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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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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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0.04.30
    조폭보다 더 무서운 '불멸의 신성가족' (18)
  2. 2010.04.28
    '검사와 여선생' 살려 낸 마지막 변사 신출 (12)
  3. 2010.04.26
    봄향기 가득한 무주 안성 장날의 '장터 여행' (30)
  4. 2010.04.24
    소릿길을 받쳐준 '고수' 한평생, 김득수 명인 (8)
  5. 2010.04.22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박동진 명창 (24)
  6. 2010.04.19
    SBS '천안함 침몰 미스터리'의 놀라운 용기 (18)
  7. 2010.04.17
    20대의 정치참여, 희망의 싹을 본다 (11)
  8. 2010.04.15
    이 지겨운 꽃샘추위, 언제 끝나려나? (22)
  9. 2010.04.12
    21세기의 수로부인에게 바치는 '헌화가' (23)
  10. 2010.04.09
    나를 매혹시킨 바이칼의 '게세르' 영웅신화 (16)
  11. 2010.04.05
    반장 권력 등에 업고 학우 괴롭힌 죄 고백 (41)
  12. 2010.04.02
    천안함 수병들이여, 귀환하라! 절규의 기도 (16)
경남의 건설업자 정씨가 25년간 100명이 넘는 검사들과 '영감님', '형', '아우'로 절친하게 지내면서 향응과 성접대를 해왔습니다. 

사장님이 권력자와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접대'를 한 것입니다. 그가 모신 검사들도 당연히 받아야 할 '대접'이라고 생각하고 고급 일식집이나 요정에서 저녁을 먹고, 2차로 양주 폭탄을 마시고, 3차로 젊은 아가씨들과 호텔이나 모텔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출근해서 '사회 정의' 위해 범죄자들을 심문하고 법정에서 매서운 법의 칼날을 휘둘렀습니다. 그리고 저녁이면 또다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정씨가 비리 사건으로 잡혀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절친하게 지냈던 형, 아우 검사들이 모른 채 하자 그는 극심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그동안 꼼꼼하게 적어놨던 '접대기록'을  MBC <PD수첩>에 제공했고, 그 내용이  <검사와 스폰서>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어 시청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박기준 부산지검 검사장은 사표를 냈고, 검찰은 부랴부랴 진상조사단을 꾸리고 검찰 개혁을 하겠다고 부산을 떨고 있습니다.

출처 : http://newslink.media.daum.net/news/20100421095150774


법조비리가 폭로된 것은 그동안에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97년 의정부 법조비리 사건, 99년 대전 법조비리, 2006년 법조브로커 김흥수 사건, 2007년 브로커 윤상림 사건, 2005년 안기부 X파일 의혹과 2007년 '삼성 떡값' 의혹, 박연차 리스트, 천성관 전 검찰총장 후보자의 스폰서 파문......줄줄이 이어져 왔습니다. 검사와 스폰서 문제는 특정지역이나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오랫동안 이어 온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왜 이 문제가 근절되지 않고 되풀이되는 걸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주는 책이 있습니다.  「헌법의 풍경」의 저자인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의 김두식 교수와 김종철 변호사 등 '우리시대 희망찾기 연구팀'이 판사, 검사, 변호사, 브로커, 법원 공무원, 경찰, 기자, 마담뚜까지 법원 안팎의 23명을 심층 면접하여 집필한  「불멸의 신성가족」이란 책입니다. 스스로 검사 출신이면서 법조계에서는 ‘또라이’라고 불렸다는 김두식 교수는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에서 우리나라 사법부의 현실을 충격적으로 해부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법조인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한명의 '사법 패밀리'가 되는 걸까요?

공부 잘하는 '수재 패밀리' 한 젊은이가 바늘구멍 같은 사법시험을 뚫고 합격되면 결혼소개업자인 마담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자 집안의 재력과 외모로 평가되는
결혼시장에서 거래를 마치고 연수원에 들어가면 '연수원 패밀리'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연수원에서 만난 교수, 동기들과 끈끈한 형, 아우 관계를 형성합니다. 좁은 법조계에서 언제 어디에서 어떤 관계로 만날지 모르기 때문에 무엇보다 모나지 않는 대인관계가 중요하다는 행동 수칙을 익히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개성이 너무 '튀거나', 권위에 도전하거나 기존 질서에 적응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자연도태되고 ‘원만한’ 사람들이 살아남습니다. 

그 뒤 크고 작은 돈으로 실핏줄처럼 연결된 '사법 페밀리'의 흐름 속에 투입됩니다. 

한 검사의 일화입니다. 부장검사, 차장검사와 평검사들이 회식을 하는 자리에 동석한 변호사가 30만원짜리 백화점 상품권을 돌렸습니다. 변호사는 현 부장 검사가 차장 검사 시절에 모셨던 부장검사 출신이었습니다. 그때 한 평검사가 받을 수 없다고 거절을 하자 뭘 모르는 우스운 사람으로 매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일화를 들려준 검사도 마음으로는 불편했지만 부장 검사도 받는 마당에 거절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매도되는 분위기여서 나서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일반인들은 돈을 거절한 평검사를 청렴하다고 칭송할지 모르지만, 좁은 법조계 안에서는 ‘또라이’ 찍힐 확률이 높습니다. 이처럼
자기 평판을 관리해 ‘사법 패밀리’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법조인들의 의식이 돈과 청탁으로 얽힌 '스폰서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이런 갖가지 역정을 거쳐 퇴직을 하면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됩니다. 판검사 출신의 개업 변호사인 ‘전관 패밀리’들은 하나같이 ‘전관 예우’를 받게 됩니다. 사건의 수임과 판결에서 한 동안 특별 대우를 받는 겁니다. 그 댓가로 그들은 후배 판검사들에게 술과 골프, 식사 등의 ‘접대’를 합니다. 이런 접대를 통해 부장판사 정도를 마친 변호사는 1년에 수억 정도를 쉽게 벌 수 있는 '부패 패밀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깊이 다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기업과 사법부의 패밀리 커넥션, 사법 패밀리 내의 학연 지연 혈연의 문제도 심각한 부패 사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사슬들을 쉽게 끊어낼 수 없는 것은 사법 패밀리라는 특수 엘리트 계층의 관계망이 '관행'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행이란 밖에서 볼 땐 아주 이상하고 합리적이지 못한 부분이 많지만 막상 그 안에 몸 담게 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답습하게 됩니다. 

스폰서 문제가 터지면 대개 사직을 하거나 해임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윤리 문제가 아니라 뇌물죄를 적용해 형사 처벌을 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만일 경찰이나 하급공무원이 똑같은 일을 했다면 검찰은 당연히 구속수사를 했을 겁니다.

박기준 검사장은 사직했지만 나중에 잠잠해지면 변호사 개업하면 됩니다. 아마 '전관 예우'를 통해서 수억원의 돈을 금방 벌 수 있을 겁니다. 진상조사단이 활동을 한다지만 민간 조사위원들은 수사지휘권이 없으니 제대로 수사가 이뤄질 리 없습니다. '상설특검'을 설치해서 부패 사슬을 끊자는 주장도 있지만, 그 사슬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야 모두 상설특검을 꺼리니 그것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희망은 없는 걸까요?

저자는 마무리 글을 통해 그래도 희망을 갖자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법조계 현실의 최대 피해자인 시민들이 나서서 판검사, 변호사와 의사소통을 시작해야 할 때가 왔다고 주장합니다. 판검사에게 실제로 전달되는지도 알 수 없는 돈을 변호사에게 쏟아붓느니, 차라리 시민 자신이 나서서 직접 편지를 쓰고 사례를 모아 전달하는 게 훨씬 판결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시민사회의 각성만 필요한 게 아니라 법조계 내부의 각성도 필수적이라고 주장합니다. 법조계 내부에서 스스로를 옥죄는 부패 사슬을 해체하고, 작은 촌지나 선물이나 골프접대 등을 거부할 수 있는 양심을 바로 세우고, 상하의 계급 관계로 꽉 막힌 의사 소통 구조를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판검사, 변호사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사법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게 가능한 일일까요?

시민들의 힘으로 검사, 판사, 변호사와 소통이 될까요? 끈끈한 부패 사슬에 너무도 깊숙이 얽혀있는 법조계에 그의 말이 통할까요? 겉으로는 누구나 찬성하는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물정 모르는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비웃지나 않을까요?  왜 제 귀에 그의 주장은 희미하게 들릴까요? 

아, 정말 희망은 없는 걸까요? 이 시대 사법 패밀리들에게 '정의'는 사라진 걸까요? 우리 법조인들은 정말 조폭보다 더 무서운 '불멸의 신성 가족'인가요? 

트랙백 1 AND COMMENT 18
'마지막 변사' 신출씨가 국립민속박물관 <추억의 영화보기> 행사에서 28일 오늘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의 변사를 맡는다는 기사가 떴군요. 저는 예전에 신출 선생의 공연을 여러 번 봤고, 그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던 인연이 있어 반갑기 짝이 없더군요. 그 분이 돌아가시면 우리나라에서 변사라는 직업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전에 썼던 그 분에 대한 소중한 기록을 손질하여 올립니다.  

영화가 '활동사진'으로 불리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희미한 알전구가 비치는 천막 안에서 영사기사가 손으로 돌리는 활동사진의 그림자가 하얀 천 위에 어른거리면 돗자리 깔고 앉은 관객들은 모두들 신기해 하며 화면에 비치는 배우의 연기에 울고 웃으며 박수를 보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울리고 웃긴 것은 배우의 연기보다 어두컴컴한 무대 구석에서 혼자 수십 명의 등장인물 흉내를 내며 해설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재담도 하는 '변사'의 목소리였습니다. 벙어리처럼 입만 벙긋벙긋하는 '무성영화'의 배우들은 변사의 목소리를 통해야 비로소 살아 숨쉬는 인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재능 있는 변사의 인기는 무성영화 배우의 인기보다 더 높았고, 영화의 성공과 실패가 오로지 변사의 연기력과 입담에 달려 있었답니다. 그러다가 '발성영화'가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변사의 인기는 차츰 시들어가고, 마침내 극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변사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도 모두 저세상으로 떠났기 때문에 들어 볼 수가 없게 되었는데, 오직 유일하게 살아 남아 옛 시절의 목소리를 다시 들려주는 사람이 바로 신철 선생입니다.

출처 :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age%3D11

"옛날에는 변사 인기가 최고였지요. 영화가 끝나고 나면 인력거가 줄을 서서 기생들이 서로 데리고 갈려고 하구, 한 번 상영에 적어도 쌀 세 가마니 값은 벌었으니까 그 시대 최고 멋쟁이로 지낼 수 있었지."

본명이 신병균인 신출씨는 1928년 평안남도 진남포 비석리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세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일곱 살 위인 큰형은 집을 뛰쳐나가고, 누님도 어디론가 행방불명이 되고, 작은형도 소식을 모른 채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렷습니다. 혼자서만 계모의 차디찬 손에 내맡겨진 그는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진남포에서 솜틀집을 경영하다 평양으로 이사한 아버지는 투전이다 마작이다 술 마신다 하며 집에 있는 날이 적었고, 새어머니가 자꾸 바뀌는 환경에서 자란 소년이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할 리가 없었습니다. 학교에 간다고 해놓고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던 보통학교 2학년짜리 꼬마는 마침내 재미있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평양 선교리 가설극장이었습니다. 천막을 치고 널빤지로 벽을 만들어 놓고 다다미를 깔아 놓은 가설극장 안에서는 밤마다 신기한 '활동사진' 돌아갔습니다. 그 사진에 넋을 빼앗긴 꼬마는 아침부터 극장 주위를 서성거리며 어떻게 하면 그 속에 들어가나 온갖 궁리를 짜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표 받는 기도주임(매표원)이 와서 너 왜 학교 안 가고 날마다 여기 오느냐 하더란 말이여. 그래 사정을 얘기했더니 그럼 극장에서 심부름도 하고 청소도 하고 있으라고 해서 얼씨구나 하고 거기서 지냈지. 저녁때 영화가 시작되면 손님들에게 방석을 팔고 나도 영화를 구경했지. 경성에서 온 변사가 해설을 하면 무대 옆에서 그 목소리를 열심히 듣다가 다음날 청소하면서 그 흉내를 냈지. 텅 빈 넓은 극장에서 혼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나면 어찌나 가슴속이 후련했는지 몰라."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뜻밖에도 그에게 무대에 설 기회가 왔습니다.

