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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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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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에 있는 진도는 다른 곳보다 유난히 예술의 향기가 짙게 배어 있는 섬입니다.

오래 전부터 문인들의 유배지로 각광을 받아 온 터라 선비들의 체취가 곳곳에 스며 있어, 그 영향으로 그림과 글과 풍류의 멋이 잔뜩 담겨 있습니다.

그 중에 그림으로는 소치 명인이, 글씨로는 소전 명인이, 음악으로는 박종기 명인이 꼽힙니다. 박종기 명인은 대금의 명인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었을 때,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잘라 고깃국을 끓여 삼 년 동안 더 사시게 했다는 전설적인 효자로도 꼽히는 분입니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무덤 곁에 움막을 만들어 놓고 삼 년 동안 거적대기 위에서 먹고 자며 무덤을 지켰는데, 그때 갈고 닦은 대금의 솜씨가 가히 신묘한 경지에 이르러 그가 대금을 불면 날짐승들이 갓에 날아와 앉았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대금으로 일가를 이룬 명인이었습니다. 게다가 대금에 판소리의 가락을 얹어서 '대금 산조'를 창시한 분이기도 합니다.

진도 씻김굿의 보유자 박병천 명인은 바로 박종기 명인의 손자입니다.

박종기 명인의 아들이며 그의 아버지인 박범준 명인은 피리도 불고 장고나 꽹가리를 치며 아내인 김소심이 굿을 할 때 잽이로 뒷바라지를 하던 터였으니, 1933년 11월 18일에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 274번지에서 태어난 박병천은 자연히 어릴 적부터 음악에 젖어 지내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할머니가 여러 분이 있었어. 양할머니, 친할머니, 외할머니가 한 집에 사셨는데 이분들이 잠을 재우면서 민요로 자장가를 불러주시고, 업고 다니면서도 쉴 새 없이 민요를 흥얼거리고, 눈만 뜨면 대금 소리, 피리 소리, 장구 소리, 북 소리가 들렸으니 음악에 눈이 안 떠질래야 안 떠질 수가 없었지.”

일곱 살도 되기 전에 이미 풍물가락이 몸에 밴 그는 부락에서 농악을 칠 때 '무동(舞童)'을 서서 그 예쁜 얼굴과 춤으로 인기를 독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락 저 부락에서 농악을 칠 때마다 돈 주고 사가는 인기 무동 노릇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학예회나 연극이나 콩쿠르 대회 같은 것이 있을 때에는 빠지지 않고 인기를 독차지하는 끼 있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로 건너가서 목포 상업중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 음악반에서 클라리넷을 불고, 음악반장도 하고, 권투부원도 하고, 하숙집에서 가까운 권번에 가끔씩 나가 판소리 북도 치는 재주있는 학생으로 거칠 것 없이 자유롭고 재미있는 생활을 했습니다.

집안에 자손이 귀하고 살림은 풍족하니 학비나 하숙비는 항상 넉넉하게 남아돌아 돈 잘 쓰고, 멋있고, 놀기 좋아하고, 싸움도 잘하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친구나 여자들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러다가 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6.25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고향으로 피난을 오니 내 위 형들은 전부 학도병, 의용군으로 가버리고 처녀하고 과부들 뿐이었어. 그때 진도에서 목포에 나가 공부하기가 지금 미국 유학 가기보다 힘들었을 때니 여자들만 웅성웅성한 곳에 멋쟁이 학생이 왔으니 가만 놔둘 것인가. 처녀들한티 기습도 많이 당했지.”

처녀들이 죽창 들고 모닥불 피우고 보초 서다가 인민군한테 잡혀가고, 인민군이 도망가면 국방군한테 잡혀가는 험난한 시절을 숨어서 보낸 그는 다시 목포로 올라와 선원을 양성하는 전문학교인 목포 상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체질적으로 배 타는 게 싫어 선원 되는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무당이 되어버렸습니다.

