녀의 소리를 들어 본 이화중선 명창은 바로 입단을 허락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을 따라 순회 공연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조선팔도는 물론이고 만주, 훈춘, 봉천까지 다녔어요. 물론 고생을 무척했지만 그때는 오로지 명창 되려는 생각에 참을 수 있었지요. 자나 깨나 명창 될 생각뿐이고, 꿈을 꾸어도 명창 꿈을 꿨어요. 닭을 먹을 때도 목소리에 좋다는 울대만 먹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명창 꿈에 부푼 소녀에게 떠돌이 창극단 생활은 차분히 공부할 시간을 마련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음해 여름, 공연이 없어서 단체가 쉬고 있을 때 고향으로 내려 가 대구의 용인사에서 조학진 명창에게 100일 공부를 하며 <적벽가>와 <춘향가>를 배운 뒤, 19살 때에는 김소희 명창과 함께 광주 지실마을에 살고 있는 박동실 명창을 찾아 가 <흥보가>와 <심청가>를 배우고, 21살 때에는 하동 쌍계사에서 임방울 명창과 함께 유성준 명창에게 <수궁가>를 배웠습니다.

이렇듯 틈틈이 연마한 솜씨를 인정받아 임방울, 박초월과 함께 ‘동일 창극단’ 조직했을 때에는 주인공 역할을 도맡아 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그녀의 목소리가 굵고 낮은 탓에 흥보나 이도령과 같은 남자 역할을 가끔씩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뒷날 여성 국극단을 탄생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해방 전에 일본에 레코드 취입하러 갔을 때에 ‘송죽가극단’이라고 하는 여자들만으로 만들어진 단체 공연을 구경했는데 기가 막히게 잘해요. 연기며 의상이며 노래며 춤이며 나무랄 데가 없고, 관객들의 반응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나라도 저런 단체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남자들하고 단체 생활을 하다보면 연애를 하고 애기를 낳아서 애기까지 끌고 다니는데, 여관의 좁은 방에서 애기 기저귀 널어놓고 복작거리는 생활이 지겹다 못해 환멸감까지 느낄 지경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오랫동안 여자들만으로 만들어진 창극단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해방 뒤에 박녹주 선배하고 상의했더니 대뜸 좋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김소희, 임유앵, 임춘앵, 김경희씨와 함께 '여성 국악 동우회' 만들었는데 뜻밖에 관중들의 반응이 좋았어요.”

1949년 2월에 김아부가 쓴 <햇님 달님>을 서울의 시공관에서 공연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놀라운 인기를 끌었습니다. 햇님 왕자는 박귀희, 달님 공주는 김소희, 햇님 아버지를 박녹주가 맡아서 했는데 우리나라 처음으로 여성들만 출연하는 창극인데다 의상과 무대장치가 화려하다보니 특히 여성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공연장의 유리창이 수없이 부서졌습니다. 부산의 공회단에서 공연을 할 때는 임신 열 달째가 된 부인이 사람들 틈에 끼어 빠져 나가지 못해 그 자리에서 해산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 젊은 처녀들이 햇님 왕자를 만나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통에 변장을 하고 달아나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인기 덕에 “돈을 가마니에 쓸어 담을 만큼” 많이 벌자 수많은 여성 국극 단체들이 생겨나서 야담이나 전설들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6.25이후로 여성 국극은 점점 인기를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할 때는 궁녀 한 사람이라도 창을 잘 하고 잠깐 나오는 엿장수 한 사람이라도 소리 실력도 있고 연기도 좋아서 손님들이 좋아했는데, 단체가 많아지다 보니까 한 단체에 두세 사람만 소리를 잘하고 나머지는 소리 들을 맛도 없고 연기 볼 맛도 없고, 아마 그래서 손님이 떨어진 것 같아요.”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0449293

그녀는 판소리를 주로 닦아 온 명창이었지만 가야금 가락에 판소리 한 대목씩을 얹어서 부르는 ‘가야금 병창’에도 명인의 경지에 이른 솜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솜씨 때문에 1971년에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을 때는 곤혹스러운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지정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판소리로 해야 될지, 가야금 병창으로 해야 될지 한동안 말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가야금 병창을 하는 사람은 드물고 귀하니까 그 맥을 잇는 의미에서 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의 예능보유자가 됐지요.”

그녀가 가야금과 인연을 맺은 것은 15살 무렵이었습니다. 처음 만난 선생은 강태홍 명인이었는데 그녀는 이상하게도 가야금에 깊이 빠져 들었습니다. 그 뒤 창극단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가야금 병창의 일인자이며 창극계의 명배우로 알려진 오태석 명인에게 열심히 가야금을 익혔기 때문에 어느덧 그녀의 솜씨는 스승의 법통을 이어받은 유일한 후계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출처 : http://jigurecords.co.kr/bbs/board.php%...page%3D4

“내가 이 길로 가려고 태어났는지 어려서부터 뭐든지 배우면 남보다 빨리 익혔어요. 하나를 배우면 그 다음 것까지 알아낼 정도였으니 선생님들이 모두 놀라면서 귀여워해 주셨지요.”

그녀는 제자 복이 많아 재능이 뛰어난 제자들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현재 판소리계 최고의 프리마돈나인 안숙선 명창 그의 제자요, 연극과 마당놀이와 뮤지컬을 오가며 눈부신 재능을 발휘하는 배우 김성녀도 그의 제자요, 강정숙·오갑순 등은 그녀의 법통을 이어받은 가야금 병창의 명인이요, 박범훈·김덕수 등 국악계의 리더로 활약하고 있는 명인들도 그녀의 제자입니다.

게다가 재복도 많아서 대부분의 국악인들이 말년을 가난하고 불우하게 보내는 데 비해서 그녀의 말년은 윤택하고 풍요로웠습니다. 종로구 운니동에 있던 전통 한옥식 여관인 ‘운당여관’의 여주인으로서 그녀의 경제력은 국악계의 어느 누구보다도 탄탄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재산을 1960년대에 박헌봉, 박초월 명창 등과 함께 설립한 '국악예술학교'를 위해 쾌척한 일로 국악인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녀는 후진들을 가르치고 국악계의 어른으로서 바쁜 말년을 보내다가 1993년 7월 14일에 이 세상을 떴습니다.

박귀희 명창은 저의 스승인 박초월 명창 언니라고 부르며 각별하게 지낸 사이여서 저는 스승을 따라 그녀의 공연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가야금 병창을 할 때면 판소리로 익힌 목 성음과, 창극을 하면서 익힌 몸짓과, 가야금으로 익힌 우아함이 서로 어우러져서 잠시도 관객의 한 눈을 팔지 못하게 했습니다.

쪽진 머리에 산호잠을 찌르고 화문석을 깐 무대에 앉아, 무릎에 가야금을 올려놓고 어깨춤을 추며 손으로 가야금 줄을 희롱하는 그 몸짓은 너무도 화사하고 흥겹고 교태가 흘러넘쳤습니다.

그녀가 가야금을 안고 노래를 부르는 순간, 사랑과 이별로 얼룩진 한 많은 세월이 어느 새 화사하고 밝고 아름다운 꿈의 세월로 변하고 마는 느낌을 받았던 나는 위대한 예술의 힘에 그저 놀라고 감탄하고 도취할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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