그날은 경성의 유명한 변사인 김선동이 그 무렵 최고의 민족영화인 나운규의「아리랑」을 해설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영 시간이 지났는데도 변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극장 주인과 영사기사는 어쩔 줄을 모르고, 관객들은 빨리 하라고 소리지르는 난리가 벌어졌습니다.

그때 청소하는 꼬마가 낮에 변사 흉내내는 소리를 가끔 들은 기도주임이 "신 꼬마야, 너 어제 들은 것 할 수 있냐?" 하고 물어봤습니다.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 신 꼬마는 평소에 닦은 실력을 마음껏 발휘했습니다.

출처 : http://book.interview365.com/34

관객들의 눈물과 박수소리와 함께 영화가 끝나자 극장주인이 달려와 껴안고서 어쩔 줄을 모르고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수고했다며 주먹만한 눈깔사탕 하나하고 50전짜리 은전을 주었습니다. 난생 처음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 본 꼬마는 신이 나서 저절로 입이 헤벌어졌습니다.

그때 김선동 변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기생집에서 술에 취해 극장에 늦게 왔다가 꼬마가 자기 흉내내는 걸 듣고 난 참이었습니다. 그는 꼬마에게 자기를 따라다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무조건 '예' 하고 대답하고선 그 사람을 따라서 원산, 철원을 돌아서 경성으로 왔어. 심부름꾼으로 따라다니면서 그 사람이 하는 대사를 전부 외워 버렸지. 종로통에 있는 우미관에서 먹고 자면서 청소도 해주고 가끔씩 대리 변사 노릇도 하면서 지내는데 몰골은 거지 한가지야. 한강에 가서 옷 빨고 목욕하고 종로 건달들하고 어울려 다니는 생활을 몇 달 하다 보니 집 생각이 나서 죽겠어. 아버지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 그래 신의주 가는 기차를 몰래 집어타고 의자 밑에 숨어서 평양까지 와버렸지."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그동안 지낸 이야기를 하니 "이놈이 극장에서 쌍놈이 되었다"며 펄펄 뛰고 화를 내는 통에 다시 집에 있기가 싫어져 가설극장에 가서 지정변사로 일을 했습니다. 집에서는 욕을 먹었지만 극장에서는 '경성에서 온 천재 소년 변사' 하여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5전도 벌고 10전도 벌어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 중에서는 제일 돈이 많은 부자였기 때문에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왕초 노릇 하는 재미도 대단했습니다. 낮에는 능라도 다리에서 어른들 몰래 담배도 피우고 씨름도 하며 놀다가 밤에는 '천재 소년'이 되어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며 지내던 중, 아버지가 덜컥 중풍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조선 영화 주식회사 경성 출장소의 영상기사로 있던 큰형에게 편지를 쓰니 돈 5원만 보내고 소식이 없고, 계모는 자기가 난 아이 데리고 어디론지 달아나 버리고, 어린 소년의 사탕값 벌이로는 약값은 엄두도 내지 못할 때에 극장 주인이 딱한 사정을 알고 약값을 도와주었습니다.

"그것으로 약을 지어 드리니 병이 조금 나아서 간신히 기동을 하시게 됐지. 그래도 반쪽은 못쓰게 됐어. 낮에는 밥을 해주고 극장에서 숙직을 하는 판인데 하루는 누가 와서 발로 툭툭 치며 나를 깨워. 일어나서 보니 얼굴이 나하고 꼭 닮았어. 누구냐고 하니까 '너 말깐 옆에 사는 병균이지?'하고 묻는데 영락없는 서울말이야. 그렇다고 하니 일으켜 세워서 주머니를 뒤져 담배꽁초가 나오니 '요 새끼, 쪼그만 게 담배 피워?'하면서 주먹으로 쥐어박아. 집에 가자고 해서 함께 가니까 아버지가 '너의 작은형이다.'하시는 거야. 그래 얼마나 서럽던지 막 울었어. 열다섯 살이 되어서 작은형을 처음 만난 거야. 작은 형 따라서 아버지와 함께 보따리 싸가지고 평양을 떠났지. 그때는 평양에 아무 미련도 안 남았던 때라 후련하기만 했어."

작은 형과 큰 형을 따라 서울로 온 그는 우미관으로, 화신영화관으로, 조선극장으로 돌아다니며 변사 실습을 했습니다.

1930년대의 변사 얼굴이 들어간 조선극장 포스터.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00425071

"그 당시 가장 유명했던 변사는 서상필, 서상호 형제 변사였어. 서상필 씨가 형인데 이분이 일본에서 변사를 배워 가지고 최초로 우리나라에 퍼뜨린 분이지. 그 밖에 성동호, 최예덕, 조화수, 김선동 같은 분들도 유명한 분들이었는데 모두 다 돌아가셨지.
변사에도 전공이 있어서 비극 전공, 희극 전공, 활극 전공이 있는데 어떤 분은 세 가지 다 능숙하게 잘했지만 어떤 분은 비극 아니면 못 하고 희극 아니면 못 하는 분도 있었어. 나는 비극하고 활극을 주로 했지. 희극도 해봤는데 왠지 비극 쪽에 마음이 끌리고 사람들도 그걸 더 좋아해. 그렇지만 그때는 풋내기 변사 시절이라 수입이 보잘 것 없었지"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에 가니 난생 처음 보는 여자가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세 살 때 헤어졌던 누이였습니다. 그동안 신의주에서 살고 있다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시신을 홍제동 화장터에 화장시킨 후, 누이와 함께 연안에서 엿장사도 하고 원산에서 생선 장사도 하며 어렵게 지내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해방이 되니 억눌렸던 민족 감정이 영화에도 쏟아져 일본영화 필름을 불에 태우고 물에다 처넣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큰형이 다니던 영화사의 일본인 사장이 영화사에 보관하고 있던 필름들을 큰형에게 맡기고 일본으로 도망갔습니다. 그 통에 「심청전」, 「대서양의 비밀」,「나폴레옹의 최후」와 함께 찰리 채플린의 희극 영화 필름들이 손에 들어왔습니다.

이들 삼형제는 각각 필름 한 통씩 둘러메고 강원도 철원으로 가서 철원 극장에서 필름을 돌렸습니다. 첫날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돌렸는데 부자를 골탕먹이기도 하고 부자들의 호화로운 파티에 가서 우스꽝스러운 행동으로 파티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리는 찰리라는 방랑자의 몸짓 하나 표정 하나하나에 사람들은 포복절도를 하고 박수를 치며 좋아했습니다.



"영화를 끝내고 쉬는 판인데 웬 소련 군인이 통역을 데리고 와서 필름을 누가 돌렸냐고 묻더니 무작정 필름을 가지고 본대로 가자는 거야. 큰형님하고 나하고 북해에 있는 소련군 본부 사령부에 갔더니 아주 대우가 좋아.
갑자기 웬 장교가 오더니 통역을 시켜서 말을 하는 데 필름을 가지고 모스크바 가자는 거야. 그 영화가 채플린의 귀한 필름이니 가지고 가면 아파트도 주고 돈도 주고 호강하면서 살게 해주겠다는 거야. 안 된다고 사정해도 막무가내야.
밤새도록 고민한 끝에 그러면 여관에서 짐을 가져 오겠다 하고 통역관하고 철원으로 기차 타고 오다가 도중에 기회를 봐서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쳐 버렸지."

필름 짊어지고 38선을 넘어 월남민 틈에 섞여서 동두천까지 걸어와 의정부 극장에서 짐을 풀었습니다. 그곳도 극장 주인이 일본으로 도망가는 통에 한국인 기도주임이 운영하던 터라 큰형이 영사기 돌리고, 작은형은 표 받고, 막내는 변사 노릇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그 일이 차츰 자리가 잡히고 사람들에게 인기도 얻자 그들 삼형제는 아예 영화사를 차리고 '천재 소년 변사 신병균'을 앞세워 「장화홍련전」, 「흥보전」 등의 일제 시대 필름들과 해방 뒤에 새로 만들어진 「자유만세」, 「유관순전」, 「검사와 여선생」, 「똘똘이의 모험」, 「조국의 어머니」 등과 같은 필름들을 사들여 상영하였습니다. 한동안은 장사가 잘되어 미군 부대에서 영사기도 새것으로 사들이고 돈암동의 단칸 셋방에서 큰 집으로 이사도 했습니다. 

<검사와 여선생>의 포스터. 출처 : http://www.wisia.com/item/146369

그러나 그러한 행복도 잠시, 6.25 전쟁을 만나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삼일극장에서 영화를 돌리며 지냈습니다.

"우리 처를 어떻게 만났는고 하니 내가 부산 피난 시절에 우리 동네 살던 처녀들을 저녁에 모아 놓고 영화 얘기를 해주곤 했는데, 하루는 무서운 얘기를 하니까 처녀들이 무서워서 차츰차츰 다가앉는데 한 처녀가 내 옆에 바짝 앉아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란 말이야. 그때는 내가 여자들한테 인기가 좋았던 때라 금세 친해졌지. 그래 가지고 결혼을 하게 됐는데 피난 시절에 제대로 식을 갖출 수가 있었나, 그저 형식적으로 대충 치르고 살았지."

그러던 어느 날, 큰형이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형을 찾아서 시내를 쏘다니다가 그마저 길거리에서 방위대에게 붙들려 그날로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운전 면허증이 있어서 연대장 지프를 운전하게 됐는데 쌀을 싣고 서울에 가게 됐어. 쌀을 내려놓고 살던 집으로 가니 형수하고 조카가 살고 있어. 작은형의 소식을 물으니 인민군이 왔을 때 인민군 차를 운전하고 다니다가 인민군 따라서 올라갔다는 거야."

동생은 국방군 차 운전수, 형은 인민군 차 운전수가 된 기구한 운명은 끝까지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국방군과 인민군이 밀고 밀리는 싸움통에 동네의 밀고자가 작은형을 밀고해 작은형은 감옥으로 끌려가 소식을 모르게 되고, 그는 부대 일로 부산에 들렀다가 유엔군 군복을 입은 큰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큰형을 통해서 누이도 만나고 뜻밖에 피골이 상접한 작은형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작은형은 형무소에 있다가 국방군이 후퇴할 때 죄수 후송차에 실렸는데 밥도 안 주고 물도 안 줘 모두들 죽어 갈 때 간신히 살아 남아, 기차가 초량역에 정거하자 초량에 있는 중앙극장을 찾아가서 목숨을 건진 것입니다.

작은형의 몸을 회복시킨 뒤 자기가 있는 부대의 운전수로 입대시켜서 차를 몰고 다니던 중, 작은형의 차가 지뢰를 건드려 폭발하는 통에 부상으로 제대하게 되었습니다. 그 역시 탄약을 싣고 가다가 총에 맞아 귀에 파편이 꽂히고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제대하게 되었습니다.

상이 용사가 된 두 형제와 유엔군을 제대한 큰형은 먹고 살기 위해 전쟁이 끝난 뒤의 어수선한 마을을 돌아다니며 포장을 쳐놓고 영화를 돌렸습니다. 그러다 점점 자리가 잡히고 돈을 많이 벌게 되자 장충동의 태극당 자리에 큰 집을 사서 <합동 영화 배급소>를 차려 필름을 수 백 권 사다 놓고 한국에서 손꼽히는 영화 배급소 사장으로 떵떵거리고 살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사업이 잘돼서 사업을 확장해 나가던 중, 뜻밖에도 세 형제가 사들인 향군극장에 불이 나서 영사기, 필름과 함께 극장이 잿더미가 되어 버렸습니다. 빚쟁이들이 몰려와 아우성을 치는 통에 장충동 집을 팔아 빚 갚는데 쓰고 전셋집을 얻은 뒤 큰형은 홧병으로 술독에 빠지고 작은형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불행이 계속되었습니다. 또다시 빈털터리가 된 그는 가지고 있는 돈과 집을 탈탈 털어 큰형에게 주고, 부인과 딸과 아들을 데리고 청계천 상가에 있는 친구의 가겟방에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갑부가 됐다가 알거지가 되는 불안한 영화일에 염증을 느낀 그는 영화계에서 손을 씻고 지금의 문화부인 공보실의 영사기사로 십 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했습니다. 그 뒤 공보실이 없어지게 되자 개인택시를 신청해서 지금까지 모범운전사로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손주를 돌보는 가장 노릇을 착실하게 해왔습니다.