“장구 메고 굿하러 가면 친구들이나 동네 사람들의 시선이 옛날 같지가 않아. 그 많은 돈을 들여서 목포에서 유학까지 한 인텔리가 굿이나 한다고 천대하는 것 같아. 그래도 내가 좋은디 어쩔 거여. 어렸을 때는 학교 브라스밴드나 가요가 좋았지만 나이가 드니 기타 소리보다 가야금 소리가 좋고, 클라리넷 소리보다 대금 소리가 좋은 걸. 그래, 친구를 만나면 오히려 내가 넉살 좋고 염치 좋게 나 굿하러 가니 굿보러 오라고 소리쳤지.”

그는 진도에서 으뜸가는 무당인 어머니 김소심을 따라다니며 굿을 배우고 악사 노릇을 하면서 굿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황해도나 평안도 등 이북의 굿은 신 내린 ‘강신무’가 진행합니다. 그에 견주어서 한강 이남지방인 경기도나 경상도나 전라도는 대대로 집안에서 의식을 전수받은 ‘세습무’가 진행합니다. 그 중에서 전라도의 무속은 '살풀이춤'과 '시나위 가락'으로 춤이나 음악에서 뛰어난 예술성과 함축미를 지녀 우리나라 고전 무용과 고전 음악의 모태가 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죽은 사람의 혼을 씻어 ‘천궁’으로 보내는 의식인 '씻김굿'은 제대로 다 하려면 81시간이 걸리는 엄청난 의식으로 '성주굿', '부정거리'와 같은 다른 굿보다 훨씬 비장하고 종교적이고 예술적이어서 많은 예술가들에게 예술적 영감과 소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출처 : http://www.oneclick.or.kr/Contents/list...page%3D6

그는 어깨에 굳은 살이 박히도록 북과 장구를 메고 다니면서 그 굿을 속속들이 다 익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은 따갑기만 했습니다.

“내가 스물 한 살에 장가를 갔는디 얼마 안 가서 가정 파탄이 나고 말었어. 내가 무당이 되나까 아내가 죽자사자 반대하는 거여. 그래도 말을 안 들으니까 챙피하다고 도망가고 말았어. 아내가 그럴 정도니 다른 사람은 오죽 헐 거여.
사람들한티 천대받고 괄시받은 한이 어찌나 깊이 맺혔는지 쌈질, 각시질, 도박질 등 질이란 질은 안 해 본 게 없어. 내가 한참 깡패짓하고 다닐 때 별명이 '전남 번개'였응께. 길을 가면서도 주먹을 핀 적이 없어. 어떤 놈이 나를 업신여기고 해치지나 않나 허고 꼭 주먹 쥐고 다녔지. 그렇게 멸시 받는 것에 대한 반발과 오기로 이를 악물고 굿을 배운 거여. 그런디 배우고낭께, 음악을 알고낭께 사람이 순해져.”

한동안은 굿을 때려치우려고 배를 사서 어부 생활도 해보고, 구멍가게도 내고, 쌀 도매상도 해보고, 농사도 지어봤지만 모두 실패하고 풍족했던 집안의 살림만 없애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굿으로 다시 돌아와 진도실업 고등학교에서 국악 강사 노릇을 하면서 무가(巫歌)를 정리하고, 민요를 발굴하고, 장단을 채록하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진도 지방의 여기저기에서 불리워지고 있는 토속 민요에 남달리 애착을 느꼈습니다. 어려서 할머니 품에서 들었던 흥얼거림의 가락들이 그의 가슴 속에서 되살아났던 것입니다. 그 가락들에서 따뜻한 정과 푸근한 안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앉아서 부르는 민요인 <모 심는 소리>, <아리랑타령>, <화초사거리>, <개구리타령>, <흥타령>, <둥덩이타령> 같은 노래들과 일할 때 부르는 <뱃노래>, <술비소리>, <부뚜질노래> <불무질노래> 같은 노동요와, 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인 <강강수월래>, <기와 밟기> 노래같은 유희요와 어린애들이 놀면서 부르는 동요들을 정신없이 찾아다니며 배우고 채록했습니다.

