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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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연극, 영화의 예술현장에서 배우로, 작가로, 연출로, CEO인 국립극장장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살아 온 제가 예술과 인생에 대해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by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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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에 허난설헌을 너무도 좋아해서 <문학사상>사의 '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시리즈에 글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실었던 <우울과 고독의 한철에 만난 난설헌의 시세계>란 글을 <내 청춘과 함께한 한 송이 부용꽃, 허난설헌>이란 제목으로 다시 손질해서 올립니다.


대학 3학년이 끝나가는 겨울, 연극과 술과 밤샘 연습으로 질풍노도의 생활을 하다보니 덜컥 결핵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휴학을 하고 내려와 고향집의 골방에 드러누운 환자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각혈과 숨 찬 느낌, 식은 땀, 약병으로 가득 찬 방안에서 저는 날개 꺾인 새처럼 외로웠습니다. 

저의 하루하루는 미열과 피로감으로 힘겹게 지나갔습니다. 친구와 함께 들과 강으로 놀러 다닐 때도, 저는 가슴에 품고 다니는 죽음의 균을 의식해야만 하는 우울한 청춘이었습니다.

그 무렵 저의 유일한 위안은 산책이었습니다. 저는 야트막한 구릉이 있는 '다가 공원'의 한구석에 서 있는 가람 이병기의 <시름>이라는 시비를 보면서 한참동안 앉아 있다 오곤 했습니다.

 
이대로 괴로운 숨지고 이어가랴 하니
좁은 가슴속에 나날이 돋는 시름
회도는 실꾸리같이 엉기기만 하여라.

시의 구절마다 어쩌면 내 심정을 그토록 잘 표현했는지 감탄하면서 시름 속의 날들을 보내던 무렵, 전주 시내의 한 서점에서 허난설헌의 시집 한 권을 사게 되었습니다. 무심코 들춰 본 시집 속의 주옥같은 시들이 제 눈길을 끌었기 때문입니다.


아침에도 생각나고 저녁에도 생각나네
생각나는 곳 그 어딘가 만리 길 끝이 없네
바람과 물결 탓에 넘어가기 어렵고
구름과 기러기도 기약하기 아득해라
내가 쓴 편지는 맡길 곳도 없어
나의 마음은 실타래처럼 엉겼어라.

-<유소사>

 

'회도는 실꾸리같이 엉기기만' 하던 제 가슴과, '실타래처럼 엉겼다'는 허난설헌의 마음이 무언가 교감을 이루었습니다.

미칠듯한 그리움과 우울과 고독으로 몸부림치던 저에게 그녀의 시들은 마치 사랑스러운 누이의 속삭임 같기도 했고, 고독한 누이의 편지 같기도 했습니다.



그 해 겨울, 저는 좋아하는 한문책 몇 권과 시집 몇 권을 들고서 지리산 상선암이라는 암자에 찾아 들었습니다. 눈 쌓이고 창호지에 바람 씽씽 들어오는 암자의 골방에서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십팔기를 하는 무술가였는데 저는 중국 무술의 소림권, 내공, 외공, 단전 호흡, 장풍, 팔단금법 등의 현란한 세계를 알려 주는 그의 말에 푹 빠져 결핵약들을 눈 속에 쏟아 버리고, 내공으로 결핵을 치료한답시고 아침저녁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습니다.

비현실적이고 초월적인 도사들의 세계를 동경하며 지내는 동안, 저는 향을 피우고 신선도를 수련해던 난설헌의 세계에 공감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죽음에 대한 그리움, 신선 세계에 대한 동경. 연꽃, 난새, 구슬, 난초, 목련, 등의 단어로 채색된 허난설헌의 시 세계에 점점 깊이 사로잡혔습니다.
 

난새를 타고 한밤중
봉래도에 내려서
기린 수레 한가롭게 올라타고
향그런 풀잎을 밟노라.
바닷바람 불어와
벽도화 가지를 꺾어 놓았으니
구슬 쟁반에다 하나 가득
신선의 과일들을 따다 담았네.

-<하늘을 거니는 노래> 

현실로부터 받는 고통과 한을 상상의 세계를 통해 걸러내야만 했던 규방의 외로운 여인!


“내게는 세 가지 한이 있다.
첫째는 여자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조선 땅에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이다.”


남편과 시집 식구와 조선의 봉건적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향에 취해 환상의 세계에서 떠돌던 시혼(詩魂)!

그녀의 절절한 한이 제 가슴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시중에서 극히 드물게 보이는 사랑의 노래는 저를 설레게 하기도 했습니다.
 

해맑은 가을 호수 옥처럼 새파란데
연꽃 우거진 속에다 목란배를 매었네
물 건너 님을 만나 연꽃 따서 던지고는
행여나 누가 봤을까 한나절 부끄러웠네.

-<채련곡> 


사랑에도 솔직하고 적극적인 처녀였던 그녀. 그러나 시가 방탕하다고 죽은 뒤에 만들어진 문집에서도 이 시를 빼 놓을 만큼 숨막히는 조선조 사대부의 봉건적 관습에 적응 못한 여류 시인의 혼은 저를 슬프게 했습니다.

모두가 주옥같은 허난설헌의 시 중에서도 저를 가장 매혹시킨 시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귀기(鬼氣)' 서린 이 시입니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바다에 스며들고(碧海侵瑤海)
파란 난새, 채색 난새와 어울렸구나(靑鸞倚彩鸞)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芙蓉三九朶)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하여라(紅墮月霜寒)

-<몽유광상산시(꿈에 광상산에서 노닐다)>



“올해가 내 나이 스물 일곱이다.
마침 오늘 부용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으니 내가 죽을 날이다.
내가 지었던 시들은 모두 불태워 없애도록 하라.”

그녀는 그 예언대로 그 날,  초당에 가득한 책들 속에서 향불을 피우고 고요하게 죽었다고 합니다. 

스물일곱의 짧은 생애를 예감한 한 떨기 부용꽃! 이 세상에 있기엔 너무도 강렬한 내세의 향기를 내뿜었던 선녀(仙女)!
 
그 아름다운 향기에 매혹 당해 상상 속에서 끊임없이 그녀를 흠모하던 문학 청년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내 청춘과 함께한 한 송이 부용꽃' 그녀를 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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