그동안 큰형과 누이와 매부도 다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그는 차츰 세상에서 잊혀졌고, 그 역시 자기가 '천재 변사'였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80년대의 어느날, 수십 년만에 다시 변사로 복귀하게 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어느날, 택시에 학생을 하나 태우고 가는데 이 학생이 자꾸 한숨을 쉬어.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자기가 학도호국단 부단장인데 축제에 나올 가수가 펑크를 내서 그 프로를 메울려고 만담가를 데리러 갔는데 그 사람마저 없어서 그냥 온 참이라는 거야. 그냥 갔다가는 학생들한테 맞아죽는다고 한숨을 푹푹 쉬어. 그래 내가 옛날 변사인데 만담으로 한 시간 채워 줄까? 그러니까 반색을 하면서 제발 그래 달라는 거야.
집에 와서 옷 갈아입고 학교에 가서 수십 년 만에 사람들 앞에 서서 변사도 하고 만담도 하면서 시간을 메워 줬지. 순전히 그 학생이 안쓰러워서 한 일인데 그걸 어떤 신문기자가 보고서는 기사로 썼어. 그러자 방송국이다 텔레비전이다 신문이다 잡지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이리저리 끌려다니기 시작한 게 다시 변사가 돼버렸어."

80년대와 90년대에는 잃어버린 우리 문화에 대한 열풍이 젊은이들 사이에 거세게 불었던 탓에 「검사와 여선생」이나 「며느리 설움」과 같은 낡은 필름을 비춰 가며 그가 변사를 하는 공연장에는 사람들이 꽉꽉 들어찼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동안 대학교나 소극장의 인기 출연자가 되었습니다.

"이름이 나서 좋기는 하지만 집식구가 싫어해. 내가 택시 일을 하면 수입이 일정한테 공연하려면 택시 일을 쉬어야 하니 수입이 불규칙해. 내가 젊어서부터 바람피고 팔도강산을 떠돌아다니느라 우리 안식구 고생을 많이 시켜서 지금은 그 죄값을 치러야 해. 그러니 택시 운전사를 내 천직으로 알고 가족들을 돌보고 착실하게 살아가는 걸로 만족하지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4251805115&code=100100

가족을 위해 착실하게 살아왔던 그가 참으로 오랫만에 다시 무대에 선답니다. '검사와 스폰서'로 시끌벅적한 요즘, "어렸을 때 사랑했던 여선생이 억울하게 남편을 죽인 살인자로 몰려 그이를 체포하게 되었으니 아,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이냐?" 하는 비장한 변사 해설로 되살아나는 「검사와 여선생」이 관객들의 눈물샘을 얼마나 자극할지 궁금해 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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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아내와 함께 무주 안성읍의 5일장에 갔습니다


오후라서 그런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평소의 인적 없는 거리에 비하면 활기가 넘칩니다.


시골장의 정겨운 물건들을 이리기웃 저리기웃하며 구경하고 다녔습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꽃나무를 세워 놓고 파는 이 곳에서 나무 몇 그루를 사곤 합니다.


처음에는 서울의 '양재 꽃시장'에서 몇 그루씩 사가지고 가서 심었는데 생존률이 저조하더군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장날에 맞춰서 이 곳에서 나무를 삽니다. 올해는 호두 나무 2그루와 자두와 복숭아 1그루, 그리고 분홍 철쭉 5그루를 샀습니다.


제가 '나무아저씨'라고 부르는 주인 아저씨가 시골의 농원에서 직접 기른 나무들이라 뿌리가 튼실해서 잘 자랍니다. 


길가의 찐빵집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네요. 집에 가지고 가서 먹으려고 찐빵과 만두 1인분씩을 시켰습니다.


단골이라고 알아본 주인아줌마가 인심 좋게 1개를 더 얹어서 쪄줍니다.


배가 고파지자 제가 좋아하는 할머니의 돼지갈비집에 들렀습니다.


남편이 일찍 돌아가신 뒤 이곳에서 사십 년이 넘게 장사를 하시면서 아들과 딸들을 공부가르치고 시집 장가까지 잘 보낸 '복쟁이 할머니'이십니다. 메뉴판에 이것저것 써놓았어도 오로지 연탄불에 굽는 돼지갈비만 파는 건 읍내 사람들은 다 아는 일입니다.


점심 때나 저녁 때나 장날에나 평일에나 언제든 이 비좁은 곳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건 오로지 푸짐한 할머니의 인심과 깔끔하고 맛있는 반찬 때문이지요. 돼지갈비 2인분이 깜짝 놀랄 정도로 푸짐하게 나옵니다.


왜 이렇게 많이 주느냐고 물으니 "다들 이렇게 많이 주면 뭐가 남느냐고들 그려. 그려도 내 집서 밥 먹고 배부르게 먹고 갔다는 말을 들어야 기분이 좋제"하며 맘씨 좋게 웃으십니다. 인심 좋은 할머니 덕분에 우리는 배부르고 기분좋게 돼지갈비 2인분에 동동주 반되를 마셨습니다. 

동동주가 너무 맛있어서 어디서 만든 거냐고 물었더니 읍내 '막걸리 도가'에서 산 거라고 합니다. 


당장 읍내 골목 안에 있는 '안성주조장' 찾았습니다.


술맛 나게 생긴 주인아저씨가 막걸리 한 사발을 맛보라고 그냥 줍니다. 그야말로 시원하고 감칠맛 나는 생막걸리가 목으로 시원하게 넘어갑니다.
 

'안성 생막걸리' 2병과 아무런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청주' 2병을 사니 가슴이 뿌듯합니다. 장터 거리로 나오니 멀리 덕유산의 산자락이 눈에 들어오는군요.


읍내에서 마을로 돌아오는 길목에 늘어 선 벗꽃 가로수 길에 벗꽃이 아름답게 피었군요.



길가의 민들레와 들꽃들도 봄맞이를 하고 있군요.


'구름샘 마을' 입구 길가의 산속에 피어 난 진달래도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저 멀리 산중턱에 정겨운 우리 마을에 보입니다.     


오랫만에 따뜻한 인심과 싱그러운 봄향기를 맛본 '장터 여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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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명인명창에 대한 이야기를  띄엄띄엄 올렸는데 앞으로는 좀더 자주 전에 제가 발표했던 명인명창에 대한 글들을 손질해서 올려볼까 합니다. 그래서 '명인명창 이야기'라는 카테고리도 만들었습니다. 
아마 네티즌들에게는 생소한 분들이 많고, 내용도 그리 흥미롭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미래의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스피어에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 끝에 시작합니다. 오늘은 지난 번에 소개한 박동진 명창과 단짝이 되어 북 치는 '고수(鼓手)' 이름을 날린 김득수 명인입니다. 

“이 쌔려 죽일 놈아, 북 좀 잘 쳐라.”
“그렇지!”
“눈 구녁을 쑥 뺄 놈이 대답은 잘 허는구나.”
“암먼.”
“정신 똑바로 차려, 이 발꼬락을 지질 놈아.”
“좋다!”

누가 들으면 당장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멱살을 잡고 덤벼들 욕설에 고수가 “그렇지!”, “좋다!”, “얼씨구!", "암먼!” 하면서 넉살좋게 받아내는 일이 소리판에서는 곧잘 벌어집니다.

욕 잘 하고 음담패설 잘 하고 재담 잘 하는 소리꾼한테는 고수가 곧잘 재담의 희생물이 되는데, 어떤 고수는 소리꾼이 자기에게 욕을 하거나 재담으로 놀리는 것을 싫어하여 대꾸를 안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김득수 명인은 소리꾼과 재담을 나누는 것을 즐겨했던 고수입니다. 특히 그의 오랜 벗으로 평생을 소리판에서 함께 지내온 박동진 명창과 소리판을 벌일 때에는 두 사람의 호흡이 척척 맞아 떨어집니다.

“아이구, 저 놈이 발뒤꿈치에 감기가 걸려서 북을 잘 칠랑가 모르겠네.”
“소리만 잘혀 봐, 북이 저절로 쳐지지”
“오냐, 내 아들놈아”
“그렇지!”

이런 재담 덕분에 소리판은 생기가 넘치고 훨씬 재미있어집니다. 이것은 그가 재담을 꾸미고 받아넘기는 솜씨가 뛰어난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고수는 소리꾼을 받쳐주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예술관에 철저한 탓이기도 합니다. 

“북은 장단을 정확하게 짚어서 시끄럽지 않고 조용하게 소리를 받쳐주어야 하는 법이여. 차가 잘 다닐 수 있도록 길을 잘 닦아야하는 것 처럼 북이 장단과 추임새로 소릿길을 닦아 주어야 혀.
소리가 나가다가 구렁에 빠질라고 허면 얼씨구 하고 추어주어서 빨리 지나가게 허고, 슬플 때는 북가락도 줄이고 추임새로 슬프게 분위기를 맞춰서 넣어 주고, 소리가 웅장할 때에는 북소리도 크고 추임새도 크게 하게 하고, 바쁘게 주워 섬길 때는 또 그런 분위기를 내주어야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청중들이 즐거워하도록 분위기를 잡아 주는 것이 중요혀. 그래서 나는 기회만 있으면 소리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한테 소리를 잘하고 못 하고는 청중들한테 달렸다고 허지. 소리꾼이 소리 잘 하도록 실컷 추어주고 받쳐줘라. 그래서 일고수 이명창이 아니라 ‘일청중 이고수 삼명창’이란 말은 내가 만들어낸 말이여.”

위에 소개한 말의 앞부분은 「서편제」에서 유봉이 아들에게 북을 가르치면서 호통을 치는 대사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렇듯 그가 철저하게 소리꾼을 받쳐주는 고수의 역할을 주장하게 된 데에는 본래 북보다 소리를 먼저 배운 그의 경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에서 김행원의 7형제 중 다섯째 아들로 1917년 7월 17일에 태어났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취미로 말도 기르고 진돗개를 길러 사냥을 즐기던 그의 부친은 정초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북, 장고, 징, 꽹과리로 풍물을 칠 때에나, 모를 심으면서 상사 소리를 할 때에는 언제나 으뜸가는 북잽이로 나설 만큼 북춤 추는 솜씨가 뛰어났고 판소리 북도 곧잘 치던 멋쟁이였습니다. 게다가 그의 집 뒤에는 조선시대 음악인들의 모임 장소라 할 수 있는 '신청(神廳)'이 있어서 노래 소리와 악기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집안과 마을의 음악적인 분위기에 흠씬 젖어서 자란 그는 진도보통학교에 다니던 일곱 살 무렵부터 채두인이라는 진도 소리꾼에게 남도민요와 육자배기와 판소리를 배우러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시골의 명창에게 깊은 판소리를 배우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열세 살 무렵에 집을 떠나 전남 목포에 있는 권번을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소리 선생으로 있던 오수암이란 젊은 명창에게 귀동냥으로 소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영광군 법성포에 있는 명월관의 초빙을 받아 그곳의 여자들에게 소리를 가르쳐 주는 강사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니까 귀엽고 예쁘고 목이 좋아서 소리도 듣기 좋으닝게 여자들한티 인기가 대단혔지. 그 덕에 한참 동안 요정 소리 선생으로 떠돌아 다닌 세월이 시작됐어.”

그곳에서 3년쯤 지난 뒤에 부산으로 가서 김광월이라는 여자 명창을 수양누이 삼아 그의 집에서 지내다가, 경북 경주군 감포읍의 달성관이라는 요정 주인에게 붙잡혀  그곳에서 2년간 소리선생 노릇을 했습니다.

그 뒤 울산 권번에 6개월쯤 있다가 경주 권번에서 1년쯤 지낼 적에 그곳에서 가야금을 가르치던 박상근의 권유로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박상근 씨는 가야금의 인간 문화재이신 성금연의 스승인데 참말로 가야금 잘 타신 명인이었어. 그 박상근 선생님하고 김천에 있는 명월관에 들렀지. 박동진이가 그곳에서 소리를 가르치고 있길래 같이 가자고 해서 셋이 상경을 했어.”

스물을 갓 지난 두 젊은 소리꾼은 ‘조선 성악 연구소’의 대명창 선생 밑에서 공부를 하며 명창에의 꿈을 키워 나갔습니다.

선생님들이 창극 단체를 꾸며 일 년 동안 조선 팔도와 만주 지방을 순회 공연 다닐 때에는 함께 따라다니며 무대 경험과 소리의 기량을 한껏 넓혀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풍성함은 잠시뿐이었고 곧이어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젊은이들은 징용이나 징병으로 끌려가고, 순사의 검문 검색은 나날이 심해지는 불안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때 징병 안 갈라고 죽을 고생했어. 공연을 해도 작품을 일본말로 해야 돼. <흥보전>을 할 때에는 흥보자식들이 일본에 충성하러 즐겁게 군대에 간다는 내용을 넣어야 했어. 그러다가 창극단에서 나와 연극 단체를 따라 다니기도 했지.”

