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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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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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은 천원짜리 지폐의 주인공일 정도로 우리 국민 들이 성인처럼 존경하는 학자입니다.

출처 : http://ask.nate.com/qna/view.html%3Fn%3D5881801

그의 초상화나 글들은 매우 엄격하고 진지하고 학문에 몰두한 선비의 기풍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퇴계의 전혀 다른 면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바로  단양 신선봉 아래 '두향묘' 전해 오는 퇴계와 두향과의 사랑이야기가 그것입니다.

퇴계는 평생 두 번 결혼을 했습니다. 21세 때 김해 허씨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세 아들을 낳은 후 결혼 6년 만에 산후풍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번째 아내 권씨와 재혼했지만, 그녀 역시 퇴계가 46세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두 아내를 잃고 홀아비가 된 퇴계는 1548년 1월 단양군수로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부임한 지 한 달 만에 둘째 아들 채(寀)가 또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48세였던 퇴계는 계속되는 가족들의 죽음으로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 무렵, 그는 명기 두향과 만나게 됩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두향은 어려서 일찍 부모을 잃고 단양고을 퇴기인 수양모 밑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녀는 열세 살 에 '기적(妓籍)'에 올려졌으며, 열여섯 살에 황초시란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결혼 석 달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어쩔 수 없이 다시 기생이 되어 단양 관기로 활동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녀는 용모가 빼어나고, 거문고를 잘 탔고, 시와 그림을 좋아했습니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왔을 때 이팔청춘 16세에 남편과 사별한 미모의 기생과, 두 아내와 사별한 채 아들까지 잃어 슬픔에 젖어 있던 48세의 홀아비가 만난 것입니다.

소설가 정비석 씨가 쓴「명기열전(名妓列傳)」에는 두 사람의 만남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가 소설적 상상을 덧붙여 애절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슬픔과 비탄에 젖은 채 묵묵히 시를 쓰고 글을 읽는 퇴계를 두향은 마음속으로 사모하게 됩니다. 두향은 사랑의 정표로 여러 가지 선물을 드렸으나 퇴계는 번번히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두향은 포기하지 않고 선생께서 무엇을 가장 좋아하시는지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 매화를 무척 사랑해서 매화를 읊은 시가 수십 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전국을 수소문해서 희다 못해 푸른 빛이 나는 최상품의 백매화를 구했습니다. 그 매화를 선생께 드리니, 선생께서도 "매화야 못 받을 것 없지." 하시며 동헌 뜰 앞에 심고 즐겼습니다.

그후 퇴계는 두향의 재능을 어여삐 여겨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의 정은 점점 깊어지고, 마침내 사랑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매화를 통해 맺어진 두 사람의 사랑은 각별하였습니다. 

출처 : http://blog.ohmynews.com/songpoet/150126

두향과 퇴계는 경치가 빼어난 강선대를 즐겨 유람했습니다. 총명하고 거문고와 시와 그림에 조예가 있던 두향은 퇴계와의 교분을 통해 그 세계가 더욱 깊어지고, 고매한 영혼의 소유자로 성숙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열 달도 안되어 끝나고 맙니다. 넷째 형인 이해(李瀣)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형제가 같은 도에서 근무하는 것을 피하는 제도 때문에 퇴계가 경상도 풍기 군수로 옮겨가게 된 것입니다.

두향으로서는 청천의 벽력이었습니다. 짧은 사랑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이별은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두 사람은 밤이 깊도록 말없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윽고 퇴계가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구나.”

두향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시 한 수를 썼습니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 제
어느덧 술 다 하고 님 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그날 밤의 이별은 결국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졌습니다.

퇴계가 단양을 떠날 때. 그의 짐 속엔 두향이가 준 수석 두 개와 매화 화분 한 개가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퇴계는 평생 동안 그 매화를 가까이 두고 두향을 보듯 애지중지했습니다.

1570년 퇴계가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도 자신의 죽음보다 매화의 목마름을 염려할 정도로 매화 사랑이 깊었습니다. 제자 이덕홍은 이렇게 전합니다.

"초여드렛날 아침, 선생은 일어나자마자 제자들에게 `매화에 물을 주라'고 말씀하였다. 오후가 되자 맑은 날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흰눈이 수북이 내렸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누워있던 자리를 정리하라고 하였다. 제자들이 일으켜 앉히자 선생은 앉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곧 구름이 걷히고 눈도 그쳤다."

한편 퇴계가 단양을 떠나자, 두향은 ‘퇴적계(退籍屆)’를 제출했습니다. 신임 사또에게 ‘이황을 사모하는 몸으로 기생을 계속할 수 없다’며 기적에서 이름을 없애달라고 간청해 기생을 면했습니다.