“내가 어려서 나무하러 갈 때는 대나무에다 낫을 매는데, 그 대나무를 가지고 ‘발치기 발치기 발로 친다고 발치기, 손치기 손치기 손으로 친다고 손치기.’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대나무 넘기 놀이를 했어.
또 우리집에 말 키우는 목장이 있었는데 머슴들이 말 키우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누가 시집갈 때는 신부 가마를 메고서 '흘롱소리'를 하면서 흥겹게 메고 갔거든. 그런 소리는 참 씩씩하고 푸짐하고 흥겹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 그러게 그 나라 '길군악' 곧 행진곡을 들어보면 민족성을 알 수 있다는 말이 맞어.
소련은 눈 속에 장화를 신고 가야 하니 '쿵짝 쿵짝' 하는 무거운 두 박자이고, 이탈리아는 날씨가 맑고 명랑하니 '띠따띠따' 하면서 경쾌하거든. 우리나라는 뭐니뭐니해도 삼채가락이여. '캥캥 캥매캥 조오타', 이것이 우리 몸짓에 딱 들어 맞어.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고 소 걸음으로 흥겹게 어깨를 들썩이면서 걸어가는 걸음, 이것이 우리 장단의 기본이여.”

출처 : http://music.cyworld.com/artist.asp%3Fa...d%3D3316

이렇듯 민요에 대한 그의 열렬한 애정은 1971년에 전국 민속경연대회에서 남도 들노래팀을 가르쳐 국무총리상을 받은 것으로 결실을 보았습니다. 그 뒤 1972년에는 <강강수월래>로 출전하여 국무총리상을 받고, 그 이듬해에 다시 출전하여 역시 <강강수월래>로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1974년에는 <진도 만가>로 문공부 장관상을 받고, 그 다음해에는 <거문도 뱃노래>를 발표하고, 1976년에는 <진도 다시래기> 발표 공연을 갖기도 했습니다.

'다시래기'는 초상난 집에서 슬픔에 젖은 상주를 위로하기 위하여 재담과 노래를 잘 하는 광대들이 모여서 한판 우습게 노는 풍습을 말합니다. 그는 어렸을 때 본 기억을 되살려 생존하는 늙은 광대들을 찾아 하나하나 구술을 받아 복원시켜 놓은 것입니다.

“처음에 발표를 하니 모두들 비웃어. 생전 놀아보지도 못한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병신춤을 추게 하고 노래를 부르게 허니 아무래도 서툴렀지. 그렇지만 자꾸 하다보니 점점 신들이 올라서 나중에는 직업배우 뺨치게 잘들했어. 그래도 옛날 어른들 솜씨를 따라갈 수가 없지. 그분들은 밥 먹고 하는 일이 그거였응께. 그분들은 징 가운데가 닳아서 떨어질 정도로 풍물을 치고 굿을 해댔어.”

그렇듯 쉴 새 없이 경연대회에 나가고, 새로운 것을 발굴하고, 연습하고, 뜯어 고치는 그를 보고 주위의 오해도 많고 잡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기와 집념으로 버티어 나갔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그의 기량과 안목은 자꾸 넓어지고 깊어져 처음에는 출연자의 입장에서만 이해하던 공연물에 대한 안목이 점점 가르치는 사람과 객석에서 보는 사람의 입장으로 변해가면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몇 번의 수상으로 자신을 얻은 그는 드디어 자기의 특기인 씻김굿을 정식무대에서 발표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만해도 무당굿을 극장에서 올린다는 것은 무모하고 미친 짓으로 여겨졌던 터라 그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씻김굿의 기능을 가진 무당과 악사들을 모아 놓고 연습을 시켰지만 평생 동안 무대에 서보지 않은 사람들이니 무대 위에서 지켜야 할 약속들을 쉽게 이해할 리가 없었습니다. 차일 쳐놓고 현지에서 하던 경험만으로 사사건건 불평을 털어놓는 그들과 죽자사자 연습하여 마침내 서울을 가려고 목포행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출연자 한 사람이 못가겠다고 버티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아들이 자기 아버지가 진도에서 굿하는 것도 창피한데 서울까지 와서 하느냐고 결사 반대하니 못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난 그가 출연자를 바닷물 속에 빠뜨리는 소동을 벌인 끝에 겨우 서울에 올 수 있었습니다.