징병에 끌려 갈 위험이 닥치자 박동진 명창과 함께 경남 도운과 위문단에 끼여서 공연을 다니던 중에 부산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쉴 새 없이 팔도를 떠돌아 다니느라 결혼할 엄두조차 못 내다가 해방되기 한 해 전 스물여덟 살에 늦장가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새색시와 신혼 생활의 재미도 채 나누지 않고 해방이 되자마자 목포로 가서 ‘진도 창극단’을 만들어 면면촌촌을 다니며 판소리와 민요와 토막창극을 들려 주며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김연수 명창이 창극단을 만들자 그곳에 가담했다가 그 단체가 해산된 후 김소희, 박후성 명창과 함께 ‘국극협단’을 창설하여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단체를 따라다니며 정처없이 떠도니 집안을 돌볼 수가 있어야지. 그러니 번번이 아내가 떠났어. 자식이 오 남매가 있는데 다 어미가 달라. 내가 스스로 지은 죄가 있으니 떠난 사람을 원망을 안 혀. 그때에는 아무튼 창극 단체 꾸미고 운영하는 데에만 온 정신이 팔려 있었응게.”

광주에서 단체를 재조직하려고 뛰어다니다가 실패하여 방황하고 있던 그는 서울에 올라와서 김연수 명창과 손을 잡고 단체를 만들어 다시 떠돌아 다니게 되었습니다.

“대구서 임춘앵 여성 국극단하고 경합이 붙어 동아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판인데 사람이 수없이 몰려와서 대만원을 이뤘어. 이제 그동안 진 빚을 갚을 수가 있겠다고 좋아하는 판인데 하루 공연하고 나니 그 이튿날 새벽에 6.25가 터져버렸어. 단원들하고 거지 생활이 시작됐지.”

대구에서 김해극장으로 옮겨서 피난민 위안 공연을 할 때, 낙동강 작전으로 함안 지방의 17만 인구가 김해로 피난을 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통해 거처할 방마저 구하기 힘들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비어 있는 어느 장삿집에서 여배우들과 함께 물장사를 하며 어려운 피난 생활을 보낸 그는 전쟁이 끝나자 단원들을 데리고 부산을 거쳐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단체 만들어 다닌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여. 작품을 만드는 일도 어렵고, 극장 잡고 사람 모으는 일도 어렵고, 허가 받고 지방 돌아다니는 일도 어려워. 그 중에서 지방 건달이나 한량들 텃세 막아내는 일이 가장 어려워. 어딜 가나 단체가 가면 괜히 시비 걸고 여배우들 집적거리는 건달들이 있는디 그런 사람들하고 싸움이 벌어지면 으레 내가 도맡아 나섰지.”

그는 한창 때에 양손에 칼을 들고 팬티바람으로 수십 명하고 싸운 전력으로 ‘진도 쌍칼’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건달 세계에서 알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평소 때는 사람 좋고 너그럽다가도 국악인을 천대하고 괴롭히는 사람만 만나면 무섭게 돌변해서 '박치기로 받아 버리고 사정없이 쥐어패는' 통에 국악계에서는 의협심과 인정으로 뭉친 사나이라는 칭송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의협심은 70년대에 국악협회가 뇌물과 공금 횡령과 기생 수출로 벌집 쑤셔 놓은 꼴이 되었을 때 여지없이 발휘되었습니다. 그는 권력자들의 위세에 눌려 바른 말을 못 하던 국악인들의 대변자가 되어 이사장과 간부들을 몰아내고 협회를 혁신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그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소리꾼을 뒷받침하는 단체의 기획이나 고수 노릇을 많이 하고 벌어들인 신망의 덕도 또한 컸습니다.

“난 본래 소리꾼으로 출발했는디 소리꾼으로 대성 못 허고 고수로 돌았지. 그것은 소리공부할 때에 한성준, 정원섭, 김재선 같은 북의 대가들에게 북을 함께 배운 받침이 있어서 단체에서 소리꾼보다 고수 노릇을 많이 하다 보니 지금은 북으로 인간 문화재가 되어 버렸지.”

한성준은 일제시대에 승무와 북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고, 정원섭 역시 판소리와 북에 통달했던 사람이고, 김재선 역시 북의 대가로 일세를 날린 사람입니다. 이들과 함께 공연을 다니며 배운 실력으로 어느덧 그는 북 치는 데에 아무도 따르지 못할 솜씨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소리하는 데에 잘 하고 못 하고 고비가 있듯이 북치는 데에도 잘 치고 못 치는 고비가 있어. 그저 또박또박 장단만 짚어서는 맛이 안 나. 고수는 반주자와 지휘자를 겸해서 소리가 험한 길로 가면 좋은 길로 가게 인도하고, 빠르면 느리게, 느리면 빠르게 음양을 맞추어 줄 줄 아는 데에서 제 솜씨가 나오는 거여.
소리도 마찬가지여. 선생에게 배운 대로 또박또박 박자 음정만 맞추는 건 진열장 소리여. 흉내 소리지. 거기서 넓힐 수도 좁힐 수도 없어. 옛날 선생들은 안 그랬어. 자유자재여. 흥이 안 나면 별 거 아니다가도 한번 흥이 나면 손님들이 앉았다 일어났다 어쩔 줄을 모르고,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떨려서 소리듣고 나면 온몽이 아플 정도여.
똑같은 음식도 간을 맞추는 데 따라 다르듯이 똑같은 선생한테 배운 소리도 제가 간을 넣어야 맛이 나는 거여. 선생을 뛰어 넘고 푹 솟아야 진짜 명창이여. 옛말에도 서당서 공부 잘 헌 놈은 붓장사 허고 공부 못 헌 놈은 영의정 헌다고 했어. 글만 많이 알아서 융통성없는 놈보다 흡글을 됫글로 말글로 섬글로 노적글로 풀어먹을 줄 아는 놈이 성공헌다는 말이지. 말허자면 창의성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여. 그런디 요새는 문화재 보호니 뭐니 해서 그런 창의성이 다 사라져 버리고 말었어.”

획일적인 문화재 전수 정책을 비판하는 그의 말투는 날카롭고 매서우면서도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배어 있어 듣는 사람도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단어 하나 장단 하나도 바꾸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전통의 보존이라는 문제와 예술적 창의력과 개성을 살려 새로운 시대의 전통예술을 창작하는 문제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야 할지는 우리 국악계 전체가 안고 있는 숙제인 것입니다.

국립국악원 자문위원, 한국 국악협회 이사로서 국악계의 든든한 대들보로 활동하던 그는 제자들과 자식들과 그를 좋아하여 끊임없이 찾아오는 후배들에 둘러싸여 외롭지 않은 말년을 지내다가 1990년 5월 21일에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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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송흥록 명창, 박초월 명창, 임방울 명창, 박녹주 명창 등 명인명창에 대한 이야기를  띄엄띄엄 올렸는데 앞으로는 좀더 자주 전에 제가 발표했던 명인명창에 대한 글들을 손질해서 올려볼까 합니다. 그래서 '명인명창 이야기'라는 카테고리도 만들었습니다. 
아마 네티즌들에게는 생소한 분들이 많고, 내용도 그리 흥미롭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미래의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지금 아니면 언제 그 소중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있겠느냐는 생각 끝에 시작합니다. 첫번째 타자는 대중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으로 박동진 명창을 선택했습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아마 판소리는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이 말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겁니다. 박동진이라는 노명창이 CF 광고에 나와서 한 대사지요. "또 제비 후리러 나간다~"하는 소리 대목도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겁니다. 모두가 박동진 명창의 광고 속의 멘트가 히트한 결과 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처음부터 판소리계의 스타로 활동한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50세가 넘어서야 명창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06/asp/ce...21203303

그 놀라운 집념과 열정의 이야기를 펼쳐 볼까 합니다. 
 
1968년에 국립국악원 강당에서 박동진이라는 소리꾼이 <흥보가>를 5시간 동안 쉬지 않고 완창한다고 하자 국악계에서는 ‘참 별일이 났다’고 수군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박동진이라는 소리꾼은 그때까지만 해도 김연수, 임방울, 김소희, 박초월과 같은 쟁쟁한 명창들의 그늘에 가려 별로 이름을 내밀지 못하던 소리꾼인데다가, 그런 소리꾼이 소리 한바탕을 완창으로 부른다는 것은 보통 무모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5시간을 쉬지 않고 불러 젖히는 데다가, 그 소리목이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힘이 있고, 고음과 저음을 마음대로 구사하였으며, 몸짓과 대사가 구성지고 익살맞고 재미있어서 5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가 버리자 그 소리판을 구경한 관객들과 소리꾼들과 기자들이 모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 이듬해에 <춘향가> 한바탕을 그 당시 명동에 있었던 국립극장에서 8시간 동안 쉬지 않고 부르자 소리 솜씨는 제쳐 두고라도 어떻게 한 인간이 8시간이나 계속해서 소리를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얘기로 온 장안이 시끌시끌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박동진이라는 소리꾼은 쟁쟁한 판소리 명창들의 대열에 끼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완창 소리꾼으로 이름이 높아졌습니다. 그 뒤 많은 소리꾼들이 그의 성공에 힘입어 완창 판소리 발표회를 가짐으로써 완창 발표가 마치 유행처럼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다른 소리꾼들은 일생에 한두 번 하기도 어려운 완창 소리판을 그 뒤로도 일 년에 한 번 또는 두 번씩 쉬지 않고 열었던 그의 정열과 집념은 무섭고 놀랍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어려운 일을 이를 악물고 해낸 데에는 그의 실패와 좌절이 큰 몫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1916년 7월 12일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무룡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 대에 몇 백 석을 거두며 부유하게 살던 그의 집안은 이미 아버지 대에 가세가 기울어 그는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 겪는 배고픔과 설움을 일찍부터 체험해야 했습니다.

여덟살이 될 때까지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익힌 그는 충남 대덕군 진잠면에 있는 진잠 보통학교를 4년 만에 어렵게 졸업한 뒤 대전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는 학비를 대기가 힘에 부쳤지만 아들이 중학교를 졸업한 뒤 면서기라도 해서 집안 살림을 도와줄 것을 기대한 그의 아버지는 꼬박꼬박 학비와 하숙비를 대주었습니다.

그렇게 학교를 다닌 지 4년이 되어 졸업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그의 앞날을 확 바꿔 놓고 집안에 평지풍파를 일으킬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지금 대전극장이 들어 선 자리에 <협률사>라는 단체가 들어와서 소리판을 연다기에 무심코 구경을 갔다가 그만 넋을 빼앗긴 것입니다.

조선 천지를 들썩이게 하던 이동백, 이화중선, 이중선, 장판개, 김창룡과 같은 최고의 명창들이 벌이는 소리판에서 넋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목석같은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소년 박동진은 온 몸이 달아오르고, 등에 소름이 끼치고, 귓전이 간질거리고, 오금이 저려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린 소년의 마음에 불을 지펴놓고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버렸습니다. 소년은 며칠 동안 학교 공부도 집어치우고 무대에 서서 소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다가 한숨을 쉬며 신세를 한탄한 끝에, 그예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소리를 배우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마침 이동백 명창의 고수로 따라다니던 지동백씨가 연기군에 산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지동근은 판소리로 이름을 날릴 만할 때에 목이 나빠져서 판소리를 그만 두고 땅재주를 하거나 북을 치면서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지동근은 자기는 판소리를 가르칠 수 없다며 “청양군 정산면 백공리에 가면 손병두라는 사람이 있는데 바탕소리는 못하지만 토막소리는 맛있게 잘 한다“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길로 집에 돌아 와 부모님께 자기의 결심을 여쭸습니다.

짐작한대로 아버지는 노발대발하고 매를 때리고 욕설을 퍼붓기까지 했습니다. “몇 달 있으면 졸업인데 무슨 미친 병이 들어서 광대짓을 하려느냐”고 펄펄 뛰며 야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집을 꺾지 않고 집을 나와 버렸습니다.

그때가 18살 되던 해 여름이었습니다. 물어물어 손병두씨 집을 찾아가서 나무도 하고 꼴도 베어 주며 머슴살이를 하다시피 일 년을 지내며 소리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사랑가'나 '옥중가' 같은 토막소리를 반 년쯤 배우고 나니 손병두씨도 가르칠 밑천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을 눈치 채고 선생 곁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손 선생의 부친인 손필모씨가 청양군 청장면에 있는 미륵당이라는 집에 그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 집은 행세깨나 하는 양반 집안이었는데 인사를 마치고 술상이 들어온 뒤, 주인 영감의 명령이 떨어지자 아들, 손주, 며느리들이 저마다 가야금, 거문고, 피리, 젓대, 양금, 해금 등을 끼고 앉아 '풍류'를 연주하는 것이었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풍류 가락에 넋을 잃고 연주가 끝났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앉아 있는데 손필모씨가 “이놈이 내 아들 제자인데 소질이 있는가 없는가 봐 주시요”하고 소개를 했습니다.

