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블로그 이미지
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 2,608,286Total hit
  • 36Today hit
  • 250Yesterday hit

동춘 서커스단이 11월 15일의 공연을 끝으로 문을 닫을 계획이라는 기사를 읽고, 부랴부랴 청량리 수산시장에 있는 천막극장을 찾았습니다.


2시, 5시, 8시 하루 3회 공연을 한다는 전화안내를 듣고 2시 공연에 맞추어 갔습니다. 이미 장을 파한 수산시장 근처는 비릿한 냄새와 여기저기 널린 쓰레기로 어수선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래도 눈에 익숙한 천막극장과 플래카드와 포스터를 보는 순간, 가슴이 뛰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동춘 서커스단의 공연을 여러번 봤습니다만, 아무도 모르게 혼자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런 방식으로 동춘 서커스에 대한 저의 아쉬움과 애정을 표현하고 싶었나 봅니다. 저는 입구에서 1만원짜리 티켓을 사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2시 10분 전, 흘러간 대중가요가 흘러 나오는 객석 안 500석 정도의 좌석은 10여 명 정도의 나이 드신 관객들 말고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시작을 기다리는 동안, 동춘 서커스와의 인연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연극을 하던 젊은 시절, 저는 거리의 약장수나, 파고다 공원의 이야기꾼이나, 줄타기 광대처럼 황혼녘에 들어 선 공연들을 열심히 보러다녔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일하게 남아 있던 서커스단인 동춘 서커스의 공연은 이런 저런 인연으로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구상하는 작품의 소재를 찾으러 보기도 하고, 국립극장에 있을 때나 행사를 할 때 출연을 요청해서 보기도 했습니다.



서커스는 1911년 5월 1일, 일본의 ‘고사쿠라’ 곡예단의 부산 공연으로 이 땅에 처음 나타났습니다. 그 뒤 10여 개의 단체가 한반도와 만주까지를 오르내리며 관객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랬지. 아니타니 기노시타니하는 곡마단이 서울에 올 때면 얼마나 화려했는가. 파고다공원 옆은 단골장소였지. 규모도 대단했고. 만주공연을 가면 또 어땠나. 남부여대해서 이불보따리에 바가지 하나 올려놓고 고국산천을 떠난 사람들이 공연 끝나면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고향소식을 묻지 않던가.”
- 한수산 부초(‘浮草)‘ 중에서


동춘 서커스단은 일제시대 일본 곡마단에서 활동을 하던 박동춘 씨가 한국인 곡예사 30여명을 이끌고 독립해서 1925년에 창단한 단체입니다. 

초창기의 동춘 서커스는 서양식의 공중 곡예와 신기한 마술쇼에 한국적 맛을 살린 판소리와 만담 등을 섞어서 서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그 후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동춘 서커스는 최고의 인기 서커스단으로
소속 단원들만 250명이 넘을 만큼 호황을 누렸습니다. 영화배우 허장강, 코미디언 서영춘, 배삼룡, 백금녀, 남철, 남성남, 장항선, 정훈희씨 등의 수많은 예능인들이 동춘 서커스단을 거쳐서 스타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동춘 서커스를 이끌고 있는 박세환 단장(66세)은 1963년 19살의 어린 나이에 부푼 꿈을 안고 입단했습니다.

박 단장은 뛰어난 노래 솜씨와 입담으로
 큰 인기를 끌었지만, 집안 어른들의 반대에 부딪혀 예인의 꿈을 중도에 포기하게 됩니다. 그 후 개인 사업체를 운영하던 박 단장은 동춘 서커스가 텔리비전의 등장으로 관객을 잃고 파산 직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1978년에 서커스단을 인수했습니다. 처음에는 의욕을 가지고 투자도 하고 새로운 시도도 하여 잃었던 관객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서커스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점점 멀어져가고 사정은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공연할 땅을 빌리기도 점점 까다로워졌습니다. 단원들도 점점 떠나갔습니다. 힘든 수련을 거쳐 무대에 설 수 있는 단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자 중국인 곡예사로 공연의 대부분을 대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2003년에는 태풍 '매미' 때문에 천막을 잃었습니다. 또 지난 해 발생한 미국발 경제 위기 때문에 작년 11월부터 올해 3월까지는 개점 휴업 상태나 마찬가지로 보냈습니다. 게다가 갑자기 닥친 신종플루 파동으로 관객이 더 줄어 입장료 수입은 거의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습니다. 결국 3~4억의 빚과 3개월 체불 임금으로 운영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돈을 빌릴 곳도 없이 진퇴양난에 빠진 겁니다.

 


동안 동춘서커스가 여러 차례 위기를 맞고 어려움에 빠진 적도 있었지만 아예 문을 닫기로 결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마지막 공연을 준비하면서 정부에 지원금을 요청했지만, 지원하기 어렵다는 대답만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상 제가 찍은 몇 컷의 공연 사진들이 너무 조악해서 공연의 수준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곡예사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군요.



동춘이 해체되면 한국 서커스의 맥이 끊길 것입니다. 또 하나의 공연 문화 중 한 장르가 사라집니다. 하지만 박세환 단장은 재기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박세환 단장. 출처 : 경향닷컴 2008.12.4 http://news.khan.co.kr/kh_news/art_print.html?artid=...

언젠가는 새로운 작품을 기획해서 동춘을 살려내겠다는 게 박 단장의 꿈입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태양의 서커스'와 같은 세계적인 서커스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얘기를 하곤 했습니다. 

태양의 서커스 공연 천막. 출처 : 고고씽님의 블로그 http:// gossing.tistory.com/337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는 캐나다 퀘벡시의 거리 곡예사이며 연출가인 기 라리베르테(Guy Laliberte)가 거리의 곡예사들과 함께 1984년에 만든 첫 작품이 빅히트를 함으로써 세계적 서커스 기업으로 발돋움한 단체입니다.

태양의 서커스 <퀴담>의 한 장면. 태양의 서커스 제공.

우리나라에도 <알레그리아>, <퀴담> 같은 작품들이 들어 와 5만원~20만원의 높은 티켓 가격에도 불구하고 좌석을 가득 채우며 수많은 관객들을 매료시켰습니다. 기왕에 있던 곡예들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지만, 기존의 서커스와 차별화된 연출로 세계 최고의 서커스 공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박세환 단장은 동춘의 이야기를 담은 <태풍>이라는 작품을 구상 중이라고 합니다. 상황만 좋아진다면 당장 내년부터라도 새 단원을 모집하겠다는 바람이지만 쉽지 않아 보입니다.

늙은 창부처럼 몰락해버린 서커스…. 천막을 싣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어디엘 가도 전깃불 밑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세상은 변해갔지만, 가설무대는 공연장소를 구하기마저 어려워져 변두리의 벽돌공장 부근이나 김장시장이 열리는 시장 옆 공터에서 막을 올리며 천막무대는 늙은 창부처럼 몰락해갔다. 화장을 해도 주름살을 가리기에는 너무 늙어버린 창부의 얼굴처럼, 세월은 곡예단의 얼굴을 밟고 지나갔던 것이다.
- 한수산 ‘부초(浮草)’ 중에서


동춘 서커스는 이대로 영영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요? 슬픈 곡예사의 노래는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일까요?



트랙백 0 AND COMMENT 42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306)
예술이야기 (55)
세상이야기 (52)
나의 이야기 (57)
책이야기 (50)
신화이야기 (6)
문화이야기 (46)
명인명창이야기 (40)

CALENDAR

«   2018/09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