YMCA와 국립극장과 공간 사랑에서 차례로 씻김굿 발표회를 여니, 이번에는 세습무 집안의 국악인들이 외면하고 냉대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당과 관련된 자기 집안의 내력이 밝혀질까 꺼려해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들과도 왜 조상을 속이느냐고 다투면서 공연을 무사히 치뤘습니다. 그뒤에는 전국 굿 경연대회에서 황해도, 서울, 부산 지방의 무당들과 함께 전라도 지방의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굿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차츰 개선되고 예술로써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80년에 씻김굿 기능보유자로 인간문화재 제 7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출처 : http://www.soundspace.co.kr/bbs.php%3Ft...%26p%3D5

그러자 해외공연에의 길이 열려 1982년에는 국제 민속 예술제의 초청으로 유럽 6개국 순회공연을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LA올림픽 개관 축제 공연도 하고, 나카라과 민속 음악제에서는 금상도 받기도 하고, 1985년에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 민속 음악제에 국가대표로 나가서 유럽 7개국 순회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굿을 극장에서도 해보고 외국 가서도 해보니까 아무래도 현지에서 차일 쳐놓고 하는 분위기가 안 나와. 화려한 무대에서 조명이 좋고 마이크 있어봐야 제맛이 안 나. 전통의 재창조도 중요하지만 원형의 보존도 그만큼 중요한 거여. 민속경연대회도 마찬가지여. 상이 걸려 있으니 출전하는 사람들이 아름답고 화려하고 기술적으로만 치중을 혀. 그것은 올바른 길이 아니지. 내가 시골 생활만 허다가 서울 와서 산 지 몇 년이 되었는데 서울 와서 보니 모든 예술이 아름답고 기교적으로만 흐르고 있어. 그러면 안돼.”

그는 제자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장단을 가르칩니다.

춤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건 노래를 배우러 오는 사람인건 먼저 기본적인 장단을 익히게 한 후 다음 과정으로 들어갑니다.

“장단에도 음과 양이 있고 소삼 대삼이 있어. 높은 소리 뒤에는 낮은 소리가 있고 빠른 소리 뒤에는 느린 소리가 있어. 타령 한 장단이라도 집이 이루어져야 돼. 남자와 여자가 모여서 가정을 이루듯 암가락과 숫가락이 어우러져야 한 장단이 이루어지는 법이여. 순서가 틀려도 안돼. 그런데 요즘은 이런 것을 모르고 마구잽이로 치는 사람이 많어.”

이러한 그에게 끊임없이 국악계나 무용계의 중진들이 찾아옵니다. 집안에서 집안으로 이어진 튼튼한 가락과 몸짓은 어느 대학 교수의 이론보다도 막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를 이어 피를 타고 흐르는 음악성은 그의 아들에게도 이어졌습니다.

“큰 아들놈이 초등학교 다닐 때인디 하루는 밖에 나갔다 집에 오니 이놈이 혼자서 장구를 치고 있어. 근디 가르쳐 주지도 않었는디 가락이 듣기 좋아. 그래 피는 못 속이는구나 생각하고 그 길로 목포로 가서 작은 장구를 사서 메어주고 달밤에 집앞 행길에서 장구를 가르쳤지. 그후 대금을 공부했는디 지금은 국립국악원에서 대금을 불고 있어.”

밖으로만 밖으로만 떠돌다보니 가정적으로는 불안해서 시련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모두 성장해 자기 길을 훌륭히 가는 걸 지켜보며 조용히 말년을 보내다 젊은 날의 오기와 반항과 집념 대신 인정 많고 훈훈한 중년 신사의 모습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니 이것은 성품을 순화시키고 심성을 맑게 하는 음악의 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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