장구를 치던 주인 영감은 “어디 한 번 소리를 들어 보자”면서 북을 가지고 앉았습니다. 그래 겁을 바짝 내며 손병두에게 배운 소리를 하고나니 영감이 “네가 소질이 있기는 있는데 명창이 되려면 지금 선생으로는 안 된다. 이 집은 선배 대명창들이 한 번씩 다녀가셨던 집이다. 서울에 가면 정정렬 명창이 있는데 그 분이 <춘향가>는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러니 그 분한테 배우도록 해라”하며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길로 손병두 선생을 떠나 정정렬 명창을 찾아 서울로 올라가는데 일이 안 되려는지 도중에 서울 못 갈 일이 생겨버렸습니다.

터벅터벅 걸어서 유성까지 나왔을 때 마침 공주의 부자인 김 갑순이 궁술대회를 열고 기생들을 데리고 노는데, 저녁에 천막을 쳐 놓고 사당패들이 소리판을 벌이는 걸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구경꾼들 틈에 끼어 소리를 듣는데 이미 소릿길을 조금 안 그의 귀에 사당패의 장바닥 소리가 가소롭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자청해서 무대로 올라가 소리를 한 마디 했더니 “야, 그거 투가리보다 장맛이다”하며 “재청이요, 산청이요” 한 것이 오청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리를 끝내고 잠을 자려는데 느닷없이 곱게 차려 입은 중년 여인이 찾아와서 “아까 소리한 학생이 누고? 니 우리 방에 온나”하지 않겠습니까? 그 여자를 따라 여관으로 가니 의젓한 중년 신사가 앉아 있다가 “내 김천 서 치과의사하는 사람인데 너 김천 가서 기생 선생할래?”하며 이 말 저 말 얘기를 했습니다. 들어보니 그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생겨 두말없이 그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올라가려다가 거꾸로 내려가게 된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그는 중년 여인이 경영하는 진양옥이란 선술집에서 손님 앞에서 소리하며 하룻밤에 50전도 벌고 1원도 벌면서 몇 달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명월관이라는 요릿집에서 기생들 소리를 가르쳐 달라고 하여 꽃같은 기생 스무 명쯤을 모아 놓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소리를 배우지도 못하고 토막 소리 몇 대목 가지고 밥벌이하면서 누구를 가르치는 일이 항시 마음에 걸리던 차에 공주 대제암에서 정정렬 명창이 소리를 가르친다는 얘기를 듣고 대번에 기차를 타고 절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스승 운이 없으려는지 조상선, 김여란, 김초앵과 같은 쟁쟁한 신인 명창 12명이 한 시간씩 꼬박 열두 시간 동안 선생님을 붙잡아 놓고 있는 통에 도저히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여름이면 절간 아무데서나 잠을 자며 귀동냥이라도 할 텐데 엄동설한에 그럴 수도 없고 해서 다시 대구 봉산동에 와서 술집 기생들의 소리선생을 하며 지냈습니다.

얼굴도 “빤질빤질하게” 잘 생긴데다가 소리 잘 하고 멋이 있는 젊은 총각이 젊은 여자들 틈에서 지내다보니 “만사가 맨숭맨숭하기만 할 수는 없어서” 가끔씩 연애 사건을 저지르곤 했습니다. 대두에서는 대구 경찰서 고등계 형사의 조카인 일본 여자 대학생과 연애를 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가서 모진 매를 맞고 갖은 협박을 당한 끝에 강제로 쫒겨나다시피 경주 권번으로 옮겼습니다. 또 경주에서는 얼굴 예쁘고 인기 있던 기생 김난윤의 짝사랑에 말려들어 호되게 곤경을 치루는 등, 여자들 등쌀에 시달렷습니다.

결국 그는 그 생활을 청산해야겠다는 결심 끝에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습니다.

“내가 여자들한테 인기는 있었구만. 그런디 그것이 좋은 것이 아녀. 젊은 놈 신세 망치기 딱 좋은 것이라. 더욱이 소리 공부하는 사람은 여색을 조심해야 돼. 지동근씨가 나헌티 헌 말이 있네. 젊어서 여자를 알면 소리를 망치게 되니 여자 보기를 원수 보듯이 해야 한다고 하셨어. 성공만 하면 여자는 줄줄이 따라오는 법이니 성공할 때까지 절대 여자를 가까이 말라고 말이여. 그런디 한창 기운이 좋을 적에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는가. 서울 와서도 맨 연애만 허고 다녔지”

22살에 서울에 와서 조선 성악 연구회에 다니며 꿈에 그리던 정정렬 명창에게 소리공부도 하고 명월관, 식도원 같은 요리집에서 소리를 하며 돈도 벌었습니다. 노명창들을 모시고 북만주, 신의주, 상해, 무창, 북경, 남경, 서주까지 공연을 다녔습니다. 또 김창진, 조학진 같은 명창에게 소리공부를 하며 몇 해를 보내는 동안 그의 앞에는 소리꾼으로서 밝은 미래와 성공이 열리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거침없이 돈도 쓰고 한껏 멋을 부리고 신식 여학생들과 뻔질나게 연애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25살이 되던 해에 무서운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목이 안 나와. 고음이 안 나오고, 숨이 짧아지고, 소리가 갈라지고, 허리도 아프고, 소리 기운이 싹 없어져 버렸어. 한약도 써 보고 목을 쑥으로 떠보기도 하며 별별 짓을 다 했지만 소용이 없어. 목이 그 지경이 되니 무대에 서면 집어치우라고 소리지르니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고, 무엇보다 내 인생이 이것으로 끝이구나 생각하니 죽고 싶은 생각밖에 안 나”

그러던 차에 고향 집에서 옥천에 사는 색시와 혼인을 하라는 전갈이 오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대뜸 혼인을 해버렸습니다. 실의에 잠긴 마음을 그렇게 해서라도 달래보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그에게 안정과 행복을 가져다 주기는 커녕 도리어 무거운 짐만 짊어지게 했습니다.

그는 그 짐에서 벗어나고 잃어버린 목도 찾을 겸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그러자니 자연 가정을 돌보지 않게 되어 아내는 집을 떠나게 되고, 그 아내에게서 낳은 자식마저 저 세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불러들인 불행이지만 자신으로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어 더욱 더 실의와 좌절 속에서 세월을 보내는 동안 해방이 되고 그의 나이 30살이 되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그는 해방 뒤에 생긴 여성창극 단체인 <햇님국극단>에 들어 갔습니다.

그 단체에는 박초월, 김소희, 박귀희, 조금앵, 김경애와 같이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던 여자 명창들이 있었는데 그는 그 단체에서 고수도 하고, 무대감독도 하고, 작곡도 하며 그들의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그 뒤 김연수 명창이 이끄는 <우리 국악단>에서도 무대 뒷일을 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때의 쓰라린 경험과 명창들의 그늘에 가려 그들의 뒤치닥거리를 하며 느꼈던 열등감, 무대감독을 하며 익힌 무대 경험들이 '재기'를 위한 밑거름이 될 줄이야 그 당시는 아무도,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기에는 숨은 공신이 있었습니다. 

함께 창극단의 스탭 일을 하던 중 사랑을 하게 되어 마지막까지 해로한 둘째부인 변기씨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없었던들 그의 재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1962년에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들어 간 그는 남들은 전성기를 지나서 활동을 마무리 짓는 나이에 골방에 틀어박혀 아침 여섯시부터 정오까지 꼼짝 않고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그 뒷바라지를 지성스럽게 했을뿐더러 돈 못 벌어 온다고 잔소리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또 소리공부하다가 절망에 빠진 그가 소리 집어치우고 다른 일을 하겠다고 하면 극구 말리며 다른 생각 말고 소리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러한 아내의 내조 덕분에 그는 10여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로지 소리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만 52살이 된 1968년에 <흥보가> 5시간 완창 발표회를 갖고, 1969년에 <춘향가> 8시간 완창발표회를 한 다음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를 차례차례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 뒤에 그는 계속해서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 <강를매화전>과 같이 가사와 곡을 잃어버린 것으로 알려진 노래들을 다시 가사를 찾고 곡을 붙여서 발표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된 그는 1970년에 주태익이라는 극작가가 판소리 사설체로 쓴 <예수전>에 곡을 붙여 5시간 동안 불렀고, 그 뒤 <팔려 간 요셉>이라는 노래도 창작해서 전국 교회를 돌며 신자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또 1973년에는 <이순신전>을 불러 창작 판소리에 대한 국악계와 일반인들 사이에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407031

“십 년 동안 목숨을 걸어 놓고 공부를 헌 결과여. 내가 젊어서 못된 짓을 많이 혀서 목을 버려 놓았응게 목만 다시 찾으면 죽어도 원이 없다 허고 일심으로 공부를 허니까 목이 다시 찾아 와. 그래도 고음이 예전처럼 안 나와서 나 혼자 연구를 혔지. 처음에 '암성'으로 가늘게 내다가 점점 기운을 넣어서 '통성'으로 내는 거여. 옛날 임방울 명창도 이런 말씀을 허셨지. 소리를 많이 허면 가느다란 '실목'이 나오느니라. 그것을 많이 허면 그 목이 차차 굵어져서 통성이 되는디 그 단계가 어려운 것이니라. 허셨는디 내가 혀 보닝게 정말 어려워요. 실목을 통성으로 변화시키기가 소리공부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여. 그 단계를 통과혀야만 득음을 혔다고 헐 수가 있는거지”

그 어려운 단계를 통과한 명창에 대한 예우로 나라에서는 1973년에 판소리 <적벽가>의 인간문화재로 그를 지정했습니다.

그는 그 뒤 국립창극단의 단원이 되고, 1978년에는 단장이 되어 1981년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창극단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는 더 바빠져서 남들은 은퇴할 나이까지 각종 판소리 관련 교육이나 수없이 밀려오는 초청 공연, 방송 출연, 음반 취입, 게다가 광고 출연까지 젊은이 못지 않게 분주하게 보내다가 87세인 2003년에 세상을 떴습니다.

인생의 후반기인 50세에 재기해서 30년의 전성기를 보낸 그는 깊은 고난의 길을 걸어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무서운 집념과 미래에 대한 도전, 그리고 열정으로 충만한 노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뜬 '대기만성' 형의 명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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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침몰 미스터리'를 다룬 4월 17일자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정말 놀라운 방송이었습니다. 

군은 함미가 인양된 뒤부터 천안함 침몰 원인을 내부폭발이나 피로파괴가 아니라 외부폭발로 유도하는 분위기고, 여당과 보수 언론들은 한 술 더 떠서 북한 어뢰의 공격에 의한 침몰이라고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알고 싶다>는 그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날카롭고도 준엄한 질문을 용기있게 던진 것입니다. 

이날 방송에서는 천안함 함미 구조물의 변형 정도와 사건 당시의 정황 등을 바탕으로 침몰 사고의 미스터리를 집중적으로 파헤쳤습니다.

먼저 
어뢰 공격을 받았다면 화염이나 화약 냄새가 있었을 텐데 왜 천안함 생존자들의 부상 상태가 경미하고, 화염을 본 사람도 없고, 화상 환자도 없고, 화약 냄새를 맡은 장병이 한 명도 없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뢰가 선체 하부에서 폭발하여 '버블제트'라는 거대한 물줄기를 일으키고, 그로 인해 선체가 두 동강 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만약 버블제트라면 엄청난 물기둥이 솟아야 하는데 생존자들은 물기둥을 보지 못했고, 구조를 담당했던 해경관계자의 증언에서도 옷이 젖은 생존자를 보지 못했다고 한 것을 볼 때 어뢰 공격으로 단정짓기는 무리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정도의 폭발이라면 TNT 150kg 규모의 파괴력이니 선체 내부에 있던 장병은 그 소리에 고막이 터지는 것이 정상인데 증언을 통해 볼 때 그 정도의 큰 소리는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같은 조건으로 호주에서 실행된 실험 결과, 선체 갑판이 크게 파괴된 모습을 보인데 비해 천안함의 함미 선체는 비교적 온전한 상태인 점도 버블제트의 가능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고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미국 버클리대 선박구조 전문가인 알라 만수르 교수와의 인터뷰도 그 의혹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연기나 물기둥을 보지 못했고 물에 젖지도 않았다는 건 수중폭발이라는 주장과는 모순이 된다며 "폭발 이외의 다른 원인으로 배가 반파 될 때도 큰소리를 들을 수 있다. 피로 파괴나 전단 파괴가 일어나도 아주 큰소리가 난다"며 어뢰 공격에 의한 폭발 외에도 큰 소리가 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 백령도 인근 경계초소에서 촬영된 '열상감지카메라(TOD)' 영상 자료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군당국이 영상을 공개하는 과정에서 일관성이 없는 모습을 보여준 점, 사고 전의 영상과 사고 직후의 영상으로 조각을 내서 보여 주는가 하면 사고 시점의 영상은 아직까지 공개하지 않고 있는 점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TOD 촬영을 담당했던 전역자의 증언에 따르면 TOD 촬영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는 것이 규정인데 중간에 끊어졌다는 군의 설명이 납득이 안가고 의혹만 증폭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밖에 기뢰로 인한 폭발 가능성도 낮다는 전문가의 증언과, 초계함이 백령도 근처까지 접근하지 않았다는 백령도 주민들 증언 등 그동안 제기된 여러 의혹들도 제기했습니다.