그 뒤 두향은 퇴계와 자주 갔던 강선대가 내려다보이는 강 언덕에 초막을 짓고 은둔생활을 하며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았습니다. 퇴계의 죽음 소식을 들은 두향은 도산서원까지 달려가 멀리서 절을 한 후 돌아왔습니다. 그후 두향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무덤을 강선대 위에 만들어주오. 내가 퇴계선생을 모시고 자주 시문을 논하던 곳이라오."

너무도 일찍 생을 마감한 그녀는 강선대 가까이에 묻혔고, 그로부터 단양 기생들은 강선대에 오르면 반드시 두향의 무덤에 술 한 잔을 올리고 놀았다고 전합니다.

퇴계와 두향의 추억이 어린 강선대는 충주댐을 만들 때 수몰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두향묘'는 그녀를 기리는 사람들에 의해 1984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장됐습니다.
 

두향의 무덤. 출처 :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6page%3D

그런데 과연 이 사랑이야기는 사실일까요?

조선 후기 문장가인 이광려가 두향묘의 정경을 읊은 한시에 그녀의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두향은 실존인물로 보입니다. 

외로운 무덤 길가에 누웠는데
물가 모래밭에 붉은 꽃 그림자 어리어 있으라
두향의 이름 잊혀 질 때라야 강선대 바위도 없어지겠지

하지만 퇴계와 두향의 사랑을 공식적으로 밝힌 문헌은 아직까지 확인된 것이 없습니다. 1977년 단양군이 펴낸 「단양군지」는 강선대를 소개하면서 '명기 두향의 묘가 있다'고 했을 뿐입니다.

퇴계와 두향의 관계가 처음 언급된 것은 위에 소개한대로 1970년대 후반에 씌여진 정비석의 소설 「명기열전」이었습니다. 정씨는 퇴계 문중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두향편'을 엮었다고 합니다.

그후 퇴계학연구원이 1980년에 낸 「퇴계일화선」에도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런데 그 책의 저자는 다름 아닌 정비석 씨였습니다.

문헌을 통해 퇴계를 연구하는 학자 중에는 퇴계가 두향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 이유로 다음의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듭니다.

첫째, 퇴계가 단양군수로 갔던 1548년은 퇴계 생애 중 정치적으로 위험한 시기였다는 겁니다. 그보다 3년 전에 일어난 을사사화에서 간신히 죽음을 면한 퇴계가 자신을 호시탐탐 노리는 정적들을 피해 지방으로 피한 때라는 겁니다.

둘째, 퇴계가 단양에 도착한 다음 달에 둘째 아들이 죽고, 고을의 행정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텐데 그런 한가한 사랑을 할 여유가 있었겠느냐는 겁니다.

셋째, 퇴계가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근거로 듭니다. 1541년 관서 지방에 출장을 갔다 오는 길에 평양에 머물렀을 때, 평안도 관찰사가 유명한 기생을 시켜 접대하려 했는데도 끝내 거부했다는 기록이 전해 올 정도로 여색에 대해 담백했던 퇴계가 그리 쉽게 사랑에 빠졌겠느냐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퇴계와 두향의 러브스토리는 오로지 소설가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허구일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비석 씨가 어떤 증언을 토대로 소설을 썼는지는 알 수 없어도, 두향이 실존인물이고 퇴계와 단양에서 만났다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으로 위험하고 아들의 죽음까지 겹쳤다면 퇴계는 정신적으로 무척 불안하고 외로웠을 겁니다. 슬픔에 지치고 세파에 시달린 중년 선비의 외로운 모습은 젊은 여인의 가슴 속에 모성애와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켰을 겁니다.

또 다른 고을 수령들처럼 여색을 탐하지도 않고, 기생이라고 하여 함부로 대하거나 성희롱을 하지도 않고, 정성을 다해 민정을 살피고 학문에 정진하는 그의 모습은 그녀의 마음 속에 존경과 사랑의 열정을 불러 일으켰을 겁니다. 

그리하여 두향이 먼저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시했을 것이고, 매화를 통해 정신적으로 교감을 나누던 퇴계도 두향에게 깊은 정을 느꼈을 겁니다. 두향과 헤어진 후 평생 홀로 살며 벼슬과 학문에만 몰두한 퇴계의 행적을 볼 때, 퇴계는 그녀에 대한 감정을 글을 통해 노출시킬 수 없었고 매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제아무리 성인처럼 추앙 받는 학자나 성직자라 할지라도 정신적 교감을 기초로 한 이성과의 사랑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런 위인의 인간적인 체취를 느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단양군 단성면에서는 1979년부터 매년 <두향제>를 열고 있습니다. 두향제를 주관하는 쪽에서는 퇴계와 두향의 사랑이야기는 단양에서 있었던 실제 역사가 분명하다는 입장입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사실인지 허구인지는 두향의 무덤 아래 출렁이는 충주호 물결만이 알고 있을 테지만, 저는 외로운 두향의 무덤에 술 한 잔 올리며 두 사람의 순수한 사랑을 기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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