그와 함께 마지막으로 희생된 장병들과 그 유족들의 가슴 찢어지는 슬픔을 생각해서라도 무능한 정부나 거짓말하는 군이나 정부가 되지 않으려면 진실을 밝히라고 준엄하게 촉구했습니다. 



아마도 이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방송하기까지 제작진에게는 적지 않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 프로그램을 방송한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 여러분들의 용기에 찬사를 보냅니다. 군사기밀과 북한의 개입이라는 빌미를 가지고 자꾸만 위기 상황으로 몰고 가려는 정부와 군과 여당과 보수 언론에 맞서 방송에서 이렇게 과감하고 직접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천안함 미스터리의 황사 바람이 부는 사막에서 맑은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이었습니다.


미국 영화 중에는 군대 내부의 비리나 음모를 소재로 다룬 영화가 많습니다. 그 중 관타나모 기지의 비리를 은폐하려는 해병에 맞서 진실을 밝힌 <어 퓨 굿맨>과 이라크 전쟁중에 발생한 비리를 밝혀낸 <커리지 언더 파이어>는 제가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그 두 영화는 미국 군대 내부의 비리를 파헤쳤지만, 그로인해 오히려 미국 군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침몰 미스터리 말고도 천안함 사건은 아직 풀리지 않은 수많은 미스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천안함이 사고로 침몰하는 상황에서 속초함은 왜 천안함 장병을 구하지 않고 북상했는가?

-새때로 추정되는 물체를 향해 76mm 함포를 쏘았다는데 과연 우리 군의 장비가 새떼와 잠수정도 구별 못할만큼 낡고 부실한가? 

-사고 관련 핵심내용이 들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천안함과 속초함끼리의 교신내용이나 천안함과 속초함이 평택 해군2함대사령부와 교신한 내용을 왜 공개 안 하는가?

-백령도 어부들 말을 들으면 그동안 천안함같이 큰 배나 함정이 그렇게 가까이 온 것을 본 적이 없었다는데, 왜 수심도 낮고 위험한 그곳으로 갔는가?

-폭발이나 침몰시간의 정확성은 왜 그리도 낮으며, 군의 위기대응 체계는 왜 그리도 미숙하고 엉성한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단 한 가지도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하는 한국군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볼 때, 우리에게도 오로지 진실을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무장한
'진실한 소수(어 퓨 굿맨A Few Good Man)' 필요한 때입니다.

유가족들은 천안함 침몰 미스터리에 대해 40여 가지의 질문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차가운 바닷속에서 생을 마친 꽃 다운 장병들과 유가족들의 피맺힌 절규를 진무하기 위해서도 그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내 아들을 삼켜 버린 잔인한 바다를 바라 보며
만신창이가 된 어미는 숨조차 쉴 수가 없구나
네 눈빛을 바랄 볼 수 없고 네 몸을 만질 수도 없고
네 목소리 조차 들을 수 없기에
피맺힌 눈물이 흐르는구나

미안하다 아들아
칠흙 같은 바다에 있는 너를 구해 주지 못해
어미의 육신이 찢기는 듯 아프구나

사랑한다 아들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새끼
그 누구도 용서하지 마라
너를 구해 주지 못한 어미도
진실을 밝히지 않는 대한민국도

오늘도 이 어미는 애타게 네 이름을 불러 본다.

어머니 하며 달려올 것 같은 내새끼
어미의 귀가에 들리는 네 목소리
한 번만이라도 네 얼굴을 만져 보고 싶구나
미안하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내 아들아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01354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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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에 실시되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20대들의 움직임이 활발하군요.

그동안 대한민국의 20대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세대라고 치부되어 왔지요. 정치보다는 텔레비전의 오락물이나 스포츠나 명품 핸드백에 열광하는 세대라고 폄하되기 일쑤였습니다.

물론 아직도 정치에 관심이 많은 20대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70년대나 80년대의 젊은이들을 휩쓸었던 변화와 개혁의 정치적 열풍이 다시 불기를 기대하기도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새 생명의 기운이 움트는 봄을 맞아 터져 나오기 시작한 20대들의 발언과 움직임은 앞으로 커다란 변화를 예감하게 하는군요. 특히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에너지를 뿜어낼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유권자 운동’을 통해서 20대의 권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한국대학생연합, 시민주권 대학생모임, 대학생 YMCA, 원불교대학생연합 등은 가칭 ‘2010 지방선거 대학생유권자연대’를 결성하고 전국의 대학 단체 등에 공동행동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20대를 위한 정책을 정당과 후보자들에게 묻는 질의서를 발송하고,
광역·기초단체장 후보들을 캠퍼스에 초청해 청년정책 토론회를 여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각 정당과 후보들이 20대의 정책을 얼마나 수용하고 있는 지 대학생들에게 공개하고, 이를 기준으로 투표참여를 적극적으로 독려하고, 정책을 수용한 정당이나 후보들과는 협약식을 개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각 대학들이 위치한 지역으로 전입신고를 해서 지방자치단체가 그 지역의 대학에 대한 정책을 내놓도록 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고, 이를 통해 ‘학자금 이자조례 제정’이나 ‘시도립 기숙사 건립’ 등의 정책을 요구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이와 같은 활동을 통해 올 지방선거에서 20대 투표율을 대폭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입니다. 역대 지방선거에서 30%선에 머물러왔던 20대의 투표율을 ‘88만원 세대’라는 호칭에 맞게 88%까지 높이겠다는 당찬 계획을 내걸고 있습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온라인에서 투표참여를 선언하는 30만 댓글운동을 벌이고, ‘대학생 정치참여 권리선언 대회’도 열고, 전입신고를 통해 선거구 내 대학생 유권자의 수를 높이고, 전국 주요 대학에 투표소를 설치하는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출처 :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rank%3D9

이런 유권자 운동뿐만이 아니라 직접 선거에 출마하는 움직임도 활발합니다. 지방선거에 직접 출사표를 낸 20대의 선언이 줄을 잇고 있어 4월 11일까지 선관위에 예비후보자로 등록한 20대 후보자는 26명입니다. 이처럼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이전과 다르게 20대들이 적극적으로 정치 참여를 준비하고 있어 선거의 향방을 가를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입니다.

그동안 우리 젊은이들은 정치에 실망하고 냉소적인 태도로 정치를 바라봤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경제난과 취업난 속에서 미래에 희망을 갖지 못하고 불안에 떨며 방황하고 자포자기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 젊은이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고, 지금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방황이나 자포자기에 머무르지 않고 일어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얼마 전 스스로 고대를 퇴교한 김예슬양의 비통하면서도 울분과 절규에 가득 찬 대자보에 대학생들의 관심이 폭발되고 뒤따라서 자퇴 선언을 하는 학생들이 나타난 것을 보면 현재 20대들의 분위기가 어떠한 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들은 이제 암담한 현실에 대한 절규를 넘어서서 스스로 행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른 세대뿐만이 아니라 젊은이들에게도 선거는 그들의 권익과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선거를 통해 정책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고, 교육제도를 바꾸고, 정치를 바꾸지 않으면 사회변혁이 어렵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지자체를 변화시키고, 정치를 바꾸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해법을 찾고자 뭉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뭉친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개혁을 시작하고 자신들의 현실을 바꾸려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보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울림을 주고 그 울림이 천둥이 되어 6월의 선거를 통해 꿈과 희망의 미래를 개척해 가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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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반절도 지났는데 아직 봄을 느끼지 못하겠네요.

지독한 꽃샘추위 때문에 강원도에서는 다시 얼음이 얼고 고드름이 열렸답니다. 여의도에 벗꽃이 피었지만 지독한 추위 때문에 꽃구경할 여유도 없습니다. 

벗꽃이 외면 당하는 여의도 벗꽃길.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4&aid=0002281840

게다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을씨년스러운 뉴스들은 국민들의 마음을 더욱 꽁꽁 얼어 붙게 하고 있습니다.  

위기관리의 문제점을 드러낸 천안함 사건으로 한동안 총체적 국가 위기상황이 전개되더니 인양 사진의 공개 여부와 사건의 진상을 둘러싸고 한동안 지난한 공방이 예상되고, 그 결과가 언제 어느 순간 폭풍이 되어 온 나라를 강타할지 모릅니다.

그 사이 일본은 슬그머니 독도 문제로 시비를 걸어 오고 있습니다.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주장을 담은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가 30일 일본 정부의 검정을 통과하고, 하토야마 총리는 공식적으로 독도 영유권을 언급하고, 여기저기서 그 주장이 펼쳐지고 있어 우리 마음을 얼어붙게 합니다.  

한동안 주요 쟁점이었던 '세종시'와 '무상급식' 문제는 여전히 수면 아래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고, 쉴새없이 터져 나오는 교육계의 비리는 이 나라 교육이 교육자에 의해서 운영되는지 범죄자들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는지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만듭니다.

김우룡 방문진 이사장은 MBC의 인사 문제에 대해 "큰 집으로 (김재철 사장을) 불러다가 쪼인트 까고 매도 맞고 해서 (만들어진 인사)”라는 발언으로 정부의 방송장악 야욕이 얼마나 심각하고 저급한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는지 현실을 알게 해줬고,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뇌물수수 재판은 1라운드에서 검찰이 패배하더니 새로운 건수를 가지고 2라운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문화부) 산하 기관장인 김정헌 전 문화예술위원장의 해고에 대해 1심에서는 위원장 손을 들어줬다가 2심에서는 문화부 손을 들어주고,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에 대해서는 1심에서는 문화부 손을 들어줬다가 2심에서는 김관장의 손을 들어주는 등 일관성 없는 판결로 문화예술계에 혼란을 가중시키더니, '회피 연아' 동영상을 유포한 네티즌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해서 온라인 세상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습니다.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이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가 자승 총무원장을 만나 ‘현 정권에 비판적인 스님을 강남 부자 절에 그냥 놔두면 되겠느냐’고 말했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습니다. 정권초기의 불교탄압 논란에 이어 권력 핵심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는 사안이라 불교계와 정권 사이의 관계가 급속하게 냉각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4대강 사업은 천주교 주교회의에 이어 불교 조계종과 수많은 종교인, 문화인, 환경단체, 시민들의 반대가 점점 거세어지고 있습니다.  

 경기도 팔당에서 '생평화미사'를 봉헌하는 천주교 사제들.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2&aid=0001959477


이 중 많은 사건들은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의 정책 추진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작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오불관언의 자세로 여전히 소명 의식에 가득 차서 그 정책들을 밀어 붙이고 있습니다. 

'살얼음을 밟듯 위태로운(如履薄冰)' 오늘의 현실, 이 지겨운 꽃샘추위는 언제나 끝날까요? 

하늘이여

하늘의 포악한 위세
땅에 펼쳐졌구나
하는 일마다 간사로워
언제나 그치려나
좋은 계획 따르지 않고
나쁜 것만 도리어 따르는구나
(중략)
안타까워라, 계획을 행함이여
성현의 길 아니고
원대한 계획 본받지 않는구나
오직 눈앞의 말만 듣고
오직 눈앞의 말만 다투는구나
집짓는 일, 지나가는 사람과 의논하는 것 같아
시작해도 아무것도 이루어지 못하리라
(중략)
사람들은 하나만 알고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하는구나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깊은 못에 임하는 듯 하고
살얼음 밟는 듯이 조심하여라

 『시경』 소아 편, <소민(小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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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성덕왕 시절에 '수로(水路)'란 이름의 절세미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순정공의 부인이었는데, 남편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러 가던 중 홀연히 용이 나타나 부인을 납치해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태수는 허둥지둥 발을 구르며 야단을 쳤으나 아무런 대책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옛 사람의 말에 여러사람의 말은 무쇠도 녹인다고 하니, 바닷속 짐승인들 어찌 여러 사람들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며 막대기로 바닷가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아내를 뺏아간 죄
그 얼마나 클까?
네 만약 거역하고
내다 바치지 않으면
그물로 사로잡아
구워 먹고 말테다.

노인이 일러준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며 막대기로 땅을 쳤더니 용은 부인을 받들고 바다에서 나왔습니다. 순정공이 부인에게 바닷속의 일들을 물어 보자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일곱 가지 보배로 지은 궁전이 있고, 그 음식은 맛이 달고 부드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 세상의 요리와는 전혀 달랐어요."

부인의 옷에도 인간 세상에서 맡아볼 수 없었던 이상한 향내가 스며 있었습니다. 수로부인은 절세미인이라서 깊은 산골이나 못을 지날 때마다 이처럼 여러 번 신들에게 납치되곤 했답니다.

'동해 용왕 납치 사건'이 있기 이틀 전,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을 때 일입니다. 

옆에는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 선 절벽이 있었는데 높이가 천길이나 되고, 위에는 철쭉꽃들이 탐스럽게 피어있었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sosun96/2FGP/128?docid=exZB|2FGP|128|20090524204827

수로부인은 그 꽃을 갖고 싶어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누가 내게 저 꽃을 꺾어 주겠어요?"

하인들은 그 절벽 위는 도저히 사람이 오르지 못할 곳이라며 난색을 지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암소를 탄 노인이 나타나더니 이런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검붉은 바위가에 
암소 잡은 손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겠나이다

노인은 이 <꽃 바치는 노래 : 헌화가(獻花歌)>를 부른 뒤에 꽃을 꺾어 바쳤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삼국유사」를 읽다가 이 낭만적이고 매혹적인 이야기에 매료되어 오랫동안 수로부인에게 반한 적이 있습니다. 

절벽과 미인과 꽃과 노인과 노래와 암소....이러한 단어들이 주는 연상 작용은 무척 예술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배경 속에서 한 송이 철쭉꽃을 들고 미소를 짓는 수로 부인은  제 마음 속에 우리 민족 최고의 미인이며 예술의 수호신과 같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천 년 전, 한 여인의 아름다움에 반한 바다용왕과 꽃의 아름다움에 반한 여인의 욕망은 음악을 탄생시켰고, 그 음악은 우리나라 고대 예술의 몇 안 되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만익 화가의 <수로부인 영접도> 출처 : http://img_34_564_5?1259578940.jpg 

오늘날에도 꽃의 아름다움에 반하는 여성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여성의 아름다움에 반해 노래를 부르고 꽃을 꺾어 주는 남성들의 눈물겨운 모습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변한 게  
있다면 꽃을 원하는 여성과 꽃을 주는 남성이 입는 옷과 머리 모양과 치장한 모습이 변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남성이 부르는 노래는 향가가 아니라 팝송이나 발라드나 힙합일 것이고, 그가 타고 오는 것은 암소가 아니라 택시나 자가용일 것입니다. 또 오늘날의 여성들이 꽃을 원하는 장소는 산속의 절벽이 아니라 경치좋은 유원지나 레스토랑일 것이며, 그 여성이 원하는 꽃은 철쭉꽃이나 야생화가 아니라 장미나 백합일 것입니다. 
 
이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본성은 변하지 않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태도나 표현 방법은 시대에 따라서, 또 환경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합니다. 한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태도는 장차 그이가 꾸려나갈 한 가정의 아름다움에 대한 태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또 개개 가정의 아름다움에 대한 태도는 장차 그 사회 또는 그 민족의 아름다움에 대한 태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태도가 됩니다. 

그러니 한 여성이 어떤 노래를 듣고, 어떤 춤을 추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가구를 좋아하고, 어떤 음식을 먹는가 하는 이 자잘한 생활의 아름다움에 대한 태도가 그 가정의 문화, 나아가서 그 사회의 문화에 대해 크나큰 변수로 작용한다고 생각할 때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오늘날 이 땅의 여성들을 매혹시키는 것은 낡아빠진 옛날 것들이 아니라 멋지고 새로운 것들입니다. TV, 영화, 패션잡지, 쇼, 비디오, 아이폰, MP3 등등 수많은 볼거리와 즐길 거리들이 엄청난 물량으로 쏟아져 나와 그들을 유혹합니다.

그들이 한 남성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게 되면 얼굴은 둥글넙적하고 눈은 가늘고 코는 납작하며 손과 발이 오동통한 몽골계의 어린이가 탄생하겠지요. 그런데 그 아이들은 자라면서 쌍꺼풀 수술을 하고 코를 높이겠지요. 그리고 바이엘이나 체르니를 옆에 끼고서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이어폰을 귀에 꽃고 영어를 배우게 되겠지요. 그리고 <알프스의 소녀>나 <신데렐라> 이야기가 쓰인 동화책을 읽고,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나 <백설공주>의 이야기가 담긴 에니메이션을 보며 자라겠지요.

조금 더 자라서는 팝송을 부르고, 나이트클럽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스파게티와 피자를 먹으면서 친구들과 떠들고,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 가는 꿈을 꾸고, 팔등신의 절세미인이 되어 뭇 남성들의 구애를 받는 꿈을 꾸겠지요. 이러한 꿈들은 이 땅의 젊은 여성들이 한 번 씩은 남모르게 꾸어 본 꿈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꿈의 위력은 너무도 대단하여 지신이 어쩔 수 없이 둥글넙적하고 손과 발이 오동통한 몽골계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아니 어느 때는 평생토록 그 꿈을 깨지 못하고 사는 여성도 많은 듯합니다. 

저는 그 꿈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저의 아내와 딸도 그 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그 꿈에 사로잡혀 자신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몰라보는 비극만은 막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눈에 콩까지가 씌인 탓인지 몽골계 여인들이 어느 종족의 여인보다 아름다워 보입니다.

제 눈에는 제 아내와 딸과 제가 아는 수많은 여인들이 어느 할리우드의 여배우보다 아름답습니다. 그 가늘한 눈은 흑진주 같이 반짝이고, 입술은 꽃잎처럼 어여쁘고, 피부는 백옥처럼 깨끗합니다. 그들 모두 어렸을 때는 엉덩이에 푸르스름한 '몽골반점'이 신비스럽게 새겨져 있었겠지요. 
   
저는 그 아름다운 여인들이 절벽 위의 꽃을 원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 꽃을 꺾어 주는 상상을 해 봅니다. 장미가 아니라 야생화를 원하고, 삐까번쩍 승용차가 아니라 암소를 원하고, 바이올린 소리가 아니라 피리 소리를 원하는 수로부인들이 이 땅에 수없이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 서구의 문물이 쓰나미가 되어 밀려오는 21세기의 바닷가 절벽 위에 외롭게 핀 '전통의 야생화'를 원하는 수로부인이 나타난다면 이 늙은 저도 기쁜 마음으로 <헌화가>를 부르며 천길 절벽이라도 올라가 꽃을 꺾어 바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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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호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곳입니다. 웬지 신비로우면서도 환상적이고 친숙한 느낌이 나는 바이칼 호수. 샤머니즘의 고향, 알타이 역사와 문화의 보고, 무한한 상상력을  불어넣어 주는 신화의 땅.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바이칼 호수.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00377128


'중앙아시아의 일리어드'로 불리는 '게세르'는 바로 이 바이칼 호수 지방에 전해 오는 영웅의 대서사시입니다. 

부리야트 공화국에 있는 게세르 동상. 출처 : http://www.bongwoo.org/xe/%3Fdocument_s...e%3Ddesc

까마득한 옛날 옛적, 천상 세계 서쪽의 신 '한 히르마스'와 동쪽의 신 '아타이 울란'이 전쟁을 벌입니다. 그 전쟁에서 패배한 아타이 울란의 갈기갈기 찢겨진 몸이 지상세계로 떨어지면서 온갖 질병과 재앙을 부릅니다. 

샤먼의 굿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모든 신들의 어머니인 '만잔 구르메'가 한 히르마스에게 지상 세계를 구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자 한 히르마스는 그의 둘째 아들 '벨리그테'를 지상으로 보냅니다. 

하늘의 신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던 벨리그테는 지상 세계를 다스리는 '센겔렌'과 '나란 고혼' 사이에서 인간으로 탄생합니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말을 하고 요람에 누워 찾아오는 적들을 물리칩니다. 신비한 능력과 용맹을 타고 난 아이는 센겔렌의 형인 '사르갈'의 양자로 들어가 '뉴르가이'라는 이름으로 자라납니다. 

뉴르가이는 부리야트어로 ‘코흘리개’라는 뜻입니다. 부리야트에서는 자식이 어렸을 때 코흘리개, 개똥이 등과 같이 지저분하거나 천한 이름으로 부르다가 자식이 열세 살 이상으로 성장하면 이름을 새로 짓는다고 합니다. 이는 지상을 떠도는 나쁜 영들이 어린아이를 해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지혜입니다. 

뉴르가이는 하늘 나라 아버지인 한 히르마스의 도움으로 '벨리겐'이라는 천마를 받고서 본래 모습인 '아바이 게세르'로 변하게 됩니다. 

‘아바이’는 부리야트 언어에서 흔히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함경도 방언의 ‘아바이’와 마찬가지로 선조나 아저씨, 혹은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높임말이라고 합니다. 바이칼 호수에서 알타이 산맥에 이르는 지역에 분포하는 알타이어계 사람들에게 아바이는 오늘날에도 남성 연장자의 이름 앞에 붙이는 일반적인 존칭으로 쓰입니다.

‘아바이’, ‘코흘리개’, 한, 하늘 신의 둘째 아들.....웬지 친숙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아바이 게세르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인간 세계에 내려온 목적을 달성해 나갑니다. 악역으로 등장하는 게세르의 삼촌 '하라주탄'은 형과 조카에 대한 질투와 게세르의 아내에 대한 욕정으로 갈등을 야기시킵니다. 그는 큰 전쟁의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을 하고, 번번이 용서를 받습니다.

또 게세르의 세째 부인 알마 메르겐은 게세르를 자기 곁에 두려고 약을 먹여 기억을 잊게 만들기도 하고, 쳐부수었던 적들이 부리는 신비한 힘으로 ‘노새’로 변하는 시련을 겪기도 하고, 셋째 부인 알마 메르겐의 도움으로 다시 본래의 모습을 찾기도 합니다.

배반도 당하고 자신보다 강한 적 앞에서 갈등하기도 하고, 패배하기도 하고, 속아서 고통을 겪기도 하는 등 악과 싸우고 하늘과 인간의 평화를 찾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게세르가 초인적인 능력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영웅이 되기까지 용맹무쌍하고 기지 넘치는 무용담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게세르 신화를 음송하는 부리야트의 샤먼 발렌친.
출처 :  
http://weekly.khan.co.kr/khnm.html%3Fmo...%3Dnm017


흥미진진한 내용 전개와 서구 신화나 중국 신화와는 색다른 분위기로 펼쳐지는 판타지, 그리고 반전을 거듭하는 게세르의 이야기는 무한한 상상의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이 이야기의 분포지역은 알타이에서부터 티베트와 몽골초원을 거쳐 만주까지 이어집니다. 이렇게 넓은 지역에 걸쳐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다보니 큰 줄거리는 같지만 각 지역마다 세부적인 내용이 조금씩 다르게 전해 옵니다. 

바이칼 호수 부근에서 채록된 판본들만 해도 100여 개가 넘고, 티베트와 몽골 인근에서 발견되는 것까지 합하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티베트 지역의 〈링 게세르 판본〉과 〈1716년 베이징 판본〉 그리고 바이칼 호수 주변 몽골계 부리야트인의 〈게세르 신화〉를 주요 판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이칼의 게세르 신화-샤먼을 통해 만난 신들의 세계」(일리야 N 마다손 채록, 양민종 옮김, 솔 펴냄)의 번역 대본인 〈페트로프-마다손 판본〉은 전설적인 부리야트 샤먼인 '페트로프P. Petrov(1866~1943)'의 낭송을  일리야 N.마다손이 채록하여 1941년~1943년 사이에 출간한 것입니다. 이 판본은 여러 판본들 중에서 신화적 요소를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고, 샤머니즘적 특징이 가장 많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 실린 부리야트 본이 샤마니즘적 성격이 강하다면, 티벳 본에서는 게세르의 싸움이 훨씬 더 빈번하게 일어나며 불교적 색채가 가미됩니다. 

「게세르 칸-몽골 대서사시」(유원수 옮김, 사계절 펴냄)에 실린 몽골 판본은 티벳의 판본을 몽골어로 번역한 것인데, 불교적 성격이 한층 더 강하게 드러납니다. 대표적인 예가 하늘신 대신 불교의 신적 존재인 ‘샤키아무니(석가모니)’가 등장한다는 점과, 신이 인간으로 환생한다는 샤마니즘적 요소가 빠져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큰 줄거리는 거의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화읽기를 좋아합니다.

그 중에서도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신화들은 제게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선사해 줍니다. 우연히 부리야트 판본을 읽고 너무 재미있어서 몽골 판본까지 읽었는데, 저는 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에 특히 끌렸습니다. 
 
그런데 주인공 게세르가 인간들을 위해 지상에 내려 온다는 이야기는 단군신화를 비롯한 한반도의 각종 건국 신화에서 보이는 '천손강림' 사상과 비슷한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또 '홍익인간' 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게세르 신화는 단군신화나 해모수 신화, 주몽 신화 등과 닮은 구조를 가지고 있고 한반도에서 면면히 생명력을 이어온 샤머니즘 전통과도 맥이 닿아 있습니다.

우리 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해결할 단서로 단군신화 연구가 필수적이라면 그 연구는 동아시아 고대 신화와 서사시의 비교연구가 관건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북방 민족 최대의 영웅서사시이며 지상의 평화를 위해 하늘의 영화를 버리고 인간의 땅을 택한 '게세르 이야기' 우리에게 무궁무진한 연구 과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단군 영정. 출처 : http://www.pulug.com/news/news_view.htm...dx%3D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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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전주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5학년까지 반장 노릇을 했습니다.

1학년 때는 담임선생님이 저를 무척 예뻐하셔서 반장으로 뽑아 주셨고, 2학년 때부터는 학생들의 투표로 선출되어 5학년 때까지 반장을 했습니다. 내성적이고 남 앞에서 설치는 성격이 아닌데도 막상 멍석을 깔아 놓으면 잘도 교단 앞에 나갔던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이 옛날 얘기하라고 하면 앞에 나가서 동화 얘기를 하기도 했고, 노래하라고 하면 서슴없이 나가서 동요를 불러대곤 했으니까요.

한번은 저의 반장 권력이 강력한 도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4학년 때 저하고 앙숙으로 지냈던 깡패 대장 비슷한 아이가 바로 그 도전자였습니다. 선생님이 안 계실 때면 제가 자습을 시키곤 했는데 그 아이가 선동을 해 반대파를 모아서 소란하게 만들고, 떠드는 아이들을 제지시키면 저한테 대들게 해서 싸움을 붙이곤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자기가 직접 싸움을 걸지 않고 부하를 시켜서 싸우게 만드는데, 저는 꼭 그 전술에 걸려들어 수업 끝나고 한적한 공원에 가서 그 애 부하들하고 싸웠습니다. 그러면 번번이 제가 이겨서 그 아이 코피가 터지게 되고, 그 아이는 울면서 저희 집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느 날, 그 깡패 대장이 자기 집에 저를 초대했습니다. 전주에서 조금 벗어난 변두리 마을에 있는 가난한 초가집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전주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거의가 초가집이 있는 시골이었습니다. 그 애는 집에 가는 동안에 호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말했습니다.

“사실은 너하고 사귀고 싶어서 그런 거다. 우리 사귀자.”
“그래 좋다.”

화끈하게 화해한 우리는 울타리에 피어 있는 호박잎을 말아 담배랍시고 만들어 그 아이 골방에서 어른들 몰래 콜록거리며 피워댔습니다. 그 뒤로 깡패 대장의 '지원'을 받은 저의 권력은 탄탄대로였습니다. 그런데 그 권력으로 인해 학우들의 가슴에 못을 박은 2가지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 중 하나는 전주 KBS 방송국 '어린이 합창단 응모 사건'입니다. 

그 당시 KBS 어린이 합창단은 노래하는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학교 합창반에서 활동하던 저와 몇몇 어린이들이 지망을 했는데, 그 중에 저희 반 부반장도 지망을 했습니다. 얼굴이 깨끗한 미소년에 심약한 소년이었던 부반장은 노래를 참 잘 불렀지만 노래라면 누구한테도 지기 싫어하는 저한테 눌려서 우리 반에서는 노래의 2인자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방송국의 발표 결과 저는 탈락되고 부반장이 합격하는 '대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를 저한테 안겨 준 부반장 아이가 밉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 심정을 미리 짐작한 저의 부하들은 그 뒤로 부반장 아이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빽으로 어린이 합창단을 들어갔다는 루머도 퍼뜨리고, 그 아이가 노래를 부르면 야유를 하기도 했고, 어린이 합창단이라고 잘난 체 한다고 괜한 트집을 잡기도 했습니다. 저는 모른 채 하면서도 속으로 고소해 했습니다. 그 후 그 아이는 반장 눈치 보느라 학교에서는 점점 노래를 부르기 힘들어 했습니다. 저는 노래 1등이라는 지위를 계속 누렸지만,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그 아이의 눈동자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볼펜 도난' 사건입니다.

역시 4학년 어느 날의 쉬는 시간에 제 앞에 앉은 아이가 멋진 외국제 볼펜을 가지고 와서 제게 자랑을 했습니다. 아마 외국에 나갔다 돌아 온 부모님이 선물한 볼펜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볼펜에 넋이 나간 저는 저도 모르게 그 아이 필통에서 볼펜을 훔쳐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밤을 새우며 그 볼펜으로 일기도 쓰고 숙제도 한 저는 다음 날 수업 시간에 또다시 그 볼펜을 꺼내어 쓰기 시작했습니다.

밤새도록 볼펜을 찾았을 그 아이는 제가 쓰고 있는 볼펜을 보자마자 "이 도둑 놈, 내 볼펜 내놔!"하고 소리쳤습니다. 조금만 더 쓰고 그 아이에게 돌려주려고 했던 저는 '도둑놈'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뭐야? 이 볼펜은 내꺼야!" 하고 마주 소리쳤습니다. 그 아이는 어이가 없어서 눈을 뒤집어까며 자기 볼펜이라고 소리치고 항의했지만, 저도 지지 않고 눈을 부라리며 '내 볼펜'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거짓말이 제 입에서 술술 나왔습니다.   

반 아이들이 모여 들어 누구 말이 맞는지 따져 보았지만 목격자가 없으니 오로지 그 아이와 제 진술로만 판단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아이들은 당연히 반장 편이 됐습니다. 그 아이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 말도 잇지 못하고 저를 노려봤지만, 저도 그 아이한테 지지 않고 노려보며 "나를 도둑놈으로 모함하는 나쁜 놈!"이라고 몰아부쳤습니다.
 
그러자 제 부하들이 그 아이를 끌고 가며 반장한테 까불지 말라고 위협했습니다. 그 아이는 기가 죽어 더 이상 저한테 대들지 못했지만, 억울함에 가득 찬 그 아이의 눈동자를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학우들이지만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는 그들의 두려움과 억울함에 가득 찬 눈동자는 지금까지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혹 그 사건의 당사자나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학우들이 있다면 무릎이라도 꿇고 용서를 빌고 싶은 심정입니다. 

친구들이여, 보잘 것 없는 반장 권력을 휘두르며 '왕따 작전'과 '거짓말 작전'으로 착한 학우들을 괴롭힌 비열한 반장을 용서해 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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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앞바다에서 반토막 난 천안함 사건으로 온 나라가 반토막이 났습니다.

하루하루 슬픔과 분노와 충격의 폭풍이 나라를 뒤덮고, 날마다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수많은 추측과 억측이 난무하고, 국회를 열어 긴급 현안 질의를 벌였지만 진실은 여전히 짙은 안개에 쌓여 있습니다.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3192308

오늘 열린 국회에서 김태영 국방부 장관은 내부 폭발과 암초 충돌의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답했습니다. 포탄은 발포되지 않으면 안전장치가 풀리지 않으며, 유류 사고의 가능성도 거의 없고, 사고 지점에는 암초가 없으며, 암초와 충돌해서 배가 두 동강 난 사례는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함정이 낡아서 '피로 파괴'된 게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지난 2월의 정비에서 아무 문제가 없었고, 지금까지 '피로 파괴'된 함정은 없었다고 답했습니다.

그럼 외부폭발 가능성이 남는데 기뢰와 어뢰를 비교하자면 우선 천안함의 절단면이 C자형인 걸 봐서 어뢰 폭발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과의 연계 가능성이 매우 적지만 연계가능성이 없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는 애매한 답으로 혼란을 키웠습니다.

속초함이 새떼를 오인사격했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레이더에 잡힌 미확인 이동목표를 사격했다는 것이고, 열상감시장비(TOD) 영상이나 교신일지 등을 전면 공개하라는 요구에 대해서도 군의 작전활동을 적에게 노출키기 때문에 부분 공개할 수밖에 없으며, 함미의 발견이나 구조함의 도착이 늦었고 구조 장비가 부실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답변으로 일관했습니다. 

결국 우리 군은 천암함이 왜 반토막이 났는지 아직 모르지만 초기 대처도 잘했고, 구조작업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토록 공개하라고 아우성인 생존자들의 '증언'이나 '교신일지'를 철저한 보안 속에서 분석한지 1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원인을 밝히지 못하면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강변합니다.

그런데 왜 군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국민들 가슴에는 분노와 슬픔의 쓰나미가 몰려 올까요?  

젊은 해군 병사 46명의 실종 때문입니다. 새파란 젊은 생명들이 바닷속에 수장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 각 한 각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생존 가능성이 희박해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서 울부짖는 가족들의 고통을 온 국민이 함께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군 전우로 알려진 김덕규씨가 지난 3월 29일 해군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이 누리꾼들을 울리고 있습니다. 

폭풍우 이는 차가운 해저에서 희미하게 꺼져가는 전우들의 생환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절규하는 그의 외침은 저마저도 울리고 말았습니다.
 

[전문] 772함 수병(水兵)은 귀환(歸還)하라



772 함(艦) 나와라

온 국민이 애타게 기다린다.


칠흑(漆黑)의 어두움도

서해(西海)의 그 어떤 급류(急流)도

당신들의 귀환을 막을 수 없다

작전지역(作戰地域)에 남아있는 772함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772 함 나와라

가스터어빈실 서승원 하사 대답하라

디젤엔진실 장진선 하사 응답하라


그대 임무 이미 종료되었으니

이 밤이 다가기 전에 귀대(歸隊)하라.


772함 나와라


유도조정실 안경환 중사 나오라

보수공작실 박경수 중사 대답하라

후타실 이용상 병장 응답하라

 

거치른 물살 헤치고 바다 위로 부상(浮上)하라

온 힘을 다하며 우리 곁으로 돌아오라.


772함 나와라


기관조정실 장철희 이병 대답하라

사병식당 이창기 원사 응답하라


우리가 내려간다

SSU팀이 내려 갈 때까지 버티고 견디라.


772함 수병은 응답하라

호명하는 수병은 즉시 대답하기 바란다.


남기훈 상사, 신선준 중사, 김종헌 중사, 박보람 하사, 이상민 병장, 김선명 상병,

강태민 일병, 심영빈 하사, 조정규 하사, 정태준 이병, 박정훈 상병, 임재엽 하사,

조지훈 일병, 김동진 하사, 정종율 중사, 김태석 중사, 최한권 상사, 박성균 하사,

서대호 하사, 방일민 하사, 박석원 중사, 이상민 병장, 차균석 하사, 정범구 상병,

이상준 하사, 강현구 병장, 이상희 병장, 이재민 병장, 안동엽 상병, 나현민 일병,

조진영 하사, 문영욱 하사, 손수민 하사, 김선호 일병, 민평기 중사, 강준 중사,

최정환 중사, 김경수 중사, 문규석 중사.

 

호명된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전선(戰線)의 초계(哨戒)는 이제 전우(戰友)들에게 맡기고

오로지 살아서 귀환하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대한민국이 부여한 마지막 명령(命令)이다.


대한민국을 보우(保佑)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아직도 작전지역에 남아 있는

우리 772함 수병을 구원(救援)하소서


우리 마흔 여섯 명의 대한(大韓)의 아들들을

차가운 해저(海底)에 외롭게 두지 마시고

온 국민이 기다리는 따듯한 집으로 생환(生還)시켜 주소서

부디

그렇게 해 주소서.




출처 :
"마지막 명령이다, 772함 수병은 귀환하라"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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